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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불교

초기불교의 교학과 수행--각묵스님 불교 TV 강의자료

불교 TV 강의자료-각묵스님

 

 

초기불교의 교학과 수행

제1:  왜 초기불교인가?

 

 

첫째, 초기불교는 불교의 시작점이다.

모든 나무에 뿌리가 있듯이 불교 2600년의 전개에도 그 뿌리가 있다. 뿌리를 거부하고 나무가 살아남을 수 없듯이 뿌리를 모르는 불교는 역사를 아는 이 시대의 외면을 받게 될 것이다.

둘째, 초기불교는 역사를 아는 이 시대에 불교 만대의 표준이다.

부처님의 금구성언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초기불교는 불교 만대의 뿌리요 그래서 모든 불교의 표준이 될 수밖에 없다.

셋째, 초기불교의 가르침은 합리성과 체계성에 바탕하고 있으며 분석적이다. 이는 수학을 토대로 하여 전개되는 과학이라는 현대의 방법론과 일치한다. 세계적인 불교수행지도자인 고엔카 거사님은 불교를 Science(과학)이라고 역설한다. 5온/12처/18계/22근/4제/12연 37조도품

넷째, 초기불전의 매개 언어인 빠알리어를 비롯한 범어는 격변화와 동사곡용을 기본으로 하며, 이는 한글과 같은 언어체계이다. 그러므로 한문 경전과 달리 문법적 구조가 정확하다. 그러므로 문장을 곡해하거나 왜곡하거나 잘못 이해할 소지가 현저히 줄어든다.

다섯째, 초기불교 경전에 대한 해석을 담고 있는 주석서가 있다. 이 주석서는 사리뿟따 등 부처님의 직계제자들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아쉽게도 북방의 아함에는 주석서가 남아있지 않다. 그러므로 빠알리로 기록된 니까야로 된 초기불교는 불교에 대한 자의적 해석에서 탈피하여 불교교리의 곡해가 제거될 것이다. 소설불교와 신변잡기불교에서 벗어날 수 있다. 현대과학의 방법론이 수학이듯이 주석서의 방법론은 아비담마(대법, 법에 대해서)이다. 둘 다 분석적이라는 측면에서 같은 방법론이다.

여섯째, 초기불교의 이해는 자주적인 진정한 한국불교를 구현 할 수 있다. 부처님의 원음을 통해서 중국불교를 바판적인 시각에서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원효스님 등이 추구했던 자주불교의 전통을 오늘에 구현할 수 있다.

일곱째, 교세가 위축되고 있는 한국불교가 딛고 일어서야할 바닥이요 출발점이다.

⑶ 왜 해체해서 보기인가?

초기불교의 핵심을 한 마디로 말해보라면 주저 없이 ‘해체해서 보기’라고 정리할 수 있다. 해체라는 용어는 이미 초기경 가운데서 나타나고 있는데 부처님 제자들 가운데 영감이 가장 뛰어난 분으로 칭송되며 시작(詩作)에 능했던 왕기사 존자는 상윳따 니까야 천 명이 넘음 경(S8:8) {742}번 게송에서 부처님을 “부분들로 해체해서(bhāgaso pavibhajjaṁ) 설하시는 분”이라고 찬탄하고 있다. 주석서는 “마음챙김의 확립 등의 부분(koṭṭhāsa)으로 법을 해체하는 것(dhammaṁ vibhajantaṁ)이라는 말이다.”(SA.i.279)라고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해체는 pavibhajja/vibhajja를 옮긴 것이다.

그리고 위밧자(vibhajja)라는 술어는 빠알리 삼장을 2600년 동안 고스란히 전승해온 상좌부 불교를 특징짓는 말이기도 하다. 그들은 스스로를 위밧자와딘(해체를 설하는 자들)이라고 불렀다. 이런 상좌부 불교를 일본학자들은 분별상좌부라 부른다. 분별이란 말이 사량분별이라는 용어에 익숙한 우리의 어감으로는 분명하게 다가오지 않아서 강의자는 해체나 분석이라고 옮긴다. vi-는 분리접두어고 √bhaj는 to divide의 뜻이다.

물론 이러한 분석과 해체의 궁극적 지향점은 개념[施設, paññatti]의 해체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한 명칭이나 말 즉 개념에 속게 되면 죽음의 굴레에 매이게 된다고 부처님께서는 초기경의 도처에서 강조하신다. 나라는 개념적 존재는 오온으로 해체해서 보고 일체 존재는 12처로 해체해서 보고 세계는 18계로 해체해서 보고 생사문제는 12연기로 해체해서 보게 되면 온/처/계/연 등으로 설해지는 모든 존재(제법, 유위법, sabbe dhammā)의 무상/고/무아가 극명하게 드러나게 된다. 그래서 이러한 무상이나 고나 무아를 통찰함으로 해서 염오하고 탐욕이 빛바래고 그래서 해탈/열반/깨달음을 실현한다는 것이 초기경전의 도처에서 강조되고 있다. 특히 상윳따 니까야의 무더기 상윳따(S22)나 감각장소 상윳따(S35)나 인연 상윳따(S12) 등의 많은 경들은 이것을 강조하고 있다.

예를 들면 땅에 떨어진 머리칼을 보고 아무도 아름답다하지 않는다. 그러나 머리라는 특정한 곳에서 특정한 색깔과 특정한 형태로 여인이라는 전체상과 얼굴이라는 부분상에 묶여 있을 때 머리칼을 아름답다하고 그것에서 애욕을 일으킨다. 그러므로 머리칼을 ‘단지 머리칼’로만 보면 그것은 애욕의 대상이 아니다. 이영애의 눈과 코와 입술이 아무리 예쁘다할지라도 그것은 전체상을 이루고 있을 때 이야기다. 눈을 빼고 코를 분리하고 입술을 도려내어 알코올에 담가두었다면 아무도 그것에서 애욕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다. 만일 애욕을 일으킨다면 그야말로 성도착증환자이거나 또라이일 것이다. 그리고 머리칼, 눈, 코, 입술 등은 땅, 물, 불, 바람이라는 네 가지 근본물질들의 조합으로 구성된 것일 뿐이다. 이들을 아름답다 여기는 것은 우리가 관념적으로 취하는 전체상과 부분상에서 기인한 것이다. 이처럼 해체해서 보면 무상/고/무아가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러므로 명칭이나 말에 속지 않고 이런 것들은 단지 오온이고 12처이고 18계이고 조건발생(연기)일 뿐임에 사무쳐서 존재하는 모든 것을 온처계연으로 해체해서 보는 것이 수행의 핵심이다. 그래서 대념처경(D22) 등의 초기경전에 나타나는 수행 방법의 핵심도 나라는 존재를 몸/느낌/마음/심리현상들(신/수/심/법)로 해체해서 그 중의 하나에 집중(삼매, 사마타)하거나 그 중의 하나의 무상/고/무아를 해체해서 보는 것(통찰, 위빳사나)이다. 해체해서 보지 못하면 그는 불교적 수행을 하는 자가 아니라고 해야 한다. 나와 존재와 세상과 생사문제를 이처럼 온처계연으로 해체해서 보지 못하면 염오-이욕-소멸을 통해서 깨달음을 실현할 수 없다는 점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다. 뭉쳐두면 속고 해체하면 깨닫는다.

해체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이를 토대로 해체해서 보는 연습을 거듭할 때 우리는 깨달음 해탈 열반을 실현하게 된다는 것이 부처님의 고구정녕하신 가르침이라고 파악한다. 그래서 강의 제목을 “해체해서 보기 ― 초기불교의 교학과 수행”으로 잡았다.

부처님께서는 대반열반경에서 “법과 율이 그대들의 스승이 될 것이다.”라는 유훈을 남기셨다. 초기불교의 법수는 전통적으로 온/처/계/근/제/연(5온/12처/18계/22근/12연기)과 37조도품으로 정리가 된다.(청정도론) 전자는 교학의 핵심이 되는 법수이며 후자는 수행의 기본이 되는 가르침이다. 이 모든 가르침이 모두 해체해서 보기의 내용이라 할 수 있다. 이번 강좌를 통해서 이러한 초기불교의 기본 법수들을 초기경에 입각해서 정확하게 점검해보려 한다. 초기불교의 법수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토대가 될 때 불교 2600년사를 통해서 전개되어온 후대 모든 불교의 가르침이 일목요연하게 파악된다고 생각한다.

세계를 공(空, śūnya)으로 보려는 것이 반야중관의 직관적인 시각이고 세계를 깨달음의 입장에서 아름답게 꽃으로 장엄하여 보려는 것이 화엄의 종합적인 시각일 것이다. 여기에 반해 초기불교는 세계를 법으로 해체해서 봐서 깨달음을 실현하려는 해체적인 시각이다. 아직 깨달음을 실현하지도 못한 범부중생이 세상을 해체해서 무상/고/무아를 통찰하려는 생각은 추호도 내지 못하면서 깨달은 양하여 세계를 찬미하고 찬탄하여 횡설수설한다면 이 어찌 슬픈일이 아니겠는가. 직관이나 통합만을 강조해온 한국불교에는 초기불교의 해체적 시각이 너무너무 필요하다고 강조하고 싶다. 이번 강의가 부처님의 원음을 제대로 이해해서 올바른 불교적 인생관과 세계관과 실천관을 갖추는 계기가 되기를 기원한다.

 

 

 

초기불교의 교학과 수행 

제2강: 초기불교의 기본주제: 행복1

 

불교의 목적: 이고득락(離苦得樂)

인간은 행복을 추구한다. 경제행위, 정치행위, 문화행위, 철학행위, 의술행위, 종교행위 등 인간의 모든 행위는 행복해지기 위해서이다. 불교도 행복을 추구한다. 그래서 예부터 스님들은 불교의 목적을 이고득락(離苦得樂)이라고 표현하였다. 초기경에서 부처님께서는 다양한 행복을 말씀하셨다. 그것을 간추려보면 금생의 행복, 내생의 행복, 구경의 행복이 된다.

금생의 행복

부처님께서는 금생에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기술(sippa, vijja)을 익혀야 한다고 하셨다. 자기 소질에 맞는 기술을 익혀서 그것으로 세상에 기여를 하고 급여를 받거나 이윤을 창출하여 금생에 행복하게 사는 것이 인간이 추구하는 중요한 행복이다.

그러나 기술만으로 금생의 행복은 얻어지지 않는다. 아무리 그 사람이 전문직종의 기술을 가지고 있다하더라도 나쁜 인성을 가지고 있다면 그는 사회와 자신을 망가지게 한다. 바른 인성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도덕적으로 건전하고, 이웃에 봉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부처님께서는 이를 각각 지계와 보시로 강조하셨다. 이처럼 인간은 자기에게 맞는 기술을 익히고, 도덕적으로 건전하고, 봉사하는 삶을 살므로 해서 금생의 행복을 얻게 된다고 부처님께서는 강조하셨다.

내생의 행복

인간이 짓는 종교행위는 기본적으로 내생의 행복을 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은 금생에 종교행위를 함으로 해서 사후에 천상이나 극락세계에 태어나거나 천당에 가게 된다고 각 종교마다 이론은 다르지만 이구동성으로 사후세계의 행복을 말하고 있다.

불교에서는 인간이 짓는 의도적 행위(업)가 원인이 되어, 해로운 업(불선업)을 많이 지은 자는 지옥, 아귀, 축생의 삼악도에 태어나게 되고 유익한 업(선업)을 많이 지은 자는 인간과 천상에 태어나게 된다고 가르친다. 초기경에서 부처님께서는 인간이나 천상에 태어나는 방법으로 보시와 지계를 말씀하셨다. 한역 〈아함경〉에서는 이를 시.계.생천(施.戒.生天)이라고 옮겼다. 금생에 이웃에 봉사하고 승가에 보시하며, 도덕적으로 건전한 삶을 살면 내생에 천상에 태어나게 된다는 말씀이다.

궁극적 행복

부처님이 말씀하신 세 번째 행복은 궁극적인 행복(parama-sukha, 至福)이며 이것은 열반이다. 불교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깨달음, 해탈, 열반, 성불은 세상의 어떤 가치체계나 신념체계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불교만이 제시하는 고귀한 가르침이다. 스님들은 이러한 궁극적인 행복을 위해서 출가하여 수행을 하며, 재가 신자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자신의 가치체계와 신념체계로 받아들이는 것도 궁극적으로는 이러한 행복을 실현하기 위해서이다.

궁극적인 행복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개념적인 존재(施設)를 해체해서 법(dhamma)으로 환원해서 보아야하는데, 초기경에서 부처님께서는 그 구체적인 방법으로 사성제의 통찰, 팔정도의 완성, 오온의 무상.고.무아에 대한 철견(徹見), 12연기의 역관(逆觀), 계.정.혜의 실천 등으로 말씀하셨다.

초기경에서 보자면, 이러한 세 가지 행복을 바르게 추구하는 방법은 팔정도로 귀결이 된다. 그러므로 바른 견해, 바른 사유,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수단(직업), 바른 노력, 바른 마음챙김, 바른 삼매를 닦아서 금생의 행복과 내생의 행복과 궁극적인 행복을 추구하는 자야 말로 진정한 불자이다.

 

 

 

 

초기불교의 교학과 수행

제3강: 초기불교의 기본주제: 행복2(궁극적 행복)

 

 

부처님이 말씀하신 세 번째 행복은 궁극적인 행복(parama-sukha, 至福)이며 이것은 열반이다. 불교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깨달음, 해탈, 열반, 성불은 세상의 어떤 가치체계나 신념체계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불교만이 제시하는 고귀한 가르침이다. 스님들은 이러한 궁극적인 행복을 위해서 출가하여 수행을 하며, 재가 신자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자신의 가치체계와 신념체계로 받아들이는 것도 궁극적으로는 이러한 행복을 실현하기 위해서이다.

