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N 15
대인연경(大因緣經, Mahanidana sutta)(D15)
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는 꾸루(지금의 델리 근처)에서 깜마사담마 라는 꾸루들의 성읍에 머무셨다. 그때 아난다 존자가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절을 올린 뒤 한 곁에 앉았다. 아난다 존자는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경이롭습니다. 세존이시여. 놀랍습니다. 세존이시여. 세존이시여. 이 연기(緣起)는 참으로 심오합니다. 그리고 참으로 심오하게 드러납니다. 그러나 이제 제게는 분명하고 또 분명한 것으로 드러납니다."
"아난다여, 그와 같이 말하지 말라. 아난다여, 그렇게 말하지 말라. 이 연기는 참으로 심오하다. 그리고 참으로 심오하게 드러난다. 아난다여, 이 법을 깨닫지 못하고 꿰뚫지 못하기 때문에 이 사람들은 실에 꿰어진 구슬처럼 얽히게 되고 베 짜는 사람의 실타래처럼 헝클어지고 문자 풀처럼 엉키어서 처참한 곳, 불행한 곳, 파멸처, 윤회를 벗어나지 못한다.
연기의 가르침
2. "아난다여, '조건이 있기 때문에 늙음 · 죽음(老死)이 있습니까?' 라고 질문을 받으면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해야 한다. 만일 '그러면 무엇을 조건으로 하여 늙음 · 죽음이 있습니까?'라고 듣는다면 '태어남을 조건으로 하여 늙음 · 죽음이 있습니다'라고 대답해야 한다.
아난다여, '조건이 있기 때문에 태어남(生)이 있습니까?'라고 질문을 받으면 '그렇습니다'라고 그는 대답해야 한다. 만일 '그러면 무엇을 조건으로 하여 태어남이 있습니까?' 라고 묻는다면 '존재[有][1]를 조건으로 하여 태어남이 있습니다.'라고 대답해야 한다.
아난다여, '조건이 있기 때문에 존재가 있습니까?'라고 질문을 받으면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해야 한다. 만일 '그러면 무엇을 조건으로 하여 존재가 있습니까?'라고 묻는다면 '취착[2]을 조건으로 하여 존재가 있습니다.'라고 대답해야 한다.
아난다여, '조건이 있기 때문에 취착이 있습니까?'라고 질문을 받으면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해야 한다. 만일 '그러면 무엇을 조건으로 하여 취착이 있습니까?'라고 묻는다면 '갈애[3]를 조건으로 하여 취착이 있습니다.'라고 대답해야 한다.
아난다여, 조건이 있기 때문에 갈애가 있습니까?'라고 질문을 받으면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해야 한다. 만일 '그러면 무엇을 조건으로 하여 갈애가 있습니까?'라고 묻는다면 '느낌(受)을 조건으로 하여 갈애가 있습니다.'라고 대답해야 한다.
아난다여, '조건이 있기 때문에 느낌이 있습니까?'라고 질문을 받으면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해야 한다. 만일 '그러면 무엇을 조건으로 하여 느낌이 있습니까?"라고 묻는다면 '감각접촉(觸)을 조건으로 하여 느낌이 있습니다.'라고 대답해야 한다.
아난다여, '조건이 있기 때문에 감각접촉이 있습니까?'라고 질문을 받으면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해야 한다. 만일 '그러면 무엇을 조건으로 하여 감각접촉이 있습니까?'라고 묻는다면 '정신·물질[名色][4]을 조건으로 하여 감각접촉이 있습니다.'[5]라고 대답해야 한다.
아난다여, '조건이 있기 때문에 정신 · 물질이 있습니까?'라고 질문을 받으면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해야 한다. 만일 '그러면 무엇을 조건으로 하여 정신 · 물질이 있습니까?'라고 묻는다면 '알음알이(識)를 조건으로 하여 정신 · 물질이 있습니다.'라고 대답해야 한다.
아난다여, '조건이 있기 때문에 알음알이가 있습니까?'라고 질문을 받으면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해야 한다. 만일 '그러면 무엇을 조건으로 하여 알음알이가 있습니까?'라고 묻는다면 '정신 · 물질을 조건으로 하여 알음알이가 있습니다.’라고 대답해야 한다.[6][1] 청정도론 등의 주석서는 ‘업으로서의 존재(業有)’ 와 ‘재생으로서의 존재(生有)’의 두 가지가 있다고 설명한다. 업으로서의 존재는 '의도와, 의도와 관련된 탐욕 등의 없이'라고 불리는 법들을 말하며, 존재로 인도하는 업은 모두 업으로서의 존재이다. 재생으로서의 존재는 업에서 생긴 무더기들 즉 오온을 말하며 중생이라는 존재와 개체를 말한다.[2] 취착(取着)은 주석서들에는 감각적 욕망에 대한 취착(慾取), 견해에 대한 취착(見着), 계율과 의식에 대한 취착(戒禁取), 자아의 교리에 대한 취착(我語取)의 넷을 들고 있다.[3] 갈애(渴愛)는 여성명사로 기본적으로는 갈증, 목마름 등을 의미한다. 중국에서는 주로 愛로 옮겼으나 우리는 어원을 살려서 갈애로 옮긴다. 갈애는 각각의 갈애가 일어나는 형태에 따라 ①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慾愛) ②존재에 대한 갈애(有愛) ③존재하지 않음에 대한 갈애(無有愛)의 셋으로 분류하기도 하고 눈, 귀 등의 일어나는 장소에 따라 6가지로 분류하기도 한다. 이렇게 해서 18가지가 되고 안팎의 각각으로 36가지가 되고 다시 과거, 현재, 미래로 모두 108가지가 된다.[4] 본래 정신(nama, 名)은 느낌, 인식, 상카라들, 알음알이[受想行識]의 네 가지 무더기[四蘊]를 뜻하고 물질(rupa, 色)은 물질의 무더기(色蘊)를 의미한다. 그러나 청정도론에서 “정신(nama, 名)이란 대상을 향하여 기울기 때문에 느낌 등 세 가지 무더기들을 뜻한다. 물질이란 네 가지 근본물질들과 그 네 가지 근본물질에서 파생된 물질들이다.”(XVII.187)라고 정의하듯이 연기각지(緣起各支)로서의 정신은 느낌·인식·상카라(受.想.行)의 3온만을 의미한다고 주석서들은 말한다. 알음알이(識)는 따로 언급되고 있기 때문이다.[5] 여기서는 12(十二) 연기의 여섯 감각장소(六入)가 빠지고 바로 감각접촉은 정신·물질에 조건 지워졌다(名色緣觸)고 나타난다. 이것이 본경에서 설하는 연기법의 가장 큰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주석서는 '①조건이 일어남의 특별함과 ②남은 조건의 특별함을 보여주기 위해서'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결론으로 ‘조건의 근본원인(nidana, 본경의 제목임)을 보여주기 위해서’라고 설명한다. 달리 말하면, 여섯 감각장소를 넣어 버리면 감각접촉이 모두 여섯 감각장소만을 조건한 것처럼 보여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감각접촉은 반드시 여섯 감각장소만을 조건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삼사화합생촉(三事和合生觸, 감각기능(根), 대상(境), 알음알이(識), 셋의 화합으로 감각접촉이 생긴다)에서 보듯이 12처 가운데 안.이.비.설.신.색.성.향.미.촉의 10가지와 법의 일부는 물질(色)이고 의(意, mano)와 6식은 정신(名)이니, 오히려 정신·물질(名色)을 조건하여 감각접촉이 있다고 하는 것이 근본원인(nidana)을 드러내는데 훨씬 분명하기 때문에 여기서는 육입을 제외시겼다는 주석서의 설명이다. 조금 산만하겠지만 중요한 부분이므로 주석서와 복주서의 해당 부분을 직역한다.
