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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교분리에한 불교의 입장

불교는 정치를 어떻게 보는가 / 윤세원

  • 기자명 윤세원 
 

특집 | 불교와 정치참여

1. 들어가는 말

정치현상과 관련된 붓다의 가르침은 불교계 내부에서는 물론이고 외부로부터도 철저히 외면당하고 있는 실정이다. 오늘날 이러한 현실과는 달리 고타마 싯다르타는 정치적으로 사유하고, 정치적으로 행동할 수밖에 없게 태어났다. 그의 탄생에 관한 경전의 설명은 그 자체로서 정치학적인 연구 대상이 되기에 충분한 것이다. 그는 작은 나라에서였지만 왕위 계승에서 최우선권을 갖진 왕자로 태어났고, 출가하여 수행하면 부처가 될 것이고, 왕위를 계승하면 전륜성왕이 될 상호를 타고났다. 또한 제왕이 되기 위한 훈련 과정을 통하여 29세 이전에 64종의 학문에 능통했고, 29종의 무술과 병법을 통달했다. 경전상의 이러한 기사들은 붓다가 출가 전에 이미 제왕의 자질과 품격을 갖추고 있었음을 알려 주고 있다. 또한 교조의 삶과 성도 후에 재가신도였던 여러 나라 국왕들에게 설해진 설법의 내용은 불교의 정치적 정향을 해석해 내는 작업에 활용할 수 있는 자료들이다. 교조의 이러한 성장 과정과 사회적 배경 및 전법 활동은 어떠한 형태로든 불교의 어디엔가 반영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상식적인 판단일 것이다.

인간은 단순히 본능과 충동에 의하여 살아가는 동물이 아니라, 도덕률을 기초로 공존을 위한 사회적 유대 속에서 서로에게 구속되는 존재이다. 인간 사이의 상호구속은 사회적인 영역에서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정치와 종교의 관계에 이러한 논리를 대입해 본다면, 사회가 옳게 조직될 때 그 사회는 완전하고 이상적인 사회라고 할 수 있는데, 사회를 조직하는 것은 정치영역의 일이고, 그것의 옳고 그름에 대한 평가의 기준은 종교와 윤리가 제공하는 것이다,

옳고 완전하게 조직된 사회란 인간이 그 본성을 발휘하기에 적합하도록 조직된 사회이고, 인간의 본성이 어떤 것인가를 제시하는 일은 종교의 몫이다. 따라서 사람됨의 고유한 가치를 본질로 하는 정치적 사유는 윤리적인 영역과 접점을 형성하게 되고, 이러한 연유로 국가는 “전체 도덕 세계의 수호자”라고 정의된다. 그래서 어떤 시기의 어떤 국가도 물질적 번영의 중요성과 필요성뿐만 아니라, 구성원들의 도덕적 정신적 성숙의 중요성과 필요성은 외면할 수 없는 일이 되는 것이다.

종교와 정치의 이와 같은 원초적 관계에도 불구하고, 불교는 정치·사회윤리가 없는 종교라는 선입견이 외부의 관찰자들에게뿐만 아니라, 경건한 불교도들에게까지 상식화되어 있다. 이러한 편견의 원인은 계율에 의거하여 수행 위주로 조직된 출가 승단을 전체 불교사회로 보는 오류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다. 욕망 증식의 메커니즘으로 작동되는 세속적인 기준으로 보면 수행 생활은 은둔적인 것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설령 승가의 수행생활이 은둔적이라고 해도 승가가 불교적인 삶의 전부도 아니고 재가사회와 완전히 단절된 것도 아니기 때문에, 그것이 불교에는 정치·사회윤리가 없다는 근거가 될 수는 없다.

불교에는 정치윤리가 없다는 편견의 또 다른 요인으로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정치와 반정치에 대한 몰이해이다. 현실에서 통치자가 반정치적으로 권력을 사용하는 일이 너무 흔하게 목격되고, 그것은 어떠한 논리로도 불교가 용인하기는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불교와 정치는 아예 상종이 불가능한 관계라고 치부해 버리는 시각을 고착시켰다고 할 수 있다.

‘불교는 정치를 어떻게 보는가’라는 주제는 정치를 보는 주체를 불교로 상정하는 것이 된다. 그런데 이 경우 ‘정치를 보는 주체로서 불교’라는 어휘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며, 그 속에 포함될 수 있는 내용이 어떤 것인지를 설정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필자는 이 글에서 ‘불교가 보는 정치’라는 말에 포함될 수 있는 내용을 1) 공동생활과 권력현상에 관련된 가르침, 2) 통치자, 국가, 자유, 평등, 복지 등 정치적 중심과제에 대한 교리적 입장, 3) 불교도들이 취할 수 있는 정치적 태도와 관련되는 가르침으로 한정하고자 한다.

그리고 1)과 2) 범주의 내용은 ‘3. 정치에 대한 불교적 관점’에서 살펴보고, 3)의 내용은 ‘4. 불교도의 정치참여’에서 검토해 보고자 한다. 그리고 이 내용에 접근하는 필자의 기본적 입장은 현실적인 전개 과정에서 보다 원론적이고 이론적인 측면을 중심으로 한다.

