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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과 범어

칠음략(七音略) 第一 

정초(鄭樵)의 통지(通志)

 

송대사학은 ‘통(通)’을 구하는 데 특징이 있어 북송중기에 사마광의 《자치통감(資治痛鑑)》이 나왔고, 남송 초에 정초가 《통지》를 지어 더욱 뚜렷해졌다. 두 책은 시간적으로 80년의 차이가 있으나 하나는 편년사로서, 또 하나는 기전사로 고금을 통관하는 사서였다. 다시말하면 송대에 일어난 통사의 바람이 정초의 《통지》에 와서 극치를 이룬 것이다. 그리고 정초는 본래 서명을 ‘통사(通史)’라고 하였다가 뒤에 《통지》로 정하였다.

 

1.정초의 사학

1)일생

정초(1104~1162)는 자가 어중(漁仲)으로 복건 흥화(興化, 현재 복건 보전(莆田)의 한 하층 관리의 집에서 태어났다. 가정의 영향을 받아 어려서 독서를 좋아하였다. 자라서는 실학(實學)을 숭상하여 과거에 응시하지 않고 학문연구에 뜻을 두었다. 16세 때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당형인 정후(鄭厚)와 함께 협제산(夾漈山)에 초당(草堂)을 짓고 평생을 학문 토론과 저술로 보내 그를 협제선생이라 불렀다. 정강 2년(1127)에 금군이 남하하여 변경을 점령하고 휘종과 홈종이 포로가 되어 붙잡혀가게 되자 정씨 형제는 시서(詩書)에만 빠져있을 수 없다 하여 하산하여 금군에 저항하자고 하였다. 그러나 그의 뜻이 받아들여지지 않아 다시 산으로 들어가 실용적인 학문 연구에 정진하였다. 소흥 5년(1132)에 정후가 예부시험에 합격하여 천주(泉州)의 관리가 되었다. 이때부터 정초는 독자적으로 독서와 저술에 매진하였다. 그의 향리에서는 두 번씩이나 그를 효렴 유일(孝廉 遺逸)로 추천하였으나 이에 응하지 않았다. 정초가 16세에 협제산으로 들어가 학문을 연구한 이래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크게 네 단계로 나누어, 고종 건염 3년(1129)까지를 첫 단계로 보아 주로 『詩』,『書』를 중점적으로읽고 연구하였으며, 『禮』, 『樂』에 관련된 것을 읽었다. 이 시기에 정초는 《시변망(詩辨妄)》을 지어 사학계에 영향을 크게 끼쳐 주희마저도 그의 식견에 경탄을 금치 못했다. 소흥 11년(1141) 이전까지가 두 번째 단계로 문자학에 전념하였다. 대표적으로 《이아주(爾雅注)》, 《본초성서(本草成書)》등을 지어 동식물에 관한 지식을 학습하였다. 세 번째 단계는 소흥 18년(1148) 이전까지로 주로 도서목록과 교수학에 전념하였으며, 그 이후 《통지》를 완성할 때까지가 네 번째 단계였다. 그의 저서는 단편을 포함하여 95종에 달하며, 권수로 되어있는 것은 50종에 584권, 454편으로 권수가 표시되지 않은 것도 35종에 달하였다. 정초는 평민 학자여서 자기의 저작을 간행하기가 어려웠다. 이에 정초는 자기의 저작을 조정에 올려 그의 재능을 인정받기를 원했기 때문에 세 차례나 불원천리하고 임안(남송의 서울, 항주)에 가서 황제에게 헌상하였다. 첫 번째는 소흥 18년(1148)으로 정초는 140권을 헌상하였고, 이로 인하여 진회(秦檜)의 아들 진희(秦熺)의 추천으로 우적공랑(右迪功郞)이 되었다. 두 번째는 소흥 28년에 고종에게 《통지》의 대강을 올려 고종의 칭찬을 들었다. 이에 우적공랑으로서 예·병부가각(架閣)을 겸임하였다. 그후 정초는 어사 섭의(葉義)에게 탄핵을 받았다. 세 번째는 소흥 31년(1161)으로 《통지》를 갖고 임안으로 가 헌상하였는데, 고종이 순행중이어서 만날 수 없었으나 추밀원 편수 겸 섭검상제방문자(攝檢詳諸房文字)에 봉해졌다. 다음해 고종은 《통지》를 헌상한 정초를 불렀으나 이때는 정초가 이미 중병에 걸려 있었으며 곧 세상을 떠났다.

