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현욱 기자
- 승인 2021.03.16 11:46
“‘불교성전’ 근본문제는 편찬기준…시대착오적”
지난번에는 급히 글(2021년 종단본 ‘불교성전’을 비평하다 1)을 쓰느라 <불교성전> 일러두기를 보지 못하여 언급하지 못했다. 일러두기를 보니 매초에 불교성전 편찬기준을 잘못 정한 것이 근본적인 문제였음을 알겠다. 어떻게 이런 시대착오적인 편찬기준에 그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였는지 믿겨지지 않는다. 종단본 <불교성전> 일러두기는 아래와 같다.
1. 이 성전은 경전 발췌가 기본이지만, 제1장은 여러 경전에서 발췌하여 서사식으로 구성한다.
2. 한역 삼장의 경우 ‘고려대장경’을 저본으로 하며 ‘신수대장경’은 참고용으로 한다. 팔리어 삼장의 경우 PTS본을 저본으로 한다.
3. 한역 삼장 및 선어록의 경우 동국역경원 ‘한글대장경’과 ‘한국불교전서’의 번역 용례를 참조하고, <금강경>과 <천수경>은 조계종 표준본을 인용한다.
4. 팔리어 삼장의 경우 경전은 초기불전연구원의 번역 용례를 참고하고, 율장은 한국빠알리성전협회의 번역 용례를 참고한다.
5. 초기경전과 대승경전의 용어가 상이한 경우 구마라집본의 한자음을 사용한다. 단 통용되는 인명이나 지명은 익숙한 용어를 사용한다.
예) 사리뿟따, 사리푸트라 - 사리불
예) 라자가하 - 왕사성
일러두기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5번이다. ‘초기경전과 대승경전의 용어가 상이한 경우’라는 조건을 달은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니까야’의 번역본 전부를 구마라즙(344~413)이 번역한 한자음으로 변경하겠다는 말이다. 아함경과 대승경전의 번역용어는 거의 전부가 다르기 때문이다.
편찬자들은 이러한 사실을 몰랐을까? 그러한 기준으로 용감하게도 ‘아누룻다’를 ‘아나율’로, ‘난디야’를 ‘난제’로, ‘낌빌라’를 ‘금비’로 ‘뿐나’를 ‘부루나’로 ‘수나빠란따’를 ‘수로나’로 바꾸어 결과적으로 니까야를 한문경전으로 만들어 놓았다. 경을 부분 인용하였기에 빨리어 고유명사를 최소한으로 인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작업도 완벽하지 못해서 니까야 경전의 중간에 등장하는 짬빠, 숩삐야, 나꿀리빠따, 알라깝빠, 웨타디빠, 빠와 같은 이름들은 바꾸지 못했다. 결과적으로는 구마라즙의 한자음 발음과 영어 발음과 빨리어 발음이 혼재된 책을 만들었다.
2021년에 이런 시대착오적인 기준을 정했다는 것이 놀랍고 젊은 기획위원(법인·덕문·원철·정덕 스님, 박영동, 김상영, 이미령)과 전문위원(원묵·휴담·도문 스님, 이진영, 권기찬)들이 이 기준을 따랐다는 것이 믿겨지지 않는다.
더 놀라운 것은 포교원장의 편찬사에서 드러난다.
“종단본 <불교성전>은 각 주제별로 초기경전, 대승경전, 선어록 등을 망라하여 수록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의 주제 안에서 여러 불교의 전통의 교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장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경전을 사상의 점검 없이 모아놓는 것이 장점인가? 내용이 이질적인 경과 율을 모아놓으면서 편찬위원들은 정녕 갈등이 없었단 말인가? 포교원장이 장점이라고 말하는 지점이 <불교성전>을 접하는 불자와 일반인들에게는 이렇게 느껴질 것이다.
“종단본 불교성전은 하나의 주제 안에서 여러 불교의 전통을 용어통일 없이 그리고 시대별로 다른 시기에 나타난 경과 율의 내용이 일치하는가에 대한 검증도 없이 모아놓았기에, 불교를 처음 접하는 사람들에게는 황당함을 안겨주고 기존의 불자들에게는 혼란을 가중시키는 단점을 가지고 있다.”
2021년 종단본 <불교성전>은 인도와 중국에서 여러 번에 걸쳐 한반도에 전승된 경전과 율장을 정리하고 비교하여, 부처님 가르침을 가장 쉽고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2021년 종단본 <불교성전>이야 말로 조계종의 수준이며 종단의 얼굴이다. 일반 책들은 출판사에서 출판하는 것으로 끝나지만, <불교성전>을 부처님 전에 봉정하는 의식을 거행한 이유는 무엇이며 많은 불자들이 <불교성전> 편찬에 성금을 보낸 이유는 무엇인가? 오직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이 정확하고 명료하게 전달되기를 바라는 염원이 아니겠는가?
