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다의 옛길 - 올바른 집중(正定. 정정)
모든 종교는 인간의 내적인 계발을 위해 어떤 명상 즉 정신적인 수행을 가르친다. 그것은 조용한
기도의 형태일 수도 있고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 어떤 신성한 경전을 선택해서 읽는 형태일 수도
있다. 또한 어떤 신성한 대상, 인물, 관념에 집중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이러한 정신적인 수행에
의해서 때로 성자나 신성한 분들의 모습을 보거나 그들과 대화하거나 목소리를 듣는 따위의 신비적인
체험을 하기도 한다고 믿어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건들이 환상, 상상, 환각, 잠재의식의 단순한 투영인지 진실한 현상인지는 확실하게
말할 수 없다. 마음은 개인적인 힘이며, 이 마음은 앞에서 말한 모든 현상들을 만들어 낼 수 있다.
황홀경에 들어 간 요가 수행자들이나 신비주의자들은 무감각해져서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 필자는
명상의 자세에서 일종의 혼수상태에 빠지는 사람들을 보았는데, 그들은 마치 생각에 잠겨 있는 듯 했다.
이런 사건들을 목격한 또 다른 사람들은 이것을 일종의 명상이라고 잘못 생각한다.
경전에서는 명상에 몰두한 상태인 선(禪)을 통해 즉 정신적인 기능의 계발을 통해 정신적인 힘을
얻을 수 있다고 전한다. 이 힘을 얻으면먼 곳까지 볼 수 있어서 다른 세계에 있는 중생들까지도 볼 수
있다. 또한 멀리서 들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으며, 과거 생도 알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 그러나
불교에서 말하는 선은 자기 최면의 상태나 의식이 없는 혼수 상태가 아니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그것은 마음이 청정한 상태를 말하는데, 이 상태에서 번뇌가 정복되고 고요히 가라앉아 마음은 통일
되고 집중된다. 그래서 마음은 의식이 또렷하고 깨어 있는 상태로 들어가게 된다.
최근에 이루어진 초심리학의 연구에서 이러한 현상들은 어느정도 받아 들이고 있다는 사실은
흥미로운 일이다. 임상 심리학에서도 초감각적 지각에 대한 관심이 서서히 확산되고 있고 일반적인
이해의 수준을 능가하는 결과를 얻어 낸 것 같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인간의 최종적인 해탈 즉 속박으로부터의 해방과 비교했을 때는 그다지 중요
하지 않은 부산물에 지나지 않는다. 때로는 이러한 초현실적인 현상들이 속박으로 작용해서 깨달음을
지연시킬 수도 있다.
불교에서 가르치는 명상은 어떤 지고한 존재와의 결합을 얻기 위한 것도, 어떤
신비적인 경험들을 나타내기 위한 것도, 자기 최면을 위한 것도 아니다. 그것은 마음의 모든 번뇌들을
모두 제거함으로써 흔들리지 않는 마음의 해탈 즉 속박으로부터 가장 안전한 곳을 찾으려는 한 가지
목적을 위한 고요함(止)과 통찰(觀)을 일으킨다.
인간이란 끊임없이 변화하는 몸과 마음의 흐름이다.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마음이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인간의 마음에 큰 비중을 둔다. 어느 때 한 비구가 붓다에게 질문을 했다.
"세존이시여, 세상은 무엇에 의해서 인도되고, 무엇에 의해서 이리저리 끌려 다니고, 어떤 법에 의해
좌우 됩니까"
"비구야, 세상은 마음에 의해서 인도되고, 마음에 의해서 이리저리 끌려 다기고, 마음이라는 법에
의해 좌우된다. (증지부. II. 177, 상응부 I 39)
붓다와 동시대의 인물이었던 나타풋타(Nataputta. 육사외도중 자이나교주)처럼 몇몇 사상가들은
행위를 가장 중요하게 여겼지만, 붓다는 마음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다. (중부. 56, Upali-sutta)
마음을 통제해서 마음을 깨끗이 하는 것이 불교의 핵심이다. 마음을 통해서 행복을 발견하고
마음을 통해서 (인생의) 완성을 이루어야 한다. 그러나 마음이 오염되어 있고 통제되어 있지
않는 한 마음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가치 있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붓다는 정신적인
청정을 강조 하는데, 이것은 괴로움으로부터 진정한 행복과 해탈을 얻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자유와 방종을 같은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현저하게 감각적인 현대 문명의
물질주의적인 경향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을 길들이는 일은 자신의 발전을 저해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붓다의 가르침은 전혀 다르다. 진정으로 잘되고 싶으면 올바른 방법으로 자신을
정복하고 길들여야 한다. 불교에서 진정한 행복과 번영으로 가는 길은 욕망, 성냄, 어리석음으로부터
마음을 보호해서 마음이 이들로부터 벗어나도록 하는 것이다.
마음이 잘 통제되어 올바른 길로 나아 가야 자신에게도 사회를 위해서도 유용하다. 혼란스러운 마음은
자신에게도 해롭고 다른 사람에게도 해롭다. 이 세사에서 일어난 엄청난 파괴적인 행위는 모두 마음의
통제 방법 즉 마음의 균형을 잡고 안정시키는 방법을 모르는 사람들이 저지른 것이다.
한 사람을 세상에서 가치 있는 인물로 만드는 데는 지위, 계급, 피부색 또는 부나 권력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단지 그의 행위만이 한 사람을 위대하고 존경 받으며 가치 있는 사람으로 만든다.
"지헤를 밝게 빛내는 것은 바로 행위이다." (증지부. i. 102)
"마음은 빛난다. 단지 객진번뇌(客塵煩惱)에 의해서 오염될 뿐이다." (증지부. i. 10)
충동을 억제하고, 습성을 통제하며, 우리들을 유혹해서 노예 상태로 묶어 두는 것들을 걷어차 버리고
악한 생각이 일어나도록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는 악령들을 쫓아 내는 일은 그리 쉽지 않다. 이러한
생각들은 죽음(악마)의 세 군대인 욕망, 성냄, 어리석음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이러한 생각들은
지속적으로 마음을 닦아서 진정한 청정을 얻을 때까지는 근절되지 않는다.
마음을 다스리는 일은 행복으로 가는 열쇠이다. 그것은 미덕의 왕이며 모든 진정한 성취 뒤에 놓여
있는 힘이다. 인간의 마음속에 여러 가지 갈등이 일어나는 것은 바로 마음을 잘 다스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만약 그 갈등들을 통제하려면 욕망과 성벽을 통제해야 하고 스스로 경계하고 청정하며
참착하게 살아 가려고 노력해야 한다.
침착함은 나약함이 아니다. 교양 있는 사람은 항상 침착한 태도를 보여 준다. 일이 순조로울 때는
쉽게 침착해질 수 있지만 상황이 어려울 때는 침착하기 어렵다. 이러한 어려운 자질은 획득할 만한
가치가 있다. 왜냐하면 그와 같은 침착함과 자제력에 의해서 사람들은 인격의 힘을 축적해
가기 때문이다. 시끄럽고 말이 많으며 떠들기 좋아하고 바쁜 사람들이 강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주
잘못된 것이다.
