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백장암 하안거 '불교성전' 공부, 10회 나눔(매주 목요일, 7월 7일 목요일은 선지식 초청으로 하루 쉼)
1회 5월 26일 목요일 자애경
2회 6월 2일 목요일 p1~74
3회 6월 9일 목요일 p75~133
4회 6월 16일 목요일 p134~194
5회 6월 23일은 목요일 p195~269
6회 6월 30일 목요일 p273~340
7회 7월 14일 목요일 p341~415
8회 7월 21일 목요일 p416~532
9회 7월 28일 목요일 p535~620
10회 8월 4일 목요일 p621~6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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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성전 비평하다(종합)’
‘불교성전’ 비평 1~74p
5p.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합니다."
[비평] '승가'라는 단어는 '모임'이라는 뜻으로 부처님 당시에 사용되었던 단어이다.부처님은 물론 뿌라나 깟사빠등 육사외도에게도 승가를 가졌고(saṅghī) 무리를 가졌고(gaṇī)라는 단어들이 사용되었다.
“폐하, 뿌라나 깟사빠라는 분이 있는데, 그는 승가를 가졌고 무리를 가졌고 무리의 스승이며 지자요 명성을 가졌고 교단의 창시자요 많은 사람에 의해서 사두로 인정되며 노련하고 출가한 지 오래되었으며 연로하고 삶의 완숙기에 이르렀습니다.“ayaṁ, deva, pūraṇo kassapo saṅghī ceva gaṇī ca gaṇācariyo ca ñāto yasassī titthakaro sādhusammato bahujanassa rattaññū cirapabbajito addhagato vayoanuppatto.사문과경(D2 )
그런데 부처님은 이 승가(saṅgha)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셨다. 그래서 saṅgha는 보다 복잡한 의미를 가지게 되었으며 상가의 어원을 분석해도 그 뜻이 시원스럽게 드러나지도 않는 단어가 되었다. 이것이 번역가들이 붓다(Buddha) 담마(Dhamma) 상가(Sangha)를 번역하지 않고 소리나는 대로 불타, 담마, 승가라고 음사한 이유다. (담마는 법(法)이라고 번역되었지만 담마에는 진리,이치,현상,규칙,가르침,심리현상,사건등의 뜻이 있기에 법(法)이라는 번역은 부족하다) 붓다(Buddha) 담마(Dhamma) 상가(Sangha)의 어원을 분석한다고 해서 붓다 담마 승가의 뜻이 드러나지 않는다. 이 용어들은 이전부터 사용되고 있었으나 부처님이 새로 의미 규정하여 사용한 단어들이기 때문이다. 붓다라는 의미를 알기 위해서 여래십호, 18불공법등의 설명이 필요하고 승가에 대해 알기 위해서는 율장의 여러가지 설명이 필요하다. 자동차 부품이 모여놓았다고 자동차라고 부르지 않듯 '승가'를 '스님들'이라고 부를 수 없다. 승가라는 용어에는 부처님 제자들의 모임이라는 뜻 외에 의지처, 공유(무소유), 평등, 자율, 자발, 자율, 민주, 화합(육화),참회를 통한 청정등의 내용이 녹아있다. 그래서 승가야중,귀의불법승등 음사하는 경우가 많았다. 불교도들에게 승가는 너무 중요한 단어인데도 그 뜻을 정확히 알고 있는 이가 드물다. 심지어 니까야를 번역하는 이들에의해서 승가에 대한 오해들이 더 확산되기에 이르렀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대한불교조계종에서는 승가를 "스님들" "거룩한 스님들" "성인들"이라고 이해하는 사람들도 있고, 재가자도 포함되는 "공동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승가'에 대한 이해가 없는 상태에서 '종헌종법'을 만들었으므로 종헌종법에는 많은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고 '종단 운영'면에서도 부처님의 가르침과 어긋나는 일들이 수시로 벌어지게 되었다. 승가라는 의미를 잘 안다고 생각하는 스님들이나 학자들도 막상 승가의 의미를 물어보면 혼란스런 경우가 많다. 스스로가 승가에 대해서 이해를 잘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아래 질문에 대답해보시라. 승가의 의미를 가르치지도 배우지도 않는 조계종에서 아래에 대한 답을 하는 것은 쉽지 않으리라.
첫째 삼귀의 때 승가에 귀의하는 것인가 승보에 귀의하는 것인가?
둘째 승가 혹은 승보에 재가자도 포함되는가? (초기불교와 대승불교의 입장에서 각각 설명한다면)
셋째 대한불교조계종은 현전승가인가? 사방승가인가?
넷째 경장에서 설명하는 승가와 율장에서 설명하는 승가는 같은가?
다섯째 현전승가에서는 어떤 일을 다수결로 결정할 수 있는가?
여섯째 붓다, 승가, 백명의 아라한,백명의 아나함, 한명의 벽지불, 한명의 무심도인중에서 보시공덕이 큰 대상을 순서대로 적어 보셔요.
일곱째 승가의 화합을 위하여 필요한 핵심정신은 무엇인가?
사종삼보(四種三寶): 이체삼보(理體三寶), 화상삼보(化相三寶), 주지삼보(住持三寶), 일체삼보(一切三寶)이다.
첫째, 이체삼보에서 불보는 오분법신을 말하는데 계·정·혜는 인을 쫓아서 이름한 것이고 해탈과 해탈지견은 과를 쫓아서 이름한 것이다. 법보는 사제(四諦) 가운데 멸제의 무위법이며 승보는 성문(聲聞)의 초과에서 3과(아나함)까지는 나누어서 진제를 보고, 무학인 제4과(아라한)에서는 한 가지로 진제를 보는 공덕이 있으므로 이화합승(理和合僧)이라 한다.
둘째, 화상삼보에서 불보는 부처님께서 사바세계에 오셔서 이 세계에 계시므로 화신여래로써 주를 삼은 것이고, 법보는 부처님께서 연포(演布)하신 사제 등의 가르침을 뜻하고, 승보는 교진여 등 녹야원에서 처음 제도된 5비구 등을 말한다.
셋째, 주지삼보에서 불보는 형상으로 이루어진 탑이나 부처님 형상 등을 말하며, 법보는 전적으로 전하는 삼장의 성스러운 가르침을 말하며, 승보는 계법(戒法)을 통해 구족된 승체(僧體)와 삭발염의를 통해서 나툰 승려의 모습을 말한다.
284p에서처럼 만일 법을 계속 생각할수 없다면 "세존의 제자들의 승가는 잘 도를 닦고, 세존의 제자들의 승가는 바르게 도를 다꼬, 세존의 제자들의 승가는 참되게 도를 닦고, 세존의 제자들의 승가는 합당하게 도를 닦으니 곧 네 쌍의 인간들이요, 여덟 단계에 있는 사람들이시다. 이러한 세존의 제자들의 승가는 공양 받아 마땅하고, 선사받아 마땅하고, 보시받아 마땅하고, 합장받아 마땅하고, 세상의 위없는 복밭이시다."라고 승가를 계속 생각하라는 표현에서 성인의 과위를 얻은 출가자만 승가에 포함되며 승보에만 귀의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분들도 있다. 그러므로 승가의 의미를 명확하게 알기 위해서 아래 질문에 답해보자
첫째 승가에 귀의하는 것인가 승보에 귀의하는 것인가?
둘째 승가 혹은 승보에 재가자도 포함되는가?(초기불교와 대승불교의 입장에서 각각 설명한다면)
셋째 대한불교조계종은 현전승가인가? 사방승가인가?
넷째 경장에서 설명하는 승가와 율장에서 설명하는 승가는 같은가?
다섯째 현전승가에서는 어떤 일을 다수결로 결정할 수 있는가?
여섯째 승가, 붓다 ,백명의 아라한,백명의 아나함, 벽지불,무심도인중에서 보시공덕이 큰 순서대로 적어 보셔요.
일곱째 승가의 화합을 위하여 필요한 핵심정신은 무엇인가?
*참조할 글 셋: 승가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승가에 대한 오해들'( https://blog.daum.net/whoami555/13742914)이나
'삼귀의 한글화 문제점'(https://blog.daum.net/whoami555/13742831),
그리고 '승가에 대한 7가지 질문과 답변'(https://blog.daum.net/whoami555/13742938)
5p. 살아있는 생명을 죽이지 말라. 주지 않는 물건을 가지지 말라......
[비평] 계는 자발적으로 받아야 한다. 이렇게 "~하지 말라"고 표현해 놓으면 부처님은 명령하는 분이고 불자들은 복종하는 자들이 된다. 아소까 석주에서 아소까왕은 "사람들을 가르치는데 '규제'하는 것과 '권고'하는 방법이 있는데 규제는 보다는 권고가 훨씬 더 효과적이다. '열심히 한 권고'에 의해 생명을 해치지 않고 동물을 죽이지 않는 것이 상당히 증진됐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오계는 재가자가 원해서 자발적으로 받는 것이고 오계를 받을 때 재가자는 "살아있는 생명을 해치지 않겠습니다" 혹은 "살아있는 생명 해치는 것을 멀리하는 계를 받아 지키겠습니다" 라고 맹세한다. 오계의 표현이 ~하자 말라는 표현보다는 자발적인 결의가 나타나는 표현이 되는것이 더 불교적이다. 이책 316p 오계받는 법에는 '살생을 하지 않는것이'라고 나타나며 600p에 생명을 죽이는 것을 멀리 하고, 주지않는 것을 가지는 것을 멀리하고 삿된음행을 멀리하고,삿된음행을 멀리하고..라고 나타난다.
“Yato kho, mahānāma, upāsako pāṇātipātā paṭivirato hoti, adinnādānā paṭivirato hoti, kāmesumicchācārā paṭivirato hoti, musāvādā paṭivirato hoti, surāmerayamajjappamādaṭṭhānā paṭivirato hoti—ettāvatā kho, mahānāma, upāsako sīlasampanno hotī”ti.마하나마 경(S55:37)
" 명령형으로 번역된 계목에는 심각한 문제점이 있다. 율장의 전문을 살펴 보면 부처님께서는 계율을 제정하실 때, '어떤 행위는 단두다.' 라고 해당 범법을 명시했을 뿐이고, 추가로 보완 제정하실 때에도 '지금부터는 어떠어떠한 것을 용인한다. 라고 금지 내용을 표현하셨다. 다른 한편으로, 5계 중에 '不殺生'을 우리나라 승단에서는 '살생하지 말라. 라고 번역하고 있다. 이것은 아마도 타종교의 계시적인 율법이나 일반적인 법령의 강제적인 표현에 암암리에 영향 받은 것으로 보이는데, 이것은 불교의 '自誓受戒' 정신을 크게 훼손하는 잘못된 번역이다. 불살생은 한문 어법으로도 '살생하지 않는다.'라고 번역해 야 맞다. '~하지 말라. 라는 부정 명령형에는 보통 莫이나 勿을 사용한다. 범본에도 부정 명령형으로 되어 있지 않아서 한역자들도 부정 평서형으로 번역한 것이다.(팔리 경전에서 5계 중에 불살생은 'panatipata veramani' '생명을 해치 는 것을 멀리한다. '로 되어 있다. 물론 나머지 계율도 같은 형식과 내용으로 나온다.) (성념번역 사분율계본 77p)
【pabca sikkhapadani】 五學處 (five steps of training, five moral rules)
‧panatipata veramani 離殺生 (abstaining from killing living beings)
‧adinnadana veramani 離不與取 (abstaining from taking what is not given)
‧kamesu micchacara veramani 離邪淫 (abstaining from misconduct in
sensual pleasures)
‧musavada veramani 離妄語 (abstaining from lying or false speech)
‧sura-meraya-majja-pamadatthana veramani 離種種酒類--放逸之根本
(abstaining from wine, liquor,and intoxicants, which are the basis of negligence)
7p. 설산에서 6년의 용맹정진끝에
[비평] 설산에서 6년 수행하지도 않았을뿐만아니라 고행의 무익함을 보고 고행을 포기해버리자 오비구는 실망하여 떠나버렸다. 마치 고행을 용맹정진이라 표현하고 고행으로 깨달은 것처럼 오해하게 만드는 문장이다. 그리고 종정스님의 법문의 결론은 화두 참선하라는것인데 왜 이런 것을 불교성전에 실었나 모르겠다. 불교성전의 전체적인 내용은 초기경전의 37조도품을 설명하고 있고 대승경전등을 아우루고 있으므로 선불교의 화두참선을 강조하는 것은 내용상 알맞지 않다.
12p. “종단본 불교성전은 각 주제별로 초기경전 대승경전 선어록 등을 망라하여 수록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의 주제안에서 여러불교의 전통의 교리를 한눈에 볼수 있는 장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비평] 2600년 불교역사속에서 나타났던 여러 가지 불교경전을 사상의 맥락과 표현방법을 고려하지 않고 수록하는 것이 장점이라고 할수 있을까? 만약 경전과 경전의 내용이 이질적이고 모순적이라면 그 혼란과 갈등을 재가자들이 어떻게 감당할수 있겠는가? 포교원장과 편찬위원들은 이렇게 경전을 모아 놓는 것에 대해서 갈등과 이견이 없었단 말인가?
포교원장이 장점이라고 말하는 지점을 다른사람들은 “종단본 불교성전은 하나의 주제안에서 여러불교의 전통을 용어통일 없이 그리고 사상의 맥락에 대한 검증없이 모아놓았기에, 불교를 처음 접하는 사람들에게는 황당함을 안겨주고, 기존의 불자들에게는 혼란을 가중시키는 단점을 가지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건 아닌가?
41p.선혜의 안타까운 마음을 살피신 연등부처님이 땅을 진창으로 만드시자 발이 더럽혀 질까 염려한 사람들이 양쪽으로 갈라섰다. ...어찌 그대의 머리카락을 밝을 수 있겠는가?라며 사양하자 선혜는 말했다. 부처님 만이 밟을 수 있습니다.
[비평] 선혜의 안타까운 마음을 살피신 연등부처님이 땅을 진창으로 만드시자 발이 더럽혀 질까 염려한 사람들이 양쪽으로 갈라섰다(菩薩欲前散花,不能得前。佛知至意,化地作泥,人衆兩披) 수행본기경 1권에 나오는 이야기지만 연등부처님이 일부러 땅을 진창으로 만드는 설명은 부자연스럽다.수행자의 머리카락을 밟은 것이 얼마나 큰 공덕이 되기에 이사건 이후 수기를 받는가? 부처님과 수십만 제자가 선혜의 등짝을 밟고 지나갔다고 하면 힘든 고행이 될 것인데 여기서는 머리카락만을 밟은 것으로 나온다. 부처님과 제자들이 등짝을 밟고 지나갔다고 하면 현대인들은 가혹행위라고 비판할 것이요, 머리카락만 밟고 지나갔다면 그게 무슨 큰 공덕인가라고 의문이 들것이다.
49p. 인욕하는 수행자의 전생이야기
[비평] 불교성전에는 포악한 가리왕이 인욕수행자의 두손을 자를때 인욕수행자는 삼매와 사무량심을 얻지 못한 범부였지만 마음이 고용하여 흔들리지 않았다고한다. 그런데 금강경에서는 인욕선인이 아상,인상,중생상, 수자상이 없었기에 화를 내지 않았다고 다고 나온다. 이렇게 다르게 설명하면 불자들은 어떤 설명을 따라야 할까?
須菩提 如我昔爲歌利王 割截身體 我於爾時 無我相 無人相 無衆生相 無壽者相
수보리 여아석위가리왕 할절신체 아어이시 무아상 무인상 무중생상 무수자상
何以故 我於往昔節節支解時 若有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 應生嗔恨
하이고 아어왕석절절지해시 약유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 응생진한
54p. 모든 것은 무상하니 이것은 일어나고 사라지는 법이다. 일어나고 사라짐이 소멸하면 열반의 즐거움이다.
[비평] 석가모니 부처님이 깨닫기 전에 나찰이 읊은 이 게송은 아라한의 경지에서 읊는 것이다. 제석천이 변한 나찰이 아라한의 경지를 얻은 것인가 아니면 어디서 누구에게 들은 것인가? 후에 깨닫는 부처님의 게송을 나찰은 어떻게 알고 있었는가?
61p.
며칠이 지나 나라의 현자들을 불러 태자를 보이자 그들은 하나같이 이렇게 예언했다. "대왕이시여, 이 아기는 위대한 사람이 지니는 서른두가지 신체적 특징, 즉 삼십이상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런 모습이 있는 분에게는 두 가지 길이 앞에 놓여 있으니, 속세에 계시면 왕 중의 왕이라 불리는 전륜성왕이 되어 온 세상 사람을 바른 법으로 다스릴 것입니다. 만약 집을 떠나 출가한다면 반드시 위없는 아라한(應供), 완전히 깨달은 분(正等覺), 명지와 실천을 구족한 분 [明行足], 피안으로 잘 가신 분(善逝), 세간을 잘 알고 계신 분(世間解], 가장 높은 분(無上士), 사람을 잘 길들이는 분(調御丈夫), 하늘과 인간의 스승(天人師), 부처님(佛), 세존(世尊)이 되실 것입니다.
[비평]---부처님의 10호를 그 당시의 브라민들의 입에서 나온 것으로 소개하고 있다. 이러한 설명은 부처님의 10호를 브라민들이 알고 있었다는 말이된다. 베다와 우파니샤드 그리고 자이나교 경전들에 여래십호가 나타나있는가? 여래십호는 부처님의 사성제와 12연기등의 가르침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일례로 명지와 실천을 구족한 분 [明行足]이란 삼명육통(三明六通)을 성취한 것인데 이것을 성취하거나 이것의 구체적인 내용을 설명할수 있는 것은 부처님들이다. 사성제와 12연기를 설명하지 못했기에 부처님은 브라만교를 부정한 것이고 그들의 사상이 진리가 아니라고 설명하셨다. 부처님들만이 가지는 여래10호를 아시타 선인등이 미리 알고 있는 것처럼 설명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여래십호는 역대 부처님들을 부르는 이름으로 위빳시 부처님에게 불려진 것으로 나타난다. 474p에는 법온족론에서 설명하는 여래십호를 보여주고 있다. "의미와 형식을 갖춘 설법"도 전도선언에 나타나는 표현이다.
불소행찬
마침 그 때 그 근처 동산에는
아사타(아사타)라 이름하는
고행을 실천하는 선인이 있었는데
관상 보는 법을 잘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왕궁의 문 앞에 와서 왕에게 말했다.
“범천이 응한 상이며
고행으로 바른 법 닦기를 좋아할 상으로서
이 두 가지 상을 다 드러내고
범행의 상을 두루 갖추었다오.”
.....그러자 그 때 그 선인은
왕을 향해 진실을 말하였다.
“틀림없이 왕께서 걱정하는 것처럼
장차 정각도를 이룰 것입니다.”
63p. 사문유관상
[비평] 사문유관을 하는데 제석천이 변하여 나타나 도와 준다는 설명은 자연스럽지 않다. 출가하는 장면도 마찬가지.
71p. 믿음이 있어 머리를 깍고 여래의 옷을 입으며 속가를 떠나 열반의 길에 오르기 때문에 출가하였다고합니다.
[비평] 부처님이나 제자가 아닌 자에게 여래의 옷을 입었다고 표현하는 것은 타당한가?
74p. 생로병사를 벗어나지 못하면 영원히 이런 인연속에서 살지 않으리라
[비평]생로병사를 벗어나지 못하면 영원히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리라
75p. 설산수도상
사문 고타마는 먼저 당시 명상 지도자였던 알라라 칼라마와 웃다카 라마풋타를 찾아갔다. ...니련선하 근처로 갔다.
[비평]----싯타르타가 왕궁의 동문에서 출발하여 밤사이에 아노마강을 건너고 다시 웨살리와 라자가하로 내려와서 알라라 칼라마와 웃다카 라마풋타를 만났다. 알라라 칼라마와 웃다카 라마풋타를 만나고 나서 니련선하강 근처에서 6년 고행하였다. 그가 웨살리와 라자가하로 남하한 것은 분명 당신이 만나볼 만한 수행자들이 그곳에 있다는 정보가 있었을 것이다. 흔히 부처님의 일대기를 그림으로 표현하는 팔상도(八相圖)에서 부처님의 수행을 설산수도상(雪山修道相)으로 표현하는 것은 마치 싯타르타가 희말라야 설산에서 6년 수행한 것처럼 오해하게 만든다. 왜 이런 오해가 생겨났을까? 그것은 전재성거사의 다음과 같은 번역 때문인 것이다.
“왕이여, 저쪽 히말라야 중턱에 한 국가가 있습니다.
꼬쌀라 국의 주민으로 재력과 용기를 갖추고 있습니다.”(Stn.422)
Ujuṃ jānapado rājā himavantassa passato,
Dhanaviriyena sampanno kosalesu niketino.
