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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안의 납자들

<벽안출가〉에는 총 일곱 분 스님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대봉.무진.청안.청고.무심.일조.오광

한국불교에 귀의한 눈 푸른 선승 7인의 일대 구도기 

 

너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느냐

한국 불교에 귀의한 눈 푸른 선승들이 있다. 이들은 미국, 헝가리, 영국, 세르비아에서 태어나고 자란 후에 한국 불교를 만나 자신이 지니고 있던 모든 것을 포기했다. 아니, 포기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그것은 ‘내려놓음’이다. 상황과 여건이 충족되지 않아 어쩔 수 없이 손을 뗀 것이 아니라 자신이 원해서 적극적으로 뿌리친 것이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한 것과 원해서 한 것 사이에는 하늘과 땅의 간극이 있다. 이들은 국적, 지위, 명예, 돈 같은 세상의 모든 명리를 속세에 남겨 놓았다. 스스로 결정했기 때문에 두고 온 것에 대해 후회나 미련은 없다. 오로지 깨달음을 향해 정진할 뿐이다. 과연 깨달음은 무엇이기에 모든 것을 버린 것일까. 어떤 길이기에 뒤돌아보지 않고 문화와 종교 그리고 육신의 옷까지 벗고 훌쩍 떠나버릴 만큼 사람을 잡아끄는 것일까. 용기 있게 걸어가는 벽안 선승의 뒷모습이 커다랗게 드리워져 있기 때문에 그 길은 더욱 눈부시다.


전부를 버리고 하나를 얻는다

<벽안출가〉에는 총 일곱 분 스님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세계 4대 생불로 칭송 받으면서 한국 불교를 세계에 널리 알린 숭산 스님의 유일한 전법제자 대봉 스님을 시작으로 외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조계종 포교대상을 수상한 무진 스님, 고국 헝가리에 한국식 사찰을 짓기 시작한 청안 스님과 청고 스님, 스승의 유지를 이어받아 무상사 주지로 있는 무심 스님, 외국인 스님으로서는 최초로 율원과 강원을 졸업한 일조 스님, 한국 선원에서 수십 차례 안거에 든 오광 스님…….

이 스님들은 모두 각자의 인연에 따라 출가를 했다. 대봉 스님은 사회적 부조리에 반발해 미국 월남전 참전에 반대하는 시위에 참가하기도 했지만 곧 회의를 느끼고 방황하던 중 숭산 스님을 만났다. 무진 스님은 대학에서 아동심리학의 거장 장 피아제를 사사할 정도로 뛰어난 재원이었다. 하지만 우연히 원명 스님을 만나 한국 불교가 어떤 것인지 묻게 됐고 ‘Everything is perfect’라는 말 한마디에 한국행을 결심하게 됐다. 예민한 감수성의 청안 스님은 삶 뒤에 숨어 있는 비애를 알아차리고 숭산 스님을 만나 그에 대한 해답을 얻으려 출가했다. 청안 스님은 대학에서 우연히 대행 스님을 만나 ‘네 안을 찾아라’는 말에 지식으로 얻을 수 없는 어떤 경지를 목격했다. 무심 스님은 명문 보스턴 대에서 화학과를 전공하고 직장 생활을 하던 중 ‘모두 내려놓으라’는 숭산 스님의 말씀을 듣고 그 순간 그 말씀을 따랐다. 일조 스님은 도저히 한국 불교와 만날 수 없는 키르기스스탄에서 나고 자랐지만 운명처럼 한국 불교를 찾아 왔다. 그리고 오광 스님은 온갖 수행법을 다 경험하고 다시 한국 불교로 돌아왔다.   

살면서 용기를 내어 무엇인가를 결정하는 일은 흔치 않다. 간혹 결정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대부분 일상의 테두리 안에 갇혀 있다. 이 책은 모든 것을 내려놓음으로서 하나를 얻는 역설을 말한다. 이런 행복한 책 읽기의 경험도 흔하지 않다. 