 

 

해석1

 

『通志』 三十六, 「七音略」 第一, 七音序

《七音略》序:“然漢儒識文字 而不識子母,則失制字之旨;江左之儒識四聲而不識七音,則失立韻之源。獨體為文、合體為字,漢儒知以說文解字,而不知文有子母。生字為母、從母為子,子母不分,所以失制字之旨。四聲為經、七音為緯,江左之儒知縱有平、上、去、入為四聲,而不知衡有宮、商、角、徵、羽、半徵、半商為七音。縱成經、衡成緯,經緯不交,所以失立韻之源。”
그러나 한나라 유생(儒生)들은 문자(文字)는 알았지만, 자모(字母)를 몰라 글자를 만든 (근본) 뜻을 잃었다. (황하)강 남쪽의 유생들은 사성(四聲)은 알았지만, 칠음(七音)을 몰라 입운(立韻)의 근원(根源)을 잃었다. 체(體)는 홀로 문(文)이 되고 체(體)를 합하면 자(字)가 된다. 한나라 유생들은 설문해자(說文解字)는 알고 있었지만, 문(文)에 자모(字母)가 있다는 것을 몰랐다. 글자가 생기면 모음(母音)이 되고, 모음(母音) 따라 자음(子音)이 되므로 자모(子母)란 나눌 수 없는 것인데 글자를 만든 뜻을 잃은 것이다.   
사성(四聲)은 날줄(經)이 되고 칠음은 씨줄(緯)이 된다. 황하 남쪽의 유생들은 종(縱)에 평성ㆍ상성ㆍ거성ㆍ입성 같은 4성이 있다는 것은 알았으나 형(衡)에 궁ㆍ상ㆍ각ㆍ치ㆍ우ㆍ반치ㆍ반상이 있어 7음이 된다는 것은 몰랐다. 세로(縱)는 날줄(經)이 되고 가로(衡)는 씨줄(緯)이 되어 서로 오가지 않으므로 입운의 근원을 잃은 것이다.  

 

 

鄭樵認為“識文字”為先,識“七音”在后,“識字”為“辨音”的基礎。鄭樵在其諧聲造字法理論的基礎上,將漢字諧聲的特點與語音的系統性相結合,提出了“諧聲制字六圖”
(通志를 지은) 정초(鄭樵 : 송나라 1104~1162)는 ‘문자’를 아는 것이 먼저이고 ‘7음’을 아는 것은 그 다음이라, ‘문자를 아는 것(識字)’는 소리를 분별하는(辨音) 첫 걸음이라고 보았다. 정초는 그가 쓴 『소리에 맞게 글자 만드는 법 이론(諧聲造字法理論)』의 첫걸음에서 한자 소리의 형성(諧聲) 특징과 말소리(語音)의 계통성을 서로 결합하여 「소리에 따라 글자 만드는 6가지 그림(諧聲制字六圖)」을 내놓았다.   