2. 종교와 정치의 관계

종교와 정치는 그 본질과 담당 영역이 서로 다르고, 역할 대행도 불가능한 관계이지만, 현실에서 횡행하는 악과 부정의를 용인하거나 부추기는 정치나 종교는 없다. 이는 정의의 실현이라는 명제 앞에서 정치와 종교가 묵시적인 공조체제를 형성할 수도 있음을 의미한다. 더구나 종교가 가진 도덕적인 힘은 기존의 사회질서를 정당화 혹은 해체시킬 수 있는 기능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양자는 인간다운 삶이라는 동질적인 가치를 추구하지만, 방법과 동원 수단에서 차이가 있다.

또한 종교의 정신적 원리들이 사회적인 가치, 이상 그리고 이익의 의미로 전환될 수 없거나 혹은 가치 있는 세속의 일들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없는 것이었다면, 그러한 원리들은 오랜 시간 동안 생명력을 유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러한 논리는 인류의 삶에 긍정적인 역할을 해 온 종교들은 어떠한 형태로든 정치와 관계를 맺어왔고, 불교도 예외가 아님을 의미하는 것이다.

앞에서 필자는 정치에 대한 오해가 불교를 정치윤리가 없는 종교로 매도한 원인 중의 하나였음을 언급하였다. 정치현상의 핵심은 권력현상이고, 정치권력은 무력이나 단순한 힘과는 다른 것이다. 국가 혹은 통치자가 소유한 정치권력은 아무 곳에나 사용할 수 있는 힘이 아니라, 공공적 공존을 가능하게 하기 위하여 행사되어야 하는 명백한 존재 이유를 가진 힘이기 때문에 중립적일 수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은 정치권력의 존재 이유는 그것이 특정한 소수에게 독점될 수 있는 유일한 근거이다. 만약 통치자가 행사하는 정치권력이 여타의 힘과 차이가 없다면, 정치의 본질에 대한 바른 이해는 불가능해진다.

정치권력은 공적인 영역에서 공적인 절차에 따라 그것을 행사할 소유자가 결정되고, 그 소유자에 의하여 공공성이 담보되게 행사되어야 하는 강제력이 동반된 힘이다. 때문에 절차상의 정당성이 확보된 정치권력일지라도, 그것이 반정치적으로 행사될 경우에는 정당성을 상실하게 되고, 정당성을 상실한 정치권력은 폭력이 된다. 때문에 정치권력이 지속적으로 정치권력이기 위해서는 획득과 유지뿐만 아니라 행사되는 일체의 과정에 정당성이 담보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원리적인 측면과는 달리 정치권력이 정치라는 명분 아래서 반정치적으로 행사되는 현장을 목격하기는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이 정치라고 여겨지는 반정치적인 행위의 속성은 반불교적일 수밖에 없는 것들이기 때문에 이를 정당화할 수 있는 논리가 불교에는 있을 수 없다는 점에서 불교에는 정치윤리가 없다고 할 수 있다.

정치권력이 행하는 가장 중요한 역할은 ‘한 사회 내에서 희소한 자원을 권위적으로 배분하는 것’이다. 희소한 자원의 배분이 권위적인 것이 되기 위해서는 우선순위가 있어야 하고, 우선순위를 결정하는 데는 합당한 근거가 있어야 하는데, 그 근거를 제공하고 그것에 정당성을 제공하는 것이 도덕 혹은 윤리이다. 정치나 윤리는 결국 인간사회에 엄연히 존재하는 자원의 희소라는 객관적인 사실 때문에 불가피한 것이 된다. 이를 불교적 방식으로 설명하면, 비난할 만한 자를 비난하고, 처벌할 자를 처벌할 수 있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하고, 이 힘의 근거가 되는 것이 도덕적 삶을 원하는 인민의 요구와 동의라는 의미가 된다.
종교는 상징적 언설과 기재들을 통하여 사람을 그의 궁극적 조건과 관계 짓게 해 준다. 정치는 공존질서의 유지를 위하여 권력으로 통제하지만, 종교는 인간 내면의 도덕성을 증진시킬 수 있는 상징으로 통제한다. 단기적인 관점에서는 권력에 의한 통제가 훨씬 강력하고 효과적인 것 같지만, 장기적으로는 도덕성이 뒷받침된 상징체계를 통한 통제가 더 강력하고, 비용 면에서도 훨씬 유리하기 때문에 정치권력은 이 상징체계를 권력과 일치시키려는 유혹을 항상 받게 된다.

특히 종교적 영역 안에서 이루어지는 가치추구 행위나 규범들은 정치적 정당성의 영역에도 영향을 미친다. 예를 들면 불교의 만민평등 사상과 교단 내에서 실현된 평등의 원리가 바로 그러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인종, 피부색, 계급이나 국적에 상관없이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교리를 실천하는 종교제도의 실질적인 운영은 상당한 정치적 의미를 갖는 일이었다. 이러한 논지는 붓다의 출가 자체도 당시의 정치적 상황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주장으로까지 연결되기도 한다. 붓다의 이러한 정치적 행위와 가르침은 통상적인 정치의 개념이나 정치행위들과 비교할 때, 매우 비정치적인 것이었다. 따라서 붓다의 정치적 가르침과 정치적 행위는 가장 비정치적인 정치행위였다.

