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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말걸기

[스크랩] 천장사

칠흑같은 어두움이다.

불빛 하나없는 급경사길을  휴대용 손전등 하나로 길을 비추며 올랐다.

어둠에 쌓인 사위는 적막과 적요의 공간이고, 적멸의 공간이었다.

벌써 30분째 오르고 있지만 산속의 어둠은 대처의 어둠보다 더 깊고 더 길었다.  

쉽게 물러나지 않으려는 어둠과 대치하는라 바람이 숨죽이고 새가 눈치를 보는 신새벽의 산사길은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는 미명의 길이였다.

한줄기 바람이 불어오자 떨어진 나뭇잎이 우르르 몰려다닌다.

문득, 절에 가고싶은 생각에 무작정 나온 길이였고, 예고없이 찾아온 낮선 방문객을 천장암은 그렇게 팽팽한 어둠의 긴장속에서 맞이하고 있었다. 

초겨울의 산사길은 6시가 넘어가고 있는데도  어둠이 가득했다.

오랫만에 맛보는 어둠속의 산책이었다.

비록 30분, 40분 동안의 어둠속의 길이였지만 그 짧은 시간속에서 나는 내자신속에 있는 수많은 생각과 번뇌를 보았다.

그 번뇌속에는 나의 모습이 있었고, 나와 인연이 있는것들의 모습이 있었고, 인연이 닿은 사람들의 모습들이 있었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 한평생을 살면서 인연이 되어 관계되어지는 것들에서 생기는 일들이 수없이 많다.

물론 본인 자신의 문제도 있지만 경제적인 문제를 비롯하여 가정 문제, 자식들과의 문제, 이웃들과의 문제, 직장에서의 문제 등 실로 수 많은 문제들과 부딫히며 얼키고 설키며 살아가고 있는것이다.  

그 문제들을 고민하고 해결하며 살아가는 동안 우리 중생들은 그렇게 세월속에 뭍히고 잊혀지며 소멸하는지도 모를일이였다.  

    

얼마나 올랐을까 드디어 저만치서 희미한 불빛이 보이기 시작하자 어둠과 대치하는라 팽팽히 긴장했던 내마음도 깊은 심호흡으로 긴장의 끈을 풀어놓고 있었다.

이윽고 어둠과 구름이 가득한 하늘을 쳐다보며 절로 가는 마지막 오솔길로 접어드니 절 근처에서 부는 바람속에선 온기가 느껴지고 사람냄새가 풍겨났다. 

공양간을 지나 인법당으로 올라 법당쪽을 보며 합장을 하고 허리를 펴는 순간 문을 열고 나오는 스님과 마주졌다.

스님은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합장을 했다. 나도 얼른 스님을 따라 합장을 했다.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깊디 깊은 산중에 있는 이곳을 새벽 일찍이 온 나를 보고는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 어서오세요. 어디서 오셨어요?』 『 인천에서 왔습니다』

『 아, 그러세요?  아직 아침공양 전이시지요?』 『 예』

마침 지금 아침 공양중이니까 밑에 내려가셔서 공양하시고 몸도 좀 녹이고 오세요』

『 고맙습니다』

스님과 인사를 마치고 공양을 하러가다 어둠속의 절 풍경과 모습들을 놓힐것 같아 멀지감치 떨어져서 둘러보았다. 

어둠에 쌓인 절 모습은 천장암(天藏庵)이란 이름대로 그야말로「하늘이 감춘 곳」바로 그런곳이었다.

아늑하고 편안한 모습이었다.

불쑥 공양간문을 열고 들어서자 공양주 보살도 낯선사람에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 스님이 공양 먼저 하고 오라고해서......왔습니다. 』

『아.., 예, 어서오세요. 근데 찬이 없어서.... 』

『 괞찮습니다』

이렇게 이른 아침부터 이곳에 온 사람은 필시 무슨 사연이라도 있어서 온것 같았는지 공양을 준비하는 공양주보살은 궁굼해 못살겠다는 듯이 나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하지만  “그냥 절에 오는것이 좋아서 왔다” 고 하자 이내 나에 대한 궁굼증을 접으며 『 찬은 없지만 맛있게 드세요 』하며 상을 내밀며 나간다.공양을 마치고 올라오자 아까 만났던 스님이 법당쪽으로 안내하며

『 아직 이르니까 법당에 가셔서 관세음보살님께 예도 드리고 참선도 하면서 구경하고 계세요. 주지스님이 새벽예불을 드리고 지금 쉬시는 중이라 조금있다 만나시구요. 인천에서 오셨다고 그러셨죠? 』

『  예. 알겠습니다 』

법당에 들어가 우선 관세음보살님께 삼배로 예를 드린 다음 천천히 법당안을 둘러보았다.