진정으로 부처님 가르침을 따르는 제자라면 <불교성전>에 오자 하나가 발견되어도 송구스러워하고 반성해야 할 것인데, 하물며 <불교성전>의 문제가 있는 곳 40여개를 발견하여 지적한지 보름이 지났는데도 편찬자들이 오직 침묵으로 외면하는 것은 무슨 배짱이고 아만인가? <불교신문>은 종단본 <불교성전>이 공신력이 있다며 자화자찬하는 기사를 실었고, <불교방송>과 <불교TV>도 최고의 불교성전이라며 선전에 열을 올리고 있다. 종단이 왜 존재하고 교계언론이 왜 존재하고 신문이름에 왜 ‘불교’라는 단어가 왜 들어가 있는지를 망각하고 사는 자들이 아닌가? 시대착오적인 잡탕 불교성전을 보면서 비통함을 금 할 수 없다.
지적해야 할 곳이 다시 발견되어 2차 비평을 하게 되었다.
159p
붓다가 앞으로 석달 후에 열반에 드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라. 붓다가 떠난다 해도 가르침과 계율을 지켜야하고 붓다가 세상에 있다 해도…
[비평] 부처님은 자신을 붓다라고 부른 적이 없다. 자신을 부를 때는 항상 ‘여래’라고 불렀다. 이러한 원칙을 이제 와서 불교성전이 깨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예)비구들이여, 여래는 회중들에게 법을 설하나니 이것이 그에게 있어서 사자후이다.
비구들이여, 여래에게는 열 가지 여래의 힘이 있나니,
여기 여래는 원인을 원인이라고, 원인이 아닌 것을 원인이 아니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우빨리여, 열 가지 이유 때문에 여래는 제자들에게 학습계목을 제정하고 빠띠목카를 마련했다.
164p
바라문이여, 여기 어떤 자는 감각적 욕망에 대한 탐욕을 여의고 의욕을 여의고 애정을 여의고 갈증을 여의고 열병을 여의고 갈애를 여의었습니다. 그런 그가 어떤 혹독한 병에 걸리자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 사랑하는 감각적 욕망들은 나를 버릴 것이다. 나도 저 사랑하는 감각적 욕망들을 버리게 될 것이다.’라고. 그는 근심하지 않고 상심하지 않고 슬퍼하지 않고 가슴을 치지 않고 울부짖고 광란하지 않습니다. 바라문이여, 이런 자가 죽기 마련이면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죽음에 대해 떨지 않는 자입니다.
다시 바라문이여, 여기 어떤 자는 몸에 대한 탐욕을 여의고 의욕을 여의고 애정을 여의고 갈증을 여의고 열병을 여의고 갈애를 여의었습니다. 그런 그가 어떤 혹독한 병에 걸리자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 사랑하는 몸은 나를 버릴 것이다. 나도 저 사랑하는 몸을 버리게 될 것이다.’라고. 그는 근심하지 않고 상심하지 않고 슬퍼하지 않고 가슴을 치지 않고 울부짖고 광란하지 않는다. 바라문이여, 이런 자도 죽기 마련이면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죽음에 대해 떨지 않는 자이다.”
[비평] 부처님은 ‘무외 경’(A4:184)에서 자눗소니 바라문에게 죽음을 두려워하고 죽음에 대해 떠는 자가 있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죽음에 대해 떨지 않는 자도 있다는 말씀을 하시는데, 인용된 부분은 “바라문이여, 그러면 어떤 자가 죽기 마련이면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죽음에 대해 떨지 않는 자인가?”라는 물음으로 시작하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죽음에 대해 떨지 않는 자에 대한 설명이다. 그러므로
“그런 그가 어떤 혹독한 병에 걸리자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라는 문장은
“그런 그가 어떤 혹독한 병에 걸리자 이런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na evaṃ hoti)”라고 수정되어야 한다.
아랫부분에 “다시 바라문이여, 여기 어떤 자는 몸에 대한 탐욕을 여의고 의욕을 여의고 애정을 여의고 갈증을 여의고 열병을 여의고 갈애를 여의었습니다.”라는 문장 다음에도 “그런 그가 어떤 혹독한 병에 걸리자 이런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na evaṃ hoti)”라고 수정되어야 한다.
169p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괴로움인가 태어남도 괴로움이다. 늙음도 괴로움이다 병도 괴로움이다 죽음도 괴로움이다 근심·탄식·육체적 고통·정신적 고통·절망도 괴로움이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도 괴로움이다. 요컨대 취착하는 다섯 가지 무더기[고성제苦聖諦]들 자체가 괴로움이다.
[비평] “싫어하는 것과 만나는 것도 괴로움이다. 사랑하는 것과 헤어지는 것도 괴로움이다.(appiyehi sampayogopi dukkho, piyehi vippayogopi dukkho)”라는 문장이 빠졌다. PTS본에 빠진 것을 확인했으나 전재성 등 다른 번역본에는 들어가 있고 일반적인 불자들이 알고 있는 팔고(八苦)의 내용이니 <불교성전>에 넣은 것이 좋을 듯하다.
171p에도 “싫어하는 것과 만나는 것도 괴로움이다. 사랑하는 것과 헤어지는 것도 괴로움이다.”를 삽입하고 자세한 설명도 삽입되어야 할 것이다.
177p
어떤 것을 사랑하는 것과 이별하는 괴로움인가? 사랑하던 물건이 파괴되거나 흩어지는(흐트러지다의 비속어) 것입니다. 인간의 다섯 무더기가 파괴되는 것과 천상의 다섯 무더기가 파괴되는 것입니다.
