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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과 범어

신숙주와 훈민정음

신숙주와 훈민정음 (원문 가독성 개선본)

1. 들머리: 훈민정음 창제와 집현전 8학사

문화관광부가 한글 반포 556돌에 맞추어 올해(2002) 10월의 문화 인물로 신숙주(申叔舟)를 선정함에 따라 국립국어연구원에서 필자에게 맡긴 글의 제목이 「신숙주와 훈민정음」이다.

주지한 바와 같이 『훈민정음』(해례본:1446)의 정인지 서문에 의하면 “계해년(음 1443) 겨울에 우리 전하(세종대왕)께서 정음 28자를 창제하시어 간략히 예의(例義)를 지어 보이시고 이를 '훈민정음'이라 이름 지으셨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새 문자에 대해 자세히 해석을 가하여 여러 사람들을 가르치라는 왕명에 따라 저술한 이 책의 서문에 당시 참여했던 집현전 학사들의 이름이 나온다.

  • 예조판서로서 주관자라 할 수 있는 정인지(1396~1478)
  • 집현전 응교 최항(1409~1474)
  • 부교리 박팽년(1417~1456)
  • 부교리 신숙주(1417~1475)
  • 수찬 성삼문(1418~1456)
  • 돈녕부 주부 강희안(1418~1465)
  • 행집현전 부수찬 이개(1417~1456)
  • 행집현전 부수찬 이선로(?~1453)

신숙주는 이 중의 한 인물인데 훈민정음과 관련하여 유독 이 분만을 들추는 점에 대하여 의아하게 생각될지 모르지만, 후술할 내용에서 위 주제의 타당성이 어느 정도 밝혀질 것이다.

2. 세종대왕의 4대 어문 대업과 표음문자의 필요성

정인지의 말대로 세종대왕(1419~1450 재위)은 하늘이 내신 성인으로서 베푸신 정치 업적이 모든 왕보다 뛰어나셨지만, 어문 정책의 성과에만 한정한다면 다음 네 가지를 들 수 있다.

  1. 한글의 창제와 『훈민정음(해례본)』(1446)의 간행
  2. 당시의 조선 한자음을 중국 운서에 준거하여 규범음으로 개신한 『동국정운』(1448)의 간행
  3. 중국어 학습을 위해 한글로써 중국의 표준 자음을 표기할 목적으로 편찬에 착수한 『홍무정운역훈』(1445~1455)과 『사성통고』의 간행
  4. 인근 여러 민족어의 학습을 위한 4학(한·몽·여진·왜학)의 장려
  5.  

이 네 가지 사업은 서로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 한글 창제의 동기와 목적이 우선 어리석은 백성들의 문자 생활을 쉽게 해 주려는 데 있었음을 인정하더라도,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특히 『동국정운』 편찬과 중국어 표음 사업을 해결하기 위해 표음 문자의 필요성이 절실하였던 사실도 간과할 수 없다.

그리하여 한글은 순수한 우리말 표기, 개정할 조선 한자음의 완전한 표기, 외국 어음의 정확한 표기 등을 동시에 충족시켜 주어야 할 문자였다고 보아야 한다. 이 점은 한글의 창제와 더불어 위 사업들이 동시에 진행되었던 사실에서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신숙주는 위의 세 가지 대업에 모두 참여하였을 뿐 아니라 특히 『동국정운』과 『홍무정운역훈』에 주무자로서의 역할을 맡은 인물이다.

3. 음운학에 밝은 세종과 신숙주: '성운'은 도를 배우는 시초

한글 창제에 절대적 영향을 끼친 중국 학술로는 두 가지를 지적할 수 있다. 하나는 당시 유일한 동양 언어학의 한 분야인 중국 음운학이요, 또 하나는 철학적 이론의 배경이 된 송대의 성리학이다. 우선 『훈민정음』의 내용만 보아도 이 두 가지 학술적 이론을 섭렵하지 않고는 가위 접근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특히 세종은 물론 신숙주를 비롯한 당시 학자들이 만약 음운학의 이해가 없었더라면 과연 한글과 같은 정연한 체계의 문자가 창제될 수 있었을까 의심하여도 무리는 아니라고 본다.

우선 세종이 음운학에 조예가 깊었던 사실은 도처에서 확인된다. 신숙주가 『홍무정운역훈』 서문에서 *“우리 세종 장헌대왕께서는 음운학에 뜻을 두시어 깊이 연구하시고 훈민정음 약간 자를 창제하시니 사방 만물의 소리가 전할 수 없는 것이 없게 되었다”*라고 한 말이나, 1444년 2월에 최만리 등이 올린 「언문창제 반대 상소문」에 대하여 세종이 일일이 반박한 말 가운데 *“또 그대가 운서를 아는가? 사성과 칠음을 알며, 자모가 몇인지 아는가? 만일 내가 저 운서를 바로잡지 않는다면 그 누가 장차 이를 바로잡을 것인가?”*라고 당당하게 힐문한 말에서도 세종의 음운학에 대한 자신감이 엿보인다.

그러면 어찌하여 세종은 한자음 또는 운서에 관심이 깊었을까. 여기에서 우리는 세종의 언어 사상의 일면을 짚어볼 필요가 있다. 그 직접적인 동기는 신숙주가 『동국정운』 서문에서 대변하고 있다.

