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론(中論, Mādhyamaka-śāstra)(24회)
제24장 관사제품(觀四諦品)(40偈) : 사성제에 대한 관찰
목 차
제1장 관인연품(觀因緣品)(16偈) : 인연(因緣)에 대한 관찰(1회)--------------
제2장 관거래품(觀去來品)(25偈) : 거래(去來)에 대한 관찰(2회)--------------
제3장 관육정품(觀六情品)(8偈) : 육근(六根)에 대한 관찰(3회)---------------
제4장 관오음품(觀五陰品)(9偈) : 오온(五蘊)에 대한 관찰(4회)---------------
제5장 관육종품(觀六種品)(8偈) : 육계(六界)에 대한 관찰(5회)---------------
제6장 관염염자품(觀染染者品)(10偈) : 탐욕과 탐욕에 물든 자에 대한 관찰(6회)
제7장 관삼상품(觀三相品)(34偈) : 삼상에 대한 관찰(7회)-------------------
제8장 관작작자품(觀作作者品)(13偈) : 업과 업을 짓는 자에 대한 관찰(8회)----
제9장 관본주품(觀本住品)(12偈) : 근본주체에 대한 관찰(9회)---------------
제10장 관연가연품(觀燃可燃品)(16偈) : 불과 연료에 대한 관찰(10회)---------
제11장 관본제품(觀本際品)(8偈) : 근본한계에 대한 관찰(11회)--------------
제12장 관고품(觀苦品)(10偈) : 고에 대한 관찰(12회)----------------------
제13장 관행품(觀行品)(9偈) : 행에 대한 관찰(13회)-----------------------
제14장 관합품(觀合品)(8偈) : 결합에 대한 관찰(14회)---------------------
제15장 관유무품(觀有無品)(11偈) : 있음과 없음에 대한 관찰(15회)---------
제16장 관박해품(觀縛解品)(10偈) : 속박과 해탈에 대한 관찰(16회)---------
제17장 관업품(觀業品)(33偈) : 업에 대한 관찰(17회)--------------------
제18장 관법품(觀法品)(12偈) : 법에 대한 관찰(18회)--------------------
제19장 관시품(觀時品)(6偈) : 시간에 대한 관찰(19회)-------------------
제20장 관인과품(觀因果品)(24偈) : 인과에 대한 관찰(20회)---------------
제21장 관성괴품(觀成壞品)(21偈) : 생성과 소멸에 대한 관찰(21회)---------
제22장 관여래품(觀如來品)(16偈) : 여래에 대한 관찰(22회)---------------
제23장 관전도품(觀顚倒品)(25偈) : 전도에 대한 관찰(23회)---------------
제24장 관사제품(觀四諦品)(40偈) : 사성제에 대한 관찰(24회)-------------
제25장 관열반품(觀涅槃品)(24偈) : 열반에 대한 관찰(25회)---------------
제26장 관십이인연품(觀十二因緣品)(12偈) : 12인연에 대한 관찰(26회)------
제27장 관사견품(觀邪見品)(30偈) : 사견에 대한 관찰(27회)---------------
※ 주석(註釋)--------------------------------------------
※ 참고문헌(參考文獻)-------------------------------------
『중론(中論)』(산스크리트어:Madhyamaka-śāstra, 마드야마카 사스트라)은 나가르주나[Nāgārjuna 용수(龍樹), 150?~250?]가 만든 449구의 간결한 게송인 『중송(中頌)』(산스크리트어:Madhyamaka-kārikā, 마드야마카 카리카) 또는 『중관론송(中觀論頌)』,『중관론(中觀論)』 이라고도 하며 청목(靑目:4세기 전반)이 주석을 단 인도 불교의 논서이며 4권으로 되어 있다.
『중론(中論)』에 포함된 청목(靑目)의 주석은 『중송(中頌)』의 여러 주석들 중의 하나이다. 『중송(中頌)』은 용수(龍樹)의 초기 작품으로서 초기 및 중기 대승불교사상의 중요한 기초가 되었으며 그 후의 대승불교의 사상전개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대승불교의 중심을 이루는 중관사상의 요체가 이 책에 설파되어 있다. 중국 삼론종의 학승인 길장(吉藏, 549년 ~ 623년)은 『삼론현의(三論玄義)』에서 『중론』의 근본 입장[종(宗)]은 이제(二諦)이며 또한 이제는 중도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중론』의 주제는 연기라고 명시하였다.
