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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불교

안거로 보는 부처님의 45년 +아소까 연대기

지도 India.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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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도에서 만꿀라 언덕(Mankula Pabbata) 숭수마라기라(Sumsumaragira), 짤리야 바위산(Cālikapabbata)등을 찾을 수 있습니다.

 

"세존이시여, 강가, 야무나, 아찌라와띠, 사라부, 마히와 같은 큰 강들이 큰 바다에 이르면 이전의 이름과 성을 버리고 큰 바다라는 이름을 가지게 됩니다."

 

 

 45년이라는 긴 교화기간 동안, 부처님은 인도의 북부지방을 널리 편력하셨다. 그러나 우기(雨期)의 안거철에는 대개 한 곳에 머무셨다. 다음은 부처님이 안거하신 지역들을 경전에서 간추린 것이다.

 

첫 번째 안거 : 베나레스(Benares)의 이시빠따나(Isipatana) 사슴동산.

두 번째 ~ 네 번째 안거 : 라자가하(Rajagaha, 왕사성).

다섯번째 안거 :웨살리(Vesali), 대원림(大園林)의 중각강당(Mahavana-Kutagarasala, 重閣講堂).

여섯 번째 안거 : 만꿀라 언덕(Mankula Pabbata).--( )

일곱 번째 안거 : 천상의 삼십삼천(도리천,Tavatimsa 忉利天).

여덟 번째 안거 : 숭수마라기라(Sumsumaragira)의 베사깔라 숲(Bhesakalavana).

아홉 번째 안거 : 왐사의 꼬삼비 (Kosambi).

열 번째 안거 : 꼬삼비 옆에 있는 빠릴레이야까(Parileyyaka) .

열한 번째 안거 : 날라(Nala) 도시의 바라문 마을(지금의 날란다).

열두 번째 안거 : 웨란자(Veranja) 마을.

열세 번째 안거 : 짤리야 바위산(Caliya Pabbata, Cālikapabbata )

열네 번째 안거 : 사왓티(Savatthi)의 제따와나(Jetavana)

열다섯 번째 안거 : 까삘라왓투(Kapilavatthu)

열여섯 번째 안거 : 알라위(Alavi) 도시

열일곱 번째 안거 : 라자가하(Rajagaha) 도시

열여덟 번째 ~ 열아홉 번째 안거 : 짤리야 바위산(Caliya Pabbata, Cālikapabbata)

스무 번째 안거 : 라자가하(Rajagaha) 도시

스물한 번째 ~ 마흔세 번째 안거 : 18번은 사왓티(Savatthi, 사위성)

제따와나(Jetavana) 동산에서 안거를 나셨고,5번은 동원 녹자모강당(Pubbarama Migaramatu-pasada, 東園 鹿子母講 堂)에서 지내셨다

마흔네 번째 안거 : 웨살리 주변의 벨루와(Beluva, 竹林)마을

마흔다섯 번째 안거를 지내기 전인 음력 사월 보름날 꾸시나라(Kusinara)에서 완전한 열반에 드셨다.

 

 

 

 

 

첫해 :35세 바라나시(녹야원) - 7월 보름에 꼰단냐(Kondabba), 왑빠(Vappa), 밧디야(Bhaddiya), 마하나마(Mahanama), 앗사지(Assaji) 5명의 수행자들에게  전법륜경을 설하자 최초로 꼰단냐가 예류과를 얻었다. 나머지 4명도 차례로 수다원과를 얻어 비구계를 받으므로서 승단이 탄생했다. 5일 뒤 무아경(S22.59)을 설하자 모두 아라한이 되었다. 야사와 그의 부모님이 귀의하여 최초로 삼귀의한 재가신자가 생겼다. 야사의 친구들도 귀의하여 61명의 아라한이 생겼을때 전도선언을 하셨다. 이때는 안거라는 형식이 제정되지 않았다. 멀리 전도를 떠난 아라한 제자들이 전도한 제자들을 데리고 구족계를 받기 위해 녹야원에 계신 부처님을 찾아왔는데 부처님은 삼귀의를 통해서 제자들 스스로가 구족계를 줄수 있도록 하였다. 첫 우기를 녹야원에서 보내고 부처님은 가섭삼형제가 살고 있는우루웰라로 가셨다. 우루웰라로 가다가 30명의 밧다왓기들을 만나 모두를 출가 시켰는데 나중에 그들은 아라한이 되었다. 

