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남연군의 묘지
남연군구흥선군의 아버지. 시는 충정. 편자주 의 아들 4명 중 흥선군은 그 끝이었다. 남연군이 작고할 때 흥선군의 나이는 18세였다.
그가 지사를 따라 덕산의 대덕사에 도착하자 지사는 한 고탑을 가리키며 “저곳은 큰 길지라 그 귀함을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흥선군은 즉시 집으로 돌아가 그의 재산을 모두 팔아 현금 2만냥을 마련한 후, 그 절반을 대덕사의 주지에게 주어 절을 소각하도록 하였다. 이에 그 절이 모두 타버리자 흥선군은 상여를 뫼시고 가서 재를 쓸고 그곳에 머물렀다.
한밤중에 그의 형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제각기 꿈 이야기를 하였다. 흰옷을 입은 노인이 나타나 꾸짖기를, “나는 탑신인데 너희들이 어찌 나의 사는 곳을 앗아가느냐? 만일 이곳에 장사를 하면 우제가 끝나기 전에 너회 4형제가 폭사할 것이니 속히 가거라” 하고 말했다는 것이다. 이상하게도 3형제의 꿈이 모두 동일하였다.
이 말을 들은 흥선군은 분통을 터뜨리며 “과연 그렇다면 참으로 길지입니다. 운명이란 주관한 자가 따로 있는 것이니 신이 어찌 해를 끼치겠습니까? 그리고 종실이 날로 몰락하여 우리 형제들이 옷자락을 끌고 날마다 장금의 문전을 찾아다니며 구차히 사느니보다, 차라리 죽는 것이 쾌하지 않겠습니까? 형님들은 모두 자식이 있지만 혈육 하나도 두지 못한 것은 저 혼자뿐이니 죽어도 아무 두려움이 없습니다. 형님들은 아무 말씀 마시고 계십시오”라고 하였다.
그가 이른 아침에 탑을 무너뜨리고 보니 탑터가 모두 암석으로 되어 있었다. 도끼로 팠지만 도끼도 튀기만 하여, 그는 도끼를 어깨에 메고 공중을 향하여 크게 꾸짖었다. 그런 후 다시 도끼질을 하자 다시 튀지 않고 암석이 잘 파졌다. 이렇게 하여 하관을 한 후 혹 훗날 누가 옮길까 염려되어 수만 근의 철을 녹여 지어 붓고 그 위에 사토를 하였다.
그리고 그는 스님을 데리고 경성으로 가던 중 수원의 대포진을 건널 무럽, 배에 탔던 스님이 갑자기 고함을 치며 불을 끄라고 말한 후 머리를 움켜쥐고 불에 탄 모습을 하더니 잠시 후 물에 뛰어들어 죽었다. 많은 사람들은 그 남정군의 묘가 복치형이라고 하였다. 그 일이 있은 후 14년 만에 고종이 탄생하였다.
18. 보덕사 창건
갑자년(1864) 이후 나라에서는 국비를 들여 대덕산에 절을 짓고 이름을 보덕사라고 하였다. 토목에 금을 칠하여 극히 웅장하고 화려하게 하였다. 그리고 논밭도 하사하고 보화도 후하게 주었다
병인년(1866) 겨울에 양인들이 강화에서 도주할 때 사교에 빠진 우리 백성들은 그들을 덕산으로 인도하여 그 묘를 파헤치려고 하였지만 너무 단단하여 파지 못하고, 다만 그 묘에 불만 지르고 달아났었다. 이때 대원군은 리건창에게 장례치른 일을 말하면서 “탑을 헐고 보니 그 속에 백자 2개, 다병 2개, 사리 3개가 있었는데 그 사리는 작은 머리만하여 빛이 매우 밝고 물에 담그면 물을 빨아들이고 물을 꿰뚫은 그 청기는 실오라기만한 연기같았다”고 하였다.
매천야록 제1권
상(1894년 이전) ①
1. 흥선대원군의 운현궁 확장
관상감천문, 지리, 책력, 측후 등의 사무를 보던 관청으로 지금의 관상대와 같음. 편자주 의 또 다른 이름은 서운관이다. 그러나 지금 주상 조선조 26대 왕 고종을 가리키는 말. 명은 희. 자는 성림, 호는 주연으로 영조의 현손인 흥선대원군 리하응의 둘째 아들임. 편자주 의 잠저종실에서 등극한 왕이 세자로 있을 때 거처하던 집. 편자주 가 바로 옛날 관상감의 터이므로 운현궁이라고 한다.
철종 초에 경성에서는 관상감에서 성인이 난다는 민요가 있었고, 또 운현궁에서 왕기가 있다는 말이 떠돌아다녔는데 그 후 지금 주상이 탄생하였다.
그가 등극한 후 대원군 리하응26대 고종의 부친으로 휘는 하응, 호는 석파이다. 편자주 은 이 터를 다시 넓히고 새로 단장하여 주위의 담장이 수리나 되었고, 네 개의 대문도 설치하여 대내대궐의 이칭. 편자주 처럼 엄숙하게 하였다.
2. 관상가 박유붕과 고종의 인연
청도인 박유붕은 관상을 잘하였다. 그는 자기의 얼굴을 보고 한쪽 눈이 애꾸가 되면 귀인이 될 것이라고 판단하고 결국 한쪽 눈을 찔러 애꾸가 되었다.
그는 고종을 어렸을 때 만나, 고종의 옆에 있던 사람들을 물러가게 하고 “왕이 될 관상이니 이 말을 누설하지 마십시오”라고 하였다. 이로 인하여 그는 갑자년(1884) 이후 남양부사와 수사를 지냈다.
3. 고종의 패기
고종은 13세에 등극하였다. 수년이 지난 후 경연왕이 경사 등 학문을 강론한 자리. 편자주 에서 <맹자>를 강하다가 「탕이칠십리 문왕백리」란 대목에 이르러 개연히 좌우를 돌아보며, “70리와 100리의 작은 땅으로 천하에 정치를 하였는데 우리나라는 삼천리나 되니 말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어떻게 하면 연운지금의 하북성과 산서성 및 찰합이의 남부지역인 유주와 운주로 오대 진의 석경당이 거란에게 떼어준 유, 계, 영, 막, 탁, 단, 순, 신, 규, 유, 무, 운, 응, 환, 삭, 울 등 16주를 말함. 편자주 을 평정하여 조종의 치욕을 씻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좌중에는 아무도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때 무반의 승지로 입시하였던 신정희가 반렬을 넘어와서 “이것은 매우 쉬운 일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고종은 “그 대책이 무엇입니까?”라고 묻자, 그는 “전하께서 덕을 닦으십시오”라고 하였다.
4. 완화군의 원자 거론
궁녀 이씨가 완화군을 낳아 계씨로 사성하였다. 이때 고종의 나이는 17세였다. 고종은 매우 기뻐하며 완화군을 원자로 책봉하려고 하자 대원군은, “중궁이 만일 경사가 있으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십니까?”라고 하면서 급히 서두르지 말라고 간하였다.
고종은 박유붕을 불러 관상을 보게 하였다. 박유붕은 잠시 생각을 하고 있다가 “조금 더 기다리시기 바랍니다”라고 말하자, 고종은 벌컥 화를 내며 운현궁의 사주를 받은 것으로 의심하였는데, 그 후 얼마 안되어 박유붕이 사망하였다.
구례 사람 류제관은 무과에 급제하여, 한양에 살고 있으면서 박유붕과 자주 왕래하였다. 하루는 그의 집을 가보니 박유붕이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깜짝 놀라 그 이유를 물었으나 박유붕은 손을 저으며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있다가 잠시 후 사망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그가 사사된 것이라고 하였다.
이 말은 유제관이 나에게 전해 준 것이다.
5. 장금의 융성
금조순?~1831, 순조 때의 문신, 호는 풍고. 편자주 은 옛날부터 자하동에서 살고 있었다.
이 자하동은 경복궁의 북쪽과 창의문 아래에 위치하고 북악산과 인왕산 사이에 있으므로, 여울과 숲이 감싸고 있어 시내에 있는 것 같지 않기 때문에 이 동명을 붙인 것이다. 그리고 간혹 발음을 생략하여 「자동」으로 부르기도 하고, 혹은 급히 부를 때는 「장동」이라고도 한다.
이때 김조순은 이미 국구가 되어 조정에서 권세를 잡고 있었다. 그는 장동에서 교동으로 이사한 후 순조를 대신하여 국권을 장악하였고, 삼대를 거쳐 국혼을 하였으므로 국조에서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외척이 많아, 세칭 안동 금씨를 「장금」이라고도 하였다. 그리고 김조순이 사망한 후 그의 아들 유근, 좌근과 손자인 병기 등이 교동에서 살고 있었다.
금문근은 철종의 장인으로 그의 아들 병필이 어리어, 그의 조카 병학과 병국이 국사를 돌보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전동에 거주하고 있으면서 권력이 금병기와 대등하였으므로 경성에서는 전동과 교동으로 칭했다. 지금 시골에서도 전동교동 시절에 부르던 말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6. 외척망국의 화
장동 김씨 선조에 선원금상용1561~1637. 인조 때의 문신. 자는 경택, 호는 선원. 편자주 , 청음 금상헌1570~1652. 효종 때의 학자, 자는 숙도, 호는 청음. 편자주 , 문곡 금수항1629~1689. 현종 때의 문신. 자는 구지, 호는 문곡. 편자주 , 몽와 금창집1648~1722. 경종 때의 로론 4대신 중 한 사람. 자는 여성, 호는 몽와. 편자주 등은 덕망과 공훈으로 온 나라의 선망을 받았고, 금조순도 문장과 국사에 숙련된 솜씨를 발휘하여 덕망높은 분으로 칭송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자손들은 탐욕과 사치만 부려 외척이 국가를 망치는 화근이 되었다. 다만 그들이 오랫동안 국권을 장악하여 세상에서는 장동 김씨만 알고 국가가 있는 줄을 모르고 있었으므로, 어떤 사람들은 장동 김씨가 국가의 주석나라의 기둥. 즉 태산반석, 주석지신과 같은 뜻임. 편자주 이라고 말하지만 어찌 그럴 수 있겠는가?
7. 김흥근의 출처
장동 김씨 중에서 오직 금흥근이 헌종을 극간하다가 유배되었다. 그는 유배에서 풀려난 후 양화도의 별장에서 기거하고 있다가 이조판서로 피소되었다.
그는 이때 임금으로부터 일곱 번이나 부름을 받았지만 끝까지 나가지 않고 있어 세상 사람들은 한때 그를 고상하게 여겼으나 그는 조정으로 나간 후 벼슬을 떠나지 않았고, 여러 차례 재상을 지내면서도 밝은 정치를 하지 못하였다.
8. 명성왕후의 출현
철종이 승하한 후 후사가 없었다. 철종은 일찍부터 희에게 뜻을 두고 있었으므로 장동 김씨들은 그를 옹립하려고 하였다. 이에 금흥근은, “흥선군이 있으니 이것은 두 임금이 있는 셈입니다. 어찌 두 임금을 섬길 수 있겠습니까? 꼭 그만두지 않으려거든 흥선군을 옹립하십시오”라고 하였다. 이때 금병학은 흥선군과 약속하여 그의 딸을 왕비로 간택하기로 하였다. 이는 외척의 기반을 마련하려고 한 일이다.
그러나 희가 등극하여 흥선군이 대원군으로 승격되면서부터 김병학을 배반하고 국혼을 민치록본관은 려흥. 영의정과 려성부원군으로 추증됨. 편자주 의 딸에게 정하였다. 이분이 바로 명성왕후이다. 그 후 김병학의 딸은 조신희에게 출가하였다.
9. 대원군의 김흥근 정원 탈취
갑자년(1864) 초에 대원군이 점차 용사를 하려고 하자 금흥근은 조정에 말을 퍼뜨리기를, “옛날부터 사친은 정치를 간섭하지 못하게 하였으니 즉시 그를 사제로 돌려보내어 한평생 부귀나 잃지 않게 하는 것이 옳은 일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대내의 대권이 모두 대원군에게 돌아갔다. 이때부터 대원군은 김씨 중에서 김흥근을 가장 미워하여, 김흥근의 장토와 전답 수십 마지기를 빼앗아 갔다.
그리고 김흥근의 별장이 북문 밖 삼계동에 있었는데 서울에서 가장 유명한 정원이었다. 하루는 대원군이 그 별장을 팔기를 간청하였으나 김흥근이 그의 말을 듣지 않자 다시 청하기를, “하루만 빌려 주어 놀게 해주십시오”라고 하였다.
그것은 정원을 가진 사람에게 놀기 위하여 빌려 달라고 하면 주인이 허락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것은 서울의 옛 풍속이기 때문이다.
흥근은 억지 승낙을 해주었다. 대원군은 고종에게 행차하도록 권고하고, 자신도 고종을 뫼시고 따라갔다. 흥근은, 국왕이 행차한 곳은 신하의 의리로서 감히 그곳을 거처할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하여 다시는 삼계동을 가지 않았으므로 결국 김흥근의 별장은 운현궁의 소유물이 되고 말았다.
10. 세도가의 칭호
홍국영이 집권한 후 외척으로 출세한 사람들을 세도가로 칭하였다. 그 세도가를 가리킬 때는 반드시 그들이 거주한 방리와 동명을 명세재보들이 지명을 따라 장사, 강릉, 분의, 귀계 등으로 불렀으므로 금씨들도 전동과 교동으로 부르고, 조씨들은 전동, 대원군은 운현궁에서 살았으므로 운현이라고 한 것이다.
비단 세도가만 그런 것이 아니라 근세의 대신들도 그렇게 하여, 반드시 「합」 자를 동명에다가 붙여 ‘모합’이라고 하였다. 예를 들면, 회동에 거주할 경우 회합, 승동에 거주할 경우는 승합이라고 하였다.
11. 교령에 「대원위분부」를 사용
운현궁에서 집권한 갑자년(1864)부터 계유년(1873)까지 약 10년 동안 나라 안이 온통 공포에 싸였다. 백성들은 혀를 깨물고 서로 경계하며 감히 조정의 일을 말하지 못하고, 항시 귀신이 문앞에 도사리고 있는 것처럼 여겼다.
구제에 교령을 내릴 때는 반드시 「왕약왈」이라고 서두를 붙였으나, 이때 10년 동안은 「대원위분부」란 다섯 자를 사용하였으므로 이것이 내외에 유행하였다. 그 후 갑술년(1874)에 친정이 시작되면서부터 다시 구제를 사용하였다.
12. 대원군의 사색당파에 대한 정책
대원군이 집권 초에 어느 공회에서 당당한 기세로 재상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천리를 지척으로 압축시키고, 태산을 깎아 평지로 만들고, 남대문을 3층으로 높이려고 하는데 여러분의 뜻은 어떻습니까?”라고 하였다.
이에 많은 재상들은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모르고 있던 중 금병기가 분연히 머리를 들고 말하기를, “천리를 지척으로 압축하려고 하면 지척이 되고, 남대문도 3층으로 높이면 3충이 될 것입니다. 지금 대감께서 무슨 일을 못하겠습니까? 그러나 태산은 태산인데 어찌 쉽게 평지를 만들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며 밖으로 나가 버렸다.
대원군은 오랫동안 생각한 끝에 “저 흔자 잘난 척 하는군” 하고 중얼거렸다.
대체로 천리를 지척으로 한다는 것은 종친을 높인다는 뜻이고, 남대문을 3층으로 한다는 것은 남인을 기용한다는 뜻이며, 태산을 평지로 만든다는 것은 로론을 억제하겠다는 뜻이다.
13. 남인 기용
남인들은 숙종 갑술년(1694) 이후 고폐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문형조선시대 대제학의 별칭. 편자주 으로는 권유현종 때의 문관. 자는 퇴보, 호는 하계. 편자주 이후 끊어지고, 각신과 대신도 채제공1720~1799. 정조 때의 대신. 자는 백규, 호는 번암. 편자주 이후 끊겼다. 그리고 같은 조정에 있더라도 관직의 직위나 품계가 노론과 소론보다는 완연히 계급의 차이가 있었다. 그것은 수레의 높고 낮은 차이뿐만이 아니었다. 북인들은 더욱 적막하여 부용대국에 속한 소국. 편자주 과 같았다.
대원군은 린평대군인조의 3남. 이름은 요(요), 호는 송계. 편자주 의 후예이다. 세 왕손의 뒤를 이어 그 근원과 폐부가 남인이므로, 그가 뜻을 이룬 후에는 남인과 북인을 고위직에 기용하였다. 이에 류후조가 정승으로 임명된 후 한계원이 그 뒤를 계승하였으니 이들은 모두 남인이다. 또 임백경이 정승이 된 후에는 강로가 그 뒤를 계승하였으니 이들은 모두 북인이었다.
그리고 조성교는 남인으로서 대제학이 되고, 북인인 금세호는 곧 그 뒤를 계승하게 되어 있었는데, 이때 대원군이 실각하여 기용되지 못하였다. 그 외의 사람들도 한림학사, 감사, 류수 등 청직을 누려 한때는 구름처럼 떼를 이루고 있었다. 대체로 남인과 북인이 많았던 것이다.
그러나 노론이 이미 한 시대를 풍미한 뒤라 그들은 중외에 도사리고 있어 갑자기 제거할 수 없었으므로, 그때 사적을 두고 있는 사람은 노론이 남인, 북인보다 3분의 2를 차지하고 있었다.
14. 이세보의 개명급제
경평군리세보는 철종의 종부와 형제간으로, 철종 때에는 김씨들에게 미움을 받아 거의 죽을 뻔한 위기를 몇 차례 당하였다. 그는 갑자년(1864) 이후에 이름을 인응으로 바꾸고 군호가 폐하여진 후 과거에 급제하였다.
대원군은 고집 센 금병기를 꺼려하여 그를 제거하려 하였으나 그의 막강한 종족들이 두려워 오랫동안 은인자중하고 있었다. 이때 김병기가 려주에서 은거하고 있었으므로, 그는 리인응을 려주목사로 임명하여 갖은 곤욕을 치르게 하였지만 결국 살해하지는 않았다. 이 일만 보아도 장금의 세도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두려워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15. 경복궁 중건과 원납전의 폐단
경복관은 조선왕조 중엽에 여러 차례 화재를 당했으나 임진왜란 때 왜병이 소각한 이후 중수하지 못하여 주춧돌만 남아 있었다. 이에 고종이 을축년(1865)에 중건하기 시작하여 수년 후 그 공정을 마치고 정묘년(1867)에 그곳으로 이어하였다. 경복궁의 그 경관은 일찍이 우리 동방에서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하였다.
경복궁의 사역을 시작할 때 재정이 궁색하여 일에 집중할 수 없었으므로 팔도의 부호들에게 금전을 부과하여 거두어들이자 파산자가 속출하였다. 그때 행회정부의 지시와 명령을 관청의 장이 그 부하들에게 알릴 때 그 시행 방법을 론정하기 위해 마련된 모임. 즉 집행위원회와 같음. 편자주 에서는 이를 원납전백성들이 자원해서 내는 돈. 편자주 이라고 하였지만, 백성들은 입술을 삐죽거리며 「원납」이 아닌 「원납」이라고 하였다
이때 백방으로 금전을 징수하여 서울에는 문세전이란 것이라는 것이 있었고, 지방에서는 장정의 수를 계산하여 징수한 일이 있어 백성들은 이를 불알전(신낭전)이라고 하였다. 또한 전답을 조사하여 징수한 것을 수용전이라 하고, 민가에서 사용한 솥, 보습, 가래 등의 부서진 것을 수집하기도 하였는데 집집마다 상하의 등급을 매겨 그 근수을 정하였다.
철종 말기에 채권자와 장리부정한 재물을 탐하는 관리. 편자주 들이 착취를 일삼아 권문세가에 아첨하였으므로 백성들은 생활을 이어갈 수 없게 되어 결국 임술년(1862)에 민란를 일으켰다. 대원군은 그 폐단을 규명하여 아무리 친한 사람이라도 그 사람이 장물에 관계되면 조금도 용서하지 않아 탐욕을 부리는 관리들이 조금 줄어들었다.
16. 만동묘의 폐지
만동묘위정척사의 정신이 드높은 우암송시렬은 중국의 도통이 우리나라로 전래되었다는 뜻으로 만절필동의 뜻을 되새겨 숙종 43년에 이 사우를 창건한 후 명나라 신종의 위패를 모셨음. 편자주 는 청주 화양동에 있는데, 이 묘를 창건한 것은 송시렬의 뜻에 의한 것이므로 그 옆에 우암사가 있다. 이것을 세칭 화양동서원이라 한다. 그리고 그 원임들은 모두 호중충청남도와 충청북도를 두루 이르는 말. 편자주 의 무단자제로서 묵패로 평민들을 붙잡아 껍질을 벗기고 뼈를 빻아 남쪽 지방의 좀(두)이 된 지 100년이 되었고, 또 수령들도 그 성사성호사서(성호사서)의 략어. 즉 임금 옆에 있는 간신. 편자주 를 두려워하여 감히 힐책할 수 없었다.
그리고 대원군도 어렸을 때 화양동 서원을 갔다가 원유에게 모욕을 당하여 늘 한을 품고 있었는데, 그가 정권을 잡은 후 그 원유를 잡아죽이고 그 서원도 폐지하였다. 그러나 그는 편협하다는 말을 들을까 걱정하여 국중의 서원과 사자, 묘 등을 모두 철폐하고 남긴 것은 48개소에 불과하였다. 그것은 모두 승무명현학덕이 높아 문묘에 합사한 현인 편자주 과 국가에 공훈이 있는 사람의 사우였다.
만동묘를 철폐한 후 그 황묘위판을 북원의 대보단명나라 태조, 신종, 의종을 제사하던 단. 1704년(숙종 30) 12월 창덕궁 금원 옆에 설치하였음. 편자주 에 이봉하여 드디어 화양동서원은 폐지되었다.
서원을 창설할 때에는 매우 좋은 뜻으로 시작하였지만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날로 폐단이 심하였다. <심경>송의 진서산이 지음. 편자주 이나 <근사록>송의 주자와 그의 제자인 려조겸이 지은 책. 편자주 등을 읽어 수양을 쌓은 사람들도 지방에서 변란이 발하면 창을 메고 군대를 갔었는데, 그 자손들은 쌀 100석만 쌓아 두면 교활한 마음이 생겨 훌륭한 집에 단청을 하고 쇠고기도 낭자하였다.
모든 일이 극에 달하면 변화가 생기는 것은 자명한 이치이다. 그러므로 서원철폐령이 내린 것을 어찌 막을 수 있겠는가? 그 일이 대원군으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해서 모두 비방할 일은 아니다. 이때 백성들의 관습은 이 비상한 변란을 당하면 서원을 의지하며 살았었다. 이때 그들은 유생들이 하루아침에 의지할 곳을 잃어 미친 듯이 부르짖으며 줄을 이어 복합국가에 무슨 일이 있을 때 유생들이 상소하기 위해 대궐문 앞에 부복하는 일. 편자주 하였으므로 식자들은 그들을 비웃었다.
17. 남연군의 묘지
남연군구흥선군의 아버지. 시는 충정. 편자주 의 아들 4명 중 흥선군은 그 끝이었다. 남연군이 작고할 때 흥선군의 나이는 18세였다.
그가 지사를 따라 덕산의 대덕사에 도착하자 지사는 한 고탑을 가리키며 “저곳은 큰 길지라 그 귀함을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흥선군은 즉시 집으로 돌아가 그의 재산을 모두 팔아 현금 2만냥을 마련한 후, 그 절반을 대덕사의 주지에게 주어 절을 소각하도록 하였다. 이에 그 절이 모두 타버리자 흥선군은 상여를 뫼시고 가서 재를 쓸고 그곳에 머물렀다.
한밤중에 그의 형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제각기 꿈 이야기를 하였다. 흰옷을 입은 노인이 나타나 꾸짖기를, “나는 탑신인데 너희들이 어찌 나의 사는 곳을 앗아가느냐? 만일 이곳에 장사를 하면 우제가 끝나기 전에 너회 4형제가 폭사할 것이니 속히 가거라” 하고 말했다는 것이다. 이상하게도 3형제의 꿈이 모두 동일하였다.
이 말을 들은 흥선군은 분통을 터뜨리며 “과연 그렇다면 참으로 길지입니다. 운명이란 주관한 자가 따로 있는 것이니 신이 어찌 해를 끼치겠습니까? 그리고 종실이 날로 몰락하여 우리 형제들이 옷자락을 끌고 날마다 장금의 문전을 찾아다니며 구차히 사느니보다, 차라리 죽는 것이 쾌하지 않겠습니까? 형님들은 모두 자식이 있지만 혈육 하나도 두지 못한 것은 저 혼자뿐이니 죽어도 아무 두려움이 없습니다. 형님들은 아무 말씀 마시고 계십시오”라고 하였다.
그가 이른 아침에 탑을 무너뜨리고 보니 탑터가 모두 암석으로 되어 있었다. 도끼로 팠지만 도끼도 튀기만 하여, 그는 도끼를 어깨에 메고 공중을 향하여 크게 꾸짖었다. 그런 후 다시 도끼질을 하자 다시 튀지 않고 암석이 잘 파졌다. 이렇게 하여 하관을 한 후 혹 훗날 누가 옮길까 염려되어 수만 근의 철을 녹여 지어 붓고 그 위에 사토를 하였다.
그리고 그는 스님을 데리고 경성으로 가던 중 수원의 대포진을 건널 무럽, 배에 탔던 스님이 갑자기 고함을 치며 불을 끄라고 말한 후 머리를 움켜쥐고 불에 탄 모습을 하더니 잠시 후 물에 뛰어들어 죽었다. 많은 사람들은 그 남정군의 묘가 복치형이라고 하였다. 그 일이 있은 후 14년 만에 고종이 탄생하였다.
18. 보덕사 창건
갑자년(1864) 이후 나라에서는 국비를 들여 대덕산에 절을 짓고 이름을 보덕사라고 하였다. 토목에 금을 칠하여 극히 웅장하고 화려하게 하였다. 그리고 논밭도 하사하고 보화도 후하게 주었다
병인년(1866) 겨울에 양인들이 강화에서 도주할 때 사교에 빠진 우리 백성들은 그들을 덕산으로 인도하여 그 묘를 파헤치려고 하였지만 너무 단단하여 파지 못하고, 다만 그 묘에 불만 지르고 달아났었다. 이때 대원군은 리건창에게 장례치른 일을 말하면서 “탑을 헐고 보니 그 속에 백자 2개, 다병 2개, 사리 3개가 있었는데 그 사리는 작은 머리만하여 빛이 매우 밝고 물에 담그면 물을 빨아들이고 물을 꿰뚫은 그 청기는 실오라기만한 연기같았다”고 하였다.
19. 대원군의 문벌
대원군은 자신의 호를 석파라고 하였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완당금정희1786~1856. 조선 말기의 서예가 및 금석학자로 대사성, 참판 등 요직을 거쳤음. 편자주 에게 서화를 배워 난초를 잘 그렸으므로 일시 「석파란」이 세상에 유행하여, 그가 보정중국 북부의 지명. 청나라가 흥선대원군을 납치, 구금한 곳임. 편자주 에 구금되어 있을 때 중국 사람들도 많이 구입해 갔었다.
그리고 고종은 흥선 대원군의 차남으로 대통을 이어받고, 장자 재면의 자는 무경으로 철종 말에 급제하여 대교 벼슬을 지냈으며 두 딸을 두어 장녀는 조경호, 차녀는 조정구1862~1926. 대원군의 둘째 사위. 궁내부대거으로 재직중 경술국치를 당하여 일본이 준 남작을 거절하고 중국으로 망명하였다가 귀국함. 편자주 에게 출가하였다. 서자 재선은 무과에 급제하여 별군직으로 있다가 신사년(1881) 겨을 안기영 등의 옥사에 연루되어 사사되었고, 서녀는 리윤용에게 출가하였다.
20. 대원군의 음행
대원군의 부인 민씨는 치구의 따님으로 금슬이 매우 좋았다. 그는 갑자년(1864) 이후 종종 경재들의 명부봉호를 받은 부인의 칭호. 편자주 및 사대부가의 과부들을 초대하여 놀면서 대원군으로 하여금 그들을 엿보게 하여 어여쁜 여자를 골라 음행을 자행하도록 하였고, 그들 중 후안무치한 여자는 뻔뻔스레 귀가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리고 혹 그로 인하여 아부한 여자에게는 그의 남편과 자식에게 벼슬을 주기도 하였으므로 조야는 모두 그들을 주목하고 있었다.
21. 당백전 주조와 청전 사용
경복궁을 중수할 때 원납전이 부족하여 병인년(1866) 봄에 다시 당백대전고종 3년(1866)에 발행하여 이듬해(1867)에 폐지함. 주화로 엽전 백 푼의 가치가 있었음. 편자주 을 주조하자, 물가가 앙등하고 도주자도 많이 발생하여 이들을 처벌하였으나 도주를 금지할 수 없었으므로 그 후 얼마 안되어 폐지하였다.
그리고 정묘년(1867)에는 청국의 소전을 사용하여, 비록 도주자는 없었지만 물가가 다시 뛰어올라 그로부터 4~5년 후인 갑술년(1874) 정월에는 사용하지 않았다. 그 소전이 사용될 때 영남과 관북 지방은 사용하지 않았다.
22. 천주교도 학살
천주교가 우리 동방으로 전래된 것은 정종조였다. 그 후 여러 차례 배척을 하였지만 그 관습을 끊을 수 없어 갑자년(1864) 초에 전승지남종삼1817-1866. 천주교의 공인을 받기 위해 대원군과 면담까지 하였으나, 1866년 병인박해로 인해 처형되었음. 편자주 , 진사 홍봉주? -1866. 1855년 상해로 가서 베르누를 데리고 와 전도에 힘쓰다가 병인박해 때 서소문 형장에서 처형되었음. 편자주 및 프랑스인 장경일(베르누 : Henri de Bellonet 신부) 등을 처형하였다.
종삼은 승지인 상교의 아들이며 북인의 명문이었다. 이 부자는 모두 문장으로 이름을 떨치었다. 종삼의 진술에 따르면, “두세 번 서양을 가서 관원이 되었는데 그 계급은 우리나라의 이조판서에 해당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봉주는 베르누를 불러 그의 사위로 맞이하였으며 그의 가산을 적몰할 때 양침이 두어 궤짝이나 나왔다.
상교는 공주 감옥에서 수척한 모습으로 사망하였다. 이때 그 사당을 수색하여 그들의 뿌리를 추적하면서 잡히기만 하면 모두 사형에 처하였다. 이렇게 처형된 사람이 전후 2만명이나 된다고 한다.
23. 도모지의 어원
근세의 방언에 「도모지」라는 세 글자가 있다. 말의 첫머리에 폐일언이란 말과 같은 것이다. 이를테면, 모씨가 누구인지 아느냐고 물으면 모른다고 할 때 「물론」이란 단어를 붙이는 것과 같은 것이다.
대원군이 집권하고 있을 때 살육을 감행하여 사학, 도주 이외에도 비방, 주오, 라직죄인 이외의 무고한 사람에게 죄를 씌워 체포하는 것. 편자주 등으로 처형된 사람이 1천여 명이나 되었다. 포도청의 형졸들도 살인하기에 염증을 느껴, 연좌된 죄인에게 백지 한 장을 죄수의 얼굴에 붙이고 물을 뿌리면 죄수의 숨이 막혀 순식간에 죽곤 하였다. 이를 해석한 사람의 말을 들으면, ‘도모지’라고 한 것은 ‘도모지’라는 것이다.
24. 이경하의 살인만행
리경하신정왕후의 인척으로 공조, 형조판서를 지냈으며, 임오군란 때 책임을 지고 고금도로 유배되었다. 그는 군사, 경찰권을 장악하고 있었으므로 락동염라라는 별명이 있었다. 편자주 가 대원군의 심부름을 가장 많이 하였다. 그는 대장과 포도대장을 겸직하고 있으면서 거의 빈 날이 없이 살인을 하였다.
대원군은 말하기를, “이경하는 다른 장점은 없고 오직 사람을 잘 살해하기 때문에 기용한 것이다”라고 하였고 어떤 사람들은, “경하가 많은 인명을 살해하는 것이 아니라 사학도와 도주자들이 처형을 당한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상(1894년 이전) ②
1. 해인사 대장경 간행
산인산에서 사는 사람 즉 은둔생활을 하는 사람을 말함. 편자주 만인이 일찍 고종이 잠저에 있을 때 찾아와서 두 번 절을 올린 뒤, ”후일에 중흥주가 될 것입니다”라고 축하를 하였다.
갑자년(1864) 초에 대원군은 만인을 찾아 헤매다가 그를 만나서 하고 싶은 일을 묻자, 그는 “산에서 사는 사람이 어찌 하고 싶은 일이 있겠습니까만 한 가지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면 해인사의 대장경 1천부만 하사하여 주시면 소원이 없겠습니다”라고 하므로 드디어 간행을 단행하였다. 이때 인은 자신이 직접 가서 간행을 하고 그 간역이 끝난 후에 해로로 떠나 어디론지 가버렸다.
해인사의 경판각은 옛날부터 새들도 똥을 싸지 않아 매우 신령함을 보였는데, 인이 떠난 후에는 그렇지 않았으므로 호사자들은 그 경판 가운데 신부가 있었으나 인이 그것을 절취해 갔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하였고, 어떤 사람들은 대원군이 어렸을 때 어느 술사에게 앞으로 무슨 환난이 없겠느냐고 묻자, 그는 “만명을 살해해야 합니다”라고 하였으므로, 그가 뜻을 얻은 후 기어이 1만명을 채우려 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는 「만인」이 「만인」인 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대원군은 인으로부터 화를 당한 일은 없었다. 이것은 모두 항간의 와전으로, 다만 그때 이 말이 요란하게 전파됐을 뿐이다.
2. 병인양요
병인년(1866) 9월에 프랑스의 군함이 강화에 정박하고 있었다. 그것은 순찰하기 위한 군함이며 침략할 뜻은 없었다. 혹자는 베르누 등이 사형을 당하고 서양의 사학을 엄히 금하기 때문에 보복하러 온 것이라고 하였다.
이때 류수리인기가 겁을 먹고 도주하여 성이 함락되었다. 양인들은 10일 동안 점거하고 있다가 많은 물품을 약탈해 갔다. 우리 나라에서는 강화도를 천애의 요새으로 생각하여 군량, 무기, 보화 등을 많이 비축하였으나 이때 모두 없어진 것이다.
그리고 순무사리경하와 중군리원희 등은 도감의 병졸 5천여 명을 인솔하고 문수산으로 나가 강화도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감히 강을 건너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천총량헌수가 추격전을 벌이자고 간청하였으나 원희는 명령을 어겼다고 처형하려 하였다. 헌수는 “죽기는 마찬가지니 차라리 적에게 죽겠습니다. 1개 병대만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원희는 할 수 없이 포수 300명을 주었다. 헌수는 그날 밤 손석포를 건너 정족산성을 점거하였다.
그 다음날 양인들은 강화부에서 나와 군함을 타고 내려오려 하였으나, 조수가 얕아 산성에서 조금 쉬기 위해 서서히 남문 밖에 도착하였다. 이때 갑자기 복병이 일어나자 적들은 황급히 후퇴하므로 그들을 대포로 추격하여 30여 명의 목을 베고 개선하였다. 이때 헌수를 황해병사로 임명하고 1년 후에는 대장으로 발탁하였다. 이 소란이 있은 후 사학을 금지하기 위해 척사윤음을 반포하였다.
3. 이시원의 순절
판서리시원1790~1866. 호는 사계. 홍문관, 예문관의 제학 및 이조판서 등을 역임하고 영의정에 추증됨. 편자주 은 덕천군의 후예로서 중간에 신임사화1721~2년(경종 1~2년)에 걸쳐 노론 리이명, 금창집, 조태채 등과 소론 류봉휘, 금일경 등이 빛어낸 사화. 편자주 로 파직되어 강화도 사곡에서 은거하고 있었다. 그는 순조 때 등과를 하였는데 성품이 청직하여 늘 순국할 뜻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서양도적들이 강화성을 점거할 때 개연히 강만리강화성 도종조의 좌승상으로 원군의 침략을 받자 물에 투신하여 자결하였음. 편자주 의 고사를 따라 그의 중제인 전군수지원과 함께 독약을 먹고 자결하였다. 나이는 77세였다.
그의 유소가 조정으로 올려지자 조정에서는 그를 애도하여 충정이란 시호를 내리고, 정경을 보내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이때 사람들은 그가 용기를 상한 것이라고 간혹 비꼬았다.
그 후 판서인 손자 건창이 사신이 되어 강화성을 들어가서 황시랑 옥과 놀 때 옥은 건창의 송서를 지었는데 그는 그의 선고의 덕을 일컬어, “죽어야 할 이유가 없는 곳에 살면서 배웠던 마음을 저버리지 않았다”고 기술하자 세상 사람들은 참으로 실록답다고 하였다.
4. 정묘년의 진사람취
옛날 진사의 수는 200명을 선발하였으나 고종 정묘년(1867)에는 특지를 내려, 낙제한 사람 가운데 고종과 나이가 같은 몇 사람을 더 뽑아 그 명단을 방목 끝에다가 붙였다. 또 시험장에 있는 종친은 친소를 막론하고 은전을 베풀었으므로 과거시험이 문란해졌다.
5. 청직의 조학
우리나라 풍속에 손님을 맞는 종을 청직이라고 한다. 대원군은 이 청지기를 모두 호탕하고 사나운 자들만 뽑아, 손님이 오면 그들로 하여금 조롱과 해학을 하게 하였으므로 찾아온 경재들이 종종 모욕을 당하였다.
6. 대원군의 인재기용
대원군은 인재를 기용할 때 준걸스럽고 말 잘하는 사람을 취하였다. 그는 기세를 부리거나 큰소리치는 사람은 쓸 만하다 하고, 로성한 선비들은 모두 싫어하였다. 그러므로 술이나 마시고 도박이나 하는 무뢰배들이 백방으로 출세를 꾀하였고, 상투를 아름답게 튼 사람과 장구를 잘 치는 사람과 해학을 잘하는 사람들이 좋은 관직을 많이 차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술사를 좋아하여 점치는 사람들이 그의 좌우를 떠나지 않았다.
병인년(1866) 이후에는 간혹 대과를 마련하여 종친들만 과거를 보게 하고 이를 종친과로 칭하였다. <대동보>를 간행하여 강화성 리씨라면 누구나 모여들었다. 한번 그 대동보에 기재되면 사족으로 칭하였으므로 향곡의 천류들도 관향을 바꾸어 그 <대동보>에 든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그리고 대원군은 일찍 종친부에서 화수회를 마련한 일이 있었는데, 이때 참여한 사람이 6만-7만명이나 되자 그는 기뻐하며, “우리는 국가를 위하여 정병 10만명은 얻을 수 있겠다”고 하였다. 그 후 무진년(1868)에 대종회를 열고 종친 문무과를 설치하였다.
7. 리최응과 상인
흥인군최응은 대원군의 둘째형으로, 그 아우가 방자한 것을 보고 매우 비난하였다.
그는 당백전을 사용할 때 언제나 부엌 일을 보는 사람들이 고기와 채소를 사면, 그 상인을 불러 수전의 돈과 물품을 교환하면서 “어찌 돈 한 푼이 백 푼을 당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한 푼만 사용하십시오”라고 하므로 후한 이익을 얻은 사람들이 매우 많았다.
8. 신정왕후의 전지
철종이 승하할 때 신정왕후가 왕대비전의 권한으로 군국사무를 처리하면서 고종의 영입을 의논하였다. 그때 원상왕이 승하한 후 26일 동안 대소 정무를 처리하던 승정원의 임시벼슬. 편자주 조두순은 전지를 쓰면서 「흥선군제이자모입승철종대왕대통」으로 쓰자고 주장하자, 신정왕후는 소리를 높여 「입승익종대왕대통」으로 쓰라고 하므로 두순은 그의 뜻을 감히 어길 수 없었다.
그것은 철종을 계승한다고 하면 대비 김씨가 수렴청정을 하는 것이 되고, 익종을 계승한다고 하면 자기가 수렴청정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이를테면, 철종을 영입할 때 익종의 대통을 계승한다고 쓰는 것이 당연한 일이지만 순원왕후는 자신이 조정에 임하기 위해 전지를 쓸 때 순조대왕의 대통을 계승한다고 쓰라고 명하였으므로 신정왕후는 이 예를 따른 것이다.
9. 강화도진무영 설치
병인년(1866) 이후 양인의 소란을 징계하기 위하여 강화에 진무영을 설치하고 경내의 포수 3천명을 뽑아 류수로 하여금 그들을 관장하게 하고, 또 삼남지방에 전세를 부과하여 이를 포량미라고 하였다. 그 세미는 수만 석이나 되어 관리들이 농간을 부리므로 삼남민들은 이중으로 고통을 받았다.
10. 외등단
통제사의 자계를 한층 더 높여 이를 외등단이라고 하였다. 이는 총융사의 예를 따른 것이다. 갑술년(1874) 이후에 폐지하였다.
11. 백낙서의 처형
백악서는 전주의 아전이었다. 대원군이 전주에 갔다가 배가 매우 고프던 중 낙서의 후한 대접을 받은 일이 있었다.
갑자년(1864) 이후 그는 대원군의 총애를 믿고 흉폭한 일을 많이 하여 그 해독이 전라도 전체에 미치게 되었다. 이 일로 인해, 갑술년(1874) 초에 엄세영이 전라우도의 어사가 되었을 때 민승호의 지시를 받아 백낙서를 처형하였다. 이때 남천의 석교가 무너지자 백낙서의 재산을 몰수하여 교량 보수비로 충당하였다.
12. 남촌과 북촌
남인 최우형은 잇달아 청직에 발탁되어 리조판서, 홍문관제학, 봉군 등의 요직을 거쳐 충훈부까지 관장하고 있었다. 그는 일찍 수레를 타고 북촌에 도착하여 부채로 코를 가리며, “로론의 냄새가 어찌 이리 고약한가?”라고 하였다.
서울의 대로인 종각 이북을 북촌이라고 하는데 이곳은 노론들이 살았다. 그 남쪽은 남촌이라 하는데 소론 이하 삼색당이 살고 있었다.
13. 대원군의 파초선
대신이 출입할 때 한 사람이 파초선을 들고 앞을 인도하는 것은 옛날부터 있었던 일이다. 그러나 대원군은 쌍선을 사용하였다. 그 부채 모양은 대단선처럼 둥글고도 길며 대로 자루를 꿰매고 파초색으로 물을 들였다.
14. 대원군의 가묘
공덕리의 천변은 동진의 하류로 산맥이 수려하고 마을이 즐비하게 널려 있었는데, 대원군은 이곳 민가를 철거하고 가묘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 속에 당을 지어 광을 가리고 이를 아소당이라 하고 그 광을 우소처라고 하여, 신억에게 당기를 지으라고 명하였다.
15. 나장과 복장
신대장 관호는 고종조에서 헌으로 개명하였다. 그는 서예에 능하고 문사도 잘하여 유장으로 유명하였으며, 성품도 매우 관후하였다. 그의 아들들도 재주가 영민하였는데, 가문이 훌륭하기 때문에 복장으로 추대되기도 하였다. 그는 일찍 대원군에게 지우를 받아 여러 차례 대장이 되었다. 강화의 손석포에서 갑관진까지의 요해처마다 돈대와 포대가 설치되어 수십 리를 뻗어 있는 것은 모두 헌이 류수로 있을 때 만든 것이다
일시의 무재였던 채동건, 정기원, 금영 등은 모두 대원군에게 기용되었는데, 동건과 영은 지혜가 있었고 기원은 청렴과 근신으로 유명하다. 또 리경하와 금건은 용맹으로 저명하였지만, 오직 신헌은 풍류와 유사의 풍도가 있는 데다가 관리로서의 재능도 있었다.
16. 신미양요와 어재연의 순절
신미년(1871) 여름에 미국인이 강화도를 침범하자 전병사어재연이 순무중군으로 임명되어, 그들을 방어하다가 전사하였다.
재연은 금위려단을 인솔하고 광성보로 들어가서 배수진을 치고 척후병도 두지 않았다. 적병들은 안개가 자욱이 낀 틈을 타서 광성보를 넘어 엄습하였다. 재연은 분연히 칼을 들고 싸우다가 칼이 부러지자 납으로 된 탄환을 쥐고 적들을 향해 던졌다. 그 탄환에 맞기만 하면 적들은 즉사하였다. 그가 가지고 있던 탄환이 다 떨어지자 적들은 그를 창으로 난자하였지만, 그는 반 발자국도 옮기지 않고 죽었다. 적들은 그의 머리를 베어 갔다.
재연이 이미 전사하였으나 적들은 수비가 되어 있는 줄 알고 모두 도주하였다. 이 패전 소식이 전해지자 조야는 온통 진동하였다. 그에게는 병조판서가 증직되고 충장의 시호가 내려졌다. 그의 시신이 돌아오자 대원군은 조정에서 제창하기를, “어병사의 상여를 맞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모두 천주교인이다”라고 하였다. 이로 인하여 온 조정이 출영하여 수레와 말이 수십 리나 줄을 이었다. 이때 노인들은 순조 계유년(1813)에 충장공 정시의 장례를 치른 이후 처음 있는 일이라고 하였다.
재연의 아우 재순도 백의종군하여 형과 함께 전사하였으므로 그에게도 리조참의를 증직하였다.
17. 영해의 민란
기사년(1869) 봄에 토구가 광양을 함락하였으나 현감윤영신에게 생포되고, 신미년(1871) 봄에는 녕해의 백성들이 난을 일으켜 부사리정이 달아나다가 죽었다. 민심은 극도로 동요되어 난리가 일어나기를 바라는 사람이 많았다.
영신은 무식한 사람이지만 본래 호탕한 성품을 타고나 대원군에게 곱게 보였는데, 이때의 공로가 인정되어 통정에 오르고, 정은 문정공리재1680~1746. 호는 도암. 금창협의 문인. 예조참판을 지냄. 편자주 의 후예로 그의 인척들이 귀성한 데다가 그도 순절을 하였으므로 관직과 시호를 증직받고, 그의 자손들도 록용되었다.
18. 정원용의 아부
정원용의 자는 선지이며 호는 경산으로, 양파정태화1602-1673. 영의정을 지냄. 시호는 충익(충익). 편자주 의 후손이다.
그는 순조 초에 등과하고 일찍 금조순에게 발탁되어 영의정까지 이르렀으며, 90세에 사망하였다. 그리고 전후 수십 년 동안 삼공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을 함께 일컫는 말. 편자주 을 거치면서 조정의 일을 다 익혀 노숙하고 정중하므로 조야가 모두 촉망하였다. 다만 권문에 아부하여 적당한 자세를 취하므로 세상에서는 그를 호광후한 안제 때의 태부(태부)로 30여 년 동안 륙제를 섬겼음. 편자주 에게 비하였다.
19. 정원용의 회방과 회혼
정원용은 대소과의 회방과거에 급제한 지 60돌을 말함. 편자주 을 모두 맞이하였고 또 회혼결혼한 지 60년이 됨을 말함. 편자주 까지 치렀다. 그의 아들 3형제 중 장남 기세는 정경이 되고, 손자인 범조는 참판을 지냈다. 이것은 모두 그의 생전에 있었던 일이다. 그는 복록을 다 갖춘 사람으로서 수와 강녕도 근세에서는 비교할 사람이 없었다.
고종이 혼례를 치를 때 다복한 사람을 례사로 택하여 폐백함을 지게 하였는데 정원용이 그 일에 뽑혔다.
20. 대원군의 자식관
대원군은 “아들을 낳으려면 금병기처럼 웅특한 아들을 낳고, 그렇지 않으면 홍원식 형제처럼 단아하고 준수한 아들을 낳아야 한다”는 말을 하였다.
원식은 남인으로 그의 아우 건식과 함께 대과에 급제하였는데, 대원군은 그를 가장 사랑하였다.
21. 금병기의 애국심
병인양요 때 금병기는 려주에 있었다. 서울이 소란하여 피난민이 사방에 가득 찼다는 말을 들은 그는 가족에게 말하기를, “우리는 대대로 국은을 받고 살아왔으므로 사직과 함께 존망을 같이해야 하니 너희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였다. 그런 다음, 그날 즉시 그가 가족을 데리고 입경하자 이 소문을 들은 대원군은 매우 낙심하였다.
22. 잠영록의 「선」자 표시
서울에서 관리생활을 하던 시골 사람들은 양요로 인하여 모두 도망하였다. 이에 대원군은 그들을 염탐하여 잠영록관리들의 명단기록부. 편자주 을 만들고 그들의 성명 옆에 「선」 자를 써 놓았다. 그것은 사망했다는 뜻을 표시한 것이다. 대원군은 양요가 평정된 후에 그들은 기용하지 않았다.
23. 이항노와 기정진
광해조 때 리이첨이 용사하여 정인홍을 삼공의 서열에 두고, 큰일이 있으면 언제나 서로 화응하여 유현의 여론을 빙자하면서 자기들의 사욕을 이행하였다. 이로부터 당국자들도 덩달아 그들을 본받으므로 조정의 판세는 하루아침에 변하여, 산림처사 한 사람을 추대할 때 반드시 령수로 칭하고 비록 어질고 간사한 것이 다르더라도 산림처사라는 구실을 붙이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대원군은 이를 부끄럽게 생각하였으므로 대원군 때에는 이런 일이 없었다.
이때 벽계리항로와 로사기정진은 양요로 인하여 천주교를 배척하자고 항의하였다. 벽계는 더욱 강력히 주장하였으므로 이때 사람들은 그를 100년 이래 제일가는 명소라고 하였다. 이항로와 기정진은 모두 아경참판의 별칭. 편자주 으로 발탁되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의 학술과 문장은 많은 사람을 압도하였다. 그들의 입신 처세도 본말이 있기 때문에 지난날 관직을 출세길로 삼아 권문세가에게 머리를 굽힌 사람과는 완연히 달랐다.
24. 군역의 폐단
군역에 뽑힌 장정들에게 군포를 받아들였으므로 그 폐단이 많아 백성들이 뼈를 깎는 원한을 갖고 있었다. 사족들은 한평생 한가하게 놀며 신역이 없었으므로 과거의 명신들도 이에 대한 여론이 있었다. 그러나 류속에 끌려 결국 이행되지 못하고 있다가 갑자년(1864) 초에 대원군은 강력히 중원을 책임지고, 귀천이 동일하게 장정 한 사람마다 세납전 2꾸러미를 바치게 하여, 이를 동포전이라고 칭하였다.
25. 동포와 와환
환곡정부 소유 양곡을 춘궁기에 백성에게 대여하여 추수 후에 일정한 이자와 함께 회수하는 환상곡. 편자주 의 수납과 방출에 대한 폐단은 이미 오래 전부터 발생하여 백성들이 거의 죽을 지경에 놓였다. 그러나 아무도 구제한 사람이 없었고, 동포를 시행한 후 개혁하자는 여론이 높았다. 그리고 환곡 대신 돈을 징수하여 환곡 10말당 돈 3꾸러미를 받되 수납과 방출은 양곡을 주고받을 때와 같이 하여 그 고을 비용으로 충당하고, 이를 와환이라고 하였다.
동포와 와환을 시행한 후 백성들의 어깨가 좀 가벼워졌으나, 일부 여론 중 혹자는 그 신역이 사족에게까지 미쳐 천인과 다름없음을 비방하였다. 명분이 날로 문란해진 것은 동포가 원인이 되었다고 한다.
26. 8도의 사창설치
정묘년(1867) 가을에 팔도에다 사창춘궁기에 빈민을 구제하기 위하여 설치한 미곡창고. 편자주 을 설치하였다. 그 법은 관청에서 집집마다 돈 2꾸러미를 주어 그것을 밑천으로 삼고 백성에게 쌀 10말을 받아 내는 것이었다. 그것을 마을에 저축하여 백성들이 관리토록 하고 아전의 손에 돌아가지 않도록 하였다.
그리고 그 쌀을 춘궁기에 대출하고 추수 후에 수납토록 하여 환곡을 받는 예와 같이 하였다. 이때 준 돈은 당백전이었다. 이를 쌀값으로 계산하면 2푼에 해당된다. 처음엔 백성들이 매우 원망을 하였지만 수년이 지난 후에는 량법으로 인식되었다.
대원군이 내놓은 제도는 매우 많았지만 이 세 가지가 가장 좋은 것이었다.
27. 난후청 설치
부, 주, 군, 현에서 인재를 뽑아 관청에 예속시키고 이를 란후군군대의 행진에서 대열의 뒤끝을 경비하는 군대. 편자주 이라 하였다. 각도의 감영에서는 난후청을 신설하여 별장을 두고 이를 관찰사에게 귀속시켰다.
28. 토목공사의 확대
경복궁을 준공한 후 다시 토목공사를 일으켜 서울에 있는 각 관청은 일신되었다. 관리들도 바람을 일으켜 서로 신축공사를 벌였으며 외진 시골에서도 성곽, 정, 대 등이 훤칠하게 꾸며져 빛을 발하였다.