인도 대승불교의 대표적 논서. 전 4권. 용수가 저술한 약 450의 게송과 후에 부가된 주석을 합쳐서 말한다. 원명은 『물라마디야마카카리카(Mūlamadhya-makakārikā)』 또는 『마디야미카샤스트라(Madhyamikaśāstra)』.산스크르트 원전, 티벳어역, 한역(쿠마라지바 역)이 현존한다. 인도의 중관파, 중국의 삼론종의 중심전적. 용수의 송(頌)은 간결한 게문으로 되어 있으며 27장으로 나뉘어져 있다. 이 논은 모두 4권으로 용수가 짓고 구마라집(Kumarajiva, 鳩摩羅什 344~413)이 다소 수정을 가해 한역하였다.
자세한 내용은 앞으로 27회에 걸처 설명하기로 한다.
제24장 관사제품(觀四諦品)(40偈) : 사성제에 대한 관찰(24회)
āryasatyaparīkṣā nāma caturviṃśatitamaṃ prakaraṇam 성스러운 진리(聖諦)의 고찰이라고 이름하는 제24장(40게)
◈ 제24 관사제품(觀四諦品) : 40송. 4제(諦)와 관련해서 2제의 본성을 밝히고, 공에 집착함을 경계하여 이로써 법의 실상을 드러낸다. 먼저 공관(空觀)에 대한 반론을 소개한다. 즉 만약 일체가 모두 공이라면, 곧 4성제와 4도과(道果)와 불 법 승의 3보(寶)도 있을 수 없으니, 공법(空法)은 인과를 무너뜨리고 죄와 복을 무너뜨리며, 나아가 세속의 모든 법을 무너뜨린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답한다. “너는 무엇이 공상(空相)이고, 어떤 인연으로 공을 설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또 공의 뜻도 이해하지 못한다. 사실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와 같은 의혹이 생긴다. 여러 부처님은 2제(諦)를 가지고 중생을 위해서 법을 설한다. 첫째는 세속제(世俗諦)이고 둘째는 제일의제(第一義諦)이다. 만약 2제를 분별해서 알지 못하면 곧 깊고 깊은 불법의 진실한 뜻을 알지 못할 것이다. 속제에 의하지 않고는 제일의를 얻지 못하며, 제일의를 얻지 못하고는 열반을 얻을 수 없다. 또 공의 뜻이 있으므로 모든 법은 성립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공의 뜻이 없다면 일체는 성립하지 못할 것이다. 여러 인연으로 생겨난 법을 나는 공이라고 설한다. 왜냐하면 중연(衆緣)이 화합해서 사물이 생기기 때문이다. 이 사물은 여러 인연에 속하기 때문에 자성이 없고, 자성이 없으므로 공이다. 그러나 공도 또한 공이다. 그것은 다만 중생을 인도하기 위해 가명(假名)으로 설한 것이다. 또 그것은 유(有)와 무(無)의 2변(邊)을 떠났으므로 중도(中道)라고 부른다. 오히려 만약 일체가 공이 아니라면 곧 생멸이 없을 것이고, 그렇다면 곧 4성제의 법 등도 있을 수 없을 것이다. 또 공이 없다면 얻지 못한 것은 영원히 얻을 수 없을 것이며, 번뇌를 끊을 수 없고, 고통이 다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이어서 만약 공의 뜻이 무너진다면 인연성이 무너지고, 인연성이 부서지면 3보가 무너지며, 3보가 무너지는 것은 곧 자신을 무너뜨리는 것이 될 것이라고 설한다. |
24-1) 若一切皆空 無生亦無滅 如是則無有 四聖諦之法(약일체계공 무생역무멸 여시칙무유 사성제지법)
만일 일체가 모두 空하다면 生도 없고 滅도 없다. 그렇다면 사성제(四聖諦)➀의 法도 존재하지 않는다.
24-1) yadi śūnyamidaṃ sarvamudayo nāsti na vyayaḥ/
caturṇāmāryasatyānāmabhāvaste prasajyate//
만일 이 모든 것이 空하다면 일어남(起)도 없고 소멸함도 없다. (그래서) 그대는 四聖諦도 존재하지 않다는 오류에 빠진다.
24-2) 以無四諦故 見苦與斷集 證滅及修道 如是事皆無
四聖諦가 존재하지 않기에 苦의 見과 集의 斷과 滅의 證과 道의 修, 이런 것들이 모두 없다.
