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아함경

불설대안반수의경(佛說大安般守意經)의 十六特勝 과 들숨날숨 경(M118)

 

<석선바라밀차제법문(釋禪波羅蜜次第法門)>은  <차제선문>으로 약칭하는데 <선바라밀> 혹은 <선문수증(禪門修證)>이라고도 불린다. 중국 천태종의 실질적 개조인 천태 대사 지의가 설하고 그의 제자 관정(灌頂)이 정리한 것이다. 《차제선문》은 《대안반수의경》, 《선비요법경》, 《좌선삼매경》, 《달마다라선경》 등 선정 수행법을 중점적으로 설명한 경전과 《구사론》, 《대지도론》 등의 논서를 참조해 초심자 수행부터 고차적인 수행까지 단계적으로 조직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천태대사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선정 수행에 필요한 조건들, 선정 중에 일어나는 경계와 마장에 대한 대처방법도 함께 서술하고 있다. 오늘날 간화선, 염불선, 위빠사나 등의 수행에도 적용할 수 있어, 단순히 고전의 위치에 머물지 않고 현대 불교 수행에도 실질적인 도움을 준다. 우리나라에는 <차제선문>을 요약한  <선학입문(禪學入門)>이 있다.  동국대의 리영자 교수가 이 책을 다시 고쳐 써서 <초보자를 위한 선>이라는 제목으로 1997년에 출간한 바 있다.

 

*천태 대사 지의(538~597) 說
중국의 위진 남북조 말기에서 수 통일기에 걸쳐 활동한 천태종의 실질적인 개창조로서 천태 대사(天台大師) 혹은 지자 대사(智者大師)라는 호로 불린다. 호남성 화용현에서 태어났으며 속성은 진(陳)씨이다. 18세에 출가하였고, 23세 되던 해에 높은 수행력으로 명성을 떨치던 광주(光州) 대소산(大蘇山)의 혜사(慧思) 선사를 찾아가 치열하게 수행하였다. 그 결과 30세에 초선다라니를 증득하고 스승에게서 “법을 설하는 사람 가운데 제일이 될 것”이라는 칭찬을 들었다. 스승의 예언대로 지의는 최고의 설법을 통해 당시 불교계를 평정하고 진(陳)과 수(隋)의 황제에게 국사(國師)의 예로 존경을 받았다. 지의의 법문은 특히 교판론, 법화경의 해석 그리고 수행론에 있어서 으뜸이었다. <법화경>, <유마경>, <금광명경>, <대지도론> 등의 경론에 대한 해설서가 전해지고, <법화현의(法華玄義)>, <법화문구(法華文句)>, <마하지관(摩訶止觀)> 은 천태 삼대부(天台三大部)라고 불리며 그 영향력이 매우 크다. <차제선문>, <소지관> 등의 수행 관련서들도 후대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오시팔교(五時八敎)

제1 화엄시, 제2 녹원시[아함시], 제3 방등시, 제4 반야시, 제5 법화열반시이다.
당시 남북의 교판설인 오시설과 사종설 등을 수정하여 보완한 것이지만 기존의 교판을 종합한 것이므로 독창적이다.
석선바라밀차제법문(釋禪波羅蜜次第法門)>은 자나(禪)를 바라밀(波羅蜜)로 이름 붙이는 것도 대승에서 초기경전을 바라보는 입장이다.

 

 

제19장 십육특승 十六特勝(선학입문 83p~85p)들숨날숨에 대한 마음챙김 경(M118) 비교

 

십육특승(十六特勝)이란 1)호흡이 들어오는 모양을 아는 것(知息入) 2)호흡이 나가는 모양을 아는 것(知息出) 3)호흡의 길고 짧음을 아는 것(知息章短) 4)호흡이 몸에 두루 퍼짐을 아는 것(知息遍身) 5)모든 몸의 작용을 하지 않는 것(除諸身行) 6)기쁨을 느끼는 것(受喜) 7)즐거움을 느끼는 것(受樂) 8)여러 마음작용을 받아들이는 것(受諸心行) 9)기쁜 마음을 짓는 것(心作喜) 10)마음을 거두어들이는 것(心作攝) 11)마음이 해탈함(心作解脫) 12)무상을 관하는 것(觀無常) 13)나가서 흩어지는 것을 관하는 것(觀出散) 14)욕망을 관하는 것(觀欲) 15)멸함을 관하는 것(觀滅) 16)포기하고 버림을 관하는 것(觀棄捨)이다.

 

 

1)호흡이 들어오는 모양을 아는 것(知息入) 2)호흡이 나가는 모양을 아는 것(知息出) 3)호흡의 길고 짧음을 아는 것(知息章短) 4)호흡이 몸에 두루 퍼짐을 아는 것(知息遍身) - 어떤 이는 이렇게 설명한다. "첫째, 들숨을 관하는 법은 숨의 기운이 없어질 때까지 관하는 것이다. 둘째, 날숨을 관하는 법이란 코끝에 이르러 멈출 때까지 관하는 것이다. 셋째, 호흡의 길고 짧음을 관하는 법이란 몸이 불안하고 마음이 산란하면 나가고 들어오는 호흡이 짧고, 몸이 편안하고 마음이 고요하면 나가고 들어오는 호흡이 길다. 넷째, 호흡이 몸에 두루 퍼진다는 것은 몸과 마음이 편안하면 기도가 막히지 않아 호흡이 몸에 두루 충만한 것이다. (或曰一觀入息。 至於氣滅也。 二觀出息止。 至於鼻端也。 三觀息長短者。若 身不安。 心散亂。 則出入息短。 若身安心靜。 則出入息長也。 四息徧身者。 形心既安。 則氣道無壅。 充徧身中也。)

󰡒① 길게 들이쉬면서는 󰡐길게 들이쉰다.󰡑고 꿰뚫어 알고, 길게 내쉬면서는 󰡐길게 내쉰다.󰡑고 꿰뚫어 안다. 짧게 들이쉬면서는 󰡐짧게 들이쉰다.󰡑고 꿰뚫어 알고, 짧게 내쉬면서는 󰡐짧게 내쉰다.󰡑고 꿰뚫어 안다. ③ 󰡐온몸을 경험하면서 들이쉬라.󰡑며 공부짓고 󰡐온몸을 경험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④ 󰡐몸의 작용을 편안히 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몸의 작용을 편안히 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Dīghaṃ vā assasanto ‘dīghaṃ assasāmī’ti pajānāti, dīghaṃ vā passasanto ‘dīghaṃ passasāmī’ti pajānāti; rassaṃ vā assasanto ‘rassaṃ assasāmī’ti pajānāti, rassaṃ vā passasanto ‘rassaṃ passasāmī’ti pajānāti; ‘sabba­kā­yapaṭi­saṃ­vedī assasissāmī’ti sikkhati, ‘sabba­kā­yapaṭi­saṃ­vedī passasissāmī’ti sikkhati; ‘passambhayaṃ kāyasaṅkhāraṃ assasissāmī’ti sikkhati, ‘passambhayaṃ kāyasaṅkhāraṃ passasissāmī’ti sikkhati.

 

5)모든 몸의 작용을 하지 않는 것(除諸身行) 6)기쁨을 느끼는 것(受喜) 7)즐거움을 느끼는 것(受樂) 8)여러 마음작용을 받아들이는 것(受諸心行)  --다섯째, 모든 몸의 작용을 없애는 것이란, 상想과 수受가 마음의 작용이고, 각覺과 관觀이 입의 작용이며, 날숨과 들숨은 몸의 작용이 된다는 것이다. 호흡이 몸에 두루 퍼지고 나면 그 감각이 거친 생각을 일으킬 것이 우려된다. 따라서 모든 거친 생각을 제거하므로 모든 몸의 작용을 없앤다고 한다. 여섯째는 기쁨을 느끼는 것이고, 일곱째는 즐거움을 느끼는 것이다. 미미한 기쁨과 즐거움만 있어도 그것이 온몸에 가득 퍼지고, 몸과 마음이 가득 차고 나면 안으로 마음에 희열이 있게 된다. 따라서 즐거움이라고 한다. 여덟째, 온갖 마음의 작용을 느끼는 것이란, 이미 마음속에 즐거움을 느꼈다면 반드시 마음의 즐거운 경계에 의지하여 여러 가지 마음의 작용이 따라 일어나게 된다. 따라서 온갖 마음의 작용을 느낀다고 한다. (五除諸身行者。 想受爲心行。 覺觀爲 口行。出入息爲身行。 旣息徧身中。 患彼覺動麤念。 除諸麤。 故名除諸身行也。六受喜。 七受樂者。 雖有微喜樂。 能徧滿。 身識旣滿。 内心喜悅。 故名樂 也。八受諸心行者。 旣受樂在懷。 必有數法相隨。 倚心樂境。 故名受諸心行也)

⑤ 󰡐희열을 경험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희열을 경험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⑥ 󰡐행복을 경험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행복을 경험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⑦ 󰡐마음의 작용을 경험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마음의 작용을 경험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⑧ 󰡐마음의 작용을 편안히 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마음의 작용을 편안해 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Pīti­paṭi­saṃ­vedī assasissāmī’ti sikkhati, ‘pīti­paṭi­saṃ­vedī passasissāmī’ti sikkhati; ‘sukha­paṭi­saṃ­vedī assasissāmī’ti sikkhati, ‘sukha­paṭi­saṃ­vedī passasissāmī’ti sikkhati; ‘citta­saṅ­khā­ra­paṭi­saṃ­vedī assasissāmī’ti sikkhati, ‘citta­saṅ­khā­ra­paṭi­saṃ­vedī passasissāmī’ti sikkhati; ‘passambhayaṃ cittasaṅkhāraṃ assasissāmī’ti sikkhati, ‘passambhayaṃ cittasaṅkhāraṃ passasissāmī’ti sikkhati. 

 

9)기쁜 마음을 짓는 것(心作喜) 10)마음을 거두어들이는 것(心作攝) 11)마음이 해탈함(心作解脫) 12)무상을 관하는 것(觀無常) ----아홉 째, 기쁜 마음을 짓는 것이란, 마음이 한 경계에 머물게 되었어도 지혜로 이해하는 작용이 없으면 가라앉은 마음에 반드시 덮이고 만다. 따라서 기쁨으로 그 마음을 일으켜 가라앉지 않게 하므로 기쁨을 일으킨다고 한다. 열째, 마음을 거두어들이는 것이란, 기뻐하는 마음이 정상보다 지나치게 일어나 산란해지면 그것을 거두어 돌아오게 하고, 온갖 연으로 달아나 흩어지는 일이 없도록 한다. 따라서 거두어들인다고 한다. 열한째, 마음이 해탈하는 것이란, 마음이 들뜨거나 산란하지 않고 고르고 평등하여 얽매임이 없는 것이다. 따라서 해탈이라고 한다. 열두째, 무상을 관하는 것이란, 이미 자재함을 얻어 가라앉거나 들뜨는 일이 없게 되었으므로 '모든 법은 무상하여 찰나찰나 생멸하니 즐거워할 것도 없다'고 관할 수 있는 것이다. (九心作喜者。 旣止心一境。 未有慧解。 必爲沉心所覆沒。 以喜擧之。令 不沉沒。 故名作喜也。 十心作攝者。 喜心動散。 則發越過常。 攝之令還。不 使馳散諸緣。 故名作攝也。 十一心作解脫者。 心不掉散。 均等無累。 故名解 脫也。 十二觀無常者。 已得自在。 不爲沈浮所敗故。 能觀諸法無常。 念念生 滅。不可樂也 )

⑨ 󰡐마음을 경험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마음을 경험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⑩ 󰡐마음을 기쁘게 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마음을 기쁘게 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⑪ 󰡐마음을 집중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⑫ 󰡐마음을 해탈하게 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마음을 해탈하게 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Cit­tapaṭi­saṃ­vedī assasissāmī’ti sikkhati, ‘cit­tapaṭi­saṃ­vedī passasissāmī’ti sikkhati; ‘abhippamodayaṃ cittaṃ assasissāmī’ti sikkhati, ‘abhippamodayaṃ cittaṃ passasissāmī’ti sikkhati; ‘samādahaṃ cittaṃ assasissāmī’ti sikkhati, ‘samādahaṃ cittaṃ passasissāmī’ti sikkhati; ‘vimocayaṃ cittaṃ assasissāmī’ti sikkhati, ‘vimocayaṃ cittaṃ passasissāmī’ti sikkhati. 

‘vimocayaṃ  vi-muc 使 現分 ant 解脱させる、解放する

 

13)나가서 흩어지는 것을 관하는 것(觀出散) 14)욕망을 관하는 것(觀欲) 15)멸함을 관하는 것(觀滅) 16)포기하고 버림을 관하는 것(觀棄捨).---열셋째, 흩어져 무너짐을 관하는 것이란 '이 몸은 오래지 않아 흩어져 무너지고 닳아 없어지는 법으로서 진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라 고 관하는 것이다. 열넷째, 욕망에서 벗어남을 관하는 것이란, 이 몸은 오직 고통의 근본일 뿐이므로 마음으로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다. 따라서 욕망을 벗어난다고 한다. 열다섯째, 멸함을 관하는 것이란, 이 마음은 머물다 사라지고 갖가지 허물과 근심이 많으므로 머무르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열여섯째, 버림을 관하는 것이란 '이러한 모든 법이 다 허물과 근심이다'라고 관하는 것이다. 따라서 버림이라고 한다."(十三觀散壞者。 此身不久。 當是散壞磨滅之法。 非眞實有者 也。十四觀離欲者。 此身惟是苦本。 心欲離之。 故名離欲也。 十五觀滅者。 是心住滅。 多諸過患。 不欲住故也。 十六觀棄捨者。 觀此諸法。 皆是過患。 故名棄捨也) 

⑬ 󰡐무상을 관찰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무상을 관찰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⑭ 󰡐탐욕이 빛바램을 관찰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탐욕이 빛바램을 관찰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⑮ 󰡐소멸을 관찰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소멸을 관찰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⑯ 󰡐놓아버림을 관찰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놓아버림을 관찰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Aniccānupassī assasissāmī’ti sikkhati, ‘aniccānupassī passasissāmī’ti sikkhati; ‘virāgānupassī assasissāmī’ti sikkhati, ‘virāgānupassī passasissāmī’ti sikkhati; ‘nirodhānupassī assasissāmī’ti sikkhati, ‘nirodhānupassī passasissāmī’ti sikkhati; ‘paṭi­nissag­gā­nu­passī assasissāmī’ti sikkhati, ‘paṭi­nissag­gā­nu­passī passasissāmī’ti sikkhati.

 

 

-무아상경  정형구 -

Yaṁ kiñci viññāṇaṁ atītānāgatapaccuppannaṁ ajjhattaṁ vā bahiddhā vā oḷārikaṁ vā sukhumaṁ vā hīnaṁ vā paṇītaṁ vā yaṁ dūre santike vā, sabbaṁ viññāṇaṁ

netaṁ mama, nesohamasmi, na meso attāti

evametaṁ yathābhūtaṁ sammappaññāya daṭṭhabbaṁ.

Evaṁ passaṁ, bhikkhave, sutavā ariyasāvako rūpasmimpi nibbindati, vedanāyapi nibbindati, saññāyapi nibbindati, saṅkhāresupi nibbindati, viññāṇasmimpi nibbindati;

nibbindaṁ virajjati;virāgā vimuccati;vimuttasmiṁ vimuttamiti ñāṇaṁ hoti, ‘khīṇā jāti, vusitaṁ brahmacariyaṁ, kataṁ karaṇīyaṁ, nāparaṁ itthattāyā’ti pajānātī”ti.

 

 

 

 

 

*** 어떤 이는 이렇게 설명한다.(或曰)

육묘문의 관환정의 설명과도 맞지 않다.

 

"이 열여섯 가지 법은 반드시 여러 단계 선의 여덟 가지 관법과 서로 관련지어 차례로 대치해야 한다.(此十六法。 應須堅對諸禪八觀法相關) 왜 그런가? 첫째와 둘째 호흡이 드나듦을 아는 것은 호흡을 세는 법을 대치하고, 셋째 호흡의 길고 짧음을 아는 것은 욕계정을 대치하고, 넷째 호흡이 몸에 두루 퍼짐을 아는 것은 미도지정을 대치하고, 다섯째 모든 몸의 작용을 없애는 것은 초선의 각지覺支를 대치하고, 여섯째 기쁨을 느끼는 것은 초선의 희지喜支를 대치하고, 일곱 째 마음으로 즐거움을 느끼는 것은 초선의 낙지樂支를 대치하고, 여덟째 온갖 마음의 작용을 느끼는 것은 초선의 일심지를 대치하고, 아홉 째 기쁜마음을 일으키는 것은 제2선의 내정지內淨支와 희지喜支를 대치하고, 열째 마음을 거두어들이는 것은 제2선의 일심지를 대치하고, 열한째 마음이 해탈에 머무는 것은 제3선의 낙지를 대치하고, 열두째 무상을 관함은 제4선인 부동정不動定을 대치하고, 열셋째 흩어져 버림을 관함은 공처정을 대치하고, 열넷째 욕망으로부터 벗어남을 관하는 것은 식처정을 대치하고, 열다섯째 멸함을 관하는 것은 불용처정(무소유처)을 대치하고, 열여섯째 버림을 관하는 것은 비상비비상처정을 대치하기 때문이다.

 

첫째와 둘째, 호흡의 드나듦을 아는 것은 호흡 세는 법을 대치할 수 있다. 수행자가 호흡을 조절하여 그것이 면면히 이어지게 되었다면 한마음이 호흡을 의지하며 따르기에 숨을 들이쉴 때 그 숨이 코에서 배꼽까지 이르는 것을 알고, 숨을 내쉴 때 그 숨이 배꼽에서 코에 이르는 것을 안다. 이와 같이 한마음으로 호흡을 관조하며 의지해 따르고 산란함이 없게 된다. 다시 호흡의 거칠고 미세하고 가볍고 무겁고 껄끄럽고 매끄럽고 차 갑고 따뜻한 상태를 안다. 저 호흡을 세는 법은 그저 어두운 마음으로 호흡을 세기만 하고 관하는 행법이 없으므로 애착 . 아견 · 자만 등의 허물 이 생기는 경우가 많이 있지만 지금 호흡을 따를 때에는 곧 이 호흡이 무상함을 알게 된다. 목숨(命)은 호흡에 의지하므로 호흡을 목숨으로 삼는다. 한번 내쉰 숨이 돌아오지 않으면 목숨 또한 따라서 떠나는 것이다. 호흡이 이미 무상하고 목숨 또한 견고하지 않으므로 애착 · 아견 · 자만 등이 저절로 생기지 않게 된다. 또 수행자가 한마음으로 호흡에 의지하여 마음 이 산란하지 않게하고서 선정에 들어가기 때문에 '애착이기도 하다(亦愛)' 고 하며, 무상을 깨닫기 때문에 '다스림이기도 하다(亦策)'고 한다. 선정과 상응하기 때문에 '유루이기도 하다(亦有漏)'고 하고, 관법으로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무루이기도 하다(亦無漏)'고 한다.(與定相應 故名亦有漏。 觀行不著。故名亦無漏也) 또한 호흡을 셀 때에는 어둡고 우매한 마음으로 세기 때문에 비추어 깨닫는 바가 없다. 따라서 선정을 증득할 때에도 마음에 보이는 것이 없다. 그러나 지금 호흡을 따르는 법은 곧 밝은 마음으로 호흡을 관조하는 것이 므로 선정을 증득할 때 마음의 눈이 밝게 열려 몸의 서른여섯 가지 물질을 보고 애착 · 아견 · 자만을 깨뜨릴 수 있다. 이것이 바로 호흡을 세는 법 보다 특별히 뛰어난 점이다.

