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좌불교와 대승불교의 실천적 특성 비교
李秀昌(摩聖)
I. 머리말
불교에는 크게 남전(南傳)과 북전(北傳)의 두 흐름이 있다.
남전은 인도에서 스리랑카로 전해져, 그 곳을 근거로 하여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로 퍼졌다.
북전은 인도에서 서역을 거쳐 중국으로 전파되고, 다시 한국을 거쳐 일본에 전해졌다.
전자를 남방불교 혹은 상좌불교(上座佛敎, Theravāda)라 하고,
후자를 북방불교 혹은 대승불교(大乘佛敎, Mahāyāna)라고 부른다.
일반적으로 상좌불교 국가는 스리랑카, 미얀마, 태국, 캄보디아, 라오스, 베트남 일부이고,
대승불교 국가는 중국, 한국, 일본, 몽골, 티베트 등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제 이러한 지역적 구분은 큰 의미가 없으며, 또한 그렇게 중요한 사항도 아니라고 본다.
지금까지 한국의 불교도들은 중국에서 들어온 대승불교의 영향으로 상좌불교를
소승(小乘, Hīnayāna)이라고 업신여겨 왔다.1)
하지만 최근에는 그 동안 멸시해 온 상좌불교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초기불교에 대한 학문적 연구 성과와 아울러 교통과 통신 및 매스미디어의
발달로 다른 나라의 불교를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나마 접할 기회가 많아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지만 아직도 대승불교도들은 상좌불교에 대해서 잘 모르고,
상좌불교도 역시 대승불교를 잘 모른다.
필자가 현재의 상좌불교와 대승불교의 실천적 특성을 비교해 보고자 하는 목적도 여기에 있다.
이 글은 이러한 목적에서 씌어진 것이기 때문에 두 전통의 불교를 이해하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초기불교와 대승불교의 교리적․사상적 차이점을 비교 연구한 대표적인 인물은 일본의 불교학자
마스다니 후미오(增谷文雄)이다.
그는 근본불교2)와 대승불교를 비교함에 있어서 변증법(辨證法, Dialectic)의 원리를 도입했다.
변증법이란 정립(定立, These)에 대한 반정립(反定立, Antithese)이 성립되고, 그 다음 정립과
반정립을 뛰어넘어 보다 높은 자각 속에서 그것들을 종합(綜合, Synthese)하는 사상적 작업을
말한다.
그는 근본불교를 테제(정립)로 삼고, 이 테제에 대한 안티테제(반정립)가 대승불교라고 보았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정반대의 대립적인 개념인 근본불교와 대승불교를 회통(會通) 혹은
회석(會釋)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했다.3)
이러한 그의 작업은 근본불교와 대승불교의 사상적 차이점을 원론적으로 논했기 때문에
현재의 상좌불교와 대승불교에 그대로 대입하기에는 곤란한 점이 있다.
왜냐하면 지금의 상좌불교는 마스다니 후미오가 말한 근본불교가 아니기 때문이다.
현존하는 동남아시아의 상좌불교는 전래 이후 그 나라 고유의 민간신앙과 습합된 부분도 있고,
후대에 성립된 다른 부파의 사상과 대승불교의 영향을 받은 부분도 많이 남아 있다.
따라서 현재의 상좌불교는 원래의 불교, 즉 붓다시대의 불교에서 많이 벗어나 있음도 사실이다.4)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좌불교는 대승불교에 비해 상대적으로 초기불교 전통을 더 많이 계승하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글은 현재의 상좌불교가 초기불교의 전통을 비교적 원형에 가깝게 계승했다는
전제 아래 논의를 전개한다.
II. 근본불교와 대승불교의 사상적 차이점
현재의 상좌불교와 대승불교의 실천적 특성을 비교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근본불교와
대승불교의 사상적 차이점부터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그래야만 두 다른 전통의 실천적 특성을 정확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는 마스다니 후미오의 견해를 거의 그대로 소개한다.
마스다니 후미오는 근본불교와 대승불교의 차이점을 다음의 다섯 항목으로 나누어 설명했다.
즉 ①개인과 대중의 문제, ②분석과 직관의 문제, ③아라한과 보살의 문제,
④의식과 무의식의 문제, ⑤이성과 감정의 문제 등이다.
첫째는 개인(個人)과 대중(大衆)의 문제이다.
오래된 불교적 술어로 표현하면 상구보리(上求菩提)와 하화중생(下化衆生)의 문제이다.
인간은 혼자가 아니고서는 살 수 없는 동시에 또한 혼자서는 살 수 없는 존재이다.
그런데 우리 불교인은 과연 어느 쪽 삶에 중점을 두고 불교적 생활을 생각할 것인지, 그 선택에
있어 소승불교 쪽에 선 사람과, 대승불교 쪽에 선 사람들은 서로 갈리어 길을 달리해 왔다고
하는 것이 불교의 역사가 말해 주는 사실이다.5)
이것은 ‘개인의 도’와 ‘대중의 도’를 대조적으로 다룬 것이다.
둘째는 분석(分析)과 직관(直觀)의 문제이다.
오래된 불교의 표현을 빌리면 분별(分別)과 무분별(無分別)의 문제이다.
이들은 모두 불교에 있어서의 방법론이다.
분석적 방법과 직관적 파악 중 어느 것이 불교인의 방법으로서 훌륭한 것이냐 하는 문제이다.
잘 아는 바와 같이 고타마 붓다는 존재를 논하고, 세계를 논하고, 인간을 논함에 있어 빈번히 분석적 방법을 구사했다.
또한 그 제자 중에도 사리뿟따(Sāriputta, 舍利弗)나깟짜야나(Kaccāyana, 迦旃延)와 같은 분석의 명인이 있었다.
따라서 초기경전에서 번거롭기 그지없는 분석의 결과를 자주 보게 된다.
이에 대해 대승불교 쪽에 선 사람들은 대부분 분석적 방법보다는 직관적 방법을 중시하여
‘분별지(分別智)’를 낮게 보고 ‘무분별지(無分別智)’를 높게 보았다.6)
이것은 분석과 직관을 대조적으로 다룬 것이다.
