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삘라왓투는 어디인가?
언제부터인가 네팔과 인도에 각각 까삘라왓투(Kapilavathu)가 생겨서 진짜 논쟁을 하고 있다. 어떤 학자는 인도쪽의 삐쁘라흐와(Piprāhwā)가 진짜라고하고 어떤 학자는 네팔쪽의 띨라우라콧(Tilaurakot)이야 말로 진짜라고 주장한다. 인도쪽에서 나오는 가이드북에는 네팔쪽의 까삘라왓투는 아예 언급하지 않는다. 네팔쪽에서는 불교성지가이드북이 거의 출판되지 않으니 숫적으로나 힘으로 인도쪽의 주장이 대세가 되는 추세다. 한국불자들도 인도쪽의 주장을 따르는 분들이 많다. 예나 지금이나 국력이 쎈 나라가 문화를 지배하기 때문이다.
싯타르타가 출가직후 빔비사라왕을 만났을 때 자신을 “코살라국에 속한 희말라야 자락의 주민”이라고 소개하고 있고 꼬살라국왕 빠세나디도 “부처님께서도 코살라사람이고 저도 코살라사람입니다. 부처님도 80세이시고 저도 80세입니다”라는 말하고 있듯이 정치적으로는 사까국은 코살라국에 속해 있었다. 비록 사까족의 까삘라왓투가 꼬살라국의 영향아래 있었지만 집단적인 회의구조를 통해 지도자를 뽑고 나름의 군사력을 갖춘 순수혈통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민족이었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부처님의 어머니 마먀부인이 태어난 꼴리야족의 데바다하도 사까족에 속한다. 많은 경전에는 석가족의 마을들중의 하나가 데와다하였다고 전하는데 이런 이유는 사까족과 꼴리야족이 같은 형제자매사이에서 분파된 것에서 근거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인도쪽에서 왕궁터라고 주장하는 간와리아
사까족의 시조인 오까까(甘蔗王)왕에게는 사남오녀(四男五女)의 자식이 있었다. 왕비가 죽고 새로운 젊은 왕비가 임신을 하자 왕은 그 왕비에게 어떤 소원이든 한 가지를 들어주겠다는 약속을 한다. 젊은 왕비는 아들을 낳았고 자신의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라는 한 가지 소원을 말한다. 결국 왕은 자신의 아들과 딸들에게 이 사실을 이야기하고 순종적인 그의 아들과 딸들은 왕의 약속을 지켜주려고 자진해서 왕국을 떠나 북쪽으로 갔다. 그 곳에살던 까삘라선인(仙人)이 자신의 터전을 그들에게 양보하고 그들은 그곳에 젗착하게 되면서 선인의 이름을 따서 까삘라왓투라고 하고 부르게 되었다. 사까족들은 자신들의 순수한 혈통을 보존하기 위하여 형제자매가 서로 짝을 이루어 살았다. 그들 중에 맏딸은 문둥병이 걸려서 숲속에서 왕대추나무(koli)속에서 홀로 살았는데 마침 문둥병 때문에 왕위를 물려주고 숲속에 들어와 살고있는 바라나시의 왕을 만나 동병상린의 마음으로 함께 살게 되었다. 그 둘은 왕대추나무속에서 과일을 따먹고 지내다 병이 나았다. 그 후 그곳에 마을을 만들고 살았고 사끼야족과 꼴리야족은 서로 상대방의 누이와 결혼했기 때문에 양쪽 종족은 한 핏줄이나 다름없었다. 이것은 숫도다나왕은 꼴리야족 마야와 마하빠자빠티를 왕비로 맞이하고 싯타르타도 꼴리야족 야소다라를 아내로 맞이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들은 평상시에는 누구보다도 사이좋게 어울려 살았으나 가뭄이 들어 물 부족때문에 서로사이가 좋지 않을 때는 서로의 약점을 들추며 상대방을 공격하기도 하였다. 한 때 사까족과 꼴리야족 사이에 흐르던 로히니 강물을 서로 끌어들이려는 싸움이 일어나게 되었다. 꼴라야의 농부들이 사까족 농부들에게 “개나 재칼과 같은 짐승들처럼 자기 누이동생과 결혼해 사는 녀석들아!”라고 욕을 하면 사까족 농부들은 꼴리야 농부들에게 “속이 빈 왕대추 나무속에서 짐승처럼 살았던 문둥이 자식들아!”라고 서로 상대방을 비난하며 전쟁 직전까지 갔던 것이다. 부처님은 이 상황을 천안(天眼)으로 보시고 허공으로 날라오셔서 이들의 물싸움을 중재하였다. 이에 대한 보답으로 사까족과 꼴리야족 젊은이들 이 각각 250명식 승가에 출가하였고 졸지에 지아비를 잃은 500명의 과부들은 몇 년후에 숫도다나왕이 죽고 마하빠자빠띠 고따미가 출가할 적에 함께 출가하여 최초의 비구니승단을 이루게 된다. 로히니 강을 두고 두 부족이 물싸움을 했다는 것은 까삘라왓투라는 나라가 얼마나 큰 나라였는지 알수 있는 단서를 제공한다. 지금의 까삘라왓투(띨라우라콧)에서 로히니강까지 거리는 약 50km이다. 이 50km가 이 나라의 반지름이라 볼 경우 까삘라왓투는 동서로 약 지름 100km 정도의 면적을 가진 작은 나라인 것이다.
