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다원의 깨달음과 아라한의 깨달음
깨달음이 목적인가, 열반이 목적인가
깨달음과 열반은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깨달음지상주의에 젖어 있는 한국불교의 현실을 통렬히 비판하는 논문이 불교평론에 발표 되었다. 기자겸 작가로도 잘 알려져 있는 ‘김나미’박사의 ‘깨달음과 열반의 상관관계(불교평론 2011년 봄호)’글을 보면 깨달음 대신 열반이 모든 수행의 목적이 되어야함을 강조 하고 있는데, 이는 한국불교의 깨달음지상주의가 불교의 목표인 열반을 도외시하며, 단지 열반에 이르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깨달음에 집착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류의 비판은 이미 있었다. 현재 불교신문 주필로 있는 홍사성위원의 글 ‘깨달음이 불교의 목적인가’와 호진스님의 글 ‘성지에서 쓴 편지’에서 거론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홍사성 위원과 호진스님은 깨달음과 열반에 대하여 어떻게 말을 하였을까. 먼저 호진스님의 주장을 보면 다음과 같다.
“그러나 싯다르타 제자들의 경우를 보면 ‘깨닫기 위해서’, 즉 ‘연기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수행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모두 싯다르타의 법문을 듣고 그 자리에서 모두 깨달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깨달음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습니다. 그들은 깨달음을 성취한 뒤에, 즉 연기법을 이해한 뒤에 수행을 시작했습니다.”
(호진스님, 성지에서 쓴 편지)
호진스님은 부처님의 제자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그 자리에서 깨달은 사실을 들었다. 그리고 깨달음이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음을 강조한다.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수행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여 궁극적으로 열반을 성취하였다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깨달음은 열반에 이르기 위한 하나의 과정이자 수단이며,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홍사성위원 역시 호진스님과 같은 입장의 글을 발표 하였는데, 내용은 매우 가혹할 정도로 혹독한 비판의 글이다. 다음의 글을 보면 그 정도를 알 수 있다.
이러한 깨달음은 그렇게 오랜 시간 좌선명상을 해야 깨닫는 그런 문제가 아니다. 그야말로 ‘한 생각’ 돌리면 그만인 그런 깨달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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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깨달음에 대한 지독한 환상, 깨닫기만 하면 축지법도 쓰고 은산철벽도 뚫고 나갈 것으로 믿어버리는 것이 그 대표적인 오해다. 그것은 마치 몇 년 전 종말론을 믿는 광신적 기독교인이 지구종말의 날에 공중들림(携擧)이 일어날 것이라며 난리를 치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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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화두 타파가 곧 깨달음이고, 깨달음만 얻으면 생사를 해탈하고 열반이 성취된다는 발상도 지나친 비약이다.
(홍사성위원, 깨달음이 불교의 목적인가)
불교의 목적이 깨달음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한 글이다. 깨달음을 얻기 위하여 그토록 오랜시간 수행한다 것은 본질을 망각한 것으로서, 깨달음을 위한 수행이 아니라 열반을 위한 수행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깨달음이란 꼰단냐 (Añña Kondañña)가 부처님의 법문(사성제)을 듣고 이해 하였듯이 인식의 전환에 지나지 않을 뿐 목적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불교의 목표이자 부처님의 궁극적인 가르침의 실천인 열반을 얻기 위한 수행(팔정도, 사념처등)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깨달음에도 단계가 있다
김나미박사나 호진스님, 홍사성위원 모두 깨달음이 불교의 목적이 아니라 열반이 불교의 목적이라는 것에 대하여 글을 통하여 주장하였다. 하지만 그다지 구체적이지 않다. 사성제를 통한 인식의 전환이 깨달음이라면 그 것은 어느 단계인지, 팔정도와 사념처수행등으로 수행을 하여 열반을 성취하였다면 또 그것은 어느 단계인지 불문명하다.
그런데 이런 의문점에 대하여 명쾌하게 밝혀준 글을 발견하였다. 이웃 블로거인 후박나무님은 글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호진스님은 안냐 꼰단냐(Añña Kondañña)의 안냐(Añña)가 여러 한문 경전에서 知,解,了達등으로 번역되었음을 설명하고 '이해(解)'의 뜻으로 보고 있는데 사실은 안냐(Añña) 어떻게 해석하든 간에 이 경전의 문장표현과 문맥상의 의미는 꼰단냐가 처음으로 수다원과를 얻었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꼰단냐가 얻은 법안이란 수다원으로서의 법안이고 깨달음이지 아라한의 깨달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후박나무님, 호진 스님의 <성지에서 쓴 편지>를 읽고)
후박나무님은 안냐 꼰단냐가 부처님의 초전법륜경을 듣고 깨달음을 얻은 것에 대하여 ‘수다원과’를 얻은 것이라 말하고 있다. 따라서 깨달았다고 해서 모두 아라한과를 얻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초기경전에서도 볼 수 있는 것이라 한다. 그러한 예를 초기경전에서 찾아 보았다.
