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정도와 6바라밀의 차이
1.들어가는 말
불교는 크게 남방불교와 불방불교로 나누어 집니다.
오랫동안 대승 불교권에서는 남방 불교를 소승불교라고 불러 왔습니다.
대승불교는 bc1-ad1세기경에 중국에 전해졌고 다시 4세기(372)경에 한국으로 전해졌고 다시 5세기 경에 한국에에서 일본으로 전해 졌습니다.
불교는 bc 6세기 싯달타의 깨달음을 시작으로 초기불교, 아비달마불교, 중관, 유식, 대승불교로 변화하여 왔습니다. 인도인에게 이러한 변화는 자신의 나라 안에서 일어난 변화이기에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중국, 한국은 인도불교의 변화과정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상태에서 인도로부터 여러 가지 경론(經論)이 한꺼번에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붓다가 설하였다고 하는 대승 소승의 경전들 가운데에서 서로 모순되는 가르침을 접하게 된 중국의 불교인들은 이를 해결할 방법을 모색하게 됩니다. 그렇게 불교 경전을 중국인의 입장에서 정리한 것이 교상판석입니다. 교판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은 천태 지의(538-597)스님이 제시한 5시8교(五時八敎)입니다.
천태스님이 확립한 5시五時는 다음과 같습니다.
①깨달음을 얻은 직후 천상에 올라가 21일 동안 화엄경을 설한 화엄시(華嚴時),
②이후의 12년 동안 아함경을 설한 아함시(阿含時),
③다시 8년 동안 유마경, 능가경, 무량수경 등과 같은 방등부(方等部)의 경전들을 설한 방등시(方等時),
④뒤의 22년동안 반야경을 설한 반야시(般若時),
⑤최후의 8년동안 법화경을 설하고, 열반에 들기 직전에 열반경을 설한 법화열반시(法華涅槃時)
이것이 붓다가 설법한 기간을 5時로 나누어서 경전을 분류한 것입니다.
즉, 천상에서 화엄경을 설한 붓다는 인간세상에서는 화엄경을 설해도 알아듣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고 처음에 12년 동안 낮은 수준의 아함경을 설해서 사람들의 수준을 높이는 작업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수준이 높아지자 다음으로 능가경, 무량수경 등을 설하고 다시 반야경을 설한 다음 마지막으로 법화경을 설해서 성문 연각 보살의 3승을 일승으로 들어오게 설했다는 것이 이 교판의 내용입니다. 3승(성문,연각,보살)이 하나의 불승으로 돌아온다는 것은 법화경의 내용이기도 합니다. 천태스님이 교판을 세운 이래로 중국과 한국에서는 이것이 경전을 이해하는 정당한 전통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처음에는 불경의 체계적인 이해를 위하여 제시 되었던 이러한 교판은 종파불교의 발달과 함께 각 종파의 소의경전이 갖는 우월성을 확립 하기 위한 수단으로 변모하게 됩니다.
이러한 전통 때문에 대승불교 권에서는 대승은 수준 높은 가르침이고 소승불교는 하열한 가르침이다. 소승불교는 자신의 해탈만을 구하고 대승불교는 이타적인 가르침이라는 견해가 아직도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불교를 역사와 함께 공부하는 시대에서는 이러한 교판은 역사적으로 아무런 근거가 없는 것임이 밝혀졌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이 글에서 대승은 수승하고 소승은 하열하다는 방식을 버리고 각 경전의 내용을 비교하여 대승과 소승의 차이점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2. 8정도와 6바라밀의 차이
그렇다면 역사와 경전의 내용을 통해서 살펴본 대승과 소승의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우선 소승불교라는 이름은 테라와다불교에 대한 정당한 평가가 아니므로 소승불교라는 용어대신에 초기불교라는 이름을 사용하고자 합니다. 초기불교의 빠알리경전은 인도에서 3차례의 결집을 거쳐 서기 1세기경에 스리랑카에서 문자화 되었고 대승불교 경전은 불멸후 약 600년이 지난 다음에 나타나게 되는 산스크리트로 씌여진 경전들입니다. 그래서 대승불교 경전은 부처님이 직접 설하신 법문이 아니란 것은 확실합니다.
