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불교입문>을 비평하다
‘불교입문’은 각 사찰에 설치된 불교대학 교재로서 조계종 신도가 되면 무조건 이 책으로 불교를 배워야 한다. 나는 매주 목요일 오후에 서산 개심사 불교대학에서 강의를 할 기회가 있어 ‘불교입문’이라는 책을 살펴보게 되었다. ‘불교입문’은 1996년 9월에 초판이 발행된 이후 2012년과 2017년 수정 증보판을 거쳐 2017년 개정판이 나왔다. 놀랍게도 2021년 ‘불교성전’을 편찬한 편찬위원들이 ‘불교성전’에 참여하고 있는데 법인스님, 원철스님, 이미령등이다. 포교원장 지홍스님은 ‘불교입문’과 ‘불교성전’ 간행 책임자였다.
2017년 불교입문은 시대의 변화에 맞게 고따마, 사리뿟따(사리불) 목갈라나(목련), 마하깟사빠(대가섭), 아난다(아난), 라훌라(라후라), 우빨리(우바리), 아누릇다(아나율), 수부띠(수보리), 깟짜나(가전연), 뿐나(부루나), 마하빠자빠띠, 끼사고따미, 웁빨라완나, 담마딘나등 수닷따, 빠세나디등 부처님과 제자 이름, 왕과 장자의 이름등을 빨리어 발음으로 단독표기 하거나 빨리어 발음뒤에 한문발음을 병기하였다. 그런데 4년 뒤인 2021년 불교성전에는 니까야를 인용하면서 빨리어 발음조차도 구마라즙의 한자음으로 표기하였다. 조계종 포교원이라는 같은 기관에서 같은 사람들이 이렇게 다른 기준으로 책을 펴냈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불자들은 혼란스럽게 해야지”라는 심술굿은 마음이 아니라면 어떻게 이렇게 변덕스럽게 책을 만들 수 있었을까? 정말로 이해되지 않는 조계종 포교원이다. ‘불교성전’에서 발견되었던 사상적인 혼란은 여전히 ‘불교입문’에서도 발견된다. 책을 만드는 사람들이 혼란스러우니 책을 읽는 사람들도 당연히 혼란스러울 것이다. 그 혼란을 음미해보자.
21p.
종교 중에는 신을 매개로 하는 종교와 그렇지 않은 종교가 있다. 불교는 신의 존재를 전적으로 부정하지 않지만, 신에게 의존한다고 인생의 궁극적이고 근원적인 문제가 해결된다고 보지 않는다. 진리를 통찰하고 진리에 맞게 실천 수행하며 살아갈 때, 고통으로부터 해탈한다. 구원의 주인공은 진리를 자각한 자기 자신인 것이다. 그렇다면 불교에서 신앙의 대상인 불보살님은 어떤 역할을 하는가? 부처님은 지혜와 자비의 손길로 우리의 눈을 뜨게 해서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을 보여 주며 그 길을 잘 따라갈 수 있게 이끌어 주고 도와주며 두려움을 없애 주신다. 보살님 또한 각자 맡은 영역에서 우리들을 도와주고 이끌어 주며 힘과 평화를 주신다.
[비평]
‘진리를 통찰하고 진리에 맞게 실천 수행하여 해탈한다.’는 자력을 설명하고 나서 바로 불보살님은 ‘각자 맡은 영역에서 이끌어 주고 도와주며 힘과 평화를 주신다.’는 타력을 설명한다. 이렇게 자력과 타력을 동시에 설명하는 것이 불자들에게 ‘불교입문’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 그리고 자력의 원리와 타력의 원리를 상세히 설명하여 이해를 시켜야 하는데 그러한 친절한 설명이 보이지 않는다.
38p.
여래에 관해 생각하라. 법에 관해 생각하라. 승가에 관해 생각하라.