“정신·물질을 조건으로 하여 감각접촉이 있다고 했다. 그것은 ‘여섯 감각장소(六入)를 조건으로 하여 감각접촉이 있다.’라고 설하게 되면 눈의 감각접촉 등 여섯 가지의 과보로 나타난 감각접촉만을 취하게 된다. 그러나 여기 [본경]에서는 ‘여섯 감각장소를 조건으로 하여’라는 이런 구문을 취하거나 취하지 않거나 간에 ①조건이 일어남의 특별함과 ②여섯 감각장소 이외에도 감각접촉의 남은 조건의 특별함을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여섯 감각장소를 조건으로 라는 구문을 생략하여] 이렇게 [정신·물질을 조건으로 하여 감각접촉이 있다]고 말씀하셨다고 알아야 한다. 그러면 이런 방법으로 세존께서는 무엇을 말씀하시는가? 조건들의 근본원인(nidana)을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이 경은 조건 가운데서 헝클어진 것을 없애고 잡목을 제거한 뒤에 말씀하셨기 때문에 ‘근본원인에 대해 길게 설하신 [경](mahanidana, 大因緣)’이라 불리기 때문이다여기에 대해서 복주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을 덧붙이고 있다.“’취하거나’라는 것은 여섯 가지의 과보로 나타난 감각접촉이다. ‘취하지 않거나’라는 것은 과보로 나타난 감각접촉이 아닌 유익하거나 해롭거나 작용만 하는 감각접촉이다. 이 구문은 ‘조건이 일어남의 특별함을 보여 주기 위해서’와 연결지어 해석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조건의 일어남만이 취착된 것이라는 것을 뜻할 뿐만 아니라 조건도 취착된 것이라는 뜻도 된다. 그래서 안의 감각장소인 여섯 감각장소를 취함에 의해서 취함이라고 만든 뒤 ‘여섯 감각장소 이외에도 감각접촉의 남은 조건의 특별함을 보여 주기 위해서이다.’라고도 설명하였다. 왜냐하면 감각접촉은 눈 등의 여섯 감각장소만이 그 조건인 것은 아니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 “눈과 형상들을 반연하여 눈의 알음알이가 일어난다. 이 셋의 화합이 감각접촉이다.”라는 등의 말씀으로부터 형상의 감각장소 등의 물질(色)과 눈의 알음알이 등의 정신(名)도 그 조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눈등의 여섯 감각장소 이외의 남은 [조건인] 전향(轉向) 등처럼 일반적인 것이 아니며, 그런 감각접촉의 일반적인 것과는 다른 특별한 조건을 pi(역시)라는 단어로써 특별하지 않은 일반적인 조건을 제외하기 위해서 세존께서는 여기서 “정신·물질을 조건으로 하여 감각접촉이 있다.’고 말씀하셨다고 적용해야 한다. [위방가의] 아비담마 바자니야에도 이러한 조건의 [특별함]을 두고 정신·물질을 조건으로 하여 감각접촉이 있다.”고 설하셨으며 그 주석서에서도 “조건의 특별함을 보여 주시기 위해서이고 중요한 근본 원인을 취하기 위해서이다.”라고 주석을 하였다.[6] 본경은 알음알이의 조건으로 다시 정신·물질을 언급하면서 알음알이·정신·물질의 상호관계로 연기를 설명한다. 이렇게 하여 본경에서는 12지 연기 가운데 무명·행·육입이 나타나지 않는 9지 연기로 연기의 근본(nidana)을 정밀하게 설하고 있다.
3. "아난다여, 이처럼 정신 · 물질을 조건으로 하여 알음알이가(namarupapaccaya vinnanam), 알음알이를 조건으로 하여 정신 · 물질이(vinnanapaccaya namarupam), 정신 · 물질을 조건으로 하여 감각접촉이(namarupapaccaya phasso), 감각접촉을 조건으로 하여 느낌이(phassapaccaya vedana), 느낌을 조건으로 하여 갈애가(vedanapaccaya tanha), 갈애를 조건으로 하여 취착이(tanhapaccaya upadanam), 취착을 조건으로 하여 존재가(upadanapaccaya bhavo)존재를 조건으로 하여 태어남이(bhavapaccaya jati) 태어남이, 태어남을 조건으로 하여 늙음 · 죽음과 근심 · 탄식 · 육체적 고통 · 정신적 고통 · 절망이 있다(jatipaccaya jaramaranam sokaparidevadukkhadomanassupayasa sambhavanti). 이와 같이 전체 괴로움의 무더기가 일어난다(evametassa jevalassa dukkhakkhandhassa samudayo hoti).
4.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 · 죽음이 있다고 말하였다.[7] 아난다여,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 · 죽음이 있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알아야 한다. 아난다여, 만일 신들이 신이 되고, 간답바들이 간답바가 되고, 약카들이 약카가 되고, 정령[8]들이 정령이 되고, 인간들이 인간이 되고, 네발 짐승들이 네발짐승이 되고, 새들이 새가 되고, 파충류들이 파충류가 되는 이런 태어남이 어떤 것에 의해서도 어떤 식으로도 그 어디에도 그 누구에게도 없다고 하자. 그러면 이런저런 중생들의 이런 태어남은 결코 없을 것이다. 아난다여, 그러면 이처럼 태어남이 소멸해버려 태어남이 어떤 식으로도 전혀 존재하지 않는데도 늙음 · 죽음을 천명할 수 있겠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아난다여, 그러므로 이것이 바로 늙음 · 죽음의 원인이고, 근원이고, 기원이고, 조건이니, 그것은 다름 아닌 태어남이다."[7] 이상으로 9지 연기의 전체 골격을 드러내시고 이제 연기의 정형구 각각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전개하신다. 그래서 주석서도 “이제 그들 각각의 조건들이 참되고 거짓되지 않고 다르지 않게 조건짓는 상태를 보여주시기 위해서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죽음이 있다’는 등을 말씀하신다.”라고 적고 있다.[8] ‘정령’으로 옮긴 원어는 bhuta 이다. Bhuta의 기본적인 의미는 ‘존재하는 것, 생긴 것’의 의미이다. 초기경에서 bhuta는 크게 세 가지 문맥에서 나타난다.첫 번째는 ‘존재하는 것 = 생긴 것, 있는 것 = 진실, 사실’의 의미로 쓰인다. 중국에서 여실지견(如實知見)으로 옮긴 단어 가운데 여실(있는 그대로)에 해당하는 것이 yatha-bhutam이다. 초기경에 아주 많이 나타나는 표현이다. 두 번째는 ‘존재하는 것 = 기본 요소 = 지.수.화.풍 = 근본물질’로 쓰였다. 이것은 사대(四大, 네 가지 근본물질)로 나타나고 있다.그리고 세 번째가 본문에서처럼 ‘존재하는 것 = [살아있는] 존재’라는 뜻으로 쓰여 특히 유령 등 초자연적인 존재를 뜻하는 경우로도 많이 나타난다. 그래서 ‘정령’으로 옮겼다.
5.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있다고 말하였다. 아난다여,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있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알아야 한다. 아난다여, 만일 욕계의 존재, 색계의 존재, 무색계의 존재, 이러한 존재가 어떤 것에 의해서도 어떤 식으로도 그 어디에도 그 누구에게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자. 아난다여, 존재가 소멸해 버려 존재가 어떤 식으로도 전혀 존재하지 않는데도 태어남을 천명할 수 있겠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아난다여, 그러므로 이것이 바로 태어남의 원인이고, 근원이고, 기원이고, 조건이니, 그것은 다름
아닌 존재이다."
6. "취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있다고 말하였다. 아난다여, 취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있다는 이것은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알아야 한다. 아난다여, 만일 감각적 욕망에 대한 취착, 견해에 대한 취착, 계율과 의식에 대한 취착, 자아의 교리에 대한 취착 - 이러한 취착은 어떤 것에 의해서도 어떤 식으로도 그 어디에도 그 누구에게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자. 아난다여, 취착이 소멸해버려 취착이 어떤 식으로도 전혀 존재하지 않는데도 존재를 천명할 수 있겠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아난다여, 그러므로 이것이 바로 존재의 원인이고, 근원이고, 기원이고, 조건이니, 그것은 다름 아닌 취착이다."
7. "갈애를 조건으로 취착이 있다라고 말하였다. 아난다여, 갈애를 조건으로 취착이 있다는 이것은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알아야 한다. 아난다여, 만일 형상에 대한 갈애, 소리에 대한 갈애, 냄새에 대한 갈애, 맛에 대한 갈애, 감촉에 대한 갈애, 법에 대한 갈애 - 이러한 갈애[9]가 어떤 것에 의해서도, 어떤 식으로도, 그 어디에도, 그 누구에게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자. 아난다여, 갈애가 소멸해버려 갈애가 어떤 식으로도 전혀 존재하지 않는데도 취착을 갈애할 수 있겠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아난다여, 그러므로 이것이 바로 취착의 원인이요, 근원이요, 기원이고, 조건이니, 그것은 다름 아닌 갈애이다."[9] 여기서는 갈애를 여섯 가지 밖의 감각장소(六外處, 六境)와 관련지어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아래의 느낌과 감각접촉도 같은 방법으로 여섯 가지 감각장소와 관련지어 설명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도 본경에서는 여섯 감각장소가 중복되기 때문에 ‘명색연육입 육입연촉’을 줄여서 ‘명색연촉(名色緣觸)’으로 설명하고 있다고도 이해할 수 있겠다.