셋째는 의식(意識)과 무의식(無意識)의 문제이다.
옛 불교 술어로 표현하면 현행(現行)과 종자(種子)의 문제이다.
이것은 오늘날의 표현으로는 심리학의 문제이다.
그러나 그 내용은 오히려 불교의 실천문제였다.
현행이란 현실적인 신(身)․구(口)․의(意)의 행위를 뜻한다.
종자란 대승불교 학자들이 지어낸 말로서, 그것(현행)이 존재하게 하는 가장 근본적인 요인은,
자신의 내부 깊은 곳에 있는 무의식 속에 있다고 보는 것이다.
고타마 붓다가 그 제자들을 지도함에 있어 사용한 방법은, 먼저 뜻(意)으로 잘 정리한 생각에
따라 신(身)․구(口)의 실천도 정리해 간다는 방법이다.
이것이 인간의 실천에 있어서 왕도(王道)일 것이다.
그러나 실천에 있어 현실은 좀처럼 뜻대로 되지 않는 경우를 만나게 된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어느덧 그 반대로 하고 마는 경우를 종종 경험하게
되는 것은 인간의 비극이다.
그리고 이런 것으로부터 문제를 추구해 가자 무의식의 세계, 심층심리의 문제가 크게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된 것이다.
여기서 불교의 실천은 다시 한 번 새로운 도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이런 흐름은 불교의 기나긴 역사 속에서 추구해 온 가장 흥미 있는 경위(經緯)의 하나이다.7)
이것은 의식과 무의식을 대조적으로 다룬 것이다.
넷째는 나한(羅漢)과 보살(菩薩)의 문제이다.
이것은 차라리 새로운 인간상으로서의 보살의 등장이라고 하는 편이 보다 적절할지도 모른다.
나한이란 ‘아라한트(Arahant)’를 음역하여 아라한(阿羅漢)이라고 쓰고, 그것을 다시 약해서
‘나한’이라고 한 것이다. 열반의 경지에 안주하는 불교적 성자의 이상상(理想像)을 가리키며, 주로 대승불교 쪽에서 사용한 용어이다.
대승에서, 자기완성에 전념하는 정통파의 방법을 비판하고 대중의 구제야말로 우선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다시 그것을 구체적인 인간상 위에 구상화시켜,
나한이라는 정통파가 지어낸 성자의 이상에 맞서서,
보살이라는 새로운 불교의 이상적 인간상을 내세운 것이다.8)
보살이란 ‘보디삿따(Bodhisatta)’ 또는 ‘보디사뜨바(Bodhisatva)’를 음역하여
‘보리살타(菩提薩埵)’라 쓰고, 그것을 다시 약해서 ‘보살’이라고 한 말이다.
이 말은 초기경전에 있어서는 단순히 불교수행자로서 이 길을 가는 자라는 정도의 뜻이었으나
바야흐로 대승불교에서는 여기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여 이를 새로운 불교인의
이상상(理想像)으로서 내세운 것이다.9)
이것은 나한과 보살을 대조적으로 다룬 것이다.
다섯째는 이성(理性)과 감정(感情)의 문제이다.
고타마 붓다가 그 제자들을 인도하고 가르치는 방법으로서 인간의 이성과 감정 중 어느 것에
중점을 두었을까? 그것은 의심할 여지도 없이 이성에 중점을 두었다.
그리고 인간의 감정에 호소하는 일은 극력 이를 배격했던 것이다.
특히 이 점에 있어 인상깊은 것은 이 스승은 그러한 교화의 방법으로 음악과 예술을
이용한 일이 전혀 없었다는 사실이다.
오늘날 우리들은 불교가 훌륭한 불․보살이나 제천(諸天)의 상(像; 조각)을 자랑으로 삼지만,
놀라운 것은 초기의 불교에는 그러한 것과는 전혀 관련이 없었다.
그렇다면 그토록 훌륭한 조각 등은 대체 어느 시대에 제작된 것일까?
아마도 대승불교가 번성하면서부터인 것 같다.
이 불상의 기원에 대해서는 아직도 논의되고 있으나 대승불교가 초기의 불교에 비해
훨씬 인간의 감정에 중점을 둔 경향이 강해진 것은 여러 면에서 분명하다.10)
이것은 이성과 감정을 대조적으로 다룬 것이다.
III. 상좌불교와 대승불교의 실천적 특성
앞에서 살펴본 근본불교와 대승불교의 사상적 차이로 말미암아 초기불교의 전통을 계승한
상좌불교와 대승불교의 신앙적 양상들은 각기 다르게 전개되었다.
이처럼 다르게 전승된 신앙형태를 통틀어 편의상 ‘실천적 특성’이라고 이름 붙였다.
“실천이라는 말에는 추구하는 노력에 대한 가치 평가가 전제되어 있다.
즉 실천은 개인적 수행에 요구되는 가치관까지 포함한다.”11)
필자도 이러한 의미로 실천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1. 이해와 믿음의 문제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근본불교는 ‘개인의 도’에서 출발했고,
대승불교는 ‘대중의 도’에서 출발했다.
또한 근본불교는 ‘지혜의 도’에 그 바탕을 두고 있고,
대승불교는 ‘신앙의 도’에 그 토대를 두고 있다.
다시 말해서 근본불교는 ‘개인의 도’와 ‘지혜의 도’에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교리에 대한 ‘이해’를 중요시하였다.
반면 대승불교는 ‘대중의 도’와 ‘신앙의 도’에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에 만인이
함께 갈 수 있는 ‘믿음’의 길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면 왜 이러한 양상으로 전개되었는가?
그 사상적 배경에 대해 살펴보자.
초기불교는 처음부터 신앙이나 믿음이 아닌 보고․알고․이해함 을 강조하고 있다.
불교의 경전에는 일반적으로 ‘신앙’ 혹은 ‘믿음’으로 번역되는 ‘삿다(saddhā, Skt.
