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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율스님, “난 지금 이 사회 흐름에 문제제기 하는 것…

지율스님, “난 지금 이 사회 흐름에 문제제기 하는 것…

천성산, 못 놓는다”


산골은거 2년 반…언론과 나홀로 법정투쟁


지율스님이 숨어든 곳은 휴대폰도 터지지 않는 깊은 산속이었다. 5차 단식을 중단한 뒤

주변의 부축을 받으며 이 곳에 온 것이 2006년 봄의 일이다. 그 때 세상 인심은 참 흉흉

했다. 

 

 

▲ 경북 영덕 산골의 누옥은 오랜 단식과 여론의 뭇매로 탈진한 지율스님에게 의지처가

되어주었다. 스님은 “이곳은 필요한 사람에게 쓰게 하고 나는 좀더 멀리 떠나야 할 것 같다”고

했다. 영덕 | 박재찬기자 


지율스님은 2003년부터 경부고속철도의 천성산 구간 터널공사를 반대하며 모두 350여일을

굶었다. 본래 단식이란 ‘뜻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죽겠다’는 결연한 의사의 표현이다.

그런데도 세상은 이 단식을 너무 쉽게 논평했다. 언론은 지율스님이 단식으로 지키려고

했던 천성산의 환경 문제보다 스님의 단식이 진짜인지에 관심이 더 많았다.

여론은 ‘비구니 하나의 아집으로 공사가 지연돼 2조원의 혈세가 낭비됐다’고 비난했다.

결국 터널 공사는 강행됐고 지율스님에게는 상처 외엔 남은 것이 없었다.


그러나 지율스님은 천성산을 향한 마음을 접지 못했다. 당시 한국철도시설공단은 공사 지연

손실이 2조5000억원이라고 주장했지만, 실제로는 145억원에 그친 것으로 확인됐다.

지율스님은 2조5000억원을 근거로 들며 천성산 보존운동을 공격했던 거대 신문사들을

상대로 나홀로 법정 투쟁을 벌이고 있다.


지난 15일 경북 영덕 칠보산 기슭에 살고 있는 지율스님을 만났다. 스님은 소송에 대해

“170배나 부풀려진 숫자가 사용됐는데도 누구도 반성하지 않는 이 사회에 문제를 제기

하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세상에 다시 나설 생각은 없다. 그는 “천성산 문제가

정리되는 대로 아무 일도 하지 않겠다는 것이 계획”이라고 했다.


-모습을 감춘 지 약 2년 반 만에 첫 인터뷰입니다. 다시 세상에 나갈 준비를

하는 것으로 해석해도 될까요.

“그런 건 아닙니다. 세상에 나가려고 인터뷰를 하는 게 아니라 안 나가려고 하는 거예요.

한 번은 해야 될 것 같아서요. 지금 하고 있는 일(천성산 관련 소송)이 있기도 하고. 모르겠

어요. 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것들이 있잖아요. 너무 잘못 알려지고 있는 것이

많고…. 제 기사가 나와도 한 1년은 안 봐요. 텔레비전도 안 켜요. 무서워서. 그래서 1년쯤

지나고 좀 가라앉으면 봐요. 소심해요.”


-스님이 영덕으로 오신 게 2006년 5차 단식을 끝낸 이후입니까.

“동국대 병원에서 퇴원하고 갈 데가 없어서 왔어요. 여동생이 데려다 주고 갔지요. 여기

들어올 때만 해도 몸이 아파서 못 걸었어요. 동네 어르신들이 참 많이 애쓰셨어요. 밥도

해다 먹이고. 좋은 곳에 왔어요. 사람이 살다보면 자기가 사는 곳이 세상의 중심인 것

같아요. 이런 데서 사는 것은 생각도 안 해봤는데 사니까 살아지고.”


-이 마을은 어떻게 아셨습니까.

“10년 전에 우연히 들렀어요. 저 밑에 소나무 숲이 참 좋아요. 그 길을 따라 오다가

이 집이 첫 집이니까 들어왔지요. 할머니가 이사 갈 준비를 하고 계시더라고요. 집값이

얼마냐고 물으니까 150만원 달래요. 돈 모아서 다시 왔더니 그 사이 길이 생겨서 집값이

오른 거예요. 결국 못 사고 1년을 돌아다니다 저희 스님이 주지 마지막 임기 때 잠깐 들어

가서 봐드렸더니 용돈을 주시더라고. 그래서 여기를 산거예요. 그 후엔 한 번도 와보지

않았어요. 올 일이 없었으니까.”


-스님이 세상에 알려진 사람이라는 것을 마을 주민들도 알고 있습니까.