종교와 정치는 다른 범주의 것이지만, 종교 행위를 하는 인간은 정치의 영향권을 벗어날 수 없다. 따라서 정신적 요소로서 종교는 정치 영역을 초월할 수 있지만, 신앙 행위를 하는 국가 구성원으로서 개인과 조직된 집단으로서 종교 조직은 국가가 목적 달성을 위하여 제시하는 질서나 통제의 영역을 벗어나기 어렵게 된다. 그러나 국가목적은 국가가 스스로 설정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를 운영하는 사람들의 인간관과 세계관에 의하여 해석되는 것이다. 따라서 국가목적은 그 구체적인 내용에서 종교가 제시하는 세계관이나 인간관의 영향을 받는 관계가 된다.

3. 정치에 대한 불교적 관점

불교는 정치현상을 이상주의나 현실주의의 어느 한 측면에서 보지 않는다. 정치현상이라고 할 수 있는 일들에 대한 경전에서의 언급은 환경과 조건에 따라서 도둑의 현상에 비교되기도 하고, 성스러운 질서를 구축할 수 있는 수단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사회와 사회제도도 무상의 범주를 벗어날 수 없다. 무상은 단절 없는 변화의 연속이고, 이 변화의 흐름은 본래 정해진 방향이 없는 것이다. 정치와 정치윤리는 이 변화의 흐름이 사람의 본성을 위해하고 사회악을 양산하는 방향이 아니라, 생명을 살리고 선(善)을 증진시키기 위하여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이 필요의 실천 주체로 통치자를 세웠다고 보는 것이 정치에 대한 불교의 원론적인 입장이다.

1) 존재 이유와 순기능에 관하여
정치와 종교 사이에 맺어지는 관계의 가장 깊은 심층에는 서로의 존재양식을 규정하는 분리 불가능한 연기적 관계망이 존재한다. 정치의 중심 과제는 공동체의 유지라는 삶과 삶의 현장에서 일어나는 문제이고, 종교의 중심 과제는 삶과 삶의 현장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해 주는 정신적인 영역에 관한 문제이다. 정신적인 뒷받침이 부실한 삶이나 공동체는 그것의 유지 방법과 방향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없는 것이 되고, 사회적인 실천력이 없는 정신적인 가치는 공허한 것이 된다.

그래서 어떠한 정치 공동체도 국가의 존재 이유와 관련되는 구성원의 정신적 성숙을 국가의 임무에서 배제시키지 못한다. 만약 이 임무를 포기하는 국가가 있다면, 그것은 더 이상 국가이기를 포기하는 것이고, 심하게 말하면 범죄 집단에 지나지 않음을 선언하는 일이 된다. 종교 역시 그 고유의 영역에서 추구하는 가치들이 인간의 삶과 무관계한 것이라면 그 속에서 공적인 존재 이유를 발견하기는 어려운 것이 된다.
초기불교도들은 국가를 신이 만든 것이 아니라 더 이상의 도덕적 타락을 막기 위하여 인간들이 스스로 만들어 낸 ‘인공적인 것’으로 보았다. 최초의 왕은 현대 민주주의 국가의 국가원수나 행정 수반처럼 인민들에 의하여 선출된 존재였고, 인민들이 왕을 선출한 이유는 도덕적 타락으로 인하여 생명과 재산의 안전이 보장되지 못하는 무정부적인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서였다고 설명하고 있다.

최초의 통치자는 도덕적인 사회의 건설을 주 임무로 하는 사회의 공복이며, 국민의 동의에 의하여 획득한 지위였다. 프라사드는 이러한 국가기원론을 ‘국가 창조라는 주제에 대한 불교적 입장에는 신성(神性)의 영향이 전혀 없다. 오로지 인간의 이성과 편의만이 국가의 형성을 결정한다’고 보았다. 연기하는 세상에서 국가, 통치자, 계급제도 등이 인간적 편의 이외의 궁극적 의미를 가질 수는 없는 것이므로 프라사드의 지적은 매우 적절한 평가라고 할 수 있다.

불교는 정부 혹은 통치자의 출현을 탐욕적인 인간들이 야기시키는 부도덕한 일들이 필연적이면서도 자연스럽게 유도한 것으로 본다. 정치적 실체로서의 국가 혹은 정부는 공존이 불가능한 상황을 해결하고, 자연상태에서 인간이 누렸던 권리를 보장받기 위한 수단으로 고안된 장치라고 보는 것이 국가에 대한 불교의 설명이고, 그것의 구체적인 실행자가 선출된 통치자이다. 따라서 국가의 근원은 인민의 자발적인 동의이고, 동의자들의 구체적인 이익과 의도는 가족의 안전과 사유재산을 보호할 수 있는 도덕적인 질서의 확립이었다.

한편 계약의 다른 쪽 당사자인 인민들은 정부에 납세를 통한 기여와 정부의 권위에 대해 복종하는 것으로 계약의 임무를 이행해야 한다. 선출된 왕의 생계수단 성격의 납세는 공동체가 왕의 봉사 대가로 지급하는 봉사료라고 명시하고 있다. 정치의 필요성과 출발점에 대한 불교의 설명이 가진 중요한 정치철학적 기여는 선출을 통하여 고용된 통치자의 개념과 그의 직무를 도덕인 사회의 건설이라고 명시한 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입장의 천명은 인간과 인간사회를 움직이는 제도들을 신성 창조로 믿는 베다적 전통에 대한 공개적인 도전의 성격을 갖는 것이었다. 그리고 통치자에게 특별한 신성을 부여하지 않는 통치자 출현의 논리는 무아의 교리에 근거를 둔 인간의 근원적 평등함이 반영된 정치이론이라고 할 수 있다.

