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만 할 뿐이다 _ 마산 정토회 유애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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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15 | 2821 |
인터뷰, 글_ 정현정
576차 깨달음의 장.
준비된 과일과 케잌을 나눠 먹는 자리였다. 돕는이로 깨달음의 장에 참가했던 유애경 보살은 케잌 상자 아래에 묻은 지꺼기를 혀로 핥는다 하여도 더이상 깨끗하게 먹을 수 없을 정도로 박박 긁어 먹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보고 수련생 중 한명이 말했다. “아까요, 설거지 할 때 돕는이님 보고 깜짝 놀랐어요. 설거지 마치고 나니까 밥알 두알이 나왔는데요, 그걸 돕는이님께서 손으로 집어 드시는 거예요.” 감탄하는 수련생들을 향해 그녀가 말했다. “저도 원래 많이 남기는 사람, 남긴 음식은 그냥 버리는 그런 사람이었어요. 화도 잘 내고, 불만도 많았고... 지금은 정말 많이 변한 거예요”
_무엇이 그녀를 이렇게 변하게 하였을까?
95년을 그녀는 잊을 수 없다. 같은 아파트의 이웃에게 받은 잡지, 월간 정토. 그 안에 실려있던 법륜 스님의 글이 그녀의 마음에 와 닿았다.
“법륜 스님이 인도에 처음 갔을 때 이야기가 거기 적혀있었어요. 캘거타의 골목에서 아이를 안고 구걸했던 어느 여인을 만난 이야기인데요, 그 여인이 아이를 가리키며 배가 고프니 먹을 것을 달라고 했대요. 여인을 따라 구멍가게에 들어갔더니 분유통을 가리키더래요. 가격을 물으니 60루피였다는데 그때 스님께서는 구걸하는 사람에게 1루피 이상 주지 말라고 사전교육을 받아서 60루피가 큰돈인 줄 알고 도망을 쳤는데 알고보니 우리나라 돈으로 겨우 2400원이더래요. 스님께서는 가슴이 막히고 눈물이 나왔대요. 어린 아기가 겨우 2400원 때문에 배고파 우는데 그걸 못주고 도망친 일이 너무 후회가 됐대요. 여인을 찾아 골목을 헤맸지만 찾지 못하시고, 이튿날부터 수건이며 옷이며 구걸하는 사람들이 달라는대로 다 줬대요. 그리고 결심하셨대요. 인도의 구걸하는 사람들을 위해 무엇인가 해야겠다고.”
원래부터 그녀는 불교신자였다. 성철스님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백련암에서 삼천배를 한 적도 있었고, 불교공부에 대한 열망도 있었다. 그러나 ‘왜 불교는 자비에 대한 실천이 부족할까?’ 항상 고민하고 있던 차였는데, 법륜스님의 글이 그녀의 눈을 뜨게 만들었던 것이다. 법륜 스님의 말씀 속에 그 ‘자비’가 있었던 것이다.
“그 글을 읽고 생각했어요. 이 스님을 따라다녀야겠다고. 그때 제 큰아들이 초등학교 3학년, 작은 아들이 1학년일 때였어요. 그때 저는 아이들 키우느라 중단했던 서예학원을 다시 나가려고 했었거든요. 근데, 법륜스님의 그 글을 읽으니 서실에 나가서 붓글씨 쓰는 건 그저 나무를 잘라 없애는 일일뿐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그 돈으로 굶어 죽어가는 아이들을 살리는 일이 나에게는 더 보람있는 일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몇 개월 뒤에 정토지 뒤편에 있는 인도 후원 계좌를 발견한 후에는 학원비로 후원을 하기 시작했어요.”
그후, 그녀는 부산의 동래법당에서 스님의 금강경 강의를 듣기 시작했다고 한다. 단지 경전이 너무 궁금했고, 스님의 법문이 좋았다. 남편의 허락을 얻어 매주 금요일이면 그녀가 살고 있던 창원에서 부산의 동래법당으로 달려갔다. 그때는 터널이 하나밖에 없었고 퇴근길에는 차가 많이 막혀서 3시간 30분이나 걸렸다.
