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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 가르치고 있는 것들

불설과 비불설 논쟁을 넘어서

 

 

부처님이 가신지 2600년이 흐른 지금, 거의 모든 종류의 불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와 있다. 예전에는 여러가지 경전을 체계적으로 이해해 보려고 다양한 시도를 했는데 그것이 부처님의 가르침(敎相)을 분류하여 해석하는 일(判釋)로써 교상판석(敎相判釋)의 전통이다. 중국의 교상판석은 천태종의 지의가 확립한 오시팔교(五時八敎)가 유명하고 우리나라에서는 신라시대의 원효(元曉)가 세운 사교판(四敎判)이 대표적이다. 사교판은 삼승별교(別敎)와 삼승통교(通敎), 일승분교(分敎)와 일승만교(滿敎)이다. 원효는 사교판을 넘어서 적극적으로 경전마다 상이한 점을 회통시키는 화쟁의 노력을 하였다. 최근에 우리나라 불교도 초기경전이 들어옴으로서 다시 한번 화쟁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우리나라 불자들이 혼란스러운 것은 니까야로 대표되는 초기경전과 한문으로 전승된 대승경전의 충돌이다. 이것을 충돌이라고 표현한 것은 그 만큼 이 두 불교는 표현과 내용에 있어서 이질적이고 배타적인면이 있기 때문이다. 안거기간이면 일주일마다 1회 정기적으로 토론하는 백장암선원에서는 그러한 충돌이 항상 일어나고 있다. 아무래도 연세가 있으신 분들은 대승불교 입장에서 토론을 하고, 젊은 승려들은 초기불교 입장에서 토론을 하게된다. 안거때마다 토론주제가 바뀌고 토론하는 사람이 교체되면서 반박과 재반박이 교차하는 팽팽한 긴장감은 7년째 이어지고 있다. 그나마 공양, 울력, 포살,예불을 같이 하고 자주 다각실에서 차를 마시며  기타 일상 이야기를 많이 나누기에 토론시간에 격앙된 분위기도 누그러지고 견해 차이도 점점 좁혀지고 있다.  

 

 

토론과정에서 견해차이가 뚜렷하게 나는 것은  불설비불설 문제이다.  2015년 법보신문에 연재된 불설비불설 논쟁에서도 보았듯이 불설 비불설 논쟁은 끝이 나기 어렵다. 니까야가 스리랑카에서 문자화되었다는 기록은 있지만 그때 문자화된 패엽경이 지금 남아있지 않다. 학자들은 니까야도  부파불교의 전승일뿐이며 후대에 만든어진 빠알리 패엽경은 대승 산스끄리뜨 경전보다 늦다고 주장한다. 지금도 불설비불설 토론이 시작되면 어김없이 이런 반박이 나오고 결론도 없이 많은 시간이 흐르고 만다.

 

 

그렇다면 이러한 불설 비불설 논쟁을 끝내는 방법은 없는가? 토론의 방향을 돌려 전승된 내용을 가지고 무엇이 불설에 가까운가 하는 것을 따지면된다. 현재 빠알리경전이 번역되고 한문 아함경이 번역되어 비교해보니 두 개의 전통의 내용이 80%이상 같다는 결과가 나왔다고 한다. 이천년동안 떨어져 있던 경전이 같은 내용을 보이는 것은 니까야와 아함경이 본래 하나의 뿌리에서 출발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런데 두 전통중에서 서로 상반되는 내용이 있을때 우리는 어느전통을 따라야 하는가? 어느전통이 더 믿을 만한가라는 문제도 내용파악으로 가능하다. 언제 어떤 문자로 전승되었든 이제는 내용을 가지고 판단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각각 전통을 다 파악하고 비교하여 공통점과 차이점을 밝혀내는 노력이 있어야겠다. 몇가지만을 비교해 보려한다.

 

 

 

먼저 니까야와 아함경의 차이를 살펴보자.

