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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의 생애

[스크랩] 결론

이제 사성제가 불교의 중심 개념이라는 것이 확실해졌다. 45년간의 포교 기간을 통해 붓다가 가르친
것은 모두 사성제 즉 괴로움, 괴로움의 원인, 괴로움의 소멸, 괴로움을 소멸하는 길 이었다. 생각이
깊은 사람은 이 사성제를 자신의 목표인 최종적인 해탈로 받아들일 것이다. 궁극적인 의미에서 본다면
인간이라 부르는 것은 정신과 육체의 결합 즉 오온의 결합이다. 인간의 입장에서 본다면 괴로움은
몸과 마음의 결합체인 인간과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붓다가 "오온에 집착하는 것이 괴로움이다."라고 말하듯이 괴로움이란 인간 그 자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확실하다. 두 번째 진리인 괴로움의 원인인 갈애이다. 그러면 갈애는 어디에서

일어 나는가? 오온의 결합이 있는 곳, 거기에서 이 갈애가 일어난다.  세 번째 진리는 이 갈애가 소멸된
최종적인 해탈, 열반이다. 이건 또한 인간에게 외부적인 것이 아니다. 마지막이자 네 번째 진리는
이 괴로운 상태 즉 이 윤회하는 존재로부터 벗어나는 길(방법)이다.


자세히 분석해 보면 여기서 의도하는 바는 윤회와 윤회의 원인, 열반과 열반에 이르는 길을 제시하는
것임을 이해하게 된다. 윤회란 육체적.정신적 집합체가 연속되는 것에 불과하. 다시 말하면 그것은
되풀이되는 존재를 의미하지만 태양, 달, 강, 바다, 나무, 바위들을 가지고 있는 물질적인 세계가
되풀이 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러한 의미에서 윤회는 오온으로 구성되어 있는 인간에 대한 또 다른 명칭이다. 이것이 첫 번째
진리이다. 두 번째 진리 속에서 우리는 윤회의 원인과 조건을 보게 된다. 세 번째 진리 속에서
우리는 속박으로부터 가장 안전한 윤회의 소멸을 보게 된다. 이와 관련하여 상좌부(Theravada)

에서는 윤회를 열반의 정반대 개념으로 본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왜냐하면 윤회는 오온의 지속인 반면에 열반은 오온의 소멸이기 때문이다. 이 삶 속에서 감각적인
쾌락을 즐기는 사람은 윤회로 부터 벗어날 수 없다. 갈애와 애착이 사라지지 않는 한 그는 오온에
집착하게 되고 오온에 속하는 것들에 매달리게 된다. 그러나 해탈한 사람은 지금 바로 여기서 열반
에서 나오는 축복을 경험한다. 왜냐하면 가각 대상들에 집착하지 않아서 즉 갈애와 애착이 소멸
되어 그에게는 더 이상 오온의 지속, 윤회가 없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 진리는 팔정도이다. 사성제 내에서 팔정도는 유일하게 수행적인 측면을 다루고
있다. 불교 안에서는 무엇을 수행하고 계발하더라도 팔정도의 영역 내에 포함된다. 이것은 붓다가
설한 생활 방식의 시작이자 끝이다. 팔정도는 뒤얽힌 윤회로부터 벗어나, 불교의 유일하게 조건
지어지지 않은 법인 열반을 실현하게 해 주는 수단들을 요약한 것이다. 그러므로 팔정도는 열반의
원인과 조거능로 작용하지 않는다. 열반의 수단일 뿐이다.


팔정도는 붓다의 가르침 가운데서 유일하게 수행적인 측면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 실용적인
가르침에 관심을 집중시켜야 한다. 이론과 사색은 진정으로 법을 수해하는 데는 쓸모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평화와 행복으로 가는 지금길은 없다, 붓다가 여러 설법에서 지적하고 있듯이 팔정도는
훌륭한 삶의 정상으로 인도해 주는 유일한 길이다. 여기서 훌륭한 삶이란 낮은 정신적인 영역에서
더 높은 정신적인 영역으로 올라 가는 것을 말한다. 완전한 깨달음 속에서 절정에 달하는 진정한
지혜와 열반의 실현을 가져다 주는 것은 바로 말과 행동과 생각에 대한 점진적 수행이다.