여기서 "히말라야 중턱에는" “저쪽에 히말라야가 보이는(himavantassa passato) 한 나라가 있습니다."라고 번역해야한다. 다른곳에서는 “한때 세존께서 꼬쌀라 국의 히말라야가 보이는(himavanta passe) 숲속 꾸티에 머무셨다.”라는 설명도 보인다. 히말라야는 워낙 거대하고 유명하기에 히말라야를 랜드마크로 언급하여 장소를 설명하는 것이다. 예를들어 충청도의 수덕사를 외부에 소개할 때 ‘예산 수덕사’라고 표현한다. 그러나 막상 예산터미널에 내려서 수덕사를 찾아보면 수덕사는 없다. 수덕사는 예산에서 멀리 떨어진 덕산면 사천리에 있는데 정확하게 설명한답시고 ‘사천리 수덕사’라고 말하면 알아듣는 사람이 거의 없게 된다. 이처럼 설산수도상은 ‘설산이 보이는 어딘가에서 수도했다’는 말이지 설산으로 들어가서 눈쌓인 동굴에서 수행했다는 말이 아니다. 전재성거사는 ‘히말라야가 보이는’으로 번역하지않고 “히말라야 중턱”이라고 번역하고 있는데 이러한 번역들은 싯타르타가 설산에서 수도했다는 오해를 불러들이게 하고 있다.
그리고 고타마, 알라라 칼라마, 웃다카 라마풋타, 파타차리는 영어발음이다. 니련선하, 파사익은 한문으로 번역할 때 정착된 발음이다. 짜빨라 탑묘(136p),빠와마을(138p), 삡팔리(144p)는 빠알리어 발음이다. 이렇게 하나의 교재에서 때로는 영어발음, 때로는 한문음사 때로는 빨알리어 발음을 자유롭게 사용하고 있다. 종단차원에서 책을 이렇게 만드는 것은 무책임한 것이다. 2012년 교육원에서 나온 <부처님 생애>에는 고따마, 알라라 깔라마, 웃따까 라마뿟따, 네란자라, 빠따짜리등 빨리어 발음을 따르고 있다. 포교원에서 출판한 <불교입문>등은 빨리어 발음을 따르지 않는 책을 출간했왔는데 이번에는 여러가지 다른 발음이 섞여있는 불교성전을 출판했다. 같은 종단 소속 포교원과 교육원에서 다른 기준으로 책을 출판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79p. 보리수 아래로 나아가다
다섯 수행자가 떠나고 홀로 남은 사문 고타마는 깨달음을 이룰 자리를 찾아 나섰다. 가야 지방의 니련선하 강변에서 숲이 우거진 산을 바라보다 평평하고 깨끗한 곳을 발견했다. 그곳에는 보리수 한 그루가 높이 자라나 있었는데 가지와 잎들이 무성하고 고운 빛깔의 꽃이 만발하였다.
[비평]니련선하 강변에서 보리수 아래로 나아가면서 보이는 '숲이 우거진 산'은 없다. 또한 보리수나무는 무화과에 속하는 식물로서 '고운 빛깔의 꽃'이 만발할 수가 없다.
79p.길상이 물었다. "왕좌도 버리고 호화로운 궁전도 버렸으면서 이 거친 풀을 어디에 쓰시려 하십니까?"
[비평]처음 만난 길상이 싯타르타의 과거를 자세히 말고 있는 것이 어색하다.
81p. 나는 사유를 다스리고 '알아차림'을 잘 확립해 ......그대는 싫어하겠지만 나의 제자들은 나태하지 않고 노력하며 내 가르침을 실행하면서 슬픔없는 경지에 도달하겠다.
[비평]--슬픔 없는 경지에 '도달할 것이다'. 이책의 다른 곳에서는 사띠(sati)를 마음챙김(正念)이라고 번역하고 삼빠잔냐(sampajañña)를 알아차림(正知)이라고 번역하고 있지만 여기서는 사띠(sati)를 여기서는 '알아차림'으로 번역하고 있다. 용어가 통일되면 좋을 것이다.
88p. 부처님은 나무 아래로 가셔서 그곳에서 두발을 맺고 앉아 해탈의 즐거움을 누리셨다.
[비평] 부처님은 정각후에 7일식 나무를 올겨나니며 49일동안 깨달음을 음미하셨다. 위 문장은 보리수에서 나무를 옮기신 것을 표현하는 것인데 정확하게 며칠째 어떤 나무아래서 보리죽을 받으셨는지 설명하면 좋을 것이다. 토론중에 여담으로 불교성전 91p "사함빠띠 범천은 잠깐 사이에 천상세계를 떠나 부처님 앞에 나타나 합장하고 청하였다."라고 나타나는 범천권청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몇 스님은 세존의 내면에 일어난 심적 갈등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천싱의 존재를 인정하는 스님이 답했다. 알라라 깔라마가 죽은지 칠일이 되었다는 것을 천신이 말하고 그다음 부처님이 지혜의 눈으로 스스로 알았다. 천신의 존재가 심리적 상태라면 이렇게 두가지로 묘사하지 않았을 것이다.
"[천신] “세존이시여 알라라 깔라마는 죽은 지 이미 칠일이 되었습니다"
세존께도 역시 ‘알라라 깔라마는 죽은 지 이미 칠일이 되었다.’라는 앓이 일어났다. 그래서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생각했다.
[세존] ‘알라라 깔라마는 그 성품이 위대했다. 만약 그가 가르침을 들었다면,신속하게 이해했을 것이다."
다른 여담으로 부처님이 그 많은 중생구제의 일념으로 그 오랜 동안 난행고행으로 바라밀을 닦으셨는데 깨닫고서 설법을 망설였다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는 다는 견해가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해가 가는 측면이 있다. 부처님도 깨닫기전에는 깨달음의 상태가 이렇게 중생의 생존욕망과 반대되는 것인줄 몰랐을 것이다. 윤회의 모태에 태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생명들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95p. 요컨데 존재 자체(五取蘊)가 괴로움입니다.
[비평] 오취온의 설명을 이렇게 하면 불교가 너무 허무주의 종교로 오해 받는다. (고경스님)
95p. 그때 부처님께서는 "참으로 교진여는 완전하게 알았구나! 참으로 교진여는 완 하게 알았구나!"라고 찬탄하셨다. 이렇게 해서 그는 '깨달은 교진여'라는 뜻의 '아야교진여'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비평]----‘꼰단냐’를 ‘교진여’, ‘안냐 꼰단냐(Añña Kondañña)’를 '아야교진여'라고 나타난다. 국제화시대, 정보화시대에 왜 우리 종단은 과거 정보부족으로 정착된 이름들을 고집할까? 세계불자인들이 공통적으로 사용하고 국제 학술세미나에서 사용하는 이름으로 불러야 소통이 쉬울텐데... 옛 발음을 고집하는 것은 누구를 위한 배려일까? 노인불교를 위하기 때문이라면 세계와 소통하는 불교, 청년들의 불교는 포기하는 것인가? '아야교진여'를 생동감있게 듣자면 ‘아야!’ 아프다고 외치는 ‘교진여’라고 오해될 수도 있다.
95p.다섯비구와 함께 머물며 가르침을 베푸셨고 다섯비구는 모두 최고의 성자인 아라한이 되었다.
[비평] 중간에 '무아상경'을 설명하지 않고 아라한이 되었다라고 설명한다. 무아상경은 너무도 중요한 경전인데 그 중요한 경전을 소개하지 않았다는 것이 참으로 아쉽다.
105p. 석가족 출신의 우다야는 세존께 아뢰었다.
[비평]-까삘라왓투 출신인 우다이(udāyī)를 깔루다이(Kāludāyī)라고도 하는데 얼굴이 검었기(Kāla) 때문이라 한다. 그는 부처와 같은 날에 태어나 그의 동료로 자랐다. 정반왕이 여섯명의 신하를 보냈는데 그들은 부처님의 설법을 듣자마자 모두 아라한이 되어 사명을 잊었다. 마지막으로 어릴적 소꼽친구인 깔루다이를 보내어 붓다를 고향에 초청하였는데 우다이는 정반왕과의 약속을 잊지 않고 붓다에게 고향에 갈것을 권했고 부처님은 고향을 방문하게 된다. 우다야(Udaya)는 다른 사람이며 경에서는 여러명의 우다야가 등장한다.
109p. 다자(多子)라는 신을 모시고 제사지내는 곳을 지나게 되었는데
[비평]-다자탑(Bahuputtaka cetiya)은 가지가 많은 반얀나무가 있는 곳을 말하는데 사람들이 나무신에게 아들을 낳게 해달라고 빌던 곳이라 한다. 다자(多子)라는 신이 있는 것처럼 설명하는 것은 적당하지 않다.
[pali 고유어 사전 설명]Bahuputta , Bahuputtaka cetiya A shrine in the neighbourhood of Vesāli, to the north of that city (D.iii.9). The Buddha is said to have stayed there (D.ii.118;, Ud.vi.1; S.v.259). It was a pre Buddhist shrine and, according to the Commentaries (E.g., UdA.323; SA.ii.128, etc.), was a many branched nigrodha tree where persons prayed for sons to the deva of the tree. Hence its name.
111p. 가섭은 제자이기 때문에 스승의 거친 옷을 받았고 쉬지 않고 정진해서 최고의 성자인 아라한이 되었다.
[비평]-110p에 8일 만에 아라한이 되었다고 해놓고 이렇게 쉬지 않고 정진해서 아라한이 되었다고 설명하는 것은 불필요해 보인다. 또한 "가섭이 입고 있는 묘한 옷을 받으셨다"는 표현도 적절해 보이지 않는다.
112p. 기타왕자와 급고독장자가 힘을 합해 건립한 사원이 바로 기원정사로 석가모니 부처님은 훗날 24안거를 이곳에서 보내시며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법문을 베푸셨다.
[비평]---정확히 말하면 부처님은 기원정사에서는 18안거를 보내셨고, 나머지는 위사카가 세운 동원정사에서 머무셨다. 사위성에서 24안거는 맞지만 기원정사에서 24안거는 틀리다.
113p. 세존에게 보시하는 것보다 ‘세존앞에서 승가에 공양한다면’ 그것은 더 커다란 과보를 가져올 것입니다.
[비평]----웰라마 경(A9:20)의 부분을 인용한 문장인데 전재성의 번역이다.
그런데 yo ca buddhappamukhaṃ bhikkhusaṅghaṃ bhojeyya를
전재성은 ‘세존앞에서 승가에 공양한다면’으로 번역하였고 각묵은 ‘부처님을 상수로 하는 비구승가를 공양한다면’으로 번역하였다. '붓다빠무캄'이 '비구상감'을 수식하는 단어이기에 둘다 목적격으로 사용되었다. pamukha는 수장(首長),상수(上首)의 뜻이므로 각묵스님의 번역이 올바르다. 원래 전재성의 번역은 ‘깨달은 님 앞에서 수행승의 참모임에 공양한다면’인데 <불교성전>은 이것을 ‘세존앞에서 승가에 공양한다면’이라고 수정한 것이다.
나는 ‘세존’이라는 용어가 등장하길래 각묵스님의 번역인 줄 알았다. 이처럼 <불교성전>은 각 번역자의 번역을 편찬자의 의도대로 수정하여 실었는데 하필이면 잘못 번역된 것을 가져온 것이다. '불교성전편찬위'는 니까야를 인용할때 니까야경전이 제대로 번역된 것인지를 먼저 확인하는 작업을 했어야 했다. 잘못된 번역이 있다면 <불교성전>에 그대로 실리기 때문이다.
또한 gandhohanamattampi mettacittaṃ bhāveyya를
전재성은 ‘단지 스치는 향기처럼이라도 자애의 마음을 닦는다면’으로
각묵은 ‘소젖을 한번 짜는 동안만큼이라도 자애의 마음을 닦는다면’이라고 번역했는데 간다(gandha)는 꽃향기, 우하나(ūhana)는 잠깐이라는 뜻이기에 전재성의 번역이 올바르다. <불교성전>은 전재성 번역을 따랐으나 ‘꽃향기가 잠시 스치는 것처럼 짧은 순간에 세상을 향해 자비심을 품는다면’이라고 수정하여 실었다. gandhohanamattanti gandhaūhanamattaṃ, dvīhaṅgulīhi gaṇḍapiṇḍaṃ gahetvā upasiṅghanamattaṃ.
118p. 살인자 앙굴리 말라를 교화하다
[비평]--‘5절 법의 바퀴를 굴리다’(90p~133p)는 부처님의 생애를 성도후부터 열반까지 시간 순서대로 기술하고 있다. 부록에 ‘불교사 연표’에서는 39세때 벌어진 바이샬리 전염병 퇴치사건이 일어나고(120p), 아누룻다가 눈이 멀게 된 이야기(128p)가 일어나고, 56세때 앙굴리말라 사건(118p)이 일어났기에 일어난 사건 순서대로 배열해야 하건만 바이샬리 전염병 퇴치사건(120p),을 앙굴리말라 사건(118p)뒤에 배치하고, 아누룻다가 눈이 멀게 된 이야기(128p)를 데와닷따 반역사건(125p) 뒤에 배치하는 것은 순서상 맞지 않다. 불교사연표에는 순서대로 정리를 잘 해놓고 본문에서는 이렇게 순서를 어기는 이유는 무엇일까?
121p. 바이샬리에 재앙은 없으리
[비평]---정확한 번역은 ‘이러한 진리로 행복하기를’이다. ‘바이샬리에 재앙은 없으리’와 ‘이러한 진리로 행복하기를’이라는 표현은 많이 다르다. ‘이러한 진리로 인해서 모두 편안히 지내길(Etena saccena suvatthi hotu!)’ 이라는 문장이 ‘바이샬리에 재앙은 없으리’라고 변경되면 본래의 ‘진리의 힘’을 강조하는 것이 사라진다. 뒤에 376p에는 ‘보배경’ 전문이 소개되고 있는데 그곳에서는 "이 진리에 의해서 행복하라"라고 제대로 표현 되어있다.
128p. 부처님은 복을 짓는 사람
[비평]-아나율존자는 부처님 성도후 1년후에 출가하였다. 그러므로 아나율 존자가 시력을 잃고 천안을 얻은 것은 부처님이 성도후 멀지 않은 때에 일어난 사건이므로 이 아나율 이야기는 비구니 출가 전후로 배치 되어야 할 것이다.
122p. 부처님은 멀리서 그가 오는 것을 보고 돌아서 나가려 하셨다...그저 나쁜 사람과는 만나고 싶지 않을 뿐입니다.
124p 공부가 완성될 때 까지는 선한 사람 반듯하게 마음을 잘 쓰는 사람을 만나기를 권하셨다.
[비평]---부처님이 제바달다를 피하신 사건을 예로 들면서 ‘공부가 완성될 때 까지는 선한 사람을 만나기를 권하셨다.’라고 결론짓는 것은 비유와 설명이 맞지 않는다. 불교성전의 내용으로 보면 부처님은 공부가 완성되었는데도 제바달다를 피하셨기 때문이다. 부처님이 정말 제바달다를 피하셨을까? 경전 출처를 알고싶다.
131p. 이런 기적은 누구라도 조금만 노력하면 얻을 수 있고 사람들의 논란만 부추깁니다.
[비평]----부처님은 신족통, 타심통을 이런 식으로 설명하지 않았다. 신족통, 타심통이 조금만 노력하면 얻는 신통도 아니고 부처님이 모든 신통력을 금하신 것도 아니다. 삔돌라바라드와자가 허공으로 날라가서 전단향나무발우를 가져온 것을 부처님이 나무란 것은 사실이다.(변변치 않는 일에 신통을 뽑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신통력은 신통지(智)이다. 부처님과 제자들은 신통지를 일상적으로 사용했고 부처님 제자중에는 그 신통지를 보고 출가하고 신심을 낸 사람이 많았다. ‘누구라도 조금만 노력하면 얻을 수 있고 사람들의 논란만 부추깁니다’라고 신통력을 평가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고 본다. 출처를 알고 싶다.
131p. 업의 과보는 아무도 피 할수 없다. "그대는 사람이 저지른 악업도 숨길수 있습니까? 그런일은 할 수 없습니다."
[비평] 이렇게 업의 과보는 아무도 피 할수 없다고 말하면서 이 책의 150p에서는 "일념으로 미륵보살을 부르십시요. 마침내 1천 2백겁 동안 지은 죄업을 다 소멸하게 될 것이요, 미륵보살의 이름을 듣고 합장하고 공경하는 마음을 품기만 해도 50겁 동안 지은 모든 죄업을 다 소멸할 것입니다."라는 문장이 나타난다. 초기경과 대승경을 이렇게 섞어 놓은 결과인데 이 책을 편집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모순을 느끼지도 못했나?
또한 부처님이 세번이나 길가에나가서 아자타삿투 군대를 막은 것은 그냥 해본 일일까? 석가족이 망해가는 것을 알면서도 세번이나 나가서 막는 모습을 보인 이유는 무엇일까? 부처님이 말려도 석가족이 멸망했기에 업의 과보는 아무도 피할수 없다만을 강조하기 보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번이나 가서 말린 자비심, 가능과 불가능을 떠나서 해야할 일은 하는 부처님의 태도를 더 부각시켜야 하지 않을까?
136p. 다른 것을 위의처로 삼아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부처님은 아난에게 이렇게 당부하셨다.
[비평] "다른 것을 위의처로 삼아 머물러서는 안됩니다."라는 말뒤에 다음과 같이 사념처의 설명이 이어진다. 이러한 문장을 첨가하였다면 부처님의 최후유언이 불자들에게 더 명확하게 이해될 것이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떻게 비구는 자신을 섬으로 삼고[自灯明] 자신을 귀의처로 삼아[自帰依] 머물고 남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않는가? 어떻게 비구는 법을 섬으로 삼고[法灯明] 법을 귀의처로 삼아[法帰依] 머물고 다른 것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않는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身随観] 머문다.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면서 근면하게,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는 자 되어 머문다. 느낌들에서 느낌을 관찰하며[受随観] 머문다. … 마음에서 마음을 관찰하며[心随観] 머문다. … 법에서 법을 관찰하며[法随観] 머문다.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면서 근면하게,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는 자 되어 머문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비구는 자신을 섬으로 삼고[自灯明] 자신을 귀의처로 삼아[自帰依] 머물고 남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않는다. 법을 섬으로 삼고[法灯明] 법을 귀의처로 삼아[法帰依] 머물고 다른 것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않는다."
136p. 사람의 이익과 행복을 위하고 세상을 가엾게 여기시어 일겁을 더 머물러 주소서.
[비평] 일겁을 머무는 것이 어던 의미인가?하고 의문을 가질 수있다. 불자들을 위해서 이때의 겁이라는 것은 생명의 겁((Āyukappa))이라고 해서 일생의 기간은 100~120살을 사는 것을 말한다. 주석서에 이런 설명이 나올 뿐더러 밀린다왕문경에서도 나가세나가 밀린다왕에게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 겁이라는 것은 목숨의 겁을 말한다.(so ca pana kappo āyukappo vuccati)
137p. 셋째로 많이 배우고 정통한 장로비구들의 면전에서 받아지녔다면서
[비평] 셋째로 많이 배우고 정통한 많은 장로비구들의 면전에서 받아지녔다면서
137p. 네가지 권위를 설하겠습니다.
[비평] "대반열반경에 나오는 '네 가지 큰 권위'가 대비바사론에 오면 “불타가 설한 것이든 제자가 설한 것이든 법성에 위배되지 않으면 불설로 수지할 수 있다”(『대비바사론』) “ 불법은 오로지 불타의 입으로 설해진 것만이 아니라 일체 세간의 진실하고 좋은 말은 다 불법이다.” “법성에 위배되지 않으면 불설”이다.(『대지도론』『성실론』)라는 견해가 불설을 판정하는 교파 간의 보편적인 기준으로 정착됐다. "그리고 이러한 각 부파의 불설론이 경전 편찬의 이론적 근거가 됐던 까닭에 오늘날 전해지고 있는 아함경과 니카야를 곧이곧대로 붓다의 친설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권오민의 주장은 비약이다. “불타가 설한 것이든 제자가 설한 것이든"은 열반경에서 붓다가 말한 "경과 대조해 보고 율에 비추어 보아야 한다."말고 다르지 않다. 다만 대지도론이나 성실론에서 주장하는 것은 대승불교를 편찬하는 근거가 되었을 것인데 이들이 비판 받는 것은 “법성에 위배되지 않는다는것"과 "일체 세간의 진실하고 좋은 말"을 누가 몇사람이 판단하느냐 하는 것이다. 각자가 판단해서 대승경전을 편찬하고 거기에다. 마치 부처님이 설하신 것처럼 "여시아문"이라고 가탁하여 대승경전을 편찬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더욱이 니까야와 아함경도 “법성에 위배되지 않으면 불설”이다는 기준으로 편찬도었기에 붓다의 친설로 볼수 없다는 것은 비약이다.
