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훈민정음과 범어

정광교수의 [동아시아 여러 문자와 한글]에 나타난 誤字

정광교수의 [동아시아 여러 문자와 한글]에 나타난 誤字

 

 

 

134p.  
천축의 승려 축불념이 한한 보살영락본업菩薩瓔珞 (하권)에는 옛 불도에서 배워야 하는 십이부경十二部經의 하 나로 비가라나毘伽羅를 들었다.3) 

 

주석 3) 불자여, 광혜신인(光慧信忍)하여 옛 부처님의 도(道)를 수습하나니, 이른바 십이부경(十二部經)이니라. 수다라(修多羅)ㆍ기야(祇夜)ㆍ비가라나(毘伽羅那)ㆍ가타(伽陀)ㆍ우다나(憂陀那)ㆍ니다나(尼陀那)ㆍ아바다나(阿波陀那)ㆍ이제목다가(伊帝目多伽)ㆍ사타가(闍陀伽)ㆍ비불략(毘佛略)ㆍ아부타달마(阿浮陀達摩)ㆍ우바제사(憂波提舍) 등 이러한 법으로써 중생을 제도하고 신통 변화의 광명이 빛나므로 명지(明地)라 이름 하느니라.

佛子光慧信忍修習古佛道所謂十二部經修多羅祇夜毘伽羅那伽陁憂陁那尼陁那阿波陁那伊帝目多伽闍陁伽毘佛略阿浮陁達摩憂波提舍以此法度衆生光光變通故名明地

----여기서 나오는 뱌까라나(vyākaraṇa,毘伽羅那)는 수기(受記)  기답(記答)  기설(記說)  기별(記別)  기별(記莂)  설(說)로 번역되는 용어로 성명기론(聲明記論)과는 다른 용어이다.뱌까라나는 현재 오부니까야에  ānandaparikathā (DN 18), sakkapañhasuttaṃ(DN 21), kīṭāgirisuttaṃ (MN 70)등에 그 내용이 들어가 있다.

9분교로 나누어 질 때에도 수기(veyyākaraṇa)는 포함되어 있었다.

9분교: (sutta), 미증유법(abbhutadhamma), 문답(vedalla), 응송(geyya), 수기(veyyākaraṇa),게송(gāthā), 감흥어(udāna),여시어(itivuttaka),본생담(jātaka),

 

 

 

 

 

139p. 

이 이론 중국에 들어와서 성명학聲明學으로 발전하여 중국 성운학聲韻學의 반이 되었다. 그리고 고려의 대장경에 포함되어 한반도에 전달되었고 조선의 초기에 세종과 그의 주변의 신미信와 같은 학승들에게 전달되어 훈민정음 제정의 이론적 배경이 된 것으로 졸저(2015), 《한글의 발명》에서 주장하였다.

----261p."중성 11자는 이후에 신미대사에 의하여 《실담자기》의 마다 12자에 맞추어 추가한 것이다."  라고 말하고 있는데, 신미信와 같은 학승들에게 전달되었다는 정확한 증거를 보여주었으면 좋겠다. 이 책의 곳곳에서 이러한 주장만 수차례 반복된다. 

 

 

 

 

162p. 
중국에 와서 섭론攝論宗의 개조開祖가 된 삼장법사 진체(眞諦,499∼ 569)는 범어명梵語名으로 Paramärtha이고 일명 Gunarata라고도 부르며 불가의 유명한 <바수반두법사전婆藪盤豆法師傳》을 한역漢譯하였다.
3.3.2.2 진체 법사는 중국 양나라의 무제가 대동大同 연간(535~ 545)에 부남南에42) 사신을 보내어 고승과 대승大乘 경전을 구하 자 이에 응하여 중국으로 떠났으며 중대동中大同 1년(546)에 중국의 해남에 이르렀다. 태청太淸 1년(548)에 불가(佛家의 경經논을 많 이 가지고 양의 서울 건강(建康, 현재의 南京)에 도착하여 양 무제 의 존경을 받았던 인물이다.
---진체(眞諦)는 진제라고 발음해야 한다. 229p.265p.에도 '진체'라고 되어있는등 다수 '진체'라고 되어있다. 

 

 

 

166p. 

3.3.3.2 이것은 범어의 [Praja]를 '반약般若'으로 번역하고 [hrdaya] 를 흘리제야紇哩第野-經)'로 그리고 [sutra]를 '소달라(素恒羅-心) 로 번역하여 'Prjña hrdaya sutra'를 '반야심경'으로 적는 것과 같다. 다음은 송대의 일이지만 불경의 한역에서 다음의 9단계를 거 쳐 역문이 이루어짐을 보인 것이다. 불경 번역의 아홉 단계란 졸고(2012)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이루어진다.