8.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있다고 말하였다. 아난다여,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있다는 이것은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알아야 한다. 아난다여, 만일 형상에 닿아서 생긴 느낌, 소리에 닿아서 생긴 느낌, 냄새에 닿아서 생긴 느낌, 맛에 닿아서 생긴 느낌, 감촉에 닿아서 생긴 느낌, 법에 닿아서 생긴 느낌 - 이러한 느낌이 어떤 것에 의해서도, 어떤 식으로도, 그 어디에도, 그 누구에게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자. 아난다여, 느낌이 소멸하여 버려 느낌이 어떤 식으로도 전혀 존재하지 않는데도 갈애를 천명할 수 있겠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아난다여, 그러므로 이것이 바로 갈애의 원인이고, 근원이고, 기원이고, 조건이니, 그것은 다름 아닌 느낌이다."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9가지 갈애
9. "아난다여, 이처럼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vedanam paticca tanha)[10], 갈애를 조건으로 추구가(tanham paticca pariyesana), 추구를 조건으로 얻음이(pariyesanam paticca labho), 얻음을 조건으로 판별이(labham paticca vinicchayo), 판별을 조건으로 욕망이(vinicchayam paticca chandarago), 욕망을 조건으로 탐착이(handaragam paticca ajjhosanam), 탐착을 조건으로 거머쥠이(ajjhosanam paticca pariggaho), 거머쥠을 조건으로 인색이(pariggaham paticca macchariyam), 인색을 조건으로 수호가(macchariyam paticca arakkho), 수호를 원인으로 하여 몽둥이를 들고 무기를 들고 싸우고 말다툼을 하고 분쟁하고 상호비방하고 중상모략하고 거짓말하는 수많은 사악하고 해로운 법들이 생겨난다(arakkhadhikaranam dandadanasatthadanakalahaviggahavivadatuvampesunnamusavada aneka papaka akusala dhamma sambhavanti).[11][10] 연기의 구성요소들(各支) 가운데서 생사유전(生死流轉)의 가장 직접적인 원인이 되는 것이 바로 갈애이다. 그래서 사성제에서도 고의 원인을 밝히는 집성제(괴로움의 일어남의 진리)에서 갈애를 괴로움의 원인으로 들고 있는 것이다. 갈애는 이처럼 중요한 구성요소이기 때문에 이제 여기서부터는 이러한 갈애가 실제로 전개되는 상황을 9가지로 심도 깊게 설명하고 계시는데 연기를 설명하는 다른 경에서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 본경 특유의 가르침이다. 여섯 감각장소(六入)가 나타나지 않는 것이 본경의 첫 번째 큰 특징이라면 이것은 두 번째 큰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주석서는 이와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이처럼 윤회의 뿌리가 되는 앞의 갈애를 ‘수연애(受緣愛)’로 설명하신 뒤 이제는 [말의] 등짝을 때리고 목의 털을 거머쥐고서 용감무쌍하게 길 위로 올라선 사람과 같이 9가지 구문을 통해서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갈애의 [모습을] 설하신다.”[11] 이9가지는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갈애의 적나라한 모습이다. 윤회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는 갈애가 어떻게 현실 속에서 실제로 사악하고 해로운 법들로 중생에게 일어나고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 주고 계신다. 그래서 주석서에서는 이것을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갈애라고 표현하고 있다.
10. "수호[12]를 원인으로 하여 몽둥이를 들고 무기를 들고 싸우고 말다툼을 하고 분쟁하고 상호비방하고 중상모략하고 거짓말하는 수많은 사악하고 해로운 법들이 생겨난다고 말하였다. 아난다여, 이것은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알아야 한다. 아난다여, 만일 수호가 어떤 것에 의해서도 어떤 식으로도 그 어디에도 그 누구에게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자. 아난다여, 수호가 소멸하여 버려 수호가 어떤 식으로도 전혀 존재하지 않는데도 몽둥이를 들고 무기를 들고 싸우고 말다툼하고 분쟁하고 상호비방하고 중상모략하고 거짓말하는 수많은 사악하고 해로운 법들이 생겨날 수 있겠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아난다여, 그러므로 이것이 바로 몽둥이를 들고 무기를 들고 싸우고 말다툼하고 분쟁하고 상호비
방하고 중상모략하고 거짓말하는 수많은 사악하고 해로운 법들이 생겨나는 원인이요, 근원이고, 기
원이고, 조건이니, 그것은 다름 아닌 수호다."[12] ‘수호’란 대문을 걸어 잠그고 보석함을 지킴에 의해서 잘 수호하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는 나쁜 뜻으로 쓰였다.
11. "인색[13]을 조건으로 수호가 있다고 말하였다. 아난다여, 인색을 조건으로 수호가 있다는 이
것은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알아야 한다. 아난다여, 만일 인색이 어떤 것에 의해서도 어떤 식으로
도 그 어디에도 그 누구에게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자. 아난다여, 인색이 소멸하여 버려 인색이
어떤 식으로도 전혀 존재하지 않는데도 수호를 천명할 수 있겠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아난다여, 그러므로 이것이 바로 수호의 원인이고, 근원이고, 기원이고, 조건이니, 그것은 다름
아닌 인색이다."[13] ‘인색’의 원어는 macchariya이다. 주석서는 “남의 성공을 견디지 못하는 것”으로 설명한다. 그리고 이 단어를 경이로움을 뜻하는 acchariya에 견주어서’이런 경이로움이 내게만 있고 남에게는 없기를(ma).’이라고 한다고 해서 ma+acchariya로 재미있게 풀이하고 있다. 다른 문맥에서는 주로 질투(issa)와 짝을 이루어 issa-macchariya(질투와 인색)로 많이 나타난다.
12. "거머쥠[14]을 조건으로 인색이 있다고 말하였다. 아난다여, 거머쥠을 조건으로 인색이 있다는
이것은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알아야 한다. 아난다여, 만일 거머쥠이 어떤 것에 의해서도 어떤 식으로도 그 어디에도 그 누구에게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자. 아난다여, 거머쥠이 소멸하여 버려 거머쥠이 어떤 식으로도 전혀 존재하지 않는데도 인색을 천명할 수 있겠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아난다여, 그러므로 이것이 바로 인색의 원인이고, 근원이고, 기원이고, 조건이니, 그것은 다름 아닌 거머쥠이다."[14] ‘거머쥠’ 수행의 문맥에서는 ‘파악, 파지, 이해’의 뜻으로 쓰이지만 여기서는 문자 그대로 거머쥠을 뜻한다. 그래서 주석서에서는 ‘갈애와 사견으로 거머쥐는 행동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13. "탐착을 조건으로 거머쥠이 있다고 말하였다. 아난다여, 탐착을 조건으로 거머쥠이 있다는 이것은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알아야 한다. 아난다여, 만일 탐착이 어떤 것에 의해서도 어떤 식으로도 그 어디에도 그 누구에게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자. 아난다여, 탐착이 소멸하여 버려 탐착이 어떤 식으로도 전혀 존재하지 않는데도 거머쥠을 천명할 수 있겠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아난다여, 그러므로 이것이 바로 거머쥠의 원인이고, 근원이고, 기원이고, 조건이니, 그것은 다름 아닌 탐착이다."
14. "욕망을 조건으로 탐착이 있다고 말하였다. 아난다여, 욕망을 조건으로 탐착이 있다는 이것은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알아야 한다. 아난다여, 만일 욕망이 어떤 것에 의해서도 어떤 식으로도 그 어디에도 그 누구에게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자. 아난다여, 욕망이 소멸하여 버려 욕망이 어떤 식으로도 전혀 존재하지 않는데도 탐착을 천명할 수 있겠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아난다여, 그러므로 이것이 바로 탐착의 원인이고, 근원이고, 기원이고, 조건이니, 그것은 다름 아닌 욕망이다."
15. "판별을 조건으로 욕망이 있다고 말하였다. 아난다여, 판별을 조건으로 욕망이 있다는 이것은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알아야 한다. 아난다여, 만일 판별이 어떤 것에 의해서도 어떤 식으로도 그 어디에도 그 누구에게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자. 아난다여, 판별이 소멸하여 버려 판별이 어떤 식으로도 전혀 존재하지 않는데도 욕망을 천명할 수 있겠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아난다여, 그러므로 이것이 바로 욕망의 원인이고, 근원이고, 기원이고, 조건이니, 그것은 다름 아닌 판별이다."
16. "얻음을 조건으로 판별이 있다고 말하였다. 아난다여, 얻음을 조건으로 판별이 있다는 이것은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알아야 한다. 아난다여, 만일 얻음이 어떤 것에 의해서도 어떤 식으로도 그 어디에도 그 누구에게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자. 아난다여, 얻음이 소멸하여 버려 얻음이 어떤 식으로도 전혀 존재하지 않는데도 판별을 천명할 수 있겠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아난다여, 그러므로 이것이 바로 판별의 원인이고, 근원이고, 기원이고, 조건이니, 그것은 다름 아닌 얻음이다."
17. "추구[15]를 조건으로 얻음이 있다고 말하였다. 아난다여, 추구를 조건으로 얻음이 있다는 이것은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알아야 한다. 아난다여, 만일 추구가 어떤 것에 의해서도 어떤 식으로도 그 어디에도 그 누구에게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자. 아난다여, 추구가 소멸하여 버려 추구가 어떤 식으로도 전혀 존재하지 않는데도 얻음을 천명할 수 있겠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아난다여, 그러므로 이것이 바로 얻음의 원인이고, 근원이고, 기원이고, 조건이니, 그것은 다름 아닌 추구다."[15] “추구란 형상 등의 대상을 탐구하는 것이니 갈애가 있을 때 추구가 있다.”