 

불멸후 200년 뒤의 사람인 아소까왕(阿育王)의 일대기가 잡아함경에 나타나는데 니까야에는 아소까왕의 이야기가 없다. 아함경에서는 부처님은 마야부인의 오른쪽 옆구리로 태어나셨다고 전하지만 니까야에는 마야부인의 자궁에서 태어났다고 전한다. 아함경에는 부처님 당시에 우전왕에 의해서 불상이 만들어졌다고 나오는데 니까야에는 불상(佛像) 이야기가 없다.  불멸후 200년 뒤 아소까왕이 만든 석주, 수투파등의 어떤 조형물에서도 부처님의 형상을 발견할 수 없다. 아함경에는 대승(大乘)또는 소승(小乘)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이라는 단어가 증일아함,장아함,잡아함들에서 발견되는데 니까야에는 대승(大乘) 소승(小乘)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이라는 단어는 한번도 나오지 않는다. 아함경에서는 마하깟싸빠와 아난에게 불법을 부촉하였다고 나오는데 니까야에는 누구에게도 부촉하지 않은 것으로 나온다. 아함경에는 호흡을 관찰할 때 숫자를 하나에서 열까지 세라고 나오는데 니까야에는 그런 설명이 없다. 이것 말고도 많은 차이가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율장을 비교해 보아도 빠알리 율장이 더 원형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빠알리 율장에서는 비구율이 227조이고 비구니는 311조인데 한문 사분율에는 비구율이 250조 비구니는 348조, 오분율에서는 비구율이 251조, 십송율는 비구율이 263조, 근본설일체유부율에서는 비구율이 249조, 티베트역의 근본설일체유부율에서 258조로 되어 있다. 빠알리 율장에는 탑이나 불상에 대한 계율이 없지만 사분율에는 탑이나 불상에 조항이 26개나 들어있다. 이것은 사분율은 시대에따라 변해왔음을 시사하는 것인 반면 빠알리율은 시대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그 원칙을 지켜왔음을 보여주는 실례이다. 

  

 

많은 학자들이 언어적인 관점에서 법구경이나 수따니빠따가 가장 오래된 경전이라고 말한다. 그런 법구경이나 수따니빠따에서 12연기가 등장하지 않는다. 이러한 이유로 학자들은 12지 연기의 형식은 후대에 편집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12지 연기가 후대에 편집된 것이라는 이유는 아함뿐만아니라 니까야가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완성되어 갔다는 주장에 이른다. 그렇게 주장하는 학자는 법구경과 수따니빠따가 게송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것을 간과하고있다. 아래 법구경 183번 게송은 8음절~ 9음절의 4 행으로 되어있다.

 

Sabbapāpassa akaraṇaṁ,(9음절) 諸惡莫作

kusalassa upasampadā,(9음절) 諸善奉行

sacittapariyodapanaṁ (9음절) 自淨其意

etaṁ Buddhāna’ sāsanaṁ.(8음절) 是諸佛敎

 

 

숫따니빠따(Stn. 27)의 게송도 9음절~12음절의 4행으로 되어있다.

 

Natthi vasā natthi dhenupā, (9음절) 다자란 송아지도 없고 젖먹이 송아지도 없고

Godharaṇiyo paveṇiyopi natthi; (12음절 ) 새끼 밴 어미소 뿐만 아니라 성년이 된 암소도 없고

Usabhopi gavampatīdha natthi, ( 11음절) 암소의 짝인 황소 또한 없으니

Atha ce patthayasī pavassa deva.(12음절 ) 하늘이여,비를 뿌리려거든 뿌리소서

 

 

이와 같이 게송으로 이루어진 법구경이나 숫따니빠따는 음절을 적절하게 유지해야한다. 8음절~9음절 4행 형식 그리고 9음절~12음절의 4행 형식은 게송 하나에 총 32음절~44음절이다. 십이연기는 "무명을 조건으로 형성이 생겨나고, 형성을 조건으로 의식이 생겨나고, 의식을 조건으로 명색이 생겨나고, 명색을 조건으로 여섯 가지 감역이 생겨나고, 여섯 가지 감역을 조건으로 접촉이 생겨나고,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생겨나고,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생겨나고, 갈애를 조건으로 집착이 생겨나고, 집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생겨나고,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생겨나고, 태어남을 조건 으로 늙음과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생겨난다."는 순관만해도 빠알리어는 123음절이고 순관역관을 다 적으려면 246음절이다. 십이연기의 순관역관을 적는데만  6개~8개의 게송이 필요하다. 또한 윈냐냐빠짜야 나마루빠(식연명색 10음절) 나마루빠빠짜야 살라아야타나(명색연육입 13음절) 처럼 음절의 수가 불규칙하기에 게송을 만드는 것이 불가능하다. 이러한 이유때문에 법구경이나 숫따니빠따에서 십이연기가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을 간과하고 단순하게 십이연기가 법구경이나 숫따니빠따에 등장하지 않는다고 십이연기가 후대에 편집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오해이다. 십이연기의 순관역관은 산문으로 되어있는 율장의 대품, 소부의 우다나, 맛지마니까야, 앙굿따라니까야 그리고 상윳따니까야등에서 여러번 등장하는데도 그들은 이러한 경전들에 나타나는 십이연기도 후대에 편집된 것이라고 말한다. 경전을 전체적으로 살펴보지 않고 게송 짓는 법에 대해서 생각해보지 않은 사람들이 하는 이러한 어리석은 주장을 하고있다. 우리나라 학자들과 승려들 주에서도 이러한 학설을 따르는 자들이 많다. 

