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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

4월 만행기 -귀신사-금산사

 

 

4월 8일

며칠동안 비염 알레르기로 만행을 쉬었다. 쉬는 동안 구례매천도서관에 만행기를 쓰기도하고 책도 읽으면서 지냈다. 사찰을 찾아다니며 문전박대를 받는 만행기가 특이한 내용없이 반복되는 것 같아 사찰의 역사, 문화재, 분위기도 담으려 노력하였다. 이번 주말(4.12)에 서산 개심사에서 개산대제 행사가 있기에 그 쪽으로 천천히 올라갈 것이다. 내가 몰고 다니는 차는 폐차 직전에 상태여서 장거리를 달리기엔 무리다. 쉬엄쉬엄 쉬면서 가기로 했으니 김제 금산사가 적당할 것 같다. 금산사가 얼마 남지 않았는데 귀신사 표지판이 나타났다. 귀신사를 천천히 둘러보다. 건물 자체가 보물인 대적광전(大寂光殿)에 들어서다. 준수하게 생긴 부처님 세 분이 조용히 앉아있다. 천장과 벽에 단청이 안되어 있어 더욱 단아하고 단촐한 느낌을 준다. 세 부처님의 얼굴은 같은 듯 하면서도 다르다. 석탑을 오르는 계단 구석에 기와장 위에 쓴 글씨가 보인다. ‘생각이 길이다’비구니 스님이 정갈하게 썼을 것 같은데 글 쓴이의 마음이 느껴진다. 석탑에서 바라보는 귀신사 대적광전은 그야말로 큰 고요함(大寂)이다. 비구니 스님이 대나무를 잘라서 울타리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다. 도와주고 싶었으나 도량에 처사님이 있는듯하여 다시 가던 길로 향했다.   

귀신사 전경



금산사에 도착하니 곳곳에 벚꽃이 한창이다. 금산사의 벚꽃은 수령이 오래되어서 꽃 무더기가 장엄한 맛이있다. 금산사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미륵대불로 유명한 사찰이다. 미륵전에는 세계에서 가장 큰 미륵보살님이 입상으로 모셔져있다. 미륵전(彌勒殿)은 밖에서 보면 3층이지만 안에 들어가면 1층이다. 그만큼 거대한 미륵보살이 서 있는 것이다. 모악산에 자리한 금산사는 백제 법왕 2년(600)에 지은 절로 신라 혜공왕 2년(766)에 진표율사가 다시 지었다.미륵전은 정유재란 때 불탄 것을 조선 인조 13년(1635)에 다시 짓고 1935년에 불이나서 다시 또 지었다. 거대한 미륵존불을 모신 미륵전은 겉으로 복에는 삼층이지만 안으로 들어서면 하나로 통해있다. 겉으로 보기에 법당 1층에는 ‘대자보전(大慈寶殿)’, 2층에는 ‘용화지회(龍華之會)’, 3층에는 ‘미륵전(彌勒殿)’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법당의 기둥중에서 어떤 것은 하나의 통나무가 아닌 몇 개를 이어서 지어졌다. 아마도 기둥으로 사용할 나무가 부족해서 나무를 이어서 사용했을 것이다. 

7년동안 미륵전의 법당보살로 근무하고 있다는 분에게 3가지 현판의 뜻에 대해서 물었다. 미륵전(彌勒殿)은 미륵보살을 모신 곳이라는 의미고, 용화지회(龍華之會)는 미륵보살이 용화수 아래서 모임을 갖어 중생을 제도한다는 의미이고, 대자보전(大慈寶殿)은 모르겠다고 말했다. 내가 이야기하였다. 미륵은 범어로 마이뜨레야(Maitreya), 빠아리어로 메떼야(Metteya)인데 자비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자씨(慈氏)보살이라고도 한다. 대자보전(大慈寶殿)은 그런 미륵보살이 도솔천(都率天) 보궁(寂滅寶宮)에 계신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본다. 

미륵부처님을 왜 저렇게 크게 만들었을까? 이번에도 법당보살님은 모르다고대답했다. 내 생각에는 미륵 부처님이 5억 6천만년 후에 오실 때 인간의 수명이 8만세가 되고 키가 매우 커진다고 한다. 미륵보살상을 11m크기로 거대하게 만든 것은 미륵부처님이 오시는 시대의 인간상을 그리고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미륵불은 처음에는 철불로 만들어져 있으나 큰 화재로 녹아버렸고, 두 번째는 나무로 만들었으나 그 또한 화재로 소실 되었고, 세 번째 1935년 석회로 만든 부처님이 지금의 불상이다. 미륵 부처님 발 아래는 청동연화대 혹은 철가마솥이라고 불리는 것이 있다. 이 가마솥을 참배하러 많은  증산교도들이 금산사를 찾는다고 한다. 

