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 법문 -여덟 가지 고귀한 길(八正道): 지혜(慧)
글· 윌리암 하트(William Hart) 요약·일중(一中) 스님 옮김
2003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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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날이 끝났습니다. 내일 오후면 여덟 가지 고귀한 길의 세 번째 분야인 지혜(慧)의 분야로 들어갈 것입니다. 지혜가 없다면 수행의 길(道)은 완성되지 않습니다. 계를 실천함으로써, 우리는 수행의 길을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다른 이들을 해롭게 하려는 것을 삼가하고 절제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비록 우리가 다른 이들을 해롭게 하지 않을지라도, 우리는 마음 속에 번뇌를 계속 일으킴으로써 자기 자신을 해롭게 합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통제하고 일어난 번뇌들을 가라앉히는 수행, 즉 선정을 수련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번뇌를 가라앉히는 것이 번뇌를 제거하는 것은 아닙니다. 번뇌는 무의식 속에 남아서 자기 자신을 계속 해롭히면서, 거기서 증식합니다. 그러므로 법의 세 번째 단계인 지혜를 수행해야만 합니다. 그것은 번뇌에게 자유 허가증을 주는 것도 아니고, 번뇌들을 가라앉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보다는 번뇌들이 일어나고 소멸되는 것을 허용하는 것입니다.
번뇌가 소멸되었을 때, 마음은 마음의 오염들로부터 자유롭게 됩니다. 마음이 청정해졌을 때는 아무런 노력 없이도, 우리는 다른 이들을 해롭게 하는 행위를 삼가합니다. 왜냐하면 청정한 마음은 본질적으로 다른 이들을 위한 선의와 자비심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아무런 노력 없이도, 자기 자신을 해롭게 하는 행위를 삼가합니다. 그 때 우리는 행복하고 건강한 삶을 살아갑니다.
이와 같이 수행 길(道)의 각 단계는 그 다음 단계로 나아가야만 합니다. 계를 통해 바른 마음집중인 선정의 계발로 나아가고, 선정을 통해 마음을 청정하게 하는 지혜의 계발로 나아갑니다. 그리고 지혜를 통해서 열반과 모든 번뇌로부터의 해탈, 완전한 깨달음으로 나아갑니다.
지혜(慧, Panna)
지혜(Panna)의 부분에는 여덟 가지 고귀한 길(八正道) 중에서 두 가지가 포함됩니다.
7) 쌈마 쌍깝빠(Samma-san-kappa)는 바른 생각을 말합니다. 지혜를 계발하기 시작하기 이전에, 사고의 전 과정이 멈춰지리라는 기대는 할 필요가 없습니다. 생각은 여전히 있습니다. 다만 사고의 유형이 바뀌는 것입니다. 마음의 표면 층에 있는 번뇌들은 호흡을 알아차리는 수행 때문에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욕망이나 혐오, 무지와 같은 생각들 대신에, 우리는 자기 자신을 자유롭게 하는 방법, 즉 법에 대한 생각, 건강한 생각들을 하기 시작합니다.
8) 쌈마 딧티(Samma-ditthi)는 바른 이해를 말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지혜입니다. 단지 드러나는 것으로서가 아니고, 있는 그대로서의 본질적인 실재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지혜(Panna)의 계발에는 세 단계가 있습니다. 첫째는 숫따-마야(suta-maya panna)인데, 다른 이의 말을 읽거나 들어서 얻은 지혜(聞慧, 혹은 聞所成智)입니다. 이렇게 얻은 지혜는 우리를 올바른 방향에 두기 위해서 매우 유익합니다. 그러나 그 지혜만으로는 해탈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단지 빌려온 지혜이기 때문입니다. 아마 믿지 않는 것이 우리를 지옥으로 이끌 것이라는 두려움에, 맹목적인 믿음에, 혹은 혐오감 때문에, 그리고 또한 믿는 것이 우리를 천상으로 이끌 것이라는 희망과 욕망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사실이라고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그것은 자기 자신의 지혜가 아닙니다.
들어서 얻은 지혜의 역할은 그 다음 단계인 찐따-마야 빤냐(cin-ta-maya panna), 즉 지적인 이해(思慧, 혹은 思所成智)로 인도해야만 합니다. 이성적으로 우리는 우리가 들었던 것과 읽었던 것이 논리적이고 실제적이며 유익한 것인지 아닌지 알기 위해서 그것을 점검합니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입니다.