“비구들이여, 네 가지 큰 권위[大法教]를 설하리라. 그것을 듣고 마음에 잘 새겨라. 이제 설하리라.”
1.“비구들이여, 여기 비구가 말하기를 ‘도반들이여, 나는 이것을 세존의 면전에서 듣고 세존의 면전에서 받아 지녔습니다. 이것은 법이고 이것은 율이고 이것은 스승의 교법입니다.’라고 하면, [일단] 그런 비구의 말을 인정하지도 말고 공박하지도 말아야 한다. 인정하지도 공박하지도 않은 채로 그 단어와 문장들을 주의 깊게 들어서 경과 대조해 보고 율에 비추어 보아야 한다. 그의 말을 경과 대조해 보고 율에 비추어 보아서, 만일 경과 견주어지지 않고 율과 맞지 않는다면 여기서 ‘이것은 세존의 말씀이 아닙니다. 이 비구가 잘못 호지한 것입니다.’라는 결론에 도달해야 한다. 비구들이여, 이렇게 해서 이것은 물리쳐야 한다. 그의 말을 경과 견주어 보고 율에 비추어 보아서 만일 경과 견주어지고 율과 맞는다면 여기서 ‘이것은 세존의 말씀입니다. 이 비구가 잘 호지한 것입니다.’라는 결론에 도달해야 한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첫 번째 큰 권위이다.”
2.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가 말하기를 ‘도반들이여, 아무개 거처에 장로들과 유명한 스승이 계시는 승가가 있습니다. 그런 나는 이것을 그 승가의 면전에서 듣고 승가의 면전에서 받아 지녔습니다. ...그의 말을 경과 대조해 보고 율에 비추어 보아서 만일 경과 견주어지고 율과 맞는다면 여기서 ‘이것은 세존의 말씀입니다. 이 비구가 잘 호지한 것입니다.’라는 결론에 도달해야 한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두 번째 큰 권위이다.”
3.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가 말하기를 ‘도반들이여, 아무개 거처에 많이 배우고, 전승된 가르침에 능통하고, 법을 호지하고, 율을 호지하고, 마띠까(論母)를 호지하는 많은 장로 비구들이 계십니다. 그런 나는 이것을 그 장로들의 면전에서 듣고 장로들의 면전에서 받아 지녔습니다. ...만일 그의 말을 경과 대조해 보고 율에 비추어 보아서 만일 경과 견주어지고 율과 맞는다면 여기서 ‘이것은 세존의 말씀입니다. 이 비구가 잘 호지한 것입니다.’라는 결론에 도달해야 한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세 번째 큰 권위이다.”
4.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가 말하기를 ‘도반들이여, 아무개 거처에 많이 배우고, 전승된 가르침에 능통하고, 법을 호지하고, 율을 호지하고, 마띠까(論母)를 호지하는 한 분의 장로 비구가 계십니다. 그런 나는 이것을 그 장로의 면전에서 듣고 장로들의 면전에서 받아 지녔습니다. ...그의 말을 경과 대조해 보고 율에 비추어 보아서 만일 경과 견주어지고 율과 맞는다면 여기서 ‘이것은 세존의 말씀입니다. 이 비구가 잘 호지한 것입니다.’라는 결론에 도달해야 한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네 번째 큰 권위이다.”
138p. 그후 빠와마을로 가셔서 대장장이 아들 춘다의 망고숲에 머무셨다.
[비평] 대장장이 아들 이름은 춘다가 아니고 쭌다(cunda)이다. 그런데 불교성전 696p색인에 보면 3명의 춘다가 보인다. 138p 쭌다는 대장장이 아들쭌다이고 465p 정신경(D29)에 나타나는 쭌다는 사리뿟다의 동생이며 594p 지워 없앰 경(M8)에 나타나는 쭌다는 마하쭌다로 나오는데 이분도 사리뿟다의 동생이다. 색인에서는 같은 춘다로 나오고 있어 같은 사람으로 오해하게 되어있다.
139p. 여래의 몸위로 흩뿌려졌다.
[비평]-여래의 몸위로 떨어져 내렸다.흩뿌려졌다는 의도적인 행위로 보인다.
143p. 바이샬리에 사는 릿차위족, 카필라에 사는 석가족, 알라깝빠에 사는 불리족, 마가다에 사는 콜리야족, 웨타디빠에 사는 바라문, 바와에 사는 말라족도 부처님께서 쿠시나가라에서 완전한 열반에 드셨다는 소식을 듣고,
[비평]---위에서 영어식 발음은 바이샬리, 카필라, 콜리야, 쿠시나가라이고 빨리어 단어는 웨살리, 릿차위, 꾸시나라, 까삘라, 알라깝빠, 불리, 말라, 라마가마, 꼴리야, 웨타디빠, 빠와, 삡팔리이다. pava는 영어식으로는 파와, 빨리어로는 빠와인데 위에서처럼 ‘바와’라고 발음하는 것은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는 발음이다. 138p에서는 '빠와'라고 제대로 쓰고 있는데 여기서는 '바와'라고 하였다.
144p. 인간의 왕에게 예경을 받은 부처님은 이처럼 인간의 왕들로부터 예배를 받았다.
[비평]---'인간의 왕에게'가 반복되고 있다.
144p. 부처님을 언제 다시 친견 할 수 있을까? 부처님과 가르침이 간절한 사람이라면 탑을 향해서서 두손을 높이 합장하여 절을 올려야 한다. 백겁이 지나도록 친견하기 어려운 분이시기 때문이다.
[비평]----이러한 감상적인 발언은 삭제하는게 좋다. 부처님 말씀을 정확하게 들려주는 것에서 만족하고 ‘~해야 한다’라는 의무감이나 강요는 하지 않는게 좋다. 반응은 독자들의 자율에 맡기는 것이 불교적이다. 그리고 여기부터 145p끝 까지는 다시 편집자의 감상을 적어 놓은 것이고 앞의 내용과 중복되고 있으므로 삭제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145p. 종교적 방황을 두루 겪은 뒤
[비평]--- ‘종교적 방황’이라는 표현보다는 ‘종교적 탐색’이 더 적절하지 않을까?
146p. 미래에 오실 미륵 부처님
[비평]--원래 이 부분은 편찬되지 않았는데 금산사 출신의 총무원장스님이 첨가하라고 해서 첨가되었다고 한다. 부처님 이야기를 하는데 도병거브 곡귀겁,질역겁 이야기를 하면서 미륵 부처님 이야기를 해야 하는가?
147p. 거바라촌 고향으로 돌아가 가부좌하고
[비평]-----131p에는 “길가의 앙상한 나무아래 ‘두발을 맺고’ 앉으셨다.”라는 표현처럼 ‘가부좌’ 대신에 ‘다리를 맺고’ 라는 표현을 사용해 오다가 여기에서 갑자기 ‘가부좌’라는 단어가 나온다. ‘가부좌’라는 말이 현대인에게 생소해서 ‘다리를 맺고’라는 표현을 의도적으로 사용한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었다. ‘두발을 맺고’든 ‘가부좌’든 하나로 통일해야 하지 않을까?
148p. 미륵보살은 염부제의 햇수로 56억만년 동안을 도솔천에 설법하여 밤낮으로 수없는 천신을 교화한뒤 다시 염부제에 태어날 것입니다.
[비평]---앙굿따라니까야 팔관재계경(A3:70)에서 도솔천에서의 수명이 설명되는데 인간의 수명으로 계산해보니 5억7천600만년이다. 아비달마 길라잡이에도 도솔천의 수명이 5억7천600만년으로 나온다. 이것은 사대왕천(900만년) 도리천(3600만년) 야마천(7200만년) 도솔천(5억7천600만년) 화락천(23억0400만년)의 수명과 비교해 보아도 야마천과 화락천 사이에 있는 도솔천에서의 수명이 56억7천만년이라는 것은 잘못 된 계산인 것을 알 수 있다. 이번 기회에 도솔천의 수명이 5억7천600만년으로 확정되었으면 한다. 미륵불이 사바세계에 오시는 시간은 최대 5억7천600만년이 되는 것이다.
* 다른 경에서 각각 미륵부처님의 출현시기가 다르다. 잡심론(雜心論)에서는 50억 6백만세설, 보살처태경과 현우경 (菩薩處胎經 ·賢愚經)에서는 5억 6억 7천만세설, 미륵상생경과 일채지광명선인경 (彌勒上生經 .一切智光明仙人經)에서는 56억만세설, 정의경(定意經)에서는 5억 76만세설, 증일아함(增-阿含) 현겁경(賢劫經) 현우경(賢愚經)에서는 인수(人壽) 8만4 천세 설
아래는 팔관재계경(A3:70)에서 각 천상에서 수명을 계산한 것이다.
"위사카여, 인간들의 50년은 사대왕천의 단 하루 밤낮과 같고, 그 밤으로 [계산하여] 30일이 한 달이고, 그 달로 [계산하여] 12달이 1년이다. 그 해로 [계산하여] 사대왕천의 신들의 수명의 한계는 500년이다. (30x50x12x500=9,000,000년)
"위사카여, 인간들의 100년은 삼십삼천의 신들의 하루 밤낮과 같고, ... 그 해로 [계산하여] 삼십삼천의 신들의 수명의 한계는 1000년이다. ... (3600만년) 30x100x12x1000=36,000,000
"위사카여, 인간들의 200년은 야마천의 신들의 하루 밤낮과 같고, ... 그 해로 [계산하여] 야마천의 신들의 수명의 한계는 2000년이다. ... (7200만년) 30x200x12x2000= 72,000,000년
"위사카여, 인간들의 400년은 도솔천의 신들의 하루 밤낮과 같고, ... 그 해로 [계산하여] 도솔천의 신들의 수명의 한계는 4000년이다. ... (5억7천600만년) 30x400x12x400= 576,000,000년
"위사카여, 인간들의 800년은 화락천의 신들의 하루 밤낮과 같고, ... 그 해로 [계산하여] 화락천의 신들의 수명의 한계는 8000년이다. ... (23억0400만년)
149p. 부처님의 극락정토는 미타정토라고 부르고 미륵보살의 도솔천은 미륵정토라고 부른다. 도솔천이야 말로 그토록 그리는 불국토이다.
[비평]---부처님 당시 말리까왕비, 수마나, 마야왕비, 욕심 많은 띳사비구, 상인 마하다나등이 도솔천에 태어났다. 도솔천에 태어나는 것은 초기경전에는 시계천이라는 예비법문일 뿐인데 도솔천에 나는 것을 이렇게 찬탄하다니 놀랍다. 더군다나 180p에는 ‘보살은 천상에 태어나길 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태어나면 반드시 늙고 병들고....’라고 말하고 있다. 어느 장단에 춤을 추어야 하나?
150p. 일념으로 미륵보살을 부르십시요. 이렇게 관하는 사람은 도솔천의 천인 한 사람이나 연꽃 한송이라도 보게 될 것이요, 마침내 1천 2백겁 동안 지은 죄업을 다 소멸하게 될 것이요, 미륵보살의 이름을 듣고 합장하고 공경하는 마음을 품기만 해도 50겁 동안 지은 모든 죄업을 다 소멸할 것입니다.
[비평] 부처님도 어쩌지 못하는게 업력이라서 석가족은 멸망했는데 이렇게 쉽게 죄업이 소멸한다니? 그렇다면 석가모니 부처님도 석가족을 보호하기 위해 3번이나 나가서 나무아래에 앉아 있을 것이 아니라 일념으로 미륵보살을 불렀어야 하지 않나?
152p. 첫번째 설법에서 96억명이 아라한이 될 것이다. 두번째 법회에서는 94억 대중이 아라한을 얻을 것이며 세 번째 법회에서는 92억 대중이 아라한을 얻을 것이다.
[비평]--- 부처님생애는 일반적으로 열반으로 끝나는데 <불교성전>에서는 이례적으로 열반에 이어서 미륵보살 이야기가 등장한다. 미륵보살이 56억7천만년(5억6천7백만년)후에 그리고 인간의 나이가 8만세가 될 때에 세상에 오셔서 282억명(96+94+92=282)을 제도 한다는 설명이다. 미륵보살을 일념으로 부르면 1천2백겁동안 지은 죄가 사라진다. 이런 식으로 불교를 가르칠 필요가 있을까? 지금여기에서 고따마 부처님의 가르침을 충실히 배우고 수행하는 것을 가르치는게 더 중요하지 않을까? 지금 지구의 나이(46억년)보다 더 오랜 시간인 56억년을 기다려야 만나게 되는 미륵보살을 이렇게 자세히 이야기 한다는 것은 이 책의 취지와는 어긋나는 것 같다. 미륵보살이 오시는 세상에 282억명이 산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젊은이들은 인구과잉으로 환경문제등 여러 가지 심각한 문제를 염려할지도 모른다. 먼 미래의 이야기를 젊은이들에게 말해주는 것이 과연 불교 포교를 잘 하는 것일까? 들리는 말로는 총무원장 스님이 계셨던 사찰이 미륵도량 금산사이기에 특별히 미륵 보살부분이 첨가되었다고 한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공과 사를 구분하지 않은 것이라는 비난을 들을 것이다.
159p. 붓다가 앞으로 석달후에 열반에 드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라. 붓다가 떠난다해도 가르침과 계율을 지켜야하고 붓다가 세상에 있다해도...
[비평] 부처님은 자신을 붓다라고 부른 적이 없다. 자신을 부를 때는 항상 ‘여래’라고 불렀다. 이러한 원칙을 불교성전이 깨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예)"비구들이여, 여래는 회중들에게 법을 설하나니 이것이 그에게 있어서 사자후이다."
"비구들이여, 여래에게는 열 가지 여래의 힘이 있나니"
"여기 여래는 원인을 원인이라고, 원인이 아닌 것을 원인이 아니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우빨리여, 열 가지 이유 때문에 여래는 제자들에게 학습계목을 제정하고 빠띠목카를 마련했다"
160p. 어떤 두왕이 전쟁을 일으켜 많은 백성을 해치고 밤낮으로 음모를 계속 꾸몄다....왕은 부처님의 게송을 듣고 나서 곧 마음이 열리고 뜻을 이해하여 수다원과를 얻었다.
[비평]---파사익왕이 부처님께 부탁하여 두 왕의 싸움을 말렸다는 이야기는 니까야에 나오지 않는 내용이다. 바라나시국 녹야원에서 싸움을 벌이려 했다는 두왕은 꼬살라국의 족장들이었을 것이다. 꼬살라국의 두왕의 싸움을 말리기 위하여 사위성에서 바라나시까지 가셨다는 내용은 부처님이 전쟁을 적극적으로 말류 하셨다는 증거가 된다. 한 왕은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출가하여 아라한이 되었고 다른 왕(반차야(般遮耶) 국의 왕)은 뒤에 무승(無勝)이라는 부처가 될 것이라고 예언하신다. 佛在舍衛國祇樹給孤獨園。爾時有二國王,常共忿諍,多害民衆,晝夜陰謀,無有休息。時波斯匿王觀彼二王,流轉生死,恐難拔濟於生死中,欲使解脫,往詣佛所,頭面禮足,卻坐一面白言:“世尊!今者如來無上法王,觀諸衆生有苦厄者,爲作救護,於鬪諍閒,能令和解。今此二王,常共鬪諍,多所傷害,久挾怨讎,不可和解,唯願世尊和彼二王,使不鬪諍。”佛卽然許。爾時如來於其後日,著衣持鉢,將諸比丘,而自圍繞,詣波羅柰國鹿野苑中。時彼二王各集兵衆,便欲戰擊,一則怯弱,甚大惶怖,退詣佛所,前禮佛足,卻坐一面。佛卽爲王,說非常偈:
『찬집백연경』 1권
161p. 만물을 이루는 여섯가지 근본원소인 지[地]․수[水]․화[火]․풍[風]․허공[空]․의식[識]의 요소[界]를 바로 6계라 한다.
[비평] 대보적경에는 "만물을 이루는 여섯가지 근본원소"라는 표현이 없다. 뒤에 오온을 설명하는 것을 보더라도 육계와 오온은 인간을 설명하는 부처님의 방식이지 만물을 설명하는 방식이 아니다.
" 또 6계(界)를 아는 것이니, 이른바 땅[地]․물[水]․불[火]․바람[風]․허공[空]․의식[識]의 요소[界]를 바로 6계라 하느니라.
땅의 요소[地大]는 무상(無常)한 것이고, 변하고 파괴되며 견고함이 없고 굳은 모양이 없는 것이다. 만일 무상한 것이라면 그것은 곧 괴로운 것이요, 만일 그것이 괴로운 것이라면 곧 나(我)라고 하는 것도 없을 것이다."
.復次知六界,所謂地、水、火、風、空、識界,是名六界。觀地大無常變壞,無堅無牢相,若無常卽是苦,若是苦卽無我。水火風空識大,無常變壞無堅牢相,若無常卽苦,若苦卽無我。是名知六界。
164p.
바라문이여, 여기 어떤 자는 감각적 욕망에 대한 탐욕을 여의고 의욕을 여의고 애정을 여의고 갈증을 여의고 열병을 여의고 갈애를 여의었습니다. 그런 그가 어떤 혹독한 병에 걸리자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 사랑하는 감각적 욕망들은 나를 버릴 것이다. 나도 저 사랑하는 감각적 욕망들을 버리게 될 것이다.’라고. 그는 근심하지 않고 상심하지 않고 슬퍼하지 않고 가슴을 치지 않고 울부짖고 광란하지 않습니다. 바라문이여, 이런 자가 죽기 마련이면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죽음에 대해 떨지 않는 자입니다.
다시 바라문이여, 여기 어떤 자는 몸에 대한 탐욕을 여의고 의욕을 여의고 애정을 여의고 갈증을 여의고 열병을 여의고 갈애를 여의었습니다. 그런 그가 어떤 혹독한 병에 걸리자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 사랑하는 몸은 나를 버릴 것이다. 나도 저 사랑하는 몸을 버리게 될 것이다.’라고. 그는 근심하지 않고 상심하지 않고 슬퍼하지 않고 가슴을 치지 않고 울부짖고 광란하지 않는다.바라문이여, 이런 자도 죽기 마련이면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죽음에 대해 떨지 않는 자이다.”
[비평] “그런 그가 어떤 혹독한 병에 걸리자 이런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na evaṃ hoti)”라고 수정되어야 한다. 부처님은 무외 경(A4:184)에서 자눗소니 바라문에게 죽음을 두려워하고 죽음에 대해 떠는 자가 있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죽음에 대해 떨지 않는 자도 있다는 말씀을 하시는데 인용된 부분은 “바라문이여, 그러면 어떤 자가 죽기 마련이면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죽음에 대해 떨지 않는 자인가?”라는 물음으로 시작하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죽음에 대해 떨지 않는 자에 대한 설명이다. 그러므로 그런 그가 어떤 혹독한 병에 걸리자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라는 문장은
“그런 그가 어떤 혹독한 병에 걸리자 이런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na evaṃ hoti)”라고 수정되어야 한다.
Tassa aññatarena gāḷhena rogātaṅkena phuṭṭhassa na evaṁ hoti:‘
아랫부분에 “다시 바라문이여, 여기 어떤 자는 몸에 대한 탐욕을 여의고 의욕을 여의고 애정을 여의고 갈증을 여의고 열병을 여의고 갈애를 여의었습니다.”라는 문장 다음에도 “그런 그가 어떤 혹독한 병에 걸리자 이런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na evaṃ hoti)”라고 수정되어야 한다.
169p.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괴로움인가 태어남도 괴로움이다. 늙음도 괴로움이다 병도 괴로움이다 죽음도 괴로움이다 근심ㆍ탄식ㆍ육체적 고통ㆍ정신적 고통ㆍ절망도 괴로움이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도 괴로움이다. 요컨대 취착하는 다섯 가지 무더기[苦聖諦]들 자체가 괴로움이다.
[비평] “싫어하는 것과 만나는 것도 괴로움이다. 사랑하는 것과 헤어지는 것도 괴로움이다.(appiyehi sampayogopi dukkho, piyehi vippayogopi dukkho)”라는 문장이 빠졌다. PTS본에 빠진 것을 확인했으나 전재성등 다른 번역본에는 들어가 있고 일반적인 불자들이 알고 있는 8고의 내용이니 불교성전에 넣은 것이 좋을 듯하다. 171p에도 “싫어하는 것과 만나는 것도 괴로움이다. 사랑하는 것과 헤어지는 것도 괴로움이다.”를 삽입하고 자세한 설명도 삽입되어야 할 것이다.
176p. 여래는 상견과 단견을 떠나 중간에서 설한다.