궁극적인 행복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개념적인 존재(施設)를 해체해서 법(dhamma)으로 환원해서 보아야하는데, 초기경에서 부처님께서는 그 구체적인 방법으로 사성제의 통찰, 팔정도의 완성, 오온의 무상.고.무아에 대한 철견(徹見), 12연기의 역관(逆觀), 계.정.혜의 실천 등으로 말씀하셨다.

그러면 어떻게 열반을 실현할 것인가

⑴ 사성제의 통찰을 통해서

나는 알아야 할 것(고성제)를 알았고,

닦아야 할 것(도성제)를 닦았고,

버려야 할 것(집성제)을 버렸다.

바라문이여, 그래서 나는 붓다, 즉 깨달은 사람이다.

(숫따니빠따 558게)

⑵ 중도(8정도)를 깨달음으로써

“비구들이여, 출가자는 이들 두 가지 극단을 따라서는 안 된다. 무엇이 둘인가? 감각적 욕망의 즐거움에 탐닉하는 것은 저열하고 촌스럽고 범속하며 고결하지 않고 해로움과 함께하나니 이것이 (하나의 극단이다.) 자기 학대에 몰두하는 것은 저열하고 촌스럽고 범속하며 고결하지 않고 해로움과 함께하나니 이것이 (다른 하나의 극단이다.) 이들 두 극단을 따르지 않고 여래는 중도를 철저하게 깨닫고 눈을 만들고 지혜를 만들었나니 이 (중도는) 고요함과 최상의 지혜와 바른 깨달음과 열반으로 인도한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중도인가? 바로 이 여덟 가지로 구성된 성스러운 도(八正道)이니 바른 견해(正見), 바른 사유(正思惟), 바른 말(正語), 바른 행위(正業), 바른 생계(正命), 바른 정진(正精進), 바른 마음챙김(正念), 바른 삼매(正定)이다.”(깟짜야나곳따 경, S56:11)

⑶ 온-처-계의 무상/고/무아를 통찰함을 통해서

“비구들이여, 물질은 무상하고 … 괴로움이고 … 무아이고, 느낌은 … 인식은 … 심리현상들은 … 알음알이는 무상하다 … 괴로움이다 … 무아이다.

비구들이여, 이렇게 보는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물질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느낌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인식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의도적 행위들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알음알이에 대해서도 염오한다. 염오하면서 탐욕이 빛바래고, 탐욕이 빛바래므로 해탈한다. 해탈하면 해탈했다는 지혜가 있다. ‘태어남은 다했다. 청정범행(梵行)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 해 마쳤으며,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고 꿰뚫어 안다.”(무상 경 등, S22:12~14)

염오(nibbidā) - 이욕(virāga) - 소멸(nirodha)

염오(nibbidā) - 이욕(virāga) - 소멸(nirodha) - 고요(upasama) - 최상의 지혜(abhiññā) - 바른 깨달음(sambodha) - 열반(nibbāna)

염오 - 이욕 - 해탈(vimutti) - 해탈지(vimuttiñāṇa)

⑷ 연기의 순관과 역관을 통해서

“이와 같이 참으로 무명을 조건으로 의도적 행위[行]들이, 의도적 행위들을 조건으로 알음알이가, … 이와 같이 전체 괴로움의 무더기[苦蘊]가 발생한다. 비구들이여, 나에게는 ‘일어남, 일어남’이라고 전에 들어 보지 못한 법들에 대한 눈[眼]이 생겼다. 지혜[智]가 생겼다. 통찰지[慧]가 생겼다. 영지[明]가 생겼다. 광명[光]이 생겼다.” …

“이와 같이 참으로 무명이 남김없이 빛바래어 소멸하기 때문에 의도적 행위[行]들이 소멸하고, 의도적 행위들이 소멸하기 때문에 알음알이가 소멸하고, … 이와 같이 전체 괴로움의 무더기[苦蘊]가 소멸한다. 비구들이여, 나에게는 ‘소멸, 소멸’이라고 전에 들어 보지 못한 법들에 대한 눈[眼]이 생겼다. 지혜[智]가 생겼다. 통찰지[慧]가 생겼다. 영지[明]가 생겼다. 광명[光]이 생겼다.”(사꺄무니 고따마 경, S12:10)

결론적으로 사성제/8정도/5온/12연기 등으로 설해지고 있는 법(dhamma)을 봄을 통해서 해탈, 열반, 깨달음을 실현한다.

법을 보는 자는 나를 본다(yo dhammaṁ passati, so maṁ passati)

법과 율이 그대들의 스승이 될 것이다.(대반열반경, D16)

법을 보기 위해서 개발된 전문적인 기법(테크닉)이 간화선이나 위빳사나 등의 수행법이다.

개념(paññatti)과 법(dhamma)의 엄정한 구별이 중요하다.

 

 

 

 

 

초기불교의 교학과 수행

제4강: 초기불교의 핵심: 법(法, dhamma, dharma)

 

 

⑴ 초기경의 도처에서 부처님은 법을 강조하셨다.

① 법을 의지하여 머무르리라

“아무도 존중할 사람이 없고 의지할 사람이 없이 머문다는 것은 괴로움이다. 참으로 나는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을 존경하고 존중하고 의지하여 머물러야 하는가?”(A4:21)

앙굿따라 니까야「우루웰라 경」1(A4:21)에 나타나는 세존의 성찰이다. 세존께서는 깨달음을 성취하신 뒤 아직 아무에게도 자신의 깨달음을 드러내지 않으셨을 때에(주석서에 의하면 세존께서 깨달음을 성취하신 뒤 다섯 번째 7일이라고 한다. - AA.īi.24) 우루웰라의 네란자라 강둑에 있는 염소치기의 니그로다 나무 아래에 앉아서 과연 나는 누구를 의지할 것인가를 두고 진지하게 사유하셨다. 경에 의하면 세존께서는 자신이 의지할 자를 찾아서 신들을 포함하고 마라를 포함하고 사문․바라문을 포함한 하늘과 인간의 모든 세상 모든 존재를 다 살펴보셨지만 세존께서 구족한 계(戒)와 삼매[定]와 통찰지[慧]와 해탈보다 더 잘 구족한 자를 그 누구도 그 어디에서도 보지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마침내 세존께서는 이 문제에 대해서 이렇게 결론지으신다.

“참으로 나는 내가 바르게 깨달은 바로 이 법을 존경하고 존중하고 의지하여 머물리라.”(A4:21)

② 법의 바퀴를 굴리다

이러한 법을 전개하시는 것을 불교에서는 전법륜(轉法輪, dhamma-cakka-pavattana)이라하며 최초에 팔정도를 중심으로 중도를 천명하신 가르침을 초전법륜경(S56:11)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처럼 세존께서는 법을 근본으로 하셨다.

그리고 “법을 의지하여 머물리라.”는 이러한 부처님의 태도는 부처님이 전법과 교화를 하신 45년간 내내 “법을 의지처로 삼고[法歸依] 법을 섬으로 삼아라[法燈明].”는 가르침과 “자신을 의지처로 삼고[自歸依] 자신을 섬으로 삼아라[自燈明].”는 가르침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잘 알고 있다. 우리는 또한 세존께서 반열반하시기 직전에 남기신 첫 번째 유훈도 바로 법과 율이 그대들의 스승이 될 것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아난다 존자도 세존께서 반열반하신지 얼마 뒤에 고빠까 목갈라나 바라문과 나눈 대화에서, 비구들은 법을 의지처로 한다고(dhamma- paṭisaraṇa) 바라문에게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M109/īi.9)

③ 법을 보는 자는 나를 본다

“왁깔리여, 그만 하여라. 그대가 이 썩어문드러질 이 몸을 봐서 무엇을 하겠는가? 왁깔리여, 법을 보는 자는 나를 보고 나를 보는 자는 법을 본다. 왁깔리여, 법을 볼 때 나를 보고 나를 볼 때 법을 보기 때문이다.”(왁깔리 경(S22:87) §8)

그리고는 오온의 무상/고/무아를 설하시고 염오-이욕-해탈-해탈지를 설하셨다.

“바라문이여, 그분 세존께서는 일어나지 않은 도를 일으키신 분이고 생기지 않은 도를 생기게 하신 분이고 설해지지 않은 도를 설하신 분이고 도를 아시는 분이고 도를 발견하신 분이고 도에 정통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제자들은 그 도를 따라가면서 머물고 나중에 그것을 구족하게 됩니다.”(고빠까 목갈라나 경(M108) §5)

④ 마지막 유훈 ― 법과 율이 그대들의 스승이 될 것이다.

“아난다여, 아마 그대들에게 ‘스승의 가르침은 이제 끝나버렸다. 이제 스승은 계시지 않는다.’라는 이런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아난다여, 그러나 그렇게 생각해선 안 된다. 아난다여, 내가 가고 난 후에는 내가 그대들에게 가르치고 천명한 법과 율이 그대들의 스승이 될 것이다.”(「대반열반경」(D16) §6.1)

이처럼 세존께서는 깨달음을 성취하신 직후에도 스스로 깨달은 법을 의지해서 머물리라고 하셨고, 45년간 제자들에게 설법하실 때에도 법을 강조하셨으며 이제 사바세계에서 자취를 감추시는 반열반의 마지막 자리에서도 법이 그대들의 스승이 될 것이라 유훈하셨다. 그러므로 세존께서 반열반하고 계시지 않는 지금에 사는 우리가 뼈가 시리고 가슴이 사무치게 존중하면서 배우고 궁구하고 이해하고 실천해야 할 것은 바로 이 법(dhamma)이 아니고 그 무엇이겠는가?

부처님께서는 “법과 율이 그대들의 스승이 될 것이다.”라고 하셨다. 그래서 결집에 참석한 500 아라한들은 일단 법의 바구니(Dhamma-Pitaka = Sutta-Pitaka, 經藏)와 율의 바구니(Vinaya-Pitaka, 律藏)라는 두 개의 바구니를 먼저 설정하였다. 그 가운데서 율의 바구니부터 먼저 채우기로 결의하였는데 합송에 참석한 아라한들은 “마하깟사빠 존자시여, 율은 부처님 교법의 생명(āyu)입니다. 율이 확립될 때 교법도 확립됩니다. 그러므로 율을 첫 번째로 합송해야 합니다.”라고 결정하였기 때문이다.

[요약]

담마(Dhamma, 법): 온처계근제연 37조도품

아비담마(Abhidhamma, 對法, 勝法): 아비담마 칠론:『담마상가니(Dhammasaṅgaṇī, 法集論),『위방가(Vibhaṅga, 分別論)』,『다뚜까타(Dhātukathā, 界論)』, 『뿍갈라빤냣띠(Puggalapaññatti, 人施設論)』,『까타왓투(Kathāvatthu, 論事)』,『야마까(Yamaka, 雙論)』, 『빳타나(Paṭṭhāna, 發趣論)』

위나야(Vinaya, 律): 두 가지 위방가(Sutta-vibhaṅga, 경의 분석, 비구계목과 비구니계목을 뜻함)

아비위나야(Abhivinaya, 對律): 대품, 소품, 부록(附錄): 주석서들과 복주서들에서는 이 둘을 아비위나야(Abhivinaya)라고 이름하기도 한다)

[아비담마와 아비위나야]

아비담마와 아비위나야라는 술어는 이미 초기경전에 나타난다.(디가 니까야 합송경(D33) §3.3과 앙굿따라 니까야 망아지 경(A3:137), 망아지 경(A9:22) 등)

주석서는 이렇게 설명한다.

“여기서 ‘아비담마(abhidhamma)와 아비위나야(abhivinaya)에 대해서’란 담마(法)와 아비담마(對法)와 위나야(律)와 아비위나야(對律)의 네 가지라고 알아야 한다. 이 가운데서 담마(法)는 경장이요 아비담마(對法)는 칠론(七論)이요 위나야(律)는 [비구계와 비구니계의] 두 가지 분별이고 아비위나야(對律)는 칸다까(Khandhaka, 犍度)와 빠리와라(附錄, 補遺)이다. 혹은 경장과 논장이 담마(법)이고 도(道)와 과(果)는 아비담마(대법)이며, 모든 율장은 위나야(율)이고 오염원을 가라앉게 하는 것이 아비위나야(대율)이다. 이처럼 담마와 아비담마와 위나야와 아비위나야가 모두 여기에 해당된다.”(DA.īi.1047)

아비담마는 법에 대한 것[對法]이란 뜻이고 아비위나야는 율에 대한 것[對律]이란 뜻이다. 주석서의 설명처럼 일반적으로 담마(법)는 경장을, 아비담마(대법)는 논장을, 위나야(율)는 율장의 경분별(비구계목과 비구니계목)을, 아비위나야(대율)는 율장의 대품과 소품과 부록을 말한다. 아비위나야는 따로 독립된 장으로 결집하지 않고 율장에 포함시켰다.

이처럼 세존께서는 깨달음을 성취하신 그 때부터 마지막 반열반에 드시는 순간까지 법을 생명으로 여기셨다. 그러므로 우리도 법을 생명으로 삼아야한다.

⑵ 법이란 무엇인가?

① 교학으로서의 법: 청정도론을 위시한 주석서들은 교학으로서의 법을 온/처/계/근/제/연(蘊處界根諦緣)으로 정리하였다.

온(蘊, 무더기, khandha): 5온 = 물질[色, rūpa], 느낌[受, vedanā], 인식[想, saññā], 심리현상들[行, saṅkhārā], 알음알이[識, viññāṇa]의 다섯 가지 무더기이다.

