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교분리의 핵심가치는 자유의 원리
교회는 정치에 침묵해야 하나? [Ⅰ]
피터 안 기자 | 기사입력 2019/08/03 [09:44]
요즘처럼 정치 이야기가 많이 회자되는 때가 있었을까? 모임을 가도, 식당에 가도, 평범한 가정의 식탁에서도 한국과 미국은 물론 일본, 중국, 북한 등과 관련해 일련의 한반도 정세에 대한 정치 이야기가 어디를 가나 어렵지 않게 들린다. 그러나 유독 정치 이야기를 꺼리는 곳이 있다. 그곳은 바로 교회가 아닐까. 교회를 제외한 다른 장소에서는 너나없이 정치 이슈를 화제로 올리지만 교회에서 만큼은 정치에 무관심한척 애써 조심하는 것은 왜일까. 이번호와 다음호 두 차례에 걸쳐 ‘교회는 정치에 침묵해야 하나?’란 제목으로 이를 다루려 한다. <편집자주>
흔히 “교회에서는 정치적 발언을 하면 안된다” “교회는 하나님만 예배하는 곳이지 세상 이야기를 하는 곳이 아니다” “교회에서 정치적 이야기를 하면 서로 얼굴 붉히게 되니 될 수 있는대로 하지 않는게 좋다” 등 교회 내에서의 정치적 발언을 금기하는 이들의 주장이다. 어느 정도 수긍이 가는 말이다. 하지만 한편으론 완전히 이해하기란 어딘지 설득력이 부족한 구실 찾기처럼 들리기도 한다.
사실 교회에서 세상 정치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으므로 얻을 수 있는 유익은 분명히 있다. 성도들의 종교적 성향에 대한 마찰을 피하므로 논쟁의 소지를 처음부터 없애고 될 수 있는한 교회에 더 집중하게 할 수 있다. 하지만 좀 더 거시적인 관점에서 볼 때 국가에서 무슨 정책을 펴든 내가 상관할 바 아니라고 넋을 놓고 있다가는 정작 기독교에 반하는 정책이나 악법이 시행될 경우 그 피해는 분명히 교회가 고스란히 받게 된다. 그 때는 이미 후회해도 소용없는 일들이 발생할 수도 있고 말이다.
그렇다면 정말 그들의 말처럼 “교회는 정치적 발언을 하면 안되는 것일까?” 어떤 이들은 목사가 왜 정치적 발언을 하느냐고 비판하지만, 예언자적 사명으로 사회에 참여하는 것은 기독교의 중요한 가치 중 하나이기도 하다. 따라서 “종교인들은 정치적 발언이나 행동을 하지 말라”고 단정 지어 말할 수도 없다. 그렇다면 세상을 변화시키고, 하나님의 통치를 이 땅에 이루고자 하는 기독교인들은 어디까지 정치에 참여해야 하며, 어디쯤에서 멈춰야 하는 것일까? 이 명제를 들춰보기 이전에 이번 달에는 ‘정교분리’가 무엇인지부터 살펴보고자 한다. 그래야 과연 교회나 목사나 혹은 성도들이 정치적 발언이나 행동을 해야할지 말아야 할지에 대한 판단의 기준이 설 것이다.
미국의 정교분리 출발은 미국헌법 제정시 ‘국교’ 부인
‘정교분리’는 미국의 제3대 대통령 토마스 제퍼슨 당시 다음과 같은 3가지 중요한 원칙에서 출발했다고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세상정부는 교회를 탄압하는 법을 제정할 수 없다 ▲세상정부는 교회에 세금을 징수할 수 없다 ▲대통령은 교회의 수장이 될 수 없다.
엘정책연구원(Eternal Liberty Institute for Policy Studies) 대표 이정훈 교수는 ‘정교분리’의 출발은 미국 헌법이 만들어질 때 ‘국교’를 부인하는데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예를 들면, “청교도 회중교회만이 진짜 교회야, 다른 거 하지마~” 식의 청교도 교회 외의 다른 종파, 즉 침례교도라든지 감리교도 등을 박해나 차별하지 말라는 원리, 다시 말해 ‘자유의 원리’라는 핵심가치가 ‘정교분리’의 근본 시작점이라는 것이다. 장로교 교인이 되던 침례교에 출석하든 국가권력뿐 아니라 어느 누구의 강요가 아닌, 개인의 자유에 따라 자신이 원하는 종파나 종교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정교분리의 핵심은 국가권력이 교회를 위한답시고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을 법으로 정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특별한 교단만 국교로 정해 하나만 인정하고 나머지는 다 인정하지 않는 차별을 막는 것에서 기인합니다. 즉 정교분리의 출발은 자유입니다. 종교의 자유, 신앙의 자유를 헌법에 탑재시킨 것을 미국인들은 위대한 실험이라고 표현했고, 미국헌법에서 가장 멋진 것이 바로 ‘정교분리’ 입니다.”
사랑침례교회 정동수 목사 역시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가장 고귀한 가치는 ‘자유의지’이며, 이 기본적인 행복추구권을 인정하는 것 중의 하나가 ‘정교분리’라고 말한다.
정 목사는 조직신학자 웨인 그루뎀이 쓴 <성경에 따른 정치(Politics according to the Bible)>의 내용을 인용해 “인간은 속박에 갇히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믿고, 원하는 대로 말하고, 물론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도 내에서 얼마든지 자유롭게 생각하고 창의성을 가지고 이 세상에서 살아갈 권리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정부가 해야될 가장 중요한 일 중에 하나는 정부에 속한 국민들의 자유를 지켜주는 것이 정부의 가장 큰 책임이다. 따라서 세상 정부는 인간의 행복을 극대화 해줄 수 있는 정부가 바람직한 정부다. 이런 정부가 되려면 필연적으로 정부가 작아야 한다. 정부의 기능이 작을수록 국민의 자율성이 크다. 그러나 반대로 전체주의 독제주의를 추구하는 공산주의 사회주의 나라는 큰 정부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러한 정부는 국민의 모든 것을 규제하고 간섭하려 든다. 잘못된 정교분리에 대한 상식으로 교회를 공격하는 현실이 안타깝다”고 전했다.
정교분리의 해석을 한국의 역사를 통해 해석하는 이들도 있다.
역사신학자 배덕만 교수(기독연구원느헤미야 연구위원)는 ‘정교분리의 복잡한 역사’란 아티클에서 “기독교와 깊은 관계를 맺어 온 서양은 근대사회에 진입한 이후 각자의 고유한 경험을 토대로 국가와 종교의 관계를 법적·현실적으로 재구성했지만, 오랫동안 불교와 유교가 국교로 기능했던 한국사회에서 정교분리는 생각할 수 없는 사상이었다며 한국사회의 정교분리에 대한 이해가 왜곡되어 있음을 지적한다.
“정교분리에 대한 이해의 편차는 해방 이후 현재까지 한국사회에서 정교분리가 정교유착 혹은 정교갈등의 명분으로 사용되어 왔던 혼란스런 역사의 부정적 흔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도 정교분리를 교회의 정치참여 금지로 이해하는 사람들, 국가의 종교 간섭을 배제하는 것으로 주장하는 사람들, 혹은 양자 간의 월권행위 금지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배 박사의 주장이 일리가 있는 것은 현재 대한민국 헌법 제20조는 “①모든 국민은 종교의 자유를 가진다. ②국교는 인정하지 아니하며, 종교와 정치는 분리한다”라고 규정되어 있고, 헌법 제37조 제2항은 “국민의 모든 자유와 권리는 국가안정보장·질서유지 또는 공공복리를 위하여 필요한 경우에 한하여 법률로써 제한할 수 있으며, 제한하는 경우에도 자유와 권리의 본질적 내용을 침해할 수 없다”라는 단서조항이 삽입되어 있어 한국사회에서의 정교분리가 상대적 개념을 담고 있음을 시사한다.