“문자가 이루어지기 이전에는 성인의 도가 서적에 기록되지 못하고 천지에 발붙이고 있었으나, 문자가 만들어진 다음에는 성인의 도가 여러 서책에 실리게 되었다. 그래서 성인의 도를 구하려면 먼저 글의 뜻(文義)을 알아야 하고, 글의 뜻을 잘 알려면 문자의 성운으로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성운이란 도를 배우는 시초이다(聲韻學道之權輿也)

 

이 말은 곧 「聲韻(성운) → 文義(문의) → 聖人의 道(성인의 도)」의 순서가 된다. 즉, 세종은 중국의 한자가 혹은 자획이 와전되고, 혹은 성운과 사성이 변하여 가르치는 선생도 왕왕 옳은 음을 모르고 사사로이 음을 바꾸어 자제를 가르치는 현실을 직시하였다. 이를 바로잡지 않으면 해가 거듭할수록 심해져서 장차는 구제할 수 없는 폐가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따라서 성운을 알아야 할 필연적인 이유는 결국 음운학이야말로 공맹(孔孟)의 이상인 성인의 도를 배우기 위한 단초적 수단이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역시 신숙주가 『동국정운』 서에서 *“우리 주상 전하께서는 유학을 숭상하고 도를 중히 여겨 우문을 흥화하는 일에 전력을 기울이지 않은 곳이 없다. 속음을 정음으로 환원하고 구습을 바로잡도록 혁신하셨다”*라고 지적한 대목에도 잘 나타나 있다. 이는 물론 『동국정운』 편찬의 의도를 강변한 것이지만 어쨌든 이러한 과업은 중국 음운학에 대한 조예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한편 통치자의 입장에서 보면 역시 『동국정운』 서의 다음 말을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성을 알아야 음을 알고, 음을 살펴야 음악을 알며, 음악을 살펴야 정사를 알게 된다(審聲以知音 審音以知樂 審樂以知政)”

 

이 말을 한글과 관련지으면 「한글 → 審聲 → 知音 → 知樂 → 知政」에서 보는 바와 같이 한글의 창제는 정치의 도에까지 이어진 것임을 간파할 수 있다. 『동국정운』의 서문은 비록 신숙주가 집필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 내용에는 작성자뿐 아니라 세종의 언어·문자관이 함축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신숙주 역시 음운학에 조예가 깊었음은 뒤에서 차츰 밝혀질 것이다.

4. 신숙주의 조선 한자음에 대한 판단과 23자모 체계

중국에서는 특히 7세기를 전후하여 음운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여러 음운서가 봉출하였는데 현재 우리가 접할 수 있는 가장 오래된 운서는 『절운』(601)이다. 그 후로 당대에는 『당운』(751)이, 송대에는 『광운』(1008)이 간행되었다. 이를 이른바 '절운계 운서'라고 한다. 그 이후로도 왕조에 따라 대표적인 운서가 편찬되었으니 원대에는 유연의 『임자신간예부운략』(1252)과 웅충의 『고금운회거요』(1297)가, 명대에는 『홍무정운』(1375)이 간행되었다.

또 송대에는 등운학(等韻學)이 성하여 『절운지장도』와 같은 등운서가 출현하였다. 여기에서는 한자음의 성모가 발음되는 위치에 따라 7음을 분류한 다음 36자모를 선정하고 각 성모(聲母)의 변별적 자질인 청탁(淸濁)의 체계를 확립하였다. 그리고 운모(韻母)에 대해서는 먼저 사성을 구분한 다음 운두의 종류와 유무에 따라 개구음과 합구음으로 양분하고, 또 운두와 주모음(핵모음)의 성질에 따라 1등운~4등운을 구별하여 각 한자음의 변별성을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등운도(일종의 sound table)를 작성하였던 것이다.

 

신숙주가 이상의 운서와 등운도를 비롯하여 중국 음운학에 대한 조예가 매우 깊었던 증거는 그가 집필한 『동국정운』 서문과 『홍무정운역훈』 서문은 물론, 최세진의 『사성통해』(1517)에 수록된 『사성통고』 범례 등을 정독하여 보면 곧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세종 당시에 우리 한자음의 실상은 어떠하였던가. 신숙주는 『동국정운』 서문에서 당시에 전승된 조선 한자음의 특징을 빚어낸 변인을 매우 극명하게 지적하였다. 즉, 어리석은 스승이나 선비들이 (1) 반절법을 모르고 (2) 자모와 운모의 분류 방식도 몰라서 (3) 혹은 자형이 비슷하여 한 음으로 하고 (4) 혹은 선왕의 휘자를 피하여 다른 음을 빌리며 (5) 혹은 두 글자를 합하여 하나로 하고 (6) 혹은 한 음을 둘로 나누며 (7) 혹은 다른 글자를 빌리고 (8) 혹은 점이나 획을 가감하며 (9) 혹은 중국 한음에 기대기도 하며 (10) 혹은 우리말 음을 따라서 (11) 자모와 칠음, 청탁과 사성이 모두 변하였다고 보았다.

이상 11가지 변인 중 특히 (11)의 실상을 중국 운서음과 비교 귀납하여 해설하면 다음과 같다.

  • 원래 중국 한음에서 무성유기음$[k'-]$으로 발음되던 자음이 우리 한자음에서는 대부분 무성무기음$[k-]$으로 발음되고 있다.
  • 원래 중국 한음에서 $[k'-]$로 발음되던 자음이 더러는 $[h-]$음으로 발음되는 것도 있다.
  • 우리말에서는 $[k'-]$음이 많이 쓰이는데 조선한자음에는 오직 '쾌'자가 있을 뿐이다.
  • 설두음과 설상음의 구별이 없다.
  • 순중음과 순경음의 구별이 없다.
  • 치두음과 정치음의 구별이 없다.
  • 우리 한자음에는 전탁음(된소리성 격음)이 없다.

