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의 생애’를 읽고
올해(2010년) 조계종 교육원에서 출판한 <부처님의 생애>는 7명의 학자들이 공동으로 집필했다는 것, 조계종단 본이라는 것, 그리고 많은 유물사진을 곁들여 이해하기 쉽게 집필했다는 것등으로 불자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고 한다. 이 책에는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부처님의 행적을 시간 순으로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고 비구와 비구니들의 수행담이나 재가자들의 이야기가 감동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래서 어떤 스님은 이 책을 읽고 부처님에 대한 신심이 더욱 깊어 졌다고 고백하며 이 책은 ‘불자들이 반드시 읽어야 할 책’으로 홍보하고 있다. 분명 이 책은 기존의 부처님의 전기들 보다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지만 아쉬운 점도 눈에 띈다.
<부처님의 생애>에 대한 ‘독후감 쓰기 대회’에서 대상을 받은 이지안님은 “나는 ‘님’이라는 말이 주는 막연한 숭배의 느낌이 어쩐지 불편했다.”라고 적고 있다. 불교인이 아닌 사람들에게는 이렇게 ‘부처님’이라는 호칭 하나까지도 문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영화 시나리오를 쓴다는 어느 작가는 이 책을 “공상소설 같다”고 평가 했다. 이제까지 출판된 부처님 전기 중에서 가장 믿을만한 이 책이 그러한 평가를 받는 것에 대해서 나는 충격을 받았다. 경험상으로 기독교의 성경을 읽었을 때 신을 믿는 사람과 그렇치 않는 사람의 반응이 극단적으로 나누어지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런데 어떤 종교보다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가르침이라고 자부하고 있는 불교와 <부처님의 생애>가 “공상소설 같다”는 평가를 받는 것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그러한 소감을 듣고나서 다시 이 책을 읽어 보니 그러한 평가를 받을 만한 부분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은 우주가 생성되고 파괴되기를 91차례 거듭하기 이전에 데와와띠라는 도시에 살고 있던 수메다라는 청년이 디빵까라붓다(연등불)에게 미래에 부처가 된다는 수기 받고 마지막으로 도솔천에서 머물다가 인간 세상에 태어나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헤아릴 수 없는 시간동안 수행해 온 그 분이 인간 세상에 태어나는 모습은 다음과 같이 묘사된다. “오른쪽 옆구리로 태어난 아기는 오른 손은 하늘을 가르키고, 왼손은 땅을 가르키며, 사방으로 일곱 걸음을 걸으면서 사자처럼 당당하게 말하였다. ‘하늘 위 하늘 아래, 내 오직 존귀하니, 온통 괴로움에 휩싸인 삼계, 내 마땅히 안온하게 하리라.’” 이와 같은 탄생모습과 <탄생게>는 불자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다. 그렇치만 이것을 사실이라고 받아들이는 불자들은 매우 드물다. 스님들이나 불자들은 이것을 신화적인 상징으로 해석하고 있다. ‘옆구리로 태어났다는 것은 크샤트리야 출신을 의미하고 일곱 발자국 걸었다는 것은 육도윤회를 벗어났다는 의미’라고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은 이러한 설명 없이 옆구리로 태어난 것이 사실인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 더군다나 태어나자마자 일곱 발자국 걸었는데 몇 달 뒤에는 “걸음마를 막 시작한 태자를 위해 왕은 장남감을 선물했다.”라는 표현이 등장하고 있다. 처음에는 잘 걸었는데 다시 걸음마를 시작했다는 이러한 모적인 표현을 어떻게 일반인들이 이해할 수 있을까? 이러한 표현들은 비불자들에게는 물론 불자들에게도 ‘허황되다’는 인식을 갖게 할 것이다.
부처님이 옆구리에서 태어났거나 태어나자마자 일곱 발자국 걸었다고 해서 더 위대해 지는 것은 아니다. 그분이 불교역사 2600년 동안 존경받아 온 것은 깨달음의 수승함, 가르침의 자세함과 정확성, 자애로움, 누구에게나 평등한 태도 때문에 그 분과 그분의 가르침이 존중 받아 왔던 것이다. 부처님도 당신의 보여주신 최고의 기적은 ‘신통의 기적’이 아니라 ‘말씀의 기적’이라고 하셨다. 불교에서 말하는 믿음이란 이해를 바탕으로 하는 믿음이다. 부처님의 탄생과 성장과 깨달음과 가르침과 죽음은 마땅히 믿어지기 전에 온전히 이해되어야한다. 그렇게 <부처님의 생애>가 이해되어지면 그 이해만큼 부처님을 존경하는 마음이 우러나오게 되고, 그런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부처’를 ‘부처님’이라 부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부처님의 생애>를 이해시키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요구하고 있는 것 같아 아쉽다.
