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뇌하는 스님! 실첨하는 도법스님!
실상사 도법스님이 다시 한마디 하셨는데요.
문수스님 1주기 추모마당에서 조계종에서 추진하는 '5대결사 종도들 대부분 안 믿는다 '고 하셨습니다.
총무원으로 부터 시달 되는 결사가 제대로 되기 어려울 것이라는 것은 웬만한 사람들은 알고 있었습니다만 ...
'그래도 이렇게라도 추진되는 '5대결사'에도 뭔가 의미는 있지 않겠는가'라는 생각은 하게 됩니다.
그래서 관망하는 자세로 있는 것보다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을까라는 생각도 내게 됩니다.
그런데 이 기사에서 제 눈을 끄는 것은 5대결사 보다도 '언어를 잘 사용하는 것이 불교를 잘하는 것'이라고 지적하신 것입니다.
"근본적 진단이 필요하다. 불교인들의 왜곡된 이해가 너무 많다, 불교에 대한 왜곡된 의견, 수행에 대한 왜곡된 관점이 그렇다.불교하면 내면적 은둔적 정적인 것 등을 떠올린다. 깊은 산, 조용한 곳... 이건 불교가 아니다. 반불교 비불교적이다. 그건 수행도 아니다. 그런데 왜곡된 그것만이 진짜인 것처럼 신주단지 모시고 살고 있다. 불교는 역동적인 가르침이다. '지금 여기' 삶을 얘기하는 것이다. 전생이나 내생이 아니다. 죽어도 살아도 '지금 여기'를 떠난 얘기는 불교가 아니다. 박물관 골동품 불교다. 불교 수행에 대한 왜곡된 관점과 견해를 정직하게 겸손하게 투철하게 성찰 반성 다짐해야 한다.
예를 들면, 부처님 가르침으로 8정도를 얘기한다. 정어가 그 중 하나. 불교수행으로 연결시키면 언어를 잘 다루는 것이 수행이다. 언어는 선방에서 혼자 또는 심산유곡에서 하는 것이냐, 법당에 가야만하는 것이냐. 삶과 너와 나의 문제다. 언어에 대해서만 제대로 다루면 불교는 중흥한다. 그게 참다운 수행이다. 언어는 선방에서 혼자 또는 심산유곡에서 하는 것이냐, 법당에 가야만하는 것이냐. 삶과 너와 나의 문제다. 언어에 대해서만 제대로 다루면 불교는 중흥한다. 그게 참다운 수행이다. 대화를 제대로 하고 말을 잘 듣는 것, 말이 참되도록하고, 희망과 기쁨을 주도록 하는 것, 사람을 믿게 만드는 것, 매우 중요한 수행이다. 말은 '지금 여기 현장'의 문제다. 히말라야나 사후의 얘기 아니다. 말 잘 하는 것이 해탈열반이고 언어를 잘하는 것이 수행이다. 오늘날 불교를 이렇게 하는 해석하는 사람 못 봤다. 언어를 아름답게 하는 것이 답이다. 맨날 불교는, 수행은 내면적 개인적으로 하는 것으로 뇌리에 박혀있다. 불교와 수행의 문제를 심각하게 성찰 재정립하는 것이 절실한 과제다."
언젠가 도법스님께서 하신 말씀중에서 가장 기억이 나는 것은 불교도의 가장 큰 문제는 '불교도가 불교를 제대로 모르는 것이다.'라는 것이었는데....이번의 '바른 언어'는 그것과 같은 맥락이면서 더 정확한 말씀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바른 언어'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에서 한발 더 나아가 어떻게 '바른언어'가 가능하게 되는가를 우리는 고민해야 한다고 봅니다.
'바른언어'란 다른 말로 '정확한 언어' '자비로운 언어' '지혜로운 언어' '화합의 언어' '해탈로 이끄는 언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언어들이 누구에게 그리고 어떻게 가능할까요?
부처님 하신 말씀을 잘 이해하면 그 속에 답이 있을 것입니다.
역시 '불교를 제대로 알면....' 이것이 대답이라고 봅니다.
마침, 바른언어가 어떻게 가능한가에 대한 설명이 있는 경전을 발견하였습니다.
M.117 '큰 사십경'에서는 바른언어를 사용하려면 반드시 3가지가 갖추어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수행승들이여, 올바른 언어란 어떠한 것인가? 수행승들이여, 올바른 언어에 대하여 나는 두 가지가 있다고 말한다. 수행승들이여, 번뇌에 영향을 받기 때문에, 일정한 공덕이 있어도 집착의 결과가 따르는 올바른 언어가 있고, 수행승들이여, 번뇌에 영향을 받지 않기 때문에, 세상을 뛰어넘고 고귀한 길의 경지에 드는 올바른 언어가 있다.
수행승들이여, 번뇌에 영향을 받기 때문에, 일정한 공덕이 있어도 집착의 결과가 따르는 올바른 언어는 어떠한 것인가? 거짓말을 삼가는 것, 이간질을 삼가는 것, 욕지거리를 삼가는 것, 꾸며대는 말을 삼가는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이것이 번뇌에 영향을 받기 때문에, 일정한 공덕이 있어도 집착의 결과가 따르는 올바른 언어이다.
수행승들이여, 번뇌에 영향을 받지 않기 때문에, 세상을 뛰어넘고 고귀한 길의 경지에 드는 올바른 언어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고귀한 마음, 번뇌에 영향을 받지 않는 마음, 고귀한 길을 갖추고 고귀한 길을 닦은 결과로서 악한 네 가지 언어적 행위를 절제하고 제어하고 금지하고 삼가는 것이 생겨나는데, 이것들이 수행승들이여, 번뇌에 영향을 받지 않기 때문에, 세상을 뛰어넘고 고귀한 길의 경지에 드는 올바른 언어이다.