[비평] 애별리고(愛別離苦) 설명이 앞에서 설명한 ‘니까야’와는 다르다. 이어지는 원증회고(怨憎會苦)의 설명도 ‘니끼야’와 다르다. 이것이 ‘니까야’와 ‘아함경’의 차이일 것이다. 순서도 ‘니까야’는 원증회고 애별리고 순인데 ‘아함경’은 애별리고 원증회고 순서로 되어있다.
176p
알음알이
[비평] 다른 곳에서는 알음알이를 의식이라고 수정했는데, 여기서는 수정하지 않고 알음알이라고 사용한다.
182p
네 마리 동물은 이 말을 듣고 마음이 곧 열렸다.
[비평] 동물이 마음이 열렸다는 데 어떻게 열렸다는 것인가? 까마귀 비둘기 독사 사슴 인간이 등장하여 서로 대화를 하는 ‘법구비유경’의 비유는 ‘이솝 우화’같다. 이러한 비유를 보고 동물이 깨달을 수 있다는 증거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을까 염려된다.
183p
내가 그대들에게 말한 이 세상은 다섯 가지 악으로 가득 차 있고 고통과 괴로움을 받는다. 이로 인해 다섯 가지 고통과 다섯 가지 불길이 서로 원인이 되어 생긴다.
[비평] ‘무량수경’의 내용으로 현세의 다섯 가지 악으로 현세에 다섯 가지 고통을 받고 내세에 다섯 가지 불길을 받는다는 것인데, 위 인용문은 이러한 시간의 차이를 설명하지 않고 서로가 원인과 결과가 이어진다는 설명을 하지 않고 있다. 뜻을 훼손시키지 않고 원문에 대한 정확하게 인용하는 것이 필요하다. 또한 하나의 경전에서 부분만을 인용할 때 느끼는 생경함이 발견된다. 아래는 ‘무량수경’을 검색하여 찾아낸 같은 부분의 내용이다.
“내가 지금까지 그대들에게 말한 것은 세상의 다섯 가지 죄악(五惡)과 그 죄악으로 말미암아 바로 현세에 받는 다섯 가지 고통(五痛)과 또한 그 죄보로 내세에 받을 고통인 다섯 가지 불길(五燒)에 대한 법문이었느니라. 이러한 죄악과 그 과보가 서로 원인이 되고 결과가 되어 끝없이 굴러다니게 되느니라.”
186p
괴로움과 즐거움, 선악(善惡)이 합해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비평] ‘밀린다왕문경’을 인용한 것인데, “괴로움과 즐거움, 선악(善惡)이 합해서 사람이 되는 것”이라는 표현은 원전에 없다. 상식적으로도 불교사상과 맞지 않다. 원전에는 색(色) 수(受), 상(想), 행(行), 식(識)이 조건이 되어 사람이 된다고 말하고 있다. 즐거움과 괴로움, 선악(善惡)은 몸과 마음의 조건으로 발생하는 전개과정이지 선악이 따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부처님 가르침과 다른 내용을 불교성전에 실어 놓아서 불자들을 혼란스럽게 하는 것은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다. ‘밀린다왕문경’의 바른 번역은 이렇다.
“이처럼 대왕이여 머리, 핏줄, 뼈 등 몸의 부분들과 색(色), 수(受), 상(想), 행(行), 식(識)을 조건으로 ‘나가세나’라는 일반적인 명칭이나 이름이 생기는 것입니다.”
196p
"바라문이여, 예전에 이 사왓티에 어떤 여인의 아버지, 오라버니, 자매, 아들, 딸, 남편이 임종을 했다. 그녀는 남편의 임종으로 실성을 해버리고 정신이 나가버렸다. 그래서 이 거리 저 거리 이 골목 저 골목을 다니면서 '내 남편을 못 보셨습니까? 내 남편을 못 보셨습니까?'라고 울부짖었습니다."
[비평]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생겨난 것에 대한 경(M87)’을 각묵은 ‘애생경(Piyajātikasutta)’이라 번역하였다. 인용문은 어떤 여인의 아버지, 오라버니, 자매, 아들, 딸, 남편이 등장하는 문장에서 마지막 남편만을 ‘내 남편을 못 보셨습니까?’라고 설명하고 있다. 아버지, 오라버니, 자매, 아들, 딸, 남편이 각기 다른 집안의 사건인데도 이 문장에서는 어떤 여인이 주어가 되어 그 여인의 아버지, 오라버니, 자매, 아들, 딸, 남편이라는 오해를 하게 만든다. ‘내 아버지를 못 보셨습니까?’ ‘내 오라버니를 못 보셨습니까?’ ‘내 자매를 못 보셨습니까?’ ‘내 아들을 못 보셨습니까?’ ‘내 딸을 못 보셨습니까?’ ‘내 남편을 못 보셨습니까?’라고 전체 문장을 인용하거나, ‘어떤 집에서는 아버지, 어떤 집에서는 오라버니, 어떤 집에서는 자매, 어떤 집에서는 아들, 어떤 집에서는 딸이 임종했다.’라고 서술형식으로 처리했으면 좋았을 것이다. 아래 각묵의 번역본은 생략표시로 다른 집안임을 표시했다.