가운데로 관세음보살이 계셨고 우측벽에는 경허스님의 영정이 그리고 좌측벽에는 만공스님의 영정이 걸려있었으며 좌측 한칸 건너에는 지장보살과 불전들이 계셨다. 꾸밈이 없는 소박한 절이엇다.

법당에 앉아있는게 이상하게도 그 옛날 시골의 안방에 앉아있는 느낌이 들었다.

이윽고 마음이 편안해지자 조용히 앉아 관세음보살을 올려다 보았다.

그런데 순간 관세음보살이 그렇게 준수하고 이뻐 보일수가 없었다. 그래 자꾸 쳐다보았다.

그러나 몇번을 쳐다봐도 볼수록 이뻣다. 이상한 일이였다.

법당안에는 아무도 없어 나는 이내 관세음보살님에게 바짝 다가가 눈을 맟쳐보았다.

그러나 그래도 역시 준수하고 이뻣다.  

아무도 없는 법당에서 관세음보살님과 한참동안 그렇게 놀고난 후 가부좌를 틀고 참선에 들었다.

이 새벽에 내가 왜 여기 와 있지? 

밖은 서서히 어둠의 두께가 엷어지고 있지만 아직도 어둠속에 있었다.

어렴푸시 창문이 훤해지는 느낌이 들어 밖으로 나와보니 날이 밝고 있었다.

산은 겨울색이 완연해 쓸쓸하고 황량한 느낌마져 들었지만 조그마하고 아담한 절은 새둥지처럼 둥구런 연암산속에 파묻혀 있는 형상이어서 포근하게 느껴졌다.

 

천장암(天藏庵)!

선불교의 중흥조 경허스님이 주재하시던 곳이고 그 유명한 경허스님의 제자인 세개의 달

즉, 수월, 혜월, 월면 만공스님들이 출가한 곳으로 유명한 절이다.

우리나라 선불교는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 국시로 채택한 숭유억불정책과 성리학의 영향으로 유림들의 상소와 탄압 그리고 고려후기에 나타나기 시작한 불교폐단에 대한 자체적인 정화 노력이 부족하여 중기까지는 근근히 서민들 위주로 명맥을 유지하여 왔지만 후기로 들어서면서 신분제도의 붕괴와 산업구조의 전반적인 발달로 선불교의 존재가 거의 아사직전까지 가는 쇠퇴일로를 걷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경허스님이 나타나 선불교의 중흥을 일으키게 된다.

경허스님은 9세 때 과천 청계산에 있는 청계사에서 계허(桂虛)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승려생활을 시작하며 글을 배우게 된다. 박처사(朴處士)로부터 글을 배우는데 하나를 일러주면 열을 알정도로 영민하고 똑똑한 아이여서14세 때쯤엔 그 근방에서 재동으로 칭송이 자자하여 바로 은사가 계룡산 동학사로 추천하여 그곳에서 불교경전은 물론 유교경전과 노장까지 두루 섭렵하였다.

그렇게 열심히 공부한 결과 23세 때부터는 동학사 강원 강사로 크게 이름을 떨치다가 31세때 여름에 은사 계허스님을 찾아 뵈러 가던 중 천안 부근에서 폭풍우를 만나 민가에 머물러 피하려 했으나 마침 근방에 악성 콜레라가 만연되어 도처에 시신이 널려 있는 참혹한 현장을 보고는 비로소 생사의 절박함을 깨닫고 대발심하여 가던길을 돌려 동학사로 돌아와 학인들을 해산하고 강원을 철폐한 다음 영운선사 (靈雲禪師)의 려사미거 마사도래(驢事未去 馬事到來 : 나귀의 일이 가지 않았는데 말의 일이 닥쳐 왔다)라는 화두를 들고 용맹정진하던 중 한 사미승이 전하는 “소가 되어도 고삐 뚫을 구멍이 없다”는 말에 활연대오하여 깨달음을 얻게 된다.