 

빠알리어가 어떤 언어인가를 말할 때도 상식적이지 않은건 마찬가지다. 동국대에 어느 교수는  "인도전역의 아쇼까왕 비문석주의 언어들과 빠알리어를 비교해보면 빠알리어는 마가다 지역이 있는 동인도 지역의 방언들보다는 서인도 지역의 방언들과 더 많은 유사성을 보이고 있다. 따라서 빠알리어는 부처님께서 직접 설하신 언어일 가능성 또한 거의 없어 보인다."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대나무로 하늘을 보고 하늘이 작다고 주장하는 것과같다. 교통이 발달하지 않은 아소까왕 시대에 동인도의 빠알리어는 단어와 발음등이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아소까 석주에 새겨진 동인도 다울리(Dhauli)지역의 브라흐미(Brahmi) 문자보다 서인도의 기르나르(Girnar)지역 브라흐미(Brahmi) 문자가 빠알리어와 더 가까운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차이는 매우 극미하며 스리랑카로 전법여행을 떠난 마힌다장로의 고향이 서인도 웃제니(Ujjenī) 출신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자연스럽게 이해되는 부분이다. 서인도와 동인도의 브라흐미글자로된 언어의 차이는 우리나라 전라도 말과 경상도 말처럼 약간 차이가 있지만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정도다.아소까석주의 브라흐미 문자는 니까야의 빠알리 문자와 문법과 발음체계가 같다. 칙령의 내용을 보면 아소까는 국민들에게 칙령의 내용을 하루에 한번씩 읽도록 명령하고 있는데 이 것만 보더라도 브라흐미문자는 불멸후 200년이 지난뒤에도 대다수 인도인들이 이해할수 있는 문자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니까야의 빠알리어는 불멸후 제1차 제2차 제3차결집을 거쳐서 제4차결집을 통해서 빠알리어가 스리랑카에서 문자화되었다. 이렇게 네차례에 걸쳐 500명~1000명이 모여서 결집을 했다는 것은 내용적으로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공인한 것이고 언어적으로는 빠알리어가 부처님이 사용한 언어라는것을 공인한 작업이었다. 이렇게 불멸후 400년동안 네차례나 승가에서 공인한 가르침과 그 언어를 부처님이 사용하신 언어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어리석은 소견이다.

 

 

 

대승견전은 어떠한가?조계종의 소의 경전인 금강경을 초기경전과 비교해서 살펴보자.

 

첫째는 금강경은 대승초기 경전으로 산스끄리뜨로 만들어진 경전이다.  제1차 제2차 제3차등의 결집을 통해 승가에서 공인된 기록이 없다. 산스끄리뜨경전이 나타난 시기는 기원전후로 부처님의 재세시와 시간적으로 400~500년의 차이를 보인다.

 

둘째는 금강경에서 대승(大乘), 최상승(最上乘),소법(소승법)이라는 표현이 나타난다. 이런 단어들은 불멸후 400년간은 나타나지 않던 용어들로서 경전간의 우열을 가르는 것으로 오해하게 만든다

 

셋째는 니까야에 한 번도 나타나지 않는 책을 베껴쓰고 읽고 외워라(書寫受持讀誦)는 표현이 등장하는데 수지독송(受持讀誦)9번이나 등장한다.

 

넷째는 사상적인 면에서 초기경전에서는 오온의 무아(人無我)를 설명하는데 금강경은 제법의 무아(法無我)를 강조한다.

 

다섯째는 부처님 당시에는 나타나지 않았던 사상(四想)이나 구상(九想)의 표현이 나타난다. 구마라즙은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으로 번역했고 현장은 아상(我想) 유정상(有情想) 명자상(命者想) 사부상(士夫想) 보특가라상(補特伽羅想) 의생상(意生想) 마나파상(摩納婆想) 작자상(作者想) 수자상(壽者想)으로 번역했다.