이상의 사항들은 세종 당시까지 우리나라의 전래 한자음이 지닌 성모의 특징을 명확히 꿰뚫어 본 것이다. 특히 설두·설상음, 순중·순경음, 치두·정치음 같은 차이들은 당시 국어 음운 체계에서도 비변별적(non-distinctive)이었으므로, 신숙주는 *“우리나라 한자음에서는 구별할 수 없으니 역시 마땅히 자연스러움을 바탕으로 할 것이지 어찌 반드시 36자모에 얽매일 필요가 있겠는가?”*라고 언명하였다.

이 대목은 그가 개별 언어의 음운에 얼마나 밝았는가를 알게 한다. 이에 따라 『동국정운』에서는 중고한음의 36자모를 통합하여 조선 실정에 맞는 '23개 자모'를 책정하였던 것이다.

5. 신숙주의 중국어음 표기와 역경(譯經) 사업의 고난

5.1. 요동의 왕래와 중국어 음운 질정

한글 창제와 더불어 시작한 『동국정운』의 편찬 사업은 세종 29년(1447)에 완료되어 그 이듬해에 간행되었지만, 세종은 조선 한자음뿐 아니라 명나라와의 외교를 원만히 수행할 뜻에서 중국어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다. 이에 한글로써 중국어음을 정확히 표음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가지고 텍스트로 선정한 운서가 곧 명 태조의 흠정 운서인 『홍무정운』(1375)이었다.

세종은 이 책을 최고의 권위서로 인정하여 이 운서의 자음을 신숙주·성삼문 등에게 명하여 한글로 주음(소리 적기)토록 하였던 것이다. 이에 따라 신숙주 등은 『홍무정운』의 반절을 귀납하여 31자모를 밝혀내고 4성을 포함한 76운 체계의 소운자(小韻字)를 한글로 표음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렇게 하여 나오게 된 책이 『홍무정운역훈』이다.

신숙주는 이 역훈 사업에 주무자 역할을 하였는데, 그가 집필한 서문을 보면 다음과 같은 열정과 고난의 역정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어음이 이미 다르고 와전이 심하여 이에 (세종이) 신등에게 명하기를 '중국 선생이나 학사들에게 물어보아 바로잡도록 하라' 하시기에 왕래가 7, 8회(행장에는 13회)에 이르렀고 물어본 사람이 몇 사람이나 된다. 중국의 수도인 연경은 만국이 회동하는 곳으로서, 먼 길을 오갈 때에 일찍이 교섭하여 밝혀 보려고 한 사람이 적지 않고, 변방이나 이역의 사신과 평민에 이르기까지 접해 보지 않은 사람이 없다. 이리하여 정속과 이동의 변화를 다 밝히려고 하였다.”

 

이 사실은 『세종실록』 및 강희맹이 찬한 「문충공행장」의 기록과도 정확히 부합한다. 을축년(1445) 봄에 때마침 죄를 지어 요동에 유배되어 있던 명나라 한림학사 황찬(黃瓚)을 찾아가 음운을 질문할 때, 신숙주가 한글(언문)로 중국어음을 옮겨 적으며 물음에 따라 민첩하게 해석하고 추호도 틀림이 없으므로 황찬이 매우 신기하게 여겼다고 전한다.

또한 1450년 명나라 사신 예겸과 사마순이 왔을 때도 성삼문과 신숙주가 『홍무정운』을 강론하며 정음을 질정받았다. 신숙주는 *“원고를 10여 차례나 반복하여 애써 고쳐 마침내 8년의 긴 세월 만에 바르게 되었다”*고 토로했다.

이처럼 각고면려한 신숙주의 업적은 까다로운 반절법이나 등운도를 살피지 않고도 직접 정확한 한자 소리를 읽을 수 있도록 함으로써, 표음 문자인 한글의 우수성을 외국어 표기에까지 종횡으로 십분 발휘하게 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만하다. 강희맹이 *“대왕께서 언문 자모 28자를 만드시고 서적을 편찬할 때 신숙주 공이 실지로 대왕의 속마음을 받들었다”*라고 찬사를 적은 것도 이 때문이다.

5.2. 중국어 현실음을 반영한 31성모 체계의 확립

『홍무정운』은 전통적인 운서 체계와 정리를 보여주지만 성모에 대해서는 명시하지 않았다. 이에 신숙주는 서문에서 *“7음은 36자모이지만 설상음 4모와 순경음의 차청 1모는 세상에 실제 발음되지 않은 지 이미 오래되었으니 억지로 옛 자모 체계에 사로잡혀서는 안 된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중고한어의 성모 중 당시 중국 실제 현실음에서 이미 다른 음으로 흡수·통합된 성모들을 과감히 제외하고 '31개 성모'를 추출해 내는 탁월한 어학적 성과를 거두었다.

특히 주목할 사실은 우리말이나 『동국정운』 표기 체계와는 달리, 중국어의 치두음(잇몸소리)과 정치음(혓날소리)을 명확히 구별하여 표음하기 위해 한글 자형을 변형한 두 종류의 글자 부호를 새로 창안했다는 점이다. 이 글자들은 이후 『사성통해』, 『노걸대』, 『박통사』 등 중국어 학습 교재의 주음에 그대로 이용되었으며, 신숙주 등의 한글 응용 공헌도를 잘 보여준다.

