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을 줄여야 합니다 –수경스님-
이 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도반들께 삼가 오체투지의 정례를 올립니다.
외람되지만 개인적인 얘기로 말문을 열까 합니다. 동진 출가는 아니었습니다만 이른 나이에 산문에 들었습니다. 젊은 수행자들 가운데 출격장부를 꿈꾸지 않는 이는 없습니다. 저 역시 그렸습니다. 생사를 벗어나 부처를 이루고자 했습니다. 꽤 오랫동안 선방에서 살았습니다.
젊은 시절 저는 운이 좋았습니다. 여러 산중의 선지식을 만났습니다. 지월스님 같은 분을 통해서는 남자의 처신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배웠고, 춘성스님 같은 노장님으로부터는 남자의 용심을 익 했습니다. 송담스님에게서는 수좌의 분상에서 대중 생활의 묘리에 눈떴습니다.
춘성스님은 늘 젊은 우리에게 "삼년 안에 득력(得力)하지 못하면 산적 노릇을 면치 못할 것"이라 이르셨습니다. 지금도 떠올릴 때 마다 서늘해지는 말씀입니다. 제가 득력을 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한창 정진할 때는 해제를 해도 절 밖으로 나가지않고 공부를 이어갔습니다. 나중에 산철결제라는 것이 생겨났을 때도 노장님들이 계시는 신중을 찾았습니다.
기도-귀명(歸命)
어느 날 다른 길이 보였습니다. 다르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이미 있는 길이었고, 지금껏 제가 걸어온 길의 다른 모습이라 해야겠지요. 그 길을 따라 세상으로 나왔습니다. 만약 도를 구하는 길이 따로 있는데 길을 잃었다면, 용맹정진을 해서라도 어떻게든 화두와 씨름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화두일념이 성성하고 오매일여의 경계에 이르렀다 한들 그게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그 경계에 한사코 머물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새가 창공의 자유를 구가하나 그곳에 집을 짓지는 않습니다. 번뇌를 돌이켜 지혜이고, 중생이 부처가 된다고 배웠습니다.
새만금이 묻히고 있었습니다. 강이 더 큰 인공의 강 대운하에 수몰된다 했습니다. 땅이 땅에 묻혀 숨 막혀하고, 물이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모습을 차마 지켜보고만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이 세계를 화장찰해(華藏利海)라고 읊조릴 자신이 없었습니다. 무엇이라도 해야 했지만 제 작은 덕으로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래도 아주 없지는 않았습니다. 무릎 꿇는 일이었습니다. 참회하고, 빌고, 매달리는 일이라도 해야 했습니다. 저에게 삼보일배, 오체투지는 기도였습니다. 빌고 또 비는 일이 있습니다. 무릎을 꿇고 이마를 땅에 붙이고, 온 몸을 던지 땅의 품 에 안기는 일이었습니다. 귀명(命). 생명의 근원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발원이었습니다.
본시 기도는 내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기도로는 아무리 간 질해도 닿을 수 없습니다. 가피라는 것은 나의 성취가 아닙니다. 불보살의 본원릭(木願力)이 발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피는 실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분야든 일가를 이룬 사람들은 '일이 일을 하는' 경지를 체험합니다. 보통 사람들도 일상생활환에서 그런 경험을 합니다. 기도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나의 기도가 통한 것이 아니라, 불보살님들이 오랜 세월 중생의 안락을 위해 행하여 이룬 '본원의 힘(本願力)'이 작용한 것입니다. 나의 기도는, 자신의 원력과 신심을 저울에 올려놓고 불보살님께 시위를 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가피
어느 날 좋은 도반을 만났습니다. '세상과 함께'의 도반들입니다. 그들은 세상 한 귀퉁이에 작은 학교를 짓는 일을 공부로 삼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하는 일에 심부름이라도 하며 또 한 시절을 건넜습니다. '세상과 함께'에서 지은 미얀마의 작은 학교에서 아이들을 만났습니다. 그 아이들이 제게 합장 인사를 하면서 안부를 묻더군요. ‘밍글라바'라고, '안녕하시냐'고 말입니다. 아이들은 얼굴 가득 활짝 웃음을 머금고 있었습니다. 저에게 그 웃음은 '가피'였습니다.
문득 한 생각이 떠오릅니다. 오체투지를 할 때 엄마를 따라온 아이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그 아이들은 오체투지를 따라 하기도 했습니다. 그 어린아이들이 무얼 알았겠습니까. 그저 놀이려니 했겠지요. 그러나 지금 사회인이되어 일을 하거나 대학교에서 공부하고 있을 그 아이들이 그때를 떠올린다면, 분명 활짝 웃을 것입니다. 필시 그 웃음은 대지와의 일체감을 느낀 사람만이 지을 수 있는 웃음일 것입니다. 그 또한 제게는 가피입니다.