2) 정치의 역기능에 관하여
인간은 본질적으로 사회적 관계에서 조화와 협력에 바탕을 둔 행위만을 하는 존재가 아니라 분열과 갈등을 야기하는 행위도 하는 존재이다. 더구나 희소한 자원을 두고 서로 경쟁하는 관계에서는 더욱 그렇기 때문에 정치의 필요성이 등장하게 되고, 정치과정을 통하여 이러한 갈등을 조정 관리하기 위한 집단적 대응이나 제도적 장치로서 국가나 정부가 필요하게 된다. 그러나 갈등을 조정 관리하는 제도적 장치는 스스로 작동되는 것이 아니라, 정부나 국가 내의 직책을 맡은 사람에 의하여 작동되는데, 이들 역시 임무수행과 반대되는 행위를 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는 일이다. 불교에서 보는 정치의 역기능은 정치 자체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바로 이 부분에 대한 평가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정치권력의 타락을 경계하는 붓다의 설법이 여러 경전에 설해져 있는데, 타락한 왕이 인민에게 주는 고통은 도적이 양민에게 주는 고통과 동일한 것으로 보았다. 통치자 혹은 정부라는 제도는 인간의 도덕적 타락에 의하여 필요성이 제기된 불행이라고 할 수 있다. 정치를 ‘필요의 악’으로 보는 불교적 관점은 정치 자체에 관한 것이라기보다 정치현상을 불러온 원인과 정치의 역기능에 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도덕적 타락이 정치의 존재 이유라는 점은 부정적인 것이지만, 정치를 통하여 도덕적인 사회를 재건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는 점에서는 정치의 존재 이유를 긍정적으로 본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 목격되는 권력의 반정치적 사용과 그것으로 인해 인민이 입게 되는 사회고는 정치의 역기능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논리는 오거스틴(St. Augustinus)의 “정의가 배제된 국가는 강력한 도둑의 집단으로 전락”한다는 경고와 일맥상통한다.

인간들은 본능과 충동이 아닌 사회적 유대 속에서 공동생활을 해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정치와 종교는 윤리적인 영역을 자연스럽게 공유하는 관계가 된다. 이는 도덕적인 사회의 재건을 위해 정치현상이 출현했다고 보는 입장의 다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불교의 정치적 이상은 정치가 존재해야 할 이유와 달성해야 할 목적에 합당한 일들이 정치권력을 통하여 실천되도록 하는 것이고, 또 권력이 그렇게만 사용되도록 하는 것이다. 제도나 정부 형태 등은 무상한 것들이지만, 인간이 공존해야 한다는 사실은 피할 수 없는 일이고, 공존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인간의 본성을 위협하지 않는 공존질서가 있어야 한다는 것도 변할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공존질서는 구성원들이 물질적 결핍 없이 도덕적인 생활을 영위할 수 있고, 정신적인 성숙이 가능하도록 방향 지워져야 한다.

정치와 관련된 사안인 한 이 시대의 불교인들에게는 각성된 시대정신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재가자들이 자신의 국토에서 일어나는 사회고와 시대고에 대한 무대응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것은 범계나 비불교적인 행동이 아니라, 시민적 권리와 의무이고 자비실천의 한 방법이다. 이는 불교교리와 중요한 가치들을 정치·사회적 의미와 가치로 전환시킬 수 있는 해석학적 지평의 확장이 필요하다는 의미이다.

정치적 관점에서 도덕적인 사회의 건설이라는 명제는 최고의 국가목표이고, 불교적 관점에서 도덕적인 사회의 건설은 최고의 목표는 아니지만 배제할 수 없는 중요한 목표 중의 하나이다. 따라서 최고의 국가목표와 불교가 건설하고자 하는 불국토를 하나의 개념으로 일치시킬 수 있다면, 양자는 각자의 영역에서 서로 다른 방법과 수단으로 공동목표를 추구하면서 동시에 권력의 자의적 행사에 대한 도덕적 견제가 가능할 수 있을 것이다.

