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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불교

각묵스님의 교리문답(불교신문 연재)

각묵스님의 교리문답(불교신문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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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초기경전은 깨달음을 어떻게 정의합니까? - 사성제 자각 팔정도 실천하는 것

2.초기경에서 팔정도를 어떻게 설하는지? - 다른 종교와 불교 구분짓는 핵심

3.마군(魔軍)의 의미에 대해서

4. 바른 마음챙김

5.연기와 중도

6.무아(無我)’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 고정불변의 실체 극복한 가르침. 허무적멸 아닌 연기의 다른 이름

7.삼법인의 구성요소 변화근거과 의미는? - 무상.고.무아는 삼법인 아닌 ‘삼특상’

8. 십이연기를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하는지?

9.행(行)의 의미는?

10.오온(五蘊)은 순차적으로 발생하는 것인가요?

11.열반의 정확한 의미 - 해로운 심리현상이 모두 꺼진 상태

12.‘5위100법’ 혹은 ‘5위75법’이 무엇인가요? - 法은 고유성질, 位는 법의 범주

13.깨달음도 언어 문자 의지해 드러나, 문자 무시하는 불립문자 ‘공허’

14.육도윤회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나요?

15.깨달음과 수행은 어떤 연관이 있나요? - 처절한 문제의식에 기초한 삶이 수행

16. ‘삼계’의 실천적 의미

17.깨달으면 정말 모든것이 달라지는지

18.윤회는 부처님 가르침인가요

19.사마타와 위빠사나 수행법의 차이점은

20. '법'의 본래 의미는 - 자신의 본성 지니고 있는 것. 해탈.열반을 성취하는 토대.


1.
Q:부처님은 ‘깨달은 분’을 뜻하는 범어 붓다(Buddha)에서 유래된 말이라 합니다. 그렇다면 깨달음이란 무엇이고 어떻게 해야 깨닫게 됩니까? 불교가 2600여년간 전개돼 오면서 깨달음에 대한 너무 많은 말을 쏟아놓다 보니 깨달음에 대한 기본정의가 아주 혼란스럽게 된 듯합니다. 초기경전에서는 깨달음을 어떻게 정의하는지 정말 궁금합니다.


A:〈숫따니빠따〉에서 부처님은 왜 자신이 깨달은 자, 즉 부처인가 하는 것을 다음과 같이 명료하게 밝히셨는데 이는 깨달음에 대한 만대의 표준이 되는 분명한 선언입니다.

“나는 알아야 할 것(苦聖諦)을 알았고,
닦아야 할 것(道聖諦)를 닦았고,
버려야 할 것(集聖諦)을 버렸다.
바라문이여, 그래서 나는 붓다(깨달은 자)이다.”(숫따니빠따 558게)

다른 여러 경들과 주석서들의 설명을 빌려서 부연하자면, 세존께서는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를 철저히 아셨고(parinnaa), 괴로움의 원인의 진리를 완전히 버리셨고(pahana), 괴로움의 소멸의 진리를 실현하셨고(sacchikiriya),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 닦음의 진리를 닦으셨기에(bhavana) 부처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깨달음은 사성제를 깨달은 것이라고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불자들이 여기에 투철하지 못하면 깨달음을 신비화해 비상식적이고 초월적인 어떤 당체를 세워 그것을 보거나 그것과 합일된 경지쯤으로 깨달음을 착각하게 됩니다.

고성제의 핵심은 오온을 나라고 취착하는 것(五取蘊)이라고 경들은 설명합니다. 우리의 삶은 어떤 불변하는 실체(자아)가 있는 것이 아니고 물질(色) 느낌(受) 인식(想) 심리현상들(行) 알음알이(識)라는 여러 가지 요인들이 가합하여 매순간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거듭하면서 흘러가는 것입니다. 중생들은 이러한 사실을 까마득히 모르고 이러한 것들을 나라거나 내 것이라고 이름 붙이고 취착하여 거머쥐고 있기 때문에 그 삶은 괴로움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반야심경〉에서도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오온이 실체없음을 꿰뚫어보고 모든 괴로움을 건넌다)’이라고 설파하고 있습니다.

집성제는 오취온의 원인인 갈애(渴愛)를 뜻합니다. 그리고 갈애는 12연기에서 최종적으로 무명에 조건지워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석서들에서는 무명(혹은 삿된 견해)과 갈애를 괴로움의 근본원인으로 꼽고 있습니다. 이러한 무명과 갈애가 완전히 해소된 경지 혹은 탐진치가 완전히 소멸된 경지가 바로 세 번째 진리인 멸성제며 이것은 열반의 동의어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열반을 실현할 것인가. 그 방법론으로 부처님께서 고구정녕 설하신 것이 바로 팔정도이며 이것이 네 번째 진리인 도성제입니다.

그러므로 실천적인 입장에서 보자면 팔정도야말로 깨달음이나 해탈.열반의 실현을 위해서 반드시 닦아야할 덕목입니다. 예부터 우리 조상님들은 불교를 “도 닦는 가르침”이라고 불렀습니다. 부처님의 원음에서 보자면 불교는 “팔정도를 닦는 종교”입니다. 팔정도는 아주 중요하기 때문에 다음에 다시 설명드리겠습니다.

“깨달음이란 무엇이고 어떻게 해야 깨닫게 됩니까?”라는 질문에 대해서 깨달음이란 사성제를 깨달은 것이고 팔정도를 실천함으로 해서 실현된다고 답변드립니다.


2.
Q : 지난번에 불교는 도 닦는 종교요. 도는 팔정도이며 그래서 불교는 팔정도를 실천하는 가르침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불교인들마다 제각각 다르게 팔정도를 설명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초기경전에서는 팔정도를 어떻게 구체적으로 설하는지 알고 싶습니다.


A : 부처님께서는 다른 종교와 불교의 차이를 바로 이 팔정도가 있느냐 없느냐로 구분짓기도 하셨을 만큼 팔정도는 중요한 가르침 입니다. 그래서 〈대반열반경〉에서 “수밧다여, 어떤 법과 율에서든 팔정도가 없으면 거기에는 사문이 없다. 그러나 나의 법과 율에는 팔정도가 있다. 수밧다여, 그러므로 오직 여기(불교교단)에만 사문이 있다. 다른 교설들에는 사문들이 텅 비어 있다”고 단언하셨습니다. 범부는 깨달음과 해탈열반을 실현하기 위해서 팔정도를 닦고, 깨달은 분들은 이 팔정도로써 삶의 매순간에서 깨달음을 구현합니다.

팔정도는 경에서는 대부분 “여덟 가지 구성요소를 가진 성스러운 도(八支聖道)”라는 표현으로 나타나는데 그것은 바른 견해, 바른 사유,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 바른 정진, 바른 마음챙김, 바른 삼매입니다.

초기경들에서는 정형구로써 이 여덟 가지를 분명하게 정의하는데 요점만 간추리겠습니다.

먼저 바른 견해(正見)는 사성제에 대한 지혜로 정의합니다. 그리고 〈가전연경〉에서는 연기(緣起)를 아는 것으로 말씀하시고 이것을 ‘있다 없다’를 떠난 정중(正中)의 견해라 하셨습니다. 이처럼 정견은 사성제와 연기의 가르침으로 귀결됩니다.

바른 사유(正思惟)는 출리(욕망에서 벗어남)와 악의 없음과 해코지 않음(不害)에 대한 사유로 정의하는데 불자들이 세상과 남에 대해서 항상 지녀야할 바른 생각을 말합니다.

바른 말(正語)은 거짓말(망어)을 삼가고 중상모략(양설)을 삼가고 욕설(악구)을 삼가고 쓸데없는 말(기어)을 삼가는 것으로 정의합니다.

바른 행위(正業)는 살생을 삼가고 도둑질을 삼가고 삿된 음행을 삼가는 것입니다.

바른 생계(正命)는 삿된 생계를 제거하고 바른 생계로 생명을 영위하는 것이라 정의하는데 구체적으로는 무기거래 마약매매 등 바르지 못한 직업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것과 특히 출가자가 사주관상 등의 삿된 방법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것을 끊는 것입니다.

바른 정진(正精進)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해로운 법(不善法)들을 일어나지 않게 하고 이미 일어난 해로운 법들을 제거하기 위해서, 그리고 아직 일어나지 않은 유익한 법(善法)들을 일어나도록 하고 이미 일어난 유익한 법들을 지속시키기 위해서 마음을 다잡고 애를 쓰는 것이라고 정의합니다. 그러므로 선법과 불선법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없다면 아무리 용을 써도 그것은 결코 바른 정진이 되지 못합니다.

바른 마음챙김(正念)은 몸.느낌.마음.법(身受心法)에 대한 마음챙김으로 정의합니다. 불교역사에서 남방북방에서 전승되어 오는 여러 수행법은 모두 이 바른 마음챙김을 특정 시대와 환경에 맞게 개발한 것이며 〈대념처경〉에 21가지로 구체적으로 정리돼 있습니다.

바른 삼매(正定)는 초선, 2선, 3선, 4선에 들어 머무는 것으로 정의합니다. 〈청정도론〉에서는 바른 삼매를 증득하는 40가지 방법을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불자는 팔정도를 골수에 새기고 팔정도의 여덟 가지를 하나하나 정확하게 이해하고 이를 매 순간 내 삶의 현장에서 실천하고 구현하려고 노력해야합니다. 그래야 부처님 제자입니다.


3.
Q: 불교에서는 마(魔)라거나 마군(魔軍)이라는 말을 많이 씁니다. 마와 마군의 유래와 정확한 의미를 알고 싶습니다.



A: 마(魔)는 빠알리어와 불교 산스끄리뜨 마라(Maara)의 역어입니다. 이 마라가 거느리고 있는 군대를 마라세나(Maara-sena)라고 하는데 이를 마군(魔軍)이라고 한역하였습니다. 마라는 초기경에서 빠삐만(사악한 자)이라고도 불리고 나무찌(해탈을 방해하는 자)라고도 불립니다. 이처럼 마(魔)는 사악함의 화신이며 해탈열반을 방해하는 훼방꾼의 상징으로 나타납니다.

마라(Mara)는 초기경에서부터 다양한 문맥에서 아주 많이 나타나는데 전통적으로 주석서들은 이런 다양한 마라의 언급을 다음의 다섯 가지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첫째, 오염원(kilesa, 번뇌, 染)으로서의 마라입니다. 탐욕 성냄 어리석음 자만 사견 의심 해태 들뜸 양심 없음 수치심 없음의 열 가지를 오염원(번뇌)으로 들고 있는데 이러한 번뇌 혹은 삿되고 해로운 심리현상 자체를 마라로 보는 것입니다.