이러한 이성적 이해는 물론 중요합니다만, 그것이 그 자체로 끝이라고 간주한다면, 그것은 매우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지적인 지식을 많이 쌓은 뒤, 그 스스로가 매우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자부한다고 합시다. 이 때 그가 배운 모든 지식들은 오히려 그의 에고를 강화시키는 데만 쓰여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라면 그는 해탈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것입니다.
지적인 이해의 올바른 역할은 그 다음 단계로 이끌어주는 것입니다. 그 다음 단계란 바와나-마야 빤냐(bhavana-maya panna)인데, 수행을 통한 경험적인 차원에서 자기 자신 안에서 계발한 지혜(修慧, 혹은 修所成智)를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지혜입니다. 들어서 얻은 지혜나 지적인 이해가 만약 우리에게 다음 단계로 가기 위한 영감과 안내를 준다면, 그것은 매우 유익합니다. 그러나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은 오직 수행경험의 지혜 뿐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자기 자신의 경험에 바탕을 둔 자기 자신의 지혜이기 때문입니다.
지혜의 세 가지 유형에 대한 한가지 예를 들어봅시다.
한 의사가 병자에게 약을 위한 처방전을 주었습니다. 환자는 집에 가서 의사에 대한 굉장한 믿음으로, 매일 약 처방전을 암송합니다. 이것이 지혜의 첫 번째 유형인 수따-마야 빤냐(suta-maya panna) 즉, 들어서 얻은 지혜를 말합니다. 그러나 그 환자는 그것에 만족하지 않고, 의사에게 돌아가서 약은 왜 필요한가, 그것이 어떻게 작용하는가’라고 처방전에 대한 설명을 요구하고, 그것을 얻었습니다. 이것이 지혜의 두 번째 유형인 찐따-마야 빤냐(cinta-maya panna) 즉 지적인 분석을 통해서 얻은 지혜입니다. 마침내 환자는 약을 먹습니다. 오직 그때에야 환자의 질병은 사라집니다. 이 효과는 오직 세 번째 단계인 바와나-마야 빤냐(bhavana-maya panna) 즉 수행의 경험을 통해서 얻은 지혜로부터 옵니다.
여러분은 스스로 약을 먹기 위해서, 여러분 자신의 지혜를 계발하기 위해서 이 수행 코스에 왔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여러분이 경험의 차원에서 진리를 이해해야만 합니다. 표면적인 사물의 존재 방식과 실제의 본질과는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너무도 많은 혼란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러한 혼란을 제거하기 위해서, 여러분은 경험적인 지혜를 계발해야만 합니다. 몸의 이 형체 밖에서 진리는 경험되어질 수 없습니다. 거기서 진리는 오직 지적인 분석만이 되어질 뿐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모든 환상과 속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가장 거친 차원에서 가장 미세한 차원까지, 여러분 자신 안에서 진리를 경험하기 위한 능력을 계발해야만 합니다.
전 우주가 계속적으로 변한다는 사실은 누구나 다 압니다. 그러나 이 실재에 대한 단순한 지적인 이해는 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 안에서 그것을 경험해야만 합니다.
가까운 사람이나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과 같은 큰 정신적 사건은 우리로 하여금 무상(無常)이라고 하는 힘겨운 사실에 직면하도록 만듭니다. 그 때에서야 비로소 우리는 세속적인 물질을 위해 애쓰고, 다른 이들과 다툼하는 것의 무익함을 알기 위해서 지혜를 계발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곧바로 이기주의의 오래된 습성이 또다시 드러나고, 지혜는 사라져 버립니다. 왜냐하면 그 지혜는 직접적이며, 개인적인 경험에 바탕을 두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기 자신 안에서 무상(無常)의 실재를 경험하지 못한 것입니다.