이것은 종족, 계급, 신조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들을 위한 길이며 깨어 있는 동안은 어느 순간에라도
계발할 수 있는 길이다. 팔정도를 설하는 붓다의 유일한 목적은 다음과 같은 말 속에 퍼함되어 있다.


"세존은 깨달은 분이니 그분은 깨달음을 위해 법을 설한다. 세존은 길들여진 분이니 길들임을
위해 법을 설한다. 세존은 고요해진 분이니 고요해지도록 하기 위해 법을 설한다. 세존은 건너간
분이니 완전히 건너가도록 하기 위해 법을 설한다. 세존은 열반을 얻은 분이니 열반을 얻도록
하기 위해 법을 설한다." (중부 35, 장부 25)


이것이 붓다가 법을 설하고 길을 가르쳐 주는 목적이라면 그 길을 딸가는 사람의 목적도 동일함에
틀림없다. 예를 들면 자비스럽고 이해심이 많은 의사의 목적은 치료를 받으려고 자신을 찾아 온
환자를 치료하는 것이고 환자의 유일한 목적은 가능한 빨리 치료를 받는 것이다. 이것이 환자를
위한 유일한 목적이다.


우리는 또한 충고해 주고 가르침을 주는 안내자가 있다 하더라도 법의 실제적인 수행 즉 팔정도의
길을 걷는 것은 우리들의 일이아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지칠 줄 활기를 가지고 모든 장애
들을 넘어, 모든 시대의 붓다도 걸어갔고 또 그들이 가르쳐 준 올바른 길에 따라 우리들의 발거음을
바라보며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상응부.ii. 106)


건너간다는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붓다는 뗏목의 비유를 들고 있다. (중부 22) 그리면 그분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보자.


"비구들아, 나는 뗏목의 비유를 들어, 건너가서 집착하지 않는 법을 설 하겠다. 잘 듣고 생각해
보아라."
"그렇게 하겠습니다. 세존이시여."
"비구들아, 여행자가 광대한 강에 이르렀다고 하자. 이쪽 둑은 위험하고 저쪽 둑은 안전하다.
그러나 이 둑에서 저 둑으로 가는 배도 없고 다리도 없다. 그래서 그는 '이 강은 참으로 광대
해서 이쪽 둑은 안전하지 못하고 저쪽 둑은 안전하다. 풀, 잎사귀, 나뭇가지, 나무 들을 모아
뗏목을 만들어서, 손과 발을 써서 저쪽으로 건너가자.'고 생각한다.


비구들아, 그래서 그 사람은 뗏목을 만들어 손과 발을 써서 저쪽 둑으로 안전하게 건너간다.
건너가서 그는 '이 뗏목은 매우 유용했다. 이 뗏목 덕택에 이 둑에 안전하게 도착했다. 그러니
이것을 머리에 이거나 짊어지고 원하는 곳으로 가는 것이 좋겠다.'로 생각한다.


비구들아, 너희들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렇게 한다면 그는 뗏목에 대해서 바르게 행동하는
것이냐?"
비구들아, 어떻게 하면 이 사람은 뗏목에 대해서 바르게 행도하는 것이냐? 저쪽 둑으로 건너간
사람이 '이 뗏목은 매우 유용했다. 이 뗏목 덕택에 둑에 안전하게 도착했다. 이제 이것을 여기에
두거나 강에 떠내려 보내고 원하는 곳으로 가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한다고 하자.
비구들아, 만약 이와 같이 행동 한다면 그는 뗏목에 대해서 바르게 해동하는 것이다.
비구들아, 이와 같이 나는 뗏목의 비유를 들어 건너가 집착하지 않는 법을 설했다.
비구들아, 너희가 뗏목의 비유를 이해한다면 좋은 것도(법) 버려야 하는데 나쁜 것들(非法.비법)
이야 말해서 무엇하겠느냐?"