"바라문이여, 어떻게 근심․탄력․육체적 고통․정신적 고통․절망이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생겨나고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발생하는 것인지 그것은 이런 방법으로도 역시 알 수 있다. 바라문이여, 예전에 이 사왓티에 어떤 여인의 아버지가 … 오라버니가 … 자매가 … 아들이 … 딸이 … 남편이 임종을 했다. 그녀는 남편의 임종으로 실성을 해버리고 정신이 나가버렸다. 그래서 이 거리 저 거리 이 골목 저 골목을 다니면서 '내 남편을 못 보셨습니까? 내 남편을 못 보셨습니까?'라고 울부짖었다."
202p
‘이 사람이 나에게 손해를 끼쳤다. 그러나 이 경우에 그것이 우리 둘의 어디에 존재한단 말인가?’라고 원한을 다스립니다.
[비평] ‘합송경(D33)’에서 아홉으로 이루어진 원리 부분을 인용한 것이다.
“‘이 사람이 나에게 손해를 끼쳤다. 그러나 이 경우에 그것이 우리 둘의 어디에 존재한단 말인가?’라고 원한을 다스립니다.”라는 문장에서 ‘그것이 우리 둘의 어디에 존재한단 말인가?’라는 문장은 이해가 쉽지 않다. 각묵의 번역보다는 ‘이 사람이 나에게 해악을 끼쳤다.’는 생각에 대하여 ’그것이 무슨 이득이 되는가?’(taṃ kutettha labbhā’ti)라고 생각하여 원한을 제어합니다.”라는 전재성의 번역을 취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203p
상습적으로 화를 낸 과보
[비평] ‘분노 경(A7:60)’을 소개하면서 3가지 내용은 소개하고 4가지는 소개하지 않았다. ‘분노하게 되면 어떻게 된다’는 7가지 경우를 소개하는 부처님의 의도가 있을 것인데 이렇게 3개만 소개하는 것이 바람직해 보이지 않는다. 이것이 경전을 부분 인용한 대표적인 나쁜 예이다.
분노하는 자가 저지르는 3가지 저주는 소개했다.
‘오, 참으로 이 자가 흉한 꼴이 되기를!’
‘오, 참으로 이 자가 잠을 잘 못 자기를!’
‘오, 참으로 이 자에게 큰 이익이 따르지 않기를!’
분노하는 자가 저지르는 4가지 저주는 소개하지 않았다.
‘오, 참으로 이 자에게 재물이 생기지 않기를!’
‘오, 참으로 이 자에게 명성이 따르지 않기를!’
‘오, 참으로 이 자에게 친구가 없기를!’
‘오, 참으로 이 자는 몸이 무너져 죽은 뒤 좋은 곳[善處]이나 천상에 태어나지 않기를!’
207p
맹인들의 코끼리 만지기
[비평] 장님 코끼리 만지기 비유는 ‘우다나(Ud6.4)’에 자세한 내용이 나오는데, 경의 제목이 ‘다양한 이교도의 경’이다. 부처님 당시에 이교도들은 “① ‘세상은 영원하다.’거나 ② ‘세상은 영원하지 않다.’거나 ③ ‘세상은 유한하다.’거나 ④ ‘세상은 무한하다.’거나 ⑤ ‘생명이 바로 몸이다.’거나 ⑥ ‘생명은 몸과 다른 것이다.’거나 ⑦ ‘여래는 사후에도 존재한다.’거나 ⑧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지 않는다.’거나 ⑨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기도 한다.’거나 ⑩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라는 10가지 주장을 고집하고 있었다.
부처님은 이교도가 10가지 주장을 고집하여 서로 자기의 주장이 옳다고 주장하는 것을 보고,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고 서로 자기가 만진 부분이 코끼리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신다. 여기서는 사성제(四聖諦)를 모르는 사람들을 장님으로 비유했다. 같은 경전이지만 ‘우다나’를 인용하는 것이 장님의 비유를 설한 이유가 분명하게 이해될 것이다.
첨부 하고 싶은 말은 장님의 비유를 사용한 이유를 자세히 알지 못하면서 이 비유를 엉뚱하게 사용하는 경우를 보게 된다.
하나는 정견을 가진 불자들을 장님으로 비유하는 것이다. 대화상대를 서로가 장님이라고 규정함으로서 타협과 설득이 쓸모없으며 불가능하다고 여긴다. 정견을 가진 사람들을 장님으로 비유하는 것은 대화의 단절을 가져오고 불자를 외도로 취급하는 결과가 된다.
두 번째는 원효의 ‘화쟁사상’처럼 '장님의 비유'를 모두가 맞고 모두가 그르다는 개시개비(皆是皆非)로 설명하는 것이다. 원효 스님은 이것을 교리적인 화쟁의 도구로 한정하여 사용하였는데, 요즘사람들은 이 개시개비를 불교와 이교도의 사상에까지 확장 대입하여 정견(正見)과 사견(邪見)을 동급으로 취급하며 그것을 ‘화쟁’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227p
십선업을 지켜라
[비평] 이 경은 ‘소라고둥 불기 경(S42:8)’을 인용한 것인데 단순하게 십선업(十善業)을 말하는 경이 아니다. 니간타의 주장처럼 시간의 양에 따라서 지옥에 간다면 아무도 지옥에 가지 않을 것이라고 부처님은 반박한다. 왜냐하면 아무리 거짓말쟁이라도 하루 24시간 중에 거짓말을 하는 시간보다도 거짓말을 안 하는 시간이 많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설사 십악업(十惡業)을 조금 지었더라도 그것에 집착하고 있으면 그 집착과 염려 때문에 그는 지옥에 가게 된다. 이전에 지은 악업에서 생각을 떠나서 이제부터라도 십선업을 지으면 이전의 십악업이 소멸된다. 이렇게 지난날 행한 악업에 대하여 죄의식에 빠져 번민하는 이들에게 희망을 주는 가르침이다. 이것을 단순히 ‘십선업을 지켜라’는 경으로 인용하는 것은 너무 아쉬운 태도이다.