그리고 해마다 무기를 점검하여 극히 예리하게 하였으나 대원군이 실각한 지 10년도 못되어 선혜청정부의 양곡, 목재 등을 관리하던 관청. 편자주 의 담장이 무너졌다. 동비가 일어났을 때 주현의 무기고를 열어 보았지만 무기가 모두 녹이 슬어 사용할 수 없었다.
29. 일본의 대한정책 변화
무진년(1868)에 일본이 서양의 영향을 받아 관백일본 천황을 보좌하여 정사를 집행하는 중직. 편자주 을 폐지하고 정치를 일신시켜, 우리나라와 다시 화약을 체결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모든 일이 초창기였기 때문에 먼 곳까지 정략을 펼 수 없었다. 다만 군량을 받지 않고 이를 핑계로 트집을 잡아 공관의 관원들을 조금씩 인솔하고 귀국하였지만, 우리 조정에서는 그들의 정상을 예측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동래부사정현덕과 경상감사금세호가 7년이 되도록 자리를 옮기지 않고 있으므로, 그 두 사람의 재주를 빌리면 반드시 일본의 정상을 판단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세호는 얌전한 문관이고, 현덕은 3년 동안 성을 쌓으면서 많은 살인으로 위엄을 부려 민심을 크게 잃은 상태였다. 이에 식자들은 매우 근심을 하며, “만일 이때 사정을 엿볼 수 있는 사람을 보빙사답례로 외국을 방문한 사신. 편자주 로 임명하여 그들의 음모에 대비하였다면 반드시 훗날 분열이 생기지는 않았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30. 통역관안동준의 처형
통역관안동준은 일본공관의 훈도로 10년 동안 초량에 있으면서 한없이 재리를 탐하여 변민에게 원망을 사게 되어 나라에서 무슨 일이 생길 징조가 있었는데, 갑술년(1874)에 그는 처형되었다.
31. 척양비
경오(1870), 신미(1871) 양년 사이에 각 지방에 모두 척양비를 세우도록 하였다. 그 비문은 「양이래침비전칙화주화매국이계아만년자손」이라고 하였다.
32. 원자 사망과 마행일, 정현덕
신미년(1871) 4월에 원자가 탄생하였다가 곧 사망하였다.
마행일은 경성의 소교로 집안을 일으켜 경성부사에까지 이르고, 일곱 번이나 관북의 주군을 맡기도 하였다. 대원군은 그를 매우 의지하여 “북에는 마행일이 있고 남에는 정현덕이 있으니 내가 걱정이 없다”고 하였다.
33. 대원군의 민심 수습
대원군이 집권 초에, 민심을 위로하고 당시의 여망을 수습하고자 신임사화와 시벽량파영조 38년(1762)에 사도세자를 동정한 홍봉환 등을 시파라 하고, 영조를 동정한 금구주 등의 일파를 벽파라고 함. 편자주 의 공방이 있은 이후 단서왕이 공신에게 붉은 글씨로 그 공적을 써준 표. 편자주 에 기록된 여러 임금 때의 죄인을 모두 사면하여 복직을 시키고 그들의 자손들도 관직에 임용하였다. 이에 침환지와 리서구 등의 죄인이 차례로 복권되었고, 복권하지 않을 사람들도 복권되었다.
34. 이시원의 집안내력
리시원의 호는 사기로, 그의 나이 27세 때 과거에 급제하였다. 그러나 그의 5대조인 진급은 진유, 진검 등과 형제지간으로, 진유와 진검이 폐했을 때 진급의 가족까지도 연루되어 량세가 고폐되었다.
그리고 진급의 손자인 충익은 호가 초원으로, 그는 강화의 초봉 밑에서 살며 벼슬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는 의술과 지리에 능통하고 문장에도 기특한 솜씨를 발휘했으므로 세상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삼절이라고 하였다.
그는 일찍 동둔포에다가 선조의 묘를 쓰고, “우리 자손 중에 반드시 세상에 유명한 사람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고 또 “이곳은 백로가 물로 내려오는 형국이므로 백로가 모여들기만 하면 바람이 날 것이다”라고 하였다. 과연 그의 아들 리면백이 진사시에 합격하여 어떤 사람이 축하를 하자 충익은, “”아직 바람이 나지 않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시원이 과거에 급제하기 2년 전에 백로가 모여들기 시작하자 그는 손가락을 꼽아 보며 “괴상한 일이다. 왜 틀릴까?”라고 하더니, 이시원이 급제하여 왕을 알현했다는 기별이 전해지자 그는 웃음을 지으며 “꼭 이런 일이 있을 줄 알았다”고 하였다. 그 후 얼마 안되어 이충익은 세상을 떠났다
이시원은 명성과 기절로 유명하였으며, 그의 손자 리건창은 문장으로 한 시대를 울리고 또 일찍 관직에서 은퇴하여 세상의 명신이 되었다.
35. 이시원의 강직성
리시원은 성품이 매우 강직하여 사람들과 화목하게 지내지 못한 일이 많았지만 관리로서의 재능이 뛰어났다.
그가 처음으로 태천 군수로 있을 때 선정을 하였고, 춘천으로 부임하였을 때는 국구조선왕조 때, 「왕비의 아버지」를 일컫던 말. 편자주 인 조병구가 그의 경내에서 장례를 치른 일이 있었는데, 도내의 수재들이 뒤질세라 몰려갔으나 이시원은 그곳을 가지 않아 얼마 후 파면되었다.
그는 또 경기도의 암행어사로 있을 때, 그가 서계를 올려 탄핵한 사람들은 참판 이상이 8명이며 그 이하가 10명이나 되었고, 또 풍채도 늠름하여 한때는 「십준팔초」라는 노래가 유행하기도 하였다.
36. 이시원과 정원용
리시원은 정원용이 권문에 아첨하는 것을 질투하여 서로 마음이 맞지 않았으나, 철종 때 정원용은 임금의 마음이 그에게 기운 것을 보고 경연에서 번임변방의 관리. 편자주 을 추천할 때 부질없이 그를 언급한 바 있었는데, 그 후 그는 함경감사로 임명되었다.
37. 철종과 이시원
철종은 천성이 나약하고 온유한 데다가 김씨들에게 견제를 받아 관리 한 사람을 임명할 때도 결정을 내리지 못하였다. 그러나 잠저에 있을 때 리시원과는 한 고을 사람이므로 리승지가 좋은 관리라는 말을 많이 듣고 마음속으로 기억하고 있다가, 등극한 후 언제나 인사발령을 할 때 이시원의 이름이 후보 명단에 있으면 아무리 차석이나 말석에 있더라도 반드시 서열을 초월하여 임명하였다.
한때 개성유수 자리가 공석중에 있자 주상은 어필로 이시원의 이름을 첨서하여 낙점관원을 선임할 때 리조나 병조에서 3명의 후보자 명단을 올리면, 왕이 그중 마땅한 사람의 이름 위에 점을 찍어 뽑는 것임. 편자주 을 하였다. 그는 개성에서 3년 동안 있으면서 자신이 머물고 있는 관아에서 건창을 낳았으므로 그의 아명을 송열이라고 하였다 그것은 개성을 속칭 송도라고 하기 때문이다.
38. 이시원의 돗자리짜기
사기리시원은 어려서부터 왕골 돗자리를 짜서 그것을 팔아 부모의 반찬을 마련하였다. 그는 조정에서 벼슬을 하면서도 퇴근만 하면 집에 돌아와 돗자리를 짰으므로 시민들은 그의 솜씨를 알아보고, “이것은 이승지가 짠 돗자리다”라고 하였다.
상(1894년 이전) ③
1. 이시원의 인재기용
국가의 제도에 따르면 성균관의 진사과는 인, 신, 사, 해에 시험을 치르고, 회시는 자, 오, 묘, 유의 해에만 시험을 치렀다 그리고 매 3년마다 경시관을 시골로 분송하여 향시관으로서의 선비들을 기용하게 하였다. 이 시험에 급제한 사람을 가리켜 초시에 급제하였다고 한다.
삼남과 관서지방에는 좌우소로 나누어, 주시관은 해도에서 각 2명씩 선발하고 관동, 관북, 해서 3도에는 그 도에서 1명씩 선출하였다. 경기도는 서울에서 1~2개소로 나누어 한 개의 도와 서울의 선비들만 시험을 치렀지만 사방에서 모여든 선비들도 모두 청을 들어주어 과거를 치른 사람이 많았으므로, 선발된 인원도 매우 많아 거의 7도에서 선발된 수 중 절반을 차지했다. 그것은 서울만 취급하고 기타 지역은 취급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준 것으로서 그 법률만 조금 느슨하게 한 것이다.
처음으로 법을 시행할 때는 매우 엄격하여 부자가 함께 과거를 볼 수 없었고, 과거를 보려고 한 사람도 증서를 주어 다른 도로 가서 시험을 치를 수 있도록 허락하여 주었다 이것을 월소라고 한다. 이렇게 월소하여 중서가 없는 사람에게는 비록 급제를 하였더라도 삭제하였다. 이것을 발거라고 한다. 그러나 서울에서 시험을 치른 사람은 1소와 2소를 막론하고 증서가 없더라도 아무런 문책을 받지 않았다
순조 중엽만 하더라도 과거법이 해이하지 않아 경시관이 한 시대의 명사들만 선발하였으므로 문장이 훌릉하지 않으면 아무리 문벌이 좋아도 급제할 수 없었다.
이시원은 영남 좌도의 주시관이 되어 명성이 자자했고, 그후 3년 만에 다시 영남 우도의 주시관이 되었다.
대구는 영남 좌도의 관할지역이다. 이 대구에서 급제한 리모란 사람은, 과거를 이시원에 의해 선발된 사람으로 이 해에 우연히 서울을 가게 되었다. 그는 조령에 도착하여 이시원이 우도의 주시관으로 임명되었다는 말을 듣고 다시 우도로 발길을 돌리며, “일찍 이분이 오신 줄 알았다면 어찌 서울을 갈 필요가 있었겠는가? 나는 이번에 또 급제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는 도착한 즉시 수석으로 급제하였다.
수석으로 급제한 사람들은 그 묵권과거시험 답안지. 편자주 을 가시 울타리에 걸어 놓았다 이것을 휘장이라고 한다. 그 휘장의 뒤를 따라오던 리시원은 여러 사람을 향해 고함을 지르며 “이분이 대구리모가 아닙니까? 이분을 내가 선발하였는데 이분이 아니면 이런 글을 지을 수 없을 것입니다. 아마 내가 왔다는 소문을 듣고 오셨을 것입니다. 또 그분은 장원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증서가 없어 범법을 하였으니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부득이 발거를 하더라도 원한을 갖지 마십시오”라고 하자 그 사람은 껑충껑충 뛰며 “세상에는 장원도 있고 발거도 있지만 주시관처럼 신감을 가진 분이 있으니, 나와 같이 오늘 이런 기구한 운명을 당한 사람이야 말할 필요가 있겠습니까?”라고 하면서 눈물을 흘리며 춤을 덩실덩실 추고 떠났다. 영남 사람들은 지금도 그때 이야기를 하며 애석해 하고 있다.
그리고 고종 경진년(1880) 봄에 왕세자의 마마가 쾌유되자 증광경과를 설치하였는데, 서울의 1소와 2소에서 방이 나온 후 물의를 일으켰다. 이에 고종은 매우 노하여 파방을 명하였고 다른 도에서도 방을 파했다.
그 후 다시 과거장을 설치하여 전시관에게 주관하도록 하였는데, 이때 영남 우도의 주시관인 조병필이 친상을 당하여 집으로 돌아가자 리교하를 대리로 내세웠다. 그가 현지에 도착하기 전 리건창이 영남에 온다고 잘못 전해져, 종종 과거를 보던 두메 산골에서 온 늙은 선비 70-80명은 서로 손을 잡고 나오면서 “우리는 강화도에서 이판서가 주시관이 된 것을 보았는데, 지금 온 사람이 이판서의 손자라고 하니 어찌 가 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으나, 알고 보니 그 사람이 아니므로 모두 되돌아갔다.
2. 리건창의 등과
병인양요 이후 강화도에 과거장을 설치하라고 명하였다. 이때 대원군은 고시관에게 부탁하기를, “만일 리건창이 시권을 올리거든 불가불 그를 기용하고 그렇게 하지 않으려면 그만두십시오”라고 하였다. 그때 이건창의 나이는 15세였다. 그의 조부인 리보가 절사하였으므로 그는 늘 비통해 하며 과거시험을 보지 않고 있었으나, 많은 사람들이 권하여 결국 급제하였다.
그는 장성하여서도 늘 한을 품고 있었다. 그가 이미 과거에 급제하였으므로 대원군을 보러 갔다. 대원군은 그를 회롱하여 “나이도 아직 어리고 하니 집에 돌아가서 글이나 더 읽어라. 5년 후에는 너를 한림학사예문관검교의 별칭. 편자주 로 기용하리라”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5년이 지난 뒤에도 아무 소식이 없자 그는, “왜 저를 한림학사로 기용하지 않습니까?”라고 항의하였다. 대원군은 그가 경박하다고 생각하고 결국 기용하지는 않았지만, 갑술년(1874) 이후에 그의 관직이 구차하지 않은 것을 보고 매우 후회하였다.
3. 익종과 박규수
박규수의 자는 환경이며 호는 환재로, 연암박지원의 손자이다. 그는 재주가 뛰어나 어려서부터 집이 가난하였지만 날마다 공부를 하였다.
익종순조의 아들 효명세자로, 그 후 왕으로 추존되었음. 편자주 이 대리집정을 하고 있을 때였다. 그는 미행을 좋아하여, 하룻밤에는 자하동에 도착하였다. 그때 옥을 부수는 듯한 글 읽는 소리가 낭랑하게 들려왔다. 그 소리는 담장이 무너진 사이에서 흘러나왔다. 익종은 매우 기뻐하며 사잇길로 들어갔다. 무감임금을 뫼신 무관. 편자주 이 먼저 들어가 손을 저으며 “대가가 도착하였다”고 말하자, 박규수는 정신없이 부복을 하였다. 익종은 그를 일어나라고 말한 후에 무슨 책을 읽느냐고 물었다. 그리고 그를 쳐다보며 “네가 글 읽기를 좋아하니 너를 기용하리라” 하고 말하였다.
그 다음날, 차가가 박규수의 집을 갔다는 소문이 서울 안에 퍼졌다. 이때부터 박규수도 더욱 분발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해에 익종이 승하하였다. 박규수는 호곡을 하며 그 슬픔이 너무 커서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은 마음이 들었다. 이 소문을 들은 신정왕후익종의 비. 편자주 도 더욱 슬픔을 견디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조병구가 집권한 후, 신정왕후는 강력히 그를 도와 과거에 급제시켰다.
그 후 갑자년(1864) 초에 그는 회시의 고시관으로 발탁되었는데, 그때 시제는 「철금련촉송소학사귀원」이라고 하였다. 그것은 소동파북송의 문인 소식의 호. 당송 8대가 중의 한 사람. 편자주 와 선인태후송나라 인종의 왕비. 편자주 의 고사를 인용하여 자기를 말한 것이다.
4. 셔먼호 사건
무진년(1868)에 박규수가 평안감사로 임명되었을 때였다. 미국인 토마스(Robert Jermain Thomas, 선교사)가 군함 한 척을 타고 대동강까지 들어왔는데, 조수가 빠지는 바람에 꼼짝도 못하고 있었다.
박규수는 그들을 엄습할 장교 1명을 구했다. 또 어민들이 가지고 있는 작은 배(과피선) 수백 척에다가 장작 다발을 싣고 점화를 하였다. 그리고 궁노수를 모집하여 배에다 줄을 매고 일제히 화살을 쏘았다. 화살은 빠르고 배는 가벼워서 양인의 군함에 꽂히고, 군함 안에 있는 인화물질이 일시에 불이 붙어 군함 전체가 모두 소각되었다. 적이 화염 속을 빠져 나가 파도를 건너서 도주하므로, 대포로 사격하여 그들 4-5명을 죽였다.
이 소식이 대궐로 전해지자 박규수에게 자계를 올려 주고 장교에게는 진영장으로 승진시켰다.
5. 박규수의 시세영합
박규수는 관청 일에 능숙하고 문학에도 조예가 깊어, 사람들은 그를 쓸 만한 사람이라고 하였다. 다만 그가 대원군 때 척양주의를 외치다가 갑술년(1874)에는 일본과의 협상을 주장하였으나, 앞뒤가 맞지 않고 일시 여론에만 치우치므로 사람들은 그를 의심하기 시작하였다.
6. 대원군의 독재
종전의 세도는 비록 한 사람이 주관하고 있을지라도 옆으로 자질과 인척들이 종종 한몫을 하고 있었으므로, 서로 간섭하고 부족한 점을 보완하여 오직 실각하지 않을까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러나 대원군 때는 혼자 집권을 하였기 때문에, 비록 음관한 사람과 변장 한 사람이라도 대원군을 거치지 않고는 발령할 수가 없었다. 인사발령을 할 때는 언제나 그가 미리 후보 명단을 작성하여 자리를 채운 후에 올리면 고종은 그것을 따라 낙점만 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의 아들 재면과 사위인 조경호, 처남 민승호 등은 감히 벼슬 한자리도 바라지를 못하여 마음속으로 원망하고 있었다. 고종도 나이가 들어가면서 대원군의 전횡을 싫어하여 불평을 하였다. 이에 재면 등의 공모가 싹트기 시작하여 그 쌓인 불만이 계유년(1873)까지 이르게 되었고, 이때 최익현의 상소문이 나오자 시국은 크게 변하였다.
7. 고종 행행때의 봉변
임신년(1872) 봄에 고종은 제릉과 후릉의 성묘를 마치고 개성으로 가다가 도중에서 어가를 되돌렸다. 거센 비바람에 천지는 어두워지고 물은 평지에 두어 자나 차서 사람과 말의 허리에까지 넘실거렸다.
고종은 어가를 버리고 단마로 옮겨 탄 뒤 민가로 가서 머물렀다. 한기가 들어 입도 열리지 않고 몸을 벌벌 떨었다. 이때 조녕하가 말을 타고 수십 리를 달려와 호로병에다가 쌀죽을 가득 담아 올리자, 쌀죽을 든 고종은 비로소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 다음날 아침부터 날씨는 활짝 개이었다. 행궁에서 호종한 장사들을 점검해 보니 사람과 말이 많이 사망하였다.
8. 최익현의 대원군 배척
최익현의 본관은 경주이고, 윗대로부터 포천에서 살았다. 그는 리항로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고, 철종 때 명경과에 급제한 후 신창 군수로 있으면서 선정을 하였으나 집안은 항시 가난하였다.
계유년(1873) 겨울에 최익현이 소장을 올려 대원군을 배척하며 그를 권신으로 지목하자, 고종은 부드러운 비답을 내렸다. 이때 대원군은 분통을 참지 못하여 문을 닫고 앉아서 정사를 사절하고 있었지만 고종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또 대원군이 고종 앞에 가서 노고를 치하하였지만 고종은 묵묵부답하였다 이에 서석보 등이 최익현을 공격하면서 골육을 이간시킨 행위라고 말하며, 심지어 고종까지 천륜에 야박한 분이라고 하였다.
서석보의 상소문 가운데 「요순지도효제이이」라는 말이 들어 있었다 고종은 이 말에 매우 노하여, 서석보를 친히 국문하고 그를 묶어 매달아 놓으므로 그의 목숨은 거의 끊어질 지경에 이르렀다. 그에게는 임자도에 천극유배보낸 죄인의 거처에 가시나무로 울타리를 쳐서 출입을 제한하는 것 편자주 안치하라는 엄명이 떨어졌다.
그후 최익현은 계속 승진하여 호조참판에까지 이르렀으나, 그는 상소하여 이를 간곡히 사양하였다.
9. 대원군의 몰락과 남인의 도태
최익현이 상소한 후 종전에 추탈되었던 륙래선, 한효순, 리현일 등이 복직되고, 청나라의 소전이 폐지되었다. 이것은 모두 상소문 내용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갑술년(1874) 봄에 운현궁에서 나온 대원군은 양주의 직동으로 내려갔으나 고종의 은례는 매우 인색하였다. 이에 민승호가 집권하여 청반에 있는 남인들을 완전히 도태시켰다.
어사들을 파견하여 남인, 북인 및 대원군의 빈객으로 있다가 수령이 된 사람의 파직을 거론하여 이들이 거의 다 사직하였다. 이때부터 남인들도 더욱 쇠퇴하여 어머니를 잃은 듯이 실의에 빠지게 되었다. 이에 성균관 유생들과 팔도 유생들은 서로 줄을 이어 대궐문 앞에서 규탄과 원망을 하였지만 고종은 이들마저 모두 물리쳤다.
그 후 7월에 영남의 류도석과 호남의 조병만 등이 상소를 하자, 고종은 크게 노하여 이 두 사람을 포도청에 가두도록 하였다. 그들을 곧 처형하려고 할 때, 대원군은 직동에서 곧바로 대궐로 향하여 격렬하게 진언하면서 자결을 하려 하였다. 이에 고종은 부득이 그들을 석방하고, 승정원에 명을 내려 대원군에게 관계된 상소 일체를 받아들이지 못하도록 하므로 결국 호소하는 사람들이 모두 끊기었다.
10. 청전의 유통
청전이 폐지된 것은 갑술년(1874) 정월이었다. 이때 경향 각지에서 교역을 한 것은 오직 청전뿐이었는데, 하루아침에 폐지령이 내려지자 전국의 통화 사정이 나빠져 상업거래가 막혔다. 실업자도 속출하여 상평전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몇배의 금리를 취하고 있으므로 수개월 후에 청전이 다시 유통되었다
11. 대원군의 위세
대원군이 10년 동안 집권하면서 그 위세를 내외에 떨치었다. 「대원위분부」란 다섯 자가 삼천리 강토를 풍미하여 그 위세가 우레와 불 같으므로, 모든 관리와 백성들은 두려움에 휩싸여 항시 관청의 법을 우려하였다. 또 조석으로 유언비어가 판을 쳐 서울에 온 시골 사람들을 체포하여 죽이므로, 궁벽한 산중 촌민과 멀고 먼 해변의 어민들은 살고 싶은 마음을 잃게 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서로 기뻐하며 축하를 하고 있다. 이를 논평한 사람의 말을 빌리면, 대원군을 실각시키지 않았더라면 국가가 망하는 것은 오늘까지 지속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민씨들이 집권한 이후 서민들이 그들의 착취를 견디다 못해 종종 한탄을 하며 도리어 대원군의 정치를 그리워했다. 이것은 한민족이 말한 바와 같이, 민심이 흉흉하여 다시 왕망전한 시대의 신을 세운 창업주. 편자주 의 조정을 그리워한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백성들을 사랑해서 그런 것은 아니다.
12. 최익현의 투옥과 출옥
최익현은 두 번의 상소를 올렸다. 그가 두 번째 상소를 하였을 때, 고종은 고의로 대원군의 동정을 살피기 위해 최익현을 금부에 가두었다. 그 후 그가 출옥할 때 서울의 사녀들은 술을 들고 다니기도 하고 향화를 머리에 이고 다니기도 하여 그 불빛이 거리를 찬란하게 비추었다. 그들은 이토록 최충신이 다시 살아난 것을 경축한 것이다.
이에 최충신의 이름이 나라 안에 전파되었고, 그의 상소문은 집집마다 전송되어 옛날 명신의 장주처럼 여겨지고 이를 등사하기 위해 종이도 일시 불티나게 팔렸다. 그러나 유식한 사람들은, 그가 대원군을 권신으로 몰아세운 것은 윤리에 크게 저해된 일이라고 지적하였다.
그 후 고종이 사친을 매우 야박하게 대접하자 세상 사람들은 최익현의 상소에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구실을 붙였다. 자고로 권신은 친척과 인척 및 환사환관과 사인. 편자주 , 훈신 이외에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생긴 것이다. 그러나 대원군과 고종은 부자간이라 누구도 이간시킬 수 없는 일이다. 모든 사람들은 대원군이 세도를 종신토록 누리고야 말 것이라고 하였는데, 하루 아침에 배척되어 문로가 봉쇄된 것이 다른 사람이 실세한 것보다 심하였다. 그것은 득세를 매우 화급히 하였으므로 실세도 매우 처량했던 것이다. 이것은 사물의 이치가 그러한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최익현이 갑자기 상소를 을린 후 발탁된 것을 보고 그가 사주를 받은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병자년(1876) 일본과 강화하자는 여론이 있을 때, 최익현이 우탁1263-1343. 고려의 학자로, 호는 역동. 정주학을 처음으로 해독하였고, 시조 2수가 전해짐. 충선왕이 숙창원비와 밀통하자 이를 극간하다가 유배되었음. 편자주 , 조헌1544~1592. 자는 여식, 호는 중봉. 1591년 일본 사신이 오자 대궐앞에서 그 사신을 처형하자는 상소를 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 다음해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그는 옥천에서 의병 1,700여 명을 규합하여 청주를 수복하고, 또 승장 령규가 인솔한 승병과 함께 금산으로 향하였으나 관군의 방해로 해산당하고, 700명의 의병과 금산에서 격전을 벌였으나 모두 전사하였음. 영의정에 추증되고 시호는 문렬임. 편자주 의 고사를 인용하여 도끼를 들고 상소하여 강력히 척화를 주장하다가 흑산도로 유배하라는 명령이 내려지자 이에 그를 의심하는 마음이 모두 사라졌다.
13. 최익현의 효성
최익현은 집이 매우 가난하였으나 늙은 아버님을 잘 봉양하여 지극한 효성을 다하였다. 날씨가 차가울 때는 언제나 그의 부친 방에 친히 불을 때면서, “내 대신 수고할 사람이 없어서가 아니라 다습게 하고 시원하게 하는 일을 알맞게 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그는 친히 경작을 하여 식생활을 해결하고 땔감도 마련하였다. 심지어 울을 막고 포전 일을 하는 것까지 자신이 다 하였고, 서울에 무슨 일이 있으면 도보로 왕래하였다.
그리고 그는 만년에 뜻을 더욱 겸손하게 가졌지만 직위가 더 높아져 한때는 태산과 북두성처럼 선망을 받았다.
14. 대원군의 정치
대원군은 고종의 부친으로 총재수상과 같음. 편자주 의 일을 행한 것이며 왕 노릇을 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엄연히 섭정을 한 것이다. 그 10년 동안은 국가에 아무런 변고도 없었다. 이것은 천년에 두 번도 없는 좋은 기회이므로 큰일을 할 수 있는 시기였다.
만일 그로 하여금 주공주나라 문왕의 자. 이름은 단. 무왕이 죽자 성왕을 도와 섭정하였음. 편자주 처럼 밥을 먹다가도 뱉어 내고, 머리를 씻다가도 상투를 움켜쥐고 나올 만큼 분주하고, 현사를 대우하여 량법을 강구하고, 국가경비를 절약하여 백성을 사랑하고, 인자와 겸양과 측은한 마음으로 문화와 법률 등 그 이외의 범위까지 빛을 내어 원우송나라 철종의 연호. 철종이 즉위한 후 선인태후가 섭정하면서 사마광 등 수구파를 기용하여, 신종의 신법을 폐지하고 보수정치를 하였으므로 이 시기를 원우지치라고 함. 편자주 년간의 사마광중국 송나라 사람 자는 군실, 호는 제물자. 철종 초에 상서좌복사로 임명되어 왕안석의 신법을 폐지하고 <자치통감> 등 많은 저서를 남겼음. 편자주 처럼 하였더라면, 기화의 추세로 비록 극치에 달한 정치를 회복하지는 못하더라도 하늘이 행운을 주어 인재들이 그 시기를 타고 모여들었을 것이다. 그들을 10년 동안 좋은 교육을 시켰다면 천하에 어찌 못할 일이 있겠는가?
그러나 대원군은 장금의 부귀를 탐내고 있다가 하루아침에 뜻을 얻은 후로, 음행과 사치와 교만과 폭행을 자행하여 장동 김씨들보다도 더 지나친 일을 감행하였다. 그는 원기를 손상시키고 백성들에게 원한을 샀으며, 공연히 토목공사를 일으키고 사색당파를 두둔하였다. 이것이 그의 10년간의 사업이다.
아, 이것이 시운일까? 아마도 천년 후에는 이 일에 대하여 통탄할 사람이 있을 것이다.
14. 장금의 12사랑
장금 시절에는 온 가문이 부귀를 누렸으므로 뇌물을 받아들이기 위해 빈객과 내통한 집이 12호나 되었는데, 이를 12사랑이라 한다.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청사를 칭한 말이다 주군의 관리들이 백방으로 착취하여 뇌물을 많이 받았지만 장률금전이나 물품 등 부정한 재물을 받은 사람을 다스리는 법률. 편자주 이 시행되지 않고 있었다.
대원군은 그 폐단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그가 집권한 이후 이를 범한 자가 있으면,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용서를 하지 않았다. 채동술은 봉산군수로 있을 때 종로에서 장형곤장으로 볼기를 치는 형벌. 편자주 을 받았는데 이때부터 수령들의 부정이 사라졌다.
15. 대원군과 심의면의 불화
대원군이 어렸을 때 집안이 가난하여 남의 집을 잘 찾아 다녔다. 하루는 금좌근의 집을 방문하고 나올 때 판서침의면이 좌근에게, “궁도령이 궁이나 지키고 있을 일이지 왜 굽실굽실 재상집을 찾아 다닐까?”라고 하였다. 이 말이 밖으로 퍼졌다.
우리나라 방언에 종실 중 「군」으로 봉한 사람을 「궁도령」이라고 한다. 대원군은 그 말을 깊이 간직하고 있었다. 갑자년(1864) 이후 심의면은 화를 면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공주의 고향집에서 칩거생활을 하다가 죽었다.
그 후 그의 둘째아들 침리택은 의주부윤으로 있을 때 많은 불법행위를 자행하였으므로 어사를 파견하여 장형을 치른 후 제주도로 유배하였다. 그의 맏아들인 침순택은 화를 두려워하여 두문불출하고 있다가, 갑술년(1874) 이후 민씨와 심씨가 서로 사이 좋게 지내며 강력히 후원하였으므로 심이택은 누차 감사를 지내고, 심순택은 20년 동안 수상을 지낼 수 있었다.
16. 동인의 세도
속담에 「동인의 세도는 10년을 넘기지 못한다」고 하였다. 그것은 박종경, 금조순, 조만영 이후 비록 한집안이라 하더라도 서로 경쟁이나 하듯 부자, 형제, 인척들이 드나들면서 대략 한 사람이 10년 내외에 그쳤기 때문이다. 대원군 때도 그러하였다.
17. 남인들의 유배
남인의 재상 자제들은 젊은 나이에 좋은 벼슬을 지냈는데, 이들은 모두 대원군의 사인으로서 그 수를 헤아릴 수도 없지만 한기동, 라봉구, 채동술, 권정호, 정현덕 등이 그중에서 더욱 지지를 받던 사람들이다.
갑술년(1874) 초에 대내에서는 그들에게 비밀봉투 하나씩을 주며 성외로 나가서 열어 보도록 하였다. 그 봉투를 열어 보니, 변방으로 가서 한가히 지내라는 명령이 적혀 있었다. 그중에는 북인 신헌구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 6인은 창황히 길을 떠났다. 유배를 당한 것이다.
그들을 3,4년 후에 다시 불러들이자 그들은 민씨들에게 아부하여 높은 벼슬을 탐내었다. 그중에서 권정호는 안기영의 역모에 가담하여 신사년(1881) 겨울에 처형되고, 채동술은 그 기미를 알고 있으면서 고해 바치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처형되었다.
18. 대원군 문객에 대한 배척
불순한 무리들은 대원군이 실각한 후 유언비어를 퍼뜨려 다시 기용되기를 바랐으나 고종은 그들을 미워하여 금세호, 정현덕, 조병창 등을 차례로 유배시키고 이들과 어렸을 때부터 상종한 사람들도 죄를 씌워 폐인이 되게 하였다.
그리고 그들을 대원군의 문객으로 지목하여 기어이 제거하려고 하였으므로, 비록 다른 당파라도 그들을 배척하려고 할 때는, “아무개는 대원군의 주위에 있던 사람이다”라고 고해바쳤다. 이로 인해 대원군과 관계가 없는 사람들도 종종 고폐를 당했다.
19. 규장각의 유래
정종 때 호당을 「규장각」으로 개칭하여 제학, 직제학, 부제학, 직각, 대교 등의 관직을 신설하고, 문벌 있는 가문의 학문이 높은 사람을 기용하였다. 그들은 명망도 높고 직위도 청반에 속하므로 다른 관료와는 비교될 수 없었다. 이를 총괄하여 각신이라고 칭한다. 처음에는 남인들도 간혹 그 직위에 참여하였지만 순조 이후에는 노론이 아니면 소론뿐이었다.
그리고 대원군 때에는 한기동이 대교가 되고 홍은모가 직각이 되었는데, 이들은 모두 남인이다. 또 대교가 된 금규식과 직각이 된 강찬은 모두 북인이므로 노론측에서는 불만이 대단하여, 이를 운각이라고 하였다.
20. 대원군을 대로로 추존
현종과 숙종 때 서인들이 송우암을 대로로 추대하였는데, 대원군도 이를 자기 호로 삼고 “나도 대로이다”라고 하면서 우암을 조롱하였다.
계유년(1873)에 최익현이 상소한 후 태학생 리세우가 대원군을 대로로 높이자고 간청하자, 고종은 이를 극히 가하다고 하면서 겉으로 우대하는 뜻을 보였다. 이것은 이세우가 고종의 뜻을 헤아려 본 것이다.
21. 고종의 원자 탄생
갑술년(1874) 2월에 원자가 탄생하였다 3월에 증광시를 설치하여 대과와 소과의 급제자를 선발하고, 을해년(1875)에 세자로 책봉하였다.
22. 별입시의 입직
갑술년(1874) 초에 고종의 친정이 시작되었으나, 안으로는 명성왕후가 주관하고 밖으로는 민승호가 명을 받들어 시행하였다.
명성왕후는 총민하고 정략도 풍부하였는데, 언제나 고종의 좌우를 떠나지 않고 고종이 미치지 못한 일을 도와주었다. 그는 처음부터 고종을 빙자하여 애증을 마음대로 하다가 그 후 방자한 행동이 날로 심하여 고종이 도리어 그의 제재를 받아 민승호가 대원군의 전횡을 징계하여 대원군을 실각케 하였다.
그리고 그는 고종에게 조정에서 여망이 있는 대신들을 골라 그들이 차례로 입직하면서 기무에 참여토록 하였는데, 이것을 별입시라고 하였다
이에 금병시, 금영수, 금보현, 정범조, 윤자덕, 조인희 및 그의 아우 민겸호 등도 모두 참여하게 되었다. 정범조, 윤자덕, 조인희 등은 소론이다.
그것은 남인과 북인이 이미 물러간 데다가 다시 소론마저 억제하면 비방이 노론으로 돌아오기 때문에, 안으로는 고종이 독단한 것이라고 핑계를 치고 밖으로는 소론들이 그 사이에 끼어있음을 과시하여, 그들의 세도를 은폐하고 비방도 무산시키려고 한 것이다.
23. 흥인군과 대원군의 불화
흥인군리최응은 그의 아우 대원군과 본래부터 불화하여 언제나 민승호가 무마하곤 하였다.
그러나 그가 령의정이 되고부터는 대원군과 적대관계가 되어, 무슨 일을 주달하려고 할 때 어려운 점이 있으면 반드시 이최응을 시켜 탑전에 나가서 고하도록 하였다. 이최응도 그 심부름을 달게 여기어 그에 따른 혜택을 입자 대원군은 이에 대한 원한을 품고 있다가, 하루는 그의 침실로 찾아가 장막을 걷어치우고 노려보며 “형님이 오래 나오지 않는 것을 보니 수양대군의 음모를 꾸미고 있지요?” 하고 말했다. 이때 이최응은 병가를 신청하고 있는 중이었다
24. 고종의 미행
숙종과 영조 량조에서는 미행을 많이 하여 지금도 항간에서는 고담으로 전해지고, 고종 갑술년(1874) 초에도 그 이야기를 조야가 다 기특한 전설로 삼았었다. 그리고 고종도 자주 미행을 하여 민간의 고통을 살폈는데, 아마 조종의 이런 기풍이 태평시대를 바라는 데 있었던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25. 민승호의 무능
민승호는 성품이 유하고 어두운 데다가 건망증까지 심하였는데, 일조에 국정을 담당하여 기강을 잡지 못하자 하위직 관료들이 그를 두려워하지 않고 서로 속이고 모함하여, 반 년도 채 못되어 백 가지 기무가 해이해지므로 이를 본 사람들은 모두 심난하게 생각하였다.
그 후 얼마 안되어 그는 또 어머니의 상을 당하자, 상려를 지키고 앉아서 대궐을 나가지 않고 서한만 왕래하므로 모든 일이 기무에 맞지 않을 뿐 아니라, 그런 와중에 별입시들이 용사를 하여 정사가 쥐구멍처럼 들쭉날쭉하였고 많은 정권이 옆사람에게 돌아갔다.
상(1894년 이전) ④
1. 대원군의 해학
금보현은 사계금장생1548-1631. 인조 때의 학자 자는 희원, 호는 사계. 편자주 의 후손으로, 어릴 때부터 교묘한 재주가 있어 약관에 급제하였다.
김보현이 나귀를 산 지 3일 만에 그 나귀가 죽었다. 그것은 청탁하기 위하여 사람을 찾아 다니는 일이 많아 나귀의 힘이 기진맥진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장금들과 친하게 지내어 철종 때 이미 대교를 거쳐 참판까지 지냈다. 대원군은 늘 그 사람 됨됨이를 비루하게 생각하여 10년 동안 망단후보단자. 편자주 을 정지하고 있는 중이었다.
하루는 그가 상려를 지키고 있으면서, 대원군이 조문하러 오지 않는 것을 수치로 생각하고 있었다. 대원군은 해학가로 사람들에게 욕을 잘 하였다. 그는 욕을 할 자료가 있으면 조문을 하러 올 것으로 생각하고 대원군의 식객에게 “우리 선친의 아명은 구자인데 자네는 혹시라도 대원군에게 이 말을 하지 말게…… 이분은 남에게 욕을 잘 하니 나도 욕을 얻어먹을까 두렵네”라고 하였다.
그 식객은 돌아가서 대원군에게 “김보현의 부친은 아명이 소구라고 하던데 대감께서는 아직 모르고 계십니까?” 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대원군은 크게 기뻐하며 그 즉시 수레를 타고 그의 상여로 가서 “오요오요” 하고 두어 번 소리를 지른 후 김보현을 돌아보며 “나는 그만 가겠습니다”라고 하고 말 한마디 나누지 않고 떠나갔다.
김보현은 도리어 기뻐하며 적객록에 기록하기를, 「모일대원군입곡」이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포복절도하였다. 그 「오요오요」라고 하는 것은 방언으로 개를 부르는 소리이다. 지금 세속에서 남의 집을 조문하러 가서 곡을 할 때 「어이어이」라고 소리를 내는 데 이것은 「오요오요」와 「어이어이」의 소리가 매우 비슷하였다.
그는 이때 민승호와 인연이 되어 금중을 출입하면서 총애를 받아 1년 사이에 리조판서로 발탁되어 선혜청당상관을 겸하고, 그 후 얼마 안되어 다시 경기감사가 되었다.
2. 호조와 선혜청
호조와 선혜청은 국가의 전곡을 맡은 곳이다. 선혜청은 오로지 미포만 관리하기 때문에 재부아문으로도 칭하였으므로 아무리 자체에서 절약하는 일이 있더라도 봉급을 후하게 주었다.
그리고 옛날부터 호조판서, 선혜청당상관, 훈련대장 등은 회계를 하지 않았으므로 이 세 곳에서는 수시로 비용을 끌어써도 아무런 구애를 받지 않았다.
그러므로 금보현이 수년 동안 선혜청을 관리하면서 고직 및 조졸조운선의 군졸. 편자주 들과 짜고 농간을 부려 조선이 침몰하였다고 하면서 환미를 사장하기도 하고, 혹은 방매를 한 후 모리하여 쌀 대신 금전을 받기도 하였다. 이에 선혜청의 저장미가 점차 줄어들고 도민들은 먹고 살길이 없었지만 김보현의 전원은 비옥해지고 정대는 즐비하였으며, 풍악놀이는 한 시대의 절정을 이루었다
3. 고종, 민비의 유연과 매관매직의 발단
원자가 탄생한 이후 궁중의 기양은 절도가 없어 그 행사가 팔도의 명산까지 미치고, 고종도 마음대로 유연을 즐겨 상을 줄 경비가 모자랐다.
량전이 하루에 천금을 소모하여 내수사에 있는 물량으로는 지탱할 수 없으므로 호조와 선혜청의 공금을 공공연히 가져다 썼으나 재정을 관장하는 사람이 감히 거절을 할 수 없어, 1년도 안되어 대원군이 10년 동안 쌓아 둔 저축미가 다 동이 났다. 이로부터 매관매과의 폐단이 발생하기 시작하였다.
4. 불지적과 연연적
금병시는 판서금응근의 아들이다. 그는 부귀를 누린 집에서 태어났지만 성품이 매우 조용하였다. 갑자년(1864) 이후에도 그는 시세에 따라 아부하고 다니지 않았으므로 대원군이 매우 중히 여겼다.
그리고 경오년(1870)과 신미년(1871) 사이에 충청감사가 되어 선정을 하였고, 별입시에 발탁되어서는 머리를 숙여 순응하였다. 언제나 고종이 물을 때 그는, “신은 잘 모릅니다”라고 하였고, 윤자덕은 고종이 물을 때 “그러하옵니다”라고 하였으므로 대궐 안에서는 김병시를 「불지적」이라고 하고 윤자덕을 「연연적」이라고 하였다.
5. 윤자덕의 경력
윤자덕은 명재윤증1629-1714. 숙종 때의 학자. 자는 자인, 호는 명재. 편자주 의 후손이며 정원용의 외손으로, 문예에 능하고 영합을 잘 하여 아첨을 일삼았다. 호는 현호이다.
그는 헌종 때 총애를 받아 대과에 급제하고 대교가 되었으며, 고종이 친정을 하자 전참판으로 정경이 되고 두 아들 윤상만와 윤상연도 잇따라 대과에 급제하였다.
6. 신정희의 경력
신정희의 자는 원중이며 신헌의 아들이다. 그는 용모가 단정하고 재주가 영민하여 헌종 때 별군직으로 금중에서 독서하면서 크게 총애를 받았다.
그리고 노후에 그는 비록 시골 집에 있었지만 헌종의 탄생일에는 서울에 와서 진전의 다례식에 꼭 참석하고, 무슨 이야기를 하다가도 이야기 중 당시의 일을 들먹이면 오랫동안 눈물을 흘렸다.
7. 정기세의 경력
정기세는 정원용의 아들이다. 정씨들은 재상이 많았지만 화목하고 근신하여 세신의 모범이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혁혁한 고관대작을 지내면서도 이렇다 할 풍절이 없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이 점을 얕보게 되었다. 이에 정기세는 더욱 겸손하여 남의 뜻을 거스르지 않고 남에게 기쁜 일만 전하여, 사람들은 그를 작판서라고 불렀다.
8. 이유원의 탐욕과 박규수의 호기
갑술년(1874) 이후 리유원과 박규수는 서로 번갈아가며 좌상과 우상을 지냈다.
이유원은 탐욕스럽고 교활하여 늙은 후에도 그 마음을 버리지 못하였으며, 소론 중에서 갑부라는 말을 들었지만 한없이 재물을 탐하였다
그는 담소를 잘 하고 거동이 한아하여, 이런 점 때문에 고종과의 지우관계가 맺어졌다. 그는 고종 앞에서도 손뼉을 치고 즐겁게 놀기도 하여 마치 한집안 부자관계처럼 화기롭고 자유롭게 지냈으므로 금중을 자기 집 드나들 듯이 한 간사스러운 종친이라도 그를 따를 수 없었다.
그리고 박규수는 문학을 잘하고 풍채도 뛰어난 데다가 지혜도 있어 수시 강인한 기운을 드러내었으므로 모든 사람들의 칭찬을 받았다.
그가 하루는 이유원과 함께 고종을 알현하기로 약속한 후 고종을 찾아뵈었다. 그런데 그들은 고종 앞에서 언쟁을 벌였다. 박규수가 먼저 시작하였다. 고종은 묵묵히 앉아 난색을 지으므로 이유원은 감히 대들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박규수는 큰 고함을 지르며 “사관은 어디 있습니까? 모월 모일에 이유원과 박규수가 주상 앞에서 국사를 논하다가 이유원이 위축되어 감히 말 한마디 못하였다고 쓰십시오” 하고는, 이유원을 돌아보며 “공은 소인을 면키 어려을 것입니다. 공 같은 사람이 어찌 리산해와 류성룡의 기풍을 들었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9. 이유원의 토지
리유원의 호는 귤산이다. 그의 별장은 양주 가오곡에 있으며 서울에서 80리 거리이다.
그때 사람들은 그곳 80리 거리를 왕래하는 길이 모두 그의 밭두렁이었으므로 다른 사람의 땅은 단 한 평도 밟지 않고 다녔다고 한다. 심하게 말해서 이유원의 밭이 많다는 표현이다.
그리고 그가 훌륭하게 꾸며 놓은 정원의 기화괴석은 근세에 찾아보기 드문 것이었다. 동녀들을 뽑아 남장을 하게 하고 그들이 모든 심부름을 다 하였다. 기타 호사스럽고 음란한 시설도 이에 준하였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 리계조는 사신으로 북경을 갔을 때, 점술가에게 이유원의 수명을 묻자 그 점술가는, “만일 정승의 자리에 있으면 곱게 죽지 못할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이계조는 임종할 때 이 말을 상기하여 아들 이유원에게 거듭 주의를 주었으므로 이유원은 정승을 임명할 때마다 눈물을 흘리며 사양하였다.
그러나 계유년(1873)부터 갑술년(1874) 사이에 그는 고종의 간청을 받고 감히 사양하지 못하였다. 그가 이미 정승 자리에 오르자 고종은 그를 매우 총애하였고, 그도 민승호와 결합하여 병부발병부. 한쪽에 발병이란 글자를 쓰고 다른 한쪽에는 관찰사, 절도사, 진호 등을 기록한 둥글고 납작한 나무패로, 발병 명령을 내릴 때 이 패를 쪼개어 오른쪽은 책임자를 주고 왼쪽은 왕이 가지고 있다가 왕의 교시와 함께 그 왼쪽 패를 내리면 지방관은 그 두 쪽을 맞추어 보고 틀림이 없을 때 군대를 동원함. 편자주 열두 개를 찼다. 그를 찾는 사람들은 문전성시를 이루어 세상 사람들은 그를 남촌의 세도가라고 하였다.
10. 이유원의 아부성
리건창의 아버지 리상학이 건원릉조선 태조 리성계의 능. 편자주 의 령으로 있을 때 리유원이 서울을 오면서 건원룽 밑을 지나다가 이상학을 방문하였다.
이때 마침 이상학에게 은어를 갖다 준 사람이 있었는데, 아직 반찬을 만들지 않은 상태라 이상학은 시자를 불러 “은어를 속히 회로 만들어 대감께 술을 올려라”고 하였다. 이유원은 깜짝 놀라며 “이 근처에서 어떻게 은어를 가져온 사람이 있습니까? 그냥 회를 만들지 말고 가져오십시오”라고 말한 후, 버들가지를 꺾어 오게 하여 친히 은어를 싸 놓고 그 표지에 「내수사개탁신유원복정」이라고 써서 그 즉시 자기 하인에게 주며 진상하도록 하고 자리를 떠났다.
이상학의 천성은 질박하고 정직하였다. 그는 집으로 돌아가 아들들에게 말하기를, “이것이 어찌 대신이 할 일이겠느냐? 이러니 온 나라 관리들이 경쟁을 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라고 하고 여러 날 탄식하였다고 한다. 이 말을 나는 이건창에게 들었다.
세자가 어렸을 때 어느 노리개든 가지고 놀기를 좋아하자, 이유원은 동궁으로 가 다람쥐를 바쳤다.
11. 이유원의 파양
리유원의 아들 리수영은 풍증이 있었다. 그는 을해년(1875)에 치른 별시과국가에 경사가 있을 때나 병년마다 문무 급제자를 뽑은 과거. 편자주 에 급제하였는데, 합격자를 호명하던 그날 금병학을 뵈러 갔다. 그는 얼굴에 종기가 나서 그 냄새가 남에게 풍기었다.
김병학은 옆자리에 앉아 있는 손님을 돌아보며 “누가 이정승의 아들을 병이 들었다고 합디까? 또 오성대감 한 분이 나셨습니다”라고 하였다.
이 「오성」은 「오성」과 음이 같으므로 중풍병이 다섯 가지 색채를 띠고 있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그것은 해학으로 하는 말이다.
그는 그 후 대교 벼슬을 지내고 있을 때 세상을 떠났다. 이유원은 별수없이 양손을 맞이하였으나 그의 나이가 이수영의 처와 네다섯 살 차이밖에 안되어 모자가 음행을 저지르고 말았다. 이에 이유원은 고종에게 아뢰기를, “신의 손자가 그의 어머니와 간통하였으니 양손을 파기해야겠습니다”라고 하였다. 반렬에 있던 대신들은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그 후 이유원은 고종의 교지를 내놓으며 그의 족인인 판서장안세(장안세)의 자의 아들 리석영을 빼앗아 양손을 삼았다. 그 양손도 그 후 얼마 안되어 과거에 급제하였다. 영남의 선비 손영경이 이유원을 탄핵한 말 중에 “병든 아들이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고약한 종기가 난 근시는 돌아보지도 않을 것이다”는 구절이 있었는데 이 말이 일시에 퍼졌다. 고종은 그가 대신을 비방하였다는 이유로 곧 유배하였다.
12. 강화도무위영의 철폐
강화의 무위영을 서울로 옮겨 내영으로 칭하고 도통사를 두었다. 이때 대원군이 설치한 것은 좋고 나쁜 것을 막론하고 모두 개혁하였다.
대원군은 무위영을 철폐하였다는 소문을 듣고 가슴을 어루만지며 “이 영이 국가에 무슨 해를 끼쳐서 그 장성을 파괴하는가?” 라고 하였다.
13. 이재면의 분노
리재면이 민씨들과 결탁하여, 시국이 바뀌면 자신도 국정에 참여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그 일이 성공한 후 민승호가 국정을 전제하므로, 그는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다가 분통이 터지면 꾸짖기 시작하였다. 대원군은 이런 사실을 알고 “아, 돼지새끼 같은 놈, 제 눈물이나 빨아먹을 일이지 탄식만 하면 해결되나!” 라고 하였다.
14. 민승호의 변사
병자년(1876) 봄 경복궁에 화재가 발생하여 고종이 창덕궁으로 이어하였다. 이때 민승호의 집도 화재가 발생하여 민승호가 불에 타 죽고, 그 후 흥인군리최응의 집도 화재가 발생하였다.
이때 민승호는 거상중에 있으면서 어떤 스님에게 조용한 곳에서 자기 아들을 위해 기도를 해 달라고 부탁하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밖으로부터 함 하나를 가져온 사람이, “기도하는 곳에서 왔습니다. 스님 말씀으로는 밀실로 가서 열어 보시라고 하였습니다. 이 속에는 복이 있으니 다른 사람은 보지 못하게 하십시오” 라고 하였다
민승호는 함을 주고 간 사람을 찾았으나 그는 이미 떠나고 없었다. 민승호는 반신반의하였으나 일단 그의 말을 따랐다. 그 함에는 은밀히 구멍이 하나 있었다. 자물쇠가 채워져 있어 열쇠로 끌러야 했다. 그 자물쇠는 옆에 달려 있었다. 그는 시험삼아 열쇠로 자물쇠를 끌렀다. 그 순간 꽝 하고 불빛이 새어나왔다. 그의 10세 된 아들과 할아버지가 함께 죽은 것이다.
민승호는 튀어나갔다가 떨어졌다. 그의 온몸은 숯덩어리처럼 시커멓게 타 있었고 벙어리가 된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그런 그는 하룻밤을 지나고서야 사망하였다. 그는 사망할 때 대원군을 두세 번 가리켰다. 자자한 바깥 여론들도 모두 대원군을 지목하였다.
그러나 그 함이 어디서 왔는지는 결국 알아내지 못하였다.
량전도 슬퍼하고 명성왕후도 대원군에게 이를 갈았으나 그 원한을 갚을 길이 없었다. 이때 흥인군의 집에도 화재가 발생하였는데, 명성왕후는 대원군이 흥인군에게 원한을 품고 저지른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이 두 곳의 화재는 모두 그의 계략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 후 은밀히 염탐하여 장모란 사람을 체포하였는데, 그는 신철균의 식객이었다. 신철균은 옛날 대원군의 문용 출신이므로 그를 고문하여 감옥에 가두었다.
15. 신철균의 가산 몰수
신철균의 처음 이름은 효철이다. 그는 병인년(1866) 영종첨사로 있으면서 양인 유격병 수명의 목을 벤 공로로 진주병사로 발탁되었다가, 갑술년(1874) 이후에는 집에서 칩거하였다.