경전을 공부하면서 변한 것은 시어머님과의 관계였다. 無住常報施, 바라는 마음을 내지 말고 그저 베풀어라, 는 그 말씀에서 시어머님과의 관계를 돌아보았다. 그 전에는 어머니에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몰랐던 나의 무지의 탓이었구나, 하고 그녀는 반성했고 “죄송합니다”하고 시어머님에게 빌면서 화해했다. 그후, 경전에 목말라 계속 법문을 공부하였는데, 그 시절 그녀는 무엇인가를 바라는 기도는 하는 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아들이 야뇨증이 있었는데 낫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았다. 달리 마음 속에 그 일을 두고 기도하지도 않았는데도 어느날 ‘아들의 야뇨증은 내가 만들었구나!’하는 깨우침이 왔다. 아들이 똑똑하여 판사가 되었으면 하는 소망이 있었는데, 그 소망 때문에 아들이 조금만 잘못하여도 야단치고 혼내었던 자신이 보였다. 고칠 사람은 아들이 아니고 나라는 생각이 들면서 기도를 해야겠다는 마음이 일어났다. 그녀는 스님의 가르침으로 세 가지의 명심문을 받아 새벽 5시에 일어나서 매일 108배 기도를 하였다.
-남편 비위를 잘 맞추고 살겠습니다. (남편) -어떤 경우에도 화내지 않겠습니다. (아들) -미워하는 사람이 제 가슴에 남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시어머님)
그때부터 참회기도가 시작되었는데, 시간을 지켜서 하지는 못하였다. 108배 중간에도 잠이 오면 50배만 하고 ‘부처님 잠 좀 자고 하겠습니다’ 한 적도 있고, 힘들어서 그만두고 싶었던 적도 많았다. 100일 하고 일주일 후에 아들의 야뇨증이 거짓말처럼 없어졌다. 기뻤다. 그래, 오줌싸는 판사 되면 뭐하나? 오줌 안싸는 평범한 사람이 훨씬 낫지, 하는 생각에 웃음이 저절로 나왔다.
_내가 무엇으로 그들을 도울 수 있을까?
96년 당시 동래법당으로 불교대학을 다녔는데, 12월에 우수공무원에게 주는 특별 상려금이 46만원 나왔다. 그때 법륜스님께서 동래에 내려오셔서 북한 어린이들이 전부 굶어죽어가고 있다며 눈물을 흘리셨다. 그 모습을 보면서 그녀는 같이 울었고, 그 자리에서 특별 상려금의 절반인 23만원을 성금으로 내었다.
“갈증이 났어요. 더 돕고 싶었어요. 어떡해야 좋을 지 고민하다가 사람들을 찾아가게 되었어요. 선배를 찾아가고, 후배를 찾아가고, 친구를 찾아가기 시작했어요. ‘탁발’을 생각하면서 ‘나는 다만 할 뿐이다’라고 스스로 되뇌였어요.”
아는 사람들을 다 찾아가서 모금을 한 후에는 거리로 나갔다.
“처음에는 일요일마다 창원의 성주사라는 절에서 모금을 하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어느날 할아버지 한분이 ‘이렇게 좋은 일을 산속에서만 하면 되나? 사람이 많은 곳에서 해야지!’ 하시는거예요. 그 말씀을 듣고 마산역으로 나갔어요”
“처음 거리로 나가던 날, 마산역에서 어떤 술취한 남자를 만났어요. 3만원 성금을 낼테니 여관을 가자고 하는 거예요. 처음엔 기분이 나쁘고 상처 받았는데, 갑자기 북한 여자들이 생각나는 거예요. 나는 굶어죽는 아이들이 내 아이가 아니니까 여관 안가고 3만원 안 받으면 그뿐이지만, 정말 북한의 엄마들은 자기 자식이 굶어죽잖아요. 그녀들은 3만원 받아서 내 자식 살리려면 여관으로 갈 수 밖에 없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더라구요. 그래서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나, 세상에는 3만원을 줄테니 여관을 가자는 남자만 있는 게 아니었다. 주머니 털어 100원 200원을 주는 사람들이 훨씬 많았다. 우리돈 천원이면 북한 아이 한명이 1주일을 살 수 있는데, 100원도 감사하였다. 도와줄 것이다, 도와주지 않을 것이다, 내 생각을 내려놓았다. 그런 다음에는 금강경에서 밥을 빌러 다닐 때 차례차례 빌러 다녔듯이 사람들에게 도와달라고 말하였다.