모든 것은 매 순간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일시적인 것입니다. 이것이 아니짜(無常, anicca)입니다. 그러나 그 과정의 빠름과 지속성이, 우리로 하여금 영원성에 대한 환상을 갖게 합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초의 불꽃이나 전깃불의 빛은 둘 다 계속적으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촛불의 경우에는 우리의 감각으로 그 변화 과정을 감지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영원하다’는 환상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전깃불의 경우에는 그 일어남과 사라짐의 변화가 너무 빠르고 지속적이어서, 우리의 감각으로는 그것을 좀처럼 감지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영원하다’는 환각을 깨트리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우리는 흘러가는 강에서 계속되는 변화를 감지할 수 있을지도 모르나, 그 강에서 목욕하는 사람이 강물이 매 순간 변화한다는 사실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이 착각을 깨트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자기 자신의 내부를 탐구하고, 자기 자신의 신체와 정신 구조의 실재를 경험하기 위해 수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고타마 싯다르타가 붓다가 되기 위해 했던 것입니다.
그는 모든 선입견을 버리고, 신체와 정신 구조의 실제적 본질을 발견하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탐구했습니다. 표면적이며 외관상 두드러진 실재의 단계에서부터 시작하여, 그는 가장 미세한 단계까지 통찰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물질의 구조와 전체 물질의 세계가 빨리어로 ‘앗타 깔라빠(attha kalapa)’라고 불려지는 원자 구성 요소인 미립자들로 구성되었다는 것, 그리고 그러한 각 미립자들은 다시 4가지 요소(四大)들로 구성되었다는 것도 발견했습니다.
이 네 가지 요소란 땅의 요소(地大), 물의 요소(水大), 불의 요소(火大), 그리고 바람의 요소(風大)와 그에 따른 부수적인 특성들을 말합니다. 그가 발견했던 이 미립자들은 물질의 가장 기초적인 구성 재료입니다. 그것들은 수억 분의 일초라는 엄청난 빠르기로 끊임없이 일어났다가 사라집니다. 실제로 물질계에서 고정된 것은 없습니다. 그것은 오직 가연성과 진동뿐입니다. 현대 과학자들은 붓다의 발견을 확증했고, 물질적인 전 우주가 빠르게 일어나고 사라지는 미립자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실험으로 증명했습니다.
그러나 이 과학자들은 그들의 지혜가 단지 지적이었기 때문에, 모든 고통으로부터 해탈하지 못했습니다. 붓다와는 다르게 그들은 자기 자신 안에서 진리를 직접적으로 경험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즉, 우리는 자기 자신의 무상(無常)에 대한 실재를 개인적으로 직접 경험할 때, 오직 그때에만 우리는 고통에서 벗어나기 시작합니다.
무상에 대한 이해가 자기 자신 안에서 계발될 때, 지혜의 또 다른 측면이 일어납니다. 그것은 나도 없고, 나의 것도 없는 무아(anatta)의 지혜입니다. 신체와 마음의 구조 안에서, 한 순간보다 더 오래 지속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또한 영원불변한 자아나 영혼 등 자신과 동일시할 수 있는 것도 없습니다.
만약 어떤 것이 실제로 나의 것이라면, 그 때 우리는 그것을 소유하고 조절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는 자기 자신의 몸에도 통제권이 없습니다. 몸은 자신의 바람과는 상관없이 계속 변하고 늙어갑니다.
그 때 지혜의 세 번째 측면인 괴로움(dukkha)에 대한 이해가 계발됩니다. 만약 우리가 자신의 통제권 너머에서 변화하는 어떤 것을 소유하거나 잡으려고 노력한다면, 그 때 우리는 스스로를 불행하게 만들 것이 틀림없습니다. 상식적으로 우리는 불쾌한 감각의 경험을 고통과 동일시합니다. 그러나 유쾌한 감각도 똑같이 불행의 원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유쾌한 감각들에 집착한다면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것들도 똑같이 영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일시적인 것에 대한 집착은 고통을 초래할 것이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무상(anicca)과 무아(anatta), 고통(dukkha)에 대한 이해가 확고할 때, 이 지혜는 자기 자신의 일상의 삶 속에서 드러날 것입니다. 자신의 내부에서 분명하고 두드러진 실재를 넘어 꿰뚫어 보는 것을 배웠던 것처럼, 그렇게 외부의 환경 속에서도 우리는 표상적인 실재는 물론 궁극적인 진리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착각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고, 그리고 행복하고 건강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표상적이며 고정되어 있고 결합되어져 있는 실재에 의해서 수많은 환상들이 야기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육체의 아름다움에 대한 환상이 그렇습니다. 몸이라고 하는 것은 오직 그것이 결합되어 있을 때 아름답게 보입니다. 몸의 한 부분을 따로따로 떼어서 본다면, 거기엔 매력도 아름다움도 없습니다. 이것이 몸은 부정(不淨)하다고 하는 의미입니다. 육체의 아름다움은 피상적이고 표상적인 실재이나, 궁극적 진리는 아닙니다.