 

여섯째는 금강경은 모든 수행단계를 사상(四想)이 없는 상태로 표현한다. 부처님이 오백생 인욕선인으로 살며  사지를 잘릴 때도 사상(四想)이 없었고, 수다원,사다함,아나함,아라한과를 얻은 자는 사상(四想)이 없어야하고, 오백년뒤에 금강경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자들도 모두 사상(四想)이 없을 것이고, 부처가 되는 것도 사상(四想)이 없기에 가능하다고 설한다. 초기경에는 수행의 점차적인 단계에 따라 열가지 족쇄가 점차적으로 소멸되어 '사향사과'를 얻게 되는데 금강경에서는 모든 수행의 기준을 사상(四想)이 없는 상태로 규정하므로서 사실상 수행의 단계를 무효화시키고 있다.

 

일곱째는 칠보(七寶)로 탑을 쌓는 것보다 사구게(四句偈)를 법보시(法布施)하는 것이 수승하다면서 외형적인 불사의 공덕 을 비판하고있다. 이것은 아소카왕 이후에 나타난 외형적인 불사를 비판하는 것으로 금강경이 만들어지던 시대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여덟째는 금강경을 수지독송하면 천대받고 멸시받을 것이라고 염려하는 표현이 나온다. 금강경을 수지독송한 까닭에 비난받고 멸시받는다면 그것은 업장이 소멸되는 것으로 알고 금강경을 더욱 유포하라고 강조하는 이러한 표현은 불멸후 오백년뒤에 나타난 금강경이 그당시 사람들에게 거부당하고 배척당할 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의 표현이다.

 

 

아홉째는 보시가 아니라 보시바라밀을, 반야가 아니라 반야바라밀을 강조함으로서 보살의 바라밀수행을 천명하고 있다.보시하고 계를 지키면 천상에 태어난다는 부처님의 예비법문을 바라밀 수행으로 변화시켜서 일상생활이 수행이고 수행의 일상생활임을 설파하고 있다. 출가자들만의 전유물처럼 되어버린 수행을 재가자들의 일상생활로 확대하는 효과를 보이고있다. 이름하여(是名)라는 단어가 26번이나 등장한다.

 

열째는 후오백세(後五百歲)라는 표현은 금강경이 나타난 시기가 불멸후 500년이라는 것을 상징한다고따미 경(A8:51)에서 부처님은 아난다여, 만일 여자가 집을 나와 여래가 선포하신 법과 율 안으로 출가하지 않으면 청정범행은 오래 머물 것이고 정법은 천년을 머물게 될 것이다. 그러나 여자도 집을 나와 여래가 선포하신 법과 율 안으로 출가하게 되었으므로 이제 청정범행은 오래 머물지 못할 것이고 정법은 오백년 밖에 머물지 못할 것이다."라는 말씀에서 알수 있는 것처럼 부처님은 비구니의 출가를 허락한 직후 불멸후 500년이 흐른뒤에는 정법이 사라질 것임을 말씀하셨다.이러한 부처님이 말씀은  불멸후 500년경에 사는 사람들에게 절망적으로 다가왔을 것이며 역으로 새로운 경전인 금강경이 편집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열한번째 이 경전이 있는 곳은 모든 인간과 천신들에게 공양받을 것이고 그곳이 바로 부처님의 사리탑이 있는 곳과 같다고 말한다. 불멸후 사리탑이 많이 만들어진 상황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열두번째 수보리가 금강경과 같은 깊고깊은 경전은 이제까지 들어본적이 없다면서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들어가 있다. 이미 아라한인 장로 수보리가 금강경을 듣고서야 이렇게 깊고 깊은 경전은 일찍이 얻어 듣지 못한 경전이라고 고백하게 함으로서 이 경이 깊고깊고 특별하다는 것을 드러내고있다. 이러한 표현으로 해서 자연스럽게 금강경의 가르침이 기존의 니까야와 아가마가보다 심오한 경전이라고 인식하게 되었다.

 

 

이러한 여러가지 표현방법과 내용을 고찰해 보면 자연스럽게 금강경이 불멸후 500년에 나타난 경전이라는 것을 알게된다. 불멸후 500년경에는 법에 집착하는 사람들이 생겨나서 인무아(人無我)를 넘어서 법무아(法無我)를 강조해야할 필요성이 있었고 사상(四想)과 구상(九想)을 주장하는 무리들이 나타났음을 알 수 있다.특히 대승(大乘), 최상승(最上乘)이라는 용어들과 수보리가 눈물을 흘리며 금강경을 찬탄하는 장면은 경전간의 우열을 가르는 것으로 오해하게 만든다. 대승불교권의 스님들과 불자들은 최고, 최상승이라는 표현에 함몰되고 이중 삼중 부정의 논리에 도취되어 대승우월주의에 빠져있는 경우가 있는데 모두 이런 표현들 때문이다. 최상승 경전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선택받은 사람이고 화두를 드는 사람만이 최상의 공부를 하는 것처럼 말하기도한다. ‘탐진치(貪瞋癡) 없음이라는 표현이나 탐진치가 본래없다. 다만 이름하여 탐진치라 부를뿐이다'라는 것은 표현만 다르지 내용과 경지는 다르지 않음에도 다른 것처럼 오해한다.