벽안의 납자들 

 

대봉 스님

미국 필라델피아 엘킨스 파크 출생으로 대학에 입학해 전공을 물리학에서 심리학으로 바꾸었다. 대학시절 학생운동에 참여했으나 회의를 느끼고 이후 정신병원 카운슬러로 일했다. 1977년 뉴헤이븐 선원에서 숭산 스님 법문에 감화돼 불법에 귀의했다. 1984년 프로비던스 선원에서 사미계를 수지했으며 이후 서유럽과 미국에 있는 선원에서 수행을 지도했다. 1988년 스페인 바르셀로나 선원에서 비구계를 수지했으며, 1992년 숭산 스님으로부터 인가를 받아 전법제자가 됐다. 현재 무상사 조실로 있으면서 외국인 수행자들에게 깨달음을 전하고 있다.


 

무진 스님 

1949년 영국에서 태어나 스위스 제네바 대학교에서 심리학과 교육학을 전공했다. 박사 학위를 준비하던 중 돌연 휴학하고 이슬람 신비주의인 수피 사상을 공부했다. 그러다 1976년 스리랑카 스리난다라마야 사원에서 불교 수행자로 입문했다. 1986년 인홍 스님을 은사로 조계종 비구니계를 받았으며, 1987년 연등국제불교회관을 창설해 제1기 국제포교사 양성 과정을 만드는 등 많은 활동을 했다. 이후 스위스로 돌아가 2005년에 한국 선원 법계사를 세우고, 2007년 초에는 스위스 현지에서 최초의 한국 문화 축제를 열어 화제가 되었다. 또한 2006년 말엽부터 현재까지 더불어 전 세계 각지를 돌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고 있다.

 

   청안 스님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양친이 모두 의사인 중산층 집안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대학 졸업 후 번역 전문 회사를 차려 큰 성공을 거두었지만 1991년 헝가리에 방문한 숭산 스님을 만나 출가를 결심했다. 1993년부터 미국 프로비던스에서 1년간 행자 생활을 하고 1994년 겨울 한국에 왔다. 이후 숭산 스님을 은사로 조계종 비구계를 수지하고, 같은 해 관음선종 지도법사로 인가받았다. 2000년 고국 헝가리로 돌아가 인근 동유럽 여러 국가를 순회하며 법회와 강연을 열었다. 또한 유럽인들에게 한국 불교의 유구한 전통을 알릴 목적으로 유럽 최초의 한국식 사찰 원광사 건립을 서원하고 현재까지 공사를 이어 가고 있다.


청고 스님     

미국 워싱턴 주에서 출생했다. 오하이오 주립대학 산업심리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했으며, 1992년 한마음선원장 대행 스님의 초청 강연을 듣고 출가를 결심했다. 1993년 충북 보은 광명선원에서 출가해 사미계를 받았으며, 1998년 혜거 스님을 은사로 비구계를 수지했다. 2003년 동국대 선학과 석과정을 졸업했다. 현재 한마음선원 산하 국제문화원 및 출판사에서 불교경전의 번역 작업에 매진하고 있다. 향후 꿈은 개인적으로는 심안개오心眼開悟하는 것이며, 사회적으로는 한국 불교의 세계화에 일조하는 것이다.

 

   

무심 스님

1958년 미국 필라델피아의 유대계 교육자 집안에서 태어나 보스턴 대학에서 화학을 전공했다. 1979년 숭산 스님을 만나 감화, 1983년 프로비던스 선원에서 1년여 행자 생활을 하고 1984년 한국 화계사에서 정식으로 출가했다. 이후 계룡산 신원사, 예산 정혜사, 수덕사 등지에서 30여 차례 안거에 들었다. 1997년에는 화계사 국제선원에서 관음선종 지도법사, 1999년 수석지도법사, 2001년 국제선원장을 거쳐 2002년에는 부산에 남산국제선원을 개원하고 2003년부터 지금까지 계룡산 국제선원 주지 및 지도법사를 맡아 수많은 외국인 납자들을 지도하고 있다.

