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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 마애삼존불 안내판 유감

서산 마애삼존불 안내판 유감’(수정)

 

어제 오후 오랜만에 서산마애삼존불(瑞山磨崖三尊佛像)을 참배했다. 개울을 건너는 다리에는 부처님오신날을 맞이하여 연등, 사각등 등 각종 봉축등이 걸려있다. 진입로 주변의 바위에서 돌조각이 떨어지는 위험을 제거하기 위하여 울타리를 치고 바위틈 돌조각을 제거하는 공사를 하는 중이다. “낙석 제거한다고 해서 안전할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면서 오히려 진입로를 다른 곳으로 내는 게 현명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해봤다. 삼존불의 머리 위에는 거대한 바윗덩어리가 엉겨있는데 갈라진 데가 많아서 위험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러한 문제는 이미 15년 전 논객 법응 스님이 중생 고통 짊어진 마애삼존불 고통으로 신음(http://www.bulkyo21.com/news/articleView.html?idxno=1574)이라는 기고문으로 문제점과 해결방안을 제시한 바가 있다.

 

오후 3, 삼존불은 햇살을 온몸으로 받으며 서 있었다. 눈 부신 햇살로 인해 부처님의 얼굴에서 자비로운 미소를 발견하기 어렵다. 백제의 미소를보려면 오전에 와야만 하는지 그 이유를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참배하는 분들이 드문드문 보였는데 그들도 선명하지 않은 삼존불의 표정에 실망을 느꼈는지 사진을 찍고는 금방 내려갔다. 나는 따가운 햇살을 피하여 바위 근처로 갔다. 그늘 속에서 비스듬히 보이는 삼존불과 주변 자연환경을 살펴보다가 예전에 보았던 삼존불의 미소를 기억하였다. 그러다가 문득 사람들이 금방 내려가는 것이 삼존불의 표정을 명확하게 볼 수 없기 때문만은 아니란 것을 알게 되었다. 근처에는 앉아 쉴 수 있는 의자가 없기에 방문객은 햇살 속에서 무조건 서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만약 주변에 의자가 있다면 주변을 경관을 감상할 수도 있고, 조용히 보살의 미소를 보며 명상의 시간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사람들이 삼존불 앞에서 오래 머무르지 않고 금방 내려가는 것은 삼존불에 대한 안내판의 설명이 너무 딱딱하고 재미없기 때문일 것이다. 2016<불교신문>은 서산마애삼존불의 안내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지적을 하고 있다.

 

삼존불은 언제 누가 무엇 때문에 조성했는지 알 수 없다. 삼존불의 명칭도 확인되지 않는다. 주존을 석가모니불이라 추정하고, 좌측은 관음보살이란 견해를 밝힌 학자가 여럿이다. 그럼에도 안내판에는 주존을 석가모니불로, 좌우 협시를 제화갈라보살과 미륵보살로 단정 짓고 있다.”

 

지금도 그때와 같은 내용의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설명문 중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제화갈라보살의 미소를 묘사하면서도 그분이 어떤 보살인지 설명이 없다는 것이다. 제화갈라는 연등불(Dipankara Buddha)의 음역이다. ‘디빵까라제화갈라로 발음되었다니 천오백년전의 한문발음과 지금의 한문발음이 얼마나 달라졌나를 짐작할 수 있다. 지혜의 등불(Dipa)을 만드는 자(kara)라는 뜻으로 정광불(定光佛), 등광불(燈光佛), 보광불(普光佛)로 의역되었다. 연등불은 석가모니불이 선혜(수메다) 선인이었을 때 미래세에 석가모니라는 이름의 부처가 되리라고 수기(예언)를 하신 분이다. 그런데 안내문에는 연등불이 연등보살로 설명되고 있다. 바위에 조각된 모습은 불상의 모습이 아니라 보살상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분이 제화갈라(연등)보살이 아니고 자비의 화신인 관세음보살이라는 입장이다. 왜냐하면 보살의 머리 위에 부처님을 모시고 있고, 양손에 중생의 병을 치료하는 약을 들고 있기 때문이다. 서산마애삼존불에 세분의 부처님이 모셔진 것이 아니라 한 분의 부처님과 두 분의 보살님이 새겨져 있으므로 정확하게 이름을 붙이자면 '서산마애삼존불보살'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석가모니 부처님도 깨닫기 이전 보살이었을 때 수많은 모습으로 윤회하면서 선행(善行) 고행(苦行)을 하였다. 우리는 자타까에서 부처님의 547가지 전생담을 살펴볼 수 있다. 싯타르타가 완전한 깨달음을 얻어 붓다가 된 후에는 보살로 불리지 않았다. 석가모니보살상도 만들어지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이미 붓다가 되신 연등부처님을 연등보살이라고 부르고 연등보살상을 만드는 것은 적절치 않다. 수억 겁 전에 완전한 깨달음을 얻어 붓다(佛)로 불리는 분을 다시 보살로 호칭하는 것은 마치 아들의 이름을 아버지 이름으로 삼는 것과 같아 매우 어색하다. 연등보살로 오해하게 된것은 왼쪽 반가사유상을 미륵보살이라고 파악하고 나서 자연스럽게 중앙은 석가모니 부처님이고, 오른쪽은 과거의 연등불로 추측한 결과일것이다

