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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완수의 우리문화 바로보기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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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화경’ 권1 서품과 권5 여래수량품에 기술되고 있는 영취산, 즉 기사굴산의 실상과 비슷한 토함산 상봉 동쪽 기슭에 잡았다. 그리고 본존 석가여래좌상은 막 마군(魔軍)을 항복시키고 대각(大覺)을 이루어 부처님이 되신 순간의 모습을 표현하기 위해 편단우견(偏袒右肩; 오른쪽 어깨를 드러냄)에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짓게 하였다.

이는 아마 ‘구화엄경’ 권1 세간정안품(世間淨眼品)이나 ‘신화엄경’ 권1 세주묘엄품(世主妙嚴品)에서 밝힌 것처럼 마가다국 적멸도량(寂滅道場)에서 대각을 얻어 막 부처님이 되고 나서 환희에 넘쳐 ‘화엄경’을 설하려 하는 장면을 상징하는 것일 듯하다.

그러면서 백제와 고구려를 항복받아 삼국통일을 이루어냄으로써 전륜성왕으로 군림해온 신라 진골 왕통의 절대 권위를 과시하는 동시에 문무왕 이래 신라 왕실의 숙원이던 일본의 항복을 염원하는 표현이기도 하였을 것이다. 특히 이 본존불이 성덕왕의 초상조각이라 할 때 일본 제압은 당면문제였으니 항마촉지로 동쪽을 향해 위엄을 과시할 필요가 절실하였으리라 생각된다.

상 형식은 편단우견에 결가부좌한 6∼7세기 굽타 말기 사르나드식 항마촉지인 상 양식을 따르는 것으로, 이런 상 양식은 이미 경주 남산 칠불암 마애삼존상에서 그 선구를 보였다. 김리나(金理那) 선생이 심혈을 기울여 밝혀냈듯이 이런 상 양식은 현장법사(玄, 602∼664년)와 왕현책(王玄策)에 의해서 중인도 마가다국 부다가야의 석가여래 성도처(成道處)로부터 전해져온 초당 시기(618∼712년)의 새로운 양식기법이었다.

현장은 당 태종 정관 3년(629) 3월8일에 태종의 공식적인 후원 아래 서역(西域, 인도 문화권)으로 구법(求法; 불교 경전을 구함)여행을 떠난다. 그래서 17년 동안 130여 개국에 이르는 인도 곳곳을 돌아보고 대소승 경전 520질(帙) 657부(部)와 불상 8구(軀) 불사리(佛舍利) 150과를 가지고 정관 19년(645) 1월에 장안으로 돌아온다.

표면적으로 내건 명분은 구법여행이었으나 사실 천하 제패를 꿈꾸던 야심만만한 당 태종이 서역의 영토확장 가능성과 교역의 득실을 탐색하기 위해 밀명을 내려 보낸 탐색여행이었다. 그래서 현장은 정관 10년(636)에 중천축 마가다국에 이르러 마침 4천축의 맹주로 군림하던 시라일다(尸羅逸多)왕을 만나고 이를 설득하여 정관 15년(641)에 당나라로 사신을 파견하게 하여 중인도와 중국이 최초로 외교관계를 수립하게 한다.

 

당 태종은 중인도와 교역이 성사될 듯하자 중국과 중인도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티베트와 동맹이 필요하다고 생각, 이미 정관 15년 1월에 종실녀(宗室女; 종실의 딸)를 문성(文成)공주로 삼아 티베트왕 기종농찬(棄宗弄讚)에게 시집보내 놓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 정관 15년부터 마가다왕 시라일다와 몇 차례 사신을 교환한 다음 정관 17년(643) 3월에는 위위시승(衛尉寺丞) 이의표(李義表)를 정사(正使)로 하고 황수현령(黃水縣令) 왕현책(王玄策)을 부사(副使)로 하여 22인의 공식수행원을 거느리고 가는 대규모 사절단을 파견한다.

왕현책 등은 이해 12월에 마가다국에 도착하여 시라일다왕의 배려로 각처의 불교유적지를 순례하고 정관 19년(645) 1월27일에는 왕사성 기사굴산, 즉 영취산에 오른다. 여기서 영산정토를 배관한 감격과 당 태종의 위덕을 칭송하는 기념비문을 석벽에 새겨 놓고 2월 초에는 부다가야로 내려와 마하보리사, 즉 대각사(大覺寺)에 들러 석가여래의 항마성도상에 참배한다. 그러고 나서 2월11일 여기에다가도 기념비를 세운다. 그 다음 대각사의 항마성도상 등에 매료되어 수행했던 송법지(宋法知) 등의 화가들에게 이를 모사하게 하여 10권의 도상집을 만들어낸다.

그런데 당나라에 우호적이던 시라일다왕이 정관 20년(646)경에 죽자 혼란을 틈타 왕위를 찬탈한 아라나순(阿羅那順)은 왕현책 일행을 구금하고 그 사이 여러 나라로부터 받은 교역품을 빼앗는다. 이때 왕현책은 우위솔장사(右衛率長史)로 벼슬이 올라 정사의 지위에 있었는데 밤중에 탈출하여 티베트로 달려가 구원을 요청한다.

문성공주의 남편인 농찬왕은 정예병 1200명과 네팔 기병 7000명을 내주어 중천축국, 즉 마가다국을 정벌하게 한다. 정사 왕현책과 부사 장사인(蔣師仁)은 왕성을 공격한 지 3일 만에 아라나순왕과 그 일족을 사로잡고 남녀 포로 1만2000인 및 소와 말 2만 여 필을 획득한다. 그래서 드디어 정관 22년(648) 5월에는 왕현책 일행이 이들을 이끌고 장안으로 개선해 돌아온다.

왕현책은 귀국한 다음에 6년 동안 중천축을 여행하며 겪은 일들을 ‘중천축행기(中天竺行記)’ 10권으로 저술하고 또 ‘서역국지(西域國志)’ 100권을 지어 그 풍물을 소개하는데 그중에 도화(圖畵)가 40권이었다 한다. 아마 석굴암 불상 형식의 조본(祖本)이 되었을 <편단우견항마촉지인석가불좌상>도 그 속에 들어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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