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처럼 자승을 빨던 기자가 죽은 이후에는 자승을 불교신문에서는 "한국불교에서 가장 밝게 빛나던 별(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408528)"이라고 칭송한다.
법보신문에서는 권오영기자의 ‘한국불교 중흥’에 온몸 던진 이 시대 큰 스승(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319360) 이라고 칭송하는데 불교신문과 쌍벽을 이룬다.
이들의 기사를 한문장 한문장 그 모순을 반박할수 있으나, 나중에 시간날 때 하기로 하고,
오늘은 그냥 이런게 있었다고 박제해 놓는다. 이렇게 칭송 받고 가는 자승은 좋겠다.
불교신문 장영섭은 자승이 승진시킨 자다.
[자승대종사 원적] 한국불교에서 가장 밝게 빛나던 별
- 종단
- 입력 2023.11.30 13:30
33·34대 총무원장 연임하며
종단 안정과 쇄신 기반 마련
승려복지법으로 공동체정신 복원
각종 국가 규제법령 개선에 기여
용산참사 쌍용차 세월호 참사 등
약자의 아픔 있는 현장에 투신
‘상월결사 인도순례’로 새 지평
마지막 원력 ‘대학생 전법’ 계승해야
한국불교에서 가장 밝게 빛나던 별이 졌다. 대한불교조계종의 상징이자 기둥이었던 해봉당 자승대종사가 11월29일 저녁 원적에 들었다. 당신의 삶 그대로가 불교중흥이었다. 스님의 지혜는 고스란히 한국불교의 길이 되었고 행동은 역사로 승화됐다. 33·34대 총무원장으로서 조계종단의 안정과 쇄신에 크게 기여했다. 퇴임 후에는 상월결사(霜月結社)를 이끌며 생의 마지막까지 불교와 세상을 위해 헌신했다. 한겨울 공사장 한복판에서의 상월선원을 시작으로 전인미답의 인도 불교성지 도보순례를 기어이 성취했다. 그 지중한 원력의 힘으로 한국불교의 미래가 달린 대학생 전법에 모든 열정을 쏟았다. 종단 안팎으로 갈수록 희미해지는 정법(正法)에 기운을 불어넣으려 스스로 솔선하고 종도들을 독려했다. ‘부처님 법 전합시다’라는 간절한 외침은 남은 사람들의 과제가 되었다.
자승대종사는 2009년 10월31일 제33대 조계종 총무원장에 취임했다. 이후 연임을 거쳐 2017년 10월30일까지 정확히 8년간 종단을 이끌었다. 두 번의 임기를 원만하게 마쳤다는 점만으로도 종단사에서 희귀한 일이었다. 최대 종단의 행정수반이자 한국불교의 얼굴로서 내건 캐치프레이즈는 ‘소통과 화합’ 그리고 ‘자성과 쇄신.’ 스님이 자신의 약속을 올곧게 지킨 덕분에 세상과 불교는 활력과 희망을 되찾았다. 안으로는 종단 안정과 혁신, 밖으로는 사회통합과 치유에 앞장섰다. 불교의 권익을 되찾고 수행공동체를 여법하고 거룩하게 복원했다. 선거의 폐해도 계파의 다툼도 사라졌다. 재임 내내 우리 사회는 말도 많고 탈도 많았다. 대종사는 극심한 아픔과 첨예한 갈등이 있는 곳이라면 맨 먼저 찾아가 손을 잡아주고 말을 들어주었다.
자승대종사는 대중공의를 따른다는 종단 운영기조를 일관되게 유지했다. 예전의 권위와 강압이 아닌 대화와 설득으로 다가섰다. 8년 동안 서울 봉은사 직영 전환, 백양사 도박사건, 전 총무원장 의현스님의 사면, 동국대 관련 내홍 등 난제들이 적지 않았다. 그때마다 스님은 모든 문제를 독단으로 처리하지 않았다. ‘사부대중 100인 대중공사’ 등 공론의 장으로 끌어내 반대의견을 경청하고 솔직하게 말했으며 비난을 감수했다. 이러한 용기와 끈기에 힘입어 종단은 차츰 투명해지고 신뢰를 되찾았다.
