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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

원만스님 시한부 판정받다

사는건가 죽는건가?

 

원만스님이 병원에 있다. 악성급성 갑상선 미분화암(역형성암)이라는데 통증도 없이 자라나는 병이라 발견했을 때는 이미 손을 써 볼 수 없는 단계라고 한다. '이리도 허망한 것을...'

내가 스님을 문안하기 위해 병실을 들어 설 때 스님은 가쁘게 숨을 몰아 쉬고 있었다. 암이 기도를 감싸고 자라서 기도를 압박하고 있기에 호흡곤란 상태가 된 것이다. 의사는 갑상선암도 문제지만 호릅곤란을 방치하면 당장 죽을 수도 있다고 했다. 의사의 말을 들을 필요도 없이 산소호흡기를 입에 단 원만스님은 필사적으로 호흡을 시도하고 있었고 아무리 노력을 해도 산소가 부족했던지 간간히 신음을 내 질렀다. 물에 빠져서 허우적 대는 사람의 절박함과도 같았다.

 

스님에게 다가가 스님 저 왔어요라고 말을 건냈는데 누군가 말을 시키는 것도 귀찮은 듯 스님은 조용히 하라고 얼른 손가락을 입술에 갔다 대었다. 그렇게 멈칫하고 숨을 쉬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모습을 안타깝게 바라 볼 수 밖에 없었다. 불과 한 두달 전만해도 건강한 모습으로 전라도와 경상도에 있는 수많은 사찰을 누비며 만행을 다녔는데...지금 눈앞에서 서서히 고통스럽게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호흡 곤란한 상황이면 작별인사도 하기 어렵다. 숨을 쉬는 것이 어찌나 힘드신지 몸에서는 땀이 비오듯 하다. 환자복을 새 것으로 갈아 입혀도 삼십분도 안되 축축하게 젖어 버렸다. 만스님이 숨이라도 쉴 수 있도록 목에 구멍을 뚫는 수술을 하기로했다. 어제 까지는 몸에 칼을 안대겠다고 했던 원만스님은 목에 숨구명을 내겠다는 제안에 즉각 “now cut”이라며 손으로 목을 긋는 시늉을 하였다. 그런데 수술을 하는 동안에 국소마취를 하려던 계획이 전신마취로 바뀌면서 그날 오후에 하여던 수술은 다음날 아침으로 미루어 졌다. 그 사실을 모르는 원만스님은 계속 “now cut”을 외쳤다. 차마 오늘 수술을 못한다고 말해주지 못했는데 원만스님은 그날 밤 죽음보다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원만스님이 수술하는 것을 보지 못하고 나는 함양으로 가는 밤 버스에 몸을 실었다. 방금전까지 숨을 고통스럽게 할딱이는 원만스님의 모습이 생생하다. 한 인간이 이룩해 놓은 것들이, 살아온 세월이 호흡이 곤란한 상황에서는 아무런 의미도 없구나. 오로지 지금 여기서 숨을 마시고 들이 쉬는 것, 이것 밖에 다른 무엇도 필요 없구나!

 





 

가진 것이 없는 원만스님은 죽는 일보다 병원비가 걱정되었다. 몇 년전부터 종로에 얻어놓은 월세 포교당을 처리하는 일, 그리고 몇 년째 소송중인 인도의 여래선원을 정리하는 일도 남아있다. 원만스님이 원만스님의 뜻대로 서울 여래선원에 있는 책들과 불상과 부처님사리는 백장암으로 모셔올 것이고, 인도 여래선원을 정리하기 위해서 보원스님과 조만간 인도에도 다녀와야 한다. 스님이 동안거 해제때까지는 기다려 주실 것으로 믿고,,, 원만스님의 고통스런 모습과 시한부 인생이 된 상황과 남겨진 뒤처리에 대한 걱정 때문에 생각이 많다원만스님을 시봉하는 외국인 상좌 보원스님이 있기에 망정이지 상좌스님이 없었다면 더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다행히 정토마을 자재요양병원 능행스님이 원만스님을 병원으로 모셔가겠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병원비도 걱정되고 간호항 사람도 마땋치 않았는데 정말 관세음보살님을 만나듯 고마운 소식이다. 자재요양병원이 이런 위급한 상황에 놓인 스님들을 위해서 만들어진 요양원이라는 걸 새삼 느끼게 되었다.

