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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가니까야

대념처경 D22 각묵역-수식(數息)

마음챙김의 확립(대념처경, Mahaasatipat*t*haana Sutta, D22)

각묵스님 번역

 

I. 서언

1-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 세존께서는 꾸루 지방의 깜맛사담마라는 꾸루족들의 읍에 머무셨다. 그곳에서 세존께서는 “비구들이여”라고 비구들을 부르셨다. “세존이시여”라고 비구들은 세존께 응답했다.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1-2. “비구들이여, 이 도는 유일한 길이니 중생들의 청정을 위하고 근심과 탄식을 다 건너기 위한 것이며,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을 사라지게 하고 옳은 방법을 터득하고 열반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다. 그것은 바로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四念處]’이다.”

1-3. “무엇이 네 가지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身隨觀] 머문다.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면서 근면하게,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는 자 되어 머문다. 느낌에서 느낌을 관찰하며[受隨觀] 머문다.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면서 근면하게,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는 자 되어 머문다. 마음에서 마음을 관찰하며[心隨觀] 머문다.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면서 근면하게,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는 자 되어 머문다. 법에서 법을 관찰하며[法隨觀] 머문다.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면서 근면하게,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는 자 되어 머문다.”

 

 

1. Kāyānupassanā

1.1. Kāyānupassanāānāpānapabba

II. 몸의 관찰[身隨觀]

II-1. 들숨날숨에 대한 마음챙김

2-1. “비구들이여, 어떻게 비구가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 머무는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가 숲 속에 가거나 나무 아래에 가거나 외진 처소에 가서 가부좌를 틀고 몸을 곧추세우고 전면에 마음챙김을 확립하여 앉는다. 그는 마음챙겨 숨을 들이쉬고 마음챙겨 숨을 내쉰다. 길게 들이쉬면서 ‘길게 들이쉰다’고 꿰뚫어 알고(pajānāti), 길게 내쉬면서 ‘길게 내쉰다’고 꿰뚫어 안다. 짧게 들이쉬면서 ‘짧게 들이쉰다’고 꿰뚫어 알고, 짧게 내쉬면서 ‘짧게 내쉰다’고 꿰뚫어 안다. ‘온 몸을 경험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sikkhati) 온 몸을 경험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신행(身行)을 편안히 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신행을 편안히 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Kathañca pana, bhikkhave, bhikkhu kāye kāyānupassī viharati?

Idha, bhikkhave, bhikkhu araññagato  rukkhamūlagato  suññāgāragato  nisīdati pallaṅkaṁ ābhujitvā ujuṁ kāyaṁ paṇidhāya parimukhaṁ satiṁ upaṭṭhapetvā. So satova assasati, satova passasati.

Dīghaṁ  assasanto ‘dīghaṁ assasāmī’ti pajānāti, dīghaṁ  passasanto ‘dīghaṁ passasāmī’ti pajānāti.

Rassaṁ  assasanto ‘rassaṁ assasāmī’ti pajānāti, rassaṁ  passasanto ‘rassaṁ passasāmī’ti pajānāti.

‘Sabbakāyapaṭisaṁvedī assasissāmī’ti sikkhati, ‘sabbakāyapaṭisaṁvedī passasissāmī’ti sikkhati.

‘Passambhayaṁ kāyasaṅkhāraṁ assasissāmī’ti sikkhati, ‘passambhayaṁ kāyasaṅkhāraṁ passasissāmī’ti sikkhati.

 

 

 

(아래 내용부터 번역에서 빠져서 다른 곳에서 가져옴)

비구들이여, 마치 숙련된 도공이나 도공의 도제가 길게 돌리면서 길게 돌린다.’고 꿰뚫어 알고 짧게 돌리면서 짧게 돌린다.’고 꿰뚫어 아는 것처럼, 그와 같이 비구는 길게 들이쉬면서 ‘길게 들이쉰다’고 꿰뚫어 알고(pajānāti), 길게 내쉬면서 ‘길게 내쉰다’고 꿰뚫어 안다. 짧게 들이쉬면서 ‘짧게 들이쉰다’고 꿰뚫어 알고, 짧게 내쉬면서 ‘짧게 내쉰다’고 꿰뚫어 안다. ‘온 몸을 경험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sikkhati) 온 몸을 경험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신행(身行)을 편안히 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신행을 편안히 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이와 같이 안으로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身随観] 머문다. 혹은 밖으로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 머문다. 혹은 안팎으로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 머문다. 혹은 몸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관찰하며 머문다. 혹은 몸에서 사라지는 현상을 관찰하며 머문다. 혹은 몸에서 일어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하는 현상을 관찰하며 머문다. 혹은 그는 몸이 있구나.’라고 마음챙김을 잘 확립하나니 지혜만이 있고 마음챙김만이 현전할 때까지. 이제 그는 [갈애와 견해에] 의지하지 않고 머문다. 그는 세상에서 아무 것도 움켜쥐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비구는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 머문다.”

Seyyathāpi, bhikkhave, dakkho bhamakāro  bhamakārantevāsī  dīghaṁ  añchanto ‘dīghaṁ añchāmī’ti pajānāti, 

rassaṁ  añchanto ‘rassaṁ añchāmī’ti pajānāti; evameva kho, bhikkhave, bhikkhu dīghaṁ  assasanto ‘dīghaṁ 

assasāmī’ti pajānāti, dīghaṁ  passasanto ‘dīghaṁ passasāmī’ti pajānāti, rassaṁ  assasanto ‘rassaṁ 

assasāmī’ti pajānāti, rassaṁ  passasanto ‘rassaṁ passasāmī’ti pajānāti. ‘Sabbakāyapaṭisaṁvedī assasissāmī’ti 

sikkhati, ‘sabbakāyapaṭisaṁvedī passasissāmī’ti sikkhati, ‘passambhayaṁ kāyasaṅkhāraṁ assasissāmī’ti 

sikkhati, ‘passambhayaṁ kāyasaṅkhāraṁ passasissāmī’ti sikkhati.

Iti ajjhattaṁ  kāye kāyānupassī viharati, bahiddhā  kāye kāyānupassī viharati, ajjhattabahiddhā  kāye 

kāyānupassī viharati. Samudayadhammānupassī  kāyasmiṁ viharati, vayadhammānupassī  kāyasmiṁ 

viharati, samudayavayadhammānupassī  kāyasmiṁ viharati. ‘Atthi kāyo’ti  panassa sati paccupaṭṭhitā hoti 

yāvadeva ñāṇamattāya paṭissatimattāya anissito ca viharati, na ca kiñci loke upādiyati. Evampi kho, bhikkhave, 

bhikkhu kāye kāyānupassī viharati.

 

* upādiyati: kāmupādānaṃ vā diṭṭhupādānaṃ vā sīlab­ba­tu­pādā­naṃ vā attavā­du­pādā­naṃ

 

II-2. 네 가지 자세[四威儀]

3. “다시 비구들이여, 비구는 걸어가면서 ‘걷고 있다’고 꿰뚫어 알고, 서있으면서 ‘서있다’고 꿰뚫어 알며, 앉아있으면서 ‘앉아있다’고 꿰뚫어 알고, 누워있으면서 ‘누워있다’고 꿰뚫어 안다. 또 그의 몸이 다른 어떤 자세를 취하고 있든 그 자세대로 꿰뚫어 안다.”

“이와 같이 안으로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身隨觀] 머문다. … 그는 세상에서 아무 것도 움켜쥐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비구는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 머문다.”

 

 

II-3. 분명하게 알아차림

4. “다시 비구들이여, 비구는 나아갈 때도 물러날 때도 [자신의 거동을] 분명히 알면서[正知] 행한다(sampajāna-kāri). 앞을 볼 때도 돌아 볼 때도 분명히 알면서 행한다. 구부릴 때도 펼 때도 분명히 알면서 행한다. 가사․발우․의복을 지닐 때도 분명히 알면서 행한다. 먹을 때도 마실 때도 씹을 때도 맛볼 때도 분명히 알면서 행한다. 대소변을 볼 때도 분명히 알면서 행한다. 걸으면서․서면서․앉으면서․잠들면서․잠을 깨면서․말하면서․침묵하면서도 분명히 알면서 행한다.”

“이와 같이 안으로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身隨觀] 머문다. … 그는 세상에 대해서 아무 것도 움켜쥐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비구는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 머문다.”

 

 

II-4. 몸의 32가지 부위에 대한 혐오

5-1. “다시 비구들이여, 비구는 이 몸이 여러 가지 부정(不淨)한 것으로 가득 차 있음을 발바닥에서부터 위로 올라가며 그리고 머리털에서부터 내려가며 반조한다. 즉 ‘이 몸에는 머리털․몸털․손발톱․이빨․살갗․살․힘줄․뼈․골수․콩팥․염통․간․근막․지라․허파․큰창자․작은창자․위․똥․쓸개즙․가래․고름․피․땀․굳기름․눈물․[피부의] 기름기․침․콧물․관절활액․오줌 등이 있다’고.

대념처경 주석 2-4. 몸의 32부위

5-2. 비구들이여, 이는 마치 양쪽에 아가리가 있는 자루에 여러 가지 곡식, 즉 밭벼․논벼․콩․완두․기장․현미 등이 가득 담겨 있는데 어떤 눈 밝은 사람 이 그 자루를 풀고 일일이 헤쳐 보면서 ‘이것은 밭벼, 이것은 논벼, 이것은 콩, 이것은 완두, 이것은 기장, 이것은 현미’라 하는 것과 같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비구는 여러 가지 부정한 것으로 가득 차 있는 이 몸을 발바닥에서부터 위로 올라가며 그리고 머리털에서부터 아래로 내려가며 반조한다. 즉 ‘이 몸에는 머리털․몸털․손발톱․이․살갗․살․힘줄․뼈․골수․콩팥․염통․간․근막․지라․허파․큰창자․작은창자․위․똥․쓸개즙․가래․고름․피․땀․굳기름․눈물․[피부의] 기름기․침․콧물․관절활액․오줌 등이 있다’고.”

“이와 같이 안으로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身隨觀] 머문다. … 그는 세상에 대해서 아무 것도 움켜쥐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비구는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 머문다.”

 

II-5. 네 가지 근본물질[四大]

6. “다시 비구들이여, 비구는 이 몸을 처해진 대로 놓여진 대로 요소[界]별로 고찰한다. ‘이 몸에는 땅[地]의 요소, 물[水]의 요소, 불[火]의 요소, 바람[風]의 요소가 있다’고.

비구들이여, 마치 솜씨 좋은 백정이나 그 조수가 소를 잡아서 각을 뜬 다음 큰길 네 거리에 이를 벌려놓고 앉아있는 것과 같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비구는 이 몸을 처해진 대로 놓여진 대로 요소[界]별로 고찰한다. ‘이 몸에는 땅의 요소, 물의 요소, 불의 요소, 바람의 요소가 있다’고.”

“이와 같이 안으로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身隨觀] 머문다. … 그는 세상에 대해서 아무 것도 움켜쥐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비구는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 머문다.”

 

 

II-6. 아홉 가지 공동묘지의 관찰

7. “다시 비구들이여, ① 비구는 마치 묘지에 버려진, 죽은 지 하루나 이틀 또는 사흘 된 시체가 부풀고 검푸르게 되고 문드러지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는 자신의 몸을 그에 비추어 바라본다(upasamharati). ‘이 몸 또한 그와 같고, 그와 같이 될 것이며, 그에서 벗어나지 못하리라’고.”

“이와 같이 안으로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身隨觀] 머문다. … 그는 세상에 대해서 아무 것도 움켜쥐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비구는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 머문다.”

