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법 스님을 만나다
4대강 사업, 막는 게 최상이지만 귀농학교, 인드라망 생명공동체운동,지리산생명평화운동으로 널리 알려진 도법 스님. 그를 만나기 위해 지리산 실상사를 찾았다. 그날따라 비가 내려 소박한 절은 더욱 고즈넉해 보였다. 종무사 찻집에는 지리산 댐, 케이블카 건설 반대 문구의 스티커가 붙어 있어 이곳의 분위기와 상황을 짐작케 했다. 마침 그날도 스님은 지리산 문제와 마을 운동 논의를 위해 마을을 한 바퀴 돌고 오신 터였고 뉴스에선 ‘4대강 사업’이 환경영향평가를 마쳐 본격적으로 착수에 들어간다는 소식이 들렸다. “작년 겨울 종교인들이 모여 100일 강 순례를 했어요. 천혜의 자연 조건이 그대로 살아있는 강을 보면서 ‘그래, 이게 아름다움이야, 살아있음이야’ 하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지요. 4대강 사업이란 게 사람들이 하도 반대를 많이 하니까 운하에서 말만 바꾼 건데... 물론 막는 게 최상이니까 노력해야 합니다. 하지만 막느냐 못 막느냐 하는 단순한 논리로 우리가 실망하고 좌절하는 건 좋지 않아요. 최상이 안 된다면 차선으로라도 접점을 만들어야지요. 그것도 안 된다 해도 다른 길을 모색하고 거기에 의미를 부여해야 합니다. 운동하고 활동하는 사람들에겐 어떤 상황에서도 상처받고 실망하지 않을 수 있는 주체적인 힘과 태도를 견지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봐요. 일이 잘되면 우쭐하고 안 되면 주저앉는 건 관대한 태도가 아녜요.”
이어 스님은, 대응만큼이나 중요한 건 사안에 대한 분석이라며 현재 대한민국에는 엄연히 두 개의 민심이 존재한다는 걸 잊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하나는 이명박 대통령에게 표를 주었던 민심이고 다른 하나는 잘못한다고 해서 촛불을 든 민심이에요. 두 개의 민심이 엄밀하게 현존하는 게 한국 사회고. 그런데 진보 진영과 활동하는 사람들 중엔 촛불 민심만 민심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실상을 제대로 봐야죠. 두 개의 민심이 공존하고 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해요.” 소위 진보 진영으로 불릴 만한 활동을 하는 스님이지만 그의 말에선 어떤 사람이든 소외시키지 않으려는 마음이 묻어났다. “접점을 찾기 힘든 건, 욕심 때문일까요?” “욕심보다도...” 사진 기자의 물음에 답하는 스님의 목소리는 나지막했다. “상처 때문이겠지요.” 대한민국 그 어느 곳보다도 좌우대립이 극렬했던 지리산에서 살아온 스님에게는 바라는 일이 관철되는 것보다도 그 과정에서 사람들이 주고받는 상처가 더 염려되는 것 같았다.
|
사람들은 나더러 환경운동가다, 진보쟁이다,
개혁적이다 온갖 얘길 하는데
그런 거하곤 관계없어요.
나는 내 인생을 살고 있는 거예요. 내 생명이
안전하고 건강하게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다 보니 좋은 환경이 있어야 하고 내 이웃이 평화로워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한 것뿐.
난 그렇게 생각해요. 사회적으로 정의롭고 의미 있는 일들도 결국
모두 자기 자신을 위해 하는 거라고 |
선방에서의 10년 도법 스님의 이력을 보면 웬만한 사회 운동가들보다도 더 활발히, 깊게 활동해 왔음에 놀라게 된다. 지금의 도법 스님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불교수행자로서 그가 걸어온 길을 짚어봐야 한다.