에벤에셀교회 이충근 목사의 경우는 정교분리와 관련해 대한민국은 기독교를 따로 떼어놓고는 설명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기독교가 대한민국의 건국에 지대한 관여를 했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3.1운동, 학교, 병원, 복지시설, 조국 근대화 발전 등 그 중심에는 기독교가 있었습니다. 1948년 5월 31일 대한민국 제헌 국회가 열릴 때도 기도로 시작했습니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4대 정책은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한미동맹, 기독교입국론 이었습니다. 국가의 주요 의식을 기독교 의식에 따라 집행했고, 크리스마스를 국경일로 정했으며, 군대에 군종제도를 도입해 병사들에게 전도를 할 수 있는 길을 열고, 또 감옥에 형목제도를 도입해 옥중의 죄수들에게도 전도의 문을 열었습니다.”
“또한 정부 요직에 기독교인들을 많이 기용하고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국회에 많이 진출하도록 권장했습니다. 기독교 신문사·방송사의 설립, 기독교계 학교와 신학교의 설립, 그리고 YMCA 및 YWCA의 활동을 장려 내지 지원. 게다가 선교사들을 우대하고, 6·25전쟁 기간과 그 후에 외국에서 들어오는 구호금과 구호물자를 기독교 단체 등을 통해 배분토록 하는 등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습니다. 한마디로 대한민국의 국민들이 가는 곳마다 목사를 만나고 복음을 들을 수 있게 만들어 놓았고, 그로 인해 수많은 영혼들이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한국 교회와 정치는 절대 무관하지 않습니다.”
정교분리 앞세워 교회 허무는 법 우후죽순처럼 제정되는 현실
현대로 넘어와 정교분리의 이해는 좀 더 복잡해진다. 다변화와 다양화, 다민족과 다인종, 그리고 이민 커뮤니티의 형성과 확장, 다양한 종교들의 한 국가에서의 공존. 여기에 더해 오늘날 정교분리 원칙을 이유로 교회를 무너뜨리는 법들이 여기저기 우후죽순처럼 제정되고 있다.
엘정책연구원 이정훈 교수는 정교분리를 현대적 시각에서 해석할 때 정부가 정책을 만들고 실행함에 있어 어떤 특정 종교집단과 유착하는지, 아니면 반대로 차별을 하는지의 유무로 보아야할 것을 지적한다.
“정부는 특정 종교집단에 예산을 밀어준다든지 우대해서는 안 됩니다. 또 특정 종교를 차별하고 괴롭히는 것을 못하게 하는 것이 정교분리의 핵심입니다. 오히려 걱정되는 것은 교회가 ‘다원주의와 타협 합시다’란 말에 침묵하고, 카이퍼적인 신학과 신앙을 하면 정치적인 것이라 안 되고, 무신론과 타협하고, 공교육에서 무신론을 아이들에게 강요하고 주입하더라도 크리스천들이 침묵하고, 크리스천 선생님이 학생이 배가 아프다고 해서 기도해줬더니 교육청이 징계를 해도 모르는 척 하는 것 등, 다른 것이 정치화가 아니고 바로 이런 것이 정치와라는 것을 모르는 것이 너무 안타깝습니다.”
이 교수는 이어 “상황이 이러함에도 교회들은 쥐 죽은 듯 조용하기만 합니다. 이것은 수많은 교회들이 정교분리의 뜻을 오해하고 있기 때문에 나오는 반응들입니다. 가령 ‘A가 옳다. B가 옳다’에서 크리스천에게 확실한 진리는 무엇입니까? 즉, 상대가 다원주의가 좋으면 좋다고 말을 할 수 있습니다. 나 역시 나는 예수님만이 진리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나도 계속 얘기하고, 너도 계속 얘기해! 그러니까 - 내가 저 사람 입을 막아, 또는 저 사람은 내 입을 막아 - 이런 거 하지 말고, 말해! 괜찮아! 이겁니다. 크리스천들은 우리가 선포할 수 있으면 우리가 이긴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미 결론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그들도 그것을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법으로 기독교의 입을 막아버리려 한다면 그것은 공정한 게임(정교분리)이 아니기 때문에 그 법을 용납할 수 없는 것입니다.”
교회는 정치에 침묵해야 하나? [Ⅱ]
정치는 합법적으로 복음 전할 수 있는 능력의 기반
피터 안 기자 | 기사입력 2019/08/24 [07:40]
▲ 미항공우주국(NASA) 소속 위성이 촬영한 한반도 사진. 한국과 중국 사이에 위치한 북한이 캄캄한 바다처럼 보인다. © 크리스찬투데이
요즘처럼 정치 이야기가 많이 회자되는 때가 있었을까? 모임을 가도, 식당에 가도, 평범한 가정의 식탁에서도 한국과 미국은 물론 일본, 중국, 북한 등과 관련해 일련의 한반도 정세에 대한 정치 이야기가 어디를 가나 어렵지 않게 들린다. 그러나 유독 정치 이야기를 꺼리는 곳이 있다. 그곳은 바로 교회가 아닐까. 교회를 제외한 다른 장소에서는 너나없이 정치 이슈를 화제로 올리지만 교회에서 만큼은 정치에 무관심한척 애써 조심하는 것은 왜일까. 지난호 ‘정교분리의 핵심가치는 자유의 원리’에 이어 ‘교회는 정치에 침묵해야 하나?’ 그 두 번째를 다룬다. <편집자주>
2018년 9월 8일 허가되지 않았던 인천 퀴어축제 강행 시 반대 입장을 외치던 지역교회 목사가 수갑이 채워진 채 경찰에 연행되는 사건이 있었다. 주요 언론에는 거의 보도된 바 없지만 페이스북과 유튜브 등 각종 SNS를 타고 퍼진 소식은 많은 이들의 공분을 자아냈다. 특히 교계는 일제히 비판의 목소리를 냈다. 한국기독교연합과 한국교회언론회 등은 성명서를 내고 “불법적인 집회를 강행하는 동성애자들과 이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보호한 채, 양심과 도덕과 윤리의 정신에 따라 반대하는 목회자를 현장에서 수갑을 채워 체포하는 경찰은 도대체 어느 나라 경찰인가. 이는 공권력(公權力)이 아니라, 공포의 권력을 가진 공권력(恐權力)”이라며 현 정부와 경찰을 성토했다.
지난 6월 5일에는 한국의 가장 보수적 교단이라 할 수 있는 합동교단의 대형교회인 분당우리교회의 정진영 부목사가 수요예배 시간에 ‘지적질인가, 거룩한 분노인가’라는 제목의 설교에서 동성애를 반대하는 한국교회를 소위 ‘꼰대’라는 표현을 써 물의를 빚은바 있다. 이때 교계는 물론 동성애에 대해 보수성이 강한 국민들로부터 “세상 따라가지 말라면서 본인은 세상의 눈치를 보며 대세를 좇는 기회주의자인가”라는 비난을 면치 못했다.
같은 날 한국기독교총연합회 대표회장 전광훈 목사의 문재인 대통령을 ‘종북’으로 규정하고 하야를 촉구하는 시국선언문 발표가 있었다. 이에 반발한 고신대 석좌교수 손봉호 장로는 한 라디오 방송에 나와 전 목사를 향해 “낮은 수준의 정치적인 발언으로 많은 기독교인들을 부끄럽게 만들었다. 한기총 대표회장직과 목사직에서 물러나라”고 비판했다. 하지만 이후 손 장로가 촛불집회를 평화집회라고 한 발언, 천안함, 연평도 사건 이후 북한의 위협에 대응한 ‘키 리졸브 훈련’ 중단 주장, 무차별적 대북지원 성명, 국가보안법 폐지 동참, 과도한 설교 사례비 등 그의 과거 정치적 발언들과 행보가 SNS를 타고 빠르게 퍼지면서 정의와 도덕성을 강조했던 손 장로를 향해 “누가 손 장로에게 한국 기독교를 대표하는 원로라고 했던가”라며 오히려 역으로 비난이 쏟아졌다.