빈 것은 요란하지만 가득 찬 것은 아주 조용하다.
어리석은 자는 반쯤 채운 항아리 같고
성자는 잔잔한 호수와 같다. (숫타니파타 721)
마음의 고요를 계발한 사람은 인생의 성쇠를 겪더라도 자제력을 잃지 않는다. 그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려고 노력한다. 걱정과 혼란함에서 벗어나 그는 덧없는 인간의 허약성을 보려고 노력할 것이다.
"고요한 마음들은 행운 속에서든 불행 속에서든 각각의 속도를 유지하며 계속된다. 마치 폭풍우 속
에서도 제 속도를 유지하는 괘종 시계처럼." (R.L.Stevenson)
마음을 고요히 해서 인생을 완성한다고 아무리 떠들어 봤자 그것으는 우리들이 바라는 목표에 도달
할 수 없다. 번뇌를 부추기고 무지의 암흑 속으로 점점 더 깊이 빠뜨리며 유혹의 미끼로 우리들을
노예로 만드는 대상들을 버리고, 그 대상들에 대한 초연함과 진심에서 우러나온 포기를 실천함으로써
고요함과 최종적인 해탈을 얻을 수 있다.
완전함에 도달하려는 우리의 시도는 종종 성공을 거두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의 동기가 진지하고
순수하다면 실패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멈추지 말고 거듭해서 노려하자. 아무도 단번에 산의
정상에 올라갈 수는 없다. 조금씩 올라가야 한다. 금의 불순물을 제거하는 숙련된 기술자처럼
사람들은 조금씩 인생의 번뇌를 씻어 내려고 노력해야 한다. 붓다가 가르쳐 준 내적인 성장과
발전의 길은 바로 명상의 길이다. 이제 그 길로 되돌아가 보자.
인간의 마음이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데에 빠지면 마음을 닦으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반면에 성실히 명상 즉 마음을 닦는 데에 몰두하는 사람은 세소적인 일에 관심을
덜 갖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감각적인 쾌락으 즐기고 겉보기에는 중요하다고 생각되고 유쾌한 것들에
집착한다. 그러나 동.서양 어디에도 여전히 오염이 덜 된 눈과 날카로운 감각 기능들을 가지고
세속적인 지식이나 선입견과는 전혀 다른 어떤 것을 찾으려는 사람들이 있다.
최근에 사람들은 정신 현상을 연구하고 조사하느라 바쁘다. 그리고 이 연구는 인간의 마음에
숨겨진 통로를 드러내고 인간이 정신 계발을 하도록 부추긴다. 내적인 발전을 추구하려는 인간의
욕구가 점점 커지고 있다. 그것은 좋은 징조이다.
정말 중요한 생각들은 상당히 긴 시간이 지나야 떠오르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 인간의 마음은
바로 고독 속에서 고독을 통해서 힘을 얻게 된다. 가장 큰 창조적인 힘은 침묵 속에서 작용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침묵보다는 시끄러운 것을 더 좋아하는 것 같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루하루
의 일과 가 너무나 힘들고, 겉보기에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일에 푹 빠져 있어서 고요한 사색의
중요성을 간과한다.
침묵속에 들어 갔을 때 우리는 완전히 홀로 있게 되고 그 결과 우리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된다. 이때 우리는 실제와 직면하게 되고 일상적인 경험의 약점과 한계를 극복 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매우 분주하지만 소득은 없다. 반면에 달걀을 품고 있는
암탉은 매우 비활동적이지만 달걀을 따뜻하게 해서 병아리가 태어나도록 하는 유용한 일을 한다.
우리도 달걀을 품고 있는 암탉처럼 매일 30분 정도라도 비활동적인 일에 몰두해 보자. 우리의
마음이 고요하고 평온해졌을 때, 가식없이 우리 자신의 본성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 자신의
마음과 조용한 대화를 나눔으로써 우리는 마음을 계발할 수 있다. 그러면 재가 신자들은 다음과
같이 반문 할지도 모른다.
"해야 할 많은 의무를 가지고 어렵게 살아가는 우리들이 어떻게 명상할 시간이 있습니까?"
그러나 사람들은 자신을 즐기는 데 탐닉할 시간은 있다. 의지만 있다면 새벽이든 잠자기
전이든 매일 잠깐 동안은 명사에 몰두 할 수 있다. 또는 마음의 준비만 되면 바로 현재 있는
그곳에서 아무리 짧더라도 생각을 한 곳에 모아 집중할 수 있다.
만약 이와 같이 매일 조용한 사색을 하게 되면 그는 일을 더 잘할 수 있고 더 효율적으로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당당하게 시련과 걱정거리를 대면할 용기를 갖게 되고 훨씬 더 쉽게
만족하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단지 그렇게 노력할 결심만 하면 된다.
불교에서 말고 있는 명상은 어떤 것이라도 정신적인 건강을 가져다 준다. 결코 병을 가져다
주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모든 명상은 마음을 병들게 하는 정신적인 긴자응ㄹ 조절하고 완화
하려는 노력이기 때문이다. 육체의 병은 치료하기가 그리 어렵지 않지만 마음의 병은 치료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더러운 마음을 깨끗이 하려고 노력하고 또 그렇게 해야 한다. 그것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어려운 일일지도 모르지만 반드시 해야 할 일이다.
"내적으로 번뇌가 사라진 사람(아라한)들을 제외하고 이 세상에서 한 순간만이라도 마음의
병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들은 드물다." (증지부. ii. 143)
늙고, 약하고, 병든 나쿨라피타(Nakulapita)가 기운을 북돋우며 편안하게 해 주는 어떤 법문을
듣기 위해 붓다에게 다가갔을 때 붓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대가 약하고 병든 것은 사실이다. 이와 같은 몸을 갖고 있는 사람이 잠시라도 건강하다고
자신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러므로 그대는 다음과 같이 자신을 훈련해야 한다. '비록
나의 몸은 아프지만 나의 마음은 아프지 않을 것이다.' 이와 같이 그대는 자신을 훈련해야
한다." (상응부 .iii. 2)
여기서 명상은 일상 생활에서 벗어나는 자발적인 은둔이나 내세를 위해서 수행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밝혀 두고 싶다. 명상은 일상적인 삶 속에 적용 되어야 하고, 그 결과는
지금 바로 여기에서 얻을 수 있어야 한다. 명상은 일상적인 삶과 분리된 것이 아니다. 명상은
우리 생활의 본질적인 부분이다. 명상을 무시하면 인생은 의미와 목적 그리고 영감히 희미해
진다.
불교에서 명상 (명상이라는 말은 계발, 닦음을 의미하는, 즉 '마음의 계발'이나 '마음을 닦음'을
의미하는 불교 용어 바바나(bhavana)와 일치하지는 않는다. 바바나란 진정한 의미에서의 계발을
의미한다. 이것은 모든 현상적인 것들의 본질을 보고 열반을 실현하기 위하여 마음의 모든
악한 요소들을 제거해서 마음의 모든 선한 요소들을 계발하는 것이다)은 가장 높은 위치를
차지한다. 붓다의 가르침 중에서 가장 중요한, 속박으로부터의 해탈은 바로 이 명상 속에서,
이 명상을 통해서 획득되기 때문이다.
