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도(中道)라는 이름으로 내란사태에 침묵한 조계종
(중도란 무엇인가?)
‘국난극복과 마음치유를 위한 담선(談禪)대법회(4.14~4.20)’가 7일동안 조계사에서 있었다.그 가운데 의정스님이 중도에 대해서 법문을 하였는데 불교닷컴 조현성 기자가 “스님, 불의를 보고 외면하는게 중도(中道)가 아닙니다”라고 비판하는 글을 올렸다. 법회에 참석한 사람이나 방송과 신문을 통해서 법문을 들은 스님과 불자들이 담선(談禪)법회를 칭송만하고 있는 때에 조현성 기자의 비판 글은 법사 뿐만이 아니라 그날 법문을 듣고 박수 친 스님들과 불자들을 부끄럽게 하기에 충분하다.
조현성기자는 담선(談禪)법회에서 의정스님이 “불자들은 여당 야당 어디에도 치우치면 안 된다. 보수와 진보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는 것이 중도이다. 여야갈등, 보수와 진보 다툼을 화합과 상생으로 이끌 것은 중도뿐이다.”라고 말한 것을 두고, 그는 “중도를 기계적 중립으로 혼돈하는 순간 불의(不義)와 정의(正義)에 대한 불자들의 분별과 실천을 포기하게 만든다. 중도는 단순한 ‘가운데 서기’가 아니라, ‘무지와 집착을 벗어난 자각의 실천이며, 팔정도를 실천하는 길이다.”라고 설명하였다.
나는 조현성기자가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며 ‘무지와 집착을 벗어난 자각(自覺)의 실천’, ‘중도는 방관이 아니라 통찰(洞察)’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고자 한다. 일반인들은 ‘무지와 집착을 벗어난 자각(自覺)과 통찰(洞察)’이 무슨 내용인지, 어떻게 그런 경지를 성취하는 것인지를 이해하기가 쉽지않기 때문이다. 가장 바람직한 방법은 부처님의 말씀을 인용하여 무엇이 ‘팔정도의 실천’인지 설명하는 것이다.경전에서 분명히 팔정도의 실천이 중도라고 말하고 있다. 팔정도의 핵심은 정견(正見,Sammādiṭṭhi)이다. 가장 일반적인 정견의 정의는 '사성제에 대한 완벽한 이해'이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이해 할 수 있는 정견에 대한 설명이 '정견 경(M9)'에서 보인다. 사리뿟다 존자가 도반들에게 정견을 이렇게 설명하고있다.
"도반들이여, 성스러운 제자가 해로움(不善,akusala)을 잘 알고, 해로움의 뿌리를 잘 알고, 유익함(善,kusala)을 잘 알고, 유익함의 뿌리를 잘 알 때, 성스러운 제자가 정견(Sammādiṭṭhi)이 있다고 말한다.
"도반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해로움이며, 무엇이 해로움의 뿌리이며, 무엇이 유익함이며, 무엇이 유익함의 뿌리입니까?"
"도반들이여, 생명을 죽이는 것이 해로움(不善,akusala)이다. 주지 않은 것을 가지는 것이 해로움이다. 삿된 음행을 하는 것이 해로움이다. 거짓말을 하는 것이 해로움이다. 중상모략을 하는 것이 해로움이다. 욕설을 하는 것이 해로움이다. 쓸데없는 말을 하는 것이 해로움이다. 탐욕이 해로움이다. 악의가 해로움이다. 삿된 견해(micchādiṭṭhi)가 해로움이다."
"도반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해로움의 뿌리입니까?
탐욕( lobho)이 해로움의 뿌리이다. 성냄(doso)이 해로움의 뿌리이다. 어리석음(moho)이 해로움의 뿌리이다. 도반들이여, 이를 일러 해로움의 뿌리라고 한다."
경에서 말하는 중도는 정견(Sammādiṭṭhi)이다. 그 정견은 무엇이 해로움(不善,akusala)이고 무엇이 유익함(善,kusala)인가를 잘 아는 것이다. 삿된견해를 가지고 다른 생명을 죽이거나 때리거나 거짓말로 속이거나 하여 괴롭히지 말라는 것이다. 연기론으로 세상을 보아서 영원하다(상견)거나 허무하다(단견)을 극복하고 다른 생명을 죽이거나 때리거나 속이지 않는 것이 중도이다. 간단하게 말하면 오계(五戒)와 십계(十戒)를 잘 지키는 것이 중도이다. 중도를 이해하려할때 중도의 중(中)에서 헷갈리면 중도를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팔정도의 정(正)을 이해하라. 정(正)에서도 헷갈리면 정(正) 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유익함(善)과 해로움(不善)을 이해하라. 유익함(善)과 해로움(不善)에서 헷갈리면 해로움을 열가지 계로 설명하는 십계(十戒)를 이해하라.이것이 중도(中道)를 바르게 이해하는 길이다. “모든 생명은 폭력을 두려워하고 죽음을 두려워한다. 이 이치를 자기에게 견주어 보아서 남을 죽이거나 때리지 말라.”라는 법구경의 말씀처럼, 중도는 역지사지(易地思之)하는 능력이기도하다. 부처님이 전법선언에서 “비구들이여, 많은 사람들의 이익을 위하여(hitāya), 많은 사람들의 행복을 위하여(sukhāya) 길을 떠나라.”고 당부 하셨듯이 뭇 생명의 이익과 행복을 위하는 것이 중도이다. 불교의 목적인 이고득락(離苦得樂)의 길을 가는 것이 중도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대통령은 국민의 이익과 행복을 위하여 일하는 머숨이다. 