 

 

 

금강경에서 사상(四想)이 없는 경지는 초기경전의 열가지 족쇄중에서 마지막 족쇄인 무명이 없는 것이다. 초기경전에서는 열가지 족쇄들의 점차적인 소멸을 근거로 수행계위를 설명하지만 금강경은 '일체 유위법을 꿈,허깨비,물거품,그림자.이슬,번개 같다고 관찰하라'는 게송으로 간단하게 표현할 뿐이다. 육조혜능스님처럼 '머문바 없이 마음을 내라'는 한 구절에 깨달음을 얻는 다면 다행이겠으나 그렇치 못할 경우에는 '머문바 없이 마음을 내는' 방법이 구체적으로 제시되어야 할 것이다. 사향사과라는 수행계위를 설명하고 37조도품으로 자세하게 수행방법을 설명하는 것은 정등각자인 부처님 이외에는 인류사에 있어서 그 누구도 하지못한 위대한 가르침이다. 뭉뚱그려서 설명하는 것보다 단계적으로 자세하게 설명하는 것이 친절이자 실력인데 금강경은 부처님의 이러한 능력과 실력을 사상(四想)없음으로 단순화시키고 있다.금강경은 부처님이 니까야에서 천명한 깨달음의 경지보다 더 깊고 높은 경지를 말하거나 니까야와 다른 내용을 설하는 경이 아님에도 대승경전에서 나타나는 최고, 최상승이라는 표현들에 취하여 대승경전은 다른 경보다 수승한 가르침이라고 오해한다.

 

조계종에서 수많은 부처님의 많은 말씀중에서 금강경만을 소의 경전으로 삼는것은 억지스럽다. 금강경을 소의경전으로 삼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협소하게하고 불친절하게 만든다. 소의경전이라는 아이디어 자체가 종파불교의 산물이다. 반야심경도 마찬가지다. 오온의 자성이 공하다는 것을 통찰한 자를 아라한이라 부르는데 사리뿟따는 아라한중에서도 가장 지혜가 뛰어나서 '지혜제일 사리불'이라고 불리는 분이다. 그런데 반야심경에서 관세음보살은 사리뿟따에게 조견자성개공을 설법하고 있다. 이러한 설정 자체가 보살이 성문제자보다 수승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치이다. 반야심경은 무아상경이나 초전법륜경과 다를바 없는 내용임에도 관세음보살은 사리뿟따를 가르치게 만든 것이다. 금강경과 반야심경이 이러한 특징을 가지고 있는 것은 불멸후 500년후에 사회현상의 반영일뿐이다. 금강경과 반야심경보다는 초전법륜경과 무아경같은 역사적이고 자세하고 친절한 경전이 현대인들에게 더 친절하게 다가갈 것이다.

 

대반열반경(D16)에서 부처님은 “한 분의 장로 비구에게 들은 것도 경과 율에 비추어 보아서, 만일 경과 율에 맞지 않는다면 ‘이것은 세존의 말씀이 아닙니다.’라는 결론에 도달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때의 경은 금강경같은 '대승경전'은 아닐 것이고 율장도  불탑신앙이 나오는 사분율장은 아닐 것이다. 승가에 의해서 공인된 경전과 승가에 의해서 공인된 적이 없는 경전의 차이를 가지고도 부처님의 가르침에 가까운 것인가를 판단할수 있다. 어느 동굴속에서 산스끄리뜨 필사본이 발견되었고 그것이 빠알리어 필사본보다 더 오래된 것이라는 이유가 산스끄리뜨 경전이 빠알리어 경전보다 더 친설에 가깝다는 증거는 되지 못한다. 어느 경전이 친설에 가까운가 하는 것은 언어의 기록과 경전의 내용으로 판단해야 한다. 나의 짧은 지식으로는 한문율장보다는 빠알리율장이, 금강경같은 대승경전보다는 니까야가 그리고 아함경보다는 니까야가 더 권위가 있고,더 믿음이 간다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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