[비평] 나체수행자 깟싸빠경은 이곳 '만족스럽지 못한 현실'에 맞지가 않다. 184p 밀린다왕문경도 187p 금강경 구경무아분도 '라훌라를 교계한경'도 '고성제'를 소개하는 이 단원에 맞지 않다. 고통의 소멸을 목표로하는 불교이니 만큼 이곳에서는 끼사고따미 일화,55년 동안 똥을 먹었던 잠부까 비구등 기구한 사연들이 소개되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176p. 알음알이
[비평]
다른 곳에서는 알음알이를 의식이라고 수정했는데 여기서는 수정하지 않고 알음알이라고 사용한다.
177p.
어떤 것을 사랑하는 것과 이별하는 괴로움인가? 사랑하던 물건이 파괴되거나 흩어지는 것입니다. 인간의 다섯무더기가 파괴되는 것과 천상의 다섯무더기가 파괴되는 것입니다.
[비평] 애별리고 설명이 앞에서 설명한 니까야와는 다르다. 이어지는 원증회고의 설명도 니끼야와 다르다. 이것이 니까야와 아함경의 차이일 것이다. 순서도 니까야는 원증회고 애별리고 순인데 아함경은 애별리고 원증회고 순서로 되어있다.
177p.
다섯무더기로 성하는 괴로움입니다.
----- ‘오취온고’를 90p에서는 ‘요컨대 존재 그 자체가 괴로움입니다’라고 표현하고 170p에는 '요컨데 취착하는 다섯가지 무더기 자체가 괴로움입니다.'라고 표현하고 177p에서는 ‘다섯무더기로 성하는 괴로움입니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같은 책에서 이렇게 다르게 표현하는 것은 너무 성의가 없다. 더구나 177p에서 여덟가지 괴로움이 있다고 말해놓고서는 내용은 7가지만 말하고 있다. 가장 중요한 ‘오취온고’를 다르게 설명하는 경을 인용하여 소개하는 것은 '불교성전'을 읽는 불자들에게 일부러 혼란을 주고자 하는 것인가? 가장 중요한 교리를 다르게 설명하는 것은 고등학생도 이해하기 쉬운 '불교성전'을 편찬하자는 본래의 취지를 배반하는 것이다.
"어떤 것을 다섯 가지 음으로 성하는 고라 하는가. 다섯 가지 음으로 성하는 고라 함은 나는 고ㆍ늙는 고ㆍ병나는 고ㆍ죽는 고ㆍ사랑하는 것을 이별하는 고ㆍ미운 것이 모이는 고ㆍ구하여 얻지 못하는 고 따위들이니, 이것을 이름하여 다섯 가지 음으로 성하는 고라 하느니라."何等名爲五盛陰苦?五盛陰苦者,生苦、老苦、病苦、死苦、愛別離苦、怨憎會苦、求不得苦,是故名爲五盛陰苦。大般涅槃經卷第十一
182p. 네 마리 동물은 이 말을 듣고 마음이 곧 열렸다.
[비평]
동물이 마음이 열렸다는 데 어떻게 열렸다는 것인가? 까마귀 비둘기 독사 사슴 인간이 등장하여 서로 대화를 하는 법구비유경의 비유는 이솝우화같다. 이러한 비유를 보고 동물이 깨달을 수 있다는 증거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을까 염려된다.
180p.보살은 천상에 태어나기를 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태어나면 반드시 늙고 병들고 죽기 때문에 모두 버리고 조금도 받을 마음 이 없는 것이다. 범부나 어리석은 사람은 늙고 병들고 죽는 걱정 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생사는 두 가지 법을 받으려고 탐하는 것 이다." <대반열반경> <성행품>
[비평] "가섭이여, 보살마하살도 그와 같아서 천상에 태어나기를 원하지 않나니, 나면 반드시 늙고 병나고 죽음이 있는 까닭으로 모두 버리고 조금도 받을 마음이 없거니와, 범부나 어리석은 사람은 늙고 병나고 죽음의 걱정을 알지 못하는 연고로 생사라는 두 가지 법을 받으려고 탐하느니라."’迦葉!菩薩摩訶薩亦復如是,不願生天,以生當有老病死故,是以俱棄‚曾無受心:凡夫愚人不知老病死等過患‚是故貪受生死二法。
183p.
내가 그대들에게 말한 이 세상은 다섯가지 악으로 가득차 있고 고통과 괴로움을 받는다. 이로인해 다섯가지 고통과 다섯가지 불길이 서로 원인이 되어 생긴다.
[비평]'고통과 괴로움'은 동어 반복이므로 '근심과 괴로움을' 받는다고 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내가 그대들에게 말한 이 세상은 다섯가지 악으로 가득차 있고 근심과 괴로움을 받는다."(佛告彌勒:“吾語汝等,是世五惡勤苦若此)
다섯가지 고통을 받고 내세에 다섯가지 불길을 받는다는 것인데 위 인용문은 이러한 시간의 차이를 설명하지 않고 서로가 원인과 결과가 이어진다는 설명을 하지 않고있다. 뜻을 훼손시키지 않고 원문에 대한 정확하게 인용하는 것이 필요하다. 또한 하나의 경전에서 부분만을 인용할 때 느끼는 생경스러움이 발견된다. 아래는 무량수경을 검색하여 찾아낸 같은 부분의 내용이다.
“내가 지금까지 그대들에게 말한 것은 세상의 다섯 가지 죄악(五惡)과 그 죄악으로 말미암아 바로 현세에 받는 다섯 가지 고통(五痛)과 또한 그 죄보로 내세에 받을 고통인 다섯 가지 불길(五燒)에 대한 법문이었느니라. 이러한 죄악과 그 과보가 서로 원인이 되고 결과가 되어 끝없이 굴러다니게 되느니라.”
『五惡』者,殺生,偷盜,邪淫,妄語,飲酒。即反於五戒者。又『五痛』者,由五惡而感五種之苦果也。又『五燒』者,造殺,盜,婬,妄,酒之五惡者,生時遭王法之逼害,死入於惡道,名為五痛,苦痛切身如火之燒,故喻之為五燒。至於何等為『五惡五痛五燒』?依《佛說無量壽經》開示:何等為五惡?何等五痛?何等五燒?即
186p.
소리의 울림, 들숨 날숨,괴로움과 즐거움, 선악(善惡)이 합해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비평] 밀린다왕문경을 인용한 것인데 “괴로움과 즐거움, 선악(善惡)이 합해서 사람이 되는 것”이라는 표현은 원전에 없다. 상식적으로도 불교사상과 맞지않다. 원전에는 인체의 33가지 부분과 색(色) 수(受), 상(想), 행(行), 식(識)이 조건되어 나아가세나라는 명칭이 생기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즐거움과 괴로움, 선악(善惡)은 몸과 마음의 조건으로 발생하는 전개과정이지 선악이 따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닌 것을 멋대로 실어 놓는 것은 불자들을 혼란스럽게 하는 훼불사건이다. 밀린다왕문경의 바른 번역은 이렇다.
“이처럼 대왕이여 머리털, 몸의 털, 손톱,살갗,살,힘줄,뼈,뼛골,콩팥, 염통,간장,늑막,지라,폐,창자, 창자막, 위, 똥,담즙,담,고름, 피,땀,굳기름(脂肪),눈물,기름(膏), 침,콧물, 관절액, 오줌,뇌 , 핏줄, 뼈의 부분들과 색(色), 수(受), 상(想), 행(行), 식(識)을 조건으로 (나가세나)라는 '일반적인 명칭'이나 이름이 생기는 것입니다.”
mayhampi kese ca paṭicca lome ca paṭicca …e… matthake matthaluṅgañca paṭicca rūpañca paṭicca vedanañca paṭicca saññañca paṭicca saṅkhāre ca paṭicca viññāṇañca paṭicca ‘nāgaseno’ti saṅkhā samaññā paññatti vohāro nāmamattaṁ pavattati,
194p. 부처님께서 나라장가 바라문에게 말씀하셨다.
[비평] 애생경(M87) 부분을 옮겼는데 바라문의 이름은 날리장가(nāḷijaṅghaṃ brāhmaṇaṃ)이다. "참으로 근심․탄력․육체적 고통․정신적 고통․절망은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생겨나고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발생한다."는 부처님의 말씀을 빠세나디왕이 이해하지 못하자 말리까부인은 날리장가 바라문을 부처님께 보내어 부처님 말씀이 사실임을 확인 하게 한다. 말리까 왕비는 빠세나디 왕에게 사랑하는 와지리 공주가 죽었을 경우를 예를들어 빠세나디 왕도 사랑하는 사이에서 고통이 발생한다는 것을 설득시키자 왕은 부처님께 세번귀의한다(Namo tassa bhagavato arahato sammāsambuddhassa) 이러한 스토리가 빠지고 중간에 날리장가 바라문이야기만 소개되어 경의 의미가 반감되었다.
195p.그러면 무엇이 집성제인가?
[비평] 불교성전 곳곳에서 괴로움의 일어남의 성스러운 진리[苦集聖諦]를 단순하게 '집성제'라고 줄여서 표현하고 있다. 경전을 옮길 때는 경전의 표현을 그대로 해주는 것이 좋다. 부처님이 네곳에 괴로움을 넣어서 사성제를 명명하신 이유가 분명히 있기 때무이다. 그렇게 하지 못하니 집성제(集聖諦)라고 써놓고 다시 집(集)이라는 한자를 해석하는 노력을 하게 된다. 부처님이 명명하신 그 이름을 그대로 불러주면 선명하게 뜻이 다가온다.
"부처님이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괴로움의 일어남의 성스러운 진리[苦集聖諦]인가? 그것은 갈애이니, 다시 태어남을 가져오고 환희와 탐욕이 함께 하며 여기저기서 즐기는 것이다. 즉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慾愛], 존재에 대한 갈애[有愛],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갈애[無有愛]가 그것이다. 다시 비구들이여, 이런 갈애는 어디서 일어나서 어디서 자리 잡는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 있으면 거기서 이 갈애는 일어나서 거기서 자리 잡는다."
196p.
"바라문이여, 예전에 이 사왓티에 어떤 여인의 아버지, 오라버니, 자매, 아들, 딸, 남편이 임종을 했다. 그녀는 남편의 임종으로 실성을 해버리고 정신이 나가버렸다. 그래서 이 거리 저 거리 이 골목 저 골목을 다니면서 내 남편을 못 보셨습니까? 내 남편을 못 보셨습니까?"라고 울부짖었습니다.
[비평]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생겨난 것에 대한 경(M87)’을 각묵은 애생경(Piyajātikasutta)이라 번역하였다. 인용문은 어떤 여인의 아버지, 오라버니, 자매, 아들, 딸, 남편이 등장하는 문장에서 마지막 남편만을 ?내 남편을 못 보셨습니까?‘라고 설명하고 있다. 아버지, 오라버니, 자매, 아들, 딸, 남편이 각기 다른 집안의 사건인데도 이 문장에서는 어떤 여인이 주어가 되어 그 여인의 아버지, 오라버니, 자매, 아들, 딸, 남편이라는 오해를 하게 만든다. ?내 아버지를 못 보셨습니까?‘ ?내 오라버니를 못 보셨습니까?‘?내 자매를 못 보셨습니까?‘?내 아들을 못 보셨습니까?‘ ?내 딸을 못 보셨습니까?‘?내 남편을 못 보셨습니까?‘라고 전체 문장을 인용하거나 ’어떤 집에서는 아버지, 어떤 집에서는 오라버니, 어떤 집에서는 자매, 어떤 집에서는 아들, 어떤 집에서는 딸이 임종했다.‘라고 서술형식으로 처리했으면 좋았을 것이다.아래 각묵의 번역본은 생략표시로 다른 집안임을 표시했다.
?바라문이여, 어떻게 근심․탄력․육체적 고통․정신적 고통․절망이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생겨나고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발생하는 것인지 그것은 이런 방법으로도 역시 알 수 있다. 바라문이여, 예전에 이 사왓티에 어떤 여인의 아버지가 … 오라버니가 … 자매가 … 아들이 … 딸이 … 남편이 임종을 했다. 그녀는 남편의 임종으로 실성을 해버리고 정신이 나가버렸다. 그래서 이 거리 저 거리 이 골목 저 골목을 다니면서 ?내 남편을 못 보셨습니까? 내 남편을 못 보셨습니까??라고 울부짖었다.?
198p. 사랑하는 것을 향해가지 말고 사랑하지 않는 것을 만들지 말라. 사랑하는 것 보지못하면 근심하고 사랑하지 않는 것을 보아도 근심한다.
[비평] 법구경 210번~214번 게송을 소개하고 있는데 이것은 210번 게송이다.
210번 게송을 불교성전은 "사랑하는 자도 갖지 말라. 사랑하지 않는 자도 갖지 말라. 사랑하는 자는 만나지 못함이 괴로움이요.사랑하지 않는 자는 만남이 괴로움이다."Mā piyehi samāgañchi,appiyehi kudācanaṃ; Piyānaṃ adassanaṃ dukkhaṃ,appiyānañca dassanaṃ. 라고 번역하였다.
일러두기에서 법구경은 전재성 번역을 옮겼다고 했으나 전재성 번역과 차이가 있다. 전재성은 번역한 괴로움(dukkha)을 여기서는 근심이라고 옮겼다.
211번 게송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를 만들지 말라. 사랑하는 자와 헤어지는 것은 참으로 불행이다. 사랑하는 자도 사랑하지 않는 자도 없는 그 님들에게는 참으로 속박이 없다." Tasmā piyaṃ na kayirātha,piyāpāyo hi pāpako; Ganthā tesaṃ na vijjanti,yesaṃ natthi piyāppiyaṃ.
전재성 번역 "사랑하는 자와 헤어지는 것은 참으로 불행이다."를 불교성전은 "사랑으로 말미암아 미움이 생겨난다"라고 옮겼다.
202p.
‘이 사람이 나에게 손해를 끼쳤다. 그러나 이 경우에 그것이 우리 둘의 어디에 존재한단 말인가?’라고 원한을 다스립니다.
[비평] 합송경(D33)에서 아홉 가지 원한을 다스림(āghāta-paṭivinaya)을 설명하는 부분이다.
"이 사람이 나에게 손해를 끼쳤다. 그러나 이 경우에 그것이 [우리 둘의] 어디에 존재한단 말인가?’라고 원한을 다스립니다.
‘이 [사람이] 나에게 손해를 끼친다. ‘이 [사람이] 나에게 손해를 끼칠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 그것이 [우리 둘의] 어디에 존재한단 말인가?’라고 원한을 다스립니다."라는 문장에서 ‘그것이 우리 둘의 어디에 존재한단 말인가?(taṃ kutettha labbhā’ti)’라는 문장은 이해가 쉽지 않다.
전재성의 ‘이 사람이 나에게 해악을 끼쳤다.’는 생각에 대하여 ’그것이 무슨 이득이 되는가?’라고 생각하여 원한을 제어합니다.”라는 번역을 취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초불연의 열반경 (DN 16.28)에서는 taṃ kutettha labbhā라는 문장을 '여기서 무슨 소용있겠는가'라고 번역하고 있다.
‘형성된 것들은 무상하다. 그러니 여기서 [울부짖는다 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aniccā saṅkhārā, taṃ kutettha labbhā’’ti. (DN 16.28)
203p. 상습적으로 화를 낸 과보
[비평] 분노 경(A7:60)을 소개하면서 3가지 내용은 소개하고 4가지는 소개하지 않았다. 분노하게 되면 어떻게 된다는 7가지 경우를 소개하는 부처님의 의도가 있을 것인데 이렇게 3개만 소개하는 것이 바람직해 보이지 않는다. 이것이 경전을 부분 인용한 대표적인 나쁜 예이다.
분노하는 자가 저지르는 3가지 저주는 소개했다.
‘오, 참으로 이 자가 흉한 꼴이 되기를!’
‘오, 참으로 이 자가 잠을 잘 못 자기를!’
‘오, 참으로 이 자에게 큰 이익이 따르지 않기를!’
분노하는 자가 저지르는 4가지 저주는 소개하지 않았다.
‘오, 참으로 이 자에게 재물이 생기지 않기를!’
‘오, 참으로 이 자에게 명성이 따르지 않기를!’
‘오, 참으로 이 자에게 친구가 없기를!’
‘오, 참으로 이 자는 몸이 무너져 죽은 뒤 좋은 곳[善處]이나 천상에 태어나지 않기를!’
207p. 맹인들의 코끼리 만지기
[비평] 장님 코끼리 만지기 비유는 우다나(Ud6.4)에 자세한 내용이 나오는데 경의 제목이 '다양한 이교도의 경'이다. 부처님 당시에 이교도들은 “① ‘세상은 영원하다.’거나 ② ‘세상은 영원하지 않다.’거나 ③ ‘세상은 유한하다.’거나 ④ ‘세상은 무한하다.’거나 ⑤ ‘생명이 바로 몸이다.’거나 ⑥ ‘생명은 몸과 다른 것이다.’거나 ⑦ ‘여래는 사후에도 존재한다.’거나 ⑧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지 않는다.’거나 ⑨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기도 한다.’거나 ⑩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라는 10가지 주장을 고집하고 있었다. 부처님은 이교도가 10가지 주장을 고집하여 서로 자기의 주장이 옳다고 주장하는 것을 보고 부처님은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고 서로 자기가 만진 부분이 코끼리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신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신하가 장님을 코끼리근처로 데려가서 각각 다른 코끼리의 부분을 만지게 했다는 것이다. 자기주장을 하는 10가지 이교도들을 비유한 것이기에 그것을 정확하게 비유하려고 각각 코끼리의 다른 부분을 만지게 했다는 것이 비유의 핵심이다. 그런데 인용한 기세경에서는 "어떤이는 코를 만졌고 어떤이는 어금니를 만졌고 어떤이는 귀를 만졌고...."라며 장님이 코끼리를 자유롭게 만진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 기세경의 이러한 묘사때문에 원효스님도 화쟁을 설명하며 장님 코끼리 만지기를 잘못 인용하는 오류를 범하고있고 많은 분들이 이러한 오류를 범하고 있다. 부처님이 왜 이 비유를 사용하셨는지 알려면 기세경을 인용하지 말고 우다나를 인용해야한다.그런데 이 불교성전을 편찬한 이들은 이러한 차이를 알지 못했던 것 같다.
213p. 어리석은 중생은 다섯 무더기, 발생, 소멸, 맛들임, 재앙, 벗어남을 사실 그대로 알지 못합니다. 다섯 무더기에 대해서 사실 그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다섯 무더기를 좋아하고 집착하며, 다섯 무더기를 좋아하고 집착하기 때문에 다시 미래의 모든 다섯 무더기를 일으킵니다. 많이 배운 거룩한 제자는 다섯 무더기와 다섯 무더기의 발생, 소멸, 맛들임, 재앙, 벗어남을 사실 그대로 압니다. 사실 그대로 알 기 때문에 다섯 무더기를 좋아하거나 집착하지 않고, 좋아하거나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미래의 다섯 무더기를 일으키지 않습니다. (凡愚眾生不如實知 色.色集.色滅.色味.色患.色離。於色不如實知
故。樂著於色。樂著色故。復生未來諸色。如是凡愚不如實知受.想.行.識.識集.識滅.識味.識患.識離。不如實知故。樂著於識。樂著識故。復生未來諸識。當生未來色.受.想.行.識故。於色不解脫。受.想.行.識不解脫。
[비평] 어리석은 중생은 색, 색의 발생, 색의 소멸, 색의 맛, 색의 재앙, 색을 벗어남을 사실 그대로 알지 못합니다.라고 설명해야 하나 여기서는 색수상행식을 묶어 오온으로 한번에 설명하고 있다. 그렇다면 "어리석은 중생은 다섯 무더기, 다섯 무더기의 발생, 다섯 무더기의 소멸, 다섯 무더기의 맛들임, 다섯 무더기의 재앙, 다섯 무더기의 벗어남을 사실 그대로 알지 못합니다."라고 번역해야 할것이다.
213p. 많이 배운 거룩한 제자는 다섯 무더기와 다섯 무더기의 발생 소멸 맛들임 벗어남을 사실 그대로 압니다. 사실 그대로 알 기 때문에 다섯 무더기를 좋아하거나 집착하지 않고, 좋아하거나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미래의 다섯 무더기를 일으키지 않습니다. 다섯 무더기에 대해서도 좋아하거나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다섯 무더기에서 해탈했으므로 나는 말하기를, '그들은 태어남, 늙음, 병들, 죽음, 근심, 슬픔, 번민, 괴로움에서 해탈했다'고 한 것입니다.