“텔레비전에서 많이들 보셨지요. 이곳은 소도 같은 곳이에요. 저처럼 아프고 외로운 사람들,

어려운 사람들이 와 있어요. 그래서 마을 전체가 알려지는 것은 부담스러워요. 그분들을

보호해드려야 하니까.”


-요즘 하루를 어떻게 보내십니까.

“하는 게 많아요. 일도 하고, 제 농사도 하고. 기본적으로는 제 생활을 지키지요. 일어나는

시간이 거의 정확해요. 새벽 3시 정도. 저절로 눈이 떠져요. 아침에 해 뜰 때까지 앉아

있다가 어르신들 농사일 하는 데 가서 일 배우고 품앗이도 해드리고. 바느질도 하고 염색도

하고. 사진 찍을 때도 있고 기록도 많이 하지요.”


-홈페이지를 보니 글과 사진을 이것저것 많이 올려놓았던데.

“놀랍게도 필요한 건 금세 습득을 해요. 너무 절실하니까. 컴퓨터를 제대로 배운 적이

없어요. 사람들한테 일일이 물어봐서 여는 것 가르쳐 주세요, 닫는 것 가르쳐 주세요,

그렇게 배운 거예요. 최근까지도 인터넷 검색이란 게 있는지 몰랐어요. 그런 게 있는 줄

알았으면 그 전에 일을 좀 벌였을 텐데(웃음). 긁어오는 건 꿈에도 생각을 못했고. 만날

타자치는 거예요, 독수리로. 지금도 독수리지만 그래도 천천히 배우고 사진도 찍어요.”


-홈페이지에 언론사 소송에 관한 자료가 많습니다. 조선일보·동아일보를

상대로 진행하고 있는 소송에 대해 설명하신다면.

“천성산 터널 공사 지연으로 발생한 손실이 2조원이다, 아니다 하는 문제, 혹은 저에 대한

안티 문제가 있었어요. 하지만 제가 소송하는 이유는 그것과 다릅니다. 천성산을 지키려는

싸움 속에서 그런 일이 있었다면, 지금은 이 사회가 가고 있는 흐름에 문제를 제기하는

거지요. 언론에서 한결같이 ‘공사 지연 손실이 2조5000억원’이라고 했던 것에 대해,

제가 ‘실은 145억원’이라고 해도 현실적으로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 그런데도 제가

소송을 하는 것은 이 사회가 170배나 과장된 숫자로 옮겨가도 언론뿐 아니라 연구소라든지

교수들, 우리 ‘도롱뇽의 친구들’까지 그 흐름을 같이 따라가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에 문제

제기를 한다는 게 하나의 이유이고. 또 직접적으로는 대운하 문제가 연결되어 있어요.

대운하를 한다고 했을 때 홍준표 의원이 ‘천성산 터널 공사를 할 때 한 비구니가 단식해서

2조5000억원이 손해가 나는 등 국가 손실이 많은데 운하가 되겠느냐’고 했어요.

국가 로펌인 ‘정부법무공단’이 출범할 때의 취지가 천성산 문제로 2조5000억원의 손실이

발생하는 등 시민단체의 소송으로 국가적 손실이 크니까 직접 대응하는 로펌을 만들겠다는

겁니다. 지나가는 사람은 그냥 듣지만 이해당사자인 저는 책임을 많이 느낍니다. 정부에서

그 숫자를 굉장히 정략적으로 쓰잖아요. 한 번은 바로잡아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천성산 통해 아픔 배웠다”

요즘 영덕 칠보산 기슭서 농삿일…정리되면 어떤 일도 하지 않겠다

 

 

지율 스님이 마을 주민 ‘나무 할배’와 마주 앉아 웃고 있다. ‘나무 할배’는

기력이 남아있을 때 장작을 준비해야 한다며 부지런히 나무를 한다.


-당시 손실이 2조5000억원이라는 주장은 맨 처음 어디서 나온 겁니까.

“딱 한 장이에요. 2조원대라는 엄청난 숫자를 여기저기서 많이 사용한 근거가 됐던

보고서가. 그 숫자를 언론에서 400번이나 쓰고도 문제제기가 없었다는 건 큰일이지요.”


-2조5000억원을 근거로 들며 스님을 공격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중앙대 이상돈 교수님이나 서울대 박효종 교수님처럼 반대쪽 논리를 기고하시는 분들이

있어요. 그런 분들을 뉴라이트라고 하던가요? 그 교수님들이 칼럼에 2조원 문제를 쓸 때

언론 보도를 인용만 하는 게 아니에요. 인용에 따라오는 비약들이 있잖아요. 비약을 심하게

하신 분들에게 메일을 보냈어요. 그동안 교수님들이 알고 있던 사실과 제가 아는 사실을

비교해서 7명 정도에게 보냈는데 6명이 답장을 하셨어요. 죄송하다고. 잘못 알았다고.