24-2) parijñā ca prahāṇam ca bhāvanā sākṣikarma ca/
caturṇāmāryasatyānāmabhāvānnopapadyate//
사성제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완전하게 아는 知>와 <(번뇌의) 끊음>과 <실천하는 수행>과 <깨달음의 증득>도 성립하지 않는다.
24-3) 以是事無故 則無四道果 無有四果故 得向者亦無(이시사무고 칙무사도과 무유사과고 득향자역무)
그것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네가지 道果는 존재하지 않는다. 사과(四果)②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向을 얻은 자도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24-3) tadabhāvānna vidyante catvāryāryaphalāni ca/
phalābhāve phalasthā no na santi pratipannakāḥ//
그것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四果도 존재하지 않는다. 果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 果에 오른 자도 없고 (그 果로) 向하여 나아가는 자〔사향(四向)〕③도 존재하지 않는다.
24-4) 若無八賢聖 則無有僧寶 以無四諦故 亦無有法寶(약무팔현성 칙무유증보 이무사제고 역무유법보)
만일 여덟가지 현성(賢聖)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승보(僧寶)도 존재하지 않는다. 사성제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법보(法寶)도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24-4) saṃgho nāsti na cetsanti te ’ṣṭau puruṣapudgalāḥ/
abhāvāccāryasatyānāṃ saddharmo ’pi na vidyate//
만일 그런 여덟가지 사람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승가(僧伽)도 존재하지 않는다. 또 사성제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正法도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24-5) 以無法僧寶 亦無有佛寶 如是說空者 是則破三寶(이무법승보 역무유불보 여시설공자 시칙파삼보)
법보와 승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불보도 역시 없다. 이처럼 공을 설하는 자는 삼보를 파괴한다.
24-5) dharme cāsati saṃghe ca kathaṃ buddho bhaviṣyati/
evaṃ trīṇyapi ratnāni bruvāṇah pratibādhase//
法과 僧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佛이 존재하겠는가? 이와 같이 말한다면 그대는 三寶를 파괴하는 것이 되리라.
24-6) 空法壞因果 亦壞於罪福 亦復悉毁壞 一切世俗法(공법괴인과 역괴어죄복 역복실 훼괴 일체세속법)
空이란 법은 인과도 파괴하고 죄와 복도 파괴하고 일체의 세속적인 존재를 모두 훼손하고 파괴한다.
❲壞 무너질 괴❳ 1. 무너지다 2. 무너 뜨리다 3. 허물어 지다 4. 파괴하다 5. 망가지다(부서지거나 찌그러져 못 쓰게 되다 6. 고장나다(故障-) 7. 악하다(惡-) 8. 나쁘다 9. 썩다 10. 나쁜 생각......
24-6) śūnyatāṃ phalasadbhāvamadharmaṃ dharmameva ca/
sarvasaṃvyavahārāṃśca laukikān pratibādhase//
空性을 주장한다면 그대는 果報의 실재와 非法과 法과 세간에서의 일체의 언어 관습을 파괴하게 된다.
24-7) 汝今實不能 知空空因緣 及知於空義 是故自生惱(여금보불능 지공공인연 급지어공의 시고자생뇌)
그대는 지금 空과 空인 까닭과 空의 意義를 알 수 없다. 그러므로 스스로 고뇌를 생한다.
❲惱 괴로워할 뇌❳ 1.번뇌(煩惱)하다 2.괴로워하다 3.괴롭히다 4.화내다(火-) 5.
성내다 6.원망하다(怨望-) 7.괴로움
24-7) atra brūmaḥ śūnyatāyāṃ na tvaṃ vetsi prayojanam/
śūnyatāṃ śūnyatārthaṃ ca tata evaṃ vihanyase//
여기서 우리들은 말한다. “그대는 空性에서 (그) 효용과 空性과 또 空性의 意義를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대는 그처럼 저항한다.”라고.
24-8) 諸佛衣二諦 爲衆生說法 一以世俗諦 二第一義諦(제불의이제 위중생설법 일이세속제 이제일의제)
모든 부처님들께서는 이제(二諦)④에 의거하여 중생을 위해 설법하신다. 첫째는 世俗諦로써, 둘째는 第一義諦로써.
24-8) dve satye samupāśritya buddhānāṃ dharmadeśanā/
lokasaṃvṛtisatyaṃ ca satyaṃ ca paramārthataḥ//
부처님들의 敎法은 二諦에 의거한다. (그것은) 세간에서 행해지는 진리와 승의(勝義)로서의 진리이다.