 

셋째, 호흡의 장단을 아는 것은 욕계정을 대치하는 것이다.(第三知息長短。 對欲界定者) 욕계정에 들었을 때에는 선정의 마음이 밝고 깨끗하나 도무지 호흡을 느낄 수 없다. 그러나 지금 이 선정에서는 들어오는 숨이 긴 것과 나가는 숨이 짧은 것을 깨닫는다. 왜냐하면 마음이 이미 안에 고요하게 자리해 숨이 마음을 따라 들어오므로 들이쉬면 곧 긴 것을 알고, 마음이 밖을 반연하지 않으므로 내쉬면 곧 짧은 것을 안다. 또한 마음이 세밀하면 호흡도 세밀해지고 호흡이 세밀하면 숨을 들이쉴 때 코로부터 배꼽에 이르는 것이 미세하고 느리며 길어진다. 숨을 내 쉴 때도 배꼽에서 코에까지 이르는 것이 미세하고 길어진다. 마음이 거칠 면 호흡도 거칠어지고, 호흡이 거칠면 곧 숨이 들고 나는 것이 아주 급하고 짧아진다. 또한 호흡이 짧기 때문에 마음이 세밀하다는 것을 알고 호흡이 길기 때 문에 마음이 거칠다는 것을 안다. 왜냐하면 마음이 이미 더욱 고요해졌다면 내쉬는 숨은 배꼽에서 시작해 가슴에 이르러 끝나고, 들이쉬는 숨은 코로부터 목구멍에 이르러 끝난다. 이것은 마음이 고요하기 때문에 호흡이 짧은 것이다. 마음이 거칠면 (내쉬는) 숨이 배꼽에서 코에 이르는 것을 느끼며 그 길은 멀고도 길다. 이것은 곧 마음이 거칠기 때문에 호흡이 긴 것이다. 또한 (호흡이) 짧은 가운데 길다고 느끼면 곧 선정이 세밀한 것이고, (호흡이) 긴 가운데 짧다고 느끼면 선정이 거친 것이다. 왜냐하면 호흡이 코 에서부터 가슴에 이르러 끝날 경우에는 행로는 비록 짧지만 그 움직임은 미세하고 느려서 오랜 시간이 걸려야 배꼽에 다다른다. 이것은 지나간 거리는 짧지만 시간이 길게 걸리는 것이다. 만약 마음이 거칠면 코에서 배 꼽에 이르는 길이 비록 멀지만 그 움직임이 거칠어 금방 되돌아 나온다. 이것은 지나간 거리는 길지만 시간이 짧게 걸리는 것이다. 이와 같이 관 할 때 곧 무상함을 알게 되고, 마음의 생멸이 일정치 않은 것을 말미암아 능히 욕계정을 깨트리게 된다.

 

넷째, 호흡이 온몸에 두루 퍼지는 것을 알아 미도지정을 대치한다. 근 본선의 미도지정에서는 몸의 모습이 허공처럼 없어지는 것만 느낄 뿐, 몸과 호흡이 있는지 없는지는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지금 특승에서는 미도지정을 일으켰을 때에도 다 없어진 듯이 선정에 들어가서 구름이나 그림자처럼 몸이 점점 나타남을 느낀다. 또한 내쉬고 들이쉬는 숨이 온몸의 털구멍까지 두루 퍼지는 것을 깨닫고, 숨이 들이쉬어도 쌓이지 않고 내쉬어도 흩어짐이 없이 무상하게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본다. 또 몸은 공 空이고 가假로서 진실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또한 생멸하며 찰나도 머무르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세 가지가 화합해 선정이 생기지만 세 가지가 이미 공하므로 선정은 의지할 곳이 없다. 공을 아는 것 또한 공해 선정 가운데서 집착하지 않으면 곧 근본 미도지정을 타파하니, 애착하고 가책 한다는 뜻이 이미 그 가운데 있다.

 

다섯째, 몸의 모든 작용을 제거하는 것은 초선정의 각지覺支와 관지觀支 를 대치한다. 수행자가 호흡이 몸에 두루 퍼지는 것을 깨달아 초선을 일으키게 되면 마음의 눈이 활짝 열려 냄새나고 더러우며 혐오스러운 몸의 서른여섯 가지 물질을 보게 된다. 이때 서른여섯 가지 물질은 모두 사대 四大로 말미암아 존재하기에 하나하나가 다 아我가 아니고 하나하나가 다 내 몸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이것이 곧 욕계의 몸을 없애는 것이다. 다시 욕계의 몸에서 색계의 사대를 구한다면 그것은 밖으로부터 오는 것인가, 안에서부터 나오는 것인가, 중간에 머물러 있는 것인가? 만약 (색계의 사대가) 없다면 어떻게 색계의 촉감을 느끼며, 만약 있다면 지금 어느 곳에 있는가? 이와 같이 관할 때에 끝내 얻을 수 없으니, 이것이 곧 초선의 몸을 제거하는 것이다. (몸의 모든 작용을 제거한다고 할 때의) '작용(行)'이란 곧 관지觀支이다. 몸이 제거되면 작용 또한 따라서 멸한다.

 

여섯째, 기쁨을 느끼고, 일곱째 즐거움을 느끼는 것은 초선의 희지와 낙지를 대치한다. 이 선정은 곧 기쁨과 즐거움 속에서도 그 성품이 공함을 알기 때문에 그것을 받아들이지도 집착하지도 않아 어떤 허물과 죄도 없다. 그러므로 느낀다(受)고 한다. 여덟째, 모든 마음의 작용을 받아들이는 것은 초선의 일심지를 대치한다. 각 등의 사지를 움직이는 작용(動行)이라 하고, 일심지를 움직이지 않는 작용(不動行)이라 한다. 근본선에서 일심으로 들어갈 때는 마음에 애착이 생기지만, 이 선정에서는 이 일심이 헛되고 진실하지 않다는 것을 알아 곧 취하거나 집착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바르게 삼매에 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마음의 작용을 받아들인다고 한다.

 

아홉째, 마음으로 기쁨을 짓는 것은 제2선의 내정지와 희지를 대치한다. 제2선의 희지는 지혜로 비추어 깨닫는 작용이 없으나 지금 여기에서는 이 기쁨을 관찰하여 곧 헛된 것임을 알고 애착을 일으키지 않는다. 따라서 마음으로 기쁨을 짓는다고 한다.열째, 마음으로 거두어들이는 것은 제2선의 일심지를 대치한다. 앞에서 마음으로 기쁨을 일으키는 것이 비록 바르기는 하지만 동요되는 허물이 없지 않다. 따라서 기쁨의 성품이 끝내 공적함을 돌이켜 관찰한다. 그러면 선정심이 산란하지 않고 기쁨을 따라 동요하지 않게 된다. 따라서 마 음으로 거두어들인다고 한다.

 

열한째, 마음이 해탈에 머무는 것은 제3선의 낙지를 대치한다. 제3선에는 온몸에 두루 퍼지는 즐거움이 있어 범부가 이를 얻으면 대부분 애착을 일으켜 그것에 묶여 벗어날 수 없게 된다. 이제 관하는 지혜로써 분석하여 타파하면, 온몸에 두루 퍼지는 즐거움을 증득할 때 "이 즐거움은 인연 으로 생겨났으므로 공하고 자성이 없으며 헛되고 진실하지 못하다. "고 안다. 이렇게 즐거움을 관하여 집착하지 않으면 마음이 자재하게 된다. 따라서 마음으로 해탈한다고 한다. 

 

열두째, 무상을 관하는 것은 제4선인 부동정을 대치한다. 제4선을 부동정이라 하는데, 범부가 이를 얻으면 대부분 이것이 영원하다는 생각을 내어 애착하고 취하려는 마음이 생긴다. 이제 이 선정도 세 가지 모습으로 변천하는 것임을 관하여, 이것이 파괴되며 불안한 모습임을 안다. 그러므로 무상을 관찰한다고 한다.

‘Aniccānupassī assasissāmī’ti sikkhati, ‘aniccānupassī passasissāmī’ti sikkhati;

 

 

열셋째, 나가서 흩어짐을 관하는 것은 공처정을 대치한다. 나가서 흩어 진다는 것은 색을 벗어나서 마음이 허공을 의지해 소멸하고 흩어져 자재 함으로써 색법에 구속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나가서 흩어진다고 한다. 범부는 이 선정을 얻을 때 이것이 진실한 공이며 안온함이라여겨 마음에 집착을 일으킨다. 지금 '나가서 흩어짐을 관찰한다'고 하는 것은, 수행자가 처음 허공처정에 들어갔을 때 곧바로 "사온이 화합해 있을 뿐 실제로는 자성이 없어 취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왜냐하면 과거의 마음은 이미 사라졌고, 미래의 마음은 아직 이르지 않았으며, 현재의 마음은 머물지 않으니, 곧 마음은 세 가지 모습으로 변천하는 것이다. 또 공은 앎이 없는 법이니, 마음이나 공에서 얻을 곳이 없다. 따라서 마음에 애착이 없다. 이를 나가서 흩어짐을 관하는 것이라고 한다. 

 

열넷째, 욕망으로부터 벗어남을 관하는 것은 식처정을 대치한다. 무릇 애착이 있으면 모두 욕망이라 한다. 식처정에서는 바깥 법을 여의고 안의 법을 반연하며 공을 여의고 식을 반연하지만 역시 욕망에 대한 집착임을 면치 못한다. 지금 이 선정에서는 이를 능히 관하여 타파한다. ‘virāgānupassī assasissāmī’ti sikkhati, ‘virāgānupassī passasissāmī’ti sikkhati;

 

열다섯째, 멸함을 관하는 것은 무소유처정을 대치한다. 불용처정은 무위법의 경계를 반연하므로 마음이 무위와 상응한다. 따라서 범부가 이를 얻으면 버릴 수가 없다. 지금 "멸함을 관찰한다"고 한 것은 이 선정을 얻었을 때 식이 조금 남아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이 식이 비록 적긴 하지만 역시 수 · 상· 행 · 식의 사온이 화합한 무상하고 무아인 법이니 물들고 집착해서는 안 된다. ‘nirodhānupassī assasissāmī’ti sikkhati, ‘nirodhānupassī passasissāmī’ti sikkhati;

 

열여섯째, 포기하고 버림을 관하는 것은 비상비비상처정을 대치한다. 초선으로부터 각 단계의 선정에서 두루 버리긴 했지만 비상비비상처정에 이르러 유와 무를 모두 버리니, 이것은 버림 가운데서도 가장 지극한 것이다. 범부가 이를 얻으면 열반이라 여겨 버리지를 못한다. 지금 이 선정 에 들었을 때에는 그 법 역시 무상· 고 · 공 · 무아로서 진정한 열반이 아니라고 관할 수 있다. 따라서 포기하고 버림을 관찰한다고 한다. 근기가 날카로운 이라면 꼭 열여섯 가지를 다 닦을 필요는 없다(若利根者。 未必具修十六). 즉 호흡을 따르는 법에서도 무상을 잘 깨달아 곧장 큰 깨달음으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혹은 두세 가지를 얻기도 하고 네다섯 가지를 얻기도 하 는데, 이는 사람의 근기에 달렸다. 그러므로 특승이라고 한다. (선학입문 85p~91p)

 ‘paṭi­nissag­gā­nu­passī assasissāmī’ti sikkhati, ‘paṭi­nissag­gā­nu­passī passasissāmī’ti sikkhati.

 

 
 
 

十六特勝第十九章 

十六特勝者。 一知息入。 二知息出。 三知息長短。 四知息徧身。 五除諸身行。 六受喜。 七受樂。 八受諸心行。 九心作喜。 十心作攝。 十一心作解脫。十二 觀無常。 十三觀出散。 十四觀欲。 十五觀滅。 十六觀棄捨。 佛未出世時。 外道等。 已得四禪四空。 而無對治觀行故。 不出生死矣。如來 初說四諦。 而或有不悟者。 更說九想背捨等不淨觀法。 而對治之。 修不淨觀 者。貪欲雖除。 而或有厭患心重。 不能發無漏者。 佛即令捨不淨觀。 而修此 特勝法。 蓋此法中。 有定有觀。 具足諸禪故也。 或曰一觀入息。 至於氣滅也。 二觀出息止。 至於鼻端也。 三觀息長短者。若 身不安。 心散亂。 則出入息短。 若身安心靜。 則出入息長也。 四息徧身者。 形心既安。 則氣道無壅。 充徧身中也。 五除諸身行者。 想受爲心行。 覺觀爲 口行。出入息爲身行。 旣息徧身中。 患彼覺動麤念。 除諸麤。 故名除諸身行也。六受喜。 七受樂者。 雖有微喜樂。 能徧滿。 身識旣滿。 内心喜悅。 故名樂 也。八受諸心行者。 旣受樂在懷。 必有數法相隨。 倚心樂境。 故名受諸心行也。九心作喜者。 旣止心一境。 未有慧解。 必爲沉心所覆沒。 以喜擧之。令 不沉沒。 故名作喜也。 十心作攝者。 喜心動散。 則發越過常。 攝之令還。不 使馳散諸緣。 故名作攝也。 十一心作解脫者。 心不掉散。 均等無累。 故名解 脫也。 十二觀無常者。 已得自在。 不爲沈浮所敗故。 能觀諸法無常。 念念生 滅。不可樂也 十三觀散壞者。 此身不久。 當是散壞磨滅之法。 非眞實有者 也。十四觀離欲者。 此身惟是苦本。 心欲離之。 故名離欲也。 十五觀滅者。 是心住滅。 多諸過患。 不欲住故也。 十六觀棄捨者。 觀此諸法。 皆是過患。 故名棄捨也。 

 

或曰。 此十六法。 應須堅對諸禪八觀法相關。 所以者何。 一二知息入出者。 對於數息也。 三知息長短者。 對欲界定也。 四知息徧身者。 對未到地定也。 五除諸身行者。 對初禪覺支也。 六受喜者。 對初禪喜支也。 七心受樂者。對 初禪樂支也。 八受諸心行者。 對初禪一心支也。 九心作喜者。 對二禪內淨 喜支也。 十心作攝者。 對二禪一心支也。 十一心住解脫者。 對三禪樂支也。
十二觀無常者。 對四禪不動定也。 十三觀出散者。 對空處也。 十四觀離欲 者。對識處也。 十五觀滅者。 對不用處也。 十六觀棄捨者。 對非想非非想處 也。
一二知息入出。 對代數息者。 行者。 旣調息綿綿。 一心依隨於息。 息入時。 知其從鼻至臍。 息出時。 知其從臍至鼻。 如是一心照息。 依隨不亂。 復知息 相之麤細輕重澁滑冷煖。 若彼數息者。 直閽心數。 無有觀行故。 多生愛見慢 等諸過矣。 今隨息之時。 即知此息無常。 命依於息。 而以息爲命。 一息不還。 則命亦隨去。 息旣無常。 命亦不固故。 愛見慢等。 自不能生也。 復次行者。 一心依息。 令心不散。 得入禪定。 故名亦愛也。 覺悟無常。 故名亦策也。與 定相應。 故名亦有漏。 觀行不著。 故名亦無漏也。 復次若數息時。 則以冥闔 心而數。 無所照了。 故證定時。 心無所見。 今隨息則。 明心照息。 故證定時。心眼開明。 能見身中三十六物。 而破愛見慢。 此即特勝於數息也
第三知息長短。 對欲界定者。 欲界定時。 定心明淨。 都不覺息。 今此定中。 覺入息長。 出息短。 何以故。 心旣靜住於內息。 隨心入故。 入則知長。心不 綠外故。 出則知短也。 復次心細則息細。 息細則入息從鼻至臍。 微緩而長。 出息從臍至鼻。 亦微而長也。 心麤則息麤。 息麁則出入急疾而短也。 復次息 短故。 知心之細。 息長故。 知心之麁。 何以故。 心旣轉靜。 則出息。 從臍至胸 而盡。 入息。 從鼻至咽而盡。 此則心靜故息短也。 心麁者覺息從臍至鼻。道 里長遠。 此則心麤故息長也。 復次短中覺長則定細。 長中覺短則定麤,何以 故。如息從鼻至胸而盡。 則行路雖短。 而其行微緩。 久方至臍。 此則行處短 而時節長也。 若心麤而從鼻至臍。 道里雖長。 而其行麁率。 欻然還出。此則 行處長而時節短也。 如是觀時。 即知無常。 由心生滅不定。 能破欲界定也。 第四知息徧身。 對未到地定者。 根本未到地。 但覺身相。 泯然如虚空。而不 覺身息之有無。 今特勝中。 發未到地時。 亦泯然入定。 即覺漸漸有身。如雲 如影。 復覺出入息。 徧身毛孔。 見息入無積聚。 出無分散。 無常生滅。覺身 空假不實。 亦知生滅。 刹那不住。 三事和合。 故有定生。 三事既空。 則定無 所依。 知空亦空。 於定中不著。 即破根本未到地。 愛策之義。 已在其中矣。 等"五除諸身行。 對初禪覺觀支者。 行者。 因覺息徧身。 而發得初禪。 心眼開 明。見身三十六物。 臭穢可惡。 爾時即知三十六物。 皆由四大而有。 一一無 我一一非身。 此即除欲界身也。 復於欲界身中。 求色界四大。 爲從外來耶。 爲從內出耶。 爲在中間住耶。 若無者。 云何受色界觸。 若有者。 今何所在。 如是觀時。 畢竟不可得。 此即除初禪身。 所謂行者。 即觀支也。 身除則行亦 隨滅矣。 第六受喜。 第七受樂。 對破初禪喜支樂支者。 此定即於喜樂。 知其性空故。 不受不著。 無諸過罪。 故云受也。 第八受諸心行。 對初禪一心支者。 覺等四支。 名動行。 一心支。 名不動行。 根本禪。 入一心時。 心生愛著。 而此定。 知此一心。 虚誑不實。 即不取著。是三昧正受。 故云受諸心行也。 第九心作喜。 對二禪内淨喜支者。 二禪喜支。 無智慧照了。 而今觀此喜。即 知虛誑。 不生愛著。 故名心作喜也。 第十心作攝。 對二禪一心支者。 前心作喜雖正。 而不無動過。 故返觀喜性。 畢竟空寂。 定心不亂。 不隨喜動。 故云作攝也。 第十一心住解脫。 對破三禪樂支者。 三禪有徧身之樂。 凡夫得之。 多生愛 染。爲其所縛。 不得解脫。 今以觀慧破析。 證徧身樂時。 即知此樂。 從因綠 生。空無自性。 虛誑不實。 觀樂不著。 心得自在。 故名心作解脫也。 第十二觀無常。 對破四禪不動定者。 四禪名不動定。 凡夫得之。 多生常想。 心生愛取。 今觀此定。 三相所遷。 知是破壞不安之相。 故名觀無常也。 第十三觀出散。 對破空處定者。 出散。 謂出離於色。 而心依虛空。 消散自在。 不爲色法所縛。 故名出散。 凡夫得此定時。 謂是真空安穩。 心生取著。今言 觀出散者。 行人。 初入虛空處定時。 即知四陰和合而有。 實無自性。 不可取 也。何以故。 過去心已謝。 未來心未至。 現在心無住。 則心是三相所遷。空 是無知之法。 於心於空。 無可得處。 故心無愛著。 是名觀出散也。 第十四觀離欲。 對識處定者。 凡有愛著皆名爲欲。 識處離外而綠內。 離空而 緣識。 亦未免著欲。 今此定。 能觀破析也。 第十五觀滅。 對無所有處者。 不用處定。 綠無為法塵。 心與無為相應。凡夫 得之不能捨離。 今言觀滅者。 得此定時。 覺有少識。 此識雖少。 亦是四陰和 合。無常無我之法。 不可染著也。 第十六觀棄捨。 對非想非非想者。 從初禪以來。 處處徧捨。 至非想而雙捨有 無。是捨中之極。 凡夫得之。 以謂涅槃。 不能捨離。 今此定時。 能觀其法。亦 是無常苦空無我。 而非眞涅槃。 故云觀棄捨也。 若利根者。 未必具修十六。 即於隨息中。 亦能覺悟無常。 便入大道故。或得 二三或至四五。 在人根機。 故名特勝也 

 

 

 

천태지의 한계
 
1.《차제선문》은 《대안반수의경》, 《선비요법경》, 《좌선삼매경》, 《달마다라선경》 등 선정 수행법을 중점적으로 설명한 경전과 《구사론》, 《대지도론》 등의 논서를 참조해 강설했다고 하는데 경을인용할때 인용부호나 어떤 표시를 하지 않아서 모든 내용이 천태지자의 개인 의견이 되어 경전의 권위가 사라졌다. 
 

