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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견해가 ‘마음의 병’ 원인

등현스님이 불교신문에 연재하는 글이 재미있다.

예전에 알던 등현스님 보다 많이 성숙되었고 정제되어있다.

오온의 탐구 만으로도 심리상담이 가능하도록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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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띠 대상은 바로 신수심법
생각 견해가 ‘마음의 병’ 원인
업 다스려야만 고칠 수 있어

일반적으로 ‘사띠’는 ‘바라봄’ ‘깨어있음’ ‘알아차림’ ‘마음챙김’ ‘바른 억념’ ‘각성’ 등으로 번역되어지고 있다. 일상에 일어나는 상황을 있는 그대로 보되 조금의 판단 작용도 섞이지 않고 바라보는 것이 사띠라는 것인데 필자는 이후 ‘사띠’로 통일하려 한다. 왜냐하면 한 단어에 복합적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사띠에 단지 ‘바라봄’의 기능만 있는가 또는 ‘바라봄’의 기능과 함께 ‘앎’이라는 지성작용도 있는 것인가이다.

사띠는 ‘알아차림’의 기능과 함께 단순 앎과 복합 앎의 기능도 있다. <대념처경>에 의하면 호흡의 들고 남을 주시하는 것이 사띠이다. 호흡이 들어가고 나올 때, 긴지 짧은지의 ‘단순 개념에 대한 앎이 있는 알아차림’을 빠자나티(pajānāti)라 하고, 가고 오고 들고 나올 때 모든 몸의 구부러짐과 유기적이고 ‘복합적인 개념을 아는 알아차림’을 정념정지(sati sampajañña)라 한다. 삶에서 일어나는 행위의 대부분은 복합적인 앎과 함께하며, 좌선할 때의 앎은 단순 앎에 가깝다. 이 앎의 기능은 좋아하고 싫어함, 이롭고 해로운 것, 욕구함의 번뇌적 기능이 제거된 상태의 앎인 것이다. 곧 심(心)이 심소(心所)를 또는 ‘식’이 ‘수상행’을 ‘알아차림’이다. 

어떠한 대상을 사띠해야 하는가? 그것은 다름 아닌 ‘나이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은 나는 누구인가?이다. 그러므로 내가 누구인지를 알려면 나의 몸과 마음을 있는 그대로 알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사띠를 하는 것이다. 첫째로 나는 몸과 마음으로 구성되어져 있음을 알아야한다. 그리고 그 대상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작용 속에서만 나의 존재가 파악되기 때문이다. 몸(身)의 대상은 느낌(受)이고, 마음(心)의 대상은 생각(想), 욕구 작용(行) 등의 법(法)이다. 다시 말해서 나를 안다는 것은 ’신수심법‘을 안다는 것이 되고, 신수심법을 정확히 안다는 것은 오온으로 구성된 나를 정확히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띠의 대상은 신수심법 또는 오온(나)이다. 

수행이라고 하는 것은 마음의 병(業)을 다스리는 것이다. 오해로 인해 잘못된 견해가 발생하고, 그 잘못된 견해가 잘못된 인생관을 형성하게 하고, 잘못된 인생관 때문에 행해진 잘못된 행위들의 결정체가 마음의 병(業)이다. 그러므로 잘못 형성된 견해와 인생관을 바르게 다스리고 또한 악의 행위를 다스려서 선의 행위를 증장시키고 마음을 청정하게 하는 것, 이것을 수행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일련의 과정은 거울이 대상을 비추듯 ‘있는 그대로 주시함’이 필요하다. 앎이 거울 같아야 하는 이유는 주관적 해석과 시비가 앎에 붙어있으면 객관성을 상실하여 있는 그대로를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신구의 3가지 행위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고 바라보아서, 잠재의식의 의도를 현재의식화 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의도가 업을 일으키는 주체이기 때문이다. 의도를 분명히 알아야만 의도의 구성요소인 생각, 견해를 보고 교정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생각과 견해는 모든 마음의 병의 시작점이라서 이것을 다스리지 않고서는 절대로 마음의 병을 고칠 수가 없는 것이다. 

또한 이 3업(業)은 6문(門)을 통하여 발현된다. 6가지 감각 기관이 작용하는 가운데 수와 상과 행이 같이 작용하게 된다. 대상을 보고 듣는 가운데 좋아하고 싫어하는 느낌(受), 옳고 그르다고 하는 판단(想), 당기고 밀치는 의지작용(行)들이 같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의 ‘수상행’은 각각 주관적이고, 개인의 업에 의해 각자의 견해들이 형성되어 진다. 똑같은 사물을 바라보아도 사람마다 ‘수상행’이 각각 다른 것이다. 그러므로 업을 다스리는 데는 두 가지 단계가 필요하다. 첫째, 6근에서 받은 정보를 ‘수상행’과 분리해서 업에 물들지 않은 청정한 의식을 봐야한다. 이들을 분리하는 작업이 바로 ‘아무런 분별없이 바라봄’ ‘단지 바라보기만 할뿐’의 수행적 의미이다. 둘째, 끌어당김(行)의 구성요소인 좋아하고 싫어하는 느낌(受)과 옳고 그르다고 하는 판단(相)의 본질을 해체해 관찰해야 하는 것이다. 