이후 이곳 연암산 천장사 (天藏寺)로 옮겨 보림을 하여 33세에 주장자를 꺾어 던지며 오도송(悟道頌)을 읋었다.   

문득 콧구멍 없다는 소리에

삼천대천세계가 내 집임을 깨달았네

유월 연암산 아랫길에

일없는 들사람 태평가를 부르네. - 경허선사의 오도송

이로부터 경허스님은 20여년간 전국을 돌아다니며 선원을 개설하고 납자를 제접하면서 선풍을 날려 선을 중흥시켰다.

56세 때 천장암으로 돌아온 경허는 만공에게 전법송(傳法頌)으로 후래불법(後來佛法)을 부촉하고는 홀연히 함경도와 만주지방을 떠돌아다니며 비승비속차림으로 인연따라 중생을 제도하다 함경도 갑산에서 마지막으로 붓에 먹을 듬뿍 묻혀 일원상(一圓相)을 그리며 열반송을 읋고는 홀연히 입적하시니 세수는 64세요 법랍(法臘)은 56세였다.
心月孤圓  마음만 홀로 둥글어
光呑萬像  그 빛 만상을 삼켰어라
光境俱忘  빛과 경계 다 공한데
復是何物  다시 이 무슨 물건이리오. - 경허선사의 열반송

뒤늦게 입적소식을 들은 제자 만공(滿空)과 혜월(慧月)스님이 갑산에 가서 법구(法軀)를 모셔다 다비(茶毘)하여 모셨다 한다.  

염궁선원문이 빼꼼히 열리고 스님 대여섯분들이 나오시더니 스트레칭을 하신다.

마침 지금은 스님들이 동안거 결재중이였다.

스님들이 발심을 가지고 치열하게 결제중일 때는 온 신경이 화두를 잡고 있느라 몸을 돌볼겨를이 없어 몸의 생체 바란스를 잃을수 있어 잘못하면 오히려 화두가 아니라 병을 얻는경우가 있다고 한다.

그래서 스님들끼리 시간을 정하여 몸에 스트레칭을 하며 긴장을 풀어주고 잠시나마 휴식을 취하는 것이다. 

그러고보니 아까 아침 공양중에 공양주보살이 현재 안거중인 스님들의 신심의 기(氣)가 하늘을 찌를껏 같아 바라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다고 한 말이 생각났다.  

                                                                                                                          ▲ 염궁문 - 경허선사의 친필

『 처사님, 이리오세요. 주지스님 뵈러가죠?』 아까 그 스님이였다.

그리곤 주지스님이 거처하는 곳으로 데려가더니 『 이분이 아까 말씀드린 인천에서 오신 처사님입니다 』

『 아~ 그러세요. 어서들어오세요. 아침 일찍 오셨다구요 ?』『 예. 4시에 인천에서 출발했습니다 』

『 예~, 그러시구나. 여긴 처음이신가요?』『 예』

『 여긴 어떻게 알고 오셨어요?』

『 그냥, 뭐 특별한 이유는 없구요. 예전부터 절에 가면 그냥 마음이 편하고 좋아서 간간히 불교와 절에 관련된 책을 읽어 왔는데 문뜩 절에 가고싶다는 생각이 들어 비록 절의 규모는 작지만 근, 현대 우리나라 선불교의 중흥조이신 그 유명한 경허스님이 계시던곳이라고 하여 무작정 오게 됐습니다 』

『 귀한 손님이 오셨네요. 이게 "보이차" 거든요. 나름대로 귀한 손님이 오셨을때만 내놓는 찹니다. 』

그렇게 시작된 주지스님과의 다담(茶談)은 열잔이 넘게 차를 마시는 동안 계속되었고 주로 내가 주변의 힘들고 어려운 문제들을 이야기 하면 스님은 최선을 다해 공감대를 형성해가며 비록 완벽하진 않지만 문제들을 풀어가는 방법들을 이야기 해주셨다. 

한시간 반동안 계속된 스님과의 다담(茶談)으로 스님이 마치 십년지기가 넘는 친구처럼 느껴졌고, 그리고 스님과의 다담이 무엇보다도 좋았던것은 비록 해결책은 없더라도 속시원하게 마음을 털어놓고 이야기 할수 있었던것이 속을 후련하게 했다. 