8. “다시 비구들이여, ② 비구는 마치 묘지에 버려진 시체를 까마귀가 마구 쪼아 먹고, 솔개가 마구 쪼아 먹고, 독수리가 마구 쪼아 먹고, 개가 마구 뜯어먹고, 자칼이 마구 뜯어먹고, 수없이 많은 갖가지 벌레들이 덤벼들어 파먹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는 자신의 몸을 그에 비추어 바라본다. ‘이 몸 또한 그와 같고, 그와 같이 될 것이며, 그에서 벗어나지 못하리라’고.”

“이와 같이 안으로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身隨觀] 머문다. … 그는 세상에 대해서 아무 것도 움켜쥐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비구는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 머문다.”

 

9. 다시 비구들이여, ③ 비구는 마치 묘지에 버려진 시체가 해골이 되어 살과 피가 묻은 채 힘줄로 얽히어 서로 이어져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 ④ 해골이 되어 살은 없이 피만 엉긴 채 힘줄로 얽히어 서로 이어져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 ⑤ 해골이 되어 살과 피는 없고 힘줄만 남아 서로 이어져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 ⑥ 해골이 되어 힘줄도 사라지고 뼈들이 흩어져서 여기에는 손뼈, 저기에는 발뼈, 또 저기에는 정강이뼈, 저기에는 넓적다리뼈, 저기에는 엉덩이뼈, 저기에는 등뼈, 저기에는 갈빗대, 저기에는 가슴뼈, 저기에는 팔뼈, 저기에는 어깨뼈, 저기에는 목뼈, 저기에는 턱뼈, 저기에는 치골, 저기에는 두개골 등이 사방에 널려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는 자신의 몸을 그에 비추어 바라본다. ‘이 몸도 또한 그와 같고, 그와 같이 될 것이며, 그에서 벗어나지 못하리라’고.

“이와 같이 안으로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身隨觀] 머문다. … 그는 세상에 대해서 아무 것도 움켜쥐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비구는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 머문다.”

10-1. “다시 비구들이여, ⑦ 비구는 마치 묘지에 버려진 시체가 해골이 되어 뼈가 조개껍질 색깔같이 하얗게 백골이 된 것을 보게 될 것이다 … ⑧ 해골이 되어 풍상을 겪어 단지 뼈 무더기가 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 ⑨ 해골이 되었다가 다시 삭아서 티끌로 변한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그는 자신의 몸을 그에 비추어 바라본다. ‘이 몸도 또한 그와 같고, 그와 같이 될 것이며, 그에서 벗어나지 못하리라’고.”

10-2. “이와 같이 안으로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身隨觀] 머문다. 혹은 밖으로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 머문다. 혹은 안팎으로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 머문다. 혹은 몸에서 일어나는 현상[法]을 관찰하며 머문다. 혹은 몸에서 사라지는 현상을 관찰하며 머문다. 혹은 몸에서 일어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하는 현상을 관찰하며 머문다. 혹은 그는 ‘몸이 있구나’라고 마음챙김을 잘 확립하나니 지혜만이 있고 마음챙김만이 현전할 때까지. 이제 그는 [갈애와 사견에] 의지하지 않고 머문다. 그는 세상에 대해서 아무 것도 움켜쥐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비구는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 머문다.”

 

 

III. 느낌의 관찰[受隨觀]

11-1. “비구들이여, 어떻게 비구가 느낌에서 느낌을 관찰하며[受隨觀] 머무는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즐거운 느낌을 느끼면서 ‘즐거운 느낌을 느낀다’고 꿰뚫어 안다. 괴로운 느낌을 느끼면서 ‘괴로운 느낌을 느낀다’고 꿰뚫어 안다.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느끼면서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느낀다’고 꿰뚫어 안다.

세간적인 즐거운 느낌을 느끼면서 ‘세간적인 즐거운 느낌을 느낀다’고 꿰뚫어 안다. 출세간적인 즐거운 느낌을 … 세간적인 괴로운 느낌을 … 출세간적인 괴로운 느낌을 … 세간적인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 출세간적인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느끼면서 ‘출세간적인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느낀다’고 꿰뚫어 안다.”

11-2. “이와 같이 안으로 느낌에서 느낌을 관찰하며[受隨觀] 머문다. 혹은 밖으로 느낌에서 느낌을 관찰하며 머문다. 혹은 안팎으로 느낌에서 느낌을 관찰하며 머문다. 혹은 느낌에서 일어나는 현상[法]을 관찰하며 머문다. 혹은 느낌에서 사라지는 현상을 관찰하며 머문다. 혹은 느낌에서 일어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하는 현상을 관찰하며 머문다. 혹은 그는 ‘느낌이 있구나’라고 마음챙김을 잘 확립하나니 지혜만이 있고 마음챙김만이 현전할 때까지. 이제 그는 [갈애와 사견에] 의지하지 않고 머문다. 그는 세상에 대해서 아무 것도 움켜쥐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비구는 느낌에서 느낌을 관찰하며 머문다.”

 

 

IV. 마음의 관찰[心隨觀]

12-1. “비구들이여, 어떻게 비구가 마음에서 마음을 관찰하며[心隨觀] 머무는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① 탐욕이 있는 마음을 탐욕이 있는 마음이라 꿰뚫어 안다. 탐욕을 여읜 마음을 탐욕이 없는 마음이라 꿰뚫어 안다. ② 성냄이 있는 … 성냄을 여읜 … ③ 미혹이 있는 … 미혹을 여읜 … ④ 위축된 … 산란한 … ⑤ 고귀한 … 고귀하지 않은 … ⑥ [아직도] 위가 남아있는 … [더 이상] 위가 없는[無上心] … ⑦ 삼매에 든 … 삼매에 들지 않은 … ⑧ 해탈한 … 해탈하지 않은 마음을 해탈하지 않은 마음이라 꿰뚫어 안다.”

12-2. “이와 같이 안으로 마음에서 마음을 관찰하며[心隨觀] 머문다. 혹은 밖으로 마음에서 마음을 관찰하며 머문다. 혹은 안팎으로 마음에서 마음을 관찰하며 머문다. 혹은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法]을 관찰하며 머문다. 혹은 마음에서 사라지는 현상을 관찰하며 머문다. 혹은 마음에서 일어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하는 현상을 관찰하며 머문다. 혹은 그는 ‘마음이 있구나’라고 마음챙김을 잘 확립하나니 지혜만이 있고 마음챙김만이 현전할 때까지. 이제 그는 [갈애와 사견에] 의지하지 않고 머문다. 그는 세상에 대해서 아무 것도 움켜쥐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비구는 마음에서 마음을 관찰하며 머문다.”

 

 

V. 법의 관찰[法隨觀]

 

V-1. 다섯 가지 장애[五蓋]

13-1. “비구들이여, 어떻게 비구가 법에서 법을 관찰하며[法隨觀] 머무는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다섯 가지 장애[五蓋]의 법에서 법을 관찰하며 머문다. 비구들이여, 어떻게 비구가 다섯 가지 장애의 법에서 법을 관찰하며 머무는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자기에게 감각 욕망이 있을 때 ‘내게 감각 욕망이 있다’고 꿰뚫어 알고, 감각 욕망이 없을 때 ‘내게 감각 욕망이 없다’고 꿰뚫어 안다. 비구는 전에 없던 감각 욕망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꿰뚫어 알고, 일어난 감각 욕망을 어떻게 제거하는지 꿰뚫어 알며, 어떻게 하면 제거한 감각 욕망이 앞으로 다시 일어나지 않는지 꿰뚫어 안다.

13-2. 자기에게 악의가 있을 때 ‘내게 악의가 있다’고 꿰뚫어 알고, 악의가 없을 때 ‘내게 악의가 없다’고 꿰뚫어 안다. 비구는 전에 없던 악의가 어떻게 일어나는지 꿰뚫어 알고, 일어난 악의를 어떻게 제거하는지 꿰뚫어 알며, 어떻게 하면 제거 한 악의가 앞으로 다시 일어나지 않는지 꿰뚫어 안다.

13-3. 자기에게 해태와 혼침이 있을 때 ‘내게 해태와 혼침이 있다’고 꿰뚫어 알고, 해태와 혼침이 없을 때 ‘내게 해태와 혼침이 없다’고 꿰뚫어 안다. 비구는 전에 없던 해태와 혼침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꿰뚫어 알고, 일어난 해태와 혼침을 어떻게 제거하는지 꿰뚫어 알며, 어떻게 하면 제거한 해태와 혼침이 앞으로 다시 일어나지 않는지 꿰뚫어 안다.

13-4. 자기에게 들뜸과 후회가 있을 때 ‘내게 들뜸과 후회가 있다’고 꿰뚫어 알고, 들뜸과 후회가 없을 때 ‘내게 들뜸 과 후회가 없다’고 꿰뚫어 안다. 비구는 전에 없던 들뜸과 후회가 어떻게 일어나는지 꿰뚫어 알고, 일어난 들뜸과 후회를 어떻게 제거하는지 꿰뚫어 알며, 어떻게 하면 제거한 들뜸과 후회가 앞으로 다시 일어나지 않는지 꿰뚫어 안다.

13-5. 자기에게 회의적 의심이 있을 때 ‘내게 의심이 있다’고 꿰뚫어 알고, 의심이 없을 때 ‘내게 의심이 없다’고 꿰뚫어 안다. 비구는 전에 없던 의심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꿰뚫어 알고, 일어난 의심을 어떻게 제거하는지 꿰뚫어 알며, 어떻게 하면 제거한 의심이 앞으로 다시 일어나지 않는지 꿰뚫어 안다.”

13-6. 이와 같이 안으로 법에서 법을 관찰하며[法隨觀] 머문다. 혹은 밖으로 법에서 법을 관찰하며 머문다. 혹은 안팎으로 법에서 법을 관찰하며 머문다. 혹은 법에서 일어나는 현상[法]을 관찰하며 머문다. 혹은 법에서 사라지는 현상을 관찰하며 머문다. 혹은 법에서 일어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하는 현상을 관찰하며 머문다. 혹은 그는 ‘법이 있구나’라고 마음챙김을 잘 확립하나니 지혜만이 있고 마음챙김만이 현전할 때까지. 이제 그는 [갈애와 사견에] 의지하지 않고 머문다. 그는 세상에 대해서 아무 것도 움켜쥐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비구는 다섯 가지 장애의 법에서 법을 관찰하며 머문다.

 

 

V-2. 다섯 가지 무더기[五蘊]

14. 다시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다섯 가지 취착하는 무더기[五取蘊]들의 법에서 법을 관찰하며[法隨觀] 머문다. 비구들이여, 어떻게 비구가 다섯 가지 취착하는 무더기들의 법에서 법을 관찰하며 머무는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이것이 물질이다. 이것이 물질의 일어남이다. 이것이 물질의 사라짐이다. 이것이 느낌이다. 이것이 느낌의 일어남이다. 이것이 느낌의 사라짐이다. 이것이 인식이다. 이것이 인식의 일어남이다. 이것이 인식의 사라짐이다. 이것이 상카라[行]들이다. 이것이 상카라의 일어남이다. 이것이 상카라들의 사라짐이다. 이것이 알음알이다. 이것이 알음알이의 일어남이다. 이것이 알음알이의 사라짐이다’라고 [관찰하며 머문다].

이와 같이 안으로 법에서 법을 관찰하며[法隨觀] 머문다. … 그는 세상에 대해서 아무 것도 움켜쥐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비구는 다섯 가지 취착하는 무더기들의 법에서 법을 관찰하며 머문다.