[비평]많이 배운 거룩한 제자는 다섯 무더기와 다섯 무더기의 일어남((samudaya) 사라짐(atthaṅgama) 맛(assāda) 위험(ādīnava) 벗어남(nissaraṇa)을 사실 그대로 압니다. 사실 그대로 알 기 때문에 다섯 무더기를 좋아하거나 집착하지 않고, 좋아하거나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미래의 다섯 무더기를 일으키지 않습니다.다섯 무더기에 대해서도 좋아하거나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다섯 무더기에서 해탈합니다. 나는 '그들은 태어남, 늙음, 병들, 죽음, 근심, 슬픔, 번민, 괴로움에서 해탈했다'고 말합니다. 如實知故。不染著於識。不樂著故。不生未來諸識。不樂著於色.受.想.行.識故。於色得解脫。受.想.行.識得解脫。我說彼等解脫生.老.病.死.憂.悲.惱.苦。 佛說此經已。時。諸比丘聞佛所說。歡喜奉行。
217p.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태어남[生]인가?
이런저런 중생들의 무리로부터 이런저런 중생들의 태어남, 일어남,오온의 나타남, 감각장소[處]를 획득함 ―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태어남이라 한다.”
[비평] 태어남(jāti)다음에 출생(sañjāti) 도래함(okkanti) 생김(abhinibbatti)이라는 단어들이 생략되어 있다. 이러한 정형구들의 생략은 신중해야한다.
이런저런 중생들의 무리로부터 이런저런 중생들의 태어남, 출생,도래함, 생김, 탄생, 오온의 나타남, 감각장소[處]를 획득함 ―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태어남이라 한다.”
Katamā ca, bhikkhave, jāti? Yā tesaṃ tesaṃ sattānaṃ tamhi tamhi sattanikāye jāti sañjāti okkanti abhinibbatti khandhānaṃ pātubhāvo āyatanānaṃ paṭilābho. Ayaṃ vuccati, bhikkhave, jāti.
218p.눈의 감각, 귀의감각, 코의 감각, 혀의 감각, 몸의 감각,마음의 감각에서 생긴 느낌입니다.
[비평] 시각의 접촉에서 생기는 느낌, 청각의 접촉에서 생기는 느낌, 후각의 접촉에서 생기는 느낌, 미각의 접촉에서 생기는 느낌, 촉각의 접촉에서 생기는 느낌, 정신의 접촉에서 생기는 느낌이 있으니 비구들이여, 이것을 느낌이라고 부른다.
Katamā ca, bhikkhave, vedanā? Chayime, bhikkhave, vedanākāyā— cakkhusamphassajā vedanā, sotasamphassajā vedanā, ghānasamphassajā vedanā, jivhāsamphassajā vedanā, kāyasamphassajā vedanā, manosamphassajā vedanā. Ayaṃ vuccati, bhikkhave, vedanā.
218p.형색에 대한 접촉, 소리에 대한 접촉....
[비평] 눈에 대한 접촉, 귀에대한 접촉.....잘못 번역된 니까야를 인용하였다.
Katamo ca, bhikkhave, phasso? Chayime, bhikkhave, phassakāyā—cakkhusamphasso, sotasamphasso, ghānasamphasso, jivhāsamphasso, kāyasamphasso, manosamphasso. Ayaṃ vuccati, bhikkhave, phasso.
18p.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정신ㆍ물질인가? 느낌,인식,심리현상들,감촉 그리고 올바른 마음 기울임을 일러 정신이라고 합니다.
[비평] 느낌Vedanā, 인식saññā, 의도cetanā, 감각접촉phasso, 마음에 잡도리함manasikāro이라고 번역하여야 한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정신ㆍ물질인가?
느낌, 인식, 의도, 감각접촉, 마음에 잡도리함(주의) ― 이를 일러정신이라 한다." Katamañca, bhikkhave, nāmarūpaṃ? Vedanā, saññā, cetanā, phasso, manasikāro— idaṃ vuccati nāmaṃ. 분석 경(S12:2)
224p. 강물에서 목욕한들 오염된 업이 씻어지랴
[비평] 옷감의 비유 경 (M7)을 인용하였지만 아래와 같이 강물에 목욕하는 부분은 인용하지 않았다. 그런데 제목을 '강물에서 목욕한들 오염된 업이 씻어지랴'라고 달아 놓으니 제목과 내용이 맞지 않다.
"그때 순다리까 바라드와자 바라문이 세존과 멀지 않은 곳에 앉아 있었다. 그는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그런데 고따마 존자께서도 바후까 강으로 목욕을 가지 않으십니까?
바라문이여, 바후까 강이 무슨 소용 있는가? 바후까 강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고따마 존자시여, 많은 사람들은 바후까 강이 해탈을 준다고 생각하빈다. 고따마 존자시여, 많은 사람들은 바후까 강이 공덕을 준다고 생각합니다. 바후까 강에서 많은 사람들은 악업을 씻어냅니다. 그때 세존께서는 순다리까 바라드와자 바라문에게 게송으로 설하셨다.
바후까, 아디깍까, 순다리까
사랏사띠, 빠야까, 바후마띠 강에
어리석은 자 항상 뛰어들지만
검은 업을 맑히지 못한다네.
순다리까 강이 무엇을 하며
빠야까 강이 무엇을 하며
바후까 강이 무엇을 하겠는가?
나쁜 업을 지었고 잔혹한 행위를 했으며
악업을 지은 그를 [이 강들이] 맑히지 못한다네.
225p. 무엇이 마음의 번뇌들인가?...부주의가 마음의 번뇌입니다.
[비평]무엇이 마음의 오염원인가?...부주의가 마음의 오염원입니다.
오염원을 번뇌로 바꾸었다.아래는 초기불전의 번역이다.
"비구들이여, 무엇이 마음의 오염원들인가? ① 욕심과 그릇된 탐욕이 마음의 오염원이다. ② 악의가 마음의 오염원이다. ③ 분노가 마음의 오염원이다. ④적의가 마음의 오염원이다. ⑤모욕이 마음의 오염원이다. ⑥ 얕봄이 마음의 오염원이다. ⑦ 질투가 마음의 오염원이다. ⑧ 인색이 마음의 오염원이다. ⑨속임이 마음의 오염원이다. 사기가 마음의 오염원이다. 완고함이 마음의 오염원이다. 뻔뻔스러움이 마음의 오염원이다. 자만이 마음의 오염원이다. 거만이 마음의 오염원이다. 허영이 마음의 오염원이다. 방일이 마음의 오염원이다."옷감의 비유 경 (M7)
227p. 십선업을 지켜라
[비평]
이 경은 소라고둥 불기 경(S42:8)을 인용한 것인데 단순하게 10선업을 말하는 경이 아니다. 니간타의 주장처럼 시간의 양에 따라서 지옥에 간다면 아무도 지옥에 가지 않을 것이라고 부처님은 반박한다. 왜냐하면 아무리 거짓말쟁이라도 하루 24시간중에 거짓말을 하는 시간 보다도 거짓말을 안하는 시간이 많기 때문이다. 그렇치만 설사 십악업을 조금 지었더라도 그것에 집착하고 있으면 그 집착과 염려 때문에 그는 지옥에 가게된다. 이전에 지은 악업에서 생각을 떠나서 이제부터라도 십선업을 지으면 이전의 십악업이 소멸된다. 이렇게 지난날 행한 악업에 대하여 죄의식에 빠져 번민하는 이들에게 희망을 주는 가르침이다. 이것을 단순히 십선업을 지켜라는 경으로 인용하는 것은 너무 아쉬운 태도이다.
229p. 팔정도의 의미
‘무엇이 팔정도를 행하는 것인가? 첫째는 바른견해이니 보시공덕을 믿고, 예의를 믿으며, 사당에서 재사하는 것을 믿고, 선하거나 악한 행동에 따라 동일한 과보를 불러온다는 것을 믿으며,부모를 믿고, 천하도인을 믿으며, 도를 구함을 믿고, 바른행위를 믿으며, 바른 생활을 믿어서, 지금의 세상과 다음의 세상에도 스스로 지혜롭게 깨닫고, 자신이 성취한 일을 곧바로 모두에게 알려 설하는 것이 바른 견해입니다.’何等為道八正行。一者諦見。諦見為何等, 信布施、信禮、信祠、信善惡行自然福、信父母、信天下道人、信求道、信諦行、信諦受。今世後世,自黠得證自成。便相告說是為諦見。
둘째는 바른사유이니 어떤 것인가? 욕심과 아집을 버리겠다고 생각하는것, 성내거나 분노하지 않는것, 서로 침해하지 않는것이 바른 견해입니다. 第二諦念為何等。所意棄欲棄家不瞋恚怒不相侵。是為諦念
여섯째 바른정진이니 어떤 것인가? 삶과 죽음에 대한 마음을 하나로 집중해서 닦는것, 정진할 대상을 향해 닦는것, 힘찬 인연을 일으켜서는 닦는 것 등에 실증내지 않고 나아가서 마음에 굳게 지님이 바른 정진입니다.’第六諦治為何等。生死意共合行所精進行出力因緣行。乃精進不厭意持。是為諦治
일곱째 바른 마음챙김이니 어떤 것인가? 삶과 죽음에 대한 마음을 하나로 집중하는 생각,정진할 대상을 향하는 생각, 거짓이나 함께하지 않으려는 마음없이 추구하는 것이 바른 마음 챙김입니다.’第七諦意為何等。生死行合意念向意念不妄不共意求。是名為諦意
[비평] 안세고가 번역한 '불설팔정도경'을 소개하고 있는데 문장 자체가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어떻게 이런 문장으로 설명하는 팔정도를 <불교성전>에 실으려고 했는지 이해할 수 없다. 한문경전과 니까야를 비교해서 정확하고 명확한 내용을 실어야지 이렇게 그냥 경전을 모아 놓는다고 좋은 책이 되는가? 팔정도에 대한 정확한 경전이 있음에도 이런 번역을 싣는 다는 것은 이 편찬위원들의 자질을 의심하게 만든다. 이 팔정도경과 같은 내용이 마흔 가지 경(M117)에 나온다. 맛지마니까야의 경을 보면 팔정도경은 바른견해를 소개하면서 세속적인 바른견해와 성스러운 바른견해를 설명하는 부분이다. 그런데 불교성전에 인용한 팔정도경은 그런 설명도 없고 바른 견해를 모두 믿음으로 번역하고 있다. 팔정도경에서는 바른사유를 제념(諦念), 바른정진을 제치(諦治), 바른마음챙김을 제의(諦意)라고 번역하고 있다. 팔정도경에서 '부모를 믿고'라고 번역한 부분은 마흔 가지 경(M117)에서 '어머니도 있고 아버지도 있고 화생하는 중생도 있다'라고 번역되어 있다. 아래는 마흔 가지 경(M117)에서 설명하는 두가지 종류의 바른 견해이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바른 견해인가? 비구들이여, 나는 바른 견해는 두 가지라고 말한다. 비구들이여, 번뇌에 물들 수 있고 공덕의 편에 있으며 재생의 근거를 가져오는 바른 견해가 있고, 번뇌에 물들지 않고 출세간의 것이고 도의 구성요소인 성스러운 바른 견해가 있다.
비구들이여, 어떤 것이 번뇌에 물들 수 있고 공덕의 편에 있으며 재생의 근거를 가져오는 바른 견해인가?
비구들이여, '보시도 있고 공물도 있고 제사도 있다. 선행과 악행의 업들에 대한 결실도 있고 과보도 있다. 이 세상도 있고 저 세상도 있다. 어머니도 있고 아버지도 있고 화생하는 중생도 있다. 이 세상과 저 세상을 스스로 최상의 지혜로 알고 실현하여 선언하는, 덕스럽고 바른 도를 구족한 사문․바라문들도 이 세상에는 있다.'라고 하는 것이 번뇌에 물들 수 있고 공덕의 편에 있으며 재생의 근거를 가져오는 바른 견해이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번뇌에 물들지 않고 출세간의 것이고 도의 구성요소인 성스러운 바른 견해인가?
비구들이여, 성스러운 마음을 가졌고 번뇌 없는 마음을 가졌으며 성스러운 도를 구족하여 성스러운 도를 닦는 자가 있으니, 그가 가진 통찰지, 통찰지의 기능, 통찰지의 힘, 법을 간택하는 깨달음의 구성요소, 바른 견해, 도의 구성요소 – 이것이 번뇌에 물들지 않고 출세간의 것이고 도의 구성요소인 성스러운 바른 견해이다.
Katamā ca, bhikkhave, sammādiṭṭhi sāsavā puññabhāgiyā upadhivepakkā? ‘Atthi dinnaṃ, atthi yiṭṭhaṃ, atthi hutaṃ, atthi sukatadukkaṭānaṃ kammānaṃ phalaṃ vipāko, atthi ayaṃ loko, atthi paro loko, atthi mātā, atthi pitā, atthi sattā opapātikā, atthi loke samaṇabrāhmaṇā sammaggatā sammāpaṭipannā ye imañca lokaṃ parañca lokaṃ sayaṃ abhiññā sacchikatvā pavedentī’ti—ayaṃ, bhikkhave, sammādiṭṭhi sāsavā puññabhāgiyā upadhivepakkā.
232p.
오계는 위대한 보시이며 최초의 것으로 인정되었고, 오랜 세월 동안 유지되어 왔고, [부처님 등 성자들의] 계보라고 알려졌고, 오래된 것이며, 그것은 거부하면 안 되는 것이고, 과거의 [부처님에 의해서도] 거부되지 않았고, 현재에도 거부되지 않으며, 미래에도 거부되지 않을 것이며, 지혜로운 사문들과 바라문들에 의해서 비난받지 않는 것이다.
[비평]
넘쳐흐름 경(A8:39)의 부분을 인용하였는데 계를 지키는 것이 왜 보시인가를 설명한다.
“여기 성스러운 제자는 생명을 죽이는 것을 버리고 생명을 죽이는 것을 멀리 여의었다. 생명을 죽이는 것을 멀리 여읜 성스러운 제자는 한량없는 중생들에게 두려움 없음을 베풀고 증오 없음을 베풀고 악의 없음을 베푼다. 그는 한량없는 중생들에게 두려움 없음을 베풀고 증오 없음을 베풀고 악의 없음을 베푼 뒤 두려움 없음과 증오 없음과 악의 없음을 나누어 가진다. 이것은 공덕이 넘쳐흐르고 유익함이 넘쳐흐르고 행복을 가져오고 신성한 결말을 가져오고 행복을 익게 하고 천상에 태어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원하는 것, 좋아하는 것, 마음에 드는 것, 이익, 행복으로 인도한다.”
불살생계를 지키는 것이 훌륭한 보시라는 것을 잘 설명하고있다. 이러한 자세한 설명을 소개하였다면 좋았을 텐데...단지 오계가 보시라는 것만 이야기하니 아쉽다. 경전을 너무나 부분적으로 인용하는 폐단이라 할 것이다.
233p.
정확하게 판단후에 받아들이라
[비평]
유명한 깔라마경을 소개하고 있다. 유명한 경이고 중요한 경이기에 전체를 소개했으면 좋았을 것이다. 전체가 아니더라도 아래와 같은 부분은 포함되어야 한다. 이런 경전은 부분적으로 생략하여 인용하고 천수경,치문,서장,초발심자경문등이 많이 들어간 것이 아쉽다. 불교성전에는 부처님 말씀으로 족하다. 다른 것은 다른 책에서 소개해도 된다.
“깔라마들이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사람의 내면에서 탐욕이 일어나면 , 혹 성냄이 일어나면, 혹 어리석음이 일어나면 그것은 그에게 이익이 되겠는가, 손해가 되겠는가? 손해가 됩니다, 세존이시여, 깔라마들이여, 포악한 사람은 탐욕에 사로잡히고 성냄에 사로잡히고 어리석음에 사로잡히고 그것에 얼이 빠져 생명을 죽이고, 주지 않은 것을 갖고, 남의 아내에게 접근하고, 거짓말을 하게 된다. 또한 다른 사람에게도 그렇게 하도록 유도한다. 그러면 이것은 오랜 세월을 그에게 손해와 괴로움이 되지 않겠는가?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235p.정진이 너무 조급하면 오히려 들뜸만 늘어나고,정진이 너무 느슨하면 사람을 게으르게 한다. 그러므로 너는 평등하게 닦고 익히고 거두어 받아 집착하지도 말고 게으름도 짖지말고 상을 취하지도 말라
[비평] 한문경전은 상을 취하지도 말라, 니까야는 거기서 표상을 취해야 한다라고 각각 다르게 번역되어 있음을 알수 있다. 그러므로 어떤 경전이 정확하고 명확한가하는 것을 비교도 하지않고 그냥 경전을 모아 놓는다고 좋은 책이 되는 것이 아님을 알수 있다. 그리고 235p 입밥계품을 설명하는 '보살이 실천해야 할 열가지 바라밀'은 뒤에 나오는 '보살의 길'쪽으로 옮겨야 한다.
"소나여, 그와 같이 지나치게 열심인 정진은 들뜸으로 인도하고 지나치게 느슨한 정진은 나태함으로 인도한다. 소나여, 그러므로 그대는 정진을 고르게 유지해야 한다. [다섯 가지] 기능들[五根]의 균등함을 꿰뚫어야 하고 거기서 표상을 취해야 한다.”“Evamevaṁ kho, soṇa, accāraddhavīriyaṁ uddhaccāya saṁvattati, atisithilavīriyaṁ kosajjāya saṁvattati. Tasmātiha tvaṁ, soṇa, vīriyasamathaṁ adhiṭṭhaha, indriyānañca samataṁ paṭivijjha, tattha ca nimittaṁ gaṇhāhī”ti.
So, Soṇa, you should apply yourself to energy and serenity, find a balance of the faculties, and learn the pattern of this situation.
242p. 37조도품을 닦아야 깨달음을 얻는다
비구들이여, 예를 들어 여덟 개나 열 개나 열두 개의 계란을 품는다고 합시다. 이때 앎탉이 계란에 바르게 앉아 품고 바르게 온기를 주고 바르게 다룹니다. 그렇치만 앎탉에게 ‘오, 이병아리들이 발톱 끝이나 부리로 계란의 껍질을 잘 깬뒤에 안전하게 뚫고 나오기를’ 이라는 소망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치만 병아리들은 발톱 끝이나 부리로 계란의 껍질을 잘 깬뒤에 안전하게 뚫고 나올 것입니다. 그것은 무슨이유 때문이겠는가? 그 앎탉이 계란에 바르게 앉아 품고 바르게 온기를 주고 바르게 다루웠기 때문입니다.
비구들이여 그와같이 수행에 몰두해 머무는 비구에게 ‘오, 참으로 나는 취착이 없어져서 번뇌로부터 해탈하기를’ 이라는 이러한 소망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취착이 없어져서 번뇌로부터 해탈합니다.
[비평]
도끼자루 경 (S22:101)에서 인용한 것인데 위와 같은 번역은 어색하다.
계란을 잘 품는 암탉은 소망이 없어도 계란을 잘 부화시키고 계란을 잘 품지 않는 암탉은 소망이 있어도 계란을 부화시키지 못하듯이, 수행을 열심히 하는 사람은 깨닫겠다는 소망이 없어도 깨닫게 되고, 수행을 열심히 하지 않는 사람은 깨닫겠다는 간절한 소망이 있어도 깨닫지 못한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므로 아래와 같은 문장으로 수정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비구들이여, 예를 들어 여덟 개나 열 개나 열두 개의 계란을 품는다고 합시다. 그 암탉이 계란에 바르게 앉아 품고 바르게 온기를 주고 바르게 다룹니다. 설사 암탉에게 ‘이 병아리들이 발톱 끝이나 부리로 계란의 껍질을 잘 깬뒤에 안전하게 뚫고 나오기를’ 이라는 소망은 일어나지 않는다고해도(na evaṃ icchā uppajjeyya) 병아리들은 발톱 끝이나 부리로 계란의 껍질을 잘 깬뒤에 안전하게 뚫고 나올 것입니다. 비구들이여 그와같이 수행에 몰두해 머무는 비구에게는 ‘내가 취착이 없어져서 번뇌로부터 해탈하기를’이라는 소망이 일어나지 않더라도(na evaṃ icchā uppajjeyya) 그는 취착이 없어져서 번뇌로부터 해탈합니다.”
Suppose there was a chicken with eight or ten or twelve eggs. Seyyathāpi, bhikkhave, kukkuṭiyā aṇḍāni aṭṭha vā dasa vā dvādasa vā.
But she had not properly sat on them to keep them warm and incubated. Tānassu kukkuṭiyā na sammā adhisayitāni, na sammā pariseditāni, na sammā paribhāvitāni.
That chicken might wish: Kiñcāpi tassā kukkuṭiyā evaṁ icchā uppajjeyya:‘
If only my chicks could break out of the eggshell with their claws and beak and hatch safely!’‘ aho vata me kukkuṭapotakā pādanakhasikhāya vā mukhatuṇḍakena vā aṇḍakosaṁ padāletvā sotthinā abhinibbhijjeyyun’ti,
But they can’t break out and hatch safely. atha kho abhabbāva te kukkuṭapotakā pādanakhasikhāya vā mukhatuṇḍakena vā aṇḍakosaṁ padāletvā sotthinā abhinibbhijjituṁ.