둘째는 무더기(蘊, khandha)로서의 마라입니다. 물질(色), 느낌(受), 인식(想), 심리현상들(行), 알음알이(識)의 오온(五蘊) 자체가 바로 마라라는 의미입니다.

셋째는 업형성력(abhisankhara)으로서의 마라입니다. 업을 짓는 것이 바로 마라라는 의미입니다.

넷째는 신(devaputta)으로서의 마라입니다. 신으로서의 마라는 욕계의 최고천상인 타화자재천에 거주하는 신들 가운데 하나인데 수행자들이 욕계를 벗어나 색계, 무색계, 출세간의 경지로 향상하는 것을 방해하는 자라고 합니다. 그래서 세존께서 깨달음을 증득하시려고 할 때 그의 군대와 함께 나타나서 방해를 했다고 합니다. 부처님께서 성도하시면 그의 영역인 욕계를 벗어나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는 신들의 왕인 인드라(삭까, 제석천왕)처럼 군대를 가지고 있으며 이를 마군(魔軍, Maara-sena)이라고 부릅니다. 이처럼 마라는 유력한 신으로 묘사됩니다.

다섯째는 죽음(maccu)으로서의 마라입니다. 죽음 자체가 마라라는 뜻입니다.
청정도론에서는 부처님은 이러한 다섯 가지 마라를 부순 분이기에 세존이라 한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라는 인도의 힌두문헌에는 스마라(Smara)로 나타나는데 스마라는 로마신화의 사랑의 신인 큐피드와 비교할 수 있습니다. 큐피드처럼 스마라도 사랑의 화살을 가지고 다니면서 화살을 쏜다고 합니다. 마라 혹은 스마라는 다섯 종류의 꽃 화살을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꽃 화살에 맞게 되면 사랑에 빠지게 되고 사랑의 열병을 앓는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마라는 유혹자(Tempter)입니다. 이성을 서로 꼬드기게 할 뿐 아니라 세속적인 것에 집착하고 연연하고 그런 것에 묶어두게 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 스마라는 기억을 뜻하는 어근 √smr에서 파생되었는데 마음챙김으로 옮기고 있는 smrti(sati, 念)와 같은 어원입니다. 마음챙김은 해탈열반의 실현에 장애가 되는 탐욕 성냄 어리석음 자만 나태 들뜸 등의 해로운 심리현상을 제거하는 불교수행을 대표하는 공부법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챙기지 못하면 그것은 마라의 유혹에 빠진 것이요, 마음챙김을 오롯이 하면 마라의 영역을 극복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라(魔)를 타화자재천에 사는 신으로 이해하기에 앞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삿되고 해로운 심리현상들이 바로 마라라고 이해하는 것이 더 중요하며 이러한 나쁜 심리현상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마음챙기기를 게을리 해서는 안됩니다


4.
문: 팔정도의 일곱 번째는 정념(正念)입니다. 정념을 ‘바른 생각’이나 ‘바른 기억’으로 설명하는 분들도 있던데 스님께서는 바른 마음챙김이라는 다소 생소한 용어로 옮겨서 설명하였습니다. 좀 더 상세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정념은 빠알리어 삼마 사띠(sammaa-sati, 산스끄리뜨 samyak-smr*ti)의 중국번역입니다. 여기서 삼마(sammaa)는 ‘바른, 옳은’을 뜻하는 형용사이므로 중국에서 正으로 옮겼고 사띠(sati, smrti)는 √smr*(기억하다)에서 파생된 명사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중국에서는 念으로 옮겼습니다. 그러다 보니 원의미를 살린다는 뜻에서 한글로 ‘바른 기억’으로 설명하는 분들도 있고 念이 생각 念자이므로 ‘바른 생각’이라 이해하려는 분들도 있는 듯합니다. 그러나 이는 경에서 정의하는 것과는 전혀 동떨어진 해석이라 해야 합니다. 그리고 수행과 관련된 문맥에서 사띠는 결코 기억이라는 의미로 쓰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바른 생각은 팔정도의 두 번째인 바른 사유(正思惟)에 해당합니다.

경에서 정념은 사념처(四念處,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를 뜻한다고 분명하게 정의합니다. 사념처란 몸(身)·느낌(受)·마음(心)·심리현상(法)이라는 네 가지 대상 가운데 하나를 챙기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정념은 실참수행의 대상이 되는 나라는 존재를 몸과 느낌과 마음과 심리현상으로 구분하여 이들 가운데 하나에 마음을 챙기는 수행을 뜻합니다. 그래서 안세고 스님은 이미 150년 경(후한)에 사띠를 수의(守意)로 옮겨서 마음을 지키고 보호하고 챙기는 의미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마음챙김에서 중요한 것은 ‘대상을 분명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청정도론》에서는 “여기 마치 송아지를 길들이는 사람이/ 기둥에다 송아지를 묶는 것처럼/ 자기의 마음을 마음챙김으로/ 대상에 굳건히 묶어야 한다.”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대상을 분명하게 챙기지 않으면 마음은 이리저리 다른 대상으로 헤매거나 멍청한 상태에 빠지기 때문에 바른 수행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대상을 세분하여 정확하고 분명하게 하는 것이야말로 수행의 핵심중의 핵심입니다.

예를 들면 몸을 대상으로 마음을 챙긴다고 하지만 몸이라는 대상도 한 순간에 모두 다 챙기기에 너무 크고 많고 복잡합니다. 그래서 〈대념처경〉에서는 이러한 몸을 챙기는 공부도 더욱 더 세분해서 설명합니다. 몸 가운데서 가장 분명한 것이 들숨과 날숨입니다. 그래서 경에서는 들숨과 날숨이 매순간 들어오고 나가면서 닿는 부분에서 들숨과 날숨을 챙기는 공부를 신념처(身念處) 가운데서 첫 번째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신체의 각 부위를 32가지로 해체해서 이들 가운데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고 인식되는 부분을 집중적으로 챙기는 공부를 설하기도 하며, 다시 지수화풍의 4대로 해체해서 챙기는 수행을 설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마음챙김은 나 자신을 21가지 혹은 44가지로 분해하고 분석하고 해체해서 그 가운데 하나의 분명한 대상에 마음을 챙기는 공부를 뜻하지 기억이나 생각을 뜻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바른 마음챙김이야말로 팔정도가 드러내는 가장 본격적인 공부법입니다. 이러한 정념공부를 단지 바른 기억이나 바른 생각으로 이해해버린다면 이건 경의 가르침에 너무 무지한 발상이라 아니 할 수 없습니다. 마음챙김을 본격적으로 설하고 있는 〈대념처경〉과 이에 대한 상세한 주석들을 모아서 《네 가지 마음챙기는 공부》(초기불전연구원, 2004)로 출간되어 있습니다. 마음챙기는 공부에 관심이 있는 분들의 일독을 권합니다.


5.
질문: <사분율> <오분율> 등을 보면 부처님은 “중도를 바르게 깨달았다”고 나옵니다. 깨달음의 내용이 ‘연기’라고 알고 있는데, 중도라고 경전은 전합니다. 부처님이 깨달은 것은 무엇이며, 연기와 중도는 어떤 관계인가요. 연기와 중도는 같은 것인가요. 아니면 다른 것인가요.


결론적으로 말해서 부처님의 깨달음은 다양한 문맥에서 다양하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먼저 《율장》과 〈초전법륜경〉에서 세존께서는 다섯 비구에게 이렇게 천명하십니다.

“비구들이여, 출가자는 이들 두 가지 극단을 따라서는 안된다. 무엇이 둘인가? 감각적 욕망의 즐거움에 탐닉하는 것은 저열하고 촌스럽고 범속하며 고결하지 않고 해로움과 함께하나니 이것이 [하나의 극단이다.] 자기 학대에 몰두하는 것은 저열하고 촌스럽고 범속하며 고결하지 않고 해로움과 함께하나니 이것이 [다른 하나의 극단이다.] 이들 두 극단을 따르지 않고 여래는 중도를 철저하게 깨닫고 눈을 만들고 지혜를 만들었나니 이 [중도는] 고요함과 최상의 지혜와 바른 깨달음과 열반으로 인도한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중도인가? 바로 이 여덟 가지로 구성된 성스러운 도(팔정도)이니 바른 견해, 바른 사유,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 바른 정진, 바른 마음챙김, 바른 삼매이다.”

이처럼 〈초전법륜경〉에서 세존께서는 중도로 표방되는 팔정도를 깨달았다고 분명하게 밝히고 계십니다. 그리고 팔정도의 첫 번째는 바른 견해[正見]이고 여러 경에서 정견은 사성제에 대한 지혜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성제의 도성제는 다시 팔정도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팔정도와 사성제는 서로를 포함하는 체계로 조직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 경들에서 부처님은 사성제를 깨달으신 것으로도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중도(팔정도)를 깨달으셨다는 것은 사성제를 깨달으셨다는 것과 그 내용상 일치합니다.

한편 《상응부》 〈인연상응〉의 여러 경들에서 12연기의 구성요소들의 일어남[流轉門]은 “전체 고온(괴로움의 무더기)의 일어남”으로 정의되고 소멸[還滅門]은 “전체 고온의 소멸”로 정의됩니다. 그리고 이 각각에 대해서 “‘일어남(혹은 소멸)’이라고 전에 들어보지 못한 법들에 대한 눈[眼]이 생겼다. 지혜[智]가 생겼다. 통찰지[慧]가 생겼다. 영지[明]가 생겼다. 광명[光]이 생겼다.”라고 깨달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사성제 가운데 집성제는 연기법의 유전문에 대한 통찰과 연결되고, 멸성제는 연기법의 환멸문과 연결됩니다. 그리고 〈인연상응〉의 다른 여러 경들에서는 12연기의 구성요소들 각각에 대한 일어남(집)과 소멸(멸)과 소멸에 이르는 길(팔정도)을 설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연기법을 깨달았다는 말은 사성제를 깨달았다는 말과 그대로 일치하고 이는 다시 팔정도를 그 내용으로 하는 중도를 깨달았다는 말과도 같은 내용입니다.