신철균은 방술을 좋아하여 그의 집을 찾는 사람들은 잡술객이 많았다. 이때 그의 문객 장 모라는 사람이 신철균에게 “몇일날 흥인군 집에 불이 날 것입니다”라고 하였는데, 그 후 과연 그 집에서 불이 났다.
이 말이 사방으로 퍼지자 이 두 사람을 체포하여 신문을 하였다. 이때 신철균은 거짓 자복을 하여 세 곳에서 난 화재는 모두 한 사람의 뜻에서 나왔다고 하였다. 이에 그에게 대역죄를 적용하여 참형을 가하고 그의 가산을 적몰하는 한편, 그의 처자들은 먼 곳으로 보내어 노비로 충당하였다.
16. 신철균과 지관의 복수
신철균이 젊었을 때 한 지관을 만나 그의 부친의 묘소를 의녕 땅으로 이장하였다. 그 혈은 산 정상에 가까운 곳으로 주위가 암석으로 되어 있어 동반과 같았다.
그 지관은 “모년에 진주병사가 나올 것이니 내 말이 맞으면 나에게 돈 1천꾸러미를 주십시오” 라고 하였다. 그가 진주영으로 옮겨 간 해는 바로 지관이 말한 해였다.
그 지관은 신철균을 찾아왔다. 이때 신철균은 그를 평상시처럼 대접하고 1천꾸러미의 돈은 줄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 지관도 아무런 기색도 보이지 않고 길을 떠나면서 “그 혈은 이미 효험을 보았으니 사람이 더 기교를 부리면 그 즉시 높은 직위를 얻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자 신철균은 급히 그 방법을 물어 보았다.
그 지관은 “그 주위의 암석을 파서 한쪽을 헐어 버리면 됩니다”라고 하였다. 신철균은 기뻐하며 그의 말을 따랐다. 그 혈을 헌 후 지관은 떠나가서 사람들에게 “이 혈은 조천랍촉이라 한쪽을 헐어 버리면 기름이 샐 터이니 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그 후 10년도 안되어 이런 화가 일어난 것이다.
17. 원세개의 개혁 권유
원세개1859-1916. 1882년 조선에 와서 내치, 외교에 간섭하였으며, 1912년에 청조의 선통제에게 퇴위를 요구하고 임시 공화 정부를 수립. 손문의 양보를 강요하여 중화민국 초대 대통령이 되고, 그 후 제위에 올랐다가 실각되었음. 편자주 가 뒤에 금윤식에게 말하기를, “귀국은 정란이 일어난 지 오래되었으므로 큰 경장을 일으키지 않으면 유지하지 못할 것입니다. 10월에 일어난 갑신정변은 주견이 없는 일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금옥균 등이 그 일을 나에게 들려주었다면 내가 중립이 되어 그 일을 성사시켰을 것이지만, 그 일이 불의에 발생하였기 때문에 서로 방해가 되었습니다”라고 하였다 한다. 나는 이 말을 김윤식에게 들었다.
18. 민승호의 후사
민승호의 시호를 특별히 충정이라고 했다.
민승호는 아들이 없으므로 명성왕후가 그의 후사를 세우려고 하였다. 이때 민씨들 중 민겸호, 민두호, 민관호 등이 모두 아들이 있으므로 자신들의 아들을 양자로 세우려고 하였으나 명성왕후의 뜻에 맞는 사람이 없었다. 민태호의 외아들 민영익은 촌수가 약간 멀지만, 영리하고 숙성하므로 명성왕후가 자기의 뜻을 전했으나 민태호는 그 말을 따르지 않았다. 그러나 민태호의 아우 민규호가 위협을 가하면서 “하늘의 뜻을 어찌 어기려고 하십니까? 함께 부귀를 누린 것만 못할 것입니다”라고 하므로, 민태호는 그의 말을 따라 민영익은 결국 민승호의 양자가 되었다.
명성왕후는 매우 기뻐하였다. 이에 민규호가 이조판서로 임명되어 도통사를 겸직하였다.
19. 민규호의 출세
민규호 형제는 아들 하나만 있었는데 이미 민승호에게 입양하여 그 형제에게는 아들이 없게 되었다. 민태호는 민영익의 생부이므로 민승호 대신 출세를 해야 할 사람은 당연히 그였다.
그러나 민규호는 그 재간과 문필이 형보다 훌륭하고, 또 명성왕후는 민영익이 출계된 것은 민규호의 뜻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그를 매우 부추기어 그의 형이 차지해야 할 벼슬을 빼앗았다.
20. 민규호의 이간
처음에 민승호와 대원군의 사이가 벌어진 것은 민규호의 역할이 컸다. 그 후 사이가 벌어진 것이다. 그것은 민승호는 물정에 어둡고 용렬하여 그의 마음대로 갖고 놀았지만 민승호는 조금도 양보를 하지 않았다.
그 후 민승호가 죽자 혹자는, “민규호가 꾀를 내어 죽이고 애매하게 대원군을 지목하여 자기 자취를 감추고, 또 그의 조카를 민승호의 후사로 입양한 후 대권이 자기에게 돌아가도록 하였다”고 하였다. 아마 그럴 수 있을 만한 말이다.
21. 김병국과 민규호의 동성연애
금병국과 민규호는 서로 동성연애를 하였다. 김병국이 자헌대부의 계품에 오르자 민규호가 축하하기를, “대감께서 판서가 되셨으니 저는 정경부인이 되었습니다”라고 하였다.
22. 민규호의 무자사연
민규호는 젊었을 때 집안이 매우 가난하여, 형과 함께 살면서 조석으로 콩죽을 사서 형제가 같이 먹고, 그의 부친이 사망하였을 때는 관이 없어 짚자리로 말아 출상하였다.
그가 안악군수로 있을 때, 하루는 그의 아내가 세저포를 사가지고 왔다. 그는 안방으로 들어간 즉시 그것을 보고 침을 뱉으며 “이 베는 너무 거치니 어찌 명부의 옷으로 맞겠습니까? 바꿔 오십시오”라고 하였다. 그의 아내는, “당신은 정동의 허름한 집에서 콩죽 먹던 기억이 나지 않으세요. 이런 정도면 족한데 어찌 바꿔 오라고 하십니까?”라고 하였다.
민규호는 크게 화를 내어 자기를 모독한 행위라고 말하며 자기 아내를 발로 차고 나가 버렸다. 이때부터 그는 안방을 들어가지 않았으므로 아들이 없었던 것이다.
23. 민규호의 작호사연
근세의 세력가로는 황산을 꼽는다. 황산은 금유근이다. 그리고 명필로는 추사를 추대한다. 추사는 금정희이다.
민규호는 이 두 사람을 사모하여 자호를 황사라고 하였다. 그것은 권력을 황산처럼 갖고 싶어하고, 필력은 추사처럼 갖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24. 민규호의 어명 유도
민규호는 정권을 잡은 이후, 고종에게 내비를 유도하여 관직에 진출하고 싶은 사람의 명단을 제출한 후 고종으로 하여금 관직을 임명하도록 하였다.
그 후보 명단에 낙점을 받으면 「서하」라 하고, 혹 고종이 구전으로 “모인은 모관이 가하다”고 하면 「제수」라고 하였다. 이것은 모두 옛날에 사용하던 내비이다.
25. 명성왕후의 수령직 매매
명성왕후는 비용이 부족한 것을 염려하여 수령 자리를 팔기로 마음먹고 민규호에게 그 정가를 적어 올리도록 하였다. 민규호는 근민관의 관직을 팔 수는 없다고 판단하고 응모자가 없도록 하기 위해 그 가격이 1만꾸러미라면 2만꾸러미로 정하였다
그러나 그 응모자들은 더욱 경쟁이 심하였고, 그들이 관직을 받으면 백성들에게 착취를 강요하여 백성들은 더욱 궁핍하게 되었으므로 민규호는 후회하였다.
26. 민규호의 정치
민규호는 사리가 어둡고 어리석은 민승호의 뒤를 이어 엄한 정치를 하였으나 많은 사람들을 중상하여 조야가 다 그를 두려워하였고, 천리 거리에 있는 사람들도 그의 명령을 따랐다.
그러나 그의 인척과 옛 친구들은 재물을 탐하고 교활하여 침리택, 조병식 등이 권좌에 오른 후로 착취하는 기풍이 날로 심하여 대원군 때와는 완연히 다른 시대 같았다.
27. 민규호의 행패
민태호가 해주판관으로 있을 때 조석여는 감사로 있으면서 매우 엄하게 다스렸다.
하루는 공적인 일로 조석여가 민태호를 준절히 질책하자, 민태호는 분에 못이겨 관사에 돌아간 후 매우 가슴 아파했다. 이때 민규호는 전승지로서 형의 관아에 머물고 있었다. 그는 팔을 꽉 쥐면서 “저놈이 어찌 감히 이런 행동을……”하며, 선화당으로 가서 “조석여야, 너는 이 세상에 민규호가 있는 줄 모르느냐? 사대부가 비록 음관으로 불우락척한 나날을 보내고 있지만 어찌 너 같은 쥐새끼들에게 발로 채일 물건인 줄 아느냐?”라고 한 후 그의 관을 부수고 상투를 휘어잡아 땅에 넘어뜨렸다. 그리고 주먹으로 마구 때렸다. 조석여는 어쩔 수 없이 맞고만 있었다. 그 후 그는 수치심에 못이겨 관직을 버리고 귀향하였다.
상(1894년 이전) ⑤
1. 병자수호조약 때의 상황
병자년(1876) 정월에 일본인들은 맹약을 어기고 그 나라 고관인 흑전청륭1839~1900. 일본 명치유신의 공신으로 1867년에 일본의 전권대사로 강화조약에 참석하였음. 편자주 이 병함을 인솔하고 강화도로 왔다. 그들은 많은 협박과 요구를 하며 겉으로는 전투태세를 취했지만, 그들 속셈은 다시 화약을 체결하려는 것이었으므로 우리 조정에서는 크게 당황하였다.
민규호와 박규수는 협의를 끝낸 후 판부사(판부사) 신헌(신헌)의 관함을 빌려 그를 전권대신으로 임명하고, 그들과 협상을 통하여 타협하게 하였다. 신헌은 명성왕후의 교지를 받고 혹 병란이 일어날까 염려하여, 그들의 청을 모두 받아들여 그들의 욕심을 채워 주자 흑전청융은 물러갔다.
이때 조병식은 강화류수로 있으면서 고종의 뜻이 강화에 있음을 간파하고 상소를 하였다. 그 내용은 “신의 정병이 수만 명이 있습니다만, 강적이 국경을 쳐들어와도 화살 한 발 쏘지도 않고 화의에만 급급하는 것은 신으로서는 매우 부끄럽게 생각합니다”라고 하였다.
이 내용을 들은 사람들은 그의 교사한 행동에 미소를 지었다. 이 일이 발생한 후 물의가 비등하여 박규수가 나라를 그르쳤다고 꾸짖었다. 심지어 북촌사람들은 강화조약을 체결한 죄를 징계하기 위하여 박규수의 관을 부수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것은 그 후 얼마 안되어 박규수가 죽었기 때문이다.
2. 금기수의 일동기유
4월에 승지금기수가 수신사로 임명되어 일본을 가고, 인천 제물포에 일본공관을 설치하였다.
8월에 김기수는 일본에서 돌아와 <일동기유> 세 권을 지어 바쳤다. 이에 수신사의 임무를 잘 수행한 공로로 곡산부사에 임명되었다.
3. 이최응의 우유부단
흑전청륭이 왔을 때 백관들은 날마다 정부에 모여 회의를 개최하고 있었다. 이때 한 사람이 “이번에는 당연히 강화를 해야 합니다”라고 하자, 수상인 흥인군리최응이 “그렇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한 사람이 “이번에는 당연히 싸워야 합니다”라고 하자, 그는 또 “그렇습니다”라고 하고 한 사람이 “만일 싸워서 승리를 거두지 못하면 어떻게 대처하려고 그런 말을 하십니까?”라고 하자, 그는 또 “그렇습니다”라고 하였다. 또 한 사람이 “싸워서 승리하지 못하면 강화를 해야 합니다”라고 하자, 그는 또 “그렇습니다”라고 하여 종일 가부를 결정짓지 못하고 날이 저물면 해산하곤 하였다. 이에 서울 사람들은 그를 「유유정승」이라고 하였다.
4. 병자년의 한해
이해 봄에 비가 오지 않아 보리는 풍년이 들었으나 3월부터 6월까지는 큰 가뭄이 들어 모가 다 타버렸고, 6월 16일에는 하룻밤 사이에 큰비가 내려 개천이 범람하였다.
이때 중복과 립추의 차이가 겨우 3일밖에 되지 않았지만 백성들은 어쩔 수 없이 바짝 마른 모를 이앙하였다. 가뭄은 겨울까지 계속되어 샘이 다 말랐지만 종종 부슬비가 내려 벼 뿌리를 적셔 주었다. 가뭄에 탄 벼와 물이 있는 벼를 막론하고 땅에 있는 모든 벼들은 추수기에 절반밖에 수확되지 않았다. 다만 황재가 없어 「하늘이 다 죽이는 일이 없다」는 옛말을 징험할 수 있었다.
5. 기사, 갑술 흉년과 병자년 흉년
순조 때 기사(1809)와 갑술(1814) 양년에는 큰 흉년이 들었다. 이해에는 큰 가뭄이 들어 8월 초순에 서리가 내렸으므로 큰 흉년이 들고 말았다.
자주 흉년이 든 해는 기사년과 갑술년이라고 말했으나 병자년(1876) 이후에는 기사년과 갑술년이라는 말이 없어지고 병자년에 흉년이 든다고 하였다.
6. 삼남지방의 아사 참상
삼남지방은 수종이 많고 서북지방은 한종이 많기 때문에, 병자년에 서북 지방은 벼가 조금 익었으나 삼남 지방은 벼 한 말에 100전이나 되어 굶어 죽은 사람이 많이 보였다.
시골 마을은 매우 처참하였다. 백성들은 입을 다물고 죽기만 기다리고 있었지만, 나라에서 진휼미를 방출한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다.
7. 서정순과 이승우의 진휼
도처에 진청을 설치하였지만 그 미치는 혜택은 고르지 못하고 모두 관리들에게 돌아갔다. 호남의 순천부사서정순과 경기의 진위현령리승우가 가장 진휼을 잘 했다는 소문이 들렸다.
8. 서울, 호남, 영남의 서리 피해
서울에는 8월 초10일 밤에 서리가 내리고, 호남과 영남은 12일 혹은 13일 밤에 서리가 내려 조종을 늦게 파종한 사람은 수확을 많이 하지 못했다.
9. 정범조의 기우제
지나친 가뭄이 계속된 때라 각군과 읍에서는 곳곳마다 기우제를 지냈다. 그리고 수재들도 기우문을 지어 그 관례를 따랐으므로 민폐만 가중시켰다. 심지어는 쇠고기와 술을 가지고 기생과 함께 산사를 찾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전라감사정범조만은 작은 나귀와 동자 하나만 데리고 제사음식도 없이 도내의 각 산을 찾아 다니며 기우제를 지냈다.
그가 무등산에서 기우제를 지낼 때는 햇빛이 쨍쨍 비추는 곳에 앉아 머리를 조아리며 하늘을 우러러 호소하였다. 그가 꿇어앉은 곳에 갑자기 구름이 생기더니 비가 약간 왔다. 백성들은 그것을 보고 매우 이상하게 생각하였다.
그리고 정범조는 9월에 어머니 상을 당했다. 부임한 지 얼마 안된 날이었다 그는 영내의 장부를 정리하지 못한 것이 많았었다. 그의 아버지 정기세는 어떤 고관을 찾아 같은 당색을 가진 사람에게 후임을 맡겨 그것을 미봉해 주도록 간청하므로 그 후 리돈상이 전라감사에 임명되었다.
10. 조선의 3대 폐단
전주의 아전들은 그 재산과 횡포가 국내에서 제일이었다. 대원군은 조선의 3대 폐단을 충청도의 사족과, 평안도의 기생과, 전주의 아전을 꼽았다.
정범조가 전라감사로 있을 때, 한 아전이 어느 선비 한 사람을 매로 쳐 욕을 보였다. 정범조는 그 아전을 죽이라고 하였다. 그 아전은 정기세에게 뇌물을 갖다 바치고 그 일을 호소하자 정기세는 정범조를 불러 부드럽게 타이르기를, “그 아전이 죄를 짓기는 하였지만 우리집 삼대가 이 병영에 부임하여 아직 한 사람도 죽이지 않았는데 네가 어찌 살인을 하려고 하느냐?”라고 하였다. 정범조는 “삼대가 이 병영에 부임하였으니 소자가 어찌 자리만 지키고 앉아서 밥만 먹고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정기세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여 그 아전은 결국 죽고 말았다.
11. 서정순의 순천 부임
서정순은 서당보의 조카이며 금영목은 금상현의 조카로, 이들은 모두 민규호에게 아첨하였다. 이들은 그의 세력을 힘입어, 서당보는 함경도관찰사가 되고 김상현은 황해도관찰사가 되었다. 이때 사람들은 그것을 매우 대조적이라고 하였다. 모두 조카로서 숙부가 부임하였던 곳으로 부임하였기 때문이다. 그의 숙부들은 모두 감사로 부임하였었다.
그 후 병자년(1876) 가을에 조정에서는 순천이 호남의 큰 도읍으로 한발 피해를 많이 당하였으므로 적임자를 택해야 한다는 여론이 있었다. 서정순이 적임자로 피선되었다.
그는 어머니의 병환을 이유로 호소를 하였으나 정부에서는 허락하지 않아 결국 떠날 준비를 하였다. 그는 떠나는 길에 대원군을 찾아보고 자신이 억지로 부임하는 이유를 설명하였다. 그러나 대원군은 냉소를 지으며 “어찌 정부에 태부인과 간통한 자가 있겠는가? 그리고 어찌 이 늙고 병든 사람이 하룻밤 사이에 임명하여 허락하지 않는 이유를 알겠는가?”라고 하였다.
12. 김상현의 연원
금상현의 자는 위사이며 호는 경산으로, 사계의 후손이다. 그는 대산금매순의 문하생으로, 약관 때부터 영민하고 준수하여 글을 잘한다는 소문이 파다하였다.
김매순의 시에는 「위생토사화생필」이라는 구절이 있다. 이때 신석희는 북촌에서 살고 있었으며 호는 위사로 글을 잘하였으므로 일시 노론의 재자로 추대되어, 북촌에는 위사, 남촌에는 위사라고 하였다.
김상현은 간항하고 고상하여 세상 사람들을 안하무인으로 생각하였으나 그의 글은 하자가 많고 시도 거칠었다. 조금 단련된 것은 사륙문병려문. 이 문체는 네 자와 여섯 자로 대구를 이루며 그 연원은 진의 리사와 한의 가의로부터 나왔음. 편자주 이었다. 그러나 그가 대제학이 되고부터는 나이가 많은 데다가 재기도 적어져서 후배들이 불복하였고, 그가 함경도감사로 있을 때는 청백하지 못하다는 평을 듣기도 하였다.
김상현은 어렸을 때 광주에서 살면서 다산정약용1762-1836. 조선조의 실학자. 호는 다산, 삼미, 여유당, 사암 등이 있으며, 천주교의 세례명은 요한. 1789년 과거에 장원급제하여 가주서, 검열 등을 역임하다가 남인의 공서파의 탄핵으로 해미에 열흘 동안 유배되었다가 풀려났다. 그 후 경기도 암행어사동부승지, 곡산부사 등을 역임하다가 신유박해 때 장기로 유배되어, 「황사영백서사건」으로 강진에 이배된 후 19년 동안 많은 저서를 내놓았음. 편자주 에게 사사하였다. 그러나 그의 나이가 조금 많아지자 다산은 그를 보내면서 “자네는 노론의 명가인데 왜 나를 스승으로 삼으려고 하는가? 그러면 자네 친구들에게 조롱을 받을 걸세. 북촌에 대산이 있으니 그분이 정말 자네 스승일세. 자네는 그분을 스승으로 삼게……”라고 하므로 그는 대산의 고제가 되었다.
그러나 그 연원을 말하자면, 그는 노년에 후배들에게 대산에게는 선생으로 부르게 하고 다산은 그냥 「다산」이라고 하므로 세상 사람들은 그를 경박하다고 하였다.
13. 정약용의 유배와 저서
정약용의 이름은 약광이며, 남인이다. 그는 정종(조)때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은 승지에 그쳤으나 일찍 초계문신당하문관 중에서 문학에 뛰어난 사람을 뽑아 매월 강독과 제술을 시험할 때의 말함. 편자주 으로 임명되어 내각에 들어가서 크게 총애를 받으므로, 이로부터 그를 시기한 사람이 많았다.
그리고 그는 그의 형인 정약종1760~1801. 천주교 회장이며 정다산의 셋째형. 신유박해 때 옥사하였음. 편자주 의 옥사순조 신유년(1801)에 일어난 천주교에 대한 박해사건. 이 사건은 대왕대비 김씨를 바경으로, 벽파가 남인인 시파를 타도하려는 정치적인 술책에서 나왔음. 편자주 에 연좌되어 강진에 유배된 지 19년만에 풀려났다. 그는 유배된 후 아무 할 일도 없었으므로 고금을 연구하고 민생문제와 국가대계에 유념하여 토론도 하고, 저술도 하였다. 그는 근본적인 것을 규명하여 사용할 수 있는 학문을 중요시하였기 때문에 그것이 모두 후세의 법이 되었던 것이다.
그중에서 <목민심서>, <흠흠심서>, <방례초본>, <전제고> 등이 이에 해당하는 것으로, 우리 동방에서 공전절후의 작품이며 반계류형원1622~1673. 1654년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평생을 야인으로 지내며 실학을 전공하였음. 편자주 과 성호리익1681-1673. 류형원의 학통을 계승하여 실학자의 중조가 되었음. 편자주 의 학문에 비해서 더욱 큰 업적을 남긴 것이라고 할 것이다.
그의 시문과 잡저를 수록한 <여유당집> 200권이 전한다.
14. 정약용의 석방
정약용이 그 형의 옥사에 연루되어 진술하기를, “임금을 속일 수 있겠습니까? 임금은 속일 수 없습니다. 그리고 형을 증인으로 세울 수 있겠습니까? 형은 증인으로 세울 수 없습니다”라고 하자, 세상 사람들은 공적인 의리와 사적인 윤리를 다 갖추어 참으로 말하기 어려운 묘언을 하였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는 유배지에 19년 동안 있으면서 온갖 시련을 겪었지만 아무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어느 날 서울로 떠날 좌천객 한 사람을 보내면서 그의 부채에다 시 한 수를 써주었다. 그 첫머리 구절은 「역정추우송인지」이다. 그리고 그는 「리릉귀한수무기」라는 시를 쓴 후 붓을 던지고 오랫동안 그 시를 읊으며 처량하게 눈물을 흘렸다.
그 사람은 서울로 간 후, 어느 재상을 만나 무심코 그 부채를 보였다. 그 재상은 깜짝 놀라며 “정다산이 아직도 인간세계에 살아 있습니까?”라고 하더니, 그 후 그가 석방되었다고 한다.
15. 정약용의 의술
정다산은 의학에 정통하였다. 그를 비방한 사람들은 그의 의술이 서양학에서 나왔다고 하였다.
16. 정약용의 천재성
정다산의 기억력은 절륜하여 세상 사람들은 계곡장유1587~1638. 호는 계곡. 금장생의 문인으로, 우의정을 지냈음. 편자주 와 비교하였다.
하루는 강산리서구1754~1825. 순조 때의 대신. 자는 락서, 호는 상재. 편자주 상국이 영평에서 대궐로 오던 길에 한 소년을 만났다. 소년은 말에다가 서적을 한 짐 싣고 북한사로 가고 있었다. 리상국은 10여 일 후 고향으로 가다가 다시 지난번에 만났던 소년을 만났다. 소년은 또 말 위에다가 서책 한 짐을 싣고 산에서 나오고 있었다.
이상국은 그를 이상하게 여기고 “너는 무엇을 하는 사람인데 글은 읽지 않고 왔다갔다 하느냐?” 하고 물었다. 그 소년은 “벌써 다 읽었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상국은 깜짝 놀라며 “말에 실은 것은 무슨 책이냐?”고 묻자 소년은 “<강목>주자가 지은 <자치통감강목>. 편자주 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상국이 “<강목>을 어찌 열흘 만에 다 읽을 수 있단 말이냐?” 하고 묻자 소년은 “읽은 것이 아니라 다 외웠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상국은 수레를 멈추고 책을 여기저기서 뽑아 그를 시험하였다. 소년은 보지 않고 대충 다 외웠다. 그 소년이 바로 정다산이다.
17. 추사김정희의 <여유당집> 교열
정다산은 이미 천재적인 재주를 타고 나 백가제서를 독파하였다. 다만, 실용적인 학문에만 힘을 기울여 구태여 고인의 학문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약간의 잡박한 하자가 있었다.
그리고 그는 비록 마단림중국 원나라 학자. 편자주 과 고염무중국 명말청초의 학자. 편자주 등보다 못하진 않았지만, 그의 문장은 결국 명청 이후의 여러 명가에 미치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런 점이 있다고 해서 그들의 문장력과 바꿀 수는 없는 것이다. 하루는 그의 아들 유산정학연이 추사금정희를 맞이하여 <여유당집>의 교열을 부탁하면서, 버릴 것은 버리고 남길 것은 남기라고 하였다. 그 교열이 끝나자 금추사는 정유산에게 “선친의 백세대업은 위대한 것이지만 그 저작은 나도 잘 모르고 있는데 어찌 버리고 남기는 것을 함부로 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어찌 전고를 보존하여 후세에 양자운많은 저서를 남겼음. 편자주 같은 사람을 기다리지 않으려고 하십니까?”라고 하였다.
김추사의 문장이 매우 딱딱하여 척독 같은 소품에 그치긴 하였지만 그의 높은 재주와 박식한 학문은 그 나름대로 안목이 있었다.
18. 정약용의 심회
사대부들이 분당한 이후 비록 대유라도 문호에 구속되어 언론이 편파적이었지만, 정다산의 심기는 고상하여 오직 좋은 점만 있으면 그를 스승으로 여겨 선배들 사이에 애증의 차별을 두지 않았다 이때부터 그는 남인들의 미움을 샀다.
19. 13부제의 유래
고종은 부강정책에 예의 주시하여 경장을 서둘렀다. 그러나 많은 신하 중에서 누구 하나 의지할 사람이 없었으므로, 을유년(1885)부터 병술년(1886) 사이에 <여유당집>을 올리라고 하였다. 고종은 정다산과 동시대에 살지 못한 것을 매우 탄식하다가, 그 후 그의 증손 정문섭을 대과에 급제시켜 기용하였다.
지금 13부제를 실시한 것은 정다산의 뜻을 이은 것이다.
20. 정약용 원고를 후손이 매도
정다산의 저술문자는 한 권도 간행하지 못하고 등사한 단행본만 유행하고 있었다. 그중 <흠흠심서>와 <목민심서>는 관리를 다스리는 요령과 형옥의 소송에 관계된 자료이므로 아무리 취지가 다른 사람이라도 귀중하게 소장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지금 그 단행본은 이미 수백 본이 되지만 오자가 많아 읽을 수가 없다.
그리고 정문섭은 무식하여 그 전고를 모두 팔아 버렸다.
21. 과거매매
정축년(1877) 봄에 정시문과를 설치하여 5명의 급제자를 냈다. 이때 남정익은 의주부윤으로 있으면서 돈 10만꾸러미를 상납하고 그의 아들 남규희를 수석으로 급제시켰다.
그리고 그 밖에 4명도 고종의 낙점을 받아 발탁하였다. 이에 금릉위 박영효가 고종에게 말하기를, “지금 서울에는 쌀이 귀하여 굶은 사람이 많으므로 팔방에서 과거 보러 온 사람들을 모아 뇌물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과거를 판다는 소문이 자자합니다. 선비들은 입을 모아 서로 속삭거리고 그들의 원망은 가슴속에 가득하니 누가 전하를 위해 이런 일을 획책하였습니까?”라고 하자 고종은 조금 후회하였다.
22. 박영효와 영혜옹주
박영효는 금주군박정의 후손이며 진사 박원양의 아들이다. 그는 용모가 그림같이 아름다워 자도중국 고대 미남자임. 편자주 의 눈처럼 예뻤으므로 철종은 딸 영혜옹주를 출가시켰다. 철인대비1837~1878. 금문근의 딸. 1851년 왕비로 봉해졌으며 능명은 헌릉. 편자주 는 그를 매우 사랑하여, 예물을 보낼 때 상례를 초월하였다.
박원양은 본래 가난하여 수원 시장에서 신을 팔고 살았는데 하루아침에 가문이 혁혁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후 얼마 안되어 영혜옹주가 세상을 떠났다.
23. 정축년의 장마 피해
여름과 가을 사이에 한 달 이상이나 장마가 계속되어, 밀과 보리가 탈곡장에 쌓여 있지만 무더운 비에 젖어서 흉하게 썩어 있는 것이 70퍼센트는 되었다.
이때 고향으로 돌아간 류민들은 일조에 보리밥을 먹자 설사가 나고 독진이 발생하였으나, 죽음을 면한 사람들은 가을을 지나서 겨우 생기가 돌았다.
각도의 진정
가을에 암행어사를 파견하여 진정을 살폈는데, 충청우도의 리건창과 전라우도의 어윤중이 가장 명성을 떨쳤고 그 나머지는 관례를 따를 뿐이었다.
그때 충청도감사조병식은 착취를 한다는 소문이 자자하므로 이건창이 조사하여 임금께 보고하였고, 충청좌도리승고는 일도의 복성으로 추대되어 표창하자는 장계가 올려졌으나 시비가 비등하여 취소되었다. 모두 이런 예였다.
24. 조병식과 이건창의 유배
조병식은 민씨의 빌붙어 세도가 충천하였으나 리건창은 조그마한 한 소년으로 기개를 떨쳐 조병식을 조금도 용서해 주지 않자 그때 사람들의 여론은 그를 칭찬한 말이 많았다. 이때 민규호는 조병식을 강력히 비호하였으나 다시 조사를 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조병식은 공의에 굴복하여 지도로 유배되고, 이건창은 많은 인명을 살해하였다는 무고를 당하여 벽동군으로 유배되었다.
25. 이건창의 조병식 탄핵 전말
리건창이 조병식을 탄핵할 때 고종이 민규호의 말을 받아 들여 조병식을 두둔한 것은 그 탄핵서가 드러나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은밀히 무감 두 명을 보내 도중에서 그의 계초를 빼앗아 포창서로 바꾸었다.
이건창은 그 사실을 알고 사잇길로 가서 그 탄핵서를 직접 승정원으로 올렸다. 고종은 그 사실이 발각된 것을 크게 노하고 있던 중, 그가 입대할 때 고종의 얼굴은 더욱 노기를 띤 채 큰소리로 “너같이 나이 어리고 어리석은 자가 어찌 조병식의 일을 다 아느냐?”하고 물었다. 이건창은 황공하게 대답하기를 “그 실상을 들어 사건을 조사하는 것은 부득이한 일입니다”라고 하였다.
고종은 “그것은 너무 오랫동안 그들을 배척한 행위가 아닌가?”라고 하였다.
그것은 이건창의 선대에 조병식의 집안과 신임사화로 인하여 대대로 혐오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민규호는 그 일로 인하여 중상모략을 꾀하고 있었다.
이때 그는 고종에게 대답하기를, “하늘의 해가 위에 있는데 신이 어찌 그런 일을 하겠습니까? 단지 신이 어사의 직분을 갖고 있기 때문에 어사의 직분을 이행한 것뿐입니다”라고 한 후 그의 불법행위를 대충 아뢰었다. 그러나 고종은 아무 말을 하지 않고 있다가 물러가라고 하였다. 이로부터 고종은 이건창을 과격하게 생각하여 크게 기용할 뜻이 없었다.
상(1894년 이전) ⑥
1. 과거제도
무인년(1878) 봄에 정시과를 설치하였다. 국조 중엽 이후 대과를 설치하여 선비들을 급제시켰지만 그 과목이 매우 번거로웠다. 그것은 매 식년3년마다 한 번씩 시험을 치른 해. 편자주 마다 론, 부, 책 등을 먼저 시험하고 그 후에 경서를 시험하여 이를 동당과라고 하였다. 이것은 곧 옛날 진사과이다.
그리고 3년마다 팔도의 선비들을 모아 시험하였는데 이것을 정시과라고 하며, 국가에 경축일이 있을 때 동당에서 복시를 치러서 이를 증광과라고 하였다.
물론 서울에서 치르는 과거시험일지라도 과거장에서 무슨 일이 발생하면 간혹 파방할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3년마다 과거시험을 한 번씩 마련하여 간혹 방외자에게도 기회를 주는 것을 정시과라고 하고, 왕과 동궁이 친히 석전을 하여 반궁성균관의 이칭 편자주 에서 시험을 치르는 것은 알성과라고 한다.
그리고 매년 봄과 가을에 생원, 진사 및 성균관학생, 재임거재유생 중의 일원. 편자주 등에게 보인 시험을 도기과라고 하고, 재상의 자제들에게 삼경 중에서 한 질을 택하여 왕 앞에서 등을 지고 외는 것을 일차과라고 한다. 또 경축일 및 명절에 유생들을 전정으로 불러 치른 시험을 응제료, 증광시 같으면서도 대과만 취한 것은 별시과, 매년 대보단 제향 후 그곳에서 병자년(1876)에 척화 및 순절한 명신의 자손들에게 보게 한 시험은 충량과, 식년마다 팔도의 향시 합격자를 모아 칠서를 시험하여 뽑는 것은 명경과, 서울에서 대소과의 초시를 보다가 시험장에서 무슨 사건이 발생하여 파방될 경우 다시 선비들을 모아 대소과를 치르게 한 것은 륜차과, 또 역적을 제거하기 위하여 특별히 마련한 시험은 토역과, 또는 고시관에게 특명을 내려 지방으로 가서 어느 한 도의 선비들에게 보인 시험은 도과, 늙도록 과거에 실패한 사람을 위하여 로유들이 보는 것을 로인과, 또한 왕족들에게 시험을 보게 하여 친족에게 사정을 보인 것은 종친과라고 하였다.
이상이 과거제도를 대별한 것으로서 륜차과 이하는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리고 순조, 헌종 이후에는 권척들이 집권하여 모든 기무가 공도를 상실하였으므로 과거의 폐단이 더욱 심하였다. 이에 소위 통과라는 것이 있었는데, 이것은 여러 사람의 눈이 부끄러워 만든 것으로서 귀족들의 자제들만 급제시켰다. 금년에 뽑지 않은 사람은 명년에 뽑아 그 서차를 헤아려 가며 강력히 추진하였다. 이것을 상전으로 삼은 것이다. 이것은 곧 고려 말기에 실시한 홍분방권문세도가의 자제들이 과거에 급제한 명단. 편자주 의 전철을 밟은 것이다.
임금이 수시로 마음을 바로 세워 시골의 백성들을 위로하기 위하여 억지로 공도를 행하려고 하면 초야의 천민들도 종종 급제하였지만, 그들은 문벌에 짓눌려 잠적하고 있으면서 발을 동동 구르며 그 억울함을 분통하게 여겼으므로 과거를 보지 않는 것만 못하였다.
그러나 고종 10년(1873) 이후에는 세자의 탄생과 경축일이 거듭 있었으므로 고종은 과거시험이 공도를 지키는 것은 세자의 복이라고 인식한 것이며 부득이 치른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이때 공도를 지켜 과거에 급제한 사람이 많자 권력이 있는 사람들은 고종의 뜻을 잘 헤아리고 있다가, 공도를 지키라는 명령이 내려지면 금부, 서리, 별감, 사알, 내시로부터 승지, 한림, 주서, 시종에 이르기까지 악전왕이 밖에 나왔을 때 휴식을 취하던 임시 어엄전. 편자주 을 오르내리며 서로 한마음으로 뭉쳐 시권을 주고받아 제각기 1축을 작성하였다. 그 축은 사알축, 내시축, 정원축, 각신축 등이 있는데 서로 돌려 가면서 고시관에게 갖다 주었다. 그러므로 그 고시관이 비록 공도를 잘 지킨다 하더라도 옛날 홍분방처럼 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지방 부호들도 액속들에게 많은 뇌물을 주어 그 축에 들어갔으므로 그들도 뽑힌 사람들이 많았다. 이 밖에도 시권이 탈락된 많은 사람들은, 한편으로 조지서에 그 시권을 갖다 주어 과거 보는 사람들은 그들의 비행을 지적하며 가슴 아파했다.
2. 구제의 정시과
옛날 제도에 정시과를 치를 때는 시험장의 규칙이 매우 엄격하여 생원, 진사, 관학유생 및 초시를 거치지 않은 사람은 입장을 허용하지 않았다. 또 입장을 하여 급제를 하였더라도 중죄를 적용하였으므로 선비들 중에 벼슬을 목표로 하는 사람은 반드시 소과와 대과를 겸하였으므로, 과거를 보러온 유생들은 생원, 진사시험이 대과를 보는 단계가 되기 때문에 기어이 급제하였다.
그러나 영조 말엽에는 은전을 널리 베풀어 종종 지방 선비들에게도 시험을 치를 수 있도록 개방하였다. 그 개방된 지방 선비들의 범위는 생원, 진사 및 관학유생에만 국한하지 않았다. 이에 창우와 여대들도 도포와 유건만 걸치면 모두 선비행세를 하였는데, 근세에는 조정의 강령이 날로 문란하고 과거제도도 해이되어 과거시험장이 무슨 시장이나 된 듯 요란하고 잡답하여 욕설과 싸움질이 판을 치고, 그중에서 조금 간사한 사람은 옆에서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그들은 세상을 무시하는 마음이 없었다고 말할 수 없다.
이때부터 재주 많고 학식이 높은 사람은 자신의 뜻을 간직하여 일체 과거에 참여하지 않는 것을 고상하게 여겼다.
3. 정시의 속권모발
정시를 치를 때 받은 시권은 10만여 장이나 되지만 그 내용은 수백 편에 불과하였다. 그것은 입장한 사람 100명 중 선비는 1명밖에 되지 않는 데다가 한 사람이 글을 지어 놓으면 1천명쯤은 그것을 등사하였기 때문이다. 이런 부류들은 설사 경형죄인의 이마에 먹물로 쪼아 표시한 형벌. 편자주 과 월형죄인의 발뒤꿈치를 베는 형벌. 편자주 으로 처형하더라도 어떻게 금지할 도리가 없었다.
그리고 주시관도 정신이 피로하고 눈에 현기증이 생겨 자세히 고사를 할 수 없었으므로 그 시권을 묶어 놓고 마음대로 뽑아서 합격을 시켰다.
4. 목불식정의 경재
요즈음 경재들은 모두 통과 출신이었다. 그들은 본래 문자를 알아볼 수 있는 식견이 없었으므로 고시관의 책임을 맡았을 때는 그 수고를 무릅쓰고 뇌물을 바친 사람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심지어는 목에 힘을 준 사람과 고관을 끼고 남에게 부림을 당하지 않는 사람들까지도 자신이 공도를 잘 지킨다고 자랑하였다.
그들은 낫놓고 기역자도 모르고, 어떤 것이 모래고 금인지도 구별하지 못하였다. 그들이 말한 공도는 결국 시권을 묶어놓고 마음대로 뽑는 것에 불과하였으므로, 그때 사람들의 속담에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주시관이 과거꾼을 시험하여 기역자도 모르는 급제자를 뽑는다」고 하였다.
흥인군리최응과 침순택은 영의정으로 있으면서 여러 차례 관직을 임명하였지만, 이 두 사람은 정신이 몽롱하여 어떤 것이 좋고 나쁜지 구별을 잘 하지 못하였다. 그들은 시권을 보고 잘하고 못함을 구분하지 못하여, 합격과 불합격을 그들 마음대로 결정하였다. 그러므로 이 두 사람이 고시관으로 임명되면 글을 잘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서로 기뻐하였다.
5. 김병시와 김홍집의 공선
재상금병시는 조금 공정하고, 금홍집은 조금 글을 잘하여 고종에게 예우를 받았다. 그러므로 고종이 통과를 치를 때는 리최응과 침순택을 고시관으로 임명하고, 공정한 선발을 하고자 할 때는 김병시와 김홍집을 고시관으로 임명하였다.
6. 소과제도
소과는 초시와 회시가 있으며 생원과 진사로 구별되지만, 세속에서는 통칭 진사시라고 한다.
그 초시가 인, 신, 사, 해의 해에 설치되면 이를 식년과라고 하며, 나라에 경축일이 있을 때 설치하는 것을 증광시, 매년 대사성이 관리 및 신사의 자제들을 시험하여 1월부터 12월말까지 12회에 걸쳐 뽑힌 인원 중에서 선발하는 시험을 승보, 각도의 감영과 류영에서 매 식년 가을에 각 도도에서 뽑힌 인원을 다시 시험하는 것을 복시 또는 공도회라고 하였고, 응제 대소과의 끝에 붙여서 시험하는 것을 응제초시라고 하였다. 이들은 만 3년이 지난 후 식년회시에 나가도록 하였으므로 속담에 「천초시이백진사」라는 말이 있었다.
그러나 증광회시만은 다른 곳에 붙이지 못하게 하고 표로 만들어 써서 경회에 내놓도록 하였다. 그 시문은 의, 의를 제출하여 합격하면 이를 종장생원이라고 하였고, 시와 부가 합격하면 초장진사라고 하였다
그 시험 보는 법은 초시와 회시를 막론하고 먼저 시부를 시험하였으므로 이를 초장이라 하고, 하루를 지나서 의, 의를 시험한 것을 종장이라고 하였다. 그중 회시에 합격하면 초장과 종장을 막론하고 이를 모두 진사라고 한다
그리고 그 방은, 식년의 소과를 인판에 이름을 기록하여 이를 사마방이라 하는데, 이것을 중국으로 보냈다. 증광시는 방을 내기는 하였으나 중국으로 보내지는 않았으므로, 소과에서는 식년이 가장 소중하였다.
7. 초시, 회시와 서울의 승보 및 각도의 복시, 공도회의 응제시
경향의 초시에 초장을 보는 사람들은 회시에서도 초장을 보며, 종장에서도 그렇게 하며 일정한 규례를 바꿀 수 없다.
그리고 각도의 초시에서도 좌도에서 뽑힌 사람들은 회시의 1소에서 시험을 보고, 우도에서 뽑힌 사람들은 2소에서 시험을 치러 일정한 규례를 바꿀 수 없었다.
그러나 서울의 승보와 각도의 복시, 공도회 및 응제에 붙여서 시험을 치르는 사람은 초종장의 1,2소에 구애받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볼 수 있다. 그들은 그 주시관과 친하고 안 친한 것을 살피고, 또 뇌물이 통하고 안 통하는 것을 잘 헤아려 가장 빠르게 통할 수 있는 길을 신축성 있게 대처할 수 있으므로, 과거 보는 사람들은 이 세 가지 시험에 가장 많이 모였다.
8. 생원 칭호의 기피
방언에, 늙은 유생을 생원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회시에서 생원에 합격한 사람이 자신을 진사라고 칭하는 것은, 그 늙은 유생과 칭호가 같은 것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초시에서 승보와 복시를 독차지한 사람들은 모두 서울과 시골에서 세력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므로 그들은 더욱 생원이란 칭호를 싫어하였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이 초장으로 모이기 때문에 회시와 동일하게 시험을 치렀지만 진사시험이 더욱 어려워져서, 요사이 기회주의자들은 생원시험이 조금 쉽다고 하면서 종종 종장으로 모여들기도 하였다.
9. 과문의 종류
국조에서 과거문의 호칭은 륙체이다. 시부는 대과, 소과, 초시, 회시에 통용하고, 의와 의는 소과, 초시, 회시에만 사용되며, 표와 책은 별시, 증광시, 대과, 초시, 회시에 사용되지만 표는 혹 응제에도 사용된다.
그러나 시골 선비들은 사륙체에 능하지 못하므로 응제에는 간혹 서울 선비에게는 표를 제출하게 하고, 시골 선비에게는 부를 제출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근세에는 서울의 사대부들이 부귀를 누리며 놀기를 좋아하여, 평일에 붓을 가까이 하지 않고 가난한 선비들을 자기 집에 뫼셔 같이 생활하고 있다가, 시험만 다가오면 그들에게 답안지를 쓰도록 하였다.
이 답안지를 대신 지어 주는 사람을 거벽이라고 하며 대서하는 사람을 사수라고 한다. 그들은 한가히 누워서 <저보>에 보도된 모일 모과를 치른다는 기사만 보면 목청을 돋구어 “거벽과 사수가 어디에 있느냐?”하고 묻기 일쑤였다
서울 이외의 지방 부호들도 이런 관습을 본받아, 글자 한 자 읽지 않고도 그들의 시권에 씌어진 답안이 모두 가작이었다. 주시관이 설령 공정한 심사를 하더라도 선발된 사람들은 모두 부귀를 누린 자제들이었다. 이에 “공자가 주시관이 되더라도 석숭중국 진의 남피인. 자는 계륜. 원강 초에 여러 차례 형주자사(형주자리)가 되고, 무역으로 큰 부를 누려 하양의 금곡에 별장을 두었음. 편자주 을 장원으로 뽑았을 것이다”라고 한 노래가 유행하였다.
10. 조흘강과 외장
옛 제도에는 매 식년마다 수령이 그 고을에서 초시 보는 자제들을 불러 <소학>을 강하도록 하고 그 강에서 통을 받은 선비에게 식년초시를 허락하여 이를 조흘강이라고 하고, 또 그 연령과 관향 및 강에서 통을 받아 초시에 참여할 수 있는 사유 등을 기록한 후 인장이 찍혀진 첩을 만들어 이를 자격증으로 주었다. 이것을 조흘첩이라고 한다.
그리고 시험장을 입장할 때 그 조흘첩을 갓 끝에 매고 입장하였는데, 관리들은 시험장 문 앞에 앉아 있다가 그 조흘첩이 있으면 들여보내고 없으면 거절하였다.
그리고 회시도 전기 5일부터 8도의 향시에 급제한 선비들을 불러 시강을 하면서 위의 법과 같이 한 사람에게 첩 하나씩을 주고, 이것이 없는 사람에게는 입장을 거절하였다. 그러나 초시를 보는 사람에게는 시한에 아무런 구애를 받지 않았으므로 날짜를 늦추려면 늦추고 당기려면 당겼으며, 회시는 일정한 정액이 있으므로 금지사항이 가장 엄하여 한 번 강에서 쫓겨나면 백권을 가지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아무리 그 첩을 갖고 있더라도 그 첩은 한 명에게만 국한되었으므로 다른 사람은 입장할 수 없었다. 이에 그들은 가난하고 돈이 없는 사람에게 그 첩을 샀다. 이것을 매좌라고 한다. 그것은 첩 한 개가 자리 하나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본래 갖고 있던 첩과 그 매좌를 거벽과 사수가 함부로 들여놓아 시권 두 장을 신청하였다. 하나는 자기 이름으로 올리고, 하나는 파는 사람으로 올린 것이다. 이런 악습이 100년 동안이나 지속되어 왔으므로 고종 10년 이후에는 그 폐단이 극에 달하여, 시험장을 마구 입장하여도 아무런 금지도 하지 않았으며, 술과 사탕을 파는 사람들 중에도 젊은 선비들이 거의 절반이나 되었다.
그리고 공경의 자제들은 과거시험이 있을 때마다 시험장에 가지 않고 집에 앉아서 답안지를 써 올렸다. 이것을 외장이라고 하였다. 이런 풍습도 처음에는 금지법에 저촉될까 전전긍긍하였으나, 요사이는 누가 왜 시권을 올리지 않았느냐고 물으면 으레 「오늘은 장외」라고 대답하였다.
11. 중국과 조선의 과거제도
중국은 성마다 과거 보는 사람의 수가 일정하게 정해져 있다. 과거장에는 사랑을 즐비하게 지어 방 한 칸에 한 명씩 거처하도록 하고, 그 방에 시험생이 들어가면 자물쇠를 채워 파수병들에게 지키도록 하였다. 그러므로 화재가 발생하면 그들은 타죽기 일쑤였다. 이것을 장옥이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그 이름만 사용할 뿐 그 방식은 사용하지 않았다. 모든 시험장소는 객사를 사용하여, 그 객사 주변에 있는 담 밖에 말뚝을 박고 가시로 둘러 놓았다. 이것은 시성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사랑 연목에다 색줄을 쳐 놓았다. 이것은 망박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담에 붙은 문은 미리 봉쇄해 놓고 있다가 시험 보기 하루 전에 문을 열어 과거 보는 선비들을 들여보냈다. 이것은 부문이라고 한다. 그 선비들을 다 들여보낸 후 말뚝을 꽃아 놓고 우산을 덮어 놓는다. 이것은 의막 라고 한다.
그리고 망박 위에 판을 하나 걸어 놓고 시험제목을 걸 준비를 해놓았다. 이것을 현제판이라고 한다. 그 망박 밖에는 네 군데의 출구를 내 놓고 이를 동정, 서정, 남정, 북정이라고 하고, 그 시험일이 되면 첩을 일일이 조사하여 시험생을 들어가게 하였는데 이를 입문이라고 하였다.
시험생들이 시권을 올리면 그 순서를 구별하여 천자문의 글자로 표시를 하고 이를 전자라고 하였고, 진자를 마친 후에는 그 봉지를 뜯어 다른 봉지에 봉함한 다음 다른 곳에 비장해 둔다. 이것을 할봉이라고 한다.
서울에서 시험을 볼 때는 시험장소가 일정하지 않아 성균관, 비천당, 례조, 삼군부 등에 마음대로 정했다. 회시도 그렇게 하였지만 그 격식은 각도와 대충 같았다.
12. 상시, 부시, 참시의 선임
지방의 고시관은 상시 한 명을 서울에서 임명하여 보내고, 부시 한 명과 참시 한 명은 감사가 도내의 수령을 임명하였다. 그리고 할봉관 한 명도 부시와 참시의 예에 의하여 임명되었다. 이 세 시관 중에서 상시관이 붓을 잡는다.
그러나 방목을 게시할 때, 부시관과 참시관 중 한 사람의 의견이 맞지 않아 날인을 하지 않았을 때는 그 방목을 게시하지 못하였다.
13. 지방 주시관의 변천
중세에 삼남지방과 관서 및 관북지방에는 경시관 두 명이 발령되었고 기타 지방에는 경시관 한 명이 발령되었다.
그러나 철종 때에는 5도의 반을 관찰사로 대체하여 경시관을 한 명만 임명하였다.
그리고 관동과 해서지방에는 경시관을 폐지하고 감사가 주관하였다. 맨 처음에는 과거장의 폐단이 막심하여 관직이 높고 위엄이 있는 도신에게 선비들의 마음을 진정시키도록 기대하였으나, 그 후 감사들이 도리어 그 관직과 위엄을 빙자하여 공공연히 과거를 팔므로 명관으로 처음 왔던 경시관들이 아까워 하는 마음을 갖는 것만 못하였다.
14. 초시 매매가
이때 초시를 매매하기 시작하여, 그 가격은 200냥에서 300냥으로 동일하지 않았으나 500냥을 호가하면 사람들은 혀를 내둘렀다.
그러나 갑오년(1894) 이전 두 식년 동안은 1천여 냥씩 하였으나 사람들은 태연하였고, 회시는 대충 1만여 냥씩 하였다. 그것은 화폐가 점차 많아지자 화폐 가치도 점차 떨어졌기 때문이다.
15. 경시관의 당색별 배치
향시 급제자의 방이 나오면 시관들은 먼저 매도할 과를 정하여 자루를 채우고, 그 다음으로는 명목을 내걸어 미붕하려 하였다. 이것을 가수라고 한다. 그것은 도내의 명문 자손들을 말한 것이다.
그리고 실재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과거장에서 명성이 있는 사람을 말한 것이다. 만일 과거를 열 자리 팔았다면 이 두 사람 중에서 그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그리고 북관의 10개 주는 북평사가 경시관의 일을 맡아보았으나, 북평사를 폐지하고 안무사를 두고부터는 안무사가 북평사의 일을 관장하였으므로 경시관으로 나간 사람들은 관서와 삼남 네 자리뿐이었다.
이에 사색당인을 4도로 분배하여, 관서에는 관광할 수 있는 루관과 산천을 미리 정해 두고 식사할 때는 노래 부를 기생들을 마련하여 로론의 자리로 정하였고, 영남은 모두 남인들이라 남인이 임명되면 공정한 고시를 할 수 없으므로 소론과 북인을 참석시켰다.
그리고 호서에는 시골 수령들을 간혹 임명하였으므로 세력 있는 강족들이 행패를 부렸다. 이것이 관습화되어 그들은 종종 고시관의 상투를 잡고 행패를 부렸으므로, 고시관의 후보에 오른 사람들은 임명되기를 회피하여 가난한 조사들이 종종 임명되었다.
그러므로 북인들은 호서를 많이 주관하였다. 호남은 일국의 재부로서 물산이 풍족하였으므로 초시를 사는 사람들도 거액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그곳은 주민들의 성품이 유순하여 제압하기에 쉬웠으므로 매우 중요한 자리로 여겨졌으며, 관서 지방은 남인, 소론, 북인의 3색 당인 중 유력한 사람이 임명되었다.