śraddhā)’라는 낱말이 있다.
하지만 삿다(saddhā)는 맹목적인 ‘신앙’이기 보다는 오히려 신념에서 나온
‘확신’에 가깝다.12)
초기불교에서는 언제나 앎과 봄의 문제이지, 믿음의 문제가 아니다.
붓다의 가르침은 ‘와서 보라’(ehi-passika)라고 당신을 초대하는 것이지,
‘와서 믿어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진리를 깨달은 사람에 관해 언급한 불교 경전의 도처에서 사용된 표현법은
‘티끌 없고 더럼 없는 진리의 눈(法眼, Dhamma-cakkhu)을 떴다.’
‘그는 진리를 보았고, 진리에 도달했고, 진리를 알았고, 진리를 파악했으며,
의혹을 건너서 흔들림이 없다.’
‘이와 같이 올바른 지혜로 진리를 있는 그대로 본다.(yatha bhūtaṁ)’13)
붓다는 자신의 깨달음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
‘눈이 생기고, 통찰이 생기고, 지혜가 생기고, 과학적 지식이 생기고, 빛이 생겼다.’
깨달음은 언제나 지식 혹은 지혜(ñāṇa-dassana)를 통해 보는 것이지,
신앙을 통한 믿음이 아니다.”14)
그러나 ‘지혜의 도’에서 출발한 초기불교가 짊어지고 있던 최대의 제한 또는 모순은
그것이 ‘소수인의 도’라는데 있었다.
즉 “이 가르침은 슬기로운 자(智者)에게 맞는 것이며, 어리석은 자(愚者)에게는 맞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대승불교에서는 개인의 도가 아니라 대중의 도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불교는 자기형성에 전념하는 ‘소수의 도’이어서는 안되며, 그것은 모든 사람이 갈 수 있는
‘광대한 도’, 혹은 대중과 더불어 탈 수 있는 ‘큰 수레’(大乘)가 아니면 안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대승불교도의 입장에 대해서 에드워드 콘즈(Edward Conze, 1904-1979)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재가신도는 지혜를 얻지 못하기 때문에 ‘믿음’을 가져야 한다.
초월적 지혜의 방법에 귀의(Bhakti)의 방법을 보충해 주어야 한다.
나가르주나(Nāgārjuna, 龍樹)는 어렵고 힘든 지혜’의 방법과 쉬운 ‘믿음’의 방법을 구별했다.
그 둘은 모두 같은 목적지로 이끌어간다. 그것은 마치 바다로 가든, 육지로 가든 동일한 마을을
여행할 수 있는 것과 같다. 어떤 사람들은 활기차고 엄정한, 명상을 필요로 하는 방법을 선호한다.
어떤 사람들은 귀의라는 도움 수단[방편]을 손쉽게 행함으로써, 즉 붓다의 이름[佛名號]를
부르면서 붓다를 생각함으로써 ‘물러서지 않는 자리[不退轉位]’, 즉 완전한 깨달음에
이르리라는 확신을 갖고 그 깨달음을 향해 나아가는 지위에 곧바로 다가설 수 있다.”16)
초기불교에서는 믿음이 부차적인 덕이었지만 대승불교에서는 지혜와 동등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믿음의 구제력은 옛 학파들이 추정했던 것보다 훨씬 강해졌다.
인류가 점점 타락해가고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만 했다.
자기훈련과 활력이 필요한‘지혜라는 힘든 방법’은, 대다수는 아니더라도 승려들 일부를
포함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적당치 않았다.
이러한 여건에서, 손쉬운 믿음의 방법은 사람들에게 남아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17)
이러한 과정을 거쳐 대승불교에서는 믿음이 지혜와 자비의 실천에 있어서
불가결한 제일의 덕목이 된다.
특히 화엄경(華嚴經)에 이르면 믿음의 중요성은 극치를 이룬다.
그 대표적인 예가 80권 화엄경의 현수품(賢首品)에 나오는 다음의 게송(偈頌)이다.
“믿음은 도(道)의 근원이요, 공덕의 어머니라.
일체의 모든 착한 법[善法]을 길러내고,
의심의 그물을 끊어 제거하고, 애욕에서 뛰어나며,
열반의 무상대도(無上大道)를 열어 보인다.”18)
초기경전에서도 믿음에 관해 언급한 대목을 찾을 수 있다.19)
하지만 초기불교도에게 있어 신앙의 의미는 단순한 ‘믿음’이 아니라 지혜의 증장에
필요한 덕목이며, 마음의 청정을 증득하는 기본 전제로서의 기능이었다.
그런데 나중에는 ‘절대 확실한 신앙’이라는 사불괴정(四不壞淨)으로 확립된다.
불괴정(不壞淨, aveccappasāda)이란 불(佛)․법(法)․승(僧)․계(戒)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말한다.
이것이 갖추어질 때 비로소 불교적인 세계관․인생관에 투철하여 의심하지 않게 된다.
이것은 사제(四諦)의 도리를 이론적으로 완전히 이해한 것과 같다.
그러므로 사제관(四諦觀)이 확립된 자를 최하위의 성자20)
라고 한 것과 같이 사불괴정을 얻은 자도 최하위의 성자로 인정된다.21)
그러나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믿음은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확신’을 의미한다.
대승불교는 ‘인간의 심성이 본래 청정하다(心性本淨)’는 전제에서 출발하였다.
일체 중생이 본래 갖추고 있는 이 깨끗한 마음을 ‘일체중생 실유불성(一切衆生 實有佛性)’
혹은 ‘여래장심(如來藏心)’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이와 같이 일체 중생은 누구나 깨끗한 마음인 보리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부처와 아무런 차별이 없다는 것이다.22)
이러한 사실을 확고히 믿고 이해하여 행동으로 실증해 나가는 것이 대승불교 신행의 요체인 것이다.
즉 대승불교의 신행은 신(信)․해(解)․행(行)․증(證)의 순서로 이루어져 있다.