해석2

七音略 第一 

通志 三十六

七音序

 

天地之大其用在坎離人之為靈其用在耳目人與禽獸視聼一也 聖人制律所以導耳之聰制字所以擴目之明耳目根於心 聰明發於外上智下愚自此分矣 雖曰皇頡制字伶倫制律歴代相承未聞其書 漢人課籕隸始為字書以通文字之學 江左競風騷始為韻書 以通聲音之學 

 

然漢儒識文字而不識子母,則失制字之旨,江左之儒識四声而不識七音,則失立韻之源,独体為文,合体為字

그런데 한유들은 글짜는 인식하게 되엿지만, 자모가 글짜를 밍가는 의의는 인식하지 못하엿다. 江의 南쪽에 잇는 유생들은 사성(四聲)에 관해서는 인식하고 잇엇지만 칠음(七音)에 무지(無知)하여 음운(音韻)을 세우는 근원(根源)을 잃게 되엿다. 유독 체(體)와  체(體)가 합하면 문자(文字)가 된다.

 

漢儒知以説文解字而不知文有子母生字為母, 従母為子,子母不分所以失制字之旨,四声為経七音為緯,

한유들은 설문해자는 알고 잇섯지만 자모(字母)가 자음(子音)을 생략하여 이것이 모음(母音)이 되고, 모음(母音)을 쯫아서 자음(子音)이 되는 리치(理致)를 인식하지 못햇다. 자모가 나뉘지 않으면, 글짜를 제정하는 뜯(志)을 잃게 된다. 사성(四聲)은 경(經)이 되며 칠음은 위(緯)가 된다.

 

江左之儒知縦有平上去入為四声而不知衡有宮商角徴羽半徴半商為七音縦成経衡成緯経緯不交所以失立韻之源

강남(江南)의 유생들은 평상거입(平上去入)에 따라 사성(四聲)이 된다는 것은 알고 잇섯지만, 균형을 위하여 궁상각징우(宮商角徵羽) 반상반징(半商半徵)의 칠음은 모르고 잇섯다. 칠음이 되면, 종(縱)은 경(經)을 이루고, 형(衡)은 위(緯)가 되며, 경(經)이 교차하지 않으면 음운(音韻)의 근원을 잃게 된다.

 

 

七音之韻起自西域流入諸夏, 梵僧欲以其教伝之天下 故為此書雖重百訳之遠一字不通之処而音義可伝 

칠음의 운(韻)은 서역으로 부터 생겨서 하(夏)나라 때 모든 나라로 류입되엿다. 범승(梵僧)들이 칠음(七音)을 가르쳐 세상에 전하고자 이 운서(韻書)를 수 백 가지로 번역하엿스나 일자(一字)에도 불통(不通)하엿스나 음과 뜯을 전할 수 있다.

 

 

華僧従而定之以三十六為之母, 重軽清濁不失其倫, 天地万物之音備於此,  矣雖鶴唳風声鶏鳴狗犬雷霆驚天蚊虻過耳皆可訳也, 況於人言乎

중국승려(華僧)가 수긍하여 삼십육자모(三十六子母)를 정하여 중경청탁(重輕淸濁)이 그 질서를 잃지 않아 천지만물의 음이 여기에 맞추어 졌다. 비록 학(鶴)의 울부짖는 소리와 바람소리, 닭이 우는 소리, 개가 짖어대는 소리, 뇌성벽력(雷聲霹靂)과 하늘을 놀라게 하는 소리, 모기나 벌레 소리가 귀(耳)를 지나가는 소리 까지도 음역(音譯)할 수 있게 되었다. 하물며 사람의 말에 관해서랴?      

 

 

 

欽定四庫全書

通志卷三十六

宋 右廸功郎 鄭樵漁仲 撰

七音略 第一
七音序

天地之大其用在坎離人之為靈其用在耳目人與禽獸視聼一也 聖人制律所以導耳之聰制字所以擴目之明耳目根於心 聰明發於外上智下愚自此分矣 雖曰皇頡制字伶倫制律歴代相承未聞其書 漢人課籕隸始為字書以通文字之學 江左競風騷始為韻書 以通聲音之學 