그러나 육체의 아름다움에 대한 환각적인 본질을 이해한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을 싫어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지혜가 일어날 때, 마음은 자연적으로 균형 잡히고 초연하며, 청정하고, 모든 이를 향한 선의로 가득 찹니다. 자기 자신 안에서 실재를 경험한 뒤, 우리는 어리석음과 욕망 그리고 혐오에서 벗어날 수 있고,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내일 오후 위빠사나를 수행하기 시작할 때, 여러분은 지혜의 분야에서 첫 발자국을 내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위빠사나를 시작하자 마자, 온 몸 전체에서 모든 소립자들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보게 될 것이라고는 기대하지 마십시오. 그렇지는 않습니다.
여러분은 거칠고 표상적인 진리로 시작할 것입니다. 평정한 마음에 머무름으로써, 여러분은 점차적으로 좀더 미세해진 진리, 마음과 물질, 그리고 정신적 요소들에 대한 궁극적인 진리들을 꿰뚫어 볼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마음과 물질 너머에 있는 궁극적 진리를 통찰할 것입니다.
이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서 여러분은 스스로 수행해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계율을 강하게 지키십시오. 왜냐하면 이것은 수행의 기반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내일 오후 3시까지 호흡을 관찰하는 아나빠나(Ana-pana)수행을 계속하고, 콧구멍 주변에서 일어나는 실재를 계속 관찰하십시오. 여러분의 마음을 예리하게 유지하십시오.
그래야만 내일 여러분이 위빠사나 수행을 시작할 때, 좀더 깊은 차원을 통찰할 수 있으며, 거기에 숨겨져 있던 번뇌들을 제거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자신의 선과 여러분 자신의 해탈을 위해서 참을성 있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계속 수행하십시오.
부디 여러분들 모두가 해탈의 길에서 첫 발자국을 떼는 데 성공하기를 빕니다.
모든 존재들이 다 행복하기를!
글· 윌리암 하트(William Hart) 요약·일중(一中) 스님 옮김
2003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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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날이 끝났습니다. 내일 오후면 여덟 가지 고귀한 길의 세 번째 분야인 지혜(慧)의 분야로 들어갈 것입니다. 지혜가 없다면 수행의 길(道)은 완성되지 않습니다. 계를 실천함으로써, 우리는 수행의 길을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다른 이들을 해롭게 하려는 것을 삼가하고 절제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비록 우리가 다른 이들을 해롭게 하지 않을지라도, 우리는 마음 속에 번뇌를 계속 일으킴으로써 자기 자신을 해롭게 합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통제하고 일어난 번뇌들을 가라앉히는 수행, 즉 선정을 수련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번뇌를 가라앉히는 것이 번뇌를 제거하는 것은 아닙니다. 번뇌는 무의식 속에 남아서 자기 자신을 계속 해롭히면서, 거기서 증식합니다. 그러므로 법의 세 번째 단계인 지혜를 수행해야만 합니다. 그것은 번뇌에게 자유 허가증을 주는 것도 아니고, 번뇌들을 가라앉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보다는 번뇌들이 일어나고 소멸되는 것을 허용하는 것입니다.
번뇌가 소멸되었을 때, 마음은 마음의 오염들로부터 자유롭게 됩니다. 마음이 청정해졌을 때는 아무런 노력 없이도, 우리는 다른 이들을 해롭게 하는 행위를 삼가합니다. 왜냐하면 청정한 마음은 본질적으로 다른 이들을 위한 선의와 자비심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아무런 노력 없이도, 자기 자신을 해롭게 하는 행위를 삼가합니다. 그 때 우리는 행복하고 건강한 삶을 살아갑니다.
이와 같이 수행 길(道)의 각 단계는 그 다음 단계로 나아가야만 합니다. 계를 통해 바른 마음집중인 선정의 계발로 나아가고, 선정을 통해 마음을 청정하게 하는 지혜의 계발로 나아갑니다. 그리고 지혜를 통해서 열반과 모든 번뇌로부터의 해탈, 완전한 깨달음으로 나아갑니다.