이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부처가 될 수 있다(成佛)’는 확고한 믿음이다.
이러한 마음을 일으키는 것을 발심(發心) 혹은 발보리심(發菩提心)이라고 부른다.
이 발보리심을 계기로 최후에는 깨달음을 얻게 된다.
이와 같이 상좌불교는 맹목적인 믿음보다는 지혜를 통한 이해를 강조한다.
그러나 대승불교는 이해보다 믿음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러한 두 전통의 사상적 차이로 말미암아 그 실천적 양상은 전혀 다르게 나타난다.
그 구체적인 신앙형태에 대한 비교 작업은 너무나 번쇄하여 여기서는 생략한다.
2. 점수와 돈수의 문제
점수(漸修)와 돈수(頓悟)의 문제는 불교의 수행과 증득에 관한 수증론(修證論)에 해당된다.
수증론이란 불교에서의 닦음[修]과 깨달음[悟]에 관한 이론이다.
그런데 초기불교에서는 닦음을 중요시하고, 대승불교는 깨달음을 중요시한다.
여기서는 닦음의 문제를 집중적으로 살펴본다.
이 글에서 점수(漸修)는 ‘점진적 수행(gradual progress)’이라는 의미로 쓰고,
돈수(頓修)는 ‘급진적 수행(rapid progress)’이라는 의미로 사용한다.
천태교판(天台敎判)의 점교(漸敎)와 돈교(頓敎)의 개념과 유사하다.
사실 돈점(頓漸) 논쟁은 인도가 아닌 중국에서 중요하게 대두되었다.
인도의 불교가 중국에 전해지면서 ‘깨달음’에 대한 방법과 내용에 깊이 천착(穿鑿)한 나머지
돈오(頓悟)를 주장하는 사람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후일 돈오(頓悟)와 점수(漸修)에 관한 논의는 돈점사구(頓漸四句)로 압축된다.23)
돈점사구란 진리를 증득하는 깨달음인 오(悟)와 그 실천 수행인 수(修)에 모두 네 가지의
구별이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 논문은 이렇게 세분화된 오(悟)와 수(修)에 관한
논의를 전개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기 때문에 자세히 다루지 않는다.
여기서는 상좌불교와 대승불교의 닦음[修], 즉 수행에 있어서
돈(頓)과 점(漸)의 차이를 비교해 보고자 할 뿐이다.
이 점수와 돈수는 분석과 직관(분별과 무분별)의 문제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다.
근본불교는 ‘지혜의 도’를 추구함에 있어서 분석적 방법을 채택했고,
대승불교는 ‘신앙의 도’를 추구함에 있어서 직관적 방법을 채택했다.
따라서 분석적인 방법은 점수로,
직관적 방법은 돈수로 귀결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현상이라 할 수 있다.
초기불교에서는 분별지(分別智)를 높이 평가한다.
이러한 전통을 계승한 세일론 상좌부는 불교를 ‘분별설(分別說, Vibhajjavāda)’이라고 이해했다.
그래서 세일론 상좌부를 ‘분별설부(Vibhajjavādin)’라고도 한다.24)
그러나 대승불교에서는 분별지를 낮추어보는 측면이 강하다.
대승불교 중에서도 특히 중국에서 태동한 선불교에서는 분별지를 뛰어넘는
무분별지(無分別智)야말로 최고라고 주장한다.
역사적으로 중국에서 최초로 ‘돈오론(頓悟論)’을 제기한 사람은 도생(道生) 스님이다.
그 후 중국에서는 ‘돈오’가 절대적인 우위를 차지하였다.
그 원인은 중국인들의 사유양식과 정서에 ‘돈오’의 이론이 적합하였기 때문이었다.25)
특히 중국 선종의 ‘돈오론’은 중국의 전통사상과 정서가 혼합되어 본래 인도불교의
교의(敎義)와는 형식과 내용에서 상당히 이질적인 색채를 지니고 있다.
인도의 전통적인 불교는 ‘점차적인 수행’ 즉 차제론(次第論)이었다.
그런데 중국의 불교는 ‘단박 깨달음’ 즉 돈오론(頓悟論)이 주류를 이루었다.
이 차제론과 돈오론이 정면으로 충돌한 곳은 인도와 중국이 아닌 티베트였다.
이른바 ‘라싸의 쟁론’으로 알려져 있는 돈점논쟁이 바로 그것이다.26)
이 논쟁의 최종적인 승리는 인도의 전통을 계승한 연화계(蓮花戒)에게로 돌아갔다.
그 승리의 원인은 문화와 정서적인 요소가 작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한마디로 ‘라싸의 쟁론’은 서로 다른 문화 속에서 불교에 대한 이해의 충돌로 이해할 수 있다. 티베트는 지정학적으로 인도와 중국의 중간에 놓여있지만, 문화사적으로는 인도의 사유방식과 전통에 보다 가깝기 때문이다.27)
이러한 점수와 돈수의 실천관은 불교의 모든 교육 프로그램에 그대로 적용된다.
교학(敎學, pariyatti)은 물론 수행(修行, paṭipatti)까지도 포함된다.
상좌불교에서는 붓다의 가르침을 전수함에 있어서 교학적인 측면에서는 철저하게
점진적 교육법을 고수하였다.
남방의 승가교육 제도는 전통적인 교육과 현대적인 교육이 병행되고 있는데,28)
둘 모두 단계별 교육제도를 채택하고 있다.
현대의 교육은 거의 대부분 이 점진적 교육관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
그런데 상좌불교에서는 수행에 있어서도 점진적 방법을 채택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29)
초기불교의 사선관(四禪觀)을 비롯한 위빠사나(Vipassanā, 觀法)도 점진적 수행법이다.
붓다고사(Buddhaghosa, 佛音)의 <비숫디막가(Visuddhimagga, 淸淨道論)>에 제시된
일곱 가지 청정[七淸淨]은 수행의 단계를 말한 것이다.30)
현재 태국의 경우 ‘명상(瞑想, Buddhist Meditation)’이라는 수행 과목도
제1단계에서 제7단계까지 구체적으로 세분하여 지도하고 있다.31)
그러나 대승불교에서의 교육관은 직관(直觀)의 원리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
불교적 교육의 목적은 자각(自覺)을 통한 열반․해탈에 있기 때문이다.