5.3. 창의적인 입성자음(받침 소리)의 처리

또 하나 지적할 것은 『홍무정운역훈』에서 입성자음(받침소리)을 처리한 태도이다. 당시 중국 북방어에서 입성 운미 $[-k, -t, -p]$는 이미 소멸되어 평·상·거성으로 변해있었으나, 『홍무정운』 책법에는 이 변화가 반영되지 않고 남아있었다.

신숙주는 당시의 실제 북방어 현실 속음을 고려하여, 입성 운미의 흔적이나 미세한 발음 차이를 표현하기 위해 한글의 후음 전청 문자인 'ㆆ(여린히읗)' 등을 종성으로 대용하여 속음을 표시하는 놀라운 창의성을 보여주었다. 신숙주의 관찰로는 당시에 이미 입성음이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며 본래의 성조와는 발음상 차이가 있는 상태(성문파열음 $[?]$ 등)로 파악한 듯하다. 음운론적 관점에서도 이 표음 방법은 매우 타당하고 정밀한 것이었다.

6. 맺음말: 신숙주와 훈민정음의 청출어람

세상에는 제아무리 훌륭한 발명품이라도 그것을 유용하게 사용하고 응용할 줄 모르면 가치를 발휘하지 못하는 법이다. 정인지가 서문에서 언급한 대로 한글 28자는 전환이 무궁하고 간단요긴하여 지혜로운 사람은 아침 나절에, 어리석은 이라도 열흘이면 배울 수 있으며 자연의 모든 소리까지 못 적을 것이 없다. 세종이 창제한 한글은 세계 문자사에 길이 남을 문자임에 틀림없다.

그렇지만 한글은 우연히 창제된 것이 아니며, 세종과 같은 호학군주와 그를 따른 학자들의 헌신적인 노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근본적으로는 세종과 신숙주를 비롯한 학자들이 중국 음운학에 조예가 깊었기 때문에 이 도약이 가능했다.

신숙주는 『용비어천가』 저술을 통해 우리말 표기에 공헌했을 뿐만 아니라, 『훈민정음(해례본)』 편찬에서는 제자(글자 만들기)의 음운학적 이론을 단단히 뒷받침했다. 게다가 『동국정운』과 『홍무정운역훈』이 완성되기까지 실무 주무자 역할을 전담하며 한글이 표음 문자로서 지닌 독보적인 우수성을 종횡으로 십분 발휘하는 데 이바지하였다. 이런 점에서 신숙주와 훈민정음은 뗄 수 없는 위대한 청출어람의 관계에 있으며, 그의 어학적 업적은 역사적으로 재조명받아 마땅하다.

 

 


[특집·신숙주의 학문과 인간] 신숙주와 훈민정음 (이돈주) 

1. 들머리

문화관광부가 한글 반포 556돌에 맞추어 올해(2002) 10월의 문화 인물로 신숙주(申叔舟)를 선정함에 따라 국립국어연구원에서 필자에게 맡긴 글의 제목이 「신숙주와 훈민정음」이다. 주지한 바와 같이 『훈민정음』(해례본:1446)의 정인지 서문에 의하면 “계해년(음 1443) 겨울에 우리 전하(세종대왕)께서 정음 28자를 창제하시어 간략히 예의(例義)를 지어 보이시고 이를 '훈민정음'이라 이름 지으셨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새 문자에 대해 자세히 해석을 가하여 여러 사람들을 가르치라는 왕명에 따라 저술한 이 책의 서문에 당시 참여했던 집현전 학사들의 이름이 나오는데, 곧 예조판서로서 주관자라 할 수 있는 정인지(1396~1478)를 비롯하여 집현전 응교 최항(1409~1474), 부교리 박팽년(1417~1456), 신숙주(1417~1475), 수찬 성삼문(1418~1456), 돈녕부 주부 강희안(1418~1465), 행집현전 부수찬 이개(1417~1456), 이선로(?~1453) 등 8인이다. 신숙주는 이 중의 한 인물인데 훈민정음과 관련하여 유독 이 분만을 들추는 점에 대하여 의아하게 생각될지 모르지만 후술할 내용에서 위 주제의 타당성이 어느 정도 밝혀질 것이다.

정인지의 말대로 세종대왕(1419~1450 재위)은 하늘이 내신 성인으로서 베푸신 정치 업적이 모든 왕보다 뛰어나셨지만 어문 정책의 성과에만 한정한다면 (1) 한글의 창제와 『훈정』 (1446)의 간행, (2) 당시의 조선 한자음을 중국 운서에 준거하여 규범음으로 개신한 『동국정운』 (1448: 이하 『동운』으로 약칭함)의 간행, (3) 중국어 학습을 위해 한글로써 중국의 표준 자음을 표기[諺譯]할 목적으로 편찬에 착수한 『홍무정운역훈』 (1445~1455: 이하 『역훈』으로 약칭함)과 『사성통고』의 간행 (4) 인근 여러 민족어의 학습을 위한 4학(한·몽·여진·왜학)의 장려 등을 들 수 있다. 이 네 가지 사업은 서로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 한글 창제의 동기와 목적이 우선 어리석은 백성들의 문자 생활을 쉽게 해 주려는 데 있었음을 인정하더라도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특히 2), 3)을 해결하기 위해 표음 문자의 필요성이 절실하였던 사실도 간과할 수 없다. 그리하여 한글은 순수한 우리말 표기, 개정할 조선 한자음의 완전한 표기, 외국 어음의 정확한 표기 등을 동시에 충족시켜 주어야 할 문자였다고 보아야 한다. 이 점은 한글의 창제와 더불어 위 사업들이 동시에 진행되었던 사실에서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신숙주는 위의 세 가지 대업에 모두 참여하였을 뿐 아니라 특히 (2)와 (3)에 주무자로서의 역할을 맡은 인물이다.