일조 스님

러시아(구소련) 케메로보 시에서 태어나 중앙아시아 북부 키르기스스탄에서 성장기를 보냈다. 16세 무렵 〈무신론자〉라는 책을 통해 불교를 처음 접했고 이내 매료됐다. 군 복무 중 수도 비슈케크 시에 처음 생긴 한국식 사찰 보리사에서 본격적으로 불교를 공부했고, 1998년 한국 강화연등국제선원에서 행자 생활을 시작했다. 2000년 송광사 강원에, 2004년 율원에 각각 입학해 외국인 최초의 졸업생이 되었다. 2004년 원명 스님을 은사로 조계종 비구계를 수지하고, 고국 키르기스스탄 및 러시아, 우크라이나 등지를 만행했다. 이후 다시 강화연등국제선원으로 돌아와 내외국인들을 대상으로 참선, 명상, 다도 등을 지도하며 수행하고  있다.

 


  오광 스님

세르비아에서 태어났다.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한 스님은 쇼펜하우어 철학에 경도되어 불교 사상에 관심을 갖게 됐다. 1989년 7월 1일, 폴란드에서 숭산 스님을 은사로 사미계를 수지했다. 숭산 스님을 따라서 헝가리, 미국, 프랑스, 스페인 등 유럽을 순회했으며, 영국 아마라와띠 사원에서 수행했다. 이어 태국과 스리랑카에서 오랫동안 위빠사나 수행법으로 정진했다. 1998년 한국에 입국해 숭산 스님을 은사로 비구계를 수지했다. 수덕사, 계룡산 무상사 등지에서 수행하고 있으며 향후 고국인 세르비아에 작은 선원을 세우는 것이 꿈이다.

유럽 첫 한국사찰 원광사 상량식 봉행
11월 11일 부다페스트 인근 지역서
설정 스님 등 사부대중 40여명 동참
기사등록일 [2006년 12월 07일 목요일]
 

유럽 최초의 한국 전통사찰인 헝가리 원광사의 상량식이 11월 11일 부다페스트 인근 지역에서 봉행됐다. 2000년부터 헝가리 관음선원을 이끌며 한국불교를 알려온 청안 스님의 원력에 따라 지어지는 원광사의 상량식에는 화계사 회주 설정 스님과 국제선원장 현각 스님, 법현 스님, 우봉 스님 등 사부대중 40여명이 동참했다.

청안 스님은 2007년 말까지 부다페스트 인근 지역에 1차로 3000평의 부지를 확보해 선방 등을 우선 건립한다. 2008년부터는 사찰 주변 지역을 차례로 매입해 최대 5000평의 부지를 확보한다는 방침이다.

법당 용마루에 손수 ‘西紀二千六年十一月十一日巳時元光寺禪院立柱上樑(서기이천육년십일월십일일사시원광사선원입주상량)’이라는 글씨를 써준 설정 스님은 “원광사는 유럽의 한국불교 포교 중심지가 될 곳”이라며 “더 넓은 부지 위에 장엄한 모습을 갖춘 한국사찰을 건립해 달라”고 축하의 말을 남겼다.

청안 스님은 “유럽인들에게 참된 한국불교를 알리기 위해서는 한국불교의 전통을 그대로 간직한 사찰건립이 필수”라며 “부디 많은 불자들이 이 불사에 관심을 가져주길 바란다”고 간곡히 당부했다. 계좌번호 : 외환은행 611-016937-100(원광사)

정하중 기자 raubone@beopbo.com

 

 

 