18. "갈애[16]를 조건으로 추구가 있다고 말하였다. 아난다여, 갈애를 조건으로 추구가 있다는 이것은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알아야 한다. 아난다여, 만일 갈애가 어떤 것에 의해서도 어떤 식으로도 그 어디에도 그 누구에게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자. 아난다여, 갈애가 소멸하여 버려 갈애가 어떤 식으로도 전혀 존재하지 않는데도 추구를 천명할 수 있겠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아난다여, 그러므로 이것이 바로 추구의 원인이고, 근원이고, 기원이고, 조건이니, 그것은 다름 아닌 갈애다. 아난다여, 이와 같이 두 가지 법들[17]이 이처럼 두 가지 부분으로 느낌에 의해서 하나가 된다.[18][16] “갈애는 추구하는 갈애와 추구된 갈애의 두 가지가 있다. 그 갈애 때문에 양들이 다니는 길과 갈고리를 사용해야만 하는 험난한 길 등을 다니면서 즐길 거리를 찾고 구하는 것을 ‘추구하는 갈애’라 한다. 찾았고 구했고 획득한 것들에 대한 갈애가 ‘추구된 갈애’이다. 이 두 가지도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갈애의 [모습]이다. 그러므로 느낌을 조건으로 이러한 두 가지 갈애가 있게 된다.”[17] 여기서 두 가지 법들이란 윤회의 뿌리가 되는 갈애와 바로 위 주해에서 설명한 벌어지고 있는 갈애를 뜻한다.[18] 윤회의 뿌리가 되는 갈애와 현실에서 벌어지는 갈애, 둘 모두 여섯 감각장소에서 기인한 느낌을 조건으로 생긴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두 가지 갈애는 느낌이라는 하나의 조건을 가진다.
19. "감각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있다라고 말하였다. 아난다여, 감각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있다는 이것은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알아야 한다. 아난다여, 만일 형상에 대한 감각접촉, 소리에 대한 감각접촉, 냄새에 대한 감각접촉, 맛에 대한 감각접촉, 감촉에 대한 감각접촉, 법에 대한 감각접촉(오), 이러한 감각접촉이 어떤 것에 의해서도 어떤 식으로도 그 어디에도 그 누구에게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자. 아난다여, 감각접촉이 소멸해버려 감각접촉이 어떤 식으로도 전혀 존재하지 않는데도 느낌을 천명할 수 있겠는가?""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아난다여, 그러므로 이것이 바로 느낌의 원인이고, 근원이고, 기원이고, 조건이니, 그것은 다름 아닌 감각접촉이다."
‘Phassapaccayā vedanā’ti iti kho panetaṃ vuttaṃ, tadānanda, imināpetaṃ pariyāyena veditabbaṃ, yathā phassapaccayā vedanā. Phasso ca hi, ānanda, nābhavissa sabbena sabbaṃ sabbathā sabbaṃ kassaci kimhici, seyyathidaṃ— cakkhusamphasso sotasamphasso ghānasamphasso jivhāsamphasso kāyasamphasso manosamphasso, sabbaso phasse asati phassanirodhā api nu kho vedanā paññāyethā”ti? “No hetaṃ, bhante”. “Tasmātihānanda, eseva hetu etaṃ nidānaṃ esa samudayo esa paccayo vedanāya, yadidaṃ phasso.
20. 정신 · 물질을 조건으로 감각접촉이 있다고 말하였다. 아난다여, 정신 · 물질을 조건으로 감각접촉이 있다는 이것은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알아야 한다. 아난다여, 여기 [느낌, 인식, 상카라들, 알음알이의] 각각의 성질들이나 특징들이나 표상들이나 개요들에 의해서 정신의 뿌리라는 개념이 생긴다. 그러나 만약 이런 각각의 성질들이나 특징들이나 표상들이나 개요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물질의 무리에서 이름 붙이기를 통해 생기는 정신의 감각접촉을 천명할 수 있겠는가?""없습니다, 세존이시여."
‘Nāmarūpapaccayā phasso’ti iti kho panetaṃ vuttaṃ, tadānanda, imināpetaṃ pariyāyena veditabbaṃ, yathā nāmarūpapaccayā phasso. Yehi, ānanda, ākārehi yehi liṅgehi yehi nimittehi yehi uddesehi nāmakāyassa paññatti hoti, tesu ākāresu tesu liṅgesu tesu nimittesu tesu uddesesu asati api nu kho rūpakāye adhivacanasamphasso paññāyethā”ti? “No hetaṃ, bhante”.
"아난다여, 여기 각각의 성질들이나 특징들이나 표상들이나 개요들에 의해서 물질의 무리라는 개념이 생긴다. 그러나 만약 이런 각각의 성질들이나 특징들이나 표상들이나 개요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정신의 무리에서 부딪힘을 통해 생기는 [물질의] 감각접촉을 천명할 수 있겠는가?"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아난다여, 여기 성질들이나 특징들이나 표상들이나 개요들에 의해서 정신의 무리와 물질의 무리라는 개념이 생긴다. 그러나 만약 이런 고유성질들이나 특징들이나 표상들이나 개요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름 짓기로 얻어지는 [정신의] 감각접촉이나 부딪힘으로 얻어지는 [물질의] 감각접촉을 천명할 수 있겠는가?"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아난다여, 여기 각각의 성질들이나 특징들이나 표상들이나 개요들에 의해서 정신 · 물질이라는 개념이 생긴다. 그러나 만약 이런 각각의 성질들이나 특징들이나 표상들이나 개요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감각접촉을 천명할 수 있겠는가?"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아난다여, 그러므로 이것이 바로 감각접촉의 원인이고, 근원이고, 기원이고, 조건이니, 그것은 다름 아닌 정신 · 물질이다."
21. "알음알이를 조건으로 정신 · 물질이 있다고 말하였다. 아난다여, 알음알이를 조건으로 정신 · 물질이 있다는 이것은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알아야 한다. 아난다여, 만일 알음알이가 모태에 들지 않았는데도 정신 · 물질이 모태에서 발전하겠는가?"
‘Viññāṇapaccayā nāmarūpan’ti iti kho panetaṃ vuttaṃ, tadānanda, imināpetaṃ pariyāyena veditabbaṃ, yathā viññāṇapaccayā nāmarūpaṃ. Viññāṇañca hi, ānanda, mātukucchismiṃ na okkamissatha, api nu kho nāmarūpaṃ mātukucchismiṃ samuccissathā”ti?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아난다여, 알음알이가 모태에 들어간 뒤 잘못되어버렸는데도 정신 · 물질이 [오온을 구비한] 그러한 상태를 생기게 하겠는가?""아닙니다, 세존이시여."
“No hetaṃ, bhante”. “Viññāṇañca hi, ānanda, mātukucchismiṃ okkamitvā vokkamissatha, api nu kho nāmarūpaṃ itthattāya abhinibbattissathā”ti? “No hetaṃ, bhante”. “Viññāṇañca hi, ānanda, daharasseva sato vocchijjissatha kumārakassa vā kumārikāya vā, api nu kho nāmarūpaṃ vuddhiṃ virūḷhiṃ vepullaṃ āpajjissathā”ti?
"아난다여, 알음알이가 동자나 동녀와 같은 어린아이일 때 잘못되어버렸는데도 정신 · 물질이 향상하고 증장하고 번창하겠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아난다여, 그러므로 이것이 바로 정신 · 물질의 원인이고, 근원이고, 기원이고, 조건이니, 그것은 다름 아닌 알음알이이다."
“No hetaṃ, bhante”. “Tasmātihānanda, eseva hetu etaṃ nidānaṃ esa samudayo esa paccayo nāmarūpassa—yadidaṃ viññāṇaṃ.
22. "정신 · 물질을 조건으로 알음알이가 있다고 말하였다. 아난다여, 정신 · 물질을 조건으로 알음알이가 있다는 이것은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알아야 한다. 아난다여, 만일 알음알이가 정신 · 물질에 확립됨을 얻지 못하였는데도 미래에 태어남과 늙음 · 죽음과 괴로움의 일어남이 생긴다고 천명할 수 있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아난다여, 그러므로 이것이 바로 알음알이의 원인이고, 근원이고, 기원이고, 조건이니, 그것은 다름 아닌 정신 · 물질이다. 아난다여, 이와 같이 하여 태어나고, 늙고, 죽고, 죽어서는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이러한 [알음알이와 정신 · 물질의 상호 조건]에 의해 이름짓는 토대가 생기고, 어원에 입각한 언어의 토대가 생기고, 개념을 얻는 토대가 생기고, 통찰자의 영역이 생기며, 이 알음알이와 정신 · 물질의 상호 조건에 의해 [윤회는] 전개되는 것이다. 정신 · 물질은 알음알이와 더불어 [오온의] 이러한 상태를 천명하기 위한 것이다."