종단 안정이 지속되자 해묵은 숙제들도 풀려나갔다. 재임 8년간 종법령 제·개정 수가 144건에 이른다. 발로 뛰면서 모두를 끌어안은 결과다. 특히 승려복지법 제정으로 스님들이 평생 동안 수행과 포교에만 전념할 수 있는 풍토를 조성했다. 사사롭지 않고 오직 불교를 위해 살겠다는 책임감과 주인의식을 북돋웠다. 종단 차원에서 시행한 재정공개도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종단을 옭아매던 각종 국가법령의 개정을 이뤄내며 중흥의 발판을 마련했다.
총무원장으로서 첫 대외행보는 2009년 용산 참사 유가족 위문이었다. 이후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립, 세월호 침몰 등 약자들의 고통과 저항이 있는 현장마다 관심과 지원을 내주었다. 자비와 포용은 이념과 사상 앞에서 망설이지 않았다. 내란음모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9년형을 받은 이석기 전 통합진보당 의원의 사면을 요청하는 탄원서를 법원에 제출한 것이 비근한 예다. 피아와 여야를 넘어 오로지 종도와 국민 전체의 이익만을 생각하며 걸어온 8년이다.
‘큰스님’으로서의 훈향은 총무원장에서 물러나면서 오히려 더 깊어지고 널리 퍼졌다. 스스로를 고통의 극한으로 내몰면서 일체중생의 고통에 눈을 떴다. 퇴임 직후 설악산 백담사 무문관(無門關) 정진에 들어갔다. 방문은 3개월 내내 잠가졌고 어둡고 비좁은 공간에서 거듭 동안거를 났다. 치열하고 도저한 궁구(窮究)의 인과(因果)는 눈물겨운 결실들을 일궈냈다. 첫 발걸음은 상월선원이다. 자승스님을 비롯한 아홉 명의 스님들이 맹추위 속에서 소음과 매연을 견뎌냈다. ‘하루 14시간 정진, 하루 한 끼, 포기할 시 승적 반납’ 등의 다짐은 듣기만 해도 소름이 끼친다. 모든 생명의 몸부림과 아우성을 대신 짊어지겠다는 미증유의 고행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새로운 발심과 원력의 공동체인 상월결사가 형성된 계기다. 상월선원의 좌선은 ‘국난극복 자비순례'' '삼보사찰 천리순례’라는 행선(行禪)으로 확산됐다. 그리고 한국불교사 최초의 기적을 완성했다.
부처님의 발자취가 서린 인도 네팔 불교성지 1167km를 43일 동안 걸어서 이동했고 완보해냈다. 상월결사 인도순례는 사례가 없고 앞으로도 이루기 어려운 쾌거이자 공덕(功德)으로 평가된다. 힌두교에 눌려 오래 잠들어있던 인도불교가 다시 기지개를 켰고 한국의 불자들은 순례단의 장엄한 안행(雁行)을 지켜보며 자존감을 회복했다. 초췌한 모습으로 인도순례 회향식 연단에 선 자승스님은 “부처님 법 전합시다”라는 사자후로 능동적이고 열정적인 불교로의 전환을 촉구했다. 절절한 선언은 불교와 미래와 청년을 동시에 일으켜 세울 수 있는 ‘대학생 전법’으로 연결됐다. 범종단적으로 사부대중을 모아 함께 고민하고 실천에 나섰다. 150억 원이 넘는 대학생 전법기금을 모아두고 스님은 먼 길을 떠났다.