 

 

2, 3, 4년째(36-38세) : 라자가하[王舍城]의 웰루와나[竹林精舍] -부처님이 우루웰라로 돌아오시어 우루웰라가섭, 나디가섭, 가야가섭등 가섭삼형제를 제도하고 1000명의 제자들에게 가야산에서 연소경을 설하여 모두 아라한이 되게 함. 빔비사라왕과 약속을 지키려고 천명의 제자들과 라자가하로 행진 하다가 제티얀(Suppatittha)에서 마중나온 빔비사라 왕과 만났다. 이때 12만 명의 귀족들과 같이 왔는데 붓다의 차제설법을 듣고 11만 명이 수다원과를 성취하였고 나머지 만 명도 삼보에 귀의하였다. 붓다는 라자가하에서 공양을 하고 죽림정사(웰루와나)를 기증 받음.

사리뿟다와 목건련을 비롯한 250명이 출가하여 아라한이 됨. 마하가섭귀의. 

음력 1월 15일 사리뿟따가 아라한과를 성취한 날 웰루와나에서 제자들의 대집 회(Dhammãbhisamaya)

가 열렸다. 


이 대집회에는 네 가지 조건이 있다 1. 그곳에 모인 비구 모두가 에히 빅쿠(ehibhikkhu) 아라한 이어야 한다. (‘에히 빅쿠’라는 말은 ‘오라 비구여 !’라는 한마디로 비구계를 받은 사람이 다.) 2. 비구들이 모두 육신통을 갖추어야 한다. 3.비구들이 모두 초대받지 않고 스스로 모인 대중이어야 한다. 4. 그날이 보름날 포살하는 날이어야 한다.

 

부처님 아버지 숫도다나 대왕의 요청으로 고향 까빨라핫투 를 방문한 시기는 죽림정사에서 2년째(37세) 안거를 나기 전에 일어난 일이다. 이때 처음으로 고향 까삘라왓투를 방문하시는데 붓다는 2만 명의 비구들과 함께 하루 1요자나씩 걸어서 2달 동안 여행한 끝에 까빨라왓투에 도착했다. 사끼야족의 친척들이 모두 모여 붓다를 환영 했지만 그들은 자존심이 강해서 붓다에게 예배를 올리지 않았다. 붓다는 고향사람들의 거만함을 조복하기 위하여 니그로다 숲에서 '쌍신변'을 보여 사끼야족의 자만심을 조복시켰다. 이때 이복동생 난다와 아들 라훌라(8살)를 출가 시켜서 숫도나도왕이 어린아이의 출가는 부모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고 부탁하였다. 라자가하로 돌아가던 중 사끼야 왕자들 밧디야, 아누룻다,아난다, 바구, 낌빌라, 데와닷따와 이발사 우빨리가 부처님을 뒤따라와서 말라국의 아누삐야 망고 숲에서 만나 출가하게 하였다. 

 

유명한 재가 후원자 수닷따 장자가 부처님께 귀의한 것은 이 3년째(38세) 되던 해의 일이다. 그는 자선가로 유명해 아나타삔디까 즉 ‘의지할 곳 없는 사람들을 돌봐 주는 분’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었다. 꼬살라국의 사와티[舍衛城] 사람인 그는 마가다국의 라자가하에 왔다가 부처님이 출현하셨다는 얘기를 듣고 시따완나(시타림)찾아가 부처님을 친견하고 법문을 들었다. 삼보에 깊은 신심을 발하게 된 그는 그 자리에서 바로 예류과를 성취했다. 그 후 그는 오늘날 사헤트-마헤트로 불리는 사와티(사위성)에 제따와나(祇園精舍)를 지어 부처님과 그 제자들에게 기증했다. 

 

라자가하에 계실때(중각강당이 만들어지기 전이므로 성도후 2년째에서 5년째사이) 웨살리에 가뭄과 질병이 나돌자 그들의 초청으로 웨살리에가서 보배경을 설하였다.불교성전에서는 4년째(39세)라고 말함.

 

다시 까삘라왓투를 방문했을 때(성도후 2년째에서 4년째사이)는 사끼야와 꼴리야족이 로히니강의 물을 가지고 싸우는 것을 중재하였는데 그 덕으로 사끼야족 250명 꼴리야족 250명 총 500명의 젊은이들이 출가하여 500명의 과부들이 생겼다. 불교성전에서는 5년째(40세)라고 말함. 물싸움때는 아버지를 만나지 않고 돌아왔다. 

 

 

 

 

5년째(40세) : 웨살리 - 부처님은 중각강당(重閣講堂)에서 지내셨다. 숫도다나 왕이 이 해에 병이 들었다. 부처님은 부왕(父王)을 찾아가 법을 설해 드렸다. 법문을 들은 왕은 완전한 청정(아라한과)을 얻게 되었고, 일주일 동안 해탈의 즐거움을 누린 후 입적했다. 왕이 죽고나자 마하빠자빠띠왕비는 로히니 물싸움때 생긴 500명의 과부들과 출가하기를 원하였으나 허락치 않으셨다. 부처님이 출가를 허락하지 않고 웨살리로 가시자 마하빠자빠띠 왕비는 삭발하고 500명의 여인들과 같이 찾아가서 아난다의 도움으로 웨살리에 처음으로 비구니승가가 생겼다. 마하빠자빠띠 고따미는 상낏따 경(A8.6.3)을 듣고 아라한이 되었으며,오백 명의 비구니들은 난다꼬와다 경(M146)을 듣고 아라한이 되었다. 