 

내 인생의 후반기에 만난 원만스님은 참으로 좋은 분이다. 15년정도 차이가 나는 선배님이지만 나에게는 누구보다는 가까운 도반이자 친구이다. 인도성지 순례를 하면서 보드가야 여래선원에 계시던 원만스님에게 신세를 진적이 있는데 그 이후로 원만스님과 가까워졌다. 그후 인도에서 만날 기회가 많았고 스님과 여러번 성지 순례를 같이 하기도 했다. 특히 부처님과 빔비사라왕이 만난 제띠얀’, 가섭과 부처님이 옷을 바꿔 입은 실라오’ 그리고 위끄람살라 대학터를 같이 참배하였는데 그 후 스님은 인도 아이들과 성지순례할 때 마다 그 곳을 빼놓치 않았다. 한국에서는 내가 원만스님의 포교당에서 자주 신세를 졌다. 내집에 온것처럼 편안하게 대해주셨기에 다른 스님들도 편하게 들렸. 원만스님은 나 때문에 말을 많이 하게 되었고 웃는 일이 많아졌다고 자주 말했다. 나 또한  스님의 자비로운 미소와 따듯한 마음씨에 많은 위로를 받았다. 나는 원만스님을 지구에 불시착한 늙은왕자라고 놀렸다.

 



 

그렇다고 사람이 늘 웃고 지낼 수는 없는 법. 아마 나보다 원만스님을 많이 실날하게 비판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인도에서 한국불교를 포교하는 방법이 당체 납득이 안되었기에 아이들이 뜻도 모르면서 지심귀명례 삼계도사...’라는 한국식 예불문을 외우게 하는게 포교입니까? 이건 아이들을 괴롭히는 거 아닙니까?” “거짓말을 하는 아이들이 법화경을 사경할때 사리가 나온다고 좋아할 일입니까? 그런 사리는 나오는 족족 쓰레기 통에 버려야지요.” 원만스님에게 별 도움도 못 되면서 원만스님이 아이들을 대하는 태도와 오랫동안 해오던 일을 비판했다. 원만스님의 계획없음, 대책없이 사람을 잘 믿는 것, 나이를 상관 않고 돌진하는 추진력등이 나에게는 모두 비합리적인 비판꺼리로 보였다. 몇번은 원만스님과의 인연이 끝난다고 하더라도 할 수 없다는 생각으로 실날하게 비판하였다. 그때마다 원만스님은 그만 합시다라고 침묵을 지키거나 자리를 피할 뿐 그만 만납시다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고락을 함께하며 인연을 이어가다 보니 원만스님은 나에게 큰 형님 같은 분이 되어 있었다. 법당바닥에 누워서 실실 서로를 흉보고, 얼굴을 찡그리며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고, 내가 좋아하는 건시를 사다주면 같이 먹으며 농담을 나눴. 내가 조계사앞에서 직선제를 입법을 위해 피켓 시위를 할 때 원만스님은 사진에 찍할까 무서워 몰레 바카스병을 놓고 갔다. 어떤날은 길 건너편에서 나를 불러 밥을 사주더니 급기야는 천막 단식장 , 기자회견장에 나란히 서있게 되었다. 승려결의대회를 홍보한다고 전국 사찰을 찾아 현수막을 달고 사람을 만나러 가는 일도 즐겁게 같이 하였다.

 

 스님은 평소에 심장이 않좋다고 하시며 2년정도 밖에 살지 못할 거라고 농담삼아 이야기 했다.  나는 그때마다 “2년이 20년 되는거 아녀유하며 놀렸는데 이제 그 2년도 이루지 못하는 희망이 되고 말았다. 올해 지리산 백장암에 하안거 해제때 오셔서 선방스님들과 잘 어울리며 지내시더니 스님들이 좋고 도량이 편안하다며 백장암에 나머지 여생을 보냈으면 좋겠다는 말을 하셨다. 백장암에서 공부하고 싶다는 계획도 보드가야에서 인생을 마감하고 싶다는 소원도 이룰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 원만스님이 평소에 운율을 넣어 예불끝에 노래하듯 항상 3번 읊으시던 구절이 떠오른다.  "부처님~ 크신 자비원~력 고~맙습니다."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원만스님이 부처님의 크신 자비를 얼마나 존경하고 따르려고 하는지가 느껴졌었다. 지금 스님은 온 몸으로 무상의 가르침을 보여주고 계시다. 들어 마시고 내 쉬는 이 호흡, 이것 만이 있을 뿐, 아무것도 기댈게 없고 바랄게 없다는 사실을 채찍질처럼 보여주고 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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