 

2. 다섯가지 법을 조절한다는 것은 첫째 음식을 조절하고 둘째 수면을 조절하고 셋째 몸을 조절하고 넷째 호흡을 조절하고 다섯째 마음을 조절하는 것이다.  一調節飲食。 二調節睡眠。 三調身。 四調氣息。 五調心。此 五事和適。 則三昧易生。 若有所不調。 則多諸妨難。 善根難發也)  선학입문 41p

....넷째, 호흡을 조절하는 것이다. 호흡에는 풍상風相·천상喘相·기상氣相· 식상息相의 네 가 지 상相이 있다. 코로 쉬는 숨을 마음으로 지각할 때, 들어오고 나가며 소리가 나는 것을 풍상風相이라 하고, 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나가고 들어오는 기운이 맺히고 막혀 통하지 않는 것을 천상喘相이라 하며, 소리도 없고 맺힘도 없지만 들어오고 나감이 미세하지 않은 것을 기상氣相이라 한다. 이 세 가지는 조화롭지 못한 모습이다. 이를 조절하지 않고 좌선하면 병이 쉽게 생기고 마음이 고요해지기 어렵다. 이를 조절하려면 세 가지 법을 사용해야 한다. 첫째, 마음을 가라앉혀 안정시키는 것이고, 둘째, 신체를 느슨히 하는 것이며, 셋째, 온몸의 털구 멍으로 두루 호흡해 출입에 장애가 없이 잘 통한다고 상상하는 것이다. 그 마음을 세밀하게 하고 호흡을 미미하게 해 호흡이 조절되면 온갖 병이 생기지 않고 그 마음이 쉽게 안정된다. 식상息相이란 소리가 나지 않고 맺히지 않으며 거칠지도 않은 호흡이다. 있는 듯 없는 듯 출입이 면면히 이어져 정신이 안온해지고 마음에 기쁨이 생기도록 돕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166p

...들숨날숨 관찰에서 호흡을 조절하면 안된다는 가장 기본적인 부처님의 가르침을 무너뜨리고 있다. 

 
3. 或曰(어떤 이는 이렇게 설명한다.)
....개인의 의견을 첨가한 것으로 이해되기에 역시 경전의 권위가 사라지고 개인들의 의견으로 남겨졌다. 
 
4.  

열다섯째, 멸함을 관하는 것은 무소유처정을 대치한다. 불용처정은 무위법의 경계를 반연하므로 마음이 무위와 상응한다. 따라서 범부가 이를 얻으면 버릴 수가 없다. 지금 "멸함을 관찰한다"고 한 것은 이 선정을 얻었을 때 식이 조금 남아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이 식이 비록 적긴 하지만 역시 수 · 상· 행 · 식의 사온이 화합한 무상하고 무아인 법이니 물들고 집착해서는 안 된다.(第十五觀滅。 對無所有處者。 不用處定。 綠無為法塵。 心與無為相應。凡夫 得之不能捨離。 今言觀滅者。 得此定時。 覺有少識。 此識雖少。 亦是四陰和合。無常無我之法。 不可染著也)

.....12)무상을 관하는 것(觀無常)에서 부터  13)나가서 흩어지는 것을 관하는 것(觀出散) 14)욕망을 관하는 것(觀欲) 15)멸함을 관하는 것(觀滅) 16)포기하고 버림을 관하는 것(觀棄捨)을 모두 무색계정으로 배대하고 있다.멸함을 관하는 것(nirodhānupassī)등을 무소유처정에 배대함으로서 위빠사나의 작용을 무색처정으로 잘못 이해하고 있다.  이것은 천태지자가 스스로 수행체험이 없이 이 책을 썼다는 것을 보여준다. 

 

 

5. 천태지자는 오시팔교(五時八敎)를 설명하며 오시를 제1 화엄시, 제2 녹원시[아함시], 제3 방등시, 제4 반야시, 제5 법화열반시로 설명하였다. 이렇게 오시(五時)로 불교를 설명하는 것은 사실이 아닌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다른 설명도 믿기가 어려워 진다. 

 

6.  "이에 간장은 혼魂 을 간직하고, 폐장은 백魄을 간직하고, 신장은 의지(志)를 간직하고, 심장은 신神을 간직하고, 비장은 뜻(意)을 간직한다. 사대가 화합하여 오행五行 이 성취되면 뼈로 기틀을 잡고, 골수로 기름칠을 하고, 힘줄로 봉합하고 핏줄로 관통하고, 피로 윤택하게 하고, 살로 감싸고, 피부로 덮는다. 이러 한 인연으로 곧 머리 몸 · 손 · 발의 여섯 신체 부위가 있게 된다. 이것이 바로 근본세간과 의세간이다."( 於是肝藏魂。肺 藏魄。 腎藏志。 心藏神。 脾藏意。 四大和合。 五行成就。 骨以柱之。 髓以膏之。 筋以縫之。 脉以通之。 血以潤之。 肉以裹之。 皮以覆之。 以是因緣。 即有頭 身手足六分之軀。 此則根本義世間) (선학입문 104p)

...이와 같은 사상은 불교고유의 사상이 아니라 중국의 영향을 받았다고 보여진다.

 

 

7. "염승念會을 설명하겠다. 다음과 같이 생각해야 한다. "성문승聲聞僧 · 벽지불승辟支佛僧 ·보살승菩薩儈, 이와 같은 삼승의 성자들은 참다운 부처님의 제자로서 신통과 지혜가 한량없고, 고난을 구원하며 중생을 제도해 해탈시키는 분들이다. 이들이 나의 참다운 벗들인데 다시 무엇을 두려워하겠는가?" 이와 같이 일심으로 되새기면 공포가 곧 사라진다."(선학입문 120p) (念僧者。 當念聲聞僧。 辟支佛僧。 菩薩儈。 如是三乘聖衆。 眞佛弟子。神智 無量。能救苦難。 度脫衆生。 是我真伴。 復何所畏。 一心憶念。 恐怖即除也)

..승가를 염하는 것에 보살승가를 언급하고 있다. 벽지불승辟支佛僧 ·보살승菩薩儈을 염하는 것이 아니라 벽지불승가와 보살승가를 염하는 것인데 어디에 벽지불 승가가가 있고 어디에 보살승가가 있을 것인가? 벽지불승가와 보살승가는 어떤 계목으로 포살과 자자와 안거와 갈마를 하는가? 공동체인 승가를 단순히 개별적인 수행자를 뜻하는 승(僧)으로 인식하고 역사적으로 존재하지 않은 벽지불승가와 보살승가를 거론하는 것은 실수다.

 

 

8.  "저 달마 문하에 이를 것 같으면 허황된 '할'과 장님의 '방'이 어찌 그리도 많은가? 어리석음을 익히는 것이 가풍이 되어 이른바 미치광이나 백치가 엄숙한 표정에 눈을 부릅뜨고서 불자를 세우고는 큰 선지식이라고들 하 고 있으니, 도리어 천태 문하만 못하다. 문자로 뜻을 온전히 표현하고 뜻 으로 이치를 밝혀 오히려 뜻과 이치를 잃지 않으니, 선을 닦는 제자들에 게는 (천태선이) 훨씬 낫다는 것을 여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천태선의 방편은 말세의 학인들을 굽어살펴 간곡하게 난관을 뚫어 주고 있으니, 하 류의 학인들을 완전히 매몰시키는 달마선보다 뛰어난 점이 하늘과 땅 차 이다."225p

...박한영스님의 1918년 발문을 통해서 그당시에도 달마선의 폐해가 대단했음을 알수 있다.  

 

추사가 벽파선사에게 보낸편지중에서....

"《기신은 본시 능엄을 종으로 하여 논을 지은 것이지요. 어찌 능엄의 논례(論例)가 원래 의거가 없이 논을 만든 것은 없다는 것이 아니겠소. 기신의 논 된 것은 비록 이것이 요의(了義)이기는 하나 어찌 의거가 없이 논을 만들었으리오.

사는 다만 석론(釋論)이 석경(釋經)이 되는 줄만 알고 종론(宗論)이 종경(宗經)이 되는 줄은 몰라서 이와 같이 말한 것인가? 어찌 사가 모르리오. 미처 점검하지 못해서이겠지요.

오늘날의 할 일은 먼저 삼처의 전심과 간가(間架)의 도()를 버려 버리고 경솔히 화두도 추겨 들지 말며 염송사(拈頌師) 되기를 좋아도 말며 머리를 숙이고서 안반수의경을 읽으면 거의 혹 일선(一線)의 광명이 앞에 있게 될 거외다."

 

"지난번에 안반수의(安般守意)를 읽으라고 권한 것은 어찌 반야 법화를 몰라서리요. 특히 사의 근기(根器)와 식해(識解)가 이로 말미암아 들어가야만 문로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며 안반수의로써 이 방편의 교체(敎體)를 세워 사람마다 다 그렇게 하라는 것은 아니지요. 비유하자면 법화중의 화성(化城)과 같아서 비유하여 말한 것이니 실로 사를 슬퍼하고 민망히 여겨서 그런 것이며 사를 얕잡아 보거나 업신여긴 것은 아니오.

사의 문하의 작은 도리(闍黎)도 항상 가벼이 여기지 않는데 하물며 사에게랴. 사는 끝내 이 의를 알지 못하고 도리어 사부(士夫)의 거만으로 여기니 어찌 평심하여 자세히 강구하지 못하시오. 사부의 거만도 오히려 불가한데 하물며 산승의 거만이겠소."

 

9.불설대안반수의경(佛說大安般守意經)에서 들숨날숨을 설명하는 것이 특이하다.

"안()은 생겨남[]이고, ()은 멸함[]이며, ()는 인연이 되고, ()는 도가 된다.

守者爲禁亦謂不犯戒禁者亦爲護護者遍護一切無所犯意者息意亦爲道也

 

()은 셈[]이고, ()은 서로 따름[相隨]이며, 수의(守意)는 그침[]이 된다.

安爲生般爲滅意爲因緣守者爲道也

 

()은 도를 생각하는 것이고, ()은 묶인 것을 푸는 것이며, 수의(守意)는 죄에 떨어지지 않는 것이다.

安爲數般爲相隨守意爲止也

 

()은 죄를 피하는 것이고, ()은 죄에 들지 않는 것이고, 수의(守意)는 도()가 된다.

安爲念道般爲解結守意爲不墮罪也"

 

 

10. 불설대안반수의경(佛說大安般守意經)에서 16승을 설명하는 것이 특이하다.

"무엇이 16()인가? 즉시 스스로 숨이 길음을 아는 것, 곧 스스로 숨이 짧음을 아는 것, 곧 스스로 숨이 몸을 움직임을 아는 것, 곧 스스로 숨이 미세(微細)함을 아는 것, 곧 스스로 숨이 상쾌함을 아는 것, 곧 스스로 숨이 상쾌하지 못함을 아는 것, 곧 스스로 숨이 멈춤을 아는 것, 곧 스스로 숨이 멈추지 않음을 아는 것, 곧 스스로 숨이 마음에 기꺼움을 아는 것, 곧 스스로 숨이 마음에 기껍지 않음을 아는 것, 곧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만물이 이미 없어져 다시 숨을 얻을 수 없음을 스스로 아는 것, 안으로 다시 생각할 바 없는 숨임을 스스로 아는 것, 생각하는 바를 버리는 숨임을 스스로 아는 것, 생각하는 바를 버리지 못하는 숨임을 스스로 아는 것, 신명(身命)을 버리는 숨임을 스스로 아는 것, 신명을 버리지 못하는 숨임을 스스로 아는 것이니, 이것이 즉시 스스로 아는 열여섯 가지이다.

何等爲十六勝,卽時自知喘息長, 卽自知喘息短, 卽自知喘息動身, 卽自知喘息微,  卽自知喘息快,  卽自知喘息不快,卽自知喘息止,卽自知喘息不止,卽自知喘息歡心,卽自知喘息不歡心, 卽自知內心念萬物已去不可復得喘息, 自知內無所復思喘息, 自知棄捐所思喘息, 自知不棄捐所思喘息, 自知放棄軀命喘息  ,自知不放棄軀命喘息自知  是爲十六卽時自知也"불설대안반수의경(佛說大安般守意經) 상권

 
 
11.불설대안반수의경(佛說大安般守意經)에서 농사짓는 것과 비교하는 것이 특이하다.
"숨을 세는 것은 땅이 되고, 서로 따르는 것은 보습이 되며, ()는 멍에가 되고, ()은 씨앗이 되며, ()은 비가 되고, ()은 행함이 되니, 이와 같은 여섯 가지 일로 마침내 도를 따르는 것이다.數息爲地相隨爲犂止爲軛觀爲種還爲雨淨爲行如是六事乃隨道也"

 

 니까야의 표현--"믿음이 씨앗이고, 감관의 수호가 비며, 지혜가 나의 멍에와 쟁기입니다, 양심은 [연결하는] 막대기이고, 마음은 노끈입니다. 나의 마음챙김은 보습과 몰이막대입니다.  “몸을 수호하고 말을 보호하고 뱃속에 들어가는 음식량을 제어하고, 진리는 잡초 뽑은 갈고리로 사용하여 온화함이 멍에를 내려놓는 것입니다”

“정진이야말로 짐을 실어 나르는 황소로서 열반으로 실어가서 되돌아오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밭갈이를 다 해마치고 불사의 열매를 거두게 되니 이러한 밭갈이를 마치고 나면 모든 괴로움으로부터 풀려납니다.“까시 바라드와자 경 (S7:11)

 

 
 
 

 

 

 

 

 

 

 

 

 

불설대안반수의경(佛說大安般守意經) 상권佛說大安般守意經卷上

불설대안반수의경(佛說大安般守意經) 상권

佛說大安般守意經卷上

 

 

 

강승회(康僧會)1) 서문[]

康僧會序

 

 

 

안반(安般)2)이라는 것은 여러 부처님들의 큰 가르침[大乘]으로, 세속에서 표류하는 중생을 구제하는 것이다. 안반의 선법에는 여섯 가지가 있는데, 이것으로 6[六情]을 다스린다. ()에는 안[]과 바깥[]이 있는데, [][][][][]마음[]은 안이고, ()()()()촉감[細滑]사념(邪念)은 바깥이라 한다. ()에서 여러 바다의 12가지 현상[]”이라고 한 것은, 안과 바깥의 6정이 삿된 행위를 받아들이는 것이 마치 바다가 온 세상의 흐르는 물을 받아들이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夫安般者諸佛之大乘以濟衆生之漂流也其事有六以治六情情有內外眼耳鼻舌身心謂之內矣色聲香味細滑邪念謂之外也經曰諸海十二事謂內外六情之受邪行猶海受流

 

굶주린 사람이 꿈에서도 밥을 먹는 것은 대개 만족하지 못했기 때문이니, 마음이 이렇게 만족을 모르고 이리저리 요동치는 것은, 마음의 아주 작은 것에도 6정이 작용하지 않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모습은 너무나 흐릿하고 어렴풋하며, 그 작용은 끊임없이 이루어져서, 보아도 그것을 그릴 수 없고, 들어도 소리로 나타낼 수 없으며, 이것을 맞닥뜨려 알려 해도 그 앞에 아무 것도 없고, 이것을 좇아서 탐구해도 뒤에 남는 것이 없으니, 지극히 은밀하고 너무나 오묘하여 그 모습을 터럭만큼도 형용할 수 없다. 그래서 범천[제석[신선[성자[]6정의 실체를 밝힐 수 없었으니,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게 마음에 심어져 고요히 생겨난 것이다.

餓夫夢飯蓋無滿足也心之溢盪無微不浹怳惚髣髴出入無閒視之無形聽之無聲逆之無前尋之無後深微細妙形無絲髮梵釋僊聖所不能照明默種于此化生乎

 

육정의 이런 모습은 일반적인 방법으로 엿볼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이것을 []’이라고 하니, 마치 그늘진 곳에 농부[種夫]가 땅을 깊게 파서 손수 씨앗을 덮어주면 씨앗이 셀 수 없을 만큼 열매를 맺으나,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들도 그 이루어진 과정을 알 수 없고, 씨를 뿌린 사람도 그 수()를 알지 못하는 것과 같다. 아래에서 하나가 썩어도 위에서는 만 가지가 생겨나고, 손가락을 한 번 튕기는 짧은 시간에도 마음은 960번을 변하게 되어, 하루 밤낮이면 13억의 생각[]이 생겨나게 된다. 생각마다 하나의 몸통[一身]이 있으나 마음[]은 제 스스로 알 수 없으니, 저 씨 뿌리는 농부와 같은 것이다.

彼非凡所睹謂之陰也猶以晦曀種夫深芬闓手覆種孳有萬億旁人不睹其形種家不知其數也一朽乎下萬生乎上彈指之閒心九百六十轉一日一夕十三億意意有一身心不自知猶彼種夫也

 

이 때문에 마음의 움직임을 고요하게 하고, 생각이 날뛰지 않게 꽉 붙잡고 호흡을 시작하여 하나부터 열까지 센다. 열을 셀 때까지 잘못되지 않으면 생각이 고요한 상태가 되어 제 자리를 찾은 것이다. 짧은 입정[小定]3)3일을 하고, 긴 입정[大定]7일을 하는데, 고요히 다른 생각[]은 없어지고 죽은 듯이 생각이 맑아지니, 이것을 첫 번째 선()이라고 한다.

是以行寂繫意著息數一至十十數不誤意定在之小定三日大定七日寂無他念怕然若死謂之一禪

 

()은 버린다는 뜻이니, 13억의 더러운 생각을 버린다는 것이다. 이미 수를 세어 생각을 고요히 했고, []을 바꿔서 부처님의 법을 그대로 따르니, 더러운 생각은 열에 여덟이 제거되고 바로 두 가지 생각[二意]만 남게 된다. 이처럼 생각이 고요해지고 뜻이 부처님의 법을 따르게 된 것은, 수를 세는 것에서 비롯된 것이도다. 그래서 모든 더러운 것들이 씻겨나가고 마음이 점점 맑아지게 되니, 이를 일러 두 번째 선()이라고 한다.

禪棄也棄十三億穢念之意已獲數定轉念著隨蠲除其八正有二意意定在隨由在數矣垢濁消滅心稍淸淨謂之二禪也

 

다시 그 나머지 하나를 제거하는 것은, 코끝[鼻頭]에 생각을 집중하는 것이니, 이것을 일러 지()라고 한다. 이렇게 생각을 한 곳에 집중하는 지()의 선법을 얻으면 삼독(三毒)4)사주(四走)5)오음(五陰)6)육명(六冥)7) 등의 모든 더러운 것이 소멸하게 되어, 찬란하게 빛나는 마음의 밝은 빛이 명월주(明月珠)의 빛보다 더 밝을 것이다. 음탕하고 거짓된 더러운 마음은 거울이 아주 더러운 진흙탕에 놓인 것과 같으니, 눕히면 하늘을 비출 것이고 엎어두면 땅만 마주할 것이다. 그러나 총명하고 지혜롭고 성스러우며 이치에 통달한 마음은 온 세상을 비출 것이다. 하늘과 땅이 광대하여 평범한 사람은 엿볼 수 없다고 하지만, 그러한 까닭은 오직 그 마음이 더러움에 물들어 혼탁해졌기 때문이니, 온갖 더러움에 물든 마음은 저 진흙탕에 놓인 거울보다 더 심한 것이 있는 것이다.