처(處, 감각장소, āyatana): 12처 = 눈/귀/코/혀/몸/마음(眼耳鼻舌身意)의 여섯 가지 감각장소[六內處]와 형색/소리/냄세/맛/감촉/마음(色聲香味觸法)의 여섯 가지 대상[六外處]인 12가지 감각장소이다.

계(界, 요소, dhātu): 12처의 마음(마노)에서 여섯 가지 알음알이를 독립시켜서 모두 18가지가 된다. 즉 눈/귀/코/혀/몸/마음(眼耳鼻舌身意)의 여섯 가지와 형색/소리/냄세/맛/감촉/마음(色聲香味觸法)의 여섯 가지와 눈의 알음알이[眼識], 귀의 알음알이, 코의 알음알이, 혀의 알음알이, 몸의 알음알이, 마노의 알음알이[意識]의 여섯을 합하여 18가지가 된다.

근(根, 기능, indriya): 모두 22가지가 있다. 22가지는 아래 제13강의 자료를 참조할 것.

제(諦, 진리, sacca): 4제 =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고성제), 괴로움의 일어남의 성스러운 진리(집성제), 괴로움의 소멸의 성스러운 진리(멸성제),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의 성스러운 진리(도성제)의 네 가지 진리이다.

연(緣, 조건발생, paccaya, pat(iccasamuppāda): 12연기를 말한다.

① 수행으로서의 법: 주석서들은 37조도품(助道品, 菩提分法, bodhipakkhiya-dhammā)을 들고 있다.

4념처(마음챙김의 확립), 4정근(바른 노력), 4여의족(성취수단), 5근(기능), 5력(힘), 7각지(깨달음의 구성요소), 8정도의 일곱 가지로 분류되며 법수로는 모두 37가지가 된다. 이 법수들에 대해서는 모두 해당 강의 자료들을 참조할 것.

이러한 불교의 기본법수들을 불교에서는 법(dhamma/dharma)이라 한다. 불교교학에서 법은 크게 두 가지 의미로 쓰인다. 하나는 부처님 가르침을 뜻하고 다른 하나는 존재를 구성하는 기본 단위(고유성질을 가진 것)를 뜻한다. 이를 구분하기 위해서 전자는 Dhamma로 후자는 dhamma로 구분해서 표기하기도 한다. 위에서 나열한 온처계근제연과 37조도품은 부처님 가르침으로서의 법(Dhamma)이다. 아비담마에서는 고유성질을 가진 것을 법(dhamma)이라고 정의한다.

[고유성질[自性]을 가진 것이 법이다]

이처럼 불교에서는 일찍부터 존재일반을 어떤 기준으로 일목요연하게 재구성해서 설명하였다. 그 기준을 불교에서는 법(dhamma)이라고 한다. 불교학의 토대가 되는 아비달마에서는 법을 ‘고유성질(sabhava)을 가진 것(sabhāvaṁ dhārenti)’이라고 정의한다. 예를 들면 지대(地大)는 견고성을, 탐욕(貪)은 대상을 끌어당기는 성질을, 성냄(瞋)은 대상을 밀쳐내는 성질을 각각 고유성질로 가진다. 그래서 75법이니 100법이니 하는 말은 이 세상의 존재일반은 모두 75가지 혹은 100가지의 고유성질을 가진 법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4위 82법, 5위 75법, 5위 100법]

이러한 법들은 크게 몇 가지 범주로 무리 지어져 있는데 이 범주를 위(位)라고 부른다. 그래서 5위라는 말은 이러한 제법은 다섯 가지 큰 범주로 분류된다는 뜻인데, 그것은 마음(心, 心王), 마음과 함께 일어나는 심리현상들(心所), 마음과 함께 하지 않는 현상들(心不相應行), 물질(色), 무위(無爲)의 다섯이다. 한편 가장 오래된 체계인 상좌부 아비담마에서는 마음과 함께 하지 않는 현상들(心不相應行)이란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4위가 된다.

이렇게 하여 설일체유부에서는 마음 1가지, 심리현상들 46가지, 마음과 함께 하지 않는 현상 14가지, 물질 11가지, 무위법 3가지하여 모두 5위75법들을 인정하고, 비슷한 방법으로 유식에서는 5위100법을, 상좌부는 4위82법을 설한다. 그래서 5위100법이니 5위75법이니 하는 용어가 생긴 것이다. 비록 각 학파마다 일체법(諸法)의 개수를 조금씩 다르게 설정하지만, 존재일반을 이처럼 여러 가지 법들로 분해하고 해체해서 통찰하는 것은 불교의 모든 학파에서 한결 같다.

⑶ 법은 해체해서 보기이다

이처럼 불교에서는 존재를 온처계근제연의 법들로 해체해서 설하고 있다. 그러므로 초기불교와 아비담마의 특징은 해체해서 보기이다.

해체라는 용어는 이미 초기경전 여러 곳에서 나타나고 있는데 부처님 제자들 가운데 영감이 가장 뛰어난 분으로 칭송되는 왕기사 존자는 부처님을 “부분들로 해체해서 설하시는 분”(S8:8)이라고 찬탄하고 있다. 여기서 해체는 위밧자(vibhajja)를 옮긴 것이다. 그리고 이 위밧자라는 술어는 빠알리 삼장을 2600년 동안 고스란히 전승해온 상좌부 불교를 특징짓는 말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들은 스스로를 위밧자와딘(해체를 설하는 자들)이라 불렀다.

그러면 무엇을 해체하는가? 개념[施設, paññatti]을 해체한다. 나라는 개념, 세상이라는 개념, 이영애라는 개념, 돈이라는 개념, 권력이라는 개념, 신이라는 개념을 해체한다. 이런 것들에 속으면 그게 바로 생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명칭이나 언어 즉 개념에 속게 되면 죽음의 굴레에 매이게 된다고 부처님께서는 초기경전 도처에서 강조하셨다.

[고정관념의 해체와 무상/고/무아의 통찰]

중요한 것은 이렇게 해체해서 보는 이유이다. 그것은 첫째, 존재하는 모든 것을 이처럼 제법들로 분해하고 해체해서 보면, 자아(我)니 인간(人)이니 중생이니 영혼(壽者)이니 우주니 하는 무슨 변하지 않는 불변의 실체가 있다는 착각이나 고정관념을 척파할 수 있기 때문이다.(인무아) 둘째는 이렇게 법들로 해체하면, 이러한 법들의 찰나성(無常)이 극명하게 드러나고, 찰나를 봄으로 해서 제법이 괴로움(苦)일 수밖에 없음에 사무치게 되고, 제법은 모두가 독자적으로는 생길 수 없는 연기적 흐름(無我)이라는 사실이 극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법무아).

자아니 인간이니 하는 개념적 존재(施設, 빤냣띠, 산냐)로 뭉뚱그려두고는 그것의 무상이나 고나 무아를 철견한다는 것은 불가능이다. 그래서 아비달마는 존재일반을 철저히 법들로 분해해고 해체해서 제시하는 것이다. 아비달마에서는 법의 찰나성을 통찰한 깨달음을 무상(無相)해탈이라 하고, 괴로움과 무아를 철견한 깨달음을 각각 무원(無願)해탈과 공(空)해탈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화엄경 등 대승경전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해체해서 보기는 초기불교의 생명]

그래서 지금까지 강의에서 살펴본 것처럼 나라는 개념적 존재는 5온으로 해체해서 보고, 일체 존재는 12처로 해체해서 보고, 세계는 18계로 해체해서 보고, 생사문제는 12연기로 해체해서 보게 되면, 온/처/계/연 등으로 설해지는 조건지워진 법들의 무상/고/무아가 극명하게 드러나게 된다. 이처럼 존재를 법들로 해체해서 그들의 무상이나 고나 무아를 통찰하여, 염오(厭惡, 넌더리, 역겨움, 구토)하고 탐욕이 빛바래고[離慾] 그래서 해탈/열반/깨달음을 실현한다는 것이 수많은 초기경전의 일관된 흐름이다.

해체라는 관문을 넘지 못하고 불교를 논하면 안된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왜? 그는 부처님 제자가 아니요, 불교적 인생관, 불교적 세계관, 불교적 신념을 가진 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아비담마/아비달마와 유식처럼 분석을 강조하던, 반야중관처럼 직관을 강조하던, 화엄처럼 종합을 강조하던, 그것은 불교적 방법론인 해체에 토대해야하기 때문이다. 직관을 강조하는 반야부의 여러 경들조차 해체 끝에 드러나는 법의 자성을 강조하는 것을 보고 필자는 놀란 적이 있다. 이런 토대위에서 그들은 무자성과 공의 직관을 다그치는 것이다.

어느 대통령은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고 했다. 부처님은 말씀하신다. “뭉쳐두면 속고 해체하면 깨닫는다.” 법들로 해체해서 보자.

 

 

 

초기불교의 교학과 수행

제5강: 초기불교의 진리 ― 사성제: ① 고성제와 집성제를 중심으로

 

⑴ 모든 가르침은 사성제로 총섭된다.

“도반들이여, 예를 들면 움직이는 모든 생명들의 발자국들은 모두 코끼리 발자국에 총섭되고 코끼리 발자국이야말로 그 크기로서 최상이라고 불리는 것과 같습니다. 도반들이여, 그와 같이 어떤 유익한 법[善法]이던 그것들은 모두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四聖諦]에 총섭됩니다. 무엇이 넷인가?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苦聖諦], 괴로움의 일어남의 성스러운 진리[苦集聖諦], 괴로움의 소멸의 성스러운 진리[苦滅聖諦],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의 성스러운 진리[苦滅道聖諦]입니다.” (맛지마 니까야 코끼리 발자국 비유경(M28) §2)

“그는 모든 번뇌를 소멸하는 지혜[漏盡通]로 마음을 향하게 하고 기울게 한다. 그는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이것이 괴로움의 일어남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이것이 번뇌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이것이 번뇌의 일어남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이것이 번뇌의 소멸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이것이 번뇌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이와 같이 알고 이와 같이 보는 그는 감각적 욕망의 번뇌[慾惱]로부터 마음이 해탈한다. 존재의 번뇌[有惱]로부터 마음이 해탈한다. 무명의 번뇌로부터 마음이 해탈한다. 해탈했을 때 해탈했다는 지혜가 있다. ‘태어남은 다했다. 청정범행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 해 마쳤다.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꿰뚫어 안다.”(사문과경(D2) §97 등)

“비구들이여, 괴로움을 본 사람은 괴로움의 일어남도 보고 괴로움의 소멸도 보고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도 본다. 비구들이여, 괴로움의 일어남을 본 사람은 괴로움도 보고 괴로움의 소멸도 보고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도 본다. 비구들이여, 괴로움의 소멸을 본 사람은 괴로움도 보고 괴로움의 일어남도 보고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도 본다. 비구들이여,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을 본 사람은 괴로움도 보고 괴로움의 일어남도 보고 괴로움의 소멸도 본다.”(가왐빠띠 경(S56:30) §4)

진리[諦]로 옮긴 sacca는 √as(이다, 있다, to be)에서 파생된 중성명사이다. √as는 ‘있다, 이다’를 뜻하는 영어의 be동사와 꼭 같이 범어 일반에서 널리 사용되는 어근이다. 이것의 현재능동분사가 sat이고 여기에다가 가능분사를 만드는 어미 -ya를 첨가하여 satya라는 형용사를 만들어 이것이 중성명사로 쓰인 것이다. satya의 빠알리 형태가 sacca 이다. 그래서 형용사로 쓰이면 진실한, 사실인 등의 의미이다. 중성명사로서는 진실, 진리, 사실 , 실제란 의미로 쓰인다.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苦聖諦, dukkha-ariya-sacca]

괴로움의 일어남의 성스러운 진리[集聖諦, dukkha-samudaya-ariya-sacca]

samudaya = saṁ(함께) + ud(위로) + √i (가다, to go)

괴로움의 소멸의 성스러운 진리[滅聖諦, dukkha-nirodha-ariya-sacca]

nirodha = ni(아래로) + √rudh(방해하다, to obstruct)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의 성스러운 진리

[道聖諦, dukkha-nirodha-gāmini-paṭipadā-ariya-sacca]

paṭipadā = prati(~에 대하여) + √pad(가다, to go): 발로 실제 길을 걸어가는 실천

적인 의미가 강함. 중도의 도도 이 단어이다.

지난 번 강의에서 궁극적인 행복인 열반은 ① 사성제를 관통함을 통해서, ② 팔정도의 실현을 통해서, ③ 온/처/계의 무상고무아를 통찰하여 염오-이욕-소멸을 통해서, ④ 12연기의 순관/역관을 통해서라는 네 가지로 실현된다고 했다. 그런데 이 넷은 궁극적으로는 사성제로 귀결된다. 팔정도는 사성제의 네 번째인 도성제의 내용이다. 그러므로 팔정도는 사성제에 포함된다. 물론 팔정도의 처음인 바른 견해(정견)의 내용은 사성제를 아는 것이다. 오온/오취온은 사성제의 첫 번째인 고성제의 내용이다. 그러므로 온/처/계의 가르침은 사성제에 포함된다. 12연기의 순관(順觀, 流轉門, anuloma)은 사성제의 고성제와 집성제에 해당하고 역관(逆觀, 還滅門, paṭiloma)은 사성제의 멸성제와 도성제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12연기의 순관과 역관은 사성제에 포함된다.

⑵ 고성제는 ① 사고팔고(四苦八苦)와 ② 삼성(三性)으로 정리된다.