 

 

 

V-3. 여섯 가지 감각장소[六處]

15. 다시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여섯 가지 안팎의 감각장소[六內外處]의 법에서 법을 관찰하며[法隨觀] 머문다. 비구들이여, 어떻게 비구가 여섯 가지 안팎의 감각장소의 법에서 법을 관찰하며 머무는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눈을 꿰뚫어 안다. 형상을 꿰뚫어 안다. 이 둘을 조건으로[緣] 일어난 족쇄도 꿰뚫어 안다. 전에 없던 족쇄가 어떻게 일어나는지 꿰뚫어 알고, 일어난 족쇄를 어떻게 제거하는지 꿰뚫어 알며, 어떻게 하면 제거한 족쇄가 앞으로 다시 일어나지 않는지 꿰뚫어 안다.

귀를 꿰뚫어 안다. 소리를 꿰뚫어 안다. … 코를 꿰뚫어 안다. 냄새를 꿰뚫어 안다. … 혀를 꿰뚫어 안다. 맛을 꿰뚫어 안다. … 몸을 꿰뚫어 안다. 감촉을 꿰뚫어 안다. … 마노를 꿰뚫어 안다. 이 둘을 조건으로 일어난 족쇄도 꿰뚫어 안다. 법을 꿰뚫어 안다. 전에 없던 족쇄가 어떻게 일어나는지 꿰뚫어 알고, 일어난 족쇄를 어떻게 제거하는지 꿰뚫어 알며, 어떻게 하면 제거한 족쇄가 앞으로 다시 일어나지 않는지 꿰뚫어 안다.

이와 같이 안으로 법에서 법을 관찰하며[法隨觀] 머문다. … 그는 세상에 대해서 아무 것도 움켜쥐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비구는 여섯 가지 안팎의 감각장소의 법에서 법을 관찰하며 머문다.

 

 

V-4. 일곱 가지 깨달음의 구성요소[七覺支]

16-1. “다시 비구들이여, 비구는 일곱 가지 깨달음의 구성요소[七覺支]들의 법에서 법을 관찰하며 머문다. 비구들이여, 어떻게 비구가 일곱 가지 깨달음의 구성요소들의 법에서 법을 관찰하며 머무는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자기에게 마음챙김의 깨달음의 구성요소[念覺支]가 있을 때 ‘내게 마음챙김의 깨달음의 구성요소가 있다’고 꿰뚫어 알고, 마음챙김의 깨달음의 구성요소가 없을 때 ‘내게 마음챙김의 깨달음의 구성요소가 없다’고 꿰뚫어 안다. 비구는 전에 없던 마음챙김의 깨달음의 구성요소가 어떻게 일어나는지 꿰뚫어 알고, 일어난 마음챙김의 깨달음의 구성요소를 어떻게 닦아서 성취하는지 꿰뚫어 안다.

16-2. 자기에게 법을 간택하는 깨달음의 구성요소[擇法覺支]가 있을 때 … 정진의 깨달음의 구성요소[精進覺支]가 있을 때 … 희열의 깨달음의 구성요소[喜覺支]가 있을 때 … 편안함의 깨달음의 구성요소[輕安覺支]가 있을 때 … 삼매의 깨달음의 구성요소[定覺支]가 있을 때 … 평온의 깨달음의 구성요소[捨覺支]가 있을 때 ‘내게 평온의 깨달음의 구성요소가 있다’고 꿰뚫어 알고, 평온의 깨달음의 구성요소가 없을 때 ‘내게 평온의 깨달음의 구성요소가 없다’고 꿰뚫어 안다. 비구는 전에 없던 평온의 깨달음의 구성요소가 어떻게 일어나는지 꿰뚫어 알고, 일어난 평온의 깨달음의 구성요소를 어떻게 닦아서 성취하는지 꿰뚫어 안다.

16-3. 이와 같이 안으로 법에서 법을 관찰하며[法隨觀] 머문다. … 그는 세상에 대해서 아무 것도 움켜쥐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비구는 일곱 가지 깨달음의 구성요소들의 법에서 법을 관찰하며 머문다.

 

 

V-5.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四聖諦]

17. “다시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四聖諦]의 법에서 법을 관찰하며[法隨觀] 머문다. 비구들이여, 어떻게 비구가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의 법에서 법을 관찰하며 머무는가? 여기 비구는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이것이 괴로움의 일어남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이것이 괴로움의 지멸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이것이 괴로움의 지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V-5-1.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苦聖諦]

18-1.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괴로움인가? 태어남도 괴로움이다. 늙음도 괴로움이다. 병도 괴로움이다. 죽음도 괴로움이다. 근심․탄식․육체적 고통․정신적 고통․절망도 괴로움이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도 괴로움이다. 요컨대 다섯 가지 취착하는 무더기[五取蘊]들 자체가 괴로움이다.”

18-2.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태어남인가? 이런 저런 중생들의 무리로부터 이런 저런 중생들의 태어남, 출생, 도래함, 생김, 탄생, 오온의 나타남, 감각장소[處]를 획득함 ―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태어남이라 한다.”

18-3.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늙음인가? 이런 저런 중생들의 무리 가운데서 이런 저런 중생들의 늙음, 노쇠함, 부서진 [이빨], 희어진 [머리털], 주름진 피부, 수명의 감소, 감각기능[根]의 허약함 ― 이를 일러 늙음이라 한다.”

18-4.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죽음인가? 이런 저런 중생들의 무리로부터 이런 저런 중생들의 종말, 제거됨, 부서짐, 사라짐, 사망, 죽음, 서거, 오온의 부서짐, 시체를 안치함, 생명기능[命根]의 끊어짐 ― 이를 일러 죽음이라 한다.”

18-5.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근심인가? 비구들이여, 이런 저런 불행을 만나고 이런 저런 괴로운 현상에 맞닿은 사람의 근심, 근심함, 근심스러움, 내면의 근심, 내면의 슬픔 ― 이를 일러 근심이라 한다.”

18-6.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탄식인가? 비구들이여, 이런 저런 불행을 만나고 이런 저런 괴로운 법에 맞닿은 사람의 한탄, 비탄, 한탄함, 비탄함, 한탄스러움, 비탄스러움 ― 이를 일러 탄식이라 한다.”

18-7.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육체적 고통인가? 비구들이여, 몸의 고통, 몸의 불편함, 몸에 맞닿아 생긴 고통스럽고 불편한 느낌 ― 이를 일러 육체적 고통이라 한다.”

18-8.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정신적 고통인가? 비구들이여, 정신적인 불편함, 마음에 맞닿아 생긴 고통스럽고 불편한 느낌 ― 이를 일러 정신적 고통이라 한다.”

18-9.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절망인가? 비구들이여, 이런 저런 불행을 만나고 이런 저런 괴로운 법에 맞닿은 사람의 실망, 절망, 실망함, 절망함 ― 이를 일러 절망이라 한다.”

18-10.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괴로움인가? 비구들이여, 태어나기 마련인 중생들에게 이런 바람이 일어난다. ‘오 참으로 우리에게 태어나는 법이 있지 않기를! 참으로 그 태어남이 우리에게 오지 않기를!’이라고. 그러나 이것은 원함으로서 얻어지지 않는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이것도 괴로움이다. 비구들이여, 늙기 마련인 중생들에게 … 병들기 마련인 중생들에게 … 죽기 마련인 중생들에게 … 근심/탄식/육체적 고통/정신적 고통/절망을 하기 마련인 중생들에게 이런 바람이 일어난다. ‘오 참으로 우리에게 근심/탄식/육체적 고통/정신적 고통/절망하는 법이 있지 않기를! 참으로 그 근심/탄식/육체적 고통/정신적 고통/절망이 우리에게 오지 않기를!’이라고. 그러나 이것은 원함으로서 얻어지지 않는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이것도 역시 괴로움이다.”

18-11.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요컨대 다섯 가지 취착하는 무더기[五取蘊]들 자체가 괴로움인가? 그것은 취착하는 물질의 무더기[色取蘊], 취착하는 느낌의 무더기[受取蘊], 취착하는 인식의 무더기[想取蘊], 취착하는 상카라들의 무더기[行取蘊], 취착하는 알음알이의 무더기[識取蘊]이다. 비구들이여, 요컨대 취착하는 이 다섯 가지 무더기들 자체가 괴로움이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라 한다.”

 

 

V-5-2. 괴로움의 일어남의 성스러운 진리[集聖諦]

19-1.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괴로움의 일어남의 성스러운 진리[苦集聖諦]인가? 그것은 갈애이니, 다시 태어남을 가져오고 환희와 탐욕이 함께 하며 여기저기서 즐기는 것이다. 즉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慾愛], 존재에 대한 갈애[有愛],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갈애[無有愛]가 그것이다.”

19-2. “다시 비구들이여, 이런 갈애는 어디서 일어나서 어디서 자리 잡는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 있으면 거기서 이 갈애는 일어나고 거기서 자리 잡는다. 그러면 세상에서 어떤 것이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인가? 눈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귀는 … 코는 … 혀는 … 몸은 … 마노는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는 일어나고 여기서 자리 잡는다. 형상은 … 소리는 … 냄새는 … 맛은 … 감촉은 … [마노의 대상인] 법[法]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는 일어나고 여기서 자리 잡는다. 눈의 알음알이는 … 귀의 알음알이는 … 코의 알음알이는 … 혀의 알음알이는 … 몸의 알음알이는 … 마노의 알음알이는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는 일어나고 여기서 자리 잡는다.”

19-3. “눈의 감각접촉[觸]은 … 귀의 감각접촉은 … 코의 감각접촉은 … 혀의 감각접촉은 … 몸의 감각접촉은 … 마노의 감각접촉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는 일어나고 여기서 자리 잡는다. 눈의 감각접촉에서 생긴 느낌은 … 귀의 감각접촉에서 생긴 느낌은 … 코의 감각접촉에서 생긴 느낌은 … 혀의 감각접촉에서 생긴 느낌은 … 몸의 감각접촉에서 생긴 느낌은 … 마노의 감각접촉에서 생긴 느낌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는 일어나고 여기서 자리 잡는다. 눈의 인식은 … 귀의 인식은 … 코의 인식은 … 혀의 인식은 … 몸의 인식은 … 마노의 인식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는 일어나고 여기서 자리 잡는다.”

19-4. “눈의 의도는 … 귀의 의도는 … 코의 의도는 … 혀의 의도는 … 몸의 의도는 … 마노의 의도는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는 일어나고 여기서 자리 잡는다. 눈의 갈애는 … 귀의 갈애는 … 코의 갈애는 … 혀의 갈애는 … 몸의 갈애는 … 마노의 갈애는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는 일어나고 여기서 자리 잡는다. 눈의 일으킨 생각[尋]은 … 귀의 일으킨 생각은 … 코의 일으킨 생각은 … 혀의 일으킨 생각은 … 몸의 일으킨 생각은 … 마노의 일으킨 생각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는 일어나고 여기서 자리 잡는다. 눈의 지속적인 고찰[伺]은 … 귀의 지속적인 고찰은 … 코의 지속적인 고찰은 … 혀의 지속적인 고찰은 … 몸의 지속적인 고찰은 … 마노의 지속적인 고찰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는 일어나고 여기서 자리 잡는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괴로움의 일어남의 성스러운 진리라 한다.”

 

 

V-5-3. 괴로움의 지멸의 성스러운 진리[滅聖諦]

20-1.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괴로움의 지멸의 성스러운 진리[苦滅聖諦]인가? 갈애가 남김없이 빛바래어 지멸함, 버림, 놓아버림, 벗어남, 집착 없음이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괴로움의 지멸의 성스러운 진리라 한다.”