“처음부터 그런 용기가 있었던 것은 아니예요. 모금함을 천으로 만든 가방 안에 넣고 다녔던 기억도 있어요. 모금을 하다가도 아는 사람을 만나면 숨기도 했구요. 하지만, 북한의 상황에 대해 공부하면 할수록 안타까웠어요. 쉴 수가 없었어요. 가깝지만 갈 수 없는 곳, 더 줄 수도 있는데도 마음껏 돕지도 못하는 곳, 더 살릴 수도 있는데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한계가 있는 곳. 분단되어 있는 우리나라의 현실이 가슴 아팠고, 그런 상황 때문에 국가적인 손실이 너무 많다는 것이 안타까웠어요.”
모금을 할 때는 실제상황을 정확히 알리는 것이 중요했다. 자료를 보여주며 북한 주민들이 지금 얼마나 힘든지 먼저 알려주었다. 또한 칭찬과 비난에도 자유로워져야했다.
“사람들이 놀라요. 아프리카나 인도 같은 곳은 워낙 정보가 많고 사진도 흔하잖아요. 그런 곳에서 굶어죽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다들 아는데 의외로 북한어린이들이 굶고 있고, 그래서 죽음에 이르고 있다는 것은 잘 몰라요. 그들을 도와야해요. 그들은 배고파서 탈북 하는 거예요. 살려고 탈출 하는 거예요. 실제로 새터민들 만나면요, 다시 북한으로 돌아가고싶어 해요. 굶어죽지만 않으면 제 가족 옆에서 살고 싶은데 굶어죽게 생겼으니까 도망쳐 온 거잖아요. 그사람들 탈북 못하게 막으려면 도와줘야 해요!”
북한의 현실에 대해 생각하면 가슴이 저리는지 그녀는 내내 눈물을 글썽거렸다. 여러번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기도 하였다. 더 자주 모금하고, 더 많이 모금하여, 더 많이 돕고싶다고 하였다.
명절에는 시댁 가족들에게도 도와달라고 했다. 시아버지는 6.25 참전용사여서 북한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음에도 선뜻 돈을 내어놓으셨다.
“어느날 모금을 하는데 커피를 파는 할머니가 살짝 다가와서 ‘북한 돕는다는 말 하지마라, 다 싫어한다. 그냥 한국아이 돕는다고 말해라’ 라고 하시더라구요. 북한 아이들 돕는다고 하면, 싫어하는 사람들이 간혹 있어요. ‘경찰들은 뭐하노? 저것들 안 잡아가고? 뒷조사해보면 다 빨갱이들일 것이다!’ 소리치는 할아버지를 만난 적도 있고요. 또 어떤 분은 경찰에 신고한 후에 경찰들로부터 ‘사기’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한 다음에 모금해주신 분도 있었어요.”
“어느날은 정신이 조금 이상해서 거리를 떠돌아다니는 부랑인을 만난 적이 있어요. 캠페인 부스 책상 위에 북한 어린이 사진을 보고 가슴을 치면서 우는 거예요. ‘누야, 가슴이 너무 아프다. 내가 이빵 줄게. 꼭 북한에 갖다줘라.’ 하면서 자신이 구걸한 빵을 북한 어린이에게 갖다주라며 저에게 주는 거예요. 정상인이 아니었지만, 살아있는 부처님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한번은 또 어떤 분이 찾아오셔서 백만원을 선뜻 내어놓으시는 거예요. 적금을 해약하셨다고 하더라구요. 병원에서 아르바이트해서 가난하게 살아가고 있는 공부하는 직장인이었는데, 깨달음의 장에가서 그동안 세상으로부터 참으로 많은 은혜를 입었다는 것을 깨닫고 선뜻 적음을 해약해서 가져오신 거예요. 코끝이 찡해졌어요.”
도와달라고 말, 하기 어렵다고 다들 생각하지만 막상 입 밖으로 꺼내놓고 보면 의외로 많은 분들이 선뜻 도와주신다. 가게도 없이 길거리에서 과일 파는 아저씨도 꼬깃꼬짓 몇천원 내어놓고, 우리나라 애들은 안 돕고 왜 북한 애들을 돕냐고 소리치는 한의원 하시는 분도 선뜻 몇만원 내어놓으신다. 지난달에 찾아가고 이번달에 또 찾아왔다고 싫은 소리 하셔도 지갑을 여시는 분들이 참으로 많다. 그럴때 느낀다. 사람이 참 아름답다.
“북한 아이들 생각할 때마다 눈물이 나요. 힘들고 지치더라도 조금만 더 힘을 내어서 살아주면 좋겠에요. 북한 현실을 더 많이 알려나가고, 더 간절하게 기도할테니 그들이 조금만 더 버티어 주었으면 하고 기도해요.”