자아를 천명함
23. "아난다여, 그런데 [사람들은] 어떻게 자아[19]라고 천명하는가? 아난다여, ① 물질을 가진 유한한 자아를 천명하면서 '나의 자아는 물질을 가졌고 유한하다.'고 천명한다.
② 물질을 가진 무한한 자아를 천명하면서 '나의 자아는 물질을 가졌고 무한하다.'고 천명한다.
③ 물질을 가지지 않은 유한한 자아를 천명하면서 '나의 자아는 물질을 가지지 않았고 유한하다.'고 천명한다.
④ 물질을 가지지 않은 무한한 자아를 천명하면서'나의 자아는 물질을 가지지 않았고 무한하다.'고 천명한다."[19]
여기서 주의해서 봐야 할 점은 이런 문자 풀처럼 얽히고 설킨 윤회의 전개의 중심에는 바로 ‘자아(atta)’가 있다는 점이다. 선정, 삼매, 신통이 아무리 자유자재하더라도 자아라는 개념을 해체하지 못하는 한 그는 결코 성자가 아니다. 아마 많은 사람들은 ‘자아가 없으면 아무것도 없는 허무주의가 아니냐?’고 회의하고 두려워할지도 모른다. 거기에 대한 대답이 바로 본경의 주제인 연기이다. 자아가 없다는 말은 연기한다는 말이다. 여러 조건들이 서로 일어나고 사라지고 뭉치고 흩어지고 하면서 흘러가는 것이 연기의 실상이다. 이것이 바로 무아다. 그러므로 연기를 꿰뚫지 못하는 한 자아의 개념은 척파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본경에서도 심오한 연기의 가르침의 결론으로 자아개념의 척파를 설하신다. 불교의 관점에서 볼 때 자아란 매 순간 일어나고 사라지는 오온들을 두고 나라거나 내 것이라고 취착한 것이거나 이러한 오온들이 일어나고 사라지면서 서로 부딪혀서 만들어내는 물안개와 물보라와 같은 개념적 존재일 뿐이다.
24. "아난다여, ① 여기서 물질을 가진 유한한 자아를 천명하는 자는 자아는 현생에서 물질을 가지고 유한하다고 천명하거나, 혹은 '비록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다음 생에는] 그러한 상태가 될 것이다.' 라고 생각하면서 내생에 자아는 물질을 가지고 유한하다고 천명한다. 아난다여, 그렇기 때문에 물질을 가진 [자아를 천명하는] 자에게는 이미 유한한 자아라는 견해가 잠재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아난다여, ② 여기서 물질을 가진 무한한 자아를 천명하는 자는 자아는 현생에서 물질을 가지고 무한하다고 천명하건, 혹은 비록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다음 생에는] 그러한 상태가 될 것이다.'라고 생각하면서 내생에 자아는 물질을 가지고 무한하다고 천명한다. 아난다여, 그렇기 때문에 물질을 가진 [자아를 천명하는] 자에게는 이미 무한한 자아라는 견해가 잠재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아난다여, ③ 여기서 물질을 가지지 않은 유한한 자아를 천명하는 자는 현생에서 자아는 물질을 가지지 않지만 유한하다고 천명하거나, 혹은 '비록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다음 생에는] 그러한 상태가 될 것이다.'라고 생각하면서 내생에 자아는 물질을 가지지 않지만 유한하다고 천명한다. 아난다여, 그렇기 때문에 물질을 가기지 않는 [자아를 천명하는] 자에게는 이미 유한한 자아라는 견해가 잠재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아난다여, ④ 여기서 물질을 가지지 않은 무한한 자아를 천명하는 자는 현생에서 그 물질을 가지지 않은 무한한 자아를 천명하거나 '비록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다음 생에는] 그러한 상태가 될 것이다.'라고 하면서 내생에서 물질을 가지지 않은 무한한 자아를 천명한다. 아난다여, 그렇기 때문에 물질을 가지지 않은[자아를 천명하는] 자에게는 이미 무한한 자아라는 견해가 잠재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아난다여, [사람들은] 이렇게 자아를 천명한다."
성자들은 자아를 천명하지 않음
25. "아난다여, 그런데 [성자들은] 어떻게 천명하지 않으면서 자아를 천명하지 않는가? 아난다여, ① 물질을 가진 유한한 자아를 천명하지 않으면서 '나의 자아는 물질을 가졌고 유한하다.'고 천명하지 않는다. 아난다여, ② 물질을 가진 무한한 자아를 천명하지 않으면서 '나의 자아는 물질을 가졌고 무한하다.'고 천명하지 않는다. 아난다여, ③ 물질을 가지지 않은 유한한 자아를 천명하지 않으면서 '나의 자아는 물질을 가지지 않았고 유한하다.'고 천명하지 않는다. 아난다여, ④ 물질을 가지지 않은 무한한 자아를 천명하지 않으면서 '나의 자아는 물질을 가지지 않았고 무한하다.'고 천명하지 않는다."
26. "아난다여, 여기서 물질을 가진 유한한 자아를 천명하지 않는 자는 지금 현재에서 그 물질을 가진 유한한 자아를 천명하지 않거나 '비록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다음 생에는] 그러한 상태가 될 것이다.'라고 하면서 다음 생에는 그러한 상태가 될 것이다.'라고 하면서 다음 생에서 물질을 가진 유한한 자아를 천명하지 않는다. 아난다여, 그렇기 때문에 물질을 가진 [자아를 천명하지 않는] 자에게는 유한한 자아라는 견해가 결코 잠재해 있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아난다여, 여기서 물질을 가진 무한한 자아를 천명하지 않는 자는 지금 현재에서 그 물질을 가진 무한한 자아를 천명하지 않거나 '비록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다음 생에는] 그러한 상태가 될 것이다.'라고 하면서 다음 생에는 그러한 상태가 될 것이다.'라고 하면서 다음 생에서 물질을 가진 무한한 자아를 천명하지 않는다. 아난다여, 그렇기 때문에 물질을 가진 [자아를 천명하지 않는] 자에게는 무한한 자아라는 견해가 결코 잠재해 있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아난다여, 여기서 물질을 가지지 않은 유한한 자아를 천명하지 않는 자는 지금 현재에서 그 물질을 가지지 않은 유한한 자아를 천명하지 않거나 '비록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다음 생에는] 그러한 상태가 될 것이다.'라고 하면서 다음 생에는 그러한 상태가 될 것이다.'라고 하면서 다음 생에서 물질을 가지지 않은 유한한 자아를 천명하지 않는다. 아난다여, 그렇기 때문에 물질을 가지지 않은 [자아를 천명하지 않는] 자에게는 유한한 자아라는 견해가 결코 잠재해 있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아난다여, 여기서 물질을 가지지 않은 무한한 자아를 천명하지 않는 자는 지금 현재에서 그 물질을 가지지 않은 무한한 자아를 천명하지 않거나 '비록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다음 생에는] 그러한 상태가 될 것이다.'라고 하면서 다음 생에는 그러한 상태가 될 것이다.'라고 하면서 다음 생에서 물질을 가지지 않은 무한한 자아를 천명하지 않는다. 아난다여, 그렇기 때문에 물질을 가지지 않은 [자아를 천명 하지 않는] 자에게는 무한한 자아라는 견해가 결코 잠재해 있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 아난다여, [성자들은] 이렇게 천명하지 않으면서 자아를 천명하지 않는다."
사람들의 자아를 관찰함
27. "아난다여, 그런데 [사람들은] 어떻게 관찰하면서 자아를 관찰하는가? 아난다여, 느낌을 관찰하면서 다음과 같이 자아를 관찰한다.
① "느낌은 나의 자아다."
② "느낌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 나의 자아는 느껴지지 않는다."
③ "느낌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 그러나 나의 자아는 느껴지지 않는 것은 아니다. 나의 자아는 느낀다. 나의 자아는 느끼는 성질을 가졌기 때문이다."라고.
아난다여,, [사람들은] 이와 같이 관찰하면서 자아를 관찰한다.
28. "아난다여, 여기서 ① '느낌은 나의 자아다.'라고 말하는 자에게는 이와 같이 말해주어야 한다.
. '도반이여, 세 가지 느낌이 있나니 즐거운 느낌과 괴로운 느낌과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입니다. 이러한 세 가지 느낌들 가운데서 그대는 어떠한 자아를 관찰합니까?'라고.
아난다여, 즐거운 느낌을 느낄 때는 괴로운 느낌을 느끼지 못하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느끼지도 못한다. 그때는 오직 즐거운 느낌만을 느낀다.
아난다여, 괴로운 느낌을 느낄 때는 즐거운 느낌을 느끼지 못하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느끼지 못한다. 그때는 오직 괴로운 느낌만을 느낀다.