20-2. “다시 비구들이여, 그런 이 갈애는 어디서 없어지고 어디서 지멸되는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 있으면 거기서 이 갈애는 없어지고 거기서 지멸된다. 그러면 세상에서 어떤 것이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인가? 눈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귀는 … 코는 … 혀는 … 몸은 … 마음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는 없어지고 여기서 지멸된다. 형상은 … 소리는 … 냄새는 … 맛은 … 감촉은 … [마노의 대상인] 법[法]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는 없어지고 여기서 지멸된다. 눈의 알음알이는 … 귀의 알음알이는 … 코의 알음알이는 … 혀의 알음알이는 … 몸의 알음알이는 … 마노의 알음알이는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는 없어지고 여기서 지멸된다.”

20-3. “눈의 감각접촉은 … 귀의 감각접촉은 … 코의 감각접촉은 … 혀의 감각접촉은 … 몸의 감각접촉은 … 마노의 감각접촉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는 없어지고 여기서 지멸된다. 눈의 감각접촉에서 생긴 느낌은 … 귀의 감각접촉에서 생긴 느낌은 … 코의 감각접촉에서 생긴 느낌은 … 혀의 감각접촉에서 생긴 느낌은 … 몸의 감각접촉에서 생긴 느낌은 … 마노의 감각접촉에서 생긴 느낌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는 없어지고 여기서 지멸된다. 눈의 인식은 … 귀의 인식은 … 코의 인식은 … 혀의 인식은 … 몸의 인식은 … 마노의 인식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는 없어지고 여기서 지멸된다.”

20-4. “눈의 의도는 … 귀의 의도는 … 코의 의도는 … 혀의 의도는 … 몸의 의도는 … 마노의 의도는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는 없어지고 여기서 지멸된다. 눈의 갈애는 … 귀의 갈애는 … 코의 갈애는 … 혀의 갈애는 … 몸의 갈애는 … 마노의 갈애는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는 없어지고 여기서 지멸된다. 눈의 일으킨 생각은 … 귀의 일으킨 생각은 … 코의 일으킨 생각은 … 혀의 일으킨 생각은 … 몸의 일으킨 생각은 … 마노의 일으킨 생각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는 없어지고 여기서 지멸된다. 눈의 지속적인 고찰은 … 귀의 지속적인 고찰은 … 코의 지속적인 고찰은 … 혀의 지속적인 고찰은 … 몸의 지속적인 고찰은 … 마노의 지속적인 고찰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는 없어지고 여기서 지멸된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괴로움의 지멸의 성스러운 진리라 한다.”

 

 

 

V-5-4. 도닦음의 성스러운 진리[道聖諦]

21-1.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괴로움의 지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의 성스러운 진리[苦滅道聖諦]인가? 그것은 바로 여덟 가지 구성요소를 가진 성스러운 도[八支聖道]이니, 즉 바른 견해[正見], 바른 사유[正思惟], 바른 말[正語], 바른 행위[正業], 바른 생계[正命], 바른 정진[正精進], 바른 마음챙김[正念], 바른 삼매[正定]이다.”

21-2.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바른 견해[正見]인가? 비구들이여, 괴로움에 대한 지혜, 괴로움의 일어남에 대한 지혜, 괴로움의 지멸에 대한 지혜, 괴로움의 지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에 대한 지혜 ― 이를 일러 바른 견해라 한다.”

21-3.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바른 사유[正思惟]인가? 비구들이여, 출리에 대한 사유, 악의 없음에 대한 사유, 해코지 않음[不害]에 대한 사유 ― 이를 일러 바른 사유라 한다.”

21-4.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바른 말[正語]인가? 비구들이여, 거짓말을 삼가하고 중상모략을 삼가하고 욕설을 삼가하고 잡담을 삼가하는 것 ― 이를 일러 바른 말이라 한다.”

21-5.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바른 행위[正業]인가? 비구들이여, 살생을 삼가하고 도둑질을 삼가하고 삿된 음행을 삼가하는 것 ― 이를 일러 바른 행위라 한다.”

21-6.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바른 생계[正命]인가? 비구들이여, 성스러운 제자는 삿된 생계를 제거하고 바른 생계로 생명을 영위한다. ―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바른 생계라 한다.”

21-7.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바른 정진[正精進]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사악하고 해로운 법[不善法]들을 일어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의욕을 생기게 하고 정진하고 힘을 내고 마음을 다잡고 애를 쓴다. 이미 일어난 사악하고 해로운 법들을 제거하기 위하여 의욕을 생기게 하고 정진하고 힘을 내고 마음을 다잡고 애를 쓴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유익한 법[善法]들을 일어나도록 하기 위해서 의욕을 생기게 하고 정진하고 힘을 내고 마음을 다잡고 애를 쓴다. 이미 일어난 유익한 법들을 지속시키고 사라지지 않게 하고 증장시키고 충만하게 하고 개발하기 위해서 의욕을 생기게 하고 정진하고 힘을 내고 마음을 다잡고 애를 쓴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바른 정진이라 한다.”

21-8.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바른 마음챙김[正念]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身隨觀] 머문다.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면서 근면하게,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며 머문다. 느낌들에서 … 마음에서 … 법에서 법을 관찰하며[法隨觀] 머문다.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면서 근면하게,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며 머문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바른 마음챙김이라 한다.”

21-9.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바른 삼매[正定]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감각적 욕망을 완전히 떨쳐버리고 해로운 법[不善法]들을 떨쳐버린 뒤, 일으킨 생각[尋]과 지속적인 고찰[伺]이 있고 떨쳐버렸음에서 생겼고, 희열[喜, pīti]과 행복[樂, sukha]이 있는 초선(初禪)에 들어 머문다.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을 가라앉혔기 때문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자기 내면의 것이고, 확신(sampasādana)이 있으며, 마음의 단일한 상태이고,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이 없고, 삼매에서 생긴 희열과 행복이 있는 제2선(二禪)에 들어 머문다.

희열이 빛바랬기 때문에 평온하게 머물고, 마음챙기고 알아차리며[正念正知] 몸으로 행복을 경험한다. 이를 두고 성자들이 ‘평온하게 마음챙기며 행복하게 머문다’고 묘사하는 제3선(三禪)에 들어 머문다.

행복도 버리고 괴로움도 버리고, 아울러 그 이전에 이미 기쁨과 슬픔을 없앴으므로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으며, 평온으로 인해 마음챙김이 청정한[捨念淸淨] 제4선(四禪)에 들어 머문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바른 삼매라 한다.”

21-10. “이와 같이 안으로 법에서 법을 관찰하며[法隨觀] 머문다. 혹은 밖으로 법에서 법을 관찰하며 머문다. 혹은 안팎으로 법에서 법을 관찰하며 머문다. 혹은 법들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관찰하며 머문다. 혹은 법들에서 사라지는 현상을 관찰하며 머문다. 혹은 법들에서 일어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하는 현상을 관찰하며 머문다. 혹은 그는 ‘법이 있구나’라고 마음챙김을 잘 확립하나니 지혜만이 있고 마음챙김만이 현전할 때까지. 이제 그는 [갈애와 사견에] 의지하지 않고 머문다. 그는 세상에 대해서 아무 것도 움켜쥐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비구는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의 법에서 법을 관찰하며 머문다.”

 

 

VI. 결어

22. “비구들이여, 누구든지 이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四念處]을 이와 같이 칠 년을 닦는 사람은 두 가지 결과 중의 하나를 기대할 수 있다. 지금 여기서 구경지(究竟智)를 얻거나, 취착의 자취가 남아 있으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경지[不還果]를 기대할 수 있다.

비구들이여, 칠 년은 그만두고 누구든지 이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을 이와 같이 육 년을 닦는 사람은 … 오 년을 … 사 년을 … 삼 년을 … 이 년을 … 일년은 그만두고 누구든지 이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을 이와 같이 일곱 달을 닦는 사람은 두 가지 결과 중의 하나를 기대할 수 있다. 지금 여기서 구경지를 얻거나, 취착의 자취가 남아 있으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경지를 기대할 수 있다.

일곱 달은 그만두고 누구든지 여섯 달을 … 다섯 달을 … 네 달을 … 세 달을 … 두 달을 … 한 달을 … 반달을 … 반달은 그만두고 누구든지 이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을 이와 같이 칠 일을 닦는 사람은 두 가지 결과 중의 하나를 기대할 수 있다. 지금 여기서 구경지를 얻거나, 취착의 자취가 남아 있으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경지를 기대할 수 있다.”

“‘비구들이여, 이 도는 유일한 길이니 중생들의 청정을 위하고 근심과 탄식을 다 건너기 위한 것이며,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을 사라지게 하고 옳은 방법을 터득하고 열반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다. 그것은 바로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四念處]이다.’라고 설한 것은 이것을 반연하여 설하였다.”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설하셨다. 그 비구들은 마음이 흡족해져서 세존의 설법을 기뻐하였다. (대념처경 끝)

 

 

 

 

 

修行道地經卷第五

 

어떤 것을 수식(數息)이라고 하는가?

만일 수행하는 사람이 한가하고 사람이 없는 곳에 앉아 뜻을 잡아 어수선하지 않게 한 다음 나고 드는 숨을 헤아려 열 번까지 이르게 한다.

하나에서부터 둘까지 이르다가 만일 마음이 어수선해지면 마땅히 다시 하나ㆍ둘로부터 헤아려 아홉까지 이르게 해야 한다.

가령 마음이 어수선해지면 마땅히 숨을 다시 헤아려야 하나니, 이것을 수식이라고 말한다.

수행하는 사람은 이와 같이 밤낮으로 한 달이든지 1년이든지 숨 헤아리기를 익혀 열 번째 숨까지 이를 때까지 마음이 어수선하지 않게 해야 한다.

이것을 게송으로 말한다.

何謂數息若修行者坐於閑居無人之處秉志不亂數出入息而使至十從一至二設心亂者當復更數一二至九設心亂者當復更數是謂數息行者如是晝夜習數息一月一年至得十息心不中亂於是頌曰

 

 

숨 쉼에 움직이지 않음 저 산과 같아

나고 드는 숨을 헤아려 열까지 이를 것이니

낮과 밤, 한 달, 한 해를 게을리 하지 말고

이렇게 수행하여 숨 헤아리기를 지켜야 한다.

息在不動譬如山

數出入息令至十

晝夜月歲不懈止

修行如是守數息

 

 

숨을 헤아려 이미 안정되었으면 마땅히 서로 따르게 하는[相隨] 수행을 해야 한다.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앞에서 걸어가면 그림자가 뒤따르듯이 수행도 그와 같이 하여 숨이 나고 드는 것을 따라 다른 생각이 없어야 한다.

이것을 게송으로 말한다.

數息已定當行相隨譬如有人前行有從如影隨行修行如是隨息出入無他之念於是頌曰

 

 

숨을 헤아려 뜻이 안정되면 자재를 얻나니

들고 나는 숨을 헤아리는 것이 수행이 된다.

그 마음 서로 따르면 어수선하지 않나니

숨을 헤아려 마음을 조복하는 것을 서로 따른다고 말한다.

數息意定而自由

數息出入爲修行

其心相隨而不亂

數息伏心謂相隨

 

 

수행하는 사람이 이미 서로 따르게 할 수 있게 되었으면, 그 때는 마땅히 마치 소치는 이가 한쪽에 멈춰 있으면서 저 멀리 소가 먹이 먹는 것만 보는 것처럼, 수행하는 이도 그와 같이 하여 처음 숨을 헤아릴 때부터 다음 구경(究竟)에 이르기까지 마땅히 다 관찰해야 한다.

이것을 게송으로 말한다.