[비평]
믿음을 ‘이해에 기반을 둔 확신’이라고 설명하면서도 굳이 대승경전의 신행방식인 ‘신해행증’으로 불교를 설명하려고 하니 억지스럽다. 인용한 염삼보경도 ‘삼보를 믿어라’가 아닌 ‘삼보를 생각하라’이다. 팔정도의 첫 번째가 정견인 이유는 불교가 이해를 중요시하기 때문인데 여기서는 믿음을 강조하려고 염불(念佛)염법(念法)염승(念僧)도 신불(信佛)신법(信法)신승(信僧)으로 설명한다. 부처님은 한 번도 나를 믿어라, 나를 따르라고 말한 적이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39p에도 부처님을 믿는다. 가르침을 믿는다.라고 말한다.
40p
여섯가지를 믿음의 대상으로 들기도한다.
[비평]
불법승을 생각하라는 것처럼 계율,보시,천상도 믿는게 아니라 생각하는 것이다. 육념(六念)을 여섯가지 믿음의 대상이라고 설명하여 불교를 믿음의 종교로 만드는 것은 불자들에게 혼란을 가중시킨다.
46p
법신불은 언제 어느곳에서나 두루 존재하며 무한한 빛과 생명을 각춘 부처님이시다. 진실 그대로 아는 힘이 있으며 자유자재한다. 인류의 구제자이기도 하며 만생의 자비로운 어버이 이기도하다.
[비평]
법신불과 부처님이라는 단어 대신에 신과 창조주라는 단어를 넣어보면 바로 성경구절이 된다.
“신은 언제 어느곳에서나 두루 존재하며 무한한 빛과 생명을 갖춘 창조주이시다. 진실 그대로 아는 힘이 있으며 자유자재한다. 인류의 구제자이기도 하며 만생의 자비로운 어버이 이기도하다.” 창조주를 부정하는 불교라고 설명하더니 이렇게 부처님을 창조주와 같이 설명 하는 것이 ‘불교입문’인가?
49p
이 법화경을 믿어 간직하는 사람이 혹은 걷거나 혹은 서서 법화경을 읽고 외우면 이때 여섯의 상아를 가진 희 코끼리를 타고 큰 보살들과 더불어 그가 있는곳에 찾아가 스스로 몸을 나투어 ...법화경 보현보살품
비단 법화경 뿐이겠는가? 보현보살은 그 사람이 어떠한 경전에 의거한 수행을 하건 그 사람이 수행이 잘 되도록 도와주며 그 사람을 평안하게 해준다.
[비평]
초기경전을 읽으며 수행을 하면 삼보를 염하는 공덕으로 두려움이 사라지고 평안해진다. 이치를 이해하는 힘으로 불퇴전의 마음이 생겨난다. 이런 가르침을 놔두고 꼭 법화경에서 설명하는 여섯의 상아를 가진 희 코끼리를 타고 오는 보현보살의 도움을 받아야 할까? 이렇게 다양한 보살들을 소개하여 믿음의 불교가 되게하는 것이 조계종에서 ‘불교입문’하는 방식인가?
50p
고통에 신음하는 중생이 일심으로 관세음 보살을 부르면 곧바로 그 음성을 관하여 해탈케한다.
[비평]
불교입문 p.21에 소개한 “종교 중에는 신을 매개로 하는 종교와 그렇지 않은 종교가 있다. 불교는 신의 존재를 전적으로 부정하지 않지만, 신에게 의존한다고 인생의 궁극적이고 근원적인 문제가 해결된다고 보지 않는다. 진리를 통찰하고 진리에 맞게 실천 수행하며 살아갈 때, 고통으로부터 해탈한다.”라는 설명과 위 “관세음 보살을 부르면 관세음 보살이 해탈케한다.”는 설명이 모순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가? 관세음보살을 부르면 정말 해탈하는가?
66p
왕자를 등에 태운 말은 가볍게 날아올랐다.