돌이켜보니 삼보일배, 오체투지를 함께 한 문규현 신부님을 비롯한 여러 종교의 성직자들이나 함께한 사람들 그리고 자비로운 눈길 을 보내 준 모든 이들이 보살이었습니다. 그 따뜻한 손길이 정녕 가 피였습니다.
공양
'세상과 함께' 도반들 덕분에 몇 해 전 <공양>이라는 이름으로 작은 책을 냈습니다. 사람이 산다는 건 어떤 형태로든 '밥'을 구하는 일이고, 그 밥을 먹고 목숨을 이어가는 일은 만 생명에 빚지는 일입니다. 고마워하는 마음으로 먹고, 그 고마움을 보살행으로 되돌리는 것 말고는 달리 감사할 길이 없습니다. 그 뜻을 나누어 보고자 한 것이 <공양>이라는 책을 내게 된 이유였습니다.
불교 환경운동은 생명 공양이자 보살도의 실천입니다. 불교의 관점에서 환경은 도구적 대상의 객체가 아닙니다. 절집 말로 하자면 기세간(器世間)입니다. 이 기세간을 터전으로 살아가는 유정들의 세계를 중생세간(衆生世間)이라 합니다. 기세간과 중생세간이 하 나로 포개진 세계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입니다. 교학적 관점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중생의 범주에 산천초목을 포함시키는 입장에서면 자연환경은 객체가 아니라 주체입니다. 인간과 자연은 분리 불가능합니다.
인간과 자연환경-이 한 몸이라는 인식의 사상적 연원은 '연기법'입니다. 모든 존재는 서로 스며들어 있다는 연기법에 입각하면 인간과 자연은 공생 관계입니다. 하지만 그 공생의 존재 양태는, 인간만 일방적으로 이익을 보는 '편리공생'입니다. 무조건 고마워하고 미안해하는 것이 인간의 도리입니다.
자연의 혜택에서 벗어난 인간은 잠시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은 분명 자연의 한 부분이지만 매우 이질적입니다. 그 이질성이 문명의 본질입니다. 인간의 이질성이 자연에 대한 적대성으로 작용하기 시작한 기점을 농업혁명과 산업혁명 가운데 어느 때로 봐야 할지는 관점에 따라 다닐 터이고 그것을 따지는건 학문의 영역이겠지만, 작금의 현대문명이 자연에 대한 극단의 적대성을 보이고 있다는 점은 분명해 보입니다. 유례없는 폭우와 폭설, 극심한 가뭄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보잘것없는 존재인가를 통절하 고도 고작 내놓는 반성의 인사라는 것이 '자연의 역습' 따위인 것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자연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인간을 공격하지 않습니다. 인간에 대한 호오의 감정 자체가 없습니다. 환경 재앙은 인간에 의한, 인간의 자해 행위의 결과인 것입니다.
인간의 기술이 현재의 환경 위기를 완벽히 극복할 수준으로 발달한다 해도 자연은 근본적으로 인간의 통제 밖에 있습니다. 신의 권능에 맡길 수도 없습니다. 그런 신이 있다 해도 정녕 신이라면 인간을 바꾸는 방식으로 자신의 권능을 발휘할 것입니다. 인간을 신을 닮은 모습으로 만든 것만 봐도 그렇게 짐작할 수밖에 없습니다.
겸손이라는 말도 자연 앞에서는 오만입니다. 미안한 마음으로 참회하는 것이 먼저여야 합니다. 작게 살고, 적게 쓰고, 감사하는 것 만이 참회의 길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쉽지 않습니다. 오랜 습관과 전생과 금생의 온갖 업이 뒤엉킨 것이 우리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소욕지족으로 복덕의 가피를 구하는 기도, 이것이 불교 환경운동의 정신적 바탕이이야 할 것입니다.
불교 환경운동에서 승가의 역할
불교 환경운동의 실천 지침은 따로 설정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6 바라밀, 8정도로 다 밝혀져 있습니다. 그렇게 살면 됩니다. 그런 삶이 좋은 삶이고 보살행입니다. 그런데 그게 말처럼 쉽지 않지요. 사바를 살아가야 하니까요. 생각 없이 한세상 살아가는 일도 쉽지는 않습니다. 어느 한 곳, 어느 한때도 녹록지 않습니다.