24-9) 若人不能知 分別於二諦 則於深佛法 不知眞實義(약인불능지 분별어이제 칙어심불법 불지진실의)
만일 사람이 二諦를 분별함을 알 수 없다면 심오한 佛法에서 진실한 뜻을 알지 못한다.
24-9) ye ’nayorna vijānanti vibhāgaṃ satyayordvayoḥ/
te tattvaṃ na vijānanti gambhīraṃ buddhaśāsane//
이 두가지 진리의 구별을 모르는 사람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있는 심원(深遠)한 진실을 알지 못한다.
24-10) 若不依俗諦 不得第一義 不得第一義 則不得涅槃(약불의속제 부득제일의 부득제일의 칙불득열반)
만일 俗諦에 의지하지 않는다면 第一義諦를 얻을 수 없다. 제일의제를 얻지 못하면 열반을 얻을 수 없다.
24-10) vyavahāramanāśritya paramārtho na deśyate/
paramārthamanāgamya nirvānaṃ nādhigamyate//
(세간의) 언어 관습에 의거하지 않고서는 최고의 意義는 가르쳐지지 않는다. 최고의 의의에 도달하지 않고서는 열반은 증득되지 않는다.
24-11) 不能正觀空 鈍根則自害 如不善呪術 不善捉毒蛇(불능정관공 둔근칙자해 여불선주술 불선착독사)
空을 올바로 觀할 수 없어서 둔근기는 스스로를 해친다. 잘못된 주술(呪術)이나 잘못 잡은 독사(毒蛇)와 같이.
24-11) vināśayati durdṛṣṭā śūnyatā mandamedhasam/
sarpo yathā durgṛhīto vidyā vā duṣprasādhitā//
잘못 파악된 空性은 지혜가 열등한 자를 파괴한다. 마치 잘못 잡은 뱀이나 잘못 닦은 呪術과 같이.
24-12) 世尊知是法 甚深微妙相 非鈍根所及 是故不欲說(세존지시법 심심미묘상 비돈근소급 시고불욕설)
세존께서는 이 법이 아주 깊고 미묘한 相이어서 둔근기가 미칠 바 아니라고 아셨다. 그래서 설하려고 하지 않으셨다.
24-12) ataśca pratyudāvṛttaṃ cittaṃ deśayituṃ muneḥ/
dharmaṃ matvāsya dharmasya mandairduravagāhatām//
그래서 이 법이 미천한 사람에게는 이해되기 어려우리라고 생각하셔서 〔석가(釋迦)〕모니:牟尼(=聖者)의 설법하려는 마음은 후퇴하였다.
24-13) 汝謂我著空 而爲我生過 汝今所說過 於空則無有(여위아저공 이위아생과 여금소설과 어공칙무유)
그대는 내가 空에 집착하여 내가 허물을 내었다고 말하지만 그대가 지금 말하는 (그런) 허물은 空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謂 이를 위❳ 1.이르다, 일컫다 2.기리키다 3.논평하다 4.설명하다(說明-) 5.알리다, 고하다(告-) 6.생각하다 7.힘쓰다 8.하다 9.근면하다(勤勉-) 10.어찌하랴 11.름(이르는 바) 12.까닭, 이유(理由) 13.함께
24-13) śūnyatāyāmadhilayaṃ yaṃ punaḥ kurute bhavān/
doṣaprasaṅgo nāsmākaṃ sa śūnye nopapadyate//
그대는 다시 空性인 것에 집착을 짓는다. 오류에 집착하는 것은 우리들의 것이 아니다. 그것(집착)은 공성에서는 성립하지 않는다.
24-14) 以有空義故 一切法得成 若無空義者 一切則不成(이유공의고 일체법득성 약무공의자 일체칙불성)
空의 이치가 있기 때문에 모든 존재가 성립할 수 있다. 만일 공의 이치가 없다면 어떤 존재도 성립하지 않는다.
24-14) sarvaṃ ca yujyate tasya śūnyatā yasya yujyate
sarvaṃ na yujyate tasya śūnyaṃ yasya na yujyate//
空性이 타당한 것, 그것에서는 모든 것이 타당하다. 공성이 타당하지 않은 것, 그것에서는 모든 것이 타당하지 않다.