초기 경전이 전하고 있는 명상에 대한 설명은 대부분 깨달음을 얻기 위해 붓다가 사용했던
방법들 즉 정신적 향상을 위해 붓다 자신이 했던 개인적인 경험에 기초한 것이다.
깨달음을 얻기 전과 얻고 난 후 붓다가 수행하고 경험했던 명상은 두 가지로 구분된다. 사마디
(samadhi. 삼매)와 비파사나(vipassana.관)가 그것이다. 사마디는 마음을 집중시키는 방법
즉 마음을 통일시키는 방법이고, 비파사나는 통찰하는 방법이다.
이들 가운데 마음을 집중 시키는 사마디는 마음을 가라앉히는 기능을 한다. 그래서 사마디라는
말이 어떤 문맥에서는 고요함, 적정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마음을 가라앉힌다는 것은 마음을
통일하는 것 즉 마음을 한 곳에 집중하는 것을 의미한다. 마음의 통일은 다른 모든 대상을
배제하고 한 가지 유익한 대상에 마음을 집중시킴으로써 이루어진다.
"집중(定.정)이란 무엇인가? 집중의 표적, 집중의 필수품, 집중의 계발이란 무엇인가? 마음의
통일, 이것이 집중이다. 사념처가 집중의 표적이고 네 가지 올바른 노력(四正勤.사정근)이
집중을 위한 필수품이다. 바로 이러한 법들을 ㅜ행하고 발전시키고 향상시키는 것, 이것이
바로 집중의 계발이다." (중부 i. 301 sutta 44)
이 설명은 삼학 가운제 정학의 세 가지 요소인 올바른 노력, 올바른 주시, 올바른 집중이
서로서로 도와 함께 적용한다는 것을 분명히 지적하고 있다.
경전과 주석서들에는 명상의 많은 주제들(行處.행처. 이는 집중을 위한 토대 즉 집중을 위한
표적이 되는 어떤 유익한 대상을 의미한다)이 언급되어 있다. 이 주제들 가운데 어떤 것들은
수행자를 '아무것도 없는 영역 (空無邊處.공무변처)'이나, '지각도 아니고 지각이 아닌
것도 아닌 영역(非想非非상處.비상비비상처)'으로 인도해 주는, 선정(禪定,jhana)으로
알려진 매우 높은 정신적인 집중과 성취를 얻도록 해 줄 수 있다. 그러나 이 정신적인 성취가
아무리 높고 고상하다 할지라도, 이것은 진리의 깨달음과 속박으로부터의 해탈을 가져다
줄 수 도 없고 가져다 주지도 않는다.
붓다는 깨달음을 얻기 전에, 가르침을 얻고 지도를 받기 위해 당시 가장 유명했던 두 명상 수행자
알라라 칼라마(Alara Kalama)와 웃다카 라마풋타(Uddaka Ramaputta)를 찾아갔었는데 그들뿐만
아니라 다른 요가 수행자들도 붓다에게 최고의 진리와, 속박에서 해탈로 가는 길을 보여주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들의 명상 체험은 '지각도 아니고 지각이 아닌 것도 아닌 영역
(비상비비상처)'에서 끝나는데 이 체험은 서로의 상관 관계 속에서 존재하는 사물의 본성
(연기성)을 파악하기에는 불충분했기 때문이다. 즉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선(禪) 체험들은 말할 필요도 없이 매우 높은 정신적인 집중을 일으킨다. 그리고 이러한
정신적인 집중은 바로 이 삶 속에서 대단한 기쁨과 행복이라는 진실한 감각을 가져다 주는 절대적인
고요와 적정으로 인도한다. 이 행복은 경전에서 언급되고 있는 수행의 다섯 가지 장애를
극복한 자연스러운 결과인 마음의 고요함에 의해서 생긴다. 이 다섯 가지 장애에 대해서는
곧 살펴보게 될 것이다.
불교에서 설하고 있는 적정의 계발은 불교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붓다가 출현하기 이전에 이미
요가 수행자들은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이어져 내려오는 다른 명상 체계를 구행하고 있다. 인도는
항상 신비의 땅으로 불려왔다. 그러나 당시의 요가는 결코 어떤 한계를 넘지 못했다. 보살은
단순한 선정과 신비적인 경험에 만족할 수 업었다. 그의 유일한 목저은 열반을 얻는 것이었다.
이 목적을 가지고 그는 완전한 평화와 해탈을 가져다 줄 명상법을 찾아 자신의 가장 깊숙한
마음의 구석을 탐색했다.
앞에서 보았듯이 보살은 마침내 가야에 있는 한 나무 아래 앉아서 들숨과 날숨을 관찰하는 명상에
몰두했다. 이와 같이 해서 완전한 고요함을 얻고 나서야 그는 통찰 즉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게 해 주는, 다시 말하면 조건지어져 있는 사물들의 세 가지 특성인 무상, 괴로움, 무아를
볼 수 있게 해 주는 진정한 지혜를 계발할 수 있었다. 보살이 무지의 두터운 벽을 허물고
실재에 도달하고, 이전에는 그가 들은 적이 없었던 법인 사성제를 완전히 이해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 통찰 즉 통찰의 지혜에 의해서였다. (상응부 .s.421)
비파사나라는 단어는 팟사티(passati, 보다)에 접두어 비(vi, 특별한)가 합성된 것으로, 특별한
방식으로 본다는 의미를 가진다. 그러므로 비파사나는 일상적인 것을 넘어서, 있는 그대로 바르게
본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피상적으로 보거나 단지 겉모습만 보는 것이 아니라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즉 모든 현상적인 존재의 세 가지 특성을 보는 것을 의미한다.
수행자가 마음의 모든 때를 벗고 실재(열반)를 볼 수 있는 것도 통찰의 기초가 되는 마음의
고요한 집중과 더불어 바로 이 통찰 덕분이다. 통찰을 명상하는 것은 붓다 자신의 전형적인
교리 즉 붓다의 독특한 체험이며 불교에만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붓다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와 같은 고요와 통찰은 함께 하고 '동시에 발생한다." (중부,sutta 149) 수행자는 고요와 통찰을
함께 멍에로 연결하고 이 두 가지가 균형을 이루도록 이끌어 감으로써 명상을 완성으로 이끈다.
멍에의 한쪽은 고요한 마음이고 다른 한쪽은 날카로운 통찰이다.
"여기서 날카로운 통찰의 계발은 적정의 계발과 결합한다. 그러나 각각의 기능들이 다른 기능을
압도하지 않는 방식으로 결합한다. 그래서 둘다 균등한 힘을 얻는다. 한편 지나친 분석은
혼란을 가져올 수 있다. 그리고 지나친 적정은 나태함을 가져온다." (Bhikkhu Soma, The way of
Mindfulness)
붓다도 다음과 같이 말한다.
"비구들아, 적정을 계발하라. 적정을 얻은 비구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본다." (상응부.iii sutta 5)
그러나 적정의 계발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중요한, 더 지고한 것 즉 통찰을
계발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다시 말하면 팔정도의 첫번째 요소인 '올바른 견해'를 얻기 위한
수단이다. 올바른 집중은 목적을 위한 수단에 불과 하지만 팔정도에서 대단히 중요한 역활을 한다.
