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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단개혁

‘선원일기’를 읽고

 

선원일기를 읽고

 

 

 

지범스님의 선원일기를 읽었다. 선원(禪院)이라는 공간이 신비감을 자아내고 일기(日記)라는 단어가 주는 은밀함이 호기심을 자극한다. 그렇다해도 나는 이 책을 구입하지 않았다. 개심사를 방문한 사유수출판사 대표님으로부터 이 책을 선물 받은 후겨우 읽었다. 쉽게 읽히는 책이다. 40여년동안 화두를 들고 애써 온 수행자의 내면이 청량한 바람처럼 지나갔다. 지범스님처럼 정직하고 밀도있게 자기의 인생을 살아내지 못한 사람은 쓸 수 없는 책이다. 몸으로 쓴 책이다. 번득이는 선문답, 기이한 수행체험이 없어도 좋다. 아니 그런 내용이 없어서 오히려 좋다.

 

 

 

세련된 말이나 글이 아닌 거칠고 낡은 무명적삼 같은 수좌의 글이다. 생로병사라는 백척간두에서 자신을 온전히 내 던지고 있는 수행자에게 무슨 말이 필요할까? 대저 사람은 밥 먹고 차 마시는 모습만으로도 넉넉히 자신의 전부를 드러내는 법이다. 그런면에서 결제 해제 때마다 발표되는 선지식들의 법어에 사람들은 관심이 없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다. 방장을 투표로 선출하고 종이에 써진 글을 읽느라 대중과 눈을 맞추지도 못하는데 나머지는 말해서 무엇하랴. 너의 말을 들려 주기전에 너의 생()을 보여달라는 것이 시대의 요구다. ()과 방()을 보여주기 전에 한 인간으로서 겸손함과 정직함을 보여주어야 했다.

 

 

 

요즈음은 누구에게 인가를 받았다고 해서 솔깃하지 않다. 인가를 받는 사람 보다도 근본적으로 인가를 해주는 사람들이 신뢰를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최근에 지리산 정각사에서 생을 마감한 대현스님의 입적소식은 선지식의 법어를 능가한다. 이름없는 뒷방의 노스님이었지만 죽는 마지막 순간까지 굶어 가면서 알아차림을 놓치지 않았던 모습은 잔잔한 감동을 선사한다. 사람들은 수행자들에게 결과 보다는 태도, 속일 수 없는 눈빛, 그런것을 요구한다.

 

 

 

개인의 치열한 선원생활에 대한 기록임에도 불구하고 선원일기에서 아쉬운 점이 있다. 대한민국 안에서 불교가 처한 상황, 비상식적인 승가의 운영에 대한 책임, 불자들의 시대적인 의무에 대한 고민을 보여주지 못한 점이다. 선지식을 찾아가지도 않는 수행자들, 막상 찾아가도 제대로 지도해주지 못하는 선지식들, 맑게 살아온 수좌스님들이 공양금이 부담되어 방부 들이기가 어려운 상황은 누가 만들어 놓은 것인가? 사찰에 객실이 없어져서 스님들이 갈 곳이 없고, 승가공동체를 무너져 주지는 사업주가 되고 나머지 스님들은 종업원이 된 것이 단지 자본주의 탓이고 시대 탓일까? 후학들을 지도해줄 실력도 없고 자세도 못 갖춘 스님들이 방장 조실 노릇을 하도록 방치한 것이 선원의 수좌스님들이 아닌가? 수좌스님만의 안위를 걱정하여 수좌복지회를 만들어 놓아서 결과적으로 어린 사미스님들과 학인스님들을 소외 시키고 있는 것이 수좌스님들이 아니었던가?

 

 

 

초근에 불자 300만명이 떠나고 초기불교 티벳불교등의 다양한 불교사상이 유입되어 대립하고, 다양한 수행법의 등장으로 젊은 출가자들이 혼란스러워하는 현실적인 고민이 보이지 않는다. 승가에서 시주물이 평등하게 분배되지 않고 대중공의로 사찰이 운영되지 않고 만장일치나 다수결의 전통이 무너지고 있는 것에 대한 고민이 보이지 않는다. 종정스님이 자신의 석상을 해운정사 도량에 만들어 놓고 다례를 지내고, 사십이장경을 잘못 해석하여 '부처님위에 무심도인이 있다'고 선언해도 '그러시면 안됩니다'라고 따지는 수좌스님이 없다. 지혜는 있지만 정의(正義)롭지 않고 자비는 있지만 공심(公心)이 없는 반쪽짜리 수행자들이 많아졌다. 순간 순간의 삶에서 '이건 아니다'라고 브레이크를 밟지 못하고 고정관념에 갖힌 자들의 자업자득이요 사필귀정이다.  종헌종법으로 종단이 운영되고 선원의 살림이 결정되고 있는데도 종헌종법은 곳곳한 수행자가 들여다 볼 책이 아니라고 외면한 결과다. 승가의 운영은 사판들의 헛짓꺼리라고 욕하며 돌아 앉은 결과다. 

 

 

상황이 이러함에도 선원일기에서 ‘희망이 있다’고 주문처럼 말하고 있는 것에 동의하기 어렵다. 이 책에서 말하는 희망이 희망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희망이 있으면 좋겠다는 의도만으로 희망이 생겨나지 않는다. 경전과 선어록과 종헌종법과 청규가 다르지 않음을 모른다면 여전히 희망은 없다. '승가에 귀의'해야하는 것을 '스님들께 귀의'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면 희망은 없다. 고려시대의 전통, 조선시대의 전통을 부여잡고 있으면서 부처님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다면 희망은 없다. 전통을 고집하지 않고 솔직해지는 곳에서 우리는 만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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