위의 예들은 최근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면서 끊이지 않고 사회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불화와 분열의 뉴스들 중 기독교와 관련된 소식의 극히 일부이다. 이런 가운데 전에는 정치에 전혀 관심이 없던 20-30대들이 정치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정치를 모르면 대화에 쉽게 참여하지 못한다는 이유도 있겠지만 극심한 청년 일자리 부족과 미디어가 전하는 뉴스와는 다른 사회 분위기가 한몫했다. 특히 교회의 청년들 사이에서도 기독교적 가치관으로 돌아가 세계의 정세와 경제의 흐름을 공부하고, 촛불사태 이후 등장한 문재인 정부의 정치적 위선 프레임에 대해 바로 알고, 더 이상 왜곡된 보도에 선동당하는 일이 없도록 각성하자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이 일에 앞장서고 있는 울산대 법학과 이정훈 교수(엘정책연구원 대표)는 “역사 속에서 헌법이 종교, 모임, 거주이전, 자유 등을 보장하기 시작한 것은 기독교인들의 신앙의 자유를 보호하면서부터다. 미국에서 강조되는 정교분리의 원칙 또한 역사적으로 볼 때 특정 종교나 종파가 국가권력과 연합해 다른 이들을 차별해 온 유럽의 경우를 반면의 교사로 삼아 ‘국교부인의 원칙’을 제시하면서 시작됐다. 교회에서 절대 정치를 얘기하지 말라는게 아니라 성숙한 신앙인이라면 정치를 생각하고 기독교의 믿음에 부합한 특정 정당을 지지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오히려 국가권력이 종교인이 갖는 예배의 자유,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게 문제”라고 지적한다.
또한 이 교수는 “작금의 한국에 이러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크리스천들이 제대로 목소리를 내지 못한다면 유럽이나 캐나다의 경우처럼 기독교인이 표현의 자유에 기반해 자신의 목소리를 낸다는 이유로 국가로부터 고소당하고 제지당하는 일이 벌어질 것”이라고 우려한다.
사랑침례교회 담임이며 인하대학교 기계공학과 교수이기도한 정동수 목사는 기독교인의 정치참여는 선거에서 투표로 나타내야 한다고 강조한다.
“크리스천은 올바른 투표를 해야 한다. 무조건 사람이나 출신 지역, 정당을 보고 뽑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올바른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사람을 선거에서 뽑아야 한다. 동성애 반대, 낙태 반대, 진화론 반대, 사회주의 반대, 무상복지 반대, 종북 반대, 친북 반대 등과 기업의 자유, 가난한 사람 배려, 의로운 자 등의 하나님이 원하는 사람에게 투표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이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하고 살고 있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그러면서 정 목사는 “교회와 좌익, 좌파주의자는 물과 기름과 같다 교회도 나라가 있어야 한다. 사회가 전체 건물이라고 가정해 보라. 사회가 붕괴하면 교회도 무너진다. 공산주의자나 사회주의자들이 원하는 세상은 결코 하나님이 원하는 세상이 아니다. 앞으로 교인들이 해야 하는 일은 교회 안의 좌익 목사들을 더 이상 용납해서는 안 된다. 친중, 종북, 반미를 외치는 자들이 외치는 평화, 인권, 정의라는 구호에 더 이상 선동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면서 기독교인은 정치에 관여하면 안된다. 기독교인은 말씀만 전해야 한다는 허울 좋은 말은 하나님의 사상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교회를 허무는 양의 탈을 쓴 이리와도 같다”고 강하게 경고했다.
기독교 모임인 다니엘기도회가 전신인 트루스포럼(Truth Forum)은 서울대학교에서 시작해 현재 전국 30여개 대학에서 활동 중이다. 서울대 법학과 박사과정을 밟고 있고 있는 트루스포럼 김은구 대표 역시 투표를 통해서 그리스도인은 정치에 상당한 영향력을 미쳐야 한다고 말한다.
김 대표는 “국민이 대표를 잘못 뽑으면 국가가 망가지고 교회가 힘들어진다. 그렇다고 무조건 기독교인 후보가 나오면 그 후보를 찍어야 하는가의 질문에는 꼭 그렇지만은 않다. 후보가 정말 기독교 신앙과 가치를 가지고 있느냐를 먼저 살펴야 한다. 건전한 기독교적 사고에서 나온 국방, 경제 등의 탄탄한 정책을 보고 찍어야 한다. 정당이나 정치적 입장은 다를 수 있다하더라도 바른 기독교 진리에 바탕을 두었다면 반기독교적이거나 기독교를 억압하고 탄압하는 정책은 펴지 않을 것이다. 이 진리만이 분열된 대한민국을 하나 되게 하고, 앞으로 나가게 할 것이다”고 역설한다.
크리스천포스트 객원 칼럼니스트이자 조지워싱턴대학 교수를 지낸 프랭크 터렉 박사(크로스이그재민드 대표)는 한 대학의 강의에서 세상에서 합법적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능력의 기반이 되는 것이 정치라고 단정지어 말했다.
“혹자는 크리스천은 정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구원의 길이 아니니 정치에 너무 깊이 몰두해 완전히 빠져서는 안된다. 또는 정치는 우리와 상관없으니 크리스천이라면 딴 얘기 하지 말고 복음만 전하라고 한다. 하지만 조금만 깊이 생각해 보면 법이 실제로 우리의 모든 것에 영향을 주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즉 자유, 교회, 자녀, 가족, 건강, 돈, 사업, 재산, 학교, 안전, 가난한 자, 아직 태어나지 않은 자, 복음 등등. 그래서 우리는 정치에 관여해야 한다. 무신론자나 크리스천이나 모두 정치에 관여해야 한다. 교회가 정치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생각하는 이들에게 가장 좋은 예는 대한민국과 북한을 비교해 보는 것이다. 한반도 밤의 위성사진을 보면 남쪽은 빛이 밝고 생산도 넘치지만 북한은 암흑이다. 전기라는 단순한 이유가 아니다. 한 마디로 정치다. 남한은 자유가 있고, 북한은 자유가 없다. 남한은 복음이 퍼져 있으며, 적어도 모든 사람이 크리스천은 아닐지라도 세계에서 가장 기독교화한 나라들 중 하나인 반면 북한은 강제 노동 수용소가 있다. 당신이 합법적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능력의 기반이 되어주는 것이 바로 정치다. 그렇지 않고 종교의 자유가 없다면 오늘 이 시간에 이 자리에 있을 수 없을 수 없고, 모임을 가질 때 지하로 내려가야 할 수도 있다.”
그러면서 터렉 박사는 “다만 우리는 신실하게 행동하고 결과를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 정치적인 논쟁을 이기는 것은 우리의 일이 아니고 우리는 할 수도 없다. 우리는 깊이 관여하고 결과를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고 강조했다.
에벤에셀교회 이충근 목사는 오늘날 대한민국의 교회는 친북, 종북 좌파 세력들과 동성애, 이슬람, 반기독교 악법으로부터 위협을 받고 있다며, 잘못된 법을 지적하고, 잘못된 정치와 목숨 걸고 싸워서 다음세대를 위해 목숨을 건 신앙으로 나가는 것이 진짜 예수님의 본을 따라가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정치를 이용해, 법을 이용해 기독교의 가치를 말살하려는 시도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 다음 세대는 ‘예수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외칠 수 없는 세상에서 살게 될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수많은 사람이 참된 복음을 들을 수 없는 나라에서 살지도 모릅니다. 나라가 이런 심각한 상황에 놓여 있는데 진짜 기독교인은 교양있게 신앙생활하며 정치 이야기는 하면 안 된다는 것이 맞는 말인가요. 그것이 진짜 예수님의 마음을 아는 사람들일까요.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만난자의 삶이 아닙니다. 종교놀이를 하고 있는 자일 것입니다. 진정 기독교인이라면 남들이 뭐라고 하든 상관하지 않고 기도로 세워진 나라가 끝까지 예수님을 찬양하고 끝까지 예배할 수 있는 나라가 될 수 있도록 목숨을 거는 자일 것입니다.