其修行者已得相隨爾時當觀如牧牛者住在一面遙視牛食行者若茲從初數息至後究竟悉當觀察於是頌曰

 

 

소치는 이가 저 멀리 멈춰 있으면서

늪 위에 있는 소 떼를 관찰하는 것처럼

숨을 헤아려 다스리는 것도 또한 그렇게 하고

수의(守意)도 그와 같이 하는 것을 관()이라고 한다.

如牧牛者遙往察

群在澤上而護視

持御數息亦如是

守意若彼是謂觀

 

 

수행하는 사람이 이미 관법을 이루었으면 마땅히 다시 환()과 정()을 행할 것이니, 마치 문지기가 문 위에 앉아 나가고 들어오는 사람을 관찰해 모두 아는 것처럼, 수행하는 사람도 마땅히 그와 같이 하여 마음을 코끝에 매어두고 숨을 헤아리는 것을 관찰해 그 나가고 들어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것을 게송으로 말한다.

其修行者已成於觀當復還淨如守門者坐於門上觀出入人皆識知之行者如是係心鼻頭當觀數息知其出入於是頌曰

 

 

비유하면 문을 지키는 이가

앉아서 드나드는 사람을 관찰할 적에

한곳에 있으면서 움직이지 않고

사람 숫자를 모두 살펴 아는 것처럼

譬如守門者

坐觀出入人

在一處不動

皆察知人數

 

 

마땅히 한결같은 마음으로 숨을 헤아려

나고 드는 숨을 보아야 할 것이니

수행하는 사람이 이와 같이 한다면

숨을 헤아려 환과 정을 이루리라.

當一心數息

觀其出入意

修行亦如是

數息立還淨

 

 

어떤 것을 과하게[] 헤아린다고 하는가?

마침 숨이 이르지 않았는데 미리 헤아리는 것이니, 숨이 코에 이르기도 전에 둘이라고 헤아리는 것을 곧 과하게 헤아리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을 게송으로 말한다.

何謂數長適未有息而預數之息未至鼻而數言二是爲數長於是頌曰

 

 

숨이 아직 이르지 앉았는데

나고 들어오는 숨을 헤아리면서

하나를 셀 차례에 둘이라고 한다면

이와 같이 하면 세는 법을 이루지 못한다.

尚未有所應

而數出入息

數一以爲二

如是不成數

 

 

어떤 것을 미급하게[] 헤아린다고 하는가?

두 번째의 숨을 하나라고 헤아리는 것이다.

이것을 게송으로 말한다.

何謂數短二息爲一於是頌曰

 

 

그 숨이 코에 이르렀다가

다시 배꼽에 이르렀는데

두 번째 숨을 하나라고 헤아린다면

이는 곧 헤아리는 법을 잘못하는 것이다.

其息以至鼻

再還至於齊

以二息爲一

是則爲失數

 

 

어떤 것을 숨을 헤아릴 적에 긴 것을 안다고 하는가?

수행하는 사람이 처음 숨을 헤아릴 때부터 숨이 더디고 빠름을 따라 관찰하여 그 갈래를 보아 헤아리고, 나고 드는 한도(限度)를 알아야 하나니, 이것이 헤아리는 숨이 긴 것을 아는 것이다. 헤아리는 숨이 짧은 것을 아는 것도 또한 이와 같다.

이것을 게송으로 말한다.

何謂數息而知長其修行者從初數息隨息遲疾而觀察之視忖其趣知出入息限度知之是爲息長數息短者亦復如是於是頌曰

 

 

숨을 헤아릴 적에 긴 것을 알며

돌이키는 숨도 이와 같이 하나니

가령 이와 같이 살피고 관찰한다면

이것을 숨의 길고 짧음을 안다고 말한다.

數息長則知

息還亦如是

省察設若此

是謂息長短

 

 

어떤 것을 헤아리는 숨이 몸을 움직이는 것을 안다고 하는가?

몸 가운데 모든 헐떡거리는 숨[喘息]을 죄다 관찰하는 것이다.17) 들이쉬는 숨도 또한 이와 같이 한다.

어떤 것을 숨을 헤아림에 몸이 온화하게 풀리는 것을 안다고 하는가?

처음 숨을 일으킬 때에 만일 몸이 나른해지고 졸음의 번뇌[睡蓋]가 생겨 몸이 무거워지면, 곧 그것을 제거해버린 다음 한결같은 마음으로 숨을 헤아리는 것이다. 돌이키는 숨을 헤아리는 것도 또한 이와 같이 한다.

何謂數息動身則知悉觀身中諸所喘息入息亦如是何謂數息身和釋卽知初起息時若身懈惰而有睡蓋軀體沈重則除棄之一心數息數息還入亦復如是

 

어떤 것을 숨을 헤아림에 희열을 경험하는 것을 안다고 하는가?

숨을 헤아릴 때에 기쁨에 이르는 것이다.18) 들이쉬는 숨도 이와 같이 한다.

어떤 것을 숨을 헤아림에 편안함을 만났는지를 안다고 하는가?

처음 숨을 헤아릴 때 안온함을 얻는 것이다. 들이쉬는 숨도 이와 같이 한다.

어떤 것을 숨을 헤아림에 마음이 나아가는 데를 안다고 하는가?

숨을 헤아리는 생각을 일으킬 때에 모든 생각을 관찰하는 것19)이다. 들이쉬는 숨도 이와 같이 한다.

何謂數息遭喜卽知若數息時歡喜所至息入如是何謂數息遇安卽知初數息時則得安隱息入如是何謂數息心所趣卽知起數息想觀諸想念入息如是

 

어떤 것을 숨을 헤아림에 마음의 유순함을 안다고 하는가?

처음 숨을 일으킬 때 생각을 분별하면서 생각이 헤아리는 숨을 따르는 것이다. 들이쉬는 숨도 또한 이와 같이 한다.

어떤 것을 숨을 헤아림에 마음이 깨달아 아는 것을 안다고 하는가?

처음 숨을 일으킬 때에 모든 관법(觀法)을 식별하면서 숨을 헤아리는 것이다. 들이쉬는 숨도 또한 이와 같이 한다.

어떤 것을 숨을 헤아릴 때에 즐거움을 안다고 하는가?

처음 숨을 헤아릴 때에 만일 마음이 즐겁지 않으면 기쁘게 하기를 힘써 내쉬는 숨을 순조롭게 하는 것이다. 들이쉬는 숨도 이와 같이 한다.

何謂心柔順數息卽知始起息想分別想念而順數息息入亦爾何謂心所覺了數息卽知初起息想識知諸觀而數息息入如是何謂數息歡悅卽知始數息時若心不樂勸勉令喜以順出息入息如是

 

어떤 것을 숨을 내쉴 적에 마음이 조복되었음을 안다고 하는가?

가령 마음이 안정되지 않았으면 강제로 조복하여 고요해지게 한 다음 숨을 헤아리는 것이다. 들이쉬는 숨도 이와 같이 한다.

어떤 것을 마음이 해탈하였음을 안다고 하는가?

만일 숨을 내쉴 적에 마음으로 이해하지 못했으면 강제로 조복시켜 터득하게 한 다음에 내쉬는 숨을 헤아리는 것이다. 들이쉬는 숨도 이와 같이 한다.

何謂心伏出息卽知心設不定强伏令寂而以數息入息如是何謂心解脫卽知若使出息竟不肯解化伏令度而數出息入息如是

 

어떤 것을 숨을 헤아림에 무상(無常)함을 관찰해 안다고 하는가?

모든 헐떡거리는 숨이 다 무상한 것임을 보아 내쉬는 숨을 헤아리는 것이다. 들이쉬는 숨도 이와 같이 한다.

어떤 것을 숨을 내쉴 적에 욕망이 없음을 안다고 하는가?

숨이 일어나고 멸함을 보아 이와 같이 욕망을 여의는 것이니, 이것은 곧 욕망의 여읨을 내쉬는 숨에서 보아 아는 것이다. 들이쉬는 숨도 이와 같이 한다.

何謂數息見無常卽知見諸喘息皆無有常是爲出息入息如是何謂出息無欲卽知見息起滅如是離欲是爲觀離欲出息卽知入息如是

 

어떤 것을 숨을 헤아림에 적멸(寂滅)함을 관찰해 안다고 하는가?

숨을 내쉴 때에 멸하여 다하였음을 보는 것이니, 이것은 내쉬는 숨에서 적멸을 보아 아는 것이다. 들이쉬는 숨도 이와 같이 한다.

何謂觀寂滅數息卽知其息出時觀見滅盡是爲觀寂出息卽知入息如是

 

어떤 것을 숨을 헤아림에 도의 나아갈 바를 보아 스스로 안다고 하는가?

숨이 나와 멸하는 곳을 보는 것이니, 그런 뒤에야 마음이 곧 번뇌를 여의게 된다.

번뇌를 여의어 욕망을 없애고 3()를 버리면 뜻이 곧 해탈하나니, 이 뜻을 잘 보호하여 가지면 이것이 숨을 헤아리는 것이 된다.

이것이 내쉬는 숨과 들이쉬는 숨에 대한 열여섯 가지 특별하게 뛰어난 것이다.

何謂見趣道數息卽自知見息出滅處睹是以後心卽離塵以離無欲棄於三處志卽解脫將護此意是爲數息出息入息如是爲十六將勝之說

 

수행하는 이가 내쉬고 들이쉬는 숨을 관찰하는 이유는 고요해지기를 구하기 위해서이다. 그리하여 마음으로 하여금 안정되게 머무르게 되며, 그 적연(寂然)함을 좇아서 두 가지 일을 얻게 된다. 첫째는 범부요, 둘째는 부처님의 제자이다.

行者所以觀出入息用求寂故令心定住從其寂然而獲二事一者凡夫二者佛弟子

 

어떤 것을 범부가 적연함을 구하는 것인가?

마음을 멈추게 하여 5()의 번뇌[]를 제거하려는 것이다.

무슨 까닭에 모든 번뇌의 환난을 제거하려고 하는가?

1선정을 얻으려고 하는 것이다.

무슨 까닭에 제1선정을 구하려고 하는가?

다섯 가지 신통(神通)을 얻으려고 하는 것이다.

何謂凡夫而求寂然欲令心止住除五陰蓋何故欲除諸蓋之患欲獲第一禪定故何故欲求第一之禪欲得五通

 

어떤 것을 부처님의 제자가 적연(寂然)함을 구하는 것인가?

구하는 까닭은 온화(溫和)함을 얻으려고 하는 것이다.

무슨 까닭에 온화함을 구하는가?

정법(頂法)을 이룩하려고 하는 것이다. 5음은 공()한 것이어서 다 내 것이 아니라고 보는 것을 바로 정법이라고 말한다.

무슨 까닭에 정법을 구하는 것인가?

네 가지 진리를 보아 법인(法忍)에 따라 향하려는 것이다.

何謂佛弟子欲求寂然所以求者欲得溫和何故求溫和欲致頂法見五陰空悉皆非我所是謂頂法何故求頂法以見四諦順向法忍

 

무슨 까닭에 법인을 구하는 것인가?

세간의 최상법(最上法)을 구하기 위해서이다.

무슨 까닭에 세간의 최상법을 구하는 것인가?

모든 법이 다 괴로움[]뿐임을 알아서 37도품(道品)20)을 분별하기 위해서이다.

무슨 까닭에 모든 법이 괴로움뿐임을 알려고 하는가?

8()21)를 얻으려고 하는 것이다.

무슨 까닭에 제8()에 뜻을 두려고 하는가?

그 사람은 도적(道跡)22)을 이루기 위함이다.