880호 [2006-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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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호 전문기자의 한국서 길찾는 이방인] (17) 헝가리 출신 청안 스님
2005년 입적한 숭산 스님은 생전 5만여명에 달하는 외국인을 제자로 삼았다. 한낱 공허한 말에 얽매여 머물지 않는 그의 실천행 법문에 감화된 많은 지식인들이 출가해 수행 중이거나 한국불교 포교에 앞장서고 있다. 헝가리 출신의 청안(42·淸眼) 스님도 그중 한 사람. 헝가리에 머물면서도 틈틈이 불교TV 강의와 법문집 ‘꽃과 벌´(김영사)을 통해 국내에 이름이 알려져 숭산 제자 중 가장 대중에게 인기높은 ‘스타 스님´이다. 출가 전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무명에 흔들리는 사람들의 ‘본래불성(本來佛性)´을 찾아 주기 위해 고국 헝가리에 유럽 최초의 한국식 사찰 원광사(www.wonkwangsa.net)를 짓는 불사에 매달려 있는 청안 스님. ‘나의 마음이 깨끗해지면 세상이 하나가 된다.´는 숭산 스님의 ‘세계일화(世界一花)´ 사상을 몸으로 펴가는, 한국불교의 대표격 국제포교사이다.

모든 것을 내려놓으라는 ‘방하´ 한마디에 깨달음 얻어

▲ 청안 스님
하안거(夏安居) 결제를 사흘 앞둔 16일 오전. 수소문끝에 조계사 일주문에서 만난, 훤칠하게 키가 큰 스님은 환하게 웃으며 손을 모았다. 나란히 찻집으로 향하는 길에서도 ‘스타 스님´을 알아본 신도가 거푸 인사를 하는 바람에 여러 번을 멈춰서야 했다.

지난해 11월 숭산 스님 3주기 행사 때 한국에 들어온 이후 6개월 만의 방한. “안거를 나기 위해 들어 왔느냐.”고 묻자 “현실적인 이유” 때문”이라며 헝가리 부다페스트 외곽에 짓고 있는 원광사 이야기부터 꺼낸다.

“한국식 그대로 절을 지으려니 꼼꼼히 챙길 게 많아요. 벌써 두어차례 다녀갔지만 공을 들일수록 손볼 것이 생겨납니다. 이번엔 서까래와 기와 때문에 헝가리 와공들을 대동하고 절집들을 돌면서 전문가들을 만나고 있습니다.”

양양 낙산사에서 대목장을 만나 ‘한 수´ 배웠지만 출국하는 23일까지 찾아야 할 사찰과 만날 사람들이 많아 바쁘단다. 헝가리의 신도 6명도 함께 들어와 부처님오신날 법요식을 백담사에서 지냈다.

백담사는 숭산 스님이 조실로 주석했던 곳. 스승의 흔적과 정신이 고스란히 스며 있으니 응당 여느 사찰과는 달리 각별할 것이다.

헝가리 중산층 가정, 의사 아버지 밑에서 유복하게 자라난 그가 숭산을 만나 삶의 모든 것을 송두리째 바꾼 이유는 무엇일까. 무슨 말을 들었기에 그토록 자신을 괴롭혀 왔던 혼란을 단박에 털고 벼락 같은 깨침에 닿았을까.

숭산의 제자들이 대부분 그랬던 것처럼 청안도 그 유명한 법문 ‘방하(放下)´를 입에 올린다. “오직 모를 뿐, 그저 내려 놓아라. 그런 다음 그냥 하라(Just do it).”

‘내가 누구이고 무엇 때문에 이곳에 이렇게 살고 있느냐.´는 보편적인 의문이라면 누구나가 한번쯤은 품었을 터. 하지만 그냥 모든 것을 내려 놓으라는 ‘방하´ 한마디에 벼락 같은 해법을 찾았으니 예사 법기(法器)는 아니다.

헝가리 부다페스트 엘테(Elte)대학에서 영어와 헝가리어를 전공한 어학도. ‘내가 누구인가.´라는 근원적인 의문에 더해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 것인지, 어떤 것이 좋고 어떤 것이 나쁘냐는 삶에 대한 고민과 의심에 끊임없이 시달렸단다. 이런저런 철학·심리학 책들을 뒤졌고 종교인들의 조언도 받았지만 답을 얻을 수는 없었다. 절친한 친구로부터 소개받은 관음선종 선방을 다니며 참선을 하다가 선방을 찾은 숭산 스님 법문 자리에서 문답을 통해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었던 마음의 안정을 얻었다고 한다.