사람들은 왜 도성제(道聖諦)를 성스러운 여덟 가지 길(팔정도)이라고 하고, 왜 '올바른'이란
말이 각 요소 앞에 붙는지 의아해할지도 모른다. 평범하고 간단한 대답은 '성스럽지 않고 잘못
된 길, '잘못된'이라는 말이 붙는 각각의 여덟 가지 길이 있다는 것이다. 두 가지 교훈적인
비유 속에서 붓다는 올바른 길과 잘못된 길을 분명히 하고 있다. 붓다는 팃사(tissa)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팃사야, 비유하자면 이렇다. 두 남자가 있는데 한 사람을 길을 알고 다른 사람은 길을 알지
못한다. 길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길을 아는 사람에게 길을 물었다. 길을 아는 사람이 대답
했다. '이 길 입니다. 한참 가면 두 갈래 길을 만나게 될 것 입니다. 왼쪽 길을 버리고 오른쪽
길을 택하십시오. 그 길을 따라 한참 가면 울창한 숲을 볼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거대한 늪
지대를, 그리고 험준한 벼랑을 보게 될 것입니다. 좀더 가면 당신은 평평하고 안락한 땅을
보게 될 것입니다.'


팃사야, 이 비유의 의미는 이와 같다.


길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란 중생을 의미한다. 길을 아는 사람이란 여래, 아라한, 정등각자를
의미한다. 두 갈래 길 가운데 왼쪽 길은 여덟 가지 잘못된 길, 즉 잘못된 견해, 잘못된 생각,
잘못된 말, 잘못된 행위, 잘못된 생활, 잘못된 노력, 잘못된 주시, 잘못된 집중을 의미한다.
오른쪽 길은 팔정도 즉 올바른 견해등을 말한다.


팃사야, 울창한 숲이란 무지를, 거대한 늪 지대란 감각적 쾌락을, 험준한 벼랑은 괴로움과
절망을, 평평하고 안락한 땅이란 열반을 의미한다.


팃사야, (수행 생활 속에서) 기뻐하라! 기뻐하라! 내가 그대에게 충고해 주고 그대에게 가르쳐
주겠다." (상응부 iii 108 sutta 84)


위의 설법과 다소 유사한 비유가 맛지마 니카야 (Majjhima-nikaya)의 19번째 경에 있다. 여기서
붓다는 늪지대와 수목이 우거진 계곡에 살고 있는 사슴들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그곳에
사슴들의 행복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없애려는 사람이 온다. 그가 안전한 길을 막고
위험한 길을 열어 두어 그곳으로 사슴을 유인한다면, 저 사슴의 큰 무리는 화를 입고 (무리의
수가)줄어들게 될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행복과 안녕을 바라는 다른 사람이 안전한 길을 열고 위험한 길을 막아 사슴을
놓아 준다면 사슴들은 자라서 늘어날 것이다. 그리고 나서 붓다는 이 비유의 의미를 설명했다.
늪지대는 감각적인 쾌락의 다른 명칭이고 사슴들은 중생의 다른 명칭이다. 첫 번째 사람은
악마를 나타내고 위험한 길이란 잘못된 여덟가지 길 즈 ㄱ잘못된 견해등이다. 위험한 길이란
탐욕적인 쾌락을 나타내고 암사슴이란 무지를 나타낸다. 그리고 사슴들의 행복과 안녕을 바라는
사람은 여래, 아라한, 정등각자이며, 안전하고 평안하고 행복한 길이란 팔정도 즉 올바른
이해 등이다.


"비구들아, 이와 같이 나는 안전하고 평안하고 행복한 길을 열고 위험한 길을 막아 버렸다.
비구들아, 나는 너희들에 대한 연민에서, 제자들의 안녕을 바라는 자비로운 스승이 해야 할
일을 다 했다. 여기에 나무들이 있고 한적한 오두막이 있다.


비구들아, 명상하라. (항상 깨어 있는 일에)주의를 게을리 하지 마라. 뒤에 가서 후회하지 마라.
나는 너희들에게 이와 같이 훈계하노라."


자비로은 스승 붓다는 더 이상 이 세상에 계시지 않지만 지고한 법의 유산을 남겨 주었다. 법은
발명된 것이 아니라 발견된 것이다. 이것은 영원한 법이다. 어느곳에서나 남자건 여자건,
불교도인건 비불교도건, 동양인이건 서양인이건 모든 사람들과 더불어 존재한다. 법은 호칭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시간과 공간, 종족이라는 한계가 없다. 이것은 항상 존재한다.