① 사고팔고(四苦八苦)

“비구들이여, 이것이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이다. 태어남도 괴로움이다. 늙음도 괴로움이다. 병도 괴로움이다. 죽음도 괴로움이다. 싫어하는 [대상]들과 만나는 것도 괴로움이다. 좋아하는 [대상]들과 헤어지는 것도 괴로움이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도 괴로움이다. 요컨대 취착의 대상이 되는 다섯 가지 무더기[五取蘊]들 자체가 괴로움이다.”(상윳따 니까야 초전법륜 경(S56:11) §5)

일반적으로 사고팔고로 정의된다. 생/노/병/사와 愛別離苦, 怨憎會苦, 求不得苦, 略 五陰盛苦이다. 정리하면 생사문제가 된다. 출가는 생사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다.

② 괴로움의 세 가지 성질[三性]

“도반 사리뿟따여, '괴로움, 괴로움'이라고 합니다. 도반이여, 도대체 어떤 것이 괴로움입니까?”

“도반이여, 세 가지 괴로움의 성질[苦性, dukkhatā]이 있습니다. 그것은 고통스런 괴로움의 성질[苦苦性], 형성된 괴로움의 성질[行苦性], 변화에 기인한 괴로움의 성질[壞苦性]입니다. 도반이여, 이러한 세 가지 괴로움의 성질이 있습니다.” - (괴로움 경(S38:14) §3 ― 잠부카다까 유행승과 사리뿟따 존자의 대화)

고고성(苦苦性, dukkha-dukkhatā): 중생의 삶은 고통스럽기 때문에 괴로움이다.

괴고성(壞苦性, viparinnāma-dukkhatā): 아무리 큰 행복일지라도 끝내 변하고 말기 때문에 괴로움이다.

행고성(行苦性, saṁkhāra-dukkhatā): 본질적으로는 오온으로 형성되어 있는 것을 ‘나’라거나 ‘내 것’으로 취착하기 때문에(五取蘊) 괴로움이다.

이 세 가지는 청정도론 XVI:35에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나타나고 있다.

“①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괴로운 느낌은 고유성질로서도, 이름에 따라서도 괴롭기 때문에 고통스러운 괴로움[苦苦]이라 한다. ② 즐거운 느낌은 그것이 변할 때 괴로운 느낌이 일어날 원인이 되기 때문에 변화에 기인한 괴로움[壞苦]이라 한다. ③ 평온한 느낌과 나머지 삼계에 속하는 형성된 것들[行, saṅkhāra]은 일어나고 사라짐에 압박되기 때문에 형성된 괴로움[行苦]이라 한다.”

⑶ 집성제(集聖諦, 일어남의 성스러운 진리)는 갈애요 갈애는 셋으로 정리된다

① 갈애(渴愛, taṇhā)

taṇhā는 동사 √tṛṣ(to be thirsty)에서 파생된 명사이다. 문자적인 의미는 ‘목마름’이다. 그래서 목마를 갈(渴)자를 넣어서 갈애(渴愛)로 옮기고 있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괴로움의 일어남의 성스러운 진리[苦集聖諦]이다. 그것은 바로 갈애이니, 다시 태어남[再有]을 가져오고(ponobbhavikā) 환희와 탐욕이 함께 하며 여기저기서 즐기는 것이다. 즉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慾愛], 존재에 대한 갈애[有愛],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갈애[無有愛]가 그것이다.”(상윳따 니까야 초전법륜 경(S56:11) §6)

여기서 주목할 것은 갈애는 다시 태어남을 유발하는 근본원인이라고 부처님이 설하신 것이다. 이 갈애가 근본원인이 되어 중생들은 끝모를 생사윤회를 거듭하는 것이다. 물론 갈애만이 괴로움의 원인은 아니다. 무명과 성냄이나, 성냄, 질투, 인색 등의 불선법들은 모두 괴로움의 원인이 되고 생사윤회의 원인이 된다. 부처님께서는 갈애를 가장 대표적인 원인으로 들고 계시는 것이다.

“‘환희와 탐욕이 함께 하며(nandi-rāga-sahagatā)’라는 것은 [갈애가] 환희와 탐욕과 뜻으로는 하나라는 뜻이다.”(DA.īi.799)

② 욕애(慾愛), 유애(有愛), 무유애(無有愛):

욕애(慾愛, kāma-taṇhā):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 -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慾愛, kāma-taṇhā]’란 다섯 가닥의 감각적 욕망에 대한 탐욕의 동의어이다.”(DA.īi.800)

유애(有愛, bhava-taṇhā): 색계․무색계에 대한 갈애(常見) - “‘존재에 대한 갈애[有愛, bhava-taṇhā]’란 존재를 열망함에 의해서 생긴 상견(常見, sassata-diṭṭhi)이 함께 하는 색계와 무색계의 존재에 대한 탐욕과 禪을 갈망하는 것의 동의어이다.”(DA.īi.800)

무유애(無有愛,, vibhava-taṇhā): 비존재에 대한 갈애(斷見) -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갈애[無有愛, vibhava-taṇhā]’라는 것은 단견(斷見, uccheda-diṭṭhi)이 함께 하는 탐욕의 동의어이다.”(DA.īi.800)

⑶ [갈애에 대한 연기적 고찰]

“다시 비구들이여, 이런 이 갈애는 어디서 일어나서 어디서 자리잡는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 있으면 거기서 이 갈애는 일어나고 거기서 자리잡는다.

그러면 세상에서 어떤 것이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인가?

① 눈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귀는 … 코는 … 혀는 … 몸은 … 마노는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는 일어나고 여기서 자리잡는다.

② 형상은 … 소리는 … 냄새는 … 맛은 … 감촉은 … 마음의 대상[法]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는 일어나고 여기서 자리잡는다.

③ 눈의 알음알이는 … 마노의 알음알이는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는 일어나고 여기서 자리잡는다.”

④ 눈의 감각접촉[觸]은 … ⑤ 눈의 감각접촉에서 생긴 느낌은 … ⑥ 눈의 인식은 … ⑦ 눈의 의도는 … ⑧ 눈의 갈애는 … ⑨ 눈의 일으킨 생각은 … ⑩ 눈의 지속적인 고찰[伺]은 … 귀의 지속적인 고찰은 … 코의 지속적인 고찰은 … 혀의 지속적인 고찰은 … 몸의 지속적인 고찰은 … 마노의 지속적인 고찰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는 일어나고 여기서 자리잡는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괴로움의 일어남의 성스러운 진리라 한다.”(디가 니까야 대념처경(D22) §19)

6근-6경-6식-6촉-6수-6상-6사-6애-6심-6사

 

 

 

 

 

불교TV 강의 자료

제6강: 초기불교의 진리 ― 사성제: ② 멸성제와 도성제를 중심으로

 

 

⑴ 멸성제

① 멸성제는 열반이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의 성스러운 진리[苦滅聖諦]이다. 그것은 바로 그러한 갈애가 남김없이 빛바래어 소멸함, 버림, 놓아버림, 벗어남, 집착 없음이다.”(상윳따 니까야 초전법륜 경(S56:11) §7)

“‘남김없이 빛바래어 소멸함(asesa-virāga-nirodha)’이라는 등은 모두 열반의 동의어들이다. 열반을 얻으면 갈애는 남김없이 빛바래고 소멸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갈애가 남김없이 빛바래어 소멸함이라고 설하셨다.

열반은 하나이지만 그 이름은 모든 형성된 것들의 이름과 반대되는 측면에서 여러 가지이다. 즉 남김없이 빛바램, 남김없이 소멸함, 버림, 놓아버림, 벗어남, 집착 없음, 탐욕의 소멸, 성냄의 소멸, 어리석음의 소멸, 갈애의 소멸, 취착 없음, 생기지 않음, 표상 없음, 원함 없음, 업의 축적이 없음, 재생연결이 없음, 다시 태어나지 않음, 태어날 곳이 없음, 태어나지 않음, 늙지 않음, 병들지 않음, 죽지 않음, 슬픔 없음, 비탄 없음, 절망 없음, 오염되지 않음이다.”(DA.īi.801) - 26개의 동의어를 들고 있음. 후대에는 모두 43개의 동의어를 듦.

② 열반은 탐진치의 소멸이다

“도반 사리뿟따여, '열반, 열반'이라고 합니다. 도반이여, 도대체 어떤 것이 열반입니까?”

“도반이여, 탐욕의 소멸, 성냄의 소멸, 어리석음의 소멸 ― 이를 일러 열반이라 합니다.”(상윳따 니까야 열반 경(S38:1) §3)

주석서적인 논의를 종합하면 열반은 출세간도를 체험하는 순간(magga-kkhaṇa)에 체득되는 조건 지워지지 않은 상태(asaṅkhata)를 뜻한다. 이러한 조건 지워지지 않은 상태를 체득하는 순간에 번뇌가 소멸하기(kilesa-kkhaya) 때문에 열반은 ‘탐욕의 소멸, 성냄의 소멸, 어리석음의 소멸’이라고 불리는 것이지, 단순히 탐/진/치가 없는 상태로 쇠약해지고 무기력해진 것이 열반은 아니다.(SA.īi.88 참조)

③ 갈애의 소멸에 대한 연기적 고찰

“다시 비구들이여, 그런 이 갈애는 어디서 없어지고 어디서 소멸되는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 있으면 거기서 이 갈애는 없어지고 거기서 소멸된다. 그러면 세상에서 어떤 것이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인가?

① 눈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귀는 … 코는 … 혀는 … 몸은 … 마노는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는 없어지고 여기서 소멸된다.

② 형상은 … ③ 눈의 알음알이는 … ④ 눈의 감각접촉[觸]은 … ⑤ 눈의 감각접촉에서 생긴 느낌은 … ⑥ 눈의 인식은 … ⑦ 눈의 의도는 … ⑧ 눈의 갈애는 … ⑨ 눈의 일으킨 생각은 … ⑩ 눈의 지속적인 고찰[伺]은 … 귀의 지속적인 고찰은 … 코의 지속적인 고찰은 … 혀의 지속적인 고찰은 … 몸의 지속적인 고찰은 … 마노의 지속적인 고찰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는 없어지고 여기서 소멸된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괴로움의 소멸의 성스러운 진리라 한다.”(디가 니까야 대념처경(D22) §20)

6근-6경-6식-6촉-6수-6상-6사-6애-6심-6사

④ [열반은 버려서 실현된다]

초기불교의 궁극적인 메시지를 하나로 말해보라면 그것은 열반이다. 두 가지로 표현해보라면 열반과 열반에 이르는 길이다. 부처님께서 특히 출가자에게 고구정녕하게 말씀하신 메시지는 바로 이것이다. 열반이 무엇인가? 한 마디로 말하자면 버림이다. 그래서 초기경의 도처에서 열반은 “모든 형성된 것들[行]이 가라앉음, 모든 재생의 근거를 놓아버림[放棄], 갈애의 소진, 탐욕의 빛바램[離慾], 소멸, 열반이다.”(A3:32 등)로 표현되고 있고, “탐욕의 소멸, 성냄의 소멸, 어리석음의 소멸”(S38:1 등)이라고도 설해지고 있으며, “[세속을] 전적으로 역겨워함[厭惡, 넌더리], 욕망의 빛바램, 소멸, 고요함, 최상의 지혜, 바른 깨달음, 열반”(D14 등)이라는 문맥에서도 많이 나타난다.

이것을 실현하는 길이 바로 도, 저 팔정도요, 더 풀어서 말하면 37가지 깨달음의 편에 있는 법들(37조도품)이다. 이런 열반의 실현에 전념하는 방법으로 세존께서는 출가를 말씀하셨으며, 이런 출가의 삶이야말로 이세상의 진정한 복밭[福田]이라 강조하셨다.

⑤ [열반은 삶에 대한 의미부여가 끝나야 드러난다]

이처럼 열반은 온갖 종류의 삶에 대한 의미부여가 끝나야 드러나는 것이다. 그러나 필자를 위시한 인간들은 출가자든 재가자든 삶에 대한 무한한 의미부여를 하고 있다. 삶이 아닌 것은 허무요 끝장이라 생각하며 바들바들 떨어온 게 중생의 역사 아니던가? 물질문명의 극치를 구가하는 현대의 우리는 어느 시대보다 삶에 대한 강한 의미부여를 하고 있다. 그런데 삶에 대한 의미부여가 끝나야 열반이라니 이 무슨 해괴망측한 망발인가!

이런 인간들의 구미를 맞추려다보니 역사적으로 불교 안에서부터 가장 난도질당하고 곡해당해 온 것이 부처님 제일의 메시지인 이 열반이 아닌가 여겨진다. 그래서 열반은 무주처열반으로 이해되기 시작했고, 생사뿐만 아니라 열반마저도 허망하다고 이해되었고, 마침내 생사가 그대로 열반이라고 주장하게 되었으며, 탐진치 그대로가 열반이라는 말까지 서슴없이 내뱉어 왔다. 그런데 이런 말들의 이면에는 생사로 대표되는 삶에 대한 무한한 의미부여가 들어있고, 이 삶 속에서 오래오래 단맛을 쪽쪽 빨아먹으리라는 간절한 소망이 들어있다고 하면 너무 심한 표현일까?

혹자는 반박할 것이다. 생사를 떠난 열반이 따로 있다고 한다면 이분법적인 사고라고. 그에게 말하고 싶다. 그대는 이미 스스로가 이 삶에 의미부여를 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태도로는 절대로 열반을 알 수도 볼 수도 실현할 수도 없다고.