그 분들, 천성산 문제에 대해 양보하지 않던 사람들이었거든요. 그 분들이 진정으로

잘못했다고 말씀하시는 것들을 조선일보 소송을 통해 모아보는 겁니다.”


-‘나홀로 소송’을 하고 있습니다. 거대 언론사를 상대로 법리를 다투는 게

쉽지 않을 텐데 왜 혼자서 소송을 합니까.

“직접적인 이유는 같이 해 줄 사람이 없어요. 이제 끝난 일이라고 생각하니까 하려고

안 하시더군요. 저로서는 지금이 굉장히 중요한 고비인데도. 대운하 문제도 그래요.

공교롭게도 지금 정종환 국토부 장관이 한국철도시설공단 이사장을 했던 분이잖아요.

저는 그 분이 천성산을 어떻게 다뤘는지 아는 거예요. 박재완 청와대 국정기획수석도

천성산 터널공사 반대가 ‘설익은 민주화의 적폐’라고 했는데, 그렇게 얘기하실 수 없는

분이에요. 그 분은 제가 정토회에 있을 때 환경영향평가 재실시를 위한 국회의원 모임의

중요한 멤버였거든요. 지금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에서 박 수석의 발언에 대해

소송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보통사람이라면 소송을 혼자 해야 할 경우 그냥 포기해버릴 것 같습니다.

“저도 때때로 그래요. 제가 그러잖아요, 머리를 헹궜으면 좋겠다고. 하지만 다른 쪽에서도

생각을 해봅니다. 왜 나같이 배우지도 못하고 세상물정도 잘 모르는 사람을 천성산이

불렀을까. 저 위에 꽂혀 있는 책이 화엄경인데 저게 발단이에요. 제가 화엄경을 사경한

적이 있어요. 천성산 화엄벌에 올라가면 화엄바위라는 큰 바위가 있는데 원효스님이

1000명의 대중을 모아놓고 화엄경을 설했다고 해서 그렇게 불러요. 그때는 그곳이

습지인지도 모르고 지뢰밭이라서 아무도 안 갔는데 제가 붓글씨로 써서 80권이나 되는

책을 들고 가서 읽은 겁니다. 큰소리로. 거기 새나 나비가 날아다녀요. 꽃밭이니까.

생명이 많이 사는 곳이에요. 저는 그것들이 듣고 있다고 생각하고 계속 읽었어요.

10년 후에 그곳에 갔다가 관광지를 만든다고 길 닦는 현장을 본 거지요. 다른 스님은

거기까지 쫓아 올라갈 일이 없었을 거예요. 고속철도 문제도 산사태 현장을 제가 목격했고.

그 사진을 찍어서 보여주니까 여기 지질이 단층대다, 이렇게 된 겁니다.”


-천성산에 가 보십니까.

“부산에 가끔 가요. 모니터링은 직접 하지 않지만 여러 가지로 일을 하고 있어요. 2조원

문제가 끝날 때쯤엔 천성산에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정리를 해야 할 것 같아요.

처음에 문제제기를 했던 것들이 그대로 가고 있잖아요. 꼭 터널 구간이 아니더라도 지반이

약해서 그 입구가 벌써 무너졌고 공사 지연 얘기까지 나오고 있고요. 실제로 천성산 앞

구간의 지질이 비슷하거든요, 15-5 공구가. 지난해에 9900㎡(3000평)가 5m 밑으로 가라

앉았어요. 지금 터널 안에서 뭔가 일어나고 있고 사람이 죽기도 했다는데 밖으로는 전혀

보도가 안 되고…. 늪이나 계곡의 지하수 문제도 정리를 해야지요.”


-단식을 5차례나 하셨는데 후유증은 없습니까.

“병원에 안 가서 잘은 모르겠어요. 저는 이상하게 제 몸에 대해서는 통증이나 아픔 같은

것을 떨어뜨려놔요. 어디가 아프면 그것을 들여다보고 거기 집중하는 게 아니라 그걸

한 쪽에 놓고 저 하는 일에 전혀 지장을 안 받고 그냥 아파요. 너무 아프면 눕고. 아픈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편이에요.”


-외부에서 찾아오는 손님들이 있습니까.

“거의 안 오시지요. 신문에 인터뷰가 나가면 많이 섭섭해할 거예요. 걱정이에요. 초파일에도

아무도 안 와요. 그러니까 마을 할매들이 ‘스님들 오시면 밥은 돌아가면서 우리가 해드릴

테니까 스님들 좀 받으세요’ 그래요.”