그녀는 99년 12월, 깨달음의 장에 갔다. 법문만 들어도 충분하다고 생각했고, 5박 6일이란 시간을 내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그때는 수련비가 이십만원이었다. 깨달음의 장이 끝난 후 병중에 계신 아버지 생각에 눈물이 났다. 내가 조금 일찍 왔더라면, 아버지도 여기 모시고 왔을텐데.. 하는 회한으로 가슴이 뜨거웠다. 아버지는 당시에 고혈압과 뇌졸중으로 이미 수련을 하실 수 없는 몸이셨다.
그녀는 지금 깨달음의장에 ‘돕는이’로 쓰이고 있는데 한달에 두 번 정도 참가한다. 많은 수련생분들을 문경수련원에서 만났고, 그분들을 통해 많이 배웠다. 어느 한분 한분 그녀 자신의 모습이 아닌 분이 없다. 그때마다 자신을 돌아본다. ‘나도 저랬지..’ 하면서.
“우리는 몰라서 성질내고 화내잖아요. 무지한 상태기 때문에 무엇 때문에 화가나는 줄도 모르고 화를 내고, 그 화에 시달리고, 스스로 괴롭히잖아요. 무지한 상태로 그대로 있는 사람에게 밥 한그릇을 주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아요. 그 무지를 깨닫게 해야죠. 깨달음의 장에 참여하면 할수록 그런 사명감이 커져요.”
수련생들의 변화에 놀라울 때가 많다. 도저히 변하지 않을 것 같은 분들도 자신을 내려놓고 변화하는 모습을 보면서 깜짝 놀란다. 어느 거사님께서는 아들을 너무 미워해 괴로워하는 분이었는데 수련이 끝난 후 자신의 명찰을 뒤집으셨다. “나는 죽었고, 오늘 다시 태어났다”는 것이 그분의 말이었다. 그 거사님은 그후 공양바라지로 자주 참여하시는데, 그런 변화들이 놀랍고 감사하다.
-남편이 현관문을 철사줄로 꽁꽁 묶어놓은 적도 있어요!
그런 그녀들을 바라보는 가족들의 생각은 어떨까?
“아휴, 말도 마세요. 남편이 처음에 저를 얼마나 원망했는지 몰라요. 남편이랑 저는 초등학교 동창생이거든요. 저보고 미쳤다, 돌았다, 제 정신이 아니다고 했어요. 거리모금 시작했을 때는 제발길거리 모금하러 나가지 말라고 했어요. 이혼하자고도 몇 번이나 했는지 몰라요. 이혼하자고 하면 잘못했다고 싹싹빌고 또 거리모금하러 나가고, 못살겠다고 하면 또 잘못했다고 싹싹빌고 법회 다니고 그랬어요.”
“2000.3.1부터 서울정토회관에서 천일동안 1초도 쉬지 않고 목탁을 치며 민족의 화해와 통일을 염원하는릴레이 참회기도를 하는 기간에 주말에는 매주 철야정진을 했는데 제가 매주 참가한 적이 있었거든요, 그 때 남편이 아파트 현관문을 철사줄로 꽁꽁 묶어서 못나가게 한 적이 있었어요. 그러면 또 철사줄 끊고 도망나와 기도하러 나가고 그랬어요. 아들들한테 남편이 그랬대요. 너희 엄마는 밥도 안해주고 미쳐서 돌아다닌다구요. 그때 아들들이 나서서 설득했다고 하더라구요. ‘우리 엄마가 나쁜 일 아는 거 아니잖아요.’ 아들들한테 그말을 전해들으니 아들들이 참 고맙더라구요. 잘 자랐구나, 싶기도 하고요.”
지금은 두 아들이 군인이 되었다. “엄마는 정토회에서 높은 사람되지 마세요, 거리에서 모금할 때 가장 빛나요”라고 말해주는 아들들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남편은 여전히 불편해 하지만 그대로 많이 인정하고 도와주는 편이예요. 사람이 살아가는 데 어찌 맑은 날만 있을 수 있겠어요? 가끔씩 소나기도 내리고, 구름도 끼고, 햇빛 쨍쨍한 날도 있고... 그렇죠.”
