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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불교

인도철학[印度哲學, Indian philosophy]

인도철학[印度哲學, Indian philosop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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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개요  | 일반적 고찰  | 일반적 특성  | 정통학파  | 불교  | 현대철학  

인도에서 성립·발전한 철학·종교 사상의 총칭 및 그것을 연구대상으로 하는 학문.
[개요]

인도철학은 니아야·바이셰시카·상키야·요가·푸르바미망사·베단타 학파의 정통철학(stika)과 불교·자이나교·순세파(Crvka) 등의 비정통철학(nstika)으로 대별되며, 여러 가지 철학적 물음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주요관심사로는 세계의 본성을 탐구하는 우주론, 실재의 본성(형이상학), 논리학, 지식의 본성(인식론), 윤리학, 종교 등이 있다.


[일반적 고찰]

인도철학은 서양철학적 사유와의 관계에서 놀랄 만한 유사성과 해명적인 차이점을 제공한다. 차이점을 통해서 우리는 인도철학자들이 제기한 근본적으로 다른 새로운 물음들을 드러낼 수 있다. 반면에 유사성을 살펴보면, 인도와 서양철학자들이 동일한 문제를 다루거나 유사한 이론들을 제시할 때도 인도철학자들은 진기한 형식화와 논의들을 진전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서양철학자들과는 달리 인도철학자들만이 제기했던 문제들 가운데는 진리(prmya)의 생성(utpatti)과 가지성(可知性 : jñapti)의 문제가 포함되어 있다. 반대로 인도인은 거의 무시했으나 서양철학의 형성에 기여했던 물음 중에는 지식의 기원이 경험인가 이성인가 하는 질문, 분석판단과 종합판단의 구분, 그리고 우연적 진리와 필연적 진리간의 구별 등이 포함된다. 따라서 인도사상은 서양철학사가에게 서양적 사유에서 획득한 것을 보완할 수 있는 관점을 제공하고 있다. 나아가서 인도사상 연구는 서양철학적 사유의 부적합성을 표출시키고, 몇몇 개념들과 구분들이 필수적이지 않음을 잘 보여준다. 인도철학자들이 얻어낸 서양철학에 관한 지식도 유사한 방식으로 그들에게 유익한 것이 되어왔다.

베다 찬가는 BC 2000년까지 소급하는 힌두 성전이며, 현존하는 인도 문헌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인간심성이 신들을 만들어가는 과정과 신화 만들기의 내면적·심리적 흐름들이 심원한 우주론적 관념에 도달하는 과정을 기록하고 있다(→ 힌두교). 〈우파니샤드 Upaniads〉(인도의 철학적 문헌)는 극단적인 일원론(絶對的不二論, 즉 물질과 정신의 본질적 동일성)으로 이어지는 보편적이며 정신적인 실재의 최초의 관념들 중의 하나를 포함하고 있다. 〈우파니샤드〉는 윤리학과 사회철학은 물론이며 자연·인생·마음·신체 등의 제개념에 대한 인도철학자들의 초기 성찰을 담고 있다. 고전적 또는 정통적 체계(darana)들은, 때로는 날카로운 통찰력을 가지고 때로는 지루할 정도로 반복해가면서 여러 가지 문제들, 즉 한정된 자아의 지위·신체·마음, 자아의 구분 및 관계, 지식의 본성과 정당한 지식의 유형들, 진리의 본성과 기원, 실재한다고 여겨지는 실체들의 유형들, 실재론과 관념론에 대한 관계, 보편자 또는 관계가 기본적인가 하는 문제, 해탈(moka)의 문제, 그 본성과 그것을 달성하는 방법 등에 대해서 토론을 벌였다(→ 다르샨).


[일반적 특성]

인도의 여러 철학들은 매우 다양한 견해·이론·체계를 담고 있으므로, 모두에게 공통된 특성들을 골라내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베다 권위의 인정은 모든 정통체계의 특성은 되겠지만, 순세파·불교·자이나교라는 비정통체계는 제외된다. 철학자들이 베다에 대해서 충성을 고백하더라도 이것이 사변적 작업의 자유를 거의 억누르지 않았다. 반대로 베다 권위의 인정은 어떤 철학자의 견해가 정통파에게 수용될 수 있게 하는 편리한 방도였는데 이것은 어떤 사상가가 전혀 새로운 관념을 소개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광범위하게 다양한 견해가 확증을 얻기 위해서 베다를 언급했다. 예를 들면, 개인적 영혼과 원자라는 궁극 원소의 존재를 믿고 있는 바이셰시카 철학자들도, 불이론자도 모두 베다를 인용하고 있다.

성전의 권위에 대한 충성과 마찬가지로 거의 모든 인도철학체계들이 해탈이라는 이상을 인정하고 있으나, 해탈은 그것들이 제시하고 있는 체계적 교리들과 느슨하게 연관되어 있다. 해탈의 이상과 직접적인 관계 없이 수많은 인식론적·논리적, 심지어 형이상학적 이론들이 논의되고 순수하게 합리적인 토대 위에서 결론이 도출되었다. 오직 베단타 철학과 상키야 철학만이 해탈의 이상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니아야·바이셰시카·푸르바미망사의 논리적 체계들은 해탈과 약간의 관계만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카마 수트라 Kma-stra〉·〈아르타샤스트라 Arthastra〉를 포함한 여러 철학들과 다른 과학적 문헌들마저도, 해탈의 이상을 인정하고 해탈의 달성을 위한 자기체계의 효율성을 공언하고 있을 정도로 해탈이 형식적 중요성을 갖고 있음도 사실이다.

인도철학자들이 직관적 지식을 말할 때, 그들은 논리학의 조력으로 직관의 여지와 가능성을 증명하려고 했다. 그들에게 철학의 의무는 바로 여기에서 종결된다. 그들은 종교적 신앙을 정당화하고자 하지 않는다. 철학적 지혜가 바로 종교적 진리의 존엄을 가지는 것이다. 이론은 실천에 종속되지 않으며, 그것 자체로 매우 가치 있고 효과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영혼(tman)·(karma)·해탈이라는 3개의 기본적 개념들이 인도철학사유의 주춧돌을 이루고 있다. 이들 개념들의 객관적 타당성을 수용하는 방식은 다르지만, 순세파를 제외한 모든 인도철학자들은 3개의 개념과 그것들의 상호관계에 대해서 관심을 지니고 있다. 이중에서 인간행위의 도덕적 효용성을 의미하는 업개념이 가장 인도 전형의 것으로 보인다. 아트만 개념은 서양사유에서 완전히 부재한다고는 할 수 없다. 중요한 차이점을 부인할 수 없지만 어떤 의미로는 초월적·절대적 정신자아라는 서양 개념에 상응하고 있다. 최고이상이란 의미를 지닌 해탈이란 개념도 서양사유가 지닌 관심사의 하나였다. 인도심성이 중시했던 정도만큼은 아니지만 해탈과 유사한 개념은 특히 그리스도교시대에 중요 관심사였다. 대부분의 인도철학자들은 해탈의 가능성을 상정하고 있으며, '해탈의 불가능성'(anirmoka)은 철학이론을 공론화(空論化)시키는 중대오류로 간주되었다. 업개념과 더불어 2가지 관심사의 결여가 인도철학적 사유를 서양철학 일반과 구별짓는다. 고대 그리스 시대 이래 서양적 사유는 수학과, 그리스도교시대에는 역사와 관계해왔다. 그런데 인도인에게 수학과 역사가 철학적 문제를 야기한 적은 결코 없었다. 상이한 학파가 수용했던 프라마나, 즉 지식수단의 목록에도 수학적·역사적 지식의 포함은 전혀 없다. 인도철학자들이 형식논리학을 발전시키지 않았다는 중요한 사실도 수학에 대한 무관심과 관계가 있는 듯하다. 그런데도 삼단논법(2개의 전제와 하나의 결론으로 이루어진 타당한 연역논증)이 발달되었고, 상당히 정교하고 치밀한 논리이론이 성취되었다. 인도논리학은 추상적 명제들에 대해서가 아니라 지식들(jñnni)의 논리에 대해서 교훈적인 예증을 제공하고 있다. 인도 논리학은 심리학과 인식론에서 분리될 수 없는데, 그것은 세계에 대해서 진리를 알려고 하는 인간의 실제적인 노력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정통학파]
  • 미망사 학파의 제사철학
  • 푸르바미망사 수트라와 샤바라의 주석