 

 

6년째(41세) : 만꿀라 언덕 - 라자가하 존자 삔돌라바라드와자가 공중으로 날아올라서 발우를 얻었다. 붓다는 장로를 꾸짖으며 신통과 나무발우 사용을 금지시켰다. 외도들은 붓다가 신통을 금지한 것을 기회로 신통을 겨루자고 도전해왔다. 붓다는 그 말을 듣고 4개월 후 사왓티에서 신통을 보이겠다고 선언했고 음력 6월 15일 안거 결재일에 붓다는 사왓티의 깐담바(Kandamba) 망고 니무 아래서 쌍신변(yamakapãtihãriya) 의 기적을 보여주었다.불교성전에서는 6년째(41세)케마왕비가 출가하고 꼬삼비에 3개의 정사가 세워졌다고 말함.라고 말함.

 

 

 

7년째(42세) : 삼십삼천 - 부처님은 생전에 쌍신변의 신통을 4번 보여주셨는데 첫째는 정각 후 대보리수 (Mahãbodhi) 아래에서 천신과 범천의 마음에 일어난 의심을 풀어주기 위해서,둘째 2년째 까삘라왓투(Kapilavatthu)를 방문하여 모인 친족들의 자만심을 꺾기 위해서, 셋째 7년째 사왓티의 깐담바(Kandamba) 망고나무 아래에서 신통을 보기 위해 모인 군중들에게(현재 성지 천불탑으로 순례지가 되고 있음) 기적을 보이고 삼십삼천에 올라가 어머니 마야 부인을 필두로 한 천신들에게 수승한 법인 아비담마를 설하셨다. 이후 상까사로 하강 하셨다. 넷째  웨살리 (Vesali)에서 이교도 빠티까뿟따(Pãthikaputta) 때문에 모인 군중들 앞 에서 쌍신변을 나투었다. 

 

 

붓다가 상깟사에서 제따와나로 돌아와 머물때 이때 찐짜마나위까가 붓다의 아이를 밴 것처럼 연극을 하며 붓다를 모함했다가 산채로 지옥에 떨어졌다. 

이교도들은 다시 순다리를 살해하여 붓다의 명예를 훼손하려 했다가 발각되어 벌을 받았다.  

 

8년째 (43세): 베사깔라 숲 - 부처님이 여기 계실 때 금슬 좋은 나꿀루삐따 부부가 부처님을 친견하고 그들의 행복한 결혼생활이 다음 생에도 이어지기를 발원했다. 부처님은 이 두 사람을 제자들 중 가장 의좋은 사이로 인정하셨다. 

보디왕자는 꼬삼비의 우데나왕과 와술라닷따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었는데 박가국의 총독으로 와 있었다. 수도인 숭수마라기리에 대목수를 시켜 꼬까나다(Kokanada)이라 아름다운 궁전을 지었고, 건물 낙성식에 붓다와 스님들을 초청하여 공양을 올리고 삼보에 귀의했고 그 일화보디 왕자경(M85)에 있다. 

 

 

9년째(44세) : 꼬삼비의 고시따 정사- 마간디야의 모함으로 사마와띠 왕비를 비롯한 시녀 500명이 죽고 꼬삼비 비구들의 분쟁이 있었다.

 

10년째(45세) : 빠아릴레이야까 숲 - 꼬삼비 비구들의 분쟁으로 부처님께서는 숲으로 물러나셨다. 안거가 끝날 무렵 코삼비 시민들의 공양거부로 분쟁은 해결되어 비구들은 사왓티 성으로 와서 부처님께 용서를 빌었다.

 

 

11년째(46세) : 에까날라 마을(마가다 국) -

라자가하에서 멀지 않은 닥킨나기리 지방에 있는 날라 마을에서 까시바라드와자(Kasibharadvaja) 바라문을 만나 “나는 밭을 갈고 씨를 뿌린 후에 식시를 합니다. 당신도 밭을 갈고 씨를 뿌린 후에 식사를 하십시요”라는 말을 듣고

 

“나도 밭을 갈고 씨를 뿌린 뒤에 먹는다" “당신이 밭을 갈고 씨를 뿌리는 것을 보지 못했는데 어떻게 씨를 뿌립니까?" “믿음이 씨고 수행이 비네. 지혜가 쟁기와 멍에 이고 부끄러움이 몰이막대이네. 