스님 말씀중에 기억나는 것은  배려하고, 베푸십시요 그 공덕이 다 처사님에게 돌아올겁니다.  

 

선하게 생기신 주지스님은 다담(茶談)이 끝날때쯤 일어나시더니 『 제가 선물을 하나드릴게요 』하며 다락문을 열더니 책을 한권 가지고와 내앞에 내밀었다. 그리고 옆에 있는 묵주도 주시며 『 법당옆에 가면 경허스님이 득도를 하신 두평 남짓한 원구문이라는 방이 있는데 그곳에 가서 참선도 하시고 인법당도 둘러보시구요,그리고 한 5분정도 산을 오르시면 제비바위가 있는데 그곳도 경허스님이 수행하시던 곳이니 두루두루 둘러보시고 점심공양 하시고 내려가세요 』

주지스님의 법명을 물어볼수가 없어 책을 슬며시 내밀자 친히 법명으로 싸인까지 해 주셨다. 

禪一스님이셨다.

다담이 끝난 후 주지스님께서는 주법당인 인법당을 비롯하여 경허스님이 1년여의 장좌불와하며 용맹정진하여 깨달음을 얻었다는 2평 남짓한 조그만방인  "원구문(圓求門)" 조왕신을 모신 옛날식 부엌등등을 일일히 함께하시며 설명을 해주셨다.

특히 경허스님의 발자취가 남아 있는 곳이면 행여나 빠뜨릴까봐 빠지지 않고 설명해 주셨다.

이윽고 주지스님과 헤어진 후 경허스님께서 깨달음을 얻었다는 " 圓求門"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방은 발뻣고 누우면 꼭 맞을 정도의 크기였고 전면에 경허스님의 영정이 걸려있고 초가 놓여있는 작은 탁자하나와 5cmx5cm정도크기의 시계가 방 살림의 전부였다.

눈을 감았다. 적요하다.

소리가 없으니 귀가 뻥 뚤리는 느낌이 든다.

세속에서의 속진이 빠져나가는 느낌이 든다.

사랑도, 미움도, 서운함도 부질없는 것인데

너무 많은것을 붙잡고 집착하고 있는건 아닌지..................................................!

한줄기 바람이 스치며

마당을 쓸고가는 소리가 들린다.

그리곤 이내 다시 적요하다. 적막강산이다.

633년 백제 무왕때 담화스님이 창건햇다는 절집.

비록 문화재 한점없고 고작 인법당과 산신각 염궁선원이 전부인 작은 절집이지만 어찌 당우가 많고 문화재가 많아야지만 절의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닐것이다.

힘들고 지친사람이 와서 잠시마음을 내려놓고 쉬다가면 족하고,

절이 좋아 절을 찾는사람들이 가끔씩 들러 놀다갈수 있으면 그것으로 귀한 문화재 못지않은 존재가치가 있지 않은가.............!  

원구문을 나올때즘 작은 시계의 시침은 9시가 다 돼가고 있었다.

여전히 사람한명 보이지 않는다.

동안거 결재중인 스님들에게 방해가 될까봐 조심스럽게 경내 산책을 했다.

연암산에 아늑하게 쌓인 모습이 한폭의 그림으로 보였다.

하늘을 보니 "하늘이 감춘 곳" 이란 말이 실감이 난다.

산신각에서 예를 드리고는 내려오는길에 탱자나무가 보인다.

고염나무엔 고염이 곳감처럼되어 산새들의 먹이가 되어가고 있었다.

산책로를 따라 산을 올랐다.

경허스님이 앉아서 휴식을 취하던 곳엔 벤치가 놓여있었고 제비바위는 부리처럼 앞쪽으로 뽀족하게 나와 있었다.

서산시내가 한눈에 들어왔다. 

 

이제는 떠나야 할 시간이다. 

경내가 다보이는 먼발치에 서서 합장으로 스님들에게 고마움의 인사를 드리고 발길을 돌렸다. 

어둠속에 올라왔던 길이 정겹다

 

어치피 인생은 회자정리(會者定離) 아닌가 !

울림이 컷던만큼 떠남의 아쉬움도 컷다. 다시한번 합장으로 아쉬움을 달래며 발걸음을 돌렸다.  

 

 

 

 

출처 : 산사를 찾는사람들
글쓴이 : 바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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