⑥ [스승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는 부처님 제자다. 제자가 자기 스승의 말씀에 대고 자신의 부질없는 생각으로 마구 황칠을 해대면 곤란하지 않은가? 부처님께서 세속에 넌더리치고 열반을 실현하라고 했으면 그렇게 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바른 제자 아닌가? 세속문제는 세속의 정치인, 경제인, 지식인, 문화인, 의료인 등 세속전문가들에게 맡겨두면 된다. 출가자인 나는 열반을 바르게 실현하고 드러내는 전문가가 되어야하지 않는가?

⑵ 도성제

① 도성제는 팔정도다

“도반이여, 그러면 이러한 열반을 실현하기 위한 도가 있고 도닦음이 있습니까?”

“도반이여, 이러한 열반을 실현하기 위한 도가 있고 도닦음이 있습니다.”

“도반이여, [252] 그러면 어떤 것이 이러한 열반을 실현하기 위한 도이고 어떤 것이 도닦음입니까?”

“도반이여, 그것은 바로 여덟 가지 구성요소로 된 성스러운 도[八支聖道]이니, 바른 견해, 바른 사유,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 바른 정진, 바른 마음챙김, 바른 삼매입니다. 도반이여, 이것이 열반을 실현하기 위한 도이고 이것이 도닦음입니다.”(상윳따 니까야 열반 경(S38:1) §4)

“비구들이여,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의 성스러운 진리[苦滅道聖諦]이다. [422] 그것은 바로 여덟 가지 구성요소를 가진 성스러운 도[八支聖道]이니, 즉 바른 견해[正見], 바른 사유[正思惟], 바른 말[正語], 바른 행위[正業], 바른 생계[正命], 바른 정진[正精進], 바른 마음챙김[正念], 바른 삼매[正定]이다.”(상윳따 니까야 초전법륜 경(S56:11) §8)

② 팔정도의 정의

“①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바른 견해[正見]인가? 비구들이여, 괴로움에 대한 지혜, 괴로움의 일어남에 대한 지혜,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지혜,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에 대한 지혜 ― 이를 일러 바른 견해라 한다.

②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바른 사유[正思惟]인가? 도반들이여, 출리에 대한 사유, 악의 없음에 대한 사유, 해코지 않음[不害]에 대한 사유 ― 이를 일러 바른 사유라 한다.

③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바른 말[正語]인가? 비구들이여, 거짓말을 금하고 중상모략을 금하고 욕설을 금하고 잡담을 금하는 것 ― 이를 일러 바른 말이라 한다.

④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바른 행위[正業]인가? 비구들이여, 살생을 금하고 도둑질을 금하고 삿된 음행을 금하는 것 ― 이를 일러 바른 행위라 한다.

⑤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바른 생계[正命]인가? 비구들이여, 성스러운 제자는 그릇된 생계를 제거하고 바른 생계로 생명을 영위한다. ―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바른 생계라 한다.

⑥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바른 정진[正精進]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사악하고 해로운 법들을 일어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의욕을 생기게 하고 정진하고 힘을 내고 마음을 다잡고 애를 쓴다. 이미 일어난 사악하고 해로운 법들을 제거하기 위하여 의욕을 생기게 하고 정진하고 힘을 내고 마음을 다잡고 애를 쓴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유익한 법들을 일어나도록 하기 위해서 의욕을 생기게 하고 정진하고 힘을 내고 마음을 다잡고 애를 쓴다. 이미 일어난 유익한 법들을 지속하게 하고 사라지지 않게 하고 증장하게 하고 충만하게 하고 개발하기 위해서 의욕을 생기게 하고 정진하고 힘을 내고 마음을 다잡고 애를 쓴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바른 정진이라 한다.

⑦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바른 마음챙김[正念]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몸에서 몸을 따라 관찰하면서[身隨觀] 머문다. 세속에 관한 욕심과 정신적 고통을 제쳐두고서 열심히,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 챙기며 머문다. 느낌들에서 … 마음에서 … 법들에서 법을 따라 관찰하며[法隨觀] 머문다. 세속에 관한 욕심과 정신적 고통을 제쳐두고서 열심히, 충분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며 머문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바른 마음챙김이라 한다.

⑧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바른 삼매[正定]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모든 감각적 욕망을 떨쳐내고 해로운 법[不善法]들을 떨쳐버리고 일으킨 생각[尋]과 지속적인 고찰[伺]을 수반하며, 멀리 떨쳐버렸음에서 생긴 희열[喜, pīti]과 행복감[樂, sukha]을 특징으로 하는 초선(初禪)을 성취하여 머문다.

여기 비구는 일으킨 생각[尋]과 지속적인 고찰[伺]을 가라앉혔기 때문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자기 내면의 것이고, 확신(sampasādana)이 있으며, 마음의 단일한 상태이고,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이 없고, 삼매에서 생긴 희열과 행복이 있는 제2선(二禪)을 구족하여 머문다.

여기 비구는 희열이 사라졌기 때문에 평온하게 머물고 마음챙기고 알아차리며[正念正知] 몸으로 행복을 경험한다. 이 때문에 성자들이 그를 두고 ‘평온하게 마음 챙기며 행복에 머문다’라고 일컽는 제3선을 구족하여 머문다.

여기 비구는 즐거움도 버렸고 괴로움도 버렸고 아울러 그 이전에 이미 기쁨과 슬픔이 사라졌기 때문에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으며, 평온으로 인해 마음챙김의 청정함이 있는[捨念淸淨] 제4선을 구족하여 머문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바른 삼매라 한다.”(디가 니까야 대념처경(D22) §21)

 

 

 

 

 

불교TV 강의 자료

제7강: 나는 누구인가 ― 초기불교의 인간관, 오온1: 색온

 

 

⑴ 오온: 온(蘊, 무더기, khandha)

오온(pañca-kkhandha):

물질의 무더기[色蘊, rūpa-kkhandha]

느낌의 무더기[受蘊, vedanā-khandha]

인식의 무더기[想蘊, saññā-khandha]

심리현상들의 무더기[行蘊, saṅkhārā-khandha]

알음알이의 무더기[識蘊, viññāṇa-kkhandha]

오온으로 해체해서 보기

인류가 있어온 이래로 인간이 자신에게 던진 가장 많은 질문은 아마 ‘나는 누구인가’일 것이다. 인간과 신들의 스승이신 부처님께서도 당연히 이 질문에 대해서 대답하셨다. 중요한 질문이기에 아주 많이, 그것도 아주 강조해 말씀하셨다. 그러면 부처님께서는 이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셨을까. 부처님께서는 초기경 도처에서 간단명료하게 ‘나’는 ‘오온(五蘊, panca-kkhandha)’이라고 말씀하셨다. 나라는 존재는 물질(몸뚱이, 色), 느낌(受), 인식(想), 심리현상들(行), 알음알이(識)의 다섯 가지 무더기(蘊)의 적집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왜 부처님께서는 다섯 가지로 해체해서 대답하셨을까. 그것은 ‘나’ 혹은 자아(아뜨만)라는 고정불변하는 어떤 실체(sara)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이다. 영원불변하는 나를 찾아서 온갖 노력을 다해봐야 그것은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얻어진 것처럼 여겨지는 인식(想, 산냐)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우리의 소의경전인 〈금강경〉도 자아니 영혼(壽者)이니 하는 산냐의 척파를 외치지 않았던가.

해체해서 보면 무상/고/무아가 드러난다

부처님께서 ‘나는 누구인가’에 대해서 ‘오온’이라고 말씀하신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 나라는 존재를 몸뚱이와 느낌과 인식과 심리현상들과 알음알이로 해체해서 보게 되면 이들의 변화성과 찰나성 즉 무상(無常)이 극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상하고 변화하는 것은 괴로움(苦)이다. 우리는 변하는 것을 가지고 행복이라 하지 않는다. 행복이란 것도 변하면, 즉시에 괴로움이 되고 만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행복을 괴고성(壞苦性, 변하는 괴로움)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그리고 우리는 변하고 괴로운 것을 가지고 나라거나 나의 자아라고 하지 않는다. 이처럼 변화를 통찰할 때 괴로움과 무아도 꿰뚫게 된다. 그래서 초기경에서 오온의 무상.고.무아는 도처에서 아주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어디 초기경뿐인가. 우리가 조석예불에서 정성을 다해서 외는 〈반야심경〉의 핵심도 오온(照見五蘊皆空)이 아니던가.

무상/고/무아를 통해 해탈한다

이처럼 나라는 존재를 오온으로 해체해서 보면 무상과 고와 무아가 극명하게 드러나고 이러한 무상이나 고나 무아를 철견할 때 불가능해보이던 중생의 해탈은 비로소 성취되는 것이다. 그래서 초기경뿐만 아니라 대승경전에서조차 무상(無常)을 통한 해탈을 무상(無相)해탈이라 하고, 고를 통한 해탈을 무원(無願)해탈이라 부르며, 무아를 통한 해탈을 공해탈이라 천명하고 있다. 실체 없는 자아에 계합하는 것이 해탈이 아니라 무상.고.무아에 사무쳐야 해탈이다. 불자가 이 사실을 잊어버리면 그 즉시 외도가 되어버린다.

[오온의 무상고무아와 염오-이욕-해탈에 대한 경전적 근거]

“비구들이여, 물질은 무상하고 느낌은 무상하고 인식은 무상하고 심리현상들은 무상하고 알음알이는 무상하다.

비구들이여, 이렇게 보는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물질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느낌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인식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의도적 행위들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알음알이에 대해서도 염오한다. 염오하면서 탐욕이 빛바래고, 탐욕이 빛바래므로 해탈한다. 해탈하면 해탈했다는 지혜가 있다. ‘태어남은 다했다. 청정범행(梵行)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 해 마쳤으며,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고 꿰뚫어 안다.”(상윳따 니까야 무상 경(S22:12) §3 등)

“‘염오(nibbidā)’란 염오의 지혜(nibbidā-ñāṇa)를 말하는데 이것으로 강한 위빳사나(balava-vipassanā)를 드러내고 있다.”(SA.ī.53 ― 의지처 경(S12:23) §4의 주해)

“‘탐욕의 빛바램(이욕, virāga)’이란 도(magga, 즉 예류도, 일래도, 불환도, 아라한도)이다. ‘탐욕이 빛바래므로 해탈한다’는 것은 탐욕의 빛바램이라는 도에 의해서 해탈한다라는 과(phala)를 설하셨다. ‘해탈하면 해탈했다는 지혜가 있다.’라는 것은 여기서 반조(paccavekkhaṇā)를 설하셨다.(MA.ī.115 = 맛지마 니까야 뱀의 비유 경(M22) 29에 대한 주석)

또 다른 주석서를 인용하자면, “‘염오(nibbidā)’는 강한 위빳사나(balava-vipassanā)이고 ‘탐욕의 빛바램(virāga)’은 도이다. ‘해탈지견(vimutti-ñāṇadassana)’은 과의 해탈(phala-vimutti)과 반조의 지혜를 뜻한다.”(AA.īi.228) 이 주석서에서는 있는 그대로 알고 봄[如實知見]을 얕은 단계의 위빳사나라고 설명하고 있다.

한편 과거/현재/미래 경1(S22:9) 등 온 상윳따(S22)의 도처에서는 오온의 무상/고/무아를 통찰하여 염오-이욕-소멸을 실현하는 것을 설하고 있다. 여기서도 당연히 염오는 강한 위빳사나요, 이욕은 도요 소멸은 아라한과라고 주석서들은 밝히고 있다.

[진아란 없다]

매년 여름과 겨울에 한국의 유서 깊은 명산대찰에서는 각종 수련대회가 열린다. 몇몇 사찰에서는 아예 주제를 ‘나를 찾는 여행’으로 정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러한 명산대찰에서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불교적 대답인 오온을 강조한 곳은 없었던 것으로 안다. 오히려 나를 진아로 추앙하고 대아나 주인공으로 경외하여 부르면서 이러한 영원불변하는 참 나를 찾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불교수행이라고 공공연히 외쳐댔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진아니 대아니 하는 대답이 나오는 한 그것은 불교가 아니다. 불자는 나는 누구인가에 서슴없이 오온이라 답할 줄 알아야 하고, 나를 오온으로 해체해서 살펴보아 오온으로 이루어진 나라는 존재가 무상하고 고요 무아임을 통찰해서 해탈열반을 실현해야 한다. 우리는 언제나 외도이기를 그만두고 진정한 부처님 제자가 될 것인가.

⑵ 색온 - 물질 - 근본물질과 파생된 물질

“비구들이여, 그러면 왜 물질이라고 부르는가? 변형(變形)된다고 해서 물질이라 한다. 그러면 무엇에 의해서 변형되는가? 차가움에 의해서도 변형되고, 더움에 의해서도 변형되고, 배고픔에 의해서도 변형되고, 목마름에 의해서도 변형되고, 파리, 모기, 바람, 햇빛, 파충류들에 의해서도 변형된다. 비구들이여, 이처럼 변형된다고 해서 물질이라 한다.”(상윳따 니까야 삼켜버림 경(S22:79) §4)

“물질 등은 자아(attā)가 아니고 자아에 속하는 것(attaniyā)도 아니고 실체가 없고(asārā) 주인이 없다(anissarā). 그래서 이들은 공(suññā)하다. 이러한 그들의 성질(bhāva)이 공함[空性, suññatā]이다. 이러한 공함의 특징을 ‘변형됨(ruppana)’ 등을 통해서 ‘보여주시기 위해서’라는 뜻이다.”(SA.ī.210)

“‘변형된다(ruppati)’고 했다. 이것은 물질(rūpa)이라는 것은 차가움 등의 변형시키는 조건과 접촉하여 다르게 생성됨을 두고 말한 것이다.”(SAṬ.ī.210)

여기서 변형(ruppana, ruppati)은 변화(viparinnāma)와 다르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변형(變形)은 형태나 모양이 있는 것이 그 형태나 모양이 바뀌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물질만의 특징이다. 느낌, 인식, 심리현상들, 알음알이와 같은 정신의 무더기들은 변화는 말할 수 있지만 변형은 없다. 형태나 모양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변형은 물질에만 있는 성질이다.