229p
팔정도의 의미
‘예의를 믿고~자신이 성취한 일을 곧바로 모두에게 알려 설하는 것이 바른 견해입니다.’
‘힘찬 인연을 일으켜서는 닦는 것 등에 실증내지 않고 나아가서 마음에 굳게 지님이 바른 정진입니다.’
‘거짓이나 함께하지 않으려는 마음 없이 추구하는 것이 바른 마음 챙김입니다.’
[비평] 안세고가 번역한 ‘팔정도경’을 소개하고 있는데 위 인용문은 문장 자체가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어떻게 이런 문장으로 설명하는 팔정도를 <불교성전>에 실었는지 이해할 수 없다. 팔정도에 대한 정확한 경전이 있음에도 이런 번역을 싣는 다는 것은 이 편찬위원들의 자질을 의심하게 만든다. ‘위대한 마흔 가지 경(M117)’에서는 8정도를 아주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는데 이 경을 소개하는 것이 훨씬 낳을 것이다.
232p
오계는 위대한 보시이며 최초의 것으로 인정되었고, 오랜 세월 동안 유지되어 왔고, [부처님 등 성자들의] 계보라고 알려졌고, 오래된 것이며, 그것은 거부하면 안 되는 것이고, 과거의 [부처님에 의해서도] 거부되지 않았고, 현재에도 거부되지 않으며, 미래에도 거부되지 않을 것이며, 지혜로운 사문들과 바라문들에 의해서 비난받지 않는 것이다.
[비평] ‘넘쳐흐름 경(A8:39)’의 부분을 인용하였는데 계를 지키는 것이 왜 보시인가를 설명한다.
“여기 성스러운 제자는 생명을 죽이는 것을 버리고 생명을 죽이는 것을 멀리 여의었다. 생명을 죽이는 것을 멀리 여읜 성스러운 제자는 한량없는 중생들에게 두려움 없음을 베풀고 증오 없음을 베풀고 악의 없음을 베푼다. 그는 한량없는 중생들에게 두려움 없음을 베풀고 증오 없음을 베풀고 악의 없음을 베푼 뒤 두려움 없음과 증오 없음과 악의 없음을 나누어 가진다. 이것은 공덕이 넘쳐흐르고 유익함이 넘쳐흐르고 행복을 가져오고 신성한 결말을 가져오고 행복을 익게 하고 천상에 태어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원하는 것, 좋아하는 것, 마음에 드는 것, 이익, 행복으로 인도한다.”
불살생계를 지키는 것이 훌륭한 보시라는 것을 잘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자세한 설명을 소개하였다면 좋았을 텐데…. 단지 오계(五戒)가 보시(布施)라는 것만 이야기하니 아쉽다. 경전을 너무나 부분적으로 인용하는 폐단이라 할 것이다.
233p
정확하게 판단 후에 받아들이라
[비평] 유명한 ‘깔라마경’을 소개하고 있다. 유명한 경이고 중요한 경이기에 전체를 소개했으면 좋았을 것이다. 전체가 아니더라도 아래와 같은 부분은 포함되어야 한다. 이런 경전은 부분적으로 생략하여 인용하고, ‘천수경’, ‘치문’, ‘서장’, ‘초발심자경문’ 등이 많이 들어간 것이 아쉽다. <불교성전>에는 부처님 말씀으로 족하다. 다른 것은 다른 책에서 소개해도 된다.
“깔라마들이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사람의 내면에서 탐욕이 일어나면, 혹 성냄이 일어나면, 혹 어리석음이 일어나면 그것은 그에게 이익이 되겠는가, 손해가 되겠는가?
손해가 됩니다, 세존이시여,
깔라마들이여, 포악한 사람은 탐욕에 사로잡히고 성냄에 사로잡히고 어리석음에 사로잡히고 그것에 얼이 빠져 생명을 죽이고, 주지 않은 것을 갖고, 남의 아내에게 접근하고, 거짓말을 하게 된다. 또한 다른 사람에게도 그렇게 하도록 유도한다. 그러면 이것은 오랜 세월을 그에게 손해와 괴로움이 되지 않겠는가?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242p
삼십칠조도품(三十七助道品)을 닦아야 깨달음을 얻는다.