국부 이승만 초대 대통령은 1903년 28살 당시 ‘두 가지 편벽됨’ 이란 글에서 나만을 위한 이기적인 신앙생활에 대해 경종을 울리는 글을 남겼다. <전문>을 소개한다.
“내 일신이나 돌아보며, 세상 시비에 상관하지 말며, 믿음으로써 영원한 복이나 구하리라 하여, 전국 동포가 다 죽을 고초를 당하였다 하여도 조금도 동심치 아니하며, 일국강토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 하여도 들은 체 아니하며, 다만 기도하는 바는 나의 몸을 구제하소서, 나의 집안과 부모 처자와 친척 친구를 복 많이 주소서 일뿐이라...이 어찌 예수의 본이며 하나님의 기쁘게 드리시는바라 하리요. 이는 이른바 교회의 편벽되기를 주의함이라.”
[205호]교회의 정치참여, 길을 묻다
[특집-2007 대선과 정치적 제자도] 제14차 공정포럼 '한국교회와 정치참여'
기자명 복음과상황 승인 2007.10.15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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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의정치실천연대(공동대표 손봉호 외 3인) 가 ‘한국교회와 정치참여’를 주제로 포럼을 열었다. ⓒ복음과상황 이승규
“한국교회는 어떻게 정치에 참여할 것인가.” ‘2007 대선’을 두 달여 남긴 10월 8일, ‘한국교회와 정치참여’를 주제로 포럼이 열렸다. 공의정치실천연대(공동대표 손봉호 외 3인)에서 개최한 제14차 공정포럼. 발제자들은 정치세력화를 통해 적극적으로 정권교체 운동에 나서는 보수 교계의 정치참여를 비판적으로 성찰하면서 올바른 정치 참여의 원칙과 방법을 모색했다.
▲ 이문식 목사(산울교회)는 교회가 백성들의 분노를 치유하고 분노의 정치행위를 극복하기 위해 냉정한 선지자적 거리 두기가 요청된다고 했다. ⓒ복음과상황 이승규
이문식 목사 “정치과잉 버리고 선지자적 거리 두기 있어야”
손봉호 총장의 사회로 진행된 이날 포럼에 첫 번째 발제자로 나선 이문식 목사(산울교회)는 “한국교회에서 정치참여에 있어서 문제는 정치 과잉”이라고 주장하고 “지금은 다니엘처럼 하나님나라의 관점에서 정권이 하나님나라의 순기능을 할 때는 도와주고, 아닐 때는 냉정하게 비판하다가 사자굴에도 들어갈 수 있는 냉정한 선지자적 초월성과 거리를 두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교회의 정치참여는 정치적 상황의 변화에 따라 분별력 있는 접근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목사는 “사회 구조악이 존재하는 상황에서는 개인의 정의롭고 인애를 베푸는 삶만으로는 무력하다. 반면에 교회가 예수의 이름으로 정치에 참여하고자 할 때는 예언자적 저항과 순교자적 저항이라는 한계를 지켜야 한다. 그러나 지금처럼 정치가 민주화되어 모든 정치행위가 공정하게 보장되어 있는 상황에서는 정치에 과잉해서 참여하기보다는 정치 엘리트를 지원하거나 신앙적인 힘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이어 이 목사가 한국교회의 사명으로 제시한 것은 ‘백성들의 상처와 분노를 치유하는 것’이다. IMF 체제 10년을 겪으면서 국민들은 피로가 쌓여있고, 오랜 이념적 논쟁과 분열의 정치에 분노하고 있는데, 이 분노가 정치를 비이성적으로 몰고 가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가 백성들의 분노를 치유하고 분노의 정치행위를 극복하기 위해서 냉정한 선지자적 거리 두기가 요청된다고 했다.
▲ 방인성 목사(뉴스앤조이 대표)는“ 한국교회는 무분별한 정치개입으로 더이상 사회를 혼탁하게 하지 말고 지나온 과거를 돌아보고 회개와 정화운동을 먼저 벌여야 한다”고 주장했다.ⓒ복음과상황 이승규
방인성 목사 “한국교회의 무분별한 기독교 편들기 버릴 때”
방인성 목사(뉴스앤조이 대표)는 한국교회가 정치에 참여하는 과정에서 드러낸 세 가지 문제점을 지적했다. 방 목사가 진단한 세 가지 오점은 독재와 부패정권에 침묵으로 안주했던 것, 정치적 힘을 빌려 기득권을 누렸던 것, 무분별하게 종교이기주의로 기독교를 편들었던 것이다. 방 목사는 “한국교회는 무분별한 정치개입으로 더 이상 사회를 혼탁하게 하지 말고 지나온 과거를 돌아보고 회개와 정화운동을 먼저 벌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방 목사는 한국교회가 잘못된 정치권력에 침묵하면서 현실에 안주한 대표적인 사례로 보수교회가 독재정권 시절 ‘정교분리’의 원칙을 내세워 현실참여를 비판한 것을 들었다. 역사적으로 기독교는 정교분리를 가지고 살아남기 위한 또는 기득권 층이 되기 위한 줄타기를 해왔다는 것이다. 방 목사는 “정교분리의 원칙은 국가권력의 박해에서 종교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깨어있는 신앙인들이 신사참배와 독재에 항거하고 순교하고 감옥에 갈 때도 ‘교회보호’와 ‘복음의 순수성’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기득권에 붙어 있기 위해 ‘정교분리’의 방패 뒤로 숨었다”고 비판했다.
방 목사가 가장 심각하게 우려하는 문제점은 한국교회의 무분별한 기독교 편들기다. 그는 최근 전광훈 목사(청교도 )의 발언-“대선은 할 것 없어. 올해 12월 달 대선은 무조건 이명박이 하는 거니까, 장로님이니까.”-를 예로 들면서 장로라는 이유로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한국교회의 종교연고주의 행태를 비난했다.
▲ 백종국 교수(경상대학교)는 정치참여를 위한 개신교의 원칙은‘ 정치영역에서 하나님나라를 구현하는 것’이라고 했다. ⓒ복음과상황 이승규
백종국 교수 “특정한 정파의 성공만을 위해 몰두하는 행위는 반기독교적”
세 번째 발제를 한 백종국 교수(경상대학교)는 2007 대선을 앞둔 한국 교회의 정치참여 방식을 선택할 때 1) 기독교적 정치 참여의 본질에 합당한가?, 2) 이 결과가 복음전파에 유익한가?를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정치영역에서 하나님나라를 구현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는 개신교 원칙을 제시했다. 하나님나라를 구현하는 것은 하나님의 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실천하고, 복음의 역사성에 입각한 정책과제를 설정하며, 기독시민이 복음적 실천의 주체로 나서는 것이다.