又除其一注意鼻頭謂之止也得止之行三毒四走五陰六冥諸穢滅矣㷡然心明踰明月珠婬邪污心猶鏡處泥穢垢污焉偃以照天覆以臨土聰睿聖達萬土臨照雖有天地之大靡一夫而能睹所以然者由其垢濁衆垢污心有踰彼鏡矣

 

만약 좋은 스승을 얻어 더러운 것을 깎아내고 마음을 잘 닦아내면, 마음에 남아 있던 적은 흠과 아주 작은 얼룩도 시원하게 씻기어 남은 것이 없게 되고, 이런 마음을 들어서 온 세상을 비춘다면 터럭과 머리카락 같은 아주 작은 이치까지 조금이라도 살피지 못하는 것이 없을 것이니, 마음에 묻은 흠이 없어지고 밝은 마음만이 남아서 그렇게 된 것이다. ()은 생각[]을 요동치게 하고 뜻[]을 어지럽게 하여, 만 가지 이치 중에 하나라도 알지 못하게 하는 것이니, 마치 시장에서 마음을 놓아버리고 제멋대로 듣는다면 많은 소리들을 들으나, 집으로 돌아와 들은 것을 생각해보면 한 사람의 말도 제대로 알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마음이 풀어지고 생각[]이 흩어지면 그 총명함이 흐려지고 어둡게 된다. 만약 스스로 조용한 곳에 머물며 마음과 생각을 고요하게 한다면, []에 거짓된 욕망이 없게 되고, 귀를 기울여 고요히 듣게 되어서, 들은 불법의 모든 구절[萬句]을 조금도 잃지 않으며, 부처님의 한 마디 말씀[片言]도 분명하게 깨우치니, 마음[]이 고요해지고 생각[]이 맑아졌기 때문인 것이다. 이렇게 고요하게 생각을 모아서 코끝에 집중하는 것, 이것을 세 번째 선()이라고 하는 것이다.

若得良師剗刮瑩磨薄塵微曀蕩使無餘擧之以照毛髮面理無微不察垢退明存使其然矣情溢意散念萬不識一矣猶若於市馳心放聽廣採衆音退宴在思不識一夫之言心逸意散濁翳其聰也若自閑處心思寂寞志無邪欲側耳靖聽萬句不失片言斯著心靖意淸之所由也行寂止意懸之鼻頭謂之三禪也

 

다시 그 몸을 관찰하여, 머리부터 발끝까지를 반복하여 세밀히 살피면, 몸 안의 더러운 농과 빽빽하게 곤두선 머리털을 마치 눈물이나 고름처럼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방법으로 하늘[]과 땅[] 그리고 사람[]과 사물[]을 모두 관찰한다면, 그 흥성함은 쇠망함과 같고, 존재하는 것은 쇠망하지 않는 것이 없음을 깨닫게 되어, 부처님의 삼보(三寶)를 믿게 되고, 모든 어둠[]은 전부 밝아질 것이니, 이를 일러 네 번째 선()이라고 한다.

還觀其身自頭至足反覆微察內體污露森楚毛豎猶睹膿涕於斯具照天地人物其盛若衰無存不亡信佛三寶衆冥皆明謂之四禪也

 

마음을 다잡아 고요히 하고 바른 뜻[]으로 돌아간다면, 모든 6정의 음()이 다 소멸하게 되니, 이것을 환()이라고 한다. 그리고 더러운 욕심이 소리 없이 사라지면, 그 마음은 곧바로 대상을 구분하는 의식작용()8)이 없어지게 되니, 이것을 정()이라고 한다. 안반의 선법을 얻은 사람은 그 마음이 곧장 밝아지고, 그 밝음으로 온 세상을 관찰한다면 아무리 깊이 감추어진 것도 관찰하지 못할 것이 없다. 지나온 셀 수 없는 겁()의 시간, 현재와 미래의 일들, 사람[]과 사물[]의 변화, 현재 존재하는 방방곡곡의 모든 세상[諸刹], 그리고 그 가운데 있는 것들을 모두 알 수 있다. 또한 세존(世尊)의 가르침과 교화, 그리고 제자들이 그 가르침을 외고 학습하는 것도, 아무리 멀리 떨어져도 보지 못함이 없고, 그 소리를 듣지 못함이 없게 되어, 6정의 흐릿하고 어렴풋한 모습도, 존재와 소멸의 시작과 그 이유도 깨닫게 된다. 그래서 커지면 온 세상[八極]에 두루 미치게 되고, 가늘어지면 머리카락보다 가는 것[毛釐]도 꿸 수 있으며, 하늘과 땅을 바로잡고, 수명(壽命)을 주관하며, 거룩한 덕[神德]을 발휘하고, 천병(天兵)9)도 무너뜨리며, 삼천대천세계를 진동시키고, 세상의 방방곡곡을 옮겨 다닌다. 이 여덟 가지 불가사의는 범천[]도 측량할 수 없는 것이니, 이런 신묘한 덕의 무한함은 안반의 여섯 가지 선법[六行] 때문에 이루어진 것이다.

攝心還念諸陰皆滅謂之還也穢欲寂盡其心無想謂之淨也得安般行者厥心卽明擧明所觀無幽不睹往無數劫方來之事人物所更現在諸剎其中所有世尊法化弟子誦習無遐不見無聲不聞怳惚髣髴存亡自由大彌八極細貫毛氂制天地住壽命猛神德壞天兵動三千移諸剎八不思議非梵所測神德無限六行之由也

 

세존께서 처음 이 경전을 말씀하려고 할 때, 큰 진동(震動)이 있어, 사람과 천신이 얼굴색을 바꾸어 이 말씀을 공손히 받아들였고. 세존께서는 3일 동안 안반(安般)의 선법을 하시고 바로잡을 것[]10)이 없게 되었다. 이 때 세존께서 변화되어 두 몸이 되었는데, 하나는 하등(何等)이라고 불렸고, 다른 하나는 존주(尊主)라고 불렸으니, 이 당시의 일에서 그 뜻이 나온 것이다. 그리하여 대사(大士), 상인(上人), 육쌍(六雙), 십이배(十二輩)11) 모두 안반의 선법을 굳게 행하였다.

世尊初欲說斯經時大于震動人天易色三日安般無能質者於是世尊化爲兩身一曰何等一尊主演于斯義出矣大士上人六雙十二輩靡不執行

 

이름이 안청(安清)인 보살이 있었는데, ()는 세고(世高)이고 안식왕(安息王)12)의 정실 왕후의 자식이다. 그는 나라를 숙부에게 양보하고 고국을 떠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살펴보다가13) 드디어 경사(京師)에 머무르게 되었다. 또한 그는 널리 배우고 아는 것이 아주 많았으며. 신묘한 모사[神摸]천체의 운행[七正]14)세상의 변화[盈縮]15)풍기(風氣)길흉(吉凶)산사태[山崩]지진[地動]침놓기[鍼䘑] 등의 여러 기술에 통달했다. 낯빛을 보면 병을 알았고, 새와 짐승들의 울음소리를 듣고도 어떤 짐승인지 알 수 있었다. 또한 하늘과 땅[二儀]16)처럼 넓고 어진 마음을 지니고 있어서 백성들의 완고함과 어리석음을 걱정하여. 먼저 자신의 귀를 세우고 자신의 눈을 열어서, 백성들의 모든 것을 잘 보고 들으려고 하였다. 그러고 나서 천천히 백성들에게 석가모니 부처님[正眞]6[六度]17)를 자세히 설명해 주었고, 안반의 비밀스럽고 오묘한 뜻을 번역해 주었다. 그리하여 배우는 자들이 크게 늘어났고, 그들의 더럽고 탁한 생각이 모두 없어졌으며, 맑고 깨끗한 덕을 이루는 사람들이 되었다.

有菩薩名安淸字世高安息王嫡后之子讓國與叔馳避本土翔而後集遂處京師其爲人也博學多識貫綜神摸七正盈縮風氣吉凶山崩地動鍼脈諸術睹色知病鳥獸鳴啼無音不照懷二儀之弘仁愍黎庶之頑闇先挑其耳卻啓其目欲之視明聽聰也徐乃陳演正眞之六度譯安般之秘奧學者塵興靡不去穢濁之操就淸白之德者也

 

나는 말세에 태어나 땔감을 짊어 질 수 있는 나이가 되자, 부모님을 여의었고 세 분의 스승도 모두 돌아가셨다. 구름과 해를 우러러보았지만 슬프게도 질정을 받을 곳이 없게 되었고, 머리를 돌려 바라보아도 눈물만이 주르륵 흐를 뿐이다.18) 오랫동안 쌓아온 복이 다 없어지지 않아서, 남양(南陽)의 한림(韓林) 선생님, 영천(潁川)의 피업(皮業) 선생님, 회계(會稽)의 진혜(陳慧) 선생님을 만나게 되었다. 이 세 분의 현자(賢者)들은 독실하고 철저하게 불도를 믿으셨고, 넓고 바른 덕을 지니고 계셨다. 또한 끊임없이 정진하셨으며 불도에 뜻을 두고 게으름을 피우지 않으셨다. 내가 이 분들을 좇아 물음을 청하면, 세 분의 대답은 모두 진리에 딱 들어맞았고 그 의미도 서로 어긋남이 없으셨다. 그리고 지혜를 베푸시고 불법의 의미를 해석해주셔서 내가 불도를 따져서 헤아릴 수 있도록 도와주셨으니, 제 스스로는 할 수 없는 것이었다. 나는 말이 비루한 데가 많고, 부처님의 뜻을 궁구하지도 못하였기에, 삼가 명철한 많은 현인들께서 함께 꼼꼼히 살펴봐주시고, 불법의 의미에도 군더더기가 많이 있으니, 성인들께서 군더더기를 깎아내고 다듬어서 감춰졌던 부처님의 신묘한 뜻을 드러내 주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余生末蹤始能負薪考妣殂落三師凋喪仰瞻雲日悲無質受睠言顧之潛然出涕宿祚未沒會見南陽韓林穎川皮業會稽陳慧此三賢者信道篤密執德弘正烝烝進進志道不倦余從之請問規同矩合義無乖異陳慧注義余助斟酌非師所傳不敢自由也言多鄙拙不究佛意明哲衆賢願共臨察義有肬腨加聖刪定共顯神融矣

 

불설대안반수의경(佛說大安般守意經) 상권19)

佛說大安般守意經卷上此經多隨字除數息相隨之隨餘皆他本作隨

 

 

 

후한(後漢) 안식(安息) 안세고(安世高) 한역

김달진 번역

後漢安息三藏安世高譯

 

 

 

부처님께서 월지국(越祗國)의 기수정사(羈瘦精舍)에 계셨는데, 월지국은 다른 이름으로 차닉가라국(遮匿迦羅國)이라고도 하였다.

佛在越祇國舍羈瘦國亦說一名遮匿迦羅國

 

이때에 부처님께서 90일 동안 앉아 안반수의(安般守意)를 행하시고 부처님께서 다시 홀로 90일 동안 앉아 사유(思惟)하고 헤아리신 것은, 시방 사람 및 꿈틀거리고 날고 기고 움직이는 무리들을 도탈(度脫)시키려 하신 것이었다.

時佛坐行安般守意九十日佛復獨坐九十日者思惟挍計欲度脫十方人及蜎飛蠕動之類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90일 동안 안반수의를 행한 것은, 안반수의로 자재한 자념(慈念)의 뜻을 얻고 돌이켜서 안반수의를 행한 다음, 다시 뜻을 거두어 행함을 생각한 것이다.

復言我行安般守意九十日者安般守意得自在慈念意還行安般守意已復收意行念也

 

()은 몸이고, ()은 숨[]이며, 수의(守意)는 도()가 된다. ()는 금함[]이고, 또한 계()를 범하지 않음을 말한다. ()은 또한 보호함[]이니, ()는 일체를 두루 보호하여 범하는 바가 없는 것이다. ()는 숨[]이요, 또한 도()가 된다.

安爲身般爲息守意爲道

 

()은 생겨남[]이고, ()은 멸함[]이며, ()는 인연이 되고, ()는 도가 된다.

守者爲禁亦謂不犯戒禁者亦爲護護者遍護一切無所犯意者息意亦爲道也

 

()은 셈[]이고, ()은 서로 따름[相隨]이며, 수의(守意)는 그침[]이 된다.

安爲生般爲滅意爲因緣守者爲道也

 

()은 도를 생각하는 것이고, ()은 묶인 것을 푸는 것이며, 수의(守意)는 죄에 떨어지지 않는 것이다.

安爲數般爲相隨守意爲止也

 

()은 죄를 피하는 것이고, ()은 죄에 들지 않는 것이고, 수의(守意)는 도()가 된다.

安爲念道般爲解結守意爲不墮罪也

 

()은 정()이고, ()은 흔들리지 않게 하는 것이며, 수의(守意)는 뜻을 어지럽히지 않는 것이다. 안반수의(安般守意)는 뜻을 다루어 무위(無爲)에 이르는 것이다.

安爲避罪般爲不入罪守意爲道也

 

()은 유()이고, ()은 무()가 되니, 뜻으로 유()를 생각해도 도를 얻지 못하고, 뜻으로 무()를 생각해도 도를 얻지 못하며, 또한 유()를 생각하지도 않고 무()를 생각하지도 않음이 바로 공정(空定)의 뜻과 도를 따르는 행에 응하는 것이다. ()는 만 가지 물건을 말하고, ()는 의() 또는 공()이 된다.

安爲定般爲莫使動搖守意莫亂意也安般守意名爲御意至得無爲也

 

()은 본래의 인연이고, ()은 처소가 없음이니, 도인(道人)은 본래 온 바가 없음을 알고 또한 멸함의 처소가 없음을 아는 것이 바로 이 수의(守意)가 된다.

安爲有般爲無意念有不得道意念無不得道亦不念有亦不念無是應空定意隨道行有者謂萬物無者謂疑亦爲空也

 

()은 청()이고, ()은 정()이며, ()는 무()가 되고, ()는 위()라 이름하니, 이것이 바로 청정하여 함이 없는 것이다. ()는 활()이라 하고, ()는 생()이라 하니, 다시 고()를 얻지 않기 때문에 활()이 되는 것이다.

安爲本因緣般爲無處所道人知本無所從來亦知滅無處所是爲守意也

 

()은 미()이고, 반은 기()이다. 아직 일어나지 않았으므로 문득 뜻을 지킬[守意] 수 있지만, 만약 이미 뜻이 일어났다면 곧바로 뜻을 지켜야 하니, 만일 이미 뜻을 일으켰다면 곧 달아나서 지키지 못하므로 마땅히 돌이켜야 하는 까닭에 부처님께서 안반수의(安般守意)를 설하셨다.

安爲淸般爲淨守爲無意名爲是淸淨無爲也無者謂活爲者謂生不復得苦故爲活也

 

()5()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5음을 제거하는 것이며, 수의(守意)는 인연을 깨달아 몸과 입과 뜻을 따라가지 않는 것이다.

安爲未般爲起已未起便爲守意若已意起便爲守意若已起意便走爲不守當爲還故佛說安般守意也

 

수의(守意)는 집착하는 바가 없음이 곧 수의이니, 집착하는 바가 있다면 수의가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뜻은 일어났다가 다시 멸하기 때문이니, 뜻이 다시 일어나지 않음이 도()가 되고, 이것이 바로 수의가 되는 것이다.

安爲受五陰般爲除五陰守意爲覺因緣不隨身口意也

 

수의(守意), 뜻이 생기지 않게 하는 것이니 생김[]으로 인하여 죽음[]이 있으므로 뜻을 지킬 수 없으며, 뜻이 죽지 않게 하는 것이니 죽음이 있음으로 인하여 생김이 있으므로 뜻이 또한 죽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도()가 된다.

守意者無所著爲守意有所著不爲守意何以故意起復滅故意不復起爲道是爲守意

 

안반수의(安般守意)에 열 가지 지혜가 있으니, 숨을 세고[數息] 서로 따름[相隨]과 지()와 관()과 환()과 정()4()를 말한다. 이것이 열 가지 지혜를 이루니, 이른바 37품경(三十七品經)을 합하여 행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守意莫令意生生因有死爲不守意莫令意死有死因有生意亦不死是爲道也

 

수의(守意), 비유컨대 등불과 같아서 두 가지 인연이 있으니, 첫째 어둠을 부수며, 둘째 밝음을 보이는 것처럼, 수의(守意)도 첫째 어리석음[愚癡]을 부수고, 둘째 지혜를 보이는 것이다.

安般守意有十黠謂數息相隨止觀還淨四諦是爲十黠成謂合三十七品經爲行成也

 

수의(守意), 뜻이 인연을 좇아 생겨나서 마땅히 인연을 반연(攀緣)하여 집착함이 없으니, 이것이 바로 수의가 된다.

守意譬如燈火有兩因緣一者壞冥二者見明守意一者壞癡二者見黠也

 

수의(守意)에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지켜서 생겨나지 못하게 하는 것이요, 둘째는 이미 생긴 것은 마땅히 빨리 소멸하는 것이요, 셋째는 이미 행한 일은 마땅히 뒤에 뉘우쳐서 억만겁이 지나도 다시 하지 않는 것이다.

守意意從因緣生當緣因緣莫著是爲守意也

 

()와 의()는 각기 다르다. 시방의 일체를 보호하여 대경(對境)을 범하지 않음을 깨달음이 바로 수()가 되고, 저 무위(無爲)를 깨달음이 바로 의()가 되니, 이것이 수의이다.

守意有三輩一者守令不得生二者已生當疾滅三者事已行當從後悔計億萬劫不復作也守與意各自異護十方一切覺對不犯是爲守覺彼無爲是爲意是守意也

 

수의(守意) 가운데 네 가지 즐거움[]이 있으니, 첫째는 요체(要體)를 아는 즐거움이요, 둘째는 법()을 아는 즐거움이요, 셋째는 위[]를 아는 즐거움이요, 넷째는 옳음[]을 아는 즐거움이 바로 네 가지 즐거움이다. ()은 행()이 되고, 얻음[]은 도()가 된다.

守意中有四樂一者知要樂二者知法樂三者爲知止樂四者爲知可樂是爲四樂法爲行得爲道

 

수의(守意)의 여섯 가지 일에 안과 밖이 있다. 숨을 셈[數息]과 서로 따름[相隨]과 멈춤[]은 밖[]이 되고, ()과 환()과 정()은 안[]이 되어, ()를 따르는 것이다. 왜냐하면, 숨을 생각함과 서로 따름과 지()와 관()과 환()과 정()은 뜻을 익혀서 도()에 가까워지려고 하기 때문이니, 이 여섯 가지 일을 여의면 곧바로 세간을 따르게 된다.

守意六事爲有內外數隨止是爲外觀還淨是爲內隨道也何以故念息相隨止觀還淨欲習意近道故離是六事便隨世閒也

 

숨을 세는 것은 뜻을 막음이 되고, 서로 따르는 것은 뜻을 거둠이 되며, ()는 뜻을 정함이 되고, ()은 뜻을 여읨이 되고, ()은 뜻을 한결같이 함이 되고, ()은 뜻을 지킴이 되니, 사람이 능히 뜻을 절제할 수 없기 때문에 이 여섯 가지 일을 행할 뿐이다.

數息爲遮意相隨爲斂意止爲定意觀爲離意還爲一意淨爲守意用人不能制意故行此六事耳

 

무슨 까닭에 숨을 세는가? 뜻이 어지럽기 때문이다. 무슨 까닭에 얻지 못하는가?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무슨 까닭에 선()을 얻지 못하는가? ()을 다 버리며 도()를 증득하여 행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何以故數息用意亂故何以故不得用不識故何以故不得禪用不棄習盡證行道故也

 

숨을 세는 것은 땅이 되고, 서로 따르는 것은 보습이 되며, ()는 멍에가 되고, ()은 씨앗이 되며, ()은 비가 되고, ()은 행함이 되니, 이와 같은 여섯 가지 일로 마침내 도를 따르는 것이다.