초기불교는 8정도를 닦고 대승불교는 6바라밀을 닦습니다. 초기불교는 아라한이 되는 것이 목표이고 대승불교는 끝임 없는 보살행을 통해 부처가 된다는 것이 목표입니다. 8정도와 12연기를 수행하는 소승불교 수행자를 성문이라고 불리고 대승불교의 수행자는 보살이라 불립니다.
이것이 대승불교와 초기불교의 내용적인 차이라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초기불교와 대승불교의 차이점을 자세히 살펴보는 것은 너무 방대한 작업이므로 이 글에서는 8정도와 6바라밀이라는 차이를 살펴보는 것으로 대신 하겠습니다.
8정도는 그냥 8정도가 아닙니다. 8정도는 항상 성스러운(ariya) 8정도라는 이름으로 불리 우고 있습니다.
붓다가 그의 최초의 제자인 5비구들에게 사르나트에서 4성제를 설할 때 8정도는 도성제의 내용으로 다음과 같이 설해졌습니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여래가 발견하여 깨달은 중도가 어떻게 여래에게 법안을 갖게 했고, 평화로운 적정을 가져오는 지식을 얻게 했고, 위없는 지혜를 증득하여 깨달음과 닙바나(열반)를 성취케 하였는가? 그것은 참으로 바른 성스러운 여덟가지도(八正聖道)로서, 이름하여 바른 견해(正見), 바른 사유(正思惟), 바른 말(正語), 바른 행위(正業), 바른 생활(正命), 바른 노력(正精進), 바른 마음챙김(正念), 바른 정신집중(正定)이니라. (mahavagga.10)
위 경전에서 보듯이 8정도는 중도입니다. 붓다는 어느 시대 어느 집단이든 그 가르침에 8정도가 포함되어 있으면 성스러운 가르침이지만 8정도가 포함되어 있지 않으면 그 가르침은 텅 비어 있는 가르침이라고 강조 하였습니다.
8정도의 첫 지분은 정견인데 정견은 계정혜 삼학중에 지혜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시 번뇌가 함께 하는 정견과 번뇌가 함께 하지 않는 정견으로 나누어 친절하게 설명이 되기도 합니다. 이 정견은 세상에 대한 바른 견해를 갖는 것으로서 수행의 처음부터 끝 까지 매우 중요한 가르침으로서 강조되고 있습니다.
이 8정도에서 정견을 강조하는 이유를 들어서 저는 초기불교를 이성불교라고 부릅니다.
그러면 6바라밀을 살펴 보겟습니다.
육바라밀은 보시(布施Dana Paramita)) 지계(持戒Sila Paramita) 인욕(忍辱Kshanti Paramita) 정진(精進Virya Paramita) 선정(禪定Dhyana Paramita) 지혜(智慧Prajna Paramita)입니다.
이 6바라밀도 계정혜 삼학으로 나눈다면 8정도와 마찬가지로 온전하게 삼학으로 정리 됩니다. 그래서 8정도와 6바라밀의 공통점을 말한다면 8정도와 6바라밀은 [같은 내용]이다 라고 말할 수 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차이점은 8정도는 정견과 정사유로 시작하는 반면에 6바라밀은 보시,지계로 시작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붓다는 성도 후 사르나트에서 다섯 수행자들에게 첫 설법을 하여 그들을 교화하고 나서 다시 바라나시에 사는 청년 야사를 교화 합니다. 그리고 야사를 찾기 위해 붓다를 찾아온 야사의 부모를 교화하기 위해 설법을 하게 되는데 이때는 4성제와 8정도를 직접 설하지 않습니다. 8정도를 설하기 전에 예비 법문으로 다음과 같은 시계천(施dānakathaṃ 戒sīlakathaṃ 天saggakathaṃ)의 가르침을 먼저 설합니다.
보시를 실천하고 계율을 준수하면 하늘나라에 나게 됩니다. 여러 가지 애욕에는 위험과 공허함과 번뇌가 있고 애욕에서 벗어나면 큰 공덕이 있습니다. 세존은 장자가 법을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되고 법을 이해할 수 있으며 번뇌에서 벗어나 청정한 삶을 따르고자 한다는 것을 아시고 드디어 고집멸도의 가르침을 설하시었다..(mahavagga.17)
이것은 중도의 가르침인 성스러운 8정도의 가르침은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가르침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수 많은 경전에서 8정도를 가르치기 전에 예비 법문을 해서 8정도와 4성제를 받아 들일 준비가 되게 하고나서 8정도를 설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계천(施戒天)의 예비법문과 8정도를 합해 놓은 것이 6바라밀 입니다. 보시(施dānakathaṃ)의 법무은 보시바라밀(Dana Paramita)이 되고 지계(戒sīlakathaṃ)의 법문은 지계바라밀(Sila Paramita)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가르침은 더욱 보편적인 것이 되었고 실천하기 쉬운 것이 되었습니다. 저는 대승불교의 이 6바라밀을 감성불교라고 부릅니다.