“실체가 아닌 나와 모든 것에 대한 집착을 버릴 때 진짜 나를 보게 된다. 본디 내 안에 있는 이 불성을 닦게 되면 마음이 맑아지고 세상도 밝아지게 된다.”

헛된 생각에 휘둘리지 않고 있는 그대로 세상을 바라볼 때 나와 세상에 얽힌 매듭과 관계가 풀린다는 말은 당시 무슨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큰 충격이었다.

대학시절 영어 교생으로 있던 어느 날. 수업을 마친 뒤 무심코 학교 잔디밭에 환하게 쏟아지는 빛을 보면서 불현듯 ‘스님´될 생각이 들었고 참선 수행에 깊숙이 빠져 들었다고 한다. 대학을 졸업하고 통역사로 일하던 중 숭산 스님이 세운 관음선종의 본산인 미국 프로비던스 선원 겨울 안거를 나면서 결국 출가를 결심, 해인사에서 행자교육을 받고 사미계를 받았다. 이후 통도사에서 비구계를 받았고 서울 화계사에서 2000년까지 수행 끝에 고국 헝가리로 돌아갔다고 한다.

숭산스님의 ‘세계일화´ 이어 유럽에 한국불교 전파

한국불교가 좋아 한국 비구가 되었으니 한국에 머무는 게 바른 길이 아닐까. 비구계를 받은 ‘한국 스님´으로 꼬박꼬박 안거도 참여했지만 굳이 헝가리를 택한 이유를 들려 준다.

“비구계를 받고 나서 적지 않은 갈등이 있었습니다. 한국에서 출가 전의 나같은 속인들을 위해 길잡이를 할까, 아니면 헝가리를 터전삼아 유럽 포교에 나설까를 놓고 많이 고민했습니다.”

1999년 숭산 스님으로부터 외국인 스님으론 사실상 최고 경지인 지도법사 인가를 받고 이듬해 결국 고심 끝에 헝가리를 택했다. 오스트리아, 슬로바키아, 리투아니아, 체코, 폴란드 등 발닿는 대로 유럽 각지를 돌며 포교에 나섰다고 한다.

“고국으로부터 받은 은혜를 갚는다는 뜻도 있지요. 헝가리서 받은 내 몸과 교육, 집, 음식…. 이런 것들을 부처님 법(佛法)으로 갚자는 것이지요.”

헝가리에서 처음 3년간은 집시들을 위한 작은 선원에서 기거했다. 그러던 중 숭산 스님이 세운 관음선종 사찰들이 유독 유럽에만 없다는 사실을 알고는 스님과 주민들이 함께 생활할 수 있는 원광사를 짓기 시작한 것이다.

대웅전이며 크고 작은 선방, 탑, 요사채 등 한국 전통사찰 양식 그대로 지으려니 공사가 더디다. 2006년 선방 상량식을 갖고 식당이며 목욕탕 같은 우선 필요한 부대시설을 갖추었지만 주 건물인 대웅전과 명부전, 선방을 다 세워놓기엔 아직 갈길이 멀다. 한국불교를 온전히 담고 알리려면 그 그릇(원광사)부터 제대로 만들어야 한단다. 불교 십이인연(十二因緣)의 하나로 모든 사물이 무상(無常)·무아(無我)함을 모르고 갈애(渴愛)를 일으켜 윤회(輪廻)의 원인이 된다는 근본적 번뇌 무명(無明). 24년간의 무명에서 깨어나 한 줄기 빛과도 같은 깨침을 얻었다는 뜻이 담겼을까. 스님이 그토록 애착을 갖는 원광사의 이름 뜻이 궁금해졌다. 이름은 누가 지었을까.