마음이 끈이고 마음챙김이 보습이네"(S7.11) (Sn1.4)

1. Nala

A village in Magadha, near the Bodhi tree at Gaya. It was the birthplace of Upaka (Thig.294; ThigA.225). The Buddhavamsa Commentary (p3) speaks of a brahmin village Nala, where the Buddha spent his eleventh rainy season. It was the township of the Upatissas (hence also called Upatissagama), and it was there that Sariputta and other members of his family were born.

 

 

12년째(47세) : 웨란자 마을 - 부처님께서 율을 제정하기 시작하신 것이 이 때 부터다. 웨란자의 마을에서 바라문이 부처님을 친견하고 불자가 되어 부처님과 승단이 웨란자에서 안거를 하도록 청했다. 마침 그 해에 기근이 들어 부처님과 제자들은 말 장수들이 올리는 매우 조악한 음식(말들이 먹는 보리)으로 그 철을 지내야 했다. 바라문은 자신이 부처님과 제자를 청해 놓고도 초청자의 의무를 이행하지 못한 것을 사과한 후 승단에 음식과 옷을 보시했다. 8세에 출가한 라훌라 사미가 이 철에 구족계(비구계)를 받았다. 율장에 따르면 구족계는 20세가 되어야만 받을 수 있는데 라훌라 존자가 그 나이가 된 것이다.

 

 

13년째(48세) : 짤리야 바위산(짤리까 시 부근) - 이 철에는 메기야 장로가 부처님의 시봉을 들었다. 장로는 강가의 아름다운 망고 숲에 마음이 끌려 그곳에 가서 선정을 닦고 싶다고 부처님께 허락을 구했다. 다른 비구가 올 때까지 기다리라고 부처님이 만류 하셨건만 그는 거듭 졸랐다. 마침내 부처님의 허락을 받고 그곳에 갔지만 선정은 커녕 감각적 쾌락, 악의, 해악심 따위에 시달리기만 하다가 실망해서 돌아왔다. 그러자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메기야여! 성숙하지 못한 사람의 마음이 성숙하는 데는 다음의 다섯 가지가 도움이 된다. 

첫째 좋은 벗, 둘째 기본적 계율에 따른 덕 있는 행위, 셋째 이욕, 고요․ 멸진․ 깨달음 그리고 열반으로 이끌어 주는 훌륭한 조언, 넷째 나쁜 생각들을 버리고 선법을 지니려는 노력, 다섯째 오온의 발생과 소멸을 분명히 보는 지혜의 획득이 바로 그것이다.”

 

 

14년째(49세) : 사와티의 제따와나 정사 - 라훌라가 아라한이 되었다.

 

15년째(50세) : 까삘라왓투 -  이 해에 야소다라의 아버지 수빠붓다가 죽었다.

 

16년째(51세) : 알라위 시(市)-이 해에 부처님은 사람 잡아먹기를 즐기는 야차 알라와까를 제도하여 추종자로 만드셨다. 알라와까와의 문답은 『숫따니빠따』의 「알라와까 경」에 자세히 나온다.

 

17년째(52세) : 라자가하의 웰루와나 정사 - 이 철에 유명한 고급 창녀이며, 의사 지와까의 누이동생인 시리마가 죽었다. 장례식에 참석하신 부처님은 왕에게 일러 말씀하시기를 ‘그 시체를 사갈 사람을 찾는 공고를 내어 보라’고 하셨다. 살아있을 때 그토록 사람들을 매혹 시키던 그 몸뚱이. 그러나 누구 하나, 돈은커녕 거저 주어도 그 시신을 가져가려 하지 않았다. 이때 부처님은 북을 쳐서 이 여인을 갖는 자는 화대로 천 냥을 내야 한다고 공지하도록 했으나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화대를 한 냥까지 줄여도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부처님께서는 ‘비구들이여, 바로 이 도시에서 이 여인과 하룻밤을 보내기 위해서 남자들은 수천 까하빠나의 돈을 지불했다. 지금은 그냥 주어도 가져가는 사람이 없다. 이처럼 아름다움은 무상하여 괴멸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라고 이어서 시로써 

 

‘보라 아름답게 꾸며진 영상, 

상처투성이로 세워진 몸, 

고통스럽고 망상으로 찬 것. 

영원하지도 않고 견고하지도 않다

 

Parijiṇṇamidaṃ rūpaṃ,

roganīḷaṃ pabhaṅguraṃ;

Bhijjati pūtisandeho,

maraṇantañhi jīvitaṃ. 법구경148

 

 

18년째(53세) : 짤리야 바위산 - 이 철에 한 직조공의 어린 딸이 부처님을 친견하고, 죽음을 염(念)하는 공부법에 대해서 가르침을 받았다. 이 가르침을 잊지 않고 부지런히 닦았던 소녀는 다음에 부처님을 친견했을 때 부처님이 던지신 네 가지 질문에 정확히 대답했다. 소녀의 대답은 매우 철학적이어서 부처님 말씀을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았던 사람들은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부처님은 소녀를 칭찬하면서 대중을 향하여 다음과 같은 게송을 읊으셨다.