선가(禪家)에서 널리 알려져 있는 ‘한 번 뛰어 곧바로 여래의 경지에 들어간다
(一超卽入如來地)’라는 말은 깨달음이 비약적인 직관임을 잘 나타내 주는 말이다.
이러한 불교적 교육관에 의하면, 깨달음 그 자체는 점진적인 것이 아니고,
인간의 정신세계에서 찰나적인 비약(飛躍)으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직관의 원리’는 삶의 현장 속에서 현장의 본질을 직감함으로써
삶의 새로운 차원을 자각케 하는 학습 원리라고 한다.32)
이와 같이 대승불교에서는 선교(禪敎)를 막론하고 깨달음을 중시하기 때문에
직관적 교육관을 견지(堅持)하고 있다.
이와 같이 상좌불교는 점진적 수행[점수]을 선호하고, 대승불교는 급진적 수행[돈수]을 선호한다. 이러한 경향성 때문에 두 전통의 교학체계와 수행체계는 전혀 다르게 전개되었다.
3. 번뇌와 보리의 문제
앞에서 살펴본 점수와 돈수의 문제는 사상적으로 번뇌(煩惱)와 보리(菩提)의 문제와도
깊은 관련이 있다. 이 번뇌와 보리의 문제는 인간의 본성에 관한 심성론(心性論)이다.
그런데 이 심성론(혹은 本性論)은 인간의 삶의 태도 내지 가치관과 깊은 관계가 있다.
즉 인간의 본성을 선과 악 혹은 보리와 번뇌의 두 측면 가운데 어느 쪽에 중점을
두느냐에 따라 그 실천적 양상이 달라진다.33)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간의 심성이 본래 청정하다’라는 심정본정설(心性本淨說)을
신봉하는 경향이 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혐오스러운 것을 피하고자 하는 의식이 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심리적으로 인간은 ‘불만족스러움’이라는 고(苦)보다 ‘만족스러움’이라는 열반(涅槃)
이라는 말을 더 좋아한다. 이러한 인간들의 바램을 충족시켜 준 것이 바로 대승불교다.
이 대승불교에서는 ‘불타가 되는 것’, 즉 성불(成佛)의 근거를 ‘심성본정설(心性本淨說)’에서
찾고 있다. 그래서 심성본정설은 대승불교 성립의 기본 전제가 된다.
이러한 심성본정의 입장은 부파불교 시대에서 대중부계(大衆部系)의 불교도에 의해 전지(傳持)
되다가 대승불교의 흥기와 함께 더욱 발전하게 되었다.34)
이 심성본정설과 관련된 중요한 전거(典據)는 <증지부경전(增支部經典)>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비구들이여, 이 마음은 청정하다.
그러나 이것은 본래적인 것이 아닌 번뇌(客塵)에 의해 오염되어 있다.
비구들이여, 이 마음은 청정하다.
그래서 이것은 실로 본래적인 것이 아닌 번뇌로부터 이탈되어 있다.
비구들이여, 이 마음은 청정하다.
그러나 이것은 본래적인 것이 아닌 번뇌에 의해 오염되어 있다.
가르침을 듣지 않은 범부는 이를 여실(如實)하게 알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범부는 마음을 실수(實修)하지 않는다고 나는 설한다.
비구들이여, 이 마음은 청정하다. 그래서 실로 이것은 본래적인 것이 아닌 번뇌로부터
이탈되어 있다. 가르침을 들은 거룩한 제자는 이것을 여실하게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가르침을 들은 거룩한 제자는 마음을 실수한다고 나는 설한다.35)
이 경에서는 분명히 마음 그 자체는 오염,미망 등을 본질로 하지 않는다고 설해져 있다.
마음 그 자체는 아무런 오염도 되지 않은 명정(明淨)한 것이지만, 본래적인 것이 아닌
번뇌에 기인하여 그러한 오염의 작용이 일어난다는 것이다.36)
또 다른 경전37)에서는 ‘염정화합(染淨和合)’을 주장하면서 마음의 오염,청정이라고
하는 것은 마음 자체의 본성이 아니며, 인간 자신의 마음을 나타내는 방법이나 마음을
지니는 방법에 따라 그 마음은 오염된 것이라든지 혹은 청정한 것이 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38)
위에서 언급한 경전들에 의하면, 인간의 마음 속에는 분명히 청정한 부분과 오염된 부분이
공존한다.
그런데 이러한 경설(經說)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그 실천은 전혀 다르게 전개되었다.
대중부 계통에서는 “일체 중생의 심성은 본래 청정하고 부처의 심성[佛陀心]이지만,
이 마음이 후천적 부가물인 객진(客塵)의 잡염에 의해 더럽혀져 있는 것이 범부의 실상이라고
보았다.”39)
그리고 일체 중생이 본래 갖추고 있는 이 청정한 마음은 부처와 다를 것이 없다는 입장이다.
특히 대승불교의 여래장계의 문헌에서 범부들은 누구나 여래장(如來藏)을 갖추고 있으며,
본래 깨달은 존재라는 것이다.
그러나 붓다는 번뇌를 설명함에 있어서 다양한 입장에서 다양하게 분류하여 표현했다.
그래서 그 분류의 표준도 극히 많고, 이것을 숫자에 따라 분류해 보더라도 무명(無明)이라는
하나를 비롯하여 삼독(三毒).사액(四軛).오개(五蓋),칠사(七使),십결(十結),21예(穢) …
108번뇌 등, 거의 열거하기가 곤란할 정도로 많은 분류가 있다.
이들이 바로 증일아함(增一阿含) 등의 주된 내용을 이루고 있는 것인데, 또한 후대에 이르면
아비달마에 있어서 번뇌품(煩惱品; 使品 또는 睡眠品이라고도 한다)의 자료가 되는 것이다.