24-15) 汝今自有過 而以廻向我 如人乘馬者 自忘於所乘(여금자유과 이이회향아 여인승마자 자망어소승)
그대는 지금 스스로 과오가 있는데 (그것을) 나에게 돌린다. 마치 말을 탄 사람이 스스로 탄 것을 잊고 있는 것처럼.
24-15) sa tvaṃ doṣānātmanīyānasmāsu paripātayan/
aśvamevābhirūḍhaḥ sannaśvamevāsi vismṛtaḥ//
그러한 그대는 자신에 속한 과오들을 우리들에게 전가하고 있다. 마치 그대가 말을 타고 있으면서 그 말을 잊어버리고 있는 것 같이.
24-16) 若汝見諸法 決定有性者 卽爲見諸法 無因亦無緣(약여경제법 결정유성자 즉위견제법 무인역무연)
만일 그대가 모든 존재들이 분명히 自性이 있다고 본다면 그것은 모든 존재들이 因도 없고 緣도 없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24-16) svabhāvādyadi bhāvānāṃ sadbhāvamanupaśyasi/
ahetupratyayān bhāvāṃstvamevaṃ sati paśyasi//
만일 그대가 존재들이 자성으로서 실재한다고 생각한다면, 그와 같다면 그대는 존재들을 因과 緣이 없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24-17) 卽爲破因果 作作者作法 亦復壞一切 萬物之生滅(즉위파인과 작작자작법 역복양일체 만물지생멸)
그것은 곧 인과와 행위와 행위자와 행위되는 것을 파괴하는 것이며 일체 만물의 生滅을 다시 파괴하는 것이기도 하다.
24-17) kāryaṃ ca kāranaṃ caiva kartāraṃ karaṇaṃ kriyām/
utpādaṃ ca nirodhaṃ ca phalaṃ ca pratibādhase//
그대는 결과와 원인과 행위의 주체와 수단과 작용과 발생과 소멸과 과보를 파괴한다.
24-18) 衆因緣生法 我說卽是無 亦爲是假名 亦是中道義(중인연생법 아설즉시무 역위시가명 역시중도의)
여러가지 인연으로 生한 존재를 나는 無라고 말한다. 또 假名이라고도 하고 또 中道의 이치라고도 한다.
24-18) yaḥ pratītyasamutpādaḥ śūnyatāṃ tāṃ pracakṣmahe/
sā prajñaptirupādāya pratipatsaiva madhyamā//
연기인 것 그것을 우리들은 空性이라고 말한다. 그것(=공성)은 의존된 假名이며 그것(=공성)은 실로 中道이다.
24-19) 未曾有一法 不從因緣生 是故一切法 無不是空者(미증유일법 부종인연생 시고일체법 무불시공자)
인연으로부터 발생하지 않는 존재는 단 하나도 없다. 그러므로 일체의 존재는 공 아닌 것이 없다.
24-19) apratītya samutpanno dharmaḥ kaścinna vidyate/
yasmāttasmādaśūnyo hi dharmaḥ kaścinna vidyate//
緣하여 生起(연기)하지 않은 존재(=法)는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空하지 않은 존재는 그 무엇도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24-20) 若一切不空 則無有生滅 如是則無有 四聖諦之法(약일체불공 칙무유생멸 여시칙무유 사성제지법)
만일 일체의 것이 공하지 않다면 生滅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사성제(四聖諦)의 진리도 존재하지 않는다.
24-20) yadyaśūnyamidaṃ sarvamudayo nāsti na vyayaḥ/
caturṇāmāryasatyānāmabhāvaste prasajyate//
만일 이 모든 것이 공하지 않다면 생기는 존재하지 않고 소멸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대는 네가지 성스러운 진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오류에 빠진다.
24-21) 若不從緣生 云何當有苦 無常是苦義 定性無無常(약불종연생 운하당유고 무상시고의 정성무무상)
만일 緣으로부터 발생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苦가 존재하겠는가? 無常은 苦의 이치이지만 결정된 自性으로는 無常도 없다.
24-21) apratītya samutpannaṃ kuto duḥkhaṃ bhaviṣyati/
anityamuktaṃ duhkhaṃ hi tatsvābhāvye na vidyate//
緣하지 않고 生起(緣起)한 苦가 어떻게 존재하겠는가? 왜냐하면 “無常한 것은 苦이다”라고 말해졌는데 그것(無常한 것)은 自性에 있어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24-22) 若苦有定性 何故從集生 是故無有集 以破空義故(약고유정성 하고종집생 시고무유집 이파공의고)
만일 苦가 확고한 자성을 갖는다면 어떻게 集에서 생하겠는가? 그러므로 공의(空義:일체법을 이루는 근간(根幹)이 되기 때문입니다. 근간이란! 뿌리와 줄기라는 뜻인데 모든 삼라만상은 허공(虛空)에서 생겨 났으므로 현상의 모체(母體)는 허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용수보살이 공의 즉! 허공에서 일체법이 이루어진다 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이치를 파했기에 集은 존재하지 않는다.