아난다여,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는 느낌을 느낄 때는 즐거운 느낌을 느끼지 못하고 괴로운 느낌을 느끼지 못한다. 그때는 오직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만을 느낀다."
29. "아난다여, 즐거운 느낌도 무상하고 형성된 것이며 조건에 의해서 일어난 것이요 부서지기 마
련인 법이며 사라지기 마련인 법이며 빛바래기 마련인 법이며 소멸하기 마련인 법이다.
아난다여, 괴로운 느낌도 무상하고 형성된 것이며 조건에 의해서 일어난 것이요 부서지기 마련인 법이며 사라지기 마련인 법이며 빛바래기 마련인 법이며 소멸하기 마련인 법이다.
아난다여,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도 무상하고 형성된 것이며 조건에 의해서 일어난 것이요 부서지기 마련인 법이며 사라지기 마련인 법이며 빛바래기 마련인 법이며 소멸하기 마련인 법이다. 그러므로 즐거운 느낌을 느끼면서 '이것은 나의 자아다.'라고 하는 자는 누구든지 그 즐거운 느낌이 소멸하면 '나의 자아는 사라져버렸다.'고 해야 한다. 괴로운 느낌을 느끼면서 '이것은 나의 자아다.'라고 하는 자는 누구든지 그 괴로운 느낌이 소멸하면 '나의 자아는 사라져 버렸다.'고 해야한다.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느끼면서 '이것은 나의 자아다.'라고 하는 자는 누구든지 그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 소멸하면 '나의 자아는 사라져버렸다.'고 해야 한다. 이와 같이 '느낌은 나의 자아이다.'라고 말하는 자는 결국 '자아는 현생에서 무상하고, 즐거움과 괴로움이 섞여있고, 일어나고 사라지기 마련인 법이다.'라고 관찰하면서 관찰하는 것이 된다.
아난다여, 그러므로 여기서 '느낌은 나의 자아다.'라고 관찰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30. "아난다여, 여기서 ② '느낌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 나의 자아는 느껴지지 않는다.'라고 말하는 자에게는 이와 같이 말해주어야 한다.
'도반이여, 만약 느낌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면 내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까?' 라고."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아난다여, 그러므로 '느낌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 나의 자아는 느껴지지 않는다.'라고 관찰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31. "아난다여, 여기서 '3)느낌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 그러나 나의 자아는 느껴지지 않는 것은 아니다. 나의 자아는 느낀다. 나의 자아는 느끼는 성질을 가졌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는 자에게는 이와 같이 말해주어야 한다.
'도반이여, 만약 모든 종류의 느낌이 남김없이 전부 소멸해 버린다면 느낌이 소멸해 버렸기 때문에 그 어디서도 느낌은 존재하지 않게 됩니다. 그런데도 내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까?'라고."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아난다여, 그러므로 '느낌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 그러나 나의 자아는 느껴지지 않는 것은 아니다. 나의 자아는 느낀다. 나의 자아는 느끼는 성질을 가졌기 때문이다.'라고 관찰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해탈한 비구의 관찰
32. "아난다여, 비구는 느낌을 자아라고 관찰하지 않으며, 자아는 느껴지지 않는다고도 관찰하지 않으며, 자아는 느끼는 성질을 가졌기 때문에 느낀다고도 관찰하지도 않는다. 그는 이와 같이 관찰하지 않기 때문에 세상에 대해서 어떤 것도 취착(집착(하지 않는다. 취착하지 않으면 갈증내지 않는다. 갈증내지 않으면 스스로 완전히 열반에 든다. '태어남은 다했다. 청정범행은 성취되었다. 할 일은 다 해 마쳤다.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꿰뚫어 안다.
아난다여, 이와 같이 해탈한 마음을 가진 비구에 대해 말하기를 '그는 여래는 사후에 존재한다는 견해를 가졌다'.라고 한다면 그것은 옳지 않다. '그는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견해를 가졌다.'라고 한다면 그것도 옳지 않다. '그는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기도 한다는 견해를 가졌다.'라고 한다면 그것도 옳지 않다. '그는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라는 견해를 가졌다.'라고 한다면 그것도 옳지 않다.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아난다여, 이름과 그것의 토대가 그 어떤 범위까지 미치건, 어원에 입각한 언어와 그것의 토대가 그 어떤 범위까지 미치건, 개념과 그것의 토대가 그 어떤 범위까지 미치건, 통찰지와 그것의 영역이 그 어떤 범위까지 미치건, 윤회의 회전이 그 어떤 범위까지 미치건, 그 모든 것을 비구는 최상의 지혜로 안 뒤 해탈했다. 그러므로 '그 비구는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이러한 견해를 가졌다.'라고 한다면 참으로 옳지 않다."
일곱 가지 알음알이의 거주처와 두 장소로부터 벗어남
33. "아난다여, 참으로[20] 일곱 가지 알음알이의 거주처[21]와 두 가지 장소가 있다. 무엇이 일곱인가?"
① 아난다여, 각자 다른 몸을 가지고 각자 다른 인식을 가지고 [거기에 태어난] 중생들[22]이 있다. 예를 들면 인간들과 어떤 신들과 어떤 악처에 떨어진 자들이다[23]. 이것이 첫 번째 알음알이의 거주처이다.(santananda, satta nanattakaya nanattasannino, seyyathapi manussa, ekacce ca deva, ekacce ca vinipatika. ayam pathama vinnanatthiti.)
② 아난다여, 각자 다른 몸을 가졌지만 모두 같은 인식을 가지고 [태어난] 중생들이 있다. 예를 들면 [여기 이 세상에서] 초선을 닦아서 [죽은 뒤] 범중천에 태어난 신들이다. 이것이 두 번째 알음알이의 거주처이다.(santananda, satta nanattakaya ekattasannino, seyyathapi deva rahmakayikapathamabhinibbatta. ayam dutiya vinnanatthiti)
③ 아난다여, 모두 같은 몸을 가졌지만 각자 다른 인식을 가진 중생들이 있다. 예를 들면 광음천의 신들이다. 이것이 세 번째 알음알이의 거주처이다.(santananda, satta ekattakaya nanattasannino,seyyathapi deva abhassara. ayam tatiya vinnanatthiti)
④ 아난다여, 모두 같은 몸을 가졌고 모두 같은 인식을 가진 중생들이 있다. 예를 들면 변정천의 신들이다. 이것이 네 번째 알음알이의 거주처이다.(santananda, satta ekattakaya ekattasannino, seyyathapi deva subhakinha. ayam catutthi vinnanatthiti)
⑤ 아난다여, 물질에 대한 인식을 완전히 초월하고 부딪힘의 인식을 소멸하고 갖가지 인식을 마음에 잡도리하지 않기 때문에 '무한한 허공'이라고 하면서 공무변처에 도달한 중생들이 있다. 이것이 다섯 번째 알음알이의 거주처이다.(santananda, satta sbbabo rupasannanam samatikkama patighasannanam atthangama nanattasannanam amanasikara ananto akaso'ti akasanancayatanupaga.ayam pancami vinnanatthiti.)
⑥ 아난다여, 공무변처를 완전히 초월하여 '무한한 알음알이'라고 하면서 식무변처에 도달한 중생들이 있다. 이것이 여섯 번째 알음알이의 거주처이다.(santananda, satta sabbaso akasanancayatanam samatikkamma anantam vinnana'nti vinnanancayatanupaga. ayam chatthi vinnanatthiti)
⑦ 아난다여, 일체 식무변처를 완전히 초월하여 '아무 것도 없다.'라고 하면서 무소유처에 도달한 중생들이 있다. 이것이 일곱 번째 알음알이의 거주처이다.(santananda, satta sabbaso vinnanancayatanam samatikkamma natthi kinci'ti akincannayatanupaga. ayam sattami vinnanatthiti.)
그리고 무상유정처가 있고 비상비비상처가 있다(asannasattayatanam nevasannanasannayatanameva dutiyam)."[20] 이제 이 문맥에서 갑자기 알음알이의 거주처와 두 가지 장소, 그리고 팔해탈을 설하시는 이유는 주석서에서는 다음과 같이 들고 있다. ”위[25 ~26에서 네 가지로] 자아를 천명하지 않음을 통해서 지속적으로 가면서 양면해탈을 하게 되고 다시 [27 ~ 32에서 세 가지로 유신견으로서의] 자아를 관찰하지 않음을 통해서 혜해탈을 하게된다. 이러한 [범부인,] 두 부류의 비구들에 대한 벗어남과 그런 [혜해탈과 양면해탈의] 이름을 제대로 보여 주시기 위해서이다.” 복주서에서는 다음과 같이 부연하고 있다.