‘한국불교 중흥’에 온몸 던진 이 시대 큰 스승
해봉당 자승 대종사는
숱한 저항·도전 속에서도 8년 임기 모두 채운 첫 총무원장
사회약자 위한 행보로 위상 제고…신도시 포교 토대 마련
상월결사·인도 순례 등 진행하며 한국불교사 큰 족적 남겨
11월29일 ‘전법합시다’라는 말을 남기고 소신(燒身)한 조계종 전 총무원장 해봉당 자승 대종사는 한국불교계에서 입지전적인 인물로 꼽힌다. 든든한 문중의 뒷배도 없이 50대에 총무원장에 선출됐고, 숱한 저항과 도전 속에서도 재임에 성공해 8년 임기를 꽉 채운 첫 총무원장이었다. 총무원장에서 퇴임한 이후에도 상월선원 천막결사, 만행결사, 인도순례 등을 진행하면서 전법을 통한 한국불교 중흥에 앞장서는 등 현대 한국불교사에서 큰 족적을 남겼다.
자승 스님은 1954년 강원도 춘천에서 태어나 19세 되던 해 조계종 3·9대 총무원장을 역임한 경산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그러나 은사와의 인연은 깊지도, 오래가지도 않았다. 당시 총무원장이었던 경산 스님은 상좌를 살뜰히 챙길 시간적 여유가 많지 않았고, 자승 스님이 군에서 제대할 무렵 돌연 입적했다. 은사에 대한 기억은 많지 않았음에도 첫 은사와 맺은 인연을 쉽게 저버리지 않았다. 1988년 정대 스님(30대 총무원장)과 새롭게 사제의 연을 맺으면서도 첫 은사로부터 받은 법명을 버리지 않았다.
1979년 겨울, 3년간의 군복무를 마치고 돌아온 스님은 설악산 봉정암에서 홀로 수행했다. 군에서 물든 세간의 물을 빼고 다시 출가자 본연의 삶으로 돌아가겠다는 원력에서 비롯됐다. 체감온도 영하 30~40도의 맹렬한 추위에도 새벽·오전·오후·저녁, 하루 4번 부처님께 공양을 올렸고, 그때마다 2시간씩 하루 8시간 석가모니불 정근을 하며 목탁을 쳤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이어진 5개월여의 고된 정진은 설악에 봄이 찾아들면서 끝이 났다.
이후 사판의 길에 들어선 스님은 1986년 총무원 교무국장을 시작으로 규정국장, 재무부장 등에 임명되며 종무행정을 익혔고, 수원포교당·삼막사·연주암 주지 등을 거치며 가람수호와 대중 포교에 매진했다. 1992년 10대 중앙종회의원에 선출되면서 종단 정치무대에 첫발을 내디딘 스님은 11대 중앙종회 사무처장, 12·13·14대 중앙종회의원에 선출되면서 중진스님으로 몸집을 불려 나갔다. 폭넓은 인간관계와 종무행정에 대한 탁월한 이해는 중앙정치무대로 도약할 수 있는 발판이 됐다. 14대 전반기 중앙종회의장을 거치면서 이미 유력한 차기 총무원장 후보로 거론됐다.
스님은 2009년 10월, 제33대 총무원장 선거를 앞두고 중앙종회 종책모임 화엄회를 기반으로 무차회와 무소속 연대의 지지에 이어 야권으로 분류됐던 보림회와의 합의를 이끌어냈다. 그 결과 선거인단 320명 중 317명이 참석한 가운데 역대 최다 득표인 290표(91.48%)를 얻어 당선됐다.
스님이 33대 총무원장에 취임하며 내세운 슬로건은 ‘소통과 화합을 통한 불교중흥’이었다. “조계종이 많은 변화와 발전을 거듭해 왔지만 화합하지 못한 승가의 모습으로 종도와 국민들에게 큰 실망감을 줬고, 어렵게 쌓아 올린 불교중흥의 기회도 스스로 놓쳤다”는 이유에서였다. 때문에 스님은 총무원 집행부 구성도 여야를 막론하고 고르게 배분했으며, 대립보다는 화합에 중점을 두고 종단을 운영했다.