붓다에 의하면, 우리들의 수행이란 적극적인 입장에서는 지혜의 행[智行]을 증장하는 데에
있는 것이지만, 소극적인 입장에서는 요컨대 번뇌를 끊는 데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실제적 수행의 입장에서 본다면, 다양한 입장에서 악덕의 종류를 열거하여
이것을 억제해 나가는 쪽이 실행상 적절하고 친절하다고 할 것이다.
아마도 이런 이유 때문에 많은 번뇌를 다양하게 열거했을 것이다.40)
그래서 불멸후 대부분의 부파에서는 범부들은 온갖 종류의 번뇌로 오염되어 있기 때문에
그 오염된 번뇌를 하나하나 제거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들은 오로지 번뇌 제거에 심혈을 기울였던 것이다.
아비달마교학의 복잡한 번뇌론도 이러한 배경에서 나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히로 사치야(增原良彦)는 당시 부파불교의 번뇌론에 대해 이렇게 묘사했다.
“승원에 정주한 비구,비구니들은 현학적인 교리나 교학의 연구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학승’이 된 것이다. 그리하여 ‘번뇌(煩惱)’라는 것이 실체시 된다.
즉 번뇌의 극복이 곧 불교의 출발점이자 마지막 종착점이라면, 번뇌는 반드시 극복해야만 한다.
이것의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하는 것이 소승불교의 연구목표였다.
따라서 번뇌가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지 않고서는 번뇌극복에 대한 방법을 연구할 수
없기 때문에 번뇌는 반드시 실체시 되어야만 했다.”41)
이처럼 부파불교, 즉 아비달마교학에서는 언제나 번뇌가 그 주된 연구 대상이었다.
이러한 배경에는 불교의 현실 인식이 반영되어 있다.
붓다는 이 세계를 고(苦, dukkha)라고 판단했다.
그 근거는 무상(無常, anicca)과 무아(無我, anattā)이다.
붓다는 시종일관 ‘이 법은 무상성(無常性)이고 진멸법성(盡滅法性)이며,
멸법성(滅法性)이고 변이법성(變易法性)이다’42)라고 가르쳤다.43)
붓다께서 이 세계를 고(苦)라고 판단하여 강조했던 까닭은 범부들이 지고하고 심오한
이상을 깨닫지 못한 채 단지 당면한 욕망에 미혹되어 참으로 구해야 할 것을 잊어버리고
있는 것을 경고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44)
그러나 반대로 대승불교 쪽에 선 사람들은
붓다께서 고(苦)를 강조하심은 곧 낙(樂, 열반)을 상정한 것이라고 이해했다.
즉 범부들은 무명(無明)에 의해 현실세계의 괴로움에 빠져있지만, 성자들은 밝음[明]에 의해
모든 괴로움을 제거하고 열반의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다는 것이다.
요컨대 불교의 현실세계는 무상(無常),고(苦),무아(無我),부정(不淨, 穢)이지만,
불교의 이상세계는 상(常),락(樂),아(我),정(淨)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논리적으로 가능한 일이다.
그리하여 괴로움의 현실세계가 아닌 즐거움의 이상세계를 동경하고 희구(希求)하게 되었다.45)
이들이 바로 대승불교도들이다.
이들은 번뇌즉보리(煩惱卽菩提)의 원칙에서 현세생활(現世生活)을 긍정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이상경(理想境)을 실현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대승의 즉신성불설(卽身成佛說)이다.46)
그러나 초기불교에서는 이러한 상락아정(常樂我淨)을 ‘네 가지 왜곡된 견해’(四顚倒見, viparyāsa)로 보았다. 즉 ‘영원하지 않은 것에서 영원을 찾고, 고통 속에서 행복을,
내가 아닌 것에서 나를, 부정한 것에서 청정한 것을 찾는 것’을 말하는데,47)
이것은 모두 잘못된 견해라는 것이다.
초기불교에서는 후대 대승불교에서 열반의 네 가지 속성이라고 인정했던 상락아정(常樂我淨)의
원리를 배척하고 끝까지 무상(無常),고(苦),무아(無我),부정(不淨, aśubha)을 강조했다.48)
왜 초기불교에서는 욕망을 긍정하는 일이 없이 철두철미하게 그것을 부정했을까.
이에 대해 기무라 다이켄(木村泰賢)은 다음의 비유를 들어 설명했다.
“비유하자면, 마치 가난한 사람이 백만장자가 되기를 간절히 바라던 나머지 마침내 스스로
진짜 그렇게 된 듯한 망상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런 만큼 그 자신은 행복하겠지만 그 망상에서 깨어난 뒤에는 오히려 일장춘몽에
불과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우리들은 이러한 불확실한 기초 위에다 이상을 세워서는 안된다.
어디까지나 사실의 참모습과 합치되는 입장 위에다 그것을 놓아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붓다가 주어진 것으로서의 상락아정의 원리를 배척하고
끝까지 무상․고․공․무아49)를 부르짖었던 까닭이다.”50)
한편 후대의 대승불교 안에서
인간의 본성과 관련하여 구분한 수행법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인간의 본성을 번뇌[惡]의 측면에서 본 수상문(隨相門)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의 본성을 보리[善]의 측면에서 본 자성문(自性門)이다.51)
수상문은 제도해야 할 중생이 있다는 것이고, 자성문은 제도해야 할 중생이 없다는 것이다.
중생이 있다는 입장은 겉으로 보아서 번뇌가 있기 때문이고, 중생이 없다는 입장은 속으로 보아서 번뇌가 본래 공(空)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52) 다시 말해서 수상문은 우리 중생을 범부로 파악한 것이라면, 자성문은 범부가 아닌 성자로 파악한 것이다. 중국선종사에서 남종(南宗)의 혜능(慧能)과 북종(北宗)의 신수(神秀)의 관계는 돈오와 점수의 대립이었을 뿐만 아니라 자성문과 수상문의 대립이었다. 요컨대 남종과 북종은 자성문(=돈오=혜능)과 수상문(=점수=신수)의 대립 관계였다. 고려의 보조지눌(普照知訥, 1158-1210) 스님은 이 둘을 다 포용한 성상융회(性相融會=돈오점수=보조)의 보조선을 탄생시켰다.53)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상좌불교는 번뇌의 측면에서 인간을 이해하는 경향이 강하고,
대승불교는 보리의 측면에서 인간을 이해하는 경향이 강하다.