지혜(慧, Panna)
지혜(Panna)의 부분에는 여덟 가지 고귀한 길(八正道) 중에서 두 가지가 포함됩니다.
7) 쌈마 쌍깝빠(Samma-san-kappa)는 바른 생각을 말합니다. 지혜를 계발하기 시작하기 이전에, 사고의 전 과정이 멈춰지리라는 기대는 할 필요가 없습니다. 생각은 여전히 있습니다. 다만 사고의 유형이 바뀌는 것입니다. 마음의 표면 층에 있는 번뇌들은 호흡을 알아차리는 수행 때문에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욕망이나 혐오, 무지와 같은 생각들 대신에, 우리는 자기 자신을 자유롭게 하는 방법, 즉 법에 대한 생각, 건강한 생각들을 하기 시작합니다.
8) 쌈마 딧티(Samma-ditthi)는 바른 이해를 말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지혜입니다. 단지 드러나는 것으로서가 아니고, 있는 그대로서의 본질적인 실재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지혜(Panna)의 계발에는 세 단계가 있습니다. 첫째는 숫따-마야(suta-maya panna)인데, 다른 이의 말을 읽거나 들어서 얻은 지혜(聞慧, 혹은 聞所成智)입니다. 이렇게 얻은 지혜는 우리를 올바른 방향에 두기 위해서 매우 유익합니다. 그러나 그 지혜만으로는 해탈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단지 빌려온 지혜이기 때문입니다. 아마 믿지 않는 것이 우리를 지옥으로 이끌 것이라는 두려움에, 맹목적인 믿음에, 혹은 혐오감 때문에, 그리고 또한 믿는 것이 우리를 천상으로 이끌 것이라는 희망과 욕망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사실이라고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그것은 자기 자신의 지혜가 아닙니다.
들어서 얻은 지혜의 역할은 그 다음 단계인 찐따-마야 빤냐(cin-ta-maya panna), 즉 지적인 이해(思慧, 혹은 思所成智)로 인도해야만 합니다. 이성적으로 우리는 우리가 들었던 것과 읽었던 것이 논리적이고 실제적이며 유익한 것인지 아닌지 알기 위해서 그것을 점검합니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입니다.
이러한 이성적 이해는 물론 중요합니다만, 그것이 그 자체로 끝이라고 간주한다면, 그것은 매우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지적인 지식을 많이 쌓은 뒤, 그 스스로가 매우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자부한다고 합시다. 이 때 그가 배운 모든 지식들은 오히려 그의 에고를 강화시키는 데만 쓰여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라면 그는 해탈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것입니다.
지적인 이해의 올바른 역할은 그 다음 단계로 이끌어주는 것입니다. 그 다음 단계란 바와나-마야 빤냐(bhavana-maya panna)인데, 수행을 통한 경험적인 차원에서 자기 자신 안에서 계발한 지혜(修慧, 혹은 修所成智)를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지혜입니다. 들어서 얻은 지혜나 지적인 이해가 만약 우리에게 다음 단계로 가기 위한 영감과 안내를 준다면, 그것은 매우 유익합니다. 그러나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은 오직 수행경험의 지혜 뿐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자기 자신의 경험에 바탕을 둔 자기 자신의 지혜이기 때문입니다.
지혜의 세 가지 유형에 대한 한가지 예를 들어봅시다.
한 의사가 병자에게 약을 위한 처방전을 주었습니다. 환자는 집에 가서 의사에 대한 굉장한 믿음으로, 매일 약 처방전을 암송합니다. 이것이 지혜의 첫 번째 유형인 수따-마야 빤냐(suta-maya panna) 즉, 들어서 얻은 지혜를 말합니다. 그러나 그 환자는 그것에 만족하지 않고, 의사에게 돌아가서 약은 왜 필요한가, 그것이 어떻게 작용하는가’라고 처방전에 대한 설명을 요구하고, 그것을 얻었습니다. 이것이 지혜의 두 번째 유형인 찐따-마야 빤냐(cinta-maya panna) 즉 지적인 분석을 통해서 얻은 지혜입니다. 마침내 환자는 약을 먹습니다. 오직 그때에야 환자의 질병은 사라집니다. 이 효과는 오직 세 번째 단계인 바와나-마야 빤냐(bhavana-maya panna) 즉 수행의 경험을 통해서 얻은 지혜로부터 옵니다.