16. 경시관의 반비전과 락폭전
경시관은 봉급이 없고 다만 내사전으로 주는 800냥뿐이므로 방을 게시한 후 시험답안지(묵권)를 거두어 팔았다. 이것을 락폭전이라고 한다.
17. 진시상
회시를 볼 사람이 기공상1년상과 3월상. 편자주 과 중상할아버지나 아버지의 상. 편자주 을 당했을 때에는, 예조에 신고하면 증빙서류(문빙)를 내주어 다음 시험을 기다리도록 하였다. 이것을 진시상이라고 한다.
그러나 요즈음은 난봉꾼들이 암암리에 연락하여 미리 기회를 엿보고 있다가, 예조의 관리에게 뇌물을 주어 진시장을 받아내거나 혹은 미리 진시장을 내주어, 시험에 합격하면 장부에서 이름을 삭제하고 불합격이 되면 장부에 이름을 기록하여 후일의 여지를 두었다. 그 후일의 시험 때도 그런 방법을 사용하였고, 그 다음 시험도 그런 방법을 사용하였으므로 그 사이 5, 6차에 걸쳐 시험에 합격한 사람도 있었다
18. 회시 묵권의 2중 제출
회시의 묵권을 이중으로 바칠 경우 그 사실이 탄로나면 비록 시험에 합격한 사람이라도 그 시험에서 제명되고, 따라서 그 사람도 유배되었다.
그러나 요즈음, 유배된 사람이 줄을 이었지만 묵권을 이중으로 바치는 사람들은 그치지 않았다.
19. 삼전진사
옛 제도의 응제에는 대과의 한두 명만 뽑았으나, 갑술년(1874) 이후에는 대소과를 다 취하였으므로 사람들은 응제 때 소과에 합격한 사람을 가리켜 삼전진사라고 하였다.
그것은 방언에, 돈 10문을 1전이라고 하였으므로 응제시험을 치를 때 그 시권의 종이를 30문에 사기 때문이다.
20. 고종의 곡연유희
고종은 놀기를 좋아하여, 집정한 이후 날마다 밤이 되면 잔치를 베풀고 음란한 생활을 하였다. 광대와 무당과 소경들도 노래를 부르고 거드름을 피웠다. 대궐에는 등불을 대낮처럼 훤히 밝히고 새벽이 되도록 놀다가, 4-5시 내지 7시경이 되면 휘장을 치고 어좌에 누워 잠을 자고 오후 3시나 4시에 일어났다.
이런 일을 날마다 반복하므로 나이 어린 세자는 습관이 되어 아침 햇살이 창가에 비추면 량전의 옷을 붙들고 “마마, 잠자러 가요?” 하고 졸라댔다.
이로부터 모든 관장들도 게으름을 피우고 기무도 해이해지기 시작하였다. 고종이 친임하여 시험을 치를 때도 날이 저문 후에 출궁하였다가 잠시 후 다시 들어가 버리므로 과거 보는 사람들은 정신없이 촛불을 켜고 시권을 쓰곤 하였다.
고종은 놀기를 좋아하여 과거를 유희로 생각하였으므로 매월 과거시험을 치렀다. 어떤 때는 한 달에 두 번씩 과거시험을 치르기도 하였고, 혹은 걱정이 있거나 무료하면 과거장을 설치하라는 명을 내리므로 서울 선비들은 조금 소원한 사이라도 만나기만 하면 “오늘은 과거 보라는 명령이 없었습니까?”라고 먼저 물어 보았다. 이에 지방 선비들도 관광을 즐겨 1년 내내 쌀을 요구한 사람이 있었다.
21. 대과 매매가
응제를 치르라는 명령이 있을 때마다 물장수, 나무장수, 인분통을 메는 사람까지 짐을 내려 놓고 유건을 쓰고서 삼삼오오 길을 왕래하므로, 서울에 온 중국 사람들은 그들을 가리켜 “조선에는 인재도 많다”고 하였다. 또 어떤 사람은 그들의 손을 잡고 속삭이기를, “당신은 돈이 몇만 냥쯤 있습니까?” 하고 묻기도 하였다. 이때 대과의 매매가는 10만여 냥쯤 되었기 때문이다.
22. 사대부, 중인, 상민의 등급
우리나라 제도에 문벌의 등급이 있는데 서울에서의 그 등급은 더욱 심하였다. 사대부의 1등급은 그 직업이 관직이고, 중인의 1등급은 통역, 상인의 1등급은 상업으로 하인들은 중, 하의 등급이 있어 그 명목이 가장 많았다.
그들은 통역 이외에도 의술, 음양가, 률학, 력학, 사자관, 각 관사의 아전, 각도의 청지기 등의 직업을 대대로 이어받았다. 이들을 통칭 중인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하급은 백집사 및 공사천역을 도맡아 하였다. 이들은 모두 상한으로서 수백 년 동안 그 직업에 종사하여 직업을 절대 혼동할 수 없었다. 그 중인이 만일 과거에 급제할 경우 그 직업에 구애되어 사대부들이 거들떠보지도 않았으므로 그들은 오나가나 소속될 곳이 없기 때문에 과거는 별도의 일로 생각하여 상을 준다 하여도 과거를 보지 않았고, 진사는 관적과 무관하여 청직으로 흠모하였으나 급제할 길이 없으므로 바라만 볼 뿐이었다.
그러나 응제를 자주 치러 요행의 길이 열리기 시작하자 그들은 관청 구실아치들과 결탁하여 돈 바칠 길을 잡은 후로는, 진사시험에 합격하는 것을 주머니에 든 물건처림 쉽게 여기어 떼를 지어 과거장을 드나들었으나 그들이 대과에는 끝까지 원하지 않았다.
23. 무과제도
문과와 무과는 계제가 달라 비록 높고 낮은 점은 있더라도 하늘과 땅처럼 현격한 차이는 없었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역대 왕조로부터 큰 병란과 큰 역사를 겪으면 무과시험을 치러서 수천 명을 기용하기도 하고 혹은 1만명까지도 기용하였다. 이는 숙종 때 강도의 성역과 정종 때 수원성을 쌓은 것이 그 좋은 예이다.
그리고 그 시험을 통하여 기용하는 방법은 대충 대소과를 모방하여 별시, 증광시, 알성시 등을 두고 문과와 함께 설치하였으며, 식년과를 둔 것은 문과의 명경과와 같고, 각도의 병수영에 도시과를 둔 것은 관찰사가 도회지에서 인재를 뽑은 것과 같은 것이며, 서울의 5영에서 군문과를 둔 것은 대사성이 폐보에서 인재를 뽑은 것과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언제나 방을 게시할 때는 적어도 그 수가 100명을 내리지 않았고 그 시험에 급제한 사람은 출신문무과나 잡과에 급제하고 아직 벼슬길에 오르지 못한 사람. 편자주 아니면 선달이었다. 이토록 많은 사람을 뽑다 보니 보기에도 천하게 되어 관례의 청사와 점보의 벽에 홍패를 걸어 놓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시골 무뢰배들도 약간의 욕설을 퍼붓다가 두어 잔의 술잔만 나누어도 선달이 되기 때문에, 인근 마을 사람들은 서로 웃으며 「모선달」이라고 불렀다. 그러므로 그 선달들은 대대로 명장을 지낸 집안에서 가장 부끄럽게 생각하였다.
이런 무리들을 대오로 편성하여 조정에서는 별천하는 규정을 마련하였다. 이 별천이라고 하는 것은 무장집의 자제들에게 과방을 거치지 않고 선전관, 별군직 등을 임명하여 교대로 대궐을 지키게 하고 적절히 임용할 인재로 대비하였다.
24. 무과의 폐강
무과의 조례는 매우 엄하여 무경과 기사를 시험하고 신체와 근력이 규격에 맞지 않으면 불합격시켰다. 그러나 요즈음은 이런 시험을 폐한 지 오래되어, 다만 활만 쏠 뿐이지만 그것도 다른 사람이 대신 쏘았다.
그리고 아무 시험도 보지 않고 방을 내는 때도 있었다.
25. 방목의 종류
문과는 룡방, 무과는 호방, 소과는 련방, 대과는 계방이라고 한다.
25. 무관의 명가
대대로 무관의 명가로는 옛날부터 신, 구, 장을 일컬어 왔다. 신씨의 조상으로는 신립1546~1592. 자는 립지. 니탕개를 격퇴한 후 임란이 일어나자 삼도도순변사로 충주탄금대에서 참패하여 부하장수 금여물과 함께 강물에 투신, 자결하였음. 편자주 , 구씨의 조상은 구인후1578~1658. 인조의 외종형으로 인조반정에 참여하여 정사공신 2등으로 릉성군에 봉해지고, 1644년 어영대장으로 침기원의 모반음모를 적발, 녕국공신 1등으로 릉성부원군에 봉해졌으며, 그 후 우의정과 좌의정을 지냄. 편자주 , 장씨의 조상은 장만1566~1629. 인조반정 후 리괄의 난을 평정하여 진무공신 1등으로 보국숭록대부가 된 후 옥성부원군에 봉해졌다가, 정묘호란 때 적을 막지 못한 죄로 관직을 삭탈당했으나 그 후 복직되었음. 편자주 이다. 그 자손들도 혁혁한 무재를 지내다가 요즈음에 와서는 조금 쇠퇴하여 오직 리충무공의 자손만 교체되지 않고 있다.
이렇듯 무장의 대가로는 열 집에 불과하여 지금까지 면면이 지속하면서 무업을 바꾸지 않고 있었지만, 고종조의 훈련대장 신원희의 아들 신규붕이 문과에 급제하여 무가라는 이유로 여론이 분분하다가 겨우 당록도당록의 약칭. 홍문관교리 이하의 관직을 임명할 때, 부제학 이하의 관원들이 자격 있는 사람을 뽑은 후 다시 영의정이 골라 뽑음. 편자주 에 등록되었다.
이때 많은 사람들은 이충무공의 충훈을 생각할 때 그 자손들의 환도가 문가의 상품에도 못미치는 것을 한탄하고 있었다. “아, 심하다. 국속의 협소함이여!”
상(1894년 이전) ⑦
1. 조선 3대 명신
조선왕조 때 명신 중 시호로 세상에 널리 알려진 세 사람이 있다.
익성공 하면 방재황희1363-1452. 호는 방촌. 고려가 망할 때 두문동에 들어가 은거하고 있었으나 태조의 간청으로 영의정에 올라 농업과 예법을 개정하였음 편자주 인 줄 알고, 문익공하면 정광필1462~1538. 호는 수천. 갑자사화 때 아산으로 유배되었다가 그 후 중종반정으로 인하여 예조판서, 대사헌 등의 요직을 거쳤으며, 삼포왜란을 수습한 후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 등을 지냈음. 편자주 인 줄 알고, 충무공 하면 리순신1545~1598. 사후 영의정에 추증됨. 편자주 인 줄 안다.
그리고 봉호로 알려진 사람에는, 료동백 하면 금응하1580~1619. 건주위를 치기 위해 압록강을 건너가서 명나라의 제독류정과 싸워 그를 폐하고, 조선군 3천 명을 데리고 고군분투하다가 전사하여 명나라 신종이 료동백으로 추봉하였음. 편자주 인 줄 알고 있다.
2. 이문영의 궤변
충무공의 봉사손 리문영은 얼굴이 고요하고 기운도 드러나지 않았다.
병자년(1876) 봄 흑전청륭이 강화도에 정박하고 있을 때 온나라가 모두 두려워하고 있었다.
이때 그가 대원군을 방문하자 대원군은, “당신은 충무공의 사손이니 왜놈을 격파할 좋은 계책이 있습니까?”라고 희롱섞인 말을 하였다. 그는 즉시 “대감은 급히 서둘지 마십시오. 이것은 매우 방어하기 쉬운 일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대원군은 “그 계책이 무엇입니까?”라고 묻자, 그는 “충무공의 8세손이 이렇게 못났으니 청정의 8세손인들 어찌 용맹이 있겠습니까?”라고 하므로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포복절도하였다. 이때 전한 말을 들면 흑전청융은 청정의 8대손이라고 하며, 이문영은 충무공의 8대손이라고 하였다.
3. 송시열과 이순신 후손들
선비로는 우암송시렬을 추대하고 충훈으로는 충무공리순신을 추대하였으므로, 조가에서는 그들의 후손들을 후하게 대우하여 다른 명신가의 자손과 비교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그 두 집안 후손들은 관직에 있으면서 재물을 탐하였으므로, 청렴결백하다는 소문을 들은 사람이 없었다.
4. 민영익의 급제
민영익이 과거에 급제하였다. 그가 거상 중에 있을 때 명성왕후는 손가락을 꼽아 가며 하루가 급하게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과거를 보는 날이 다가오자 그는, “나는 은문과거에 급제한 사람이 자기의 주시관을 부를 때의 호칭. 편자주 이 금병덕이 아니면 과거를 보지 않겠다”고 하였다. 그것은 김병덕이 청백하다는 명망이 있어서 시험을 매우 공정하게 보기 때문이었다.
그 후 김병덕을 주시관으로 임명하자 그는 어김없이 민영익을 뽑았다. 이때 민영익은 또 그를 찾아가 신래명관이 새로 급제한 사람의 집에 가서, 급제자를 호출하여 온갖 욕설과 곤욕을 보이는 일종의 축하행사. 편자주 를 불러 달라고 하자 그의 명망은 일시에 떨어지기 시작하였다. 대원군은이 소문을 듣고 “사람들은 성일이 기재보다 낫다고 하더니 더 못하다”고 탄식하였다.
기재는 김병덕의 부친 금흥근의 자이며, 성일은 김병덕의 자이다.
5. 신방과 신래
신방이라고 하는 것은 고려 말 홍분방이 있을 때부터 조선왕조에 이르기까지 고치지 않고 사용되었다. 그것은 과거에 급제한 사람이 있으면 선배인 명관이 그의 집 문 앞에 도착하여 그를 호출한 후, 불렀다가 다시 손을 저어 물러가게 하고 이런 일을 되풀이하면서 온갖 욕설을 퍼부어 극히 곤욕을 치르게 하였다. 이를 신래라고 하며, 일명 묵희라고도 한다.
과거에 급제한 사람에게 신래로 불러 주지 않으면 세상 사람들은 수치로 생각하였다. 그리고 아무리 선배의 관원이라도 문벌이 같아야 신래로 불렀고, 그렇지 못하면 신래로 불러도 나가지를 않았다. 그 선배는 문과 출신이 아니면 감히 문과 호칭을 할 수 없었고 오직 문과 출신이라야 대소과를 아울러 부를 수 있었다.
그리고 소과 출신은 소과라고 부를 수도 없거니와, 만일 부른다면 삼소과를 급제하여야 일소과를 부를 수 있다. 무과도 무과에 급제한 사람이라야 부를 수 있었다.
6. 고종과 신래
고종은 유회를 좋아하여 방을 낼 때마다 종종 손짓으로 신래를 부르므로 이때부터 신하들은 감히 신래라고 부르지 못하였다. 그것은 한 번 옥수로 희롱한 것이므로 신하로서 따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7. 급제자의 도문, 소분, 유가, 솔창, 효죽
시골 사람이 과거에 급제하면 문무과의 대소과를 막론하고 집에 도착한 즉시 잔치를 베풀었다. 이것을 도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선산에 성묘한 것을 소분, 친구를 방문하기 위하여 마을길을 다닌 것을 유가, 유가할 때 광대들이 피리와 젖대로 앞길을 인도하는 것은 솔창, 가난한 친구들이 돈을 거두어 노비로 준 것을 과부, 마을 앞과 선산에 화표묘를 장식하기 위하여 묘전에 세워 둔 나무. 편자주 를 세워둔 것을 효죽이 라고 한다.
이 효죽은 호남과 영남에서 많이 사용하지만 서북지방에서는 사용한 사람이 없었고, 서울에서는 유가가 3일에 불과하였다.
8. 고종의 노론 자처
고종은 노론으로 자처하면서 군신들을 삼색으로 구분하여 매우 박하게 대우하였다. 만일 참하관동서반의 7품관. 편자주 이 6품으로 승진하는 것은 극히 화려한 것이지만 노론일 경우는 대교가 되고, 소론은 한림, 남인과 북인은 주서가 되었다. 이와 같이 높낮이가 심한 것이다. 다른 관직도 이와 마찬가지였다.
고종은 언제나 대과에 급제한 사람의 려창전시급제자가 전상으로 올라가 왕을 알현하는 것을 말함. 편자주 이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 사람이 노론이면 「친구」라고 부르고, 소론일 때는 「저쪽」이라 하였다. 또 남인과 북인일 때는 「그놈」이라고 하였다.
9. 민영익, 민규호의 불화
민영익은 이미 출세를 한 후 명일 대교로 임명되었다면 내명일에는 한림학사가 되고, 그 내후명일에는 주서로 임명되어 모든 청직을 거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는 1년 사이에 통정대부를 넘어섰다. 량전도 그를 총애하여 그의 말을 따르지 않는 것어 없었다. 그는 하루에 세 번씩 대궐을 출입하였고, 물러나오면 찾아오는 손님들이 많아 뒤늦게 방문한 사람은 종일 그를 만나지 못하였다.
민규호는 고종을 알현할 때마다, 연소한 사람은 독서와 수양을 하게 하고 일찍 벼슬길에 나서서 나랏일을 그르쳐 모든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지 않도록 하기를 권유하였다. 민영익은 이 말을 듣고 매우 불쾌하게 생각하여, 민규호가 무슨 일을 상주할 때는 그가 나서서 저지하였으므로 결국 두 사람 사이가 벌어지고 말았다.
10. 민영익 문하의 8학사
민영익의 자는 자상이며 호는 운미로, 사호는 례정이다. 그는 어릴 때부터 영리했다. 서화를 좋아하고 경박하였으므로 아부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앞을 다투어 아첨하였다. 그는 하는 일마다 번잡하고 행동거지도 무상하여 어린아이 같은 일을 하곤 하였다.
그리고 그의 가문에 출입한 사람 중에서 8학사로 지목된 사람들은 리중칠, 조동희, 홍영식, 금흥균, 홍순형, 침상훈, 금옥균, 어광중 등이다
하루는 그가 첩에다가 글씨를 쓰고 있는데, 어느 좌객이 입이 모자라도록 칭찬을 하자 어윤중은 정색을 하며 “지금 영감께서 맡고 있는 책임이 매우 지대하고 국내의 일도 모두 자신의 일인데, 어찌 글씨만 쓰고 앉아서 시간을 다 보내며 일을 방해하고 정신을 손상하고 있습니까?”라고 하였다. 그는 얼굴빛을 바꾸어 사죄하였다. 이 소문을 들은 사람들은 아첨을 잘한 행위라고 지적하였다.
11. 김보현의 아첨
민영익의 처 김씨는 금영철의 딸이며, 김영철은 금보현의 아들이다.
김보현이 정경으로 나이가 60세가 가까웠을 때의 일이다. 하루는 그가 민영익의 집을 방문하여 대자에게 담배 하나를 주면서 민영익에게 바치도록 하고, “영감은 귀인이라 관계와 연령이 무슨 구애가 되겠습니까?”라는 말을 전했다.
방언에 통정 이상은 「영감」이라 하고, 자헌 이상은 「대감」이라고 한다.
12. 철인왕후의 승하와 장례
5월에 철종의 왕비 김씨가 승하하였다. 왕후의 시호는 철인왕후이며, 금문근의 딸이다. 그는 현명하고 정숙하여 궁내에서 모두 추앙하였다. 그는 철종이 승하한 후로 웃는 얼굴을 남에게 보이지도 않았고, 글도 잘 알고 글씨도 단아하게 잘 썼지만 남에게 한 번도 보이지 않았다.
그가 하루는 은식기 두어 개를 잃어버린 일이 있었다. 좌우의 시녀들이 그것을 찾으려고 하였지만 그는 많은 사람에게 오해가 미칠까 염려하여 그만두라고 명하였다.
그리고 언제나 국상이 있을 때는 대내의 빈전을 일정한 장소에 두었다. 그러나 이때 세자로 말미암아 꺼린 일이 많고 중궁도 흉한 일을 싫어하여 빈전을 멀리 옮기도록 명하였다. 금병덕은 이를 저항하여, “대비가 일국의 왕모 노룻을 한 지 수십 년이 지났지만 이토록 노골적으로 박대를 하면 어떻게 신민에게 사죄할 것입니까?”라고 하였다. 민씨 일파들도 중궁에게 그렇게 하지 말도록 권유하여 결국 빈전을 옮기지 않았다.
9월에 철인왕후를 대왕릉에 부장하였다.
옛날부터 국가의 3대 비용은 칙사를 맞는 일과 가례, 인산 등으로 대충 백만 냥이나 든다. 이때 양전은 아무 절제가 없이 낭비만 하여 비축된 전이 모두 고갈된 상태에 있었으므로 갑자기 대상을 당하여 속수무책이었다.
고종은 부득이 대원군을 불러들여 물었다. 그는 “천천히 생각해 보겠습니다. 훈국훈련도감의 별칭. 편자주 과 동영어영청의 분영. 편자주 에 20만냥을 비축하여 놓았는데 전하께서 혹 모르고 계실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것은 대원군이 집정할 때 동영에 20만을 비축하여 급할 때 사용하려고 한 것이다.
대원군은 그것을 꺼내어 시장 거간꾼들에게 주면서 각 전에 물건 값으로 분배하도록 하고 그 가격이 100퍼센트 오르면 먼저 20퍼센트를 지급하게 하며, 일이 끝나면 문서를 교부하도록 약속을 하였다. 그 상인들은 “운현대감의 분부신데 누가 감히 불응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그 후 열흘 만에 돈이 모두 확보되자 고종은 그의 권위에 감복하여 그를 더욱 두려워하였다.
13. 한계원과 강로의 유배
한계원은 중화부, 강로는 삼화부로 유배하였다. 이 두 사람은 대원군의 문객으로 그들의 자취가 드러날까 두려워하여 교외에서 살고 있다가, 철인왕후의 상을 당하여 분곡도 하지 않으므로 민규호는 대사헌리인명에게 부탁하여 그들을 탄핵하였다.
14. 장신 신정희 부자
신정희가 금위영의 대장이 되었다. 옛날부터 무신은 부자가 한 시대에 등단할 수 없었으나, 신정희는 고종의 총애를 받는데다가 민규호와 친한 사이라 이런 제명이 내린 것이다. 이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의 논란이 분분하였다.
하루는 민영익이 좌객에게 “부자가 장신이 된 것은 옛날에도 그 예가 있습니까?” 하고 물었다 그것은 신진이 국가의 체통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15. 민규호의 사망
이해 겨울에 민규호가 사망하였다. 민규호는 글도 잘 알고 지혜도 넉넉하였다. 그는 량전의 눈치를 잘 살펴 교묘하게 뜻을 잘 받들었으므로 양전은 항시 그를 의지하였다. 그러나 민영익의 출현으로 그 권리가 두 갈래로 나누어지자, 그는 분노로 인한 화병이 발생하여 날마다 석고 두 냥씩을 먹다가 사망하였다.
그는 사망하기 수일 전에 정승의 직함이나 하나 받고 죽기를 원하므로, 즉일 회의를 개최하여 그를 우의정으로 임명하였다. 그의 족인의 아들 민영소를 후사로 세워 그 다음날 대과에 급제시키자 대원군은 책상을 치며 외치기를, “정승이 하고 싶다면 정승을 시키고 대과가 하고 싶다면 대과를 시키니, 지금이 바로 민규호의 세상인가?” 하고 고함을 쳤다.
16. 민규호의 전횡과 김보현의 저항
민규호는 국권을 남용하여 대교를 로론만 임용하려 하였고, 보국숭록대부는 자신이 하고 싶어하였으므로 2년 동안 소론에서는 대교가 없었다.
보국숭록대부는 오직 금보현만이 차지하고 있었다. 그것은 김보현이 민규호의 뜻을 염탐하여 기어이 그 자리를 얻어낸 것으로 그와의 저항을 암시한 것이다.
17. 민태호의 집권
민규호가 사망한 후 황해도 관찰사로 있던 민태호를 불러들였다. 고종은 그를 민규호처럼 의지하였다.
민태호는 자상하고 근신하여 전제정치를 하지 않아 종종 <견록>퇴임한 후 다시 기용할 만한 사람의 명단을 기록한 책. 편자주 에는 빠졌으나 많은 사람에게 칭찬을 들었다. 그러나 민겸호는 민승호의 아우로 자신을 세도가로 자처하였지만 민영익이 그 사이에 끼어, 이때부터 권위가 그쪽으로 기울어져 민규호의 시대만 못하였다.
18. 민겸호의 탐욕과 비루함
민겸호는 재물을 탐내고 무식한 사람으로, 장원과 집을 꾸미고 성악과 여색을 즐겨 뇌물을 청하지 않는 날이 없었다. 그는 고종에게 관직 매매 및 옥사, 수뢰 등을 주도하게 하여 제반 패정을 주관하였다.
19. 민씨의 세도
민영목은 민영익의 먼 일가로, 그는 학식도 있고 방도도 잘 알아 민씨 중에서는 조금 건전한 편이지만 그도 초연히 발탁되어 수년 사이에 정경이 되었다. 이에 민영위, 민영규, 민영상 등이 요직에 있게 되었고 그 밖에 방백, 수령까지도 좋은 자리는 모두 민씨들이 차지하였다. 민씨가 아니면 민씨의 인척들이 차지한 것이다.
그리고 명성왕후도 사가에 빠져 민씨 성만 가지면 촌수에 관계없이 한결같이 여기었으므로 수년 사이에 먼 시골까지도 민씨의 성을 가진 사람은 의기양양하여 남을 잡아먹을 듯이 기세를 부렸다.
그러나 모든 민씨들은 양자들이었고, 그 민정중과 민유중의 혈통을 가진 사람은 오직 민영익 부자와 민영위뿐이었다.
20. 명성왕후의 정경세 후손 우대
문정공송준길1606-1672. 호는 동춘당. 리이 및 금장생의 문인. 병조판서를 역임하였음. 편자주 은 우복정경세1563-1633. 호는 우복. 류성룡의 문인. 성리학과 례학에 밝고 대사헌을 역임하였음. 편자주 의 사위이며, 민유중은 문정공의 사위이다. 명성왕후는 문정공의 집안과 누차 외숙과 생질간의 관계가 있었고 또, 정씨 집안을 미루어 볼 때 외척처럼 여겼으므로 양가의 후손들은 큰 총애를 받아 관원들이 서로 줄을 잇고 있었다. 이때 고종은 대원군 관계로 골육을 멀리하여 무슨 혐오가 있는 것같이 보였으므로 혹자는, “내전이 일가들에 대한 친목을 조금 적게 하고, 대전이 조금만 골육에게 친목을 베풀면 참으로 좋겠다”고 하였다.
명성왕후는 정경세를 「우복 할아버지」라고 불렀다.
21. 명성왕후의 총명
명성왕후는 총명하여 기억력이 좋았으므로 조장, 전고 및 당색의 원파와 문벌의 고하를 모두 암기하였고, 또 소론과 남인같이 준론을 제기한 가문은 일체 배척하였다. 그리고 인현왕후1667-1701. 숙종의 계비로 민유중의 딸임. 편자주 에게 충성한 사람에게는 그 자손이 아무리 불우낙척하더라도 반드시 다 찾아 기용하였다.
22. 세자를 위한 명산기도
명성왕후는 명산의 사찰을 두루 다니며 세자를 위해 기도하였다. 그리고 많은 고사여자 소경. 편자주 들도 군읍을 횡행하면서 후전기후제나 로제를 지낼 때 사용한 지전. 편자주 을 길에 뿌렸다.
금강산은 속칭 1만2천 봉이라고 하는데 그 봉우리마다 규폐바위에 기도제를 지낼 때 사용한 지전. 편자주 의 가치가 1만냥이나 된다고 하면서 스님들은 이를 인연으로 삼아 출입하기 시작하였으며, 그들이 거처한 암자에는 조금 명망이 있는 곳이면 원당을 세우지 않는 곳이 없었다. 이것을 축리라고 한다.
그리고 시골 사람들은 그 스님들을 잘못 건드렸을 때는 형을 받거나 파산한 사람이 많았다.
23. 대원군에 대한 저주기도
정씨의 성을 가진 소경이 금중에서 명성왕후의 사주를 받고 나무로 허수아비를 만들어 대원군을 저주하다가, 그 일이 발각되자 대원군은 그를 체포하여 처형하였다.
24. 정태호와 팔양경
소론인 정태호는 명가의 아들이었다. 그는 일찍이 문과에 급제하여 승지까지 되었으나 팔양경천음지양의 팔양으로 미신을 타파하는 불경. 편자주 을 외운 덕으로 총애를 받아, 아경정경 다음가는 벼슬로 륙조의 참판, 좌우윤 등을 말함. 편자주 과 강원도관찰사 및 황해도관찰사까지 올랐다.
25. 포도대장신명순의 강기
서울의 동서쪽 교외와 남산, 북한산 기슭에는 사찰이 많았다. 무뢰배들은 이를 이용하여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고 다녀 겉으로 보기에는 스님 같았지만 실은 굴실을 마련해 놓고 부녀자들을 끌어들여 음욕을 채우곤 하였다. 그들은 액정서조선조의 관청. 왕명의 전달, 정원의 관리, 지필묵의 조달 등을 맡아보았음. 편자주 의 관속과 친분을 맺고 혹은 강도와 내통하여 약탈하다가 종종 체포되기도 하였지만 중궁이 교지를 내려 석방하였으므로 도난금지령이 아무리 엄하여도 결국 도적들이 줄어들지 않았다.
신명순이 포도대장으로 있을 때, 하루는 도적 13명을 체포해 오자 고종은 석방하라는 명을 내렸다. 그러나 신명순은 고종의 명도 듣지 않고 그들을 일시에 처형하였다. 그리고 그는 화를 내면서 “그들의 소굴을 헐어 버리지 않으면 분이 풀리지 않는다”고 말하고, 포졸들을 시켜 그 암자들을 불지르고 불상도 묶어 오게 하였다. 그 불상 네다섯 개가 새끼줄에 묶여서 종가를 통과하자 구경꾼들은 길을 메웠다.
그 후 신명순은 장부를 풀어 어전에 바치면서 “신이 교지대로 봉행하지 못하여 그 죄가 만번 죽어 마땅하옵니다”라고 하였다. 그 후 그는 체직되자 수년 동안 두문불출하다가 사망하였다.
26. 신명순의 과감성
신명순이 관직을 거친 전후로 성적이 매우 두드러져 그와 친근한 선비들은 그에 대한 송축시를 지어 주었다. 그는 가벼운 갑옷 차림으로 띠를 느슨하게 차 유유자적한 기풍이 있었지만 의기가 격발하면 결연히 몸을 돌아보지 않았다.
하루는 영의정리경재의 족인 아들이 이경재의 하인에게 모욕을 당하자 그는 이경재에게 그 사연을 호소하였다. 이경재는 그를 보고 웃으며 “네가 좀 조심하면 어찌 그런 일이 있겠느냐?”라고 하며 거들어 줄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그는 화가 더욱 치솟아 이 세상에서 이 말을 할 만한 사람은 신명순뿐이다, 만일 신명순도 그를 치죄하지 않는다면 그때 죽여도 늦지 않다고 생각하고, 신명순이 있는 곳으로 가서 그 사연을 호소하였다. 신명순은 웃으며 “이 일은 자네 집안 일인데 왜 나를 번거롭게 하는가? 속히 가서 글공부나 하게”라고 하였다. 그는 문을 나서며 “이것이 천명이로구나…”라고 탄식하였다. 그러나 그가 집에 가서 보니 그 하인이 이미 체포되어 잠시 후 처형되었다는 기별이 왔다. 그의 풍도와 과감성은 이외에도 많이 있었다.
27. 리중칠의 초시공선
무인년(1878) 가을 감시의 초시를 치르려고 하였으나 철인왕후의 인산 전이라 시험일자를 기묘년(1879) 정월로 연기하였다.
이때 전라좌도의 경시관이 된 한림리중칠이 가장 공정한 심사를 했고, 그 다음으로는 청북경시관어윤중이었다.
28. 과거 시행의 남발
기묘년(1879) 2월에 정시를 마련하여 15명의 급제자를 내고 그 후 3일 만에 응제를 치르게 하여 3명의 급제자를 내었다. 그리고 3월 초에는 또 정시를 보아 10명의 급제자를 내었다
29. 천추절의 응제경과
2월 8일은 세자를 위한 천추절이다. 세자가 탄생한 후 매년 이날에 응제경과를 설치하여 대소과의 급제자를 선발하였다. 이 시험은 일정한 정원이 없고 지극히 공정한 시험을 치르는 데 그 목적이 있다. 그것은 세자를 길상으로 인도하기 위한 것이다. 이때 경향 각지의 유생들은 미친 듯이 물려와 종종 파산한 사람까지 있었다.
30. 북당나구
3월 12일 밤 12시경에 무슨 소리가 남쪽에서 들려와 잠깐 사이에 장안을 진동하였다. 그 소리는 「곽곽」 「찰찰」 하고 들려 어떻게 형언할 수가 없었다. 부인들은 북(릉)을 판자에 문지르며 경쟁이나 하듯 서로 북소리를 내었다. 이 소리를 북당라구라고 한다. 우리 방언에 북을 「북」이라고 하고 나귀를 「당나구」라고 하며, 미신에 정씨를 당나귀라고 한다.
이에 어리석은 백성들은 서로 선동하여 정씨가 일어날 징조라고 하였다. 이때 나는 서울에 있으면서 서울에서만 그런 소리가 들렸는 줄 알았는데 서북 사람들을 만나서 물어 봐도 그런 소리를 들었다고 하고, 하향길에 삼남지방 사람에게 물어 봐도 그런 소리를 들었다고 하였다. 다만 그 들린 시각이 한 시간 차이뿐이었다.
이날 밤 새벽 4시경에 큰 지진이 일어났다. 팔도가 다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31. 서울의 괴질만연
8월 중 서울에서는 괴질이 크게 번져 사망자가 무려 6만명이나 되었다. 이때 전령부사금병학도 사망하였다.
32. 경진년 증광시의 파방
경진년(1880) 봄, 세자의 마마가 완쾌되어 증광과를 설치하였다. 경시관이 폐사한 후 고종은 헌당에 임어하여 친히 유시하기를, “춘궁이 수를 하고 못하는 것은 이번 증광과가 공정하고 공정하지 않는 것에 달려 있으니 당신들은 유념하시오”라고 하였다.
이때 홍철주와 금창희는 서울 1, 2소의 시관이 되었다.
그 후 고종은 또 유시하기를 “이번 증광과에 사가 있으면 그것은 나를 임금으로 섬기지 않는 사람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방이 게시되고 보니 남촌과 북촌 경재의 자제들이 급제하여 물의를 일으켰다. 고종은 매우 진노하여 홍철주 등을 유배하고 1, 2소의 방을 파방하였다. 그리고 지방의 방도 파방하였다. 그것은 옛날의 례를 따른 것이다. 그 내용을 본즉, 이때 경시관이 한 사람도 공정한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파방한 후 다시 택일을 하여 과거시험을 치렀다. 지방의 경시관은 그대로 임용하고 서울의 시소에는 정해륜 등을 임명하여 주관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공정성을 외면하고 사사로운 마음을 품어 우물우물 미봉하였다.
낙제한 시골 선비들은 “파방, 파방 또 파방하였으니 파방이 되지 않을까 두렵다”라는 노래를 부르고 다녔다. 고종은 은밀히 이 노래소리를 듣고 다시 파방하려고 하였으나 한 번 파방하는 것도 거창한 일인데 다시 그런 일을 할 수 있겠느냐 싶어 불문에 부치고 말았다.
33. 고종의 시권모발
고종은 과거장이 공정하지 못한 것을 매우 노엽게 생각하고 있었으나 어쩔 수가 없어 동당의 복시 때에는 시권을 묶어 중희당으로 가져오라는 분부를 내리고는 고종과 세자가 돌아가면서 한 장씩 뽑아 33명을 합격시켰다.
서광범과 조한국도 이때의 방에 속해 있었다.
34. 복시의 남발
이때 생원, 진사의 복시를 치르면서 80세 이상과 갑술생(67세)을 모두 방에 붙이라는 특명을 내렸다. 이에 시골 선비들은 10세 내지 20세를 더 올려 혜택을 받고자 한 사람이 무려 300명이나 되었다. 유사는 그 수효가 많은 것을 싫어하여 장부에 적힌 생년을 보고 그 실제 수효를 가려내자고 아뢰었다.
그러자 그 나이를 올린 사람들은 다시 다른 길을 뚫어 옛 장부를 고치므로 한성부의 관리들 중 거부가 된 사람이 있었고, 그 재능과 재산이 없는 수십 명은 결국 탈락되어 서로 상소문을 가지고 1개월이 지나도록 호소를 하므로, 그들도 다시 과거시험을 볼 수 있도록 허락하여 모두 경하하는 뜻을 보였다.
35. 홍철주의 의기
홍철주는 판서홍열모의 종형이다.
그가 충청도의 어사로 있을 때 홍열모는 청풍의 향제로 내려가 만년을 보내고 있으면서 한 기생을 사랑하고 있었다.
그 기생이 첩 노릇을 하면서 집안 살림을 독차지하려 하자 온 집안이 분통해 하였다. 이때 홍철주는 홍열모의 집으로 가서 기생의 머리를 움켜쥐고 박살을 내려고 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힘을 다하여 구하려고 하였으나 그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홍열모의 첩이 머리가 흙범벅이 된 채 눈물을 흘리면서 목숨만 살려 달라고 애걸하므로, 그는 겨우 그 첩을 놓아주었다. 그는 평생 동안 자신의 강한 것을 자부하였고 사람들도 그를 공정하고 청백한 사람이라고 지목하였다.
그러나 과거장의 일이 발각된 후로 그의 친구들마저 그를 비난하자 그는 탄식하기를, “내가 어찌 임금의 뜻을 어겨 큰 죄를 지은 줄 모르겠습니까? 본래 과거란 공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찌 다른 과거는 공정하질 않고 세자의 경과만 공정하여, 신하들에게 고르지 못한 것을 보여서야 되겠습니까? 내가 이번에 공정하게 하지 않은 것은 성상께서 혹 이 일로 인하여 깨달음이 있기를 바라서 그런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36. 수신사금홍집의 일본 방문
경진년(1880) 여름, 전승지금홍집이 수신사로 임명되어 일본을 방문하였다.
제물포를 개항한 지 1년 남짓 되었는데, 이때 일인들은 점차 서울과 가깝게 있기를 간청하므로 조정에서는 신문 밖에 있는 천연정을 그들의 주재지로 허락하여 주었다. 일본의 령사화방의질은 그곳으로 와서 거주하고 있으면서 갖은 요구를 다하였다. 그가 요구한 사항은 약조를 어긴 것이 절반은 되지만 결국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없어 김홍집이 가게 된 것이다.
상(1894년 이전) ⑧
1. 굴본례조의 사망과 화방의질의 도주
일본의 교사 굴본례조와 기타 일인 7명이 사망하자 화방의질은 부하 29명을 인솔하고 인천으로 도주하였다. 미국 군함이 구제하였다. (이 기사는 당연히 임오군란기사 밑에 있어야 함 -- 국사편찬위원회)
2. 김홍집의 나쁜 징조
금홍집의 자는 경능이며 호는 도원으로, 경은부원군금주신의 후예이다.
김주신은 숙종의 국구로, 영종을 도와 신임사화 때 공로가 많았으므로 노론은 그의 덕을 보았다. 그는 대대로 북촌에 살아 세상에서는 북촌소론이라고 하였지만 혼사는 동색만 취해 하였고, 그 밖에 교우 관계도 모두 노론들이었다.
김홍집은 젊어서부터 출세하여 병자년(1876)에 흥양현감으로 부임하였을 때 선정을 하였으므로 백성들은 흉년을 모르고 지냈다. 그리고 그 후 얼마 안되어 그는 통정대부가 되었다. 그는 영민하고 정사에 통달하여 많은 사람들의 칭찬을 받았다.
그가 벼슬을 사임하고 떠날 때 조정에서 하직인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오자 오찬이 나왔다. 그가 수저를 들어 밥을 뜨려 할 때 백자기로 된 밥그룻이 「탕」 하고 깨어졌다. 이 광경을 본 사람들은 모두 대경실색하였다.
이 일이 있은 후로 그는 일본의 사신으로 다녀와 누차 유소의 성토를 받다가, 갑오년(1894)에 그가 집권한 후에는 일본인과 함께 일을 하여 결국 처형되었다. 이때 많은 사람들은 이번 행차가 화근이 된다고 하였으며, 백자 밥그릇이 깨진 것이 그 징조라고 하기도 하였다.
3. 륙조천사
가을에 전현감금락현과 전감역박성양, 리상수 등을 경연관, 서연관 등으로 임명하였다.
이해 여름 경재에게 명하여 문학과 재능과 역량 등 륙조의 조문을 내걸어 이에 해당한 선비를 천거하도록 하였다. 6품부터 포의에 이르기까지 상격에 구애받지 말고 재능만 있으면 선발하라는 것이다. 이에 천거되기를 바란 선비들은 과거 때처럼 청탁을 해 왔다. 수개월 만에 그 인원은 정해졌다.
김낙현은 사계금장생의 후손인데 그는 음관으로 여러 읍재를 맞았으나 뇌물을 탐한다는 소리가 높았고, 박성양은 조금 근신하였으며, 이상수는 글을 잘하여 젊었을 때 서울에 와서 달관들과 많이 사귀었다. 그들은 모두 노론이었다.
그는 시를 잘하였다. 그는 대원군이 청나라에 구금되었을 때 상소하여 부름을 거절하고, 아울러 고종에게 신정대비에게 효도하도록 권고하였으나 대원군을 봉환하라는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4. 완화군의 사망
기묘년(1879) 봄, 완화군선이 사망하였다.
외간의 전하는 말에 의하면 명성왕후가 젓항아리에 거꾸로 넣어 죽였다고 하고, 일설에는 방망이로 때려 죽였다고도 하였다. 라합의 수광죽기 전에 만들어 놓은 묏자리. 편자주 이 동대문 밖에 있었다. 그러나 이때 대원군은 그곳을 빼앗아 완화군의 장례를 치렀다.
5. 라합
라합은 옛 영의정금좌근의 첩이다. 그는 나주의 기생으로 김좌근의 집에 들어왔다. 그는 지혜가 있어 남의 뜻을 잘 살폈다.
김좌근은 처음부터 그의 유혹에 현혹되어 오랫동안 그의 제압을 받다가 결국 국정까지 상의하게 되어 그의 손에서 많은 방백, 수령들이 나왔다. 그는 손님들과 의젓이 내통하여 그의 세력이 한때는 불꽃처럼 치솟았으므로 체면이 없는 자들은 그를 아첨할 대상으로 보고 「나합」이라는 호를 붙여 주었다.
하루는 참판조연창이 나합의 초청을 받아 한자리에 마주앉아 있었다. 이때 김좌근이 갑자기 들어와 그 광경을 보고 꾸짖기를, “영감이 어찌 이곳에 있습니까?”라고 하므로, 나합은 웃으며 “어찌 대감만 관상을 보십니까? 나도 관상 좀 보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는 “그래!”하고 나가 버렸다.
그것은 조연창이 본래 남의 관상을 잘 본다는 소문이 있기 때문이다. 조연창은 그 후 병창으로 개명하였다.
6. 황준헌의 <이언>
경진년(1880) 10월, 금홍집은 일본에서 돌아와 <역언> 2책을 진상하였다.
이 <이언>은 청나라 황준헌이 지은 것으로, 그 내용은 지금 부강을 꾀하는 길은 반드시 서양의 제도를 배워 서양의 기술을 익혀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말이 수십만 마디나 언급되었다. 대충 예를 들면 책사들이 이곳저곳을 다니며 예상한 견해를 적은 것이다. 이 책은 황준헌이 일본에서 가지고 다니던 것을 김홍집이 입수하여 고종의 일독을 대비한 것이다.
그것은 고종이 천하대세를 살펴 국정을 상하에 자문케 하려는 목적이 있을 뿐이며 어떤 사의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식견이 천박한 선비들은 김홍집이 천주교의 서적을 진상한 것으로 오판하여 그를 공격하는 여론이 분분하였다.
7. 영남 유생들의 상소
영남의 일도는 풍기가 강하고 여론이 일치하여, 인조 이후로 국가에 무슨 일이 있거나 방례의 시비나 유현의 거취에 관계된 일이 있으면 처사로 자처한 선비들이 여론을 일으켜 대궐 앞에 모여서 규탄을 하였다.
이것을 복합이라고 한다. 그들의 수는 혹 1만명이 되기도 하고 혹은 수천 명에 이르기도 하였다. 그들은 연명으로 상소하였고 출중한 인물이 아니면 소수가 될 수가 없었으므로 사람들은 그 소수를 부러워하여, 누구 집은 어느 때 소수의 자손이라고 칭하여 덕망 높은 사람으로 인정되기도 하고 명관으로 여겨지기도 하였다.
그들이 처음에는 바른 마음으로 여론을 일으켜 사림의 기절을 떨어뜨리지 않았지만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는 임금의 뜻을 엿보기도 하고 시국에 영합하기도 하여 종종 횡포를 서슴지 않다가, 최근에 와서는 더욱 극렬한 행동을 취하였다.
그리고 이때 김홍집이 일본에서 돌아오자 조야는 그를 의심하여 유언비어를 서로 퍼뜨려, 경진년(1880) 겨울 영남 사람들은 상주에서 대회를 갖고 만인소를 지었다. 이 소문은 서울까지 들렸으므로 서울 사람들은 모두 얼굴빛을 변하여, 만일 영남 유생들의 상소가 올려지더라도 임금이 윤허를 하지 않으면 그들은 일본공관을 파괴하여 일본인들을 모두 죽이고 그들의 의분을 터뜨릴 것으로 생각하였으므로 이때부터 정국은 화기로운 기운이 사라지고 민심은 흉흉하여 조석간에 무슨 일이 터질 것만 같아 어떤 사람들은 손을 이마에 얹고 그 시기를 기다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해 섣달이 지난 후 그들은 서울로 들어와 소청을 마련하였다. 그 상소를 올리기 전에 그 부본이 이미 밖으로 흘러나왔다. 그 내용은 먼저 흥인군리최응(이때 령상이었음)은 당국의 주화파를 성토하고 김홍집이 일본 사신으로 갔다온 후 고종을 사교로 인도한다고 공격하면서 그 종족까지도 아울러 공격하였다. 그 상소 내용은 매우 준엄하였다.
소수는 리만손으로 퇴계리황의 후손이며, 전참판리만운과 전승지리만유도 포함되어 있었다. 민태호는 그 상소를 보고 크게 노하여 이만유 등을 불러 놓고 위협하기를, “만일 상소문을 고치면 전화위복이 되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당신들의 가문에 영향이 미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만유 등은 이만손을 백방으로 설득하여 그 상소의 원고를 고친 후 올렸다. 그 내용에 적힌 말은 매우 온순하였지만 김홍집만은 맹렬히 공격하였다. 그 이유는 이미 당노자와 합하기만 하면 김홍집은 쉽게 참여할 것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고종은 온화한 비답을 내려 그들을 물러가게 하였다.
그 후 이만유는 령해부사로 임명하고 이만운도 승급을 해주었다. 이로부터 세상 사람들은 그들을 꾸짖고 욕을 하므로 영남 사람들의 상소는 갑자기 끊기었다.
8. 허원식, 류원식 등의 유배
전정언허원식, 류원식, 전사과홍시중, 황재현 등과 포의금조영, 금석규, 한홍렬 등이 전후로 상소하여 일본인과 서양인을 배척하므로 그들을 모두 유배하였다. 그 일은 경진년(1880)과 신사년(1881) 사이에 일어난 것이다.
9. 강원도 소수와 홍재학의 참형
신사년(1881) 윤7월 7일, 강원도 유생들은 복합상소를 하였다. 소수는 홍재학이었다.
그 상소문의 내용이 매우 격렬하므로 고종은 진노하여 그를 의금부에 가두어 엄한 문초를 하도록 하였다. 재판장(위관)은 리최응과 홍순목이었다.
그는 형틀에 매여 있으면서도 말 한마디도 착오가 없었고 그가 하는 말은 매우 엄격하고 의리도 곧았으므로 재판장과 문초하는 사람은 모두 놀라 어쩔 줄을 몰랐다. 그러나 세 차례의 신문 끝에 그를 무상불도죄로 판결하여 그 달 20일에 서소문 밖에서 참형으로 처형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는 34세로 집에는 80세의 노모가 있었다. 길을 가는 사람들도 그의 죽음을 매우 슬퍼하였다.
홍재학을 처형하기 위하여 의금부의 관리들이 옥문을 열 때 자물쇠의 쇠가랫대가 세 동강으로 부러지고 길을 나선 후에도 차바퀴의 축이 또 부러졌다. 사람들은 그것을 그의 원기의 소치라고 하였다.
홍재학은 그의 형 홍재구와 함께 리항로의 문하에서 수업하여 쌍벽을 이루고 있다는 지목을 받기도 하였다. 그가 소수로 나설 때 홍재구는 그를 만류하였으나 그는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홍재구는 그를 따라 서울로 갔다가 그의 시신을 거두어 돌아왔다.
10. 이항노의 문인
리항로의 문하에 최익현, 금평묵, 홍재학, 류린석 등이 전후로 기절을 드러내고 명분과 의리를 부식하므로, 세상 사람들은 학문하는 집안에서 빛을 낸다고 하였다.
11. 김평묵의 지도 유배
금평묵의 호는 중암으로 그는 강개한 기개가 있었고 문장에 능하였다. 그는 평생 동안 임헌회(임헌회)에게 불만을 갖고 있다가 그가 작고하자 제문에다가 그를 풍자하고, 간재전우와 교우한 후에는 매산 홍직필과 얼계리항로를 싫어하여 문호를 달리하였다.
그는 전감역으로 가평 산중에 거주하고 있으면서 문생들을 받아들여 세상을 꾸짖고 공경들을 기롱하므로 많은 사람들은 그를 두려워하고 미워하였다. 그리고 그는 홍재학이 상소하기 위하여 서울로 갈 때 눈물을 흘리면서 그를 전송하고 그 후 또 소청으로 서신을 보내 진동송나라 사람. 고등과 함께 6적을 참하라는 상소를 하였음. 편자주 과 고등의 일을 열거하여 그를 격려하였다. 홍재학을 치죄하고 있을 때 어떤 사람이 그를 당로자에게 모함하여 홍재학의 상소문을 김평묵이 지었다고 하였다. 그는 결국 신문을 받고 지도로 유배되었다. 그는 적소에 있을 때 식량도 끼니를 이을 수 없었지만 조금도 좌절하지 않고 나라의 임금을 사모하여 수시 눈물을 흘렸다. 임오군란이 일어난 후 그는 석방되었으나, 겨우 집에 도착할 무렵 다시 배소로 유배되었다가 갑신년(1884) 이후에 석방되었다.
그는 늙으면서 가세가 더욱 가난하여 거의 굶어 죽을 지경에까지 놓이게 되었다. 상국금병덕이 귀향한 후 그와 가깝게 살고 있으므로 그것을 민망히 여겨, 자기 마을에 집을 마련해놓고 그를 맞이하였다. 그는 그곳에서 일생을 마쳤다.
12. 제소인 강진규의 불복
홍재학이 처형된 후 리만손과 강진규도 체포되어 멀리 유배되었다.
강진규는 대대로 안동에 살면서 문과에 급제하여 참판까지 지냈는데 당시 그의 나이는 60여 세였다. 이때 여론을 일으킨 사람들은 그 영남유소가 소란한 이유는 이만손의 제창으로 시작되었다고 하였으나 이만손의 상소는 강진규가 지은 것이다.
그는 체포되어 신문을 받을 때 굴복하지 않아 결국 연좌되고 말았다. 그것은 세상 사람들의 입을 막아 함부로 여론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13. 지석영의 우두법 전파
우리나라에 마마라는 병이 있다. 그 병은 어느 시대부터 시작되었는지 잘 모르지만 천연적으로 전염된다. 이것을 시두라고 하는데 그 시기가 되면 전염되었다
100년 이래로 사람들의 기교는 점차 발달하여 전종법이 개발되기 시작하였다. 이것을 종두라고 한다. 그 종두를 하면 감염이 된 것이다.
그런데 시두증에 걸리면 험한 일이 많아 어린아이들이 많이 죽었으나 종두의 독성이 점차 덜해지면서 병을 다스리기가 더욱 쉬워졌다. 그리고 요즈음은 우두법이 태서로부터 오주까지 파급되어 그 법이 성행한 지 수십 년이 되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그 소문을 듣지도 못하고 막연히 있었다.
이때 서울에는 지석영이란 사람이 있었다. 그는 통역관으로 시를 전공하고 서화를 잘하였다. 그가 일본에 있으면서 우두법을 배워 기묘년(1879)부터 경진년(1880) 사이에 서울에서 약국을 차려 지방 사람들에게 교육을 시키자 그 법은 점차 팔도에 파급되었다.