 

2. 음운학에 밝은 세종과 신숙주

한글 창제에 절대적 영향을 끼친 중국 학술로는 두 가지를 지적할 수 있다. 하나는 당시 유일한 동양 언어학의 한 분야인 중국 음운학이요, 또 하나는 철학적 이론의 배경이 된 송대의 성리학이다. 우선 『훈정』의 내용만 보아도 이 두 가지 학술적 이론을 섭렵하지 않고는 가위 접근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특히 세종은 물론 신숙주를 비롯한 당시 학자들이 만약 음운학의 이해가 없었더라면 과연 한글과 같은 정연한 체계의 문자가 창제될 수 있었을까? 의심하여도 무리는 아니라고 본다.

우선 세종이 음운학에 조예가 깊었던 사실은 도처에서 감지, 확인된다. 신숙주가 『역훈』 서문에서 “우리 세종 장헌대왕께서는 (음)운학에 뜻을 두시어 깊이 연구하시고 훈민정음 약간 자를 창제하시니 사방 만물의 소리가 전할 수 없는 것이 없게 되었다."라고 한 말이나, 또는 1444년 2월에 최만리 등이 올린 「언문창제 반대 상소문」에 대하여 세종이 일일이 반박한 말 가운데 "또 그대가 운서를 아는가? 사성과 칠음을 알며, 자모가 몇인지 아는가? 만일 내가 저 운서를 바로잡지 않는다면 그 누가 장차 이를 바로잡을 것인가?"라고 당당하게 힐문한 말에서도 세종의 음운학에 대한 자신감이 엿보인다.

그러면 어찌하여 세종은 한자음 또는 운서에 관심이 깊었을까. 여기에서 우리는 세종의 언어 사상의 일면을 짚어볼 필요가 있다. 그 직접적인 동기는 신숙주가 『동운』서에서 대변하고 있다. 즉, "문자가 이루어지기 이전에는 성인의 도가 서적에 기록되지 못하고 천지에 발 붙이고 있었으나 문자가 만들어진 다음에는 성인의 도가 여러 서책에 실리게 되었다. 그래서 성인의 도를 구하려면 먼저 (성인이 쓴) 글의 뜻(文義)을 알아야 하고, 글의 뜻을 잘 알려면 (문자의) 성운으로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성운이란 도를 배우는 시초이다".

이 말은 곧 「聲韻 → 文義 → 聖人의 道」의 순서가 된다. 즉, 세종은 중국의 한자가 혹은 자획이 와전되고, 혹은 성운과 사성이 변하여 가르치는 선생도 왕왕 옳은 음을 모르고 사사로이 음을 바꾸어 자제를 가르치는 현실을 직시하고 이를 바로잡지 않으면 해가 거듭할수록 심해져서 장차는 구제할 수 없는 폐가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따라서 성운을 알아야 할 필연적인 이유는 결국 음운학이야말로 공맹(孔孟)의 이상인 성인의 도를 배우기 위한 단초적 수단이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역시 신숙주가 『동운』 서에서 "우리 주상 전하께서는 유학을 숭상하고 도를 중히 여겨 우문을 흥화하는 일에 전력을 기울이지 않은 곳이 없다....... 속음을 정음으로 환원하고 구습을 바로잡도록 혁신하셨다."라고 지적한 대목에도 잘 나타나 있다. 이는 물론 『동운』 편찬의 의도를 강변한 것이지만 어쨌든 이러한 과업은 중국 음운학에 대한 조예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한편 통치자의 입장에서 보면 역시 『동운』 서의 다음 말을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성을 알아야 음을 알고, 음을 살펴야 음악을 알며, 음악을 살펴야 정사를 알게 된다(審聲以知音 審音以知樂 審樂以知政)". 이 말을 한글과 관련지으면 「한글 → 審聲 → 知音 → 知樂 → 知政」에서 보는 바와 같이 한글의 창제는 정치의 도에까지 이어진 것임을 간파할 수 있다. 『동운』의 서문은 비록 신숙주가 집필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 내용에는 작성자뿐 아니라 세종의 언어·문자관이 함축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신숙주 역시 음운학에 조예가 깊었음은 뒤에서 차츰 밝혀질 것이다.

 

3. 신숙주의 조선 한자음에 대한 판단

중국에서는 특히 7세기를 전후하여 음운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여러 음운서가 봉출하였는데 현재 우리가 접할 수 있는 가장 오래된 운서는 『절운』(601)이다. 그 후로 당(唐)대에는 『당운』(751)이, 송(宋)대에는 『광운』(1008)이 간행되었다. 이를 이른바 '절운계 운서'라고 한다. 그 이후로도 왕조에 따라 대표적인 운서가 편찬되었으니 원(元)대에는 유연의 『임자신간예부운략』(1252)과 웅충의 『고금운회거요』(1297)가, 명(明)대에는 『홍무정운』(1375)이 간행되었다. 또 송대에는 등운학(等韻學)이 성하여 『절운지장도』와 같은 등운서가 출현하였다. 여기에서는 한자음의 성모가 발음되는 위치에 따라 7음을 분류한 다음 36자모를 선정하고 각 성모(聲母)의 변별적 자질인 청탁의 체계를 확립하였다. 그리고 운모(韻母)에 대해서는 먼저 사성을 구분한 다음 운두의 종류와 유무에 따라 개구음과 합구음으로 양분하고 또 운두와 주모음(핵모음)의 성질에 따라 1등운~4등운을 구별하여 각 한자음의 변별성을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등운도(일종의 sound table)를 작성하였던 것이다.