스님은 사회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총무원장 취임식 하루 전 당시 한국 사회의 갈등이 집약적으로 표출된 용산참사 현장을 방문해 중재를 약속했고, 이웃종교인들을 초청해 오찬을 함께 하며 종교간 화합과 상생을 모색했다. 2010년 1월30일~2월2일 평양을 방문해 2008년 금강산 관광객 피격 사건으로 경색된 남북관계를 풀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50대 총무원장의 의욕적인 행보는 2010년 3월 발생한 ‘봉은사 직영전환 사태’가 발목을 잡았다. 서울 봉은사를 직영사찰로 전환해 강북의 조계사와 강남의 봉은사를 중심으로 서울 도심포교 역량을 강화하겠다는 취지였지만, 당시 봉은사 주지 명진 스님의 거센 반발로 논란을 키웠다. 결국 조계종 화쟁위가 출범해 중재에 나서면서 1년 가까이 지속됐던 봉은사 직영사태는 일단락됐다. 봉은사 문제 해결로 안정세를 찾는가 싶었지만 그해 12월 여당이었던 한나라당이 새해 예산을 단독 처리하면서 템플스테이 예산을 일방적으로 삭감한 사건이 발생했다. 템플스테이는 2002년 월드컵을 앞두고 외국인들에게 전통문화를 소개하자는 취지에서 정부의 요청으로 추진됐던 사업이었다. 그럼에도 정부 여당은 템플스테이 예산을 불교계에 대한 특혜, 혹은 ‘선심성 예산’인 것처럼 호도했다. 불교계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이기도 했다.
스님은 정면 돌파를 선택했다. “더 이상 정부 예산에 발목 잡혀 끌려다니지 않겠다”며 정부 여당과의 대화 거부를 선언하고, 내부적으로 ‘자성과 쇄신 5대 결사’를 추진했다. 조계종의 단호한 대응에 정부 여당은 물러섰다. 템플스테이 예산을 복원했으며, 전통문화에 대한 인식개선을 약속했다. ‘자성과 쇄신 결사’를 통해 사부대중이 한마음으로 결집한 결과였다. 이는 불교계의 위상을 높이는 토대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2012년 5월 백양사에서 발생한 도박사건으로 스님은 또 시련에 직면했다. 스님들이 술과 담배를 든 채 ‘포커’를 치는 장면이 언론을 통해 공개된 사건이었다. 충격적인 영상에 조계종을 향한 세간의 비판은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됐다. 스님은 대국민 참회문을 발표하고 종단 쇄신을 위해 100일간 108배 참회를 진행했다.
자승 스님의 재임 과정은 험난했다. 백양사 도박 사건을 수습하면서 “재임에 연연하지 않겠다”는 모호한 발언이 스님의 발목을 잡았다. 이런 가운데 33대 집행부를 구성했던 종책모임 무차·무량·보림회 소속 스님들이 ‘3자연대’를 구성하며 호주 순방길에 나선 자승 스님의 공백을 틈타 보선 스님을 후보로 추대했다. 그러자 자승 스님도 귀국과 동시에 “선거로 종단구성원들에게 평가를 받겠다”며 출마를 공식 선언했다. 그러나 선원수좌회를 중심으로 자승 스님의 ‘재임반대’ 여론이 득세한 데다 3자연대를 구성하고 있는 스님들의 상당수가 그동안 선거 경험이 많고 종단 정치에 잔뼈가 굵은 스님들이었다는 점에서 선거 결과를 낙관할 수 없었다. 자승 스님은 전국의 선거인단을 일일이 만나 설득했고, 진심으로 지지를 호소했다. 그 결과 2013년 10월 진행된 34대 총무원장 선거에서 전체 선거인단 311명 가운데 179표를 얻어 재임에 성공했다.