-외롭다거나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습니까.

“그런 생각은 해본 적이 없습니다. 여기 와서 배운 것 중 하나가 무서움이 없어졌다는

거예요. 제가 겁이 많거든요. 혼자 있는 것도 무섭고 어둠도 무섭고. 그런데 그런 것에 대한

무서움을 잊었어요.”


-도법스님은 서울에서 생명평화 탁발순례를 하고, 수경스님은 오체투지를 하고

있습니다. 소식은 들으셨습니까.

“도법스님이나 법륜스님의 단식, 그런 데는 별로 가고 싶은 생각이 없어요. 거기는

보해주는 분들이 다 계시잖아요. 오히려 지난번에 기륭전자를 들여다보지 못해서 참 미안

했어요. 서울 갔을 때 몇 번이나 가보고 싶었는데 또 괜히 잘못했다가…. 제가 하도 구설에

많이 오르니까….”


-천성산 문제를 겪으면서 스님 스스로 달라졌다고 느끼는 부분이 있습니까.

“마음은 별로 변하지 않았어요. 제가 늘 그렇게 얘기해요. 세상을 무심하게 살았던

벌이라고. 천성산 현장을 보고 돌아온 순간부터 제 삶이 완전히 바뀌었어요. 피하고

싶어도 피해지지가 않아요. 그래도 거의 마무리 단계까지 오지 않았나 싶어요. 제가 천성산

지키기를 2001년부터 했으니 7년째이지요. 한 번도 놓은 적이 없어요. 자나깨나 서나

앉으나. 제가 놓지 못하는 거지요. ‘목숨을 건다’는 표현은 나쁘지만, 저는 제 모든 것을

걸어요. 지금도. 소송 준비하면서 잠도 거의 안 잤을 거예요. 3000건이 넘는 기사를

날마다 열어서 분석했으니까.”


-천성산 문제를 정리하고 나면 무슨 일을 하실 계획입니까.

“그건 비밀이에요. 아마 어떤 일도 하지 않겠지요. 어떤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공부를 했어요. 다른 분들이 보면 좀 모질게 했지만 저는 사실 즐겁게 한 일이잖아요.

고맙고 감사하지요.”


-지켜보는 사람들은 안타깝게 여겼는데 스님은 즐거웠다고 하시네요.

“즐겁다기보다 감사했지요. 아픔을 알게 됐으니까. 천성산을 통해 아픔을 배웠고 저보다

힘들었던 사람들에 대한 책임도 느끼고. 만약 밖에 나오지 않았으면 영원히 몰랐을 뻔한

많은 고통이 이 세상에 있었어요. 그 자리에 제가 옮겨갈 수 있어서 행복했다고 생각

하지요. 감사해요. 또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런 곳에 있을 때 제가 신앙적으로도 완성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그런 곳이라면 어디든지 있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사실

여기서 지내는 건 저한테 덤 같은 세월이에요. 덤으로 받은 세월이지요.”


지율스님은 누구인가

2001년 환경운동 첫발…‘천성산 공사’ 중단요구 350여일 단식


지율스님이 처음 환경 운동에 뛰어든 것은 2001년이다. 경남 양산 천성산 내원사에서 수행

하던 중에 천성산의 습지가 관광지 개발이라는 명분으로 훼손되는 현장을 목격한 것이 계기

였다. 2003년부터는 경부고속철도의 천성산 터널 공사를 중단하고 환경영향평가를 다시

실시하자는 운동을 시작한다. 2002년 노무현 당시 대통령 후보가 경부고속철 천성산 관통

노선의 백지화를 약속했지만 공약을 이행하지 않았던 탓이다. 지율스님은 2003년 2월 부산

시청 앞에서 시작한 1차 단식(38일)을 시작으로, 같은해 11월 2차 단식(45일), 2004년 6월

3차 단식(58일), 같은해 10월 4차 단식(100일), 2005년 9월 5차 단식(약 100여일) 등

모두 350여일을 굶었다. 현재 조선일보·동아일보를 상대로 왜곡 보도를 바로잡으려는

‘10원 소송’을 진행하고 있으며 외부와의 연락을 끊은 채 경북 영덕에 살고 있다.


<영덕 | 대담 김택근 논설위원> <정리 최희진기자 daisy@kyunghyang.com>


 



http://cafe.daum.net/chongmu1gi/B9jq/1269?docid=J2c5|B9jq|1269|20081029181603&q=%C1%F6%C0%B2%BD%BA%B4%D4&srchid=CCBJ2c5|B9jq|1269|2008102918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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