제주에서 태어나 18세에 금산사로 출가한 스님은, 스무 살 무렵 어머님의 위독함을 계기로 죽음이란 화두에 휩싸이게 된다. 그때부터 그는 존재의 의미를 찾기 시작했다. “사람은 왜 죽고 죽으면 또 어떻게 되는가. 인생에 대한 가장 보편적이고 본질적인 물음에 휩싸인 거야. 그러자 다른 건 아무것도 들어오질 않았어요. 너무 고통스럽고 힘들어서 그때부터 이 문제를 푸는 것만이 내가 살아야 할 이유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경전도 보고 성철 스님 만나서 이야기도 들었는데 그래도 안 풀렸지. 참선에서 깨닫는 게 해답이라는 사람들 말에, 늦어도 3년이면 답을 얻을 수 있다는 말에 희망을 걸었는데 안 되더란 말이지요. 불교계에선 간화선(화두를 가지고 수행하는 참선법으로, 마치 수학문제를 풀듯 화두를 잡고 자나 깨나 철저하게 집중해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선풍)을 최고라고 말하는데, 나는 안 됐어요. 처음엔 내가 노력이 부족해서 그럴 거다 생각했지만 나만 그런가 하는 생각에 주변을 보니 내 동료, 선배, 어른들도 크게 다르지 않은 거야. 그리고 지도자 스님들의 말씀도 심오한 것 같긴 한데 말씀과 삶이 다르니 의심이 가고. 그러면서 이건 뭔가 내가 갈 길이 아니다 하는 생각에 다른 길을 찾아가게 됐어요.” 최고의 수행인 간화선을 버린다는 것은 대단한 각오가 필요한 일이었다. 그는 수없는 고민과 동료 선배들로부터의 비웃음을 헤치고 10년 동안의 선방 생활을 정리했다. 그리고 다른 길을 가기 위해 떠났다. “떠나온 뒤로도 정리하기까지 지난한 세월이 필요했어. 다른 걸 한다 해도 쉽게 대안이 나오는 건 아니니까. 여전히 지금까지도 계속 길을 찾고 있는 거야.”
|
|
마을만이 희망이다 수많은 방황과 시행착오를 겪은 후 마흔 가량이 된 스님은 내면으로만 향해 있던 시선을 밖으로 돌려보았다. 그러자 불교의 대안과 현대 사회의 대안을 모색하는 일에 관심이 가기 시작했다. 지금의 그가 하는 모든 대안 운동들이 싹을 틔우기 시작한 것이 바로 이 무렵이었다. 그는 불교적 세계관과 정신을 개인의 일상적 삶 속에서 실현하는 방법을 고민했고 그 과정에서 이웃사촌, 품앗이 등으로 대표되는 전통 마을의 공동체 정신에 주목했다. 이런 것이야말로 연기적 세계관이 실현되는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시선을 밖으로 돌리긴 했지만 사실 그것은 더 깊이 내면을 바라보는 것이기도 했다. “연기의 세계관(모든 조건과 원인이 없으면 결과도 없다는 설)에서 보면, 존재의 실상은 서로 뗄 수 없는 총체적인 관계 속에서 서로 영향을 미치고 있어요. 내가 이렇게 있을 수 있는 것도 사실은 다른 사람, 나아가 모든 존재로 인해 가능한 거예요. 우리는 늘 착각하며 살아요. 마치 내가 잘나서 혼자 힘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하지만 실은 밥 한 끼 먹는 것도 수많은 사람들과 대자연을 위시한 전 우주의 도움이 아니고는 불가능해요. 연기의 진리를 분명히 깨달으면 우리의 삶은 달라져요. ‘더불어 평등하게 있다’는 연기의 실상을 알면 우리의 삶이 질적으로 변하게 됩니다.”
더불어 살아가는 자연 생태적 가치를 불교적 대안이자 사회적 대안이라 생각한 도법 스님은 마을이 희망이란 결론을 내고 마을 공동체 운동과 귀농 운동에 힘을 쏟기 시작한다. 실상사 농장 2만 평을 실습지로 삼아 농장학교를 연 것이 98년, 불교 도농(都農) 공동체 운동본부를 거쳐 인드라망 생명공동체를 창립한 것이 99년이었다. 2001년엔 귀농자의 자녀를 위한 대안 학교인 ‘작은 학교’를, 2003년엔 유기농산물을 거래하기 위한 인드라망생협을 설립해 귀농자들을 위한 일련의 제반 사항을 마련했다. 마을 운동을 시작한 지 10여 년, 300여 명이 귀농했고 50쌍이 부부의 연을 맺었다. 그렇게 조금씩 성과를 거두고 주목을 받기 시작하자 지자체도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10년 동안 남원시가 인구 감소를 막으려고 온갖 걸 다 해도 안 됐는데, 우리가 주머니 푼돈모아 운동해서 300명 내린 거야. 그러니 이제사 남원시가 쳐다보기 시작하더라고. 전엔 이상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더니만(웃음).”