    푸르바 미망사('최초의 미망사') 또는 제사(祭祀) 미망사(Karma-mms)는 베다의 명령을 탐구하는 체계이다. 이것이 1차적인 목적이지만 이 학파는 곧 경전에 대한 해석원리의 발전, 의미론과 해석학적 이론들로 나아갔다. BC 4세기경에 경전을 지은 자이미니는 초기 미망사 작가들, 특히 바다리(Bdari)에 대해서 비판적이었다. 바다리의 주장으로 간주되는 견해에 따르면 베다 명령은 자기의 이익에 대한 기대 없이 수행되어야 한다. 그런데 자이미니에 따르면 베다 명령은 행위의 명령일 뿐만 아니라, 원하는 목표를 획득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러한 행위들에 대한 권유이기도 하다. 자이미니와 그의 주요주석가인 샤바라(3세기)에게 베다의 희생제의는 생천(生天)의 획득을 위해서 도움이 되는 것이다. 이들은 행복으로 나가는 수단이 되지 못한다면 어떤 것도 의무일 수 없음을 강조했다.

    자이미니의 주요관심은 다르마이며, 그것은 욕구된 대상(artha)이고, 이것의 소망성은 베다 경전의 명령적 선언(codan-lakao)에 의해서만 증명된다. 반드시 해야할 일(dharma)은 지각이나 추리에 의해서 결정될 수 없다는 함축된 이론을 지지하기 위해서 자이미니는 지식수단을 논구한다. 다르마는 현재 존재하는 실재가 아니며, 미래의 행위의 길은 지각으로 알려질 수 없다. 지각적 지식이란 감각기관과 현재 실재하는 것과의 접촉에서 발생하는 것이고, 추론도 지각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므로 모두 무용이다. 오직 명령적 선언만이 반드시 해야 할 일을 언명할 수 있다.

    푸르바미망사 : 바타 학파와 프라바카라 학파

    쿠마릴라(7세기)는 자이미니의 경전과 샤바라의 주석에 평석(Vrttika)을 붙였다. 프라바카라는 쿠마릴라 이후의 사람으로 추정되는 바, 샤바라 주석의 평석인 브리하티를 지은 자이다. 쿠마릴라와 프라바카라는 기본적 문제에 있어서 다른 점이 많은데 전자는 자이미니와 샤바라에 더욱 가깝다. 그는 자이미니와 샤바라처럼 미망사를 다르마의 탐구에 국한시킨 반면, 프라바카라는 미망사에 베다 성전의 의미탐구라는 보다 포괄적인 임무를 부여했다. 쿠마릴라는 베다의 명령이 획득할 결과에 대한 명제까지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했으며, 프라바카라는 바다리를 추종하면서 명령 그 자체로부터 결과에 대한 일체의 고려를 배제하고 의무감만을 사람의 행동동기로 상정했다.

    형이상학과 인식론

    바타 학파(쿠마릴라 학파를 지칭)와 프라바카라 학파는 형이상학적으로는 실재론자들이며 모두 불교적 관념론과 허무주의를 반박했다. 바타 존재론은 실체·성질·행위·보편·부정의 5가지 종류를 인정하고 있다. 실체는 10종이 있다고 했다. 프라바카라 존재론에서는 오직 8종의 실체가 인정되었으며, 부정을 제외하고 대신 힘·유사성·내속관계·수(數)를 첨가했다. 양 학파 모두 보편자의 실재를 인정하지만 상당히 다른 견해를 보이고 있다. 프라바카라는 지각의 예증 속에 내재하며 지각가능한 보편자만을 인정했다. 따라서 그들은 '존재' 등의 추상적 보편자나 브라만성(性)과 같이 단순히 상정된 보편자를 거부했다.

    해석학과 의미론

    경전 해석의 원리, 결과적으로 의미론에 있어서도 양 학파는 날카롭게 대립하고 있다. 프라바카라에 의하면 단어는 1차적으로 행위의 어떤 과정 또는 행위(krya)에 관련된 사물을 의미한다(→ 언어). 문장이 유의미한 담화의 단위를 구성하며, 단어 하나는 그것 자체로는 다른 것과 연결되지 않는 단일의 관념을 결코 표현할 수 없다. 문장은 단어의 의미들의 단순 복합물이 아닌 관계적 복합물을 지칭한다. 그에 따르면 예컨대 '소를 가져오너라'라는 어른들의 명령내리기와, 청년들의 복종하기를 관찰하면서 아이들은 문장의 의미를 배운다. 이러한 의미론적 접근법에서 베다 성전의 해석원리가 도출된다. 모든 베다 경전은 규정된 행위양식과 관계한다고 해석해야 하며, 경전에는 단순한 서술적 문장은 없다. 더욱이 베다 명령이 권위 있는 증언을 제시하고 있으므로 이것만이 인식과정의 유일한 방법으로 간주된다. 모든 다른 증언적 지식들은 성격상 추론적인 것이다. 해야 할 일에 관해서 프라바카라는 베다를 유일한 권위로 인정하고 있다. 쿠마릴라의 견해는 매우 다르다. 단어는 어떤 다른 것과의 관계성이 아니라 그것 자체의 의미를 전달한다. 따라서 그는 순전히 서술적인 문장도 유의미한 것으로 인정했다. 문장의 의미는 독립된 단어의 의미들이 어떤 관계적 구조하에서 연결된 것으로 간주되고 있으며, 구성된 단어의 의미는 그에게는 가장 간단한 의미단위였다. 사람들은 어른들의 충고에서뿐만 아니라 타인의 말하기를 보고서도 배운다.


    바이셰시카 수트라는 BC 2세기에 활동했다고 추정되는 카나다라는 철학자에 의해 씌어졌다. 이 체계의 이름은 궁극개별자의 존재를 인정한다는 사실에서 얻었다. 니아야 수트라는 고타마 또는 악샤파다에 의해서 BC 2세기경에 씌어진 것 같으나, 그중 많은 부분이 후기에 편입되었다.