이처럼 부처님의 깨달음은 다양한 문맥에서 다르게 표현되고 있는데 연기법을 깨달았다함은 제법의 조건발생과 실체 없음(무아)에 대한 통찰에 초점을 맞춘 것이며, 사성제를 깨달았다함은 불교의 궁극적 진리체계에 초점을 맞춘 것이며, 중도(팔정도)를 깨달았다함은 불교의 실천체계에 초점을 맞춘 설명이라고 받아들이면 되겠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분명히 해 둘 점은 부처님께서 초기경에서 연기의 가르침을 설하신 것은 우주질서나 외부세계의 구성원리를 설명하기 위해서가 결코 아니라는 점입니다. 부처님이 연기를 설하신 것은 괴로움[苦]의 발생과 소멸의 구조를 정밀하게 드러내어서 ‘괴로움을 소멸하기 위함’입니다.


6.
Q:초기불전을 보면 ‘무아(無我)’에 대해 많이 이야기합니다. 무아가 무엇인가요? 말 그대로 ‘아(我)가 없는 것’으로 이해하면 되는지요. 그러면 ‘아’란 무엇인가요. 무아에 대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A:무아는 빠알리어 anatta(Sk. anaatman)의 역어입니다. 〈청정도론〉 등 초기경의 주석서들은 ‘실체가 없다’는 뜻에서 ‘무아(asaarakat*t*hena anattaa)’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야자나무나 파초 등은 보기에는 멋지지만 ‘심재(心材. 속재목. saaraka)’가 없습니다. 그와 같이 세상의 모든 존재도 그 본질을 꿰뚫어보면 속이 텅 비어있어 실다운 것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아(我)’란 ‘실체’를 뜻하고 ‘무아’란 존재론적으로 고정 불변하는 실체가 없다는 말입니다.

잘 알다시피 인도의 바라문 전통은 이러한 고정불변의 자아(아뜨만)를 인정하고 그러한 자아를 터득하고 그것과 하나 되는 것을 그들의 제일의 교의로 삼고 있습니다. 그러나 불교는 이러한 자아사상을 단지 ‘자아가 있다는 인식(我相)’일 뿐이라며 전면적으로 부정합니다.

여기서 분명히 해야 할 것은 무아라 한다고 해서 아무 것도 없는 허무적멸을 뜻하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점입니다. 수레라는 실체, 주먹이라는 실체, 집이라는 실체 등이 없다는 의미이지 조건의 화합으로 유지되고 있는 수레나 주먹이나 집 그 자체가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와 같이 나라는 존재를 구성하는 물질(色).느낌(受).인식(想).심리현상들(行).알음알이(識) 그 자체가 무아이지 이러한 오온을 떠나서 별다른 무아란 없습니다. 오온을 떠나서 별다른 무아를 구한다면 그러한 무아야말로 무아라는 인식이나 관념이 되고 맙니다.

무아는 ‘지금 여기(現今)’에서 벌어지고 있는 중중무진의 정신-물리적인 현상들의 참모습입니다. 그리고 지금 여기서 벌어지고 있는 역동적인 전개는 바로 연기적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무아는 연기(緣起)의 다른 이름입니다. 그래서 용수스님은 〈중론송〉에서 “연기한 것 그것을 바로 공이라 부른다”고 천명했으며, 〈회쟁론〉에서 “연기.무아.공은 같은 현상을 표현하는 다른 이름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사실 자아(아뜨만)를 존재의 본질로 생각하는 인도 지식인들이 제일 받아들이지 못하는 부처님 가르침이 무아입니다. 그래서 대승불교에서는 무아를 공(空)으로 해석하기도 하고 더 적극적으로 불성이나 진여 등으로 표현하기도 한 것입니다. 이러한 적극적인 해석이 작금의 소인배들에 의해서 실체론적으로 잘못 이해되고 있어 유감스럽기도 합니다. 물론 무아는 아무것도 없다는 허무주의가 결코 아닙니다. 무아는 불교를 불교이게 하는 가장 근본적인 가르침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자아니 진인이니 영혼이니 하는 존재론적인 실체를 극복하지 못하면 그것은 자아니 본질이니 궁극이니 하는 ‘미세한 인식(相. 想)’에 얽매인 것일 뿐이지 결코 진정한 해탈이 아니라고 설하십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무아는 이론이 아니라 실천적으로 받아들여야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네모라는 고정 불변하는 꼴이 있다면 그것은 세모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그와 같이 만일 고정 불변하는 특정한 실체가 있다면 그것은 만나는 모든 곳에서 진정한 주인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무아를 임제스님은 ‘수처작주(隨處作主)’로 표현합니다. 진정한 무아는 이처럼 대기대용이요 살활자재한 가르침이지 결코 허무주의가 아닙니다. 〈금강경〉에 “참으로 무아에 통달해야 그를 일러 진정한 보살이라 한다(若通達無我法者 如來說明眞是菩薩)”고 나오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7.
Q:대승불교에서는 ‘제행무상’ ‘제법무아’ ‘열반적정’을 삼법인이라 하여 불교와 다른 종교를 구별하는 기준으로 삼습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제행무상’ ‘일체개고’ ‘제법무아’를 삼법인이라 부르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이 둘은 어떤 근거로 서로 달라졌으며, 이 둘이 나타내고자하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A:엄밀히 말하면 ‘제행무상’ ‘제법무아’ ‘열반적정’을 삼법인이라 불러야하고 ‘제행무상’ ‘일체개고’ ‘제법무아’는 삼특상(三特相)이라 구분해 불러야합니다. 삼법인은 설일체유부로 대표되는 북방불교에 나타나며 삼특상은 상좌부로 대표되는 남방불교에서 사용하는 술어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무상.고.무아의 가르침은 〈아함경〉 등의 북방불교에도 무수히 나타나지만 이를 삼특상이라는 술어로는 부르지 않습니다. 삼특상은 “세 가지 특징”이란 의미이며 빠알리어 ti-lakkhana의 역어입니다. 초기경의 도처에서 부처님께서는 무상(無常. anicca), 고(苦. dukkha), 무아(無我. anatta)를 설하셨는데 특히 이는 대부분 ‘오온’의 무상.고.무아의 문맥에서 나타납니다. 이를 아비담마와 주석서에서는 삼특상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삼법인(三法印)이라는 용어는 초기경이나 상좌부 아비담마나 주석서에는 전혀 나타나지 않습니다. 법인이라는 말은 산스끄리뜨 dharma-mudra의 번역어인데 삼법인은 설일체유부의 율장과 〈아비달마법온족론〉과 같은 설일체유부 논장에서 제일 먼저 사용한 술어이며 이것이 반야부의 〈대지도론〉 등에서도 채용되었고 후대의 많은 중국 주석가들이 이를 그대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이처럼 삼법인과 삼특상의 출처는 서로 다릅니다. 그러면 이 둘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먼저 삼특상은 위에서도 밝혔지만 오온으로 대표되는 유위법의 세 가지 보편적 특징[共相]을 밝힌 것입니다. 삼특상이 중요한 이유는 일체유위법이 무상이고 고고 무아임을 철견할 때 해탈열반은 실현된다고 초기경에서 부처님께서 고구정녕하게 설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위법의 무상을 꿰뚫어 실현한 해탈을 무상(無相)해탈이라 하고, 고를 꿰뚫은 해탈을 무원(無願)해탈이라 하고, 무아를 꿰뚫은 해탈을 공해탈이라 부릅니다. 이런 무상해탈, 무원해탈, 공해탈은 많은 한역경전에도 나타납니다. 삼특상은 수행에 관한 강한 메시지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유위법(제행)의 세 가지 특징을 말하는 삼특상에서는 당연히 무위법인 열반은 언급하지 않습니다.

북방의 설일체유부에서는 삼법인에 열반을 포함시키는데 여기서 법은 유위무위를 모두 포함한 광범위한 개념으로 사용한 것입니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제행개고’ 보다는 열반을 포함시켜 법의 도장(직인)을 만들어 부처님 가르침과 외도의 가르침을 분명하게 구분하고자 했습니다. 삼법인은 삼특상이 전하고자 하는 수행에 관한 강한 메시지보다는 불교 전반의 가장 큰 특징을 정리한 것이라 보입니다. ‘불교는 무상을 가르친다. 불교는 무아를 가르친다. 불교는 열반을 가르친다’는 의미로 법의 도장이라 이름 지었고, 이런 무상.무아.열반의 도장이 찍힌 것은 불교고 그렇지 않은 것은 불교가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도장이란 직인인데 관공서에서 직인이 찍히지 않은 문서는 효능이 없지요.

삼법인과 삼특상을 통해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대아’니 ‘진아’니 ‘참나’니 ‘주인공’이니 하는 다분히 실체론적 발상들은 결코 부처님 가르침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불자들은 이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아니 됩니다.


8.
문: 십이연기를 현대적으로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하는지요. 선뜻 와 닿지 않는 측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실천적인 측면에서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셨으면 합니다.


연기(緣起)의 도리는 〈대연경〉에서 “심오한 가르침”이라고 부처님께서 직접 말씀하셨을 만큼 깊고 어려운 가르침입니다. 그러므로 한정된 지면으로 제대로 설명한다는 것은 정말 무리한 시도입니다. 연기의 가르침은 초기경에서 이미 6지(支) 연기, 8지 연기, 9지 연기, 10지 연기 등으로 다양하게 나타나기도 하는데 이것이 완성된 형태로 최종으로 정리된 것이 바로 12지 연기이고 이를 우리는 십이연기라고 부릅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초기경에서 부처님께서 연기를 설하신 것은 모두 예외 없이 ⑪생-⑫노사우비고뇌로 표현되는 괴로움의 발생구조와 소멸구조를 극명하게 드러내기 위함이지 우주의 생성원리 등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이러한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해야합니다.

십이연기에서 가장 중요한 사실은 12연기는 <원인과 결과의 반복적 지속>을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간과해버리면 십이연기는 그때부터 혼란스러워 집니다. 12연기 가운데 ①무명-②행과 ⑧애-⑨취-⑩유는 원인의 고리이고 나머지 ③식-④명색-⑤육입-⑥촉-⑦수와 ⑪생-⑫노사우비고뇌는 결과(과보)의 연결고리입니다. 이렇게 12연기는 원인의 연결고리와 결과의 연결고리가 반복적으로 연결되어서 괴로움의 발생구조를 중층적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 가운데 괴로움의 직접적인 원인은 애-취-유이고 근원적 원인은 무명과 행입니다. 그래서 사성제에서는 괴로움의 원인을 애(갈애)라고 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괴로움이라는 결과가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그 직접적인 원인이 되는 갈애를 척파해야 하며 갈애를 척파하기 위해서는 갈애가 일어나는 조건인 식-명색-육입-촉-수의 연기구조를 이해해야하고[正見] 이를 바탕으로 팔정도를 실천해야합니다.