불교의 가장 큰 특징은 ‘와서 보라’고 마땅히 보여줄 수 있고, 확인 될 수 있으며, 정상적인 이성의 소유자라면 당장 이해 될 수 있는 점이다. 이러한 보편적인 진리를 깨닫고 가르쳐 주신 부처님은 미화되지 않고도 신격화 되지 않았을 때 오히려 더욱 감동적인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아직 불교를 모르는 일반 사람들에게 믿음을 요구하지 않으면서도 편안하게 다가오는,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들지 않는 그러한 <부처님의 생애>가 되었다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모든 한문 경전들이 부처님의 탄생을 표현할 때 ‘옆구리에서 태어났다.’라고 묘사하고 있지만 니까야에서는 부처님들이 어머니의 옆구리로 태어났다고 표현하지 않고 일반사람처럼 자궁으로 나왔다고 표현하고 있다. 그렇다면 옆구리로 태어났다는 것은 후대에 만들어진 이야기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이 책은 인명이나 지명을 빠알리어나 싼쓰끄리뜨어로 표기하고 있어 내용면에서도 초기불경에 중심을 두고 있다고 예상했지만 내용면에서는 후대에 나타난 한문본의 부처님의 전기를 많이 짜깁기 하고 있다. 그리하여 자료의 풍부성은 간혹 혼란함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다음은 이 책을 읽고 수정해야 할 부분이나 의견을 달리하는 부분에 대해서 나의 견해를 적어 본 것이다.
1.싯닷타는 처음에 아노마강 건너 아누삐야에서 고행을 닦는 두 여인을 만나고, 다시 왓지연맹의 미틸라에서 고행자 박가와를 만나고, 웨살리에서 104년동안 수행애온 알라라깔라마를 만나고 라자가하에서 웃다까라마뿟따를 만나서 각각 그들에게 가르침을 배운다. 이러한 스승들에게 어느 정도 배웠지만 궁극적으로 만족할 만한 성과가 없자 싯닷타는 우루웰라로가서 고행을 시작한다. 싯닷타는 출가한지 얼마 지나지 않은 때에 꾸시나라에서 자신을 시봉하기 위해 따르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는 지금 누구를 따르기 위해, 누구의 가르침을 실천하기 위해 출가한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선언은 싯닷타의 의도와는 다르거나 아니면 너무 이른 발언이라고 생각한다.
연등불 시대에 수메다는 설산으로 출가했을 때에도 그는 홀로 공부 한 것이 아니라 어떤 스승 밑에서 공부를 하다가 어머니 병환 때문에 스승에게 하산하겠다는 허락을 구하는 장면p15이 이 책에 나온다.
사리뿟다와 목갈라나도 출가하기 전에 스승을 찾아보자는 대화를 나눈다.
“죽음이 있듯이 죽지 않는 법 또한 있지 않을까? 벗이여, 죽지 않는 법을 가르쳐 줄만한 스승을 우리 한번 찾아보자.”p161
그러므로 부처님이 많은 생 동안에 우리에게 보여준 출가의 의미는 생사문제를 품은 사람이 그 해답을 찾기 위해 스승을 찾아나서는 행위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스스로 더 이상 자신보다 뛰어난 스승이 없다는 것을 알기 전까지는 말이다.
2. “공작의 깃털처럼 부드럽고 향기로운 꾸사풀(kusa)p98”이라고 표현했는데 인도 현지에서 확인한 꾸사풀은 우리나라의 억새풀처럼 날카롭고 억샌 풀이었다.
3. "까마귀가 단단한 차돌을 씹은 것처럼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사라졌다.p102"이라는 표현은 적당하지 않다. 이 내용은 수따니빠따의 <정진 경>에 나오는 표현이다. 까마귀가 하늘에서 먹을 것을 찾다가 시커먼 바위덩어리를 보고 고기 덩어리인줄 알고 내려와 쪼아본다. 그리고 그 것이 딱딱한 바위덩어리인 것을 확인하고는 실망해서 다시 날아간다. 이와 같이 마라가 부처님을 7년이나 따라다녔으나 허점을 찾지 못하고 실망하여 떠나간다는 내용이다.