신숙주가 이상의 운서와 등운도를 비롯하여 중국 음운학에 대한 조예가 매우 깊었던 증거를 여기에서 문증으로 다 제시할 지면이 없지만 그가 집필한 『동운』서와 『역훈』 서는 물론 최세진의 『사성통해』(1517)에 수록된 『사성통고』 범례 등을 정독하여 보면 곧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세종 당시에 우리 한자음의 실상은 어떠하였던가. 신숙주는 『동운』서문에서 당시에 전승된 조선 한자음의 특징을 빚어낸 변인을 매우 극명하게 지적하였다. 즉, 어리석은 스승이나 선비들이 (1) 반절법을 모르고 (2) 자모와 운모의 분류 방식도 몰라서 (3) 혹은 자형이 상사하여 한 음으로 하고 (4) 혹은 선왕의 휘자를 피하여 다른 음을 빌리며 (5) 혹은 두 글자를 합하여 하나로 하고 (6) 혹은 한 음을 둘로 나누며 (7) 혹은 다른 글자를 빌리고 (8) 혹은 점이나 획을 가감하며 (9) 혹은 중국 한음에 기대기도 하며 (10) 혹은 우리말 음을 따라서 (11) 자모와 칠음, 청탁와 사성이 모두 변하였다.

 

이상 11가지 변인 중 특히 (11)의 내용을 알기 쉽게 해설하면 다음과 같다. ① 원래 중국 한음에서 k'-로 발음되던 자음이 우리 한자음에서는 대부분 k-로 발음되고 있다(溪母之字多入於見母). ② 원래 중국 한음에서 [k'-]로 발음되던 자음이 더러는 [h-]음으로 발음되는 것도 있다(溪母之字或入於曉母). ③ 우리말에서는 [k'-]음이 많이 쓰이는데 조선한자음에는 오직 '쾌'자가 있을 뿐이다(國語多用溪母而字音則獨快之一音而已). ④ 설두음과 설상음의 구별이 없다. ⑤ 순중음과 순경음의 구별이 없다. ⑥ 치두음과 정치음의 구별이 없다(如舌頭舌上 唇重唇輕 齒頭正齒之類 於我國字音未可分辨). ⑦ 우리 한자음에는 전탁음이 없다(於字音無濁聲).

이상의 사항들은 세종 당시까지 우리 나라의 전래 한자음이 지닌 성모의 특징을 중국 운서음과 비교 귀납한 것으로 특히 4~6은 한·중어 간에 존재한 음소 목록의 차이를 명확히 꿰뚫어 본 것이다. 그러므로 성모에 관한 한 전래 조선한자음 중에 ①~③항과 ⑦항에 해당한 자음들이 크게 개정되었음을 볼 수 있다. 그리하여 ④~6은 당시의 국어 음운 체계에서도 비변별적(non-distinctive)이었으므로 『동운』에서는 중고한음의 36자모를 통합하여 23개 자모를 책정하였던 것이다.

 

4. 신숙주의 중국어음 표기

4.1. 요동의 왕래와 중국어 음운 질정

한글 창제와 더불어 시작한 『동운』의 편찬 사업은 세종 29년(1447)에 완료되어 그 이듬해에 간행되었지만 세종은 조선 한자음뿐 아니라 명나라와의 교린·외교를 원만히 수행할 뜻에서 중국어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이를 장려하기 위해 한글로써 중국어음을 표음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기 위해 텍스트로 선정한 운서가 곧 『홍무정운』(홍무 8년. 1375)이었다. 이 책은 명 태조가 국가의 언어적 통일을 꾀할 목적으로 명나라의 표준음을 제정코자 송렴 등에게 명하여 칙찬한 운서이다. 그런데 중국 한자음의 표준(규범)음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세종은 바로 명 태조의 흠정 운서인 이 책을 최고의 권위서로 인정하여 이 운서의 자음을 신숙주·성삼문 등에게 명하여 한글로 주음토록 하였던 것이다. 이에 따라 신숙주 등은 『홍무정운』의 반절을 귀납하여 31자모를 밝혀내고 운모음을 살펴서 평·상·거·입성의 4성을 포함한 76운 체계의 소운자(小韻字)를 한글로 표음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렇게 하여 나오게 된 책이 『역훈』이다.

신숙주는 이 역훈 사업에 주무자 역할을 하였는데, 그가 집필한 『역훈』의 서문(1445. 음 4월 16일)을 보면 다음과 같은 열정과 고난의 역정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어음이 이미 다르고 와전이 심하여 이에 (세종이) 신등에게 명하기를 '중국 선생이나 학사들에게 물어보아 바로잡도록 하라' 하시기에 왕래가 7, 8회에 이르렀고 물어 본 사람이 몇 사람이나 된다. 중국의 수도인 연경은 만국이 회동하는 곳으로서, 먼 길을 오갈 때에 일찍이 교섭하여 밝혀 보려고 한 사람이 적지 않고, 변방이나 이역의 사신과 평민에 이르기까지 접해 보지 않은 사람이 없다. 이리하여 정속과 이동의 변화를 다 밝히려고 하였다."