“법들에는 보편적이고 개별적인 두 가지 특징(lakkhaṇa)이 있다.(중국에서는 보편적 특징을 공상(共相)으로 개별걱 특징을 자상(自相)으로 옮겼다.) 이 둘 가운데서 물질의 무더기를 [변형된다는] 개별적인 특징[自相, paccatta-lakkhaṇa = sabhāva-lakkhaṇa]을 통해서 드러내셨다. [변형되는 것은] 물질의 무더기에만 있고 느낌 등에는 없기 때문에 개별적인 특징이라 불린다. 무상/고/무아라는 특징은 느낌 등에도 있다. 그래서 이것은 보편적 특징[共相, sāmañña-lakkhaṇa]이라 불린다.”(SA.ī.291~292)

즉 변형(變形, deformation)은 형체를 가진 물질에만 적용되는 개별적이고 특수한 성질이다. 그래서 물질을 이런 변형이라는 물질에만 존재하는 개별적인 특징을 가지고 설명하셨다는 뜻이다. 느낌, 인식, 심리현상들, 알음알이는 형태가 없기 때문에 변형은 존재할 수 없다.

 

 

 

 

 

불교TV 강의자료

제8강: 나는 누구인가 ― 초기불교의 인간관, 오온2: 수온

 

 

 

[개요]

느낌은 정서적인 측면 이다. 인식은 이지적인 번뇌[見惑=어리석음]와 느낌은 정서적인 번뇌[修惑=탐욕과 성냄]와 관계있다. 느낌은 단박에 정리되지 않는다.

느낌이란 무엇인가

“비구들이여, 그러면 왜 느낌이라고 부르는가? 느낀다고 해서 느낌이라 한다. 그러면 무엇을 느끼는가? 즐거움도 느끼고 괴로움도 느끼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것도 느낀다. 비구들이여, 이처럼 느낀다고 해서 느낌이라 한다.”(상윳따 니까야 삼켜버림 경(S22:79) §5)

“‘느낀다(vedayati)’는 것은 여기서 오직 느낌(vedanā va)이 느끼는 것이지 다른 중생(satta)이나 개아(puggala)가 느끼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느낌은 느끼는 특징을 가졌기(vedayita-lakkhaṇā) 때문에 토대와 대상을 반연하여(vatth-ārammaṇaṁ paṭicca) 느낌이 오직 느끼는 것이다. 이처럼 세존께서는 여기서도 [느낀다는] 느낌의 개별적 특징(paccatta-lakkhaṇa)을 분석하신 뒤에(bhājetvā) 설하셨다.”(SA.ī.292)

“비구들이여, [232] 그러면 어떤 것이 세 가지 느낌인가?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는 느낌이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세 가지 느낌이라 한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다섯 가지 느낌인가? 육체적 즐거움의 기능[樂根], 육체적 괴로움의 기능[苦根], 정신적 즐거움의 기능[喜根], 정신적 괴로움의 기능[憂根], 평온의 기능[捨根]이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다섯 가지 느낌이라 한다.”(상윳따 니까야 백팔 방편 경(S36:22) §§5~6)

느낌에 대한 관찰

“비구들이여, 즐거움을 느낄 때 탐욕의 잠재성향을 버려야 한다. 괴로움을 느낄 때 적의의 잠재성향을 버려야 한다.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의 경우 무명의 잠재성향을 버려야 한다.”(상윳따 니까야 버림 경(S36:3) §4)

“비구들이여,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화살에 꿰찔리고 연이어 두 번째 화살에 또다시 꿰찔리는 것과 같다. 그래서 그 사람은 두 화살 때문에 오는 괴로움을 모두 다 겪을 것이다.

비구들이여, 그와 같이 배우지 못한 범부는 육체적으로 괴로운 느낌을 겪을 때, 근심하고 상심하고 슬퍼하고 가슴을 치고 울부짖고 광란한다. 그래서 이중으로 느낌을 겪는다. 즉 육체적 느낌과 정신적 느낌이다.”(상윳따 니까야 화살 경(S36:6))

“비구들이여, 비구가 이처럼 마음챙겨, 분명히 알아차리며, 방일하지 않고, 열심히, 스스로 독려하며 머무는 중에 괴로운 느낌이 일어나면 그는 이렇게 꿰뚫어 안다.

‘지금 나에게 괴로운 느낌이 일어났다. 이것은 조건 지워진 것이며, 조건 지워지지 않은 것이 아니다. 무엇에 의해 조건 지워졌는가? 바로 이 몸에 의해 조건 지워졌다. 그런데 이 몸은 참으로 무상하고 형성되었고[有爲] 조건에 의해서 생겨난 것[緣起, 緣已生]이다. 이렇듯 무상하고 형성되었고 조건발생인 몸에 조건 지워진 이 괴로운 느낌이 어찌 항상할 수 있을 것인가?’

그는 몸에 대해 그리고 괴로운 느낌에 대해 무상을 관찰하며 머무르고, 사그라짐을 관찰하며 머무르고, 탐욕이 빛바램을 관찰하며 머무르고, 소멸을 관찰하며 머무르고, 놓아버림을 관찰하며 머무른다. 그가 몸에 대해 그리고 즐거운 느낌에 대해 무상을 관찰하며 머무르고, 사그라짐을 관찰하며 머무르고, 탐욕이 빛바램을 관찰하며 머무르고, 소멸을 관찰하며 머무르고, 놓아버림을 관찰하며 머물면 몸에 대한 그리고 괴로운 느낌에 대한 적의의 잠재성향이 사라진다.”(상윳따 니까야 간병실 경 1(S36:7) §7)

즐거운 느낌과 평온한 느낌에 대해서도 같은 방법으로 설하심.

 

 

 

 

 

불교TV강의자료

제9강: 나는 누구인가 ― 초기불교의 인간관, 오온3: 상온

 

 

[개요]

인식은 이지적 번뇌와 관계있고 우리의 사상과 철학과 관계있다. 단박에 전환 가능하다. 유신견과 관계있다. 상락아정이라는 인식의 전도에 빠져서 어리석음[치]로 발전된다.

인식이란 무엇인가

“비구들이여, 그러면 왜 인식이라고 부르는가? 인식한다고 해서 인식이라 한다. 그러면 무엇을 인식하는가? 푸른 것도 인식하고 노란 것도 인식하고 빨간 것도 인식하고 흰 것도 인식한다. 비구들이여, 이처럼 인식한다고 해서 인식이라 한다.”(상윳따 니까야 삼켜버림 경(S22:79) §6)

“‘푸른 것도 인식하고’라는 것은 푸른 꽃이나 천에 대해서 준비단계(parikamma)의 [인식을] 만든 뒤에 근접단계나 본 단계의 [인식을] 얻으면서 인식한다. 여기서 인식이라는 것은 준비단계의 인식(parikamma-saññā)도 해당되고 근접단계(upacāra-saññā)의 인식도 해당되고 본 단계의 인식(appanā-saññā)도 해당된다. 그리고 푸른 것에 대해서 푸르다고 일어나는 인식도 해당된다. 이 방법은 노란 것 등에도 적용된다. 여기서도 세존께서는 인식하는 특징을 가진(sañjānana-lakkhaṇa) 인식의 개별적인 특징(paccatta-lakkhaṇa)을 분석하신 뒤에 설하셨다.”(SA.ī.292)

한편 여기에 나타나는 준비단계와 근접단계와 본 단계는 삼매 수행에도 적용되어서 설명되고 있다. 여기에 대해서는 아비담마 길라잡이 제9장 §4와 해설 등을 참조할 것.

초기경에서 인식(想, 산냐, saññā)은 다양한 문맥에서 나타난다. 가장 많이 나타나는 경우가 오온의 세 번째인 인식의 무더기(想蘊)이다. 오온의 두 번째인 느낌(受, vedanā)이 우리의 예술적이고 정서적인 심리현상들(行)의 단초가 되는 것이라면, 인식은 철학이나 사상과 같은 우리의 이지적인 심리현상들의 밑바탕이 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버려야할 인식

인식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대상을 받아들여 이름을 짓고 개념을 일으키는 작용이다. 그런데 이런 개념작용은 또 무수한 취착을 야기하고 해로운 심리현상들(不善法)을 일으키기 때문에 초기경의 여러 문맥에서 인식은 부정적이고 극복되어야 할 것으로 언급되어 있다. 그래서 최초기 가르침인 <숫따니빠따> 제4장에서도 인식은 견해(見)와 더불어 극복되어야 할 것으로 나타나며, 특히 ‘희론하는 인식(papañca-saññā)’을 가지지 말 것을 초기경들은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버리고 극복되어야 할 대표적인 인식으로 <금강경>은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즉 자아가 있다는 인식, 개아가 있다는 인식, 중생이 있다는 인식, 영혼이 있다는 인식을 들고 있음은 우리가 잘 알고 있다. 이러한 인식들은 단지 인식에만 머물지 않고 존재론적인 고정관념으로 고착된다고 이해한 구마라즙 스님은 이러한 인식을 상(想)으로 옮기지 않고 상(相)으로 옮겼다.

인식의 전도[상전도, saññā-vipallāsa] - 4전도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무아고, 부정한 대상에 대해서 영원하고, 행복하고, 자아고, 깨끗하다고 여기면서 일어나기 때문에 전도라 한다.”(청정도론 XXII.53)

무상 고 무아 부정을 상락아정(常樂我淨)으로 여기는 것을 인식의 전도라 한다.

닦아야할 인식

한편 남.북방의 아비담마/아비달마와 유식에 의하면 인식은 마음(心)과 항상 함께 일어나는 심리현상(遍行心所)이다. 그러므로 멸진정에 들지 않는 한 우리는 인식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인식이 마음과 함께 일어나기 마련인 것이라면 해탈.열반에 방해가 되는 존재론적인 인식은 버리고 해탈.열반에 도움이 되는 인식들을 개발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초기경에는 제거되어야할 고정관념으로서의 인식만을 들고 있는 것이 아니라 깨달음을 증득하고 해탈.열반을 실현하기 위해서 개발하고 닦아야 하는 인식도 나타나고 있다. 특히 앙굿따라 니까야에는 수행자들이 닦아야할 여러 가지 조합의 인식들이 나타나고 있는데 앙굿따라 니까야 인식경2(A7:46)에서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비구들이여, 일곱 가지 인식을 닦고 많이 (공부)지으면 큰 결실과 큰 이익이 있고 불사(不死)에 들어가고 불사를 완성한다. 무엇이 일곱인가? 부정(不淨)이라고 관찰하는 지혜에서 생긴 인식, 죽음에 대한 인식, 음식에 혐오하는 인식, 온 세상에 대해 기쁨이 없다는 인식, 오온에 대해서 무상(無常)이라고 관찰하는 지혜에서 생긴 인식, 무상한 오온에 대해서 괴로움이라고 관찰하는 지혜에서 생긴 인식, 괴로움인 오온에 대해서 무아라고 관찰하는 지혜에서 생긴 인식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아니 대아니 진아니 영혼이니 일심이니 하는 존재론적인 실체가 있다고 희론하는 인식이나 고정관념을 여의고, 5온.12처.18계로 분류되는 존재일반이 모두 무상이요 고요 무아라고 인식하는 습관을 길러 필경에는 무상.고.무아를 꿰뚫는 통찰지(반야, 慧)를 완성해야할 것이다. 이렇게 실천하는 자야말로 해탈.열반의 길을 가는 진정한 부처님의 제자일 것이다.

 

 

 

 

 

 

불교TV 강의 자료

제10강: 나는 누구인가 ― 초기불교의 인간관, 오온4: 행온과 식온

 

 

[개요]

초기경에서 행(行, saṅkhāra)는 세 가지 의미로 쓰인다. 이 가운데 행온(saṅkhāra-kkhandha)의 행은 ‘심리현상들’을 뜻한다. 오온의 행온은 항상 복수로 나타난다. 청정도론에서는 느낌과 인식을 제외한 50가지를 들고 있다.

심리현상들이란 무엇인가

“비구들이여, 그러면 왜 심리현상들이라고 부르는가? 형성된 것을 계속해서 형성한다고 해서 심리현상들이라 한다. 그러면 어떻게 형성된 것을 계속해서 형성하는가? 물질이 물질이게끔 형성된 것을 계속해서 형성한다. 느낌이 느낌이게끔 형성된 것을 계속해서 형성한다. 인식이 인식이게끔 형성된 것을 계속해서 형성한다. 심리현상들이 심리현상들이게끔 형성된 것을 계속해서 형성한다. 알음알이가 알음알이이게끔 형성된 것을 계속해서 형성한다. 비구들이여, 그래서 형성된 것을 계속해서 형성한다고 해서 심리현상들이라 한다.”(삼켜버림 경(S22:79) §7)

여기서 심리현상들로 옮긴 원어는 상카라(saṅkhārā)이고 중국에서 행(行)으로 옮긴 술어이다. 오온의 문맥에서 나타나는 상카라는 항상 복수형태로 나타나고 있음에 유념해야한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오온의 네 번째인 상카라[行]를 ‘심리현상들’로 옮기고 있다.

혹자들은 오온의 행온을 의도적 행위나 업형성(력) 등으로 이해하고 옮기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은 행온의 한 부분인 cetanā(의도)만을 부각시킨 역어이다. 행온에는 이 의도를 포함한 50가지 심리현상들(느낌과 인식을 제외한 모든 심리현상, 혹은 심소법들)을 다 포함한다는 것이 주석서와 복주서들을 비롯한 아비담마의 한결같은 설명이다.