비구들이여, 예를 들어 여덟 개나 열 개나 열두 개의 계란을 품는다고 합시다. 이때 암탉이 계란에 바르게 앉아 품고 바르게 온기를 주고 바르게 다룹니다. 그렇지만 암탉에게 ‘오, 이병아리들이 발톱 끝이나 부리로 계란의 껍질을 잘 깬 뒤에 안전하게 뚫고 나오기를’ 이라는 소망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병아리들은 발톱 끝이나 부리로 계란의 껍질을 잘 깬뒤에 안전하게 뚫고 나올 것입니다.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이겠는가? 그 암탉이 계란에 바르게 앉아 품고 바르게 온기를 주고 바르게 다루웠기(다뤘기) 때문입니다.
비구들이여 그와 같이 수행에 몰두해 머무는 비구에게 ‘오, 참으로 나는 취착이 없어져서 번뇌로부터 해탈하기를’ 이라는 이러한 소망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취착이 없어져서 번뇌로부터 해탈합니다.
[비평] ‘도끼자루 경 (S22:101)’에서 인용한 것인데, 위와 같은 번역은 어색하다.
계란을 잘 품는 암탉은 소망이 없어도 계란을 잘 부화시키고 계란을 잘 품지 않는 암탉은 소망이 있어도 계란을 부화시키지 못하듯이, 수행을 열심히 하는 사람은 깨닫겠다는 소망이 없어도 깨닫게 되고, 수행을 열심히 하지 않는 사람은 깨닫겠다는 간절한 소망이 있어도 깨닫지 못한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므로 아래와 같은 문장으로 수정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비구들이여, 예를 들어 여덟 개나 열 개나 열두 개의 계란을 품는다고 합시다. 그 암탉이 계란에 바르게 앉아 품고 바르게 온기를 주고 바르게 다룹니다. 설사 암탉에게 ‘이 병아리들이 발톱 끝이나 부리로 계란의 껍질을 잘 깬 뒤에 안전하게 뚫고 나오기를’ 이라는 소망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해도(na evaṃ icchā uppajjeyya) 병아리들은 발톱 끝이나 부리로 계란의 껍질을 잘 깬 뒤에 안전하게 뚫고 나올 것입니다. 비구들이여 그와 같이 수행에 몰두해 머무는 비구에게는 ‘내가 취착이 없어져서 번뇌로부터 해탈하기를’이라는 소망이 일어나지 않더라도(na evaṃ icchā uppajjeyya) 그는 취착이 없어져서 번뇌로부터 해탈합니다.”
‘삼십칠조도품을 닦아야 깨달음을 얻는다’라는 제목보다는 ‘실천이 없는 생각은 쓸모가 없다’가 더 적당할 것이다. 전재성의 번역도 부정문(na evaṃ icchā uppajjeyya)을 번역하지 않아서 의도가 제대로 전달되지 못한다. 니까야 번역을 인용할 적에는 각 경전에 대한 치밀한 점검을 하고나서 인용해야 한다.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여덟 개나 열 개나 열두 개의 계란이 있는데 닭이 그것을 올바로 포옹하고 올바로 온기를 주면 올바로 부화시키는 것과 같다. 그 닭은 발이나 발톱이나 머리나 부리로서 계란의 껍질을 부수어 병아리로 안전하게 출생시키고 싶다면 바로 발이나 발톱이나 머리나 부리로서 계란의 껍질을 부수어 병아리로 안전하게 출생시킬 수 있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여덟 개나 열 개나 열두 개의 계란이 있는데 닭이 그것을 올바로 포옹하고 올바로 온기를 주면 올바로 부화시키기 때문이다. 수행승들이여, 만약 수행승으로서 수행을 게을리 하지 않고 집착 없이 번뇌에서 마음을 해탈하고자 하면 바로 집착없이 번뇌에서 마음을 해탈할 수가 있다.”
244p
“비구들이여, 이 도는 유일한 길이니 중생들의 청정을 위하고 근심과 탄식을 다 건너기 위한 것이며,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을 사라지게 하고 옳은 방법을 터득하고 열반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다. 그것은 바로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四念處]’이다.”
“무엇이 네 가지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身隨觀] ~법에서 법을 관찰하며[法隨觀] 머문다.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면서 근면하게,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는 자 되어 머문다.”
[비평] 위와 같은 정도의 사념처를 소개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경전 토막내기의 나쁜 예이다. 바로 이어지는 아래와 같은 문장을 넣었으면 불자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될 것이다.
“비구들이여, 어떻게 비구가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 머무르는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가 숲 속에 가거나 나무 아래에 가거나 외진 처소에 가서 가부좌를 틀고 몸을 곧추세우고 전면에 마음챙김을 확립하여 앉는다. 그는 마음챙겨 숨을 들이쉬고 마음챙겨 숨을 내쉰다. 길게 들이 쉬면서 ‘길게 들이 쉰다’고 꿰뚫어 알고(pajānāti), 길게 내쉬면서 ‘길게 내쉰다’고 꿰뚫어 안다. 짧게 들이쉬면서 ‘짧게 들이 쉰다’고 꿰뚫어 알고, 짧게 내쉬면서 ‘짧게 내쉰다’고 꿰뚫어 안다. ‘온 몸을 경험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 짓고(sikkhati) 온 몸을 경험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 짓는다. ‘신행(身行)을 편안히 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 짓고 ‘신행을 편안히 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 짓는다.”
245p
사여의족을 게을리 하지 말라.
비구들이여, 열정의 삼매와 노력의 행을 갖춘 여의족(如意足)을 닦습니다.
