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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불교

“깨달음에 대한 몇 가지 오해, 그리고 진실” 을 읽고

“깨달음에 대한 몇 가지 오해, 그리고 진실” 을 읽고

(이글은 위 제목으로 2009년 불교평론에 올라온 홍사성님의 글에 대한 반박 글 이다.)

 

 

이글은 제목처럼 깨달음에 대한 몇 가지 오해를 밝히고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깨달음에 이르는 길은 무엇인가를 밝히고자 쓴 글이다. 그는 아래와 같은 5가지 조항으로 글을 전개하고 있다. 그가 아함경을 통해서 정의한 내용들을 정리해 보고 그의 정의와 비판이 타당한 것인가를 논해 보고자 한다.

 

.깨달음의 이해, 무엇이 문제인가’

 

이 것은 마지막 조항. 깨달음에 대한 오해를 없애는 길과 겹치는 내용이므로 인용을 생략한다.

 

.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불교에서 깨달음(正覺)은 수행을 통해 도달하는 궁극적 경지를 뜻하는 말이다. 부처님 시대부터 사용한 말은 열반(涅槃) 해탈(解脫) 등이 있다. 부처님이 말한 정각의 내용은 한마디로 '연기(緣起)의 법칙'이다.

 

. 깨달음은 어떻게 해야 얻을 수 있는가

부처님은 모든 사람들이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을 제시했다. 사제팔정도(四諦八正道)가 그것이다.

 

. 깨달음의 경지는 누구나 도달할 수 없는 것인가 부처님의 ‘전도선언’은 부처님과 그 제자들이 세상과 인천의 올가미에서 벗어나 동등한 경지에 이르렀음을 말해주는 증거다. 비유하자면 '피타고라스 공식'을 발견한 사람은 수학자 피타고라스이지만 그것을 알고 이해하는 사람은 여럿이며, 또 여럿이어야 하는 것과 같다. 부처님은 수행자의 '좋은 친구(善知識)'를 자처했다. 지배자나 통치자가 아니라 순수한 승단의 일원이었다. 

 

 . 깨달은 성인과 못 깨달은 범부는 어떻게 다른가

사람은 누구나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의 여섯 가지 감각기관을 통해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의 여섯 가지 대상을 만난다. 이때 어리석은 사람은 ‘좋다()’거나 ‘싫다()’거나 ‘그저 그렇다(不苦不樂)’는 반응을 나타낸다. 이것 때문에 탐진치(貪瞋癡) 삼독을 불러일으킨다. 이에 비해 깨달은 사람은 결코 생물학적 또는 물리적 현상에서 자유로울 수 없지만 깨달은 사람은 그런 분별에 빠져 탐진치를 일으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 깨달음에 대한 오해를 없애는 길

 

첫째는 깨달음의 내용에 관한 것이다. 불교에서 깨달음이란 특별히 신비한 무엇이 아니라 평범하다시피 한 상식인 관계성의 원리(緣起)라는 것이다. 부처님은 이 원리를 파악하고 우주와 세계와 인생을 설명했다. 즉 모든 것은 인연관계에 의해 성립되었으며 그 인연이 사라지면 변하고 만다. 모든 존재는 무상의 법칙에 지배를 받으며, 따라서 실체적 자아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진실을 바로 알아채야 한다.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이라는 것이다.

 

둘째는 이러한 깨달음은 특정한 사람에게만 허락되는 것이 아니라 지혜로운 사람이면 누구나 가능하다는 것이다. 부처님 당시 수많은 아라한은 부처님과 같은 깨달음을 성취한 사람들이다. 그들이 깨달은 내용은 부처님이 그것과 동일한 것이다. 다만 부처님은 먼저 깨달은 분이라는 점에서 스승, 그 가르침을 받아 나중에 깨달은 분은 제자가 된 것뿐이다.