“까마귀가 단단한 차돌인 것을 알고는 실망하여 사라졌다.”라고 해석하는 것이 적당할 듯.
4."대지가 진동하고 끝없는 광명이 비쳤다.p132"
꼰단냐가 처음부터 아라한과를 얻은 것은 아니다. 꼰단냐는 오비구 중에서 제일 먼저 예류과를 얻었을 뿐인데 이렇게 표현하는 것은 너무 지나친 것 같다. 오비구는 각각 예류과를 얻고 나서 출가를 청하게 되고 그 뒤에 <무아 경>을 듣고 모두 아라한이 된다.
5.“성숙한 벗을 얻지 못했거든 코뿔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p286
이 게송은 부처님이 코삼비에서 싸우는 비구들을 말리다 숲속으로 들어가서 빠릴레이야까 라는 코끼리와 지내실 때 자신들의 잘못을 뉘우치고 아난다를 앞세워 숲을 찾아온 비구들에게 훈계하신 말씀이다. 이 이야기는 법구경 328~330게송에서 나타나는데 게송은 아래와 같이 '코끼리처럼 홀로가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는 ‘코뿔소’가 아니라 ‘코끼리’라고 해야 할 것이다. 법구경과 수따니빠따의 내용을 혼동하고 있다.
생각이 깊고 총명하고 성실한 지혜로운 도반이 될 친구를 만났거든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극복하고 마음을 놓고 기꺼이 함께 가라.(법구경 328번 게송) 그러나 생각이 깊고 총명하고 성실한 지혜로운 도반이 될 친구를 못 만났거든 정복한 나라를 버린 왕처럼 숲 속을 다니는 코끼리처럼 홀로 가라.(법구경 329번 게송)
6. ‘짬빠’를 ‘참빠’, ‘꼬살라’를 ‘코살라’, ‘위하라’를 ‘비하라’라고 일관되지 않게 표현한 곳이 더러 있다.
7.‘비구들을 존경하지 않을뿐더러’p318는 내용상 ‘니간타 수행자들을 존경하지 않을뿐더러’로 수정되어야 한다.
8.“아힘사까, 하루해가 지기 전에 사람 백명을 죽여 그 손가락으로 목걸이를 만들어라.”p329라는 표현은 상식적이지 않다. 하루에 백명을 죽이는 것은 불가능 하며 “모든 사람이 손가락질하고 몽둥이를 겨누는”등의 표현을 보더라도 하루 동안 그가 99명을 죽였다고 보여지지 않는다. 이렇게 표현한 출처가 궁금하다.
9.①"‘어서오게, 마하깟싸빠.’ 부처님은 자리의 반을 비우며 손짓하셨다. ‘마하깟싸빠, 여기로 와 앉아라.’"p344
②"마하깟싸빠가 걸음을 멈추자 튼튼한 철곽이 철커덩 소리를 내며 저절로 열렸다. 그리고 황금 관 밖으로 부처님께서 두 발을 내미셨다."p403
③“부처님 께서는 그 연꽃을 대중에게 들어 보이며 아무 말씀 없이 눈만 깜빡이셨다.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어리둥절해하는 사람들 틈에서 오직 한사람, 마하깟싸빠만이 빙그래 웃었다. ”p373
이상의 3가지 이야기는 선불교에서 이야기하는 三處傳心의 내용이다.
①번은 선어록에서는 多子塔前分半座라고 일컫는 것으로 <불설중본기경> 大迦葉始來品에 나타나 있다. 이 경에서는 이 사건이 일어난 장소가 다자탑이 아니고 기원정사라고 한다.