행(saṅkhāra)의 세 가지 의미

옛날 중국에서 역경승들이 행(行)으로 옮긴 범어는 상카라(saṅkhāra, Sk.samskara)인데 이것은 saṁ(함께)+√kṛ(행하다, to do)에서 파생된 명사이다. 행한다는 의미를 지닌 어근 √kṛ의 의미를 적극적으로 살려서 중국에서 행(行)으로 정착시킨 것이다. 그러나 행이라는 한역 단어만을 가지고 상카라의 의미를 파악한다는 것은 무리라고 할 수 밖에 없다. 그 의미는 초기경들에 나타나는 문맥을 통해서 파악할 수밖에 없는데 상카라는 경들에는 크게 다음의 네 가지 문맥에서 나타난다.

첫째, 제행무상(諸行無常)과 제행개고(諸行皆苦)의 문맥에서 제행으로 나타나는데 항상 복수로 쓰인다. 이 경우의 제행은 유위법(有爲法, saṅkhata-dhamma)들을 뜻한다. 즉 열반을 제외한 물질적이고 정신적인 모든 유위법들을 행이라고 불렀다. 이 경우에 행은 ‘형성된 것들’에 가까운 뜻이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이렇게 통일해서 옮기고 있다. 그 외 목숨의 상카라(ayu-saṅkhara), 존재의 상카라(bhava-saṅkhara), 생명의 상카라(jīvita-saṅkhāra) 등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하는데 이 경우도 ‘형성된 것’으로 이해하면 된다.

둘째, 오온의 네 번째인 행온(行蘊, saṅkhāra-kkhandha)으로 나타나는데 이 경우에도 예외 없이 복수로 쓰인다. 오온 가운데서 색(色, 물질)은 아비담마의 색법이고 수상행(受想行)은 아비담마의 심소법(心所法)들이고 식(識)은 아비담마의 심법이다. 그러므로 오온에서의 행은 상좌부 아비담마의 52가지 심소법들 가운데서 느낌[수]과 인식[상]을 제외한 나머지 심소법들 모두를 뜻하는데, 감각접촉, 의도, 주의, 집중, 의욕과 유익한(善) 심리현상들 모두와 해로운(不善) 심리현상들 모두를 포함한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이 경우의 행은 ‘심리현상들’로, 행온은 ‘심리현상들의 무더기’로 옮기고 있다.

셋째, 12연기의 두 번째 구성요소인 무명연행(無明緣行)으로 나타난다. 12연기에서의 행도 항상 복수로 나타나는데 청정도론에서 ‘공덕이 되는 행위(punna-abhisankhara), 공덕이 되지 않는 행위, 흔들림 없는 행위’로 설명이 되듯이 이 경우의 행은 ‘업지음들’ 혹은 ‘의도적 행위들’로 해석된다. 이 경우의 행은 업(karma)과 동의어이다. 그래서 서양에서도 kamma-formations(업형성들)로 이해하고 있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의도적 행위들’로 옮긴다.

넷째, 몸(身)과 말(口)과 마음(意)으로 짓는 세 가지 행위인 신행(身行, kāya-saṅkhāra) 구행(口行, vacī-saṅkhāra) 의행(意行, mano-saṅjhāra)으로 나타난다. 본서 부미자 경(S12:25) §§8~10과 앙굿따라 니까야 상세하게 경(A4:232) §3 등에서 보듯이 이때의 행은 의도적 행위이다. 그리고 청정도론에서는 이 삼행도 12연기의 행처럼 업형성 즉 의도적 행위로 이해한다.(청정도론 XVII.61 참조) 그래서 신행 구행 의행은 각각 신업 구업 의업의 삼업(三業)과 동의어가 된다.

그런데 이 신구의 삼행은 상황에 따라 ‘작용’으로 이해해야 하는 곳도 있다. 예를 들면 이 몸의 상카라(신행)를 들숨날숨으로, 말의 상카라(구행)를 일으킨 생각[尋, vitakka]과 지속적 고찰[伺, vicāra]로, 마음의 상카라(의행)를 느낌과 인식으로 설명하는 경이 몇 군데있다.(본서 까마부 경 2(S41:6) §3이하를 참조) 이 경우에 상카라는 ‘작용’ 정도로 이해해야한다고 본다. 들숨날숨이나 생각과 고찰이나 느낌과 인식은 결코 의도적 행위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행(상카라)은 그 용처에 따라서 그 의미를 각각 다르게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상카라(saṅkhāra)에다 접두어 abhi-를 붙인 아비상카라(abhisaṅkhāra)가 나타나는데 이 경우는 의도적 행위를 뜻한다. 특히 청정도론과 주석서 문헌에서는 거의 예외 없이 의도적 행위를 뜻한다고 보여진다.(본서 부미자 경(S12:25) §8의 주해 참조) 그래서 본서에서 역자는 아비상카라를 ‘업형성’이나 ‘의도적 행위’로 옮기고 있다.

한편 청정도론 등의 주석서 문헌과 아비담마에서는 위의 느낌과 인식을 포함하여 모두 52가지의 심리현상들을 들고 있는데, 이들을 다시 공통되는 것들 13가지와 과 해로운 것들 14가지와 유익한 것들 25가지로 분류한 뒤에 이들을 다시 ‘반드시들’과 ‘때때로들’로 나누어서 고찰하고 있다. 여기에 대해서는 아비담마 길라잡이 제2장을 참조할 것.

알음알이의 무더기

알음알이란 무엇인가

“비구들이여, 그러면 왜 알음알이라고 부르는가? 식별한다고 해서 알음알이라 한다.(vijānātīti kho tasmā viññāṇaṁ) 그러면 무엇을 알음하는가? 신 것도 식별하고 쓴 것도 식별하고 매운 것도 식별하고 단 것도 식별하고 떫은 것도 식별하고 떫지 않은 것도 식별하고 짠 것도 식별하고 싱거운 것도 식별한다. 비구들이여, 이처럼 식별한다고 해서 알음알이라 한다.”(삼켜버림 경(S22:79) §8)

본경을 위시한 니까야들에서 알음알이는 단지 여섯 감각기능을 통해서 대상을 아는 작용을 뜻한다. 그래서 주석서 문헌에서 알음알이(viññāṇa)와 마음(citta)과 마노[意, mano]는 ‘대상을 아는 것(ārammaṇaṁ vijānāti ― ItA.ī.9; ārammaṇaṁ cinteti ― DhsA.63 등)’으로 정의되고 있다. 물론 이러한 아는 작용은 반드시 느낌과 인식과 심리현상들과 같은 심소법들의 도움이 있어야한다고 아비담마는 덧붙이고 있다.

[왜 오온을 설하셨는가]

“비구들이여, 물질은 무상하고 느낌은 무상하고 인식은 무상하고 심리현상들은 무상하고 알음알이는 무상하다.

비구들이여, 이렇게 보는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물질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느낌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인식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의도적 행위들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알음알이에 대해서도 염오한다. 염

오하면서 탐욕이 빛바래고, 탐욕이 빛바래므로 해탈한다. 해탈하면 해탈했다는 지혜가 있다. ‘태어남은 다했다. 청정범행(梵行)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 해 마쳤으며,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고 꿰뚫어 안다.”(상윳따 니까야 무상 경(S22:12) §3 등)

“‘염오(nibbidā)’란 염오의 지혜(nibbidā-ñāṇa)를 말하는데 이것으로 강한 위빳사나(balava-vipassanā)를 드러내고 있다.”(SA.ī.53 ― 의지처 경(S12:23) §4의 주해)

“‘탐욕의 빛바램(이욕, virāga)’이란 도(magga, 즉 예류도, 일래도, 불환도, 아라한도)이다. ‘탐욕이 빛바래므로 해탈한다’는 것은 탐욕의 빛바램이라는 도에 의해서 해탈한다라는 과(phala)를 설하셨다. ‘해탈하면 해탈했다는 지혜가 있다.’라는 것은 여기서 반조(paccavekkhaṇā)를 설하셨다.(MA.ī.115 = 맛지마 니까야 뱀의 비유 경(M22) 29에 대한 주석)

또 다른 주석서를 인용하자면, “‘염오(nibbidā)’는 강한 위빳사나(balava-vipassanā)이고 ‘탐욕의 빛바램(virāga)’은 도이다. ‘해탈지견(vimutti-ñāṇadassana)’은 과의 해탈(phala-vimutti)과 반조의 지혜를 뜻한다.”(AA.īi.228) 이 주석서에서는 있는 그대로 알고 봄[如實知見]을 얕은 단계의 위빳사나라고 설명하고 있다.

한편 과거/현재/미래 경1(S22:9) 등 온 상윳따(S22)의 도처에서는 오온의 무상/고/무아를 통찰하여 염오-이욕-소멸을 실현하는 것을 설하고 있다. 여기서도 당연히 염오는 강한 위빳사나요, 이욕은 도요 소멸은 아라한과라고 주석서들은 밝히고 있다.

 

 

 

 

불교TV 강의 자료

제11강: 괴로움의 발생구조와 소멸구조 1 ― 12연기를 중심으로

 

 

[개요]

연기는 상윳따 니까야 인연 상윳따(S12)의 주제이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12연기로 정착이 되었다. 물론 12개의 구성요소가 다 나타나지 않는 10지연기나 9지연기나 8지연기나 6지연기나 더 줄여서 4지/5지 등으로 구성된 연기가 인연 상윳따에는 나타난다.

연기의 정형구가 설해지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이다.

① 12연기의 순관/역관과 ②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의 두 가지 방법이다.

[12연기의 순관/역관]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연기인가? 비구들이여, 무명을 조건으로 의도적 행위[行]들이, 의도적 행위들을 조건으로 알음알이가, 알음알이를 조건으로 정신/물질이, 정신/물질을 조건으로 여섯 감각장소가, 여섯 감각장소를 조건으로 감각접촉이, 감각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갈애를 조건으로 취착이, 취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죽음과 근심/탄식/육체적 고통/정신적 고통/절망이 생긴다. 이와 같이 전체 괴로움의 무더기[苦蘊]가 발생한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연기[緣起]라 한다.”(상윳따 니까야 연기 경(S12:1) §3)

[이를 연기의 순관(順觀, 流轉門, anuloma)이라한다. 여기에 대한 설명은 청정도론(제17장)에서 설해져 있다.]

“그러나 무명이 남김없이 빛바래어 소멸하기 때문에 의도적 행위[行]들이 소멸하고, [2] 의도적 행위들이 소멸하기 때문에 알음알이가 소멸하고, 알음알이가 소멸하기 때문에 정신/물질이 소멸하고, 정신/물질이 소멸하기 때문에 여섯 감각장소가 소멸하고, 여섯 감각장소가 소멸하기 때문에 감각접촉이 소멸하고, 감각접촉이 소멸하기 때문에 느낌이 소멸하고, 느낌이 소멸하기 때문에 갈애가 소멸하고, 갈애가 소멸하기 때문에 취착이 소멸하고, 취착이 소멸하기 때문에 존재가 소멸하고, 존재가 소멸하기 때문에 태어남이 소멸하고, 태어남이 소멸하기 때문에 늙음/죽음과 근심/탄식/고통/정신적 고통/절망이 소멸한다. 이와 같이 전체 괴로움의 무더기[苦蘊]가 소멸한다.”(상윳따 니까야 연기 경(S12:1) §4)

“역관(逆觀, 還滅門, paṭiloma)을 설하시면서 ‘무명이 남김없이 빛바래어 소멸하기 때문에’라고 하신 것은 빛바램[離慾, virāga]이라 불리는 도(magga)에 의해서 남김없이 소멸하기 때문에라는 뜻이다.”(SA.ī.10)

“형성된 것들[行, saṅkhārā = 5온, 12처 등]에 대해서 전적으로 탐욕이 빛바랜다(이욕)고 해서 ‘빛바램(virāga)’이며 이것은 도(magga)를 말한다. ‘남김없이 소멸함’이란 남겨두지 않고 소멸함 즉 근절함을 말한다. 이와 같이 [12연기의] 각 항목들이 소멸함은 모든 형성된 것들의 소멸을 말한다. 이와 같이 무명 등의 소멸이라는 말을 통해서 아라한과를 설한 것이다.”(SAṬ.ī.11)

정리하면 빛바램(이욕, virāga)은 도(즉 예류도, 일래도, 불환도, 아라한도)를 뜻하고 소멸(nirodha)은 아라한과를 뜻한다. 주석서와 복주서의 이 설명은 중요하다. 12연기에서 12연기 각지의 이욕-소멸은 이전 강의에서 살펴본 온/처/계 등의 무상/고/무아를 통찰하여 염오-이욕-소멸이 일어나는 과정에서의 이욕-소멸과 같은 것으로 해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과거/현재/미래 경1(S22:9) 등 무더기 상윳따(S22)의 도처에서 오온에 대한 염오-이욕-소멸이 설해지고 있다. 물론 무상 경(S22:12) 등은 염오-이욕-해탈-해탈지[견]을 설하고 있지만 여기서 해탈은 과의 실현을 뜻한다고 주석서는 설명하고 있다.(SA.ī.268) 그러므로 해탈과 소멸은 과의 증득이라는 같은 현상을 나타내는 술어이다.