數息爲地相隨爲犂止爲軛觀爲種還爲雨淨爲行如是六事乃隨道也

 

숨을 세어서 바깥을 끊고, 서로 따라서 안을 끓으며, ()는 죄를 멈추는 것이고, ()을 행하여 뜻을 제거하며, 세간을 받아들이지 않음은 환()이 되고, 생각이 끊어짐은 정()이 된다.

數息斷外相隨斷內止爲止罪行觀卻意不受世閒爲還念斷爲淨也

 

뜻이 어지러우면 마땅히 숨을 셀 것이요, 뜻을 정하려면 마땅히 서로 따를 것이며, 뜻을 끊으려면 마땅히 멈춤[]을 행할 것이요, 도의 뜻을 얻으려면 마땅히 관()할 것이며, 5()을 향하지 않으려면 마땅히 돌이킬[] 것이요, 소유가 없으려면 마땅히 청정[]해야 할 것이다.

意亂當數息意定當相隨意斷當行止得道意當觀不向五陰當還無所有當爲淨也

 

일이 많으면 마땅히 숨을 셀 것이요, 일이 적으면 마땅히 서로 따를 것이며, 가가(家家)의 뜻을 다하려면 마땅히 멈춤[]을 행할 것이요, 세간을 두려워하면 마땅히 관()할 것이며, 세간을 달갑게 여기지 않으면 환()이 되며, 생각이 끊어지면 정()이 된다.

多事當數息少事當相隨家中意盡當行止畏世閒當觀不欲世閒爲還念斷爲淨也

 

무슨 까닭에 숨을 세는가? 5()을 따르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무슨 까닭에 서로 따르는가? 5음을 알려고 하기 때문이다. 무슨 까닭에 지()하는가? 5음을 관()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무슨 까닭에 5음을 관하는가? 몸의 근본을 알려고 하기 때문이다. 무슨 까닭에 몸의 근본을 알려고 하는가? ()를 버리려고 하기 때문이다. 무슨 까닭에 환()하는가? 생사를 싫어하기 때문이다. 무슨 까닭에 정()하는가? 5()을 분별하여 받아들이지 않기 위함이다.

何以故數息不欲隨五陰故何以故相隨欲知五陰故何以故止欲觀五陰故何以故觀陰欲知身本故何以故知身本欲棄苦故何以故爲還厭生死故何以故爲淨分別五陰不受故

 

곧바로 지혜를 따르면 여덟 가지 도()를 얻고 따로 소원을 얻으니, 숨을 행할 때는 세는 것을 따르며, 서로 따를 때는 생각을 따르며, 멈출[] 때는 정()을 따르며, ()할 때는 정()을 따르며, 돌이킬[] 때는 뜻을 따르며, ()할 때는 도()를 따르고 또한 행()을 따른다.

便隨黠慧八種道得別爲得所願也行息時爲隨數相隨時爲隨念止時爲隨定觀時爲隨淨還時爲隨意淨時爲隨道亦爲隨行也

 

숨을 세는 것은 4의지(意止)가 되고, 서로 따르는 것은 4의단(意斷)이 되며, 멈춤[]4신족념(神足念)이 되고, ()5()5()이 되며, 돌이킴[]7각의(覺意)가 되고, ()8()이 된다.

數息爲四意止相隨爲四意斷止爲四神足念觀爲五根五力還爲七覺意淨爲八行也

 

숨을 세는 것을 얻고도 서로 따르지 않으면 수의(守意)가 되지 못하고, 서로 따르는 것은 얻고도 멈추지[]지 않으면 수의가 되지 못하며, 멈춤을 얻고도 관()하지 않으면 수의가 되지 못하고, ()을 얻고도 돌이키지[] 않으면 수의가 되지 못하며, 돌이킴을 얻고도 청정하지 않으면 수의가 되지 못하니, 청정함을 얻고 다시 청정해야 마침내 수의가 된다.

得息不相隨不爲守意得相隨不止不爲守意得止不觀不爲守意得觀不還不爲守意得還不淨不爲守意得淨復淨乃爲守意也

 

이미 숨을 생각하여 악()이 생겨나지 않는데도 다시 세는 것은 함께 뜻을 막아 6()를 따르지 않기 때문이며, 서로 따름을 행하는 것은 6쇠의 행을 여의려고 하는 것이고, 멈춤[]6쇠의 행을 제거하려는 것이며, ()6쇠의 행을 끊으려는 것이고, 돌이킴[]6쇠의 행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것이며, 청정함[]6쇠를 멸하려고 하는 것이니, 이미 소멸하여 다하고 나면 문득 도()를 따르게 된다.

已念息惡不生復數者爲共遮意不隨六衰故行相隨爲欲離六衰行止爲欲卻六衰行觀爲欲斷六衰行還爲欲不受六衰行淨爲欲滅六衰已滅盡便隨道也

 

숨을 세는 것은 뜻을 막으려고 하는 것인데, 숨 가운데는 길고 짧음이 있으니, 마땅히 다시 이 길고 짧은 뜻을 막아야만 한다. 왜냐하면, 수의(守意)는 악()을 멈추고자 하기 때문이니, 악은 또한 가히 지킬 수도 있고 또한 지키지 않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악이 이미 다하면 마땅히 다시 지킬 것이 없기 때문이다.

數息欲遮意息中有長短當復遮是長短意也何以故守意欲止惡故惡亦可守亦不可守何以故惡已盡不當復守也

 

숨을 세는 것에 세 가지 일이 있으니, 첫째는 마땅히 앉아서 행하는 것이요, 둘째는 색()을 보고 마땅히 비상(非常)과 부정(不淨)을 생각하는 것이요, 셋째는 마땅히 성냄ㆍ의심ㆍ질투함을 분명히 알고 과거를 생각하는 것이다.

數息有三事一者當坐行二者見色當念非常不淨三者當曉瞋恚疑嫉念過去也

 

숨을 셈[數息]이 어지러운 것은 마땅히 인연을 좇아 일어난 바임을 알아야만 하고, 이것은 안의 뜻[內意]임을 알아야만 한다. 첫 번째 숨이 어지러운 것은 바로 바깥 뜻[外意]의 허물이니, 숨이 밖으로부터 들어오기 때문이요, 두 번째 숨이 어지러운 것은 바로 안의 뜻의 허물이니, 숨이 가운데로부터 나오기 때문이요, 3579번째는 바깥 뜻에 속하고, 46810번째는 안의 뜻에 속한다. 질투ㆍ성냄ㆍ의심의 세 가지 뜻은 안에 있고, 살생(殺生)ㆍ투도(偸盜)ㆍ사음(邪婬)ㆍ양설(兩舌)ㆍ악구(惡口)ㆍ망언(妄言)ㆍ기어(綺語)의 일곱 가지 뜻과 나머지는 밖에 속한다.

數息亂者當識因緣所從起當知是內意一息亂者是外意過息從外入故二息亂者是內意過息從中出故三五七九屬外意四六八十屬內意嫉瞋恚疑是三意在內殺盜婬兩舌惡口妄言綺語是七意及餘事屬外也

 

숨을 얻을 수 있는 것은 밖이 되고, 숨을 얻을 수 없는 것은 안이 된다. 숨은 뜻을 좇아 생기므로 생각과 숨을 합쳐 하나라고 세는데, 숨이 다 하면 하나를 세기도 하고 또한 하나를 세지 않기도 하는 것은, 뜻은 밖에 있는 채 숨이 아직 다하지 않았기 때문이니, 비유컨대 돈을 세면서 뜻은 다섯 번째에 있는데 세기는 하나라고 하는 것과 같다. 숨을 셈[數息]에 세는 것보다 먼저 들어오는 이유는, 밖에는 7()이 있고 안에는 3()이 있으므로 적은 것이 능히 많은 것을 이길 수 없기 때문에 세는 것보다 먼저 들어오는 것이다.

得息爲外不得息爲內息從意生念息合爲一數息至盡數爲一亦非一意在外息未盡故譬如數錢意在五數爲一也數息所以先數入者外有七惡內有三惡用少不能勝多故先數入也

 

숨을 셈에 얻지 못하는 것은 그 본래의 뜻[本意]을 잃었기 때문이니, 본래의 뜻은 비상(非常)과 고()와 공()과 비신(非身)의 이치이다. 이 본래의 뜻을 잃고 뒤바뀜[顚倒]에 떨어지기 때문에 또한 사()를 잃어버린다. ()는 처음 앉았을 때 첫 번째 들이 쉬는 숨[入息]에서 몸의 편안함과 차례대로 행함을 얻으니, 그 본래의 뜻을 잃었기 때문에 숨을 얻지 못하는 것이다.

數息不得者失其本意故本意謂非常苦空非身失是意墮顚倒故亦爲失師師者初坐時第一入息得身安便次第行爲失其本意故不得息也

 

숨을 셈[數息]에 뜻으로 항상 마땅히 비상ㆍ고ㆍ공ㆍ비신을 생각해야 하며, 숨이 나와도 또한 없어지고 들어가도 또한 없어짐을 헤아려야 한다. 이미 이것을 안다면 도를 얻음이 빠를 것이니, 마땅히 비상(非常)과 공()의 뜻을 가져야만 하며, 이 뜻을 얻으면 곧 숨 세는 것을 얻는다.

數息意常當念非常苦空非身計息出亦滅入亦滅已知是得道疾當持非常恐意得是意卽得息也

 

들이쉬는 숨과 내쉬는 숨이 다른 까닭은, 내쉬는 숨은 생사음(生死陰)이 되고, 들이쉬는 숨은 사상음(思想陰)이 되며, 때로는 내쉬는 숨은 통양음(痛痒陰)이 되고, 들이쉬는 숨은 식음(識陰)이 된다. 이런 까닭에 다른 것이니, 도인(道人)은 마땅히 이 뜻을 분별해야만 한다.

入息出息所以異者出息爲生死陰入息爲思想陰有時出息爲痛痒陰入息爲識陰用是爲異道人當分別是意也

 

들이쉬는 숨은 죄를 받아들이지 않기 위함이요, 내쉬는 숨은 죄를 제거하기 위함이요, 뜻을 따름[隨意]은 죄를 여의기 위함이며, 들이쉬는 숨은 인연을 받아들이기 위함이요, 내쉬는 숨은 인연에 이르기 위함이요, 뜻을 따름은 인연을 여의지 않기 위함이다.

入息者爲不受罪出息者爲除罪守意者爲離罪入息者爲受因緣出息者爲到因緣守意者爲不離因緣也

 

숨 세는 것을 얻지 못함에 세 가지 인연이 있으니, 첫째는 죄가 이름이요, 둘째는 행이 공교롭지 않아서요, 셋째는 정진하지 않아서 이다.

數息不得有三因緣一者罪到二者行不互三者不精進也

 

들이쉬는 숨은 짧고 내쉬는 숨은 길며, 따라 생각하는 바가 없는 것이 도의(道意)가 되고, 생각하는 바가 있는 것은 죄()가 되니, 죄는 밖에 두어야지 안에 두어서는 안 된다.

入息短出息長無所從念爲道意有所念爲罪罪惡在外不在內也

 

숨을 셀 때 뜻을 여의면 숨이 길어지고, 숨을 얻으면 숨이 짧아지며, 편안하게 행하지 못하면 숨이 길게 되고, ()하면 짧게 되며, 만물을 생각하면 긴 숨이 되고, 생각하는 바가 없으면 짧은 숨이 되며, 열 번째 숨에 이르지 못하고 그쳤다가 다시 세는 것은 긴 숨이 되고, 열 번째 숨을 얻은 것은 짧은 숨이 된다. 숨을 얻으면 짧게 되니, 왜냐하면, 멈추고 다시 세지 않기 때문이며, 숨을 얻으면 또한 길게 되니, 왜냐하면, 숨을 쉬지[] 않기 때문에 길게 되는 것이다. 숨이 긴 것도 스스로 알고 숨이 짧은 것도 스스로 아는 것은, 뜻이 있는 곳을 따라서 길고 짧음을 스스로 아는 것이니, 뜻이 길고 짧음을 깨닫는다면 스스로 아는 것이 되고, 뜻이 길고 짧음을 깨닫지 못한다면 스스로 알지 못하는 것이 된다.

數息時有離意爲喘息長得息爲喘息短不安行息爲長定爲短念萬物爲長息無所念爲短息未至十息壞復更數爲長息得十息爲短息得息爲短何以故止不復數故得息亦爲長何以故息不休故爲長也喘息長自知喘息短自知謂意所在爲自知長短意覺長短爲自知意不覺長短爲不自知也

 

도인(道人)은 안반수의(安般守意)를 행하여 뜻을 멈추려고 하니, 마땅히 무슨 인연으로 뜻을 멈춤을 얻을 것인가? 이제 안반수의를 설하겠으니 들을지어다.

道人行安般守意欲止意當何因緣得止意聽說安般守意

 

무엇이 안()이 되고, 무엇이 반()이 되는가? ()은 들이쉬는 숨이라 하고, ()은 내쉬는 숨이라고 한다. 생각과 숨이 떨어지지 않는 것을 안반(安般)이라고 하며, 수의(守意)는 뜻을 멈춤을 얻으려고 하는 것이다.

何等爲安何等爲般安名爲入息般名爲出息念息不離是名爲安般守意者欲得止意

 

행자(行者)와 새로 배우는 이에게는 네 가지 안반수의의 행이 있으니, 두 가지 악()을 제거하면 16()을 즉시 스스로 알아, 마침내 안반수의를 행하여 뜻을 멈춤을 얻게 하리라.

在行者新學者有四種安般守意行除兩惡十六勝卽時自知乃安般守意行令得止意

 

무엇이 네 가지인가? 첫째는 세는 것이요, 둘째는 서로 따르는 것이요, 셋째는 멈추는 것이요, 넷째는 관()하는 것이다.

何等爲四種一爲數二爲相隨三爲止四爲觀

 

무엇이 두 가지 악()인가? 열 번째 숨을 넘지 말 것과 열 번째 세기보다 덜하지 말 것이다.

何等爲兩惡莫過十息莫減十數

 

무엇이 16()인가? 즉시 스스로 숨이 길음을 아는 것, 곧 스스로 숨이 짧음을 아는 것, 곧 스스로 숨이 몸을 움직임을 아는 것, 곧 스스로 숨이 미세(微細)함을 아는 것, 곧 스스로 숨이 상쾌함을 아는 것, 곧 스스로 숨이 상쾌하지 못함을 아는 것, 곧 스스로 숨이 멈춤을 아는 것, 곧 스스로 숨이 멈추지 않음을 아는 것, 곧 스스로 숨이 마음에 기꺼움을 아는 것, 곧 스스로 숨이 마음에 기껍지 않음을 아는 것, 곧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만물이 이미 없어져 다시 숨을 얻을 수 없음을 스스로 아는 것, 안으로 다시 생각할 바 없는 숨임을 스스로 아는 것, 생각하는 바를 버리는 숨임을 스스로 아는 것, 생각하는 바를 버리지 못하는 숨임을 스스로 아는 것, 신명(身命)을 버리는 숨임을 스스로 아는 것, 신명을 버리지 못하는 숨임을 스스로 아는 것이니, 이것이 즉시 스스로 아는 열여섯 가지이다.

何等爲十六勝卽時自知喘息長卽自知喘息短卽自知喘息動身卽自知喘息微卽自知喘息快卽自知喘息不快卽自知喘息止卽自知喘息不止卽自知喘息歡心卽自知喘息不歡心卽自知內心念萬物已去不可復得喘息自知內無所復思喘息自知棄捐所思喘息自知不棄捐所思喘息自知放棄軀命喘息自知不放棄軀命喘息自知是爲十六卽時自知也

 

무엇이 열 번째 세기를 넘지 않는 것이며, 열 번째 세기보다 덜하지 않은 것인가? 숨이 이미 다했는데 아직 세지 않는 것이 넘는 것이요, 숨이 아직 다하지 않았는데 곧바로 세는 것이 덜 하는 것이다. 세기를 넘어서 놓친 것도 또한 악()이요, 미치지 못하는 것도 또한 악이니, 이것이 두 가지 악이 된다.

問何等爲莫過十數莫減十數報息已盡未數是爲過息未盡便數是爲減失數亦惡不及亦惡是爲兩惡

 

두 번째 숨에 이르러 어지러운 것은 짧은 숨이 되고, 아홉 번째 숨에 이르러 어지러운 것은 긴 숨이 되며, 열 번째 숨을 얻는 것은 상쾌한 숨이 되고, 서로 따르는 것은 미세함이 된다. 뜻이 긴 데에 있다면 바로 뜻을 돌이켜서 나는 왜 긴 것을 생각하는가?’라고 해야 하며, 뜻이 짧은 데에 있다면 즉시 깨달아서 뜻이 멈추지 않도록 해야 하니, 멈추면 집착이 된다. 신명(身命)을 버리는 것을 숨을 행한다[行息]고 이르니, 도의(道意)를 얻으면 문득 신명을 버리며, 아직 도의를 얻지 못했으면 항상 몸을 아끼는 까닭에 신명을 버리지 못한다. 숨이 미세한 것은 도()가 되고, 긴 것은 생사(生死)가 되며, 짧은 숨이 움직이면 생사가 되고, ()보다 길면 짧음이 되니, 왜냐하면, 도의(道意)를 얻지 못하여 아는 바가 없기 때문에 짧음이 된다.

至二息亂爲短息至九息亂爲長息得十息爲快息相隨爲微意在長便轉意我何以故念長意在短卽時覺不得令意止止爲著放棄軀命者謂行息得道意便放棄軀命未得道意常愛身故不放棄軀命也息細微爲道長爲生死短息動爲生死長於道爲短何以故不得道意無知見故爲短也

 

숨을 세는 것은 단()이 되고, 서로 따르는 것은 복()이 되며, 멈춤[]은 뜻을 한결같이 함이 되고, ()은 뜻을 앎이 되며, 돌이킴[]은 도를 행함이 되고, 청정함[]은 도에 들어감이 된다.

數息爲單相隨爲複止爲一意觀爲知意還爲行道淨爲入道也

 

셀 때 생각이 열 번째 숨이 이르러 붙잡고 있는 것이 바로 외선(外禪)이요, 몸의 부정(不淨)을 생각하고 공()을 따르는 것이 바로 내선(內禪)이다.

數時爲念至十息爲持是爲外禪念身不淨隨空是爲內禪也

 

선법(禪法)은 악이 와도 받아들이지 않으니, 이것을 버린다고 한다. 입을 다물고 숨을 셈에 기()의 나고 듦을 따르되, 기가 어떤 곳에서 일어나고 어떤 곳에서 멸하는지 알아야 한다. 뜻에 생각하는 바가 있으면 숨을 세지 못하고, 더디고 빠르고 크고 적음이 있어도 또한 세지 못하며, 귀로 어지러운 소리를 들으면 또한 세지 못한다.

禪法惡來不受是名爲棄閉口數息隨氣出入知氣發何所滅何所意有所念不得數息有遲疾大小亦不得數耳聞聲亂亦不得數也

 

숨을 셈에 뜻이 숨 세는 데만 있다면 공교함이 되지 못하니, 뜻을 행하여야 마침내 멈춤[]이 되며, 숨을 셀 때 뜻이 다만 숨에만 있다면 이것은 공교함이 되지 못하니, 마땅히 뜻이 좇아서 일어나는 곳과 기()가 멸하는 곳을 알아야만 마침내 세는 것에 응하여서 인연이 다하면 문득 정의(定意)를 얻는 것이다.