백 교수는 기독시민적 정치참여에서 유의할 점으로 다섯 가지를 들었다. 첫째, 기독교적 이상의 기준을 고려치 않고 단지 특정한 정파의 성공만을 위해 몰두하는 행위는 반기독교적이고 세속적이다. 둘째, 서로 다를 수가 없는 기독교적 이상의 실천에 있어서 현격한 의견의 차이가 발생하는 경우에는 진지하고 개방적인 논의를 통해 교정이 필요하다. 셋째 기독교적 참여에는 세 가지(기독교 정당 활동, 당파적 지원 조직 구성, 비당파적 시민단체 활동)가 다 가능하나 세 번째가 기독교적 정치 참여의 대세가 되는 것이 현명하다. 넷째, 정당 구성이나 당파적 활동 지원의 경우에 기독교적 이상의 강조는 가능하나 최대한 교회의 공조직과는 거리를 두는 것이 합당하고 신앙적 표현(기도나 찬송)도 삼가는 게 마땅하다. 당파 간의 경쟁심이 교회의 보편적 성격을 훼손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다섯째, 한국이 다종교 사회임을 고려해야 한다. 맹목적 신앙 행위 때문에 “무례한 기독교”로 비치는 일이 없도록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어진 토론의 시간에 구교형 목사(통일시대 평화누리)는 “한국교회가 정치참여에서 어떤 기여를 할 것인가를 모색해야 한다.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 가장 큰 기여를 하는 것은 ‘유치한 사고’를 안치고 정치에서 정상적인 행동을 하는 것이다. 대선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기독교 정당이기 때문에 일단은 더 낫지 않겠느냐는 의견이 나올 때, 서둘러 항의하고 고발하는 행동을 보이는 것이다.”고 말했다.
이광하 편집장 terry33@newsnjoy.or.kr
이런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자
누가 사회적 약자, 소외된 자를 잘 대변할 수 있겠는가
기자명 고세훈 승인 2002.12.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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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로멈춤앞으로
한국교회는 표면적으로 정교분리를 내세워왔다. 그러나 내용에서는 부당한 정치를 사실상 지지하거나 나아가서는 은밀히 유착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지난 세월 한국교회는 잘못되고 불의한 정치에 대해서 때로는 침묵하거나 적극적으로 거기에 가담함으로써, 약자 편에 서기보다는 권력자·기득권자의 편에 서기를 스스로 선택해 왔다. 일제시대에는 대부분의 한국교회가 적극적·소극적으로 일제에 협력해 왔다. 이러한 사실은 신사참배 거부라는 소극적 신앙운동조차도 한국교회사에서는 굉장한 일처럼 간주되고 있다는 점에서 잘 드러난다.
이승만 독재와 군사권위주의 체제하에서 한국의 대표적 목회자들이 교회의 이름을 걸고 부당한 정권을 어떻게 정당화해 왔는지는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몇몇 개인들은 이에 관하여 회개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아직도 한국교회가 교회 수준에서 과거의 잘못된 행태에 대하여 공개적으로 참회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유감이다.
부당한 정권 정당화 참회해야
1930년대 초 히틀러가 집권했을 때, 독일교회가 히틀러의 국가사회주의운동을 적극적으로 옹호하고 나섰을 때, 소위 고백교회 그룹은 바르멘 선언을 통해서 히틀러 체제가 어떻게 비성경적이고 반복음적인가 하는 점을 정밀한 신학적 분석을 거쳐 보여주었다. 물론 칼 바르트 같은 신학자들이 여기에 참여했다.
이에 반해, 우리의 신사참배 거부 같은 것은 굉장히 소중한 한국교회의 전통이지만, 그러한 운동이 신앙운동을 넘어서 당시의 정치체제·일본제국주의 등에 대한 정교한 신학적 분석에 의해서 뒷받침된 것은 아니다. 한국교회가 사실상 얼마나 이론적·신학적으로 정치현실에 맞설 준비되지 않았는가를 보여주는 한 예이다.
우리는 해방 이후 일련의 군사독재체제를 거치면서도 그러한 정치체제가 왜 성경적으로 잘못되었고, 왜 반복음적인가에 대해 이렇다 할 신학적 분석을 발견하지 못한다. 한국교회는 스스로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에, 줄 것이 없었고 불의에 저항할 수 없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보다 근본적인 의구심도 가져본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경 분리와 같은 황당한 논리가 대세를 이루는 것은 너무나 당연할 수 있을 것이다.
해방 이후 우리는 대부분의 기간을 민간독재와 군사권위주의체제가 주는 과대 성장된 국가, 무소불위의 정치 하에 살아왔다. 정치 선진국의 정치가 아래의 시민사회에 의해서 형성되고 견제되는 정치임에 비추어, 우리는 오히려 위로부터의 불의한 정치가 부당하게 아래의 시민사회를 탈정치화하고 억압하는 상황 속에 있어온 것이다. 이러한 불의하고 힘이 센 정치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안겨주었는지는 너무나 뻔한 사실이다.
한국교회의 일부가 잘못된 정치를 교정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인 것은 사실이지만, 한국의 주류교회는 정교분리를 내세워 잘못된 정치에 대해서 침묵하거나 동조해 왔다. 침묵하는 것도 적극적인 정치적 입장의 표명이다. 중대한 정치 상황에서 저항의 목소리를 내지 않고 침묵하는 것은 적극적으로 동의하는 것 못지 않게 현상유지를 원하는 기득권 세력에 힘을 실어주는 행위이다.
교회가 정치에 대해 침묵하는 사이, 노동자·참교육을 외치는 교사·장애자·실업자 등 사회의 약하고 소외된 자들, 그리고 양심적 저항세력이 얼마나 많은 고통을 받아왔는가는 우리가 너무 잘 알고 있다.
정교분리는 기독교의 관점에서 보면 처음부터 불가능한 개념이다. 우리는 바야흐로 '일상적 정치'의 시대에 살고 있다. 오늘날 정치와 무관한 순수한 경제나 사회 문제는 존재하지 않는다. 정치는 낙태 문제에서 핵 문제, 입시제도에서 실업률과 아파트 가격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삶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 우리는 정치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정치가 우리 이웃의 삶, 우리 이웃의 행복과 불행에 이렇게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면, 정치에 대한 관심은 이웃사랑의 명령을 받은 기독인에게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역으로 말해서, 기독교 복음이 침투하지 말아야 되는 영역은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정치·사회·문화·경제 등 영역은 인간이 편의상 가른 것이고, 복음은 인간생활의 전 영역에서 증거돼야 하기 때문에, 정치를 구태여 복음의 영향력 밖에 두는 것은 비성경적 관점이다. 따라서 정치에 대한 적극적 관심은 복음주의의 당연한 연장이며 기독인의 책무이다.
따라서 정교분리란 것은 그 근본에서 잘못되고 불가능한 개념이다. 근대국가가 특징으로 하는 교회와 정치의 분리 원칙은 과거 중세 시절에 있었던 교회의 부당한 정치개입 혹은 정치권 남용을 경계하거나 국교회주의의 폐해를 피하기 위함이었다. 오히려 구약의 선지자들은 잘못된 사회구조와 왕, 정치 엘리트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혹독한 비판을 서슴지 않았다. 하나님의 공의를 외치며 사회경제적 부정의를 질타했던 예수는 그가 공격했던 바로 그 종교적·정치적 권력에 의해서 십자가를 졌던 것이다.
캘빈은 국가의 목적이 질서 유지 이외에 가난한 자를 위한 정의의 실현이라고 설파하며, 절대권력에 대한 저항권을 용인하였다. 루터가 교회와 정치권력의 분리를 강조했을 때 염두에 두었던 것은 타락한 중세의 교회였다. 개혁주의 전통은 처음부터 정치지도자의 죄성에 비추어 견제와 균형의 민주주의 원리가 필요하다고 지속적으로 주장할 정도로 정치적이었다.
정교분리는 처음부터 불가능한 기독교적 개념
중요한 것은 기독교인들이 과연 어떤 방식으로 정치에의 관심을 표명해야 하는가 하는 점이다. 정치와 정치권력은 어차피 죄인인 인간과 관계되는 개념들이기 때문에 부패하려는 성향을 지닐 수밖에 없다. 이와 관련해서 성서는 아브라함, 모세로부터 열왕기서의 무수한 왕들에 이르기까지 인간이 얼마나 허약하고 넘어지기 쉬운가를 충분히 보여준다.