잘못된 언어를 버리고 올바른 언어를 성취하기 위해 노력하면, 그것이 올바른 정진(노력)이다. 마음챙김으로 잘못된 언어를 버리고 마음챙김으로 올바른 언어를 성취하기 위해 노력하면, 그것이 올바른 마음챙김이다. 올바른 언어에 수반되고 동반되는 이와 같은 세 가지법이 곧 올바른 견해, 올바른 정진(노력), 올바른 마음챙김이다...."
그 3가지는 바른 견해,바른 마음챙김,바른노력입니다.
경전의 설명을 보더라도 '바른언어'는 독립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실천력은 모자라고 말이 앞서는 사람을 보고 흔히 '말만 잘한다'라고 비난합니다.
그런데 부처님의 설명처럼 말만 잘 하는 사람은 '오직 말만 잘 하는 사람이 아닌 것'이 아님을 알 수가 있습니다.
먼저 바른언어를 사용하려면 바른견해를 얻어야 합니다.
언어는 '생각의 표현'이고 '견해'의 표현이고 '이해한 것'의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른 생각과 바른 견해를 얻기 위해서는 매 순간 마음챙겨야 합니다.
그렇게 순간 순간 마음을 챙겨서 잘못된 생각과 바른 생각을 정확히 알아차릴때 비로서 잘못된 생각을 버리고 바른생각을 일으키려는 노력을 하게 되고 그런 노력에 의해서 바른언어가 나오게 됩니다.
이렇게 3가지를 갖춘사람만이 '바른언어'를 사용하게 된다고 부처님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볼때 '바른언어'란 정직하게 말하는 것만으로는 매우부족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말은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이 있게됩니다. 우선 상대에게 적절한 말을 하려면 상대를 잘 알아야 합니다.
상대방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 잘 알아야 할 것입니다. 상대방이 어떤 상태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잘 들어야 합니다.
듣기는 바르게 말하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런데 듣는다는 것은 단순히 언어에 한정 할 수 없습니다.
듣기는 상대방의 말을 듣는 것에서 시작해서 얼굴 표정을 살피는 것, 몸짓, 목소리 굵기, 말의 빠르기, 옷차림,머리스타일등등을 관찰하는 것이 모두 듣기에 해당합니다. 이 모든 것이 그사람을 표현하는 몸의 언어이기 때문입니다.
잘 듣기만 해줘도 만족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약 80%가 넘는 다고 합니다.
이렇게 듣고 과정에서 지혜로운 알아차림이 필요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알아차림과 관찰이 있다고 하더라도 상대방에게 다시 어떤 삶의 방향을 제시해 주고자 할때는 다시 다른 능력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바로 바른 견해입니다.
삶의 순간 순간마다 사건은 끊임없이 일어나고 그때마다 괴로움이 생기기 때문에 괴로움이 소멸하는 근본적인 원리,방향을 알지 못하면 괴로움을 호소하는 사람들에게 적절한 상담을 해주지 못할 것입니다.
문제는 삶과 세상을 바라보는 바른 견해...
상대방의 생각이 바른 것이었는지, 언어가 바른 것이 었는지, 행동이 바른 것이었는지를 판단 할 줄 알아야 처방이 나올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것보다 바른견해는 중요하기에 8정도에서 정견이 가장 앞에 옵니다.
경전에서 왜 '정견'이 처음에 등장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수행승들이여, 왜 정견이 선행하는가?
잘못된 견해를 잘못된 견해라고 알고 올바른 견해를 올바른 견해라고 아는 그것이 올바른 견해이기 때문이다."
정견이 있어야 사견과 정견을 구분하고, 정견이 있어야 바른사유와 잘못된 사유를 구분하고, 바른언어와 잘못된 언어를 구분하게되어 바른 노력을 하게 됩니다. 바른견해와 이해가 없다면 바른언어를 사용하지 못하게 되고 깊이있는 대화를 못하게 될 것입니다.
요즈음 불교를 많이 오래 공부했다는 사람들일지라도 바른언어를 사용하며 바른대화를 하는 사람이 매우 귀합니다.
우리나라처럼 선불교의 영향아래에 있는 사람들 중에는 이야기, 대화, 토론에 부정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이 많고,
아예 대화와 토론을 거부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과는 다르게 열린마음으로 토론을 원하고 허심탄회한 대화를 하고자 하더라도 장애가 많습니다.
그 이유는 각자가 공부 해온 배경, 입장, 단어사용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나라에는 2600년동안 나타났던 거의 모든 불교가 지금 우리나라에 들어와 있습니다. 각각의 경전이 다르고 언어도 다르고 표현도 다르고 강조점도 다릅니다.
이렇게 각자가 가진 텍스트, 배경, 입장이 다르므로 가장 당연하다고 생각되는 정견, 신심, 발심, 수행, 깨달음, 열반등에 대한 정의에도 혼란스러워 하고 있습니다.
지금 다시 새삼스럽게 깨달음과 열반이 다르다는 주장도 나오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같은 불교권안에서도 어떤 이는 진아, 불성,여래장은 불교가 아니다라고 주장하고, 위빠사나의 방법으로는 구경의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는 선사님도 있고, 간화선을 깨달음의 방법으로 인정치 않는 남방스님도 있습니다. 극락은 없다는 분도 있고,오온의 색이 마음이라는 분도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말씀하신 '바른견해'를 이해하는 것이 더욱 중요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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