먼저 수다원과의 증득에 대한 경전상의 문구는 다음과 같다.
이러한 가르침을 듣고 꼰단냐 비구는 띠끌 없는 진리의 눈이 열렸다. ‘무엇이든지 생긴 것은 모두 소멸한다.’는 진리를 깨달았다.
(상윳따니까야 :56 삿짜상윳따11, 율장 마하왁가 1편, 일아스님의 ‘한권으로 읽는 빠알리 경전’에서)
부처님이 과거 자신과 함께 수행하였던 다섯 수행자에게 자신의 깨달음을 들려 주었을 때, 가장 먼저 꼰단냐가 지혜의 눈이 열려 깨닫게 되었는데, 이를 수다원과를 증득하는 것으로 본다. 그리고 꼰단냐 비구가 깨달은 것은 사성제이지만 이를 한 구절로 축약한 것이 ‘무엇이든지 생긴 것은 소멸한다’인데, 이 문구에 대하여 후박나무님은 ‘수도원과의 오도송’이라 불렀다. 그렇다면 아라한과의 오도송은 없을까. 이에 대하여 후박나무님은 아라한과의 오도송이 다음과 같은 게송이라 하였다.
태어남은 부서지고
청정한 삶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해 마쳤고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
(상윳따니까야 :22 삿짜상윳따59, 율장 마하왁가 1편, 일아스님의 ‘한권으로 읽는 빠알리 경전’에서)
사진 http://www.travexnet.com/festivals/thailand_festivals.html
탐진치가 소멸되어 청정한 삶이 성취 되었을 때 더 이상 지은 업이 남아 있지 않아 다음 생이 시작 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윤회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 하는 것이다. 이것을 아라한의 깨달음으로 보는 것이다. 이런 면으로 보았을때 깨달음도 ‘단계’가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수다원의 깨달음, 사다함의 깨달음, 아나함의 깨달음, 아라한의 깨달음이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단계적 깨달음에 대하여 10가지 족쇄로 설명한다. 10가지 족쇄에서 아라한의 깨달음은 탐진치가 소멸되었음을 의미하는데, 이는 감각적 욕망(kāma-rāga, sensuous craving 탐심)과 적의(paṭigha, ill-will. 진심)의 거친마음의 족쇄(오상분결)는 아나함이 되면 모두 소멸되지만, 아직까지 남아 있는 것은 색계에 대한 집착, 무색계에 대한 집착, 자만, 들뜸, 무명과 같이 다섯가지 미세한 마음의 족쇄(오상분결)이다. 그러나 아라한이 되면 미세한 마음의 족쇄는 모두 소멸되는데, 그 중 무명(avijjā, ignorance)이 풀림으로서 탐진치는 소멸되는 것으로 본다. 따라서 불교적 깨달음의 완성은 아라한이 되어야만 완성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아라한의 깨달음이 탐진치의 소멸이라면 앞서 김나미박사, 호진스님, 홍사성위원 세 분이 언급한 ‘깨달음은 수단이고 열반이 목적’이라는 말은 성립할 수 없다. 하지만 그런 깨달음이 ‘수다원과’를 의미한다면 이야기 될 수 있다고 후박나무님은 말한다.
수다원의 깨달음
후박나무님의 주장에 따르면 수다원의 깨달음과 아라한의 깨달음은 다른 것이다. 수다원의 깨달음이 열반을 목적으로한 수행의 시작이라면, 아라한의 깨달음은 완성이고 곧 열반을 말한다. 이는 초기경전에서도 발견 할 수 있다.
마침내 나머지 마하나마 비구와 앗사지 비구도 ‘무엇이든지 생겨난 것은 소멸하게 마련이다.’라는 띠끌 없는 담마의 통찰력이 생겼다. 이들은 가르침을 보았고, 가르침을 얻었고, 가르침을 알았고, 가르침에 몰입하였고, 모든 의심이 사라지고, 스승의 가르침 속에서 온전한 만족을 얻었다.
이들은 부처님께 청하였다.
“저희는 부처님께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기를 원합니다.”
“오너라, 비구여, 가르침은 잘 설해져 있다. 괴로움의 소멸을 위하여 청정한 수행을 하여라.”
그래서 이것이 이들의 구족계가 되었다.
(율장 마하왁가 1편, 일아스님의 ‘한권으로 읽는 빠알리 경전’에서)
다섯수행자가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지혜의 눈이 열려 부처님으로 부터 정식으로 부처님의 제자가 되는 ‘구족계(具足戒, upasampada)’를 받는 소박한 장면이다.