Why is that? Taṁ kissa hetu?
Because that chicken with eight or ten or twelve eggs Tathā hi pana, bhikkhave, kukkuṭiyā aṇḍāni aṭṭha vā dasa vā dvādasa vā;
has not properly sat on them to keep them warm and incubated. tāni kukkuṭiyā na sammā adhisayitāni, na sammā pariseditāni, na sammā paribhāvitāni.
‘37조도품을 닦아야 깨달음을 얻는다’라는 제목보다는 ‘실천이 없는 생각은 쓸모가 없다’가 더 적당할 것이다. 전재성의 번역도 부정문(na evaṃ icchā uppajjeyya)을 번역하지 않아서 의도가 제대로 전달되지 못한다. 니까야 번역을 인용할 적에는 각 경전에 대한 치밀한 점검을 하고나서 인용해야 한다.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여덟 개나 열 개나 열두 개의 계란이 있는데 닭이 그것을 올바로 포옹하고 올바로 온기를 주면 올바로 부화시키는 것과 같다. 그 닭은 발이나 발톱이나 머리나 부리로서 계란의 껍질을 부수어 병아리로 안전하게 출생시키고 싶다면 바로 발이나 발톱이나 머리나 부리로서 계란의 껍질을 부수어 병아리로 안전하게 출생시킬 수 있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여덟 개나 열 개나 열두 개의 계란이 있는데 닭이 그것을 올바로 포옹하고 올바로 온기를 주면 올바로 부화시키기 때문이다. 수행승들이여, 만약 수행승으로서 수행을 게을리 하지 않고 집착없이 번뇌에서 마음을 해탈하고자 하면 바로 집착없이 번뇌에서 마음을 해탈할 수가 있다.”
244p.
“비구들이여, 이 도는 유일한 길이니 중생들의 청정을 위하고 근심과 탄식을 다 건너기 위한 것이며,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을 사라지게 하고 옳은 방법을 터득하고 열반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다. 그것은 바로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四念處]’이다.”
“무엇이 네 가지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身隨觀] ~법에서 법을 관찰하며[法隨觀] 머문다.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면서 근면하게,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는 자 되어 머문다.”
[비평]위와 같은 정도의 사념처를 소개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경전 토막내기의 나뿐 예이다. 바로 이어지는 아래와 같은 문장을 넣었으면 불자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될 것이다.
“비구들이여, 어떻게 비구가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 머무는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가 숲 속에 가거나 나무 아래에 가거나 외진 처소에 가서 가부좌를 틀고 몸을 곧추세우고 전면에 마음챙김을 확립하여 앉는다. 그는 마음챙겨 숨을 들이쉬고 마음챙겨 숨을 내쉰다. 길게 들이쉬면서 ‘길게 들이쉰다’고 꿰뚫어 알고(pajānāti), 길게 내쉬면서 ‘길게 내쉰다’고 꿰뚫어 안다. 짧게 들이쉬면서 ‘짧게 들이쉰다’고 꿰뚫어 알고, 짧게 내쉬면서 ‘짧게 내쉰다’고 꿰뚫어 안다. ‘온 몸을 경험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sikkhati) 온 몸을 경험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신행(身行)을 편안히 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신행을 편안히 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245p.
사여의족을 게을리 하지말라
비구들이여, 열정의 삼매와 노력의 행을 갖춘 여의족을 닦습니다.
[비평]
게을리함 경(S51:2)을 인용하였으나 ‘열의를 주로 한 삼매’를 ‘열정의 삼매’로 변경하는등 몇가지 단어들을 임의로 바꾸었다. 문제는 짧게 변경해 놓은 것이 이해하기가 더 어렵다는 것이다. 각묵의 번역은 아래와 같다.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열의를 [주로 한] 삼매와 노력의 의도적 행위[行]를 갖춘 성취수단을 닦는다.정진을 [주로 한] 삼매와 노력의 의도적 행위를 갖춘 성취수단을 닦는다. 마음을 [주로 한] 삼매와 노력의 의도적 행위를 갖춘 성취수단을 닦는다. 검증을 [주로한] 삼매와 노력의 의도적 행위를 갖춘 성취수단을 닦는다.”
252p. 굳건한 지혜로 깨달음
[비평] 제목을 '굳건한 지혜로 깨달음'이라고 잡았지만 굳건한 지혜로 깨달은게 아니라 지혜로 깨달아 비구의 마음이 굳건해진 것이다.
“Mendicants, when a mendicant’s mind has been well consolidated with wisdom it’s appropriate for them to say
256p. 아라한이라는 관념에 집착하지 마라
[비평] 과연 아라한이 아라한이라는 관념에 집착할까? 금강경은 인욕선인,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아라한이 4상이 없기에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아라한이라고 말하는데 이렇게 말하면 인욕선인,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아라한의 차이가 없고 각 수행계위가 무너진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4상이 없는 것만을 기준으로 삼으면 이러한 결과가 벌어진다. 부처님은 열가지 족쇄를 기준으로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아라한의 차이를 설하셨다.
265p. ?도반들이여,? 예를 들면 움직이는 생명들의 발자국은 그 어떤 것이든 모두 코끼리 발자국 안에 놓이고, 또한 코끼리 발자국이야말로 그들 가운데 최상이라고 불리나니 그것은 큰 치수 때문입니다. 도반들이여, 유익한 법은 그 어떤 것이든 모두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에 내포됩니다. 무엇이 넷인가요? 고성제 집성제 멸성제 도성제 입니다.?
[비평]
사성제의 정확한 이름은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 괴로움의 일어남의 성스러운 진리, 괴로움의 소멸의 성스러운 진리,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의 성스러운 진리이다. 괴로움이 4곳에 다 들어가 있다. 그러므로 한문으로 쓸 때에도 고성제 고집성제 고멸성제 고멸도성제라고 불러야 한다. 집성제 도성제라고만 불러왔기에 집(集)이 무엇인지 멸(滅)이 무엇인지에 대한 불필요한 이야기들이 발생하게된다.
268p. ‘이것은 고성제이다.’라고 나는 설명했습니다. ‘이것은 집성제이다.’라고 나는 설명했습니다. ‘이것은 멸성제이다.’라고 나는 설명했다. ‘이것은 도성제이다.’라고 나는 설명했습니다.
[비평] 말룽꺄 짧은 경(M63)을 인용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성스러운 진리’라는 표현이 없고 단지 “‘이것은 괴로움이다.’라고 나는 설명했다. ‘이것은 괴로움의 일어남이다.’라고 나는 설명했다.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이다.’라고 나는 설명했다.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이다.’라고 나는 설명했다.”라고 나타나 있다. ‘이것이 집성제이다’라는 표현보다는 ‘이것은 괴로움의 일어남이다.’는 표현이 더 명확하고 와 닿는다. 또한 ‘말룽꺄뿟따’를 ‘만동자’라고 한다면 ‘사리뿟따’도 ‘사리동자’라고 번역해야 한다. ‘만동자’는 잘못된 번역인데 ‘말룽꺄뿟따’를 ‘만동자’라고 바꾸어 놓고 이것을 계속 사용하라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271p. ‘제 3장 보살의 길’ 목차
[비평]‘제 3장 보살의 길’은 6바라밀이 내용인데 ‘아낌없이 베푸는 삶’등 보시바라밀, 지계바라밀...이라는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1절 믿음은 공덕의 씨앗 8절 보살의 서원이 들어가 8가지가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6바라밀에 8가지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육바라밀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므로 애초에 편찬자들이 방편(方便),원(願),역(力),지(智)의 네 가지를 더하여 십바라밀로 설명했다면 좋았을 것이다.
274p. 불자여, 보살에게는 열 가지 무너지지 않는 믿음이 있다. 모든 부처님께 무너지지 않는 믿음과, 모든 부처님 법에 무너지지 않는 믿음과, 모든 성스러운 스님에게 무너지지 않는 믿음과...於一切佛不壞信 於一切佛法不壞信 於一切聖僧不壞信 於一切菩薩不壞信 於一切善知識不壞信 於一切衆生不壞信
[비평] 화엄경 이세간품에서 인용한 것으로 ‘모든 성스러운 스님에게 무너지지 않는 믿음’을 갖는다는 것은 ‘於一切聖僧不壞信’을 번역한 것인데 여기서 ‘聖僧’은 ‘성스런 승가’로 번역 되어야한다.’ 왜 그런지는 아래 인용문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세존의 제자들의 승가는 잘 도를 닦고, 세존의 제자들의 승가는 바르게 도를 닦고, 세존의 제자들의 승가는 참되게 도를 닦으니, 곧 네 쌍의 인간들이요[四雙] 여덟 단계에 있는 사람들[八輩]이시다. 이러한 세존의 제자들의 승가는 공양 받아야 마땅하고 보시 받아야 마땅하며, 세상의 위없는 복밭[福田]이시다.’
비구계 포살을 시작하는 의식에서도 승가가 아닌 성승가(賢聖僧)으로 나타난다.
一心頂禮 盡十方三世 一切諸佛
一心頂禮 盡十方三世 一切尊法
一心頂禮 盡十方三世 一切賢聖僧
我弟子等 說戒布薩 唯願三寶 爲作證明 南無本師釋迦牟尼佛 (3번)
275p. "나는 애초에 들어보지 못한 것인데 어디서 온것일까? "
[비평] 대승경전이 막 만들어지는 시기에 대승경전을 처음 접한 사람들은 "나는 애초에 들어봊 못한 것인데 어디서 온것일까? "라는 의문이 들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아래와 같이 분열 경(A10:35)에서 "법이 아닌 것(非法)을 법이라고 말하고, 법을 법이 아니라고 말하고, 여래가 설하지 않았고 선언하지 않은 것을 여래가 설했고 선언했다고 말한다."예언이 사실이 아닌가? 범망경보살계 같은 것을 만들어 놓고 무조건 대승경전이니 믿으라고 가르치는 경우 그대로 따라야 할까?
분열 경(A10:35)
1. “세존이시여, ‘승가의 분열, 승가의 분열’이라고 합니다. 어떤 것이 승가의 분열입니까?”
2. “우빨리여, 여기 비구들이 법이 아닌 것(非法)을 법이라고 말하고,
법을 법이 아니라고 말하고,
율이 아닌 것을 율이라고 말하고,
율을 율이 아니라고 말하고,
여래가 설하지 않았고 선언하지 않은 것을 여래가 설했고 선언했다고 말하고,
여래가 설했고 선언한 것을 여래가 설하지 않았고 선언하지 않았다고 말하고,
여래가 실천하지 않은 것을 여래가 실천했다고 말하고,
여래가 실천한 것을 여래가 실천하지 않았다고 말하고,
여래가 제정하지 않은 것을 여래가 제정했다고 말하고,
여래가 제정한 것을 여래가 제정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우빨리여, 그들은 이러한 열 가지 경우로 회중을 분열시키고, 불화하게 하고, 분리시키는 업을 짓고, 독단적인 다른 빠띠목카를 제정한다. 우빨리여, 이런 것이 승가의 분열이다.”
275p. 신심이 제일 가는 보물이다
281p. 삼귀의와 오계를 지닌 자는 착한 신이 보호한다.
삼귀의를 하면 36명의 착한 신이 따라 다니며 보호하고(282쪽),오계를 받아 지닌 자는 25명의 신이 따라다니며 보호한다.
[비평] 불설관정경(佛說灌頂經)은 보살승이 등장하는등 밀교적인 냄새가 나는 경전인데 이러한 경에서 삼귀의 부분을 옮겨와 설명하는것은 정확하지도 않고 현명하지 않다. 삼귀의를 설명할 때 니까야에 나오는 아래와 같은 쉽고도 정확한 경을 인용하면 더 신심을 발하기에 좋을 것이다.
무슨 교설 경(A2:4:3)
그때 어떤 바라문이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과 함께 환담을 나누었다. 유쾌하고 기억할 만한 이야기로 서로 담소를 나누고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바라문은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고따마 존자시여, 당신은 어떤 교설을 가졌으며 무엇을 말씀하십니까?”
“바라문이여, 나는 지음에 대한 교설과 짓지 않음에 대한 교설을 가르친다.”
“고따마 존자께서는 어떻게 지음에 대한 교설을 가르치시며 또한 짓지 않음에 대한 교설을 가르치십니까?”
“바라문이여, 나는 짓지 않음에 대한 교설을 가르친다. 몸으로 나쁜 행위를 저지르고 말로 나쁜 행위를 저지르고 마음으로 나쁜 행위를 저지르는 자에게 여러 가지 나쁜 불선법들을 짓지 말 것을 가르친다. 바라문이여, 나는 지음에 대한 교설을 가르친다. 몸으로 좋은 행위를 하고 말로 좋은 행위를 하고 마음으로 좋은 행위를 하는 자에게 여러 가지 선법들을 지을 것을 가르친다. 바라문이여, 나는 이와 같이 지음에 대한 교설과 짓지 않음에 대한 교설을 가르친다.” “경이롭습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경이롭습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마치 넘어진 자를 일으켜 세우시듯, 덮여있는 것을 걷어내 보이시듯, [방향을] 잃어버린 자에게 길을 가리켜주시듯, 눈 있는 자 형상을 보라고 어둠 속에서 등불을 비춰주시듯, 고따마 존자께서는 여러 가지 방편으로 법을 설해주셨습니다. 저는 이제 고따마 존자께 귀의하옵고 법과 비구승가에 귀의합니다. 고따마 존자께서는 저를 재가신자로 받아주소서. 오늘부터 목숨이 붙어 있는 그날까지 귀의하옵니다.”
참고로 불설관정경이 어떤 경인가를 설명을 옮겨왔습니다.
"제7 '불설관정복마봉인대신주경'(佛說灌頂伏魔封印大神呪經)에는 부처가 사위국의 기수(祇樹) 정로(精盧)란 곳에 머물 때 제석천(帝釋天)에게 온갖 재액을 없앨 수 있는 방법으로 문두루법 등을 추천한다. 관정경에 소개된 문두루법은 인도권 불교에서는 전혀 볼 수 없는 요소가 무수하다. 예컨대 각 방향을 관장하는 오방(五方)의 대신(大神)들이 각기 고유한 방위색의 옷을 걸치고 그 방향에 대응되는 색깔의 기(氣)를 뿜는다는 발상은 인도 불교에서는 있을 수 없다. 이는 중국의 오랜 사상 체계 중 하나인 음양오행설이 그 뿌리로 보인다.오장신 신앙은 후한시대에 출현한 초기 도교 경전들인 태평경(太平經)이나 노자하상공주(老子河上公注)에 이미 뚜렷이 보이며, 이후 도교신학의 주축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로 자리잡는다. 이런 점들로 볼 때 문두루법의 성전(聖典)이라 할 수 있는 관정경이란 밀교 경전이 서역 경전을 온전히 번역한 판본이라고 생각하기는 힘들다. 관정경의 원본이 된 서역 경전이 있었는지 확실치는 않으나, 설혹 있었다고 해도 금시리밀다라의 번역과정, 혹은 이후 경전이 유통되는 과정에서 수많은 중국적인 요소를 가미해 성립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286p.
믿음의 복은 헤아릴 수 없다.
[비평]---소 제목은 ‘보시의 복은 헤아릴 수 없다.’로 바꾸어야 할 것이다.
경의 내용이 그렇기 때문이다.
287p.
믿음의 힘으로 물위를 걷다
[비평] 내용을 보면 부처님이 신통력으로 만든 사람이 물 위를 걸은 것이지 일반사람이 부처님에 대한 믿음의 힘으로 물위를 걸은 것은 아니다. 마치 자신의 아름다움에 자만을 갖고 있던 케마왕비를 제도하기 위해서 부처님이 아름다운 미녀를 창조한 후에 늙는 모습을 보여주었던 것과 같이 여기서도 부처님은 신통력으로 사람을 창조하여 물 위를 걷게하고 있다. 그러므로 ‘믿음의 힘으로 물위를 걷다’는 제목은 적당하지 않고 ‘부처님이 신통력을 보여 믿음을 내게하다’가 더 적당하다. 믿으면 물 위를 걸을 수 있다는 믿음 절대주의에 불자들이 빠질까 염려된다. ‘보살의 길’이라는 제목 아래는 삼귀의를 믿음의 차원으로 설명하고 있는데 ‘믿음의 힘으로 물위를 걷다’는 제목으로 그것을 보여주려고 하는 것 같다. 그러나 삼보를 믿는 것으로만 설명하면 기독교에서 신을 믿는 거와 다를바가 없다. 삼보에 대한 믿음은 삼보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 믿음이어야 한다.
292p.도를 증득했다.
[비평] 부처님의 설법을 처자에게 가르치고, 서로 이어받아 모두 예류자(迹 자취 적; 흔적, 걸음, 발자취)을 증득하였다.
比羅陁聞佛所說益加篤信,稽首佛足歡喜還家,具宣佛教誨其妻子,遂相承繼皆得道迹。『법구비유경』
293p. 또는 아이들이 장난으로 모래를 쌓아 불탑을 만든다면 이런 사람들은 모두 이미 성불하였느니라.
[비평]---'성불할 것이니라'가 아니고 '성불하였니라'는 이런 설명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계정혜 수행을 통해서 해탈한다는 교리와 모순된다. 불자들에게 어떻게 모순없이 이해시킬 것인가?
295p. 개인보다 승가에 보시하는 공덕이 더 크다
[비평] ' 개인보다 승가에 보시하는 공덕이 더 크다'라는 제목과는 다르게 인용된 경에는 개인에 대한 14가지 보시를 소개하지 않고 있다. 보시의 분석 경(M142)을 부분부분 인용하였기에 전체적인 내용파악이 어렵다. 개인에 대한 보시보다 승가에 대한 보시가 크다는 것을 강조하며 개인에 붓다 자신을 넣었다는 것도 드러나 있지 않다. 또한 승가를 위해 계행이 청정치 못한 자들에게 보시를 베풀어도 승가에 보시한 공덕은 헤아릴 수 없다는 놀라운 사실도 인용하지 않고 있다. 보시의 분석 경(M142)을 읽으면 ‘승가에 귀의하는 것’을 ‘스님들께 귀의한다’고 가르치는 것이 왜 잘못된 것인지 확연히 드러난다. 각묵스님이 번역한 "아난다여, 개인에게 하는 보시가 승가에게 하는 보시보다 그 과보가 더 크다고 나는 절대 말하지 않는다.”라는 문장을 불교성전은 "그리고 나는 결코 개인에 대한 보시가 승가에 대한 보시보다 더 커다란 과보를 낳지는 못한다고 말합니다."라는 표현하고 있는데 문장이 매끄럽지 못하다. Na tvevāhaṃ, ānanda, kenaci pariyāyena saṅghagatāya dakkhiṇāya pāṭipuggalikaṃ dānaṃ mahapphalataraṃ vadāmi.
웰라마 경(A9:20)에서도 부처님께 보시하는 것보다 승가에 보시하는 것이 공덕이 더 크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계행이 청정치 못하고 삿된 법을 가진 자들이 속해 있는 승가에 보시하는 것이 개인에게 보시하는 것보다 공덕이 크다고 말하는 것은 '현성승가'가 아닌 범부승가에 보시하는 공덕이 얼마나 큰 지 알수 있다.(승가에 보시하는 공덕이 부처님께 보시하는 공덕보다 크다면 현성이 있건 없건 범부 승가에 귀의하는 것이 적합하다는걸 알수 있다.) 불교성전은 '계행이 청정치 못하고 삿된 법을 가진 자들에게 보시하는 것'을 생략하였는데 그 전체 번역은 다음과 같다.