생각은 과거 미래서 노닐지만
‘호흡은 오직 현재’에만 존재
일어남·사라짐 그대로 봐야

사띠를 하는 이유는 첫째, 잠재의식에 있는 감성의 번뇌들을 깨끗이 정화하는 것이고 둘째, 나의 실체를 분명히 앎으로써 나에 대한 집착을 놓기 위함이다. 나(我)는 몸과 그 대상인 느낌, 마음과 그 대상인 법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들이 항상 인연 따라 변화하고(無常), 그 변화하는 것에 대해 고정된 집착을 가지면 고통(苦)이 발생한다. 자성(自性)이 없음을 알면(無我), 바로 나와 법의 실체를 보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보면 더 이상 집착할 내가 없음을 알아 유신견(有身見)을 버리고 ‘수다원’을 성취하게 된다.

감성의 번뇌들을 깨끗이 정화하기 위해서는 습관적 행위를 의식화 하여야 한다. 설사 악업을 짓는 것이 몸과 입이더라도 그것은 도구일 뿐, 근원은 마음의 의도이다. 그러므로 마음의 의도(정신적인 요소)가 어떻게 신체적인 업의 행위를 일으키는지, 다시 말해서 모든 행위의 의도를 보아야 한다. 그럼으로써 마음의 숨은 번뇌를 수면위로 드러내어 빛을 비춰줄 수 있는 것이다.

번뇌는 또한 그 근원이 사견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러므로 수행의 시작은 신수심법을 부정, 고, 무상, 무아로 보는 정견이다. 그러므로 이 부정, 고, 무상, 무아를 꿰뚫어 알면, 바른 인생의 목표가 설정되고, 바른 인생의 목표는 번뇌 속에 살고 있는 중생의 삶을 번뇌를 끊는 삶으로 인도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그리고 그와 같은 생각을 하는 것을 정사(正思)라고 하고, 그와 같은 생각을 실천하는 것이 정어, 정업, 정정진이다. 이러한 실천행위를 통하여 잠재의식의 무시이래로부터 쌓아올린 한(恨)과 집착, 탐착과 성냄이라고 하는 찌꺼기를 닦아 나가는 것을 선정행(禪定行)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의 시작은 바로 정견에 기초하고 있다.

몸(身)은 부정(不淨)하고, 느낌은 괴롭고, 마음은 무상하고 법은 무아인 것을 가르치는 불조의 가르침을 거듭 듣는 문혜(聞慧), 그리고 들은 가르침을 거듭거듭 사유함으로써 마음속의 여러 가지 욕망, 견해 감정 등을 조화시키고 일치시키는 사혜(思慧), 이 두 가지가 정견에 포함된다. 이것들을 직접적으로 경험하는 사념처 수행의 수혜(修慧)가 바로 바른 사띠(정념)에 해당되는 것이다. 

사띠는 일반적으로 호흡을 알아차림으로 시작한다. 호흡에 집중해야 하는 이유는 호흡이 마음을 현재에 머물게 하는 가장 확실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생각(마음)은 늘 과거나 미래에서 노닐지만 호흡은 오직 현재에만 존재한다. 그렇다면 왜 마음을 현재에 머물게 해야 하는가? 과거나 미래는 실재하는 것이 아니고 개념으로 이루어진 가상의 실재(virtual reality)이기 때문에 현재에 마음이 머물지 않으면 나의 진실한 모습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마음이 현재에 머물렀을 때 나에 대한 실체를 경험하여 깨닫고, 나에 대한 집착을 놓을 수 있는 것이다.

마음을 현재에 머물게 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모든 번뇌가 생각(마음)을 타고 흘러 들어오기 때문이다. 호흡과 몸에 대한 느낌은 오직 현재이기 때문에, 호흡을 알아차리는 것을 통해 마음이 과거나 미래의 탐진에 흘러가는 것을 방호(防護)한다. 이리하여 일어난 근심, 걱정이나, 앞으로 일어날 근심, 걱정 등을 다스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호흡을 알아차리는 명상을 할 때 마음속의 기억들이 스멀스멀 올라오게 된다. 그것들은 감각적 욕망, 성난 기억과 짝지어 일어나는 생각들이다. 이들에 대한 생각은 몸과 마음을 지치게 하여 무기력 또는 혼침에 빠지거나, 들뜸, 후회 등에 빠지게 한다. 이들의 지속적인 반복은 아예 수행에 대한 회의와 의심을 일으키기도 한다(五障). 이때 이들이 있으면 있는 줄 알고, 없으면 없는 줄 알아야 한다. 또한 이들이 없다가 발생하면 ‘일어남’을 알고, 있다가 사라지면 ‘사라짐’을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한다. 

이것이 사띠의 첫 번째 기능이다. 몸과 마음이 기쁜 상태에서 이것들을 바라보면 감각적 욕망은 가라앉고, 성난 기억 즉, 나를 괴롭히거나 나에게 잘못했던 상대방을 이해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긴다. 이 마음의 여유 속에서 상대방의 처지와 인연을 이해하게 되면 마음의 번뇌는 바로 씻어지고 소멸해버린다. 그래서 이것을 정념정지(正念正知)라고 한다.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173238 

 

[등현스님의 초기불교에서 禪까지] <14> 정념(sammā sati) ① - 불교신문

사띠 대상은 바로 신수심법생각 견해가 ‘마음의 병’ 원인업 다스려야만 고칠 수 있어일반적으로 ‘사띠’는 ‘바라봄’ ‘깨어있음’ ‘알아차림’ ‘마음챙김’ ‘바른 억념’ ‘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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