이것을 또한 번뇌를 가라앉힘으로써 일어나는 마음의 청정으로도 알려져 있다.
고통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에게는 마음의 청정을 기대할 수 없다. 인간의 몸이나 마음이 괴로우면
집중을 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붓다는 "괴로워 하고 있는 사람의 마음은 집중되지 않는다."
라고 말함으로써 이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상응부.v. 398)
"비구들아, 탐욕, 성냄, 어리석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계발 되어야 한다. 두 가지란
무엇인가? 적정과 통찰이다. 탐욕, 성냄, 어리석음을 버리고 소멸 시키고 그치게 하기 위해서는
이 두 가지가 계발되어야 한다." (증지부. i. 100)
또한 붓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비구들아, 두 가지는 지혜와 함께 한다. 두 가지란 무엇인가? 적정과 통찰이다. 적정이 계발
되었을 때 마음도 계발된다. 계발된 마음을 통해 욕망이 제거된다. 통찰이 계발되었을 때
지혜도 계발된다. 계발된 통찰에 의해 무지가 제거된다. 욕망으로 오염된 마음은 해탈할 수
없다. 무지에 의해 마음이 오염되어 있을 때 지혜는 계발될 수 없다. 이와 같이 욕망으로부터
깨끗해진 마음에 의해 마음의 해탈(心解脫.심해탈)이 일어나고, 무지로 부터 깨끗해진 마음에 의해
지혜의 해탈(慧解脫.혜해탈)이 일어난다." (증지부.i. 61)
앞서 보았듯이 적정과 통찰, 다시 말하면 팔정도의 올바른 집중과 올바른 견해는 분리될 수 없다.
이것들은 서로서로 유지시켜 주는 보완 관계에 있다. 어느 정도의 집중에서 나오는 적적이
없다면 통찰은 게발될 수 없다. 또한 통찰이 어느 정도 갖추어지지 않는다면 즉 인생의 본질을
어느 정도 알지 못한다면 집중은 계발될 수 없다. 이러한 사실을 붓다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지혜가 없는 자에게 집중이 없고
집중이 없는 자에게 지혜가 없다.
지혜와 집중이 있는 사람은
진실로 열반의 가까이에 있다. (법구경 372)
계행을 잘 갖추고 진실하게 수행해서 최상의 청정을 얻으려는 사람은 번뇌를 제거하고 수행자들이
직면하게 되는 많은 장애물들을 극복함으로써 선정의 길을 개척한다. 선정과 해탈의 길을 가로막는
장애물로 특히 다섯 가지가 언급되고 있다. 경전에서는 이들을 '오개(五蓋)'라고 한다. 이것들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붓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비구들아, 사리 판단을 흐리게 하고 눈을 멀게 하고 사람들의 통찰력을 빼앗아 무지하게 하는
오개는 고통스럽게 할 뿐 열반으로 인도하지 않는다." (상응부.v.97)
개(蓋)란 정신적인 발전을 방해하는 것을 의미한다. 오개는 완전히 닫아 버리고 끊어 버리며
방해하기 때문에 장애라 불린다. 이것들은 해탈로 나아가는 문을 닫아 버린다. 오개란 다음과
같다.
1. 감각적인 욕망
2. 악의, 증오
3. 나태와 무기력
4. 침착하지 못함과 걱정
5. 회의적인 의심
1. 첫번째 장애인 감각적인 욕망은 감각 대상들에 대한 욕망을 의미한다. 감각적인 생각들은
확실히 정신적인 발전을 방해한다. 이것들은 마음을 어지럽게 해서 마음의 집중을 방해한다.
육욕은 감각들을 억제하지 않아서 일어난다. 감각들이 다스려지지 않았을 때 욕망이 일어나게
되어 마음의 흐름은 번뇌에 물들게 된다. 그러므로 수행자들은 해탈로 가는 문을 닫아 버리는
이 장애를 경계할 필요가 있다.
2. 다음은 악의, 증오이다. 감각적인 욕망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현명하지 못함에 의해서 즉
이치에 맞는 사유를 하지 않아서 악의가 일어난다. 그런데 이 악의가 점검되지 않았을 때
악의는 그 자체와 그 성질을 왜곡시킨다. 그래서 진리의 깨달음을 방해하고 자유로 가는 길을
차단한다. 무지에 근거하고 있는 욕망과 악의는 정신적인 성장을 방해할 뿐만 아니라
사람과 사람, 국가와 국가 사이에 일어나는 싸움과 불화의 근원적인 원인으로 작용한다.
3. 세 번째 장애인 나태와 무기력은, 정신적.육체적으로 병들어 있는 것이다. 이것은 몇몇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육체적인 무기력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장애로부터 자유로운 완전한
존재인 아라한들도 육체적인 피로를 느끼기 때분이다. 이 나태와 무기력은 너무 굳어서 잘
발라지지 않는 버터처럼 마음을 굳고 생기 없게 만든다. 그래서 명상을 하려는 수행자는
정열과 진지함이 줄어들어 결국 마음이 병들고 게을러진다. 무기력은 마침내 무관심한
상태가 될 때까지 더 큰 무기력을 낳는다.
4. 네 번째 장애는 전진을 어렵게 만드는 또 다른 불이익인 침착하지 못함과 걱정이다. 흔들리는
벌통 속에서 당황하고 있느 별들처럼 마음이 침착하지 못할 때 마음은 집중되지 않는다.
마음의 동요는 고요함을 방해하고 발전의 길을 가로 막는다. 정신적인 걱정은 해로울 뿐이다.
한 가지 일과 다른 일, 이미 한 일이나 하지 않은 일, 불운에 대해서 걱정할 때 그는 결코
마음의 평화를 가질 수 없다. 이 모든 번민과 걱정 즉 마음의 혼란과 불안정성은 집중을
방해한다. 그러므로 침착하지 못함과 걱정이라는 이 두 가지 장애는 정신적인 발전을 저해
하는 오개에 포함된다.
5. 다섯 번째이자 마지막 장애는 회의적인 의심이다. 팔리어로 비(vi)와 치킷차(cikiccha)가
합쳐져 이루어진 이 단어는 '약(cikiccha)이 없다(vi=vigata)'는 뜻이다. 그렇다. 의심을
하고 있는 사람은 진실로 무서운 병을 앓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의심을 버리지 않는다면,
그는 계속해서 근심하고 괴로움을 겪게 될 것이다. 회의에 빠져 있는 한 그는 계속해서
정신적인 발전에 매우 결정적인 것들에 대해서 회의적인 견해를 가지게 될
것이다. 경전의 주석가들은 이 장애를 '어떤 것을 단호하게 결정하는 능력이 없는 것.'
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것은 또한 선정을 얻을 가능성에 대한 의심도 포함한다. 이와
같이 이들 다섯 가지 장애들은 개별적이면서 또한 집단적으로 선정의 획득을 방해한다.