 

“이 세상은 눈 멀었도다. 분명히 보는 자 적도다.

겨우 몇몇 사람만이 좋은 세계(천상계)로 가는구나.

그물을 벗어난 새처럼.”

 

소녀는 법을 듣고 예류과를 성취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소녀는 요절하고 만다.

 

19년째(54세) : 짤리야 바위산

 

Cālikā : A village near the Cālikapabbata, where the Buddha spent the vassas of the thirteenth, eighteenth and nineteenth years after the Enlightenment (BuA.3). His attendant on one of these visits was Meghiya. Close to Cālikā was the village of Jantu where Meghiya went for alms. In the neighbourhood was the river Kimikālā, on whose banks was a mango grove (A.iv.354; Ud.iv.1; DhA.i.287f).  Outside the city gate and all around the city was a bog (cala-panka), owing to which the city gave the impression of moving, hence the name (UdA.217; AA.ii.793). v.l. Jālikā.

 

 

 

 

20년째(55세) : 라자가하 - 웰루와나 정사

 

21년째(56세)부터 43년째까지(78세) 24안거: 사와티 기원정사와 동원정사등에서

 

이 스물네 번의 안거 중 18 안거는 기원정사에서, 나머지 6안거는 동원정사(東園精舍, 鹿子母講堂)에서 지내셨다. 이 기간 동안은 아나타삔디까와 위사카가 주된 시주였다.불교성전에서는 20년째(55세)때 아난다가 시자가됨이라고 말함.불교성전에서는 21년째(56세)때 앙굴리말라를 제도하고 22년째(57세) 아자타삿투가 태어났다고 말함.

 

니간타의 제자인 가라하딘나(Garahadinna)는 붓다의 제자인 시리굿따( Sirigutta)를 자기의 종교로 개종시키려고 온갖 말로 스승들의 위대함을 칭찬했다. 시리굿따는 그를 깨우쳐주려고 니간티들을 초청하여 골탕을 먹였다. 가라하딘니는 분노하여 붓다에게 똑같이 복수를 준비하였지만 붓다의 지혜와 불가사의한 위신력을 드러났다. 이로 인해 두 친구는 수다원과를 성취했다. 

 

 

 성도 후 37년(72세)에 데와닷따(Devadatta)는 아자따삿뚜(Ajatasattu)(당시15살)왕을 부추기어 빔비사라 왕을 죽이고 왕권을 찬탈하게 하고 자신은 붓다를 살해하고 승단을 빼앗을 계획을 세웠다. 그는 아자따삿뚜 왕의 도움으로 자객을 보내 살해를 시도하고 산위에서 돌을 굴리기도 하고, 술 취한 코끼리를 붓다에게 돌진하게 하여 살해를 시도했으나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544-492 BCE Bimbisara
 492-460 BCE Ajatashatru
 460-444 BCE Udayin
 444-440 BCE Anuruddha
 440-437 BCE Munda
 437-413 BCE Nāgadāsaka

 

 

 

 

성도후 44년째(79세) : 벨루와 마을(웨살리 근처에 위치한 작은 마을) -

 

또한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도 왕족이고, 나도 왕족입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도 꼬쌀라 인이고, 나도 꼬쌀라 인입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도 여든 살이고, 나도 여든 살입니다.(M89)

 

 

빠세나디 왕은 죄 없는 반둘라 총사령관과 아들들을 죽이고 그 죄책감으로 반둘라의 조카를 총사령관에 임명했다. 반둘라의 조카 디가까라야나는 빠세나디 왕에게 원한을 품고 복수할 기회를 노렸다. 

부처님나이 80세때 빠세나디왕이 총사령관 디가까라야나를 데리고 메다딸룸빠에 계시는 붓다를 찾아 뵙고 담마쩨띠야 경(M89)을 듣고 있을 때,위두다바와 디가까라야나는 왕위를 찬탈했다. 빠세나디왕이 80세에 부처님을 친견한 후  빠세나디왕이 왕위를 위두다바에게 빼앗기고 아자따삿투(당시23세)에게 도움을 청하려다 죽었다. 부처님은 80의 노구를 이끌고 위두다바가 사끼야족을 멸망시키려는 것을 알고 길목에 나가 3번 말렸으나 끝내 사까야족은 처참하게 멸망하였다. 위두다바는 사끼야족을 죽이고 돌아와 아찌라와띠 강변에서 자다가 홍수로 휩쓸려 죽었다. 사리뿟따와 목갈라나가 부처님보다 6개월전에 열반에 들었고 부처님은 열반의 길을 떠나시게 된다. 마지막 안거를 나신 이곳에서 부처님은 크게 앓으셨으나 의지력으로 이겨 내셨다. 위두다바는 왕위에 오르자마자 군 대를 일으켜 사끼야족을 멸망시켰다. 이 때가 빠세나디 왕이 80세가 된 해이자 붓다께서 빠리닙바나에 드신 해이다.

