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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

승가는 대화가 되는 사람이 필요해요.

 

 

1. 불교공부는 [흐름]을 공부해야

 

붓다의 가르침은 불멸후 600년 동안 스님들에 의해 암송되어 전해지다가 기원전후에 스리랑카에서 문자화 됩니다. 붓다가 열반에 든지 2500년이 지난 오늘날 우리는 붓다의 가르침을 경전을 통해서 만나볼 수 있습니다.

불교를 시대별로 나눈다면 초기불교, 부파불교, 중관불교, 유식불교, 밀교, 선불교로 이어지는 2500년의 흐름이 있습니다.

그러한 각각의 불교를 받아들인 나라들은 각각 빠알리어, 산스트리트어, 한문, 티벳어 등의 언어로 쓰여진 경, 율, 론 삼장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불교를 알려면 이러한 경전을 이해해야 하는데, 문제는 경전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문자로 되어 있다는 것이고, 양 또한 한량없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분들이 불교를 알려고 알 때 직접 경전을 읽지 못하고 스님들의 설법을 듣거나 간단하게 간추린 불교 개론서를 읽고 불교를 알게 됩니다. 개론서를 어느 정도 섭렵하고 난 분들은 드디어 경전을 찾아 읽게 되는데 그 중에서 소수의 사람들은 한문 원전을 읽기를 시도하게 됩니다.

여기서 또 문제는 한문에서 한글로 번역된 경전을 읽어서는 경전의 뜻을 명확하게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한문으로 경전을 자유롭게 읽어내기에는 많은 시간과 노력을 필요로 합니다.(한문을 달통하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한문 경전이 명확하게 이해되는 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불교를 어렵게 공부했다 하더라도 정보부족, 시간부족, 등의 이유로 특정한 경전 ,특정한 시대의 불교만을 공부하게 되면 특정 경전 우월주의 ,특정 종파주의자로 변모하게 된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불교의 역사를 공부하지 않고 특정한 경전의 사상만을 공부하는 불교 집단에게 나타나는 병폐입니다.

 

사상을 공부할 때 [역사]를 함께 공부하는 것은 필수 입니다.

역사를 공부한다는 말은 붓다의 말을 상황에 맞추어 이해 한다는 말이고, 사상의 흐름과 용어의 흐름을 이해한다는 말이고 각 시대별로 나타나는 불교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안다는 말입니다. [흐름]을 이해한다는 것은 불교를 전체적으로 조망이고 다각적으로 관찰한다는 의미 입니다.

안타깝게도 한국불교는 흐름을 망각한 불교를 해왔습니다.(이것은 우리가 잘못 해서라기 보다는 조선왕조의 불교탄압, 일제식민통치 세대를 지내온 시대 상황 일수도 있습니다.) 대승 우월주의. 종파 우월주의, 간화선 지상주의, 불립문자를 잘못 해석해서 경전을 보지 않는 풍토, 기복 불교 등등의 모습은 바로 역사를 배우지 않고 특정 사상만을 배우고 익힌, 우리 불교의 현주소입니다.

우리나라 승가 교육체계에서는 이러한 [흐름]을 가르치는 교육기관이 거의 없습니다.

(이 문장에 “거의” 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다행히도 작년(2007년 초)부터 해인사 강원에서 학년제, 평가제로 교육제도를 개편하고 교육 과정도 초기불교-부파불교-중관불교-유식불교- 대승불교-선불교로 이어지는 [흐름]을 공부 할 수 있는 교과 과정을 채택하였기 때문입니다. )

 

2. 경전을 보는 순서는?

 

불교의 역사를 공부 한다면 불교공부의 순서는 초기불교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결론에 쉽게 도달할 것입니다.

빠알리어로 된 5부니까야와 한문에서 번역된 4아함경이 초기불교의 경전입니다.

초기불교 경전을 공부해야 하는 까닭은

1. 역사적으로 초기경전은 가장 오래된 것이고 가장 권위 있는 경전입니다.

2. 경전의 길이가 짧고 관념적인 용어들이 나타나지 않아서 이해 하기가 쉽습니다.

3. 빠알리 원전에서 직접 번역한 것이기에 경전의 뜻을 비교적 정확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한문에서 번역한 한글 아함경은 산스크리트-한문-한글로 중역 되었고 산스크리트 원본이 대부분 소실되었다는 단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4.초기경전에서 나타나는 용어들을 이해하고 나면 대승 초기나 후기의 경전들에서 나타나는 용어들을 더 정확하게 이해 할 수 있습니다.

(용어는 시대별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대승불교를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초기경전의 이해가 필수입니다. 예를 들면 연기가 중론에서 공으로 표현되고, 무아 사상이 반야경에서는 공으로 표현되는 과정, 8정도가 육바라밀로 변화는 과정, 삼특상이 삼법인으로 표현되는 이유, 12입처에서 나타나는 중관의 관점과 유식의 관점, 연기가 진여, 법성, 일심, 여래장으로 나타나는 과정, 연기와 연기된 법이 반야경의 색즉시공과 화엄학의 이사무애로 나타나는 과정, 4구부정이 4구 활용으로 나타나는 것 등등... )

 

3. 대화가 안되요

 

어느 대학교수와 이야기 하는 중에 자신이 성당에 다니는 이유를

“신부님들 하고는 대화가 되는데 스님들하고는 대화가 안 되요”

라고 말하는 걸 듣고 깜짝 놀란 적이 있습니다.

왜 스님들 하고 대화가 안 될까요?

이 “대화”의 문제는 불교의 모든 문제점을 상징하는 것으로 불교인들이 깊이 반성해보아야 할 대목 입니다.

대화가 상징하는 의미를 되새겨 보면, 대화가 안 된다는 말은

1. 들을 줄 모른다는 이야기입니다. 대화는 듣기가 시작입니다.

2. 말할 줄 모른다는 말입니다. 이야기를 들은 다음에 적절한 반응을 보이지 못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듣지 못하고 말할 줄 모른다는 이야기 속에서도 우리는 출가 권위주의, 승속 분리주의, 경전을 공부하지 않음, 좌선 제일주의, 개인의 편리추구 등을 읽어야 합니다. 그리고 더 근원적으로는 승가의 교육 시스템에 그 원인이 있습니다.)

대화가 안 되는 사람을 좋아하기 어렵고 친해지기 어렵고 그래서 그 사람은 타인에게 영향을 주기 어렵고 대중으로부터 사랑받기 어렵습니다.

대화가 안 되는 사람들에게 어찌 자신의 고민을 털어 놓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도 남방 스님들은 불교를 分別說部(vibhajjavadin) 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대화하는 방법에서 나온 말인데 붓다나 그의 제자들은

대화를 할 때에 상대방의 이야기를 잘 분별해서

되 물을 때는 되묻고, 침묵을 지켜야 할 때는 침묵하고, 자세하게 설명해야 할 때는 자세히 설명해주는 방식으로 대화를 능숙하게 이끄는 사람들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지식인에게는 지적욕구를 충족시켜주고 고민하는 사람에게는 마음을 安心 시켜주는 대화를 할 줄 아는 스님들이나 불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 대화가 상대방에게는 따듯한 자비로 다가오고, 본인에게는 8정도의 수행이 되며, 불교계로 볼 때는 포교가 되어 나타나야 합니다.

지금 승가는 대화가 되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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