이렇게 원인-결과의 중층적 고리인 12연기는 이미 다양한 부파의 다양한 대가들에 의해서 다양하게 설명되어 왔습니다. 《구사론》에서는 한 찰나에 연기의 12지가 동시에 함께 일어난다고 주장하는 “찰나(刹那)연기”와, 12찰나에 걸쳐서 연속적으로 12지가 연이어서 상속(相續)한다는 “연박(連縛)연기”와, 여러 생에 걸쳐서 시간을 건너뛰어서 12지가 상속한다는 “원속(遠續)연기”와, 12지는 모두 5온을 본질로 하여 매순간 오온이 생멸하면서 상속하지만 특정 순간의 두드러진 상태(分位)에 근거하여 각각의 명칭을 설정한 것이라는 “분위(分位)연기”의 넷을 들고 있습니다. 설일체유부에서는 분위연기를 정설로 간주합니다.

그 외에도 연기의 핵심이 되는 가장 중요한 변수가 무엇인가에 따라서 업감연기니 공연기니 아뢰야연기니 여래장연기니 법계연기니 하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하는데 아무튼 연기의 가르침은 역사적으로 전개되어온 모든 불교를 불교이게 하는 핵심이 되는 것임은 자명합니다.

십이연기를 접하면서 우리가 명심해야하는 더욱 중요한 사실은, 연기의 가르침은 자아니 진아니 대아니 주인공이니 하는 존재론적인 실체를 상정하고 그것과 하나 되는 것쯤으로 깨달음을 착각하지 말라고 단언한다는 것입니다. 존재론적인 실체는 어느 시대 어느 불교에도 결코 발붙일 틈이 없습니다. 만일 여래장이나 진여나 불성을 존재론적인 실체로 이해해버린다면 그것은 불교가 아닙니다. 불교라는 깃발을 내걸고 외도짓거리를 하는 현양매구(懸羊賣狗)일 뿐입니다. 이것이 실천적 측면에서 본 십이연기의 중요성일 것입니다.


9.
Q 한역 경전에서 행(行)은 다양한 의미로 쓰이는 듯 합니다. 제행무상에도 나타나고 색수상행식의 오온으로도 나타나기도 합니다. 요즘 한글로는 의도적 행위라고 옮기는 분도 있고 형성력으로 옮기는 경우도 있는 듯합니다. 초기경에 준해서 행의 의미를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십시오.


A 옛날 중국에서 역경승들이 행(行)으로 옮긴 범어는 samskara(빠알리: sankhara)입니다. 이 상스까라 혹은 상카라는 sam(함께)+√kr(하다, to do)에서 파생된 명사입니다. 행한다는 의미를 지닌 어근 √kr의 의미를 적극적으로 살려서 중국에서는 행(行)으로 정착시켰습니다. 그러나 행이라는 한역 단어만을 가지고 상카라의 의미를 파악한다는 것은 무리라고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초기경들에 나타나는 문맥을 통해서 파악할 수밖에 없는데 상카라는 경들에는 크게 다음의 네 가지 문맥에서 나타납니다.

첫째, 제행무상(諸行無常)과 제행개고(諸行皆苦)의 문맥에서 제행으로 나타나는데 항상 복수로 쓰입니다. 이 경우의 제행은 유위법(有爲法, sankhata-dhamma)들을 뜻합니다. 즉 열반을 제외한 물질적이고 정신적인 모든 유위법들을 행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경우에 행은 ‘형성된 것들’에 가까운 뜻입니다. 그 외 목숨의 상카라(ayu-sankhara), 존재의 상카라(bhava-sankhara), 생명의 상카라(jivita-sankhaara) 등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이 경우도 ‘형성된 것’으로 이해하면 됩니다.

둘째, 오온의 네 번째인 행온(行蘊)으로 나타납니다. 이 경우에도 항상 복수로 쓰입니다. 오온 가운데서 색(色, 물질)은 아비담마의 색법이고 수상행(受想行)은 아비담마의 심소법(心所法)들이고 식(識)은 아비담마의 심법입니다. 그러므로 오온에서의 행은 상좌부 아비담마의 52가지 심소법들 가운데서 수(느낌)와 상(인식)을 제외한 나머지 심소법들 모두를 뜻하는데 감각접촉, 의도, 주의, 집중, 의욕, 유익한(善) 심리현상들, 해로운(不善) 심리현상들을 모두 포함합니다. 그러므로 이 경우의 행은 ‘심리현상들’로 이해해야 합니다.

셋째, 12연기의 두 번째 구성요소 즉 무명연행(無明緣行)으로 나타납니다. 12연기에서의 행도 항상 복수로 나타나는데 〈청정도론〉에서는 ‘공덕이 되는 행위(punna-abhisankhara), 공덕이 되지 않는 행위, 흔들림 없는 행위’로 설명이 되듯이 ‘업지음들’ 혹은 ‘의도적 행위들’로 해석됩니다. 이 경우의 행은 업(karma)과 동의어 입니다. 그래서 서양에서도 kamma-formations(업형성들)로 이해합니다.

넷째, 몸(身)과 말(口)과 마음(意)으로 짓는 세 가지 행위인 신행 구행 의행으로 나타납니다. 〈청정도론〉에서는 이 삼행도 12연기의 행처럼 업형성 즉 의도적 행위로 이해합니다. 그래서 신행 구행 의행은 각각 신업 구업 의업의 삼업(三業)과 일치합니다.

이처럼 행(상카라)은 그 용처에 따라서 그 의미를 각각 다르게 이해해야 합니다. 어떤 분들은 행을 의도적 행위 즉 업형성 하나만으로 이해하려고 하는데 그렇게 되면 제행의 행과 오온의 행온은 제대로 설명이 되지 못합니다. 위의 설명에서 보듯이 제행은 물질적 현상과 정신적 현상을 모두 포함하는 일체 유위법들을 뜻하는 가장 넓은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리고 행온은 수(느낌)와 상(인식)과 식(알음알이)을 제외한 다른 모든 심리현상들을 뜻하므로 두 번째로 넓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할 수 있습니다. 12연기의 행과 삼행은 의도적 행위들(업)을 뜻하므로 가장 좁은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10.
Q:불교 입문서를 보면 오온(五蘊)이 순차적으로 발생하는 것으로 설명돼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물질이 있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수(受. 느낌. 감수)가 있고, 이것을 바탕으로 인식 혹은 표상하는 상(想)이 있고 이것을 토대로 의도적 행위(行)가 있고, 이런 것은 알음알이(識)로 저장된다는 식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뭔가 석연찮습니다. 오온은 순차적으로 발생하는 것인지 아닌지 궁금합니다.


A: 좋은 질문 감사합니다. 결론적으로 분명히 말씀드리자면 오온은 절대로 순차적으로 하나씩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동시생기(同時生起)합니다. 매순간 오온은 모두 함께 일어나고 함께 멸합니다. 오온은 결코 순차적으로 발생하고 소멸하는 것이 아닙니다. 불교의 가장 기본적인 가르침을 이처럼 잘못 가르치고 이해하면 그것은 큰 문제라고 지적하고 싶습니다.

먼저 물질(色)에 대해 살펴봅니다. 물질이 생기는 원인은 아비담마에서 네 가지를 들고 있는데 그것은 마음.업.온도.영양분입니다. 그 가운데 특정 순간의 마음이 일어나고 머물고 사라지는 매 찰나에 물질은 그 마음과 이전의 업을 원인으로 하여 마음과 함께 일어난다고 아비달마는 설명합니다. 오온의 다섯 번째인 식(識. 알음알이)은 마음(心. citta)과 동의어로 간주됩니다. 이러한 식은 찰나생.찰나멸을 특징으로 합니다. 그리고 이 식은 일어나고 멸할 때 반드시 수.상.행(受.想.行)과 함께 일어나고 함께 멸합니다. 이러한 수상행은 아비달마와 유식에서 심소법(心所法. 마음과 함께 일어나고 멸하는 마음에 부속된 심리현상)으로 설명합니다.

각 부파마다 심소법의 종류를 달리 설명하고 있는데 예를 들면 상좌부 아비담마에서는 52가지 심소법들을, 설일체유부 아비달마에서는 46가지 심소법들을, 유식에서는 51가지 심소법들을 들고 있습니다. 물론 이런 여러 가지 심소법들은 이미 초기경의 다양한 문맥에서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는데 이를 각 문파에서 조금씩 다르게 분류하여 설명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목해야할 점은 오온에서 색.수.상과 식은 항상 단수로 표현되지만, 행(상카라)은 예외 없이 ‘복수(複數. plural)’로 표현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부처님께서는 이미 초기경들에서 행을 수와 상 이외의 모든 심소법 혹은 심리현상들을 다 포함하는 복수의 술어로 정착을 시키셨습니다. 그리고 행에 속하는 여러 가지 심리현상들은 모든 마음에 공통되는 심리현상, 유익한 심리현상(善法), 해로운 심리현상(不善法)의 세 카테고리로 분류되고 있는데 다양한 조건에 따라 심리현상들은 무리 지어 마음과 함께 일어나고 멸한다고 아비담마의 제 문파와 유식에서 한결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즘 많은 분들이 오온의 행을 의도적 행위로만 이해하려하는데 지난 호에서 밝혔듯이 오온의 행은 반드시 ‘여러 가지 심리현상들’로 넓게 이해해야 합니다. 오온은 매순간순간 여러 조건이 화합해 함께 일어나고 함께 멸하며(緣起緣滅) 흘러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오온의 상속(相續. santati)이라 하는데 상속이란 흐름이라는 말입니다. ‘나’라는 존재를 다섯 가지의 무더기(蘊)로 해체해 설하는 이유는 이러한 오온의 찰나성(무상)과 고와 무아를 철견(徹見)해 깨달음과 해탈.열반을 실현하기 위한 것입니다. 오온은 동시생기 하는 것으로 분명하게 이해해야합니다. 가장 중요한 법수를 순차적으로 일어나는 것으로 잘못 이해하면 불교가 혼란스럽게 됩니다.


