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보신문이 비구니 평등을 말해?
법보신문은 자신들이 과거에 한 일을 되돌아보며 반성하고 또 반성해야 한다. 자승스님이 칠장사 전각을 태우며 방화 자살을 하고 난 뒤에 유독 법보신문 남수현 편집국장은 자승스님 찬양기사를 세 번이나 올렸다. 남수현 기자는 ‘자승 스님 입적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기획기사에서 “자승스님의 법체는 누운 자리 그대로 반듯하게 남아 있었다."라는 승려의 말을 인용하며 "결코 죽음에 끌려가지 않겠다는 평소에 신념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다.”라고 자승을 미화하는 글을썼다. 또한 자승스님은 죽기 전 몇몇 지인들과 영상 통화를 했다고 보도하면서 “불길이 선명한 영상 속 자승 스님의 목소리는 마지막 순간까지 또렷하고 여여했으며 삶과 죽음의 초연했음을 보여주고 있다.”라고 썼다.
남수연기자는 자승 스님이 죽기 3년 전에 “꿈속에서 또 다른 꿈을 꾸니 불꽃에서 여래(如來)를 만나는구나!”라는 자승이 쓴 글을 찾아내어 자승의 소신공양을 예견한 것이라고 했다. 대중(大衆)공의(公議)로 운영되어야 할 종단을 이익과 돈의 쫓는 패거리를 만들어 종단을 망친 자를 마치 부처님 같은 성인(聖人)으로 미화하고 홍보하던 신문이 법보신문이다. 법보신문은 자승이 유산을 종단에 기증하겠다고 유서까지 썼는데 왜 자승의 유산이 종단으로 귀속되지 않는지, 자승의 사리가 나왔다고 떠들더니 그 사리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묻지도 않고 기사도 쓰지 않는다. 이렇게 공적(公的)인 일은 외면하고, 자승을 미화하기에 앞장서더니 이제와서 종단을 걱정하는 냥 비구니 평등을 말하니 참으로 우습다.
종단과 불교 보다는 자신들의 밥그릇이 먼저인 법보신문 기자는 불자(佛子)라고 보기도 어렵고 기자라고 말하기도 어렵다. 자승을 미화하면서 그들은 자승으로부터 지원금등 몇 번의 후원금을 받아냈지만 그만큼 불자들의 눈과 귀를 가려서 종단이 망가지게 하였다. 법보신문의 자승승려 미화기사를 보고 난뒤부터 나는 아래와 같이 '법보신문 보지 맙시다'라는 운동을 벌이고 있다.
#자승미화하는법보신문사절
#불교계의조선일보는법보신문
#법보신문out
#법보신문보지맙시다.
#법보신문은불교계의조선일보
#댓글조작법보신문
한편 남수연 기자의 말대로 비구니 스님들이 차별받는 것은 종헌종법에 나타나있어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바다. 그러나 그 차별속에서도 부처님 당시 비구니승단에 비교하면 조계종의 비구니는 많은 혜택을 누리고 있다. 부처님이 만든 전통승가는 비구와 비구니가 함께 포살하지 않았다. 그런데 사부대중이 참여하는 조계종단은 그 종단 안에 있는 비구와 비구니는 같은 승단의 구성원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비구와 비구니가 같이 포살을 함으로서 어떤 면에서는 동등한 지위가 된 것이다. 비구 비구니가 함께 포살하는 것은 보살계를 가지고 포살하기에 가능하다. 비구계와 비구니계를 가지고 포살한다면은 포살을 같이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처럼 종단의 출현으로 비구 비구니가 어느정도 평등하게 되어 비구니도 사찰의 주지를 하고, 총무원의 소임을 살고, 대학의 교수와 강사를 하고, 선원의 선원장, 중앙종회의원을 하게 된 것이다. 그뿐인가. 비구니들은 ‘전국비구니회’라는 것을 독자적으로 만들어 회장을 직선제로 선출하고 있다. 비구들은 한번도 직선제를 해본적이 없는 상황에서 비구니회가 직선제를 실시하고 있는 것은 비구니계가 자주적인 힘을 가질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다. 그러나 직선제로 선출된 비구니 회장이 공심(公心)으로 일하거나 종단의 대안 세력이 되지 못하고 있다. 그저 비구들의 종노릇을 노릇을 하는데 그치고 있다. 그것은 자승이8년 동안 총무원장을 할 때 그리고 자승이 강남에서 상왕노릇을 하는 동안에 각종 행사에서 들러리 역할을 해왔던 것에서 확인된다.
전국비구니회는 종단본 ‘불교성전’이 잘못되었으니 세미나를 하자고 해도, 삼귀의에서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합니다’라는 잘못된 한글화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 비구들의 눈치를 보는 것이다. 종단을 생각하고 불자들을 염려한다면 눈치 볼 일이 아님에도 나서지 않는 그들을 보자면 안타깝다. 비구니회를 왜 만들었고 왜 직선제로 비구니회장 선출하는지 그 이유를 다시 생각해 보면 좋겠다. 비구니들이 종단에서 차별을 벗어나는 길은 총무원장을 직선제로 뽑는 것이다. 비구니가 비구와 동등하게 총무원장 투표권을 갖는 것은 비구 비구니가 평등하게 되는 획기적인 계기가 될 것이다.
조계종 승단의 절반을 차지하는 비구니스님들은 스스로가 제 권리를 찾지 못하고있다. 종회의원자리 몇 개를 요구하는 것보다 비구니회가 종단을 위해서 공심으로 일 하면 자연스럽게 동등한 권리가 얻어질 것인데, "뭣이 중한디?"를 모른다. 비구니들이 차별받지 않으려면 앞장서서 총무원장 직선제를 하자고 나서야한다. 대중공의로 운영되는 종단이 되도록 비구니회가 나설 때 종단의 힘은 비구니스님에게 옮겨갈 수 밖에 없다.
현재 여성 출가자가 줄어드는 것보다 기존의 비구니가 공심(公心)이 없는 것이 문제다. 직선제로 대중공의를 모아 비구니회장을 선출한 비구니계가 비구들에게 질질 끌려 다니고 있다. 그래서 직선제의 무용함을 대중들에게 심어주고 있다. 직선제로 대중공의를 모아놓고도 제 역활을 못하고 있는 현 비구니회가 가만히 있어도 비판받는 이유다. 승가라는 공동체가 대중공의로 운영되지 있지 않아 자승 같은 이가 나타나 종단의 수입을 사유화하고 권력을 휘두르는 것, 그것을 목격하고서도 아무런 반항이나 비판을 하지 않는 비구승가와 비구니승가, 종단에 자정능력이 없는 종단이 출가자 감소보다 더 큰 문제다. 출가자 감소는 종단의 부패와 연관성이 있다. 정말 젊은이들에게 행복하지 않은 승가, 화합하지 않은 승가에 들어오라고 권유하고 싶은가? 그저 사찰에서 필요한 일손이 부족해서 일꾼으로 쓰려고 출가를 권유하는 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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