“'지속적으로 가면서'라는 것은[25 ~ 26에서] 사마타를 닦음에 잘 확립된 뒤에 위빳사나로 인도함과 도로 인도함에 의해서 지속적으로 간다는 [뜻이다.] 양면으로 벗어나기 때문에 양면해탈이라 한다.” 부연해서 설명하자면 아래 34에서 “알음알이의 거주처와 두 가지 장소의 일어남과 사라짐과 달콤함과 위험과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분명하게 알고서 해탈한다. 아난다여, 이를 일러 비구는 통찰지로써 해탈한 자(혜해탈자)라고 한다.”고 나타나듯이 알음알이의 거주처와 두 가지 장소를 통해서는 혜해탈자에 대한 설명과 이름을 드러내고 있으면, 35 이하의 팔해탈과 상수멸을 통해서는 양면해탈자에 대한 설명과 이름을 드러내고 있다. 이처럼 위에서 네 가지 자아(25 ~ 26)와 세 가지를 통한 유신견을 파한 경지(27 ~ 32)가 각각 양면해탈과 혜해탈인데, 이를 더 부연해서 상세하게 설명하기 위해서 이제 알음알이의 거주처와 두 가지 장소와 팔해탈을 설하신다는 것이다.[21] “여기서 알음알이가 머문다(문자적으로는 서있다)고 해서 알음알이의 거주처이다. 알음알이가 [가서] 머무는 곳과 동의어이다.”“알음알이가 [가서] 머무는 곳이란 재생연결식이 지금 [가서] 머물기 때문이다. 뜻으로는 특히 다섯 무더기를 가진 존재의 경우에는 (즉 욕계와 색계의 존재) 색수상행의 네 가지 무더기가 알음알이(識)의 거주처요 네 무더기를 가진 존재의 경우에는 (즉 물질이 없는 무색계의 존재) 수상행의 세 가지 무더기가 알음알이의 거주처라고 알아야 한다.”[22] “여기서 중생들이란 재생연결식으로 설하였다.”즉 아비담바적으로 보면 어떤 곳에 재생연결식이 처음 생기는 것이 그곳에 중생이 태어나는 것이다[23] 주석서에 의하면 여기서 어떤 신들이란 욕계 천상(六欲天)의 신들을 말한다. 주석서에서는 인간들과 여섯 욕계 천상의 신들과 일부 악처 중생들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34. "아난다여, 각자 다른 몸을 가지고 각자 다른 인식을 가진 중생들이 있다. 예를 들면 인간들과 어떤 신들과 어떤 악처에 떨어진 자들이다. 이것이 첫 번째 알음알이의 거주처이다. 그런데 이러한 첫 번째 알음알이의 거주처를 꿰뚫어 알고 그것의 일어남을 꿰뚫어 알고 그것의 사라짐을 꿰뚫어 알고 그것의 달콤함을 꿰뚫어 알고 그것의 위험을 꿰뚫어 알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남을 꿰뚫어 아는 자가 그것을 기뻐하는 것이 타당하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아난다여, 각자 다른 몸을 가졌지만 모두 같은 인식을 가진 중생들이 있다. 예를 들면 [여기 이 세상에서] 초선을 닦아서 죽은 뒤 태어난 범중천의 신들이다. 이것이 두 번째 알음알이의 거주처이다. 그런데 이러한 두 번째 알음알이의 거주처를 꿰뚫어 알고 그것의 일어남을 꿰뚫어 알고 그것의 사라짐을 꿰뚫어 알고 그것의 달콤함을 꿰뚫어 알고 그것의 위험을 꿰뚫어 알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남을 꿰뚫어 아는 자가 그것을 기뻐하는 것이 타당하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아난다여, 각자 같은 몸을 가졌지만 각자 다른 인식을 가진 중생들이 있다. 예를 들면 광음천의 신들이다. 이것이 세 번째 알음알이의 거주처이다. 그런데 이러한 세 번째 알음알이의 거주처를 꿰뚫어 알고 그것의 일어남을 꿰뚫어 알고 그것의 사라짐을 꿰뚫어 알고 그것의 달콤함을 꿰뚫어 알고 그것의 위험을 꿰뚫어 알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남을 꿰뚫어 아는 자가 그것을 기뻐하는 것이 타당하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아난다여, 모두 같은 몸을 가졌고 모두 같은 인식을 가진 중생들이 있다. 예를 들면 변정천의 신들이다. 이것이 네 번째 알음알이의 거주처이다. 그런데 이러한 네 번째 알음알이의 거주처를 꿰뚫어 알고 그것의 일어남을 꿰뚫어 알고 그것의 사라짐을 꿰뚫어 알고 그것의 달콤함을 꿰뚫어 알고 그것의 위험을 꿰뚫어 알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남을 꿰뚫어 아는 자가 그것을 기뻐하는 것이 타당하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아난다여, 물질(色)에 대한 인식(산냐)를 완전히 초월하고, 부닫힘의 인식을 소멸하고, 갖가지 인식을 마음에 새겨두지(잡도리하지) 않기 때문 '무한한 허공'이라고 하면서 공무변처에 도달한 중생들이 있다. 이것이 다섯번째 알음알이의 거주처이다. 그런데 이러한 다섯번째 알음알이의 거주처를 꿰뚫어 알고 그것의 일어남을 꿰뚫어 알고 그것의 사라짐을 꿰뚫어 알고 그것의 달콤함을 꿰뚫어 알고 그것의 위험을 꿰뚫어 알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남을 꿰뚫어 아는 자가 그것을 기뻐하는 것이 타당하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아난다여, 공무변처를 완전히 초월하여 '무한한 알음알이(識)'라고 하면서 식무변처(識無邊處)에 도달한 중생들이 있다. 이것이 여섯 번째 알음알이의 거주처이다. 그런데 이러한 여섯 번째 알음알이의 거주처를 꿰뚫어 알고 그것의 일어남을 꿰뚫어 알고 그것의 사라짐을 꿰뚫어 알고 그것의 달콤함을 꿰뚫어 알고 그것의 위험을 꿰뚫어 알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남을 꿰뚫어 아는 자가 그것을 기뻐하는 것이 타당하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아난다여, 일체 식무변처를 완전히 초월하여 '아무것도 없다'라고 하면서 무소유처(無所有處)에 도달한 중생들이 있다. 이것이 일곱 번째 알음알이의 거주처이다. 그런데 이러한 일곱 번째 알음알이의 거주처를 꿰뚫어 알고 그것의 일어남을 꿰뚫어 알고 그것의 사라짐을 꿰뚫어 알고 그것의 달콤함을 꿰뚫어 알고 그것의 위험을 꿰뚫어 알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남을 꿰뚫어 아는 자가 그것을 기뻐하는 것이 타당하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아난다여, 무상유정처를 꿰뚫어 알고 그것의 일어남을 알고 그것의 사라짐을 꿰뚫어 알고 그것의 달콤함을 꿰뚫어 알고 그것의 위험을 꿰뚫어 알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남을 꿰뚫어 아는 자가 그것을 기뻐하는 것이 타당하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아난다여, 비상비비상처를 꿰뚫어 알고 그것의 일어남을 알고 그것의 사라짐을 꿰뚫어 알고 그것의 달콤함을 꿰뚫어 알고 그것의 위험을 꿰뚫어 알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남을 꿰뚫어 아는 자가 그것을 기뻐하는 것이 타당하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아난다여, 비구는 일곱 가지 알음알이의 거주처(識處)와 두 가지 장소(處)의 일어남과 사라짐과 달콤함과 위험과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분명하게 알고서 해탈했다. 아난다여, 이를 일러 비구는 통찰지로써 해탈한 자(慧解脫. 혜해탈)라고 한다."
* 여기서 알음알이와 거주처와 두 가지 장소 그리고 여덟가지 해탈을 설하시는 이유를 주석서는 다음과 같이 풀이하고 있다. 25-26에서 네 가지 자아천명 즉1) 물질을 가진 유한한 자아2) 물질은 가진 무하한 자아3) 물질을 가지지 않은 유한한 자아4) 물질을 가지지 않은 무한한 자아를 천명하지 않음을 통해서 지속적으로 가면서 양면해탈을 하게 되고 27-32에서 세 가지 즉1) 느낌은 나의 자아다 2) 느낌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 나의 자아는 느끼지 않는다 3) 느낌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 나의 자아는 느끼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나의 자아는 느낀다. 나의 자아는 느끼는 성질을 가졌기 때문이다. 로 관찰하지 않음을통해서 혜해탈을 하게 된다. 이러한 두 부류의 비구들에 대한 벗어남과 혜해탈과 양면해탈의 이름을 제대로 보여주기 위해서이다(DA.ii.508)
* 알음알이가 머무는 곳
알음알이가 머무는 곳이란 재생연결의식이 지금(가서) 머물기 때문이다. 뜻으로는 특히 다섯 무더기를 가진 존재의 경우(즉 욕계와 색계의 존재)에는 색수상행의 네 가지 무더기가 알음알이의 거주처요, 네 무더기를 가진 존재의 경우(즉 물질이 없는 무색계의 존재)에는 수상행의 세 가지 무더기가 알음알이의 거주처라 알아야 한다(DAT.ii.148-49)
여덟 가지 해탈
35. "아난다여, 참으로 여덟 가지 해탈[24]이 있다. 무엇이 여덟인가?"
