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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불교

諸行無常 是生滅法 生滅滅已 寂滅爲樂 의 해석

열반경 게송의 해석

 

[한문]諸行無常 是生滅法 生滅滅已 寂滅爲樂

 

[빠알리]Aniccā vata sakhārā uppādavayadhammino

Uppajjitvā nirujjhanti tesa vūpasamo sukho ti. 1)

 

[영어]impermanent, alas, are formations. subject to arisen and banishing. having arisen, they cease: their appeasement is blissful.

 

[한글]1.아아! 모든 현상은 무상하다. 생멸의 성질로 이루어진 것은 생하고 멸한다. 이것들의 진정이 평온이다.

 

2.형성된 것들은 참으로 무상하여 일어났다가는 사라지는 법

일어났다가는 소멸하나니 이들의 가라앉음이 행복이로다.

 

3.모든 지어진 것은 덧없어 생겨나고 사라지는 법이네.

생겨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고요히 함이야말로 행복일세.

 

4.진실로, 일어나고 사라지는 성질을 지닌 형성력들은 무상하다.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그 번뇌들의 가라 앉음이 행복이다.

 

5.모든 현상은 한시도 고정됨이 없이 변한다는 것이 곧 생하고 멸하는 생멸의 법이니 이 생멸에 집착함을 놓으면 곧 고요한 열반 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다

 

6.모든 지어진 것들은 무상하여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법이네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 그것을 고요히 함이 행복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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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견]

위 게송은 붓다가 막 열반에 들었을 때 범천(제석천)이 읊은 게송(d.n.14)이기도 하고 쌍윳따 니까야에 4번 나오는 게송이고 디가니까야에 2번 나온다. 디가니까야의 열반경에서는  범천이 읊는 게송으로나오고 마하수다사나수따에서는 세존이 아난다에게 해주는 법문으로 나온다. 그리고 쌍윳따 니까야에서는  각각 천신, 범천, 아라한의 법문을 아누룻따가 하는 법문으로 나오고 마지막경전은 세존의 법문으로 나온다. 한문경전으로는 대승열반경과 법화경에 이 게송이 나온다고도 한다.

위 게송을 해석하는 핵심은 [生滅滅已]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있다.

먼저 한문 번역은 sakhārā가 복수라는 이유로 모든(subba)이라는 단어가 없음에도 [諸行]이라고 번역했다.

 

여기서의 제행무상은 모든 유위법의 무상을 말하고 있다. 이것을 오온의 , , 정신현상으로만 보기도 하는데 아래와 같은 경전을 보면 그렇게 해석하는 것은 맞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경전이 좀 길지만 이게송을 해석하는데 중요한 경전이므로 쌍윳따 니까야의 베뿔라산경을 살펴보자.

한때 세존께서 라자가하의 깃자꾸따 산에 계셨다.

그때 세존께서 '수행승들이여' 라고 수행승들을 부르셨다. 수행승들은 '세존이시여' 라고 세존께 대답했다.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이 윤회는 시작을 알 수가 없다. 무명에 덮인 뭇삶들은 갈애에 속박되어 유전하고 윤회하므로 그 최초의 시작을 알 수가 없다.

수행승들이여, 옛날에 이 베뿔라 산이 한때 빠찌나방싸라고 불린 적이 있었다. 그리고 수행승들이여, 그 당시 사람들은 띠바라라고 불렸다. 수행승들이여, 그 띠바라 사람들의 수명은 4만 살이었다. 수행승들이여, 그 띠바라 사람들은 빠찌나방싸 산을 나흘이면 오르고 나흘이면 내려왔다.

 

수행승들이여, 그 당시 까꾸싼다 세존, 거룩한 이, 올바로 깨달은 이가 세상에 나타났다. 그리고 수행승들이여, 까꾸싼다 세존, 거룩한 이, 올바로 깨달은 이에게는 비루라와 싸지바라고 하는 단짝의 탁월한 제자가 있었다.

그러나 수행승들이여, 보라. 그 산의 이름은 사라졌고 그 사람들은 죽었다. 그리고 그 세존은 완전한 열반에 들었다.

이와 같이 수행승들이여, 모든 지어진 것은 무상하다. 이와 같이 수행승들이여, 모든 지어진 것은 견고하지 않다. 이와 같이 수행승들이여, 모든 지어진 것은 불안정하다. 그러나 수행승들이여, 이제 그대들은 모든 지어진 것에서 싫어하여 떠나기에 충분하고 초연하기에 충분하며 해탈하기에 충분하다.

 

수행승들이여, 옛날에 이 베뿔라 산이 한때 방까까라고 불린 적이 있었다. 그리고 수행승들이여, 그 당시 사람들은 로히땃싸라고 불렸다. 그 로히땃싸 사람들은 수명이 3만 살이었다. 수행승들이여, 그 로히땃싸 사람들은 방까까 산을 사흘이면 오르고 사흘이면 내려왔다.