----- [hrdaya] 를 흘리제야紇哩第野-)'로 그리고 [sutra]를 '소달라(素恒羅-) 로 번역하여라고 해야한다. 心과 經이 바뀌어 있다. 

 

 

 

183p. 

---훈민정음에서는 항상  () () () ()이라는 한자를 쓰고 있다. 훈민정음을 견(見)켸(溪)꾼(群)의(疑)라는 한문으로 사용하여 설명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371p. "원래는 동국정운식 수정 한자음을 표기하기 위하여 제정한 훈민정음에서는 반절상자인 성으로 27자만을 만들고 반절하자의 운은 <몽운>의 15운에 맞추어 운회를 번역하려고 하였다. 그러다가 신미가 반절하자인 운을 중성과 종성으로 다시 나누고 모음에 해당하는 중성의 표음으로 11자를 추가하여 초성과 더불어 훈민정음 28자를 완성한다."

372p."신미는 실담의 반론에서 말하는 마다 12자에 맞추어 중 성 11자를 별도로 만든 것으로 졸고(2019)에서 주장하였다. 세종은 이를 받아들여 초성 17자와 결합시켜서 훈민정음 28자를 완비한 것이다."

----신미가 이런 일을 했다는 정확한 증거가 나와야 한다.세종과 신미가 만난 것은 ‘경오(1450)년’이라는 아래와 같은 기사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서울=뉴시스] 김수온이 세조의 명을 받아 1464년 작성한 ‘복천사기(福泉寺記)’에는 세종대왕이 신미의 이름을 듣고 처음 만난 해는 ‘경오(1450)년’이라 쓰여 있으며, 조선왕조실록의 기록과 일치한다. 이는 복천사기는 신미가 훈민정음 창제와는 전혀 무관함을 입증한다.

 

 

 

1450년 세종이 죽는해에 세종과 신미가 만났다는 것을 믿는 것보다...세종실록에서 1448년에 이미 신미가 인심을 현혹(眩惑)시키고 성학(聖學)을 황폐하게 만든다는 상소가 있었는데 그것에 대해서 "알아보라" "끌고와라"라는 등의 말이 없이 침묵을 지킨 것은 세종이 이미 신미를 잘알고 심지어 총애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본다. (나의 생각) 

 

세종실록 121권, 세종 30년 7월 26일 경술 4번째기사 1448년 명 정통(正統) 13년

유상해 등이 수온을 잡아 그 죄를 바루고 요망한 중을 벌할 것을 상소하다

생원(生員) 유상해(兪尙諧) 등이 상소하기를,

"신 등이 듣건대, 요망한 중 신미(信眉)가 꾸미고 속이기를 백 가지로 하여, 스스로 생불(生佛)이라 하며, 겉으로 선(善)을 닦는 방법을 하는 체하고 속으로 붙여 사는 꾀를 품어서 인심을 현혹(眩惑)시키고 성학(聖學)을 황폐하게 만드는 것이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또 신미(信眉)의 아우인 교리(校理) 수온(守溫)이 유술(儒術)로 이름이 났는데, 이단(異端)의 교(敎)를 도와서 설명하고 귀하고 가까운 사람에게 붙어서 아첨하여 진취(進取)에 자뢰하니, 비옵건대, 수온(守溫)을 잡아다가 그 죄의 이름을 바루고, 특히 요망한 중을 베어 간사하고 요망한 것을 끊으면, 신하와 백성이 모두 대성인의 하는 일이 보통에서 뛰어남이 만만(萬萬)인 것을 알 것입니다."

하였으나, 회답하지 아니하였다.

○生員兪尙諧等上疏曰: 臣等聞妖僧信眉矯詐百端, 自謂生佛, 陽爲修善之方, 陰懷寄生之謀, 其眩惑人心, 蓁蕪聖學, 莫之勝說。 且信眉之弟校理守溫以儒術著名, 而助說異端之敎, 依阿貴近, 以資進取。 乞將守溫, 正名其罪; 特斬妖僧, 以絶邪妄, 則臣民咸知大聖人之所爲, 出於尋常萬萬也。

不報。

 

 

 

 

372p.

"애초에 중성 11자가 없었던 것은 세종 25년 12월의 훈민정음 창제 이후 불과 2개월 후인 세종 26년 2월에 올린 최만리의 반대 상소에 언 문 27자로만 되었으며 이것은 중국 성운학에서 말하는 대운大韻, 즉 반절상자의 초성만을 말한 것이다."

----애초에 중성 11자가 없었었다니 이 무슨 소리인가?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