    적어도 5세기의 주석가인 프라샤스타파와 7세기의 우드요타카라 같은 저자에 이르러서는 니아야와 바이셰시카 학파 사이에서 상대방 이론의 차용과 양 학파의 혼용이 본격적으로 진전되었지만, 이후에도 양 학파는 저자와 주석가에서 다른 전통을 갖게 된다. 10세기경에는 2개의 철학을 보다 성공적으로 결합하려는 많은 문헌이 산출되었는데, 그중에 바사르바지냐(950경)의 〈니아야사라 Nyyasra〉, 바라다라자(1100~50)의 〈타르키카락샤 Trkikarak〉, 케샤바 미슈라(1225~75)의 〈타르카바샤 Tarkabh〉, 안남 바타(17세기)의 〈타르카상그라하 Tarkasagraha〉 등이 있다.

    니아야-바이셰시카 학파는 사물·성질·관계·보편자에 대해서 실재론적이다. 양 학파는 개인적 자아에 대해서는 다원론적이며, 또한 유신론적이다. 양자는 모두 외적 관계(부분적으로만 내적인[內屬] 관계), 원자론적 우주론, 새로운 결과물을 인정하고, 존재라는 개념을 가장 포괄적인 보편자로서 수용하고 있다. 지식을 자아의 성질로 간주하며, 진리의 본성에 대해서 대응론을, 진리의 검증에 대해서는 실용주의-정합설을 각각 지지하고 있다. 주로 수(數)에 대한 이론이나 물리이론과 화학이론 등을 다루므로, 이 두 학파를 구별짓는 요점은 대수롭지 않다.

    고타마의 수트라는 400년경 바차야나가 주석을 달았고, 특히 공사상(空思想 nyavda)을 중심으로 하는 불교이론에 대해서 응수했다. 우드요타카라의 〈평석 Vrttika〉(635경)은 주요불교논리서 이후에 지어졌다. 그는 용수와 진나에 대한 반박을 시도했으며 진나의 지각설, 불교의 자아부정, 타자배제(anypoha)의 의미론을 비판했다. 긍정적으로 그는 감각과 대상과의 여섯 양상의 접촉(sanikarsa)을 최초로 도입했는데 이것은 이 학파의 주장으로 남게 된다. 우드요타카라는 추론을 둘로 나누는데, 첫째는 대전제(sdhya 所證)가 항상 현존하는 추론식, 그래서 대전제가 없으면 매개(hetu 能證)도 있을 수 없다는 규칙에만 의존하는 추론식이며, 둘째는 긍정적이며 부정적인 규칙들을 모두 사용하는 추론식이다. 그는 스포타 이론을 부정하고, 단어의 의미는 최후의 음절을 듣고 이전의 음절을 상기함으로써 파악된다고 주장했다. 9세기의 바차스파티 미슈라는 우드요타카라의 〈평석〉에다 타트파리아티카를 지었는데 이것으로 불교도에 대한 니아야의 입장을 강화시켰다. 그는 지각을 무규정적·비언어적·비판단적 지각과 규정적·언어적·판단적 지각의 둘로 나누었다. 중전제와 대전제 사이의 변충(遍充 vypti)개념을 정의하면서 그는 무효조건(updhi)이라는 개념을 도입하고 추론의 정당화를 위해서 필요한 관계의 종류가 무조건적이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니아야 - 바이셰시카의 일반 형이상학적 입장은 개별자와 보편자, 변화와 영원성을 인정했다. 보편자 사이에는 수직계열과 궁극적 차이가 존재하며, 최고의 보편자는 존재이다. 실체는 성질의 기체와 내적 원인을 구성하는 것으로 정의된다. 성질은 실체도 아니고 행위도 아니지만 보편자의 기체이다. 왜냐하면 보편자란 오직 실체·성질·행위 속에만 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보편자는 영원하며 다(多) 속에 내재하는 것으로 정의된다. 궁극적 개별성은 원자, 영혼과 같은 영원한 실체에 속하며, 이 개별성들이 다른 방식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한 개별자들 사이의 모든 차별을 설명하고 있다. 내속(內屬 samavya : 화합관계)이란 보편자와 그 예증, 실체와 성질 또는 행위, 전체와 부분, 영원한 실체와 그것의 개별성 사이에 성립하는 것인데, 이 관계 아래에서는 한쪽이 존재하지 않으면 다른 쪽도 존재하지 않는다. 비존재(abhva)란 범주는 차이('갑은 을이 아니다')와 부재('갑은 을 속에 없다')로 나누어지는데, 부재는 다시 생성 이전의 부재, 소멸 이후의 부재, 다른 장소에서의 부재로 나누어진다. 이 학파에서는 알 수 있는 모든 것은 명명할 수 있는 것이다.


  • 상키야·요가
  • 이슈바라크리슈나의 〈수론송(數論頌) Skhya-krik〉은 상키야의 가장 오래된 작품이다. 그는 아수리가 판차시카에게 가르친 카필라의 핵심적 가르침을 정리하고 있다고 말했다.

    자아의 본성

    송(頌)에 따르면 수많은 자아들이 있으며 이들은 각각 순수의식이라는 본성을 지니고 있다. 자아(purua)는 원질(原質 prakti)도 아니며 거기에서 산출된 전개물도 아니다. 물질은 3가지 성질(guna : 구성요소)로 구성되어 있으나, 자아는 그렇지 않다. 물질은 비이지적이며 분별력이 없으나, 자아는 분별한다. 물질은 대상(viaya)이지만 자아는 그렇지 않다. 물질은 공통적이나 자아는 개성적(asmnya)이다. 물질과는 달리 자아는 비창조적(aprasavadharmin)이다. 자아들의 존재증명은 자연이 질서 있는 배열을 갖고 있다는 사실에 토대를 두고 있는데, 이 질서는 자연과는 다른 타자의 존재성(parrthatva)을 의미하여, 이 타자가 바로 의식적 정신임에 틀림없다는 것이다. 다수 자아의 존재증명은 사람들이 각각 다른 때에 태어나고 죽어간다는 사실, 그들이 같은 순간에 행동하지 않는다는 사실, 상이한 성질·태도·성벽 등을 표출한다는 사실에 근거해서 가능하다고 한다. 그러나 모든 자아는 수동적인 목격자(skin)이며, 본질적으로 독존하며(kevala), 중립적(madhyastha)이며, 비행위자(akart)이다.

    세계(prakti)의 본성·기원·구조

    갖가지 차별을 가지고 있는 사물과 사람들(심리적·물리적인 유기체로 간주될 때)로 구성된 현상적 자연은 물질의 원상(原狀)으로부터의 전개물이다. 이 관념은 인중유과론(因中有果論 satkryavda)에 근거하고 있다. 결과는 그것의 산출 이전에 이미 원인 속에 선재해 있는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무로부터의 생성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원초적 프라크리트(시원적 재료)는 1차적 모태인데 여기에서 모든 차별상들이 발생하며, 이들 모두가 그 속에 무차별의 상태로 내재해 있다. 원질은 무원인적이며, 영원하고 편만하고 유일하며, 독립적·자기완결적이며, 구분되는 여러 부분을 갖고 있지 않다. 반면에 이러한 1차적 모태에서 생성되어 나오는 사물들은 원인을 가지고 영원하지 않고, 제한적이고 다수이며 의존적이고, 부분으로 이루어진 전체이며 구현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물질은 원초의 미현현의 상태이든 구현의 상태이든 3개의 구나(guna)로 구성되어 있으며, 분별력이 없고 대상이며, 무의식적이지만 창조적이다.