그 종두법은 시두법과 비교할 때 10퍼센트로 완전한 것이지만 횡사를 한 사람들도 간혹 있었고 그 후 우두법이 나온 후에는 만에 하나도 실수가 없어 종두법이 폐지되고 말았다. 그러나 우두법이 나왔을 때 많은 사람들은 종두법을 시행할 때처럼 의심하고 있었다.
14. 학질과 금계랍
이틀에 한 번 앓는 학질을 속칭 당학이라고 한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이 병을 매우 두려워하였다. 그것은 나이가 많은 사람들도 10명 중 4-5명은 사망할 뿐 아니라 힘이 강한 소장년층도 수년 동안 폐인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금계랍이 서양으로부터 들어온 후로, 학질을 앓는 사람이 1전의 양만 먹으면 즉시 낫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이에 “우두법이 나와 어린아이들이 잘 자라고 금계랍이 나와 노인들이 수를 누린다”는 유행가가 나왔다.
15. 석탄, 석유 등 서양 물화의 사용
이해에 서양 풍속을 따라 석탄과 석유를 사용하였다. 이것은 서양의 연료이다.
석유는 영, 미 제국에서 생산된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것을 바다에서 채취한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석탄에서 뽑은 것이라고 하며, 어떤 사람은 돌을 불에 달구어 걸러 낸 것이라고 하여 그 말이 한결같지 않지만 그것이 천연자원이란 것은 다 알고 있었다.
우리나라는 경진년(1880)부터 석유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석유를 처음 사용하였을 때는 그 색깔이 붉고 냄새가 극히 고약하며 1합만 가져도 열흘 밤은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수 년도 못되어 그 색깔은 점점 하얗게 변하고 냄새도 없어져 화력이 매우 감퇴되는가 하면 1합당 겨우 사나흘 밤 정도 사용할 수 있었다.
그리고 석유가 나온 후로 산과 들에는 기름을 짤 수 있는 열매가 많이 열리지 않았다. 물론 우리나라 국민 모두가 그 열매로 등유를 사용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모든 물건이 량전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양면이 나오자 목화농사가 잘 되지 않고, 양철이 나오자 강철 생산이 부진하였다. 종종 이와 같은 일이 속출하는 것은 매우 이상한 일이었다.
그리고 양수화통도 석유의 출현에 따라 유행하였다. 민간에서는 이것을 자기황이라고 하였다.
16. 외국물품의 수입
개항 이후 우리나라에 외화로 들여온 물품 가격이 매우 저렴하여 상민들은 그것을 되팔아 많은 이익을 남겼다. 그러나 수년도 못되어 일본인들은 우리 나라 사람보다 더 심한 사기를 부렸다. 그것은 우리 나라의 간사한 백성들이 그들을 유도한 것이다. 외화로 들여온 물품이 10건이라면 인조물품이 9건을 차지하고, 우리 나라 돈으로 외국에 내놓은 물품 중에 10건 중 9건은 천연 물산이었다.
이것은 너무 심한 일이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이토록 머리가 둔한 것이다. 그것은 수입해 온 물품은 비단, 표단, 종, 휴칠 등으로 음교한 기물들에 불과하며 우리나라에서 수출한 물품은 쌀, 콩, 피혁, 금, 은 등 평일에 사용할 수 있는 절실한 물품들이었다. 이런 일이 지속되면 나라가 가난하지 않으려고 해도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다.
17. 어의동 본궁과 대안동 신궁
장렬왕후가 어의동 본궁(효종의 잠저)에서 가례를 치른 후로 역대 성조에서도 그곳을 계속 가례 장소로 사용하였고, 헌종과 철종 때도 변함없이 사용하였다. 그리고 고종 때도 흥인군리최응은 운현궁을 훌륭히 꾸며 놓고 여러 사람 앞에서 외치기를, “이곳은 효종의 잠저이자 렬성조가 가례를 치르던 궁이며 지금 임금님의 잠저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장차 성자, 신손들이 가례를 치르는 궁이 될 것이니 어찌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그러나 왕세자의 가례를 치르려고 할 때, 중전은 대원군을 미워하고 있었으므로 그 궁에서 가례를 치르지 않기 위하여 대안동에 새 터를 잡아 민가 수백 채를 헐고 신관을 지었다. 그 궁은 극히 웅장하고 화려하였으며 비용도 백만 냥 정도 소모되었다.
이 궁을 영건할 때 유사는 구경만 하고 있고 장정들은 게으름을 피워 령이 떨어진 지 1년이 지나도록 아무 진척이 없자 중전은 크게 노하여 책상을 치며 고함치기를, “이렇게 가다간 어떻게 속히 지을 수 있겠는가!”라고 한 다음, 한참 무엇을 생각하고 있다가 리경하가 관역도감으로 적합하다는 임명장을 내렸다.
이경하는 이 명을 받은 즉일, 동구에다 군막을 설치하고 군막에서 거처하였다. 이에 수많은 군중들이 모여 공사를 도운 바람에 백일도 못되어 그 훌륭한 전각이 지어졌다. 그 이유는 이경하가 본래 사람을 잘 죽였으므로 모든 사람들이 그를 두려워하였기 때문이다.
18. 영선사김윤식의 청국행
신사년(1892) 가을, 금윤식이 령선사로 임명되어 천진으로 갔다.
이때 고종은 외교에 신경을 썼지만 일본인과 양인이 시기하므로 무슨 일이 발생할 때는 오직 중국을 의지하여 북방의 문화를 배워야 한다는 여론이 있었고, 또 리홍장이 우리 나라를 비호한 데다가 그는 현재 북양총독이 되어 천진에 총독부를 개설하고 있었다.
이에 우리 조정에서는 문신과 무신 집 자제들 중 총명하고 준수한 사람 100여 명을 선발한 후, 이들을 김윤식이 인솔하고 가서 이홍장의 지시에 따라 중국과 서양의 학문을 익히게 하였다.
19. 신사유람단의 일본 파견
금윤식이 천진으로 떠난 후 다시 조정에 출입한 신사 중 재주와 명망 있는 어윤중, 박정양, 침상학, 조준영, 엄세영, 조병직, 리원회 등 8명(1명은 모름)을 뽑아 이를 유람조사라고 하였다. 이들에게 일본으로 들어가 일본의 상황을 살펴보게 하였다.
그 후 이들은 모두 귀환하였으나 어윤중은 강호에서 바로 상해로 건너가 고종에게 서신을 올려 「중국을 두루 돌아본 것은 기어이 한 가지 것을 얻어, 조금이나마 성상께서 먼 곳까지 외교를 펴시려는 그 정책에 부응하고자 한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 서신을 본 고종은 근신을 대하여 감탄하기를, “어윤중이 먼 바다를 건너간 것은 나의 뜻이 아니라 그가 나라를 위하여 몸까지 잊은 것이니 어찌 가상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그러나 조녕하는 미소를 지으며, “그분은 명을 어긴 죄인입니다”라고 하였다. 이때 고종은 아무 말이 없었다.
20. 왕세자의 입학과 민태호의 상례
1882년 봄, 왕세자가 입학할 때 민태호가 대제학이 되어 그 예의범절을 도와주었다.
민태호는 문인으로 자처하고 호를 표정이라 하였으므로, 이때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작정」 「작정」 하였다.
21. 왕세자 가례
왕세자가 관례를 치른 후 민씨를 세자빈으로 책봉하고 대안동 신궁에서 가례를 치렀다. 이에 따라 경과별시와 증광시를 설치하였다.
세자빈은 민태호의 딸로 세자보다 나이가 한 살 더 많았다. 간택한다는 여론이 있을 때 부터 고종은 민씨의 집안에 뜻이 없어 다른 가문에서 간택하려고 하였으나, 중전은 세대가 교체된 후에 그 권위가 다른 사람에게 돌아갈까 두려워하여 친족을 중용하여 자리를 굳혔다.
고종은 처음에 금규홍의 딸을 간택하려고 하였으나 그것은 중전의 뜻을 다시 어기는 결과가 되므로 결국 민태호의 딸로 정하였다.
민태호는 그의 딸이 간택되어 입궁할 때 조급한 마음을 못이겨 송석원을 닫고 손님을 사절하였으나, 국혼이 이미 결정된 후에는 송석원을 열고 손님을 맞아들여 미간에 희색을 띠므로 서울에서는 이를 국혼대방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해 2월에 식년과의 생원, 진사 등 회시를 치러 방이 이미 나왔으나 증광시가 다시 결정되어, 식년과의 려창을 경과보다 먼저 할 수 없다 하고 그 시기를 증광시를 치른 후로 미루었다.
22. 윤주성의 급제
별시과의 회시를 치를 때 시관들은 이 회시가 춘궁의 경과와 겹친 것을 두려워하여, 시원을 폐쇄한 후에 시권을 묶어 놓고 제비를 뽑아 10명을 선발하였다. 그것은 공정하게 뽑으면 공정하기 때문이다.
이때 해남 출신인 윤주성이 을과에 뽑히자 대원군은 이 소문을 듣고 매우 기뻐하며, “윤주성이 한림이 된 것을 누가 불가하다 하겠는가?”라고 하였다. 그것은 윤주성의 집안이 남인의 령수였지만 대원군이 10년 동안 집권하고 있으면서 한 사람도 과거에 급제시키지 않아 마음 속에 늘 한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후 위정자들은 그 소문을 듣고 윤주성을 시기하여 결국 고폐시키고 말았다.
리남규도 이 과거에 급제하였다.
23. 무위영과 장위영의 신설
훈련도감, 총융청, 금어량영을 합하여 무위영, 장위영 등 2개의 군문을 신설한 후 리경하를 통위대장, 신정희를 장어대장으로 임명하였다.
24. 조성하의 사망
조성하가 사망하였다. 조성하는 조병구의 아들로 출계되었다. 그는 성품이 간오하여 누구에게도 아부를 하지 않았으므로 그때 많은 사람들의 여망이 그에게로 쏠렸다.
그는 갑술년(1874) 초에 날로 잘못되어 가는 나라꼴을 보고 국사에 관한 건의를 하려고 하였으나 두려움을 느껴 강력히 간하지 못하고 평안감사 자리를 하나 얻어 외직으로 나갔다. 그의 나이는 겨우 30세로 감영에 수년 동안 있으면서 풍악과 여색을 즐겨 날마다 수천 금을 낭비하였다.
그리고 화방과 소고로 밤낮을 즐기며 대동강에서 술에 취하여 살므로 서북 사람들은 그를 「부감사)」라고 하였다.
신응조가 평안감사를 그만둘 때 봉급 3만 민(돈꿰미)을 감영 창고에 비치하여 북경으로 가는 사신들의 폐단을 예방하는 자금으로 사용하였으나 조성하는 돈을 흙처럼 마구 뿌리어 그 자금이 바닥났다고 해도 마구잡이로 다 꺼내 사용하였다.
그가 하루는 칙사를 맞기 위하여 의주로 가던 도중 술에 취하여 고기즙을 가져오라고 하므로 포인(백정)들은 순식간에 민가의 소를 잡아 그 고기를 구워 올렸다. 그리고 그가 교체되어 돌아올 때 그를 전송하기 위해 이틀길을 따라오며 흐느끼는 기생들이 10명이나 되었다. 그는 골수가 고갈되도록 몸을 함부로 하다가 병이 나서 건을 쓰지 않은 지 5, 6년 정도 지나서 사망하였다.
그의 시호는 문헌이다.
25. 조성하의 부귀
조성하와 그의 당제 조녕하 및 리재면, 조경호 등은 모두 을사생으로 부귀를 누렸으므로 장안 사람들은 이들을 「사을사」라고 하였다.
배가 고프지 않으면 밥맛이 달지 않은 것은 모든 사람들의 상정이다. 그러나 조성하는 어렸을 때부터 기름진 고기와 쌀밥만 먹고 자라 하루에 여섯 번씩 밥을 먹었다. 그러므로 그는 평상시 말하기를, “나는 평생 동안 밥맛을 모른다”고 하였다. 그는 언제나 마루에서 내려오면 교자를 타지 않으면 초차를 타고 다녔으므로 1리의 길도 보행할 때가 없었다.
근세의 귀인이라고 한 사람들은 혹 어렸을 때 가난하였다가 만년에 뜻을 잃곤 하였으나, 조성하는 잉태해 있을 때부터 죽을 때까지 하루도 부귀를 누리지 않은 날이 없었으므로 사람들은 모두 조성하를 태중귀인이라고 하였다.
26. 고종의 조영하 신임
갑자년(1864) 초에 조성하와 조녕하가 입시하였다.
이때 고종은 조용히 있다가 머리를 빗으면서 조성하를 돌아보며 “형이 나의 상투 좀 틀어 주시오”라고 하자 조성하는 사양하면서 “신은 상투를 틀 줄 모릅니다”라고 하였다. 조영하가 몸을 굽히며 “신이 대신 틀어 드릴까요”라고 하므로 고종은 매우 기뻐하였다. 이때 고종은 신정대비를 어머니로 섬기고 조성하는 신정대비의 조카이기 때문에 고종이 그를 내형으로 부른 것이다.
조성하의 자는 순소로 호는 소하이며, 조영하의 자는 기삼으로 호는 혜인이다.
27. 군국기무아문의 설치
군국기무아문을 신설하고 그 당상관과 랑관 등 관원은 일시의 명사들을 뽑았다. 당상관의 문관과 무관은 금병시, 금보현, 윤자덕, 정범조, 리종승, 신정희이며, 랑청의 관원은 10여 명으로 그들은 한각을 벗어나지 않았다. 그 수석은 민영익이며 차석은 송병서등 제인이다.
송병서는 봉조하 송근수의 아들이다. 그는 40여 세에 급제하였다. 고종은 그가 대로 송시렬의 후손이므로 동색사인으로 여기기 때문에, 그를 청직으로 임용하여 민영익과 일체가 되게 하였다. 그가 겨우 급제한 후로 대교, 한림, 주서, 옥당, 동벽, 통정 등을 제수하다가 그의 부모님 봉양을 허락하여 특히 청주목사로 제수하였다. 그것은 부모님을 수시로 보살필 수 있도록 편의를 베푼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재물을 탐하고 무식하여 온 경내의 백성들이 그를 원망하고, 하루 저녁에는 그의 관문에 「우암지손 근수지자」라는 표지를 붙여 놓았다. 「우암」은 「우암」과 음이 같기 때문이다. 송근수는 이 소문을 듣고 충청감사침상훈에게 부탁하여 그를 파면하였다.
28. 송근수의 중망
송반수는 일생 동안 물러나 정경으로서 시골로 돌아간 후 독서에만 열중하므로, 사람들은 그를 재상산림이라고 하였고 조야에서도 그를 촉망하였다.
그는 무인년(1878) 사이에 병조판서의 소명을 받아, 서울로 가서 인사발령을 책임지라는 비답을 받고 고종이 내린 명은 모두 이행하여 감히 한 번도 어기지 않았다. 그는 업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서 내비의 잘못된 점을 상소에 담아 “신하를 예로 대하지 않고 관리가 공정하지 않다”는 것을 지적하므로 사람들은 “결국 아곡을 연주하였다”고 하였다.
29. <송자대전>과 <양현전심록>
정조는 송시렬을 극히 추앙하여 그의 문집을 <송자대전>이라고 하고 또 <량현전심록>으로 지정하므로, 이를 논평한 사람들은 너무 과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 책명을 더 높이려고 하더라도 다시 무슨 말을 사용할 수 없었다. 이에 송근수는 그 전집 중에서 말 한마디와 사실 한 건이라도 더 모은 후 이를 <송자언행록>이라고 하고, 또 리승우와 그에 대한 논란을 주고받으면서 <송서백선>을 만들어 정조가 만든 <주서백선>처럼 만들려고 하였다. 우암송시열과 주자가 이와 같이 동일할 수 있을지는 모를 일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그의 자손들의 성의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이라고 변명을 한다. 만일 다른 사람이 그 일을 하였다면 그것은 자기 당을 옹호하는 데 불과할 뿐이다.
30. 김병덕의 함구
금병덕을 군국기무아문의 당상관으로 임명하였다. 고종은 그를 인망이 있다고 생각하여 반대파의 여론을 진압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말 한 마디 하지 못하고 자리를 물러서곤 하므로 고종은 수일 동안 탄식을 하다가 담뱃대 두 개를 부러뜨렸다.
상(1894년 이전) ⑨
1. 임오군란의 발발
임오년(1882) 6월 초9일, 서울의 영군들은 큰 소란을 피웠다. 그것은 갑술년(1874) 이후 대내의 경비가 불법으로 지출되고 호조와 선혜청의 창고도 고갈되어 서울의 관리들은 봉급이 지급되지 않았으며, 오영의 병사들도 종종 결식을 하여 급기야 5영을 2영으로 줄이고 그중에서도 노병과 약졸들을 도태하여, 도태된 사람들은 발붙일 곳이 없으므로 그들은 팔을 끌어당겨 난을 일으키려고 하였다.
이때 군량이 지급되지 않은 지 이미 반 년이 지났는데 호남의 세금거둔 배 수 척이 도착하자, 서울 창고를 열어 군량을 먼저 지급하라는 명이 떨어졌다.
이때 선혜청당상관민겸호의 하인이 선혜청 고지기가 되어 그 군량을 지급하고 있었다. 그는 쌀을 벼 껍질과 바꾸어 그 남은 이익을 챙기자 많은 백성들은 크게 노하여 그를 구타하였다. 민겸호는 그 주동자를 잡아 포도청에 가두고 그를 곧 죽일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수많은 군중들은 더욱 분함을 참지 못하고 칼을 빼어 땅을 치며, “굶어 죽으나 법으로 죽으나 죽기는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차라리 죽일 사람이나 하나 죽여서 원을 씻겠다”고 하며 서로 고함소리로 호응하여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그 고함소리로 인하여 땅이 꺼질 것 같았다. 그들은 곧바로 민겸호의 집으로 쳐들어가서 순식간에 집을 부수고 평지로 만들었다.
그 집에는 진귀한 보물들이 가득 차 있었다. 그 군중들은 “돈 한 푼이라도 훔치는 자는 모두 죽인다”고 하고 그 보물을 뜰에 모아 놓고 불을 질렀다. 비단과 구슬이 타서 그 불빛은 오색을 띠고 인삼과 녹용과 사향 등의 냄새가 몇리 밖까지 풍겼다. 이때 민겸호는 담을 넘어 대궐로 도주하였다.
2. 임오군란과 기상이변
4월부터 이달까지 비가 오지 않다가 12시경 병란이 일어나자 오후 3시부터 큰 비가 내리고 명일에도 큰 비가 내리어 장마가 지속되다가 그믐께 개었다.
3. 별기군의 훈련과 화방의질의 도주
이해 봄에 장정들을 모집하여 일병의 군사훈련을 강습하였다. 이를 별기대라고 한다. 일본인 굴본례조를 교련사로 맞이하였다. 이들은 남산 밑에다가 교련장을 마련하여 그곳에서 총을 메고 교련을 하였으므로 먼지가 허공을 가리어, 이 광경을 처음 본 장안 사람들은 놀라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개화가 된 이후, 그들은 이해를 막론하고 일본인의 이야기만 하면 이를 갈며 그들을 죽이려고 하였다. 이런 현상은 서민층에서 더욱 심하게 나타났는데 이때 란병이 봉기하여 그들을 쫓아버렸다.
굴본례조는 교련장에서 동현 병문으로 도주하여 빗발치는 돌 세례를 받아 사망하였고 다른 일본인도 성 안에서 죽은 사람이 7명이나 되었다.
그리고 난민들은 천연정을 포위하여 손에 몽등이를 들고 함성을 지르고 있었다.
화방의질은 그의 호위병과 함께 한 떼를 이루어 밖으로 나갔으나 그 맹렬한 포환과 날카로운 칼을 함부로 접근할 수 없었다. 그는 밤 내내 도주하여 인천으로 갔다. 이때 연도에 있던 우리 나라 사람들은 그에게 피살된 사람들이 많았다. 화방의질은 인천에 도착하여 부사정지용을 속여, “내가 공무로 급히 동래를 갈 일이 있으니 공이 배를 마련하여 주십시오”하고 한 시각도 지체하지 못하도록 재촉하였다.
정지용이 증명을 요구하자 화방의질은 증명을 내보였다. 이 증명은 이때 경기관찰사로 있던 금보현이 정지용의 처지를 우려하여 화방의질의 요구에 따라 준 것이다. 그는 해외로 유유히 도주하였다. 그가 도주한 다음날 경군이 도착하였다.
이때 정지용은 김보현의 사망과 시국이 졸변하였다는 말을 듣고 독약을 먹고 자결하였다.
4. 란병의 죽기 자청
난병들은 민겸호의 집에서 물러나와 하도감에 주둔하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의 죄를 용서받지 못할 줄 잘 안 데다가 소속된 곳도 없으므로 운현궁으로 몰려가 처형해 주기를 간청하였다. 그러자 대원군은 손을 저으며, “나도 늙었는데 국가 일을 어찌 알겠습니까만 성상께서 인자하시어 다른 일은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 난병들이 서로 앞을 다투어 소란을 피우자 대원군은 고함을 지르며 그들이 물러가기를 꾸짖고, 그 괴수 몇 명을 남게 하여 그들과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으나 그 내용은 전해지지 않았다. 그 후 난병들은 모두 물러갔다.
5. 란병의 궁궐침범과 중궁의 도피
초10일, 난병들이 대궐을 침범하여 중궁은 밖으로 피신하고 리최응, 민겸호, 금보현 등이 모두 피살되자 대원군이하응이 정사를 돌보았다.
이날 날이 밝자 난병들은 흥인군이최응의 집을 포위하였다. 이최응은 담을 기어 넘다가 땅에 떨어져 불알이 터져서 사망하였다. 어떤 사람은 그가 창에 찔려 죽었다고 한다.
그 후 난군들은 돈화문으로 향하였다. 돈화문이 닫혀 있자 그들은 총으로 대문짝을 쏘았다. 그 소리는 콩이 튀듯 멀리까지 들렸다. 문이 열리자 그들은 벌떼처럼 달려들어갔다.
고종은 그 소문을 듣고 급히 대원군을 부르자 대원군은 난병들을 따라 입궐하였다. 이때 난병들은 전상에 올라가 민겸호를 치며 그의 머리를 잡아끌었다.
민겸호는 황급한 나머지 대원군을 끌어안았다. 그의 머리는 대원군 도포 속으로 들어갔다. 그는 이때 급히 외쳐 “대감, 나를 좀 살려 주십시오”라고 하자 대원군은 냉소를 지으며 “내가 어찌 대감을 살릴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이 말이 채 끝나지도 않아서 난병들은 그를 발로 차 뜨락 밑으로 떨어뜨리고 총과 칼로 내리쳐 그의 몸은 한 덩어리의 고기가 되고 말았다.
그 후 난병들은 고함을 지르며 중궁이 어디에 있느냐고 외쳤다. 그들의 말은 매우 불손하고 흉칙하여 차마 들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사방을 다니며 찾아보았다. 첩첩으로 설치된 장막과 벽 사이는 창이 삼엄하게 뻗혀 있었다. 이때 부대부인 민씨도 대궐을 들어갔다가 결국 그들 몰래 호위를 받고 사인교앞뒤에 각각 두 사람씩 모두 네 사람이 메는 가마. 편자주 에 들어가 포장을 두르고 대궐 밖으로 나왔다. 어느 궁인 한 사람이 입으로 그를 가리켰다. 난병들은 사인교의 포장을 찢고 그의 머리를 잡아 땅에 내동댕이를 쳤다. 이를 본 무감홍재희(계훈으로 개명하였음)가 고함을 지르며 “이 사람은 내 여동생 상궁이니 오인하지 말라”하고 황급히 그를 업고 도망치자 많은 난병들은 의심을 하고 있었으나 말 한마디 하지 못했다.
그리고 금보현은 경기감영에 있다가 변이 났다는 말을 듣고 황급히 대궐로 향하였다. 그가 정원을 지날 때 그의 조카인 승지금영덕이 입직하려고 하면서 그를 만류하기를, “오늘 일은 예측할 수 없으니 들어가지 마십시오”라고 하였으나 김보현은 옷을 떨치고 가면서, “나는 재상의 직위에 있고 또 한 지방의 직함을 띠고 있는데 국가에 변란이 있을 때 이 몸이 죽는 한이 있더라도 어디를 가겠는가?” 하고 결국 대궐로 들어 가다가 뜨락 층계에서 맞아 죽었다.
많은 난병들은 김보현의 시체를 발로 차며 “이놈이 돈을 즐겼으니 배에다가 돈을 좀 채워 주어야겠다” 하고 그의 입을 벌려 돈을 밀어 넣은 후 총대로 그의 시신을 누르자 돈이 옆구리를 뚫고 나왔다. 난병들은 그의 시체를 민겸호의 시체와 함께 끌어다가 어구에 버렸다. 이때 비가 많이 와서 어구에 물이 불어 있는 데다가 날씨마저 또 음산하고 더웠다. 그 시신들은 수일 동안 어구에 떠 있으므로 살이 퉁퉁 불어 하얗게 변한 모습이 마치 돼지를 잡아 씻어 놓은 것 같았다.
6. 고종의 별전 피신
고종은 중궁과 헤어진 후 변이 일어났다는 소문을 듣고 살아 남지 못할 것으로 생각하여 몸에 전율을 일으키며 말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금병시는 고종을 업고 조녕하는 그의 뒤를 호위하면서 별궁으로 피신하였다.
난병들은 주위를 왔다갔다하며 북적거렸지만 그가 김병시인 줄 모르고 그를 가리키며 “저 사람도 죽여야 한다”고 하자 그를 알아본 어느 난병이 “이분은 승동대감이시다. 이분은 죄가 없으니 어찌 범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조영하는 훈련대장으로 몇 년 동안 있었으므로 훈국 병사들은 그의 얼굴을 다 알고 있었다. 그는 본래부터 병사들은 원만하게 대해 주었으므로 난을 면할 수 있었다.
7. 대원군의 집권과 5영의 복구
대원군에게 군국사무를 처리하라는 명이 내려지자 대원군은 궐내에서 거처하며, 기무아문과 무위, 장어 량영을 폐지하고 5영의 군제를 복구하라는 영을 내려 군량을 지급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란군은 물러가라는 명을 내리고 대사령을 내렸다.
8. 난병의 퇴산
난병들은 대궐에서 물러나 사방으로 흩어졌다. 서울 내외를 막론하고 악행을 한 민씨, 무단정치를 한 경재, 외국인을 끌어다가 고종의 총애를 받은 자 등의 집을 모두 불태워 그 수를 다 기록할 수도 없다.
그리고 전참판민창식도 피살되었다. 민창식은 로봉 민정중의 사손이다. 그는 음란하고 재물을 탐하여 그의 친구들도 그를 도외시하였다. 그는 남들보다 색력이 강하였다. 그가 하루는 승정원에서 입직하던 중 성기를 세워 창호지를 뚫은 적이 있다. 그의 패행(돈행)은 이와 같았지만 그는 언제나 동궁의 관함을 띠고 있었다.
9. 민영익의 도주
민영익은 삭발한 후 삿갓을 쓰고 짚신을 신은 채 빠른 걸음으로 도주하였다. 그는 하루에 80리를 걸어 양근에 있는 금오위장 집에 도착하였다. 김오위장은 그의 식객이다.
그는 보리밥과 부추나물로 대접하였으나 배부르게 먹고 수저를 놓은 후 “어찌 이리도 맛이 있는가?”라고 하자 김오장은 웃으며, “영감께서 오늘 이런 일이 없었으면 어찌 맛을 알 수 있었겠습니까? 소인 집의 밥이 비록 추반(조반)이기도 하지만 영감님께서 손님들에게 대접한 밥과 비교할 때 정한 밥 정도가 아니오니 영감님이 집으로 돌아가시거든 밥짓는 녀비에게 주의 좀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하므로 민영익은 부끄러워 대답도 하지 못하였다.
10. 대원군의 보부상 탄압
난병들을 저지하지 못하여 연일 소란이 계속되어 오다가 12일 갑자기 유언비어가 퍼지기 시작하였다. 민영익이 동해 연안을 따라 강원도와 경기도의 보부상 천만 명을 이끌고 이들과 떼를 지어 동대문에 도착한다는 것이다. 도성이 온통 큰 난이 일어난 듯 요란하였다. 방민들은 모두 이마에 수건을 두르고 깃대를 게양하여 마을 골목을 메우고 있었다. 그들은 적을 방어한다고 하였다. 그들의 형세는 조수처럼 몰려 있어 어떻게 진정할 수도 없었다.
이에 대원군은 영을 내려 성문과 강나루를 차단하고 무기고를 열어 민간인에게 병기를 나누어 주면서 사대문을 수비하도록 하였다. 서울 일대는 온통 계엄령이 선포된 것이다. 그들은 행인들을 일일이 조사하여 거동이 수상하면 부상으로 지목하고, 그들의 주머니와 소매 속에서 인명을 기록한 장부가 적발되면 이것은 부상도록으로 인정하였다.
어느 한 사람이 외치면 백 사람이 화답하고 동쪽에서 밀어붙이면 서쪽에서 붙들어 어떻게 변명할 수가 없으므로, 이미 피살된 시체가 종으로 횡으로 널려 있어 길을 가는 행인들은 코를 가리고 지나갔다.
이때 증광과 회시의 날짜가 많이 남아 있지 않아 서울로 모여든 시골 선비들 중 소매 속에다가 종종 감시방을 간직한 채 죽은 사람도 있었다.
11. 중궁의 여주 피난
중궁이 이미 대궐을 나간 후 화개동에 있는 전사어 윤태준의 집으로 가서 피신하고 있었다. 윤태준은 중궁에게 한쪽 방을 내주었다.
그러나 문밖에 엎드려 중궁을 뫼시고 있던 익찬 민응식과 진사 민긍식은 서울에 있어서는 안된다고 판단되어 시골 벽지로 가서 피신하기로 하였다.
그들은 노자가 아무 것도 없는 것이 고민이었다. 윤태준은 이런 사정을 전승지조충희에게 알렸다. 조충희는 마침 말을 팔아 돈 500민이 있어 그것을 모두 그들에게 주었다. 그들은 즉시 단교 하나를 세내어 중궁을 태우고 민응식과 민긍식 및 리용익 등이 뒤를 따라 여주에 있는 전판서민영위의 집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수일 동안 머물다가 다시 충주 장원재에 있는 민응식의 집으로 옮겼다. 그 후 중궁은 복위하여 조충희를 영광군수로 제수하였다.
12 . 광주 일촌의 피화
중궁이 한강을 건너려고 할 때 사공이 난색을 보이며, “서울에서는 한강을 차단하라는 명령이 내려지고 또 이런 행색으로는 의심을 받을 염려가 있으니 건너갈 수 없습니다”라고 하자 중궁은 금가락지를 빼서 던져 주어 한강을 건널 수 있었다.
중궁이 광주를 지나다가 길가에서 잠시 쉬고 있는데, 어느 노파가 와서 피난하는 부녀인 줄 알고 큰 소리로 말하기를 “음란한 중전 때문에 이런 난리가 일어나 낭자가 이곳까지 피난해 온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중궁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 말을 기억하고 있다가 환궁 후에 그 마을을 없애 버렸다. 이때 그를 배종하였던 사람들은 사공도 치죄를 해야 한다고 하였으나 그것은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14일, 유언비어가 그치고 난병들도 부대로 돌아가자 성문을 열어 행인을 통과시켰다.
13. 대원군 피납후 회시 실시
증광과의 회시를 다음해 봄으로 늦추라는 명이 내려졌으나, 이때 대원군이 체포되어 북으로 가자 9월에 회시를 치렀다.
14. 대원군의 문객 기용
조강하는 전라감사, 홍우창은 경기감사, 조경호는 광주류수, 홍순형은 송도류수, 금선필은 강화류수, 정기원은 통제사, 리회정은 예조판서, 림응준은 홍문관제학, 홍원식은 부제학으로임명하였다. 이들은 모두 대원군이 구두로 후보를 낸 것이다.
조강하와 홍순형 등은 옛날 대원군의 문객이었다.
15. 명성왕후의 가상
대원군은 중궁이 화를 당한 것을 목격하였다고 하면서, “병란이 진정된 후에 그 영령을 봉심하기 위하여 옥체를 찾아보았으나 보이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는 차마 말로 형언할 수 없는 변을 당한 것이라고 하여, 중궁을 애도하기 위해 성복을 하고 변례를 적용하려고 하였다.
이때 대신 금병국과 홍순목 등은 불가함을 고집하였으나 대원군은 강경히 그들의 말을 듣지 않고 그의 의대임금의 옷. 주로 겉에 입는 평복을 일컬음. 편자주 로 염을 하여 재궁임금, 왕대비, 왕비, 왕세자들의 유해를 모시는 관. 편자주 에 넣었다.
그리고 18일, 백관을 모이게 하여 곡을 하게 하고 성복도 마친 후 국중에 애도할 것을 반포하였다. 그 뜻은 이미 중궁이 사망하였다고 하면 비록 살아 있더라도 어떻게 할 수 없을 것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16. 고부사 선정
리승우를 정사, 리건창을 서상관으로 임명하여 중국에 부음을 전하려고 하였다.
이승우는 리회정의 아들이다.
그리고 이건창은 안의현의 관아에서 근친중이었으므로 역부를 통하여 그를 사행으로 불렀으나, 그가 출발하기 전에 일이 또 변경되었다. 이건창은 <미제록>을 지었다.
17. 신응조의 중망
신응조에게 우의정을 임명하였으나 그는 강력히 사양하여 응하지 않았다. 그는 대원군과 이종형제간이었다. 대원군이 집권하여 전횡을 일삼자 그는 대원군을 비난하면서 절대 그와 왕래를 하지 않았지만 대원군은 그가 오기를 매우 바라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본래 명망이 있었으므로 부득이 그를 강원도와 평안도의 관찰사로 제수하여 점차 자기에게 기용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는 누차 사양을 하다가 억지로 부임을 하였지만 끝까지 대원군의 말은 듣지 않고 조정의 은혜를 입고 있다는 것만 인정하였다. 그가 량영에서 쌓은 치적은 세상 사람들이 모두 부러워하였다.
그러나 그는 갑술년(1874) 이후 광주로 돌아와 간혹 징명이 있었지만 그 명이 있을 때마다 사양하여 벼슬에 나가지 않고 끊임없이 저서에만 몰두하였으므로 그때의 여망은 더욱 높았다.
대원군은 민심에 순응하기 위하여 그는 고종에게 그를 특별히 우의정으로 제수하자고 아뢰고, 승지와 사관들을 계속 보내어 그를 기어이 오게 하였다. 그러나 신응조는 거짓으로 귀머거리 노릇을 하면서 곧 사망할 듯한 모습으로 땅을 그어 진정하고 죽음으로써 맹세하므로 대원군은 그를 억지로 오게 할 수 없음을 알아차리고 그대로 두었다.
그리고 국중에 애도를 반포할 때 그는 가슴을 치면서 통곡하기를, “어찌 의대로 염을 하여 국모의 상을 치를 수 있단 말인가?” 하고 끝까지 슬퍼하지도 않고 상복도 입지 않았다. 그 후 얼마 안되어 복제를 취소하자 사람들은 그의 선견지명에 감복하였다.
중궁은 이 소문을 듣고 더욱 그를 존경하였다. 이때 신응조의 나이는 80세였으며 자호를 구암이라고 하였다. 그는 중년부터 오랫동안 계전에 있는 집에 살았으므로 세상 사람들은 그를 「계전」으로 칭하였다.
18. 리재선의 옥사
신사년(1881) 겨울, 리재선의 옥사사건이 있었다
이재선은 대원군의 서자이다. 그는 갑자년(1864) 이후 별군직으로 있었으나 본성이 용열하여 숙맥도 분간하지 못하였으므로 그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었고, 다만 흥선대원군의 서자가 있다는 것만 알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대원군이 실세한 지 오래되어 그와 친한 문객 중 저명한 사람들은 벼슬길이 막혀 사적에서 제거된 것이나 다름없었으므로 그들의 마음은 모두 울분에 쌓여, 전승지안기영, 권정호 등이 유생 임철호, 정건섭 등과 함께 이재선을 국왕으로 추대하려고 하였다.
이때 그들은 9일 등산을 핑계로 이재선의 친구 채동술을 남한산성으로 납치하여 그 비밀을 털어놓았으나, 채동술은 위기를 느껴 승낙은 하지 않고 비밀을 누설하지 않겠다는 약속만 하였다.
그리고 전현감류도석은 옛 정승 류후조의 손자로, 그는 음모에 참여하는 조건을 내세워 10년 동안 경상감사를 맡기로 약속받았다. 이 맹약에 동참한 사람들은 남인과 북인이었으며, 노론으로 참여한 사람은 북촌의 서얼 수명뿐이었다.
그러나 그 약속된 기일에 광주의 토교 리풍래는, 그 음모에 참여한 사람으로서 자진 출두하여 그 사실을 고변함으로써 안기영, 권정호, 임철호, 정건섭 이하 제적들이 주살되고 그들의 가족은 법의 처벌을 받아 노비로 충당됨은 물론 그들의 가산도 모두 적몰되었다.
그리고 채동술은 지정불고죄로 처형되고, 유도석은 그의 조부가 고종의 등극을 도운 공로가 있었으므로 사형을 감면하여 도서로 유배하였으며, 이재선은 서문 밖 민가에서 사사되었다.
이재선은 사사될 때도 자신이 무슨 죄로 죽는지 몰랐다. 이때 어떤 사람은 이 옥사가 왕후의 지시였다고 하였으며, 중외에서는 대원군이 주동한 것이라는 소문이 자자하였으나 대원군은 노려보고만 있을 뿐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후 임오군란 때 그 화가 왕후에게 미치자 사람들은 더욱 대원군이 교사한 것이라고 의심하였다.
19. 리윤용의 대원군 배반
리윤용은 판서리호준의 서자이며 대원군의 사위이다. 그리고 이때 리재선의 동복 여동생이 있었는데, 그가 곧 이윤용의 처이다.
이윤용은, 대원군이 안기영, 권정호 등과 내통하여 그 음모가 성사되면 대권이 다시 자기에게 돌아오고 흑 실패하더라도 미련하고 천한 자식 하나만 희생될 뿐이라고 하여 그 아무 것도 모르는 아들을 죽음으로 몰았다고 생각하였다
이것은 크게 윤리에 어긋난 행위였다. 그는 이런 이유로 대원군을 배반하여, 그가 간직하고 있던 마음을 량전에게 다 털어놓았다. 이때부터 이윤용은 양전에게 큰 총애를 받아 가며 양전의 사인으로 지내다가 갑오경장 이후 갑자기 중용되었다.
20. 기구한 염종수의 첩
렴종수는 첩을 하나 두었다. 그녀는 얼굴이 매우 요염한 데다가 부유하게 살았다.
그러나 염종수가 처형된 후 신철균에게 개가하고, 신철균이 처형된 후에는 안기영에게 개가하였다. 그 후 안기영이 처형되자, 그의 안색은 아직 늙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그가 남편을방해한 인물이라고 하여 거들떠보지도 않자 포청의 어떤 늙은 포교가 자원하여 그를 맞이하였다.
21. 금병덕의 의기
금병덕이 신사년(1881) 겨울에 평안감사로 임명되었다.
그 후 임오년(1882) 6월에 그의 아들 금상균이 서울 본가에서 그의 가솔을 수레에 싣고 평양으로 갔었다. 그것은 군란이 겨우 종식되자마자 다시 큰 난리가 일어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때 김병덕은 그를 꾸짖어, “우리는 세신대족으로서 서울이 아무리 위험하다 하더라도 남들보다 먼저 피난을 하여 백성들의 노여움을 사서는 안될 일이다”라고 하면서 하룻밤을 지낸 뒤 다시 서울로 되돌려보내자 김조균은 눈물을 흘리며 되돌아왔다.
22. 금병덕의 청렴
금병덕의 부친 금흥근이 헌종 때 평안감사로 있었다.
그때 김병덕은 그의 부친을 따라가 자사책방 도련님 집. 편자주 에서 수년 동안 있었지만 영내의 리교도 그의 얼굴을 아는 사람이 없고, 기생 한 사람도 그의 거소를 찾아오지 않으므로 평양 사람들은 이상하게 생각하여 “또 평안감사 한 사람이 나왔다”고 하였는데 이때 과연 그들의 말처럼 부임한 것이다.
평안감영에서는 새 감사를 맞으면서 옛날 관례대로 조산전 1천꾸러미를 바치자 김병덕은 그것을 물리치며 “우리 선대감 때 사용한 우산이 지금도 남아 있는데 어찌 새 우산을 만들 필요가 있겠는가?”라고 하였고, 이미 감사의 임무를 수행한 후에는 반가를 정하여 매 밥상마다 감사는 100전, 비장은 50전, 겸종은 30전으로 하였다. 또 창녀와 어울린 자도 그에 해당한 벌을 주므로 하인들은 그 고통을 견디지 못하여 서울 집으로 돌아온 자도 있었다.
그리고 그는 장리들도 붙잡아 그 죄를 논한 후 파직하였으므로 도내가 모두 숙연하였다.
23. 서울 사녀들의 피난
이때 서울의 사녀들은 피난을 하기 위하여 사방으로 나갔다. 아낙들의 교자가 길을 이었다. 이로 인하여 관동과 호서 지방의 산간 벽지에는 집 값이 치솟아, 거처를 잃은 피난민은 그 수가 매우 많았다.
24. 대원군의 거동
고종이 대원군에게 특별한 예우를 가하여 출입을 하도록 명하였다. 그는 팔인교를 타고 앞에는 두 파초선을 든 하인들이 인도를 하며 공복에는 구배를 달고 다니므로, 이를 평한 사람들은 옛날 권신에게 내린 구석공신에게 내린 아홉 가지 물건. 즉 차마, 의복, 악기, 주호, 납폐, 호분, 궁시, 부월, 거창. 편자주 과 같다고 하였다.
25. 청국군의 대원군 납치
7월 초에 청나라 병사가 서울로 들어왔다. 그리고 그들은 13일 대원군을 체포하여 서쪽으로 갔다.
그리고 이해 봄에 어윤중은 상해에서 천진으로 가서 금윤식이 거처하는 곳에서 유숙하고 있다가, 6월 중에 전보로 본국에서 병란이 일어나 중전이 시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김윤식과 리홍장을 찾아가 그 죄를 징계해 주도록 간청하였다.
이때 이홍장은 중국이 오랫동안 전쟁을 하지 않았지만 한 번쯤은 번국을 진압할 필요성을 느끼고 마건충과 정여창에게 주사 수천 명을 선발하여 야간에 동쪽으로 진출하도록 하므로 그들은 남양 마산포에서 숭례문 밖에까지 진출하여 진무를 하기 위하여 왔다고 하였다. 이때 그들은 부하병을 엄하게 단속하여 매우 조용한 모습을 보였으므로 도민들은 그들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때 마건충 등은 대원군을 초청하였다. 대원군은 가지 않으려고 하였으나 가지 않으면 안될 형편에 놓여 있어서 결국 그들을 만나 주었다. 그들은 대원군을 맞이하여 매우 대접을 잘 하였다. 그들은 그가 두 번째 갔을 때도 그와 같이 잘 대해 주었다.
그리고 이때 또 대원군을 초청하였다. 대원군은 아무 의심없이 수레를 대기시키라고 하자 정현덕이 만류하면서, “대감께서 이번에 가시면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대원군은 그의 말을 듣지 않고 그들의 군영으로 갔다. 대원군이 제1문에 도착하였을 때 그들은 교자에서 내리도록 하고, 또 제2문에 도착하였을 때 하인들을 따라오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들의 행동은 전일과 달랐다. 대원군은 무슨 변이 있다는 것을 느꼈으나 어떤 방법을 취할 수도 없었다.
이때 별안간 마건충 등은 호통을 치면서 대원군을 포박하게 하고 밀탄으로 그의 입을 틀어막아 아무 소리를 내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대원군을 교자 안으로 밀어 넣었다. 장정 한 패거리가 달려들어 그 교자를 들고 후문으로 나갔다. 그들은 쏜살같이 동진을 건너 마산포로 가더니 륜선을 타고 훌쩍 떠나버렸다.
대원군을 배종한 하인들은 군영 밖에서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었으나 그가 나오지 않으므로 이상하게 생각하여 청군에게 그 이유를 물어 보았다. 청군은 배종한 사람들을 속여 “태공이 급한 일로 군영에서 주무시고 내일 귀환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 다음날 숭례문에는 도민을 유시하는 방문이 걸려 있었다. 그 내용은 「태공이 왕후시해사건에 참여하였다는 소문이 중국 조정에까지 알려져 있으나 그 진위를 판단하기 어려워 황제께서 그 사유를 물어 보시려고 어제와 같은 일을 조취한 것이므로, 그 사유가 밝혀지면 다시 귀환하게 될 것이니 모든 백성들은 두려워하지 말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이로 인하여 원근에서는 큰 소동이 일어났다.
26. 중궁의 환궁
8월 초에 혜성이 동쪽 방향에서부터 서북 방향으로 한 필의 베처럼 뻗쳐 있다가 11월 중에 사라졌다.
그 후 중궁 민씨가 복위되어 환궁하고 국상과 복제가 철회되었다. 처음에 중궁은 미복 차림으로 도성을 빠져 나가 상하가 그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다가, 왕후가 장원촌에서 오래 있었으므로 그 소문이 점차 퍼지기 시작하였다. 이때는 대원군이 이미 실각한 후이므로 전부사서상조가 민후를 맞이하자고 상소를 하여, 이달 의장을 갖추어 민후를 장원촌에서 창덕궁으로 맞이하였다.
상(1894년 이전) ⑩
1. 윤태준과 이조연의 출세
9월에 도기과를 설치하여 윤태준과 리조연을 발탁하였다. 처음에 이조연은 재간으로 박규수를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문벌에 구애되어 랑서에만 맴돌고 있다가 그 후 6월에 병란이 일어나 일병이 많이 피살되자 7월에 일본인들이 다시 서울로 들어와 그에 대한 배상을 요구하므로, 그는 대관과 함께 장악원으로 가 그들과 회견하여 그에 대한 득실을 설명하였다. 이때 그는 조금도 굽히지 않고 항의하였으므로 그들의 기세가 약간 꺾이었다.
고종은 그 소식을 듣고, 그렇지 않아도 그를 기용하려던 판에 윤태준이 중궁을 호종한 공로가 있으므로 도기과를 설치하여 이 두 사람을 발탁한 것이다.
2. 3인의 불구과시
임오년(1882) 4월에 증광과의 감시가 설치되어, 전라좌도에는 구례에서 초시를 보았다.
그 시방을 내기 하루 전에 어떤 세 사람이 상여 노래를 부르며 시내를 지나가고 있었다. 한 사람은 삽을 메고, 한 사람은 칠성판을 지고, 그 뒤를 따라온 한 사람은 상복을 입고 있었다. 그들은 남문 밖 들판에 있는 냇물가로 가서 묘 하나를 만들어 놓고 서로 마주앉아 통곡을 하였다. 그들은 곡을 마친 후 크게 웃었다.
그리고 상복을 갈기갈기 찢어 버리고 그곳을 떠나려고 하였다. 이때 그들을 바라보고 있던 사람들은 이상하게 여겨 그 까닭을 물었다. 상복을 입고 있던 사람이, “우리 어머님이 좀 근신하지 않아 이웃집 사람에게 피살되었으므로 이곳에 묻으려고 하였으나, 지금 어머님이 사망하지 않았음이 확인되어 초상을 취소한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때 그들에게 이유를 물은 사람들은 그들을 미친 사람이라고 하였는데, 그 후 얼마 안되어 중전이 환궁하였다.
3. 오장경의 란병 처형
청나라의 시랑오장경이 제독의 자격으로 우리나라에 왔다. 그는 6월에 일어난 병란이 고대에도 없던 일이지만 우리 신민은 상하를 막론하고 그 적도들을 죽이려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으므로 그들을 국법에 의해 다 죽여야 한다고 하면서, 병사를 풀어 도성을 도륙하려고 하였다.
이때 조녕하는 청수관의 접빈사가 되어 미리 익혔던 중국어로 입이 닳도록 그들을 설득하였다. 그는 주야를 통하여 대궐에서 오장경의 진영까지 무려 열 차례나 왔다갔다하였다. 오장경은 겨우 그의 말을 수긍하였다.
그러나 그는 병란을 주동한 것은 도감군이라고 인정하였다. 그 난병들의 집은 왕십리에 많이 있어 그는 왕십리를 공격하였지만, 난병들은 가솔을 데리고 미리 도주하였으므로 도주하지 못한 노약자 수십 명만 살해하였다.
4. 오장경의 과거법 개정 권유
오장경은 우리 나라 과거법이 너무 생략되어 있어 참된 재사와 학자를 기용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고종에게 과거법 개정을 권유하였다. 그 법은 대충 중국의 과거법을 모방한 것으로 초장에는 예, 중장에는 책, 종장에는 론을 보게 한 것이다. 그는 즉일 과거장을 설치하도록 하여 이를 현량과라고 하였다.
그리고 서울 선비들을 먼저 시험 보게 하여 10명을 선발하였는데 이때 사색당인을 골고루 분배하였다. 이것은 옛날에 시행하였던 통과와 같은 것이다.
그 후 계미년(1883) 봄에 그 제도를 확장하여 팔도의 과거후보자 200명을 모집하고 고시관 30명을 선발하여 고종이 친히 그들의 면접을 맡아 10명을 발탁하였다. 그러나 오장경이 귀국한 후에는 그 제도를 폐지하여 시행하지 않았다.
5. 금홍집의 겸손
오장경이 금홍집을 만나 난병이 일어난 이유를 물었다. 김홍집은 겸손해하면서 “그 죄가 자기에게 있다”고 하고, 하는 말마다 자신을 책망하므로 그는, “내가 들은 말에 의하면 소인은 자기 과실을 은폐하고 군자는 자신을 책망한다고 하던데 그것은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라고 하고 김홍집을 더욱 존경하였다.
6. 리경하와 신정희의 유배
전무위대장리경하는 고금도, 장어대장신정희는 임자도로 유배하여 이들을 천극안치귀양살이하는 중죄입을 가두어 두기 위하여 그의 거처 주위에 둘러친 가시나무 울타리. 편자주 하였다.
이때 오장경은 그 병란이 일어난 원인을 파헤쳐 이경하 등이 원수로서 그들을 저지하지 못하였다는 이유로 군법을 적용하려고 하였다. 고종은 그의 죄가 아니라는 것을 강력히 말하여 그를 구제하였고, 이경하의 아들 리범진도 목린덕(묄렌도르프;P.G. von Möllendorff)독일인. 외무협판으로 그는 외교와 통상관계에 조예가 깊었음. 편자주 와 친한 사이였으므로 그의 도움을 받아 사형만 감면하고 도서로 유배하였다.
7. 신정희의 기이한 꿈
신정희의 아버지 신헌은 철종 초에 흥양(고흥) 록도에서 6년 동안 유배생활을 하다가 풀려 나왔다.
임오년(1882) 원조에 신정희가 대궐에서 진하식을 마치고 돌아와 몸이 피곤하여 옷도 벗지 않고 잠을 자고 있는데 록도의 옛집 주인이 꿈속에 나타나 “옛날에 살던 집을 새로 이읍시다”하고 청하였다.
잠에서 깨어난 신정희는 기분이 매우 나빴다. 이런 일이 있은 후 그는 임자도로 유배되었다. 신정희는 손님과 함께 그때의 이야기를 하면서 미리 정해진 운명은 피할 수 없는 것이라고 탄식하였다.
8. 임오군란후의 포상
리최응의 시호는 문충, 민겸호의 시호는 충헌, 금보현의 시호는 문헌으로 하사하고, 민창식 등에게는 휼전을 베풀었다. 그리고 난병에게 피살된 유사와 백성들에게도 관함을 주었다.
9. 김홍집의 복직
계미년(1883)에 금홍집이 경기감사로 임명되었다. 그는 경진년(1880) 사신의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후 사람들에게 계속 비난을 받아, 성밖으로 나가서 수년 동안 있었으나 이때 다시 기용되었다. 그것은 그가 일본의 사정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10. 화방의질의 배상요구
일본의 사신 화방의질이 도주한 지 얼마 안되어 다시 정상형, 고도鞆지조, 인례경범 등과 함께 2개 중대를 인솔하고 서울로 들어왔다. 그는 군란이 일어난 과실을 우리 조정으로 되돌리고 다시 화의를 제기하여 매우 까다롭게 질책을 해왔다.
우리 조정에서는 겁을 먹고 리유원을 전권대신으로 임명하여 그들과 함께 일을 처리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그는 일본인들의 말만 따라 5만원은 사망한 일병들의 배상금으로 주고, 50만원은 군비 배상금으로 주었다. 이때부터 일병들은 서울에 주둔하기 시작하였다.
그 후 그들은 또 사신을 보내 사죄하기를 간청하였다. 우리 조정은 금만식, 박영효, 금옥균 등을 일병들의 진중으로 보냈다. 이때 김옥균 등은 미치도록 일본을 사모하여 개화에 뜻을 두고 있었으므로 그는 은밀히 약관과 부칙을 두자고 제의하였다. 일본인들은 이를 매우 기뻐하며 배상금 40만원을 감면해 주었다.