何故順求法忍欲得世閒最上之法何故求世最上之法欲知諸法悉皆爲苦因得分別三十七道品之法何故欲知諸法之苦欲得第八之處何以故志第八之地其人欲致道迹之故

 

어떤 것을 범부가 숨을 헤아리는 인연으로 적연(寂然)한 경지에 이르게 된다고 하는가?

마음을 숨을 헤아리는 데 두었으므로 한 생각이라도 혼란하지 않고 다른 생각이 없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저 숨을 헤아림을 좇아 적연한 경지에 이르게 되고, 그 방편으로부터 5()의 번뇌[]23)를 모두 소멸하여 없애게 된다.

何謂凡夫數息因緣得至寂然心在數息一意不亂無有他念因是之故從其數息得至寂然從其方便諸五陰蓋皆爲消除

 

그 때는 그 호흡이 설령 나고 들지라도 항상 마음으로 하여금 그 생각을 다 반연하게 된다. 들이쉬는 숨도 이와 같다.

만일 내쉬고 들이쉬는 숨이 나아가는 바를 관찰하면, 이것을 행()이라고 말하고 마음속이 기쁜 것을 곧 흔열(忻悅)이라고 말하며, 뜻에 맞는 것을 곧 편안함이라고 말하고, 마음의 높기가 제일이어서 자재(自在)하게 되면 이것을 안정된 뜻이라고 말하며, 비로소 5()를 제거하면 마음속이 따라 해탈하고 이로부터 집착을 여의게 된다.

爾時其息設使出入常與心俱緣其想念入息如是若出入息觀察所趣是謂爲行心中歡喜是謂忻悅其可意者是謂爲安心尊第一而得自在是爲定意始除五蓋心中順解從是離著

 

어떤 것을 집착을 여의었다고 하는가?

온갖 생각과 애욕과 착하지 못한 법 행하는 것을 버리는 것이다. 이와 같이 생각하여 기쁘고 편안하며, 마음에 한결같은 안정을 얻으면 다섯 가지 번뇌[]가 끊어지고 다섯 가지 덕()을 구족하게 된다.

숨을 헤아리는 법으로 인하여 다섯 가지 덕()을 이룩하여 제1()을 얻게 된다.

何謂離著遠於衆想愛欲不善之法行也如是念想歡喜安隱心得一定除斷五品具足五品因其數息緣致五德得第一禪

 

이미 제1선을 얻은 다음에 자꾸 익히고 행하여 버리지 않으면, 1선이 안온하고 견고하여 동요하지 않게 된다.

신통을 구하려고 하면 신족(神足)에 뜻을 두어야 할 것이니, 천안(天眼)으로 환하게 통해 보고 천이(天耳)로 환하게 통해 들으며, 어디로부터 와서 태어났는지를 알고,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알며, 제 마음대로 자재(自在)하게 된다.

已得第一禪習行不捨一禪適安堅固不動欲求神通志于神足天眼洞視天耳徹聽知從來生知他心念恣意自在

 

비유하면 연금술사가 자마금(紫磨金)을 가져다가 자유자재로 영락(瓔珞)ㆍ반지ㆍ팔찌ㆍ보요(步瑤) 같은 것을 제 마음대로 만드는 것처럼, 이미 네 가지 선정을 얻고 나면 자재한 것이 이와 같나니, 이것을 다섯 가지 신통이라고 한다.

譬如金師以紫磨金自在所作瓔珞指環臂釧步瑤之屬如意皆成已得四禪自在如是此爲五通

 

어떤 것을 부처님의 제자가 내쉬고 들이쉬는 숨을 헤아려 적연한 경지를 얻는 것이라고 하는가?

수행하는 사람이 고요하고 사람이 없는 곳에 앉아서 마음을 거두어 흩어지지 않게 하고 입을 다문 채 정진에만 오로지 하여 내쉬고 들이쉬는 숨을 관찰하되 숨이 코에서부터 점점 바뀌어가면서 나아가 목구멍에 이르렀다가 마침내는 배꼽에까지 이르게 하고, 다시 배꼽에서 도로 코로 나오게 한다. 그때 마땅히 내쉬는 숨이 다르고 들이쉬는 숨이 같지 않음을 살피고 관하여 뜻으로 숨을 따르게 하며, 내쉬고 들이쉼을 순조롭게 하여 마음이 혼란하지 않게 해야 한다.

何謂佛弟子數出入息而得寂然其修行者坐於寂靜無人之處斂心不散閉口專精觀出入息息從鼻還轉至咽喉遂到臍中從臍還鼻當省察之出息有異入息不同令意隨息順而出入使心不亂

 

이렇게 숨을 헤아림으로 인하여 뜻이 안정되어 적정해질 수 있고, 그 중간에 다른 생각을 영원히 없애고 오직 부처님과 법과 성중(聖衆)의 덕만 생각하며, 괴로움[]ㆍ괴로움의 발생원인[]ㆍ괴로움의 소멸[]ㆍ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 이 네 가지 진리의 이치만을 생각하므로 곧 흔열(忻悅)을 얻게 되나니, 이것을 온화(溫和)라고 말한다.

因是數息志定獲寂於是中閒永無他想唯念佛聖衆之德道四諦之義便獲欣悅是謂溫和

 

비유하면 사람이 불을 불면 뜨거운 기운이 얼굴을 향해 오는데, 그 불길이 얼굴에 닿는 것은 아니고 다만 뜨거운 기운만 미칠 뿐이다. 그러나 불의 뜨거운 기운을 입으로 불어서 일으킬 수는 없는 것이니 마땅히 이와 같이 알고 보면 온화해지는 이치도 이와 같은 것이다.

如人吹火熱來向面火不著面但熱氣耳其火之熱不可吹作當作是知溫和如斯

 

어떤 것을 온난법(溫暖法)이라고 하는가?

쉽사리 구족(具足)하지 못할 선본(善本)이 아홉 가지가 있다. 즉 미유화(微柔和)ㆍ하유화(下柔和)ㆍ승유화(勝柔和)가 있고, 중하(中下)의 유화ㆍ중중(中中)의 유화ㆍ승중(勝中)의 유화가 있으며, 상유화(上柔和)ㆍ중상(中上)의 유화ㆍ상상(上上)의 유화가 있다.

何謂溫暖法未具足善本凡有九事有微柔和下柔和勝柔和有中有中中有勝中有上柔和有中上有上上柔和

 

저 미유화와 하유화를 아는 것을 곧 온화(溫和)한 선본(善本)이라고 말하고, 중하ㆍ중중ㆍ중상의 유화를 곧 법정(法頂)의 선본이라고 말하며, 하상ㆍ중상ㆍ상상의 유화를 바로 진리의 유화법인(柔和法忍)이라고 말한다. 상중(上中)의 상유화(上柔和)를 곧 세간에서의 거룩한 법이라고 말한다. 이 아홉 가지 일이 선본의 이치이다.

知彼微柔和下柔和是謂溫和之善本也其中下中中中上是謂法頂之善本也其下上中上上上柔和是謂爲諦柔和法忍上中之上是謂俗閒之尊法也是九事善本之義

 

그러므로 세속의 일과 모든 번뇌가 다하지 못한 수행자가 만일 온화한 행()을 얻어 숨을 헤아리는 생각을 지킨다면 이로 인하여 생각이 한결같게 된다.

만일 숨을 돌이킬 때라면 뜻이 그 숨을 따라 다른 생각이 없고, 만일 숨을 내쉴 때라면 숨이 나가고 돌아옴을 알아 마음이 부처님ㆍ법ㆍ거룩한 대중과 괴로움ㆍ괴로움의 발생ㆍ괴로움의 소멸ㆍ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들어가 마음이 온화한데 있어서 그 마음이 더욱 수승하게 되나니, 이것을 정법(頂法)이라고 말한다.

故是俗事諸漏未盡修行若得溫和之行執數息想因此專念息若還者意隨其息無他之念若息出者知息往反心入佛法及在聖衆道如在溫和其心轉勝是謂頂法

 

마치 어떤 사람이 높은 산 위에 머물면서 4방을 관찰하면, 혹은 산에 올라오는 이도 있고, 혹은 도로 내려가는 이도 있는 것처럼, 혹은 거룩한 도에 들어가는 이도 있고, 혹은 범부의 자리에 들어가는 이도 있나니, 수행하는 사람이 이미 정법(頂法)을 얻고 나서 범부의 지위에 드는 것은 몹시 걱정스러운 일이다.

若如有人住高山上觀察四方或上山者或有下者或入聖道或入凡夫地其修行者已得頂法入凡夫地甚可憂之

 

비유하면 산에서 물이 흘러내릴 때, 그 흐름이 빠르고 굽이가 거세어 파도가 가로지르는데, 어떤 사람이 그 물을 건너기 위해 물 속에 들어가 헤엄을 쳐서 저 쪽 언덕에 이르려고 하다가 소용돌이치는 파도에 제지되어 되돌아오다 중류(中流)에 있게 되면, 이미 피곤함이 너무도 극심하여 마침내는 파도에 휩쓸려 그 밑에 빠지고 말 것이니, 그 사람은 틀림없이 죽을 게 의심할 나위가 없다고 생각할 것이요, 저쪽 언덕에 머물고 있는 사람들이 대신해 걱정하는 것처럼 수행하는 사람도 그와 마찬가지이다.

譬如山水流行瀑疾起曲撗波有人欲渡入水而泅欲至彼岸迴波制還令在中流旣疲且極遂沈波水沒在其底其人心念定死不疑岸邊住人代之憂慼修行如是

 

이미 밝은 스승을 만나 아침저녁으로 깨우쳐 가부(跏趺)24)를 틀고 앉아서, 거친 옷을 입고 나쁜 음식을 먹으며, 풀방석에 앉아 그 몸을 고달프게 하는 등 이와 같이 수행을 해야 한다. 그런데도 도리어 나고 죽는 흐름의 파도에 억제된 것은 은정(恩情)에 몸을 던져 마음이 한결같지 못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온갖 생각의 못[]에 빠졌기 때문이니 어떻게 도의 밝음을 얻겠는가?

已得明師夙夜覺悟結加趺坐麤衣惡食坐於草褥困苦其身作行如是反爲生死流波所制投于恩情不能專一沒於終始衆想流池安得道明

 

그러므로 마땅히 수행하는 사람을 대신해 걱정하는 것도 그와 같이 해야 한다.

비유하면 어떤 도사(導師)가 많은 재물과 보배를 싸 가지고 텅 빈 들판 험난한 길을 지나서 자기 집에 가려고 하다가 갑자기 악한 도적을 만나 재물을 다 잃어버린다면 많은 사람들이 걱정하는 것처럼, 마땅히 수행하는 사람을 위하여 걱정하는 것도 그와 같이 해야 한다.

是故行者當代憂愁譬如導師多齎財寶歷度曠野嶮厄之路臨欲到家卒遇惡賊亡失財物衆人悒悒也當爲修行懷憂如是

 

비유하면 농사꾼이 5곡을 심어 그 곡식의 열매가 무성하여 수확할 시기가 되었는데, 갑자기 우박과 서리가 내려 5곡의 열매를 다 잃고 오직 빈 짚만 남았을 적에 그 사람이 걱정하는 것처럼, 수행하는 사람도 이와 같이 해야 한다.