“관세음보살이 이름을 점지해 주셨다.”며 웃음을 피우더니 이내 정색을 한다.

“헝가리를 비롯한 유럽 사람들은 한국불교와 일본, 티베트 불교의 차이점을 모르지요. 그 모르는 상태에서 제가 숭산 스님에게 받았던 것처럼 한국불교를 통한 깨침을 얻게 해주는 게 제 소명입니다.”

예상대로 그랬다. ‘모든 사람이 각자 갖고 있는 불성을 닦아 지혜와 자비, 보시행을 이뤄 세상을 밝히자.´ 본래의 빛, 불성을 찾아가는 공간이다. 출가의 원을 세운 지 어언 20여년. ‘나는 누구인가.´라는 근원적인 의문과 무명의 번뇌는 말끔히 소멸한 것일까. 오래 전에 제 이름을 잊어 버렸다는 청안 스님. 그는 스님의 본분은 끊임없이 수행하는 것뿐이라고 거듭 말한다.

“끊임없이 버리고 내려 놓는 것이지요. 오직 모를 뿐 그냥 할 뿐입니다.” 한국불교를 삶의 또 다른 길로 선택한 푸른 눈의 납자가 가꾸는 ‘세계일화´의 꽃은 소문대로 튼실했다. 끊임없이 ‘스타 스님´을 찾는 손 전화의 울림들이 인터뷰를 힘들게 한다. 결국 스님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는 누구인가의 전화를 받고는 서둘러 일어서며 한 마디를 남긴다. ‘Just do it´.

글·사진 김성호 문화전문기자 kimus@seoul.co.kr

청안 스님은

[종교]"한국불교 유럽에 알리자”

기사입력 2004-10-20 17:21 |최종수정2004-10-20 17:21
‘한국 불교는 스타급 스님이 없다.’

대부분 사람들은 불교는 아시아 국가에서만 성행하는 것으로 알고 있으나 이것은 편견이다. 유럽은 기독교 국가임에도 불교에 대한 관심이 높아 러시아를 비롯한 유럽의 불교신자는 20여개국 1000만명을 넘어선다. 서유럽만 해도 프랑스가 400만명으로 가장 많고 독일이 150만명, 영국이 120만명으로 그 뒤를 잇고 있다. 또 프랑스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헝가리 폴란드 러시아 덴마크 등 7개국은 불교를 종교로 인정하고 있다.

유럽인들은 처음에는 불교를 문헌적 연구 대상으로 받아들였으나 곧 ‘열린 종교’로 인지했다. 지금은 삶의 철학이자 대안 사상으로 뿌리내리며 조용한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유럽 불교의 오늘이 있기까지는 현지 석학들의 치열한 탐구정신이 큰 몫을 했지만, 티베트의 달라이 라마나 베트남의 틱낫한, 일본 다이센 데시마루처럼 현지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유럽인들의 가슴에 부처의 사상을 현대적으로 쉽고 명쾌하게 와 닿게 한 스타급 승려가 있었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유럽에서 학문적으로 가장 빨리 불교를 받아들인 국가는 영국이다. 영국은 150여년 전 인도, 태국, 스리랑카 등의 식민지 경영을 통해 불교 연구를 시작했으며, 1881년에는 유명한 ‘팔리성전협회(Pali Text Society)’가 창립돼 팔리어 경전(불교의 가르침을 최초로 엮은 경전)을 영어로 번역하는 대역사를 이룬다. 유럽 불교는 19세기 지식층에서 일반대중과 청년, 학생층으로 급속히 확산됐다. 令?요인으로 불교가 지닌 ‘톨레랑스(관용)’와 비폭력, 반전사상, 여성인권 신장 등을 들 수 있다.

달라이 라마의 노벨평화상 수상 이후 불교는 기름을 부은 듯 번진다. 영국 런던의 최대 서점 포일스(Foyles) 종교코너에서 달라이 라마와 틱낫한 스님의 책들이 즐비하고, 나오기만 하면 날개 돋친 듯 팔린다.