위 서문의 내용은 ① 『세종실록』(1445년 정월조)에 “신숙주, 성삼문, 손수산 3인을 요동에 보내 운서를 질문하게 했다"라는 기사나, ② 강희맹이 찬한 「문충공행장」에서 우리나라 어음은 와전되고 정운(正韻)이 실전하였는데 을축년(1445) 봄에 때마침 죄를 지어 요동에 유배된 한림학사 황찬(黃瓚)을 찾아가 음운을 질문하고, 한글로 중국어음을 옮기는데, 물음에 따라 민첩하게 해석하며 추호도 틀림이 없으므로 황찬이 매우 신기하게 여겼는바, 요동에 왕래함이 무릇 13번이었다는 기록, ③ 『세종실록』(1450년 윤정월조)에 명나라 사신 예겸(倪謙)과 사마순(司馬恂)의 내조를 맞아 성삼문과 신숙주가 정음을 질정하고 『홍무정운』의 강론을 받았다는 기사와도 부합된다.

이렇게 요동을 오가며 황찬 등에게 음운을 질정하였던 까닭은 당시 외국어로서의 중국어음을 한글로 표음하는 일이 예상했던 것보다 어려웠기 때문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신숙주가 『역훈』 서문에서 “또 중국 사신이 우리나라에 왔을 때 유학자이면 정확한 것을 취하여 무릇 원고를 10여 차례나 반복하여 애써 고쳐 마침내 8년의 긴 세월 만에 바르게 되어 결함이 없음을 의심하지 않게 되었다."라고 토로한 말도 그 어려웠던 과정을 밝힌 것으로 이해된다.

이처럼 각고면려한 신숙주의 업적은 한글이 다만 우리말의 표기뿐만 아니라 조선 한자음과 중국 어음까지를 동시에 표음해 줌으로써 식자들이 까다로운 반절법이나 등운도 등을 살피지 않고도 직접 정확한 자음을 읽을 수 있도록 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만하다. 다시 말하면 표음 문자인 한글의 우수성을 종횡으로 십분 발휘하는 데 이바지하였다는 뜻이다. 강희맹이 위의 「문충공행장」에서 "세종대왕께서는 우리나라의 음운이 중국어와 비록 다를지언정 아·설·순·치·후음, 청탁·고하는 미상불 중국과 마찬가지로 다 갖추어 있어야 되고, 열국은 다 자국 어음을 나타낼 수 있는 글자가 있어 제 언어를 적는데, 유독 우리나라만이 글자가 없다고 하시어 대왕께서 언문 자모 28자를 만으시고 궁중 안에 기관을 설치하여 문신을 뽑아 언문 관계 서적을 편찬할 때 공(신숙주)이 실지로 대왕의 속마음을 받들었다(公實承睿裁).”라고 찬사를 적은 것도 무리가 아니다.

 

4.2. 성모 체계의 확립

『홍무정운』은 전통적인 『광운』의 206운과 달리 76운으로 통합한 것이 목록에 명시되어 있지만, 여타의 운서와 마찬가지로 성모에 대해서는 밝히지 않았다. 그런데 신숙주는 『역훈』 서문에서 "7음은 36자모이지만 설상음 4모와 순경음의 차청 1모는 세상에 쓰이지(즉 발음되지 않음) 않음이 이미 오래고, 또 선배가 이미 바꾼 것이 있으니 억지로 (36)자모를 존속시켜 옛 것에 사로잡혀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31개 성모를 추출한 것인데, 그 결과는 『사성통해』 서에 실린 '홍무정운삼십일자모지도'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31자모란 위에서 제시한 36자모에서 설상음에 속한 「知·澈·澄·娘」의 4성모와 순경음의 「敷」모를 뺀 수이다. 그 까닭은 당시 중국의 실제음에서 중고한어의 「知·徹·澄」 모는 이미 정치음인 「照·穿·牀」모에, 「娘」모는 치두음인 「泥」모에, 「敷」모는 「非」모에 흡수되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역훈』에서의 한글 주음은 31종의 성모가 쓰이게 되었다.

여기서 주목할 사실은 우리말이나 『동운』의 표기자와는 달리 중국어의 치두음과 정치음을 구별 표음하기 위하여 두 종류의 한글 글자(齒頭音·正齒音 용 부호)를 새로 창안하였다는 점이다. 두 성모의 차이점과 발음 방법에 대해서는 『역훈』에서 이 글자가 마련된 이래 『사성통해』나 『노걸대』 『박통사』 등 언해본의 중국어음 표시에도 그대로 이용되었음은 잘 아는 일이다. 여기에서도 신숙주 등의 한글에 대한 공을 간과할 수 없다.

 

4.3. 입성자음의 처리

또 하나 지적할 것은 『역훈』에서 입성자음을 처리한 태도이다. 주지한 대로 중국 북방어에서 입성 운미[-k, -t, -p]는 이미 주덕청의 『중원음운』(1324) 시기에도 소멸되어 평·상·거성으로 파입된 상태였다. 그런데 『홍무정운』에는 이러한 음운 변화가 전연 반영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신숙주는 당시의 북방음을 고려한 나머지 입성자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속음을 표시하는 창의성을 보여 주었다.

① 影 ·屋 烏谷切 俗音 우. 운내제자종성동. ② 照 ·짇 質 職日切 俗音 ·지. 운내제자종성동. ③ 匣 ·합 合 胡閤切 俗音 하. 운중제자종성동. ④ 喩 ·약 藥 弋灼切 俗音 ·야. 운내제자종성동.