여기에서 ‘무엇이든지 생겨난 것은 소멸하게 마련이다.’라는 사성제의 가르침을 듣고 탐진치가 소멸되어 아라한이 된 것이 아니라 의심등이 사라진 것으로 보아 ‘수다원과’를 증득 하였음에 틀림없다.
그렇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해 하였을 때 본격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제자로 받아 주었는데, 이것이 불교역사상 최초로 교단이 성립된 것으로 본다.
아라한의 깨달음
수다원의 깨달음으로 인하여 다섯수행자는 비구가 되었는데, 깨달음을 얻은 후에 본격적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접하고 그대로 실천수행하게 된다. 부처님은 이들 다섯비구들에게 자신이 깨달은 무아와 무상, 괴로움등 가르침을 설해 주는데, 이런 법문을 듣고 아라한의 깨달음을 얻는 장면이 초기경전에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다.
“그러므로 육신은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 라고 바른 통찰력으로 보아야 한다. 육신과 마찬가지로 느낌이 어떤 것이든, 지각이, 형성, 의식이 어떤 것이든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 라고 바른 지혜로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보고 가르침을 잘 습득한 훌륭한 제자들은 몸에 도 집착하지 않고, 느낌에도 집착하지 않고, 지각에도 형성에도, 의식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이렇게 집착을 떠났을 때 욕망에서 벗어나 해탈한다. 해탈하면 ‘나는 해탈하였다.’ 고 알게 된다. ‘태어남은 부서지고 청정한 삶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해 마쳤고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 고 알게 된다.”
이것이 부처님이 말씀하신 것이다. 다섯 명의 비구들은 부처님의 말씀에 기뻐하였다. 부처님의 말씀을 듣는 동안 다섯 명의 비구들은 집착에서 벗어나 번뇌로부터 해탈하였다.
그때 이 세상에서 아라한은 여섯 명이 되었다.
(상윳따 니까야: 22 칸다 상윳따 59, 율장 마하왁가 1편 6:38-47)
다섯비구가 부처님의 무아, 무상의 가르침에 따라 모든 욕망에서 벗어나 해탈하는 과정이 실려 있는데, 경전에서는 부처님의 말씀을 듣는 동안 집착과 번뇌에서 벗어나 해탈하였다고 표현 하였다. 이는 다섯비구가 수행을 계속 해오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초발심자가 아라한의 깨달으려면 수행과정을 필수적으로 거쳐야 할 것이다. 이렇게 아라한의 깨달음으로 인하여 이 세상에서 아라한이 여섯명이 되었다고 경전에 기록되어 있다.
다섯수행자처럼 수행을 해 오던 사람이나 근기가 있는 사람이라면 부처님의 사성제를 듣고 ‘무엇이든지 생겨난 것은 소멸하게 마련이다.’라는 오도송과 함께 수다원의 깨달음을 얻고, 부처님의 무아와 무상의 가르침을 듣고 ‘태어남은 부서지고 청정한 삶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해 마쳤고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라는 오도송과 함께 아라한의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을 처음 접하는 불자들은 가장 먼저 사성제의 가르침을 이해 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하여 인식의 전환을 이루는 것이 수다원의 깨달음으로 볼 수 있는데, 그런 깨달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다. 아라한의 깨달음에 이르기위한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견성성불’식 깨달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탐진치를 소멸해 가는 과정이 없이 오로지 ‘견성성불’식 깨달음을 불교의 목적으로 둔다면, 수행중에 ‘빛’을 보고 다음과 같이 생각하는 것과 다름이 없을 것이다.
“이전에 나에게 이와 같은 광명이 일어난 적이 없다. 확실히 나는 도에 이르렀고, 과에 이르렀다”
(청정도론, 제20장 도와 도아님에 대한 청정)
이런 현상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수행과정에서 나타나는 하나의 현상으로 본다. 광명, 희열, 경안, 결심, 분발, 행복, 지혜, 확립, 평온, 욕구등 10가지 현상은 도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도가 아닌 것들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수행중에 빛을 보았을 때 “아, 이제 내가 깨달았구나”라고 생각하면, 그 광명을 ‘즐기는’ 것으로서 현상을 제대로 보지 못하여 깨달은 것으로 착각하는 것이다. 그 들뜬에 마음이 붙들려 그들이 일어남을 무상하다고, 괴로움이라고, 무아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하여 발생하는 것으로 본다.
빛을 본다는 것은 수행의 시작 단계에 불과한 ‘현상을 바르게 아는 지혜(sammāsana ñāna, 16단계 지혜중의 3단계)’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다 깨달은 것인양 생각하는 한국불교의 현실처럼 보인다.