    윤리학

    윤리학에서 수론송은 주지주의를 표방하며, 이것이 상키야 체계의 특성이다. 고(苦)는 자아의 본성에 대한 무지에서 나오는 것으로, 자유 및 최고선은 자아와 물질 사이의 구별에 대한 지식을 통해서 도달가능하다. 자유의 상태에서 자아는 자연에 대해 무심하게 되며, 행위자와 향수자(享受者)이기를 멈춘다. 자아는 그 본성인 순수목격의식이 된다.

    요가 수트라

    BC 2세기에 활동한 파탄잘리의 〈요가 수트라 Yoga-stras〉는 요가에 대해서 현존하는 책 중 최초의 것이다. 〈요가 수트라〉의 저자인 파탄잘리가 문법학자 파탄잘리는 아닌 것 같다. 요가 수트라는 상키야 체계와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어 전통적으로 이 둘은 하나로 간주되기도 한다. 요가는 상키야의 체계에다 이슈바라라는 지고(至高)의 신을 부가하고 있으므로 유신론적 상키야로 불린다. 양자의 차이를 보면 상키야는 주지주의적이고 해탈의 수단으로써 형이상학적 지식을, 요가는 의지주의적이어서 동일한 원리의 자각을 위한 엄격한 자기억제의 필요성을 각각 강조하고 있다.

    라자 요가와 하타 요가

    파탄잘리의 요가는 그것으로 우리가 자기통제를 확보한다는 의미에서 라자 요가로 불리지만, 하타 요가(하타는 좌우 콧구멍을 통과하는 호흡을 의미)는 영적인 완성을 위한 방법으로써 신체의 자세, 호흡의 통어와 청결의 과정을 강조하고 있다. 하타 요가의 근본경전은 〈하타 요가 프라디피카 Haha-yoga-pradpik〉('하타 요가의 빛', 15세기)이다. 두 요가의 상호 관계는 "라자 없이 하타 없으며, 하타 없이 라자 없다"라는 격률로 표시된다.

    종교적 결과

    상키야-요가의 종교적 결과 중의 하나는 엄격한 고행주의에 대한 강조와 브라만주의에서 나온 제식주의적 요소들의 회피이다. 비록 두 철학이 힌두 신앙의 핵심부분으로 남아 있지만, 이 철학을 토대로 주요 종교적 교단이 형성된 적은 없다.


    샹카라 이전의 망두키아 송(頌) 단편들

    샹카라와 라마누자가 보다야나와 우파바르샤에 의해 지어졌다고 여겨지는 〈평석〉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으나, 샹카라 이전에 지어진 〈베단타 수트라〉에 대한 주석은 전해지지 않는다. 그렇지만 샹카라 이전에도 경전에 대한 일원론적 해석가들은 있었다. 바르트리하리·만다나·가우다파다가 그중에서 중요하다. 샹카라는 가우다파다를 그의 스승인 고빈다의 스승으로, 베다에서 불이론(advaita)을 발견했던 사람으로 칭송하고 있으며, 샹카라 자신은 가우다파다의 주요저작인 망두키아 우파니샤드 송에 대해서 주석을 달았다.

    가우다파다 송은 4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제1부는 우파니샤드 자체에 대한 설명이며, 제2부는 세계의 허망을 수립하고, 제3부는 실재의 유일성을 옹호하며, 제4부는 고(苦)로부터의 해탈 상태를 다루고 있다. '불타는 연료의 지멸'이라는 제4부의 제목이 시사하는 대로, 가우다파다의 철학적 견해는 불교의 중관철학, 유식학파에서 상당한 영향을 받고 있는데, 그의 기본목표 중의 하나는 우파니샤드의 가르침이 불교관념론자들의 주요이론과 부합한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의 주요 철학적 원리에는, 만물은 꿈속에 보여진 것처럼 비실재적이며, 실재에는 생성도 소멸도 없다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 변화와 인과론에 대한 그의 비판은 용수를 상기시킨다. 이분법이란 망상의 생산력인 마야가 유일의 실재 위에 부탁(附託)한 것이다. 진정한 생성이란 없으므로, 가우다파다의 철학은 흔히 무생론(無生論 ajtivda)으로 불렸다. 여기까지 그는 불교의 유식학파에 동의하지만, 유식학파에서의 마음(citta)이 실재하고 정신적 관념의 실재적 흐름이 있다는 주장은 거부하고 있다.

    샹카라는 가우다파다의 극단적인 환영주의(幻影主義)를 완화시켰다. 비록 그는 현상세계를 잘못된 현상으로 간주하고 있지만, 꿈을 비유로 사용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는 세계의 객관성을 꿈과 환영의 주관성과 대조시키고 있다. 둘 다 초월적인 것과는 반대되지만, 경험계와 환영계의 차이는 그의 사유방식에 중심적인 것이었다.

    베단타의 여러 학파들

    베단타가 흔히 하나의 철학체계로 지칭되지만, 여기에는 서로 매우 다른 여러 학파들이 존재한다. 이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것은 일련의 공통경전에 대한 충성일 것이다. 이들은 〈우파니샤드〉·〈베단타 수트라〉·〈바가바드기타〉 즉 베단타의 3개의 근본경전(prasthna)이다. 베단타의 여러 학파들은 모두 자신들의 입장을 지지하기 위해서 이들 3가지 근본자료들에 주석을 달았다. 그 차이점들의 핵심이 되는 문제 속에는 브라만의 본성, 현상계의 지위, 유한한 개인과 브라만과의 관계, 해탈의 본성과 수단이 포함되어 있다. 주요학파로는 샹카라의 무제한적 불이론(uddhdvaita), 라마누자의 제한불이론(viidvaita), 마드바의 이원론(dvaita), 바스카라의 불일불이설(不一不異說 bhedbheda), 그리고 동일과 차별을 다른 방식으로 강조하는 님바르카·발라바 학파들이 있다. 종교적 관점에서 보면 샹카라는 해탈의 유일한 수단으로써 형이상학적 지식을 찬양하고 신의 관념조차도 잘못으로 간주하고 있다. 라마누자는 반면에 지식에 수반된 박티(bhakti 信愛)의 길을 추천하고, 베다의 제식주의에 대해서 보다 관용의 태도를 보이고 있다. 마드바·님바르카·발라바는 모두 인격주의적 유신론을 주창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인격신에 대한 사랑과 헌신이 최고로 여겨졌다. 비록 인도철학에 대한 샹카라의 영향은 다른 학파들이 따라갈 수 없었다고 하더라도 실제의 종교적 삶에서는 유신론적 베단타가 샹카라의 추상적인 형이상학보다 훨씬 큰 영향을 행사했다. 샹카라 철학의 근본주장은 자아(유일하고 보편적이며, 영원하고 자증적인 자아)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자아의 본성은 초월적인 관점에서는 주관(raya)과 객관(viaya)이 없는 순수의식이다. 이런 의미에서 바르트리하리의 어불이론(語不二論 abddvaita), 불교도의 식불이론(識不二論), 가우다파다의 무생불이론(無生不二論)과 나란히 샹카라의 불이론은 자아불이론(tmdvaita)으로 불릴 수 있을 것이다. 현상계와 유한 개별적 자아는 경험적으로 실재하지만 고차적인 관점에서는 단순한 화현(化現)일 뿐이다. 이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샹카라는 논증과 성전의 해석에 의존했다. 그의 방법론적 원리에 의하면, 이성은 성전에 나타난 진리들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만 사용되어야 한다고 해서 주로 부정적 용법이었다. 그는 적수의 이론들을 반박하는 데 탁월한 논리적 기술을 보여주었으나, 그의 제자들은 불이론의 주장에 대해서 긍정적인 이성적 토대부여를 시도했다.