수행승들이여, 그 당시 꼬나가마나 세존, 거룩한 이, 올바로 깨달은 이가 세상에 나타났다. 그리고 수행승들이여, 꼬나가마나 세존, 거룩한 이, 올바로 깨달은 이에게는 비이요와 �따라라고 하는 단짝의 탁월한 제자가 있었다.

그러나 수행승들이여, 보라. 그 산의 이름은 사라졌고 그 사람들은 죽었다. 그리고 그 세존은 완전한 열반에 들었다.

이와 같이 수행승들이여, 모든 지어진 것은 무상하다. 이와 같이 수행승들이여, 모든 지어진 것은 견고하지 않다. 이와 같이 수행승들이여, 모든 지어진 것은 불안정하다. 그러나 수행승들이여, 이제 그대들은 모든 지어진 것에서 싫어하여 떠나기에 충분하고 초연하기에 충분하며 해탈하기에 충분하다.

 

수행승들이여, 옛날에 이 베뿔라 산이 한때 쑤빳싸라고 불린 적이 있었다. 그리고 수행승들이여, 그 당시 사람들은 쑵삐야라고 불렸다. 수행승들이여, 그 쑵삐야 사람들은 수명이 2만 살이었다. 수행승들이여, 그 쑵삐야 사람들은 쑤빳싸 산을 이틀이면 오르고 이틀이면 내려왔다.

수행승들이여, 그 당시 깟싸빠 세존, 거룩한 이, 올바로 깨달은 이가 세상에 나타났다. 그리고 수행승들이여, 깟싸빠 세존, 거룩한 이, 올바로 깨달은 이에게는 띳싸와 바라드와자라고 하는 단짝의 탁월한 제자가 있었다.

그러나 수행승들이여, 보라. 그 산의 이름은 사라졌고 그 사람들은 죽었다. 그리고 그 세존은 완전한 열반에 들었다.

이와 같이 수행승들이여, 모든 지어진 것은 무상하다. 이와 같이 수행승들이여, 모든 지어진 것은 견고하지 않다. 이와 같이 수행승들이여, 모든 지어진 것은 불안정하다. 그러나 수행승들이여, 이제 그대들은 모든 지어진 것에서 싫어하여 떠나기에 충분하고 초연하기에 충분하며 해탈하기에 충분하다.

 

수행승들이여, 지금 이 베뿔라 산은 베뿔라라고 불리고 있다. 그리고 수행승들이여, 지금의 사람들은 마가다까라고 불리고 있다. 수행승들이여, 이 마가다까 사람들은 그 수명이 짧아 보잘 것 없다. 수행승들이여, 이 마가다까 사람들은 베뿔라 산을 잠깐 사이에 오르고 잠깐 사이에 내려온다.

수행승들이여, 지금은 나 곧 세존, 거룩한 이, 올바로 깨달은 이가 세상에 나타났다. 그리고 수행승들이여, 나에게는 싸리뿟따와 목갈라나라고 하는 단짝의 탁월한 제자가 있다.

그러나 수행승들이여, 언젠가 이 산의 이름은 사라지고 이 사람들은 죽고 나는 완전한 열반에 들 때가 올 것이다.

이와 같이 수행승들이여, 모든 지어진 것은 무상하다. 이와 같이 수행승들이여, 모든 지어진 것은 견고하지 않다. 이와 같이 수행승들이여, 모든 지어진 것은 불안정하다. 그러나 수행승들이여, 이제 그대들은 모든 지어진 것에서 싫어하여 떠나기에 충분하고 초연하기에 충분하며 해탈하기에 충분하다."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이처럼 말씀하시고 올바른 길로 잘 가신 님께서는 스승으로서 이와 같이 시로써 말씀하셨다.

[세존] "띠바라 사람에게는 빠찌나방싸 로히땃싸 사람에게는 방까까

쑵삐야 사람에게는 쑤빳싸 마가다에서는 베뿔라라 불렸네.

모든 지어진 것은 무상하니 생성하고 다시 소멸해야 하리.

생성하고 또한 소멸하니 그것들의 적멸이 행복이네."2)

 

 

그러므로 위 경전을 보아서는 제행은 모든 조건 지어진 유위법 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래서 諸行無常 是生滅法은

진실로, 형성된 법들은 무상하여 생멸하는 법칙이다.라고 해석된다.

그런데 生滅滅已 寂滅爲樂의 해석은 조심스럽다.

왜냐하면 생멸하는 것(Uppajjitvā nirujjhanti) 그것들의(tesa) 고요히 함(vūpasamo)이 행복(sukho) 이라고  하네(iti)라는 문장에서

복수 소유격으로 사용된 그것들의(tesa)가 무엇을 가르키는 지가 불 분명하기 때문이다.