11.
Q : 열반(涅槃)이란 무슨 뜻인가요. 언론에 따르면 스님이 돌아가면 열반에 들었다고 표현하는데, 죽음이란 뜻인가요. 아니면 탐욕이 꺼진 청정한 상태를 말하는 것인가요.

A : 열반은 빠알리어 닙바나(nibbaana) 혹은 산스끄리뜨 니르와나(nirvaana)의 음역입니다. 먼저 문자적인 뜻을 살펴보겠습니다. 니르와나는 nir(없어진)+√vaa(불다, to blow)의 과거분사로 ‘불어서 없어진’, ‘불어서 꺼진’이란 뜻인데 이것이 명사화한 것 입니다. 예를 들면, 바람이 불어서 촛불이 꺼진 상태를 생각하면 됩니다. 그러면 무엇이 불어서 꺼진 것이 열반일까요. 여러 경에서 부처님은 ‘갈애가 소멸한 것(tan*haakhaya)’이라고 한결같이 말씀하십니다. 한편, 〈상응부〉에서 사리뿟따(사리불) 존자는 “도반들이여, 탐욕의 소멸, 성냄의 소멸, 어리석음의 소멸이 바로 열반입니다”(S38:1)라고 정의하고 있는데 이것은 열반에 대한 설명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열반은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慾愛]와 존재(깊은 선정체험의 경지)에 대한 갈애[有愛]와 존재하지 않으려는 갈애[無有愛]로 설명되는 모든 종류의 갈애가 다 사라진 경지이며, 탐욕[貪]과 성냄[嗔]과 어리석음[癡]으로 표현되는 모든 해로운 심리현상[不善法]들이 모두 다 불어서 꺼진 상태입니다. 그러면 무엇으로 이러한 해로운 심리현상들을 불어서 끌까요. 바로 팔정도라고 부처님께서는 고구정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열반은 팔정도의 실천을 통해서 구현하게 되는 궁극의 경지입니다.

열반은 죽고 나서나 실현되는 경지가 결코 아닙니다. 열반과 죽음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오히려 열반은 팔정도를 통해서 지금여기[現今]에서 실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경에서는 ‘열반의 실현’이라는 표현을 쓰는데, 실현으로 옮긴 삿치끼리야는 문자적으로는 ‘눈앞에 만듦’ 즉 ‘눈앞에 드러냄’이라는 뜻입니다. 열반은 지금여기에서 내 눈앞에 드러내고 현전하게 하고 실현하고 구현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열반을 ‘꺼진 상태’라는 수동적인 의미로만 설명을 하면 자칫 허무주의적이고 염세적으로만 생각하게 되는 병폐가 생깁니다. 그래서 초기경에서는 탐진치가 해소된 열반은 허무적멸한 경지가 아니라 죽지 않음(不死. amata. 감로)이요, 평화(santi)요, 병 없음(aroga)이요, 지복(至福. parama-sukha. 최상의 행복)이라고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대승불교에서는 더 적극적으로 열반이 허무의 경지가 아니라고 해명하는데, 열반은 영원하고[常] 행복이고[樂] 궁극적 실재이고[我] 깨끗한 것[淨]이라고 〈열반경〉은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열반을 죽음과 연결지어 사용하게 된 것은 일찍부터 부처님이나 아라한이나 깨달은 분들의 죽음을 빠리닙바나(parinibbaana)라고 불렀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중국에서 반열반(槃涅槃)으로 음역하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중국과 우리나라에서는 조사스님들이나 큰스님들의 입적을 반열반이라 표현하게 되었고, 요즘 우리나라에서는 반열반이라는 말 대신에 연로하신 스님들의 임종을 아무 생각 없이 열반에 들었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열반은 절대로 죽음과 연결시키면 안 됩니다. 노스님들의 임종을 세속적인 표현을 사용하여 부르고 싶지 않으면 차라리 ‘입적’이라고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물론 입적(入寂)이라는 표현도 적멸의 경지 즉 열반에 들었다는 의미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열반이라는 불교 최고 목표가 죽음과 직접적으로 연관이 되는 것은 피할 수 있다고 봅니다.


12.
Q: 교양대학에서 강의를 듣다보니 - 잘못 들었는지 모르겠으나 - 불교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5위100법 혹은 5위75법으로 구분한다고 들었습니다. 이것이 무슨 뜻인지 솔직히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5’는 무엇이고, ‘위’는 무엇이며, ‘75’와 ‘100’은 무엇인지요.

A: 먼저 5위(位)75법(法)이니 5위100법이니 하는 것은 존재일반을 분류하는 불교식 방법론이라고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존재는 그것이 물질적 현상이든 정신적 현상이든 너무도 다양합니다. 이런 다양한 존재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어떤 특정한 분류기준이 있어야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도저히 전체를 설명하기가 불가능합니다.

불교에서는 일찍부터 존재일반을 어떤 기준으로 일목요연하게 재구성해서 설명하였습니다. 그 기준을 불교에서는 법(dhamma)이라고 합니다. 불교학의 토대가 되는 아비달마에서는 법을 ‘고유성질(sabhava)을 가진 것’이라고 정의합니다. 예를 들면 지대(地大)는 견고성을, 탐욕(貪)은 대상을 끌어당기는 성질을, 성냄(瞋)은 대상을 밀쳐내는 성질을 각각 고유성질로 가집니다. 그래서 75법이니 100법이니 하는 말은 이 세상의 존재일반은 모두 75가지 혹은 100가지의 고유성질을 가진 법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법들은 크게 몇 가지 범주로 무리 지어져 있는데 이 범주를 위(位)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5위라는 말은 이러한 제법은 다섯 가지 큰 범주로 분류된다는 뜻인데, 그것은 마음(心, 心王), 마음과 함께 일어나는 심리현상들(心所), 마음과 함께 하지 않는 현상들(心不相應行), 물질(色), 무위(無爲)의 다섯입니다. 한편 가장 오래된 체계인 상좌부 아비담마에서는 마음과 함께 하지 않는 현상들(心不相應行)이란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4위가 됩니다.

이렇게 하여 설일체유부에서는 마음 1가지, 심리현상들 46가지, 마음과 함께 하지 않는 현상 14가지, 물질 11가지, 무위법 3가지하여 모두 5위75법들을 인정하고, 비슷한 방법으로 유식에서는 5위100법을, 상좌부는 4위82법을 설합니다. 그래서 5위100법이니 5위75법이니 하는 용어가 생긴 것입니다. 비록 각 학파마다 일체법(諸法)의 개수를 조금씩 다르게 설정하지만, 존재일반을 이처럼 여러 가지 법들로 분해하고 해체해서 통찰하는 것은 불교의 모든 학파에서 한결 같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렇게 해체해서 보는 이유입니다. 그것은 첫째, 존재하는 모든 것을 이처럼 제법들로 분해하고 해체해서 보면, 자아(我)니 인간(人)이니 중생이니 영혼(壽者)이니 우주니 하는 무슨 변하지 않는 불변의 실체가 있다는 착각이나 고정관념을 척파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인무아) 둘째는 이렇게 법들로 해체하면, 이러한 법들의 찰나성(無常)이 극명하게 드러나고, 찰나를 봄으로 해서 제법이 괴로움(苦)일 수밖에 없음에 사무치게 되고, 제법은 모두가 독자적으로는 생길 수 없는 연기적 흐름(無我)이라는 사실이 극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법무아).

세존께서는 초기경들에서 이미 오온(유위제법)의 무상.고.무아를 철견함으로 해서 염오.이욕.해탈.열반을 실현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자아니 인간이니 하는 개념적 존재(施設, 빤냐ㅅ띠 산냐)로 뭉뚱그려두고는 그것의 무상이나 고나 무아를 철견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아비달마는 존재일반을 철저히 법들로 분해해고 해체해서 제시하는 것입니다. 아비달마에서는 법의 찰나성을 통찰한 깨달음을 무상(無相)해탈이라 하고, 괴로움과 무아를 철견한 깨달음을 각각 무원(無願)해탈과 공(空)해탈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화엄경〉 등 대승경전에서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13.
스님이 올려주시는 교리문답 잘 읽고 있는 독자입니다. 어렵기는 하지만 불교의 중요한 가르침을 나름대로 진지하게 설명하고 있다고 봅니다. 그런데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면 달을 봐야지 손가락에 집착하면 안되지 않습니까. 솔직히 말씀드려 스님의 글을 읽으면 너무 손가락인 언어에 집착하는 게 아닌가하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좋은 지적 감사합니다.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킨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어떤 것이 달입니까. 달이 무엇인지 그려내지도 못하고 설명하지도 못하면서 손가락에 집착하지 말라는 말부터 먼저 하는 것은 아이도 낳기 전에 비행청소년이 될까봐 걱정하는 식이 아닙니까? 그리고 어떤 사람이 호떡을 가리키면서 ‘저 달을 보고 내 손가락은 보지 말라’고 한다면 어떡합니까? 차라리 호떡 정도면 그래도 봐줄만하지만 똥 덩이를 가르쳐놓고 달을 봐야지 손가락에 빠지지 말라고 한다면 이는 어찌해야합니까.

손가락이 달이 아닌 것은 자명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언어와 문자라는 손가락을 사용해서 불교라는 달을 설명하는 것은 달을 정확하게 묘사하고 가리켜보자는 것입니다. 그래야 적어도 똥덩이를 가지고 달이라고 우기지 않게 됩니다. 언어와 문자를 의지하지 않고서는 결코 불교도 깨달음도 드러내지 못합니다. 드러내지 못하면 쳐다볼 수도, 맛볼 수도, 실현할 수도 없습니다. 그리고 진정으로 깨달은 사람이라면, 진정으로 깨달음을 자기 삶의 근본에 두고 있는 사람이라면, 왜 언어문자를 두려워해야합니까. 언어와 문자를 무궁무진으로 써서 불법을 선양해야하지 않습니까. 오히려 지금의 한국불교는 언어문자에 대한 잘못된 선입관념 때문에 우리말과 우리의 사유체계를 다른 종교에게 넘겨준 것은 아닙니까. 왜 우리가 일제시대에 치를 떱니까. 많은 이유 가운데 하나가 우리의 언어와 문자를 빼앗겼기 때문이 아닙니까.

불교에는 불교언어가 있습니다. 이러한 불교언어를 중국에서는 문자반야라 불렀습니다. 이러한 멋진 언어체계를 가지고 부처님의 경지를 설명해 내려온 것이 불교역사입니다. 우리는 부처님 제자입니다. 그러므로 불교언어로 최대한 정확하고 세밀하게 부처님의 말씀을 전하려고 노력해야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벙어리 염소 노릇하는 동안 우리의 언어와 사유체계는 불교와는 아주 이질적이 되어버릴 것입니다.