    샹카라의 형이상학은 실재의 기준에 근거를 두고 있는데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공식화될 수 있다. 실재는 부정이 불가능한 것이다. 이 기준을 충족시키는 유일한 것은 의식이다. 왜냐하면 의식의 부정도 부정하는 의식의 존재를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부정은 상호부정(차이)이거나 부재일 것이다. 부재는 생성 이전 또는 소멸 이후의 어떤 사물의 부재이거나 또는 어떤 다른 장소에서의 부재일 것이다. 의식의 부정은 생각될 수 없으며, 어떤 종류의 부정도 의식의 술어가 될 수 없다. 의식은 자증적이다. 모든 다른 대상의 현현은 의식에 의존해야 한다. 의식에는 차별성도, 다(多)에 대한 의식도 없다. 복수의 의식 중심체들로 보이는 것은 화현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의식 이외에 진실로 존재하는 프라크리트 같은 것은 없다. 그런 것은 비실재적 타자이다. 의식에는 내적 부분들이나, 복수의 의식적 상태란 없다. 푸름의 의식과 노랑의 의식의 차이는 의식 내의 차이가 아니라 대상 사이의 차별이 의식에 부탁된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상키야·불교유식론·니아야 - 바이셰시카의 다원론은 반박되었다. 실재는 유일, 무한, 영원, 자기조명적 정신이다. 이것은 어떤 한정도 갖지 않는다. 한정은 곧 부정이기 때문이다.

    샹카라 철학의 근본문제는 순수자아가 어떻게 일상적 경험에서 '나의 의식'이라는 방식으로 개별화될까? 또는 '푸름에 대한 의식'에서처럼 의식이 어떻게 대상과 관계를 맺을까 하는 점이다. 어떤 것이 경험적 사실이나 동시에 그것이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면, 그것은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 샹카라의 오류이론에 따르면 잘못된 화현(예를 들면 뱀으로 보인 새끼줄)은 적극적인 것이며, 제시된 실체이므로 존재도 비존재도 아니다. 오류는 따라서 둥근 4각형 같은 허구가 아니다. 샹카라는 존재·비존재라는 범주 이외에 오류라는 또하나의 범주를 설정했다. 세계와 제한된 개인들은 이런 의미에서 오류인 것이다. 이들은 합리적으로 설명될 수 없다. 이들은 브라만으로부터 논리적으로 도출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또한 그들에 대한 경험은 브라만에 대한 명지(明知 vidy)로 지양(止揚)되는 것이다. 그들은 무명(avidy)에 의해서 브라만의 존재 위에 부탁된 화현인 것이다. 무명은 무시(無始)이며, 실재의 본성을 숨기고 그 위에 오류의 화현을 제시하는 어떤 적극적인 것이다.

    샹카라에 따르면 해탈은 획득해야 하는 완전은 아니다. 자아의 참된 본성을 숨기고 있는 무명의 파괴를 통해서 그것이 실현되는 것이다. 신(神)이란 세상을 참으로 간주하고 그 창조주와 지배자를 찾으려고 하는 무명의 마음을 가진 자에게 나타나는 것이다. 종교적 삶은 인간과 신, 덕과 악, 금생과 내생이라는 이분법적 관념들에 의해서 유지된다. 해탈의 상태에서는 이러한 이분법은 극복된다. 해탈이 육신을 지닌 상태에서 가능하다는 것도 샹카라 신념의 중요한 일부분이다. 지고의 상태를 가져오는 것은 무명의 파괴이므로 신체에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이는 정신에 대한 비실재적 한계일 따름이다.

    라마누자는 샹카라의 무한정적·무성질적·무차별적인 실재로서의 브라만 관념을 부정했다. 그런 실재는 지각되지도 알려지지도 사고되지도 않으며 언급조차 할 수 없으므로 허구와 다름없기 때문이다. 이 주장의 유지를 위해서 라마누자는 〈베단타 수트라〉에 대한 주석 〈슈리 바시아 r-bhya〉에서 지식의 여러 가지 방법을 자세히 논구하고 있다. 그에게는 주관도 객관도 없는 순수의식은 없다. 모든 의식은 무엇에 대한 의식이며 누구에게 속해 있다. 한 의식이 다른 의식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점도 사실이 아니다. 자신의 과거의식은 현재의식의 대상이 된다. 의식은 자아라는 의식소유주에게 대상을 제시할 때만 자증적이다.

    샹카라의 실재론을 부정하면서 라마누자는 브라만이란 한량없이 완전하고 탁월한 덕성을 가진 존재로서 그의 완전성은 초월될 수 없다고 한다. 세계와 유한의 개인은 실재하며 함께 브라만의 신체를 구성하고 있다. 신체와 영혼이란 범주는 그의 사유방식에 중심적이다. 신체는 영혼에게 봉사하기 위해서 통제되고 움직여진다. 물질적 세계와 의식적 영혼들은 실체적 실재들이지만 브라만과 불가분리적이며 신체가 영혼의 성격이 될 수 있듯이 브라만의 성격이 될 수도 있다. 브라만은 영혼으로도 물질적으로도 성격화된다. 라마누자와 그의 추종자들은 샹카라의 환영주의, 특히 그의 무명론과 세계의 허망성에 대한 비판을 시도했다. 라마누자에게는 무시(無始)의 적극적 무명은 어떤 장소와 어떤 대상도 갖지 못한다. 만일 그 무명이 스스로 빛나는 브라만을 정말로 숨긴다면, 무명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라마누자 인식론의 특징은 타협할 줄 모르는 실재론이다. 알려진 것은 무엇이든 실재적이며 실재만이 알려진다. 이런 이론에서 그는 오류의 대상도 실재한다는 주장으로 나아간다. 오류란 불완전한 지식이다. 오류의 교정은 불완전한 지식의 완성이다. 해탈은 개인이 부정되는 상태가 아니다. 사실 '나'라는 생각은 해탈 이후에도 잔존한다. 왜냐하면 자아야말로 '나'라는 관념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파괴된 것은 자아주의, 즉 독립되었다는 잘못된 생각이다. 거기로 나아가는 방법은 신의 은총으로 이끌어주는 박티이다. 라마누자의 박티란 사랑을 수반한 강렬한 명상(dhyna)이다. 자기자신에게 부과된 경전적 의무는 초극될 수 없다. 해탈이란 신과 함께 하는 가운데의 축복이다. 라마누자가 강조한 만인의 길은 신의 의지에 대한 완전 복종이며, 그의 은총을 받기에 합당한 자로 자신을 만드는 것이다. 사회관에서 라마누자는 박티가 카스트 및 계급간의 장애물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한다.