 

셋째는 깨달음에 이르는 길은 특별히 놀라운 어떤 방법이 있는 것이 아니라 팔정도를 제대로 닦으면 된다는 것이다. 모든 진리는 이미 부처님이 깨달아놓았다. 우리는 그분이 깨달은 진리를 진리로 인정하고, 부처님이 제시한 길로 걸어가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특별하게 새로운 깨달음을 추구하는 것은 어리석은 헛수고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넷째는 깨달은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는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흔히 깨달은 사람은 생물학적 또는 도덕적으로 완전히 자유로운 사람으로 생각하는데 이른 오해다. 부처님에 의하면 성자와 범부의 차이는 똑같은 사실에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갈라 진다고 한다. 즉 외부적 환경에 접촉할 때 탐진치 삼독을 일으키면 범부, 거기에서 벗어나는 존재는 성인이라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나라 불교가 생각하는 깨달음과 수행관을 보면 안타깝게도 과녁을 잘못 겨냥하고 있다는 느낌이 짙다. 지금까지 우리는 깨달음의 문제를 너무 신비한 무엇, 고답적인 무엇으로 생각하고 토론을 기피해왔다. 이것이 깨달음에 대한 오해를 증폭시킨 원인이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보다 다양하고 진지한 토론이 활발하게 진행돼야 한다. 그렇지 않고는 평생을 수행하고도 헛공부를 한 셈이 되기 때문이다. 

 

 

 이제 논자가 아함경을 바탕으로 정리한 내용을 토대로 저의 소견을 밝혀 볼까한다.

  그는 위 글에서 불교에서 깨달음이란 특별히 신비한 무엇이 아니라 평범하다시피 한 상식인 관계성의 원리(緣起)이고  깨달음에 이르는 길은 특별히 놀라운 어떤 방법이 있는 것이 아니라 팔정도를 제대로 닦으면 된다. 이러한 깨달음은 특정한 사람에게만 허락되는 것이 아니고 깨달은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는 외부적 환경에 접촉할 때 탐진치 삼독을 일으키면 범부, 거기에서 벗어나는 존재는 성인이다.라고 결론짓는다.

논자는 처음에 “깨달음이란 탐진치의 소멸” 혹은 “해탈(解脫)을 이루어 '다시는 윤회하지 않을 것을 스스로 알게 된다. 이것이 오분법신(五分法身)의 완성인 해탈지견(解脫知見)이며  완전한 깨달음, 열반이다.”라고  깨달음을 정의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상식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합리적인 내용이며, 그것에 동의하는 것이 깨달음이라는 것이다.” “즉 연기에 대한 바른 인식이 흔히 말하는 깨달음이다. 그러나 깨달음만으로는 마음의 평화 즉 열반을 얻지 못한다. 번뇌를 소멸시키는 수행 즉 사념처를 닦아야 한다.” 라고 말하며 깨달음에 대한 이중적인 설명을 내놓고 있다. 이러한 두 가지의 설명 중에서  뒤의 설명 즉, 깨달음이란 특별히 신비한 무엇이 아니라 평범하다시피 한 상식인 관계성의 원리(緣起)이고  깨달음에 이르는 길은 특별히 놀라운 어떤 방법이 있는 것이 아니라 팔정도를 제대로 닦으면 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논자의 주장대로라면  “흔히 말하는 깨달음”이란 사실은 정견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깨달음만으로는 마음의 평화 즉 열반을 얻지 못한다.”라는 문장은 “정견을 얻은 것만으로는  마음의 평화 즉 열반을 얻지 못한다.”라고 표현해야 할 것이다.

그는 또 구사론을 인용하며 견도(見道) 수도(修道) 무학도(無學道)중에서 견도의 단계를 그는 “흔히 말하는 깨달음”이라고 말한다.