우리는 성서와 역사로부터 도덕적·지적으로 완벽한 지도자는 발견하지 못한다. 오히려 집권자의 불완전함과 지적·도덕적 능력에 대한 과신이 인류와 사회를 얼마나 황폐하게 만들었는가에 대한 무수한 사례들을 발견한다. 중요한 것은 정치가 행사하는 막강한 영향력에 비추어, 그것이 부패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능하면 제한하는 제도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선한 정치를 위해서 민주주의가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민주주의는 분명 차선의 제도이나, 인간의 약함에 인식에 기초해 있다는 점에서 기독교적이다. 그것은 소수의 독단을 견제함으로 상대적으로 좋은 제도·관행을 만들 수 있는 장치이며, 좋은 정치를 위한 최소한의 필요조건이다. 따라서 기독인들은 특정 정치인이나 정당을 과신하지 말고, 이들이 가능하면 좋은 정치를 할 수 있도록 민주적인 제도를 만들어가는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래서 기독교인은 특히 대선이나 총선과 같은 정치적 참여의 기회를 활용해서, 정치가 아무리 부패해 있다 할지라도, 혹은 부패해 있기 때문에 더욱 정치를 견제하는 일에 적극적이어야 한다.
크리스천은 민주시민의 일원으로서 개인의 기독교적 소신에 따라 정치에 참여(선거권·피선거권 행사, 후보자 후원, 정당 가입 등)해야 한다. 하지만, 교회 혹은 기독교단체나 교계지도자가 특정 정당이나 후보자를 추천 혹은 지원하거나 정치적 입장을 공개적으로 밝히거나 혹은 기독교정당을 만들어서 정치에 관여하는 일은 바람직하지 못할 뿐 아니라 위험하다.
기독교정당과 관련해서 몇 가지만 지적한다. 우선 정치는 일반은총의 영역에 속하기 때문에 정치를 바로 세우는 일에 구태여 '기독교'의 이름 붙이기(labelling)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단지 건전한 민주시민의 자격으로 그러한 노력을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평범한 기독인 개인의 잘못은 신앙심이나 도덕성 등에서 불완전한 개인의 우연한 실수라고 치부될 소지나마 있지만, 교계의 지도자나 기독교를 전면에 건 단체(기독교정당)가 정치적 식견의 부족으로 인해 범한 실책은 당사자를 넘어 교회나 기독교 전체에 대한 지탄으로 연결되기 쉽고, 그로 인해 복음의 선포 자체가 직접적으로 방해받을 수 있고, 그 때마다 교회 혹은 교회가 선포하는 복음에 대한 일반인들의 냉소는 증폭될 수밖에 없다.
두 번째로 중요한 것은, 현실정치의 쟁점들이 점차 복잡하고 다양한 양상을 띄는데 반해, 성경은 이들 하나 하나에 대한 이론(異論)의 여지없는 '기독교적' 대안을 직접적으로 제시해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서구사회에서도 기독교정당들은 극단적으로 상이한 정책적 입장을 표명하는 것이 비일비재하다. 진보계열에 속한 기독정당들이 낙태 허용·핵 비무장·사형폐지·정부지출 증가·노동운동 지지 등을 주장하면, 보수계열에 속한 정당들은 낙태 절대금지·핵 방위력 지지·사형존속·지출 삭감·노동운동 반대 등을 위해 '기독인의 양심을 걸고' 싸운다.
이들의 정치적 입장과 그에 따른 편가르기는 비기독인들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으며, 사실상 이러한 정치적 쟁점들을 논하는데 기독교가 개입할 필요는 없다. 오늘날 서구국가들의 기독교정당은 사실상 기독교 복음과는 무관한 세속적 보수정당일 뿐이며, 장구한 세월 기독교정당이 존재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서구사회는 오히려 급속히 세속화되어 왔다.
서구국가의 기독교정당, 세속화 심각
노예제의 폐지나 반나치운동, 서구복지국가의 발전 등은 기독교정신을 내면화한 상식적 시민들의 희생과 예언자적 활동의 결과이거나 기독교와는 무관한 인본주의 운동이나 진보정당들의 박애주의적 사상에 많은 것을 빚진 것이었다. 오히려 기독교를 전면에 내걸었던 정당이나 정치인 혹은 교계지도자들은 기득권층을 위한 보수적 반개혁적 정책을 완강히 옹호했던 사례를 선진국의 역사는 무수히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기독교가 사회 전반의 윤리 혹은 문화현상으로 오랜 세월 자리잡아 온 서구사회에서 기독교정당이나 기독정치인의 실수나 잘못은 정당과 개인의 문제로 간주되지만, 기독교가 아직 이방종교(문화)로 취급되는 한국사회에서 기독정당이나 기독정치인의 잘못은 정당이나 개인이 아닌 '기독교'의 잘못으로 지탄받기 쉽다. 더구나 한국기독교는 정치 이전의 종교적 수준에서 세계 종교 사상 유례없을 정도로 이미 분열되어 있다.
이처럼 그 내부에서 이미 이기와 독단으로 피폐해 있는 한국의 일부 교계(지도자들)가 수많은 정치현안들을 앞에 두고 어떤 모습을 보일지, 얼마나 무지와 독단과 혼돈의 모습을 보일지는 불을 보듯 뻔하다.
물론 우리가 현실정치에서 기독교의 이름을 전면에 걸고 할 수 있는 일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사안의 성격이 분명해서 선악을 비교적 쉽게 파악할 수 있는 문제는 교회와 교계지도자들이 적극 나서야 한다. 예컨대 우리는 정치가 반민주적 권위주의를 지향하거나, 노예제와 같은 악법들을 용인하거나, 심지어 기독교 아닌 타종교를 탄압할 때조차도, 기독교의 이름을 걸고 정치에 저항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한국의 교계지도자들이 과거의 부당한 정권을 편들거나 그 암울한 현실 앞에서 침묵으로 일관함으로 세속의 지탄을 받아왔던 사실은 한국교회의 씻을 수 없는 오점이다.
한국교회의 상황이나 정치적 쟁점의 성격 등을 고려할 때, 기독교정당을 만드는 것은 자칫 그리스도인이라는 스티커를 차에 붙이고 교통법규 위반을 하는 것과 진배없다. 이와 더불어, 직업인 가운데 정치인이 가장 경멸의 대상으로 되어 있는데, 정치인 가운데 기독교인이 가장 많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말하자면, 세속의 도덕과 윤리를 선도해야 할 교회가 세속의 양식과 상식에도 미치지 못하는 일을 일상적으로 하고 있는 상황에서 기독교정당을 만드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고 위험한 일이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대선후보 정책 검토가 중요
그리고, 실수할 수밖에 없고 넘어질 수밖에 없는 부족한 인간에 불과한 대선 후보자와 집권이 최대목표일 수밖에 없는 특정정당을 교회와 기독교의 이름을 내세우며 지지하는 것은 참으로 잘못된 일이다. 우리는 기독교 혹은 교회를 공개적으로 내걸 때,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해야 하며, 정책과 이념에서 불완전할 수밖에 없는 정치인과 정당에 기독교와 교회를 활용하는 것은 참으로 엄청난 죄악이 될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이번 대선은 한국 정치사에서 보기 드물게 양강 구도로 진행될 것 같다. 이는 한국의 유권자들이 비교적 명료한 두 가지 대안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도록 기회를 부여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치는 일반은총의 영역에 속하는 일이다. 우리는 건전한 시민으로서, 어느 후보자가 더 상식적이고 민주적이며 원칙에 충실하고 사회적 약자를 위해 노력할 것인지를 잘 살펴보아야 한다.