 

 

 

 

성도 후 45년째(80세): 우기가 시작되기 전인 음력 4월15일(vesak) 꾸시나라에서 반열반에 드셨다.

 

정각을 이루신 후 처음 20년 간은 다음의 수행승들이 수시로 스승을 시봉했다. 비구 나가사말라, 나기따, 우빠와나, 수낙카따, 사가따, 라다 그리고 메기야와 사미 쭌다였다. 하지만 20년이 지난 후 부처님께서는 일정한 시자를 정하기를 원하셨다. 그러자 사리뿟따, 목갈라나 등 80여 명의 대 아라한들이 기꺼이 모두 스승을 시봉하겠다고 나섰다. 그러나 부처님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셨다. 장로들은 줄곧 침묵만 지키고 있던 아난다 장로에게 시자로 받아주실 것을 청해 보라고 권유했다. 아난다 장로의 대답이 흥미롭다.

“스승님께서 나를 시자로 삼기를 원하신다면 직접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난다여! 다른 사람들의 권유를 기다리지 말라. 너 혼자서 나를 시봉하도록 하여라.”

 

 

붓다는 한 쌍의 살라나무 사이에 누워 비구들에게 마지막 유훈을 내렸다. 

1. 내가 가고난 후에는 내가 그대들에게 가르치고 천명한  법(法)과 율(律)이 그대들의 스승이 될 것이다. 

2. 지금 비구들은 서로를 모두 도반(āvuso)이라는 말로 부르고 있다. 그러나 내가 가고난 후에는 그대들은 이렇게 불러서는 안 된다. 아난다여, 구참(久参) 비구는 신참 비구를 이름이나 성이나 도반(āvuso)이라는 말로 불러야 한다. 신참 비구는 구참 비구를 존자(bhante)라거나 장로(āyasmā)라고 불러야 한다.”

3. 승가가 원한다면 내가 가고난 후에는 사소한[雑砕] 학습계목들은 폐지해도 좋다

4. 내가 가고난 후에 찬나 비구에게는 최고의 처벌을 주어야 한다. 찬나 비구가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말하더라도 비구들은 결코 그에게 말을 해서도 안 되고, 훈계를 해서도 안 되고, 가르쳐서도 안 된다.”

5."비구들이여, 어느 한 비구라도 부처(buddhe)나 법(dhamme)이나 승가(saṅghe)나 도(magge)나 도닦음(paṭipadāya)에 대해서 의심이 있거나 혼란이 있으면 지금 물어라.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우리의 스승은 면전에 계셨다. 그러나 우리는 세존의 면전에서 제대로 여쭈어 보지 못했다.’라고 나중에 자책하는 자가 되지 말라.” 

6.조건지어진 것은 소멸하는 법이다. 방일(放速)하지 말고 부지런히 정진 하라.

와야담마 상카라 아빠마데나 쌍빠데타 (vayadhammā saṅkhārā, appamādena sampādetha)

붓다는 B.C. 543년 음력 4월 15일 빠리닙바나에 들었다.  

 

 

 

 

불멸후 200년 후에 아소까왕의 연대기

 

마우리야 왕조 

1대왕  기원전 322년 ~ 기원전 298년    찬드라굽타(24년간 재위)

2대왕  기원전 298년 ~ 기원전 273년    빈두사라  (28년간 재위)

3대왕  기원전 273년 ~ 기원전 232년    아소카 (41년간 재위)

4대왕  기원전 232년 ~ 기원전 224년    다사라타  (8년간 재위)

5대왕  기원전 224년 ~ 기원전 215년    삼프라티

6대왕  기원전 215년 ~ 기원전 202년    살리수카

7대왕  기원전 202년 ~ 기원전 195년    데바바르만

8대왕  기원전 195년 ~ 기원전 187년    사타단반

9대왕  기원전 187년 ~ 기원전 185년    브리하드라타(2년간 재위)

 

 

아소까의 중요 연대기

 

 

빈두사라 302-274,  302년 즉위하여 274년 죽음.