數息意在息數爲不工行意在意乃爲止數息意但在息是爲不工當知意所從起氣所滅是乃應數因緣盡便得定意也

 

수의(守意)는 나고 드는 숨을 생각하여 이미 숨을 생각함에 악()이 생기지 않기 때문에 수의가 된다. 숨은 인연을 따라 생겨나니, 인연이 없고 인연을 멸한다면 숨도 끊어져 멈추는 것이다. 숨을 세는 것이 지극히 성실하고, 숨이 어지럽지 않은 것이 인욕(忍辱)이 되며, 숨을 셈에 기가 미세하여 다시 나고 드는 줄을 깨닫지 못해야만 이에 마땅히 한 생각을 지켜서 멈출 것이다. 숨은 몸에도 있고 또한 밖에도 있으니, 인연을 얻어 숨이 생기며 죄가 아직 다하지 않았기 때문에 숨이 있으니, 인연을 끊으면 숨이 다시 생겨나지 않을 것이다.

守意者念出入息已念息不生惡故爲守意息見因緣生無因緣滅因緣斷息止也數息爲至誠息不亂爲忍辱數息氣微不復覺出入如是當守一念止也息在身亦在外得因緣息生罪未盡故有息斷因緣息不復生也

 

숨을 셈에 제2()을 따를 것이니, 왜냐하면, 생각을 기다리지 않기 때문에 제2선을 따르는 것이다.

數息以爲隨第二禪何以故用不待念故爲隨第二禪也

 

숨을 세기만 하는 것은 수의(守意)가 되지 못하며, 숨을 생각해야 마침내 수의가 되니, 숨이 밖으로부터 들어와 숨이 아직 다하지 않았다면 숨은 들어오는 중이고 뜻은 다했으며 식()은 수를 세는 데 있다.

數息爲不守意念息乃爲守意息從外入息未盡息在入意在盡識在數也

 

열 가지 숨에 열 가지 뜻이 있어 열 개의 묶임[]이 되고, 서로 따르는 것에 두 가지 뜻이 있어 두 개의 묶임이 되며, 멈춤[]에 한 가지 뜻이 있어 한 개의 묶임이 된다.

十息有十意爲十絆相隨有二意爲二絆止爲一意爲一絆

 

숨 세는 것을 얻지 못하면 악한 뜻이 되어 가히 묶을 수 없으며, 악한 뜻이 멈추어야 마침내 숨을 셈을 얻으니, 이것이 조화가 되어야 가히 뜻을 묶을 수 있다.

不得息數爲惡意不可絆惡意止乃得數是爲和調可意絆也

 

이미 숨을 얻었으면 숨을 버리고, 이미 서로 따름을 얻었으면 서로 따름을 버리며, 이미 멈춤을 얻었으면 멈춤을 버리고, 이미 관()을 얻었으면 관을 버리며, 다시 돌이키지 말 것이니, 다시 돌이키지 않는다는 것은 다시 숨을 세어 뜻을 부리거나 또한 뜻이 숨을 부리게 하지 않는 것이다.

생각하는 바가 있다면 숨이 뜻을 부리게 되고, 생각하는 바가 없다면 뜻이 숨을 부리게 된다.

已得息棄息已得相隨棄相隨已得止棄止已得觀棄觀莫復還莫復還者莫復數息亦使意意亦使息也有所念爲息使意無所念爲意使息也

 

숨에 네 가지 일이 있으니, 첫째는 바람, 둘째는 기운, 셋째는 숨, 넷째는 헐떡거림[]이다. 소리가 있는 것은 바람이 되고, 소리가 없는 것은 기운이 되며, 나고 드는 것은 숨이 되고, 나고 드는 기운이 다하지 못한 것은 헐떡거림이 된다.

息有四事一爲風二爲氣三爲息四爲喘有聲爲風無聲爲氣出入爲息氣出入不盡爲喘也

 

숨을 세는 것은 바깥을 끊음이요, 서로 따르는 것은 안을 끊음이며, 밖으로 부터 들어올 때 세는 것은 바깥을 끊음이고 또한 바깥 인연을 여의려 하는 것이요, 가운데로부터 나올 때 세는 것은 안의 인연을 여의려고 하는 것이니, 바깥은 몸을 여읨이 되고, 안은 뜻을 여읨이 된다. 몸을 여의고 뜻을 여의는 이것이 바로 서로 따르는 것이 되며, 나고 드는 숨 이것이 두 가지 일이 된다.

數息斷外相隨斷內數從外入爲斷外亦欲離外因緣數從中出爲欲離內因緣外爲身離內爲意離身離意離是爲相隨出入息是爲二事也

 

숨을 세는 것은 안과 밖의 인연을 끊으려고 하는 것이니, 무엇이 안과 밖인가? ()ㆍ이()ㆍ비()ㆍ구()ㆍ신()ㆍ의()는 안이 되고, ()ㆍ성()ㆍ향()ㆍ미()ㆍ세활(細滑)ㆍ염()은 밖이 된다.

數息爲欲斷內外因緣何等爲內外謂眼耳鼻口身意爲內色聲香味細滑念爲外也

 

숨 쉼을 행하는 것은 뜻을 공()으로 향하게 하려는 것인데 다만 나머지 뜻만 멈추려고 한다면 어떻게 공으로 향하겠는가? 숨 가운데는 숨 쉬는 대상이 없기 때문이다.

行息爲使意向空但欲止餘意何以爲向空息中無所爲故也

 

숨을 셀 때 뜻이 달아나는 것 아닌가? 이를 곧바로 깨닫는다면 죄는 무겁고 뜻은 가벼우니, 죄가 뜻을 이끌어 빨리 가버리기 때문에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數息意走不卽時覺者罪重意輕罪引意去疾故不覺也

 

()를 행하여 이미 숨 쉬는 것을 얻으면 저절로 숨 쉬는 것이 싫어져서 뜻을 돌리려고 하여도 다시 세고 싶지 않으니, 이와 같은 것이 숨 쉬는 것을 얻음이요, 서로 따르는 것과 멈춤[]과 관()도 또한 그렇다.

行道已得息自厭息意欲轉不復欲數如是爲得息相隨止觀亦爾也

 

나고 드는 숨의 사라짐을 알아서 숨의 모습[]을 얻고, 생사(生死)를 알아서 다시 쓰지 않음으로써 생사의 모습을 얻는다면, 이미 4()을 얻은 것이니, 다만 공()을 생각하여 도()를 심을 것이다.

知出入息滅滅爲得息相知生死不復用爲得生死相已得四禪但念空爲種道栽

 

숨 쉬는 것을 행하여 이미 정()을 얻어서 다시 기()의 나고 듦을 깨닫지 못한다면, 문득 관()할 수 있으니, 첫째 마땅히 55가지 일을 관해야 하고, 둘째 마땅히 몸 가운데서 12인연을 관해야 한다.

行息已得定不復覺氣出入便可觀一當觀五十五事二當觀身中十二因緣也

 

그렇다면 숨이 나고 듦에 나고 드는 곳이 있는가? 숨이 들어올 때가 바로 그 곳이요, 숨을 내쉴 때가 바로 그 곳이다. 숨을 세며 몸으로 앉아서 통양(痛痒)ㆍ사상(思想)ㆍ생()ㆍ사()ㆍ식()을 멈추고 행하지 않음이 바로 앉음[]이 된다. 숨을 생각하여 도를 얻고 다시 헤아리는 것은 숨은 본래 아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問息出入寧有處不報息入時是其處出息時是其處數息身坐痛痒思想生死識止不行是爲坐也念息得道復挍計者用息無所知故

 

숨을 생각하여 도를 얻었는데 어찌 아는 것이 없다고 하는가? 뜻은 숨을 알지만 숨은 뜻을 알지 못하니, 이것이 아는 바가 없다는 것이다. 사람이 능히 뜻을 헤아릴 수 없다면 곧바로 숨을 세도록 해서 뜻을 정하려고 하지만, 비록 숨을 세더라도 다만 악()이 생겨나지 않을 뿐이요 지혜는 없으니, 마땅히 어떤 행으로 지혜를 얻어서 첫 번째로부터 열 번째까지 이르러 분별하여 어지러움을 안정시키고 대경(對境)을 식별하여 약()을 쓰겠는가? 이미 정의(定意)를 얻었다면 곧바로 지혜를 따라서 헤아림을 얻어 관()을 따른다.

問念息得道何以爲無所知報意知息息不知意是爲無所知人不能得挍計意便令數息欲令意定雖數息但不生惡無有黠智當何等行得黠慧從一至十分別定亂識對行藥已得定意便隨黠慧得挍計爲墮觀也

 

무엇이 세는 것[]이 되는가? 센다는 것은 일[]을 말한다. 비유컨대 사람이 무슨 일이 있으면 곧바로 구하는 것과 같으니, 이것은 죄를 세는 것이지만 도인(道人)은 복을 세는 것이다. 왜냐하면, 열 번째까지 정하여 한 번 뜻을 일으키면 첫 번째가 되고, 두 번 뜻을 일으키면 두 번째가 되어, 세기를 열 번째에서 마치니, 열 번째까지 이르면 끝이 되는 까닭에, 열까지 세는 것이 복이 된다고 하는 것이다.

問何等爲數報數者謂事譬如人有事更求是爲數罪道人數福何以故正爲十一意起爲一二意起爲二數終於十至十爲竟故言十數爲福

 

또한 죄가 있다는 것은, 능히 숨 쉬는 것을 무너뜨리지 못하기 때문에 죄가 되며, 또한 생사(生死)에 뜻을 두어 소멸하지 못하고 세간에 떨어져 세간 일을 끊지 못하므로 죄가 되는 것이다. 6()의 여섯 가지 일에다 통양(痛痒)ㆍ사상(思想)ㆍ생사(生死)ㆍ식()을 합한 열 가지는 안의 열 번째까지의 숨에 응하고 살()ㆍ도()ㆍ음()ㆍ양설(兩舌)ㆍ악구(惡口)ㆍ망언(妄言)ㆍ기어(綺語)ㆍ질투(嫉妬)ㆍ진에(瞋恚)ㆍ우치(愚癡)는 밖의 열 번째까지의 숨에 응하니, 이른바 멈추어 행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復有罪者用不能壞息故爲罪亦謂意生死不滅墮世閒已不斷世閒事爲罪也六情爲六事痛痒思想生死識合爲十事應內十息殺盜婬兩舌惡口妄言綺語嫉妒瞋恚癡應外十息謂止不行也

 

무엇이 열여섯 가지 일인가? 열여섯 가지는 세어서 열여섯 번째까지 이름을 말하니, 즉 숨을 세는 것과 서로 따르는 것과 멈춤[]과 관()과 돌이킴[]과 정()을 이 열여섯 번째까지 행하여 여의지 않음이 도()를 따르는 것이다.

問何等爲十六事報十事者謂數至十六者謂數相隨止觀還淨是爲十六事爲行不離爲隨道也

 

숨을 세는 것은 바람을 생각하여 색()을 따르게 되니, 어떻게 도에 응()하는가? 뜻을 행함이 세는 데에 있고 색과 기()를 생각하지 않으면, 모두 곧바로 소멸하여 비상(非常)에 떨어지거나 비상을 아는 것이 도가 된다. 도인(道人)이 도를 얻고자 하면 마땅히 앉아서 행하는 두 가지를 알아야만 하니, 첫째는 앉음[]이고, 둘째는 행함[]이다.

問數息念風爲隨色何以應道報行意在數不念色氣盡便滅墮非常知非常爲道也道人欲得道要當知坐行二事一者爲坐二者爲行

 

앉음과 행함은 같은 것인가, 같지 않은 것인가? 때로는 같고 때로는 같지 않으니, 숨을 세는 것과 서로 따르는 것과 멈춤[]과 관()과 돌이킴[]과 정() 등 이 여섯 가지 일을 때로는 앉아서 하기도 하고 때로는 다니면서 하기도 하니, 왜냐하면 숨을 세어서 뜻을 정()하는 것이 바로 앉음[]이 되고, 뜻이 법을 따르는 것이 행이 되며, 이미 뜻을 일으켜서 여의지 않음은 행도 되고 또한 앉음도 된다.

問坐與行爲同不同報有時同有時不同數息相隨止觀還淨此六事有時爲坐有時爲行何以故數息意定是爲坐意隨法是爲行已起意不離爲行亦爲坐也

 

좌선(坐禪)하는 법은, 첫 번째에서 두 번째를 세지 않고, 두 번째에서 첫 번째를 세지 않는 것이다. 첫 번째에서 두 번째를 센다는 것은, 첫 번째 숨을 세는 것을 아직 마치지 않았는데 곧바로 두 번째를 말하는 것이 바로 첫 번째에서 두 번째를 세는 것이니, 이런 것은 지나친 정진(精進)이 된다. 두 번째에서 첫 번째를 센다는 것은, 숨이 이미 두 번 들어왔는데 겨우 첫 번째라고 말하는 것이 바로 두 번째에서 첫 번째를 세는 것이니, 이런 것은 미치지 못하는 정진이 된다.

坐禪法一不數二二不數一一數二者謂數一息未竟便言二是爲一數二如是爲過精進二數一者謂息已入二甫言一是爲二數一如是爲不及精進

 

세 번째로부터 네 번째에 이르고, 다섯 번째로부터 여섯 번째에 이르며, 일곱 번째로부터 여덟 번째에 이르고, 아홉 번째로부터 열 번째에 이르기까지 각각 부분이 있으니, 마땅히 속한 곳을 분별하여 첫 번째에 있어서는 첫 번째를 세고, 두 번째에서는 두 번째를 세는 것이 바로 법을 행하는 것이며, 곧바로 정진을 따르는 것이다.

從三至四五至六七至八九至十各自有分部當分別所屬在一數一在二數二是爲法行便墮精進也

 

앉음[]으로 도를 따르는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숨을 세면서 앉아 있는 것이요, 둘째는 경을 외우면서 앉아 있는 것이요, 셋째는 경을 듣고 기뻐하며 앉아 있는 것이, 바로 이 세 가지다.

有三坐墮道一爲數息坐二爲誦經坐三爲聞經喜坐是爲三也

 

앉음[]3()이 있으니, 첫째는 미합좌(味合坐), 둘째는 정좌(淨坐), 셋째는 무유결좌(無有結坐)이다.

무엇이 미합좌인가? 뜻이 행을 집착하여 여의지 않는 것이 바로 미합좌가 된다. 무엇이 정좌인가? 생각하지 않는 것이 정좌가 된다. 무엇이 무유결좌인가? 맺음이 이미 다한 것이 무유결좌가 된다.

坐有三品一爲味合坐二爲淨坐三爲無有結坐何等爲味合坐謂意著行不離是爲味合坐何謂爲淨坐謂不念爲淨坐何等爲無有結坐謂結已盡爲無有結坐也

 

[]에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잡식(雜息)이요, 둘째는 정식(淨息)이요, 셋째는 도식(道息)이다. 도를 행하지 않는 것이 잡식이 되고, 세어서 열 번째까지 이르도록 어지럽지 않는 것이 정식이 되고, 이미 도를 얻는 것이 도식이 된다.

息有三輩一爲雜息二爲淨息三爲道息不行道是爲雜息數至十息不亂是爲淨息已得道是爲道息也

 

숨에 세 가지가 있으니, 대식(大息)이 있고, 중식(中息)이 있고, 미식(微息)이 있다. 입으로 말하는 바가 있는 것은 대식이요, 멈추고 도를 생각하는 것은 중식이요, 멈추고 4()을 얻는 것은 미식이다.

息有三輩有大息有中息有微息口有所語謂大息止念道中息止得四禪微息止也

 

부처님께서는 왜 사람들에게 숨을 세어 뜻을 지킬 것을 가르치셨는가? 네 가지 이유가 있으니, 첫째는 고통을 받지 않게 하려는 까닭이요, 둘째는 뜻을 어지럽힘을 피하게 하려는 까닭이요, 셋째는 인연을 막아 생사와 만나지 않게 하려는 까닭이요, 넷째는 니원도(泥洹道)를 얻게 하려는 까닭이다.

問佛何以教人數息守意報有四因緣一者用不欲痛故二者用避亂意故三者用閉因緣不欲與生死會故四者用欲得泥洹道故也

 

비유컨대 해가 광명이 없다고 설하는 것에 네 가지 까닭이 있으니, 첫째는 구름이 끼었기 때문이요, 둘째는 먼지가 끼었기 때문이요, 셋째는 큰 바람이 불기 때문이요, 넷째는 연기가 끼었기 때문인 것처럼, 숨 세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에도 또한 네 가지 인연이 있으니, 첫째는 생사를 생각하여 헤아리기 때문이요, 둘째는 음식을 많이 먹었기 때문이요, 셋째는 몹시 여위었기 때문이요, 넷째는 앉아서 죄지(罪地)를 고칠 수 없기 때문이다.

譬喩說日無光明者有四因緣一者用有雲故二者用有塵故三者用有大風故四者用有煙故數息不得亦有四因緣一者用念生死挍計故二者用飮食多故三者用疲極故四者用坐不得更罪地故

 

이 네 가지 일이 모두 상()이 있으니, 앉아 숨을 세면서 갑자기 다른 일을 생각하여 숨과 뜻을 잃는 것은 바로 생각하여 헤아리는 상이요, 골절이 모두 아파 능히 오래 앉아 있지 못하는 것은 바로 많이 먹은 상이요, 몸이 무겁고 뜻이 혼몽하여 다만 자려고만 하는 것은 바로 몹시 여읜 상이요, 4()으로 앉았기만 하여 한 숨도 얻지 못하는 것은 바로 죄지(罪地)의 상이다. 만일 죄가 됨을 알았다면 마땅히 경행(經行)을 하거나 앉아 경문(經文)을 읽어서 뜻으로 죄를 익히지 않으면 또한 화()가 소멸될 것이다.

此四事來皆有相坐數息忽念他事失息意是爲念挍計相骨節盡痛不能久坐是爲食多相身重意瞪瞢但欲睡眠是爲疲極相四面坐不得一息是爲罪地相以知罪當經行若讀經文坐意不習罪亦禍消也

 

도인(道人)은 도를 행하여 마땅히 근본을 생각할 것이니, 무엇이 근본인가? ()ㆍ의()ㆍ식()이 바로 근본이 된다. 이 세 가지 일은 모두 보이지 않아서 이미 생겨났다가 곧바로 멸하여 근본의 뜻이 다시 생겨나지 않으니, 이 뜻을 얻음이 도의(道意)가 된다. 근본의 뜻이 이미 소멸하면 고통이 있지 않으며, 다시 인연으로 생겼다가도 곧바로 끊어지니, 정의(定意)가 날로 수승해진다. 날로 수승해지는 것이 정의가 되니, 때로는 숨을 좇아 정의를 얻기도 하고, 때로는 서로 따름을 좇아 정의를 얻기도 하며, 때로는 멈춤[]을 좇아 정의를 얻기도 하고, 때로는 관()을 좇아 정의를 얻기도 한다. ()의 인연(因緣)을 얻음에 따라 곧바로 행한다.

道人行道當念本何等爲本謂心意識是爲本是三事皆不見已生便滅本意不復生得是意爲道意本意已滅無爲痛更因緣生便斷也定意日勝日勝爲定意有時從息得定意有時從相隨得定意有時從止得定意有時從觀得定意隨得定因緣直行也

 

숨 쉬는 것을 행하여 또한 탐()에 떨어지니, 왜냐하면 뜻이 정해지면 문득 기뻐지기 때문이니, 곧바로 마땅히 나는 숨과 드는 숨을 헤아려야만 생각이 사라질 때, 숨이 생겨나면 몸이 생겨나고, 숨이 사라지면 몸도 사라진다. 아직 생사의 괴로움을 벗어나지 못한 것은, 어째서 인가? 기뻐서 이와 같이 헤아리기 때문이니, 곧바로 탐욕을 멈추어야 한다.