[비평]
싯타르타 왕자가 동문을 열고 나갔다는 설명을 해도 좋지 않을까? 믿지 않으면 안되는 이야기를 많이 하는 것이 현대 불자들이 ‘불교입문’하는데 도움이 될까?
75p
부처님 당시의 지도
[비평]
불교성전에서 사용한 지도를 사용하고 있다. 이미 종단본 ‘불교성전’을 비평하다1에서 지적 하였듯이 보드가야의 위치가 강이 합쳐지지 않는 지점으로 내려와야 한다. 말라족의 위치도 사꺄족 왼쪽에 있는 것이 아니라 동남방향으로 더 내려와 빠와와 꾸시나가라 근처에 위치해야 한다.
105p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다.이것이 없을 때 저것이 없다.”
[비평]
연기공식은 이것(是事)과 저것(彼有)의 관계가 아니라 이것(是事)과 이것(是事)의 관계이다. 빨리어 원문에도 이것(imasmiṃ,처격)과 이것(idaṃ,주격)으로 나타나고 잡아함 생사유전경등에서도 시사유고시사유(是事有故是事有) “이것이 있을 때 이것이 있다.”고 번역 되었다. 연기공식이 이것(是事)과 저것(彼有)의 관계가 아니라 이것(是事)과 이것(是事)의 관계라는 것을 알 때 연기에 대한 오해가 줄어들고 부처님의 의도를 알게된다.
110p
공(空), 이 말처럼 심오하기도 하고 한마디로 정의하기 힘든 불교용어도 없을 것이다.
[비평]
공을 설명하면서 이렇게 애매하게 설명하지 말고 부처님이 공의 의미를 어떻게 사용했는지를 먼저 설명해야 할 것이다.
초기경에서 공하다라고 표현 할 때 ‘무엇이 없다’, ‘무엇이 공하다’라고 꼭 대상이 제시된다. 이것만 알면 공의 표현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부처님은 무아라는 설명처럼 대상을 부정하는 의미로 공을 사용하셨다. 부처님 당시에는 아따(자아)라는 용어로 실체를 부정하고 있다면 오백년이 흐른뒤 반야심경에서는 스와바하(자성)라는 용어로 실체를 부정하고 있다. 반야심경에서 형용사 공(śūnya,suññā)은 ‘~이 공하다’ ‘~이 비었다’는 뜻이다. 오온에 자성이 공함을 확실히 보았다가 그런 표현이다. 소공경에서는 “그는 거기에 없는 것(na hoti)은 공하다(suññaṃ)고 관찰하고 거기에 남아있는 것(avasiṭṭhaṃ)은 존재하므로 이것은 있다(atthī)라고 꿰뚫어 안다.”라고 설명한다. 부처님은 당신이 깨달은 심오한 법을 설명할 때 공(空)이라 설명하든 무아(無我) 혹은 비아(非我)라고 설명하든 있다,없다는 세상의 어법에 따르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113p
공과 마음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고 우리말 반야심경을 암송해 보도록한다.
[비평]
우리말 반야심경 번역을 보면 그것을 암송해 보아도 뜻이 들어날 수 없도록 되어있다. 반야심경에는 드닷없이 조견오온개공(照見五蘊皆空)하여 일체고액을 떠났다고 말한다. 반면 무아경은 왜 몸이 나의 것이 아니고 내가 아니고 나의 자아가 아닌지를 남녀노소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도록 자세히 설명한다. 내 맘대로 할 수 없기 때문에, 몸에 대한 통제권이 없기에 몸은 나의 것이 아니고 내가 아니라고 설명한다. 느낌을 조절할 수 없기에 느낌은 나의 것이 아니고 내가 아니라고 설명한다. 무아경의 설명은 “스스로 보아 알 수 있고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는 佛法의 특징과 잘 부합한다. 이러한 점 때문에 반야심경보다는 무아경을 봉독하는 것이 수행과 포교에 효과적일 것이다. 우리의 전통이라고 무조건 신봉할 것이 아니라 불교역사를 맥락적으로 이해하고 무엇이 현 시대에 필요한가를 고민해야 할때이다. “공(空), 이 말처럼 심오하기도 하고 한마디로 정의 하기 힘든 불교용어도 없을 것이다.”라고 설명할 필요가 없다.