아무튼 온/처/계의 염오-이욕-소멸을 통해서도 아라한과를 증득하고 12연기 각지의 남김없이 빛바래어 소멸함을 통해서도 아라한과를 증득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소멸(nirodha)은 바로 사성제의 세 번째 진리인 소멸의 진리(멸성제, nirodha-sacca) 즉 열반을 뜻한다.(분석 경(S12:2) §16의 주해 참조) 그러므로 온처계의 가르침과 사성제와 12연기와 8정도(팔정도의 바른 견해는 사성제에 대한 지혜이므로)는 모두 궁극적으로는 소멸(nirodha = 열반)로 귀결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이러한 문장구조와 이러한 주석서와 복주서의 설명은 12연기의 가르침은 5온-12처-18계-4성제-8정도 등의 가르침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청정도론 서문에서 붓다고사 스님이 강조하고 있듯이 온/처/계/근/제 37보리분법으로 대표되는 초기불교의 인간관, 존재관, 세계관, 진리관, 수행관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면 12연기의 가르침은 제대로 이해하기가 힘들다고 강조하고 싶다. 디가 니까야 대인연경(D15) §1에서 세존께서 강조하셨듯이 연기의 가르침은 심오한(혹은 아주 어려운) 가르침임을 우리는 명심하고 연기의 가르침을 정독해야할 것이다.

“이와 같이 세존께서는 순관(anuloma)으로 12개의 구절을 윤회를 설하시는 것(vaṭṭa-kathā)으로 말씀하신 뒤에 그 윤회에 대한 말씀을 제쳐두고(vinivaṭṭetvā), 역관(paṭiloma)으로 12개의 구절을 통해서 윤회를 벗어남(vivaṭṭa)을 말씀하시면서 아라한과(arahatta)로써 가르침의 절정(kūṭa)을 취하셨다. 이 가르침이 끝나자 500명의 비구들은 위빳사나를 시작하는 자(āraddha-vipassakā)가 되어 간략한 가르침으로 이해하는 사람들(ugghaṭitaññū-puggalā)이 되었다. 그들은 마치 태양의 광선을 받아서 완전히 원숙해진 연꽃들(paripāka-gatāni padumāni)처럼 진리(sacca)들을 깨달은 뒤 아라한과(arahattaphala)에 확립되었다.”(SA.ī.10)

[12연기의 추상화의 정형구]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다. 이것이 일어날 때 저것이 일어난다. 이것이 없을 때 저것도 없다. 이것이 멸할 때 저것도 멸한다.

즉, 무명을 조건으로 의도적 행위[行]들이, 의도적 행위들을 조건으로 알음알이가, … 이와 같이 전체 괴로움의 무더기[苦蘊]가 발생한다.

그러나 무명이 남김없이 빛바래어 소멸하기 때문에 의도적 행위[行]들이 소멸하고, 의도적 행위들이 소멸하기 때문에 알음알이가 소멸하고, … 이와 같이 전체 괴로움의 무더기[苦蘊]가 소멸한다.”(상윳따 니까야 십력 경1(S12:21) §5)

이것은 12연기를 추상화한 정형구로 잘 알려져 있다. 빠알리 문장은 다음과 같다.

imasmiṁ sati idaṁ hoti

imassuppādā idam uppajjati

imasmiṁ asati idaṁ na hoti

imassa nirodhā idaṁ nirujjhati

복주서는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다.’라고 ‘있다’는 표현을 하였다고 해서 실재하는 어떤 것을 두고(vattamānaṁ yeva sandhāya) 말한 것이 아니라 “도에 의해서 소멸에 이르지 못한 상태(maggena anirujjhana-sabhāva)”(SAṬ.ī.51)를 뜻하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같은 방법으로 ‘이것이 없을 때 저것도 없다.’라는 표현을 하였다고 해서 아무 것도 없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도에 의해서 소멸에 이른 상태를 뜻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적고 있다.

여기서 오온의 일어남과 사라짐 바로 다음에 이 연기의 정형구를 설하시는 것은 오온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연기의 가르침과 연결하기 위해서 이다. 그러므로 오온의 일어남과 사라짐은 12연기를 통해서 이해되어야 한다.

위에서도 살펴봤듯이 존재를 특히 나라는 존재를 오온으로 해체해서 보면 염오-이욕-소멸(nibbidā-virāga-nirodha)이 일어난다. 주석서는 여기서 염오는 강한 위빳사나이고 이욕은 도과 소멸은 (아라한)과라고 설명한다. 나라는 존재를 12연기로 해체해서 보면 역시 남김 없는 이욕-소멸(asesa-virāga-nirodhā)이 일어난다. 여기서도 이욕은 과요 소멸은 아라한과라고 주석서는 설명한다. 이처럼 존재를 해체해서 봐서 염오-이욕-소멸이나 남김 없는 이욕-소멸에 도달하여 궁극적인 행복을 실현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초기불교의 핵심이다. 본경에서는 이러한 오온과 12연기가 함께 설해지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연기는 심오한 가르침]

연기(緣起)의 도리는 〈대연경〉에서 “심오한 가르침”이라고 부처님께서 직접 말씀하셨을 만큼 깊고 어려운 가르침이다. 그러므로 한정된 지면으로 제대로 설명한다는 것은 정말 무리한 시도이다. 연기의 가르침은 초기경에서 이미 6지(支) 연기, 8지 연기, 9지 연기, 10지 연기 등으로 다양하게 나타나기도 하는데 이것이 완성된 형태로 최종으로 정리된 것이 바로 12지 연기이고 이를 우리는 십이연기라고 부른다.

[연기는 괴로움의 발생구조와 소멸구조를 드러낸 것]

거듭 강조하지만 초기경에서 부처님께서 연기를 설하신 것은 모두 예외 없이 ⑪생-⑫노사우비고뇌로 표현되는 괴로움의 발생구조와 소멸구조를 극명하게 드러내기 위함이지 우주의 생성원리 등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 결코 아니다. 이러한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해야한다.

[12연기는 삼세양중인과이다]

십이연기에서 가장 중요한 사실은 12연기는 <원인과 결과의 반복적 지속>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이것을 간과해버리면 십이연기는 그때부터 혼란스러워 진다. 12연기 가운데 ①무명-②행과 ⑧애-⑨취-⑩유는 원인의 고리이고 나머지 ③식-④명색-⑤육입-⑥촉-⑦수와 ⑪생-⑫노사우비고뇌는 결과(과보)의 연결고리이다. 이렇게 12연기는 원인의 연결고리와 결과의 연결고리가 반복적으로 연결되어서 괴로움의 발생구조를 중층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것을 우리는 삼세양중인과라고 설명한다. 이것은 남북 아비담마/아비달마의 공통된 설명방법이다. 유식에서는 대신에 2세1중인과를 설하는데 성유식론에 의하면 2세만 이야기하면 3세는 자연스럽게 인정되기 때문에 2세1중인과로 족하다고 한다. 아무튼 초기-아비담-유식에서 공히 12연기는 윤회의 발생구조와 소멸구조를 설하는 것으로 인정하고 있다.

[삼세 양중인과인 두 가지 중요한 이유]

이렇게 불 수 밖에 없는 결정적인 이유는 12연기의 10번째 구성요소인 생(生, jāti)은 범어로 보면 한생에 최초로 태어나는 것이라는 이외의 뜻으로는 쓰이지 않기 때문이다. 절대로 생멸(生滅)한다는 의미의 생이 될 수가 없다. 생멸의 생은 일어남의 의미인 samudaya나 udaya이다. jāti는 태어남의 의미 외에는 없다. 그러므로 유와 생 사이에는 한 생이 개재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12연기 가운데 세 번째 구성요소인 식(식, 알음알이, viññāṇa)은 한생의 최초에 생긴 알음알이를 뜻한다. 상윳따 니까야 우현 경(S12:19)과 알음알이 경(S12:59)과 디가 니까야 대인연경(D15) §21과 앙굿따라 니까야 외도의 주장 경(A3:61) §9와 존재 경(A3:76)과 상윳따 니까야 몰리야팍구나 경(S12:12) §4 등에서 연기의 정형구에 나타나는 알음알이는 한생의 최초에 어머니 모태에 드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12연기를 삼세양중인과로 이해하는 것은 이미 초기경전에 튼튼한 근거를 두고 있다고 해야 한다. 물론 주석서는 예외 없이 12연기의 식을 한생의 최초에 일어나는 알음알이인 재생연결식(paṭisandhi-viññāṇa)으로 설명하고 있다.

[因-果의 고리]

이 가운데 괴로움의 직접적인 원인은 애-취-유이고 근원적 원인은 무명과 행이다. 그래서 사성제에서는 괴로움의 원인을 애(갈애)라고 들고 있다. 그러므로 괴로움이라는 결과가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그 직접적인 원인이 되는 갈애를 척파해야 하며 갈애를 척파하기 위해서는 갈애가 일어나는 조건인 식-명색-육입-촉-수의 연기구조를 이해해야하고[正見] 이를 바탕으로 팔정도를 실천해야 한다.

[12연기에 대한 네 가지 설명]

이렇게 원인-결과의 중층적 고리인 12연기는 이미 다양한 부파의 다양한 대가들에 의해서 다양하게 설명되어 왔다. 《구사론》에서는 한 찰나에 연기의 12지가 동시에 함께 일어난다고 주장하는 “찰나(刹那)연기”와, 12찰나에 걸쳐서 연속적으로 12지가 연이어서 상속(相續)한다는 “연박(連縛)연기”와, 여러 생에 걸쳐서 시간을 건너뛰어서 12지가 상속한다는 “원속(遠續)연기”와, 12지는 모두 5온을 본질로 하여 매순간 오온이 생멸하면서 상속하지만 특정 순간의 두드러진 상태(分位)에 근거하여 각각의 명칭을 설정한 것이라는 “분위(分位)연기”의 넷을 들고 있다. 설일체유부에서는 분위연기를 정설로 간주한다.

[12연기와 조건발생을 구분해야 함]

그리고 꼭 말하고 싶은 것은 이 12연기와 조건발생(paccaya, paṭṭhāna)을 혼동하지 말라는 것이다. 불교는 이미 초기불교부터 조건발생으로 존재일반을 설명한다. 이러한 조건은 초기 아비담마에서부터 24가지 조건으로 정리되었고 구사론을 위시한 북방아비달마아세는 6인-4연-4과로 특히 4연으로 정리가 되었으며 이것은 유식에 고스란히 전승되어서 10인-4연-5과 특히 4연으로 정리되어 설명되고 있다. 그러므로 괴로움 특히 윤회의 괴로움의 발생구조와 소멸구조를 설하는 12연기를 이러한 24연이나 4연과 혼동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 24연이나 4연이 발전하여 화엄에서 법계연기로 승화한 것이지 결코 12연기가 법계연기로 발전한 것이 아니다.

상호의존의 방법은 ⑴ 원인의 조건(hetupaccaya, 因緣) ⑵ 대상의 조건(ārammaṇapaccaya, 所 緣緣) ⑶ 지배의 조건(adhipatipaccaya, 增上緣) ⑷ 틈 없이 뒤따르는 조건(anantarapaccaya, 無 間緣) ⑸ 더욱 틈 없이 뒤따르는 조건(samanantarapaccaya, 等無間緣) ⑹ 함께 생긴 조건 (sahajātapaccaya, 俱生緣) ⑺ 서로 지탱하는 조건(aññamaññapaccaya, 相互緣) ⑻ 의지하는 조건(nissayapaccaya, 依止緣) ⑼ 강하게 의지하는 조건(upanissayapaccaya, 親依止緣) ⑽ 먼 저 생긴 조건(purejātapaccaya, 前生緣) ⑾ 뒤에 생긴 조건(pacchājātapaccaya, 後生緣) ⑿ 반 복하는 조건(āsevanapaccaya, 數數修習緣) ⒀ 업의 조건(kammapaccaya, 業緣) ⒁ 과보의 조건 (vipākapaccaya, 異熟緣) ⒂ 음식의 조건(āhārapaccaya, 食緣) (16) 기능[根]의 조건 (indriyapaccaya, 根緣) (17) 禪의 조건(jhānapaccaya, 禪緣) (18) 도의 조건(maggapaccaya, 道緣) (19) 서로 관련된 조건(sampayuttapaccaya, 相應緣) (20) 서로 관련되지 않은 조건(vippayuttapaccaya, 不相應緣) (21) 존재하는 조건(atthipaccaya, 有緣) (22) 존재하지 않은 조건(natthipaccaya, 非有 緣) (23) 떠나가버린 조건(vigatapaccaya, 離去緣) (24) 떠나가버리지 않은 조건(avigatapaccaya, 不離去緣)이다.

6인: 능작인, 구유인, 상응인, 동류인, 변행인, 이숙인

4연: 증상연, 등무간연, 소연연, 인연

5과: 증상과, 사용과, 등류과, 이숙과, 이계과 (아비달마 구사론)

6인-4연-5과에 대한 설명은『아비달마 불교』(권오민, 민족사, 106~121쪽을 참조할 것.)

아무튼 연기든 조건이든, 이러한 연이생(緣已生)의 가르침은 역사적으로 전개되어온 모든 불교를 불교이게 하는 핵심이 되는 것임은 자명하다.

[12연기는 무아를 드러내는 강력한 수단]

십이연기를 접하면서 우리가 명심해야하는 더욱 중요한 사실은, 연기의 가르침은 자아니 진아니 대아니 주인공이니 하는 존재론적인 실체를 상정하고 그것과 하나 되는 것쯤으로 깨달음을 착각하지 말라고 단언한다는 것이다. 존재론적인 실체는 어느 시대 어느 불교에도 결코 발붙일 틈이 없습다. 만일 여래장이나 진여나 불성을 존재론적인 실체로 이해해버린다면 그것은 불교가 아니다. 불교라는 깃발을 내걸고 외도짓거리를 하는 현양매구(懸羊賣狗)일 뿐입니다. 이것이 실천적 측면에서 본 십이연기의 중요성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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