그리고 진정 우리가 두려워해야할 것은 자기가 알고 있는 불교가 정말로 달(불교)인가 하는 것 아닙니까. 깨달았다는 사람 입에서, 깨달음을 장부의 본분사로 삼노라고 외치는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가 불교에 전면적으로 위배된다면 어떻게 합니까. 아니 자기가 하는 말이 불교에 위배되는지 조차 분간하지 못하고, 이런 것에 대한 문제의식조차 없는 사람이라면, 우리는 무슨 근거로 그를 불교 지도자라 해야 합니까. 그러므로 달이니 깨달음이니 하는 분일수록 먼저 정확한 언어와 문자를 사용하는 훈련을 해야 할 것입니다.

언어문자를 경계하는 것은 불교의 교학이 지나치게 만발하여 많은 사람들이 참으로 언어문자에만 국집되었을 때나 통함직한 말입니다. 지금의 한국불교는 부처님 가르침을 이 시대의 언어로 제대로 표현조차 하지 못하고 있고, 그 수준 역시 즉심시불을 짚신세벌로 이해하는 천박하기 짝이 없는 수준은 아닐까요. 상황이 이러한데도 달과 손가락 운운하거나 그림의 떡 운운할 수가 있을까요. 혹시 제 답변이 너무 도발적이고 천박했다면 저를 용서하십시오.


14.
지옥 아귀 축생 수라 사람 하늘을 윤회한다는 ‘육도윤회’라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육도윤회는 부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것인가요. 실재하는 것을 육도로 표현하신 것인지, 아니면 심리상태를 나타낸 것인지 궁금합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육도(六道)는 부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것이고, 이것은 윤회하는 세상을 말씀하신 것이기도 하면서 심리상태를 나타낸 것이기도 합니다. 부처님은 〈대사자후경〉(M12)에서 다섯 가지 태어날 곳(gati, 가띠)을 말씀하셨는데 지옥, 아귀, 축생, 인간, 천신이 그것입니다. 가띠(gati)를 중국에서는 취(趣)라고도 옮겼고 도(道)라고도 옮겼습니다. 한편 〈합송경〉(D33)에서는 청정범행을 닦기에 적합하지 않은 경우를 언급하면서 아수라도 아울러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5도에다 아수라를 넣으면 6도가 되는 것입니다. 한역 경전들에는 5취, 6취, 5도, 6도가 고루 나타납니다. 그런데 〈60화엄경〉에는 이 네 단어가 모두 다 쓰이고 있습니다. 후대로 올수록 6도로 정착이 되어 육도윤회로 불리게 됐습니다.

육도 가운데 지옥(niraya)은 천상과 해탈의 원인이 되는 공덕이 없고 행복이 없는 곳이라고 설명합니다. 아귀(peta)는 아버지를 뜻하는 삐따(pita)에서 파생된 말이며, 베다의 조상신들과 관계가 있습니다. 후손이 올리는 제사음식을 바라는 존재라는 일차적인 의미에서 ‘굶주린 귀신(餓鬼)’으로 불교에서 정착되었습니다. 축생(tiracchana)은 ‘옆으로’라는 단어에서 파생되었는데, 동물들은 직립보행을 못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아수라(asura)는 베다에서 항상 천신들과 싸우는 존재로 묘사가 되고 있어서 투쟁적인 신들을 일컫는 존재로 불교에 받아들여진 것입니다. 인간(manussa)은 마누(Manu)의 후손이란 뜻인데, 불교에서는 마음(mano)이 탐.진.치와 불탐.부진.불치로 넘쳐흐르기 때문(ussanna)에 붙은 이름이라고 설명합니다. 천신(deva)는 ‘빛나는 존재’라는 뜻인데 사대왕천 이상의 세상에 거주하는 신들을 말합니다.

초기경에서 육도는 분명히 중생이 사는 세상(loka)을 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중생이 사는 세상은 모두 심리상태의 반영이라고 불교는 설명합니다. 지옥은 지옥과 어울리는 극도로 나쁜 심리상태를 가진 중생들이 나서 머무는 곳입니다. 색계천상들은 선(禪)이라는 고도의 행복과 고요함과 집중이 있는 곳이라 합니다. 그러므로 예를 들면 색계의 범중천은 이 천상과 어울리는 초선의 삼리상태를 가진 중생들이 나서 머무는 곳입니다. 이처럼 고통스럽거나 행복하거나, 저열하거나 고상한 다양한 세상은 모두 다양한 심리상태들, 구체적으로 말하면 의도적 행위들의 반영입니다. 이러한 의도적 행위를 불교에서는 업(業)이라고 합니다.

나아가 아비담마에서는 이러한 육도를 세상(loka)과 마음(citta) 모두에 적용시켜서 설명합니다. 즉 욕계 세상에 사는 인간이 색계세상의 마음을 일으키고 있으면 그때 그가 일으키는 마음은 욕계의 마음이 아니고 색계의 마음이라고 합니다. 이처럼 육도는 마음상태 그 자체를 뜻하기도 합니다. 즉 지옥의 마음을 내면 그 순간은 그것이 지옥이요, 천상의 마음을 내면 그 순간은 그것이 천상이라는 뜻도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우리는 매순간 고귀하고 아름다운 마음을 내도록 노력해야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에서 내가 일으키고 있는 심리상태들이 결국은 내가 사는 이 세상을 만들어가는 것이며, 앞으로 태어날 세상을 결정짓기 때문입니다.


짐승들에게 의도적 행위가 없다고는 말 할 수 없지 않을까요? 본생경 등에 짐승들의 선행이야기가 나타나고 주석서들에서도 많이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짐승들이 의도적 행위를 하지 못한다는 단정은 곤란합니다.
그리고 업의 과보는 중층적입니다. 단지 현생에 지은 업만으로 내생의 과보가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수없는 전생의 무수한 의도적 행위들이 항상 내생의 과보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짐승때 설혹 아무런 의도적 행위를 못일으킨다 할지라도 그 앞의 수 많은 전생들에서 지은 의도적 행위가 다음 생의 과보로 나타나게 됩니다. 생은 중층적이고 그래서 업지음도 중층적이고 과보가 나타나는 것도 중층즉으로 나타납니다. 단순하게 병열적으로 바로 앞의 업지음의 과보가 바로 뒤순간에 나타나고 하는 단순한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이렇게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습관적인 업은 말 그대로 습관적인 의도적 행위입니다. 도벽이나 상습적인 절도라든지 습관적으로 하는 거짓말이라든지 하는 것이라고 보면 됩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매순간 항상 상습적으로 도둑질만하거나 상습적으로 늘 거짓말만 하지는 않습니다. 그외의 또 무수한 의도적 행위를 일으키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습관적이거나 상습적인 의도적 행위 이외의 것으로 다른 여러 상황에 따라 짓게 되는 많은 의도적 행위를 이미 지은 업이라고 이해하시면됩니다. 그러므로 아무래도 이미지은 업(과거에 지은 업)을 훨신 더 많이 짓는다고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업과 업의 과보는 너무나 중층적으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에 여기에 대해서 상세하게 설명하려면 부처님도 좌정하고 깊이 통찰을 하신 뒤에 말씀하시는 것이라고 북방 논서들에는 나타나고 있습니다. 업은 일회적인 것이 결코 아니며 복합적이고 중층적입니다. 먼저 이렇게 이해하셔야 할 것입니다.



15.
(Q)초기경전을 보면 부처님 설법을 듣고 그 자리에서 깨달았다는 부분이 많이 나옵니다. 마치 수행을 하지 않고도 청정한 상태에 들어간 것처럼 보이는 장면이 적지 않습니다. 깨달음과 수행은 어떤 관계인가요. 반드시 수행해야만 깨달을 수 있나요.

(A)그렇습니다. 적지 않은 초기경에 비구들이나 재가자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그 자리에서 아라한이 되거나 수다원(예류) 등이 되었다는 일화가 나타납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화를 너무 단편적으로만 받아들여서는 곤란하다고 봅니다. 어떤 사람이 부처님 말씀을 듣고 그 자리에서 깨달음을 실현했다 한다고 해서, 그가 몇 십 년을 살아오면서 삶에 대한 고뇌라고는 전혀 하지 않다가, 부처님 말씀을 듣고 갑자기 깨달음을 체득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그가 부처님 말씀을 듣고 즉시에 마음이 열린 것은 부처님을 뵙기 전까지 가졌던 처절한 문제의식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더 상식적이고 더 건전한 생각일 것입니다.

우리는 육조스님이 떠꺼머리총각으로 있을 때 홀어머니 봉양을 위해 매일 나무해서 내다 팔다가, 어느 날 금강경 독송하는 것을 듣고 홀연 마음이 열렸다고 신이 나서 말합니다. 그러면 육조스님은 스무 몇 살의 노총각이 되도록 삶에 대한 진지한 고뇌나 사유 한 번 하지 않고, ‘여로’라는 연속극의 영구처럼 그렇게 살아 왔는데, 〈금강경〉 한 구절을 듣고 홀연 대도에 계합한 것일까요? 이건 너무 소설적이고 연속극적인 발상이 아닙니까? 그분이 〈금강경〉을 듣고 마음이 열리기까지는 얼마나 삶에 대한 진지한 고뇌와 성찰이 있었겠습니까? 이런 점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둘째, 수행은 테크닉이 아닙니다. 우리불교의 가장 큰 문제 가운데 하나가 수행을 특정한 테크닉으로만 이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염불이니 화두니 위빠사나니 기도니 절이니 하는 테크닉만을 수행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수행을 하지 않고도 청정한 상태에 들어간 것이 아닌가”하는 질문을 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초기불교에서 수행에 해당하는 원어는 bhavana(바와나)입니다. 바와나는 문자적으로 ‘되게 함’이라는 뜻인데, 부처님께서는 이것을 팔정도로 정의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성제와 연기/무아에 대한 바른 안목과 이해로 요약되는 바른 견해(정견), 마음과 몸과 말의 바른 행위(정사유, 정어, 정업, 정명), 선법/불선법의 판단을 토대로 한 바른 노력(정정진), 그리고 바른 마음챙김(정념)과 바른 삼매(정정)를 실천하는 삶의 모든 순간이 모두 수행이지, 좌선을 한다든지 염불을 한다든지 하는 특정한 테크닉(수행기법)만을 수행으로 봐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수행을 이처럼 테크닉으로만 이해하게 되면 자칫 간화 염불 기도 절 위빠사나 등, 자기가 행하는 테크닉만을 최고의 수행이라고 고집하게 됩니다. 사실 이런 것을 부처님은 계금취(戒禁取, 자기가 따르는 윤리규범과 수행기법만이 최고라는 집착)라고 하셨고, 이런 취착이 남아있는 한 결코 깨달음의 초보단계인 예류과에도 미치지 못한다 하셨습니다.