1994년 이후 첫 연임 총무원장으로 취임한 스님은 ‘자비와 화쟁으로 이웃과 함께’를 종단운영의 기조로 삼고 “사회와 이웃을 향한 나눔과 봉사를 최우선 과제로 삼겠다”고 밝혔다. 매월 총무원 차원에서 진행됐던 자비나눔활동을 교구본사와 일반사찰로 확대시켰으며 승려복지회를 통해 중앙과 교구의 역할 분담을 통해 의료비 지원도 확대했다. 그런가하면 세종, 위례 등 신도시 종교용지를 매입해 신도시 포교의 토대를 닦았다. 그러나 이런 성과에도 불구하고 자승 스님 재임 4년의 과정은 갈등과 혼란의 연속이었다. 2014년 선학원 사태, 그해 12월 동국대 총장 선출 논란, 2015년 전 총무원장 의현 스님의 징계 재심파동 등으로 극심한 혼란을 겪기도 했다.
그럼에도 스님은 대사회적 행보를 멈추지 않았다. 사회노동위를 중심으로 노동자, 이주민, 다문화가정 등 소외계층을 위한 지원활동을 강화했으며, 세월호 참사 때는 진도 팽목항에 임시법당 건립에 이어 서울 조계사에서 희생자 넋을 기리는 법회를 열어 유가족들을 위로했다.
그렇게 다사다난했던 8년간의 임기를 마치고 스님은 2017년 10월30일 총무원장에서 물러났다. 조계종사에서 총무원장 8년 연임 임기를 모두 채운 것은 자승 스님이 유일했다.
총무원장에서 퇴임한 자승 스님은 다시 인제 백담사 무문관에 들었다. 40여년 전 ‘군대물’을 빼고 ‘중물’을 들이겠다며 설악산 봉정암에서 정진했던 것처럼 오랜 기간 ‘행정승’으로 머물러 있던 자신을 변화시키겠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렇게 두 번의 무문관 수행을 거쳐 자승 스님은 2019년 11월 ‘위례 상월선원 천막결사’를 단행했다. 수행이 삶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일상의 한 부분임을 일깨우자는 취지였다. 서릿발 같은 청규를 바탕으로 9명 스님들이 혹한에 맞서 진행한 상월선원 결사는 당시 한국불교에 신선한 충격을 던졌다. 스님은 여기에 머무르지 않았다. 이듬해 10월 대구 동화사에서 서울 봉은사까지 이어진 ‘국난극복 자비순례’, 2021년 조계총림 송광사에서 해인총림 해인사를 거쳐 영축총림 통도사로 이어지는 ‘삼보사찰 천리순례’, 2022년 ‘생명평화 방생순례’를 차곡차곡 진행했다.
이어 올해 2~3월, 한국불교 중흥과 세계평화, 생명존중을 발원하며 부처님 전법의 길을 따라 43일간 1167km 상월결사 인도 순례를 진행해 세간의 큰 주목을 받았다. 이 역시 부처님이 태어나고 전법하며 열반에 들었던 그 길을 걸으며 탐욕과 성냄, 어리석음으로 점철된 사바세계에 새로운 희망의 기운을 불어넣겠다는 자승 스님의 원력이 만들어 낸 결과였다. 뿐만 아니라 스님은 최근까지 한국불교의 미래인재 양성을 위한 ‘대학생 전법’에 전념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이어왔다.
그랬던 스님은 11월29일 자신의 기도처였던 안성 칠장사에서 “생사가 없다 하나 생사 없는 곳이 없구나, 더 이상 구할 것이 없으니 인연 또한 사라지는구나”라는 열반송을 남기고 홀연히 원적에 들었다. ‘한국불교중흥’을 위한 험난한 파고에 맞서 온몸을 던졌던 스님의 치열했던 삶은 한국불교의 변화와 쇄신을 위한 자양분으로 평가되고 있다.
권오영 기자 oyemc@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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