그 머숨이 허구한날 술처먹고 거짓으로 출근쇼를 하고 계속되는 거짓말로 국민을 속여왔다. 끝내 계엄령을 선포하여 국민에게 총칼을 들이댔다. 깨어있는 민주시민과 국회의원들의 노력으로 계엄이 해제되지 않았다면 수많은 국민들이 목숨을 잃을뻔 하였다. 국민의 이익과 행복을 파괴하려 한 대통령을 어떻게 보고만 있는가? 그런데 중도(中道), 정견(正見),유익함(善),역지사지(易地思之),이고득락(離苦得樂)을 가르키는 불교에서 승려와 불자들은 비상사태에 침묵했다. 불의(不義)에 침묵한 것이다. 유흥식 추기경이 “정의에는 중립이 없습니다. 우리 헌법이 말하는 정의의 판결을 해주십시오.”라는 성명서를 발표할 때도, 천주교 사제 수도자 3,462인도 시국선언문을 발표하고 '시국미사'를 진행할 때도 불교는 침묵했다. 박정희 독재정권 때도 전두환 독재정권 때도 불교는 중도라는 이름으로 침묵했다. 중도는 언제나 승려들이 숨어있기에 좋은 집이었다. 뭇 생명의 이익과 행복을 위한 행동이 중도라면 '고통에는 중립이 없다'는 말이 중도를 가장 잘 표현하고 있다고본다. 불교의 중도를 천주교의 교황이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그 거짓의 집을 때려부수자. 불교종단도 천주교처럼 ‘시국미사’를 개최하여 국민에게 총칼을 들이댄 윤석열 일당에게 불호령을 내렸어야 했다. 청년들이 아스팔트 위에서 눈보라를 맞으며 윤석열 파면을 외칠때 조계종단은 ‘시국법회’ 한번 하지 않았고, 성명서 한번 내지 않았다. 그리고는 이제 와서 담선법회의 의정스님처럼 중도라는 이름으로 국민을 훈계하고있다. 정치인들에게 ‘서로 싸우지 말라, 상대방의 단점만 보지 말라’며 ‘이것이 중도이다’라고 설파하고있다. 내란을 옹호하는 자들과 내란을 막으려는 자들을 기계적으로 A와 B로 나누어 놓고 서로 싸우지말라. 욕심을 버려라. 상대의 단점만 보지말라고 점잖게 충고하는 것은 중도가 아니다. 중도라는 이름으로 자기기만, 무사인일, 기회주의라는 연막을 치는 짓이다. 중도는 그렇게 비겁한 것이 아니다. 조계종은 윤석열 파면이 선포되기 이틀전인 4월 2일, 사회노동위원회에서 윤석열 탄핵을 위한 삼보일배를 하겠다고 했을 때, 극구 말리며 이 삼보일배는 조계종단과는 무관하다고 거리를 두기에 급급했다.
12.3 비상계엄으로 죄없는 국민들이 괴로움을 당하고, 국가 위신이 추락하고, 민생경제가 파탄났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승려들은 중도라는 이름으로 양비론을 설파하거나 승려는 정치에 대해서 참여 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중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부처님이 가르쳐주신 중도(中道)는 나와 이웃의 이익과 행복을 위한 길이다. 유익함과 해로움 그리고 불의(不義)와 의(義)를 구분하는 능력이다. 나와 이웃의 안정과 행복을 파괴하는 자들이 나타나면 지체없이 그들을 꾸짓어 바른 길로 인도해야한다. 설사 그길을 가다가 내가 다치거나 죽을 지라도 부처님 제자라면 가야하는 길이다. 국민에게 끝없이 거짓말을 해오다가 계엄을 일으킨 윤석열을 탄핵하고 파면하는게 중도다.윤석열을 옹호하는 정치검찰을 해체시키는 것이 중도다. 국민을 기만하고 이간질 시키는 부패언론을 폐간시키는 일이 중도를 실천하는 일이다.
중도는 민주시민의 상식이다. 양심이다. 이렇게 명확하게 중도를 알지 못하고, 승려들은 비상사태때마다 양비론을 펼치고, 중도를 애매하게 말함으로서 불자들에게 불의(不義)와 의(義)를 구분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조계종은 중도(中道)라는 이름으로 내란사태에 침묵했다. 승려와 불자들은 조현성기자의 “스님, 불의를 보고 외면하는게 중도(中道)가 아닙니다”라는 다음과 같은 사자후에 귀를 기울여야한다.
“불의(不義) 앞에서 침묵하는 것이 중도가 아니다. 그것은 방관이며, 때로는 악을 용인하는 동조이다. 무지 혐오 선동이 횡행하는 시대, 침묵을 ‘중도’라 부르는 순간 불교는 현실을 외면한 퇴물이 되고 만다. 중도는 방관이 아니라 통찰이다. 타자, 객체 간의 균형이 아닌 오롯한 나의 자각(自覺)이다. 양비론이 아니라 책임이다. 중도는 싸움을 피하는 태도가 아니라, 싸움의 본질을 꿰뚫고 무엇을 위해, 어떻게 싸울 것인가를 아는 지혜다. 불자라면 세상의 고통을 덜기 위한 실천으로 응답해야 한다.” -끝-
[참고기사]
https://www.bulkyo21.com/news/articleView.html?idxno=61265
의정 스님의 담선대법회 법문에 부치는 글 - 불교닷컴
최근 한 스님이 “불자들은 여당 야당 어디에도 치우치면 안 된다. 보수와 진보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는 것이 중도이다. 여야갈등, 보수와 진보 다툼을 화합과 상생으로 이끌 것은 중도뿐”이라
www.bulkyo21.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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