위의 예에서 보는 바와 같이 입성 운미[-k, -t, -p]의 흔적을 한글의 후음 전청인 'ㆆ' 등으로 대용하거나 대용한 점이 주목된다. 그러면 과연 당시에 입성자들이 -k > -?, -t > -?, -p > -?의 단계처럼 발음되었는지, 아니면 실제의 독음에서는 소실되었지만 입성 운미의 흔적을 대용한 것인지는 단언하기 어렵다. 그러나 신숙주가 『사성통고』 서에서 “또 지금의 속음은 비록 종성을 쓰지 않더라도 평·상·거성의 느린 것과는 같지 않으므로 모든 운의 속음 종성은 후음의 전청인 「ㆆ」를 쓰고, 「藥」 운의 종성은 순경음의 전청인 「ㅸ」을 써서 이를 구별하였다"는 말에서 그의 관찰로는 당시에 이전의 입성음이 본래의 음성운과는 발음상 차이가 있는 것으로 파악한 듯하다. 필자는 전자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만약 이런 판단이 옳다면 신숙주를 비롯한 『역훈』 편찬자들의 관찰은 가위 정확하였고, 또 음운론적 관점에서도 그 표음 방법은 매우 타당한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5. 맺음말

세상에는 제아무리 훌륭한 발명품이라도 그것을 유용하게 사용하고 응용할 줄 모르면 가치를 발휘하지 못 하는 법이다. 정인지가 『훈정』 서문에서 언급한 대로 한글 28자는 전환이 무궁하고, 간단하고 요긴하며 정밀히 통하는 까닭에 지혜로운 사람은 하루 아침을 마치기도 전에 깨치고 어리석은 이라도 열흘이면 배울 수 있으며, 바람 소리, 학의 울음, 닭의 울음, 개 짖는 소리까지도 못 적을 것이 없다고 하였듯이 세종이 창제한 한글은 세계 문자사에 길이 남을 문자임에 틀림없다. 그렇지만 한글은 우연히 창제된 것이 아니고 세종과 같은 호학군주와 그를 따른 학자들의 헌신적인 노력과 협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지도 문다. 또한 근본적으로는 특히 세종과 신숙주를 비롯한 학자들이 중국 음운학에 조예가 깊었기 때문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신숙주는 『용비어천가』의 저술에도 참여하여 우리말 표기에 공헌하였음은 물론 『훈정』의 편찬에서는 제자의 음운학적 이론을 뒷받침했으리라고 믿는다. 게다가 『동운』과 『역훈』이 완성되기까지 주무자 역할을 맡은 그는 한글이 표음 문자로서 지닌 우수성을 십분 발휘하는 데 이바지하였다. 이런 점에서도 신숙주와 훈민정음은 뗄 수 없는 관계가 있으므로 그의 업적을 재조명해 볼 가치가 있다고 본다.

위 논문의 핵심 요약 설명

본 논문은 조선 초기의 학자이자 정치가인 보한재 신숙주가 세종대왕의 위대한 문자 창제 유산인 훈민정음과 그 이후 전개된 국가적 어문 정책 사업에서 얼마나 중추적이고 과학적인 역할을 수행했는지를 규명하고 있습니다.

  1. 세종의 어문 대업과 신숙주: 세종대왕의 대표적 어문 업적인 한글 창제, 조선 한자음을 바로잡은 『동국정운』 편찬, 중국 표준음을 한글로 표음한 『홍무정운역훈』 편찬의 3대 사업에 신숙주는 모두 깊숙이 참여하였으며, 특히 한자음 개정 및 외국어 표기 사업의 실무 총괄(주무자)이었습니다.
  2. 조선 한자음의 정립 (『동국정운』): 당시 스승들마다 제각각 다르게 가르쳐 혼란스럽던 조선 한자음의 원인을 11가지 변인으로 명밀하게 간파했습니다. 그는 중국의 36자모 규격에 맹목적으로 얽매이지 않고, 조선인들이 실제로 구분하여 발음하지 못하는 음소들을 자연스럽게 과감히 통합하여 조선식 23자모 체계를 정립하는 어학적 탁월함을 보였습니다.
  3. 현지 조사를 통한 중국어 성모 확립 (『홍무정운역훈』): 명나라의 표준음을 완벽하게 한글로 구현하기 위해, 요동에 유배 와 있던 명나라 한림학사 황찬을 무려 13차례나 방문하여 소리를 질정(교정) 받았습니다. 이를 통해 당시 중국 현실 북방음에서 이미 사라진 성모들을 제외한 31자모 체계를 15세기에 이미 정확히 귀납해 냈습니다.
  4. 치두음·정치음 및 입성 부호의 독창적 창제: 조선어에는 없으나 중국어 표기에 필수적인 치두음(잇몸소리 계열)과 정치음(혓날소리 계열)의 미세한 소리 차이를 구별하기 위해 한글의 자형을 변형한 새로운 부호(ㅈ, ㅊ, ㅅ의 획 변형)를 창안했습니다. 또한, 중국 북방음에서 소멸해가던 받침 소리(입성 운미)의 흔적을 보존하기 위해 성문파열음[?]을 뜻하는 후음 전청 문자(ㆆ 등)를 대용하여 표기하는 천재적인 음운론적 해법을 제시했습니다.

결론적으로, 한글은 단순히 세종대왕 개인의 천재성으로만 남은 것이 아니라, 중국 음운학의 본질을 완벽하게 꿰뚫고 있던 신숙주와 같은 학사들이 현지 조사와 치열한 어학적 응용 투쟁을 거쳤기에, 조선 한자음과 외국어(중국어)까지 완벽하게 적어낼 수 있는 인류 역사상 가장 강력한 표음 문자 체계로 세상에 증명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신숙주와 훈민정음.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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