4. 불교도의 정치참여

1) 승가의 정치참여와 그 한계

불교적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붓다 시대부터 형성되어 온 두 종류의 삶의 방식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 하나는 출가하여 승가(Sangha)의 구성원이 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세속에서 재가사회의 구성원으로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다. 승가는 불교의 최고가치인 열반을 성취할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이 되도록 조직된 출가 수행자들의 사회이다. 승가는 재가사회와는 전혀 다른 목표를 가진 사회이기 때문에 재가사회와는 다른 삶의 방식과 운영원리가 작동되는 사회이다. 승가사회의 작동원리를 계와 율이라고 한다. 계율은 열반의 성취라는 목표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삶의 양식을 규정하고 있지만, 세속적인 삶을 부정하거나 비하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승가의 구성원들이 세속적인 문제에 초연한 입장을 견지하더라도,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에 재가사회와 완전한 단절은 불가능하고, 정치적 환경으로부터도 완전히 자유로울 수도 없다. 첫째 이유는 승가는 경제적인 의미에서 구성원들의 생산활동이 금지된 사회라는 점이다. 승가에 필요한 물적 토대는 경제 외적인 논리에 의하여 재가사회로부터 제공된다. 생산논리가 배제된 승가의 경제적 기반이 재가사회이고, 재가사회는 정치·경제적인 논리에 의하여 지배되는 사회이다. 재가사회의 정치·경제적 상황은 승가에 제공되어야 할 공양물들의 질과 양은 물론이고 제공 방식을 결정하는 중요한 변수가 된다. 따라서 비록 간접적으로 연결되는 관계이지만, 승가와 재가사회의 완전한 단절은 불가능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두 번째 이유는 대부분의 재가자가 열반을 성취하기 위한 출가자의 지계와 수행을 숭고한 가치를 가진 삶으로 생각하고, 율장의 규정에 따라 유지·운영되는 승가사회를 인간이 만들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공동체의 모델로 생각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상가공동체 내부에서 이루어지는 열반으로 향하게 방향 지워진 생활방식과 그것을 위한 지속적이고 반복적인 수련이 재가사회에 영향을 미치는 도덕적 권위가 된다. 두 사회는 분리되어 있으면서도 이렇게 정신적인 목표를 공유하면서 상호영향을 주고받는다. 재가자들의 승가에 대한 이러한 기대를 승가사회가 완전히 무시할 수 없기 때문에 승가 역시 정치적 환경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승가공동체와 그 구성원들의 실질적인 생활양식은 열반의 성취에 전념하도록 설계되어 있지만, 수행 이외의 일상적인 생활은 정치·사회적 환경과 무관할 수 없다. 또한 출가한 승려는 엄격하고 명예롭게 준수하는 계율에 따라서 세속적인 욕망을 삼가지 않을 수 없지만, 수행을 통하여 체득한 정신적 도덕적 복지를 사회·정치적 분야에 적용하도록 가르치는 스승의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그것이 불교적 가치추구를 통해서 얻게 되는 현실적 이익을 대중에게 회향시키는 모델로서의 행동이다. 승려는 재가자들이 제공한 보시를 단지 소비만 하는 것이 아니라, 선한 의지를 개발하고 발전시키는 것으로 재가사회의 보시에 보답해야 한다. 이것이 승가가 재가에 베푸는 자비이다.

붓다는 비록 제도적이고 정치·사회적인 방법은 아니었지만, 가난과 질병의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들의 구제에 많은 관심을 표명하였고, 통치자와 제자들에게 이러한 문제의 해결이 치자(治者)의 가장 중요한 임무임을 반복적으로 가르쳤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베푸는 미덕’과 ‘환자를 돌보는 공덕’ 그리고 ‘노인과 고독한 사람’들에 대한 정책적 배려를 강조하였다. 이는 붓다가 본 통치의 내용에 해당하는 것들이었다.
붓다는 재세 시 여러 나라 왕과 대신들의 정치적 자문에 응하였고, 연기론적 세계관으로 본 통치자의 존재 이유와 통치자가 갖추어야 할 덕목 그리고 국가운영의 중요한 과제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그리고 정치적 의미로 전환될 수 있는 종교적 신념을 제자들에게 가르쳤고, 교단 내외에서 그것을 몸소 실천하였다. 비록 그의 교단 내에 국한된 일이기는 하였지만, 붓다는 평등의 교의로 계급제도를 폐지하였다. 그는 견고하게 뿌리내렸던 바라문교의 계급 제도를 비열한 것으로 보았고, 인간의 귀천은 어머니의 종성이 아니라 자신의 행동과 직업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그리고 그의 가르침과 교단의 운영은 표리일체를 이루어서 실제로 교단에 입문하거나 입문 후의 수행생활에서 피부색이나 인종 혹은 종성으로 인한 차별은 전혀 없었다. 붓다의 교단 운영방식은 사회적 파장과 논쟁을 일으킬 수 있는 정치적인 요인을 내포한 것이었다.

승가의 구성원이 직접적으로 권력을 소유하거나 권력을 소유하기 위한 정치과정에 참여하는 것은 금지사항이다. 승가의 정치적 역할은 재가자인 정치가들에게 올바른 정치적 이상을 깨우쳐 주고, 통치자의 타락이나 권력의 남용을 경계하며, 그들을 교육하는 스승의 역할로 한정된다. 이것은 정치권력에 대한 도덕적 견제로 승가 차원에서 할 수 있는 불교의 정치적 역할이라고 할 수 있다.

2) 재가자의 정치참여
세속적인 성취동기에 의하여 움직이는 재가불자들은 붓다의 가르침을 최상의 진리로 받들면서도 출가 수행자가 되지 않고 일상적인 삶을 영위하는 불교도들이다. ‘사람됨의 고유한 가치’를 반영하고, 실현하는 수단으로서 종교의 윤리관은 ‘정치사상의 기초’가 될 수 있는 것이며 종교와 정치의 근원적인 연결고리이다. 불교적 관점에서 ‘사람됨의 고유한 가치’는 일차적으로 고(苦)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존재라는 점이고, 이차적으로는 이웃에게 고를 가하지 않고 자비를 베풀 수 있는 윤리적인 존재라는 점이다. 생로병사라는 인간의 근본고를 해결하는 길은 종교적인 가르침에 따른 수행이고, 사회적 동물로서 불가피하게 직면할 수밖에 없는 사회고의 해결은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오계를 지키는 지계의 삶이며, 집단적 차원의 해결책이 정치이다.