이는 bbs불교방송에서 음악프로인 ‘마음으로 듣는 음악’에서 “불성의 밝고 투명한 빛 속에 녹아 들게 하소서” 라든가 “당신과 내안의 신성한 빛, 거룩한 불성 앞에 경배 올립니다” 와 같은 멘트에서도 확인 할 수 있다. 방송 멘트에서 키워드는 ‘빛’이다. 빛을 보는 것이 마치 깨달은 것처럼 보이는 것은 어느 법우님이 올려준 다음과 같은 댓글에서도 알 수 있다.
간화선의 화두 타파는 전생에 상당한 선근이 있어야 됩니다. 선근이 없으면 화두일념이 안되고 의단이 생길 수 없어 화두 타파가 안됩니다.
화두 타파할 때에는 모든 경계가 뒤집어져 버려서 공(空)과 더불어 모든 경계가 없어집니다. 이것이 견성의 특징입니다.
그러면서 오직 빛만이 쏟아져 대단히 평화와 안온과 행복감을 느낍니다. 정말로 희유하고 바람직합니다. 누구나 화두 타파한 분은 그럽습니다. 그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경계가 한식경을 지나가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한두 달 그 감(영상)은 남아 있습니다. 다시 그 경계를 보려면 또 죽어라고 해야 됩니다.
(어느 법우님의 댓글에서)
견성의 특징이 빛을 본다는 것이다. 그 빛을 보면 평화, 행복, 안온을 느낀다고 한다. 이는 도처럼 보이는 도가 아닌 것 10가지 중의 몇개와 일치하고 있다.
광명, 희열, 경안, 결심, 분발, 행복, 지혜, 확립, 평온,욕구와 같은 경계는 선사들이 말하는 경계와 일치하기도 한다. 이는 불교 tv에서 한자경 교수가 스님들이 참선하는 이득에 대하여 말하는 것에서도 확인 하였다. 심산유곡에서 세상과 인연을 끊고 수행하는 스님들이 그토록 오랫동안 앉아 있는 이유는 바로 선정삼매의 즐거움때문도 있다고 한다.
이런 선정삼매의 이득은 실제로 어느 스님으로 부터도 들었다. 선정삼매에 들면 세속의 즐거움은 비교할 것이 못된다는 것이다. 그런 즐거움이 바로 경전상에 나오는 희열(2선), 행복(3선), 평온(4선)등인데 이는 네가지 선정이다.
그런데 네 가지 선정의 키워드를 보면, 초선일 경우 ‘범천(brahma, 梵)’인데 이는 대범천(大梵天, mahā-brahma)등이고, 2선일 경우 ‘광명(abha, 光)’인데 이는 광음천(光音天, ābhassarā)등이고, 3선일 경우 ‘깨끗함(subha, 淨)’인데 이는 변정천(遍淨天, subhakiṇhā)등이고, 4선일 경우 ‘큰 과보(vehpphala)’인데 이는 색구경천(色究境天, akaniṭṭhā)등이다.
만일 ‘빛’을 보고 ‘희열(喜)’과 ‘행복(樂)’과 ‘평온(定)’을 맛보았다면 색계 2선정에 있어서 ‘희락정(喜樂定) 삼매경지’로서, 이는 광음천(光音天, ābhassarā), 무량광천(無量光天, appamāṇāsubhā), 소광천(少光天, parittāsubhā)중의 하나에 해당될 것이다.
수다원과에도 미치지 못하는
초기불교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열반이 불교의 최종목적임은 분명하다. 따라서 깨달음이 결코 불교의 목적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깨달은자는 수행을 통하여 탐진치를 소멸 시켜 열반을 성취하는 것이 불교의 진정한 목표이자 부처님의 궁극적인 가르침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깨달음도 단계가 있다는 것이다.
“무엇이든지 생겨난 것은 소멸하게 마련이다.”라고 이해하는 수다원의 깨달음이 있는가 하면, “태어남은 부서지고 청정한 삶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해 마쳤고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라고 선언하는 아라한의 깨달음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막연하게 “깨달음은 수단이고 열반이 목적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깨달음의 단계를 염두에 두지 않고 말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그래서 “깨달음은 수단이고 열반이 목적이다”라는 말은 수다원과의 깨달음에서나 사용하기에 적합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초기불교에서 갈라져 나온 대승불교 전통에서는, 특히 선종에서는 깨달음이 최우선이다. 그런 깨달음을 견성성불이라 하는데, 이는 누구한테나 있는 자신 안의 불성을 깨달아서 부처가 되는 것을 말한다. 그런 방법중의 하나가 간화선일 것이다.
이는 의식을 화장하여 자신의 경계를 허물고 근원의 마음과 하나되는 경지를 말한다. 이 때 빛, 행복, 평온등을 맛 본다고 하는데,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인 ‘무엇이든지 생겨난 것은 소멸하게 마련이다.’라는 사성제와 연기의 가르침에 어긋난다.
그런 면으로 본다면 선사들의 견성성불식의 깨달음은 초기불교적 입장에서 보았을 때 수다원과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2011-04-25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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