인도쪽 삐쁘라흐와 사리탑에서 “이곳에 사까족 수끼띠와 형제들이 그의 자매,아들,아내들과 함께 불세존의 사리를 모신다.”라는 사리함에 명문이 발견됨으로 해서 삐쁘라와가 까필라왓투라는 인식이 퍼졌다. 그리고 1973년에 사리탑 동쪽승원에서는 테라코타인장이 발견되었는데 “까삘라왓투의 비구상가”라는 글이 새겨져 있어 그곳이 까삘라왓투라고 하는 확신하는 분위기다. 그러나 이것은 카삘라왓투를 특정한 장소인 점(占)으로 이해함으로서 생긴 오해다. 붓다시대에는 두 지역이 까삘라왓투라는 하나의 나라였다. 지름 100km 정도의 면적을 가진 작은 나라였기에 지금의 인도와 네팔의 까삘라왓투는 모두 하나의 나라였고 그 왕궁터는 직선거리로 16km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16km를 사이에 두고 어느 것이 진짜 공화국 까삘라왓투인가를 묻는 것이 타당하지 않다. 그것은 마치 인사동이나 청량리중에 어느 곳이 서울인가를 묻는 실수를 저지르는 것과 같다. 인사동도 청량리도 다 같이 서울이듯이 인도의 삐쁘라흐와도 네팔의 띨라우라콧도 모두 까삘라왓투다. 이러한 생각은 그 16km 사이에 인도와 네팔의 국경선이 그어졌기에 나올수 있는 의문이다. 까삘라왓투는 어디인가라는 물음부터 애초에 잘못 되었다. 어디가 까삘라왓투의 왕궁터인가?라고 물어야한다. 네팔의 까삘라왓투는 석가족의 왕궁터이고 인도의 삐쁘라와는 석가족의 사리탑터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사까족이 부처님의 사리를 가지고 왔을 때 사까족의 왕궁은 위두다바왕에 의해서 파괴되어 있는 상황이었기에 왕궁에서 떨어진 지금의 위치에 사리탑이 건립된 것이다.
왕궁터옆에 흐르는 바나강가 강
네팔의 띨라우라콧이 왕궁터라는 증거는 여럿이다. 첫째는 인도의 간와리와는 건물의 형태가 왕궁의 형태가 아닌 승원의 형태다. 사왓티의 제따와나 구조와 비슷하다. 띨라우라콧 유적의 구조가 왕궁의 형태이다. 둘째는 모든 고대도시는 강을 끼고 발달했다. 인도의 간와리아 옆에는 강이 없다. 지금처럼 펌프시설이 없는 시대에 강이 없으면 사람들이 대규모로 사는 왕궁이 들어서기 어렵다. 네팔의 왕궁터인 띨라우라콧 옆에는 바나강가(옛이름 Bhagīrathi)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다. 셋째는 왕궁터에서 북쪽으로 500m쯤에는 숫도다나왕과 마야왕비의 쌍스투파가 있고 싯타르타를 태우고 아누삐야까지 갔다가 동문앞에서 죽은 애마 깐따까를 기념하는 스투파도 남아있다.
정리하자면 두 지역은 모두 까삘라왓투라는 공화국에 속해있었고 바나강가 옆에는 왕궁이 있었고 남쪽에는 사리탑이 있었다. 이러한 이해는 이제까지 인도쪽의 발굴된 성과와도 부합한다. 두개의 까삘라왓투가 만들어진 것은 까삘라왓투를 특정한 장소인 점으로 오해하고 인도와 네팔의 국경이 생겨남으로 해서 발생했다. 특히 강대국인 인도정부가 누가봐도 사원이었음이 명백한 간와리야를 왕궁터라고 주장하는 것은 강대국의 횡포라고 보여진다. 사까족이 살았던 평야지역에는 짜뚜마(Cātumā) 코마두싸(Khomadussa) 사마가마(Sāmagāma) 데와다하(Devadaha) 실라와띠(Sīlavatī) 나가라까(Nagaraka) 메다따룸빠(Medatalumpa) 사카라(Sakkhara) 울룸빠(Ulumpa)등의 많은 마을의 이름이 전해오며 이 모든 도시들이 하나의 공화국 까삘라왓투를 이루고 있었다.