정신적 요소로서 종교는 정치영역을 초월하는 것이지만, 정치행위의 기본적인 틀을 결정하는 국가목적은 국가 스스로에 의하여 설정되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 운영에 관계하는 사람들의 세계관에 의하여 설정되고 해석되는 것이다. 때문에 정치의 내용은 종교적 세계관이나 인간관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관계는 정치 역시 종교적 사유의 영향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종교의 도덕적 힘은 기존의 정치·사회적 질서에 정당성을 부여할 수도 있고, 동시에 해체의 기능을 할 수도 있는 양날의 칼이라고 할 수 있다. 정치와 종교는 인간의 행복한 삶을 추구한다는 동질성을 갖지만, 가치를 추구하는 방식과 동원되는 수단의 차이 때문에 양자 간에는 긴장과 협력이 교차하게 된다. 정치는 권력으로 몸을 통제하고, 종교는 상징으로 정신을 통제한다. 단기적인 관점에서는 권력에 의한 몸의 통제가 효과적이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도덕성을 배경으로 정신을 통제하는 상징체계의 역할이 훨씬 강력하고 영구적이며, 비용면에서도 경제적이다. 권력은 피치자들로부터 인정받는 정당성의 정도만큼 안정적이고, 효율적인 것이 된다. 따라서 권력은 언제나 종교가 갖는 도덕적 권위를 권력의 정당화 작업에 동원하고 싶은 유혹을 받게 되고, 종교 역시 정치의 배타적인 힘과 권위를 통하여 추구하는 가치를 효과적으로 실현하고 전파할 수 있도록 사회를 조직하고 싶은 유혹을 받는다.

재가자들에게 정치참여는 국가 구성원으로서 피할 수 없는 권리이면서 의무이다. 따라서 재가사회의 구성원들은 수동적으로는 정치를 벗어날 수 없고, 적극적으로는 권력을 추구하는 당사자가 될 수도 있다. 때문에 승가의 구성원과는 달리 재가불자의 권력 추구행위는 금지나 비난의 대상이 아니다.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재가자가 권력을 추구하고, 획득한 권력을 행사하는 것은 당연하고 바람직하며 자연스러운 일이다. 단지 이 과정에서 비불교도들과 차별성을 유지해야 할 점은 권력의 추구 과정과 방법이 정당해야 하고, 유지 방법이 합법적이어야 하며, 자신의 정치적 행위가 불교가 제시한 보편적인 인간 가치의 실현에 기여하는 일인가에 대하여 끊임없이 점검해야 한다는 점이다.

권력의 추구 과정과 방법의 정당성이란 권력을 쟁취하기 위한 정치적 행위나 권력이 행사되는 내용이 얼마나 오계의 정신과 정합성을 갖느냐 하는 점이며, 보편적인 인간 가치의 실현이란 특정인의 정치행위가 얼마나 자유와 평등이 실현되는 자비로운 사회를 지향하느냐는 것이고, 수행자들이 열반을 지향하기에 적절하도록 사회적 분위기를 조성하고 수행 인프라를 구축하느냐 하는 것을 의미한다. 같은 불교인일지라도 출가자와 재가자 사이에는 정치참여 문제에 관한 한 이렇게 큰 입장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재가사회는 개인의 의지나 선택에 관계없이 ‘정치적 동물’로서 삶의 현장이고, ‘희소자원을 권위적으로 배분’할 공무 담임권이나 자신의 이익을 대변해 줄 대표자 선출권 같은 권리들이 구체화되는 사회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그것은 회피하거나 거부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능동적으로 대처해야 할 권리이며, 동시에 의무이다. 단지 한 가지 주의를 기울여야 할 일은 불교도에게 요구되는 높은 도덕적 기준을 충족시키는 정치적 행위자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불교도들이 이 의무와 책임을 포기하거나 방치할 경우, 불교도들에게 배분되어 불교의 발전과 도덕적 사회건설에 사용되어야 할 희소한 자원의 몫이 정토가 아니라 예토를 만드는 자금이 되고, 외도들의 교세를 확장시키는 재원으로 활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재가사회의 관점에서 볼 때, 불교는 부자를 매도하지 않지만, 가난을 칭찬하지도 않는다. 또한 지위가 높은 공직자에게 걸맞은 대우를 하지만, 공직이 없는 사람을 업신여기지도 않는다. 많은 사람들게 봉사할 수 있는 공직의 획득과 물질적 번영은 필요하고 중요한 것이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도덕적 정신적 발전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이렇게 출가자와 재가자는 삶의 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출가자의 삶을 흉내 내거나 출가자를 따라 하는 것이 훌륭한 재가불자가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왜냐하면 세속적인 삶을 살면서 사회적 유대를 배제하는 사고와 행위를 하는 것은 불교를 왜곡하고 자신을 기만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5. 맺는말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불교는 정치적 주장이 매우 강한 종교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 가치 실현의 수단으로 정치현상에 주목하는 것이지, 권력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었다. 때문에 불교는 매우 정치적인 종교이면서 독특한 방법으로 비정치적인 입장을 유지하는 종교라고 할 수 있다.