그리고 일본 사신 궁본수일은 록천정에서 거처하고 있었다. 그 정자는 남산 밑에 있는 주동 위에 있었는데, 송림과 천석이 그윽한 곳이다. 그곳은 옛날 양절공한확의 별장이었으나 최근에는 전판서금상현이 살고 있었다.
그러나 이때 일본인들이 다시 와서 협박과 공갈을 마구 퍼부어 전보다 더 심한 행동을 하므로 우리 조정은 그들의 뜻을 상할까 염려하여 간곡히 그들의 의견을 따르게 되었다. 그들은 이 정자를 빼앗아 자기들의 공관으로 삼았다. 이때부터 그들은 영역을 침범하기 시작하여 주동, 라동, 호위동, 남산동, 란동, 장흥방등으로부터, 서쪽으로 종현, 저동에 이르기까지 니현 일대를 포함하여 상남촌까지 40리 내지 50리 정도를 그들이 다 점유하였다.
11. 묄렌도르프의 기용
묄렌도르프를 외무협판으로 임명하였다. 그는 독일인이다. 고종은 그가 외교와 통상관계에 조예가 깊어 매우 가깝게 지내고 있으면서 전동에다가 집을 하사하였다. 그리고 그는 일반 모든 관리와 같이 관대를 착용하고 조참조선왕조 때, 한 달에 네 번씩 임금에게 문안을 드리고 정사를 아뢰던 일. 편자주 을 하였으므로 백성들은 그를 「목참판」(목참판)이라고 하였다.
12. 어윤중의 과감한 관원축소 조치
감성청을 신설하여 어윤중을 구관당상으로 임명하였다. 그는 무슨 일에든 정확하고 숙련된 솜씨를 발휘하여 군국의 불필요한 인원과 비용를 감하였고, 또 감해서는 안될 것도 감한 경우가 있었다. 그런데 왕가의 종척들과 액정서에서 종종 특지를 빌려 겨우 감한 것이라도 다시 복원하였으므로, 그 일은 당연히 번거롭기만 하였다.
그러나 그는 더욱 고집을 부려 원망을 사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았으므로, 그를 헐뜯는 사람들은 그를 「전직각」이라고 하였다. 그 이유는 「어」자의 머리와 밑에 점을 생략하면 「전」자가 되기 때문이다. 다른 모든 일도 감할 수 있는데 성의 획이라고 감하지 못할 것이 어디 있겠느냐는 것이다.
그는 출입을 할 때도 말고삐를 잡는 졸개 하나도 없이 채찍 하나만 들고 다녔다. 하루는 그가 종가를 지나고 있는데, 어느 절름발이 한 사람이 그의 뒤를 따라가며 “소인이 발 하나가 길어 걷기가 매우 불편하니 영감님께서 짧게 감해 주십시오”하고 외쳤다. 그러나 그는 못들은 척하고 빨리 지나갔다.
13. 원세개의 체류
오장경이 서쪽 지방으로 떠나면서 쇠세개에게 군무서리를 임명하고 갔다.
원세개의 자는 홍조(위정)이며 호는 위정(항성, 용암)으로, 그의 나이 30세도 안되어 사람들의 추대를 받아 가군직으로 왔다. 그는 명처하고 성숙하여 서울에 머무른 지 1년 만에 도민들의 마음을 크게 샀다.
그리고 마건충, 정여창 등은 혹 떠나기도 하고 혹은 체류하기도 하였다. 마건충의 아우 마건상은 군무아문의 참의가 되었다.
14. 황사림의 모습
오군문의 휘하에 황사림이란 사람이 있었다. 그는 말을 먹이는 졸개로 있다가 공을 쌓아 총병이 되었다. 그는 몸집이 크게 생겨, 장정 여덟 명이 들어야 옮길 수 있었다. 그는 언제나 쌀 한 말의 밥과 돼지 한 마리 정도를 먹었다. 그리고 그의 가슴과 등에는 탄환 자국이 등넝쿨처럼 얽혀 있고, 눈은 주먹만한 데다가 팔뚝은 달아 놓은 병 같아서 그를 본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비켜섰다.
15. 오장경의 사망
갑신년(1884) 봄에 오장경이 금주에서 사망하자, 고종은 침상훈을 보내어 적제를 지내도록 하였다.
16. 전환국의 당오전 주조
전환국을 설치하여 당오전고종 20년(1883)에 발행된, 5푼이 엽전 100푼과 맞먹던 돈. 편자주 을 주조하자 물가가 앙등하였다. 이 돈은 당오전이라고 하지만 그 가치는 1푼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북쪽 함경도 20개 군과 남쪽의 전주 이남 및 경상도는 옛날처럼 엽전을 사용하였다.
17. 김옥균의 부강책
금옥균을 포경사로 임명하였다. 그는 장동금씨의 변족으로, 그의 아버지 금병기의 뒤를 이어 음관으로 부사를 지냈다.
그는 재주가 조금 있었으나 급제한 지 10여 년이 지나도록 환도가 열리지 않았다. 그러나 서양 학문을 연구한 후에 부강책을 역설하여 세상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이에 박영교와 그의 아우 박영효, 리도재, 신기선, 서광범, 홍영식 등이 일당이 되어 그를 영수로 추대하고, 그가 무슨 기재나 특별한 능력이 있는 것처럼 고종에게 소문을 퍼뜨렸다. 고종은 그에게 기울어졌고, 이때 특별히 포경사를 두어 제일 먼저 그를 임명하였다.
서양인과 일본인들이 고래를 많이 잡아 후한 이익을 보았다. 그것은 우연히 그런 것이 아니라, 김옥균이 집밖을 나오지도 않고 입으로만 고래를 생산하기 때문이었다. 그때 사람들은 그를 비웃었다.
18. 박영교의 기억력
박영교의 자는 자명이다. 그는 금성현령으로 있다가 얼마 안되어 통정대부로 승진하고, 임오년(1882) 가을에는 전라어사로 임명되었다. 이때 고종은 그에게 은밀히 유시하기를, “잘해 보시오. 그리고 부명도 할 필요가 없습니다. 후일에 당신을 전라감사로 임명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박영교는 손뼉을 치고 기뻐하며 그 명을 받았다.
그는 경내에 들어간 지 한 달 만에 서릿발 같은 위엄을 떨쳤다. 탐욕한 사람을 내쫓고 권력 있는 사람도 꺼리지 않았으므로 도민들이 그를 두려워하였다.
그러나 계미년(1883) 봄에 고종은 마음이 변하여 그를 불러들이라고 하였다. 그는 고종의 식언을 한탄하며, 일을 돌보지 않고 문서를 묶어 가지고 수원에 있는 룡주사로 갔다. 거기서 서리 10여 명을 불러 놓고, 정리하지 못한 문서를 구두로 일러주어 서계를 깨끗이 작성하였다. 그는 초안도 잡지 않고 붓을 들어 마구 작성하여 하룻밤 사이에 일을 끝냈다. 그의 기억력은 이처럼 민첩하였다.
19. 이도재의 위망
리도재의 자는 성일이며 호는 운정으로, 월사리정구1564-1635. 인조 때의 대거. 자는 성징, 호는 월사. 편자주 의 후예이다. 그는 중간에 가세가 쇠퇴하여 자신을 한준으로 칭하였다.
그는 계동의 궁한 마을에서 10여 년 동안 살았다. 비가 새는 집에서 공부를 하여 진사가 되고, 잇달아 과거 후보에 올라 민태호의 처의 남동생 윤고와 함께 신사년(1881) 가을에 치른 도기과에 급제하였다. 임오년(1882) 가을에는 경상도 암행어사로 임명되었다. 그는 무슨 일을 당하든 바람이 날 정도로 잘 처리하였으므로 그 위업을 크게 떨쳤다.
20. 신기선의 급제
신기선의 자는 언여이며 호는 양원으로, 상촌신흠의 후손이다. 그는 그의 형 신두선과 임헌회의 문하에서 수업한 후 서울에서 지내다가, 계동으로 이사하여 일차과에 응시하였다.
그는 강연에 나갈 때 언제나 추포와 폐화 차림이었고, 종이 노끈으로 유건의 끈을 하여 모습이 매우 박야하였다. 이에 고종은 그를 이상히 여겨 김옥균에게 묻자 김옥균은 그가 학자라고 대답하였다.
학자는 경학에 밝은 선비를 지칭하는 말이다. 이때 고종은 그를 주목하고 있다가, 그 후 얼마 안되어 과거에 급제시켰으나 그는 귀척, 명환들과 함께 어울려 결국 시속배가 되고 말았다.
21. 서광범의 호사
서광범은 참판서상익의 아들이다. 그는 가세가 융성하여 5대가 각신으로 내려왔다.
그는 천성적으로 사치를 좋아하여 그가 포의로 지내던 약관 때부터 모든 생활을 훈신과 재상처럼 호화롭게 하였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 서상익은 태어나면서부터 어리석은 사람으로서, 노경에 이르러서는 배고픔과 추위나 더위를 알지 못하였다. 그는 다른 아들이 없었으나 서광범과 서로 다른 집에서 살고 있었다.
서광범은 아침에 잠을 자기 시작하여 한낮이 되어서야 일어나 밥을 먹고 손님을 맞이하였다. 그리고 그는 여가만 있으면 시속배들을 찾아가 열흘이 지나도록 그의 아버지가 있는 곳을 한 번도 가지 않았고 그의 하인들도 집안 청소를 잘 하지 않았으므로 서상익이 거처하는 방에는 먼지가 수북이 쌓여, 식탁을 들고 다닌 발자국이 마치 눈 위의 소 발자국처럼 남아 있었다. 이때 아경이 되었다.
서광범은 경진년(1880)에 증광과에 급제한 즉시 대교에 임명되었다. 그는 자호를 위산이라고 하였다.
22. 홍영식의 영민
홍영식은 영상 홍순목의 아들로, 참판홍만식의 배다른 아우이다. 그는 경박하고 영민하여 그가 말한 시무는 들을 만하였지만, 홍순목은 그를 매우 우려하여 가정을 보존하지 못할 아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경박한 그의 친구들은 그를 찾아다니며 「중육」 「중육」 하고 그의 자를 불렀다. 그는 일찍이 한림학사로 있다가 아경이 되었다.
23. 6도 어사 파견
중전이 환궁한 후 국가는 다사하고 민심은 소란하여 암행어사를 6도로 파견하였다. 영남은 리도재, 호남은 박영교, 호서에는 리용호, 경기도는 리건창, 관동은 리?, 관서는 □□이다. 이들은 모두 명망 높은 사람들이다.
이때 신두선이 은진 고을에 수령으로 있었는데, 신기선은 그의 관아에 누워서 이용호를 통하여 안팎으로 농간을 부려 부정한 재물을 착취하였다. 이 일로 인하여 이용호가 같은 죄에 연루되자 유식한 사람들은 신기선을 더욱 원망하였다.
24. 이건창의 경기도 순찰
리건창이 조병식을 징계한 후로 그가 경기도를 순찰할 때는 전례에 그치고 말았다. 그것은 부정을 다 조사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자신도 조그마한 과실이 없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복명을 하자 고종은 그의 서계를 본 후 그를 맞이하면서, “당신이 이번에는 무슨 일을 저지르지 않았으니 그 점을 높이 살 만합니다”라고 하였다.
25. 북관묘 건립
송동에다가 북관묘를 건립 하였다.
송동은 북촌과 동촌 사이에 있는 곳으로, 북한산 기슭에서 가장 깊고 조용한 곳이다. 그리고 이곳은 우암송시열이 살았으므로 지금도 송자동이라고 한다.
26. 중궁과 무녀 진령군
중전이 충주로 피신하였을 때, 어느 무녀가 찾아와 환궁할 시기를 점쳐 보았지만 때가 좋지 않았다. 그로부터 중전은 그를 신기하게 생각하여 환궁할 때 데리고 간다. 중전이 무슨 질병을 앓고 있을 때마다 무녀가 손으로 아픈 곳을 어루만지면 그 증세가 사라졌다. 이 일로 인하여 중전과 무녀는 날로 친숙하게 되었고, 중전은 그의 말이라면 듣지 않는 것이 없었다.
하루는 그 무녀가 자기는 관성제군의 딸이라고 하면서 관왕묘를 건립하자고 하였다. 중전은 그의 말을 따라 관왕묘를 짓고, 그를 진령군으로 봉해 주었다. 그는 수시로 중전을 찾아보았고, 간혹 어느 때는 큰 복장을 하고 찾아왔다. 그럴 때면 량전은 그를 가리켜 정말 진영군 같다고 하면서 웃었다. 중전이 그에게 내린 금은 보화가 무수하였다.
그리고 그의 말 한마디에 화복이 걸려 있어 종종 수령과 변장들이 그의 손에서 나오기도 하였다. 이에 염치없는 경재들은 그에게 아부하여, 간혹 자매를 맺기도 하고 혹은 의자를 맺자고도 하였다. 그중 조병식, 윤영신, 정태호 등이 더욱 심하게 보채었다.
그리고 그 무녀의 아들 금창렬은 엄연히 대관들의 서열에서 행세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그 무녀가 제천과 청풍 사이에 사는 사람이라고 하였다.
27. 이유인과 진령군
리유인은 금해 사람이다. 그는 가난한 무뢰배로 무과를 보기 위하여 서울에서 구걸을 하고 다니다가 진영군이 점을 잘 쳐서 국권을 뒤흔든다는 말을 듣고 어떤 사람을 시켜, 이유인이란 사람은 귀신을 부리고 비바람도 마음대로 일으킨다는 말을 전하도록 하였다. 진영군은 그 말을 듣고 매우 놀라며, 즉시 그를 불러 먼저 귀신을 불러 보라고 간청하자 이유인은, “보여 주기는 쉽지만 놀랄까 두렵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는 며칠을 목욕재계한 후 서울에 와서 먹고 있는 영남의 부랑배 소년들을 불러 은밀히 무슨 방법을 알려 주었다. 그리고 어느날 밤 진영군을 데리고 북한산 깊은 골짜기로 갔다. 그곳은 송림이 울창하고 반딧불이 깜박거려 사람 사는 곳 같지가 않았다.
이유인은 진영군에게 부탁하기를, “내가 있으니 놀라지 마십시오”라고 하더니 수건을 저으며 「동방청제장군」을 불렀다. 그러자 한 귀신이 팔장을 끼고 앞으로 다가왔다. 귀신은 온몸에 푸른 옷을 걸치고 있었으며, 10보 정도의 거리를 두고 더 이상 가까이 오지 않았다.
진영군은 나직한 목소리로, “이것뿐입니까? 저 정도가 무엇이 그리 두렵습니까?”라고 하였다. 이유인은 “떠들지 말고 기다려 보십시오”라고 하면서 또 「남방적제장군」을 불렀다. 그 귀신의 신장은 10척 정도 되고 온몸은 검붉은 색으로 감싸여 있었다. 그리고 머리는 챙이처럼 넓고 눈은 사각형으로 되어 있었으며, 눈동자가 붉은 유리처럼 툭 튀어 나오고 입으로는 붉은 피를 뿜어내어 그 냄새가 사람에게 풍기었다. 그 모습은 야차처럼 사납게 생기고, 손은 창처럼 들고 서 있었다. 진영군은 잠시 그 귀신을 보더니 이유인의 발을 슬쩍 밟으며, “속히 보내시오. 더 보고 싶지 않소”라고 하였다. 귀신은 가면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
진영군은 집으로 돌아와 그 사실을 양전에게 모두 말하였다.
양전은 이유인의 입시를 명하여 1년 사이에 양주목사를 임명하였다.
이유인은 진영군을 수양어머니로 삼고 북관묘에서 기거를 하였으므로 추한 소문이 들렸다.
28. 이유인과 행걸승의 기연
리유인이 어렸을 때, 흉년이 들어 식생활이 어려웠지만 한 로승이 눈길을 다니며 구걸하는 것을 보고 그를 불쌍히 여겨 밥 한 상을 대접하였다.
노승이 그의 집을 갔을 때 가로막힌 벽 사이에서 그릇을 씻는 소리가 들려 왔다. 이때는 흉년이어서 마을마다 밥짓는 연기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어 손님을 대접하기가 어려운 형편이지만, 그 집 부엌에서 밥을 짓던 부인은 아무 군소리도 하지 않았다.
노승은 이상하게 생각하고, 밥을 먹은 후 그 집을 떠났다가 다시 찾아와서 이유인에게 말하였다. “내가 장지를 조금 볼 줄 아는데 당신이 내 말을 듣겠습니까?”하고 그를 데리고 묘 한자리를 쓸 만한 곳으로 갔다. 그곳에는 여기저기 오래된 무덤이 있었다. 노승은 산이 허물어진 곳을 가리키며 “이곳이 묘를 쓸 만한 곳입니다. 장법에 의하여 장례를 치르면 재상이 날 것입니다. 이곳은 최관지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유인은 감탄하면서 “이곳은 우리 읍에 사는 김씨의 산입니다. 그들의 종족이 막강하니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라고 하자 노승은, “이곳에 이장을 하고 즉시 다른 곳으로 이사가시오. 2년도 채 못되어 금해부사가 날 것입니다. 그때 당신 마음대로 분묘를 만드시오. 그러나 천도는 복이 많은 사람을 미워하는 것이니 지리만 믿지 말고 김씨들을 잘 대우하여 주시오. 그리하지 않으면 화를 당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유인은 노승의 말대로 이장을 하였다. 그 후 갑신년(1884)이 지나 그의 아우가 김해부사로 임명되어 그곳에 분묘를 만들고, 김씨들을 위협하여 그곳의 무덤을 모두 파 옮기도록 하였다.
29. 대원군의 심복 8인의 사사
4월에 전판서리회정, 임응준, 조병창과 그의 아들인 전참판조채하, 전승지정현덕, 조우덕, 군수리원진, 전교리리재만 등을 모두 사사하였다. 이들 8명은 대원군의 측근들이다.
임오년(1882) 여름, 대원군이 한 달 사이에 집권하여, 이회정을 례관으로 임명하고 국휼의 의절을 정하였다. 또 임응준을 문임으로 임명하여 청나라에 보낼 국서를 찬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조병창은 다시 대원군의 막하로 들어가 음모를 획책하였다.
세상 사람들은 정현덕, 이재만 등도 대원군의 심복(조아)이라고 칭하므로, 노여움이 쌓인 량전은 그들의 주살을 의논하였다. 이에 민태호는 그 명령을 받들어 시행하려고 모든 계획을 미리 짜놓았다.
이때 민태호는 송경류수로 임명되어 조정에서 사은인사를 하고 성문 밖으로 나갔었는데, 그 다음날 사건이 발각되어 경재 8명이 모두 처형되었다. 이것은 100년 이후 처음 있는 참변으로서 조병창 부자가 처형을 당하여 사람들은 더욱 슬퍼하였다.
이날 이런 엄명이 떨어지자 도민들은 벌벌 떨었고, 남촌의 신사들도 넋을 잃었다. 그리고 대원군은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었으므로 경향의 무뢰배들은 남몰래 고종을 찾아가 유언비어로 선동하므로 고종은 조병창 등 여러 사람이 무슨 음모를 내통하고 있는가 싶어 그들을 먼저 제거한 것이다.
상(1894년 이전) ⑪
1. 천고
6월 10일 4시경 동북 방향에서 천둥이 일어 말(두)처럼 큰 불덩어리가 하늘에 뻗쳤다가 사라졌다.
2. 성주 민란
성주에서 민란이 일어나 목사리용준을 쫓아냈다. 이때 관리들은 부정한 재물을 탐하고 있었으므로 백성들이 소란을 일으켜 그들을 쫓아낸 것이다. 이런 일을 상하가 다 보통 있는 일로 생각하였고, 그들을 치죄하라는 명령도 늦게 내려졌다.
그리고 쫓겨난 관리들은 서울로 가서 백방으로 주선하여 다른 읍으로 승진되어 갔다. 관리를 발령할 때는 언제나 모읍의 재상이 병이 들었다고 하면서, 다른 곳으로 차출을 청하면 모읍과 서로 바꾸라는 내비를 내렸다.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서로 비웃으면서 묻기를, “어찌 모재의 병이 류임되면 낫지를 않고, 자리를 서로 바꿔야만 낫는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2. 각지의 기상이변
7월 15일, 호남에서는 큰 바람이 불어 나무가 꺾이고 집들이 무너졌다. 벼도 큰 피해를 입었다. 8월 중에는 가뭄이 들어 황충이 무성하였다.
파주에는 추분에 서리가 내렸다.
3. 3항의 통상
3개 항구에 통상이 시작되었다. 부산감리는 리려영, 인천감리는 조병직, 원산감리는 정현석이다.
4. 조강하의 진휼청 설치 간청
경상관찰사조강하가 장계를 올려 진청 설치를 간청하자 내탕전 2만냥과 서관미 2만석을 발급하라는 명을 내렸다.
조강하는 조녕하의 친형이다. 그가 서울에서 관직생활을 할 때에는 아무런 명망이 없었으므로 사람들은 그가 귀인인 줄만 알았다. 그러나 영남과 호남 두 도의 관찰사로 있을 때는 강명하고 자혜로워 명망과 공적이 많다는 말을 들었다.
5. 독일과 영국공사의 내한
묄렌도르프는 천진에서 화륜선을 구입해 오고, 리건영은 장기, 경주 등지에서 채광을 하였다.
그리고 독일의 전권대신짭페(Edward Zappe)와 영국의 전권대신파크스(Sir Harry S. Parkes) 영사관애슈튼(William George Aston) 등이 내한하였다.
6. 주진대원의 파견
금윤식이 귀국한 후 영선사를 주진대원으로 개칭하여, 금성근을 천진으로 파견하였다. 이때부터 이것을 매년 상예로 하였다.
7. 고종의 여러 능원 참배
8월 25일, 고종이 인릉과 헌릉을 참배하였고, 9월 3일에는 건원릉, 목릉, 원릉, 수릉, 경릉을 참배 하였다.
8. 리근수의 처형
경상도에서 사대부로 칭하는 사람들은 모두 남인이었다. 대원군이 10년 동안 그들을 기용하였으므로 영남 사람들은 그 고마움이 뼛속까지 스며들어 대원군을 「원합장」이라고 하였다.
그 후 대원군이 청나라에 구금되자 조정에서는 봉환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이 소문은 날로 험악하게 들려 중외에서 모두 그를 불쌍히 여겼지만, 영남 사람들이 친척처럼 그를 더욱 애처롭게 생각하여 선비들은 종종 과거를 보지 않았다. 그것은 이렇게 무도한 세상에 사군자가 과거를 볼 때가 아니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중에 리근수라는 선비는 문학에 능하고 외모도 준수한 사람으로, 서울에서 수십 년 동안 객지생활을 하였지만 오직 조성하만이 그를 국사로 대접할 뿐 대원군과는 서로 모르는 사이였다.
그러나 임오군란이 일어날 때 그는 다른 사람들과 시국 이야기를 하면서 시국의 대책을 몇가지 말하였다. 그 소문이 대원군의 귀에 들리자 대원군은 손뼉을 치면서 그를 칭찬하였다. 그리고 사람들을 대할 때마다, 국사를 논할 만한 사람은 오직 이근수 한 사람뿐이라고 큰소리를 쳤다.
그 후 얼마 안되어 또 시국이 달라지자 대원군의 문객들은 의심하여 도주하였고, 이근수도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때 그 고을에는 해시가 있었는데 이근수는 그 시험에 급제하였다. 그러나 가을에 치르는 향시는 보지 않았다. 이로부터 그는 더욱 강개한 마음을 갖고 술을 마시다가 나랏일에 대한 이야기만 나오면 눈이 찢어질 듯이 노하여 꾸짖었고, 그의 친구인 리문구 등도 그와 같이 하였다.
이 소문을 들은 고종은 그들을 미워하여, 암행어사로 임명된 조병로가 조정에 들어가 사은인사를 할 때 그들에 대한 일을 부탁하여 그런 일이 더 이상 번지지 못하도록 하였다
조병로의 성품은 본래 잔혹하였으므로, 이근수 등을 체포하여 상주의 감옥에다 수감하고 그들 일당을 심문하였다. 그는 대꼬치를 불에 달구어 그들의 살을 지지므로 독이 크게 퍼졌다. 이때 이근수는 고함을 지르며, “선비는 제각기 뜻이 있는 법이라, 혹 과거를 보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니 그것은 묻지 마시오. 그리고 나는 역적 모의를 하지 d않는데 어찌 당이 있단 말이오? 죽으면 죽었지 어찌 죽음을 두려워하여 거짓말로 리탁원을 끌어들일 수 있겠오?”라고 말한 후에 혀를 깨물어 말을 하지 않자 그의 목을 매어 처형하였다.
그의 시체를 검시한 결과 대꼬치가 대여섯 개 정도나 나왔다. 그는 본래 리건창과 친하게 지냈으므로 이건창은 그의 죽음을 슬퍼하여 <추수자전>을 지었다. 이때 리문구도 그 일에 연좌되어 죽었다.
그리고 조병로가 진주에 있다가 하룻밤 사이에 폭사하였다.
이근수는 얼굴이 검고 신장이 커서 우인도사의 별칭. 우사. 우의를 입었으므로 그렇게 일컬음. 편자주 과 검객처럼 늠름하였다. 그러나 너무 강직하여 위태로운 말을 함부로 하였으므로 결국 그 화를 당한 것이다. 그의 자호는 위사이며, 동인이라고도 한다.
9. 리용원의 중궁복위 반대
8월은 중궁이 복위한 지 1주년이 되는 달이므로 고종은 진하식을 거행하려고 하였다. 이때 금병덕 혼자 정승 자리에 있었는데, 그는 고종의 뜻을 어길 수 없어 백관을 거느리고 빈청 앞에 모여 있었다.
참판리용원이 상소하기를, 「지난해의 병란은 일찍 유례가 없는 흉란이므로, 오늘 군신이 그들의 죄를 징계하고 자신을 반성하는 것은 옳은 일이지만 진하를 하는 것은 매우 옳지 못한 일입니다」라고 하였다. 그가 열거하는 말마다 매우 간절하였다. 중궁은 그 상소 내용을 듣고 크게 노하여 그를 치죄하려고 하였으나 민태호가 간곡히 간하여 중지되었다. 이때 진하식은 거행되지 않았다.
그리고 이날 정범조가 대궐로 가던 중 금병시를 방문하자 김병시는 그를 만류하며 술을 대접하였다 이때 정범조가 “진하식에 참석하지 않겠습니까?”라고 말하자 김병시는 천천히 대답하기를, “진하? 무슨 진하? 아무 말씀 마시고 술이나 함께 마십시다”라고 하였다. 정범조는 이를 이상하게 생각하였다.
잠시 후에 백관들이 파도처럼 몰려나오느라 거리가 소란하였다. 그것은 이용원이 상소를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민태호가 이용원에게 부탁한 것으로 의심하고 있었다. 북촌에서 사는 권귀들은 미리 그 사실을 다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10. 민치완의 면화
민치완은 산청 사람으로 그의 집안은 대대로 시골 선비였으며, 그들은 농사를 지어 많은 재산을 모았다
민치완은 일찍 로사기정진의 문하에서 수업을 하다가 과거를 보기 위하여 서울로 왔다. 이때 어떤 사람이 그를 대원군에게 소개하여, 글씨 쓰는 직책을 1년 남짓 맡았다. 이 일로 인하여 민치완은 대원군과 매우 친한 사이가 되었고, 그의 도움으로 도사가 되었다. 그의 형제와 자질들도 관리가 되어 그들의 기세가 영남 일로에서 막강하였다.
그러나 민치완은 근신하고 영민하여 큰 부정과 시비를 일으키지 않았다. 또 대원군이 조만간 실각할 것을 예측하고 있었으므로, 만일 대원군이 실각할 경우 다른 도움을 받기 위하여 민씨들과 손을 잡아 그의 종족들을 각 방면의 요직에 두고 있었다.
이때 민승호의 형제들은 그 문세가 하늘에 나는 새도 다 잡을 만큼 널리 뻗쳐 있어, 대원군과 관계를 맺으려고 하는 사람들은 그의 형제들에게 모든 정성을 기울이게 되었으므로 민씨들은 이 점을 매우 염려하였다. 과연 갑술년(1874) 이후 대원군의 문객들은 하인으로부터 명망 있는 사람에 이르기까지 모두 화를 당하였다. 오직 화를 면한 사람은 민치완뿐이었다.
이때 중궁은 대원군에 대한 노정이 아직 풀리지 않았으므로 그들의 소굴을 다 파헤치려고 하였다. 혹 그물에서 빠져 나간 사람이 없나 하고 오랫동안 생각한 끝에, “민치완이 비록 늙었으나 그는 지모가 많아 그의 마음대로 놓아둘 수 없다” 하고 그를 위도로 유배하였다.
그가 처음 대원군에게 갔을 때부터 온종일 대원군을 뫼시고 서 있었으므로, 발등에 종기가 나고 버선이 찢어져도 물러가라고 말하지 않으면 물러나지 않았다. 그의 근신하는 모습은 이와 같았다.
11. 조헌과 금집의 문묘배향
10월 24일, 교서를 팔도에 반포하여 문렬공조헌1544~1592. 호는 중봉. 선조 때의 학자. 편자주 과 문경공금집1574~1656. 호는 신독재. 대사헌을 거쳐 이조판서가 된 후 효종과 북벌을 계획하였음. 편자주 을 문묘에 배향하라는 명을 내렸다. 이에 9월부터 관학유생들은 상소를 하여, 량선정 및 문정공금상헌1570~1652. 호는 청음. 윤근수의 문인. 편자주 과 문순공권상하1641~1721. 호는 수암. 한수재. 송시열의 수제자로리이를 조종으로 하여 송시열을 계승한 기호학파의 지도자. 편자주 도 문묘에 배향할 수 있는 은전을 내려 주라고 간청하였으나 이때 량선정만 허락하였다.
고종은 자신의 웅대한 지략을 자부한 나머지 불세출의 자질을 가지고 있다고 판단하고, 정권을 다 거머쥐고 세상일에 분주한 나날을 보냈다. 고종은 교통과 통역 등에 있어서도 오대주와 연결하고 있었다. 이것은 위로 렬조에 비교될 뿐 아니라 자신은 우리 동방에서 처음으로 난 군왕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나 유학의 전례에 있어서는 조종의 융성기를 미치지 못하였다고 늘 불만을 품고 있었다. 그러다가 결국 이 문묘에 배향하자는 청이 있자 단연 결행을 한 것이다. 그러나 고종은 너무 남발한 것이 아닌가 염려되어 이와 같이 결정하였다. 그 교서는 대제학한장석이 지었다.
12. 승무에 대한 사론의 폐단
중엽 이후 현관성균관을 달리 일컫는 말. 편자주 은 선행을 솔선수범한 곳이자 당대의 공론을 창출한 곳이기도 하였다. 위로는 임금의 뜻을 굴복시키고 아래로는 재상의 위엄을 꺾기도 하였으며, 때로는 그 언론이 과격하기도 하였지만 논평을 숭상한 선비들은 취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요즈음은 세운이 떨어지고 사풍도 퇴폐하여 소위 성균관에서 공부하는 선비들이 모두 답답한 과거꾼에 불과할 뿐더러, 그들은 뾰족한 귀신처럼 춥고 배고파도 갈 곳이 없었다. 그들은 텅텅 빈 재실에 쪼그리고 앉아 밤낮으로 무슨 일거리를 만들려고 하다가 아무 것도 할 일이 없으면 죄없는 서원 복설만 주장하였다.
그리고 명현의 승무지난날, 학덕 있는 사람을 문묘에 올려 합사하던 일. 편자주 에 대한 일을 무슨 기화로 생각한 나머지 팔도의 선비들과 서로 호응하여 외람되게 떼를 지어, 간혹 남의 집에서 돈을 거두기도 하고 혹은 강제로 향부를 분배하기도 하였다. 그들은 그 인원을 계산한 후 돈 꾸러미를 나누어 자기들이 먼저 착복하고, 그 남은 돈으로 소청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도포를 입은 채로 매일 대궐문 앞에 부복하여 상소를 한다고 하였다.
그들이 하는 일을 대충 살펴보면 금년에도 승무를 한다고 하고 명년에도 승무를 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처음부터 그것을 가지고 핑계를 대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후 유현으로 칭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임금을 찾아와서 그 일을 말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그 예를 들면 영남은 점필재금종직1431~1492. 호는 점필재. 야은길재의 학통을 받아 영남학파의 대표가 되었음. 편자주 , 남명조식1501~1571. 호는 남명. 명종 때의 학자로 두류산(지리산) 산천재에서 연구하였음. 편자주 , 한강정구1543~1620. 호는 한강. 퇴계와 남명에게 사사한 후 백매원에서 고례를 연구하고, 또 주자학을 연구하였음. 편자주 , 려헌장현광1554~1637. 인조 때의 학자. 자는 덕회, 호는 려헌. 성리학을 연구하였음. 편자주 으로부터 탁영 금일손1446~1498. 자는 계운. 호는 탁영). 연산군 때의 학자임. 편자주 까지 추천되었고, 호남은 일재리항1499~1576. 명종 때의 학자. 자는 항지, 호는 일재. 박영의 문인. 편자주 , 고봉기대승1527~1572. 중종 때의 학자. 자는 명언, 호는 고봉. 편자주 , 미암류희춘1513~1577. 중종 때의 학자. 자는 인중, 호는 미암. 편자주 , 사암박순1523~1589. 선조 때의 재상. 자는 화숙, 호는 사암. 편자주 및 옥계로신1518~1578. 호는 옥계. 편자주 등이다. 이들을 호남 오현이라고 한다.
그리고 기호에는 중봉조헌, 신독재금집, 수암권상하, 청음금상헌 및 농암금창협1651~1708. 숙종 때의 학자. 자는 화중, 호는 농암. 편자주 등이 추천되었으나 중봉과 신독재만 윤허를 받았다.
그러나 간혹 목은이색1328~1396. 호는 목은. 고려 말기의 성리학자. 여말 삼은 중의 한 사람. 편자주 을 추천한 사람도 있고 심지어는 황심현까지 거론한 사람이 있었으며, 오직 그의 할아버지인 방촌황희1363~1452. 호는 방촌. 조선왕조 초기의 명재상. 편자주 만 추천하기도 하였으나 팔도의 선비들이 덩달아 호응하였다. 그리고 허헌이란 사람은 그의 조상인 미수허목1595~1682. 호는 미수. 정구의 문인. 편자주 을 추천하므로 엄한 비답을 내려 그를 유배하였다.
허헌이 이렇게 유배된 것은 미수 때문이며, 승무를 중시한 것이 아니었다. 이것이 어찌 사론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나라의 기강이 없어짐에 따라 국왕을 생각하지 않고 그토록 소란을 피워 거의 거리낌없이 행동을 하니, 아! 세상의 변화를 볼 만하다.
4. 어윤중의 의욕과 폐단
어윤중을 서북경략사로 임명하였다.
그는 시국의 어려움을 뼈아프게 생각하여 백성들의 숨은 고통에 유의하였다. 그리고 백성들에게 해를 끼치는 일을 일체 제거하기 위하여 너무 지나칠 정도로 재감을 하여 일시 민심을 통쾌하게 하려 하였다. 그러나 경략사로 부임한 후에는 이행하지 않았으므로 어느 면에서는 옛날보다 더 폐단이 늘어나게 되고, 도리어 백성들에게 해를 끼쳤다.
5. 박영효, 홍영식 등의 행적
갑신년(1884) 봄, 전권대신박영효, 부관홍영식, 종사관서광범 등이 미국에서 돌아왔다.
옛날 법에 의하면 의빈은 국정에 참여하지 않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것은 조종의 깊은 뜻에 의한 것이다. 고종은 외국을 동경하여, 선조의 제도가 협소하므로 점차 변경하였다.
그리고 박영효는 일찍부터 아첨을 하여 금중을 출입하였으므로 고종은 그를 매우 총애하였다. 고종은 박영효의 말을 듣고 외국의 일을 어느 정도 알게 되었다. 고종은 박영효를 재사로 여겨 일본을 다녀오라고 한 후에 그를 한성판윤, 광주류수 등을 제수하였다. 이것은 매우 파격적으로 기용한 것이다 그리고 또 그에게 전권대신의 직함을 띠어 구미를 다녀오게 하자, 그는 1년 만에 귀국하였다.
그리고 홍영식은 가선으로 승진시키고, 대교서광범은 동부승지로 특진시켰으며, 김옥균도 참판을 제수하였다.
박영효 등은 밤낮으로 모여 은밀히 모의를 하였다. 그들의 종적이 수상하여 유식한 사람들은 우려를 표명하며, 무슨 변란이 일어날 징조라고 하였다.
서광범의 친척 중에 서재필이란 사람이 있었다. 그는 겨우 20세가 될 무렵 과거에 급제한 사람이다. 서재필은 유람을 하기 위해 일본으로 들어가서 1년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았는데, 갑진년(1884) 봄에 그의 조부가 사망하였다. 그는 후실에서 태어났지만 당연히 승중을 해야 할 사람이었다.
그 후 오랜 세월이 흘러 서재필은 초상을 치르러 왔다. 그거 거상중에 있을 때 박영효가 조문을 하러 와서 그에게 비단옷을 입혀 주며, “어찌 시대에 어긋나게 상제를 지키려고 하십니까? 이 옷을 입고 부귀를 함께 누리십시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홍영식은 사절로 갔다 온 후, 그의 아버지를 뵈온 지 이미 1년이 지났었다. 그가 대궐로 나갈 때 그의 부친 홍순목이 빈청에 있었으나, 그는 입시만 하고 물러나와 빈청을 들리지 않고 곧바로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는 판서리승오가 집을 판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이때 이승오는 상중에 있었지만 홍영식은 조문을 하지 않았다. 그는 그 집을 소개한 사람을 따라 이승오의 집으로 갔다. 홍영식은 홑두루마기를 입은 채 손을 뒤로 하고, 그의 집을 들어가 처마만 둘러보고 나왔다. 이승오에게 조문도 하지 않고 돌아간 것이다.
우리 국속에 대체로 남에게 조문할 사람은 하얀 도포를 입지만, 조문을 하지 않을 사람은 그의 집을 들어가지 않는다.
이때 나는 서울에 있으면서 경향한장석(한장석)을 찾아보았다. 경향은 손가락을 꼽아 가며 서재필과 홍영식의 하는 일을 말해 주면서 “윤리가 없어졌으니 나라가 망하지 않겠습니까?” 하고 탄식을 그치지 않았다.
6. 혜성과 천둥
계미년(1883) 12뭘 22일, 혜성이 신방과 경방에서 나왔다. 그 빛은 하얗고, 길이는 열 자쯤 되어 동쪽으로 뻗어 있었는데 황혼 후에 나타났다가 밤 10시경 사라졌다.
그리고 갑신년(1884) 정월과 4월 17일 새벽에 동쪽 방향에서 천둥소리가 났다.
7. 우정국 설치
전의감에 우정국을 설치하여 총판과 사사 등의 관리를 두고, 박병효와 홍영식이 주관하였다.
8. 의제 개혁
6월에 의제를 개혁하여 공사 귀천을 막론하고 신식 옷을 입으라는 명을 반포하였다. 이때 박영효 등은 서양의 제도를 미칠 듯이 좋아하여 고종에게 의제 개혁을 권고하면서, “모두 간편한 옷을 입어야 합니다 이것이 부강책의 첫째입니다”라고 하였고, 민영익도 청나라에서 돌아와 그와 같은 여론을 전개하였다.
이에 윤5월에 절목을 정하여 공복은 홍단령처럼 소매가 넓은 것을 폐지하고, 대관과 소관은 흑단령처럼 소매가 좁은 옷을 입도록 하였다. 사복은 도포와 직령, 별의 등과 같이 소매가 넓은 것을 사용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귀천을 막론하고 모두 소매가 좁은 두루마기를 입도록 하였고, 관직에 있는 사람은 전복을 더 입으라고 하였다. 기타 소소한 조목은 대충 넓은 소매를 금하도록 한 것으로, 번거로운 기록을 생략한다.
이 일로 인해 나라 안은 발칵 뒤집혀지고, 그 명령에 불복하는 사람이 많았다. 정언리수홍 등이 소를 올리고 옥당에서는 련명소를 올렸다. 또 성균관 유생 침로정 등의 상소가 있었으며, 산림으로는 송병선이 상소를 하였고, 경재로는 박제교가 상소를 하였다. 예조판서리인명은 이행하지 못하겠으므로 치죄를 기다린다는 상소를 하였다.
외직에 있는 대신으로는 봉조하리유원과 봉조하송근수가 상소하였다. 시원임대신금병국, 홍순목, 김병덕 등은 계속 연명으로 차자를 올려 강력히 간하였으나 고종은 그들의 청을 일체 배척하였다. 임금과 신하가 서로 줄다리기를 하며 조정이 소란하였으나 점차 서로 양보하여 그 제도를 조정과 민간에게 반포하였다.
9. 리유원 유배
리인명은 만경현으로, 이유원은 거제부로 유배하였다.
이유원은 본래 아첨을 좋아하고 기질이 나약하여, 조정에서 50년을 있었으나 칭찬할 만한 직언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주상의 뜻을 헤아려 모가 나지 않게 상소를 하였다. 그 소문 중에는 “신의 선조 문충공항복이 말하기를……”이라는 구절을 반드시 넣어서 자기 가문을 자랑하였으므로 사람들은 이를 「세덕소」라고 하였다.
그는 국가가 크게 경장하는 때를 당하였지만, 조정의 원로로서 한결같이 침묵만 지키고 있으므로 모든 사람들이 그를 꾸짖었다. 두려운 일이었다. 바로 이러한 시기에 그는 의제 개혁을 반대하는 상소를 한 것이다. 고종은 본래 그를 총애하고 있었으므로 윤허를 하지 않을 뿐더러, 또 그것을 깊이 죄로 생각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가 옛 법을 열거하면서까지 강경하게 말을 하므로 고종은 그의 직언을 싫어하였다. 또 이 시기에 대신들을 한번 꺾어 놓으면 다른 사람들도 자연히 기세가 꺾일 것이기 때문에 이와 같이 엄한 명령을 내린 것이다.
고종이 윤허를 하지 않자 이유원은 실의에 찬 모습으로 길을 떠났다. 그러자 남촌 사람들은 살며시 웃으며, “귤산이 올린 이번의 세덕소는 아무 효력이 없었구먼……”이라고 하였다. 세상 사람들은 이유원이 명관으로 입각하기는 틀린 것이므로 이번 걸음은 위태로울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고종은 본래부터 그를 죽일 뜻이 없었으므로, 그는 1년 남짓 있다가 다시 석방되었다.
10. 홍순목, 김병덕의 축출
영의정금병국은 파직한 후 다시 서용하지 않고, 령부사홍순목과 우의정금병덕은 대궐문 밖으로 축출되었다가 그 후 복직되었다. 이때 김병덕은 성밖으로 나가 치죄하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영평으로 돌아가고, 김병국은 노환으로 강교에 있었고, 홍순목은 두려워하면서 거취를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이 전후로 올린 연명차자는 모두 김병덕이 주관하였다. 그는 글의 내용을 부드럽게 하여 사람들을 감동시키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가 등대한 후에는 강경하게 저항하여, “전하가 이렇게 마음을 고치지 않으시면 반드시 나라가 망할 것입니다”라고 하자 고종은 몹시 노하여 그를 꾸짖었다. 그 꾸짖는 소리가 전내를 진동하므로 군신들은 얼굴빛이 변하였다. 그러나 그는 침착하게 “전하께서 신을 죽이시려면 그뿐이지만 어찌 객기를 부려 옥체를 손상하십니까?”라고 한 후 빠른 걸음걸이로 대궐을 나와, 그 즉시 동소문 밖에서 열흘 남짓 치죄하길 기다렸다.
그러나 고종은 아직 노여움이 풀리지 않아 그를 향리로 축출하라는 교지를 내리고, 영원히 그를 서용하지 않았다. 이때 대왕대비는 고종에게 “김병덕의 처분이 너무 과중하지 않습니까?”라고 하였으나 고종은, “소자가 재위한 지 20년이 되었지만 이렇게 무례한 사람은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어찌 이와 같은 조치를 취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그 후 김병덕은 영평 고향집으로 돌아가 다시 서울로 오지 않았다. 그는 청렴하고 정약하여 칭찬을 할 만하지만 역량이 모자라는 데다가 풍절이 없기 때문에 유식한 사람들은 그를 보잘 것 없이 여겼다. 그러나 이런 일이 있은 후에는 군중의 여론이 완만하게 기울어져 그를 명재상이라고 하였다.
11. 해방영 설치
부평부에 해방영을 설치하여, 민영목을 해방사로 임명하였다.
12. 일본공관의 교동 이전
일본공사죽첨진일랑이 교동에다가 새 공관을 지어 그곳으로 이거하였다. 그는 문장에 능하였다. 그는 일찍 중국을 들어가 하남, 합서, 촉, 삼협, 오, 초 등지를 두루 보고 <잔운협우기>라는 기행문을 지었는데, 그 서문은 리홍장이 지었다.
그 후 죽첨진일랑은 주한공사가 되어 우리 서울에 주재하고 있으면서 김옥균 일파와 어울려 그들과의 정이 날로 깊어졌다. 김옥균 등도 그에게 정을 주어 그의 성원을 받고 지내던 중 그로 하여금 공관을 옮기도록 하였다. 이는 김옥균 등이 죽첨진일랑과 가깝게 지내기 위해 그를 끌어들인 것이며 그도 그들의 말을 따랐다.
13. 금옥균 처첩과 나체 일인의 해학
김옥균의 집은 홍현에 있었다. 그는 밤낮으로 일본인과 왕래하였다. 이때 김옥균은 나체로 그의 집을 들어온 일본인이 그의 처첩과 어깨를 맞댄 채 대화를 하면, 그는 오히려 해학을 하도록 도왔다. 이 소문을 들은 사람들은 매우 놀랐다
14. 민영상의 집수리
민영상이 상해에서 돌아왔다.
그는 자신의 집이 여러 겹으로 차단되어 있어 그 굴곡이 싫었으므로, 담장을 모두 헐어버리고 안채와 바깥채가 훤히 보일 수 있도록 하였다.
상(1894년 이전) ⑫
1. 갑신정변
10월 17일 밤, 박영효, 김옥균 등이 난을 일으켜 대궐로 침범하였다. 그들은 고종을 경우궁으로 옮겨 놓고, 임금이 부른다고 하여 좌찬성민태호, 지사조녕하, 해방총관민영목, 좌영사리조연, 우영사윤태준, 전영사한규직 등을 불러내어 모두 살해하였다. 이때 환관 류재현도 적도를 꾸짖다가 피살되었다.
처음에 박영효 등은 일본 및 서양인들과 교류하면서 그들의 부강한 것을 흠모한 나머지 우리의 옛 국속을 버리고 그들의 제도를 배워 개화를 추진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때 고종은 우유부단할 뿐 아니라 정책이 여러 사람에게서 나와 획일성이 없었기 때문에, 박영효 등은 은밀한 음모를 꾸며 고종을 다른 궁으로 이어시켰다.
또 민태호 등과 일시의 장신들을 제거하기 위해 일본인에게 후한 뇌물을 주고, 그들로 하여금 병사들을 대궐로 집결시켜 호위하도록 하고 또 청국인을 방어하도록 하였다. 만일 성사가 잘 되면 그들이 하고 싶은 일을 점차로 이행하려 한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고종을 인천으로 유인하여 륜선을 타고 일본으로 가게 한 후 서양의 민주주의를 모방하려 하는 데 민영효 이하가 교대로 그 일을 주관한다고 하였고, 또 어떤 사람은 팔도를 분할하여 제적들이 한 지방씩 차지할 것이라고 하였으며, 또 어떤 사람은 청나라와 절교하고 일본의 세력을 얻어 고종을 대황제로 높인다고도 하였다.
그러나 그 후 그들은 하나 둘씩 그물을 빠져나가 그들을 신문할 길이 없어 그 내용을 자세히 밝힐 수는 없었다. 그들이 음모를 꾸민 지 오랜 세월이 흘렀으므로 그 음모가 조금밖에 누설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서재필은 윤태준의 조카이므로, 이때 그는 윤태준을 방문하였다. 윤태준은 그를 위해 탕면을 대접하였다. 그들은 서로 마주앉아 탕면을 먹으면서 윤태준이 먼저, “요즘 바깥 소식을 들으니 금릉위(박영효) 일파가 큰일을 꾸민다고 하던데 너도 혹 그런 말을 들어 보았느냐?” 하고 물었다. 그 말을 들은 서재필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젓가락을 놓더니 밖으로 훌쩍 나가버렸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 서재필이 들어오지 않아 윤태준이 문을 열고 보니, 그는 이미 달아나고 없었다. 윤태준은 매우 놀라며 그 사실을 민태호에게 말하자 그는, “령공께서는 지금 처음으로 들으십니까? 나는 그 소문을 들은 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일은 아직 의심과 사실이 반반이므로 그 취지를 대간에게 알려 상소를 하도록 하고, 울릉도사건을 논하여 김옥균을 추궁하면 그 단서가 나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것은 김옥균이 울릉도를 일본에게 팔았다는 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김옥균 등은 자신들의 기밀이 누설된 줄 알고 기선을 먼저 잡기 위해 17일 밤 우정국에서 잔치를 베풀어 모든 대신들을 초청하였다. 그러나 대신들이 다 오지는 않았고, 다만 온 사람은 민영익뿐이었다. 대체로 제적들은 겉으로 민영익과 가까운 척하였지만 그 비밀은 숨기고 있었다.
잠시 후에 밖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민영익도 그것을 보기 위해 밖으로 나가려는 순간 갑자기 한 사람이 일어나서 칼로 그를 향해 쳤다. 그의 귀가 맞아 어깨에 드리우고 있었다. 민영익이 땅으로 쓰러지자 묄렌도르프가 그의 팔을 껴안고 달아났다.
이때 박영효 등은 화급히 대궐 안으로 달려가서 대궐 밖의 여러 곳에 불을 지르도록 하고, 함성을 지르며 그들의 기세를 돕다가 다시 중희당으로 들어가 숨을 몰아쉬며, “청병이 난을 일으켜 매우 급하오니 상께서 잠시 일본공관으로 피신하여 그들의 변란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고종이 그들의 말을 따르려고 하자 중궁이 말하기를, “함부로 가셔서는 안됩니다” 하고 만류하였다. 박영효 등은, “그러면 경우궁으로 행차하시기 바랍니다”라고 하면서 온갖 위협을 가하였고, 박영교는 고종 앞에 엎드려 있다가 고종의 팔을 붙잡고 경우궁으로 들어가 “일병이 와서 경호하라”라는 어서를 써 달라고 간청한 후 이를 일본공관으로 보냈다. 어서를 받은 일본공사죽첨진일랑은 병사를 지휘하여 궁궐 담장을 포위하도록 하였다.
그 다음날, 날이 밝자 적당들은 거짓 조서를 만들어 민태호 등을 불렀다. 조녕하는 민태호에게 말하기를, “이번 사변을 예측하기 어려우니 제영의 병사들을 동원하고 또 이 사실을 원세개의 진영으로 알려 그들의 병사가 옹호하고 들어오면 만전을 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자 민태호는, “상께서 지금 포위를 당하고 계시므로 시급히 조서를 공포해야겠으니 우리가 어찌 들어가지 않겠습니까? 내가 먼저 들어갈 테니 공은 뒷일을 잘 처리하고 들어오십시오”라고 하였다. 조영하는 창졸간에 그의 말을 따르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민영목 등은 수선을 떨며 어쩔 줄 모르다가 들어가지 않으면 안될 형편이어서 들어갔다.
이때 서재필이 생도들과 함께 칼을 휘두르며 그들을 차례로 죽였다. 그들의 몸은 산산조각이 나 흩어졌다. 고종은 이 광경을 바라보며 눈물만 흘리고 있을 뿐이었다. 이때 조영하는 칼에 맞았으나 죽지 않고 오히려 고함을 치며, “조선의 법에 누가 문신은 칼을 차지 못하도록 하였느냐? 내 수중에 칼을 들어 너희들을 만 갈래로 쳐서 죽이지 못한 것이 한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중관 류재현이 어선을 바치자 김옥균은 그 수라상을 차면서, “이때가 어느 때인데 수라상으로 한가하게 지낼 수 있느냐?”라고 하자 유재현은 그들을 크게 꾸짖어, “너희들은 모두 교목귀경으로서 무엇이 부족하여 이렇게 천고에도 없는 역적질을 하느냐?”라고 하므로 김옥균은 칼을 빼어 그를 내려치자 그는 뜨락 밑으로 굴러 떨어졌다. 이를 본 고종은 벌벌 떨었다.
이때 김옥균은 그 옥새와 옥로를 빼앗아 박영효에게 주면서 “당신이 즉위하시오”라고 하였다. 제적들이 시역의 음모를 할 때 침상훈이 말하기를, “대가는 무능하고 안악공은 배부르게 먹고만 있으니 공들이 무엇을 꺼려하여 천하에 악명을 얻으려 합니까?”라고 하자 역적들은 음모를 중지하고 말았다.
그것은 심상훈이 그들과 함께 임금을 모시고 들어가서 제적들이 흉사를 저지르는 것을 보고 겉으로 그들에게 붙어 충성하는 체하였으므로 제적들은 그를 믿고 있었다. 이때 고종이 화를 면한 것은 심상훈의 힘이 컸으며 시종제신들도 그의 힘을 많이 입었다.