불교에서는 행위-몸으로든 마음(의식)으로든 지은 바를업(Karma)이라 합니다. 흔히 신(身)·구(口)·의(意) 삼업이라 하지요.모든 개인이 함께 짓는 입을 공업(共業)이라하고, 개인이 짓는 입을 불공업이라 합니다. 현대사회에서는 공업과 불공업의 경계가 불분명합니다. 가령 선거에서 특정 후보를 지지하는 것은 개인의 업이지만 제도화된 정치 행위로서 선거 자체는 공업이라 할 수 있고, 그 과실도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돌아옵니다. 환경문제의 경우 공업과 불공업이 합하여 이루어진 것이지만 결과는 모두가 감당해야하기 때문에 사회적 업이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기차 운행에서 발생하는 환경오염 문제의 책임을 기차 운행 주체와 그 안에 탄 사람들의 몫으로 나눌 수는 없을 것입니다. 자가용의 경우는 불공업이지만 그것들이 일으킨 오염의 합은 모두가 감당해야 합니다. 환경문제는 공업으로 인식하여야 마땅할 것입니다.
환경문제 해결의 난점은 모두의 문제이기 때문에 아무도 책임지려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대규모 자연 파괴가 따르는 개발 사업의 경우 자연은 피해 당사자 자격을 인정받지 못할뿐더러 인간의 언어로 항변할 수도 없습니다. 모두의 문제는 문제 자체가 없는 것으로 치부되기 십상입니다.
환경문제는 공업(共業) 소산으로서 우리 모두의 책임인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도덕적 책임감이 가득 담긴 '우리'라는 말에 함정이 있다는 점입니다. 환경문제에서 큰 책임을 져야 할 당사자들이 '우리'라는 이름 뒤에 숨어버린다는 것입니다. 사실 국가나 기업의 책임에 비하면 각 개개인의 몫은 미미한 수준입니다. 이를 도외시하고 우리의 문제로 묶음처리 하는 것은 국가나 기업에 면죄부를 주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그들에게 책임을 물 어야 할까요. 개인의 힘으로는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연대가 중요하지만, 한계 또한 분명합니다. 하루하루 생계도 벅찬 사람들에게 환경 운운하는 것은 죄스러운 일입니다. 연대의 손끝이야 무진 시민들에게 번번이 운동가적 희생을 요구하는 것도 염치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NGO와 종교단체가 필요한 것입니다. 종교단체 가운데서도 불교의 출가 수행자 집단인 승가가 최적임자입니다.
불교의 출가 수행자를 비구(니)라 하는데, 산스끄리뜨 Bhiksu 를 음역한 말로 그 뜻은 '걸사(乞士)'입니다. 쉽게 말해서 '얻어먹는 사람'이라는 말이지요. 율장에 의거하면 비구는 어떤 생산 활동도 해서는 안 됩니다. 오로지 걸식으로 목숨을 유지해야 합니다. 요즘도 그렇게 하는 것은 가당치 않지만, 그 정신만큼은 지켜져야 합니다.
비구는 세속과 관계를 끊은 출리적 존재입니다. 승가는 출세간 집단입니다. 세상의 이해관계로부터 떠나 있습니다. 생산관계로부터 '떠남'으로써 세상과 강력히 '결속됩니다. 승가는 세간의 호의로 사는 사람들의 집단입니다. 율장의 조목 대부분은 세간의 평판이 나빠지지 않게 하기 위한 행동 규범입니다. 승가의 출리성은 생산행위를 하지 않는 것으로 단단해지고, 그것으로써 세상과 연결됩니다. 비구가 인천사로서 세상과 하늘의 사표가 될 수 있는 도리가 거기 있습니다.
승가는 정치권력과 자본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집단입니다. 아니, 그래야 합니다. 왕이 와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는 권위가 거기서 나옵니다. 그것을 기대하고 세상 사람들이 승가에 귀의하는 것입니다. 승가는 공동체성이 붕괴된 현대사회에서 환경문제에 가장 책임 이 무거운 사람들에게 개개인을 대신하여 죽비를 내리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결코 그것이 수행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한국불교의 적 자를 자임하는 조계종이 선종을 표방하는 만큼 선가(家)의 말에 빗대어 표현해 보겠습니다. 그동안 한국불교는 가리사(家裏事) 즉 상구보리(上求菩提)'라는 '집안일'이 '하화중생(下化眾生)'이라는 '도중사(途中事)'와 별개인 듯 여겨 왔습니다. 중생이 없으면 부처 도 없다는 걸 모르는 승가 구성원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기후 위기 같은 환경문제 해결을 위해 승가의 모든 구성원이 환경운동가가 필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부처님이 행하신 대로 본분사에 충실하면 됩니다. 말 못하는 자연의 편에 서는 것, 환경 위기에 따른 피해에 취약한 약자 편에 서는 것, 이것이 제가 아는 중도입니다. 기계적 중립을 중도라 할 수는 없겠지요. 정치권력과 자본의 힘 앞에 무력한 대중의 편에서 싫은 소리 하는 것을 기꺼워하는 것이 승가의 중도행이어야 합니다. 지금 이곳을 화엄 세상으로 만 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보살행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하지 않고 화엄의 사사무애(事事無碍)를 말한다는 것은, 구름 위에 떠올라 어디에도 걸림 없이 활보하겠다는 '원대한 망상'입니다.