붓다는 정견을 말할 때에도 번뇌가 있는 정견(유루의 정견)과 번뇌가 없는 성스러운 출세간의 정견(무루의 정견)(MN.3.72)으로 설명하고 있다. 구사론에서의 견도(見道)란 적어도 예류과 이상 즉, 4과를 얻은 성자들(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이 가지고 있는 무루의 정견이다. 이러한 예류과 이상의 정견(見道)을 “어렵다고 생각할 필요도 없다. 누구나 조금만 지혜가 있는 사람이면 된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동의하고, 인정하고, 그대로 살면 된다.” 라고 설명하는 것은 타당한 발언이라고 볼 수가 없다. 더 정확히 말하면 예류과를 얻은 사람은 다섯가지 하부의 결박((五下分結: 유신견(有身見 sakkayaditthi), (vicikiccha), 계금취(戒禁取sīlabbataparāmāsa), 애욕(愛欲kāmacchanda), 진에(瞋恚vyāpāda)중에서 다음 3가지 유신견(有身見), 의심(疑心), 계금취(戒禁取)라는 결박(족쇄)을 제거한 성인의 흐름에 합류한 사람을 말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상식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합리적인 내용이며, 그것에 동의하는 것이 깨달음이라는 것이다.”라는 깨달음의 단계는 견도(見道)의 단계라고 할 수 없으며 정견 중에서도 유루의 정견일 뿐이다.

논자처럼 유루의 정견을 깨달음 이라고 본다면 깨달음은 상식적인 것이고 쉽다고 말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나’라고 하는 유신견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깨달음이란 단어는 놔두고 자신이 유신견을 벗어났는가를 스스로 점검해 본다면 깨달음은 쉽다고 주장하지 못할 것이다.

  정견은 正法과 邪法의 판단기준이며 깨달음의 시작이므로 강조되어야 마땅하다. 시작의 중요성을 강조 하기 위해 정견을 강조하는 일은 타당한 일이겠지만 정견을 깨달음이라고 설명하거나 그래서 깨달음은 쉽다고 주장하는 것은 혼란스러운 주장이다. 붓다가 위대한 것은 그 어려운 깨달음을 누구나 갈 수 있게 깨달음의 길을 열어 보여주셨다는 데 있다. 그 길은 정견을 가지고(정견) 身口意로 선업을 지어야하고(정어,정사유,정명,정업) 게으르지 않아야 하고(정정진) 항상 깨어있어야(정념,정정) 한다. 붓다의 제자는 오장애라는 마음부수를 통해 자신을 점검할 수 있고 선정을 경험했다면 48선정 등에서 나타나는 마음부수를 통해 자신의 마음상태를 점검해 볼 수 있고, 사향사과의 성인들이 가지는 마음부수를 통해서, 10가지 족쇄의 유무를 통해서, 마지막으로는 탐진치의 유무를 관찰함으로서 자신의 수행상태를 점검해 볼 수가 있다. 이렇게 가는 길을 알고 목적지를 알고 가는 확신에 찬 사람에게 깨달음의 길은 어렵지 않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연기에 대한 바른 인식이 흔히 말하는 깨달음이다.”라고 말하며 깨달음은 상식적인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우리를 더욱 혼란스럽게 할 뿐이다. 이 글은 한국불교 수행자들은 깨달음으로 가는 길을 제대로 알고 있는가? 목적지를 제대로 알고 있는가? 하는 참신한 문제의식에서 시작된 글이지만 많은 아함부의 인용에도 불구하고 깨달음에 대한 정의가 이중적이고 깨달음에 이르는 길인 팔정도에 대한 설명은 자세하지 못하고(正念을 바른 생각라고 설명), 수행자가 자신을 점검하는 기준은 생략되어 있다. 그리고 논자는 수행방법의 하나인 묵언수행이나 동구불출이나 장좌불와 같은 특별한 수행을 해야 깨달음에 이른다고 생각하는 것을 비판했지만 이것은 한국의 수행자들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생각이라고 할 수가 없다. 이밖에도 “이제 이 세상에는 6명의 아라한이 있다.” 라는 선언은 붓다의 말이 아니라 경전 편집자의 말일 뿐이고 “아비달마철학은 삼세양중인과설(三世兩重因果)를 내세우며 ‘불변의 존재’에 대한 설명을 시도한다.”라는 주장도 바른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내용이 길어지므로 반론은 생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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