이와 같이 유해한 힘들에 사로 집힌 마음은 선한 어떤 대상에 잘 집중 할 수 가 없다.
욕망, 악의 따위의 생각들을 가지고서도 한 가지 대상에 집중할 수 있지만 그것은 잘못된
집중이다. 인간 내부에 오염 즉 번뇌가 존재하는 한 잘못되고 악한 생각들이 계속 일어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집중을 닦는 수행자는 어떤 잘못도 범할 수 없다. 오개가 그의 통제를
받기 때문이다.
오개를 극복하기 위해서 선정의 요소로 알려져 있는 다섯 가지 암의 요소들을 계발해야 한다.
그것들은 오개와 정반대인 개괄적인 분별, 분석적인 분별, 기쁨, 행복, 통일된 마음이다.
수행자들에게 낮은 단계에서부터 더 높은 단계의 정신적인 청정을 가져다 주는 것은 바로
이 마음의 요소들이다. 이 다섯 가지 요소들과 결합된 의식이 선정으로 알려져 있다. 이
마음의 요소들이 선정의 길을 가로막는 장애들을 점차 차례차례 제거한다.
예를 들면 감각적인 욕망은 통일된 마음에 의해서 제거되고 악의는 기쁨에 의해, 나태와
무기력은 대상에 대한 개괄적인 분별에 의해, 침착하지 못함과 걱정은 행복에 의해, 의심은
대상에 대한 분석적인 분별에 의해 제거된다. 이들을 짝지어 놓으면 다음과 같다.
감각적 욕망 --- 통일된 마음
악의 --- 기쁨
나태와 무기력 --- 개괄적인 분별
침착하지 못함과 걱정 --- 행복
회의적인 의심 --- 분석적인 분별
진정으로 명상에 몰두하는 사람은 한적한 곳을 찾고 가능한 한 사람들을 피한다. 한적한 곳에서
명상을 통해 얻은 고요함은 사려 깊은 사람이 세상으로 돌아가서 도시 생활의 즐거움에 빠지지
앟은 채 훨씬 더 조직적이고 효과적으로 수행하게 해 준다.
공부에 깊이 몰두하는 성실한 학생은 감각적인 유혹들을 차단하고 마음에 드는 환경을 찾아
열심히 공부해서 시험에 합격한다. 마찬가지로 수행자도 적당한 장소를 찾아가 마음을 명상의
대상에 고정시킨다. 이제 그는 가장 어려운 일에 자신을 내맡기고 있다. 그는 어떻게 자신의
마음이 작용하는지 본다. 즉 어떻게 자신의 생각이 오고 가며 일어나고 다시 일어나는지 본다.
그는 정신적인 대상들을 숙고하면서 살아간다. 그래서 감각적인 욕망이 있을 때 그는 '나는
감각적인 욕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감각적인 욕망이 없을 때는 '나는
감각적인 욕망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안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수행자는 나머지 네 가지
장애들을 이해한다.
이와 깉이 집중을 포함하고 있는 팔정도의 다른 두 가지 요소인 올바른 견해와 올바른 주시의
도움을 받아 그는 먼저 근접집중(近行定.근행정)을 얻는다, 그리고 나서 수행의 장애들을 줄이고
마음의 더러움ㅇ르 씻어 냄으로써 점차 초선(初禪)에 도달한다. 이것은 무아경의 집중(安止定
안지정. 根本定근본정)이라 불린다. 단계적으로 그는 다른 세 가지 선정을 얻는다.
(설법에 나오는 네 가지 선정은 다음과 같다.
"비구는 애욕을 멀리하고 악한 생각들을 멀리하고 나서 사색과 사려를 갖추고 초연함에서 생겨난
기쁨과 행복을 가진 첫번째 선정을 성취하여 머무른다.
다시 그는 사색과 사려를 소멸시키고 나서 내적인 평온과 마음의 통일이 있고 사색과 사려가
없는 집중으로부터 생긴 기쁨과 행복을 가진 두 번재 선정을 성취하여 머무른다.
다시 그는 기쁨을 멀리하고 나서 평온에 머물렀고 주의 깊고 이해력을 갖추고 행복을 경험하고,
성자들이 '평온하고 주의 깊고 행복하게 머문다.'고 설한 세 번째 선정을 성취하여 머무른다.
다시 그는 행복도 버리고 괴로움도 버리고 나서 이전의 기쁨과 슬픔이 사라지고 난 뒤 괴로움도
없고 즐거움도 없는 평온과 관찰이 가장 깨끗한 네 번째 선정을 성취하여 머무른다."
(장부.ii. 186, 중부. i. 159,181)
이 선정 단계에서 그의 마음은 변치 않고 한결 같아서 바람이 불지 않는 날 깜박이지 않는 등불에
비유될 수 있다. 이 깊은 선정은 마음을 바르게 고정시켜 주고 마음이 움직이지 않고 혼란스럽지
않도록 해 준다. 마음과 마음의 특성들은 흔들리지 않는 손에 잡혀 있는 저울처럼 균형을 유지한다.
가장 집중된 형태인 이 선정에 있는 한 그는 가장 불리한 조건에서도 방해를 받지 않는다.
사선(四禪)을 얻고 나서 그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고 먼 과거를 탐사하고 전생을 보는 등 초자연적인
힘을 계발할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높은 단계의 선정을 수행해도 수행자는 안온의 경지에는 도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선정으로는 잠재적인 습성을 제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잠재적인 습성들은 일시적으로
중지되지만 환경이 허락되면 언제든지 다시 나타날 수 있다. 그래서 만약 올바른 노력과 올바른
집중이 약해지면 이것들은 다시 그의 마음을 괴롭힌다. 여전히 번뇌와 악한 충동들, 잠재적인
기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는 아직 완전한 안온의 상태에 있지 않다.
그는 통찰을 하는 데 가장 필요한 수단인 집중을 통해 마음의 고요함을 얻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마음의 잠재적인 습성들이 근절되는 것은 바로 통찰을 통해서이다. 이러한 습성들이 마음 깊숙한
곳에 잠복해 있을 때 이것들을 잠재해 있다고 말한다. 먹이가 없는 한 이 습성들은 잠복해 있다.
다섯 개의 감각 기관과 마음 즉 육근이 시각 대상, 소리, 냄새, 맛, 감촉, 의식의 대상이라는
형태로 이 잠재적인 습성에 음식물을 공급해 준다. 이 음식물들은 유쾌한 것일 수도 있고
불쾌한 것일 수도 있다. 어떤 경우에도 감각 대상들은 자극제로 작용한다. 그래서 잠재적인
습성들이 자극을 받자마자 이들은 표면에 떠오른다.
이와 같은 습성들이 다시 일어나는 것을 파리웃타나(pariutthana.완전히 일어남)또는 사무다가타
(samudagata.생김)라고 한다. 이렇게 습성들이 깨어나 일어나게 되면 이들은 탈출하려는 경향을
띠므로 출구를 찾게된다. 사람들이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일어난 습성들을 통제하지 못하면 이
습성들은 말이나 행위의 문을 통해 또는 그 둘 다를 통해 탈출하게 된다. 일것을 일탈 또는
벗어남이라 한다.