118p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합니다.
[비평]
전 세계 불자들은 ‘승가에 귀의합니다’라고 가르치는데 조계종만 ‘스님들께 귀의합니다’라고 가르친다. 정말 조계종 스님들은 세상에 내어 놓을 만큼 자랑스럽게 무식하다.
123p
살생하지 말라
[비평]
부처님은 오계를 명령법을 사용하여 가르치지 않았다. 125p에 ‘계는 자발적인 다짐이요 율은 약속조항’이라고 잘 설명하면서도 5계를 설명할 때는 ~말라,고 마치 부처님이 명령하신 것처럼 설명하고 있다. 살생하지 않는다. 도둑질하지 않는다.라고 평서문으로 계를 표현하고 설명해야 할 것이다.
140p
부처님에 대한 믿음으로 이룰 수 있는 구원의 길도 열어 놓았는데 그러한 믿음과 구원의 길도 궁극적으로는 깨달음과 연결된다.
[비평]
“왁깔리여, 그만두어라, 나의 부서져 가는 몸을 보아서 무엇 하느냐? 왁깔리여, 법을 보는 자는 나를 보고 나를 보는 자는 법을 본다.”라는 설명과 위 가르침은 얼마나 멀리 떨어진 가르침인가?
156p
100% 타력인 것 같지만 간절히 매달리는 기도자가 없는데 어찌 다른 도움이 있겠는가? 반대로 100% 자력인 것 같지만 그 신행 생활 하나하나가 주위의 도움 없이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비평]
자력과 타력을 설명하려면 기도하는 자와 기도를 들어 주는 자의 관계를 설명해야 하는 데 여기서는 기도하는 자와 기도하는 자를 도와주는 이웃을 설명하고 있다. 관세음보살이 존재한다고 이야기 하는 것이 힘들어서 그럴까? 관세음 보살은 어디에 계신가? 대승불교가 일어나기 이전 싯타르타가 6년 고행할 때 관세음 보살은 어디에 계셨었는가? 니까야에서는 왜 고따마 부처님이 관세음 보살에게 기도하라고 가르치지 않을까?
236p
밀적금강은 비밀스런 부처님의 행적을 듣고자 원을 세웠기 때문에 밀적(密迹)이라고 하는데, ‘훔’ 하고 입을 다물고 있어 훔금강역사라고도 한다. 아금강역사의 ‘아’는 우주의 첫소리, 우주가 열리는 소리이며, 훔금강역사의 ‘훔’은 우주의 끝소리, 우주가 닫히는 소리이다.
[비평]
부처님은 세상의 시작은 알 수가 없다고 했는데 여기서 우주의 첫소리, 우주가 열리는 소리이며, 우주가 닫히는 소리라는 설명은 어디서 근거한 것인가? 이러한 설명이 부처님의 가르침인가? 힌두교의 가르침인가?