수행은 문제의식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이를 중국 스님들은 입지(立志)라고 했고, 팔정도는 정견이라 표현합니다. 자기실존에 대한 처절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해탈열반의 실현을 위해서 매순간 진지하게 살아가는 것 자체가 수행입니다. 그러므로 수행을 ‘처절한 문제의식에 바탕한 진지한 삶 그 자체(팔정도)’라고 정의한다면, 깨달음은 반드시 이러한 수행 즉 팔정도의 실천 혹은 진지한 삶을 바탕으로 합니다. 그렇지 않은 깨달음은 자칫 영웅담이나 연속극이 되고 말 것입니다.


16.
불교적 세계관에 욕계.색계.무색계라는 삼계(三界)가 나오던데, 삼계의 의미와 현실적 의의를 설명해 주십시오. 단순히 ‘이것이 삼계다’라는 식으로 말하지 말고, 현재적 실천적 의미를 설명해 주셨으면 합니다.

생명체들이 사는 세상이나 마음의 경지는 참으로 많고 다양합니다. 이것을 정신적 깊이나 수행의 정도에 따라서 분류한 것이 바로 삼계(三界, tebhuumaka)입니다. 이 가운데서 욕계(欲界)는 감각적 욕망(kaama)에 머무는(avacara) 세상이나 마음을 뜻합니다. 그리고 색계(色界)는 물질(ruupa, 色)을 대상으로 하여 증득한 본삼매의 경지에, 무색계(無色界)는 정신의 영역(aruupa, 無色)을 대상으로 하여 증득한 본삼매의 경지에 머무는 세상이나 마음을 뜻합니다. 중생계는 갈애(tanha)를 근본으로 합니다. 그래서 욕계는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慾愛)가 지배하는 곳이고, 색계와 무색계는 존재 자체에 대한 갈애(有愛)가 남아있는 곳이라고 주석서는 설명합니다.

여기서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삼계는 세상(bhuumi/loka)과 마음(citta)의 두 가지에 다 적용되는 용어라는 점입니다. 먼저 세상으로서의 삼계를 살펴보겠습니다.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욕계천상(6욕천)은 욕계세상에 속합니다. 색계세상은 초선천부터 4선천까지의 16가지 색계천상을 뜻합니다. 무색계세상은 공무변처천부터 비상비비상처천까지 4가지 무색계 천상을 뜻합니다. 전에도 밝혔지만 세상은 모두 마음의 반영입니다. 그러므로 욕계는 다양한 감각적 욕망에 휩싸인 심리상태를 가진 중생들이 사는 곳입니다. 색계는 색계 선(禪)이라 불리는 초선부터 제4선까지의 선정의 심리상태에 있는 중생들이 머무는 곳이고, 무색계는 무색계 4선의 심리상태를 가진 중생들이 머무는 곳입니다.

두 번째로 마음으로서의 삼계를 살펴보겠습니다. 아비담마에서는 우리의 마음상태를 크게 욕계마음, 색계마음, 무색계마음, 출세간마음의 넷으로 분류합니다. 이 가운데 색계마음은 초선부터 제4선까지의 본삼매에 든 심리상태를 뜻하고, 무색계 마음은 무색계선에 든 상태를 뜻하며, 禪(본삼매)의 경지에 들지 않은 나머지 모든 심리상태를 욕계마음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열반에 든 심리상태를 출세간마음이라고 정의합니다. 그러므로 욕계세상에 있는 인간이 초선에 들어있으면 그때 그는 욕계세상에 머물지만 색계마음을 일으키고 있는 것입니다. 욕계세상에 있는 인간이 열반을 실현하면 그는 욕계세상에 머물지만 그의 마음은 삼계를 벗어난 출세간의 경지입니다.

이처럼 삼계는 일찍부터 세상과 마음의 두 측면에서 이해되었습니다. 여기서 보듯이 삼계를 분류하는 가중 중요한 기준은 바로 선(禪, 본삼매)입니다. 색계와 무색계는 본삼매의 증득 없이는 불가능한 마음이고 세상입니다. 한편 〈청정도론〉은 “계(戒)는 악처를 뛰어넘는 수단을 나타내고, 삼매는 욕계를 뛰어넘는 수단을, 통찰지(반야)는 모든 존재(삼계)를 뛰어넘는 수단을 나타낸다”라고 적고 있습니다. 비록 선정이 감각적 욕망을 극복하고 뛰어넘는 수행은 되지만, 생사윤회의 근본원인인 갈애와 무명을 타파하는 반야(통찰지)가 없이는 삼계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삼계를 설하신 것은 단순히 세상을 분류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지금여기에서 삼매를 닦아서 감각적 욕망의 굴레에서 벗어나고, 나아가 제법의 무상.고.무아를 통찰하여 삼계의 속박에서 벗어날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이 삼계의 현재적이고 실천적인 의미일 것입니다.


17.
Q: 스님들의 법문을 들으면 깨달음의 세계가 현실과 다른 무엇인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깨달음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과 다른 세계인지, 깨달으면 모든 것이 달라지는지 궁금합니다.

깨달음의 경지는 현실과 다른 세계가 아닙니다. 깨닫는다고 해서 코가 더 커지는 것도, 하늘에서 금덩이가 떨어지는 것도, 모르던 산스끄리뜨를 달통하게 되는 것도, 저 멀리 다른 세계에 가는 것도, 만인을 호령하는 황제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깨닫는다고 해서 이처럼 외형적인 조건이 바뀌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러면 도대체 깨달으면 어떻게 됩니까? 초기경에 입각해서 몇 가지를 적어보겠습니다. 첫째, 〈범망경〉(D1) 등에서 부처님께서는 ‘바로 내 안에서(paccattam- eva) 완전한 평화(nibbuti)를 분명하게 안다’고 하셨습니다. 이 완전한 평화를 우리는 열반이라 부릅니다. 이처럼 깨달음은 내면세계의 변화입니다.

둘째, 고정불변하는 존재론적 실체가 있다는 견해를 가지지 않습니다. 존재론적 실체를 초기경에서는 유신견(有身見, sakaaya-ditthi)이라 합니다. 깨달으면 진아니 대아니 유일신이니 하는 존재론적 실체에 대한 가설을 말끔히 극복하고 연기와 무아의 이치를 철견합니다. 불성이나 여래장을 존재론적 실체인양 잘 못 이해하는 불자들을 봅니다. 불성이나 여래장은 연기의 다른 이름이라고 대승경들은 분명히 밝힙니다. 이러한 유신견의 척파를 두고 견혹(見惑)이 제거되었다, 무명이 타파되었다, 어리석음[癡]이 소멸되었다고도 합니다.

셋째, 해로운 심리현상[不善法]들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은 매순간 감각기능[根]-대상[境]-알음알이[識]가 맞닿으면서 전개되는 역동적인 흐름 그 자체입니다. 이 과정에서 범부들은 좋은 대상은 갈망하고 탐착하고 거머쥐고 아등바등하며, 싫은 대상은 밀쳐내고 혐오하고 증오하고 저항합니다. 깨달으면 근-경-식-촉-수-애-취-유의 연기구조를 철견하고 이를 바탕으로 하여 유익한 심리현상[善法]들이 전개되기 때문에 해로운 심리현상들이 결코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를 두고 수혹(修惑)이 제거되었다, 탐욕[貪]과 성냄[瞋]이 소멸되었다고도 표현합니다.

넷째, 상응부 경전에서는 두 번째 화살에 맞지 않는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깨닫지 못한 범부도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느끼고, 깨달은 사람도 꼭 같이 이러한 느낌들을 느낍니다. 그러나 범부는 육체적인 괴로움을 겪게 되면 그것으로 멈추지 않고 정신적으로까지 근심하고 슬퍼하고 울부짖고 광란합니다. 그러나 깨달은 사람은 육체적으로 괴로운 느낌을 겪더라도 더 이상 그 때문에 근심하지 않고 슬퍼하지 않고 울부짖지 않고 광란하지 않습니다. 마치 어떤 사람이 화살에 맞았지만 그 첫 번째 화살에 연이은 두 번째 화살에는 맞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다섯째, 깨달은 사람은 해로운 심리현상들 대신에 항상 자애.연민.함께함.평온(慈悲喜捨)의 거룩한 마음가짐으로 대표되는 유익한 마음을 내면서 이웃과 세상의 행복을 위해서 삽니다. 부처님과 많은 옛스님들의 행적이 이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깨달음은 사성제를 철견함으로 해서 이지적인 번뇌[見惑=어리석음]와 정서적인 번뇌[修惑=탐욕과 성냄]가 말끔히 해소된 경지이지, 깨달았다고 해서 별천지가 전개되거나 나를 구성하고 있는 외형적인 조건이 완전히 바뀌어버리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깨달음은 결코 신비주의가 아닙니다. 그래서 조주스님은 평상심이 도라고 하셨습니다.


18
Q:불교는 무아를 근본으로 하는 가르침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도 윤회를 강조합니다. 무아와 윤회는 상호 모순되는 가르침인 듯합니다. 어떻게 무아이면서 윤회합니까? 어떤 분은 부처님은 윤회를 설하지 않으셨다고도 하던데 …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A:먼저 힌두교에서 설명하는 윤회와 불교에서 설명하는 윤회를 정확하게 구분지어서 이해해야합니다. 힌두교에서는 불변하는 아뜨만(자아)이 있어서 금생에서 내생으로 ‘재육화(再肉化, reincarnation)’하는 것을 윤회라 하지만 불교에서는 금생의 흐름이 내생으로 연결되어 다시 태어나는 것, 즉 ‘재생(再生, rebirth)’을 윤회라고 부릅니다.