이 습성들은 세 단계로 나누었을 때 첫번째인 잠복 상태가 가장 좋고 두번째 일어난 단계는 그런
대로 괜챦은 상태이며 세번째 일탈의 단계가 가장 나쁜 상태이다. 이 세 단계들로부터 마음을
극복하고 해탈시킬 수 있는 세 가지 무기는 지계, 선정, 지혜이다. 계율을 통해서, 몸과 말로
짓는 모든 나쁜 행위들이 통제되고 일탈의 단계가 점검된다. 말과 몸으로 짓는 업을 다스리기
위하여 어떤 정신적인 훈련이 팔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강력하고 진지한 명상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계율을 지킴으로써 사람들은 언어적.육체적으로는 고요해지고 가라앉ㅇ르지 모르지만 마음은
그렇게 되지 않는다. 선정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계유을 지키는 일은 정신적인 고요함을 얻기
위한 자산이긴 하지만 그것으로 마음을 통제할 수는 없다. 현명한 주시를 통해 얻은 선정이
습성의 두 번재 단계를 정복해서 습성이 밖으로 빠져 나가지 못하도록 해 준다. 그러나 선정도
잠재적인 습성들을 제거하지는 못한다. 지혜가 이들을 제거한다. 지혜를 통해 근원적인
충동들과 습성들이 제거되고 파괴된다. 이것이 바로 해탈이다.
잠재적인 습성들은 바로 통찰에 의해 제거된다. 그래서 수행자는 집중에서 나오는 고요함 속에
자신을 두면서 다음과 같이 통찰을 계발한다.
모든 조건지어져 있는 것들은 무상하고
모든 조거지어여 짔는 것들은 괴로움이다.
모든 존재의 요소들은 실체가 없다(무아) (법구경 277-79)
통찰의 계발이란 오온을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무아라고 이해하려는 시도이다. 그래서 진지하고
현명한 수행자는 처음으로 자신 즉 나라는 집합체(온.蘊)의 본성을 통찰하고 부분적으로 열반을
체험해서 깨달음의 첫번째 단계에 들어가는 그날까지 끊임없이 통찰한다.
이러한 성취를 통해서 세가지 족쇄인 1)내가 있다는 환상 즉 오온을 관장하는 내가 있다는 미혹,
2)의심, 3)잘못된 의례, 의식에 대한 집착을 버리게 돼ㅣ어 흐름에 들어간 사람(預流果. 예류과)이
된다. 그러나 번뇌가 완전히 제거된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는 일곱 번 정도 다시 태어나게 되지만
인간 수준 이하로 떨어지는 일은 없다. 그는 도덕적인 사람이어서 살생, 도둑질, 부정한 성행위,
거짓말, 취하게 하는 것들을 경계한다.
열성적으로 계속 통찰해서 그는 도 다른 두가 족쇄인 4) 감각적 욕망, 5)악의(증오)를 약하게
만든다. 그래서 열반을 좀더 분명하게 봄으로써 그는 깨달음의 두 번째 단계로 들어가 한 번
돌아오는 자(一來果.일래과)가 된다. 한 번 돌아오는 자라고 하는 이유는 만약 그가 아라한이
되지 못하다면 단지 한번만 더 이 세상에 태어나기 때문이다.
마침내 약해진 감각적 욕망과 악의(증오)라는 족쇄를 제거하고 그는 깨달음의 세 번째 단계에
들어가 여전히 좀더 분명한 시각으로 열반을 보게 된다. 그래서 그는 돌아오지 않는 자(不還果.
불환과)가 된다. 육욕이 제거되어 그는 인간계와 낮은 단계 있는 천상 세계 그리고 모든
비참한 세계를 포함하고 있는 감각적인 즐거움의 세계(欲界.욕계)에는 다시 태어 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범천(梵天)의 세계에 다시 태어난다.
분명한 통찰을 통해 그는 깨달음의 네 번째이자 마지막 단계에 들어간다. 그래서 그는 완성된
존재, 완전한 존재인 아라한이 된다. 이 성취와 더불어 남아 있는 다섯 가지 족쇄들인 6)형체가
남아 있는 것에 대한 욕망, 7)형체가 없는 것에 대한 욕망 (이것은 형상이 있는 세계(색계)와
형상이 없는 세계(무색계)에 대한 욕망 또는 색계선(色界禪)과 무색계선(無色界禪)에 대한
욕망이다. 이러한 욕망은 육욕적인 쾌락의 욕망만큼 거친 것은 아니지만 여전히 미묘한 욕망
이어서 높은 단계의 성취를 방해한다), 8)자만, 9) 침착하지 못함, 10) 무지가 제거 된다.
이 최종적인 정화와 더불어 그는 열반의 빛이 완전히 밝아진 상태, 말할 수 없는 고요와
흔들리지 않는 마음의 해탈 상태에 도달한다. 그래서 이 세상에는 그를 붙잡아 둘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게 된다.
자유인이 된 그는 다음과 같이 안다.
"생은 다했고, 청정한 삶을 살았으며, 해야 할 일은 이미 했고, 이제 다른 생은 없다. (윤회하지
않는 다는 말)" (상응부. iii. 822)
아라한은 선도 악도 모두 초월한다. (법구경 39,412) 그는 십이연기의 두 번째 요소이자 업을
생산하는 의지적인 형성력으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에 비록 그가 지은 가거의 업은 피할 수 없지만
새로운 업은 짓지 않는다. 생각이든 말이든 육체적 행위이든 그가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새로운
업을 형성하지 않는다. 그의 행위들은 잠재적인 습성들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다. 이것들은
단순한 행위들이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붓다는 그와 같은 완전한 성자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간의 속박에서 벗어나고
천상의 속박으로부터도 벗어난 사람
그래서 모든 번뇌로부터 자유로운 사람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른다 (여기서 바라문(Brahmana)이란 '악을 떠난 사라'이라는 의미에서
아라한과 동의어이다. (법구경 417.))
겨자씨가 바늘 끝에서 떨어지듯이
애착과 증오와 자만을 털어 버린 사람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른다 (숫타니파타 631)
인간의 기질, 성질은 다양한다. [비숫디 막가(Visuddhi-magga)]에서는 세부적으로 수없이 많은
인간의 기질을 크게 여섯 가지로 분류하고 있다. 탐욕스러운 기질, 잘 미워하는 기질, 어디에
잘 심취하는 기질, 신앙심이 깊은 기질, 지적인 기질, 주의가 산만한 기질이다.
인간의 기질이 다르듯이 명상의 주제들도 다르다. 우리는 팔리 경전 속에서, 흩어져 있는 이
명상의 주제들과 만나게 된다. [비숫디 막가]에서는 40가지 명상의 주제들을 언급하고 있다.
변처(邊處)라 불리는 10가지 대상들(十邊處).십변처)
열 가지 부정한 대상 (十不淨.십부정)
열가지 주시
네 가지 지고한 상태(四梵住.사범주)
네 가지 형테가 없는 영역(四無色處.사무색처)
한 가지 생각(一想.일상)
한 가지 분석(差別.차별)
명상의 주제와 기질과의 관계를 살펴보면 십부정과 몸에 대한 주시는 탐욕스러운 기질을 가진 사람들
에게 적합하고, 사범주와 십변처 가운데 네 가지 색깔의 변처는 성미가 급한 사람에게 적합하다.