이로 말미암아 전체의 교학체계와 수행체계가 달라지게 된 것이다.
4. 무의례와 의례의 문제
무의례(無儀禮)와 의례(儀禮)의 문제는 근본적으로 이성과 감정의 문제와 관련이 있다.
하지만 이 보다는 불상(佛像)의 출현이 미친 영향이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불상은 예경(禮敬)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잘 아는 바와 같이 초기교단에서는 특별한 의례가 없었다. 승단에서 가장 중요한 수계의식(受戒儀式)도 지금처럼 정형화되지 않았다. 붓다께서 살아 계실 때 출가를 원하는 자가 있으면, 붓다는 “오라! 비구여”(Ehi Bhikkhu)라고 말했다. 부처님의 이 한마디가 곧 수계식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교단이 확대되면서 점차 형식적인 수계 절차가 마련되었다. 그리고 붓다는 생전에 자신의 신격화를 원하지 않았다.
붓다 재세시 박깔리(Vakkali, 跋迦梨)라는 병든 비구가 죽기 전에 세존을 뵙고 예배드리고 싶다고 했다. 이때 붓다는 박깔리에게 이렇게 말했다. “박깔리여, 그만 두어라. 나의 허물어져 가는 몸을 보아서 무엇하겠느냐? 박깔리여, 법을 보는 자는 나를 보고 나를 보는 자는 법을 본다. 박깔리여, 참으로 법을 보면 나를 보고 나를 보면 법을 본다”54)라고 했다.
붓다는 자신의 육신에 예배하기보다 진리를 보라고 가르쳤다.
붓다는 생존시 제자들과 함께 똑같이 수행자의 한 사람으로서 생활했다. 별도의 종교의례가 없었다.
이와 같이 초기교단에서는 의례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의례와 의식에 대한 반대 입장을 취했다.
당시 바라문교의 공희(供犧), 즉 의례 만능주의를 극도로 반대했던 것이다.
초기불교는 ‘지혜의 도’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초기교단에서 의례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엿볼 수 있는 사례들은 초기경전 도처에서 발견할 수 있다. <숫니파타(Sutta-nipāta)> 제249게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55)
불멸 후 2-3백년까지도 예배의 대상인 불상이 없었다.
무불상(無佛像) 시대가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이것은 곧 의례가 없었음을 의미한다.
의례는 불상의 출현과 함께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
불상은 인도에서 대승불교가 흥기할 무렵, 그리스 문화의 영향을 받아 나타나기 시작했다.
최초의 불상이 간다라 지방과 마투라 지방이라는 것도 그리스 문화의 영향을 받았다는 증거다.
이와 같이 불상은 대승불교 흥기와 함께 출현했다고 보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인 견해이다.
따라서 무불상과 불상은 무의례와 의례의 관계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무불상과 불상은 초기불교와 대승불교를 구별하는 하나의 기준이 된다.
그러나 불상 출현 이후 상좌불교에서도 이것을 수용했기 때문에
이제는 불상의 유무로 상좌불교와 대승불교를 구분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상좌불교에서 불상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불상과 불화 등은 붓다의 이미지를 상기시키기 위한 시청각 교재에 불과하다.
믿음을 중시하는 대승불교도들이 대하는 불상에 대한 관념과는 전혀 차원이 다르다.
이것은 붓다를 어떻게 이해하느냐 하는 불타관(佛陀觀) 혹은 불신관(佛身觀)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현재 상좌불교에서는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석가모니불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반면 대승불교에서는 시간과 공간적으로 무수한 부처님이 상주한다고 보기 때문에 다불(多佛)과
다보살(多菩薩) 신앙이 가능하다.
이러한 일불(一佛)과 다불(多佛)의 관계는 상좌불교와 대승불교의 가장 두드러진 차이점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이 주제는 불신론과 관련된 복잡한 문제이기에 여기서는 다루지 않는다.
이러한 초기불교의 전통에 따라 지금의 상좌불교에서는 예불과 불공 등의 의례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부처님의 가르침과 계율에 따라 하루하루 게으르지 않고 정진하면 그만이다.
즉 지계에 의한 범행(梵行, Brahmacariya)의 실천을 강조하는 것이다.
스님들이 신도들을 위해 불공을 대신해 준다는 개념도 없다.
근본적으로 의례가 중요한 몫을 차지하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은 점차 대승불교의 영향을 받아 의례가 널리 행해지고 있다. 현재 남방 상좌불교에서 행해지고 있는 빠릿따(Paritta 護呪)도 대승불교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빠릿따는 원래 주문(呪文)과 같은 것이 아니었다. 빠릿따는 의미 없는 단어의 나열인 다라니와는 대조적으로 의미를 갖추고 있다.56)
그런데 지금의 상좌불교도 중에는 빠릿따의 암송을 들을 때 그 의미를 되새기기보다는 이 암송(말의 힘)으로 말미암아 악을 피하거나 행운을 가져다 준다고 믿고 있다.57)
미얀마에도 빠릿따(Paritta) 혹은 마하-빠릿따(Mahā-Paritta)로 불리는 경장에서 가려 뽑은 작은 모음집을 가지고 있는데, 귀신을 좇아내는 구마주문(驅魔呪文)으로 사용되기도 하며, 어떤 다른 팔리 경전들보다 더 많이 알려져 있다.58) 빠릿따가 점차 주문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들은 모두 초기불교적 시각에서 보면 분명히
‘변모한 불교(Buddhist Transformed)’임에는 틀림없다.59)
그러나 아직까지 상좌불교에서는 사후의 49재나 제사 및 천도재의 필요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 근거는 중아함경(中阿含經) 권3, <가미니경(伽彌尼經)>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경에 의하면, 개인이 지은 바 업(業)은 개인이 짊어져야 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즉 추선(追善)을 한다고 해서 극락에 왕생할 수 있다고 보지 않는다.
