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는 영원한 무엇을 찾는 종교인가?
얼마 전 직지사에서 실시되고 있는 행자교육에 면접관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오랜만에 찾아간 직지사는 여전히 그대로 였지만 내가 알고 있는 스님들은 떠나고 없었다. 점심을 먹고 나선 산책길에 만덕전에 걸려 있는 현수막이 눈에 들어 왔다.
“신심(信心)으로써 욕락(欲樂)을 버리고 일찍이 발심(發心)한 젊은 출가자(出家者)들은 ‘영원한 것과 영원하지 않은 것’을 똑똑히 분간하면서 걸어가야 할 길만을 고고(孤高)하게 걸어서 가라.”
우빨리 존자의 가르침이라고 익히 알고 있는 게송인데 그날 따라 마음속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영원한 것과 영원하지 않은 것을 똑똑히 분간하면서” 라는 대목을 보면서 정말 저말을 우빨리 존자가 했을까 라는 의문이 들기 시작한 것이다. 초기경전에서 '영원'이라는 말을 쓰는 경우는 거의 없고 더구나 '영원한 것을 찾으라'는 말은 더더욱 없기 때문이다. 이 게송의 출처를 찾아 본 결과 이 게송은 소부니까야의 장로게에 나타나는 251번 게송이었다. 소부(小部 Khuddaka Nikaya)의 장로게경(長老偈經 Theragatha)에서 3개의 게송을 모아놓은 삼게집(三偈集)에 보인다. 우빨리 존자의 게송은 249~251번(Thag 3.11) 게송에 나란히 나타나고 있다.
249. ‘‘Saddhāya abhinikkhamma, navapabbajito navo;
Mitte bhajeyya kalyāṇe, suddhājīve atandite.
신심으로 세속을 여의고 갓 출가한 초심자는,
성실하고 청정한 삶을 살아가는 선량한 벗하고만 사귀어야 한다.
250.‘‘Saddhāya abhinikkhamma, navapabbajito navo;
Saṅghasmiṃ viharaṃ bhikkhu, sikkhetha vinayaṃ budho.
신심으로 세속을 여의고 갓 출가한 초심자는,
승가에 머무르며 총명을 다해 계율을 지켜야한다.
251.‘‘Saddhāya abhinikkhamma, navapabbajito navo;
Kappākappesu kusalo, careyya apurakkhato’’ti.
신심으로 세속을 여의고 갓 출가한 초심자는,
‘해야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명심하여 마음의 흔들림없이 실천해야한다.(박용길역)
249.<Upāli-thera>
신심으로 말미암아 세상을 버린
새로 득도(得道)해 새로 출가승 된 사람은
부지런히 제 힘으로 깨끗이 사는
착한 친구를 사귀라.
250
신심으로 말미암아 세상을 버린
새로 득도(得道)해 새로 출가승 된 자,
대중과 함께 사는 어질고 지혜로운
비구여, 너 먼저 계율을 배워라.
251
신심으로 말미암아 세상을 버린
새로 득도(得道)해 새로 출가승 된 사람은
할 일, 안할 일을 자세히 알아
다만 혼자서 유행(遊行) 나가라.
위 게송들의 다른 언어 번역본들을 찾아 보아도 한결같이 ‘해야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로 번역 되었지 "영원한 것과 영원하지 않은 것’으로 번역된 것은 없었다. 251번 게송의 Kappākappesu는 처소격으로 ‘해야할 일(kappa)과 하지 말아야 할 일( akappa)중에서'라는 뜻이다. 이 게송에서 kappa는 합당하다는 kappati의 명사형인데 ‘겁’이라는 뜻의 kappa와 혼동된다. ‘영원한 것’이라는 해석은 kappa를 겁이라는 단어로 본 것이고 ‘해야할 일’로 번역한 것은 ‘합당’의 뜻을 취한 것이다. 그런데 kappa를 영원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1겁, 2겁,3겁, 100겁, 아승지겁등을 1영원,2영원,3영원,100영원, 아승지영원이라고 나누는 꼴이어서 자체 모순된다. 따라서 (kappa)을 ‘영원’이라고 번역하는 것은 맞지가 않다.
이 게송들은 우빨리 존자가 초심자들에게 율을 잘 배우고 지키라고 충고하는 부분이고 율장에서 kappati는 합법(合法)과 정법(淨法)의 의미로 사용된다. 즉, 어떠한 행위가 율에 맞으면 정법(淨法,kappati)이고 율에 맞지 않으면 부정법(不淨, na kappati)이라고 판단한다. 그러므로 우빨리 존자가 갓 출가한 초심자를 가르치는 249, 250, 251번의 게송에서 kappa는 ‘해야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 혹은 ‘합당한 일과 합당하지 않은 일’로 번역하는 것이 타당한 것이다. K.R. Norman과 영어번역본도 이 대목을 ‘proper and not proper’로 번역하고 있고 일본어도 마찬가지다. 우빨리존자에게 이 게송을 듣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갖출가한 초심자이다. 초심자에게 율사인 우빨리가 해야 할 일과 하지말아야 할일을 잘 구분해서 하라는 기본적인 충고를 하고 있는 것이 이게송들의 맥락이다. 맥락을 무시하고 영원한 것이라고 번역한 기존의 번역은 불자들에게 커다란 혼란을 부추긴다. 대승불교의 입장에서 번역한 것이기에 이러한 오류가 생겨난 것이 아닌가 한다. 이러한 번역으로 한국불교 수행자들이 영원한 것을 찾는 것이 불교 수행의 목표라고 착각하는 일이 없었으면 한다. 이 잘못된 번역이 영원한 무엇을 찾는 것이 불교인것처럼 착각하게 만든 주범이었지 않나 생각하게된다.
-끝-
[참고자료]
초기경전에서 영원이라는 말은 영원한 것은 없다는 것을 가르쳐주기 위해서 사용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1)"라훌라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감수는 영원한가 무상한가?"
"세존이시여, 무상합니다."
"그러면 무상한 것은 괴로운 것인가 즐거운 것인가?"
"세존이시여, 괴로운 것입니다." (상윳따니까야)
2)[밧차곳따] "세존이신 고따마여, 세상은 영원합니까?"
[세존] "밧차여, '세상은 영원하다' 라고 나는 시설하지 않는다."
[밧차곳따] "그렇다면 세존이신 고따마여, 세상은 영원하지 않습니까?"
[세존] "밧차여, '세상은 영원하지 않다' 라고 나는 시설하지 않는다."
(상윳따니까야)
3)그런데 그때 범천 바까에게 이와 같은 나쁜 견해가 생겼다.
'이것이야말로 항상하고 이것이야말로 견고하고 이것이야말로 영원하고 이것이야말로 완전하고 이것이야말로 불변의 법이다.
Tena kho pana samayena bakassa brahmuno evarūpaṃ pāpakaṃ diṭṭhigataṃ uppannaṃ hoti: idaṃ niccaṃ, idaṃ dhuvaṃ, idaṃ sassataṃ, idaṃ kevalaṃ, idaṃ acavanadhammaṃ. (상윳따니까야)
위의 경전에서 설명되는 항상(nicca), 견고(dhuva), 영원(sassata), 완전(kevala), 불변법(acavanadhamma)등은 부처님께서 극단인 견해라고 거부하셨던 상견(sassataditthi)의 동의어들이다. 경전에서 영원이라는 말이 등장하는 이유는 부처님 시대에 만연해 있던 상견들을 논파하기 위하여 사용되는 것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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