미륵전을 위에 있는 5층 석탑과 방등계단을 참배하였다. 방등계단은 수계를 하는 계단이기도하고 부처님의 사리를 모신 적멸보궁이기도하다. 절멸보궁이 미륵전보다 높은 곳에 위치한 것은 그 위치가 도솔천을 상징한다고 설명하고있다. 아침 저녁으로 예불을 드리는 대적광전(大寂光殿)에는 5명의 부처와 6명의 보살님이 모셔져 있다. 왜 하필 5명의 부처님이 모셔져 있는지는 알 수 없다. 6보살은 5명의 부처님 사이에 조성하면 6보살이된다. 금산사의 나한전은 매력적이다. 다양한 모양의 16나한과 500나한이 동시에 모셔져 있다. 각 나한님의 표정과 동작은 기발하고 활발발하다. 어디에서도 이렇게 명랑하고 활달한 오백나한을 보지 못하였다. 

 


금산사 도량은 크고 넓은 평지에 건립되어 있어서 많은 건물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음에도 도량은 헐헐하게 느껴진다. 금산사에는 기존의 건물이외에 박물관,기념관,템플스테이등 신축 건물이 많이 들어서있다. 템플스테이관 옆에는 월주 스님을 기념하는 큰 건물이 새로지어져 있다. 한 개인의 활동과 소장품을 전시하기에는 너무 큰 것이 아닌가 한다. 은사스님을 기리는 것도 좋지만 저런 건물이면 과잉충성이 아닌가한다. 사찰의 모든 건물들을 지을 때는 국가보조금을 받지만 운영해 나갈 때는 사찰에서 운영비를 부담해야 한다. 그래서 건물이 많은 사찰의 후임 주지들은 운영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런일이 금산사에서도 일어나고 있을 것이다. 

금산사 종무소에 들려서 하룻밤 묵어가고 싶다고 말했다. 사무장님은 스님께 여쭈어봐야 한다고 하면서 원주 스님을 불러왔다. 원주 스님은 다시 주지시님께 여쭈어야 한다면서 주지스님과 통화하였다. 결론은 템플스테이 방을 배정받았다. 템플스테이 객실(客室) 말고 스님을 위한 객실이 따로 없느냐고 물으니. 귀빈실이 2개 있다고 했다. 나는 귀빈(貴賓)이 아니어서 템플스테이 방이 배당된 것이다. 귀빈실이건 템플스테이 방이건 나그네는 하룻 밤 묵어 갈수 있다는 것에 마냥 행복하다. 템플스테이 방은 아침 저녁으로 예불을 드리는 법당과 멀리 떨어져 있다. 템플스테이에 참가하는 사람들에게 예불은 의무사항이 아니다. 저녁 6시에 저녁 공양을 하다. 스님들이 어디로 갔는지 노스님 한 분이 공양을 하고 계셨다. 묵언이라고 쓰여 있어서 분위기는 조용했다. 

7시에 저녁 예불을 드리는데 부전스님 한 명만 참석하였다. 부전스님은 월주 스님의 상좌라고한다. 젊었을 때 다리가 아파서 선원에 다닐 수가 없었고, 주로 부전 생활을 해왔다고 한다. 그 분과는 포행을 같이 하면서 친해져서 그 분이 관리하고 있는 토굴을 방문하였다. 그 곳은 토굴이 아니라 석굴이었다. 그 석굴 예전에 금광으로 사용하였는데 지금은 그 스님이 개조에서 본인만의 아지트로 사용하고 있다. 굴속으로 50m 쯤 들어가서 방이 나왔다. 방안은 시원하고 고요했다.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듯하다고 하니 이보다 좋은 토굴은 없으리라.

부전스님과 포행을 하는데 무슨 이야기를 하다가 부전스님이 ‘날마다 삼재(三災)다’라는 말을 했다. 삼재라고 하는 것은 몇 년 만에 돌아오는 것인데 ‘날마다 삼재(三災)’라는 말은 신선했다. 순간순간 정신 차리지 않으면 하루에도 몇 번씩 안 좋은 일(삼재)이 나타나는게 우리의 살림살이다. 그러기에 순간 순간 죽을 힘을 다해서 깨어있지 않으면 어느 순간 실수나 사고로 무너지는게 우리의 삶이다. ‘맨날 삼재’라는 말은 ‘방일하지 말고 자기 일을 성취하라’는 부처님의 마지막 유언과 닮았다. 

금산사 공양간에서는 ‘스님전용’이라는 글씨가 많이 보인다. 스님전용공간, 스님전용석이라는 안내표시는 스님들이 권위적으로 보이게 만든다. 그냥 스님용, 스님좌석이라고 써도 충분하다.금산사 공양간에 오관게가 없다. 템플스테이등 많은 일반인과 함께 공양하는 공양간에 오관게의 의미를 음미하며 공양을 하는 것은 중요하다. 스님들의 일상생활을 체험해보게하는 것이 템플스테이라면 오관게를 음미하게 하는 것이 중요한 요소라고본다. 스님들이나 재가자들이 오관계 없이 공양을 하는 것이 낯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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