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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불교

"스마트폰과 목탁이 괴로움이다"에 대한 반론

2월 23일 <온라인 불자회>에서 구글 meet로 "스마트폰과 목탁이 괴로움이다"라는 각묵스님의 주장에 대하여 토론을 하였습니다. 도정스님의 사회로  2시간동안 진행하였습니다. 토론을 시작한 이래 가장 많은 16명이 참여하여 2시간동안 공부하였습니다. 사성제에서 보듯이 불교는 괴로움(dukkha)에 대해서 말하는 종교입니다. 관념의 불교에서 현실적인 불교,참여하는 불교, 위로하는 불교,  공감하는 불교, 스스로 점검하는 불교,가되기 위해서 우리는 괴로움(dukkha)에 더 집중해야 할 것입니다.

  

아래 글은 제가 반박한 내용입니다. 혹시  "스마트폰과 목탁이 괴로움이다"라는 주장에 동의 하시는 분은 자신의 입장을  정리하여 올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다음 3월 2일 목요일 오후 9시에는 <대반열반경>를 가지고 공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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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폰과 목탁이 괴로움이다"라는 각묵스님 주장에 대한 반론

 

 

각묵스님은 [초기불전 연구원] 까페와 동영상에서 "목탁도 괴로움이다"라고 주장한다. 

“고성제와 제행개고의 고는 단순한 고통 즉 pain 혹은 괴로운 느낌(苦受)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서양 학자들이나 남방 학자들 가운데는 근원적인 괴로움이라는 의미에서 unsatisfactoriness(불만족성)으로 옮기기도 합니다. 고성제와 일체개고의 dukkha(苦)의 내용은 일체 유위법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물질도 苦라는 것입니다. 저 밖에 객관적으로 존재한다고 여겨지는 물질이 어떻게 고냐, 라는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일상적인 어법에서 고라는 것은 상당히 주관적인 사실을 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성제와 제행개고의 고는 단순한 고통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고 받아 들이셔야 합니다. 이것은 불교의 통찰지가 아니고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다음과 같은 경에서 인간등 유정물에서 둑카(dukkha)를 천명하고 있다. 당연하다. 오직 유정물에서 고의 원인과 고의 소멸과 소멸에 이르는 길을 천명하는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나는 인식과 마음을 더불은(sasaññimhi samanake)  이 한 길 몸뚱이 안에서 세상과 세상의 일어남과 세상의 소멸과 세상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을 천명하노라.”(Api cāhaṃ, āvuso, imasmiṃyeva byāmamatte kaḷevare sasaññimhi samanake lokañca paññāpemi lokasamudayañca lokanirodhañca lokanirodhagāminiñca paṭipadanti) 여기서 세상은 오취온이다. -로히땃사 경(A4:45)-

 

 

"비구들이여, 나는 느낌을 느끼는 자에게(Vediyamānassa)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천명하고, ‘이것이 괴로움의 일어남이다.라고 천명하고,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라고 천명하고,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이다.’라고 천명한다.”(Vediyamānassa kho panāhaṁ, bhikkhave, idaṁ dukkhanti paññapemi, ayaṁ dukkhasamudayoti paññapemi, ayaṁ dukkhanirodhoti paññapemi, ayaṁ dukkhanirodhagāminī paṭipadāti paññapemi)  -외도의 주장 경(A3:61)- 

 

이처럼 여러 경전에서 사성제(dukkha)를 유정물(인간)에게 설한다고 명확하게 말하고있다. 부처님은 "스마트폰과 목탁이 괴로움이다"라고 무정물에게까지 괴로움(dukkha)를 적용하지 않았다. 둑카(dukkha)를 어원적으로 설명하고, 인도철학적으로 설명하는 분들이  "스마트폰과 목탁이 괴로움이다"라고 설명하고 있지만 이러한 설명은 불교를 어렵게 만들고 심지어 비상식적인 종교로 만든다. 

 

부처님은 사성제의 고성제에서 괴로움(dukkha)에 대한 정의를 정확하게 하였다. 

"비구들이여,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란 이와 같다. 태어남도 괴로움이고 늙는 것도 병드는 것도 괴로움이고 죽는 것도 괴로움이고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도 괴로움이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만나는 것도 괴로움이고,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것도 괴로움이고,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도 괴로움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다섯 가지 존재의 집착다발이 모두 괴로움이다."

만약 목탁이 괴로움이라면 목탁은 생로병사를 겪고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만나는 괴로움을 겪어야한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괴로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괴로움을 겪고 있어야한다. 결론적으로 목탁이 다섯 가지 존재의 다발에 집착하여야한다. * 부처님은 취착(upadana)을 감각적 욕망에 대한 취착(kamupadana), 견해에 대한 취착(diṭṭhupadana), 계율과 의식에 대한 취착(silabbatupadana), 자아이론에 대한 취착(attavadupadana)으로 설명한다. 이러한 4가지 취착은 유정물인 사람이 하는 것이다. 목탁이 괴로움이라면 목탁은 4가지 취착을 하여야 한다.  불가능한 일이다.