  • 언어철학자들 : 바르트리하리만다나 미슈라
  • 여기에서 논의되는 언어철학자들은 바르트리하리(7세기)와 만다나 미슈라(8세기)가 이끌었던 문법학자들이다. 특히 후자는 쿠마릴라의 제자로 알려져 있지만 미망사 학파와는 매우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문법학자들은 미망사 학파처럼 언어와 의미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의 주요경전으로는 바르트리하리의 〈바키아파디야 Vkyapadya〉('文章單語篇'), 만다나의 주요작품으로 〈브라마 성취 Brahmasiddhi〉·〈스포타 성취 Spoa-siddhi〉·〈명령본성탐구 Vidhiviveka〉 등이 있다.

    바르트리하리는 그의 최초의 원리로서 미망사와 니아야 실재론의 한 원리, 즉 사물자체와 접촉한다는 비개념적 지각이 존재한다는 원리를 부정한다. 그에게는 이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왜냐하면 모든 지식은 말에 의해서 관통되며 밝혀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지식은 언어적이며 대상의 차이는 말의 차이로 환원된다. 형이상학적 어불이론은 이 이론에서 멀지 않다. 즉 한 단어의 본질은 인간의 상상적 구성력(kalpan)에 의해서 명색(名色)의 세계로 나타난다. 형이상학적으로 바르트리하리는 샹카라의 불이론이나 법칭과 같은 불교철학자의 학설과 매우 유사하다. 이 형이상학이론은 다른 또하나의 이론, 즉 스포타('의미가 거기에서 발생하게 되는 그것') 이론을 이용하고 있다. 대부분의 인도철학자들은 말이나 문장이 지닌 의미의 정확한 담지자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만일 음절들이 일시적이며, 우리가 한 단어의 음절들에 의해서 생긴 음성을 듣는 데 있어서 각 음성이 그 다음 음성에 의해서 대체된다면, 어느 누구도 그 단어를 전체로 파악할 수 없다. 그러면 단어의 의미를 어떻게 파악할까 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 문장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미망사 학파는 음성의 영원성을 상정했고 영원한 음성 및 음성복합체(단어와 문장들)를 그것들의 화현에서 구별했다. 문법학자는 그 대신에 단어와 음성을 구분했고 단어 자체를 의미의 담지자로 간주했다. 이런 면에서 단어는 스포타인 것이다.

    음성은 공간적이며 시간적 관계를 갖는다. 즉 상이한 화자(話者)에 의해서 다르게 산출된다. 그러나 의미담지자로서의 단어가 크기와 시간적 측면을 지닌다고 할 수는 없다. 그것은 분할불가능하며 영원하다. 스포타와 구별되는 것으로는 추상적 음성모형(prktadhvani)과 발화된 음(viktadhvani)이 있다. 나아가 바르트리하리에게 문장이란 단어의 집성이나 그것들의 질서 있는 계열이 아니다. 단어는 오히려 문장에서 추상화된 것이다. 그러므로 문장 스포타가 의미의 1차적 단위이다. 단어도 역시 프라티바로 불리는 순간적 직각에 의해서 한 단위로 파악된다.


  • 〈마하바라타〉의 철학적 부분들
  • 대서사시 〈마하바라타 Mahbhrata〉는 여러 가지 비아리안 공동체를 아리안화하는 과정에서 접하게 되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서 보여준 베다 브라만주의의 시도를 대변하고 있다. 다양한 여러 종교적·철학적 전통은 이 작품 속에 종합되었다.

    〈해탈의 법〉, 상키야 이전의 문헌

    서사시의 철학적 견해 속에는 상키야 신념(실재적 물질과 개인적 영혼들의 다수성에 대한 신념)의 초기형태(이슈바라 크리슈나의 고전 상키야 철학 이전의 것)를 간직하고 있다. 〈마하바라타〉 제12권의 〈해탈의 법 Mokadharma〉은 초기의 원형 상키야 경전으로 가득 차 있다. 카필라의 상키야-요가, 비슈누의 판차라트라, 베다, 파슈파타(가축의 主)의 4개 철학파에 대한 언급도 있다. 판차라트라에 속하는 이 서사시는 기본적으로 바가바타 신앙 속에 초기의 비체계적인 상키야 이념들을 혼융시키려고 시도했다. 상키야의 25원리(tattva)에 대해서 새로운 범주화가 시도되고 있으며 비상키야의 제26원리인 이슈바라가 도입되고 있다.

    왕권과 국가에 대한 초기이론들

    〈마하바라타〉의 제12권 '위로의 책'인 〈샨티 파르반 nti Parvan〉 속에는, 권과 왕법(rjadharma)의 기원에 관해서 괄목할 만한 설명이 있다. 이야기의 주인공인 비슈마는 왕권의 기원에 관련해서 2개의 이론에 대해 긍정적으로 언급했는데, 두 이론은 모두 국왕이 부재하던 시대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한 설명에 따르면 국왕 이전의 시대는 약자에 대한 불안전과 강자의 무제한의 권력으로 특징지어지는 시대이다. 다른 설명에 의하면 그 시대는 평화와 안전의 시대였다. 이러한 이상적 상태로부터 인류가 타락했으며, 그래서 조직적인 힘, 즉 왕권의 필수성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전자의 설명에 따르면 인류에 대한 보호와 안정을 위해서 왕권수립 이전 시대의 불안정으로부터 신적인 지배자에 의한 왕권수립으로 이행했다는 것이다. 이와같이 왕권은 역사적인 기원을 갖는다. 왕의 1차적 기능은 보호의 기능이며, 형률(刑律 daanti)은 왕법에 종속된다. 비록 이 서사시가 왕의 반신성(半神性)을 인정하고는 있으나 〈마하바라타〉는 다르마·도덕법을 왕보다 우위에 두고 있다.


  • 〈실리론〉의 세계관
  • 카우틸리아〈실리론(實利論) Artha stra〉(BC 321~296)은 인생의 4대 목표 중의 하나인 아르타, 즉 물질적 실리에 대한 학문이다. 카우틸리아는 아르타를 '인생을 유지하는 수단들'로 이해하고 있으며, 부와 토지가 그 핵심이다. 실리론은 토지를 효율적으로 유지·사용하는 방법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정치와 경제에 대한 저작이다.