법을 실현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법을 드러내어 스스로 보고 경험한다. 그러나 법을 다른 사람에게
알려 줄 수는 없다. 법은 스스로 깨달아야 하기 때문이다. 고타마 붓다는 그의 선배인 과거의
붓다들이 했던 것처럼 법을 발견했다. 우리들이 책에서 설명된 대로가 아니라, 마음의 눈으로
있는 그대로 법을 보길 바란다면 우리는이 '옛길'을 따라가야 한다.


해탈한 사람들, 완성된 사람들은 힘찬 어조로 [테라 가타(Thera-gatha)]와 [테리 가타(Theri-
gatha)]에서 이 길과 마지막 해탈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그들의 체험을 듣는 사람들은
기쁨을 느끼고 영감을 받는다. 그러나 단순한 환희와 영감만으로느 바라는 목적지에 도달 할
수 없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이 그 길을 개척할 필요가 있다.


자비롭고 동정심이 많으며 계율을 잘 지키고
목표를 향해 힘써 노력하고 용맹스럽게 밀고 나가라.
게으름은 위험하고 정진은 맏을 만하고 안전하다
이것을 알았다면 팔정도를 닦아 불사(不死)의 길을
너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라.


옛길은 모든 사람들에게 열려 있다. 열반에는 차별이 없다. 붓다는 팔정도를 마차에 비유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남자와 여자를 위해서
그러한 마차가 준비되어 있다. 그것을 타면
그들은 열반에 이를 것이다. (Kindred Sayings, i. p. 45)


이미 말한 것처럼 마차를 소유하지 못한 사람과 마차를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가르쳐 준 대로
목표를 향해 낭가지 못하는 사람은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 맛지마 니카야의
107번째 경에는 고타마 붓다와 바라문 가나카 목갈라나(Ganaka Moggallana)상에 있었던
흥미로운 대화가 들어 있다. 이 바라문의 질문에 대답하면서 붓다는 어떻게 그가 제자들을
가르치고 훈련시키는지를 상세히 설명한다.

 

주의 깊게 경청한 바라문은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이 모두 변하지 않는 목표 즉 열반을 성취하는지

아니면 단지 몇 사람만이 성취하는지 알고 싶어 했다. 붓다는 어떤 제자들은 열반을 성취하고 어떤

제자들은 성취하지 못한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바라문은 붓다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다.


"훌륭하신 고타마여, 열반이 존재하고 열반으로 인도하는 길이 존재하고 충고자로서 훌륭하신
고타마가 있는데도 가르침을 받고 있는 제자들 가운데 어떤 사람은 변하지 않는 목표인 열반을
성취하고 어떤 사람들은 성취하지 못하는 원인이 무엇입니까?"
"그러면 바라문아, 그것에 대한 대답으로 그대에게 질문을 하겠다. 그대의 뜻대로 대답해 보거라."
바라문아, 어떠하냐? 그대는 라자가하로 가는 길을 아느냐?"
"예. 그렇습니다. 저는 라가자하로 가는 길을 잘 압니다."
"바라문아, 그대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라자가하로 가기를 원하는 한 남자가 그대에게 '저는
라자가하로 가기를 원 합니다. 라자가하로 가는 길을 알려 주십시오.'라고 말했다고 하자.
그러면 그대는 '선남자여, 이 길이 라자가하로 가는 길 입니다. 한동안 이 길을 따라 가십시오.
잠시 뒤에 당신을 마을을 보게 될 것입니다. 한 동안 그 길을 따라 가십시오. 그러면 잠시
뒤에 도시를 보게 될 것입니다. 한동안 그 길을 따라 가십시오. 그러면 잠시 뒤에 눈길을
끄는 공원과 숲, 들판, 연못이 있는 라자가하를 보게 될 것입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그대가 비록 그에게 열심히 충고하고 가르쳐 주었다 할지라도 그는 잘못된 길을 택한다고
하자. 또한 라자가하로 가려는 다른 사람이 와서 길을 물으면 그대는 역시 그 길을 가르쳐
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대의 충과 지시를 따라서 안전하게 라자가하에 도착한다고 하자.