 

아소까 출생 304, 빈두사라의 차남(배 다른 형이 한 명 있음), 웃자이니 총독으로 감 286 부왕 빈두사라가 총독으로 파견함. 아소까 18 세 때

 

아소까 결혼 286,  웨딧사에서 데위와 결혼, 아소까 18세

 

마힌다 출생 284, 아소까 20

 

상가밋따 출생 282, 아소까 22

 

아소까 왕위 계승 273,  빈두사라 왕 죽은 후 왕위 계승: 아소까 30세, 마힌다 10세,  

 

아소까 즉위식 271, 왕이된 후 4년이나 늦게 즉위식을 한 이유는 왕자들과의 다틈이었을듯,  아소까 즉위식이 부처님 열반 후 218년 되었을 때라고 계산하여 불기가 정해짐(제4차 세계불교도대회(1956년)에서 1956년을 불기 2500년으로 정하고 양력 5월 15일을 부처님오신날로 결정, 석가모니의 생몰 연대는 기원전 624년∼기원전 544년으로 공식 채택) 아소까 34세, 마힌다 14세

 

즉위 4 266, 아소까 왕의 동생 띳사 출가

 

즉위 5-7 265-263, 3년 걸려 8 4천 탑을 건설함(즉위 8년에 불교에 귀의했는데 귀의 이전에 8만 사천 탑을 세웠다는 것은 이상함)

즉위 6 264, 아소까의 장자 마힌다(20세), 맏딸 상가밋따(18세) 출가- 상가밋따는 결혼까지하고 출가하였으므로 출가시기는 더 늦을듯

 

즉위 8  262, 깔링가 전쟁과 정복(13의 기록), 불교에 귀의, 아소까 42세

 

즉위 10년 260 , 불교 전향 후 1년 동안 그렇게 열심히 하지 못했다.(20여개의 ㅈㅂ(작은바위) 칙령에서 나오는 기록은 실제로는 12년에 새겼다. 전국의 256개 바위에 새겨졌을 것으로 봄), 칸다하르 이중 언어 바위칙령의 기록에 담마를 사람들에게 가르치기로 결심("우리의 군주이신 삐야다시 왕은 왕위에 오른지 10년 후에 사람들에게 담마를 가르치기로 결심하셨다.") 부처님이 깨달으신 곳, 보드가야 방문(ㅂ(바위) 칙령 8 )   아소까 44세, 마힌다 24세, 상가밋따 22세

 

즉위 12  258,   비로서 칙령을 새기기 시작함(바위에 새겨진 칙령은 분량이 적고 뛰어쓰기를 하지 않아서 읽는데 불편함)  ㅈㅂ(작은바위) 바이라트 바위 칙령에서 자신을 '우빠사까'라고 부르고 다수 경전 이름을 언급  처음으로 담마칙령을 새기도록 함(ㄷ(돌기둥) 6) '내가 왕위에 오른지 12년이 되었을 때 사람들의 복지와 행복을 위해 처음으로 담마칙령을 새기도록 하였다.'  바라바르 언덕 동굴 칙령 I, II를 새김 "삐야다시 왕은 왕위에 오른지 12년에 이 니그로다 동굴을 아지위까 교단에 기증하였다." "삐야다시 왕은 왕위에 오른지 12년에 깔라띠까 언덕에 있는 동굴을 아지위까 교단에 기증하였다."   유따, 라주까, 쁘라데시까들은 담마를 가르치 기 위해 5년마다 검열 순방을 한다.(3)  북소리가 담마의 소리가 되었다.(4)  ,아소까 46

 

 

즉위 14 256, 꼬나까마나 부처님 탑을 증축하였다. (니갈리 사가르 ㅈㄷ)  아소까 48

 

즉위 17  253,  3차 결집 개최  왕은 목갈리뿟따 띳사 존자로부터 부처님 가르침을 배우고 이단 비구들을 승단에서 추방함. 사르나트,꼬삼비, 산찌의 돌기둥에 "승가를 분열시키는 자는 비구든 비구니이든 흰옷을 입혀서 승원이 아닌 곳에 살게 해야 한다."는 칙령이 이때 만들어 졌을 것으로 추측.  목갈리뿟따 띳사 장로를 의장으로 3차 결집 개최,  외국과 여러 지역에 담마 사절단 파견( 13)  마힌다가 스리랑카로 떠나는 길에 웨디사에 사는 모친 데위를 방문하고 스리랑카로 떠남, 아소까 51세,  마힌다 31세, 상가밋따 29세

 

즉위 18 252,  사르나트 ㄷ, 산찌 ㄷ, 꼬삼비 ㄷ 을 새김 ② 즉위 19년 깔라띠까 언덕 동굴 II을 아지위까교에 기증  마힌다의 요청으로 동생 비구니인 상가밋따가 보드가야 보리수 묘목을 가지고 스리랑카로 가서 심고 비구니 승단을 개설함,아소까 52