지금 한국정치에 필요한 것은 정책과 인물에 대한 크리스천들의 성숙한 판단이지, 누가 더 종교적이냐 기독교적이냐 하는 일종의 종교적 맹목이 절대 아니다.
지금 한국의 시민사회는 아직도 냉전반공주의라든가, 지역감정, 시장만능주의 같은 퇴행적이고 기만적인 허위의식에 깊이 물들어 있다. 바로 이러한 허위의식이야말로 오늘날 한국사회에 대해 사탄이 역사하는 방식이다. 기독교는 모든 사탄의 기만, 즉 모든 우상에 대해 그것을 밝혀내고 해체해서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실현되도록 만들어야 한다.
한국 크리스천들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진리를 제대로 보지 못하게 방해하는, 시민사회에 만연된 이러한 기만적 요소들, 이데올로기적 헤게모니, 혹은 이데올로기적 폭력의 실체들을 잘 분별해 내서, 스스로 거기에 함몰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이들을 가능하면 교정하거나 해소시킬 수 있는 후보가 누구인지 면밀히 검토한 후에, 일체의 세속적 편견을 제하고,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정직한 선택을 해야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사회적 약자에 대한 대선 후보자들의 정책을 면밀히 검토하는 것이 중요하다. 한 사회가 얼마나 도덕적인가 혹은 선진적인가를 가름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그 사회에서 약자, 소외된 자를 얼마나 배려하는가를 보는 것이다. 우리가 정치선진국이라 부르는 국가들이 또한 예외없이 복지국가인 것을 기억해야 한다.
서유럽국가들에서도 구걸하는 사람들은 적잖게 거리에서 발견되지만, 한국처럼 장애자나 노인이 장애와 노령이라는 이유 때문에 걸인행각을 하는 경우는 단연코 없다. 한국은 지금 복지지출에서 OECD 국가들 가운데 최하위를 차지한다. 뿐만 아니라, 한국과 비슷한 국민소득을 지닌 나라들 가운데도 가장 낙후된 복지수준을 가지고 있다.
과연 이번 대선에서, 다른 어떤 기준보다도, 어느 후보가 사회적 약자, 소외된 자를 보다 잘 대변할 수 있는지 여부가 선택의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작용해야 한다. 기독교적 관점에서 보더라도, 약자에 대한 배려야말로, 이웃사랑을 위한 가장 명료한 과제이기 때문이다.
▲고세훈 교수.
'좋은' 정치란 약자 편을 거들고, 사회와 개인의 윤리수준을 고양시키는 정치이다. 정치를 통해서 하나님의 공의는 좀 더 실현될 수도 있고 방해받을 수도 있습니다. 정치의 '위력'이 현실이고 불가피하다면, 정치는 최대한 선용되어야 하며, 당연히 기독인들에게 정치적 무관심은 하나의 죄악이다.
기독교 교회의 정치 참여 가능성
요즘 한국 교회에서 신자들 사이 대화 주제가 정치라고 한다. 이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못하다. 좌파 정권이 들어선 이후 유난히 더 하다. 그리고 작금 벌어지는 국회 의사당의 야당 행태를 보고 어떤 목회자는 그런 정당은 사라져야 한다고 극단적으로 주장한다. 청와대에 그런 정당을 없애 달라고 약 10만 명의 시민이 청원하고 있다. 이들은 모두 지금 여당의 정치적 행보가 옳다고 본다.
갑자기 이런 질문이 떠오른다. 왜 하나님은 사단이란 존재를 허용하고(창3:1절) 선악과를 에덴 동산 중앙(창2:17절)에 심었을까? 유감스럽지만 상기의 목회자와 대부분의 신자들은 사탄 존재와 활동을 허용한 하나님의 의지와 뜻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악을 허용한 하나님을 무엇보다 먼저 이들은 원망해야 하지만 이상하게도 침묵한다.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고 가르친다. 성경의 인간론 때문에 세상 정치에 견제와 균형이라는 정치적 원리는 반드시 필요하다. 견제 세력을 없앤다면 정치는 반드시 부패한다. 목회자가 오늘의 야당을 없애야 한다는 주장은 이 점에서 극히 위험하다. 이 주장은 목회자가 해야 할 바가 절대로 아니다.
이상하게 대부분의 목회자, 신학자와 신자들은 교회의 정치 참여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잘 모른다. 초대교회 시절 예수님이나 사도들은 정치에 전혀 참여하지 않았다. 그리고 교회가 장치에 참여해야 한다는 가르침은 신약 성경 어디에도 없다. 그런데 이들은 교회의 정치 참여를 열심히 주장한다. 이것은 억지이다.
이들은 성경의 교회론, 구원론과 신국론이 무엇인지를 잘 모른다. 교회는 부활한 그리스도가 머리인 그의 몸이다(엡1:22절). 그의 몸인 교회는 머리인 그리스도의 지시에 따라 행한다. 이미 주장한대로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 전이나 후이나 정치에 참여하는 본을 전혀 보여주지 않았다. 그렇다면 교회의 정치 참여는 사실상 전혀 불가능하다.
성경 구원론(救援論: Soteriology)은 구원 받은 신자들이 교회란 몸의 지체(고전12:27절)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신자는 교회의 지체로써 세상 정치에 참여할 수 없다. 결국 교회론과 구원론은 교회 정치를 반대한다. 교회의 머리인 그리스도가 이를 반대하기 때문이다. 어떤 일이 있어도 교회는 세상 정치 문제에 휘말려선 안 된다.
성경의 신국론(神國論: doctrine of God’s Kingdom)은 교회, 목회자와 신자들이 하나님 나라에 속한다고 가르친다. 여기 하나님 나라는 세상 나라와 완전히 다르다. 다시 말해 하나님 나라는 세상 나라일 수 없다. 하나님 나라는 땅의 나라가 아닌 하늘 나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약 시대 하나님 나라는 구약 시대와 달리 세상 나라의 모습을 띠지 않는다(요3:1-14절).
즉 구약 시대 종교와 정치는 하나였다. 그러나 신약 시대 종교와 정치는 철저히 분리된다. 아들의 하나님 나라가 세상 나라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두 나라의 실질적 주인이다. 다만 영역을 달리 하며 달리 일한다. 이 두 영역은 너무나 다르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의 시민은 거듭난 신자들이다. 그러나 세상 나라의 시민은 구속 받지 못한 죄인들이다.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세상 나라의 원리에 그대로 적용할 수 없는 이유이다. 구약 시대 이스라엘이 이방 나라들과 완전히 다른 것과 같다. 이 두 영역이 분리된다는 것(영역 주권)은 예수님의 언급에서도 분명하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그러나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각각 드리라(마22:21절)고 가르쳤다.
하나님 나라가 세상 나라인 로마 제국과 어떻게 비교될 수 있는가?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 자신이 직접 다스린다면 세상 나라는 하나님이 죄인 인간을 내세워 간접적으로 통치한다. 이 때문에 구약 시대 선지자의 정치 활동을 그대로 신약 시대에 적용시킬 수 없다.
그럼 이런 질문이 나온다. 교회의 정치 참여는 전혀 불가능한가? 그렇지 않다. 얼마든지 가능하다. 단 기독교나 교회란 이름으로 정치 투쟁하지 말라! 대신 신자들이 교회 밖에서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정치 참여하게 하라! 이 때 신자들은 그냥 대한민국 시민으로서 기독교, 교회나 목회자와 어떤 연결도 없이 정당 활동을 할 수 있다. 자신이 원하는대로 얼마든지 여당과 야당에서 활동할 수 있다.