여러분은 스스로 약을 먹기 위해서, 여러분 자신의 지혜를 계발하기 위해서 이 수행 코스에 왔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여러분이 경험의 차원에서 진리를 이해해야만 합니다. 표면적인 사물의 존재 방식과 실제의 본질과는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너무도 많은 혼란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러한 혼란을 제거하기 위해서, 여러분은 경험적인 지혜를 계발해야만 합니다. 몸의 이 형체 밖에서 진리는 경험되어질 수 없습니다. 거기서 진리는 오직 지적인 분석만이 되어질 뿐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모든 환상과 속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가장 거친 차원에서 가장 미세한 차원까지, 여러분 자신 안에서 진리를 경험하기 위한 능력을 계발해야만 합니다.
전 우주가 계속적으로 변한다는 사실은 누구나 다 압니다. 그러나 이 실재에 대한 단순한 지적인 이해는 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 안에서 그것을 경험해야만 합니다.
가까운 사람이나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과 같은 큰 정신적 사건은 우리로 하여금 무상(無常)이라고 하는 힘겨운 사실에 직면하도록 만듭니다. 그 때에서야 비로소 우리는 세속적인 물질을 위해 애쓰고, 다른 이들과 다툼하는 것의 무익함을 알기 위해서 지혜를 계발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곧바로 이기주의의 오래된 습성이 또다시 드러나고, 지혜는 사라져 버립니다. 왜냐하면 그 지혜는 직접적이며, 개인적인 경험에 바탕을 두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기 자신 안에서 무상(無常)의 실재를 경험하지 못한 것입니다.
모든 것은 매 순간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일시적인 것입니다. 이것이 아니짜(無常, anicca)입니다. 그러나 그 과정의 빠름과 지속성이, 우리로 하여금 영원성에 대한 환상을 갖게 합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초의 불꽃이나 전깃불의 빛은 둘 다 계속적으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촛불의 경우에는 우리의 감각으로 그 변화 과정을 감지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영원하다’는 환상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전깃불의 경우에는 그 일어남과 사라짐의 변화가 너무 빠르고 지속적이어서, 우리의 감각으로는 그것을 좀처럼 감지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영원하다’는 환각을 깨트리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우리는 흘러가는 강에서 계속되는 변화를 감지할 수 있을지도 모르나, 그 강에서 목욕하는 사람이 강물이 매 순간 변화한다는 사실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이 착각을 깨트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자기 자신의 내부를 탐구하고, 자기 자신의 신체와 정신 구조의 실재를 경험하기 위해 수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고타마 싯다르타가 붓다가 되기 위해 했던 것입니다.
그는 모든 선입견을 버리고, 신체와 정신 구조의 실제적 본질을 발견하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탐구했습니다. 표면적이며 외관상 두드러진 실재의 단계에서부터 시작하여, 그는 가장 미세한 단계까지 통찰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물질의 구조와 전체 물질의 세계가 빨리어로 ‘앗타 깔라빠(attha kalapa)’라고 불려지는 원자 구성 요소인 미립자들로 구성되었다는 것, 그리고 그러한 각 미립자들은 다시 4가지 요소(四大)들로 구성되었다는 것도 발견했습니다.
이 네 가지 요소란 땅의 요소(地大), 물의 요소(水大), 불의 요소(火大), 그리고 바람의 요소(風大)와 그에 따른 부수적인 특성들을 말합니다. 그가 발견했던 이 미립자들은 물질의 가장 기초적인 구성 재료입니다. 그것들은 수억 분의 일초라는 엄청난 빠르기로 끊임없이 일어났다가 사라집니다. 실제로 물질계에서 고정된 것은 없습니다. 그것은 오직 가연성과 진동뿐입니다. 현대 과학자들은 붓다의 발견을 확증했고, 물질적인 전 우주가 빠르게 일어나고 사라지는 미립자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실험으로 증명했습니다.
그러나 이 과학자들은 그들의 지혜가 단지 지적이었기 때문에, 모든 고통으로부터 해탈하지 못했습니다. 붓다와는 다르게 그들은 자기 자신 안에서 진리를 직접적으로 경험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즉, 우리는 자기 자신의 무상(無常)에 대한 실재를 개인적으로 직접 경험할 때, 오직 그때에만 우리는 고통에서 벗어나기 시작합니다.