行息亦墮貪何以故意以定便喜故便當計出息入息念滅時息生身生息滅身滅尚未脫生死苦何以故喜已計如是便貪止也

 

숨을 세는 것은 빠르게 하고 서로 따르는 것은 느리게 하려고 하며, 때로는 숨 세는 것을 마땅히 느리게 하고 서로 따르는 것을 빠르게 하기도 하니, 왜냐하면 숨을 셀 때 뜻이 어지럽지 않으면 마땅히 느리게 해야 하고, 세는 것이 어지러우면 마땅히 빠르게 해야 한다. 서로 따르는 것도 또한 이와 같이 한다.

數息欲疾相隨欲遲有時數息當安徐相隨時當爲疾何以故數息意不亂當安徐數亂當爲疾相隨亦同如是也

 

첫 번째로 세는 것과 또한 서로 따르는 것이 생각하는 바가 다르니, 비록 숨을 세더라도 마땅히 기()의 나고 듦을 알아 뜻을 세는 것에 붙여두어야 하며, 숨을 세다가 다시 서로 따르는 것과 지와 관을 행한다면, 이른바 숨 쉬는 것을 얻지 못한다고 하니, 전생의 습()이 서로 따르는 것과 멈춤과 관()에 있는 것이다. 비록 서로 따르는 것과 멈춤과 관을 얻더라도 마땅히 돌이켜서 숨 세는 것으로부터 일으켜야 한다.

第一數亦相隨所念異雖數息當知氣出入意著在數也數息復行相隨止觀者謂不得息前世有習在相隨止觀雖得相隨止觀當還從數息起也

 

숨을 셀 때 뜻을 여의지 않으면 이것은 법을 여읜 것이 되며, 법이 아니기 때문에 숨을 셀 때 뜻이 죄를 따르지 않지만, 뜻을 세간에 둔다면 곧 죄에 떨어진다. 숨을 세는 것은 뜻을 어지럽히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이니, 뜻이 어지럽지 않아서 다시 서로 따르는 것을 행한다면 상지중(上之中)의 뜻을 증득하고 멈춤[]을 알 것이다. 멈춤은 관()과 같고 돌이킴[]은 정()과 같다.

數息意不離是爲法離爲非法數息意不隨罪意在世閒便墮罪也數息爲不欲亂意故意以不亂復行相隨者證上次意知爲止止與觀同還與淨同也

 

도를 행하여 미세한 뜻을 얻었다가 그 뜻이 어긋났다면, 마땅히 다시 숨을 세거나 경()을 읽어야 하며, 마침내 다시 선()을 행하여 미세한 뜻을 얻으면, 숨을 세는 것과 서로 따르는 것을 행하지 않아도 된다.

行道得微意當倒意者謂當更數息若讀經已乃復行禪微意者謂不數息及行相隨也

 

부처님은 여섯 가지 깨끗한 뜻이 있으니, 이른바 숨을 세는 것과 서로 따르는 것과 멈춤[]과 관()과 돌이킴[]과 정()이다. 이 여섯 가지 일로 능히 형체 없는 것을 제어하신다.

佛有六潔意謂數息相隨止觀還淨是六事能制無形也

 

숨은 또한 뜻이기도 하고 뜻이 아니기도 하니, 왜냐하면, 셀 때 뜻이 숨에 있으면 뜻이 되지만, 세지 않을 때는 뜻과 숨이 각자 스스로 행동하니, 이것은 뜻이 아니요, 숨을 좇아 생겨나니 숨이 이미 그치면 뜻도 없는 것이다.

息亦是意亦非意何以故數時意在息爲是不數時意息各自行是爲非意從意生息已止無有意也

 

사람이 뜻을 부리지 못하고 뜻이 사람을 부리니, 뜻을 부리는 이는 이른바 숨을 세는 것과 서로 따르는 것과 멈춤과 관과 돌이킴과 정()에서 37품경을 생각한다. 이것이 바로 뜻을 부리는 것이니, 사람이 도를 행하지 않고, 탐내어 구하며 욕심을 따르면, 이것은 뜻이 사람을 부리는 것이다.

人不使意意使人使意者謂數息相隨止觀還淨念三十七品經是爲使意人不行道貪求隨欲是爲意使人也

 

숨에 구식(垢息)이 있으니, []를 버리지 못하면 숨을 얻지 못한다. 무엇이 구식인가? 3() 가운데서 가장 극심한 것이 이 구식이다. 무엇이 3명인가? 3()이 일어날 때는 몸속이 틀림없이 어둡기 때문에 3명이라고 한다. 3독은 첫째 탐음(貪婬), 둘째 성냄[瞋恚], 셋째 어리석음[愚癡]이니, 사람이 모두 이 세 가지 일로 인해서 죽는 까닭에 독()이라고 한다. 숨을 셀 때는 뜻이 숨 세는 데에 있지만 세지 않을 때는 세 가지 뜻이 있으니, 선한 뜻도 있고, 악한 뜻도 있으며,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는 뜻도 있다.

息有垢息垢不去不得息何等爲息垢謂三冥中最劇者是爲息垢何等爲三冥謂三毒起時身中正冥故言三冥三毒者一爲貪婬二爲瞋恚三爲愚癡人皆坐是三事死故言毒也數息時意在數息未數時有三意有善意有惡意有不善不惡意

 

사람이 숨 쉬는 상()을 얻었는지 알려고 한다면 마땅히 만물과 모든 좋은 경계를 관()해서 뜻이 다시 집착하지 않는다면 이것이 숨 쉬는 상을 얻은 것이요, 뜻이 다시 집착한다면 이것은 상을 얻지 못한 것이니, 마땅히 다시 정진하여 가가(家家)의 뜻을 행함을 없애려고 해야 한다. 이른바 6()이 가가의 뜻이니 만물을 탐애하는 것이 모두 가가의 뜻이다.

欲知人得息相者當觀萬物及諸好色意不復著是爲得息相意復著是爲未得當更精進行家中意欲盡者謂六情爲意家貪愛萬物皆爲意家也

 

서로 따르는 것은 이른바 선법(善法)을 행하여 이를 좇아 해탈을 얻어 마땅히 서로 따르는 것이며, 또한 5()6()을 따르지 않고 숨과 뜻이 서로 따르는 것이다.

相隨者謂行善法從是得脫當與相隨亦謂不隨五陰六入息與意相隨也

 

세 번째 멈춤[], 무슨 까닭에 코끝에 멈추어 있는가? 숨을 세는 것과 서로 따르는 것과 멈춤[]과 관()과 돌이킴[]과 정()이 모두 코로부터 나고 드니, 뜻으로 옛 곳을 익힌다면 또한 인식하기 쉽기 때문에 코끝에 붙여두는 것이다. 악한 뜻이 오면 이를 끊는 것이 선()이니, 어떤 때는 코 밑에 멈추어 있고 어떤 때는 마음속에 멈춰 있기도 하여, 붙어 있는 곳에서 멈추기 때문에, ()가 와서 사람의 뜻을 어지럽힌다면 한 가지 일로 똑바로 관하여, 모든 악이 와도 마땅히 마음이 움직이거나 두려워하지 않아야 한다.

問第三止何以故止在鼻頭報用數息相隨止觀還淨皆從鼻出入意習故處亦爲易識以是故著鼻頭也惡意來者斷爲禪有時在鼻頭止有時在心中止在所著爲止邪來亂人意直觀一事諸惡來心不當動心爲不畏之哉也

 

멈춤[]에 네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세어서 멈추는 것이며, 둘째는 서로 따라서 멈추는 것이며, 셋째는 코끝에 멈추는 것이며, 넷째는 마음을 쉬어서 멈추는 것이다.

止有四一爲數止二爲相隨止三爲鼻頭止四爲息心止

 

멈춘다는 것은, 이른바 5()6()을 제지(制止)하는 것이다. 들이쉬는 숨이 코끝에 이르러 죄다 그친다는 것은, 이른바 악이 다시 들어오지 못하고 코끝에 이르러 멈춘다는 것이요, 내쉬는 숨이 코끝에 이르러 죄다 멈춘다는 것은, 이른바 뜻이 다시 몸을 떠나서 악으로 향하지 않기 때문에 코끝에 멈춘다는 것이요, 또한 처음 숨을 들이쉴 때 문득 한 생각으로 향하고 다시 구르지 않아서 숨의 나고 듦을 또 다시 깨닫지 못함을 말하니, 이것이 바로 멈춤이 된다.

止者謂五樂六入當制止之也入息至盡鼻頭止謂惡不復入至鼻頭止出息至盡著鼻頭謂意不復離身行向惡故著鼻頭亦謂息初入時便一念向不復轉息出入亦不復覺是爲止也

 

멈춘다는 것은, 숨을 내쉬고 들이쉴 때는 앞의 뜻이 나오는 것은 깨달아도 뒤의 뜻이 나오는 것은 깨닫지 못하므로, 앞의 뜻을 깨달아 뜻을 서로 관()해서 곧바로 나고 드는 숨을 살피되 실패한다면 문득 상()을 받아들여 생사를 두려워해서 뜻을 버리고 곧바로 도의(道意)의 상()을 따르니, 서로 따르지 말고 다만 생각을 코끝에 붙여두어 5()의 인연을 다시 생각하지 않아 죄가 끊어지고 뜻이 소멸하며, 또한 헐떡거리지 않음이 바로 멈춤[]이 된다.

止者如如出息入息覺知前意出不覺後意出覺前意爲意相觀便察出入息見敗便受相畏生死便卻意便隨道意相也莫爲相隨者但念著鼻頭五陰因緣不復念罪斷意滅亦不喘息是爲止也

 

서로 따르지 말라는 것은, 다시 뜻으로 나고 듦을 생각한다거나 5음의 인연을 따르지 않으며, 다시 헐떡거리지 않음을 말한다.

莫爲相隨者謂莫復意念出入隨五陰因緣不復喘息也

 

네 번째 관()한다는 것은, 숨을 관하다가 실패할 때에는 신체(身體)를 관하여 숨 쉬는 것과 달리하는 것이니, 인연이 나타나면 생기고 인연이 없으면 소멸하는 것이다.

第四觀者觀息敗時與觀身體異息見因緣生無因緣滅也

 

마음과 뜻으로 상()을 받아들이는 것은, 이른바 뜻에는 얻으려고 하는 바가 있으나, 마음으로 인연은 모이면 마땅히 다시 소멸함을 헤아려서 곧바로 하고 싶은 바를 끊고 다시 향하지 않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마음과 뜻으로 상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心意受相者謂意欲有所得心計因緣會當復滅便斷所欲不復向是爲心意受相也

 

인연을 인식하여 상()을 관함을 구족한다는 것은, 이른바 5()의 인연을 인식해 알아서, 내쉬는 숨도 또한 관하고 들이쉬는 숨도 또한 관한다는 것이다. ()은 이른바 5음을 관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관을 구족하는 것이요, 또한 뜻에 응하여 의상(意相)을 관함이 두 가지 인연이 되어 안으로 악을 끊고 도를 생각한다.

以識因緣爲俱相觀者謂識知五陰因緣出息亦觀入息亦觀觀者謂觀五陰是爲俱觀亦應意意相觀爲兩因緣在內斷惡念道也

 

내쉬는 숨이 다르고 들이 쉬는 숨이 다름을 관한다는 것은, 이른바 내쉬는 숨은 생사음(生死陰)이 되고 들이쉬는 숨은 사상음(思想陰)이 되며, 때로는 내쉬는 숨은 통양음(痛痒陰)이 되고 들이쉬는 숨은 식음(識陰)이 됨을 말하니, 인연을 따라 일어나 문득 음()을 받으며, 뜻이 향하는 바에 떳떳함이 없기 때문에 다른 것이다. 도인은 마땅히 이것을 분별하여 알아야 한다. 또한 내쉬는 숨이 소멸하는 것을 들이쉬는 숨을 생긴다고 하며, 들이쉬는 숨을 소멸하는 것을 내쉬는 숨이 생긴다고도 한다.

觀出息異入息異者謂出息爲生死陰入息爲思想陰有時出息爲痛痒陰入息爲識陰隨因緣起便受陰意所向無有常用是故爲異道人當分別知是亦謂出息滅入息生入息滅出息生也

 

연고가 없다는 것은, 이른바 사람과 만물에 대하여 뜻이 일어났다가 이미 멸하고 물건도 생겨났다가 다시 죽으니, 이것이 바로 연고가 없는 것이다.

無有故者謂人意及萬物意起已滅物生復死是爲無有故也

 

내쉬는 숨이 아니면 이것은 들이쉬는 숨이며, 들이쉬는 숨이 아니면 이것은 내쉬는 숨이라고 하는 것은, 숨을 내쉴 때 뜻으로 들이쉬는 숨을 생각하지 않거나 숨을 들이쉴 때 뜻으로 내쉬는 숨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는 바가 다르기 때문에 아니다라고 말한 것이다.

非出息是入息非入息是出息非謂出息時意不念入息入息時意不念出息所念異故言非也

 

중신(中信), 이른바 도() 가운데 들어가 도의 인연을 보고 도를 믿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중신이다.

中信者謂入道中見道因緣信道是爲中信也

 

다섯 번째 돌이킨다[]는 것은, 묶임[]을 버리는 것이니, 이른바 몸의 일곱 가지 악을 버리는 것이다.

여섯 번째 정(), 묶임을 버리는 것이니, 뜻의 세 가지 악을 버리는 것이다.

이것을 이름하여 돌이킨다[]고 하며, 돌이킨다는 것은 뜻으로 다시 악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니, 악을 일으킨다면 이것은 돌이킴이 아니다.

第五還棄結者謂棄身七惡第六淨棄結者爲棄意三惡是名爲還還者爲意不復起惡惡者是爲不還也

 

몸을 돌이킨다는 것은, 이른바 악을 돌이킨다는 것이다.

다섯 번째인 돌이킴[]을 얻어도 아직 몸이 있기도 하고 또한 몸이 없기도 하다. 왜냐하면, 뜻이 있으면 몸이 있고 뜻이 없으면 몸이 없으므로 뜻이 사람이 되기 때문이니, 이것을 이름하여 돌이킨다고 한다.

돌이킨다는 것은, 이른바 뜻으로 다시 악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것이니, 악을 일으킨다면 이것은 돌이킴이 아니다.

還身者謂還惡得第五還尚有身亦無身何以故有意有身無意無身意爲人種是名爲還還者謂意不復起惡起惡者是爲不還

 

또한 이른바 먼저 몸을 돕고 뒤에 뜻을 돕는다고 하니, ()ㆍ도()ㆍ음()ㆍ양설(兩舌)ㆍ악구(惡口)ㆍ망언(妄言)ㆍ기어(綺語)를 하지 않는 것은 몸을 돕는 것이 되고, 탐ㆍ진ㆍ치를 하지 않는 것은 뜻을 돕는 것이 된다.

亦謂前助身後助意不殺盜婬兩舌惡口妄言綺語是爲助身不嫉瞋恚癡是爲助意也

 

5()을 돌이킨다는 것은, 비유컨대 금을 사려다가 돌을 얻었다면 곧바로 땅에 버리고 쓰지 않듯이, 사람들은 모두 5음을 탐애하여 고통을 얻지만 문득 하려고 하지 않는 것이 바로 5음을 돌이킴이 된다.

還五陰者譬如買金得石便棄捐地不用人皆貪愛五陰得苦痛便不欲是爲還五陰也

 

무엇이 문득 소멸하여 다한 곳을 본 것인가? 이른바 무소유(無所有)가 바로 소멸하여 다한 곳이다.

이미 소유가 없다면 무슨 까닭에 이라고 하는가? 무소유한 곳이 네 곳이 있으니, 첫째 나는 새는 공중으로 곳을 삼고, 둘째 나한(羅漢)은 니원으로 곳을 삼고, 셋째 도는 유위(有爲)가 없음으로 곳을 삼고, 넷째 법은 관()으로 곳을 삼는다.

何等爲便見滅盡處謂無所有是爲滅處問已無所有何以故爲處者無所有處有四處一者飛鳥以空中爲處二者羅漢以泥洹爲處三者道以無有爲處四者法在觀處也

 

내쉬고 들이쉬는 숨에서 5음의 상()을 받는다는 것은, 뜻이 삿되고 생각을 빠르게 하여, 굴려서 되돌려 추사(麤思)가 생기고 5음의 상을 받는 것이다. 받는다는 것은, ()을 받지 않음을 받는 것이니, 5음의 상을 받음으로써 어느 곳에서 일어나고 어느 곳에서 소멸하는지를 안다. 소멸한다는 것은, 12인연을 받은 사람이 12인연을 좇아 태어나고 또한 12인연을 좇아 죽는 것이다.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은 5음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出息入息受五陰相者謂意邪念疾轉還正以生覺斷爲受五陰相言受者謂受不受相也以受五陰相知起何所滅何所滅者爲受十二因緣人從十二因緣生亦從十二因緣死不念者爲不念五陰也

 

어느 곳에서 일어나고 어느 곳에서 소멸하는지를 안다는 것은, 이른바 좋거나 나쁜 인연이 일어났다가 곧바로 다시 멸하며, 또한 몸과 기()가 생기고 소멸함도 생각하면 문득 생겨나고 생각하지 않으면 문득 소멸함을 말하는 것이다.

뜻은 몸과 더불어 동등하니, 이 생사의 도를 끊음이 이 생사 가운데 있으며, 일체의 악한 일이 모두 뜻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知起何所滅何所謂善惡因緣起便復滅亦謂身亦謂氣生滅念便生不念便死意與身同等是爲斷生死道在是生死閒一切惡事皆從意來也

 

지금은 먼저가 아니고 먼저는 지금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이른바 먼저 생각한 바는 이미 소멸하였으므로 지금 생각은 먼저 생각이 아니요, 또한 전생에 지은 바와 금생에 지은 바가 각기 복()을 얻음을 말함이요, 또한 지금 행한 바의 선()은 먼저 행한 바의 악이 아님을 말함이요, 또한 지금 숨은 앞의 숨이 아니고 앞의 숨은 지금 숨이 아님을 말하는 것이다.

今不爲前前不爲今者謂前所念已滅今念非前念亦謂前世所作今世所作各自得福亦謂今所行善非前所行惡亦謂今息非前息前息非今息也

 

생사를 분별하기 위함이라는 것은, 뜻은 생각이 생겨나면 곧 생기고 생각이 소멸하면 소멸하기 때문에 생사를 마땅히 분별해야 한다고 말 한 것이다. 만물과 몸, 과거나 미래의 복도 끝내 다하고 마니, 왜냐하면, 모두 생겨나면 문득 소멸하고 소멸하면 문득 다하기 때문이니, 이미 다하는 것임을 알았다면 마땅히 힘써 구해야 할 것이다.

爲生死分別者爲意念生卽生念滅卽滅故言生死當分別萬物及身過去未來福爲索盡何以故盡以生便滅滅便盡已知盡當盡力求也

 

앞을 봄에 좇아서 온 바가 없다는 것은, 이른바 사람은 좇아서 온 바가 없으므로 뜻이 일어나면 사람이 된다고 하며, 또한 사람은 스스로 지어서 오는 것이 아니라 좇아서 온 바가 있다고 하니, 사람이 스스로 지어 스스로 얻음이 바로 좇아 온 바가 없는 것이다.

視上頭無所從來者謂人無所從來意起爲人亦謂人不自作來者爲有所從來人自作自得是爲無所從來也

 

생사를 마땅히 분별해야 한다는 것은, 이른바 5()을 분별할 줄 아는 것이요, 또한 생사의 뜻과 사람의 뜻과 유상(有常)을 분별함을 안다는 것이며, 또한 무상(無常)을 분별할 줄 안다는 것이다.

生死當分別者謂知分別五陰亦謂知分別意生死人意爲常知無有常亦爲分別也

 

뒤를 보아도 처소가 없다는 것은, 지금 당장에는 죄가 나타나지 않지만 사람이 생사의 즈음에 있어서는 마땅히 죄를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뒤를 보아도 처소가 없다는 것이다.