然漢儒識文字 而不識子母 則失制字之㫖 江左之儒 識四聲而不識七音 則失立韻之源. 獨體為文 合體為字 漢儒知以説文解字 而不知文有子母 生字為母 從母為子 子母不分 所以失制字之㫖. 四聲為經 七音為緯 江左之儒知縱有平上去入為四聲 而不知衡有宫商角徵羽半徵半商為七音. 縱成經 衡成緯 經緯不交 所以失立韻之源. 
七音之韻 起自西域 流入諸夏 梵僧欲以其教 傳之天下 故為此書. 雖重百譯之逺 一字不通之處 而音義可傳華僧從而定之以三十六為之母重輕清濁不失 其倫天地萬物之音 備於此矣. 雖鶴唳風聲雞鳴狗吠雷霆驚天蚊䖟過耳 皆可譯也. 況於人言乎. 所以日月照處 甘傳梵書者 為有七音之圖 以通百譯之義也. 今宣尼之書 自中國而 東則朝鮮 西則涼夏 南則交阯 北則朔易 皆吾故封也. 故封之外 其書不通 何瞿曇之書 能入諸夏而宣尼之書不能至跋提河聲音之道有障閡耳. 
此後學之罪也. 舟車可通則文義可及今舟車所通而文義所不及者何哉. 
臣今取七音 編而為志 庻使學者 盡傳其學 然後能周宣宣尼之書 以及人面之域 所謂用夏變夷當自此始.
臣謹按 開皇二年 詔求知音之士 參定音樂時 有柱國沛公 鄭譯 獨得其義 而為議曰 考尋樂府鍾石律吕 皆有宫商角徵羽變宫變徵之名七聲之 内三聲乖應每加詢訪終莫能通 先是周武帝之時 有龜兹人曰 蘓祗婆從突厥皇后 入國善胡琵琶聼其所 奏一均之中間有七聲問之則曰父 在西域號為知音 世相傳習調 有七種 以其七調 校之七聲㝠若合符
一曰娑陁力華言平聲即宫聲也
二曰雞識華言長聲即南呂聲也
三曰沙識華言質直聲即角聲也
四曰沙侯加濫華言應聲即變徵聲也
五曰沙臘華言應和聲即徵聲也
六曰般贍華言五聲即羽聲也
七曰俟利箑華言斛牛聲即變宫也 譯因習而彈之始得七聲之正 然其就此七調又有五旦之名 旦作七調以華譯之旦即均也. 譯遂因琵琶更立七均合成十二應十二律 律有七音 音立一調故 成七調十二律 合八十四調 旋轉相交盡 皆和合仍以其聲 考校太樂鍾律乖戾不可勝數 譯為是著書二十餘篇 太子洗馬蘇䕫駁之 以五音所從來久矣.
不言有變宫變徵七調之 作實所未聞 譯又引古以為㨿 周有七音之律 漢有七始之志 時何妥以舊學牛弘 以巨儒不能精通 同加沮抑遂 使隋人之耳 不聞七調之音. 
臣又按唐楊收與安涗論 琴五絃之外 復益二絃因言七聲之義 西京諸儒惑圜鍾函鍾之説 故其郊廟樂惟用黄鍾一均章帝時 太常丞鮑業始旋十二宫 夫旋宫以七聲為均 均言韻也. 古無韻字 猶言一韻聲也. 宫商角徵羽為五聲 加少宫少徵 為七聲 始得相旋為宫之意 琴者樂之宗也. 韻者聲之夲也. 皆主於七名之曰韻者蓋取均聲也.
臣初得七音韻鑑一唱而三歎 胡僧有此妙義而儒者未之聞及乎 研究制字 考證諧聲 然後知皇頡史籕之書 已具七音之作 先儒不得其傳耳. 今作諧聲圖 所以明古人制字 通七音之妙 又述内外轉圖 所以明胡僧立韻 得經緯之全 釋氏以叅禪為大悟 通音為小悟 雖七音一呼 而聚四聲 不召自來. 此其麤淺者 耳至於紐躡杳㝠盤旋寥廓非心樂洞 融天籟通乎.
造化者 不能造其閫字書主於母 必母權子 而行然後 能别形中之聲. 韻書主於子 必子權母 而行然後能别 聲中之形 所以臣更作字書 以母為主 亦更作韻書 以子為主. 今兹内外轉圖 用以别音聲 而非所以主子母也.