24-22) svabhāvato vidyamānaṃ kiṃ punaḥ samudeṣyate/
tasmātsamudayo nāsti śūnyatāṃ pratibādhataḥ//
자성으로서 지금 존재하고 있는 그 무엇이 다시 生起하겠는가? 그러므로 空性을 파괴한다면 집기(集起)는 존재하지 않는다.
24-23) 苦若有定性 則不應有滅 汝著定性故 卽破於滅諦(고고유정성 칙불응유멸 여저정성고 즉파어멸제)
苦가 만일 확고한 자성이 있다면 소멸이 있어서는 안된다. 그대는 확고한 자성에 집착하므로 멸제(滅諦)를 파괴하게 된다.
24-23) na nirodhaḥ svabhāvena sato duḥkhasya vidyate/
svabhāvaparyavasthānānnirodhaṃ pratibādhase//
自性으로서 존재하는 苦에 소멸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대는 자성을 고집하기 때문에 소멸을 파괴하게 된다.
24-24) 苦若有定性 則無有修道 若道可修習 卽無有定性(고고유정성 측무유수도 약도가수습 즉무유정성)
苦가 만일 확고한 자성이 있다면 修道는 존재하지 못한다. (반대로) 만일 道가 수습(修習)할 수 있다면 확고한 자성은 존재하지 못한다.
24-24) svābhāvye sati mārgasya bhāvanā nopapadyate/
athāsau bhāvyate mārgaḥ svābhāvyaṃ te na vidyate//
道가 자성으로서 존재한다면 (道의) 修習은 성립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 道가 수습된다면 그대가 말한 자성으로서의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24-25) 若無有苦諦 及無集滅諦 所可滅苦道 竟爲何所至(약뮤유고제 급뮤잡멸제 소가멸고도 경위하소지)
만일 고제(苦諦) 존재하지 않고 집제(集諦)나 멸제(滅諦)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苦를 滅할 수 있는 것인 道는 마침내 어떻게 도달되겠는가?
24-25) yadā duḥkhaṃ samudayo nirodhaśca na vidyate/
mārgo duḥkhanirodhatvātkatamaḥ prāpayiṣyati//
苦와 集과 滅이 존재하지 않는 경우에 苦의 滅로부터 있게 되는 道가 어떻게 도달되겠는가?
24-26) 若苦定有性 先來所不見 於今云何見 其性不異故(고고정유성 선래소불견 어금운하견 기성불이고)
만일 苦가 확고한 자성이 있다면 앞서서 보지 못한 것인데 지금 어떻게 볼 수 있겠는가? 그 자성은 변이(變異)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24-26) svabhāvenāparijñānaṃ yadi tasya punaḥ katham/
parijñānaṃ nanu kila svabhāvaḥ samavasthitaḥ//
만일 자성으로서 완전히 파악되지 않는 것이라면 어떻게 그것의 완전한 파악이 다시 있겠는가? 실로 확립되어 있는 것이 自性 아닌가?
24-27) 如見苦不然 斷集及證滅 修道及四果 是亦皆不然(여견고불연 단집급증멸 수도급사과 시역계불연)
苦를 파악하는 것이 옳지 않은 것처럼 集을 斷하고 滅을 證하며 道를 修하는 것 및 四果도 역시 모두 옳지 않다.
24-27) prahāṇasākṣātkaraṇe bhāvanā caivameva te/
parijñāvanna yujyante catvāryapi phalāni ca//
<(苦諦를) 완전히 파악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단멸(斷滅)>도 <깨달음의 획득>도 <修習>도 또 四果도 그대에게 있어서 타당하지 않다.
24-28) 是四道果性 先來不可得 諸法性若定 今云何可得(시사도과성 선래불가득 제법성약정 금운하가득)
이 네가지 도의 과보의 자성은 원래 포착되지 않는 것인데 모든 존재의 자성이 확립되어 있다면 지금 어떻게 그것을 포착하겠는가?