둘숨과 날숨의 관찰은 미혹하고 산만한 사람에게 적합하고, 처음 일어나는 여섯 가지 주시는 믿음이
깊은 사람에게, 그리고 죽음에 대한 주시, 적정에 대한 주시, 사계(四界)에 대한 분석, 음식을
싫어하는 생각은 지적인 가질을 가진 사람에게 적합하다. 십변처 가운데 네 가지 색깔의 변처를
제외한 나머지 육번처와 사무색처는 모든 기질에 다 적합하다. (비숫디 막가(청정도론).ch.III)
올바른 집중을 다루는 이 장에서 다양한 명상의 주제들을 다룰 여유도 없고 다룰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이것들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비숫디 막가]와 [비뭇티 막가.Vimutti-magga. 원래
이 논서는 상좌부의 중요한 삼대 논서 가운데 하나로 스리랑카에 있었으나 중국으로 전래되어
한역된 뒤에 원본은 소실되었다. 1961년 REv. Ehara, Soma Thera, Kehminda Thera 세분이
한문본을 토대로 영어로 출간했다)]를 참조하기 바란다.
사실 인간의 다양한 기질과 명상의 주제에 대한 엄격한 규칙을 세울 수는 없다. 맛지마 니카야
(Majjhima-nikaya)에는 붓다가 라훌라에게 법을 설하면서 훈계하는 두 경이 있다(61,62번째 경).
이 경들은 전적으로 명사에 대한 가르침을 담고 있다. 62번째 경에서 붓다는 어린 라훌라에게
일곱 가지 형태의 명상에 대해서 설명한다. 주석서에 의하면 그는 그때 열여덟 살의 사미였다고
한다. 그 설법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라훌라야, 자애에 대해서 명상하라. 왜냐하면 이 자애로 악의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라훌라야, 연민에 대해서 명상하라. 왜냐하면 이 연민으로 잔인함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라훌라야, 다른 사람의 기쁨에 같이 기뻐하는 것에 대해서 명상하라. 왜나하면 이것으로 혐오하는
마음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라훌라야, 평등에 대해서 명상하라. 왜냐하면 이 평심으로 증오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라훌라야, 부정(不淨)에 대해서 명상하라. 왜냐하면 이 부정에 대한 명상으로 탐욕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라훌라야, 무상에 대해서 명상하라. 왜냐하면 이 무상하다는 생각에 의해서 아만(我慢)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라훌라야, 들숨과 날숨에 대해 관찰하라. 라훌라야, 들숨과 날숨에 대해 관찰하면서 자주 수행하면
큰 결실과 많은 이익을 얻게 된다."
한 사람이 40가지 명상의 주제를 모두 수행할 수는 없을 뿐더러 그럴 필요도 없다. 중요한 것은
자신에게 가장 적합한 하나의 주제를 선택하는 일이다. 명상을 경험해 본 적이 있는 사람의
조언도 도움이 되겠지만 우선 위에서 언급한 책들만으로도 열성적인 수행자들에게는 충분할
것이다.
하지만 진실하게 자신의 기질, 성격이 어떠한지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자신의 기질을
알 때까지는 적당한 명상 주제를 선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일단 명상 주제를 선택 했다면
그 주제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수행해야 한다. 만약 세속적인 일이나 일상적이 일에 몰두
해 있다면 진지한 명상을 위해 일을 멈추고 매일 일정한 시간 도안 조용한 장소에 앉아
있기가 쉽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성실하다면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명상은 오랜 기간 동안 일정한 시간에 규칙적으로 해야 한다. 그리고 성급하게 결과를 기대
해서는 안된다. 심리적인 변화는 매우 천천히 온다. 고요한 마음의 성취는 고요한 사색 속에서
하는 수행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우리도 또한 이 고요한 마음을 성취할 수 있을까?
홀더 경(Lord Horder),의 대답이 흥미롭다.
"그 대답은 '그렇다'이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 가능한가? 어떤 엄청난 일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 '성자들은 왜 성자들인가?'라고 물었다. 그러자 그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그들은 기분 좋기 어려울 때 기분이 좋았고, 참기 어려울 때 참았으며, 여전히 서 있고
싶을 때 힘차게 나아갔고, 말하고 싶을 때 침묵을 지켰기 때문이다.' 그것이 전부이다.
너무나 간단하지만 너무나 어려운 일이다. 정신 건강의 문제는 ..." (The Hygienen of a Quiet
Mind)
이제 40가지 명상의 주제들 가운데 하나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들숨과 날숨에 대한 관찰은
많은 사람들이 수행하는 잘 알려진 명상법이다. 이것은 보살이 보리수 아래서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노력했을 때 했던 명상이다. 그래서 붓다는 이 명상을 수행하는 중요성에 대해서 매우
강조했다. 어느때 붓다는 "비구들아, 나는 석 달 동안 홀로 머물고 싶다. 나에게 공양을
가쟈오는 한 사람만 나를 찾아 오너라." 라고 말했다. "잘 알겠습니다." 라고 비구들이
대답했다. 석 달 뒤에 붓다는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설법을 했다.
"비구들아, 만약 다른 사람들(불교와 다른 신념 체계를 가진 사람들)이 '사문 고타마는 우안거
동안 어떤 명상을 자주 수행하는가?라고 물으면, 너희들은 '세존은 들숨과 날숨을 관찰하는
명상을 자주 수행하면서 우안거를 보내셨다.'라고 말해야 한다.
비구들아, 나는 바르게 관찰하면서 숨을 들이쉬고 바르게 관찰하면서 숨을 내쉰다.
비구들아, 올바른 말을 하는 사람은 들숨과 날숨에 대한 관찰이 성스러운 삶의 방식이며,
지고한 삶의 방식이며, 여래가 사랑가는 방식이라고 말해야 한다." (상응부.s. 326)
경전에는 여러 곳에서 들숨과 날숨을 관찰하는 명상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그러므로 붓다가
라훌라를 훈계할 때 이 명상에 대한 상세한 가르침을 내린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제 다시
맛지마 니카야의 62번째 경으로 되돌아가 보자. (중부.118, Anapanasati-sutta, S.v. 311)
"라훌라야, 비구는 숲이나 나무 아래 또는 외딴 곳으로 가서 몸을 똑바로 세우고 주시하면서
결과부좌를 한다. 그리고 바르게 관찰하면서 숨을 들이쉬고 바르게 관찰하면서 숨을 내쉬어야
한다. 숨을 길게 들이 쉴 때는 '나는 숨을 길게 들이쉰다.'고 알고, 숨을 길게 내 쉴 때는
'나는 숨을 길게 내쉰다.'고 알아야 한다. 그리고 숨을 짧게 들이 쉴 때는 '나는 숨을 짧게
들이 쉰다.' 알고, 숨을 짧게 내쉴 때는 '나는 숨을 짧게 내 쉰다.'고 알아야 한다.