살아 있어야 부처도 하고 예수도 하지 도시는 농촌이 없으면 스스로 살아갈 수 없다.하지만 농촌은 도시가 없어도 스스로 살아갈 수 있다. 날고뛰는 것이 도시라 해도 결국 생명을 키워내는 곳은 농촌이기 때문이다. “농촌과 농업을 살리지 않으면 생명의 안전성, 건강성, 지속성은 위협을 받아요. 안전과 건강이 전제되지 않으면 어떤 삶도 불가능해요. 살아있어야 뭘 해보는 거잖아. 부처도 하고 예수도 하고 사랑도 하고 정의도 외치고. 그러려면 무엇보다 먹거리들이 건강해야 해요. 먹거리는 어디서 생산됩니까? 청와대입니까, 서울대입니까? 삼성입니까 현대입니까? 도시에선 가장 중요한 가치인 생명에 필요한 조건을 생산해내는 곳은 아무 데도 없어요. 오로지 생명에 필요한 조건을 끊임없이 소비시키고 오염시키기만 할 뿐. 생명을 탄생시키고 가꾸는 것보다 더 가치 있는 일이 있는가요.”
스님은 귀농에 대한 그릇된 인식에 대해서도 우려를 나타냈다. 도시에는 일자리가 부족하니 어디 농촌에서 한번 찾아볼까 하는 생각으로 귀농을 고려해선 안 된다는 것. “우리가 귀농 운동을 한다니까 정부 부처 여기저기서 연락이 와요. 실직자 노숙자들 문제를 귀농으로 해결해보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지. 우리가 귀농을 얘기하는 건 중요한 가치를 중심에 놓고 삶을 좀 더 참되고 바람직하게 살아보자는 차원에서인데. 생명 평화에 대한 인식과 새로운 삶의 방식을 정립하지 않는 사람은 성공적으로 귀농할 수 없어요. 뭔가 소박하더라도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사람들, 생명과 공동체의 가치에 주목하고, 농촌에 두발을 딛고 서서 본인의 꿈을 실현해보겠다는 사람들이 와야 해요.”
인드라망 공동체는 지금 새로운 실험을 하고 있다. 마을 전문가를 육성하기 위해 ‘마을 대학’을 열어 보려는 것이다. 대학이란 명칭을 달고 있지만 선생도 커리큘럼도 아무 것도 정해진 것은 없다. “마을 문제를 다루며 가장 힘든 점은, 불행하게도 국가도 사회도 개인도 마을 사람을 키워본 적이 없다는 거예요. 전부 논 팔고 소 팔고 밖으로 빼돌리기만 했을 뿐. 그래서 시작해보려는 게 ‘마을 대학’이야. 귀농자들 중에 빛나는 인재들이 많아요. 하지만 아직 종합적 구상과 기획을 갖고 일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어요. 그들을 꿰어내야 돼.” 20세부터 35세까지의 젊은이들이 참여할 수 있는 마을 대학. 우선 다섯 명이 마을에 대한 연구와 이론적인 작업을 시작하며 스타트를 끊었다. 인터뷰 중간 중간 핸드폰이 울렸다. 인드라망 사람들의 전화였다. 마을 대학과 관련된 이야기를 나누는 모양이었다. 전화를 받은 스님은 인터뷰 중이니 간단히 말하라고 하신 후 용건을 나누셨다. 세심한 직장 상사처럼 이런저런 조언을 하시던 스님은 전화를 끊은 후 ‘뭔 걱정이 그리들 많은지’라며 해맑게 웃었다.