보살행으로서 불교 환경운동
성장신화의 주술과 그것에 사로잡힌 대량소비는 기후 위기의 파 국적 결말을 재촉하고 있습니다. 성장의 허상은 GDP의 숨은 그림 속에도 감춰져 있습니다. 기후 변화에 따른 자연재해와 유조선 침몰 같은 인위적 환경 파괴를 복구하는 데 쓴 돈도 그 안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숨이 차게 성장한 것 이상으로 착실하게 실패해 왔습니다. 그것이 기후 위기로 표현되는 환경문제의 본질입니다. 이제는 달라져야 합니다.
삼보일배, 오체투지를 되돌아봅니다. 단순히 새만금 매립을 반대하고 한반도 대운하 사업을 저지하는 일회성 시위 차원이 아니었습니다. 그것만이 목적이었다면 머리띠와 확성기와 현수막으로 만족했을 것입니다. 그것만으로도 '우리도 할 만큼 했다'고 자기 합리화의 명분을 만들 수 있었겠지요. 우리는 국가가 앞장서서 벌이는 무지막지한 반생명적 개발 사업으로부터 생명과 미래를 지키고, 성장신화와 물신주의를 성찰하고자 했습니다. 사람의 길, 생명의 길, 평화 의 길을 함께 닦아 나가자고 했습니다.
환경 위기는 가속화되는데 이에 대한 감각은 오히려 무뎌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항생제의 내성처럼, 더 늦기 전에 더 이상 성장에 연연해하지 않는 삶의 방식을 모색하는 것으로 환경운동의 방향이 재설정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문명사적 대전환으로 생명과 평화의 길을 찾지 않으면 인류의 절멸은 시간문제일 뿐입니다. 너무 무책임하지 않습니까. 사실 어렵게 말할 것도 없습니다. 사람이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는 것이지요.
앞으로의 불교 환경운동은 욕망의 충족에서 행복을 찾는 것이 아니라 복덕구족을 지향하는 좋은 삶, 보살행으로서 자비로운 삶을 위한 기도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좋은 삶 일까요? 물과 공기조차도 자본주의에 지배당하는 세상에서 '자발적 가난' 같이 듣기만 좋은 고담을 늘어놓을 생각은 없습니다. '아낄 것 자체가 없는 사람들도 많은데 '소욕지족'을 말하기도 면구스럽습니다.
하지만 보십시오. '음식 쓰레기'라는 말, 음식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는 우리 목숨에 대한 모욕입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소욕지족은 알뜰한 삶입니다. 가능하면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재활용하고, 종이컵 안 쓰는 것이 방생'이라는 인식 정도는 하고 살자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다 보면 더 좋은 삶, 복과 덕이 구족한 세상이 한 뼘이라도 넓어지겠지요.
제가 젊은 시절에는 삼귀례를 할 때 '귀의불양쪽존(歸依佛兩足尊)'이라 했습니다. 양족이란 '복덕과 지혜'를 말합니다. 그런데 '거룩한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하고 한글로 노래를 부르는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꼭 그것 때문은 아니겠지만, 지금 한국불교는 '거룩함'에 매몰되어 버렸습니다. '좋은 삶'에서오는 '복덕'의 가치는 기복으로 오해받아 밀려났고, '지혜'는 깨달음 지상주의에 의해 신비화되어 버렸습니다. 우리의 삶과 목숨을 알뜰히 여기는 것. 이것이 제가 생각하는 '복덕구족'의 삶입니다.
번다했습니다. 시은에 감사할 길을 찾지 못해 전전긍긍하는 늙은 중의 노파심으로 혜량해 주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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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경스님 글을 읽은 소감]
수경스님이 오랜 침묵을 깨고 바른 소리를 내셨다. 반갑다.
수경스님은 “승가는 세간의 호의(好意)로 사는 사람들의 집단이고 정치권력과 자본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집단이다. 유일하게 승가만이 공동체성이 붕괴된 현대사회에 죽비를 내리는 역할을 해야 하는데 그것이 수행과 무관하지 않다.”라고 승가의 역할을 강조한다. 그러나 “한국불교가 ’승가‘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여 ’공동체성‘을 잃어버린 문제, 그래서 ’자본‘에 매몰되어 있는 문제를 지적하지 않는다.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합니다'에서 ’거룩한‘을 문제 삼고 정작 ’승가‘를 ’스님들께‘로 오역한 문제를 문제삼지 않음으로서 글의 과녁이 빗나갔다. 해결책이 없는 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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