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동영상과 번역은 정신세계사 주간이며 번역가인 이균형님이 유나 애청자들을 위해 올려주셨습니다.)
삶을 살면서 그 안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일들의 내용에 반응하는 대신,
(생각, 감정, 외부적인 사건들, 사람들, 장소, 주변의 광경들은 끊임없이 변해 가는데 이런 것들 모두가 내용입니다.)
이 내용들에 반응하는 대신에 내용들을 있는 그대로 버려두고 깨어서 인식하세요.
지금 일어나는 것들과 동화되어 있는 상태를 인식하는 게 아니라 지금 그 자체를 인식하세요.
일어나는 현상들의 너머를... 그것이 의식 변성의 기적입니다.
지금 그 자체를 인식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일어나는 모든 것의 배후를 흐르는 적정寂靜stillness, 그것을 감지하세요. 그것만이 아닙니다. 그것조차 정확하지 않습니다. 당신이 그것임을 깨달으세요.
자신이 배후의 그 깊은 적정의 흐름임을 깨닫고 나면 모든 게 너무나 쉬워집니다. 세상이 그처럼 문제투성이로 보이지 않습니다. 자신이 그것임을 깨달으면 머리 속의 ‘나’의 스토리를 포함해서 삶의 모든 내용들이 더 이상 문제 거리로 보이지 않습니다.
그것은 단지 나의 스토리이고 더 이상 거기서 나의 정체성을 구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남는 것은 단지 사진첩입니다. 진짜 사진첩 아니면 머리 속의 사진첩이지요. 나에게 일어났던 일들을 담은... 좋아요. 아니면 요샌 비디오를 찍으니까 비디오라고 해도 좋습니다. 그 속에 많은 것들이 담겨 있지요. 2년 전, 5년 전, 10년 전, 저것은 첫 번째 아내와 살았던 ‘나’, 저것은 둘째 아내와 살았던 나, 또 세 번째 아내... 그것이 다 환영이라고 말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
당신은 더 이상 과거에 일어났던 사건들에 반응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지금이라는 장 속에서 기억되고 있는데, 그 지금이라는 장 속에서 그것을 개인적인 것으로 만들고 거기에 반응하지 않습니다. 기억 속의 마누라들에 대해 반응하지 않습니다. 스토리는 계속 펼쳐집니다. 그녀가 나에게 어떤 짓을 했는지, 내가 어떤 짓을 했는지, 그녀가 한 짓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라는 등등.. 하지만 이런 모든 것들이 단지 과거에 일어났던 일일 뿐입니다.
그것은 내가 아닙니다. 나의 정체는 그 속에 없습니다. 나의 정체성을 위해서 더 이상 그것들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미래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미래는 여러 모로 필요합니다. 아무도 그것을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거기서 나를 찾고자하지 않습니다. 거기서는 나를 찾을 수 없습니다. 미래는 더 이상 문젯거리가 아니고 두려운 대상도 아닙니다. 물론 희망의 약속도 아닙니다. 미래는 그냥 그것일 뿐입니다. 당신은 그저 미래를 가지고 계획을 짭니다. 다음 주에는 이걸 하고 저걸 하고... 약속을 하고 내년에는 이걸 하고 저걸 하고... 할 일을 계획하지요. 거기서 자신의 정체성을 구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저 아무런 애씀 없이 할 뿐입니다. 애쓰고 노력한다는 것은 어떤 것에서 나를 찾으려는 행위입니다. 어떤 것에서 자신을 찾으려고 하는 것은 애쓰는 것입니다. 그것은 긴장과 스트레스를 일으킵니다.
그렇지만 깨닫고 나면 삶은 너무나 단순해집니다. 단순해지지만 문젯거리가 더 이상 생기지 않는다는 말은 아닙니다. 문젯거리는 물론 찾아옵니다. 문젯거리는 많습니다. 하지만 그건 간단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지금이라는 장 속에서는 그게 그리 대단한 게 아님을 알기 때문입니다. 무엇이든 간에 일어나는 것을 일어나도록 허용하면 그것을 지금 다룰 힘이 거기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반응과 조치를 요구하면 즉시 크나큰 힘이 당신을 관통해 흐르면서 행동을 취합니다. 위급한 상황에서 자기도 모르게 과감하게 행동을 한 사람들을 두고 어떻게 그런 용기 있는 일을 할 수 있었는지 궁금해들 하지만, 그것은 그 순간에 생각이 개입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깊은 곳에서 나온 더 큰 힘이 그를 장악해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내가 어떻게 그렇게 했는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겠다고 합니다. 그들은 자신이 대단한 일을 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나’가 개입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온 삶이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끊임없이 지금의 장, 장 그 자체에 의식을 두고 거기에 머무름으로써 말입니다. 그리고는 세상이, 일이 일어나도록 놔둡니다. 괜찮아요! 형상은 제 스스로 일어났다가 사라집니다. 내버려두세요. 어떤 형상도 아주 오래도록 머물지 못합니다. 모든 형상은 오고, 왔다가는 갑니다. 그것이 오도록 놔두고 나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형상들의 춤사위를 즐기세요.
상실에 대한 두려움은 더 이상 없습니다. 나를 어떤 <내용>과 동일시하게 되면, 그것을 잃는다는 것은 곧 내 정체성의 일부를 잃는 것이 되기 때문에 두려워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상실의 두려움입니다. 물질적인 상실이든 어떤 종류든 말입니다.
그것이 사라집니다. 그것은 두려움의 종식입니다. 인간이 더 이상 두려움에 지배받지 않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기적적인 의식의 변성인지를 당신은 깨닫게 될 것입니다.
- !!!! 당신은 실제로 그 어떤 일이 일어나든지 상관없이 끊임없는 환희와 살아있는 느낌 속에서 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일어나는 일들 자체는 그리 대단한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들은 형상이고 오래 가지 않습니다. 그것은 현상적 존재의 놀이입니다. 형상을 가지고 노는 우주, 형상을 가지고 노는 의식입니다. 형상의 놀음을 내버려두십시오.
당신 자신도 거기에 참여해서, ‘나’를 구함이 없이 창조하면서 놀 수 있습니다. 그러면 아주 아름다운 것들을 창조해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창조 속에서 ‘나’를 구하려고 한다면 거기에 이런 부정적인 에너지 장이 만들어집니다. - ‘그것이 필요해.’ ‘그것을 원해.’ ‘그것을 가져야 해.’ ‘그것이 없으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니야.’ ‘그걸 잃으면 안 돼.’ 그러면 경쟁이 일어납니다. ‘그와 싸워야 돼.’ ‘내가 가지기 전에 그가 가져가버릴지도 몰라.’ - 우리 문명을 이렇게 만들어놓은 그런 모든 것 말입니다.
이것이 사라집니다. 그리고 의식의 힘이 당신을 관통해 흐릅니다. 그것은 창조하기를 너무나 좋아합니다. 그것은 당신을 통해서 창조합니다. 무엇이 창조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지금 그걸 알 필요도 없습니다.
그것이 다만 흐르게 하십시오. 그러면 당신의 삶에 남는 것은 오로지 지금 이 순간의 단순함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언제나 너무나 단순합니다.
더 이상 과거에서도, 미래에서도 나를 구하지 않으면 이 순간을 있는 그대로 존중할 수 있고, 그러한 태도가 지금을 포용하게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삶이기 때문입니다. 있는 것을 그대로 포용하는 것이 삶의 표현입니다.
‘예스! ....’
바로 이 포용을 통해서 당신은 형상을 품고 있는 그 공간을 알게 됩니다. 이것이 인류의 내면에 떠오르고 있는 새로운 의식상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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