이를 위해 교회의 직분을 이용하지 말라! 교회가 구원의 방주로 끝까지 남아 복음을 계속 전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것이 교회의 일차적 존재 목적이다. 복음으로 죄인은 의인으로 거듭나며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된다. 정치 개혁보다 중생이 앞선다. 거듭남만이 세상을 변혁시킬 수 있는 원인과 근거를 제공한다.
그리고 교회는 성경의 사상과 철학 그리고 가치관을 전함으로 신자가 세상 나라에서 어떻게 하나님 나라의 시민 노릇을 할지를 얼마든지 가르칠 수 있다. 이 때 교회에서 어떤 식으로든지 정치적 논쟁은 피해야 한다. 교회 안에 여당이나 야당에 속한 신자는 모두 그리스도란 몸의 동일한 지체이다.
다른 것으로 교회란 몸을 즉 자신이 속한 몸을 분열시킴으로 자살하지 말라! 다른 의견이 있을 수 있다는 정도로 넘어가라! 그리고 어느 시대나 불의한 정권은 늘 출현하기 마련이다. 이에 대해 일일히 논쟁한다면 교회는 깨어진다. 이것은 자살 행위이다.
세상의 주인인 하나님은 세상을 반드시 심판하거나 징벌한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사탄의 활동을 허용하고 그 결과 악과 악인이 세상 사회에 출현한다. 세상에 나타난 악과 불의만 보고 인간 자신이 심판하려 한다면 교회와 사회에 더욱 혼란과 어둠만 초래시킨다.
물론 기독인 신자는 투표 활동을 통해 자신의 의사를 반영시킴으로 악한 정권을 심판할 수 있다. 이 때 교회와 신자는 하나님이 세운 악한 정권을 보며 무엇보다 먼저 회개해야 한다. 악하고 불의한 정권은 교회가 제 역할을 못한 결과이다.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은 이것을 분명히 가르쳤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4-16절)
산 위의 동네인 교회가 빛을 발하지 못한다면 산 아래 동네도 함께 어두워지기 마련이다. 어떻게 신학자와 목회자는 예수님의 이런 가르침을 무시하고 세상의 악과 불의만 보고 비판하고 판단하길 즐기는지? 실상 이들은 가슴을 치며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것을 하나님 앞에 회개해야 한다.
그러나 어느 신학자와 목회자가 이런 회개를 보여주는가? 자신은 의인인양 세상의 불의와 악을 비판하길 즐긴다. 자신이라면 그런 악과 불의를 절대로 저지르지 않을 것 같은 위선적 처신을 한다. 이들은 자신이 하나님의 은총이 아니라면 구원 받을 수 없는 죄인 임도 잊는다. 얼마나 무서운 위선인가?
한국 사회의 혼란과 어둠의 원인은 교회 안에 순수한 복음이 없다는데 있다. 복음은 예수님이 구세주이면서 동시에 만유의 주라고 전한다. 과연 우린 구세주인 예수님을 만유의 주로 섬기고 있는가? 아니다. 주인의 말을 들을 생각은 없고 자신의 주장만 즐겨 내세운다. 기독교와 교회 안에서 예수님은 더 이상 구세주도 만유의 주도 아니다.
결국 기독교와 교회, 신학자와 목회자 그리고 신자들은 사이비와 이단임을 스스로 증명한다. 이 점에서 예수님을 주로 믿지 않는 유대인과 다르지 않다. 유대인이 예수를 쫓아낸 것처럼 기독교와 교회도 오래 전 이미 예수님을 내몰아 냈다. 운동권 출신은 교회에 진출하여 활동하라는 공산주의자 김일성 교시가 성공했다. 그 결과 이들 목회자와 신자들은 겉으론 기독교인인데 속은 공산주의자이다.
개신교는 예수님을 몰아내고 마리아를 숭상하는 구교와 하나도 다르지 않다. 다시 출발해야 한다. 그러나 새로운 출발은 하나님의 심판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하나님의 심판은 허물고 다시 세우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이런 심판이 언제 그리고 어떻게 한국 교회에 올 것인가? 진노 중에라도 조국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절대로 잊지 말아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할 수 밖에 없다.
교회와 정치
- 기자명 코닷
- 입력 2007.03.25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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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좌파 일각에서는 과거 군사독재 시대에는 침묵하거나 독재세력에 협력하던 보수교회 지도자들이 지금은 사학법 재개정 문제뿐 아니라 뉴라이트 운동이나 심지어 정권교체 운동에까지 참여하고 있는 것에 대해 아주 비판적이다. 종교지도자들은 신앙과 그 신앙공동체의 본연에 충실해야지 왜 현실 정치문제에 뛰어드느냐고 말한다.
때로는 개 교회 안에서도 어떤 교인들은 “목사님이 복음에 충실한 설교나 해야지 왜 정치문제를 거론해서 예배자들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하느냐?”고 불평하기도 한다. 옛날에는 주로 보수적인 교인들이 이런 말을 했는데, 요즘은 좌파적인 생각을 가진 교인들이 보수적인 교인들이 전에 하던 말을 그대로 하고 있다.
사실 정치와 교회의 관계는 쉽게 말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이는 교회가 탄생한 이후부터 계속되어 온 문제이다. 시민운동의 대표자라고 할 수 있는 박원순 변호사는 한국목회자협의회에서 주최한 “교회와 정치”라는 주제의 토론회에서 “교회와 정치의 관계문제는 영원한 숙제”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런데 요즘 교회와 정치에 대한 새삼스런 토론은 교회와 정치와의 관계에 대한 토론이 아니라 실제로는 몇 가지 정치적인 이슈들에 대한 우파와 좌파의 의견충돌이다. 현 정권에 대한 평가가 다르고, 앞으로 있게 될 대선에 대한 목표와 기대가 다르고, 사학법 재개정 등 몇 가지 사안들에 대한 의견이 달라서 일어나는 담론이다.
그러므로 만약 교회에서 목사가 정치문제를 거론했을 때 듣는 사람들이 자기와 의견이 같으면 목사가 마땅히 할 말을 했다고 할 것이고, 의견이 다르면 ‘왜 목사가 거룩한 설교를 세속정치문제에 이용하느냐?’고 비판할 것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진보주의 신학은 인본주의적인 경향이 강했고, 보수주의 신학은 신본주의를 강조했다. 그러기 때문에 진보주의자들은 사회정의구현이나 정치의 민주화 등에 많은 기여를 했다. 반면에 보수주의자들은 현실문제에는 관심이 적었고, 주로 신학적인 문제, 반 복음적인 세력들에 대해 민감했다.
후자들은 정치에의 관여를 조심했다. 그리고 독재자에 대해서도 신앙적인 핍박자가 아니면 참고 수용하는 자세를 취했다. 그런데 신앙에 반하는 일을 강요하거나 핍박할 때는 죽음으로써 그것을 거부했다.
위 두 가지 경향이 우리나라 일제 강점기에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당시 보수주의자들은 정교분리를 주장하며 일제에 항거하는 일에 소극적이었다. 그러다가 신사참배 강요가 일어나자 순교적인 신앙으로 항거했다.
반면에 신학적 진보주의를 수용했던 사람들은 독립운동에 보다 적극적인 자세를 취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나중에는 거의가 다 친일파로 변절했다. 인본주의란 절대성이 약하기 때문에 오히려 변화가 자유롭다.
우리는 각 자의 반성이 필요하다고 본다. 보수주의자들은 좀 더 현실적인 문제, 사회정의와 인권 문제 등, 곧 사회구원에 적극적이어야 한다. 진보주의자들은 복음의 능력과 그 절대적 가치에 대한 인식을 좀 더 깊게 해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거듭남 없이 하나님나라의 일꾼이 될 수 없다는 진지한 신앙고백이 앞서야 한다.
만약 우리가 정치에의 관여문제도 이런 자세로 나가면 서로 협력하고 조화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서로 심판하고 저주할 것이 아니라 서로에게서 배워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