“아난다여, 열네 가지 개인을 위한 보시가 있다. 여래․아라한․정등각자께 보시하는 것이 첫 번째 개인을 위한 보시이다. 벽지불에게 보시하는 것이 두 번째 개인을 위한 보시이다. 여래의 제자인 아라한에게 보시하는 것이 세 번째 개인을 위한 보시이다. 아라한과의 실형을 닦는 자에게 보시하는 것이 네 번째 개인을 위한 보시이다. 불환자게 보시하는 것이 다섯 번째 개인을 위한 보시이다. 불환과의 실현을 닦는 자에게 보시하는 것이 여섯 번째 개인을 위한 보시이다. 일래자에게 보시하는 것이 일곱 번째 개인을 위한 보시이다. 일래과의 실현을 닦는 자에게 보시하는 것이 여덟 번째 개인을 위한 보시이다. 예류자에게 보시하는 것이 아홉 번째 개인을 위한 보시이다. 예류과의 실현을 닦는 자에게 보시하는 것이 열 번째 개인을 위한 보시이다. 감각적 욕망들에 대해 탐욕을 여윈 이교도에게 보시하는 것이 열두 번째 개인을 위한 보시이다. 행실이 바른 범부에게 보시하는 것이 열두 번째 개인을 위한 보시이다. 행실이 나쁜 범부에게 보시하는 것이 열세 번째 개인을 위한 보시이다. 축생에게 보시하는 것이 열네 번째 개인을 위한 보시이다. 아난다여, 이 가운데서 축생에게 보시를 하면 백 배의 보답이 기대된다. 행실이 나쁜 범부에게 보시를 하면 천 배의 보답이 기대된다. 행실이 바른 범부에게 보시를 하면 십만 배의 보답이 기대된다. 감각적 욕망들에 대해 탐욕을 여윈 이교도들에게 보시를 하면 천억 배의 보답이 기대된다. 예류과의 실현을 닦는 자에게 보시를 하면 헤아릴 수 없고 잴 수 없는 보답이 기대된다. 그러나 예류자에게 보시를 하면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일래과의 실현을 닦는 자에게 … 일래자에게 … 여래․아라한․정등각자에게 보시를 하면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아난다여, 그런데 일곱 가지 승가를 위한 보시가 있다. 부처님을 상수로 하는 두 승가에 보시하는 것이 첫 번째 승가를 위한 보시이다. 여래가 완전한 열반에 들고 나서 비구와 비구니 두 승가에 보시하는 것이 두 번째 승가를 위한 보시이다. 비구 승가에 보시하는 것이 세 번째 승가를 위한 보시이다. 비구니 승가에 보시하는 것이 네 번째 승가를 위한 보시이다. 승가에서 이 정도의 비구와 비구니들을 제게 정해주십시오.라고 말하고 보시하는 것이 다섯 번째 승가를 위한 보시이다. 승가에서 이 정도의 비구들을 제게 정해주십시오.라고 말하고 보시하는 것이 여섯 번째 승가를 위한 보시이다. 승가에서 이 정도의 비구니들을 제게 정해주십시오.라고 말하고 보시하는 것이 일곱 번째 승가를 위한 보시이다. 아난다여, 미래세에 계행이 청정치 못하고 삿된 법을 가졌으며 노란 가사를 목에 두른 일족들이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승가를 위해 그 계행이 청정치 못한 자들에게 보시를 베풀 것이다. 아난다여. 그렇더라고 승가를 위한 보시는 그 공덕이 헤아릴 수 없고 잴 수 없다고 나는 말한다. 아난다여, 개인에게 하는 보시가 승가에게 하는 보시보다 그 과보가 더 크다고 나는 절대 말하지 않는다."
302p. 보시하면서 분노하고 불평해도 천상의 이익을 얻는다.
[비평] "사람들은 ‘세존께서 수행승들에게 죽과 밀환을 허용했다.’라고 듣고 아침 일찍 부드러운 죽과 밀환을 조리하곤 했다. 수행승들은 아침 일찍 부드러운 죽과 밀환을 먹기 때문에 식당에서 기대했던 만큼 먹지 못하곤 했다." 이 문장으로 시작하는 글인데 이 문장을 빼니 수행자들이 왜 아침 일찍 부드러운 죽과 밀환을 먹었는지 설명이 안된다. 덧붙이면 좋을 것이다.
305p.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고 마음에 들어 하고, 선하고 참된 사람들이 가까이하고, 좋은 명성이 따르고, 재가자의 법으로부터 멀어지지 않고,
[비평] 보시의 이익 경(A5:35)에서 인용한 것인데 ‘재가자의 법으로부터 멀어지지 않고’의 뜻이 애매하다. 영어번역처럼 ‘재가자의 의무를 소홀하지 않고’라고 번역하는 것이 이해가 쉬울듯하다. pañcame gihidhammā anapagato hotīti akhaṇḍapañcasīlo hoti. sataṃ dhammaṃ anukkamanti sappurisānaṃ mahāpurisānaṃ dhammaṃ anukkamanto M.3.21. santo naṃ bhajantīti sappurisā buddhapaccekabuddhatathāgatasāvakā etaṃ bhajanti.
306p.영감(靈感)을 보시합니다.
[비평]-305p 우바새계경에서 보시 받는자가 보시의 결과로 목숨,육체,힘,편안함,언변을 얻는다고 하고 있고 음식경에서는 보시자는 수명,아름다움,행복,힘,영감(靈感)을 보시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두 경이 비슷하지만 다르다. 가장 다른것은 육체:아름다움, 언변:영감이다. 사전적인 설명으로는 언변 혹은변재를 얻는 다고 해야 알맞을 듯하다. 그런데 이 책의 편집자들은 왜 5가지 보시의 과보를 다르게 설명해 놓아야 했을까? 불교성전을 만든 이들이 보여주는 무책임함의 일면이다.
사전에서는 빠띠바나(paṭibhāna)를 辯,辯才,應辯,頓才, understanding,illumination,intelligence; readiness or confidence of speech라고 설명한다.
308p.
이 아이는 이 공덕으로 내가 열반한 후 백년뒤에 국왕이 되어 이름을 아소카라 할 것이다.
[비평]---아소카는 이 백년후에(불멸bc544-bc304아소카출생)에 태어나서 이 예언이 맞지 않는다. 년대가 맞지 않는 이런 경을 소개할 필요가 있나?
310p.'대상에 대한 관념에 집착하지 않고'
[비평]무주상(無住相) 보시를 '대상에 대한 관념에 집착하지 않고'라고 해석하였다.여기서 무주상보시는 아래처럼 해석되어야 한다. "상이 없는 마음으로 보시해야 한다는 것은 보시한다는 마음도 없고 베푸는 물건도 없으며, 받는 사람 또한 가리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상에 머물지 않는 보시입니다." 단순히 대상에 대한 관념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須菩提 菩薩 無住相布施福德 亦復如是 不可思量 須菩提 菩薩 但應如所敎住
315p.핵심이 이해된 말들은 잘 설해진 것이다. 배운것이 이해 될때가 집중의 핵심이다. 성급하고 게으른 사람의 배움과 지혜는 늘지 않는다.
[비평]- 표현은 잘 이해가 되지 않는데 전재성의 번역은 이렇다.
"훌륭히 설해진 것은 잘 분별된 것의 핵심이고, 들려지고 알려진 것은 삼매의 핵심이다. "
Viññātasārāni subhāsitāni Sutañca viññātasamādhisāraṁ;Na tassa paññā ca sutañca vaḍḍhati, Yo sāhaso hoti naro pamatto.
나의 해석을 덧 붙인다. "잘 설해진 것의 핵심은 이해함이고, 배우고 이해함의 핵심은 삼매이다 "
316p. 삼귀의 하는 법
[비평]----316p 317p에 저는 승가에 귀의합니다.를 세 번하고 있다. '부처님과 법과 승가에 귀의합니다'라는 표현이 빈번하게 나타나는데 왜 '스님들께 귀의합니다'를 고집하고 있나?
324p. 세계의 중심이 되는 나라에 태어나며 좋은 법을 듣고 그것을 분별하고 사유해 법을 성취하게 하소서.또한 이재법의 공덕으로 모든 중생이 착한 법을 받아 들이고
[비평] 여기에서 나오는 중국(中國)이란 부처님이 활동하셨던 중심지역을 말한다. 선법을 앞에서는 좋은 법(善法) 뒤에서는 착착한 법(善法)으로 다르게 번역하고 있다. 시성삼승(施成三乘)의 번역은 하지 않는등 전체적인 번역이 문제가 있다. 生中國中,聞其善法,分別思惟,法法成就,持此齋法功德,攝取一切衆生之善,以此功德惠施彼人,使成無上正眞之道,持此誓願之福,施成三乘,使不中退。復持此八關齋法,用學佛道、辟支佛道、阿羅漢道。諸世界學正法者,亦習此業,正使將來彌勒佛出現世時,如來至眞等正覺値遇彼會,使得時度。彌勒出現世時,聲聞三會,初會之時,九十六億比丘之衆,第二之會,九十四億比丘之衆,第三會,九十二億比丘之衆,皆是阿羅漢,諸漏已盡。亦値彼王及國土教授師,作如是之教,無令缺漏。
325p.
범망경 10중대계와 48계를 소개하고 있다.
[비평]---범망경보살계서(梵網經菩薩戒序)에는 싯타르타가 일곱살에 출가하고 삼십세에 깨달았다(七歲出家 三十成道 號吾爲釋迦牟尼佛)는 것은 역사적인 사실이 아니다. 또한 “그때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보리수나무 아래 앉으셔서 위없는 깨달음을 이루시고 보살의 바라제목차를 처음으로 정하시니 이는 부모와 스승과 삼보에게 효순하는 것이며, 바른도에 효순하는 법이다.”(爾時, 釋迦牟尼佛 初坐菩提樹下 成無上覺. 初結菩薩波羅提木叉, 孝順父母, 師, 僧三寶 孝順至道之法)라고 보살계를 설하는 시기를 설명하는데 여기서부터 거짓말이 시작된다. 보리수하에 처음 깨닫고 보살계를 설했다면, 부처가 설법하기 전인데 우바새 우바이가 어디서 나왔고, 오비구를 만나기 전인데 여기에 참석한 비구비구니가 어디에서 누구앞으로 출가한 자들일까? 사부대중이 아직 생겨나지도 않았는데 사부대중의 허물을 말하지 말라는 말을 한다.경구죄 15조 "이승(二乘)성문(聲聞)의 계율을 가르치거나, 외도의 삿된 소견과 학설을 가르치면 가벼운 죄가 된다(二乘聲聞經律, 外道邪見論等, 犯輕垢罪)" 는 설명을 하는데 법을 설하기도 전인데 소승경률은 어디서 나온 것이며 아비담마는 또 어디서 나왔는가?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뒤에 좋은 마음으로 보살계를 받들려면 불·보살의 형상 앞에서 서원을 세우고 계를 받되, 7일 동안 불·보살께 참회하여 좋은 징조가 보이면 계를 얻을 것이 된다"는 표현에서처럼 불멸후 500년뒤에나 나타나는 불상과 보살상을 부처가 설법하기도 전에 도대체 누가 만들었다는 말인가? 부처님은 빔비사라왕을 성도후 1년후에 만났고 코살라국 빠세나디왕은 성도후 3년후에나 만났는데 어떻게 16대국의 왕이 모두와서 보리수 아래에서 법을 들을 수 있었단 말인가? 생선을 비롯해서 모든 고기를 먹지 말자는 데와닷따의 주장을 부처님은 물리치셨는데 왜 보살계에서는 고기를 먹지말라는 계율이 제정되고 있는가? 고행을 하지 말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있는데 보살계에서는 "법대로 온갖 고행(苦行)을 말하되, 몸이나 팔·손가락을 태우는 것을 일러줄 것이며, 만약 몸이나 팔·손가락을 태워 부처님께 공양하지 아니하면 발심한 보살이 아니다."라는 기이하고 괴상하고 극단적인 행위를 계목이라고 소개하소 있는가?
승가에 재가자를 포함되다보니 사부대중 포살용 보살계본을 만들어야 했고, 이 보살계본을 부처님이 설한 것이라고 권위를 주려다보니, 보리수아래서 부처님이 설한 것이라고 거짓말을 하게 되고, 그뒤로는 경장과율장, 비구비구니,16대왕,사부대중, 불상,보살상등 역사적으로 후대에 나타나야할 것들이 등장시켜서 모든 거짓말이 줄줄이 따라나오게 되었다. 거짓으로 시작해서 거짓으로 끝나는 보살계를 우리 선배님들은 왜 금과옥조로 신봉하고 전승하였는가? 지금은 불교의 역사를 여러 가지 자료를 통해 참과 거짓을 구별해 낼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보살계를 이렇게 불교성전에 수록하는가? 전통이라는 미명하에 미신적이고 말도 안되는 보살계를 맹신하고 따랐던 불교역사를 돌이켜보면 오늘날 힌두교인들이 갠지스강에서 목욕하면 죄업이 소멸된다며 오늘도 갠지스강에 들어가 목욕하는 인도인들과 무엇이 다른가?
경구죄 8조는 ‘이승성문의 교법과 이교도의 사견(邪見)으로 만든 학설을 배우는 것은 죄가 된다.’(背大向小戒 若佛子 心背大乘 常住經律言非佛說 而受持二乘聲聞 外道惡見 一切禁戒邪見經律者 犯輕垢罪)’라는 설명이 붙어 있는데 불교성전에는 "대승이 아닌 외도의 사견을 가르치지 말라"고 이승성문(二乘聲聞)을 빼고 제목을 달았다. 경구죄 중에는 소승과 성문을 외도와 동급으로 취급하는 설명이 4번(8조, 15조. 24조. 34조)이나 나온다. 지금 말로 하면 5부 니까야,4부 아함, 빠알리 율장, 사분율등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을 부정하고 배척한 것이다. 그것을 배우는 승가를 부정한 것이고 가르침을 설하고 율을 제정한 석가모니 부처님을 부정한 것이다. 부처님의 제자라는 자들이 어찌 이런짓을 저지를수 있는가? 이렇게 보살계를 설하는 자들은 자신들이 악날하게 삼보를 비방하고 있으면서 보살계 곳곳에 삼보를 비방하지 말라고 말하고 있으니 참으로 괴이하고 기이하다.
345p. 인욕을 청정하게 하는 법
부처님 가르침을 따르는 인욕이란 무엇인가? 보살은 화나고 괴로우며 독한 마음이 일어날 때 이렇게 생각한다. ‘이 몸은 어디에서 생겨 어디로 사라지는가? 나로부터 생겼다면 무엇이 나이며, 저것으로부터 생겼다면 무엇이 저것인가? 법의 모습이 이러하니, 어떤 인연으로부터 일어나는가?’ 보살이 이렇게 생각할 때, 생겨남을 볼 수 없고, 또한 연기를 볼 수 없고, 내가 생겨나는 것을 볼 수 없고, 저것이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없으며, 또한 인연이 생겨나는 것도 볼 수 없다.
[비평] 전체적인 번역이 애매모호하여 다시번역해 보았다.
‘이 몸은 어디에서 생겨 어디로 사라지는가? 나로부터 생겼다면 무엇이 나이며, 남으로부터 생겼다면 무엇이 남인가? 이러한 법의 모양은 어떤 인연으로부터 일어나는가?’
云何名菩薩隨佛教忍?菩薩瞋惱毒心起時,作是思惟:‘此身從何而生?從何而滅?從我生者,何者是我?從彼生者,何者是彼?法相如是,從何因緣起?’
360p. 아직 일어나지 않은 착한법들이 일어나고 이미 일어난 나쁜 법들은 버려집니다.
[비평]--꾸살라(kusalā)와 아꾸살라(akusalā)를 여기서는 ‘착한 법’과 ‘나쁜 법’으로 바꾸어 사용하고있다. 초기불전에서는 ‘선법’과 ‘불선법’ 혹은 ‘유익한 법’, ‘해로운 법’으로 번역했다.
366p. 법을 가르치는 법사를 업신여기지 말라
[비평]법문하는 사람을 가볍게 여기지 말라
又不得於主法人, 生輕薄想. 因之於道有障, 不能進修, 切須愼之.
408p. 바라문이여, 게으르지 않음이 그 하나의 법이니
[비평] 방일하지 않음이 그 하나의 법이니
방일하지 않음(appamada)은 수행주제를 놓치지 않는 것으로 일반적인 게으름과는 다르다.
이러한 설명이 필요하다.
367p.
---발심수행장을 소개하고 있다.
[비평]‘절하는 무릎이 얼음과 같더라도 불을 그리는 마음이 없고(拜膝如氷無戀火心) 주린 창자가 끊어질 것 같아도 밥을 구하는 생각이 없어야 한다.’(餓腸如切無求食念) 그만큼 간절하게 다른 생각하지 않고 수행하라는 말씀이지만 이것을 잘못 이해하여 마치 고행을 하는 것이 수행인냥 오해하는 경우도 있다. 지난번 천막선원에서 목욕안하기, 머리안깍기, 말안하기, 외출안하기, 추위참기등을 청규로 정하여 안거를 한 것도 고행을 수행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는지 의심이 든다. 부처님이 가르쳐주신 오후불식과 소욕지족(少欲知足)을 강조하는 것이 부처님 가르침에 부합할 것이다. 발심수행장과 내용이 비슷한 경전을 인용하는 것이 더 낳을 것이다.
420p.모든 것은 마음이 앞서가고 마음이 가장 중요하며
[비평] 마노(mano)를 마음, 담마(dhammā)를 '모든 것'이라고 번역하였는데, 적절치 않다. 모든것에 마노도 포함되기 때문이다. 담마(복수)는 삶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괴로움과 줄거움이라는 정신현상(All mental phenomena)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아래는 법정스님의 번역과 전재성의 번역이다.
[법정]모든 일은 마음이 근본이다. 마음에서 나와 마음으로 이루어진다.
나쁜 마음을 가지고 말하거나 행동하면 괴로움이 그를 따른다.
수레바퀴가 소의 발자국을 따르듯이
[전재성]정신이 사실들의 선구이고 정신이 그것들의 최상이고 그것들은 정신으로 이루어진 것이니
만약에 사람이 오염된 정신으로 말하거나 행동하면 괴로움이 그를 따르리.
수레바퀴가 황소의 발굽을 따르듯
諸法意先導,意主意造作,若以染污意,或語或行業,是則苦隨彼,如輪隨獸足
420p. 비구들이여, 나쁜 법과 나쁜 법에 동참하는 것과 나쁜 법 편에 있는 것은 그 무엇이든 모두 마음이 그들을 앞서 갑니다.
[비평]-----위에 인용한 경의 초기불전연구원 번역은 이렇다.
“비구들이여, 불선법(不善法)과 불선법에 동참하는 것과 불선법의 편에 있는 것은 그 무엇이든 모두 마음이 그들을 선행한다. 마음이 그 법들 가운데서 첫 번째로 일어나고 그 다음에 불선법들이 일어난다.”
꾸살라(kusalā)와 아꾸살라(akusalā)를 전재성은 ‘건전한 법’과 ‘건전하지 않은 법’이라 번역했고 각묵은 ‘선법’과 ‘불선법’ 혹은 ‘유익한 법’, ‘해로운 법’으로 번역했다. 여기서는 ‘착한 법’과 ‘나쁜 법’으로 바꾸어 사용하고있다. 용어통일 없이 자유롭게 표현하고 있음을 알 수있다. 꾸살라(kusalā)와 아꾸살라(akusalā)의 번역어는 중요한데도 이 책의 색인에서는 '나쁜법' '착한법' ‘선법’과 ‘불선법’등 어떤 번역어도 실려있지 않다. 마음대로 바꾸어 번역하였으므로 색인에 실을 수 없었나 보다.
424p. 바라문 학인이여, 그러면 어떻게 비구는 마음챙김[正念]과 알아차림[正知]을 잘 갖춥니까?
[비평] 사문과경에서 인용하였다면 “대왕이여"라는 호칭이 나와야 하건만 "바라문 학인이여"라고 부르고 있다. 수바경에서 인용하여 놓고는 사문과경에서 인용하였다고 출처를 잘못 표기하였다. 사문과경의 문장은 다음과 같다.
"대왕이여, 그러면 어떻게 비구는 마음챙김과 알아차림[正念正知]을 잘 갖춥니까? 대왕이여, 여기 비구는 나아갈 때도 물러날 때도 [자신의 거동을] 분명히 알면서[正知] 행합니다" 사문과경
427p. 삼매에서 생긴 희열과 행복으로 이몸을 흠뻑 적시고 충만하게 하고 가득 채우고 속속들이 스며들게 하고,
[비평]가로안에 든 문장을 생략하였는데 어색하다.
삼매에서 생긴 희열과 행복(이 있는 제2선(二禅)을 구족하여 머물러서, 그가 삼매에서 생긴 희열과 행복으로) 이 몸을 흠뻑 적시고 충만하게 하고 가득 채우고 속속들이 스며들게 하고,
433p.
부루나를 교계한 경
[비평]---‘뿐나를 교계한 경(M145)’이라고 경의 제목도 바꾸고 본문에 등장하는 ‘뿐나’도 모두 ‘부루나’로 바꾸어 놓았다. 니까야의 번역까지 임의로 수정하면서 구마라즙 한문번역본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 501p에서도 같은 경이 나오는데 이번에는 장소를 ‘수나빠란따’에서 ‘수로나’라고 고쳐 놓았다. 제3장 '보살의 길'에 ‘뿐나를 교계한 경’을 소개하면서 경을 두부분으로 나누어 소개하는 것도 어색하다. 경은 시작부분과 중간 부분이 이어져야 내용파악이 쉽고 더 경을 읽는 효과가 있지 않을까?