불교가 세속과 절연을 권장하는 종교이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정치와는 거리가 멀다는 견해는 편견에 불과한 것이다. 인간이 정치적 동물이라는 사실에는 예외가 있을 수 없으므로 인간사회 안에서 정치와 관계없이 인간으로 존재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며, 이는 불교도라고 예외일 수 없는 일이다. 권력욕이 없고, 권력을 추구하려는 의지도 없으며, 특정 정당에 대한 지지성향도 없고, 투표도 하지 않는다고 정치와 무관해지는 것이 아니다. 사회에 대한 무관심이 불교적 원칙에 충실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불자가 있다면, 그것은 시급히 극복해야 할 시대착오적인 사고방식이다.

불교는 정치를 도덕적인 사회의 건설이라는 자연발생적인 필요에 대응하여 생겨난 인간 의지의 산물로 본다. 도덕적인 사회란 구성원 상호 간의 생명과 재산이 지켜지고, 인격을 보장하는 공존질서가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사회를 말한다. 때문에 불교의 정치 혹은 통치자에 대한 가르침은 공공성을 상실한 권력에 대한 강력한 도덕적 견제이고, 통치자의 타락에 대한 윤리적 예방책으로서의 성격이 강하다.

필자는 《불교평론》의 지면을 통하여 불교가 왜 ‘희소한 자원의 분배과정’, 즉 현실에서 소외된 길을 걷게 되었는가 하는 문제를 다룬 적이 있었다, 그 글에서 필자는 정치가 지배하는 삶의 현장에 대한 불교도들의 무관심이나 정치를 배척하는 것은 불교의 존립에 매우 위험한 일임을 다음과 같이 개진한 적이 있다.

불교도에게는 삶의 현장을 불교적 가치가 실현되도록 바꾸고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들려는 구체적인 행동강령 혹은 윤리강령이 없다. 불국토 건설이라는 염원은 있지만, 어떻게? 라는 질문에 현실적이고 사회적인 대답이 없었다. 불교도들은 객관적이고 현실적인 세계에서 일어나는 문제를 현실적이고 객관적으로 해결하려는 노력 대신 모든 것을 마음의 탓으로 돌리는 심리적 환원요법으로 대처해 왔다. 그러는 사이에 국토는 점점 외도들이 지배하는 예토가 되었고, 불교도가 낸 세금은 예토를 유지 강화시키는 수단과 외도를 선전하는 재원으로 사용되었다. 이와 같은 상황인데도 불교도들이 어떤 사회를 만들고, 우리의 후손을 어떤 사회에서 살아가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는다면, 불국토 건설이나 ‘상구보리 하화중생’은 자기기만의 헛구호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필자는 아직도 위의 경고성 주장을 변경해야 할 단서를 발견하지 못했다. 그리고 세월호의 침몰이라는 윤리 부재의 예토가 초래한 처참한 비극이 위의 주장을 신념에 가깝도록 견고하게 해줌을 절감하면서 글을 맺고자 한다. ■

 

윤세원 / 인천대학교 사범대학 윤리교육학과 교수. 중앙대학교 정치외교학과, 동 대학원 졸업(박사). 최근의 주요 연구로 〈불교의 정치사상과 법흥왕〉 〈4~5세기 동아시아의 사상적 동향과 정치사상으로서의 전륜성왕〉 〈현대사회의 병리적 작동원리와 불교의 역할〉 등이 있음.

 

불교와 정치-불교와 국가권력

동정

 

불교에서는 중생들이 모여 사는 사회, 즉 세간(혹은 중생계)을 국가의 기본 단위로 보고 있다. 세간의 산스크릿트 원어는 로카(loka)이다. "괴멸 될것", "파괴되도록 운명지워진"등의 철학적 의미를 지닌 어휘이다. 즉 영원할 수 없는 생명들의 집합체가 바로 국가이다.세속은 인과의 질서가 지배하는 곳이다. 결국 국가 또한 인과의 멍에 속에있을 수 밖에 없다. 고대사회에서는 특히 그 가운데서도 지도자의 자질이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전제왕권에서의 지도자는 절대적인 카리스마를 지닌다. 제정일치의 원시적 국가형태 속에서 그의 결심은 곧 지상명령을 의미하는 것이다.부처님 당시에는 특히 정치적 혼란이 두드러진 시기였다. 간지스강의 중허리부분을 무대로 하여 강력한 도시국가들이 출현한다. 힘있는 자만의 살아남는 처절한 피의 윤회가 되풀이되고 있었다. 인도의 역대제왕들에게 있어서 정복과 통일은 이루어야 할 당위였다. 따라서 불교를 비롯한 종교적 가치지향은 이와같은 국가의 목표와 상치될 수 밖에 없었다. 인도의 경우에는이 양자를 분리해서 이해한다. 즉 세속의 권륜성왕, 초세속의 부처님이라는등 식으로 세간 출세간을 나누는 것이다.

 

반면 중국의 경우에는 이 둘을 하나로 파악한다. 王卽佛, 호국불교 등의개념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부처님 당시의 역대제왕들이 모두 불교에 귀의했디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부처님은 국가와 종교의 분리도, 또 합일도경계하신 분이다. 그는 지도자에 대한 간접교화를 시도하였고. 국민과 국가의 안락을 도모하려 했던 것이다.<轉輪聖王獅子吼經> <仁王護國般若波羅蜜經> <最勝王經> 등은 지도자의 자질에 관해서 언급하고 있는 대표적 경전들이다. 그곳에는 전륜 성왕이라는이상적 인격체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그 골자는 다음과 같은 세가지로요약할 수 있다.