譬如田家耕種五穀子實茂盛臨當刈頃卒有雹霜傷殺穀實唯有遺草其人憂愁修行如是

 

이미 정법(頂法)을 얻고 나서 범부의 지위로 들어간다면 마땅히 걱정이 될 것이다. 정법을 얻고 난 다음 다시 타락하는 것은 혹은 나쁜 벗을 만나고 애욕을 생각했거나 부정(不淨)한 것을 깨끗하다고 하고 깨끗한 것을 부정한 것이라고 하며, 멀리 나돌아다니며 놀기만 좋아하고 수행을 한결같이 하지 않기 때문이다. 혹은 오랜 지병에 걸렸거나 혹은 곡식이 귀한 때를 만나 굶주리고 곤궁하여 입에 풀칠조차 이어가지 못하기 때문이며, 혹은 집안 일ㆍ부모ㆍ형제ㆍ아내ㆍ자식ㆍ친척들을 생각하기 때문이며, 혹은 거처해서는 안 될 시끄러운 가운데 앉아 있기 때문이다.

已得頂法入凡夫地當爲悒悒得頂法已而復墮落或遇惡友念於愛欲不淨爲淨淨爲不淨喜遠遊行不得專精或遇長疾或遇穀貴飢匱困厄不繼餬口或念家事父母兄弟妻息親屬或坐不處憒鬧之中

 

이미 정법(頂法)을 얻고 나서도 도과(道果)를 이루지 못하면 쇠하고 늙음이 장차 이르러 마음이 결국엔 미혹(迷惑)해지고 갑자기 괴로운[] 병에 걸려 목숨이 축 늘어져 다하려고 한다면, 일찍이 독실하게 믿었던 부처님ㆍ법ㆍ거룩한 대중과 괴로움ㆍ괴로움의 발생원인ㆍ괴로움의 소멸ㆍ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영원히 다시 믿지 않아 마땅히 익혀야 할 선정을 도리어 버리고, 마땅히 관()해야 할 것을 관하지 않고, 정진을 게을리 하여 본래 생각하였던 법을 영원히 다시는 일으키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런 까닭에 그 정법을 좇아서 물러나 타락하게 된다.

已得頂法未成道果衰老將至心遂迷惑悤得困病命垂向盡曾所篤信佛法聖衆道永不復信當習于定而反捨之當觀不觀精進更懈本所思法永不復起以是之故從其頂法而退墮落

 

어떤 것을 정법에서 물러가지 않는 것이라고 하는가?

일찍이 믿던 것을 날로 더욱 더 믿으면, 본래 안정되었던 마음을 끝내 움직이지 않게 할 것이요, 관찰하던 것을 잃지 않고 늘 살피고 정진하여 먼저 하던 것보다 더욱 늘려나가며, 생각하던 법을 한결같이 정진하여 놓아버리지 않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정법에서 물러가지 않게 된다.

何謂頂法而不退還如曾所信日信增益如本定心遂令不動所觀弗失常察精進轉增于前所思念法專精不捨以是之故不退頂法

 

수행하는 사람이 이와 같이 하면, 그 한결같은 정진으로 인하여 마음과 생각이 한결같아져서 각기 구경법(究竟法)을 사색하며, 처음부터 일찍이 동요하지 않아 새 것과 옛 것을 기억하지 않는다.

이와 같아서 곧 내쉬는 숨이 다르고 들이쉬는 숨이 같지 않음을 알게 되며, 내쉬고 들이쉬는 숨이 다르므로 그 마음으로 하여금 견해와 알음알이를 내게 한다.

이와 같으면, 모든 두려운 생각이 없어지나니, 이것을 중중(中中)과 중상(中上)의 법인을 얻었다고 말한다.

修行如是因其專精而心想一各各思惟究竟之法初未曾動不念新故如是卽知出息有異入息不同出入息異令其心生見知如此無所畏想是謂爲中中之上而得法忍

 

마음에 생각하는 것이 없고 이 관법을 지어 앞의 뜻과 뒤의 뜻이 일찍이 착란(錯亂)을 일으키지 않으며, 분별하여 마음을 살핀다면 어떻게 왔다갔다하겠는가? 이것을 상중(上中)과 상하(上下)의 유순법인(柔順法忍)이라고 말한다.

가령 그 마음으로 하여금 한결같이 생각하기를 좋아하게 한다면, 뜻이 흔들리거나 혼란스럽지 않으리니, 이것을 상중(上中)의 유순법인이라고 말한다.

心無所想而作是觀前意後意未曾錯亂分別察心云何往反是謂上中之下柔順法忍設使其心愛於專思志不移亂是謂上中柔順之法

 

그 법인은 어느 곳으로 따라 나아가는가?

네 가지 진리[四諦]를 따라 나아가 자세히 살피며 머무는 것이다.

마음이 이와 같으면 드디어 청정함을 이루게 되므로 이를 신()이라고 말한다. 비록 그러나 이를 얻되, 신근(信根)을 이룩하지 못했을지라도 이 신을 얻으면, []과 입[]과 마음[心意]이 굳세어지므로 이를 정진(精進)이라고 말하며, 아직은 정진근(精進根)을 이룩하지 못하였을지라도 뜻이 모든 법으로 향하게 되므로 이를 한결같은 마음[有心]이라 말하며, 염근(念根)을 이룩하지 못하였을지라도 마음과 뜻이 한결같으면, 이것을 안정된 뜻[定意]이라고 말하며, 정근(定根)을 이루지 못하였을지라도 모든 법을 관찰하여 그 이치를 분별하면, 이것을 지혜라고 말한다.

其忍何所趣順趣順四諦如審諦住心以如是遂至淸淨是謂爲信雖爾獲此未成信根以得是信身口心强是謂精進尚未能成精進之根志向諸法是謂有心未成念根以心一志是謂定意未成定根其觀諸法分別厥義是謂智慧

 

혜근(慧根)을 이루지 못하는 것은 곧 5()을 억측하여 모든 감관[]으로 향하기 때문이고, 도근(道根)을 이루지 못하는 것은 기억하고 생각하는 것이 있고 오히려 존재하는 것이 있다고 억측하기 때문에 견해가 흔들려 뜻의 안정을 이루지 못하나니, 이것을 상중(上中)과 상상(上上)인 세속의 거룩한 법이라고 한다.

未成慧根計是五法向于諸根未成道根有念有想尚有所在而見有遶未成定意是謂上中之上世俗尊法

 

수행하는 사람은 마땅히 색()이 일어나고 소멸하는 곳과 통양(痛痒)ㆍ법()ㆍ의()를 분명하게 알아야 할 것이다.25) 일어나고 소멸하는 근본을 살피고 그 인연을 관찰하여 과거와 미래의 원()이 없는 선정[]을 행하며, 해탈문을 따라 들어가고 생사의 괴로움을 살펴 이 5()은 곧 근심과 걱정거리일 뿐이라고 헤아리면 의혹이 없어지게 될 것이다.

其修行者當知了之色起滅處觀起滅本察其因緣過去當來行無願定隨入脫門察生死苦計斯五陰卽是憂患無有狐疑爾時則獲解苦法忍

 

그 때는 곧 고법인(苦法忍)을 얻었으므로 이미 괴로움의 근본을 보았고, 한 편 지혜의 눈을 얻었으므로 열 가지 번뇌[]26)를 제거하게 된다.

어떤 것이 그 열 가지인가?.

첫째는 몸을 탐하는 것이요, 둘째는 귀신을 보는 것이며, 셋째는 삿된 것을 보는 것이요, 넷째는 망설이는 것이며, 다섯째는 계율을 잃는 것이요, 여섯째는 의심하는 것이며, 일곱째는 애욕이요, 여덟째는 성냄이며, 아홉째는 교만을 부리는 것이요, 열째는 어리석은 것이다.

已見苦本便見慧眼除于十結何謂爲十一曰貪身二曰見神三曰邪見四曰猶豫五曰失戒六曰狐疑七曰愛欲八曰瞋恚九曰貢高十曰愚癡

 

이 열 가지 번뇌를 버리고 이미 이 마음을 얻었으면, 곧 번뇌가 없는 데[無漏]로 향하여 바른 소견에 들고 범부의 자리를 벗어나 거룩한 도에 머물며, 지옥ㆍ축생ㆍ아귀의 죄를 범하지 않고, 끝내 비명횡사하지 않아 마침내 도적(道跡)을 이룩할 것이다.

무원삼매(無願三昧)에 들어 정수(正受禪定)를 행하면 이미 해탈문을 향하여 아직 일어나지 않은 악법(惡法)은 다시는 생겨나지 않고 모든 악이 저절로 다할 것이며, 아직 일어나지 않은 법념(法念)은 마땅히 일으켜서 분발하게 하여 일으킨 선법(善法)이 구족(具足)함을 이루게 된다.27)

棄是十結已獲此心則向無漏入於正見度凡夫地住于聖道不犯地獄畜生餓鬼之罪終不撗死會成道迹無願三昧而行正受已向脫門未起惡法則不復生諸惡自盡未起法念當使興發所興善法令具足成

 

마음이 이미 이와 같이 원만해져서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것을 바로 자자(自恣)라고 말하고, 뜻을 한결같게 하는 것을 곧 자유자재한 안정된 뜻이라고 말하며, 이 차례를 따라 믿고 기억하고 정진하며 관찰하고 호명(護命)하는 것을 바로 믿음이라고 말하고, 그 행을 사색하는 것을 바로 자자삼매(自恣三昧)라고 말하나니, 오로지 도에 정진하여야 신족을 얻을 수 있다.

心已如足隨其所欲是謂自恣令志專一是謂自在定意從是次第信精進觀察護命是謂爲信思惟其行是謂自恣三昧專精于道而獲神足

 

가령 몸과 입과 뜻을 견고하게 수행하면, 이것을 정진하여 뜻을 안정하는 법이라 하고, 뜻이 심식(心識)과 전일하게 되면 이것을 뜻이 안정된 것이라고 말하며, ()의 이치에 들려고 하면 이것을 가르침과 훈계를 살펴 안정된 뜻이라고 말하나니, 이러한 인연으로 4신족(神足)을 이루게 된다.

假使修行身心强是謂精進定意之法志專心識是謂意定欲入道義是謂察誡定意以是之緣致四神足

 

이미 4신족을 얻은 것을 바로 신근(信根)이라고 말하고, 몸과 마음이 견고해진 것을 바로 정진근(精進根)이라고 말하며, 바른 법을 생각하는 것을 바로 의근(意根)이라 말하고, 그 마음이 전일해진 것을 정근(定根)이라고 말하며, 능히 법을 분별하여 나아갈 바를 아는 것을 바로 지혜근(智慧根)이라고 말하나니, 이런 까닭에 5()을 원만하게 갖추게 된다.

已獲神足是謂信根身心堅固謂精進根所可思法是爲意根其心專一是謂定根能分別法而知所趣是謂智慧根以是之故具足五根

 

그 온화(溫和)한 법을 믿는 것을 바로 신력(信力)이라고 말하나니, 정진력(精進力進力)ㆍ 의력(意力念力)ㆍ적의력(寂意力定力)ㆍ지혜력(智慧力慧力)도 또한 이와 같다.

其信溫和是謂信力精進力意力寂意力智慧力亦復如是

 

5()을 성취하여 모든 법에 미칠 수 있는 것을 곧 심각의(心覺意)라고 하고, 모든 법을 분별하는 것을 곧 모든 법을 정밀하게 구하는 법각의(法覺意)라고 하며, 몸과 마음이 견고한 것을 곧 정진각의(精進覺意)라고 하고, 마음에 기쁨을 품어 좋아서 뛰면서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것을 곧 흔열각의(忻悅覺意喜覺分)라고 말하며, 몸과 뜻이 서로 의지하여 서로 믿고 유순하여 혼란스럽지 않은 것을 곧 신각의(信覺意)라고 말하고, 그 마음이 한결같이 고요한 것을 곧 정각의(定覺意)라고 말하며, 그 마음에 음욕[]ㆍ성냄[]ㆍ어리석음[]의 번뇌를 멸하고 뜻하는 바 원()대로 되는 것을 곧 호각의(護覺意)라고 하나니, 이러한 까닭에 7각의를 이루게 된다.