434p. 한문 번역에 문제가 있는데 그런 번역문을 인용하였다.
"사마타는 '없앤다'는 뜻이니 온갖 번뇌를 없애기 때문이고, 또 '굴복'이라는 뜻이니 모든 감각기관의 나쁘고 착하지 못한 것을 굴복시키기 때문이다. 또 '고요하다'는 뜻이니 몸과 말과 마음의 행위를 고요하게 하기 때문이고, 또 멀리 벗어난다'는 뜻이니 중생으로 하여금 다섯 가지 욕망을 멀리 벗어나게 하기 때문이다. 또 '굴복시킨다'는 뜻이니 탐욕, 성냄, 어리석음의 탁함을 청정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선정이라고 한다. 위빠사나는 '바르게 본다'는 뜻이고, '분명히 본다'는 뜻이다. 또 "능숙하게 본다'는 뜻이고, '두루 본다, '순서대로 본다, '다른 모양 으로 본다'는 뜻이니, 이것을 지혜라 한다."
[비평] 사마타는 '없앤다'는 뜻이니 온갖 번뇌를 없애기 때문이고, 또 '굴복'이라는 뜻이니 모든 감각기관의 나쁘고 착하지 못한 것을 굴복시키기 때문이다. 또 '고요하다'는 뜻이니 몸과 말과 마음의 행위를 고요하게 하기 때문이고, 또 멀리 벗어난다'는 뜻이니 중생으로 하여금 다섯 가지 욕망을 멀리 벗어나게 하기 때문이다. 또 '청정하게 한다(能淸)'는 뜻이니 탐욕, 성냄, 어리석음의 탁함을 청정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선정이라고 한다.奢摩他者,名爲能滅‚能滅一切煩惱結故;又奢摩他者,名曰能調‚能調諸根惡不善故;又奢摩他者,名曰寂靜‚能令三業成寂靜故;又奢摩他者,名曰遠離‚能令衆生離五欲故;又奢摩他者,名曰能淸‚能淸貪欲、瞋恚、愚癡三濁法故。以是義故,故名定相。
위빠사나는 '바르게 본다'는 뜻이고, '분명히 본다'는 뜻이다. 또 "능숙하게 본다'는 뜻이고, '두루 본다, '순서대로 본다, '나누어 본다(別相見)'는 뜻이니, 이것을 지혜라 한다. 毘婆舍那名爲正見‚亦名了見‚名爲能見‚名曰遍見‚名次第見‚名別相見‚是名爲慧。
『대반열반경』 28권(ABC, K1403 v38, p996a19-a21)
434p. 저 부분들에 대하여 힘이 있고 자우자재하며 바르고 두루 통달한 것이다.
[비평] 於彼彼處를 앞에서는 '저 부분들에 대하여'라고 번역하고 뒤에서는' 여러 곳에서'라고 번역하고 있다.
聞所成慧云何?答:因聞依聞由聞建立,於彼彼處有勢力得自在正遍通達。其事如何?如有苾芻,或受持素呾纜、或受持毘奈耶、或受持阿毘達磨
서수산인(書數算印)을 '글을 쓰고 계산하거나'라고 번역하는 것도 문제가 있다. 思所成慧云何?答:因思依思由思建立,於彼彼處有勢力得自在正遍通達。其事如何?謂如有一如理思惟書數筭印,或隨一一所作事業,是名爲思
459p.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거짓 이름을 말하는 것이다....‘있다’ ‘없다’의 양극단을 여의었기에 중도라 한다.
[비평]---부처님이 사용하신 있다(atthī) 없다(natthī)는 세상 사람들의 어법에 따른 표현이다. 이러한 ‘있다’ ‘없다’는 상견과 단견에 떨어지는 것과 다르다. 상견과 단견은 동사 있다(atthī)와 없다(natthī)가 명사 있음(atthitā)와 없음(natthitā)이 될 때 나타난다. 동사가 명사가 되어 사용될 때 상견단견의 표현이 된다는 것은 깊이 음미해야 할 대목이다. 꽃경(S22:94)과 깟짜야나곳따의 경(S12:15)을 보면 그 차이가 잘 드러난다. 이렇게 부처님의 언어사용법을 설명하지 않고 단순히 ‘있다’ ‘없다’를 상견 단견이라고 비판한다면 불자들의 언어생활이 혼란스러워 진다. 중론을 인용할 때 이러한 설명을 해주어야 하는데 그러한 설명이 없다면 처음부터 중론은 인용하지 않는게 좋다.
442p. 경전, 게송, 공덕의 차이점(記別), 구절, 감흥어, 인연,비유
[비평] 12부경을 설명하는데 한문이나 범어를 써주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게경(偈經)을 구절로 번역한 것 같은데 12부경의 이름을 마음대로 의역해 놓고 한문이나 범어의 설명을 안하고 있으니 기존의 지식과 비교하여 혼란스럽다
447p. 신심이 수미산에 기댄것 같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비평] 화두참선을 하는 사람들은 이 대목에서 신심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나오기를 기대 했을 것이다. 큰 신심에 대한 이러한 설명보다 더 자세한 설명이 나오는 어록이 인용되어야 할것이다.
458p. 중론의 관안연품과 관사제품
[비평]중론의 관안연품과 관사제품이 '보살의 길'이라는 단원에 들어가는 것이 타당한가? 478p 불법은 바다와 같다는 제목으로 사분율을 소개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보살의 길'단원은 259페이지나 되는데 이 단원에 어울리지 않는 너무도 다양한 경전들이 인용되어 있다.이 부분이 가장 혼란 스럽다.
465p.
[비평]---정신경에서 쭌다를 춘다로 바꾸어 놓았다. 발음이 달라지면 쭌다(cunda)와 춘다(chunda)처럼 다른 사람으로 오해 될 가능성이 있다.
467p.
[비평]---소나단다경을 소개하는데 뽁카라사띠, 짬빠, 각가라, 소나단다는 그냥두고 빠세나디는 파사익으로, 고따마는 고타마로 이름을 바꾸어 놓았다,
494p.
저 바라문은 제화갈 부처님이었고 토끼는 나였으며 원숭이는 사리불이었고
[비평]---제화갈(提和竭) 부처님을 아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까마는 설명도 없이 지나간다.
498p.
[비평]보기 드물게 * 표시를 하고 현겁(賢劫)에 대한 주석을 달아 놓았는데 현겁에 1천 부처가 출현한다는 것이 초기불교 입장에서는 믿기 어렵다. 불자들은 어느쪽을 따라야 할까?
525p.
자비하신 관세음께 귀의 하오니 일체법을 어서 속히 알아지이다.
[비평]---갑자기 천수경이 등장한다. 천수경 다음에는 ‘행선축원’ 그 다음은 ‘이산혜연선사 발원문’....<불교성전>이 갑자기 <불교예경집>이 된 느낌이다. 정말로 여기에는 없는게 없다. 395p에도 천수경이 등장한다.
537p. 생사의 양극단을 알지 못해
[비평] 전재성의 번역은 "그대는 그 양극을 보지 못한체 부질없이 웁니다."이다. 양쪽의 끝을 양극단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무리가 있어 보인다.
539p. 현명한 이나 지혜로운이나 슬기로운 이나 선한 이들은
[비평] 전재성의 번역은 "단호하고 지혜롭고 잘 닦인 현명한 사람이라면"이라는 뜻이다. 한 사람을 수식하는 단어들을 각각 해석하여 여러사람을 만들어 놓았다. Yathā saraṇamādittaṃ, Vārinā parinibbaye ; Evampi dhīro sapañño, Paṇḍito kusalo naro; Khippamuppatitaṃ sokaṃ, Vāto tūlaṃva dhaṃsaye.
539p. 천도재를 지내는 공덕
죽은 이들은 자신의 집으로 돌아와서 벽이나 집의 세갈래나 네갈래로 갈라진 틈에 서 있거나 문기둥에 의지해 서있다.
[비평] "(조상님들이) 자기 집을 찾아와서 담장 밖이나 길목과 교차로와 문기둥 위에 서있다"
tiro-kuḍḍesu tiṭṭhanti 담장 밖에 서있다. sandhi-siṅghāṭakesu ca 길목과 교차로에서
dvāra-bāhāsu tiṭṭhanti, 문 기둥 위에 서있다. āgantvāna sakaṃ gharaṃ. 자기 집을 찾아와서
sandhi: union; junction; joint; connection; agreement; euphonic combination. (f.)
siṅghāṭaka: anything of the shape of a cross; a place where four roads meet. (m.; nt.)
담장 밖 경(KN 1.7)은 12게송으로 된 시인데 이렇게 산문으로 만들어 놓았다.
541p. 49재를 지내는 공덕
자신이 지은 악업으로 악도에 떨어지게 되었더라도 가족들이 그를 위하여 짓는 인연공덕으로 갖가지 죄가 소멸된다.
[비평] "자신이 지은 악업으로 아귀도(peta)에 떨어지게 되었더라도 가족들이 그를 위하여 짓는 법보시와 음식을 보시한 공덕으로 갖가지 죄가 소멸된다" 49재 천도재의 의미를 설명하려면 적어도 문장을 이렇게 바꾸어 주어야 초기불교의 담장 밖 경(KN 1.7)과 자눗소니 경(A10:177)의 가르침에 어극나지 않게 된다. 자눗소니 경(A10:177)에서는 다른 종류(인간,축생.천신등)로 태어나면 제사를 지내도 그 음식물을 수용하지 못하지만 죽은 사람이 아귀(peta)로 태어났을때는 아귀 조상이 제사 음식물을 받아 먹을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죽음 사람을 위해 재,혹은 제사를 지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인간,축생.천신등으로 태어난 조상들은 자신이 전생에 지은 공덕을 수용하게 되는데 살아있을 때 일상생활을 잘 하는 것이 스스로에 대한 제사임을 알수 있다. 제사 지낼 때 가장 큰 공덕을 짓는 일은 승가에 공양 하는 것이다.
554p. 자신의 살을 베어 스님들께 공양하다
[비평] 숩삐야 보살이 자신의 살을 베어 '스님들께' 공양한 것이 아니라 약속한 '스님 한 분께'만 공양 한 것이다. 부처님을 뵈고 보살의 상처난 부위에 살이 돋아나고 털이 자랐다. 이 사건을 계기로 사람고기를 먹어서는 안된다는 율이 생겨났다.율장 대품에서 이러한 기적이 실려 있는 것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들은 후대에 편집된 것이라 할 것이다.
Tassā saha dassanena bhagavato tāva mahāvaṇo ruḷho ahosi succhavilomajāto.
562p. 사문 바라문들은 다시 다섯 경우로 선남자를 사랑으로 돌봅니다.
[비평]사문 바라문들은 다시 여섯 가지 경우로 선남자를 사랑으로 돌봅니다. ① 악한 것으로부터 보호하고, ② 선한 것에 들게 하고, ③ 선한 마음으로 돌보아주고, ④ 배우지 못한 것을 가르쳐주고, ⑤ 이미 배운 것을 정화시키고, ⑥ 천상에 가는 길을 가르쳐 줍니 다. Ascetics and brahmins served by a gentleman in these five ways show compassion to him in six ways.
Imehi kho, gahapatiputta, pañcahi ṭhānehi kulaputtena uparimā disā samaṇabrāhmaṇā paccupaṭṭhitā chahi ṭhānehi kulaputtaṁ anukampanti—
565p. 목련은 천안(天眼)으로써 자신의 돌아가신 어머니께서 마리지세계(摩利支世界)에 태어나신 것을 보았다.
[비평] 마리지세계(摩利支世界)가 어떤 곳인지 설명을 해주어야 한다. 568p에서는 목련의 어머니가 아귀의 세계에 태어났다고 나오는데 이렇게 연이어 다른 곳에 태어났다고 보여주어 독자들을 혼란스렇게 해서야 되겠는가?
Mārīcī (Sanskrit: मारीची, lit. "Ray of Light"; Chinese: 摩利支天; pinyin: Mólìzhītiān; Japanese: Marishiten), is a Buddhist god (devi )or goddess, as well as a bodhisattva associated with light and the Sun. By most historical accounts, Marici is a goddess -- but in some regions, she is depicted as a male god, revered among the warrior class in East Asia.[1] She is typically depicted with multiple arms and riding a charging boar or sow, or on a fiery chariot pulled by seven horses or seven boars. She has either one head, or between three to six with one shaped like a boar. In parts of East Asia, in her fiercest forms, she may wear a necklace of skulls. In some representations, she sits upon a lotus.
568p.우란분절 유래
[비평]565p에서 목련은 천안(天眼)으로써 자신의 돌아가신 어머니께서 마리지세계(摩利支世界)에 태어났다고 했는데 여기서는 목련의 어머니가 아귀의 세계에 태어났다고 나온다. 내용도 생략되었다. "7월 15일에 액난에 빠진 7대의 부모를 위해 국수와 밥과 다섯가지 과일과 ....만일 어떤 이가 이러한 성현들에게 공양을 올린다면 7대의 부모와 5종(種) 친속이 모두 3악도(惡道)를 벗어나서 곧 해탈하고 의식(衣食)이 충만할 것이다. 마땅히 시주(施主) 집의 7대 부모를 위하여 선정을 행하여 마음으로 안정한 연후에 이 공양을 받아야 할 것이다.”
觀視世界,見其亡母生餓鬼中,不見飮食,皮骨相連柱.....七月十五日,當爲七世父母在厄難中者,具麨飯五果、汲灌瓫器、香油、庭燭、牀榻、臥具,盡世甘美,以供養衆僧。當此之日,一切聖衆,或在山閒禪定,或得四道果,或樹下經行,或得六通,飛行教化聲聞、緣覺、菩薩大人,㩲示比丘,在大衆中,皆共同心,受鉢和羅,具淸淨戒,聖衆之道,其德汪洋,其有供養此等之衆,七世父母、五種親屬,得出三塗,應時解脫,衣食自然。佛勅衆僧,當爲施主家,七世父母,行禪定意,然後食此供。’目連比丘及一切衆,歡喜奉行。佛說報恩奉瓫經己亥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雕造
『불설보은봉분경』 1권(ABC, K0283 v11, p633a14-b06)
578p. 사람들은 침묵한다고 비난하고 말이 많다고 비난하고 말이 적다고 비난한다.
[비평]아뚤라여, 이것은 오래된 것이니 지금 단지 오늘의 일이 아니다.
사람들은 침묵한다고 비난하고 말을 많이 한다고 비난하고 '알맞게 말한다고 비난한다'. 전재성의 번역도 '알맞게 말한다고 비난한다'인데 왜 이 번역을 사용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Porāṇametaṃ atula,netaṃ ajjatanāmiva;
Nindanti tuṇhimāsīnaṃ,nindanti bahubhāṇinaṃ;
Mitabhāṇimpi nindanti,natthi loke anindito.
588p. 나라고 하는 이몸도 내가 아니거니 자식과 재물을 무엇때문에 걱정하랴
[비평] ‘내 자식이다’ ‘내 재산이다’ 하면서 어리석은 사람은 괴로워한다. 제 몸도 자기 것이 아닌데 어찌 자식과 재산이 자기 것이랴?
puttā matthi dhanaṃ matthi iti bālo vihaññati
attā hi attano natthi kuto puttā kuto dhanaṃ
592p. 부끄러움은 쟁기의 자루이며
마음은 멍에의 끈이고
마음챙김은 나의 보습과 소몰이 막대입니다.
[비평] “믿음은 나의 씨앗, 고행은 나의 비
통찰지는 나의 멍에와 쟁기
양심은 나의 쟁기자루, 마음은 나의 노끈
마음챙김은 나의 쟁기날과 몰이막대"
addhā bījaṃ tapo vuṭṭhi, paññā me yuganaṅgalaṃ; Hirī īsā mano yottaṃ, sati me phālapācana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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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4p. 부처님께서 춘다에게 말씀하셨다.
[비평]지워 없앰 경(M8)에 나타나는 춘다는 '마하쭌다'이며 사리뿟다의 동생이다.
607p. 어떤 중생이 공경하고 합장하면
[비평] 어떤 중생이 불탑에 공경하고 합장하면“若復有人,於如來塔合掌恭敬,有十功德。何等爲十?
621p. "마가다국의 아사세 왕이 월지국을 침략할 생각으로 사신을 보 내 부처님의 자문을 구했다. 그때 아난이 부처님 뒤에서 부처님께 부채질을 해드리고 있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아난을 불러서 말씀하셨다. "아난이여, 그대는 월지의 사람들이 정기적으로 모이고, 자주 모인다고 들었는가?"
[비평]--왓지국을 ‘월지국’으로, 아잣타삿투를 ‘아사세’로 이름을 바꾸어 놓았다. 경전의 출처가 니까야가 아니고 한문경전인 줄 알겠다. ‘월지국’은 역사상에서 나타났던 나라이기도 하여 월지국으로 변경해 놓으면 혼란이 가중된다.
637p. 잘 화합하는 도반
[비평]---아누룻다, 난디야, 낌빌라를 아나율, 난제, 금비로 고쳐 부르고 있다. 난제, 금비가 더 익숙한가? 난디야, 낌빌라가 더 익숙한가? 니까야에 나오는 이름을 이렇게 고침으로서 니까야가 아닌 아함경에서 번역한 경전이라고 착각하게 만든다.
637p.아나율이여, 그대들은 견딜만한가?
[비평] 초기불전의 번역은 '아누룻다들이여(anuruddhā) 그대들은'처럼 모두 복수여야한다. 불교성전에서는 '아나율이여'라고 단수로 만들고 '그대들은'은 복수로 나타나고있다. '닷새마다 법담으로 온 밤을 지새웁니다'라는 문장을 보면 선방문화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짐작할 수있다. 한국불교도 법담이 생활화 되어야 한다.
643p. 한번 생겨나는 것이건 두번 생겨 나는 것이건, 이 세상에 있는 생명을 해치고
[비평 ] 한번 생겨나는 것이 무엇인지 두번 생겨 나는 것이 무엇인지 설명해주지 않는다. 주석서에 의하면 한번 태어나는 것은 태생(胎生), 습생(濕生), 화생(化生)이고, 두번 태어난 것은 난생(卵生)이다. 조류는 어미의 자궁에서 한번 태어나고 알을 깨고 다시 한번 태어나서 두번 태어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tattha ekajoti ṭhapetvā aṇḍajaṃ avasesayonijo. so hi ekadā eva jāyati. dvijoti aṇḍajo. so hi mātukucchito aṇḍakosato cāti dvikkhattuṃ jāyati. taṃ ekajaṃ vā dvijaṃ vāpi.
665p.
[비평]---부처님 당시 인도지도에서 보드가야의 위치가 잘못되었다. 지금 보드가야라고 표시된 곳은 가야이다. 보드가야는 부처님 당시에 우루웰라로서 강물이 하나로 합쳐지는 곳 아래에 위치한다.
666p.
우루벨라의 장군촌 근처의 숲속에서 6년고행하다.
[비평]----6년 고행장소를 세나니마을 근처로 특정하여 반갑다. 기존에 책들은 전정각산이 있는 곳이 고행림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네란자라강 근처 숲이 고행림인 것은 대당서역기등 여러자료에 나온다.
667p.야사의 친구 50명이 출가후 전도선언하다.
[비평]야사의 친구 54명이 출가후 전도선언하다.61명의 아라한이 있다.(야사+야사친구54명+5비구+붓다)
667p.바이샬리 강물을 두고 석가족 꼴리야족의 분쟁을 해결하다.
[비평]--바이샬리 강물이 아니라 ‘로히니 강물’을 두고 분쟁이 벌어진 일이다. 로히니강은 룸비니 동쪽에 있다.(불교성전8쇄본에서는 로히니 강물로 수정되었다)
668p.62세,16년동안 사위성에서 우기 안거에 들다
[비평] 55세, 이때부터 24년동안 사위성의 기원정사(18안거)와 동원정사(6안거)에서 우기 안거에 들다.
668p.
[비평]---찬드라 굽타 즉위년도를 bc317년 이라고 적고 있지만 bc322년이라고 여러곳에서 검색되고있다.
669p.
[비평]---산치탑과 바르후탑은 애초에 아소카왕이 건립한 것이므로 아소까 재위기간(bc 268~ 232)안에 들어 왔으면 좋겠다.
698p.~703P
[비평]---6페이지에 걸쳐서 스님들 법명과 신도회 명단이 등장한다. 불자 비불자들에게 널리 알려야 하는 <불교성전>에 이렇게 사람 이름을 많이 올릴 필요가 있나? 이들중에 이 책을 만드는데 실질적인 도움을 준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 6페이지에 ‘부처님의 45년 안거장소’를 지도에 표시하여 올리고, 부처님의 ‘가계도’, 불교의 우주관인 ‘삼계도’같은 기본적인 자료를 올려 주었으면 더 의미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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