        
바라문아, 라자가하가 있고 라자가하로 가는 길도 있고 안내자인 그대도 있어 그와 같이 가르쳐
주어고 알려 주었는데도, 한 사람은 잘못된 길을 택하고 다른 사람은 안전하게 라자가하에 도착
하니 그 원인이 무엇이겠는가?"

 

"훌륭하신 고타마여, 그 일에 대해서 제가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훌륭하신 고타마여, 저는 길을 가르쳐 주는 사람일 뿐 입니다."


"바라문아, 그와 마찬가지로 열반이 있고 열반으로 가는 길도 있고 안내자로서 내가 있다. 그러나
내가 훈계하고 가르친 나의 제자들 가운데 어떤 제자들은 변하지 않는 목표 즉 열반을 성취하고
어떤 제자들은 열반을 성취하지 못한다.
바라문아,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
바라문아, 여래는 길을 가르쳐 주는 사람일 뿐이다."


사람들은 오래된 것을 쓸모없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성급한 비평가들은 성급하게 결론을
내려 고타마 붓다가 발견한 팔정도가 2,500년 전의 것이므로 현대의 상황에 적합하지 않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피상적이고 이성을 잃은 판단이다. 중요한 것은 옛것이든
새것이든 실용적인 것인지 아닌지 이용할 수 있는 것인지 어떤지를 아는 것이다.


아득히 먼 옛날부터 세상에는 많은 문제들이 있어 왔다. 각 시대마다 자체의 문제들이 있었고
그 문제들에 대한 우리들의 태도는 다양했고 많은  해결책들이 시도되어 왔다. 붓다는 이와
같은 문제들을 팔정도에서 괴로움이라 부르는 한 가지 문제로 압축했다. 붓다는 이 문제들의
기원과 원인을 무지와 욕망 즉 이기적 동기로 보았다.


이런 문제는 현대인들이 이러한 문제 들에 대한 해결책을 발견했느냐 아니면 단지 그 문제들을
악화시키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안녕과 행복 속에 살고 있는가 아니면 두려움과
끊임없는 긴장 속에서 살고 있는가? 그들은 옳바른 정신으로 인도하는 길로 가고 있는가 아니면
미치게 하는 길로 가고 있는가?


이제 옛길이 무엇인지 살펴보자. 이것은 올바른 견해, 올바른 생각, 올바른 말, 올바른 행위,
올바른 생활, 올바른 노력, 올바른 주시, 올바른 집중의 여덟 가지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
어느 요소를 쓸모없는 것으로, 인간의 물질적.정신적 진보에 이바지 할 수 없는 것으로
무시할 수 있겠는가? 어느 요소가 세속적인 또는 비세속적인 인간의 발전을 방해하겠는가?
단지 무지한 자들만이 팔정도를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라고 할 것이다.


왜냐하면 비록 이 팔정도는 고대의 것이지만 영원한 신선미를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인생의 모든 문제들은 괴로움이라는 한 가지 문제로 압축될 수 있다. 그리고 이
문제에 대한 모든 시대의 깨달으신 분들 즉 붓다들이 제시한 해결책이 바로 팔정도이다.
푸딩을 먹어봐야 그 맛을 알듯이 팔정도도 수행을 해 봐야 그 가치를 알 수 있다.


"불교도건 불교도가 아니건 나는 세계의 위대한 모든 종교들을 조사했는데, 이들 가운데
아름다움과 포용성에서 불교의 팔정도를 능가하는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 나는 이 팔정도에
따라 내 삶을 형성해 가는 일에 만족하고 있다." (T.W.Rhys Davids. 팔리 성전(P.T.S)의 설립자)


결론적으로 나는 붓다의 위대성이 오늘날에도 미세한 빛들을 압도하는 태양처럼 여전히 빛나고
있고, 그의 팔정도는 안전하고 평화로운 열반의 세계로 가려는 지친 순례자들을 아직도
손짓해서 부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제 다음과 같은 옛 격언으로 이 글을 매듭짓고자 한다.


"어떤 사람들은 빠르게 달려가고 어떤 사람들은 걸어가고 어떤 사람들은 고통스럽게 기어간다.
그러나 계속 전진하는 사람은 모두 목적지에 도달할 것이다.


모든 중생들이 행복하고 건강하기를!

 

 

 


  

 

     

출처 : 홍사성의 불교사랑
글쓴이 : 실론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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