유럽은 주거문화, 미용, 패션에까지도 ‘선(禪)’ 스타일이 등장하고 있다. 영국 거리에는 수행안내 광고가 나붙는가 하면 머리를 빡빡 깎은 남자들이 유난히 많이 눈에 띈다. 데즈먼드 비덜프 영국불교협회 부회장은 “영국은 지금 과거 한국이 중국으로부터 불교를 받아들이고 있던 때에 비견된다”고 말했다.

유럽에는 아시아 모든 불교가 들어가 있다. 그중 티베트 불교가 45%, 일본 불교가 25%를 차지하며 베트남 스리랑카 태국이 뒤를 잇는다. 이들 나라만 해도 유럽 현지에 대규모 사찰을 짓고 현지인의 신앙지도에 열중하고 있다.

레나르트 노악 독일불교연합회 회장은 “얼마 전 야외극장에서 달라이 라마 초청토론회가 열렸는데, 2만장의 입장권이 매진됐다”며 “달라이 라마의 인격과 관용정신에 독일인들이 감동하고 있다”고 말했다.

일본 불교도 일찍이 유럽에 들어가 붐을 일으켰으며, 최근 엄격한 수행으로 다소 탈퇴자가 늘어도 여전히 지식층 신자가 많다. 유럽 불자들은 주중에는 일하고 주말에는 소속 법당이나 선센터에 나가 1박2일 혹은 2박3일의 주말 명상 프로그램에 참가하며 삶의 스트레스를 날리고 있다. 때론 아시아 본고장까지 사찰투어에 나선다.

한국 불교는 뒤늦게 상륙한 탓인지 유럽에서 인지도가 매우 낮다.

조계종 런던 연화사(주지 일대 스님), 파리 길상사(주지 무이 스님)·사자후 선원(지도법사 우봉 선사), 독일 베를린 국제선원(주지 성도 스님)·뒤셀도르프 한마음선원 등에서 한국 전통수행법(간화선)을 펼치며 약진하고 있으나 교민·유학생 중심 포교에 머물러 현지인 포교는 미흡한 실정이다.

한국은 아시아에서 선불교 전통을 가장 잘 계승하고 있고, 덕망 있는 스님도 많다. 그럼에도 한국이 유럽에서 별로 주목받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뭘까. 유럽불교연구 전문가인 이동호 발틱연구소 소장은 “현지어 포교 능력을 지닌 스님이 없고, 한국 불교의 역사와 성격 등을 알 수 있는 영문 자료조차 없는 등 한국 종단 관계자들의 해외포교에 대한 무관심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와 달리 여타 아시아권 나라들은 국가나 종단 차원에서 사전 교육도 철저히 하고 현지어에 능숙한 스님들을 대거 파견하고 있다는 것이다.

조계종 총무원 기획실장 여연 스님은 “유럽 불교 현장을 둘러보니 종단 차원의 대책 마련이 절실함을 느꼈다”며 “사찰체험(템플 스테이)의 유럽 전수도 검토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대중예술도 스타가 나와야 팬이 생긴다. 한국 불교도 스타급 스님을 육성하는 일을 서둘러야 하지 않을까. 프랑스 파리 외곽의 토르시에 자리잡은 한국사찰 길상사(주지 무이 스님)도 열악하기는 마찬가지. 송광사 파리 분원으로 11년의 역사를 갖고 있는 이 사찰 역시 매달 두 차례의 법회를 열고 있지만 교민 40여명 정도가 참석하고 있을 뿐이다.

그나마 프랑스 파리 리옹가에 자리잡은 사자후선원(주지 우봉 스님)과 독일 베를린의 국제선원(선원장 성도 스님)과 뒤셀도르프의 한마음선원 독일지원이 해외 포교의 명맥을 어렵게 이어갈 따름이다.

런던=정성수기자/hul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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