    왕권이론과 치국책

    카우틸리아는 왕권이 종족(kula)에 속할 수 있다고 하면서도 군주제에 관심을 가졌다. 그는 국왕의 신성한 성격, 국왕의 직분에 대한 신의 재가란 이념을 지지했으나 동시에 국왕의 선출적 기원이론과 타협하기를 모색했다. 그는 국왕이 없는 자연상태를 강자가 약자를 집어삼키는 일종의 무정부상태로 보고 있다. 국왕의 4가지 기능은 획득하지 못한 것의 획득, 획득한 것의 보호, 보호한 것의 확충, 필요한 사람에 대한 잉여물의 수여이다. 정치조직은 국왕·대신·영토·성채·국고·군대·우방의 7요소로 구성되며, 이들은 상호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국왕의 3가지 권력은 선량한 행정관의 힘, 국왕 자신의 위엄, 국왕의 권면하는 힘이다. 사제(司祭)는 국가조직의 요소가 아니다. 국왕이라도 다르마의 법칙에서 면제되지 않는다. '다르마의 선포자'로서의 국왕은 스스로 성애·분노·탐욕·허영심·거만·열광이라는 6가지 정염에서 자유로워야 한다. 카우틸리아가 주창하고 있는 것은 계몽적 군주의 온정주의이다.

    공동선의 이념

    신하의 행복이 국왕의 행복이다. 국왕의 주요임무는 보호하는 일이다. 군주제란 무정부주의에 대한 유일한 대안이다. 왕의 임무는 기근·홍수·전염병이라는 천재를 막는 일이다. 농업·공업·광업, 노인·병자·빈민의 보호, 간첩의 도움을 받아 범죄 통제하기, 소송의 해결 등이 국왕의 의무이다.

    국가간의 관계

    타국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카우틸리아의 사고는 고차원적인 도덕이상주의가 아니라 국가이익의 필요에 근거하고 있다. 그는 외교의 6가지 책략을 기술하고 있다. 조약, 전쟁, 진주(進駐), 중립, 강력한 군주의 보호확보, 이중정책이 그것이다. 타국과 비교해서 약하면 평화를 추구할 것, 힘이 세면 전쟁을 일으킬 것, 승산이 없다고 생각하면 중립을 지킬 것, 유리하다고 판단되면 진주할 것, 부족하다고 생각되면 보호를 확보할 것, 조력이 필요한 일을 도모할 때는 이중정책을 채용할 것이 외교책략의 핵심이다.


    [불교]

    불교는 인도종교사 가운데 완전히 새로운 현상은 아니었다. 이미 현존하고 있는 브라만 또는 비아리안적인 관념들을 토대로 해서 성립되었기 때문이다. 석가모니 이전 BC 6세기경에는 아트만·카르마·목샤(해탈)라는 브라만적인 이론들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들이 있었다. 푸라나 카샤파류의 자연주의자, 아지비카 즉 마칼리 고샬라류의 결정론자, 아지타 케사캄발린류의 물질주의자, 자기훈련의 고행과 업의 효용성을 믿었던 니간타 나타푸타, 회의주의자인 산자야 베탈리푸타 등이 반대의 대표자들이었다. 불교·자이나교·아지비카는 모두 브라마나의 제식주의적 다신론, 〈우파니샤드〉의 일원론적 신비주의를 함께 부정했다. 이들 모두는 우주 속에 있는 자연법의 지배를 인정했다. 불교는 아트만이라는 근본개념은 거부했으나, 카르마와 해탈이라는 베다적 관념은 간직했다.

    석가모니는 고집멸도(苦集滅道)와 8정도를 가르쳤다. 비록 두카(dukha)라는 말이 통상적으로 고통을 의미하지만 고타마의 용법은 고와 낙, 행복과 고통도 여기에 포함시켰다. 고에는 일상적인 고, 무상고, 오온성고(五蘊盛苦)의 3가지가 있다. 한마디로 무상한 것, 무엇이든 인과율에 종속되는 것은 고인데 이것이 인간의 상황이다. 고의 본성을 아는 자는 그 원인도 안다. 고의 원인을 갈애(渴愛 tn)와 무명에서 찾고 그 과정을 설명한 것이 12연기설이다. 석가모니는 쾌락과 고행의 삶을 부정하고 중도를 제시했는데, 이것은 8정도로 이루어졌다.


  • 무아의 관념과 열반
  • 초기불교의 중요한 2가지 개념은 무아(antman)와 열반(nirva)이다. 석가모니는 무아의 도리를 이론이 아니라 사물의 여실한 모습에 대한 현상학적인 기술로 제시했다. 유랑승 바차고타와의 대화 가운데 석가모니는 상주론(vatavda)과 단멸론(ucchedavda)을 거부했다. 상주론은 무아와 합치하지 않으며, 단멸론은 존재하지도 않는 자아를 가졌을 때만 의미가 있다. 어떤 형이상학자에도 동의하지 않으면서, 색(色)·수(受)·상(想)·행(行)·식(識)의 오온으로부터 의식의 흐름속에 '내가 있다'라는 의식이 스스로를 형성하는 과정을 석가모니는 기술하고 있다. 무아론은 푸드갈라라는 개인적 인격과 담마스라는 존재요소에 각각 적용되는 2가지 면을 갖고 있다. 전자의 측면에서는 개인은 5온으로 되어 있음을 주장하고, 후자의 측면에서는 모든 요소들의 절대 비실재성을 의미한다. 전자의 진리에 대한 직관적 통찰로 정염과 욕망이 사라지며, 후자의 진리에 대한 통찰로 사물 일반에 대한 오해를 불식한다. 전자는 번뇌장(煩惱障 klevaraa)을, 후자는 소지장(所知障 jñey-varaa)을 제거하면서 마침내 열반으로 이끈다. 초기 경전에는 열반에 대한 긍정적 설명과 부정적 설명이 함께 보인다. 열반이란 극단적인 지멸(止滅)의 상태이지만, 생존의 지멸이 아니라 정염과 고통의 지멸이다. 이는 인과계열의 초월이며, 자유와 자발성, 희열의 상태이다. 열반은 그러나 어떤 과정의 결과가 아니다. 그렇다면 그것도 또하나의 멸망하는 상태일 따름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진리이지만 〈우파니샤드〉에서 말하는 불멸의 실체는 아니다. 이 진리는 극단적인 무아, 사물의 무상, 자아의 공, 모든 사물의 무상에 대한 진리이다. 이 진리의 깨달음과 함께 무명은 없어지고, 모든 갈애·고·증오는 함께 사라진다(→ 불교).