주석서에서는 “5온/12처/18계(蘊處界)가 연속하고 끊임없이 전개되는 것을 윤회라 한다”고 정의합니다. 그러므로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는 서로서로 조건지워져서 생멸변천하고 천류(遷流)하는 일체법의 연기적 흐름을 뜻합니다. 이처럼 불교에서는 윤회의 주체가 없는(무아) 연기적 흐름을 윤회라고 멋지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윤회의 원어는 삼사라(sam+√sr, to move)인데 문자적으로는 ‘함께 움직이는 것, 함께 흘러가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자아의 재육화보다는 오히려 연기적 흐름에 가까운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무아(연기)와 윤회는 아무 모순이 없습니다. 근본적인 입장에서 보자면 매찰나 전개되는 오온의 생멸자체가 윤회입니다. 생사의 입장에서 보자면 한 생에서의 마지막 마음(死心)이 일어났다 멸하고, 이것을 조건으로 하여 다음 생의 재생연결식이 일어나는 것이 윤회입니다. 많은 불자들이 힌두교의 재육화와 불교의 재생을 정확하게 구분짓지 못하고 있어서 안타깝습니다. 힌두교의 재육화는 자아의 전변이지만 불교의 재생은 갈애를 근본원인으로 한 다시 태어남입니다.

윤회는 〈상응부〉 여러 경에서 “무명에 덮인 중생들은 갈애에 속박되어 치달리고 윤회하므로 그 시작점을 꿰뚫어 알 수 없다”는 문맥 등 여러 곳에서 언급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부처님의 오도송이라고 알려진 “많은 생을 윤회하면서/ 나는 헛되이 치달려왔다./ 집짓는 자를 찾으면서/ 거듭되는 태어남은 괴로움이었다./ 집 짓는 자여, 마침내 그대는 보아졌구나./ 그대 다시는 집을 짓지 못하리./ 그대의 모든 골재들은 무너졌고/ 집의 서까래는 해체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마음은 업형성을 멈추었고/ 갈애의 부서짐을 성취하였다.”(법구경 153-154)는 게송도 윤회와 윤회의 종식을 명쾌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이처럼 부처님께서는 분명히 윤회를 설하셨고, 갈애와 무명이 윤회의 원인이라고 밝히셨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갈애(渴愛)를 ‘재생을 하게 하는 것(ponobhaavikaa)’이라고 정의하셨습니다. 갈애와 무명이 있는 한 윤회의 흐름은 계속됩니다. 이것을 우리는 생사윤회라 합니다. 물론 갈애로 대표되는 번뇌들이 다한 아라한에게는 더 이상 윤회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외에는 불환과(아나함)까지도 다시 태어남 즉 윤회는 있습니다.

윤회는 결코 방편설이 아닙니다. 갈애와 무명에 휩싸여 치달리고 흘러가는 중생들의 가장 생생한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윤회는 힌두교 개념이고 불교는 윤회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잘못된 주장에 현혹되면 안 됩니다. 부처님께서는 윤회(苦)를 설하셨고, 윤회의 원인(集, 갈애)을 설하셨고, 윤회가 다한 경지(滅, 열반)를 설하셨고, 윤회가 다한 경지를 실현하는 방법(道, 팔정도)을 설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어설프게 ‘윤회는 없다, 부처님은 윤회를 설하지 않으셨다’고 주장해서는 곤란합니다.


19.
Q 불교의 전문적인 수행법은 사마타와 위빠사나로 정리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이미 중국에 지(止)와 관(觀)으로 정착이 되어 체계화되고 수행되었다고 합니다. 사마타와 위빠사나의 차이점을 설명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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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첫째, 사마타든 위빠사나든 중요한 것은 대상을 명확하게 설정하는 것입니다. 사마타의 대상은 표상(nimitta)이라는 개념(pannatti)이고 위빠사나의 대상은 법(dhamma)입니다. 이것이 사마타와 위빠사나를 구분짓는 가장 중요한 잣대입니다. 이 점을 명확히 해야 합니다.

둘째, 사마타는 대상(표상)에 대한 집중이고 위빠사나는 대상(법)에 대한 통찰입니다. 사마타(samatha)는 마음이 표상에 집중되어 마음의 떨림이나 동요가 그치고(止) 가라앉아 고요한 상태를 말합니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지(止)로 옮겼습니다. 위빠사나(vipassan)는 ‘분리해서(vi) 보는 것(passana)’이라는 문자적인 뜻 그대로, 대상을 나타난 모양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무상하고 고이고 무아인 특성을 여실지견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관(觀)으로 옮겼습니다. 이처럼 사마타는 대상(표상)에 집중하는 삼매(定) 수행이고 위빠사나는 대상(법)을 무상.고.무아로 통찰하는 반야(통찰지. 慧) 수행입니다.

셋째, 사마타의 키워드는 닮은 표상이고 위빠사나의 키워드는 무상.고.무아입니다. 〈청정도론〉은 사마타의 대상을 40가지 명상주제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이런 대상 가운데 하나에 마음을 집중하여 그 대상에서 익힌 표상을 만들고, 이것이 마침내 닮은 표상(相似影像. patibhaga-nimitta)으로 승화되어 흩어지지 않고 오롯하게 되어, 매순간의 마음들이 이 닮은 표상에 고도로 집중된 상태를 사마타라 합니다. 위빠사나는 마음(心).마음부수(心所).물질(色)로 구분되는 71가지 구경법들 가운데 하나를 통찰하는 수행인데 이처럼 법을 통찰해 들어가면 제법의 무상이나 고나 무아를 철견(徹見)하게 됩니다.

넷째, 사마타의 고요함만으로는 해탈.열반을 실현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마타는 마음과 대상이 온전히 하나가 된 그런 밝고 맑고 고요함에 억눌려 탐.진.치가 잠복되어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사마타에서 나올 때는(出定) 다시 탐.진.치의 영향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무상.고.무아를 통찰하는 위빠사나의 힘으로 이들의 뿌리를 멸절시켜야 영원히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 되며 그래야 해탈.열반을 실현하게 됩니다. 그래서 무상.고.무아를 해탈의 세 가지 관문이라고 합니다.

다섯째, 이처럼 위빠사나의 지혜(통찰지)가 없이는 해탈이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고요함과 고도의 집중이라는 사마타의 힘이 아니면 위빠사나의 지혜가 생기기란 결코 용이한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초기경에서 사마타와 위빠사나라는 술어는 거의 대부분 함께 나타나며 부처님께서는 이 둘을 부지런히 닦을 것을 강조하셨습니다. 그래서 중국에서도 지관겸수(止觀兼修)를 강조하였습니다.

여섯째, 사마타를 먼저 닦을 것인가 위빠사나를 먼저 닦을 것인가는 결국 인연 닿는 스승의 지도방법과 수행자 자신의 관심과 성향에 따라서 다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사마타를 반드시 먼저 닦아야한다거나 위빠사나만을 닦아야한다거나 하는 것은 독단적인 견해일 뿐이고, 이런 견해를 고집하면 진정한 수행자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수행은 무상.고.무아를 통찰하는 위빠사나로 귀결이 되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위빠사나는 무상.고.무아를 통찰하는 것 그 자체이지 결코 특정한 수행기법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20.
Q. 불교는 법을 중시하는 가르침이라 합니다. 법의 본래 의미가 어떻게 되는지 궁금합니다.

A. 법의 원어는 산스끄리뜨로는 다르마(dharma)이고 빠알리로는 담마(dhamma)입니다. 중국에서는 법(法)으로 번역이 되었고 달마(達磨)로 음역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는 법, 다르마, 담마, 달마가 지금 함께 사용되고 있습니다.

다르마는 √dhr(to hold)에서 파생된 명사로 세상을 지탱하는 원리나 법칙을 뜻합니다. 그래서 인도의 제문헌에는 ‘정의, 의무, 법률, 법칙, 도덕, 선(善), 종교’ 등의 다양한 뜻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런 배경에서 중국에서도 법(法)이라고 옮겼다고 보여집니다. 이러한 뜻을 가진 단어가 불교에 받아들여져서 초기경들에서 가장 많이 나타나고 있는 술어 가운데 하나가 되었습니다.

초기경의 주석서들은 법(dhamma)의 의미를 크게 ① 빠리얏띠(pariyatti, 교학, 가르침) ② 헤뚜(hetu, 원인) ③ 구나(guna, 덕스러운 행위) ④ 닛삿따닛지와따(nissatta-nijjivata, 개념이 아닌 것)의 넷으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다시 크게 둘로 나누어 정리가 되는데 ⑴ 부처님 가르침(=진리=덕행)으로서의 법과 ⑵ 정신적 물리적 현상으로서의 법(개념이 아닌 것)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으로서의 법을 주석서에서는 불법(佛法, Buddha-dhamma)이라 부르고, 정신적 물리적 현상으로서의 법을 일체법(一切法, 諸法, sabbe dhamma)이라 합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궁극적으로는 모두 일체법으로 정리가 되기 때문에 ‘일체법이 곧 불법(一切法 皆是佛法)’이라고 〈금강경〉은 설명하고 있습니다.

한편 이런 두 가지로 정리되는 법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추구하는 교학체계를 아비담마(Abhidhamma)라 하는데 ‘법(dhamma)에 대해서(abhi)’라는 문자적인 의미에서 중국에서는 대법(對法)으로 옮겼고, 법을 체계화한 궁극적이고 수승한 가르침이라는 의미에서 승법(勝法)이라고도 옮겼습니다. 상좌부 아비담마에서는 이러한 법을 4위 82법으로 정리하고, 유부 아비달마에서는 5위 75법으로 이해하였으며, 대승 아비달마로 불린 유식에서는 5위 100법으로 분류하였습니다.

아비담마에서는 ‘자신의 본성(사바와, sabhava, 고유의 성질, 自性)을 지니고 있는 것을 법이라 한다’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탐욕과 성냄이 서로 다른 법인 이유는 대상을 끌어당기는 성질을 가진 탐욕과 대상을 밀쳐내는 성질을 가진 성냄의 성질이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82법, 75법, 100법으로 분류되는 법들이 모두 서로 다른 고유성질(自相)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들 모든 법들(諸法)은 무상이고 고고 무아라는 보편적인 성질(共相)을 가집니다.

불교 2600년사는 실로 ‘법이란 무엇인가’를 규명한 역사라 할 수 있습니다. 대승에서는 법공(法空), 법상(法相), 법성(法性)의 관점에서 공종(중관계열), 상종(유식계열), 성종(여래장계열)이 꽃피우기도 했습니다.

법이 중요한 이유는 이러한 법이야 말로 해탈.열반을 성취하는 토대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석서에서는 법의 무상.고.무아를 통찰하는 것을 위빳사나(觀)라고 정의하고 있으며, 제법의 보편적 성질인 무상.고.무아를 해탈의 세 가지 관문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법을 이해하지 못하고 보지 못하면 결코 해탈.열반을 성취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법을 보는 자는 나를 본다’고 하셨고 ‘법을 의지처로 삼고(法歸依) 법을 등불로 삼아라(法燈明)’고 고구정녕하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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