[비평] ‘게을리함 경(S51:2)’을 인용하였으나 ‘열의를 주로 한 삼매’를 ‘열정의 삼매’로 변경하는 등 몇 가지 단어들을 임의로 바꾸었다. 문제는 짧게 변경해 놓은 것이 이해하기가 더 어렵다는 것이다. 각묵의 번역은 아래와 같다.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열의를 [주로 한] 삼매와 노력의 의도적 행위[行]를 갖춘 성취수단을 닦는다. 정진을 [주로 한] 삼매와 노력의 의도적 행위를 갖춘 성취수단을 닦는다. 마음을 [주로 한] 삼매와 노력의 의도적 행위를 갖춘 성취수단을 닦는다. 검증을 [주로 한] 삼매와 노력의 의도적 행위를 갖춘 성취수단을 닦는다.”
265p
“도반들이여, 예를 들면 움직이는 생명들의 발자국은 그 어떤 것이든 모두 코끼리 발자국 안에 놓이고, 또한 코끼리 발자국이야말로 그들 가운데 최상이라고 불리나니 그것은 큰 치수 때문입니다. 도반들이여, 유익한 법은 그 어떤 것이든 모두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에 내포됩니다. 무엇이 넷인가요? 고성제 집성제 멸성제 도성제 입니다.”
[비평] 사성제의 정확한 이름은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 괴로움의 일어남의 성스러운 진리, 괴로움의 소멸의 성스러운 진리,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 닦음의 성스러운 진리이다. 괴로움이 4곳에 다 들어가 있다. 그러므로 한문으로 쓸 때에도 고성제, 고집성제, 고멸성제, 고멸도성제라고 불러야 한다. 집성제, 도성제라고만 불러왔기에 집(集)이 무엇인지 멸(滅)이 무엇인지에 대한 불필요한 이야기들이 발생하게 된다.
268p
‘이것은 고성제이다.’라고 나는 설명했습니다. ‘이것은 집성제이다.’라고 나는 설명했습니다. ‘이것은 멸성제이다.’라고 나는 설명했다. ‘이것은 도성제이다.’라고 나는 설명했습니다.
[비평] ‘말룽꺄 짧은 경(M63)’을 인용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성스러운 진리’라는 표현이 없고 단지 “‘이것은 괴로움이다.’라고 나는 설명했다. ‘이것은 괴로움의 일어남이다.’라고 나는 설명했다.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이다.’라고 나는 설명했다.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 닦음이다.’라고 나는 설명했다.”라고 나타나 있다. ‘이것이 집성제이다’라는 표현보다는 ‘이것은 괴로움의 일어남이다.’는 표현이 더 명확하고 와 닿는다. 또한 ‘말룽꺄뿟따’를 ‘만동자’라고 한다면 ‘사리뿟따’도 ‘사리동자’라고 번역해야 한다. ‘만동자’는 잘못된 번역인데 ‘말룽꺄뿟따’를 ‘만동자’라고 바꾸어 놓고 이것을 계속 사용하라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274p
불자여, 보살에게는 열 가지 무너지지 않는 믿음이 있다. 모든 부처님께 무너지지 않는 믿음과, 모든 부처님 법에 무너지지 않는 믿음과, 모든 성스러운 스님에게 무너지지 않는 믿음과...
[비평] <화엄경> ‘이세간품’에서 인용한 것으로 ‘모든 성스러운 스님에게 무너지지 않는 믿음’을 갖는다는 것은 ‘어일체성승불괴신(於一切聖僧不壞信)’을 번역한 것인데 여기서 ‘성승(聖僧)’은 ‘성스런 승가’로 번역 되어야한다.’ 왜 그런지는 아래 인용문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세존의 제자들의 승가는 잘 도를 닦고, 세존의 제자들의 승가는 바르게 도를 닦고, 세존의 제자들의 승가는 참되게 도를 닦으니, 곧 네 쌍의 인간들이요[四雙] 여덟 단계에 있는 사람들[八輩]이시다. 이러한 세존의 제자들의 승가는 공양 받아야 마땅하고 보시 받아야 마땅하며, 세상의 위없는 복밭[福田]이시다.’
287p
믿음의 힘으로 물위를 걷다
[비평] 내용을 보면 부처님이 신통력으로 만든 사람이 물 위를 걸은 것이지 일반사람이 부처님에 대한 믿음의 힘으로 물위를 걸은 것은 아니다. 마치 자신의 아름다움에 자만을 갖고 있던 케마 왕비를 제도하기 위해서 부처님이 아름다운 미녀를 창조한 후에 늙는 모습을 보여주었던 것과 같이 여기서도 부처님은 신통력으로 사람을 창조하여 물 위를 걷게 하고 있다.
그러므로 ‘믿음의 힘으로 물위를 걷다’는 제목은 적당하지 않고 ‘부처님이 신통력을 보여 믿음을 내게 하다’가 더 적당하다. 믿으면 물 위를 걸을 수 있다는 믿음, 절대주의에 불자들이 빠질까 염려된다. ‘보살의 길’이라는 제목 아래는 삼귀의를 믿음의 차원으로 설명하고 있는데 ‘믿음의 힘으로 물위를 걷다’는 제목으로 그것을 보여주려고 하는 것 같다. 그러나 삼보를 믿는 것으로만 설명하면 기독교에서 신을 믿는 거와 다를 바가 없다. 삼보에 대한 믿음은 삼보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 믿음이어야 한다.