① 여기 비구는 [안으로] 색계에 속하는 [선에 들어] 밖으로 물질들을 본다. 이것이 첫 번째 해탈이다.[25] ② 안으로 물질에 대한 인식이 없으면서 밖으로 물질들은 본다. 이것이 두 번째 해탈이다.[26] ③ 깨끗하다(淨)고 확신한다. 이것이 세 번째 해탈이다.
④ 물질에 대한 인식(산냐)을 완전히 초월하고 부딪힘의 인식을 소멸하고 갖가지 인식을 마음에 잡도리하지 않기 때문에 '무한한 허공'이라고 하면서 공무변처를 구족하여 머문다. 이것이 네 번재 해탈이다.
⑤ 공무변처를 완전히 초월하여 '무한한 알음알이'라고 하면서 식무변처를 구족하여 머문다. 이것이 다섯 번째 해탈이다.
⑥ 식무변처를 완전히 초월하여 '아무것도 없다.'라고 하면서 무소유처를 구족하여 머문다. 이것이 여섯 번째 해탈이다.
⑦ 무소유처를 완전히 초월하여 비상비비상처를 구족하여 머문다. 이것이 일곱 번째 해탈이다.
⑧ 일체 비상비비상처를 완전히 초월하여 상수멸(想受滅, 인식과 느낌의 그침)[27]을 구족하여 머문다. 이것이 여덟 번째 해탈이다.
아난다여, 이것이 여덟 가지 해탈이다."[24] “해탈은 무슨 뜻에서 해탈이라 하는가? 벗어남의 뜻에서 해탈이라 한다. 그러면 이 ‘벗어남의 뜻’이란 무엇인가? 반대되는 법들로부터 잘 벗어난다는 뜻이며, 대상을 즐기는 것을 잘 벗어난다는 뜻이다. 아버지의 무릎에서 사지를 늘어뜨리고 잠든 어린아이처럼 거머쥐고 있지 않은 상태로 어떠한 의심도 없이 대상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설하신 것이다. 그러니 이 뜻은 맨 마지막의 [여덟 번재] 해탈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처음의 7가지에만 있다.”
“벗어남의 뜻”은 상수멸이라는 이 마지막 [여덟 번째] 해탈에는 없다. 이 [여덟 번째 해탈에는 ] 다만 해탈했음의 뜻만이 적용된다.” 즉 상수멸은 마음과 마음부수 모두가 소멸된 경지이므로 반대되는 법들이니 대상이니 하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이러한 것들로부터 벗어남이라는 해탈의 뜻은 적용되지 않고 오직 해탈했음이라는 근본적인 뜻만이 적용된다는 말이다.[25] ‘색계에 속하는 [禪에 들어] [밖으로] 물질들을 본다’고 옮긴 원어를 직역하면 ‘물질을 가진 자가 물질들을 본다’이다. 주석서에서는 “안으로 머리털 등에서 푸른색의 까시나 등을 통해서 생겨난 색계선들의 물질이 그에게 있다고 해서 물질을 가진 자라 한다.”라고 설명하고 있어서 이와 같이 의역을 하였다. 그리고 계속하기를 “'밖으로 물질들을 본다.’는 것은 밖으로도 푸른색 등의 까시나의 물질들을 禪의 눈으로 본다는 뜻이다. 이것을 통해서 안과 밖의 토대들을 가진 까시나들에서 생긴 禪을 가진 사람의 네 가지 색계선들을 보이신 것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요약하면 이 수행자는 안의 물질을 대상으로 삼아서도 색계선에 들고 밖의 물질을 대상으로 삼아서도 색계선에 든다는 의미이다. 물질을 대상으로 禪을 닦으면 거기서는 반드시 표상이 일어나는데 표상은 근접의 표산 -> 익힌 표상 -> 닮은 표상으로 발전하고, 닮은 표상이 확립될 때 그것을 대상으로 본삼매에 든다. 이것이 [청정도론] 등의 주석서 무헌에서 한결같이 설하는 물질을 대상으로 한 삼매 수행의 과정이다.[26] “’안으로 물질에 대한 인식이 없으면서’ 라는 것은 자신의 머리털 등에서 색계선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렇게 해서 밖으로 준비단계의 수행을 짓고서 밖으로 禪을 일으킨 사람의 색계선들을 보이신 것이다.”즉 안의 물질을 대상으로 삼아서는 삼매에 들지 않고 밖의 물질을 대상으로 삼아서 색계선에 드는 사람을 말한다.[27] 이 경지를 상수멸이라 부르는 이유는 이 경지에서는 인식(想)과 느낌(受)이라는 마음의 상카라들(心行)이 완전히 없어지기(滅) 때문이다(청정도론 XXIII.24). 초기경에서는 거의 예외 없이 상수멸로 나타나는데 아비다마와 주석서 등에서는 니로다사마빳띠(滅盡定)란 용어가 더 많이 나타나고 있다. 상수멸과 멸진정은 동의어이다. 이 상수멸의 경지는 불환과 이상의 성자들만이 체즉할 수 있는 경지이다.
맺는 말
36. "아난다여, 비구는 이 여덟 가지 해탈을 순서대로도 증득하고, 역순으로도 증득하고, 순서대로 와 역순으로도 증득한다. 그리고 그는 원하는 곳마다 원하는 때마다 원하는 만큼 증득하기도 하고 출정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는 모든 번뇌가 다하여 아무 번뇌가 없는 마음의 해탈[心解脫][28]과 통찰지의 해탈[慧解脫 ]을 바로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최상의 지혜로 실현하고 구족하여 머문다. 아난다여, 이를 일러 비구는 양면해탈[29]을 한 자라고 한다. 아난다여, 이 양면해탈과는 다른 더 높고 더 수승한 양면해탈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설하셨다. 아난다 존자는 마음이 흡족해져서 세존의 말씀을 크게 기뻐하였다[28] 네가지 선(禪)을 두루 닦아 그 힘으로 여러 신통지를 얻는 것을 심해탈(心解脫, ceto-vimutti)이라 하고 있고, 통찰지를 통해서만 해탈을 성취하는 것을 혜해탈(慧解脫. panna-vimutti)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 둘을 갖춘 것을 양면해탈(兩面解脫, 이라고 부르고 있다. 심해탈이라고 하지만 마음을 하나로 집중하는[心一境, citta-ekaggata] 삼매만으로는 해탈을 성취할 수 없고 이 경우에도 번뇌를 멸하는 통찰지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여 삼매[定]와 통찰지[慧] 혹은 사마타와 위빳사나의 두(ubhato) 부분(bhaga)을 다 닦아서 성취한 해탈이라 하여 양면해탈이라고 한다.
통찰지가 없이는 해탈이 불가능하고 선정의 힘이 아니면 통찰지가 생길 수 없다는 점은 초기경에서부터 남북방 불교에서 모두 다 강조하고 있다. 한편 사마타와 위빳사나라는 술어는 초기경에서도 거의 대부분 함께 붙어서 나타나며 부처님께서는 이 둘을 부지런히 닦을 것을 강조하셨다. 그래서 중국에서는도 止觀수행이 크게 성행했으며 우리나라에서도 보조국사께서 定慧雙修를 주창하신 것이다.[29] “양면해탈이란 두 부분으로 해탈한 것이니 무색의 증득으로 물질의 무리(色身)로부터 해탈하였고, 도에 의해서 정신의 무리(名身)로부터 해탈하였다는 [뜻이다]. 이 양면해탈은 공무변처 등의 어떤 경지로부터 출정하여(出定) 아라한과를 얻는 것과 불환자가 된 뒤 멸진정으로부터 출정하여 아라한과를 얻는 것으로 모두 다섯 가지가 있다.”
이것이 양면해탈에 대한 주석서의 정리된 설명으로 잘 알려진 것이다. 여기서 보듯이 양면해탈은 반드시 사마타 수행을 통해서 공무변처부터 비상비비상처까지의 4무색정 가운데 하나에 들었다가 출정해서 아라한도를 증득해야 한다. 아라한도 등의 [네 가지] 도는 반드시 위빳사나를 통해야 가능하다. 이렇게 사마타를 통해서 4무색계정 가운데 하나를 증득하고 위빳사나를 통해서 아라한이 되는 것을 양면해탈이라 한다. 그래서 위 33의 첫 번째 주해에서 인용했듯이 “사마타를 닦음에 잘 확립된 뒤에 위빳사나로 인도함과 도로 인도함에 의해서 지속적으로 간다.”라고도 설명하는 것이다.
한편 통찰지의 해탈(慧解脫)은 색계4선 이하를 증득한 뒤 출정하거나 아예 禪의 증득 없이 위빳사나를 통해서 아라한도를 증득하는 것을 말한다..[대인연경]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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