무상에 대한 이해가 자기 자신 안에서 계발될 때, 지혜의 또 다른 측면이 일어납니다. 그것은 나도 없고, 나의 것도 없는 무아(anatta)의 지혜입니다. 신체와 마음의 구조 안에서, 한 순간보다 더 오래 지속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또한 영원불변한 자아나 영혼 등 자신과 동일시할 수 있는 것도 없습니다.
만약 어떤 것이 실제로 나의 것이라면, 그 때 우리는 그것을 소유하고 조절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는 자기 자신의 몸에도 통제권이 없습니다. 몸은 자신의 바람과는 상관없이 계속 변하고 늙어갑니다.
그 때 지혜의 세 번째 측면인 괴로움(dukkha)에 대한 이해가 계발됩니다. 만약 우리가 자신의 통제권 너머에서 변화하는 어떤 것을 소유하거나 잡으려고 노력한다면, 그 때 우리는 스스로를 불행하게 만들 것이 틀림없습니다. 상식적으로 우리는 불쾌한 감각의 경험을 고통과 동일시합니다. 그러나 유쾌한 감각도 똑같이 불행의 원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유쾌한 감각들에 집착한다면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것들도 똑같이 영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일시적인 것에 대한 집착은 고통을 초래할 것이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무상(anicca)과 무아(anatta), 고통(dukkha)에 대한 이해가 확고할 때, 이 지혜는 자기 자신의 일상의 삶 속에서 드러날 것입니다. 자신의 내부에서 분명하고 두드러진 실재를 넘어 꿰뚫어 보는 것을 배웠던 것처럼, 그렇게 외부의 환경 속에서도 우리는 표상적인 실재는 물론 궁극적인 진리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착각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고, 그리고 행복하고 건강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표상적이며 고정되어 있고 결합되어져 있는 실재에 의해서 수많은 환상들이 야기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육체의 아름다움에 대한 환상이 그렇습니다. 몸이라고 하는 것은 오직 그것이 결합되어 있을 때 아름답게 보입니다. 몸의 한 부분을 따로따로 떼어서 본다면, 거기엔 매력도 아름다움도 없습니다. 이것이 몸은 부정(不淨)하다고 하는 의미입니다. 육체의 아름다움은 피상적이고 표상적인 실재이나, 궁극적 진리는 아닙니다.
그러나 육체의 아름다움에 대한 환각적인 본질을 이해한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을 싫어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지혜가 일어날 때, 마음은 자연적으로 균형 잡히고 초연하며, 청정하고, 모든 이를 향한 선의로 가득 찹니다. 자기 자신 안에서 실재를 경험한 뒤, 우리는 어리석음과 욕망 그리고 혐오에서 벗어날 수 있고,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내일 오후 위빠사나를 수행하기 시작할 때, 여러분은 지혜의 분야에서 첫 발자국을 내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위빠사나를 시작하자 마자, 온 몸 전체에서 모든 소립자들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보게 될 것이라고는 기대하지 마십시오. 그렇지는 않습니다.
여러분은 거칠고 표상적인 진리로 시작할 것입니다. 평정한 마음에 머무름으로써, 여러분은 점차적으로 좀더 미세해진 진리, 마음과 물질, 그리고 정신적 요소들에 대한 궁극적인 진리들을 꿰뚫어 볼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마음과 물질 너머에 있는 궁극적 진리를 통찰할 것입니다.
이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서 여러분은 스스로 수행해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계율을 강하게 지키십시오. 왜냐하면 이것은 수행의 기반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내일 오후 3시까지 호흡을 관찰하는 아나빠나(Ana-pana)수행을 계속하고, 콧구멍 주변에서 일어나는 실재를 계속 관찰하십시오. 여러분의 마음을 예리하게 유지하십시오.
그래야만 내일 여러분이 위빠사나 수행을 시작할 때, 좀더 깊은 차원을 통찰할 수 있으며, 거기에 숨겨져 있던 번뇌들을 제거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자신의 선과 여러분 자신의 해탈을 위해서 참을성 있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계속 수행하십시오.
부디 여러분들 모두가 해탈의 길에서 첫 발자국을 떼는 데 성공하기를 빕니다.
모든 존재들이 다 행복하기를!
출처 : 위빠사나 수행 가이드
글쓴이 : Il jung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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