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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조중동의 논리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국민의 '한 사람'되기 [24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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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번호 1516569 | 2008.07.01
    • 조회 67164 주소복사

    오늘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촛불 참여는 국민의 '한 사람'되기..

     

    이명박 정권 앞에 놓여진 수많은 촛불은 상처받기 쉽고, 가녀린 촛불이라고, 사제단 총무 신부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 촛불은 단지 '지금'의 현상으로 곧 사라질 연약함이 아니라, <역사의 연약함>, 즉 억압당하고 소외된 사람들, 의로움에 자신을 헌신했던 사람들의 역사적 현재입니다. 촛불은 그 역사를 인식하고 있습니다. 자신들의 존재가 '역사의 그들' 자신임을...

     

    그 반대로, 이명박 정권 속에서도 '역사'를 읽습니다. 한 개인, 하나의 먹거리에 대한 덧없어 보이거나, 때론 '정치적' 문제처럼 보이는 지나쳐가는 시간이 아니라, 그 안에서 '억압하고 착취하는 자', 즉 권력 욕망에 사로잡힌 역사의 사람들과의 연속성 속에서 읽고 있습니다. 권력욕망, 더 가지고자 하는 탐욕을 가진 자에게는 엄밀한 의미에서 '타자'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예컨대 조중동의 신문, 한나라당, 여러 어용단체들이 이 정권을 옹호하는 듯 보입니다만, 사실은 '위함'의 주체는 늘 '나'일 뿐입니다. 저널이 권력을 옹호하는 것은 그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 '나'를 위한 것이란 말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서로 연결되어있을까요? 철저히 '나'의 이익을 위해서 '너'를 필요로 한다는 구도입니다. 학문도 일종의 '타자'이지만 '나'의 이익을 위해서 철저히 왜곡할 수 있게 됩니다. 전문성을 앞세워, 진실을 가리우게 됩니다.

     

    누군가 왜 조중동 등의 논리에 쉽게 빠져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걸까요?라고 물은 적이 있습니다.  그들의 방식은 아주 단순합니다. 그들에게 기사와 광고는 분리해서 존재하지 않습니다. 달리 말하면 광고가 소비자의 '욕구'를 상기시키는 방식이라면, 기사는 '권력욕망'을 부추깁니다. 마치 몇몇 대형 개신교회에서 잘살게 해주는 기도처럼, 기사는 '개인주의적 욕망'을 끊임없이 상기시킵니다. 지금껏 모든 논조는 광고와 다름이 없습니다.

     

    결국 거기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사람은, 무엇보다도 그 사람 자체안에서 보자면, '타자'의 욕망을 <인정>하는 것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마치 과자를 먹고 있는 아이에게 그것을 빼앗거나 그런 조짐을 인식시키면, 분노와 좌절을 드러내는 것처럼, 자신의 욕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결코 조중동의 논리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어떤 방식으로 그런 분노를 표현할까요?

     

    욕망은 규정되지 않고자 합니다. 욕망은 늘 '뒤에서' 재현의 형태로만 드러냅니다. 그런데 그 욕망이 상처받았을때, 또 그 욕망이 드러나려할때, 공격성이 나타납니다. 그 공격성은 어느 정도 문화적인 것이라 외현은 다를 수 있지만, 공통점은 드러나려하지 않고자 결국 자신의 욕망을 상대방으로 투사시킵니다. 여기서 중요한건 상대방에게 투사시킨 그 내용 자체가, 상대방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표현하는 바로 그 욕망이란 것입니다. 예컨대 '좌빨'이란 용어, 참 듣기 거북한, 그런 용어는 상대방에 관한 폭로가 아니라, 말하는 자의 욕망의 투사라는 점입니다. 조중동의 요즘 춧불들에 대한 행태는 그 욕망의 질적 크기를 가늠케하는 것이지, 촛불의 본질을 말하는게 아니라는 점을 잘 봐야합니다.

     

    결국 그러한 욕망, 끊임없는 순환속에 있는 욕망의 정화는 '타인'의 인정 속에서, 그 사람들 안에서 '한 사람'이 되고자 할때 인식되고 다스려집니다. 인식은 다스림의 전제입니다. 그들중 한사람이 되는 것은 나만이 아니라 타인도 욕망을 지닌 한 사람이란 것을 인정할 때 인식됩니다. 이것은 윤리도, 철학도 아닌 일종의 치료입니다. 마치 선생님이 학생들 중 '한 사람'되기를 통해서, 사제가 신자들 중의 '한사람'되기를 통해서, 지도자가 구성원의 '한사람'되기를 통해서 역설적으로 그 자신이 되는 것입니다.

     

    사제들은 교회의 지도자입니다. 일종의 '권력'을 지닙니다. 정의구현 사제단 사제들은 국민의 '한 사람'되기를 무엇보다 실천했습니다. 촛불의 박수,환호에 앞서, 그 '한 사람'되기를 통해서 사제다움을, 참된 지도력을 갖게 됩니다. 그 사제들을 손가락질하는 분들은 무엇보다도 먼저, 자신들이 평가하는 '내용' 자체 안에서 자신들을 직시할 수 있길 바랍니다. 촛불들도 국민의 '한 사람'으로 자신들을 성장시키고 있습니다. 어쩌면 성숙과 미성숙의 차이는 어른과 아이, 사제와 신자, 대통령과 국민, 선생님과 학생의 차이가 아니라, '되기'의 차이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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