295p
보시의 청정
[비평] ‘보시의 분석 경(M142)’에서 ‘보시의 청정’ 부분만 인용하고 있다. 그런데 이 경에는 개인에 대한 보시보다 승가에 대한 보시가 크며, 설사 그 승가가 계율을 지키지 않는 승가라 해도 공덕이 헤아릴 수 없다고 말한다. ‘승가’에 대하여 그리고 승가에 대한 보시공덕에 대하여 제대로 이해 할 수 있는 경인데 이 부분을 인용하지 않아서 아쉽다. ‘승가에 귀의하는 것’을 ‘스님들께 귀의 한다’고 가르치는 것이 잘못된 것이란 것도 이 경에서 확인 할 수 있다.
“아난다여, 그런데 일곱 가지 승가를 위한 보시가 있다. 부처님을 상수로 하는 [비구와 비구니] 두 승가에 보시하는 것이 첫 번째 승가를 위한 보시이다. 여래가 완전한 열반에 들고 나서 비구와 비구니 두 승가에 보시하는 것이 두 번째 승가를 위한 보시이다. 비구 승가에 보시하는 것이 세 번째 승가를 위한 보시이다. 비구니 승가에 보시하는 것이 네 번째 승가를 위한 보시이다. ‘승가에서 이 정도의 비구와 비구니들을 제게 정해주십시오.’라고 말하고 보시하는 것이 다섯 번째 승가를 위한 보시이다. ‘승가에서 이 정도의 비구들을 제게 정해주십시오.’라고 말하고 보시하는 것이 여섯 번째 승가를 위한 보시이다. ‘승가에서 이 정도의 비구니들을 제게 정해주십시오.’라고 말하고 보시하는 것이 일곱 번째 승가를 위한 보시이다.”
“아난다여, 미래세에 계행이 청정치 못하고 삿된 법을 가졌으며 노란 가사를 목에 두른 일족들이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승가를 위해 그 계행이 청정치 못한 자들에게 보시를 베풀 것이다. 아난다여, 그렇더라도 승가를 위한 보시는 그 [공덕이] 헤아릴 수 없고 잴 수 없다고 나는 말한다. 아난다여, 개인에게 하는 보시가 승가에게 하는 보시보다 그 과보가 더 크다고 나는 절대 말하지 않는다.”
305p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고 마음에 들어 하고, 선하고 참된 사람들이 가까이하고, 좋은 명성이 따르고, 재가자의 법으로부터 멀어지지 않고,
[비평] ‘보시의 이익 경(A5:35)’에서 인용한 것인데 ‘재가자의 법으로부터 멀어지지 않고’의 뜻이 애매하다. 영어번역처럼 ‘재가자의 의무를 소홀하지 않고’라고 번역하는 것이 이해가 쉬울듯하다.
이상으로 1차 40여개의 비평을 하였고, 2차로 25개의 비평을 하였다. 이상하다고 생각하였지만 근거를 찾지 못해서 언급하지 않은 것들도 많았다.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불교성전>이 잘못 편찬된 근본 이유는 편찬기준을 잘못 정했다는 것이다.
조계종 ‘의례위원회’에서도 한문 <천수경>과 <반야심경>을 우리말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한자음 발음을 선호하기 때문에 ‘아제아제 바라아제’를 ‘가떼가떼 빠라가떼’로 바꾸지 못하고 있다.
니까야가 번역되어 승가대학 교재로도 사용되고, <불교성전>에도 많이 인용하고 있으면서도 니까야의 발음만은 구마라즙 시대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다. 전체 종도들의 의견을 물어서 번역기준을 정해야 한다. 집단지성을 발휘하는 시스템을 구축하지 않으면 구성원간의 불협화음과 불필요한 에너지 낭비는 지속될 것이다.
한국불교는 너무나 다양한 전통을 가졌기에 오히려 ‘전통의 무게’에 신음하고 있다. 그 전통을 소화시키거나 ‘화쟁’시키지 못하고 단순히 모아놓는 것으로 책임을 다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것과 같은 어리석음이다.
어떤 이는 종단본 <불교성전>을 비평하지 말고 독자적으로 ‘불교성전’을 만들어 보라고 충고한다. 그러나 종단본 <불교성전>을 완전에 가깝도록 돕는 것이 종도의 도리이다. 종단본 <불교성전>이 불완전하다고 개인적으로 불교성전을 만든다면 승가의 일원이기를 포기하는 것이다. 우리는 동일한 계단(戒壇)에서 계를 받았고, 동일한 교재로 교육을 받았고, 같은 종단 소속의 사찰에서 수행하며 살고 있다. 종단과 승가는 포기하거나 버릴 존재가 아니라 칭찬하고 제안하고 비판하고 토론하며 언제까지나 함께 가야 할 대상이다. 설사 종단문제를 비판하다가 징계를 받았다 하더라도 이것을 승가공동체회복을 위한 과정으로 생각한다.
종단은 <불교성전>의 미비한 점을 인정하고, 재편집하는 용기를 보여주기 바란다.
허정 스님/전 조계종 불학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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