 

첫째 통치자는 반야의 소유자여야 한다. 정법을 현양할 때 국토는 평안해진다. 사리사욕과 권위의식은 곧 국민생활의 파괴로 이어진다고설명한다.둘째 통치자는 도덕적 사회의 건설에 매진해야 한다. 국민들에게 오계를지키게 하고, 스스로는 도덕적 수범을 이루어야 한다.셋째, 국가경영의 원리는 경제적 풍요와 분배의 공정성이라고 하였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건전한 국민정서의 함양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천태대사 지의는 <인왕경소>에서 이렇게 말한다. "어질다는 것은 참는다는뜻이다. 자신을 추켜 세워도 교만하지 않고, 욕설을 하더라도 성내지 않는다. 능히 그 선악을 참고 견뎌야 하기 때문에 참을성이 있다고 한 것이다.왕이란 통솔의 의미인데 사방이 모두 그 감화를 받기 때문이다"이와같은 지도자에 대한 훈화의 법회가 바로 인왕호국법회, 백고좌도량이었다. <대반열반경>에서는 국가경영에 관한 몇가지 언급이 있다. 즉 건강한국가인가를 따지는 기준 가운데 국정의 원만한 운영을 위하여 자주 회합이있어야 한다는 점, 국민정신의 화합이 선행해야 한다는 점, 그리고 건전한신행심이 있어야 한다는 점 등을 열거하고 있다.

 

근본불교 이래, 이른바 七事의 정신을 부연한 내용이다. 앞의 두 조항은연기론적 정치윤리라고 해석할 수 있다. 회의와 화합은 대화정치를 의미한다. 대화는 결국 상대적 입장을 인정하는 상호호혜의 원칙에서 출발한다.<화엄경>의 입장에서 보면 一卽多, 一中多이다. 국가가 없으면 국민이 없다. 또한 국민이 없으면 국가도 있을 수 없다.이 공동운명체에 대한 자각은 서로를 이해하는 기본적 틀이 된다. 바로 이점에 국가의 국민편의도모, 국민의 국가에 대한 충성이 저절로 우러나게 된다. 세번째 조항은 인간의 절대자유에 대한 언급이다. 인간은 결코 경제적동물이어서는 안된다. 오히려 바라밀, 즉 불교의 자비정신을 실천으로 완성하려는데 그 삶의 목표를 설정해야만 한다. 그것이 삶의 길이요, (Dharma)이다.오늘날 우리는 경제적 가치기준만으로 국가의 우열을 가름하고 있다. 선진국이라는 개념에서부터 국민복리증진에 이르기까지 경제적 가치만이 강조되고 있다. 그러나 인간과 국가는 결코 유물적 판단만으로는 평가되기 어렵다. 오히려 문화.도덕.가치.전통등의 내면세계를 확립하는 일이 시급한 과제라고 생각한다.건강한 국가관 결국 지도자의 자질, 국민들의 정직한 마음씨 등이 어우러져야 가능한 현상이다. 불교의 이상세계가 언제나 모든 사람들의 공감을 얻어 온것은 아닐지라도, 이와같은 덕목들은 참신한 현대성을 지니고 있다.우리가 지향해야 할 德治국가의 실현을 위해서라도 불교의 가르침은 보다폭넓은 반향을 얻기 위해 노력해야 하리라고 생각한다.정병조<동국대교수.본지 논설위원>

 

 

 

 

 

불교에 있어 정치권력이 어떻게 형성되어 작용하였으며, 불법과 어떤 연관 관계를 갖고 있는지를 붓다의 관점을 중심으로 고찰한 것이다. 붓다는 불교 교단이 정치권력과 유착되는 것을 금지하였다. 즉 출가자가 왕과 대신, 바라문과 거사의 심부름을 하는 것을 원천적으로 금하고 있다. 이는 출가자가 정치권력에 빌붙어 권세를 행사하거나 아니면 출가자가 정치권력에 이용될 수 있는 소지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이다. 이처럼 불교가 정치권력에 초연하지만 국가가 정한 법률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교 분리를 위해 출가비구의 승단이 왕에 관한 일을 논의하지 못하게 하였다. 붓다는 백성들에게 ‘국왕은 뱀과 같은 존재이므로 그를 성나게 하지 말고 자신의 생명을 지키라’고 가르쳤는데 교단의 태도 역시 이와 마찬가지이다. 율장 <대품>에 의거하면, 국왕이 교단에 직접 명령을 내려 간섭을 할 경우, 그것이 부당하게 생각될지라도 붓다는 “수행승들이여, 임금의 명령에 따르라.”고 설하고 있다. 이처럼 붓다 당시의 불교교단은 국가나 국왕의 간섭을 가능한 한 피하려고 하며, 그럴 수 없는 경우에는 그 명령에 따름으로써 마찰이나 알력을 없애려고 하였다. 국가권력의 부당한 폭력성에 대해서도 붓다는 비폭력을 주장한다. 이러한 사실은 자신의 나라, 즉 석가족이 멸망의 상태에 이르러서도 폭력적인 공격을 인정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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