시계천(施戒天)의 가르침은 처음에 야사의 부모에게 설해진 것에서도 알 수 있지만 예비적인 가르침은 재가자들에게 많이 설하셨습니다. 6바라밀 사상에 보시와 지계는 보시 바라밀과 지계바라밀로 그대로 나타나는데 천상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천상(天saggakathaṃ)의 법문은 보시와 지계의 수행을 통해서 얻어지는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8정도에서 정견이 처음에 오는 것은 정견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면 6바라밀에서 보시가 가장 앞에 나타나는 것은 보시를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대승초기의 반야 사상 에서나 후기 대승불교 경전 곳곳에서 꾸준히 반야바라밀(지혜)는 강조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6바라밀은 중에서 보시가 처음에 나오는 것은 반야바라밀(정견)보다는 보시바라밀을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서 재가불자들에게 6바라밀은 8정도보다 쉽고 친숙하게 느껴졌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승불교에서 기존의 수행법인 8정도가 있는데도 굳이 6바라밀의 수행법을 주장한 것은 재가자들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즉, 6바라밀의 불교는 출가자 위주의 불교가 아닌 재가자 위주의 불교, 자비의 불교, 생활속의 불교를 지향하고 있는 것으로 볼수 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반야를 강조하는 것과 반야바라밀을 강조하는 것은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지혜(Prajna)의 완성(Paramita)이라 불리우는 반야바라밀은 금생의 나의 수행을 끝 내겠다는 태도가 아니라 수많은 겁을 거쳐서 이타행을 실천하며 수행을 완성하겠다는 보살들의 서원이기 때문입니다. 고통받는 자가 남아 있다면 나의 해탈은 완성되지 않는 다는 위대한 발상의 전환이 바라밀(Paramita)사상에 숨어있는 것입니다.
3. 결론
이처럼 8정도와 6바라밀은 같은 계정혜 삼학을 말하고 있지만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강조점이 다릅니다. 8정도는 바른 이해를 통한 수행을 강조하고 있는 반면에 6바라밀은 보시를 강조하여 생활 속에서 수행이 이루어지게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보시의 강조는 믿음과 자비를 강조하는 것으로도 나타납니다. 믿음도 초기불교에서는 이해를 통해서 생기는 신념이나 확신의 뜻으로 사용하고 있다면 대승불교의 믿음은 신앙적인 측면이 강합니니다. 이러한 보시와 자비와 믿음은 일반재가자들에게 쉽게 받아들이고 실천할 수 있는 가르침입니다. 이러한 보편적인 가르침, 누구나 쉽게 따라 할 수 있다는 가르침을 넓은 수레, 대승 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상대적으로 전통적인 입장에서 홀로 수행을 하는 전통 승단을 소승이라고 이름을 지어 주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것은 계정혜 삼학을 닦는 같은 불교임에도 불구하고 어떤 것을 강조하느냐에 따라서 불교는 전혀 다른 얼굴을 하게 되며 전혀 다른 삶의 방식이 나타나게 된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제일먼저 표현의 차이 즉, 언어의 차이로 나타나게 되는데 우리가 언어를 잘 이해하고 사용할 줄 알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대승과 소승의 보편점과 차이점을 잘 이해하면 서로에게 배울 수 있는 점도 많이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후기 대승불교는 이렇게 감성을 더욱 발전시켜 붓다와 보살을 거의 신(god)과 같은 상태로 만들고 그들을 신앙하는 형태로 변화하게 됩니다. 이러한 신앙불교는 대중의 열열한 사랑을 받아 한동안 대중화 되었지만 이렇게 본래 8정도의 모습과 멀어진 후기 신앙불교는 결국 힌두교와 구별할 수 없는 불교가 되었고 끝내는 흰두교에 흡수 되게 됩니다. 우리가 이러한 불교역사를 잘 이해하게 되면 역사로부터 많은 교훈을 얻을 수 있고 앞으로 나아갈 길도 제시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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