24-28) svabhāvenānadhigataṃ yatphalaṃ tatpunaḥ katham/
śakyaṃ samadhigantuṃ syātsvabhāvaṃ parigṛhṇataḥ//
자성이 보전되어 있다면 자성으로서 증득되지 않는 (四)果, 그것을 다시 증득함이 어떻게 가능하겠느냐?
24-29) 若無有四果 則無得向者 以無八聖故 則無有僧寶(약무유사과 칙무득향자 이무팔성고 칙무유승보)
만일 四果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四向을 획득한 자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렇게 八聖이 존재하지 않기에 승보도 존재하지 않는다.
24-29) phalābhāve phalasthā no na santi pratipannakāḥ/
saṃgho nāsti na cetsanti te ’ṣṭau puruṣapudgalāḥ//
(四)果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 果에 도달하는 자도 없고 그 과로 향해 나아가는 자도 없다. 만일 이들 팔현성(八賢聖)⑤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승가(僧伽)는 존재하지 않게 된다.
24-30) 無四聖諦故 亦無有法寶 無法寶僧寶 云何有佛寶(무사성제고 역무유법보 무법보승보 운하유불보)
사성제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법보도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법보와 승보가 존재하지 않는데 어떻게 불보가 존재하겠는가?
24-30) abhāvāccāryasatyānāṃ saddharmo ’pi na vidyate/
dharme cāsati saṃghe ca kathaṃ buddho bhaviṣyati//
(四)聖諦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正法도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法과 僧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佛이 존재하겠는가?
24-31) 汝說則不因 菩提而有佛 亦復不因佛 而有於菩提(여설칙불인 보리이유불 역복불인불 이유어보리)
그대는 菩提를 因하지 않고서 佛이 있고 또 佛을 因하지 않고서 보리가 있다고 말하는 꼴이 된다.
24-31) apratītyāpi bodhiṃ ca tava buddhaḥ prasajyate/
apratītyāpi buddhaṃ ca tava bodhiḥ prasajyate//
깨달음을 緣하지 않고도 佛이 있다는 오류가 그대에게 있어서 발생한다. 또佛을 緣하지 않고도 깨달음이 있다는 오류가 그대에게 있어서 발생한다.
24-32) 雖復勤精進 修行菩提道 若先非佛性 不應得成佛(수복근정진 수행보리도 약선비불성 불응득성불)
비록 다시 부지런히 정진하여 보리도를 수행하여도 원래 佛性이 없으면 성불할 수 없으리라.
❲雖 비록 수❳ 1.비록 2.아무리~하여도 3.그러나 4.도마뱀붙이 5.벌레의 이름 6.밀다 7.추천하다(推薦-)
24-32) yaścābuddhaḥ svabhāvena sa bodhāya ghaṭannapi/
na bodhisattvacaryāyāṃ bodhiṃ te ’dhigamiṣyati//
그대의 말대로라면(te) 자성으로서 부처가 아닌 자, 그자가 깨달음을 위해 정진하여도 보살행에서 깨달음에 도달하지 못하리라.
24-33) 若諸法不空 無作罪福者 不空何所作 以其性定故(약제법불공 무작죄복자 불공하소작 이기성정고)
만일 모든 존재가 空하지 않다면 죄나 복을 짓는 자도 없다. 空하지 않은 것은 그 자성이 확고히 있는데 어떻게 지어지겠는가?
24-33) na ca dharmamadharmaṃ vā kaścijjātu kariṣyati/
kimaśūnyasya kartavyaṃ svabhāvaḥ kriyate na hi//
또 어느 누구도 法(=善)과 非法(=惡)을 作爲하지 못하리라. 空하지 않은 상태에서 무엇이 作爲되겠는가? 왜냐하면 자성은 작위되지 않기 때문이다.
24-34) 汝於罪福中 不生果報者 是則離罪福 而有諸果報(여어죄복중 불생과보자 시칙이죄복 이유제과보)
그대는 (空하다면) 죄나 복을 지어도 과보가 생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不空이라고 주장하)는데 이것은 죄나 복을 떠나서 모든 과보가 존재한다는 말이 된다.
24-34) vinā dharmamadharmaṃ ca phalaṃ hi tava vidyate/
dharmādharmanimittaṃ ca phalaṃ tava na vidyate//
그대(의 주장)에서는 法과 非法(을 행함)이 없이도 과보가 존재하는 꼴이 된다. 그대(의 주장)에서는 법과 비법으로 인한 과보는 존재하지 않는 꼴이 된다.