“예전에는 시어머니와 사이가 좋지 않았어요. 얼마 전에는 시어머님께서 여름에 입맛을 잃으셨다고 하길래 대구탕을 끓여 드릴려고 대구를 사가는길에 전화를 드렸더니 ‘맛도 없는 대구 누가 사라고 했노? 싫다, 너거 집에 가져가라.’ 하시면서 막 소리를 지르세요. 모든 사람들이 대구탕이 맛있다고 해도 우리 어머님은 맛이 없을 수 있잖아요. 그래서 정성껏 대구탕을 끓여서 ‘어머님 맛은 없어요. 약으로 알고 드셔주세요.’하고 어머님께 드리고 집으로 왔어요. 며칠 뒤 남편에게 ‘내가 애미에게 맛이 있니 없니 해도 애미가 끓여준 대구탕 먹고 입맛이 돌아왔다’ 는 얘기를 전해들었어요.”
그 일 때문이었는지 남편은 올해 2월에 시애틀에서 열린 해외정토 행자대회에 다녀오라며 비행기삯과 용돈을 선뜻 내어주었다. 지금은 이해하고 받아주는 남편도 고맙고, 가끔씩 화내고 짜증내는 남편도 고마운 사람임을 알고 있다고. 그녀는 남편이 퇴직하면 함께 봉사하면서 살았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가지고 있다.
-앞으로의 계획
그녀는 북한 어린이 살리기 운동을 ‘생명을 살리는 운동’이라 믿는다. 좀 더 열심히, 더 많이 하고싶다. 환경오염을 막는 일에도 앞장서고 싶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알려 무지를 타파하는 일에도 정성을 다하고 싶다. 요즘은 매주 화요일마다 평화재단에서 실시하는 평화아카데미에서 평화와 남북한의 화합에 대한 공부를 한다. 통일을 조금 앞당기는 것, 그리고 통일 이후의 우리나라를 미리 준비하는 공부를 하는데, 이 공부에 집중하고 싶은 바람이 있다.
그녀가 화장실을 간 사이에 그녀가 내내 쥐고 있던 손수건을 펼펴보았다.
‘한방울의 물에도 천지의 은혜가 깃들어 있고 한톨의 밥에도 만인의 노고가 스며있으며 한 올의 실타래 속에도 베짜는 이의 피땀이 서려있다. 이 물을 마시고 이 음식을 먹고 이 옷을 입고 부지런히 수행정진하여 괴로움이 없는 사람 자유로운 사람이 되어 일체중생의 은혜에 보답하겠습니다.“라고 손수건에는 적혀있었다.
그렇다면, 그녀의 가방에는 무엇이 들어있을까? 그녀는 웃으며 가방을 펼쳐보였다.
북한의 미사일 발사이후 더 싸늘해진 남북관계를 녹이기위해 매일 아침 꺼내서 기도하느라 너덜해진 ‘통일기도 발원문’ ‘그래도 밥은 먹어야 합니다’ ‘밥과 희망’이라고 적인 북한 어린이에 대한 CD. 서초법당의 공양간에서 얻었다는 비닐봉지에 싸지 않은 삶은 옥수수 두알.
그녀는 기회는 이때다, 싶었는지 가볍게 평화로운 나눔 회원 신청서를 내밀었다. “평화를 위해 조금만 도와주세요.” 한다.
네. 그러겠습니다. 보살님! 어찌 그녀를 거절할 수 있으랴. 그녀 자체가 아름다움이며, 감동이다.
“내가 변하고 주변이 변하고 이렇게 조금씩 조금씩 변해가면 언제가는 모두 함께 웃을 날 이 있겠지요. 우리가 거리모금을 당당하게 할 수 있는것은 우리가 모금한 돈이 제대로 쓰여지는 것을 알기 때문이며, 남을 돕는것이 곧 자신을 돕는것을 알기 때문이지요. 이렇게 할 수 있게 길을 열어주신 정토회 모든분과 그동안 도와주신 모든분들께 머리숙여 감사드립니다.”
인터뷰를 했던 때는 햇살 따가운 여름날이었다. 지금은 시간이 흐르고 흘러 두꺼운 겨울옷을 여미고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굶어서, 먹지 못해서 힘든 동포들은 여전하지만, 북한의 신종플루가 횡행한다는 소식을 좋은벗들에서 전하고 우리 당국은 인도적인 차원에서 의약품을 지원한다고 하였다. 남북대화에 새로운 전기가 마련되고 있다. 세상은 변한다. 다만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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