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세상에 말걸기

교회언어와 세상언어

 

 

[기고] 교회언어와 세상언어
-->
승인 2014.06.17  17:36:08
허정_천장사 주지, 전 조계종교육원 불학연구소장

세월호 안에서 구조를 기다리던 아이들이 살려달라는 아우성이 귀에 들린다. 배에서 나오지 못한 아이들, TV를 지켜보던 부모들, 친구들, 선생님들, 그리고 온 국민은 한마음으로 기도했지만 아이들은 한사람도 살아오지 못했다. 기독교계 신문인 크리스천투데이에는 세월호 참사를 본 아이들의 고백이 실렸다. “이제는 하나님을 안 믿어도 될 것 같다. 만약 하나님께서 살아계신다면 저렇게 많은 아이들이 죽지 않았을 것이다.” 기도의 응답은 없었다. 이렇게 다급하고, 애처롭고, 안타까운 기도에 응답을 하지 않는다면 신은 도대체 언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는가?

신을 믿는 사람들은 이번 세월호 참사를 보고 나름대로 변명하느라 바쁘다. 사건의 전말이 이해되지 않으면 굳이 나서서 설명을 하지 않아도 좋으련만, 전지전능한 신에 대한 믿음이 깊다보니 나서지 않을 수도 없나보다. 그중에 김삼환 목사는 “하나님이 공연히 침몰시킨 게 아니다. 나라를 침몰하려고 하다가, 학생들을 침몰시킴으로서 국민들에게 기회를 준 것이다”라고 말했다. 또한 교회 장로인 문창극 국무총리 지명자는 “우리나라가 일본의 식민지가 된 것과 남북분단이 된 것은 더 강한 나라를 만들려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했다. 이러한 망언이 보도되자 역사학계, 종교계, 정치계 등에서 많은 비판이 일었지만 전광훈 목사는 “신학적·성경적으로 대단히 합당한 발언이었다”고 옹호하였고, 이종윤 목사도 “모든 것이 하나님 뜻 안에서 이루어짐을 강조한 지극히 성경적 표현인 것”이라고 두둔하였다.

이러한 발언은 상식을 가진 일반 국민들에게는 용서할 수 없는 망언이지만 전지전능한 신을 믿는 자들은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돌리는데 일말의 거리낌이 없다. 그러므로 이것은 실수가 아니라 신을 믿는 자들의 사고패턴이라고 봐야한다. 그들이 말하는 ‘하나님’이란 전지전능한 존재이므로 당연히 이번의 세월호 사건, 일본의 쓰나미 사건 등 모든 자연적 재해와 인위적인 사건들에 관여를 했다고 본다. 그 관여가 욕망을 충족시키는 사건일 때는 은총이라 믿으며, 욕망을 배반하는 사건일 때는 시련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절망적인 일에도 “하나님의 뜻을 어찌 알 수 있으랴!”라며 하나님의 뜻으로 돌린다. 모든 것을 하나님에게 맡겨버리고 자신의 판단을 유보하는 이러한 태도는 자신이 겪는 불안과 불행을 일시에 해소시킬 수 있는 명약이 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정의와 도덕관념을 쓸모없게 만들기도 한다. 즉, 하나님의 뜻을 개인의 일에 한정한다면 무한긍정의 힘으로 나타날 수 있지만, 지진, 태풍, 가뭄, 세월호 사건, 전쟁, 남북분단 등의 온갖 자연현상과 사회문제를 하나님의 뜻으로 해석한다면 이러한 해석은 몰상식한 망언이 되는 것이다.

부처님은 현재의 사건 사고들이 모두 신의 뜻이라고 믿는 사람들을 이렇게 논박했다. “모든 것이 신의 뜻이라면 그대들이 생명을 파괴하고, 도둑질하고, 간통하고, 거짓말하고, 삿된 견해를 가지더라도 그것은 모두 신의 뜻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대들은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에 대한 구분이 없고, 해야 할 것에 대해 하려는 노력도, 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해 하지 않으려는 노력도 필요 없게 될 것이다.”

그런데 대승불교에 접어들어 누군가가 나를 데려다 준다는 타력신앙이 생겼다. 관세음보살보문품에서는 “만일 어떤 사람이 이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지극정성으로 부르면 불 속에 들어가더라도 불이 그를 태우지 못하고, 물에 떠내려가게 되더라도 곧 얕은 곳에 닿게 된다”고 말한다. 이런 놀라운 사상 때문에 관세음보살은 불자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보살이 되었다. 이번 세월호 사건을 겪으며 신에게 기도하듯 관세음보살님께 아이들을 구해달라고 기도한 분들도 많았을 것이다. 관세음보살도 응답이 없었다. 왜 자비로 똘똘 뭉친 관세음보살님도 아이들을 구해주지 않았을까? 관세음보살을 믿는 이들은 이렇게 변명할 수가 있다. “그들이 관세음보살을 일심으로 부르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그러나 이러한 변명은 설득력이 없다. 그분이 진정 한량없는 자비심을 가진 분이라면, 당신의 이름을 부르면 구제해주고, 부르지 않으면 구제해주지 않는다는 것은 괴상하다.

관세음보살은 부처님 열반 후 약 500년 후에 부처님의 자비로운 성품의 측면을 인격화한 것이다. 그래서 관세음보살은 대승경전에만 나타나고, 태어난 장소, 태어난 날, 부모형제 같은 가족관계가 나타나지 않는다. 관음신앙의 첫 단계에서 관세음보살은 중생의 어머니와 같다. 여리고 약한 중생을 보호해주고 키워주는 역할을 한다. 불교의 최종 목표가 부처되는 것이듯 관세음보살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도 점점 성숙되어 끝내는 ‘나도 관세음보살이 되자’는 것이다. “관세음보살을 일심(一心)으로 부르면”이라는 단서를 붙인 것은 관세음보살이 기적을 나투는 것이 아니라 일심이 된 내가 기적을 만들게 됨을 말한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이다’라는 교회언어든 ‘관세음보살님을 부르면 어떤 위험에서도 벗어난다’는 사찰언어든 세상언어와 소통하여야 한다. 세상속의 교회, 세상속의 사찰이기 때문이다. 문창극 후보자는 자신의 발언을 해명하며 "이것은 일반 역사인식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과 나눈 역사의 종교적 인식"이라고 해명을 했다. 한국교회연합과 한국교회언론회도 “문창극 후보자가 기독교인이라고 하여 신앙적 언어까지 끄집어내어 몰아붙이는 ‘마녀사냥’은 그쳐야 한다”고 했다. 교회에서 말한 내용이니 교회 밖의 사람들은 관여하거나 단죄하지 말라고 요구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사찰언어든 교회언어든 마땅히 세상언어와 일반상식에 맞아야 한다. 교회언어라고 선을 긋기 이전에 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하는 그대들에게 “하나님을 욕보이지 말라”고 충고하는지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그대들의 언어가 많은 사람을 아프게 하고 있다.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