자유로운 탐험 정신을 지닌 불교 수행자 도법 스님은 한국 불교가 나아갈 길을 끊임없이 모색하는 부지런한 불교 수행자인 동시에, 한 인간으로서 상상해 볼 수 있는 갖가지 일들을 창조적으로 기획하고 실천하는 탐험가였다. 생명 평화의 가치를 알리기 위해 2004년부터 5년간 전국 곳곳을 돌아다니며 탁발 순례를 했다는 대목에서는 한계를 모르는 자유인의 면모도 엿볼 수 있었다. “탁발이라 카는 게 얻어먹고 얻어 자는 생활이라 이 말입니다. 부처님이 일생 동안 그렇게 살았어요. 사상적으로는 끊임없는 구도 행위를 하는 것이고 육신은 세상 사람들 도움을 받아 지탱해 가는 것입니다. 원래는 개인적으로 하는 건데, 우리는 대중운동으로 접목을 시켰어요. 지리산 운동을 하면서 생명 평화란 가치, 이걸 어떻게 이 시대의 보편적 화두가 되도록 할 것인가를 고민하다 탁발 순례를 해보기로 했지요.”
그냥 살아내기에도 짧지 않은 5년이란 세월 동안 어떻게 얻어먹고 자는 생활을 지속했을까. “지역 활동가와 생명 평화에 관심 있는 종교인들이 함께 지역 순례 계획을 짰어요. 그분들에 의해 잠자리도 만들어졌고 음식도 얻어먹었지. 고정 멤버는 10명 정도였지만 그날그날에 따라 지역 사람들이 합류해 들쑥날쑥했어요. 강진에 갔을 땐 성 요셉 여고라고 수녀님이 운영하는 학교의 전교생과 교직원 500여 명이 함께 했어요. 벚꽃 피고 보리가 새파랗게 한참 자랄 때였는데 두 시간 정도 걸어가서 생명평화 얘기를 나누고 놀았어요. 처음엔 모두들 반대했다는데 갔다 온 후엔 ‘자기 인생에서 잊을 수 없고 또 잊어서는 안 되는 시간’이었다고 말했다네요.” 하루 일과는 아침에 일어나 삥 둘러서서 백 번 절하는 의식으로 시작했다. 그리고 침묵으로 15km를 걷고 순례가 끝나면 또 백 번 절을 했다. 저녁엔 지역 주민과 만나 생명 평화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면서 스님은, 반대하고 싸우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적 공감을 확대재생산하는 대안으로서의 생명 평화 운동을 지역 주민들에게 알렸다. “잠은 온갖 데서 잤지. 절 교회 성당 어린이집 모텔 개인 가정집 마을회관 펜션 등. 기륭전자 농성장에서 자기도 했어.” 강남역 횡단보도를 건너는 사진도 보았다고 말했더니 스님은 그때가 생각났는지 슬그머니 웃으셨다. “강남에선 밥 못 얻어먹었어. 밥 안 줘. 부자동네 가선 못 얻어먹었어. 결국 빈민촌 철거민대책본부 사무실에서 밥 얻어먹고 자고 그랬지.”
탁발 순례는 스님에게, 또 우리들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탁발 순례는 자기를 낮추고 비우고 나누는 삶이에요. 얻어먹으려면 낮춰야 되잖아. 주는 이들도 마찬가지예요. 사람이란 늘 자기 이익을 추구하기 마련이지만 이런 기회가 있으면 누군가를 위해 내 것을 내주게 되잖아요. 이 또한 자기를 낮추고 비우고 나누는 거예요. 결국 탁발이란 자기중심적 사고와 삶의 방식을 비우고 승화시키는 행위예요. 또 한 가지는, 만약 우리가 탁발 형식을 취하지 않고 5년을 돌아다녔다면 어마어마한 예산이 들었겠지요. 그런데 맨 손으로 했다는 거예요. 생명평화를 대중화시키는 과정에서 조직도 만들어지고 이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회원으로 탄생하기도 하고. 굉장한 의미를 지녔던 만큼 좋은 성과를 이뤄내기도 했어요.”
|
도법 스님의 이야기는 개인과 사회, 종교와 현실, 긍정과 비판을
종횡무진 넘나들었다. 인터뷰는 오후 3시 반부터 7시까지 진행됐다.
서둘러 끝낼 수도 있었지만 염치 불구하고
절밥까지 얻어먹으며 오래 머물렀다. 결국 ‘자고 가지?’라는 말을 들을 때까지
스님의 시간을 뺏은 후 일어났다.
공짜 절밥에, 오랜 시간 내주셔서
감사하다는 인사말에 스님은 어두운 길을 앞장서며 말했다. “세상에 공짜는 없어. 나중에 다 갚게 될 거야.”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