왕궁터 발굴작업
사까족의 왕궁터를 거닐면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순수혈통에 대한 자만심 때문에 멸망하게된 그들의 운명이다. 빠세나디왕이 사까족에게 공주를 달라고 한 것은 사까족을 얕보고 그런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부처님에 대한 공경심 때문이었다고 한다. ‘빠세나디왕은 부처님의 친척이다.’라는 말을 들으려고 사까족에게 공주를 요청했다. 그러나 마하나마왕은 노예여인과 자신 사이에서 얻은 와사바갓띠야라는 딸을 빠세나디에게 보냈다. 그 사이에서 위두다바(Vidudabha)가 태어났고 자신의 출생비밀을 알게된 위두다바는 온몸을 떨면서 복수를 맹세했다 “사끼야족들은 내가 앉았던 자리를 우유와 물로 씻었지만 나는 사끼야족들의 목을 쳐서 그 자리를 피로 씻겠다"
위두다바는 이렇게 사왓티에 돌아왔고, 이 사실은 빠세나디 왕에게도 전해졌다. 왕도 사끼야 족에 대해 대단히 화를 냈고, 왕비와 위두다바의 지위를 박탈하여 노예로 삼아 버렸다. 며칠이 지난 다음 왕은 저간의 사정을 모두 부처님께 사뢰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말했다.
"대왕이여, 사끼야 족이 왕에게 한 행위는 참으로 옳지 않은 것이었소. 그들이 왕에게 딸을 시집보내려면 대왕의 신분에 맞는 배필을 보냈어야 마땅했소. 그러나 대왕이여, 와사바캇띠야가 분명 마하나마 왕의 딸이기도 한 만큼 귀족의 피를 받은 여인이오. 그의 어머니 쪽이 누구였든 간에 아버지 쪽은 왕족이 아니오? 그리고 위두다바는 왕의 아들임이 분명하오. 자식들의 혈통은 아버지로부터 이어지는 것이 아니겠소? 그들의 신분을 노예로 만든 것은 재고해야 할 것이오." 이에 빠세나디 왕은 자기가 가장 존경하는 부처님의 말씀을 따라 와사바캇띠야와 위두다바의 신분을 예전대로 회복시켜 주었다.
왕이 된 위두다바는 지난날 사끼야 족에게서 당한 모욕을 상기하며 군대를 일으켜 사끼야 족을 멸망시키려고 진군해 나갔다. 부처님은 사끼야 족들이 파멸의 위기를 맞게 된 것을 아시고 사끼야 족을 보호하여야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석양 무렵에 허공을 날아 까삘라왓투 근처로 가시었다. 그때 그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군대를 주둔하고 있던 위두다바는 아주 큰 반얀나무 그늘 아래 서 있다가 부처님을 보았다. 그는 곧 가까이에 다가와 부처님께 머리를 땅에 대고 인사를 올린 뒤 여쭈었다.
"부처님, 이 더운 날씨에 왜 이렇게 그늘이 엷은 곳에 앉아 계십니까?"
부처님께서 말했다.
"대왕이여, 여래에 대해 상관하지 마시오. 내 종족의 그늘이 나를 시원하게 해주고 있소.“
위두다바는 곧 부처님의 말씀이 무엇을 뜻하는지 짐작하였다.
‘부처님께서 이곳에 계시는 것은 사끼야 족을 보호하기 위해서이다.’ 이렇게 생각한 그는 부처님께 인사를 드린 다음 군대를 이끌고 사왓티로 돌아갔다. 얼마가 지나서 위두다바 왕은 두 번째로 군대를 이끌고 진격하였다. 그런데 이번에도 부처님은 같은 장소에 앉으셔서 군대를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얼마 후에 다시 군대를 이끌고 사끼야 족을 치러 갔고, 이때에도 부처님이 이를 막아내시었다. 부처님은 이 같은 방법으로 당신의 모국을 세 번이나 지키시었으나, 네 번째로 위두다바가 군대를 이끌고 사끼야 족을 치러 가자 부처님은 사끼야 족의 업을 읽으시고 그냥 승원에 남아 계시었다.
위두다바가 사까족을 치러갈 때마다 부처님이 그늘이 없는 나무에 낮아계시다가 위두다바를 맞아 공격을 막으려 했지만 그일 만큼은 부처님도 어쩌지 못했다. 사까족은 한 번의 실수로 인해 무참히 살해되었고 멸망하였다. 핏줄과 순수혈통에 대한 자만과 집착이 불러들인 그 과보가 너무 크다. 내가 너무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 그것이 나만의 생각이라면 우리만의 생각이라면, 나를 파괴하고 우리를 멸망시키는 무가치한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이 그들이 주는 충고일 것이다.
정리하는 문제
1. 공화국 까삘라왓투의 크기는 어느정도인가?
2.부처님이 3번이나 전쟁을 일으키려는 위두다바 군대를 막아내시고 4번째에는 막지 않은 이유는 무엇이며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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