서산마애삼존불의 안내문은 부처님의 손 모양을 시무외인(施無畏印)과 여원인(與願印)으로 설명한다. 두려워하지 말라는 뜻을 보여주는 시무외인(施無畏印)의 설명은 맞지만 중생의 소원을 들어준다는 여원인(與願印)의 설명은 적절치 않아보인다. 부처님의 손 모양(手印)에 이름을 붙인 것은 부처님이 생전에 취하셨던 모습에서 연유한다. 시무외인(施無畏印)은 왕사성에서 부처님을 죽이려고 데와닷따가 술 취한 코끼리를 풀어 놓았을 때 부처님은 코끼리를 향해 자비로운 마음으로 손을 들어 보인 것에서 연유한다. 부처님이 손을 들어 보이자 코끼리는 부처님 앞에 얌전히 무릎을 꿇고 앉았다. 선정인은 부처님이 삼매를 닦을 때 취하신 손 모양이고, 항마촉지인은 보리수 아래서 마라(악마)에게 자신이 복덕을 닦은 것을 증명하려고 오른손으로 땅을 가리킨 것에서 유래한다. 설법인은 오()비구에게 설법하실 때 손 모양을 취한 것이다. 이처럼 부처님의 손모양(수인)은 부처님의 행위에 대한 설명뿐만아니라 그 행위가 일어난 장소도 알려주고 있다. 왼손을 아래로 늘어뜨리고 손가락 두개를 오므린 것은 가사를 잡고 있는 모습이다. 이것에 의미를 부여하려는 시도 자체가 억지스러운데다 '부처님이 중생의 소원을 들어주는 손 모양(與願印)'으로 설명하는 것에 동의하기 힘들다. 부처님은 자등명 법등명 그리고 자업자득(自業自得)을 가르치신 분이지 어느 특정한 손 모양을 취해서 중생의 소원을 들어주는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구태여 여원인(與願印)을 설명하자면 ‘스스로 원력(願力)을 발하라’라고  해석하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에 합당할 것이다.

 

서산마애삼존불보살이 시무외인을 하고 있는 것은 삼존불이 위치한 지리적인 상황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서산은 백제 사람들이 중국과 무역을 하는 교통로였으므로 상인들이 바다에 나갈 때 삼존불을 참배하고 두려움을 갖지 않기를 바랬을 것이다. 태안 마애삼존불의 손모양이 시무외인(施無畏印)인 것도 같은 이유다. 학자들은 서산 마애삼존불과 태안 마애삼존불상에서 보이는 독특한 불상배치를 보고 백제인의 창작성에 감탄 하곤 한다. 그러나 태안 마애삼존불상 중앙에 키가 작은 보살상을 배치하고 서산 마애 삼존불상에서 좌우 보살상을 작게 만든 것은 단순히 창작성으로 설명하기에 부족하다. 그렇게 불상을 독특하게 배치할수 밖에 없었던 것은 바위의 크기와 재질 때문이다. 석공이 마음대로 새기고 싶은 것을 새긴 것이 아니라 바위의 형태와 재질에 맞게 부처님과 보살들을 새길 수 밖에 없었던 것이 결과적으로 독창적인 마애불로 남은 것이다. 자연에 순응하면서도 절망하지 않는 백제인들의 순한 마음은 지금도 충청도 사람들에게서 발견되는 은근과 끈기의 심성과 닮아있다. 

이 불상을 발견한 나무꾼이 말했다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도 안내판에 넣으면 좋겠다.

바위 위에 환하게 웃는 산신령님이 새겨져 있는데, 오른쪽 작은마누라가 다리 꼬고 앉아 손가락으로 볼을 찌르며 '용용 죽겠지' 놀리니까 왼쪽 본마누라가 짱돌을 쥐고 집어던지려 하고 있슈!.” 불교를 모르는 나무꾼이 삼존불을 이렇게 묘사했다는 것이 얼마나 발랄하고 유쾌한가? 나뭇꾼의 해학전인 설명을 듣고 마애삼존불을 감상한다면 자비의 보살님이 친근한 백제 아낙네가 되어 다가올 것이다.  

 

태안 마애삼존불의 얼굴이 많이 손상되었지만 서산마애삼존불보살의 얼굴은 거의 손상되지 않아 천진한 미소가 살아있다. 그것은 서산마애삼존불보살이 사람이 접근하기 어려운 낭떨어지 바위에 새겨졌기 때문이다. 절벽에 삼존불보살을 새긴 조각가들은 이러한 사실을 예견하고 있었을까? 자연스럽고 명랑하고 천진스러운 불보살의 미소는 서산시민들의 미소이자 한국인의 미소이다. 삼존불보살의 미소는 국경을 넘어가고 세대를 뛰어넘고 종교를 초월한다. 나는 보살상의 미소를 처음 보았을 때 감동을 잊지 못한다. 조그만 꼬마의 천진한 웃음소리가 실제로 들려오는 듯한 경험을 했었다. 그 때문인지 삼존불보살의 사진을 보면 지금도 그 꼬마 보살들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불상의 후덕한 미소와 협시보살들의 천진한 미소는 세계에서 유일한 것이고 생각만 하면 행복해진다. 그 미소를 더 잘 감상하기 위하여, 행복을 더 많이 퍼뜨리기 위하여 서산마애삼존불보살에 대한 설명이 지금보다 더 감성적이고 친절할 필요가 있겠다. 이 곳을 방문하는 이들이 안내판만 읽더라도 삼존불보살의 의미와 가치를 충분히 음미하고 가슴에 미소를 담아갈 수 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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