 

만약  tesa이 무상하다고 하는 제행을 가르키는 것이라면 베뿔라 산처럼 형성된 법을 인간이 어떻게 소멸시킬 수 있는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 성주괴공은 자연의 질서요, 법칙인데 그 것을 어떻게 소멸시킬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유위법의 생멸현상을 가라앉힌다는 해석은 적절하지 않다.

그런데 바로 이 경전안에 해답이 주어지고 있다.

 

이와 같이 수행승들이여, 모든 지어진 것은 무상하다. 이와 같이 수행승들이여, 모든 지어진 것은 견고하지 않다. 이와 같이 수행승들이여, 모든 지어진 것은 불안정하다. 그러나 수행승들이여, 이제 그대들은 모든 지어진 것에서 싫어하여 떠나기에 충분하고 초연하기에 충분하며 해탈하기에 충분하다.3)

 

이 경전의 설명에 의하면 상카라들은 무상의 법칙을 따르고 있는데 그 무상한 상카라들을 가라 앉히는 것이 아니라  무상한 상카라들에서 (처소격.sabbasakhāresu) 싫어하여 떠나고 초연하고 해탈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生滅滅已의 生滅은 대상으로부터 일어나는 탐착의 생멸을 말하고 滅已는 그 생멸하는 탐착의 소멸,즉 탐진치의 소멸을 말한.

 

디가 니까야의 마하수닷사 경에서도 이와 같은 문장이 보인다.

 

보라 아난다여, 그 형성된 것들은 모두 지나갔고 소멸하였고 변해버렸다. 이와 같이 아난다여, 모든 형성된 것들은 무상하다. 이와 같이  형성된 것들은 견고하지 않다. 이와 같이 아난다여, 형성된 것들은 안식을 주지 못한다. 그러므로 형성된 것들은 모두 역겨워 해야 마땅하며 (탐욕이)빛바래도록 해야 마땅하며 해탈해야 마땅하다.4)

 

한문의 문장을 가지고 말하자면 是生滅法 의 生滅과 生滅滅已의 生滅이 각각 다르게 해석되어야 하는데, 是生滅法 의 生滅은 자연의 법칙(uppādavayadhammino)으로서의 생멸 이라면 生滅滅已의 生滅은 정신현상으로서의 생멸심 즉, 번뇌의 생멸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멸멸이]는 번뇌()의 생멸을 가라앉히라는 의미이고 그것은 탐진치의 소멸이 바로 최상의 행복이라는 붓다의 열반에 대한 정의와 일치 한다. 가라앉히고 소멸 시켜야 할 것은 우리 자신의 번뇌이지 이 자연의 법칙이 아니다. 꽃이 피고 열매 맺어 떨어지는 이 자연의 법칙을 누가 어떻게 가라앉힐 수 있다는 말인가?

 

열반경에서 붓다의 마지막 유언이라고 알려진 법문에서도

모든 형성된 것은 부수어지는 법이다. 게으르지 말고 정진하라.

(Vayadhammā samkhārā appamādena sampādethāti.)

여기서 Vayadhammā란 위에서 uppādavayadhammino 처럼 법의 속성을 말한다. 그런데 이법의 속성을 가라앉히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게으르지 말고 정진하라고 말씀 하신다. 주석서에서 이 말을 마음챙김을 지속 시키라는 말로 이해한다. 이상으로 살펴 본바와 같이 경전의 문맥을 살펴보면 위 게송이 무상한 현상에 마음 챙겨서 법의 속성을 꿰뚫어보고 혐오하고 멀리해서 번뇌를 소멸시키고 해탈하라는 가르침인 것이다.

生滅滅已는 번뇌의 생멸을 소멸시키는 것이다. 한글 해석은 4,5번이 알맞은 해석이라 할 수 있겠다.

 

[주석]1) (D.N.PTS, Vol. , p.157)

[문법적인 설명]Aniccā(a.impermanent) vata(ind.indeed) sakhārā(m. pl.  formations) uppāda(m.rising) vaya(m.nt.decay) dhammino(m. something which have nature.), Uppajjitvā(ger. having arise) nirujjhanti(3.pl.to cease) tesa(ge.pl.of those) vūpasamo(m. nom. sg. calmness. cessation) sukho(nt. happiness)"ti.

2) Vepullapabbatasutta((s.n.2)

3)Vepullapabbatasutta((s.n.2)

4) Passānanda sabbe te sakhārā atītā niruddhā vipariatā. Eva aniccā kho ānanda sakhārā. Eva addhuvā kho ānanda sakhārā. Eva anassāsikā kho ānanda sakhārā, yāvañcida ānanda alameva sabbasakhāresu nibbinditu, ala virajjitu,

ala vimuccitu.mahāsudassanasutta(d.n.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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