 

"비구들이여, 괴로움의 발생의 거룩한 진리란 이와 같다. 그것은 바로 쾌락과 탐욕을 갖추고 여기저기에 환희하며 미래의 존재를 일으키는 갈애이다. ,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대한 갈애, 존재에 대한 갈애, 비존재에 대한 갈애이다."

만약 목탁이 괴로움이라면 목탁은 세가지 갈애를 일으켜야한다. 목탁이 갈애를 일으키는 건 불가능하다. 

 

"비구들이여, 괴로움의 소멸의 거룩한 진리란 이와 같다. 그것은 갈애를 남김 없이 사라지게 하고 소멸시키고 포기하고 버려서 집착 없이 해탈하는 것이다."

만약 목탁이 괴로움이라면 스스로 갈애를 남김없이 소멸시키야한다. 

 

"비구들이여,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길의 거룩한 진리란 이와 같다. 그것은 바로 여덟 가지 고귀한 길이다. , 올바른 견해, 올바른 사유, 올바른 언어, 올바른 행위, 올바른 생활, 올바른 정진, 올바른 새김, 올바른 집중이다."

만약 목탁이 괴로움이라면 목탁이 괴로움을 소멸시키기 위해서 스스로 팔정도를 닦아야 한다.사성제와 적용해보면 '목탁은 괴로움이다'라는 명제는 고성제,고집성제,고멸성제,고멸도성제등 어느 하나도 충족시키지 못한다.   

 

부처님은 바드라까경(S42:11)에서 보지도 못하고 만나지도 못한 여자에게 욕망과 탐욕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한다. 보고 만나야 사랑과 갈애가 생겨난다. 애생경(M87)는 "사랑하는 자에게  근심․탄식․육체적 고통․정신적 고통․절망이 일어난다고 말한다."  로히땃사 경(A4:45)과 외도의 주장 경(A3:61)에서는 "인식과 마음을 가진자에게(sasaññimhi samanake), 느낌을 느끼는 자에게(Vediyamānassa) 괴로움과 괴로움의 원인을 설명한다."고 말한다.  “사성제를 풀이나 나무토막 등에 천명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각묵스님은 청정도론의 행고의 설명에서"평온한 느낌가 나머지 삼계에 속하는 상카라들은 일어나고 사라짐에 압박되기 때문에 형성됨에 기인한 괴로움이라 한다(upekkhā vedanā ceva avasesā ca tebhūmakā saṅkhārā udayabbayappaṭipīḷitattā saṅkhāradukkhaṃ)라는 문장에서 "나머지 삼계에 속하는 상카라들(avasesā ca tebhūmakā saṅkhārā)을 삼라만상이라고 이해했기에 목탁이 괴로움이라고 주장한다. 이 부분은 고성제에 대한 설명인데 부처님이 괴로움(dukkha)을 말씀하신 것은 괴로움(dukkha)에서 해탈과 해탈에 이르는 길을 말하기 위해서다. 괴로움(dukha)의 의미는 사성제에 이미 명확하게 정의되어 있다.  주석서에서도 일체(sabbe savkhara,一切)는 오온(pañcakkhandha)을 의미한다고 설명한다.(sabbe saṅkhārāti pañcakkhandhā ) 경전에서 무생물에게 괴로움(dukkha)이 있다는 표현은 한번도 찾을 수 없다.

 

부처님은 지금여기서 일어나는 현상, 괴로움(dukha)을 설명한다. 괴로움을 소멸시키기 위해 지금여기서 일어나는 들숨날숨, 느낌, 일어난 마음을 관찰하라고 가르친다. 불교는 생각, 관념, 이미지가 아닌 지금여기서 일어나는 현상을 관찰하는 종교이기에 부처님이나 불교를 믿으라!,따르라!고 말하지 않는다. 관념적인 용어, 추상적인 단어를 사용하는 종교는 필연적으로 믿음을 강조하게 되어있다. 신,천당,원죄,창조등은 지금 눈에 보이거나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불교를 믿음의 영역으로 떨어뜨리고 "목탁이 괴로움이다"라고 말하며 "이것은 불교의 통찰지가 아니고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가르침”이라고 변명해서는 안된다. 괴로움(dukha)은 부처님이 정의 하신 경에서 찾아야하고 지금여기에서 느껴야한다.

 

du+kha라고 어원을 분석하거나 인도철학에서 내려오는 괴로움(dukkha)의 의미를 가져다 해석하는 것은 현명한 방법이 아니다. 부처님은 괴로움(dukkha)을 비롯해서 많은 단어들의 의미를 재정의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힌두교와 불교는 비록 같은 단어를 사용하지만  내용이 천지차이로 다르다.  이러한 점을 간과하고 "목탁도 괴로움(dukkha)이다" "무생물도 괴로움(dukkha)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탁월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훼손하는 일이다. 각묵스님처럼 무생물까지 확대하여 '목탁도 괴로움'이라고 설명하면 고성제는 설명하겠지만 고집성제와 고멸성제와 고멸도성제는 설명할 수 없다. 목탁도 괴로움이라면 불교의 목표인 이고득락(離苦得樂)이라는 것도 거짓이되고 중생의 이익과 안락을 위해서 떠나라는 전도선언도 허언이 된다.  ()

 

 

동영상 보기:  https://www.youtube.com/watch?v=EnhwfBbtle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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