2. 조녕하의 구마분촉
조영하가 사망하기 하루 전에, 그의 마구간에 있던 말이 뛰어나와 안채와 바깥채를 마구 들이받고 다니므로 겨우 붙잡았다. 이때 사람들은 그것을 마요라고 하였다.
조영하는 키가 크고 몸이 수척하므로 어떤 관상가는 그를 학형이라고 하였다. 그는 말을 잘 타 호협한 기풍이 있고 아랫사람을 잘 무마하여 은혜를 베풀었다. 그리고 그는 임오년(1882) 이후 국사에 헌신적인 노력을 하였으므로 그가 사망할 때 사람들은 그를 매우 애석하게 여겼다.
역적들이 조영하 등을 살해하여 그 시체를 한방에 쌓아 두었는데 그 시체들을 꺼내어 염할 때 조영하는 팔뚝 하나가 없었으나 민태호의 집에서 찾아왔다.
3. 점술가 조백승의 출세
칠곡인 조백승은 점술에 능하다는 소문이 고종에게 알려져, 계미년(1883) 봄에 피소되었다. 민영목이 해방사로 있을 때 그를 불러 군사마로 임명하였는데, 갑신년(1884) 10월에 민영목이 서울을 가려고 하자 조백승이 저지하면서 “하늘에 계엄이 생겨 형혹성이 상장을 침범하고 있으므로 공께서 장수가 될 것이니 마음을 조용히 가라앉혀 함부로 요동하지 마십시오”라고 하였다. 이때 인천부사허진이 한자리에 있다가 그 말을 기록해 두었다.
그 후 민영목이 사망하자 허진은 민씨 집안에 그 사실을 말하였다. 고종은 그 말을 듣고 그를 별입시로 블러서, 항시 무슨 재앙이 있겠는가를 물어 보았으나 그에게는 아무 능한 것이 없었다. 조백승의 관직은 의령현감에까지 이르렀다.
4. 서얼 이조연의 출세
리조연의 호는 완서로 저헌리석정의 집에 출계되었다. 그는 중간에 서얼이란 이유로 기용되지 못하다가 임오군란 이후에 등용되기 시작하여 여러 차례 청직을 거쳤다. 그 예로 이조참판, 동경연 등에는 민영익과 함께 후보로 올랐고, 그의 관직은 좌영사까지 올라 귀척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그의 아들 탁은 음사로 약관의 나이에 백천군수를 제수받아 일시의 귀족으로 혁혁한 기세를 부렸다.
그 후 계미년(1883) 봄에 그는 윤태준과 함께 상해로 갔다. 어느 날 밤에 그가 밖을 나가 보니 길가에 돈주머니 하나가 버려져 있었다. 그는 그것을 가져와서 그 전대 속에 있는 물건을 꺼내 보았다. 그것은 영국인 모의 물건들이었다. 그 속에 든 물건은 모두 지폐로 그 수량은 백만 냥쯤 되어 보였다. 그는 잠자고 있는 윤태준을 깨워 “이것을 가지고 가면 조선의 부자가 될 것인데 어른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고 하자 윤태준은, “자네 뜻대로 하게”라고 하였다.
이조연은 밤에 누웠다 앉았다 하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는 날이 밝자 문 위에 「어젯밤에 지폐 수천원을 잃어버린 사람은 와서 찾아가기 바랍니다」라는 방을 걸어 놓았다.
그때 어떤 영국인이 찾아와서 크게 놀라며, “내가 듣기로는 동양에는 인물이 적다고 하던데 공처럼 훌륭한 분도 계십니까?”라고 한 후 사례금을 후하게 주면서, “이것은 사례로 준 것이니 사양하지 마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는 이미 그 사실을 기록하여 신문에 게재하였으므로 조선의 이조연은 하루 사이 온 천하에 알려졌다. 그 후 그가 돌아오자 고종은 그를 매우 기뻐하며, 그의 아들 탁을 외직에 제수하여 그 청렴한 명예에 대한 대가를 보상하였다.
5. 한규직과 한규설의 특채
한규직은 남촌에서 대대로 사는 무관이었으나 등단한 사람들은 하나도 없었다. 그는 동래수사로 있을 때 호랑이처럼 포악하고 시랑이처럼 재물을 탐하여 그에게 뇌물을 바친 사람들이 줄을 잇고 있어 비취색 비단만 하더라도 5천필이나 되었다. 이런 그에게 곧바로 우영사를 임명하였고 그의 아우 한규설은 28세에 진주병사로 발탁하여 어머님을 뫼시고 부임하라는 특명을 내렸다. 이것은 특별한 예우이다.
그 후 한규직이 사망하자 고종은 그를 애도하는 마음이 가시지 않아, 그를 총애하던 마음을 한규설에게 옮겨 그로 하여금 그의 형이 가졌던 관직에 있게 하였다. 그리고 한규직의 아들 한린호와 이조연의 아들 이탁은 3년상을 마친 후 과거에 급제하였다.
6. 홍영식과 금옥균 등의 관직 분담
18일, 제적들은 서로 부서를 분담하여 홍영식은 영의정, 김옥균은 좌영사, 서광범은 우영사가 되고 병마, 재무아문에는 모두 그들의 일당을 심었다.
리재원은 우의정이 되었다. 이재원은 대원군의 장질이자 고종의 종부형이었다. 제적들이 만일 음모를 실패할 때는 이재원을 구실로 삼아 미봉하기 위한 것이다.
7. 청병의 입궁과 제적의 도주
19일, 청국의 제독군문원세개가 대궐로 들어와 호위하자 일본 병사들은 물러가고, 고종은 북관묘로 이어하였다.
그리고 홍영식과 박영교는 처형되고 박영효, 금옥균, 서광범, 서재필 등은 일본인의 도움을 받아 도주하였다. 고종이 환궁할 때 원세개는 하도감에 주둔하고 있다가 궁중에서 변란이 일어나 그 귀추를 예측할 수 없다는 말을 듣고 갑옷을 입고 대기하고 있었는데, 전승지리봉구가 진터의 토성을 치고 통곡하며 급히 가서 구원하기를 간청하였다.
원세개는 소매를 걷어붙이고 일어나서 병사 2천명을 동원하였다. 그가 병사들을 독려하여 궁문에 도착하자, 일본 병사들은 소나무를 의지하거나 혹은 담장 구멍으로 총을 겨누어 총탄을 빗발처럼 쏘아댔다. 원세개는 땋은 머리로 목을 감싸고 담장을 뛰어넘어 대궐문을 부수고 병사들을 들여보냈다.
그리고 그는 춤추듯 칼을 휘두르며 좌충우돌로 전진해 갔다. 그의 몸은 배꽃이 휘날리듯 가벼웠다. 그의 앞에는 무수한 탄환이 떨어졌다. 우리 군대도 원세개의 병사들을 따라 들어갔다. 그 두 군대는 서로 무찌르며 싸웠다. 일본병이 조금 물러서더니 죽첨진일랑이 병사들을 지휘하며 물러갔다. 이때 박영효 등은 자신들의 음모가 실패로 돌아간 것을 보고 죽첨진일랑을 따라 도주하였다.
고종은 창덕궁에 병기가 가득 차 있다는 이유로 잠시 북관묘로 가 있겠다고 하였다. 홍영식과 박영교는 시세가 판명되지 않았다고 생각하여 그때까지도 명령만 믿고 힘을 내었다. 그들은 북관묘까지 따라가서 어탑을 둘러싸고 앉아서 속히 어찰을 내려 청병을 물러가게 하라고 간청하였다. 고종은 놀란 마음이 진정되지 않아 잠시 일어서려고 하면 그 두 적들은 다시 끌어안고 앉히며, “전하께서는 이곳에서 한 발자국도 떠날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뜨락 밑에 있던 여러 병사들은 분을 참지 못하고 있자 무예청에서 먼저 외치기를, “우리 다 함께 저 역적들을 죽이자…”고 하였다. 수많은 병사들은 우레같이 호응하며 두 적을 끌어내어 땅에 내동댕이를 쳤다. 그들은 몸이 부서지듯 고깃덩어리가 되었다. 많은 군사들은 모두 만세를 불렀다. 고종은 궁내를 깨끗이 치우라고 명하고, 북관묘에서 청나라 통령 오방유의 영방을 들렀다. 날이 저물어 길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시민들은 환호를 하고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집을 부수어 모닥불을 피워 놓고 있었다. 고종은 그 다음날 환어하였다. (이때 원세개는 병사 2천 명을 인솔하고 있었다.)
8. 일본공관의 소각
도민들은 일본인이 역당의 편이 된 것을 노하여 그들을 만나기만 하면 죽이고, 또 군중들이 달려가서 그들의 공관에 불을 지르자 죽첨진일랑과 박영효 등은 이미 도주하고 없었다. 죽첨진일랑은 인천으로 가서 천세환을 타고 그의 나라로 도주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공관에는 큰 궤짝이 하나 있었다. 그 궤짝에는 「태평관」이라고 씌어 있었다. 그것은 제적들이 고종을 그 속에 가두어 일본으로 가져가려고 한 것이다. 처음에 제적들은 일본인과 약속하기를, 우리나라에 군함이 와서 도와주도록 하였다. 그 군함은 바다 중간에서 화통이 두 번이나 벌어져 누차 벌어진 곳을 고치느라 도착 시기가 지연되었다. 이때 제적들은 그들을 의심하여 곧 거사를 하려고 하였으나, 그 음모가 실패로 돌아가자 군함은 물러갔다. 아, 이것이 어찌 천도가 아니겠는가?
일본인 기림진삼은 일본공관이 소각될 때 죽었다.
9. 주의 폐지
17일부터 19일까지 내린 교령과 제수는 시행하지 말라고 하명하였다.
그리고 진신과 사서의 사복은 편의에 따라 입으라는 명을 내리자, 선비 및 서민들은 두루마기를 폐지하고 다시 옛날 의복을 입었다.
10. 우의정금홍집의 문재와 충성
금홍집은 상례를 초월하여 우의정으로 임명하였다. 김홍집은 가선대부가 된 지 얼마 안되어, 오늘 공조판서로 임명되었다가 명일에 입각하여 이 명령을 받았다. 그때는 변란중에 있었으므로 그는 감히 사양할 수도 없었다.
그리고 이때 백료들은 혼잡하여 조정이 아무 질서가 없었지만 김홍집은 지필을 행전에 꼽고 다니며 승지, 사관, 대신 등의 주고받은 말을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기록하였으므로, 이것을 본 사람들은 모두 칭찬하며 그의 민첩성에 감탄하였다.
그리고 고종이 경우궁에 있을 때 그는 경우궁 문밖에 도착하였으나 일본 병사들이 그를 저지하여 들어가지 못하도록 하자 그는 비와 눈이 내리는 길바닥에 누워 호곡을 하였고, 사람을 만날 때마다 성상의 안부가 어떤가 물어 보며 그가 흘린 눈물이 얼굴에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그는 수일 동안 이렇게 하였다.
11. 일본유학생도 서재창 등의 처형
생도 서재창과 오창모 등을 처형하였다. 서재창은 서재필의 아우이며, 오창모는 전병사 오진영의 서자이다. 처음에 우리 조정에서는 총명한 연소자를 선발하여 일어와 일본 기예를 익히게 하고, 이들을 왜학생도라고 하였다. 그들 중에는 가난한 사대부, 서자 및 중인의 무뢰배들이 많이 호응하였다.
그 후 10월에 변란이 일어나자 그들을 서재필이 인솔하고 있었다. 수많은 대신들을 살해한 것도 모두 그들의 손으로 저지른 것이었다. 그들의 음모가 실패로 끝나자 그들은 머리를 깎고 일본 복장을 하여 일본인과 함께 도주하였다.
그리고 그들 중 미처 도망치지 못한 사람들은 주야로 걸어서 동협관으로 갔다. 동래관에 있는 일본인들은 그들을 비호해 주었고, 그들은 선후의 간격으로 일본으로 모두 건너갔다. 그러나 오진영만은 하동으로 유배되었다가 그곳에서 사망하였다.
12. 홍영식 가정의 파멸
홍순목이 탄식하기를, “로신이 역적 아들을 두어 천지간에 죄를 지었으니 만 번 죽은들 어찌 그 죄를 속죄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리고 홍영식이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그는 아직 10세도 안되었다. 이때 홍순목은 “이런 종자를 다시 남길 수 있겠는가?”라고 하면서 그를 독살하고, 자신도 대궐을 향해 머리를 조아린 후 독약을 마시고 자결하였다.
그 후 홍영식의 처 한씨도 자살하였다. 그것은 홍만식이 시킨 것이다.
13. 조동윤의 이혼
조녕하의 아들 조동윤은 홍만식의 사위이며, 홍만식은 홍영식의 형이다. 조동윤은 결혼한 이후 금슬이 매우 좋았으나 그의 아버지 조영하가 피살된 후, 그는 의리상 원수의 집 딸과 베필이 될 수 없다 하고 그의 아내를 친정으로 보냈다. 그러나 그의 처는 다시 머리를 풀어 땋은 후 처녀로 자처하면서 “맹세코 내가 살아서 다시 조동윤의 처가 되겠다”고 하였다.
14. 금옥균 가족의 옥사
금옥균의 아우 금각균은 진사가 되어 천안에서 살고 있었다. 이때 그는 서울을 가려고 한강을 건너던 중 김옥균이 도주했다는 말을 듣고, 그날 칠곡으로 도주하였다가 암행어사조병로에게 체포되어 대구 감옥에서 사망하였고, 그의 아버지 금병기는 눈이 멀어 천안 감옥에서 6,7년간 감금되었다가 사망하였다. 김옥균은 자녀가 하나도 없었다.
15. 박영효 가정의 불행
박영교의 아버지인 참판박원양이 자살하였다. 박영교는 아들 하나를 두었지만 그의 나이 10세 때 박원양이 먼저 그를 살해하였고, 박영효는 생산을 하지 못했다.
그리고 박영교의 중제 박영호는 진사가 되었으나, 그는 변성명을 하고 진안 산중에 숨어 있다가 갑오년(1894)에 나왔다.
16. 서재필 가족의 불운
서재필의 아버지인 진사 서광언과 그의 처 리씨가 자살하였고, 그의 형 서재형도 은진 감옥에 수감되어 있다가 사망하였다. 그러나 서재우는 나이가 어려서 죽음을 면하였다.
17. 서광범 가족의 불운
서광범의 아버지 서상익은 7,8년 동안 감옥에 수감되어 있었으나, 그는 무슨 죄로 수감되어 있는지도 모르고 날마다 돼지가 먹던 음식 찌꺼기를 먹고 살다가 사망하였다. 그러나 그의 처 금씨는 옥중에서 절개를 지켜, 갑오년(1894) 이후에 다시 서광범과 동거하였다. (김옥균의 처 송씨는 옥중에서 음행을 하였다.)
18. 제적의 가산적몰
제적의 가택을 파헤쳐 연못으로 만들고 그들의 가산을 모두 적몰하였다. 이때 네 명의 역적이 도주하고 없어 왕법으로 치죄하지 못하고, 그 처형된 역적들도 모두 역적의 죄로 치죄하지 못하였다. 그것은 일본인이 두려워 그렇게 하였으므로 모든 사람들은 분개하였다.
19. 민영익의 중국유람
민영익의 상처가 매우 심하므로 양의 묄렌도르프가 그를 치료하여, 귀와 팔뚝을 완치한 후 중국으로 데리고 갔다.
이에 앞서 민태호의 처(민영익의 어머니)가 사망하였을 때, 민영익은 상중의 휴직을 원하지 않고 외국을 갔었는데, 그의 아버지 민태호가 사망하자 그는 또 상제를 지키지 않고 상해와 향항을 왕래하였다. 그가 상중에 복직하는 것은 전영사였다.
20. 리봉구의 교만
리봉구는 전주의 아전 집안이었다. 그는 풍수설로, 민영익을 통하여 민치구의 묘를 옮겼다. 그 후 그는 과거에 급제하여 내비로 옥당에 있었고, 박영교가 암행어사로 있을 때 그는 재능으로 천거되어 승지가 되었으며, 지금 그는 또 원세개에게 나아가 그의 원한을 풀어 준 공로가 있었으므로 그 변란이 끝난 후 참판에 올랐다가 다시 우영사에 제수되었다. 고종은 그를 리충신이라 불렀고 원세개도 그렇게 불러 일시에 그를 총애하였다.
하루는 그가 람여를 타고 종가를 지나고 있었다.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구름 떼처럼 많아 발걸음 소리가 땅을 울렸다. 이 광경을 본 시민들은 그를 가리키며 비웃기를, “저 사람은 전주의 장신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는 교만하여 사대부들에게 무례하게 대하므로, 많은 사람들은 그를 미워하여 모두 「죽일 놈」이라고 하였다 그 후 1년이 지나, 그가 향리로 돌아가서 사망하자 특별히 충절이란 시호를 주었다.
21. 5역적의 항열 변경
제적들은 모두 세신대족이었지만 그들은 일시 역적들이었으므로 그들의 종족들은 그들을 수치로 생각하여 그 항렬을 고쳐, 금옥균의 균자를 「규」자로, 박영효의 영자를 「승」자로, 서광범의 광자자를 「병」자로, 서재필의 재자를 「정」자로, 홍영식의 식자를 「표」자로 하였다.
22. 만국공법과 일본의 배상요구
요즈음 만국공법이라고 하는 것에는 소위 국사범과 사사범이 있다. 만일 사죄를 범하여 도주한 사람은 본국에서 그를 체포하여 치죄하도록 하고, 그 죄가 국민과 국가에 관계되면 그것은 국사범이라고 지칭하여 적극 비호하였다. 그것은 임금이 없는 오랑캐의 법인 것이다. 이때 모든 적도들은 일본으로 다 도주하여, 우리 조정에서 그들을 체포해 오라고 하자 일본인들은 그 말을 모두 비웃었다.
그리고 그 후 일본 대사정상형이 다시 와서 공관 소실과 병사 사망에 대한 배상을 독촉하여 사상자에 대한 배상은 10만원, 공관 소실에 대한 배상은 2만원, 기림진삼을 살해한 사람은 엄벌에 처한다는 것이다. 이때 금윤식을 관반으로 임명하여 그 이유를 논하게 하므로 정상향의 기세가 조금 꺾였으나, 우리 국력이 피폐하여 바르게 나가지 못하고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그들의 말만 의지하였다.
그리고 강화 여론이 더욱 굳어지자 우리 조정은 외무독판조병호를 대관으로 임명하고, 홍순학을 부관으로 임명하여 인천의 상무를 감독하게 하였다. 그 후 다시 예조참판서상우를 전권대신, 외무협판묄렌도르프를 부관으로 임명하여 일본에 사신으로 파견하였다. 이때 어떤 사람들은 죽첨진일랑이 귀국하자 일본 천황은, 그가 사건(갑신정변)을 일으킨 죄를 물어 강제로 폐고시켰다고 하였다.
23. 제중원의 설립
군국아문을 폐지한 후 의정부에 귀속시켜 제중원을 세웠다.
24. 연해 간척사업의 유명무실
해방총관리규원을 동남개척사로 임명하여, 해도의 빈터에 백성들을 모집하여 경작하게 하고 연해 지방의 진황지를 개간하여 산천에 버려진 이윤을 수확한다고 하였으나, 이것은 유명무실하여 공연히 <조보>에만 기재하였다.
상(1894년 이전) ⑬
1. 한국 관직을 가진 외국인
이때를 전후하여 우리 나라에서 관직생활을 한 외국인이 많아, 청국인 옥석창은 군국아문의 참의, 마건상은 찬의, 미국인 알렌(H.N. Allen, 1858~1932)과 헤론(J.W. Heron)은 이품계, 그레이트 하우스(C. R. Greathouse)와 리젠드르(C. W. Legendre) 및 데니(0. N. Denny) 등은 내무협판, 프랑스인 메릴(H. F. Merrll)과 영국인 헌트(H. Hont)는 호조참판, 독일인 쉬니케(J. F. Schoenicke), 프랑스인 피리(T. Piry), 영국인 크리그(E.F. Creagh) 모두 통정대부, 핼리팩스(T. E. Hallifax)는 통정대부가 되었지만 그중 묄렌도르프가 가장 저명하였다.
서양 사람들은 성씨는 없고 이름만 있기 때문에 그들 국어로만 서로 부르다가, 우리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그 음을 번역하여 사용하였으므로 그들은 성이 있는 것같이 보였지만 결국 이름만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들의 발음은 벌레 소리같고 글자도 번역하기 어려워 간혹 타가 「토」로 발음되고 하가 「호」로 와전되기 때문에 인명과 지명을 번역할 때 그 발음의 절반은 이해할 수가 없었으며, 륙서의 법으로도 해석할 수가 없었다. 이것은 하늘이 동양과 서양의 한계를 그어 놓은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또 우리나라를 처음 들어왔을 때 통역관에게 말하기를, “우리는 본래 성이 없으니 당연히 귀국의 풍속을 따르려고 합니다. 귀국에서 가장 귀한 성은 어떤 성입니까?”라고 하므로 그 통역관은, “우리 국성은 이씨로, 그것이 가장 귀한 성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그 외국인은, “나도 그 성을 사용하겠습니다”라고 하여 리선득이라고 하였고, 그 다음은 왕후의 종족으로 민씨인데 그들은 또 “나의 성은 민씨로 하겠습니다”라고 하여 민모라고 하였으므로,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배를 껴안고 깔깔대며 웃었다.
2. 외국과의 통상
서양 제국과 점차 통상이 시작되었다. 영국과 독일은 갑신년(1884), 러시아는 을유년(1885), 이탈리아는 병술년(1886), 프랑스는 정해년(1887), 오스트리아는 임진년(1892)에 시작하였다.
그리고 일본 다음으로는 미국이 임오년(1882)에 통상을 시작하여 그해에 원산항을 개항하고, 계미년(1883)에는 인천항, 병술년(1886)에는 회령항을 개항하였다.
3. 삼남지방의 바람 피해
을유년(1885) 7월 27일, 삼남 지방은 주야로 큰 바람이 불고 많은 비가 내려, 을축년(1865) 이후 이런 천재는 처음 발생하였다. 나뭇가지가 꺾이고 집이 무너졌으며 벼도 다 넘어져 여물지 않았으므로 이해 가을에 큰 흉년이 들었다.
4. 대원군의 귀국
8월 27일, 대원군이 귀국하였다. 그는 인천에서 서울로 왔다. 고종은 숭례문까지 나가 악차임금이 거동할 때 쉬도록 막을 둘러친 곳. 편자주 에서 그를 맞이하였으나 서로 말 한마디 나누지 않아 이를 본 사람들은 매우 놀랐다.
대원군은 임오년(1888) 7월에 천진으로 갔다가 그 후 보정부에 구금되었다. 그곳은 식수 사정이 매우 나빠 생활하기가 염려되었으나 그는 땅을 파서 새 샘을 만들었다. 그 샘물은 매우 달고 시원하여 그곳 주민들은 이상하게 생각하였다. 그는 죄를 지어 구금되었지만 아무 할일도 없었으므로 난초 그림을 그리며 세월을 보냈다. 이에 그가 그린 「석파란」이 온 중국에 유행하였다. 이때 청나라 조정에서는 여론이 일치하지 않아 어떤 사람은 그를 더 먼 곳으로 유배해야 한다고 하였고, 어떤 사람은 그를 본국으로 귀환시켜야 한다고 하였다. 그에 대해 올린 상소도 매우 많았다.
그 후 오랜 세월이 흘러, 대원군도 은밀히 어떤 사람을 통하여 청나라 조정의 대신들에게 뇌물을 바치고 또 옷과 식생활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본국의 김치와 새우젓 등을 요구하므로, 본국의 궁중에서는 그 반찬을 상선 편에 부쳐 계속 보내 주었다.
그 세비는 헤아릴 수도 없이 많았다. 이에 대원군이 10년 동안 쌓아 두었던 재산이 거의 바닥이 났다. 그가 바친 뇌물은 반드시 은이었으므로 청나라 사람들은 그를 「은옹」이라고 하였다.
대원군이 자기 집으로 돌아오자 조정의 신사들은 고하를 막론하고 그를 찾아와, 방명록만 해도 두어 책이나 되었고 상인, 군졸, 부녀자 등도 그의 행차를 바라보며 절로써 귀환을 축하하였다. 교동과 재동 사이는 열흘 동안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5. 원세개의 대원군 방문
원세개가 진영에 머물고 있은 지 수년이 넘어 대원군의 사람 됨됨이를 잘 알고 있었으므로, 대원군이 귀국한 후 그를 방문하였다. 그것은 급한 일이 있든 없든 그를 의지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 후 그는 대원군과 마음을 다하여 사귀었다. 이때 중궁은 대원군과 사이가 좋지 않을 뿐 아니라 그를 해치려고 하였지만, 원세개를 꺼려하여 마음대로 하지 못하였다.
6. 기청사신의 북경 방문
대원군이 환국하지 않았을 때 수명의 사신이 북경으로 갔었다. 그들의 명분은 대원군의 환국을 기청한 것이라고 하였지만 그들은 상소문을 소홀하게 지어 대원군을 알리는 말은 한마디도 없고 또 사면해 달라는 간청도 한마디도 없었으므로, 사람들은 그들이 기청하러 간 것이 아니라 귀국을 방지하러 간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최후에 리건창이, 상소문을 지으라는 명령이 내려지자 그는 일일이 잘못된 사실을 적어 그 사연이 매우 감동적이었다. 이때 금윤식과 어윤중에게 그 내용을 고치라는 내지가 있었으나, 이건창은 그 명령을 듣지 않아 그 상소문은 결국 보내지지 않았다.
7. 고종의 과거합격자 매도
을유년(1885) 식년과의 생, 진, 회시를 치를 때, 고종은 백 명을 더 선발하여 2만냥씩 받고 매도하라는 명을 내렸다.
원방은 공선을 하였다고 하였지만 고시관침리택과 민종묵등은 혼탁하여 공선은 하나도 없었다. 이때 춘계방의 사위, 자제들을 방의 말미에 붙이라는 하명이 있어 이질된 사람이 들어 있기도 하므로 과거를 보던 사람들은 그들을 조롱하여, “적을 죽일 때는 이숙도 없더니 은전을 내릴 때는 이질이 있는가?”라고 하였다. 그것은 이질인 서재필이 그의 이숙 윤태준을 살해한 것을 말한 것이다. 진사를 더 선발하여 돈을 받고 판 것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8. 고종의 실언
이때 한 해를 걸러 증광시를 치르고 한 달을 걸러 응제시를 치렀다. 그리고 식년과는 두 번씩 치러 10분의 9는 모두 동전으로 거래되었다. 경기도의 연도에서 먼 시골 마을까지 젊은 선비로부터 백정들에 이르기까지 분주한 나날을 보내기 때문에 그들 중에는 생업을 끊은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마치 풍병이 든 미치광이같이 보였다.
그리고 서울에 있던 부상들은 그들의 어음을 맡아 대내로 상납할 과거대금을 내기 위해 주야로 돈을 거두어 바치느라고 난리를 만난 것과 같았다. 이때 급제자를 더 늘리라는 명령이 내려지자 민응식은 이를 민망히 여겨 그 폐단을 고종에게 말하였다. 그러자 고종은 “잔말하지 마시오, 조선 말기에 마을마다 급제자가 나고 집집마다 진사가 난다는 말을 듣지도 못했습니까? 그것이 대운인데 어떻게 하겠습니까? 내가 과거를 팔지 않으면 더 좋은 방법이 있습니까?”라고 하였다.
9. 민응식의 평판
민응식은 임오년(1882) 호종한 공로로 과거에 급제하고, 그 후 1년도 안되어 평안감사로 임명되었다가 갑신년(1884) 겨울에 평안도감영에 있었으므로 병란을 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후 1년이 지나서 돌아와 병조판서로 있으면서 관망만 하고 있다는 이유로 물의를 빚기도 하였지만, 무슨 일이든 함부로 하는 일이 없었고 간혹 지체되어 있는 사람을 발탁하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추시부세를 하는 사람들은, “원동대감은 공심이 있다”고 하였다. 원동은 민응식이 살고 있는 마을 이름이다.
10. 신기선 등의 유배
전수찬 허!!이 신기선, 리도재, 신석유, 홍진유, 안종수 등을 탄핵하여 그들은 륙적의 결사당원임에도 아직 징계하지 못했으므로 국법으로 엄한 심문을 하자고 간청하자, 그들을 모두 도배하여 천극안치하라고 명하였다.
그 후 신석유와 홍진유는 유배지에서 모두 사망하였다. 갑신정변이 일어나던 10월, 적당들이 위정을 하고 있을 때 신기선을 이조판서와 대제학에 임명하려고 하였으나 교지가 내려지기 전에 그들의 음모가 실패로 끝났었다. 이때 신기선과 이도재는 6적들과 마음이 통한 사이였으므로 그때의 여론은 그들을 지정지률을 적용해야 한다고 하였으나 결국 가벼운 법률을 적용하였고, 또 국청마저 설치하지 않았던 것은 고종이 그들을 총애한 까닭이었다.
그리고 허석은 선산 사람으로, 의제를 개혁할 때 새로 개정한 의제가 매우 간편하여 국가의 부강에 크게 이바지할 것이라는 상소를 하여 고종은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특별히 수찬을 제수하였는데, 이번에 그가 탄핵한 것도 누구의 사주를 받은 것이라고 하였다.
11. 한러 통상
혜상공국을 설치하여 러시아와 통상을 시작하였다.
12. 토문강의 강계 설정
안변부사리중하를 감계사로 임명하여, 청국 관리와 함께 토문강 상하의 경계를 정하였다.
13. 회령의 개항
병술년(1886), 회녕부에 개항하였다.
14. 괴질 만연
5월부터 7월까지 국내에 큰 유행병이 번졌다. 이를 괴질이라고 한다. 이때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사망하였으며 종종 한 가문이 문을 닫는 경우도 있었다. 그 사망한 수는 대략 한 도의 인구에 해당되며, 이는 철종 경신년(1860)에 발생한 괴질보다 더욱 심하였다.
15. 홍종영의 탐학과 조필영의 가렴주구
홍종영을 삼남전운사로 임명하였다. 10년 동안 정치가 날로 문란하여 백성들은 세금을 낼 때 한 되, 한 홉을 조금도 빠짐없이 내지만 관리들은 농간을 부려 그 세곡을 매출하므로, 각 항구에 있는 창고와 각 지방에 있는 사창은 씻은 듯이 텅텅 비어 있고 많은 백성들은 진휼을 기다리며 근심에 쌓여 있었다. 정부의 명령이 아무리 엄하다고 하지만 상급관리와 하급관리들은 그 명령을 무시하고 있어 무슨 방법을 취할 수 없으므로, 조정에서는 벼슬이 높은 문관을 전운사로 임명하여 오로지 조운을 관장하도록 하여 편의에 따라서는 화륜선으로 운반하게 하였다.
일이 이렇게 되자 조운이 조금 원활하게 소통되었으나 홍종영이 상관을 속이고 백성들에게 착취하므로 모든 폐단이 더욱 늘어났다. 그는 이익이 있는 일이면 무엇이든 긁어모아 자신Ġ살찌우게 하므로 그가 부임한 지 1년 만에 거부가 되었지만, 고종은 그를 능력 있는 사람으로 평가하여 그의 아들에게 은전을 내려 진사로 발탁하였다.
그리고 조필영이 그와 대직으로 부임하자 그는 교묘한 명목으로 가렴주구를 하여 남은 돈 100만민을 상납하였으나, 고종은 또 그를 재능 있는 사람으로 인정하여 3년 동안 다른 자리로 옮기지 않았으므로 그의 재산은 소론 중에서 제일 갑부가 되었고, 그의 아들 조병승은 대과에 박탈되어 한림학사가 되었다.
조필영은 처음에 음관으로 여러 읍의 수령을 지내면서 재능이 있다는 명예가 있었으나, 그는 너무 가혹한 정치를 하여 수염을 잡아당기거나 상투를 매달아 놓는 형벌을 시행하였다.
16. 송병선의 유람과 조필영의 교활
조필영이 진주목사로 있을 때, 송병선이 지리산을 유람하고 진주를 지나는 중이었다. 이때 그를 수행한 사람들은 100여 명이나 되었다.
조필영은 그를 공손히 맞이하여 진주 성내에 숙소를 정하고 공대를 극진하게 하였다. 그는 소를 잡아 대접하고 상관을 대하는 것처럼 굽실굽실하였다. 이때 진주사람 구씨와 허씨는 대를 물려 가면서 묘소에 대한 소송을 벌였으나 아직 판결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은 허씨가 구씨의 산에다가 묘를 썼지만 법률상 금할 수 없는 곳이었다.
그런데 이때 구씨 중 한 사람이 송병선의 문하에 출입하고 있었다. 지금 그 사람이 이 유람길을 수행하고 있었다. 송병선이 한참 길을 걷고 있을 때, 그는 송병선을 꾀어 조필영에게 보낼 편지 한 장을 써 달라고 하였다. 그것은 허씨의 묘를 파라고 독촉하기 위한 것이다.
조필영은 그의 편지를 다 읽기도 전에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는 급히 허씨들이 있는 곳으로 가서 즉각 그 묘를 파라고 독촉하자, 허씨들은 그 사건의 전말을 자세히 말하고 그 묘소를 발굴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호소하였다.
조필영은 매우 화를 내며 송병선의 편지를 던진 후 “당신들은 이 편지를 어떤 편지로 생각하고 있습니까? 그 묘가 비록 우리집 묘소라도 파야 할 형편인데 하물며 송산림이 파라면 파야지 당신들이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군소리 말고 나로 하여금 송산림에게 죄를 짓지 말게 하시오”라고 하였다.
그 후 허씨들의 묘가 결국 발굴되고 말았다. 그것은 조필영이 송병선을 매우 미워하고 있었으나 어찌할 방법이 없기 때문에 극히 공손한 척하면서 송병선으로 하여금 비난을 자초하더라도 무슨 변명을 할 수 없도록 하게 한 것이다. 그의 교활성은 이와 같았다.
그리고 그는 시골에 있을 때도 부호에게 돈을 꾸고 가난한 백성들을 속여 만년에 조금 부유하게 지냈지만 그를 비방하는 말이 산처럼 쌓여 사람들은 서로 그를 비웃었다. 그가 만일 송병선을 공경하는 조그마한 예절이라도 지키지 않았다면 유림의 성토를 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17. 송병선의 횡포
림피의 술산은 큰 들 가운데 있다. 그 모습이 누워 있는 개처럼 보였기 때문에 술산이라고 한다. 지관들은 그곳이 오기가 잘 조화되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 산은 그 고을에 사는 최씨들의 세장산이다. 송병선은 그 산을 빼앗아 자기 소유로 하기 위하여 최씨의 선영에 표석을 묻어 놓았다가, 그 후 오랜 세월이 지나 강제로 최씨의 선산을 파고 그의 처를 이장하였다. 그러나 최씨들은 감옥에 수감되어 울고불고하면서도 감히 그 원통함을 호소하지 못하였다.
18. 영남유생의 이진상 문집 소각
리진상의 호는 한주이다. 그는 은거하면서 교육에 힘을 쓰고 부단한 각고로 정진하였으므로 그의 학문은 스스로 깨달음이 많았다. 그는 「심즉리」 3자를 종지로 삼고 그 학설을 부연하여 <심학종요> 수십 권을 지었다. 어떤 사람은 그의 저서를 양명학으로 의심하였다.
그가 작고한 후 그의 아들 리승희가 그 유집을 간행하기 위해 허훈에게 교정을 부탁하였지만, 허훈은 그의 심학에 대한 의론이 퇴계리황과 배치되므로 영남 유사들에게 죄를 지을까 우려하여 강력히 거절을 하였다. 그러자 그의 제자 곽종석이 그 문집 간행을 주관하여, 그 문집이 간행된 후 먼저 퇴계서원(도산서원)으로 보냈다.
이때 도산서원 이씨들은 소란을 피우며 그를 이단으로 배척하고 그 책 뒤에 글을 써서 보내기를, 「차책가심장가야산곡중, 대오도멸절지후 시내출이행세」라고 하였고, 또 도내의 유사들을 모아 놓고 그 문집을 불태웠다. 그리고 이승희의 집안은 수십 년 동안 벌벌 떨면서 영남에서는 용서받지 못할 것처럼 하고 살았다.
허훈의 호는 방산이며, 그는 시문을 전공하였고 일찍부터 과거를 사양하고 글과 술을 즐기며 일생을 마쳤다. 그의 아우 허위는 갑오년(1894)에 세상에서 저명하기 시작하였다.
19. 기정진의 이기론과 송병선의 노사집 성토
로사기정진은 조행이 독실하고 학문이 정통하였다. 그리고 그의 리기론은 선현의 전철을 밟지 않고 자기의 견해를 펴 성리학의 관문을 열고 그 오묘한 이치를 깊이 있게 연구하였다. 그가 지은 <납량사의> 등 여러 편은 호락의 제유를 능가할 뿐 아니라 률곡리이까지도 현저히 불만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가 작고한 지 1년도 안되어 그의 문집을 활자로 간행하려 하였으나 영남에 있는 그의 문인들은 활자가 오래 가지 못한다고 생각하여, 신축년(1901)과 임인년(1902) 사이에 단성에다 간소를 설치하고 판각을 새기기 시작하여 1년 만에 작업을 완료하였다. 근세의 문학가로 자칭한 사람 중에서 재상과 유림을 막론하고 작고한 지 얼마 안되어 문집의 간행이 이렇게 훌륭하게 이루어진 경우가 없었다.
연재송병선은 마음속으로 그의 이기론을 꺼려 하여, 자기 문인들에게 그를 공격하는 통문을 배포하도록 부탁하고 노사기정진을 편파적이고 음란한 사람으로 몰아세웠다. 그것은 율곡이이를 멸시하였다는 이유였다. 그리고 그는 또 그의 문하생에게 보낸 서환에, “당연히 이 문제는 성토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에 추시부세한 자들은 서로 뒤질세라 일어나서 경기도 진위군에다 삼남도회를 정하고 당일 상소문을 지어 대궐문 앞에 부복하면서 노사의 판각본을 불태우라고 간청하였다.
이때 조정에서는 일이 많아 유림들의 일에 관심을 둘 여가가 없었으므로 어떤 사람들은 그들을 비웃으며, “기로사가 비록 율곡과 다른 이론을 폈더라도 그는 자신이 깨달은 것을 말한 것에 지나지 않으므로 그 판각을 보존하여 후세의 공안을 기다리는 것이 옳은 일인데, 어찌 일당과 함께 승부를 가리려고 해서야 되겠느냐?”고 하였고, 어떤 사람들은 그들을 꾸짖으며, “이 사람들은 란민이므로 그들이 대궐문에서 부복하면 그들 중 젊은 사람을 뽑아 병졸로 충당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때부터 그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은 사기가 저하되어 점차 해산하기 시작하였으므로 그 성토는 중지되고 말았다.
이 사건을 논한 사람들은, 도산서원의 이씨가 <한주집>(이진상의 문집)을 불태운 것과 연재송병선이 노사기정진을 고폐하려고 한 것은 다 같이 시기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하였다.
20. 이건창의 기정진 성리학 찬탄
녕재리건창이 중년 이후 심성명의 학설에 유의하여 그의 견해가 극히 정명하였고 그가 늙어서도 이 학설에 정렬을 다 바쳤다.
그가 보성으로 유배되었을 때 <로사집>을 읽고 감탄하기를, “이것이 천하에 진짜 학문이다. 이 학설은 우리 동국에 없을 뿐 아니라 중국의 원, 명 제유 중에서도 일찍이 찾아보기 드문 일이므로, 당연히 그가 지은 성리학제설을 뽑아 두세 책 정도 만든 다음 천하에 전하고 명산에 간직해야 한다”고 하면서 언제나 노사의 문하에서 공부하지 못한 것을 한탄하였다. 그러나 그는 노사의 문장에는 복종하지 않았다.
22. 김평묵의 배반
금평묵이 매산홍직필의 문하에 있을 때 그를 수제자로 추대하였다.
그러나 조정에서 홍직필에게 그의 문인을 추천하라고 하자, 김평묵은 홍직필이 자기를 추천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이때 금병기가 홍직필을 협박하여 그의 형 금병준을 추천하라고 하자 홍직필은 그의 말대로 김병준을 추천하였다. 이에 김평묵은 홍직필을 크게 원망하여 홍직필과 사제의 의리를 끊고 리항로에게 가서 학문을 마쳤다.
23. 이항로 문하의 김평묵과 유중교
금평묵과 류중교는, 세상에서 얼계이항로 문하의 쌍벽으로 추대하였다. 김평묵은 재주가 유중교보다 더 낫고, 유중교는 덕망이 김평묵보다 더 나았다. 그들은 나이도 서로 비슷하였다.
그러나 이항로가 작고할 때 유중교에게 부탁하기를, 자기를 섬기는 것처럼 김평묵을 섬기라고 하였다. 그 후 유중교는 자기 문인들을 거느리고 김평묵을 섬겨 시종 사이가 벌어지지 않자, 사람들은 그렇게 하기가 매우 어려운 일이라고 하였다.
상(1894년 이전) ⑭
1. 전우와 김평묵의 임헌회 제문에 대한 시비
전우는 대대로 전주에 살면서 상업을 전문으로 하여 재산을 모았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호협하다는 말을 들었다. 그는 약관 때 호중(호서지방)에서 놀다가 임헌회를 보고 그를 좋아하여, 그의 이웃 마을로 이사를 하였다. 그는 임헌회를 종사하면서도 이사를 자주 하였다.
임헌회는 집안이 가난하였지만 전우를 수십 년 동안 도와주었다. 이때 전우의 가세도 점차 기울어 날로 가난한 생활을 하였다. 그는 솔잎을 갈아서 굶주린 배를 채우고, 그의 큰아들은 굶주리다가 죽었다.
그러나 전우는 재주가 많은 데다가 온갖 고난을 견디며 학문에 열중하여 그의 명성이 자자하였다. 그의 스승 임헌회는 림종할 때 그에게 자기 심의를 주며 뒷일을 부탁하였다. 전우는 가난한 집안에서 늦게 공부를 시작하여 일조에 사문의 부탁을 받게 되므로 그의 명성은 여러 제자들을 능가하였다.
그러나 그의 동문 친구들은 그에게 복종하지 않으므로 그는 꼭 그들의 스승이 되겠다고 결심하고 사력을 다하여 기치를 내세워 결국 많은 동문들을 굴복시키고 튼튼한 기초를 마련하였다. 그는 은밀히 참아 가며 때를 기다리고 있다가 과연 금평묵과 싸움을 벌였던 것이다.
처음에 임헌회는 민규호와 매우 가까운 사이였다. 그가 대사헌과 제주를 지낸 것은 모두 민규호가 집권하고 있을 때였다. 이때 그는 좋은 관직을 노리며 시국의 우려할 만한 일과 백성들의 숨은 애로는 말하지 않고 오직 겸손한 말만 가려 가면서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선비는 학문만 열심히 할 것이며 조정의 일에 간섭해서는 안될 일입니다”라고 하므로 김평묵은 그를 매우 보잘것없는 사람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임헌회가 세상을 떠나자 사람을 시켜 제문을 보내기를, “그가 청결하게 닦은 고절은 속수옹송 사마광의 호. 편자주 과 같고, 엄동설한에 송백 같은 지조는 강후송 호안국의 자. 편자주 의 풍도가 있다”고 하였다.
전우는 김평묵이, 사마광송인. 자는 군실. 시호는 문정. 철종 초에 문하시랑이 되고 왕안석의 신법을 폐지하였음. 편자주 이 사마의중국 삼국시대 위의 온인. 문제 때 누차 병력을 동원하여 촉의 승상제갈량과 그의 손자 사마염이 진나라의 황제가 되었음. 편자주 를 위나라 황제로 만든 사실을 인용하여 그의 스승 임헌회가 일본과 서양인을 배척하지 않았다는 것을 비유하고, 호문정공송의 호안국. 자는 강후. 호는 무이선생. 시호는 문정. 편자주 이 진회송의 강녕인. 자는 회지. 소흥중에 숭상이 되고 강화를 주장하여 악비를 죽이고 장준 등을 유배하였음. 편자주 를 배척하지 않는 것을 인용하여 그의 스승이 고종의 외척과 내통한 것을 비유한 것이라고 생각하여 그 사실을 그 제문 밑에다 일일이 주를 달아 다시 김평묵에게 보내고, 또 김평묵의 제문을 받지 않은 이유를 적어 그의 스승 영전에 고하여 김평묵과 서신을 왕복하며 오랫동안 분분한 논쟁을 벌였다. 이로 인하여 전우는 임헌회에게 충성을 다하여 그의 위치가 결국 튼튼하게 자리를 잡은 것이다.
2. 홍직필의 성세
매산 홍직필은 서울의 산림으로, 북촌에서 세력을 떨치던 고관집 자제들이 그의 문하에서 수업을 많이 하였다. 그들은 서로 밀어 주고 이끌어 주어 성기가 상통하므로 대가 바뀌어도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이때 임헌회가 득세한 것도 그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간재전우도 그의 여세를 이어받아 덕을 많이 보았다.
그리고 신기선도 전우와 동문으로 요직에 있으면서 세력을 떨쳤으므로 민씨들 중 영선, 병석 등도 그들에게 의탁하여 종종 수업을 간청하면서 그들과 함께 호응하였으므로, 어떤 사람들은 그들의 실상이 소문과 다르다고 비방하였다.
그러나 전우는 조신을 청결히 하였고 학술과 문장이 그의 스승보다 더 나았다.
3. 전우 문인의 복장
전우는 그의 문인들에게 심의, 폭건, 치포관 등을 강제로 입도록 하여 비록 무슨 일을 할 때도 옷을 벗지 못하게 하고, 또 갓에는 대(죽)로 만든 갓끈을 달게 하고, 신발은 나막신을 신게 하여 그들의 복식은 이상하였다.
목천군에는 아천시장이란 곳이 있다. 그곳은 들 가운데 있는 큰 시장이다. 언제나 그 시장이 열리는 날이면 심의, 폭건, 치포관 등의 복장을 하고 대 갓끈을 단 갓을 쓰고 나막신을 신은 사람들이 시전에 줄을 서서 있으면, 시민들은 그들을 보며 “이분들은 전학자의 문인이다”라고 하였다.
4. 전우의 빈한
전우는 매우 가난하여 겨울에는 솜옷을 입지 못하고 여름에는 쌀밥을 먹지 못하였다. 그는 울 밖에다가 쑥을 심어 마음대로 캐서 먹고 살았다.
그리고 그의 아들은 종체(종사)곡식을 넣어 세사와 쭉정이 등을 제거하는 기구임. 편자주 를 만들어 생활을 이어나가므로, 전우의 문인들은 그를 민망히 생각하여 생업에 유념하기를 권하자 그는 그들의 말에 따라 생업에 치중해 보았다. 그러나 그는 본래 생산할 수 있는 자원이 없으므로 다시 옛날처럼 생활이 어렵기 때문에 몇 년 간격으로 한 번씩 이사를 했다.
세상에서 가난하다고 소문이 난 사람도 전우와 비교가 되지 않았지만, 그는 사양하는 것과 받는 것을 매우 엄격히 하여 건포 하나와 포목 한 필이라도 함부로 취하지 않았다. 그러나 많은 돈을 가져와서 글을 지어 달라고 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것은 의리상 깨끗이 여기지 않을 수 없어 받았었다.
5. 곽종석과 하겸락
곽종석의 기억력은 남보다 뛰어나 어떤 사람들은 그를 동의보감이라고 하였다. 그는 한 번만 보면 모두 암송하였으므로 그의 총명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모든 예술을 통달하고 병법도 연구하였다.
그리고 하겸락이라고 하는 사람은 무인으로 곽종석과 종유하여 항시 곽종석을 도와주었다. 그는 곽종석에게 병법을 배운 후 대원군과 내통하여 강계부사까지 지냈다
곽종석은 이미 높은 명망이 있었기 때문에 경박한 무리들은 날마다 그의 옆에서 지껄이며 괴술을 가진 사람을 추천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들을 싫어하여 태백산에 들어가 수년 동안 지내다가 다시 가야산에 들어가 살았고, 최후에는 거창 산중에 들어가 살았다.
6. 임헌회의 학창의
임헌회는 옛것을 좋아하여 세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가 하루는 학창의를 입고 온양을 지나고 있었다. 그를 따라가던 동자들도 모두 머리를 묶어 올리고 사규삼(사!!삼)을 입고 있었다. 이를 본 온양현 사람들은 매우 놀라 그들을 서양 사람으로 생각하고 그들을 쫓아내려고 하였으나 그가 임산림임을 알아차리고 중지하였다.
7. 임헌회 아들의 정혼
임헌회는 어린 아들을 하나 두었는데 그는 갈산에 사는 김씨와 약혼을 하였다. 그 김씨는 선원금상용의 후예로, 대대로 홍주의 갈산에서 살고 있었다.
임헌회는 그의 아들이 10세 때 요절하자 그는 김씨 집으로 가서 김씨의 딸에게 상복을 입으라고 독촉하였다. 김씨는 그를 크게 꾸짖으며 그가 준 폐물을 돌려주었다. 임헌회는 부끄럽기도 하고 화도 났다. 그 후 그는 「배안동금모지녀」라는 구절이 들어간 묘지를 지어 아들의 묘에 넣었다.
8. 박문일과 관서지방의 유학
박문일의 자는 공렬이며 호는 운암이다. 그리고 그의 아우 박문오의 호는 성암이다.
박문일은 일찍 벽계리항로의 문하에서 수업하여 그의 형제가 가난한 중에도 학문에 열중하였으므로, 평안도에서는 둔암선우협 이후 제일인으로 추대되어 많은 사람들이 그를 스승으로 여겼기 때문에 관서에서의 유학 연원은 모두 벽계이항로를 주종으로 하였다.
9. 광무국 설치
광무국을 설치하였다.
10. 육영공원의 설립
육영공원을 건립한 후 문무관과 유사들 가운데 똑똑한 소년 40명을 뽑아 입학시키고 영국인 벙커(D. A. Bunker)와 길모아(G. A. Gilmore) 두 사람을 교사로 초빙하여 서양의 문자를 가르쳤다.
문관으로는 금승규와 신대균 등 그 이하 약간 명이 있고, 유사로는 리만재와 서상훈 등 이하 약간 명이 있었다. 사색당파를 골고루 배정하여 일시의 명문거벌들의 자제를 선발한 것이다.
그 후 1년이 지나서 이미 과거에 급제하여 청직으로 발탁되기도 하고 청년 유생들도 점차 과거에 급제시켜 격려하는 뜻을 보이기도 하였다.
11. 이범진의 음학
리범진을 규장각의 직각으로 임명하였다. 이범진은 리경하의 서자이다. 이경하가 진주병사로 있을 때 한 기생에게서 그를 낳았기 때문에, 이름을 「범진」이라고 하였다.
이범진은 용맹이 있어 담장과 집을 훨훨 뛰어넘었다. 그는 방탕한 무뢰배로 지내다가 약관의 나이에 진사가 되었다. 이때 점쟁이는 그의 운명을 점치면서, “40세가 되면 병조판서가 될 것입니다”라고 하자, 그는 감탄하며 “망령스러운 말은 하지도 마십시오. 내 처지에 무슨 병판이 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그 후 얼마 안되어 그는 대과에 급제하여 우울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가, 갑신정변 때 대궐에서 당직하고 있던 중 중궁을 업고 로원으로 피신하였다. 그 후 1년이 지나 그는 성천부사로 제수되고, 성천에서 순천부사로 임명되었다. 그는 가는 곳마다 음욕을 채우고 포학을 일삼아 백성들의 재산을 마구 긁어 쓰므로 그를 젖먹는 호랑이라고 지목하였다.
그는 순천에 있을 때 여러 기생들을 발가벗겨 놓고 말이 간내를 내는 놀이를 하였고, 부민들에게 형벌을 가할 때는 곤장이나 매로 치지 않고 다만 칼을 씌워 뜨락에 세워 놓고 있다가 무릎을 조금만 구부려도 발가벗겨 마구 매질을 하였다. 이렇게 수일 동안 세워 두면 다리가 퉁퉁 부어오르지 않는 사람이 없어 차라리 죽여 달라고 애걸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그들은 재산을 다 바치지 않으면 풀려나지 못하였다.
그리고 그는 언제나 긴 칼을 좌우에 세워 놓고 주먹을 불끈 쥐면서, “소란을 피우는 자가 있으면 이 칼로 쳐죽이겠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관리와 백성들은 그를 모두 원망하여 들것에 실어 쫓아내려고 하였지만, 그의 용맹이 두려워 감히 이행하지 못했다.