成就五力能及諸法則心覺意分別諸法是謂精求諸法覺意身心堅固是謂精進覺意心懷喜踊得如所欲是謂忻悅覺意身意相依信柔不亂是謂信覺意其心一寂是謂定覺意其心見滅婬癡垢所志如願是護覺意以是之故七覺意成

 

가령 모든 법의 이치를 분별하여 관찰하면 이것이 정견(正見)이 되고, 모든 생각하는 것에 삿된 원()이 없으면 이것이 정념(正念)이 되며, 몸과 뜻이 견고하면 이것이 정방편(正方便)이 되고, 마음이 경()의 이치로 향하면 이것이 정의(正意)가 되며, 그 마음이 한결같으면 이것이 정정(正定)이 되고, 몸과 뜻으로 짓는 세 가지 업()이 다 청정하면 곧 정명(正命)ㆍ정어(正語)ㆍ정업(正業)28)이 되어, 8정도의 행이 이루어진다.

設使別觀諸法之義是謂正見諸所思惟無邪之願是爲正念身意堅固是爲正方便心向經義是爲正意其心專一是爲正定身意造業是三悉淨爾乃得成八正道行

 

8정도 가운데 정견ㆍ정념ㆍ정방편, 이 세 가지를 헤아려 보면, 이것은 관법(觀法)에 속하고, 정의와 정정, 이 두 가지는 적연(寂然)에 속하나니, 이 관법과 적연 두 가지는 마치 두 필의 말이 한 수레를 끌고 가는 것과 같은 것이다.

此八正道中正見正念正方便計是三事屬觀其正意正定是二事則屬寂然是觀寂二如兩馬駕一車乘行

 

만약 무루심(無漏心)29)에서 전일(專一)하지 못한 한 법이라도 있으면, 37품의 법에 두루 들어가서 그 37품의 법을 원만하게 갖추면, 곧 괴로움의 진리를 알게 되나니,30) 이와 같이 헤아리면[] 곧 두 번째 무루심(無漏心)을 얻는다.

若無漏心不專一法遍入三十七品之法以是具足此三十七法便解知苦如是之比卽得第二無漏之心

 

그때 생각하기를 지금 욕계(欲界)에도 5()의 괴로움이 있고, 색계(色界)와 무색계(無色界)에서도 또한 똑같아서 욕계와 다름이 없다고 한다면 이는 괴로움의 진리[苦法智]를 알고 인()을 따르는 지혜를 성취하였다고 말하나니,31) 이것이 세 번째 무루심을 건립한 것이다.

爾時思惟如今欲界五陰有苦色界無色界同然無異是謂知苦隨忍之慧則成就建第三無漏之心

 

그리고 이미 이 행()을 얻어 그것으로써 괴로움의 진리를 보았기 때문에 18()을 제거하고 나서 색계를 지나고 무색계를 초월하여 지혜에 적절하게 따르므로 곧 네 번째 무루심을 얻는다.

已得是行用見苦故除十八結已過色界超無色界順宜慧者卽得第四無漏之心

 

이미 네 번째 무루심을 얻고 나서는 곧 삼계(三界)의 고달프고 괴로운 번뇌를 해탈하고서, 곧 스스로 나는 이미 환난을 해탈하여 그 숱한 번뇌가 없나니, 괴로움을 해탈하였다하고 깨우치게 된다. 그리고는 곧 스스로 생각하기를 괴로움은 본래 어디서 생긴 것인가? 은애(恩愛)를 근본으로 해서 집착의 그물이 생겼으니, 오래 전부터 오늘날까지 이 은애를 익혀서 지금의 환난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영원히 은애의 뿌리를 뽑으면 많은 번뇌가 없어지고 말 것이니, 은애를 여의고 나면 마음에 맞아 흐뭇해하는 기쁨인들 어디로부터 있게 되겠는가?’라고 하면, 이는 괴로움의 발생원인[]을 알아서 없애는 법인(法忍)이라 이르나니, 이것을 다섯 번째 무루심이라 한다.

已獲四無漏心便度三界勤苦之瑕卽自了之吾已度患無有衆惱爲得度苦則自思惟苦本何由恩愛之本而生著網從久已來習此恩愛遭患于今永拔愛根則無衆惱已離恩愛忻樂可意何從而有是謂解習斷除法忍是爲第五無漏之心

 

욕계의 모든 습기와 집착을 제거하면 곧 7()을 버려 욕계의 모든 환난을 뽑아버릴 줄을 알게 되나니, 이것을 여섯 번째 무루심이라 한다.

除於欲界諸所習著則捐七結便爲知拔欲界諸患是謂第六無漏之心

 

수행하는 사람이 스스로 생각하기를 색계의 근본은 본래 어디로부터 일어나는가? 그 근원을 자세히 살펴보면 탐욕으로부터 일어나고 즐거움은 은애하는 것으로부터 생겨나 마음에 맞아 흐뭇해 한다고 하면, 이것을 일곱 번째 무루심이라 한다.

修行自念色界之本本從何興諦觀其元從欲而起樂出恩愛可意而悅是爲第七無漏之心

 

이 행으로 인하여 색계와 저 무색계의 모든 12()을 해탈하고 마음이 지혜를 따라 익히면, 이것을 여덟 번째 무루심이라 한다.

이상을 여덟 가지 의미로서 부처님의 첫 번째 아들이라고 한다.

以有此行度於色界其無色界十二諸結心隨習慧是爲第八無漏之心是謂八義佛之初子

 

이때 마음속으로 생각하기를 내가 삼계를 보아 괴로움[]과 괴로움의 발생원인[]을 제거하고 탐욕에 대하여 애착이 없다고 한다면, 이는 안온하다고 말하고, 적멸(寂滅)을 좋아하여 흐뭇한 마음으로 달갑게 여기면, 이것이 멸진법해(滅盡法慧)의 인()이라고 하나니, 이것을 아홉 번째 무루심이라 한다.

爾時心念吾見三界以除苦習於欲無愛是謂安隱則樂寂滅可意甘之是爲滅盡法慧之忍斯爲第九無漏之心

 

이미 이 이치를 얻고 나서 본래의 멸진(滅盡)을 보아 욕계 7결의 속박을 제거하면, 이것을 열 번째 무루심이라 한다.

已獲此義見本滅盡於欲界除七結之縛是爲第十無漏之心

 

만일 스스로 생각하기를 또 색계와 무색계에도 집착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이것을 적()이라고 말하나니, 이것을 열한 번째 무루심이라 한다.

12()의 의심을 제거하여 이미 이 환난을 해탈하였으면, 곧 멸진(滅盡)의 지혜를 얻나니, 이것이 열두 번째 무루심이라 한다.

則自念言若不著色及無色界此謂爲寂是爲第十一無漏之心則除十二諸結之疑已度此患卽得滅盡之慧是爲第十二無漏之心

 

그때 스스로 생각하기를 일찍이 없었던 일을 얻은 것이 마치 불세존(佛世尊)께서 법을 깨달으신 것처럼 그렇게 하여 이 도의 이치로 인해 욕계의 괴로움을 알아서 곧 버리며, 괴로움의 발생원인[]이 좇아 생겨남을 알아 괴로움의 발생원인을 여의고 진멸(盡滅)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한다면, 이 경지를 얻음으로 인하여 법혜(法慧)의 도인(道忍)에 들게 되나니, 이것을 열세 번째 무루심이라 한다.

爾時自念得未曾有如佛世尊解法乃爾因斯道義知欲界苦則棄捐之知從習生則離於習得至盡滅因此得入法慧道忍是爲第十三無漏之心

 

이때 도로서 욕계를 보아 8()을 버리면, 이것을 버린 다음에는 마땅히 이것을 얻어 법혜(法慧)를 일으키나니, 이것이 열네 번째 무루심이라 한다.

爾時以道睹於欲界則棄八結去是然後會當獲此興隆法慧是爲第十四無漏之心

 

이 때를 맞추어 마음속으로 생각하기를 일찍이 없었던 일을 얻었다라고 한다면, 이 도행(道行)으로 인하여 색계와 무색계의 괴로움을 해탈하고 모든 괴로움의 발생원인을 제거하여 진멸을 증득하나니, 이것이 열다섯 번째 무루심이라 한다.

應時心念得未曾有以是道行解於色界無色之苦而除諸習證於盡滅是爲第十五無漏之心

 

마음이 도를 좇아서 12결을 제거하되 색계와 무색계에서 이 결이 이미 제거되면, 곧 도혜(道慧)를 일으키나니, 이것이 열여섯 번째 무루심이라 한다.

道從其志除十二結於色無色界除是結已則興道慧是爲第十六無漏之心

 

그 때를 맞추어 88결을 제거하고 또한 열 가지 상념(想念)의 결()을 버리게 된다.

왜냐 하면, 마치 강물에서 취한 한 방울의 물처럼 구경(究竟)의 도()의 이치는 강물과 같고, 그 나머지 아직 제거하지 못한 것은 한 방울의 물과 같기 때문이다.

이에 도적(道迹須陀洹)을 이룩하여 마침내 성현(聖賢)의 지위에 이르며, 일곱 번 반복해 하늘에 태어나고 일곱 번 반복해 인간에 태어나고서 영원히 괴로움의 근본을 다하게 된다.

應時除盡八十八諸結當去十想結所以者何如從江河取一渧之水究竟道義如江河水其餘未除如一渧水卽成道迹會至聖賢七反生天七反人閒永盡苦本

 

수행하는 사람이 이런 것을 헤아림으로써 온갖 번뇌의 뿌리를 뽑고 생사의 흐름을 끊으면, 마음은 곧 기뻐하면서 이미 3()를 해탈하고 5역죄(逆罪)32)을 범하지 않으며, 이도(異道)를 여의고 선지식(善知識)을 만나 외도(外道)를 따라 영화를 희망하지 않고 중우(衆祐)의 덕을 기대하며, 처음부터 끝까지 일곱 번 반복해 태어나는 환난을 겪지 않으며, 일찍이 계율을 범하지 않고 수 없이 많은 밝음을 보아 낮밤으로 기뻐하게 된다.

其修行者以是之比拔衆惱根斷生死流心則欣悅已度三塗不犯五逆離於異道遇其所知不從外道悕望榮冀衆祐之德不更終始七反之患未曾犯戒見無數明晝夜歡喜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흉년이 든 곳을 피하여 풍년이 든 나라에 이르는 것과 같고, 또는 험난한 곳을 벗어나 편안함을 얻는 것과 같으며, 옥에 갇혀 있다가 벗어남을 얻은 것과 같고, 병이 나아서 마음으로 기뻐 뛰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수행하는 사람은 이와 같이 안반수의(安般守意)를 잘 수행하면 그로 인하여 적멸(寂滅)을 얻으리니, 적연(寂然)해지기를 원한다면 이와 같이 익히고 수행하여야 한다.

이것을 게송으로 말한다.

譬如有人避飢饉地至豐賤國脫嶮得安繫獄得出如病除愈心懷喜踊修行如是因安般守意則得寂滅欲求寂然習行如是於是頌曰

 

 

수면(睡眠)과 심한 게으름을 깨달아 알고

몸에서 숨이 나오는 때를 분별하며

들이쉬는 숨을 수행하고 돌이켜 얻기를 생각하면

이것을 몸의 숨으로 수행을 이룩했다고 말한다.

覺了睡眠重懈怠

分別身中息出時

修行息入念還得

是謂身息成其行

修行道地經卷第五

乙巳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雕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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