  • 대승불교 : 용수와 공(空)의 철학
  • 대승불교의 시초는 비록 대중부(大衆部)·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경량부(經量部) 등의 여러 부파이지만, 철학적 토대를 부여한 자는 용수(龍樹 Ngrjuna)였다. 그에 따르면 개인도 공이며 법도 공이다. 그는 (nyat)의 개념을 확장해서 모든 개념과 실체를 포괄했다. '공'이란 연기론에로의 종속과 무자성(無自性)을 의미한다. 용수는 공의 도리로 제한된 것과 무제한의 것, 주관과 객관, 상대적인 것과 절대적인 것, 윤회와 열반 사이에 존재하는 이분법을 거부하면서, 존재론적 일원론에 도달했다. 그러면서 그는 진제와 속제라는 2개의 진리질서를 주장하면서 인식론적인 이원론을 지지했다. 유일의 실재는 불가설(不可設)이다. 용수는 철학자들이 실재를 이해하기 위해서 동원했던 주요철학범주들을 비판하고 이들 모두가 자기모순에 빠져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들 가운데는 관계, 부분적 동일성과 차이성, 인과, 변화, 자아, 지식, 보편자, 그리고 적당한 지식수단(prama) 등의 개념들이 포함되어 있다. 용수의 철학은 중관철학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것은 중도를 따른다는 의미인데, 중도란 '실재는 영원하다'는 주장과 '실재는 변화한다'와 같은 상반된 두 주장의 종합이 아니라, 두 주장 모두가 공이며 오류임을 보이는 데 있다. '실재는 영원하기도 하며 변화하기도 한다'는 주장은 또하나의 형이상학적 언명이며, '실제는 영원하지도 변화하지도 않는다'는 정반대의 주장이 전자보다는 고차원적이긴 하지만 여전히 하나의 형이상학적 견해(di)에 불과하다. 용수에게는 일체의 형이상학적 견해는 잘못이다. 용수는 이성의 비판을 위해서 이성을 사용했다. 논리의 용법을 이처럼 프라상가로 알려진 부정적이며 간접적인 방법에 국한시킨 그의 제자들은 귀류논증파(歸謬論證派 prsagika)로 알려졌으며, 성천(聖天 ryadeva)·불호(佛護)·월칭(月稱 Candrakrti) 등이 여기에 속한다. 그러나 청변(淸弁) 등은 직접적 논증의 방법을 따르며, 자재논증파(自在論證派)로 불린다. 용수와 더불어 불교논리학은 자신의 특성을 확립하고, 그무렵 유식학파가 중관학파에서 분리되어 나간다.


  • 세친·무착
  • 무착(無着 Asaga)에 의해서 유식으로 돌아선 세친(世親 Vasubandhu)은 〈유식론 Vijñpti mtrta Siddhi〉을 저술하여 이른바 외적 대상은 단지 정신적 관념에 불과하다는 주장을 옹호했다. 유식학파의 관념론은 경량부의 표상론의 논리적 발전이다. 외계의 존재가 단지 추론되었다는 생각은 만족스럽지 못하기 때문이다. 만일 의식이 자기조명적(svapraksa)이고 형상을 지닌다면, 이른바 외적 대상에 속한다고 여겨지는 형상을 의식의 형상으로 주장하는 것이 보다 논리적이라는 것이다. 여기에 또하나의 다른 관념, 즉 의식이 형상을 취하고 이를 외화(外化)하려는 경향성을 설명해주는 무시(無始)의 힘이란 관념이 필요하다. 이것이 바로 상상력(kalpan)이다. 유식은 전통적인 6식(六識)에 말라식(末那識 manas)과 장식(藏識 laya-vijñna)이라는 의식양상을 부가한 것이다. 장식은 청결하고 불결한 과거경험의 종자를 간직하고 있다. 잠재의식이나 무의식의 초기형태라고 볼 수 있는 이러한 의식양상들은 개인적 경험의 질서를 설명하기 위한 이론적 구조물이다. 그렇지만 일상적 세계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유식파의 주요난제로 남아 있다. 열반의 상태는 장식이 그 종자와 함께 없어지는 상태(layaparvtti)인 것이다. 개인적 관념들은 결국 단순한 상상에 불과하며, 의식은 그 본성상 주관과 객관의 구별이 없다. 이 불가설의 의식이 만물의 근본이 되는 여시(如始 tathat)이다. 장식도 여시도 실체적인 것으로 여겨지지는 않는다. 세친과 무착은 불교논리학의 발전에도 책임이 있다. 세친은 '지각'을 대상에 의해서 야기된 지식으로 정의했으나 이것은 5세기의 논리학자 진나에 의해서 세친 초기의 실재론적 시기에 속한 것으로 거부당했다. 세친은 또한 추론을 특성을 통해서 대상을 아는 것으로 정의했으나, 8세기의 다르마못타라는 이것이 추론의 본질에 대한 정의가 아니라 그것의 생성기원일 따름이라고 했다.


  • 진나·법칭
  • 진나(陳那 Dignga)의 〈양집성론(量集成論) Pramasamuccaya〉은 불교논리학의 가장 위대한 저서 중의 하나이다. 진나는 지각을 '이름이나 류(類)개념을 포함한 모든 개념적 구성물에서 자유로운 지식'으로 새롭게 정의했다. 그에게는 순수지각만이 지각이다. 추론에서는 그는 위자비량(爲自比量)·위타비량(爲他比量)으로 나누고, 정당한 증인(證因 hetu)의 3조건을 제시했다. 주장의 주제(paka)에 대한 속성일 것, 동례군(同例群 sapaka)에만 존재할 것, 이례군(異例群 vipaka)에는 결코 존재하지 않을 것이 그것들이다. 진나는 그의 〈헤투 차크라〉('因의 輪')에서 증인을 9가지 유형으로 나누고, 올바른 이유(正因), 잘못된 이유(相違似因), 진위부정의 이유(不正似因)로 분류했다. 진나의 전통은 7세기의 법칭(法稱 Dharmakrti)에 의해서 더욱 발전되었는데, 법칭은 지각에 대한 진나의 정의를 수정하여 '무착란'(abrnta)이라는 규정을 첨가했다. 그리고 〈정리일적(正理一滴) Nyyabindu〉에서 지각을 감관지, 마음에 의한 지각(manovijñana), 자증지(自證知), 요긴에 의한 지각 등 4가지로 구분하고 있다. 법칭은 또한 타당한 추리근거로서 본질적 속성(syabhva), 결과(krya), 비인식(anupalabdhi)의 3가지를 제시했다. 법칭은, 지각의 대상은 순수개별자, 추론의 대상은 보편자라는 사실을 불교인식론의 중심적 이론으로 확립했다. 진나와 법칭은 완화된 형태의 관념론을 대변하고 있다.


    [현대철학]

    인도의 현대철학은 서양철학과의 만남을 통해 전통적 인도철학의 현대적 재해석을 시도하고 있다. 대표적 철학자로서 오로 빈도라다크리슈난이 널리 알려져 있다. 오로 빈도 고스(1872~1950)는 진화의 개념을 받아들이고 현상 세계의 실재를 긍정함으로써 인류의 영적 진화를 중심으로 베단타 철학의 독창적 재해석을 시도했다. 사르베팔리 라다크리슈난(1888~1975)은 전통적으로 종교적 다원성을 수용해온 힌두교의 포용적 태도를 바탕으로 하는 종교철학을 전개하여 오늘날 종교간의 대화와 이해가 진전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는 종교를 외적 표현과 체험으로 나누어 교리·신학·제도·의례 등 종교의 외적 표현은 종교들마다 서로 많은 차이를 보이지만, 모든 언어적 표현과 논리를 초월하는 내적 체험은 모든 종교에서 근본적으로 일치한다고 했으며, 내적인 체험과 외적인 표현을 각각 종교의 영혼과 육체라고 하여 종교의 핵심이 내적인 체험에 있음을 강조했다.

    J. N. Mohanty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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