'나는 (숨쉬는) 과정 전체를 알면서 숨을 내쉬겠다.'고 스스로 훈련해야 한다. 또는 '나는
(숨쉬는) 육체적 기능을 고요히 하면서 숨을 들이쉬겠다고.' 고 스스로 훈련하고, '나는
(숨쉬는)육체적 기능을 고요히 하면서 숨을 내쉬겠다고.'고 스스로를 훈련해야 한다.
리훌라야, 이와 같이 들숨과 날숨에 대해 집중하고 자주 수행하면 큰 결실과 많은 이익을 얻게
된다. 이와 같이 들숨과 날숨에 대해 집중하고 자주 수행하면 마지막 둘숨과 날숨이 멈추는 것
조차도 의식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바르게 관찰하면서 숨을 들이쉬고 바르게 관찰하면서 숨을 내쉰다.'는 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바르게 관찰하면서'란 '알아차리면서', '주시하면서'를 의미한다.
그는 자기 자신을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호흡을 관찰한다. 그의 유일한 목적은 다른 생각들을
배제하고 호흡에 마음의 초점을 맞추어 거기에 마음을 고정 시키는 것이다. 분변에 있는 생각
들이 초점에 있는 생각을 깨뜨린다면 집중이 안 되고 산만해지기 때문이다.
들숨과 날숨에 대해 관찰할 때, 움직이는 공기가 코끝을 스치는 그 지점에 주의를 고정시키고
어떻게 숨이 들어가고 나가는지 관찰해야 한다. 그러나 의식이 호흡을 따라가서는 안된다.
호흡을 멈추는 일이 있어서도 안 된다. 어떤 의식적인 노력도 없이 그저 자연스러워야 한다.
때때로 수행이 잘되어 더 이상 호흡을 의식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점차 이것이 계발되어
마음이 완전히 호흡에 집중되면 거기에 단지 호흡만이 있고 호흡의 무대 뒤에 자아나 영혼
따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될 거이다.
즉 호흡과 당신이 둘이 아니며 거기에는 단지 (호흡의) 과정만이 있게 된다. 만약 이 단계를
이해할 수 있다면 집중력은 매우 높아질 것이며 더불어 크나큰 기쁨과 고요함, 마음의 평화가
따르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일 뿐이며 마음은 다시 산만해지고 생각은 방황하게 되어
집중하기 어렵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것은 문제가 안된다. 한결 같이 꾸준히 밀어
붙여야 한다. 비록 선정을 체험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이 명상은 많은 이로움을 가져다 줄
것이다. 이것은 명쾌하게 생각하고 깊이 이해하며 정신적인 균형 감각과 평등심을 가지도록
도와 줄 것이다. 이것은 또한 당신의 육체적. 정신적 건강을 증진시켜 육체적으로도 정신적
으로도 건강하게 해 줄 것이다.
붓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비구들아, 들숨과 날숨에 대해 관찰하고 자주 수행하면 큰 결실과 많은 이익을 얻게 된다.
비구들아, 들숨과 날숨에 대해 관찰하고 자주 수행하면, 사념처를 완성하게 된다. 사념처를
계발하고 자주 수행하면 칠각지를 완성하게 된다. 칠각지를 계발하고 자주 수행하면 지혜를
통한 자유를 완성하게 된다."
위에 주어진 들숨과 날숨의 관찰에 대한 설명은 초보자들에게는 결코 충분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집중을 설명하고 있는 이 장에서 더 이상 상세히 설명할 수도 없다. 좀더 상세히
알고자 하는 사람들은 위에서 언급된 책들을 참조하기 바란다.
명상이 불교의 핵심이기 때문에 붓다는 종종 정신 수행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리고 그는
다음과 같은 말로 사람들이 스스로 자신을 완성하도록 촉구하고 격려해 주었다.
물을 대는 사람은 물길을 다스리고
화살을 만드는 사람은 화살을 바로 잡으며
목수는 나무를 다듬고
현명한 사람은 자신을 다스린다. (법구경 80)
이 게송과 관계된 이야기는 여러 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사리풋타(Sariputta)가 탁발을
하기 위해 마을로 들어갔을 때, 판디타(Pandita)라는 그의 제자가 그를 따라갔다. 그때 판디타는
매우 어렸고 승가에서는 초심자였다. 그들이 마을로 가고 있을 때 판디타가 배수로를 보고
스승에게 물었다.
"스승이시여, 저것은 무엇입니까?"
"배수로이다."
"사라들은 배수로를 어디에 씁니까?"
"들판에 물을 끌어 대는 데에 사용한다."
"물은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아니다."
"스승이시여, 그러면 사람들은 마음이 없는 물질을 자신들이 원하는 곳으로 향하도록 할 수
있습니까?"
"그렇다."
그때 판디타는 다음과 같이 생각했다.
'이 사람들이 이와 같이 무생물을 자신들이 원하는 곳으로 향하게 할 수 있다면, 왜 마음을 지닌
이 사람들은 마음을 조절해서 이 삶의 결실인 아라한과를 얻으려고 하지는 않는가?'
좀더 가다가 그들은 화살을 만드는 사람들을 보았다.
"스승이시여, 이 사람들은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그들은 화살을 만드는 사람들로서, 화살을 바르게 하고 있다."
"화살도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아니다. 그것에는 마음이 없다."
그때 판디타는 다음과 같이 생각했다.
'이 사람들이 화살을 바르게 할 수 있다면, 왜 마음을 지닌 이 사람들은 마음을 통해서 저 목적
(아라한과)를 얻으려고 하지는 않는가?'
(거기서) 좀더 가다가 그들은 수레바퀴를 만드는 사람들을 보았다.
"스승이시여, 저들을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저들은 나무를 구부려서 수레바퀴를 만들고 있다."
"나무도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아니다."
그때 판디타는 다음과 같이 생각했다.
'이 사람들은 나무를 수레바퀴로 만들 수 있다. 그렇다면 왜 마음을 지닌 이들은 자신의 마음을
통제해서 신성한 삶을 영위하려 하지 않는가?'
판디타는 이와 같이 이 세 가지 일을 주의 깊게 관찰한 뒤 사라풋타에게 "스승이시여, 저는 되돌아
가려 합니다. 발우와 가사를 도로 가져가실는지요." 라고 말했다.
사리풋타가 동의하자 그는 스승에게 예를 올리고 되돌아 갔다. 그는 스승의 방에 들어가 명상을
하기 위해 앉았다. 자신의 몸에 대해 사색하고 거기에다 생각을 모으고 집중해서 그는 통찰을
통한 명상을 완성하여 아라한이 되었다. 이와 같이 출가한 지 8일 밖에 되지 않은 사미가,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마음의 통제로 명상이 무르익어 진리를 깨달았다. (법구경 141)
붓다는 그와 같은 성인들에 대해 언급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한적한 방에 들어가
마음을 고요히 해서 바르게 법(진리)를 통찰하는 비구
그에게는 인간의 기쁨을 초월한
크나큰 기쁨이 찾아 온다.
육체의 구성 요소(蘊.온)들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통찰할 때 마다
그는 현명한 사람에게 있는 불사(不死)의
기쁨과 희열을 얻는다. (법구경 373, 3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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