後視無處所者爲今現在不見罪人在生死會當得無有脫於罪故言後視無有處所

 

아직 도의 자취를 얻지 못하였으나 중도에 목숨이 다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열다섯 가지 뜻을 얻었으므로 중도에 죽지 않음을 말하는 것이니, 마땅히 열다섯 가지 뜻을 얻어 곧바로 도를 따른다면, 또한 굴려서 올라가 아라한에 이를 것이다.

未得道迹不得中命盡謂已得十五意不得中死要當得十五意便墮道亦轉上至阿羅漢也

 

중도에 도의 자취를 얻어 또한 중도에 목숨이 다하지 않는 것은, 숨과 뜻과 몸의 세 가지 일에 있어서, 이른바 좋거나 나쁜 뜻은 마땅히 도의 자취를 얻었다가 또한 다시 중도에 무너지기도 하며, 숨은 죽었다가 다시 생겨나며, 좋은 뜻은 일어났다가 다시 소멸하기도 하지만, 몸은 또한 중도에 죽지 않는다는 것이다.

中得道亦不得中命盡爲息意身凡三事謂善惡意要當得道迹亦復中壞息死復生善意起復滅身亦不得中死也

 

무엇이 정()인가? 모든 탐욕하는 대상은 부정(不淨)이 되니, 탐욕을 제거하면 바로 정()이 된다.

무엇이 5()의 상()인가? 비유컨대 불은 음()이 되고 땔감은 상()이 된다.

何等爲淨謂諸所貪欲爲不淨除去貪欲是爲淨何等爲五陰相譬喩火爲陰薪爲相也

 

숨을 세는 것[數息]으로부터 정()에 이르기까지 이 모두가 관()이 되니, 이른바 몸과 서로 따르는 것과 멈춤[]과 관()과 돌이킴[]과 정()이 본래 존재가 없음을 관하는 것이다. 안의 뜻으로는 숨을 세고 밖의 뜻으로 나쁜 인연을 끊음이 바로 두 가지 뜻이 된다.

從息至淨是皆爲觀謂觀身相隨止觀還淨本爲無有內意數息外意斷惡因緣是爲二意也

 

무슨 까닭에 먼저 안팎으로 신체를 관()하지 않고, 도리어 먼저 숨을 세고 서로 따르며 멈추고 관하고 돌이키고 청정함을 하는가? 뜻이 청정하지[] 않기 때문에 몸을 보지 못하니, 뜻이 이미 청정하다면 문득 몸의 안팎에 열아홉 가지 도()가 있음을 다 본다. 열아홉 가지 행이 있는데, 사람이 열아홉 가지 병이 있기 때문에 또한 열아홉 가지 약이 있으니, 몸을 관하여 악로(惡露)를 생각하는 것은 바로 탐음(貪陰)을 멈추는 약이 되고, 4등심(等心)을 생각하는 것은 바로 성냄[瞋恚]을 그치는 약이 되며, 스스로 본래 무슨 인연이 있는가?’라고 헤아리는 것은 바로 어리석음[愚癡]을 그치는 약이 되고, 안반수의(安般守意)는 바로 생각이 많은 것의 약이 된다.

問何以故不先內外觀身體反先數息相隨止觀還淨報用意不淨故不見身意已淨便悉見身內外道行有十九行用人有十九病故亦有十九藥觀身念惡露是爲止貪婬藥念四等心是爲止瞋恚藥自計本何因緣有是爲止愚癡藥安般守意是爲多念藥也

 

스스로 신체의 안팎을 관할 것이니, 무엇이 신()이 되고, 무엇이 체()가 되는가? 뼈와 살은 신이 되고, 6()이 합하여 체가 된다. 무엇이 6정인가? 눈은 빛에 합하며, 귀는 소리를 받아들이며, 코는 냄새를 향하며, 입은 맛에 끌리며, 매끄러움[細滑]에 몸이 쇠퇴하며, 뜻은 종자(種子)도 되고 어리석음도 되고 물건을 낳는 것도 된다.

內外自觀身體何等爲身何等爲體骨肉爲身六情合爲體也何等爲六情謂眼合色耳受聲鼻向香口欲味細滑爲身衰意爲種栽爲癡爲有生物也

 

신체가 안과 밖으로 중복되어 나오는 이유는 무엇인가? 사람의 탐구(貪求)함은 크고 작음이 있고 앞과 뒤가 있으니, 얻고자 하는 바를 마땅히 분별하여 관해야 한다.

內外身體所以重出者何謂人貪求有大小有前後謂所欲得當分別觀

 

관한다는 것은, 보는 것이 생각이 되고 생각으로 인해 보이게 되니, 관한다는 것은 즉 아는 것이다.

觀者見爲念念因見觀者爲知也

 

신체를 관하여 멈춘다는 것은, 앉아서는 일어남을 생각하고 일어나서는 뜻을 생각하여 소행(所行)하는 뜻과 소착(所着)하는 식()을 여의지 않는 것이 바로 신체를 관하여 멈추는 것이다.

身觀止者坐念起起念意不離在所行意所著爲識是爲身觀止也

 

날숨과 들숨에서 생각이 소멸한 때란, 무엇이 생각이 소멸한 때가 되는가? 나고 듦을 생각하여 기()가 다했을 때 뜻과 숨이 소멸하는 때이다. 날숨과 들숨에서 생각이 소멸한 때란, 비유컨대 허공에 그리려 해도 그릴 곳이 없는 것처럼 생사의 뜻과 도의 뜻도 모두 그러하다. 날숨과 들숨에서 생각이 소멸한 때란, 숨과 뜻을 설명할 수 없어서 저절로 설명이 소멸한 때이다. 날숨과 들숨에서 생각이 소멸한 때란, 물건은 인연을 좇아 생기므로 근본을 끊는 것이 소멸한 때가 된다.

出息入息念滅時何等爲念滅時謂念出入氣盡時意息滅出息入息念滅時譬如畫空中無有處生死意道意俱爾也出息入息念滅時亦不說息意息說滅時出息入息念滅時物從因緣生斷本爲滅時也

 

안팎으로 통양(痛痒)을 보고 관한다는 것은, 통양이 좇아 일어나는 바를 보면 문득 관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보고 관함이 된다. 안팎의 통양이라는 것은, 밖의 좋은 물건은 외양(外痒)이 되고 밖의 나쁜 물건은 외통(外痛)이 되며, 안의 맞는 뜻은 내양(內痒)이 되고 안의 맞지 않는 뜻은 내통(內痛)이 된다.

內外痛痒見觀者爲見痛痒所從起便觀是爲見觀也內外痛痒者謂外好物爲外痒外惡物爲外痛內可意爲內痒內不可意爲內痛

 

안에 있으면 내법(內法)이 되고 밖의 인연에 있으면 외법(外法)이 되며, 또한 눈은 안이 되고 빛은 밖이 되며, 귀는 안이 되고 소리는 밖이 되며, 코는 안이 되고 냄새는 밖이 되며, 입은 안이 되고 맛은 밖이 되며, 마음은 안이 되고 생각은 밖이 되며, 좋고 매끄러움을 보고 뜻으로 얻고자 하는 것이 바로 양()이 되고, 추악(麤惡)함을 보고 뜻으로 내키지 않는 것이 바로 통()이 되니, 모두 죄에 떨어진다.

在內爲內法在外因緣爲外法亦謂目爲內色爲外耳爲內聲爲外鼻爲內香爲外口爲內味爲外心爲內念爲外見好細滑意欲得是爲痒見麤惡意不用是爲痛俱墮罪也

 

통양을 관하여 멈춘다는 것은, 만약 사람이 팔뚝이 아파도 아프다는 뜻을 일으키지 않고 도리어 저 일체 몸의 아픔도 이와 같다고 생각하여 아픈 데에 뜻을 두지 않는다면, 아픔을 멈춤이 된다. 생각할 수도 있고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어서 생각이 아픈 데에 집착한 바가 없으며, 스스로 몸을 아껴 마땅히 다른 사람의 몸을 관하고 뜻으로 다른 사람의 몸을 아껴 마땅히 스스로의 몸을 관하는 것도 또한 멈춤[]이 된다.

痛痒觀止者若人臂痛意不作痛反念他一切身痛如是以意不在痛爲止痛亦可念亦不可念念痛無所著自愛身當觀他人身意愛他人身當自觀身亦爲止也

 

안팎으로 통양이 거듭 나오는 이유는 무엇인가? 사람이 경계[]를 보고 사랑함에 박하고 후함이 있어서 그 뜻이 평등하지 않아 관함에 많거나 적거나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관하는 도를 두 가지로 분별하니, 마땅히 안으로는 어리석음이 있는 지를 관하고 밖으로는 자증(自證)할 것을 관해야 한다.

內外痛痒所以重出者何謂人見色愛有薄厚其意不等觀多與少異故重分別觀道當內觀有癡當外觀以自證也

 

몸과 마음의 통양(痛痒)이 각자 다르니, 춥고 더움 그리고 칼과 몽둥이의 극심한 고통을 얻는 것은 몸의 통()이 되고, 맛있는 음식과 편안한 수레에 타는 것과 좋은 옷과 몸에 편리한 모든 것은 몸의 양()이 된다. 마음의 통()은 자신을 걱정하고 다시 다른 사람과 만 가지 물건을 걱정하는 것이 바로 마음의 통이 되고, 마음이 좋아하는 바와 모든 환희를 얻는 것이 바로 마음의 양()이 된다.

身心痛痒各自異得寒熱刀杖痛極是爲身痛得美飯載車好衣身諸所便是爲身痒心痛者身自憂復憂他人及萬事是爲心痛心得所好及諸歡喜是爲心痒也

 

뜻의 상()을 관하는 것에 두 가지 인연이 있으니, 속으로 악을 끊고 도를 생각하는 것과 5()6()를 마땅히 제지하고 끊는 것이다.

意相觀者有兩因緣在內斷惡念道一者謂五樂六衰當制斷之

 

관한다는 것은, 스스로 몸을 관하는 것이니, 몸은 추()와 세()를 알지 못하므로 얻어서 마침내 깨닫는 것이 바로 뜻으로 뜻의 상을 관함이 된다. 뜻으로 뜻의 상을 관하면 숨도 또한 이 뜻이요, 세는 것도 또한 이 뜻이니, 셀 때에 숨을 관하는 것이 뜻으로 뜻의 상을 관함이 된다.

觀者自觀身身不知麤細以得乃覺是爲意意相觀意意相觀息亦是意數亦是意數時觀息爲意意相觀也

 

뜻을 관하여 멈춘다는 것은, 음탕[]한 짓을 하려고 하면 제지하여 하지 않으며, [瞋恚]을 내려고 하면 제지하여 성내지 않으며, 어리석은 짓을 하려 하면 제지하여 짓지 않으며, 탐하려고 하면 제지하여 구하지 않아서, 모든 악한 일을 일절 향하지 않음이 바로 관하여 멈춤이 된다. 또한 37품경을 알아서 항상 생각하여 여의지 않음이 멈춤이 된다.

意觀止者欲婬制不爲欲瞋恚制不怒欲癡制不作欲貪制不求諸惡事一切不向是爲觀止亦謂以知三十七品經常念不離爲止也

 

숨을 내쉬고 들이쉴 때 다[]하고 정()하여 문득 관한다는 것은, 다한다는 것은 죄가 다함을 말하고, 정은 숨이 뜻을 멈춤을 말한다.

出息入息盡定便觀者盡謂罪盡定謂息止意

 

정관(定觀)은 관하여 멈춰서 돌이켜 청정함을 말하고, 다하여 멈춤[盡止]은 내가 능히 이를 설하고 이를 깨우쳤더라도 이것을 두루 다시 하는 것이 바로 다하여 멈춤이 된다. 숨을 일으키는 곳에서 만약 보시하여 복을 지음과 일체의 선법(善法)이 이미 일어났다가 곧바로 멸하고, 다시 뜻이 삿됨을 생각하여 죄행(罪行)을 향하여 익히며, 또한 무수한 전세(前世)와 금세(今世)에 뜻이 이와 같이 서로 따르지 않고, 다른 사람도 또한 그러함을 이미 깨우쳐 알았다면, 마땅히 끊어야 하고, 이미 끊었다면 안팎의 뜻으로 뜻을 관하여 멈춤이 된다.

定觀者謂觀止還淨也盡止者謂我能說是曉是遍更是是爲盡止也所起息若布施作福一切善法已起便滅更意念耶向習罪行亦無數古世今世意不如是相隨他人亦爾已知覺當斷已斷爲內外意意觀止也

 

안팎의 법을 본받는다는 것은, 안의 법은 몸을 말하고 밖의 법은 다른 사람을 말하며, 계를 지니는 법도 있고 계를 지니지 않는 법도 있으니, 이것이 바로 안팎의 법을 본받는 것이다.

內外法法者內法謂身外法謂他人有持戒法有不持戒法是爲內外法法也

 

안의 법은, 지혜를 행하여 37품경을 여의지 않으며, 일체의 다른 일을 뜻 가운데 두지 않고, 도를 행하여 도를 얻음이 바로 안의 법이 된다. 밖의 법은, 생사를 따르고 생사를 행하면 문득 생사를 얻어 벗어나지 못하므로 일체를 마땅히 끊어야만 하니, 이미 끊었다면 이것이 바로 안팎의 법을 관하여 멈춤이 된다.

內法謂行黠不離三十七品經一切餘事意不墮中行道得道是爲內法外法謂墮生死謂生死行便得生死不脫一切當斷已斷爲內外法觀止也

 

법을 관하여 멈춘다는 것은, 일체의 사람들이 모두 자기 몸을 제 몸인 줄 알지만 자세히 헤아린다면 내 몸이 아니다. 왜냐하면, 눈이 있고 색이 있으나 눈도 또한 몸이 아니고 색도 또한 몸이 아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이미 죽으면 눈이 있어도 보이는 바가 없고, 또한 색이 있어도 응하는 바가 없으니, 몸이 이와 같다면 다만 식()이 있을 뿐이지 또한 몸은 아닌 것이다.

法觀止者一切人皆自身爲身諦挍計非我身何以故有眼有色眼亦非身色亦非身何以故人已死有眼無所見亦有色無所應身如是但有識亦非身

 

왜냐하면, 식은 형체도 없고 또한 가볍게 멈추는 곳도 없으니, 이와 같이 헤아린다면 안ㆍ이ㆍ비ㆍ설ㆍ신ㆍ의도 또한 그러하며, 이렇게 헤아림을 얻는다면 이것이 바로 법을 관하여 멈추는 것이다. 또한 악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 멈춤이 되고, 악을 생각하는 것은 멈춤이 아니니, 왜냐하면 뜻으로 행하기 때문이다.”

何以故識無有形亦無所輕止如是計眼耳鼻舌身意亦爾得是計爲法觀止亦謂不念惡爲止念惡爲不止何以故意行故也

佛說大安般守意經卷上

癸卯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彫造

1)

강승회(康僧會) : 지겸에 이어 3세기 중반부터 활동한 역경승이다. 그는 오의 손권(孫權)에 이어 손호(孫皓)에 이르기까지 수도였던 건업(建鄴, 남경)을 중심으로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육도집경구잡비유경등을 번역하였다. 이상옥,고역(古譯) 경전에 나타난 참회(懺悔)’ 용어의 번역과 정착 과정,한국선학33, 한국선학회, 2012, 168~169쪽 참조.

2)

안반(安般) : 범어 ‘anapana’를 음사한 말로 아나파나(阿那波那) 혹은 안나반나(安那般那)로 표기되던 것을 줄여 안반이라 고 한 것이다. 같은 말로 수식관(數息觀)이라고도 하는데, 수를 헤아리면서 숨을 들이쉬고 내쉬어 어지러운 마음을 가라앉히고 고요히 집중시키는 관법이다.

3)

소정(小定) : 하나의 대상에 집중해 마음이 고요한 상태에 이르는 것을 가리킨다.

4)

삼독(三毒) : 사람의 착한 마음을 해치는 세 가지 번뇌. 욕심, 성냄, 어리석음 따위를 독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

5)

사주(四走) : 마음이 사방으로 치닫는 상태를 말하는 것으로 보이나 명확하지 않다.

6)

오음(五陰) : 인간을 구성하는 다섯 가지 범주의 요소이다. 물체인 색(), 감각인 수(), 인식 작용의 상(), 의지 작용인 행(), 마음 작용의 식()을 이른다.

7)

육명(六冥) : 직역하면 여섯 가지 어둠을 뜻하나 명확하지 않다. 이전의 번역에서는 6(六道)로 번역해 두었으나 근거는 알 수 없다. 육도는, 전통적인 관점에서는, 불교에서 중생이 깨달음을 증득하지 못하고 윤회할 때 자신이 지은 업()에 따라 태어나는 세계를 6가지로 나눈 것으로, 지옥도(地獄道아귀도(餓鬼道축생도(畜生道아수라도(阿修羅道인간도(人間道천상도(天上道)를 말한다.

8)

() : 대상에 이름을 부여하고, 다양한 개념을 지어내는 의식 작용을 말한다.

9)

천병(天兵) : 황제의 군대를 의미하기도 하며 혹은 하늘이 내려 보낸 군사나 수많은 군사를 의미하기도 한다.

10)

() : 질정(質正)을 의미한다. 즉 일의 옳고 그름을 따져 바로잡는다는 뜻이다.

11)

십이배(十二輩) : 십이배는 십이천(十二天)을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십이천은 인간을 수호하는 열두 하늘이란 의미로 그곳을 지키는 열두 신(). 사방(四方), 사유(四維)의 팔천(八天)에 상, 하의 2() 및 일(), ()2()을 더한 것이다. 곧 동에 제석천(帝釋天), 동남에 화천(火天), 남에 염마천(閻魔天), 서남에 나찰천(羅刹天), 서에 수천(水天), 서북에 풍천(風天), 북에 비사문천(毘沙門天), 동북에 대자재천(大自在天), ()에 범천(梵天), ()에 지천(地天), 그리고 일천(日天), 월천(月天)을 이른다.

12)

안식왕(安息王) : 고대 이란계 왕국인 파르티아의 왕을 말한다.

13)

상이후집(翔而後集) :논어』「향당(鄕黨)새가 사람의 기색이 좋지 않은 것을 보면. 날아올라 빙빙 돌며 살펴보고 나서 내려앉는다[色斯擧矣 翔而後集는 내용에서 나온 말이다.

14)

칠정(七正) : ()ㆍ월(), ()ㆍ화()ㆍ금()ㆍ목()ㆍ토()의 오성(五星)인데, 순 임금이 이 천체의 운행을 관찰하여 길흉을 판단하여 정사를 행하였다고 한다.

15)

영축(盈縮) : 진퇴(進退)ㆍ굴신(屈伸)ㆍ다소(多少)ㆍ장단(長短)ㆍ수요(壽夭)ㆍ영허(盈虛) 등 온갖 변화하는 현상을 말한다.

16)

이의(二儀) : 양과 음, 또는 하늘과 땅을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17)

육도(六度) : 보살이 열반에 이르기 위해서 해야 할 여섯 가지의 수행을 말한다.

18)

머리를 돌려 ~ 흐를 뿐이다. :시경(詩經)』「대동(大東)주나라가 가는 길은 숫돌처럼 판판하여 그 곧기가 화살과 같도다. 군자가 밟는 길이요 소인들이 우러러보는 것이니, 내가 머리를 돌려 그 길을 돌아보며 줄줄 눈물을 흘리노라.[周道如砥 其直如矢 君子所履 小人所視 睠言顧之 潸焉出涕]”라는 내용이 있다.

19)

이 경에서는 수()라는 글자를 자주 사용하는데, 수식상수(數息相隨)의 수 자를 생략한다. 나머지 다른 모든 본()에서는 수 자를 쓴다.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