②번은 大般涅槃經後分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③번은 염화미소라고 알려진 화두로 <대범천왕문불결의경大梵天王問佛決疑經>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이 책에서는 대열반경의 첫 부분에 나오는 일곱가지 쇠퇴하지 않는 법을 설명하고 난 뒤에 염화미소 이야기가 등장한다. 이것은 이 책의 필진들이 열반경의 내용을 임의로 고쳤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짜깁기 때문에 꾸시나라에서 부처님이 마지막으로 말씀하신 “내가 반열반에 들날도 멀지 않았다. 나의 가르침 가운데 의심스러운 부분이 남아있는 사람은 미루지 말고 물어라.”라는 말씀이 영취산에서 말씀 하신 것이 되고 말았다. <대범천왕문불결의경>에는 成就華嚴阿含方等般若一實及多寶佛이라는 말이 순서대로 나열되고 있듯이 천태 5시교판 뒤에 만들어진 위경으로 보여지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책의 집필에 참여한 7명의 학자들이 몰랐을리 없다고 본다. 그렇다면 알고서도 이렇게 염화미소 이야기를 살짝 삽입한 것은 이 책이 조계종단 본이라서 그러한 것일까? 그리고 이 경전의 이름은 부록에 실린 참고자료에도 나타나지 않고 있다. 경전을 인용했으면서도 경전의 이름을 밝히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경을 인용하자면...爾時如來。坐此寶座。受此蓮華。無說無言。但拈蓮華。入大會中。八萬四千人天時大眾。皆止默然。於時長老摩訶迦葉。見佛拈華示眾佛事。即今廓然。破顏微笑。佛即告言是也。我有正法眼藏涅槃妙心。實相無相微妙法門。不立文字。教外別傳...)
10.“스승의 골칫거리를 해결해 주기 위해서 아자따삿뚜가 나섰다.”P353
율장 ‘쭐라왁가’에 의하면 날라기리 코끼리를 풀어 놓으라고 지시한 것은 데와닷따가 직접 코끼리 조련사를 찾아가서 한 행동이다.
11. “전쟁터로 변했다.”p406라는 표현은 “전쟁터로 변하려 했다.”라는 가능성으로 표현해야 할 듯하다.
12. “어디서 쾌쾌한 냄새가 나지 않습니까?”p412
아난다 존자가 아라한이 되고 난후에 아난다에게 이렇게 말하는 아라한은 없을 듯하다. ‘사만따빠사디까’에 의하면 이러한 표현은 아난다가 아라한이 되기 전에 어떤 아라한이 한 말이다.
-끝-
추가부분
소책자 -부처님의 생애-
맨발로 꾸시나가라로 향하였다.61----부처님의 출가경로는 아노마강을 건너서 남하한것이다. 꾸시나라쪽은 아니라고 본다.
거친번뇌는 끊었지만 아직 미세한 번뇌가 남아있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79---거친번뇌는 오하분결이고 오하분결이 없으면 아나함이다.웃다까라마뿟따가 아나함인가?
입과 코와 귀뿐만 아니라 모든 구멍을 막고 숨쉬기를 멈췄다.84---모든 구멍은 어떤 구멍을 뜻하는가?
보석으로 잠식한 화병에 연꽃을 담은 대지의 여신이 땅을 뚫고 송아올라왔다.99----문장이 어색하다.
부처님은 제석천의 말을 듣고도 침묵하였다. 지켜보던 배범천은 답답하였다.----제석천이 권청을 했다는 것은 출처가 어느곳인가?
"괴로움의 소멸을 똑똑히 보아야 한다."--- "괴로움의 소멸을 실현되어야 한다.’
깟짜나는 웃제니 출신으로 국사의 아들이었으며 흑인이었다.251---소레야 라는 사람이 깟짜나의 빛나는 피부를 보고 '나의 아내가 되었으면....' 이라고 기원하는 바람에 여자의 몸으로 바뀌는 일이 있었다.(법구경 43번게송 인연담) 피부가 황금색이어서 깟짜나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는데 그를 두고 흑인이라는 것은 적절치 않다.
까달음을 이루신후 10년,세 비구와 헤어진 부처님은 빠릴레이야까라는 외딴 마을로 가셨다.271---꼬삼비에서 비구들의 분쟁(성도후 9년)후 바로 빠릴레이야까숲으로 가셨는데 1년이 지났다니...
믿음은 씨앗,감관을 지키는 단비...삼매는 끈....275----“믿음이 씨앗이고, 감관의 수호가 비며, 지혜가 나의 멍에와 쟁기입니다, 양심은 [연결하는] 막대기이고, 마음은 노끈입니다. 나의 마음챙김은 보습과 몰이막대입니다.(SN 7:11)
“Saddhā bījaṃ tapo vuṭṭhi,
paññā me yuganaṅgalaṃ;
Hirī īsā mano yottaṃ,
sati me phālapācana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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