307p
신에 대한 무조건적인 믿음보다는 자신의 내면에 간직된 부처님 성품에 대한 눈뜸이나 각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며 마음의 안정과 평화를 구하고 있는 것이다....그래서 대한불교 조계종 포교원에서는 정법에서 벗어난 신행을 혁신하여 붓다의 삶을 따라 지혜를 닦고 자비를 실천하는 ‘붓다로 살자’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비평]
이유와 결론이 맞지 않다. 맥락에 맞게 설명한다면 붓다의 삶을 따라 지혜를 닦고 자비를 실천하는 ‘붓다처럼 살자’는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고 설명해야 할 것이다. 무조건 적인 믿음을 배척하고 눈뜸이나 각성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우리의 스승인 붓다처럼 살자’라고 말해야 한다. ‘붓다로 살자’는 내가 붓다라는 믿음이 필요하다. 나는 도법스님이 제창한 ‘붓다로 살자’가 말이 안된다고 지면으로 혹은 조계사에서 토론으로 지적한 바가 있다. 포교원에서 근본이 없는 ‘붓다로 살자’를 이어받아 신행혁신 운동이라고 전게하는 것은 종도의 동의를 구하지 않은 무례한 짓이고 ‘이해의 종교’ ‘깨달음의 종교’를 ‘믿음의 종교’로 떨어뜨리는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다. 어떻게 이러한 멍청한 구호를 종단에서 불교를 가르치는 ‘불교입문’에 싣고 가르칠 수 있는가?
331p
온 세계 항상 계신 거룩하신 스님들께 절하옵니다.
[비평]
온 세계 항상 계신 거룩하신 스님들은 누구인가? 어떤 스님들이기에 온 세계 항상 계실까? 그들은 인간이 아닌 존재들일까?
335p
가족과 이웃과 도반을 붓다로 모신다.
[비평]
우리나라 국민과 세계인이 모두 이웃이다. 그러므로 목사 신부, 수녀, 권사, 집사, 여호와의 증인, 이슬람교인등이 모두 붓다이다. 그 이웃들을 다 붓다로 모시는데 새삼 ‘이웃을 이웃종교를 인정하고 존중한다.’는 청규가 왜 필요할까? 정말 이것을 불자들이 지켜야할 공동체 청규라고 만들었나? 포교원장이라는 사람이 5년동안 종단의 돈으로 이렇게 쓸모없는 짓을 하고 있었다.
이상으로 우연한 계기로 불교입문을 살펴보고 19개의 비평을 하였다. 2021년 종단본 ‘불교성전’ 못지 않게 수정되어야 할 곳이 많다. 불자들이 불교를 배우는 가장 기초적인 ‘불교입문’에 2600년 역사속에 나타났던 불교를 다 가르치려니 복잡하기도 하고 혼란스럽기도하다. 불자들에게 꼭 관세음보살, 보현보살, 지장보살 이야기를 설명하고 싶다면 그러한 사상이 나타나게 된 시대상황과 이유를 먼저 설명하고 나서 각 보살들의 역할을 설명하자. 그렇치만 가장 기초적인 ‘불교입문’에서는 우선 부처님이 누구이고 어떻게 살았나를 알기 쉽게 가르치는게 먼저이지 않을까? 불교입문이라는 책은 불교와 불교문화를 너무 많이 너무 딱딱하고 건조하게 가르치고 있다. 한 마디를 듣더라도 부처님과 가르침에 대해서 감동하고 평생 의지하게 하는 가르침이 좋지 않겠는가? 부처님의 인격을 나타내주는 감동적인 일화, 사건을 설명해 주는 것이 부처님을 더 쉽게 더 감동적으로 가르치는 길이라고 본다. 더구나 부처님 가르침에 있지도 않은 ‘붓다고 살자’라는 것을 개발해 가지고 마치 그것이 새로운 불교이고 부처님 가르침인냥 ‘불교입문’에 버젓이 실어 놓고 가르치는 것은 무례한 짓이다. 제발 자신의 생각을 불교라는 이름으로 바꾸어 가르치지 말고 정확하고 명료한 부처님 가르침을 전달하자. 그러기 위해서는 부처님 가르침이 무엇인가를 종단 차원에서 정리하여야 한다. 2600년 전승되어온 다양한 불교전통의 무게에 신음하는 ‘불교입문’을 초발심 불자들에게 가르칠 필요가 없다. 부처님 가르침도 아닌 ‘붓다로 살자’를 신행혁신운동이라고 가르치지 말고 부처님 가르침을 가르치자. 포교원은 집단지성을 활용하여 ‘불교입문’을 다시 쓰기 바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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