24-35) 若謂從罪福 而生果報者 果從罪福生 云何言不空(약위종죄복 이생과보자 과종죄복생 운하언불공)
만일 죄나 복에서 과보가 생기는 것이라면 과보는 (그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죄나 복에( 의존해)서 생기(기에 실체가 없)는데 어떻게 不空이라고 말하느냐?
24-35) dharmādharmanimittaṃ vā yadi te vidyate phalam/
dharmādharmasamutpannamaśūnyaṃ te kathaṃ phalam//
혹은 만일 그대에게 있어서 法과 非法으로 인한 과보가 존재한다면 법과 비법에서 生起한 과보가 그대에게 있어서 어떻게 不空이겠느냐?
24-36) 汝破一切法 諸因緣空義 則破於世俗 諸餘所有法(여파일체법 제인연공의 칙파어세속 제여소유법)
그대가 일체법의 모든 인연과 空한 이치를 파괴한다면 그것은 곧 세속에 있는 다른 모든 존재를 파괴하는 꼴이다.
24-36) sarvasaṃvyavahārāṃśca laukikān pratibādhase/
yatpratītyasmutpādaśūnyatāṃ pratibādhase//
그대가 연기(緣起)이고 공성(空性)인 것을 파괴한다면 그대는 또 세간에서의 모든 언어 관습을 파괴하는 꼴이 된다.
24-37) 若破於空義 卽應無所作 無作而有作 不作名作者(약피아공의 즉응무소작 무작이유작 불작명작자)
만일 空의 이치를 파괴하면 지을 것도 없다. 지은 것도 없는데 지었다고 하고 짓지도 않았는데 지은 놈이라 부르게 된다.
24-37) na kartavyaṃ bhavetkiṃ cidanārabdhā bhavetkriyā/
kārakaḥ syādakurvāṇaḥ śūnyatāṃ pratibādhataḥ//
空性을 파괴하는 자에게는 작위할 그 어떤 대상도 없으며 작용이 시작함도 없으며 행위자는 어떠한 행위도 하지 않게 되리라.
24-38) 若有決定性 世間種種相 則不生不滅 常住而不壞(약유결정성 세간종종상 칙불생불멸 상주이불괴)
만일 확고한 자성이 있다면 세간의 다양한 모습들은 생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으며 常住하여 괴멸(壞滅:조직이나 체계 따위가 모조리 파괴되어 멸망함.)되지 않는 것이리라.
24-38) ajātamaniruddhaṃ ca kūṭasthaṃ ca bhaviṣyati/
vicitrābhiravasthābhiḥ svabhāve rahitaṃ jagat//
자성이 있다면 세계(활동계)는 갖가지 상태를 떠나서 생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아 상주부동(常住不動)인 것으로 되리라.
24-39) 若無有空者 未得不應得 亦無斷煩惱 亦無苦盡事(약무유공자 미득불응득 역무단번뇌 역무고진사)
만일 空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아직 획득되지 않은 것은 획득할 수 없고 번뇌도 끊을 수 없으며 苦가 모두 사라지는 일도 있을 수 없다.
❲盡 다할 진❳ 1.다하다 2.완수하다(完遂-) 3.극치(極致)에 달하다(達-) 4.최고에 달하다(達-) 5.다 없어지다 6.사망하다(死亡-) 7.죽다 8.모든 9.전부의(全部-)
24-39) asaṃprāptasya ca prāptirduḥkhaparyantakarma ca/
sarvakleśaprahānaṃ ca yadyaśūnyaṃ na vidyate//
만일 空하지 않다면 아직 획득되지 않은 것이 획득하는 것도 苦를 종식시키는 행위도 또 모든 번뇌를 제거하는 것도 존재하지 않는 꼴이 된다.
24-40) 是故經中說 若見因緣法 則爲能見佛 見苦集滅道(시고경중설 약견인연법 칙위능견불 견고집멸도)
그러므로 경전에서는 “연기의 법칙을 본다면 능히 佛을 볼 수 있고 苦, 集, 滅, 道를 본다.”고 설한다.
24-40) yaḥ pratītyasamutpādaṃ paśyatīdaṃ sa paśyati/
duḥkhaṃ samudayaṃ caiva nirodhaṃ mārgameva ca//
이런 연기(緣起)를 보는 자, 그는 이것을 본다. 즉 苦와 集 그리고 滅과 道. 《다음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