이를테면 연못에 돌을 던지면 가라앉지만 기름을 연못에 쏟으면 물에 뜬다. 돌은 가라앉고, 기름은 뜬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악인은 내세에 지옥에 떨어질 것이고, 선인은 내세에 하늘에 태어날 것이다. 천계든 지옥이든 그것은 그 사람이 생전에 지은 선악의 업(業)에 따른 것이라고 본다.60)
그러나 대승불교에서는 사후 중유(中有)를 인정하기 때문에 49재나 제사 및 천도재는 반드시 필요한 것으로 되어있다.
이처럼 정반대의 현상으로 전개된 것은 불교교리가 변천했기 때문이다.
타케나카 신조(竹中信常)에 의하면, 불교교리는 3단계의 과정을 거쳐 변했다고 한다.
첫째는 자율자수(自律自修)의 수행단계이다. 둘째는 수행의 공덕을 인정하고 자타공수(自他共修)의 형식을 취하는 단계이다. 셋째는 그 공덕을 타인(他人)에게 혹은 사자(死者)에게 회향하기 위하여 승려에게 의뢰하여 타수적(他修的)으로 추선공양(追善供養)하는 단계이다. 이와 같이 불교의식도 교리변천과 함께 대자적(對自的)단계에서 대타적(對他的) 단계로 변해 갔음을 알 수 있다.61)
또한 상좌불교는 이성에 토대를 두기 때문에 의례에 있어서 도구, 즉 악기나 음악 및 장엄물들이 동원되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반면 대승불교는 감정에 토대를 두기 때문에 의례에 있어서 도구, 즉 각종 악기나 음악은 물론 다양한 장엄물들이 동원된다. 이러한 도구들은 교화에 큰 도움이 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좌불교에서는 일체의 도구를 사용하지 않는다. 이것은 오직 이성과 지성에 근거한 신앙만이 어떠한 외부적 환경의 변화에도 흔들리지 않는다고 믿기 때문이다.
필자는 종교에 있어서 의례는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고 믿는다. 이러한 ‘의례의 역할론’에 대해서는 종교학자들은 물론 인류학자들도 깊은 관심을 갖고 연구하고 있다.62) 홍윤식은 “교의적(敎義的) 뒤받침이 없는 의례행위(儀禮行爲)는 단순한 육체적 생리적 동작에 지나지 않으며, 한편 의례를 수반하지 않는 순수 교의사상도 비실재적(非實在的)인 것으로 현실 구체적인 것이 되지 못한다”63)고 지적했다. 매우 훌륭한 지적이 아닐 수 없다. 교의와 의례가 일치해야만 완전한 신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신앙은 가능한 한 그 절차가 간단하면 간단할수록 접근하기가 쉽다. 신앙의 대상과 의례가 복잡하다는 것은 그만큼 초보자가 접근하기 어렵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초기불교 교단에서는 의례가 없었다. 그러나 불상이 출현한 뒤 상좌불교에서도 의례가 행해진다. 하지만 의례가 큰 비중을 차지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대승불교는 신앙 자체가 의례라고 할 정도로 의례가 중요한 몫을 차지한다. 이것이 두 전통의 실천적 특성의 차이점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상좌불교와 대승불교 사이에는 거의 정반대로 보이는 입장의 차이가 있다. 그렇다고 대승불교가 실제로 남전 상좌부에 반대한 것은 아니었다. 에드워드 콘즈는 대승불교 신앙의 전형들 중 약간은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 Sarvāstivādin)나 경량부(經量部, Sautrāṇtika)에 대한 반대에서 일어난 것이라고 보았다.64) 어쨌든 근본불교와 대승불교의 사상적 차이로 말미암아 현재의 상좌불교와 대승불교의 실천적 특성은 전혀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첫째, 상좌불교는 맹목적인 믿음보다는 교리에 대한 이해를 강조하지만, 대승불교는 이해보다 믿음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상좌불교는 ‘개인의 도’와 ‘지혜의 도’에 초점을 맞추었고, 대승불교는 ‘대중의 도’와 ‘신앙의 도’에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이다. 둘째, 상좌불교는 점진적(漸進的) 수행을 고수하지만, 대승불교는 급진적(急進的) 수행을 최상으로 여긴다. 상좌불교는 분석적 방법을 채택했고, 대승불교는 직관적 방법을 채택했기 때문이다. 셋째, 상좌불교는 번뇌의 측면에서 인간을 이해하는 경향이 강하지만, 대승불교에서는 보리의 측면에서 인간을 이해하는 경향이 강하다. 상좌불교는 현실세계에 초점을 맞추었고, 대승불교는 이상세계에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이다.
넷째, 상좌불교는 의례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지만, 대승불교는 의례를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상좌불교는 이성에 토대를 두고, 대승불교는 감정에 토대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필자는 두 전통의 불교를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하기 위해 피상적으로 상좌불교와 대승불교를 구분하여 논의했다. 하지만 여기서 논의한 상좌불교와 대승불교는 지리적 영역에 의한 구분이 아니다. 이제 지역적 구분법은 중요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또한 정확한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상좌불교도 중에서도 ‘대중의 도’를 지향하는 사람이 있고, 대승불교도 중에서도
‘개인의 도’를 추구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상좌불교 국가에 진정한 의미의 대승교도들이 있을 수 있고, 대승교도라고 자처하는
무리 속에 소승교도들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월폴라 라훌라 스님은
“상좌불교 국가에 사는 대승불교도, 대승불교 국가에 사는 소승불교도들”65)이라고 표현했다.
따라서 상좌와 대승은 지역적 차이가 아니라
개인적 성향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임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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