諧聲制字六圖

諧聲者六書之一書也. 凡諧聲之道 有同聲者 則取同聲 而諧無同聲者 則取協聲 而諧無協聲者 則取正音 而諧無正音者 則取旁音 而諧所謂聲者五聲也. 
音者七音也. 制字之夲 或取聲以成字 或取音以成字 不可備舉. 今取其要 以證所諧 兹所不載觸類而長.

    

所以日月照処甘伝梵書者為有七音之図以通百訳之義也今宣尼之書自中国而東則朝鮮西則涼夏南則交阯北則朔易皆吾故封也故封之外其書不通何瞿曇之書能入諸夏而宣尼之書不能至跋提河声音之道有障〓《門亥》耳此後学之罪也舟車可通則文義可及今舟車所通而文義所不及者何哉臣今取七音編而為志庶使学者尽伝其学然後能周宣宣尼之書以及人面之域所謂用夏変夷当自此始臣謹按開皇二年詔求知音之士参定音楽時有柱国沛公鄭訳独得其義而為議曰考尋楽府鐘石律呂皆有宮商角徴羽変宮変徴之名七声之内三声乖応毎加詢訪終莫能通先是周武帝之時有亀茲人曰蘇祇婆従突厥皇后入国善胡琵琶聴其所奏一均之中間有七声問之則曰父在西域号為知音世相伝習調有七種以其七調校之七声冥若合符一曰娑陀力華言平声即宮声也二曰鶏識華言長声即南呂声也二曰沙識華言質直声即角声也四曰沙侯加濫華言応声即変徴声也五曰沙臘華言応和声即徴声也六曰般贍華言五声即羽声也七曰俟利〓《竹捷-才》華言斛牛声即変宮也訳因習而弾之始得七声之正然其就此ヒ調又有五旦之名旦作七調以華訳之旦即均也訳遂因琵琶更立七均合成十二応十二律律有七音音立一調故成七調十二律合八十四調旋転相交尽皆和合仍以其声考校太楽鐘律乖戻不可勝数訳為是著書二十餘篇太子洗馬蘇〓駁之以五音所従来久矣不言有変宮変徴七調之作実所未聞訳又引古以為拠周有七音之律漢有七始之志時何妥以旧学牛弘以巨儒不能精通同加沮抑遂使隋人之耳不聞七調之音臣又按唐楊収与安〓《シ兌》論琴五絃之外復益二絃因言七声之義西京諸儒惑圜鐘函鐘之説故其郊廟楽惟用黄鐘一均章帝時太常丞鮑業始旋卜二宮夫旋宮以七声為均均言韻也古無韻字猶言一韻声也宮商角徴羽為五声加少宮少徴為七声始得相旋為宮之意琴者楽之宗也韻者声之本也皆主於七名之曰韻者蓋取均声也臣初得七音韻鑑一唱而三嘆胡僧有此妙義而儒者未之聞及乎研究制字考證諧声然後知皇頡史籀之書已具七音之作先儒不得其伝耳令作諧声図所以明古人制字通七音之妙又述内外転図所以明胡僧立韻得経緯之全釈氏以参禅為大悟通音為小悟雖七音一呼而聚四声不召自来此其麁浅者耳至於紐躡杳冥盤旋寥廓非心楽洞融天籟通乎造化者不能造其《門困》字書主於母必母権子而行然後能別形中之声韻書主於子必子権母而行然後能別声中之形所以臣更作字書以母為主亦更作韻書以子為主今茲内外転図用以別音声而非所以主子母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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