 

즉위 20 250,  부처님 탄생지 룸비니 방문(룸비니 ㄷ)  꼬나까마나 탑을 증축하고 돌기둥 세움(니갈리 사가르 ㄷ)  아소까 54

 

즉위 26 244,  칸다하르(Kandahar) 델리미르뜨(Delhi-Meerut)델리또뽀라(Delhi-Topra) 람뿌르와(Rampurva) 라우리야난당가르트(Lauriya-Nandangarth) 라우리야아레라즈(Lauriya-Araraj)등에 다같이 1~6번의 칙령을 새김. 분량이 많고 뛰어쓰기를 하고 있어 칙령의 완성단계, 특이하게 델리미르뜨(Delhi-Meerut)에는 1~7번까지의 칙령이 있음.

 아소까 규칙: 담마에 따라 정의로 통치(ㄷ2)  라주까들은 지방 사람들의 복지를 위함( ㄷ 4)  지금까지 죄수들을 25번 석방함(ㄷ 5)  모든 이에게 복지와 행복을 주기를 염원(6)  아소까 60

 

즉위 27 243, 델리또뽀라(Delhi-Topra) 칙령에 사람들이 담마의 규정된 길을 따르게 되었다(7)는 가장 긴 유일한 칙령으로 이것이 마지막 돌기둥 칙령,  아소까 61

 

즉위 30 240, 왕비 아상디밋따의 죽음  아소까 64

 

즉위 33 237, 띳사락카 왕비로 책봉됨  아소까 67

 

즉위 35 235, 띳사락카 왕비가 보리수나무를 죽이려 하다.아소까 69

 

즉위 35-37 235-233, 띳사락카 왕비가 다른 왕비가 낳은 왕자 꾸날라의 눈을 해침

 

즉위 37 232, 아소까 왕의 죽음(72)

 

 

But the sequence of events during the forty five years of Buddha’s ministry can often be approximately determined, but except for the renunciation at the age of twenty nine, the Enlightenment six years latter, and death at eighty, there is nothing like an exact chronology. The places where he stayed each year of the first twenty years of wandering for peaching the people are given in the commentary, Madhuratthavilasini by Thera Buddhadatta on the text Buddhavamsa & we have the data: Bhagava during the first twenty years of his Buddhahood led a houseless life of pilgrim sojourning at such places as he found most convenient to dwell in, viz. out of regard to Benares (Baranasi) he tarried the first year at the Isipatana of Benares, an edifice in that city near which no living creature could be deprived of life, — establishing the supremacy of his faith & administring to eighteen kotiyas of Brahmas the heavenly draught (nibbana).

 

The 2nd year he dwelt at the Veluvana-mahavihara in Rajagaha for the spiritual welfare of that city. The third & fourth years he continued at the same place i.e. at Rajagaha. 

 

The Fifth year out of consideration for Vesali, be dwelt in the Kutagarasala in the Mahavana-Vihara near that city. The sixth year at Mankula mountain at Kosambi, near Allahabad.

 

The seventh year at Tavatimsa heaven, one of the devealokas (heaven of thirty-three);

 

The Eighth year, at Bhagga near Sumsumara hill, near Kapilavatthu he'dwelt in the wilderness of Bhesakala for the welfare of the people. The nineth year at Kosambi, and the tenth year in the Parileyyaka wood. 

 

The eleventh year, he dwelt in the brahmin village Nala. 

 

He spent the twelveth year at Veranja, 

 

the thirteenth year at Caliya (or Cali) hill, 

 

the fourteenth year at the Jetavanavihara in Savatthlpura, 

 

the fifteenth year at the great city Kapilavatthu, 

 

the sixteenth at Alavi, subduing Alavaka (an evil spirit) and administring the heavenly draught (Nibbana) to eightyfour thousand living creatures, 

 

the seventeenth year at Rajagaha, and 

 

the eighteenth year at caliya or cHlimountain. 

 

The nineteenth year he stayed at Rajagaha and 

 

the twentieth year at the same place i,e. Rajagaha. 

 

After that he exclusively dwelt either at the Jetavanamahavihara for the spiritual welfare of Savatthipura or at pubbarama for the welfare of Saketapura, deriving his subsistence by alms (from those cities). In the Tibetan the whole forty five years have been fixed, 

seventeen of them at Jetavana, eight at Rajagaha, and the rest at various places — 

(schiefner, Tibetan) Manorathapurani. According to the AnguttaraNikaya commentary, ii, 124-25; cf. Buddhavamsa commentary, R 3; Mahavastu commentary, ii, 165, the 

Tathagata, Gotama Buddha has spent his rainy seasons during the period of preaching at the following places:....

 

The Life of Buddha : Edward J. Thomas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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