12. 조성하 모친의 이범진 질책
조성하의 어머니와 리경하는 내외의 친척간이므로, 이범진이 수시 문안을 드리러 갔다. 이때 조성하의 어머니는 조용히 이범진을 꾸짖기를, “내가 듣자니, 네가 곤전에 들어가 수시로 담뱃대에 불을 붙여 갖다 바친다고 하던데 이 말이 참말이라면 다신 내 집에 오지 말아라”고 하자, 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13. 청붕과 허교
우리 국속에 나이와 지체가 같으면 반드시 상대방의 자를 부른다. 아무리 초면이라도 갑이, “나와 자네 사이에 어찌 서로 공경할 사이인가?”라고 하면 이것은 친구가 되자고 청하는 것이며 을이, “그러세” 하면 이것은 교우를 허락한 것이 된다. 이렇게 친구가 되기를 청하고 교우를 허락한 뒤에 서로 친구로 인정하게 되며, 그렇지 않으면 겉으로만 공경할 뿐이다.
그리고 사대부와 서인은 한계가 엄격하여 공사간에 서로 만나면 손을 들어 한 번 읍만 하고 서로 건네는 말도 경어에 그친다. 그리고 서인은 허리를 굽히고 주위를 맴돌면서 감히 친구를 청하거나 교우를 허락하는 일은 생각하지도 못한다. 이런 풍습은 이미 수백 년이 되었다.
그러나 리범진이 내전의 별입시로 임명된 후에는 날마다 민씨들과 만나 예전처럼 경어를 사용하므로 중궁은 민영소와 민영준 등에게 부탁하여 “이범진은 내가 매우 사랑하고 있으므로 너희들은 그를 까다롭게 대하지 말고 서로 친구가 되거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이범진은 자신이 위축되어 감히 그들과 친구가 되지 못하였다.
14. 장탕반과 망나니 민영주
서울의 서민들은 가게을 차려 놓고 담담한 간장을 고기국에다 넣은 다음 그 고기국에 면을 말아 팔았다. 이것을 장탕반이라고 한다. 이 면탕은 겨울에 많이 만들었다. 주로 객지에서 온 나그네와 하인들, 추위에 떠는 사람들이 그 탕면을 즐겨 먹고 귀호가의 경박한 소년들이 종종 떼를 지어 가서 먹으며 소창을 한다고 하였다. 그들이 가는 시간은 주로 밤이었다.
이때민영주란 자의 별호는 「망나니」로, 그는 10여 년 동안 방방곡곡을 다니며 떡과 장을 파는 사람이었다. 그는 몇 푼의 돈을 모으고 살았지만 그에게 약탈을 당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그는 밤이 되면 그의 패거리를 데리고 그 장탕점을 포위하여, 수십 그릇을 단숨에 먹어 치우고 돈 한푼 주지 않은 채 도주하곤 하였다. 이렇게 몇 차례 하고 난 후에 그 장탕점 이 망하였다.
이범진은 그 소문을 듣고 “더럽군, 이들은 유치한 도둑들이니 내가 그런 짓을 못하게 해야겠다” 하고, 하룻밤에는 거리를 서성거리다 민영주를 만났다. 민영주는 그가 누군지도 모르고 또 전날처럼 그 장탕점을 습격하였다. 이때 이범진은 그들을 크게 꾸짖으며, “너희들은 범보를 아느냐?”라고 하면서 부지깽이를 들고 그들을 치려 하였다. 민영주는 급한 나머지 “아버지!”하고 소리치며 살려 달라고 애원하므로 이범진은 그를 놓아주었다. 이로부터 그들은 감히 자주 나오지 못하였다. 그 무뢰배들은 이범진을 범보라고 불렀다. 그 범보라는 이름은 거의 망나니들의 차지가 된 것이다.
15. 서얼의 칭호
세속에서는 서얼을 초림이라고 한다. 그것은 산초의 맛이 얼얼하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이름으로는 편반, 신반, 건각, 좌족, 점족이라고도 한다. 이렇게 사소한 천인들이 비록 경상의 지자로 태어났지만 그 등급은 중인과 맞먹기 때문에 통칭 중서라고 한다.
이들은 벼슬길이 막혀 있기 때문에, 다만 먹기 위해 살거나 혹은 무관이 되더라도 영장과 중군에 그치고 혹은 영막의 비장이 되기도 하였으며, 혹은 군아의 책실이 되기도 하고 혹은 음도를 따라 내직으로는 학관, 외직으로는 찰방, 감목관 등이 되기도 하였다. 그들은 늙고 병이 들면 그 천한 것이 더욱 심하기 때문에 그들 중 지기가 조금 있는 자들은 늙어서 가난하게 살지라도 차라리 칩거하는 것을 고상하게 생각하였다. 이에 재주 있는 자들이 고락하여 유식한 사람들이 우려하였고, 수백 년이 지나는 동안 통융을 하자는 여론이 없지도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벼슬길이 뚫리면 그 권리가 양분되기 때문에, 대대로 경상을 지내던 집에서는 백방으로 그들을 억제하여 그들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게 하여 강상과 명분을 문란하게 못하도록 하는 것처럼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천하 고금에도 없는 법이었다. 그러나 법은 편파적이더라도 이치는 후박이 없는 것이라 경향을 막론하고 모든 종가에서는 사속이 점차 미약하고 서자들은 날로 불어나 거의 국중의 절반을 차지하여, 비록 옛날처럼 그들을 억제하려고 하지만 그 형세는 무너지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고종은 이미 외국과 통상관계를 맺은 이후 협소한 조국의 제도를 개혁하기 위해 파격적으로 인재를 기용하자는 여론을 펴고 있는 것이다.
이로부터 문과의 요직은 리조연부터 시작하여 그 후 리범진, 금가진, 민치헌, 민상호, 민영기 등과 리윤용, 윤웅렬, 안경수, 금영준 등이 갑오경장 이후 교대로 대관이 되었으며, 기타 금옥 같은 요직도 헤아릴 수 없이 조적의 5분의 3을 차지하였다. 굽은 것을 바로잡으려다 너무 지나치게 바룬 점도 있지만, 변하면 통하고 통하면 오래 가는 것이므로 위로는 길한 서기를 맞이하고 밑으로는 시골에 현인을 버려 둔 일이 없었다.
그러나 조정을 빼앗기 위해 문벌을 나눈 것은 그 재능 있는 사람을 뽑은 것이 아니라 임금의 사인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노론의 서자들은 청관들이 별처럼 많고 소론, 남인, 북인 등 3당은 한 사람도 아무 가망이 없고, 아무 살 만한 곳도 없는데 하물며 누가 그 반열로 부를 사람이 있겠는가?
그리고 갑자기 고관에 오른 서류들은 모두 곤경에 빠져 기세를 떨치지 못하고 있다가 일조에 출세한 후에는 오직 재물에만 도취한 나머지 자신의 재산 증식에 힘을 써 사대부의 구습을 되풀이하였고 한 사람도 결백한 마음을 갖고 보답하려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정치는 위에서 더 문란해지고 풍속은 밑에서 더욱 퇴폐하여 종사를 잃을 기미가 조성되었으므로 모두 한 언덕에서 서식하는 담비를 면할 수 없었다. 이에 따라 여론을 조성한 사람들도 모두 정치를 함부로 변경하지 않아야 한다는 구실을 붙였다. 아! 이것이 바로 밥이 목에 걸려 밥을 먹지 못할 여론이 되고 말았다.
16. 서얼 유만주의 발탁
유만주는 양성에서 살고 있다가 갑신년(1884)에 지평으로 임명되었다. 서자가 남대학문과 덕망이 뛰어나 리조에서 사헌부대관으로 천거된 사람. 편자주 로 발탁되기는 유만주가 처음이었다.
17. 유협용의 발탁
류협용은 서울의 신문 밖에서 살았다. 그는 랭재류득공의 손자이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가난하여, 늙을 때까지 솜옷 한번 못입고 솜 대신 종이를 옷 속에 넣어 입었다. 그는 겨울에도 초석에 앉아서 지냈으나 독서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리고 기무아문을 설치할 때 당국이 주사로 천거하였으나 나가지 않고, 갑오경장 이후에 안산군수로 부임하였다.
18. 이윤용과 그의 어머니
리윤용의 어머니는 평양 기생이었다. 이윤용이성천부사로 임명되었을 때, 평양 련광정에서 잔치를 베풀며 기생을 모두 모아 놓고 그의 어머니를 상석에 앉혀 헌수하였다.
그리고 잔치가 끝난 후에는 그의 어머니를 판여에 태우고 길을 나서자 사녀들은 그를 영광스럽게 생각하였다. 성천부에 도착하여 그를 내아에 모셔 놓고 대부인으로 받들었다.
그 후 한 달쯤 지나서 그의 어머니가 이윤용에게 말하기를, “내가 비록 너의 어머니이지만 기생에 불과하며, 너의 처에게도 내가 비록 고부간이지만 그는 지금 임금과 동기간이라 하늘과 땅 차이가 있으니 내가 어찌 시어머니로 자처할 수 있겠느냐? 그리고 나는 오리와 같은 몸이라 강호에 훨훨 날아다니는 것이 나의 적성이니 어찌 답답하게 울에 갇혀 살겠느냐? 내가 이곳에 온 것은 너의 봉양하고 싶은 마음을 잠시 맞추기 위함이었으나 이제 너의 소원을 풀었으니 나를 더 이상 구속하지 말아라” 하고 다음날 평양으로 돌아갔다.
19. 김가진의 내력
금가진의 아버지가 안동부사로 있을 때 한 기생과 사귀어 김가진을 낳았다. 안동을 일명 영가라고 하기 때문에 그의 아버지는 「가진」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그것은 리범진의 이름 중 「진」자와 좋은 예가 된다고 하겠다. 그는 젊었을 때부터 학관이 되어 순천부사홍재현을 따라 그의 책실에서 거처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처는 홍종헌의 서종매이므로 홍종헌이 영변에 부임하였을 때, 김가진은 비장이 되기를 원했으나 그 자리를 얻지 못하자 종일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갑신년(1884) 그는 민영준을 따라 일본을 갔다가 돌아와서, 과거에 급제하여 청직에 있으면서 온갖 교활한 짓을 다하여 일시 간사한 무리들의 괴수가 되기도 하였다. 그는 글을 조금 할 줄 알아, 호를 동농산인이라 하고 명관으로 자처하였다.
20. 중궁의 관직제수 남용
□□□□□□□□□□은 교자 메는 것을 업으로 삼고 있었는데, 임오년(1882) 중궁이 충주로 피신하였을 때 그 두 사람은 교자 인부가 되어 공로를 쌓았다. 중궁은 환궁한 후 □성택을 누차 전라병사로 임명하고, □억길은 악안군수로 임명하였다. 관직의 남용이 이런 지경까지 이른 것이다. 그 밖에 어떤 사람을 잡던 □□□ 사람도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남원의 최석두란 사람은 가난하여, 약주머니을 메고 다니면서 자신이 의사라고 하였다. 그는 근근히 생활하면서 서울까지 가게 되었다. 이때 중궁은 오랫동안 대하증을 앓고 있었으나 낫지 않자 어떤 사람이 최석두를 천거하였다. 그는 한 처방을 알려주어 조금 효험을 보았다. 중궁은 매우 기뻐하며 그를 고산군수로 임명했다가 그 후 얼마 안되어 남원부사로 선임하였고, 그의 집안에 두 사람까지 관직에 서용하였다.
그러나 그 시기를 지난 후 별 효과가 없자 최석두는 그 죄로 서울에서 사망하였다. 그가 사망할 때 입, 코, 귀 등 아홉 개의 구멍에서 피가 흐르자 사람들은 사약이 내려진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보성 사람 정순묵은 품관으로서 세금을 포탈한 죄로 서울에서 피신하고 있었다. 이때 중궁이 감기가 들어 시령탕 두 첩을 바쳤는데, 효험이 있자 즉시 영평군수로 제수하였다.
21. 중궁의 고종 우롱
□□□□□□ 고종이 내전을 들어가다가 창황히 후문으로 나가는 사람을 보았다. 고종은 그가 누구냐고 물었으나 민후는, “내 눈에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데 전하께서는 무엇이 보인다고 하십니까?”라고 하였다. 고종은 이상하게 생각하여 좌우 시녀에게 물었으나 모두 보지 못했다고 했다. 이때 민후가 천천히 말하기를, “전각이 깊어 혹 요귀가 들끓은 것이니 기양을 해야겠습니다”라고 한 후 더욱 기도하는 곳을 늘렸다. 고종은 끝까지 깨닫지 못하였지만 민후가 대전을 이와 같이 우롱한 것이다.
22. 고종의 세자 사랑
고종은 세자를 사랑하여 매일 식사할 때마다 반찬을 가려 먹이고, 옷을 입힐 때도 소매가 넓은 옷을 입혔다. 그리고 조종의 전통을 계승하는 것은 세자에게 있기 때문에 서민 가정의 예의를 사용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고, 그의 지체에 맞는 언어를 사용하여 극히 경어를 사용하였다.
그러나 명성왕후는 그렇지 않았다. 조금만 거슬리는 일을 하면 주먹으로 치면서 꾸짖기를, “네가 비록 세자이지만 어찌 세자라고 부모가 없을 수 있겠느냐?”라고 하였다. 이로부터 세자는 고종을 두려워하지 않고 명성왕후를 두려워하였다.
23. 명성왕후의 독서열
명성왕후는 제가문과 <사기>를 통달하여 백관의 장주를 친히 보았다. 그리고 그는 <팔가문초>도 읽기를 좋아하여 북경에서 새책을 구입하였다.
상(1894년 이전) ⑮
1. 민승호 후처의 청탁
민승호가 사망할 때 그의 계실 이씨는 매우 젊고 예뻤다. 그 후 수년이 지나, 그는 착실하지 못하다는 소문이 파다하였다. 민영주와 민영달이 그를 좋아하여 아들을 낳았으므로 사람들은 그 아이의 이름을 「몽득」이라고 하였다. 그것은 민승호와 꿈에서 만나 잉태한 것으로 비유한 것이다.
이 소문을 들은 중궁은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금가루를 보내자 그는 화를 내며 뿌리면서 “과부가 남자를 좋아하는 것은 상식적인 일이거늘 중궁이 어찌 나를 규제한단 말이오”라고 하였다.
그 후 중궁은 그를 더럽게 생각하여 아는 척도 하지 않았으나 이씨는 기지가 있고 기회를 잘 보아 중궁을 가까이하므로, 중궁은 다시 그를 불쌍히 여기고 서신 왕래를 하였다. 그는 언문 편지로 청탁까지 하면서 팔방을 누비고 다니므로 그의 위세는 조정과 지방까지 떨쳐 민씨들도 그를 가까이하였다.
그리고 그의 조카 리종필은 그의 향족으로 과거에 급제하여 10년 내에 황해감사까지 지내므로, 이때 사람들은 이씨를 죽부인이라고 하였다. 그의 집이 죽동에 있기 때문이다.
2. 민영익이 이씨의 음행을 극간
민영익은 항시 이씨를 간하여, “원구임금의 장인. 편자주 의 집에 불미한 소문이 들리니 어머님은 유념하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지만 이씨는 그때마다 화를 내며 “내가 행실이 좋지 않다고 해서 네 앞길을 막느냐? 네가 다시 그런 말을 하면 내가 반드시 너를 지목하겠다”고 하자, 민영익은 두려움을 느껴 다시는 말을 꺼내지 못하였다.
3. 남정철과 민영준의 아부
남정철이 과거에 급제한 지 2년도 안되어 평안감사가 되었다. 왕가의 친척도 아닌 사람이 이렇게 빨리 출세한 것은 근세에 없는 일이었다. 그는 감영에 있을 때 고종에게 계속 뇌물을 바쳤는데, 고종은 그가 충성을 한다고 생각하고 령선사로 임명하여 천진으로 보내면서 크게 기용할 뜻을 보였다.
그러나 민영준이 남정철과 교체된 후, 작은 송아지가 수레를 끄는 조각을 금으로 만들어 고종에게 바치자 고종은 얼굴빛이 변하며 꾸짖기를, “남정철은 참으로 큰 도둑이로군, 관서에 이렇게 금이 많은데 그가 혼자 독식을 했단 말인가?”라고 하였다. 이로부터 그의 총애는 쇠퇴하기 시작하고 민영준은 날로 중용되었다.
4. 감사김규홍과 김명진 등의 진상물
만수절고종의 탄생일. 편자주 에 감사와 수령들은 전례에 따라 진상을 하였는데, 그들은 왕가의 친척을 통하여 궁중으로 보냈다.
정해년(1887) 7월에 민영소와 민영환이 입시할 때 금규홍은 전라감사, 금명진은 경상감사로 임명되었다. 이때 민영환은 먼저 금명진의 물목을 바쳤다. 그 물목은 일본 명주 50필과 황저포 50필뿐이었다. 고종이 얼굴을 붉히며 그 물목을 용상 밑으로 던져 버리자 민영환은 황급히 물목을 주워 소매 속으로 집어넣었다
그 후 민영소가 금규홍의 물목을 바쳤다. 그의 물목은 춘주 500필, 갑초 500필, 백동 5합, 바리(우) 50개였고, 기타 물건도 이와 같이 많았다. 고종의 얼굴은 희색이 감돌며, “번신의 예가 당연히 이 정도는 돼야 하지 않겠습니까? 김규홍은 참으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입니다”라고 하였다. 민영환은 그 즉시 나가서 자기 돈 2만냥을 보태 물건을 사가지고 바쳤다. 민영환은 김명진의 사위이기 때문이다.
5. 경상감사김명진의 사망 내력
남일우가 경상감사로 있다가 임지에서 사망하자 그의 대직으로 금명진이 부임하였다. 그 두 사람은 본래 한 마을에서 살았으므로 서로 사이가 좋았었다.
그리고 그 징청각의 복도는 내아와 통하였는데, 하루는 김명진이 내아로 들어가다가 곡란에서 이미 작고한 남일우를 만났다. 그는 소매를 늘어뜨린 채 팔장을 끼고 “내가 매우 배가 고픈데 자네만 혼자 배불리 먹고 나는 주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에 김명진은 크게 놀라 기절했다가 결국 10일 만에 병으로 사망하였다. 김명진은 치적이 있어 리민들이 애석하게 생각하였다.
그 후 리⯶영이, 두 사람이 작고한 뒤를 이어 부임하자 사람들은 그를 위태롭게 생각하였으나 결국 아무 탈이 없었다.
6. 망나니 민영주의 급제
민영주는 그의 아버지가 사망하고 어머니가 개가한 후 금수 같은 행동을 자행하고 도둑처럼 약탈을 감행하였다. 그는 10여 년 동안 망나니로 소문이 나 사람들은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는 과거에 급제를 하기 위해 과거시험이 있을 때마다 유생 수십 명을 사서 시권 수백 장을 써가지고 서로 돌아가면서 바쳤다. 어느 때는 과거에 급제도 하였지만, 고종은 특명을 내려 그의 이름을 과방에서 삭제하였다. 민영주의 원망은 날로 깊어 더욱 난폭한 생활을 하였다.
민영준은 그를 매우 걱정하여, 공사의 임무를 띠고 일본으로 떠날 때 고종에게 말하기를, “민영주를 사람을 만들려면 그를 과거에 급제시켜 그를 얽어매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고종도 “그렇다”고 생각하고 정해년(1887) 칠석제를 치를 때 그를 발탁하였고, 그로부터 불과 1년 만에 직각까지 승진하였다. 직각이 망하는 것은 민영주가 임명된 후 극도에 달하였다.
7. 한림과 직각의 변화
전랑조선조의 정랑으로 문관을 천거, 전형하였음. 편자주 이 폐지된 후 한림과 호당은 연소한 명관들만 임명하였으나, 호당이 폐지되고 규장각이 창설된 후에는 대교가 6명이나 되었다. 그 질은 매우 낮았지만 품계는 가장 청직으로 인정되어 한림과 직각을 동일하게 여겼다.
그러나 사람들은 대교를 한림보다 더욱 주목하기 시작하여 직각이 한림과 등급이 같아, 정조와 순조 때에는 이 직각에 임명된 사람들은 모두 문망을 겸비한 사람만이 가능하였다.
그러나 갑자년(1864) 이후 왕가의 친척들의 소유물이 되어, 그들이 사필을 잡고 흔들었는데, 그들은 언문으로 사초를 쓰기도 했다. 의 기초를 잡기도 하였다. 이에 가난한 선비들이 들고일어나 한림과 직각을 죽은 물건으로 취급하여 마침내 별도의 인원 및 리범진, 민영주 등에게 맡겼다. 그러나 한림은 그들과 같이 어지럽고 더럽지 않았으므로, 한림에 임명되는 것을 더욱 영광스럽게 생각하였다.
8. 직각 매매
남규희는 10만냥을 들여서 직각을 사고, 정순원은 20만을 들여 직각을 샀다. 직각을 파는 일은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정순원은 일두정여창1450~1504. 성종 때의 학자. 자는 백욱, 호는 일두. 편자주 의 사손으로, 대대로 함양에 살면서 만석의 부를 누렸다.
9. 칠석제에 대한 속언과 어윤중
서울의 속언에 “칠석제에 급제한 사람들 중 판서를 지낸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통과에 급제한 사람들은 이를 교묘하게 피할 수 있었다. 어윤중이 칠석제에 급제하였으나, 그는 재주와 명망이 있어 사람들은 이 속언이 맞지 않는다고 하였다. 갑오경장 때 관제가 많이 변경되어 판서직이 폐지되었으나, 어윤중은 지금까지 참판으로 있다가 결국 탁지부대신이 되어서 8좌에 참여하였으므로 사람들은 그를 ‘어판서’로 부르지만 실제로는 판서가 아니었다.
10. 세자빈 민씨의 관례
정해년(1887) 봄에 세자빈 민씨가 관례를 치렀다.
11. 전보국 설치와 병자년의 흉년
가을에 전보국을 설치하였다. 전신주는 의주에서 서울로 연결되고, 서울에서는 동래까지 연결되었다. 이에 서로에는 파발첨이 폐지되고 남도의 연도에도 봉수대가 무용지물이 되었다.
민간에서는 옛날부터 내려오는 참언에, “천리에 걸친 소나무가 하루아침에 하얗게 된다”고 하였는데, 일본이 침략하였을 때 남도의 백성들은 식량 대신 소나무 껍질을 벗겨서 먹었으므로 큰 소나무들이 하얗게 껍질이 벗겨진 채 즐비하게 서 있자 어떤 사람들은 옛날 참언처럼 맞아떨어졌다고 하였다.
나는 이때 약관의 나이로 그 말을 반박하기를, “어찌 흉년을 구제할 초목이 참서에 있을 리가 있겠느냐?”고 하였지만 이때 절실히 경험한 것이다. 시골에 떠도는 말도 모두 그 이유가 없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12. 영호남의 산림 황폐 원인
흉년에 밀가루를 타서 주린 배를 채우기는 소나무 껍질같이 좋은 것이 없다. 그러나 그 소나무 껍질로 흉년을 면한 곳은 호남, 영남 사이에 있는 수십 읍뿐이었다. 기호지방 수백 리는 종종 한아름 되는 소나무가 해를 가리고 높이 솟아 릉침왕과 왕비의 릉. 편자주 보다 더 높다. 그것은 경재와 읍신들이 소유하고 있는 묘자리의 나무들이므로, 백성들은 그들의 위엄을 두려워하여 구덩이와 산 속에서 죽는 한이 있어도 감히 소나무 한 그루를 벨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 사대부들이 평일에 기염을 토하던 것을 가히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호남과 영남은 무단 행사를 한 명문거벌이 드문 데다가 소소한 향호들을 백성들이 쉽게 생각하였기 때문에 한번 흉년이 들면 산들이 완전히 벗겨졌다..
그리고 통제사와 병사, 수사 등도 벌송을 금하면 모든 고을들이 도적의 소굴이 된다 하여 천금의 자산이 모두 벌채되어도 송림의 도벌을 징계하면 도리어 화를 입어 땔감 이외에는 기르지 않았다. 이로 인하여 가옥과 관을 짤 목재를 구할 수 없어 백성들은 더욱 곤경에 처하였으며, 혹 관청에서 사용할 일이 있으면 민간의 묘 주위에 있는 나무에 공첩을 붙여 그들 마음대로 벌채해 가면서 가격도 논하지 않았다. 관청에서 민간의 물건을 가져간 것은 이것뿐만이 아니었다. 이것은 특히 작은 일에 속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원망하는 백성들이 없기를 바라지만 그렇게 될 리가 있겠는가?
13. 김윤식의 유배
금윤식을 면천군으로 유배하였다.
김윤식은 외교에 능하여 시국에 관심이 깊었지만 주관하는 역량이 적었다. 그는 천진에서 돌아온 후 잇달아 요직에 박탈되어, 나가면 강화류수가 되었고, 돌아오면 병조판서와 외무아문독판을 겸직하였다.
그리고 그는 원세개와 친하게 지냈다. 하루는 원세개가 고종의 암렬함을 민망하게 생각하여 김윤식에게 말하기를, “국왕이 덕을 고칠 가망이 없으니 만일 선위를 하여 대원군이 신왕을 돕고 민씨들을 내쫓아 백성들의 소원에 부응하면 혹 더 낫겠지요?”라고 하자 김윤식은 벌벌 떨면서 땀을 흘리며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였다.
명성왕후는 이 소문을 듣고 크게 노하여, 명성왕후이 국가를 음모한 사실을 발견하였다고 하며 엄한 교지를 내려 그를 유배하였다. 그리고 명성왕후도 매우 미워하여 국가의 기밀을 알려주지 않았다.
김윤식은 8년 동안 유배생활을 하다가 갑오년(1894) 여름에 석방되었다. 그는 지난 경진년(1880) 가을에 한성시의 부고관으로 임명되어 공정하다는 칭찬을 받았지만, 그 상으로 순천부사로 서용되자 관리들이 매우 분개해 하였다. 그러나 그가 외무독판으로 있을 때, 시속배들은 그를 따를 사람이 없다고 하였다.
14. 한장석의 아들들
금윤식과 한장석은 그들이 젊었을 때 모두 가난하였지만 자하동에서 글공부를 열심히 하였으므로, 사람들은 북산 밑에 수사를 들라면 반드시 한장석과 김윤식이라고 하였다. 그들은 중년 이후 모두 관계에 진출하여, 김윤식은 시속배로 전락하였으나 한장석은 깨끗한 마음을 유지하여 관직에 임명되더라도 억지로 하명에 응하였다. 그러므로 그와 척의가 있는 명성왕후는 본래 그를 소중하게 여겨 공보삼공과 사보. 즉 높은 벼슬자리를 말함. 삼공은 주대의 태사, 태전, 태보이며 좌보, 우필, 전의, 후승임. 편자주 로 기대하였다.
그리고 하루는 응제방을 공개할 때 한장석의 둘째아들 한창수가 초시방에 합격하였으므로 대과인 전시를 보라는 특명을 내렸다. 그 후 한창수는 영화로운 벼슬길에 급급하여 날마다 잘못된 길을 걸었지만 한장석은 그를 저지시키지 못하였다. 한장석이 죽은 후 그는 기부을 시도하여 창피한 일을 수없이 저질렀다.
그리고 한장석의 큰아들 한광수는 일찍 과거에 급제하여 한각을 출입하였다. 그러나 그는 총명하지 못하여 친구들의 웃음거리가 되었으므로 사람들은, “한장석은 아들다운 아들이 없다”고 하였다.
15. 박규수의 한장석, 김윤식 발탁
박규수는 일찍 정시의 고시관이 되어 시권 하나를 들고 여러 관리들을 돌아보면서, “국가에서 과거장을 설치하여 선비를 발탁하는 것은 장차 세상에 쓰려고 하는 것이니 쓸 만한 인재가 있으면 비록 사인이라도 공정하다고 생각되는데 공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라고 하였다.
여러 관리들은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대답하기를, “그렇습니다”라고 하였다. 박규수는 “이 시권은 반드시 한장석의 것일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잠시 후 펴 보니 과연 그의 말과 같았다. 그리고 잠시 후 또 시권 한 장을 뽑아 들고 “이 시권은 반드시 금윤식의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즉시 펴 보니 역시 그의 것이었다. 이것은 박규수가 미리 물색해 둔 것으로 그들의 필적임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여러 관리들 앞에서 손가락을 꼽아 가며 득의양양한 모습으로 조금도 위축된 기색이 없었다. 그 후 많은 사람들은 집으로 돌아가서 그를 꾸짖어, “이 사람도 역시 노론의 모습이 있구나. 소론은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고 하였다.
16. 신기선의 유배
이해 여름에 고종은 친히 신기선을 심문하였으나 그가 불복하여 다시 유배하였다. 갑신정변을 일으킨 제적들이 법망을 빠져나가 고종은 매우 분통하게 여기고 있었지만 그 분을 터뜨릴 곳이 없었다.
이때 신기선은 유사의 가정에서 발탁된 사람으로 그 흉적들의 정보를 알고 있었으므로 고종은 오래 전부터 그에게 노기를 터뜨려 죄를 주려고 하고 있다가 지금 특명을 내려 그를 다시 체포한 것이다. 삼군부에 국문 장소를 마련하여 고종이 친히 심문을 하였다. 심문할 때 곤장을 매우 가혹하게 내려져 뼈가 부러지고 피가 많이 흘렀으나 신기선은 얼굴빛이 조금도 변하지 않고 머리를 들어 조리 있게 대답하며 반박할 기회를 주지 않으므로 고종은 그를 굴복시키지 못하였다. 고종은 본래 인자한 데다가 신기선이 경악구신으로서 다시 혹독한 곤장을 맞는 것을 보고 측은한 생각이 들어, 더 이상 추궁하지 말라는 명을 내리고 옛날 죄목에 의하여 다시 유배하였다.
이때 사람들은 신기선의 사나운 성품이 아니고서는 이번 심문에 철안으로 짜여진 역적의 죄를 면하지 못하였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날 심문한 6명은 모두 글을 잘하는 사람들이었으나 그중 려규형이 가장 우두머리 격에 속하였다.
신기선은 곤장이 허벅지에 떨어질 때마다 조각상처럼 눈을 감고 있었으나 곤장이 다 끝난 뒤에 그는 눈을 뜨고 심문한 사람을 불러 말하기를, “이번 심문에 「충역」이라는 두 글자 중 한 글자가 판명돼야 할 텐데 어찌 흐지부지하고 맙니까? 내 입으로 진술을 다 할 테니 글 잘하는 심문자가 붓을 들어 받아쓰시오”라고 하였다. 여규형은 “그렇게 하시오”라고 하였다. 이에 신기선은 미리 외워 놓은 것처럼 입으로 줄줄 말하고, 여규형은 붓이 날 듯 써 내려가므로 이를 본 사람들은 모두 감탄하였다.
그리고 그 위관죄를 심문한 재판장. 편자주 이하 관원들은 국청을 물러나와 말하기를, “오늘 국청은 신기선과 여규형이 문예를 겨룬 장소였다”고 하였다. 신기선이 이 죄목에 걸려든 것은 학문이 높은 까닭이었지만 결국 죽음을 면한 것도 학문의 힘이 컸다고 하였다.
17. 신기선 재국문의 동기
시대가 잘못된 이후 정국이 바뀔 때마다, 자기와 노선을 달리한 사람을 제거하고 사람들을 살해하는 것으로 위엄을 내보였다. 이것은 세도정치의 구습이 전해진 것이다.
민영환은 상을 마치고 다시 궁궐을 출입하면서 요직에 참여하여, 새로 기용된 민응식과 알력이 생겨 정국이 안정되지 못하였다. 이때 어떤 사람이 민영환에게 권하기를, 갑신정변을 일으킨 역적의 나머지 무리들을 엄히 치죄하여 고종의 비위를 맞추고 □□□□□ 등을 살해하여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일으키게 하라고 하였다. 이에 민영환은 그 말을 깊이 공감하여 그 옥사를 찬성하고 금병시를 재판관으로 임명하였다.
이때 민응식은 그의 정보를 염탐하여 □□□□에게 말하기를, “반드시 죽을 만한 증거가 없습니다. 만일 죽게 되면 나를 걸고 넘어지십시오. 그러면 내가 어찌 앉아서 보고만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김병시가 재판관으로 임명되어 서릿발 같은 호령을 내리자 민영환은 기어이 그를 죽이려고 하였고, 민응식은 그를 반드시 살리려고 하였다. 김병시도 그를 죽일 마음이 없었기 때문에 내심으로 살려주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민응식의 입장에 서서 민영환을 전적으로 무시할 수 없기 때문에 곤장으로 맹타하여 필히 살해하려는 뜻을 내보였다. 정강이 적막가 부러지고 발가락이 잘려 나가도 끝까지 굴복하지 않으면 죄목을 결정하지 않는 것이 국청의 예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여 신기선은 죄명을 벗고, 김병시는 두 민씨의 부탁을 받았어도 한쪽편만을 들지 않는 처신을 취하여 겉으로는 공정성을 보인 것이다. 이것은 김병시가 평생 동안 갈고 닦은 기지였다.
18. 역체 복설의 이유
신기선이 흥양지금의 전남 고흥군. 편자주 의 려도로 유배되었다. 이곳은 서울에서 천리의 거리이다. 이때 역체옛날 역참에서 공문서나 관리의 호송을 도맡은 인마. 편자주 가 이미 폐지되었으므로 사령을 전달하기 위해서는 그 비용을 스스로 마련해야 해서 시간이 오래 걸렸다. 신기선을 잡아 올리라는 명령을 내렸을 때, 수십일이 지났지만 그를 체포하지 못하였다. 고종은 이상하게 생각하여 그 이유를 묻자, 좌우에 있는 대신들은 역체가 없어서 그렇다고 대답하였다. 고종은 이 말을 듣고 크게 노하여 옛날처럼 다시 설치하라는 명을 내렸다.
19. 신기선의 유배생활
요즈음 유배된 경재들은 첩을 두고 치산을 하는가 하면 백성들의 재산을 약탈하여 종종 지방의 좀노릇을 하면서 많은 재산을 모은 사람이 있었다.
그러나 신기선은 두어 칸쯤 되는 집을 빌려 조용히 생활하며, 배고픈 것도 참고 책을 쓰기기를 10년을 하루같이 하였다.
20. 박제관 기용
박제관은 관상을 잘 보았다. 민응식이 젊어서 불우한 생활을 하고 있을 때 박제관은 그의 관상을 보고 장차 귀인이 될 것이라고 하면서 그와 깊이 교제하고 있었는데, 그 후 민응식이 득세하여 박제관을 충청감사로 발탁하였다가 다시 이조판서로 불러들였다.
21. 박봉빈과 박제관
영암 사람 정학순은 무술을 익히기 위해 서울에 있었는데, 박제관이 그를 기특하게 여겨 자기의 문하에 두고 있으므로 그는 복장이란 칭찬을 받고 있었다.
그리고 민응식은 자인부사에서 김나좌수사가 되었으나, 그는 다른 능력이 없으면서 오직 백성들의 재산을 약탈하였으므로 그 수영의 관할에 있는 백성들은 소란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민씨들은 각기 식객을 두어 그중 힘이 센 사람에게 마음을 의지하고 있었다. 민영환에게는 박봉빈이 있고, 민응식에게는 박제관이 있었다. 박봉빈은 이미 사망한 판서박영보의 아들로, 그는 일찍부터 대과에 급제하여 대원군의 사랑을 받고 대원군 때 이미 직각에 임명되었다.
22. 신정희의 기부 사양
신정희가 어머니의 상을 당하자 그를 내영사로 기부하라는 특명이 내려졌다. 고종이 맨 처음 기복한 사람은 민영익이었으므로, 다시 한 사람을 택하여 그와 대를 한 것은 민영익의 부끄러움을 씻어주려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고종은 신정희를 억지로 기복하려고 하였으나 그는 잇달아 상소하여 강력히 사양하였고, 엄한 교지를 받고도 끝까지 부임하지 않았다.
하(1894년 이전) ①
1. 무자년 식년 회시와 고종의 합격자 남발
무자년(1888) 2월에 식년소과의 회시를 치러 생원, 진사방 1천여 명을 발표하였다. 고시관으로는 1소에 금빙수, 2소에는 정범조였다. 이들은 모두 내비로 임명하여 세속에서는 첨서락점이라고 칭하였다.
대개 어떤 관직을 막론하고 이조에서 삼망관리를 임명할 때 수망, 부망, 말망으로 구분하여 왕에게 추천하는 단자. 편자주 을 갖추어 올린 다음 낙점을 받은 것이 예이다. 그러나 고종은, 그것이 공정하지 못한 것을 싫어하고 혹 자기 사인을 생각하여 어필로 주를 달아 비답으로 내린 것을 첨서낙점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근년에 잘못된 규례이다.
그리고 고종은 내탕전이 고갈되었다고 하여 200명을 더 추가, 선발하라고 하므로 사람들은 돈 1만 꾸러미를 들여놓았고, 또 부호들만 선발하여 가난한 선비들에게 원망을 사면서까지 지나친 은전을 베풀어 이를 광경이라고 하였다. 이에 세자와 같이 갑술생인 사람은 시원임대신 및 춘계방세자 시강원의 별칭. 편자주 의 자, 서, 제, 질과 공주, 옹주 및 선정명현의 사손에서 임헌회, 송병선, 홍종영 등의 아들에게 이르기까지 모두 일률적으로 과방을 발표하였다.
그중 윤흥섭이란 사람은 민형식의 이종사촌이었는데, 은전을 받을 수 있는 대상은 다만 자, 서, 제, 질만 해당되고 기타 사람은 허용되지 않기 때문에, 민형식은 고종에게 통사정을 한 후 동성이나 이성을 막론하고 사촌 중 한 명만 허용한다는 특지를 받아내어 결국 은전을 받았다. 이 예로 미루어 보면 기타는 가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민형식은 민영집의 아들로 민영준의 양자가 되었다. 이때 그는 춘방의 관함을 띠고 있었다.
2. 경학원과 연무공원 설치
경학원과 련무공원을 설치하여 문무를 병용하겠다는 뜻을 보였으나 제도가 복잡하여 실용성이 없었다.
3. 무자년의 한해
6월부터 12월까지 비가 오지 않아 팔도가 큰 흉년이 들었다. 이해 3월에 큰비가 한 번 온 후 다시 가물다가, 하지 무렵에 한 보습 정도 적실 수 있는 비가 와 겨우 모내기를 하였다.
그러나 6월 이후에는 큰 가뭄이 들어 벼의 싹이 다 말랐다. 그 후 추석날에 반나절 정도 비가 와서 싹이 마르지 않은 것은 간신히 이삭을 맺었다. 그 후에는 비가 오지 않았고 오더라도 겨우 먼지만 적실 정도였다.
4. 존호가상과 승정원의 화재
봄에 「정망광의명공대덕」이라는 존호를 올리고, 대왕대비와 왕비의 존호도 모두 가상하였다.
그리고 승정원의 우사당에 화재가 발생하여 일기가 모두 소각되었다.
5. 서울의 유언비어
서울에 유언비어가 떠돌아다녔다. 서양인이 어린아이를 삶아 먹었다는 것이다. 이 소문이 전해지자 민가에서는 아이들을 간수하여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하였다.
하루는 어떤 사람이 길거리에서 자기 아들을 업고 가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그를 가리키며 “저 사람은 아이를 훔쳐내어 팔러 가는 것이다”고 하자 많은 시민들은 그를 치고 밟고 하여 그 사람은 말을 하지도 못하고 죽었다.
이 소문을 들은 서양인들은 잘했다고 칭찬을 하였다. 고종은 오부에 방을 걸어 진정시키라는 령을 내렸지만 오랜 시일이 지난 후 조금 진정되었다.
6. 춘천유수 설치와 민두호의 가공제사
춘천에 류수를 두고 부사를 독련사로 개칭하여 량헌수를 임명하였으나, 그 후 독련사를 폐지하고 민두호를 유수로 임명하였다.
고종은 임오군난과 갑신정변을 겪은 이후 항시 자기 주위에서 돌발사태가 일어나는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미리 피난을 하기 위해 교부 20명에게 후한 월급을 주어 궁성 북문에서 대기하도록 하고 그들에게 반 발자국도 자리를 떠나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고종은 한밤중에 난이 많이 일어났으므로 대궐 안에 전등을 밝히고 새벽까지 밝게 하여, 하룻밤 사이에 그 전등의 비용은 1천민의 돈이 소비되었다.
그리고 안동과 무주의 험난한 곳에 행궁을 만들어 고종의 출행을 대비하였다. 하루는 고종이 신정희에게 말하기를, “춘천은 서울과 가깝고 험한 곳이므로 내가 류영을 설치하여, 갑자기 무슨 일이 있으면 그곳의 도움을 받고자 하니 경이 그곳을 관리해 주시오”라고 하였다. 신정희가 대답하기를, “천자는 사해를 집으로 삼고 제후는 나라를 집으로 삼아 난리가 일어나기 전에 정치를 잘하고 위태롭기 전에 나라를 잘 보존해야 의외의 환난이 없는 것이며 불행히 비운이 찾아든다 하더라도 서울의 종묘가 있는 곳과 백관과 군민이 모인 곳에 그들이 죽기를 각오하고 그곳을 떠나지 않아야 신하들에게 순국하기를 유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국가의 형세는 비록 안정되지 못했지만 강토는 아직 무사하온데, 전하께서는 조석으로 겁을 먹고 이와 같이 연명할 생각만 하고 있으니 신하들이 어찌 바라는 일이겠습니까?
그리고 오늘의 기강과 민심을 살펴볼 때 전하께서 한번 궁전을 내려오신다고 해서 춘천을 어찌 가실 수 있겠습니까? 신의 생각에는 속히 유영을 폐지하여 관동의 백성들을 살게 하고 정신을 가다듬어 정치에 몰두하여 가련한 백성들의 소원에 부응하신다면 도성의 백만 생영들이 모두 전하의 자제가 되고 수족 같은 병사가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무리 견고한 금성탕지라도 어찌 이런 형세를 능가할 수 있겠습니까? 신은 금중의 군려로 죄가 내려지기를 기다리고 대궐을 출입하면서 아무 하는 일도 없이 물의를 일으키고 있는데, 하물며 비상한 일을 띠고 있는 판국에 감히 총애를 굳히려는 생각을 하고 있겠습니까? 이 몸이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 하교는 받들지 못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고종은 실망한 듯 앉아 있다가 신정희를 물러가라고 하였다. 그 후 고종은 금기석을 임명하였으나 그도 그 취지와 맞지 않아 다시 양헌수를 임명하였다. 이들은 모두 오래된 장수로서 중망을 받고 있었지만 그들이 하는 일마다 진척이 되지 않으므로 최후에는 민두호를 임명하였다. 민두호는 공사를 핑계로 사욕을 채워 백성들의 곡물을 약탈해다가 춘천에 큰 별장을 마련하였으므로, 관동과 경기도의 백성들이 난리가 일어나기를 원하고 있었다.
7. 신문국 설치
박문국을 폐지하고 갑신년(1884)에 저동에다가 신문국을 설치하여 전교리려규형을 주사로 임명하고, 일본인 정상각오랑과 함께 그 사무를 관장케 하였다. 그러나 “박문국을 수년 동안 운영해 보았지만 아무 실용성이 없고 국비만 낭비하고 있으니 이를 폐지하라”고 하였다. 시작과 끝이 이렇게 일정하지 않아 아이들의 장난과 같았다. 기타 다른 일도 모두 이와 같았다.
그 후 기사년(1905)에 이등박문이 통감부를 설치하여 우리나라 정치를 손아귀에 넣자, 어떤 사람들은 박문국의 경우가 이렇게 될 징조였다고 하였다.
8. 정상각오랑의 검술
각오랑은 얼굴이 추하게 생겼지만 문학에 재주가 있고 우리말도 잘하여 시속배와 왕래를 하였다. 그가 하루는 눈이 오는 밤에 외무아문에서 곡연곡수에 잔을 띄워 마시는 잔치. 편자주 을 베풀었다. 모든 주사들도 모여 운을 내놓고 시를 지었다. 술기운이 점차 달아오르자 각오랑은 웃으면서, “오늘밤은 매우 즐거우니 아무 거리낌없이 이야기나 나누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라고 하므로 좌중의 사람들은, “그럽시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각오랑은, “공들이 평일에 큰소리를 치면서 사대부로 자처하며 우리에게 왜놈, 왜놈 하였습니다. 우리가 왜놈은 왜놈입니다. 그러나 이 왜놈을 굴복시킨 뒤에야 왜놈을 자인하겠습니다. 오늘 공들이 어찌 입으로만 사대부를 외치면서 이 왜놈을 물리칠 수 있겠습니까? 사대부들께서는 이 왜놈을 좀 보아주십시오”라고 한 후, 옆에 있는 초꽂이에 담뱃대를 대고 손으로 받쳐들어 소반처럼 돌렸다. 초꽂이는 붉은 바퀴처럼 빙빙 돌면서 지붕 위로 오를 듯하였고 불빛은 늠름하였지만 각오랑은 보이지 않았다. 좌중에 있던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잠시 후 그 담뱃대가 쨍그랑 하고 소리가 나더니 각오랑이 촛대 오른쪽 중앙에 서서 웃으며, “제공들은 우리나라를 미워하지 마십시오. 서양나라들에 개국하던 초기에 우리 국민들 대개는 그들에 굴복하지 않고, 나와 같이 한사람이라도 더 죽일 수 있도록 칼쓰기를 배워서 외국인들을 칼로 무찌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칼을 사용한 후에 강화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조금 전에 내가 검술을 보인 것은 곧 그때 익힌 기술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과 같이 입으로만 사대부라고 말하고 검술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곧바로 왜놈이라고 한다면, 우리 왜놈들이 굴복하겠습니까?”라고 하였으나, 좌중에 있는 사람들은 아무 대꾸도 하지 못하고 서로 돌아보면서 “칼솜씨가 좋군”이라고 하였다.
9. 호남지방의 유언비어
여름에 호남에서는 유언비어가 떠돌았다. 일본인과 서양 사람들이 우리 국민들 사이에 흩어져 샘에다가 독약을 뿌리므로, 그 물을 마시는 사람들은 즉시 죽는다고 하였다.
10. 통어영의 설치
여름에 삼영을 설치하여 민영익을 통위사, 한규설을 장위사, 리종건을 총어사로 임명하였다. 그리고 청주병영을 폐지하여 통어영을 만든 후 삼남의 육군을 관할하게 하였다. 이것은 통제사가 수군을 관할하는 예와 같은 것으로, 민응식을 통어사로 임명하였다.
이때 민응식은 날마다 술만 무한정 마시고 여가가 있을 때만 내지를 받들어 이행할 뿐이었다. 민응식의 얼굴은 검고 체격이 컸다. 그리고 그는 술 마시기를 좋아하고 코는 주부코로 생겼으며 행동거지는 거칠었다.
그가 하루는 공회를 참석하기 위해 대궐에 있었는데, 승지윤상익이 허리를 구부리고 그를 쳐다보면서 “대감은 향암이라 아직도 깨끗이 버리지 못했습니까?”라고 하였다. 이에 민응식은 대궐을 물러나와 원망하기를, “오늘 악귀를 만났다”고 하였다.
11. 주미공사박정양의 소환
박정양을 미국으로부터 소환하였다. 정해년(1887) 여름, 내무협판박정양을 특파전권공사로 임명하여 공사의 임무를 맡게 하였는데, 이때 미국인들은 연회를 할 때마다 각국 공사를 초대하였다.
박정양이 그 연회에 갈 때마다 청국공사와 동등한 예우를 받자 청국 공사는 화를 내며 속국이 사적으로 외국과 국교를 맺는다 하였고, 또 감히 지위를 끌어올린다고 하여 본국에다가 호소를 했다. 그로부터 북경에서 계속 질책을 하자, 고종은 우리는 모르는 일이라고 핑계를 대고 그 죄를 박정양에게 돌려 공사의 업무가 끝나기도 전에 즉시 소환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그 일과 관련하여 전하묵 등을 유배하고, 박정양은 1년 동안 한가히 지냈다. 고종은 모든 외교를 자기 혼자서 하였지만 만일 하나라도 잘못이 생기면 무조건 아랫사람에게 죄를 돌리기 때문에, 외교를 담당한 대신들은 쥐구멍을 찾으며 성의를 다하지 않았다.
12. 조총희와 조중응의 친일
조총희는 이미 사망한 판서조득림의 조카이다. 그는 처음에 호협하다는 말을 들었으나 미친 듯이 출세를 꾀하여, 날마다 일본인과 놀면서 일본인에게 기생들을 소개하여 아첨하였다. 이때 일본인들은 대내에 들어가 그를 쓸 만한 사람이라고 칭찬하자, 고종은 그에게 마음이 쏠려 즉시 금부도사로 임명하였다. 그로부터 그가 사는 남촌에는 편지를 가지고 왕래하는 사람이 많아, 그의 문전은 모여든 사람들로 인해 저자처럼 들끓기 시작하였다.
그 후 그는 전하묵의 옥사에 연루되어 벽동군으로 유배되었다. 그리고 조총희의 형 조댁희는 조중협이란 아들이 있었는데 그도 경박하고 일을 좋아하였다. 그는 약관의 나이에 일본을 갔었는데, 그가 본국으로 돌아온 후에는 시국담을 거침없이 하고 행동도 이상하게 하였다. 그도 전하묵의 옥사에 연루되자 고종은 그를 미워하여 보성으로 유배하였다.
그 후 조택희는 민영준을 찾아가 통사정을 하였다. 그는 새벽에 갔다가 저녁에 귀가하였다. 이렇게 5년 동안을 계속하다가 유배에서 풀려 나왔다. 그러나 조총희는 풀려나지 못했다. 그것은 좀더 기다리라는 것이다. 조총희는 그를 원망하다가 빨리 벗어나기 위해 벽동군의 일곱 집에서 역모를 하였다고 무고를 하였다. 그것은 그 공으로 죄를 가볍게 하자는 것이고 또 포상을 노린 것이다. 그러나 그들을 체포하여 심문하였으나 모두 근거가 없었으므로 그는 반좌률에 적용되어 결국 옥사를 하고 말았다.
그리고 조중협은 이름을 「중응」으로 개명하였는데, 그는 을미년(1895)에 인천관찰사로 임명되었다가 박영효가 패하자 그를 따라 도주하였다. 그 후 병오년(1906)에 다시 귀국하여 법부대신이 되어 칠적의 자리에 가담하였다.
13. 관직매매
좌의정금병시가 상소하기를, “수령을 자주 교체하는 폐단이 있어 백성들이 지방에서 소란을 피우는 일이 빈번하므로 하루도 관직을 비울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후임발령이 늦어지고 있으니 속히 임명하여 보내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이때 외직으로는 감사, 유수, 병사, 수사 등으로부터 수령, 진장에 이르기까지 매도되었는데, 그중 돈을 많이 들여놓은 사람이 실직을 받을 수가 있어 어떤 사람은 자리 하나에 1만냥을 주고 제수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후 몇천 냥을 더 내놓은 사람이 있으면 먼저 제수된 사람을 도태시키고, 또 그 관함을 빌려 서열을 무시하고 마구 끌어올리다가 더 많은 액수가 없을 때 그만두었다. 그러므로 관직을 노리던 시골 사람들은 간혹 가산을 다 없애고 빈손으로 돌아오기도 하고 혹 부임한 사람들도 가다가 되돌아오기도 하였으며, 혹은 중앙 관아로 가서 인수를 벗어던지고 오기도 하여, 그 지방 백성들과 관리들은 신관을 맞고 보내기에 급급하였다.
영남의 어느 읍에는 1년에 네 번이나 신관을 맞기도 하였는데, 부임된 그 관원이 혹 몇 달이 지나도 갈려 나가지 않을 때는 백성들의 재산을 긁어모으는 데 급급하였으므로 부호들 중에 약탈을 당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이에 가난하게 사는 사람과 부자로 사는 사람들이 모두 피곤하여 백성들은 살 생각을 잃고 있었다. 대체로 팔도가 다 마찬가지였지만 호서 일대는 경재들의 고향이 제일 많기 때문에, 서울의 권귀들과 서로 호응하여 부유하게 사는 사대부들은 그들의 약탈을 교묘히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곳 서민들은 혹독한 침해를 받아 다른 도의 관리들이 침해하는 것보다 더 심하였다.
서울의 관직 중에서 잘 팔리지 않는 것은 문직뿐이었다. 그리고 음사로는 도사, 감역, 참봉, 감찰 등이 그 계품의 우열을 따라서 가격이 정해지기도 하였는데, 그 가격은 혹 2~3만냥에서 혹은 1만냥 내지 수천 냥쯤 하였다. 이때 관리들은 농간을 부려 많은 공명첩을 만든 후 간혹 1천냥을 받기도 하고 혹은 술 한잔에 교환되기도 하였다. 그 관직매도가 시작될 때에는 시골 사람들이 재산을 바치고라도 출세를 원했지만, 오랜 시일이 지난 후에는 자주 좋지 않은 일을 보았기 때문에 서로 싫어하였다. 이에 부랑배들은 서울과 시골을 오가며 집안을 망치려고 하고 혹은 그로 인한 이익을 노려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강제로 임명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관문으로 독촉하는 사례가 매우 엄하였으므로 지방관들은 자기의 상납이 늦을까 두려워서 늑탈한 것에다가 또 자기 재산을 더하여 충당하였다. 이것을 벼락감투(별악감투)라고 한다. 우리말로 풀면 벽력을 벼락(별악)이라 하고, 관리의 모자를 감투(감투)라고 한다. 이것은 한 번 관직에 임명되면 가산을 탕진하는 것이 벼락을 맞은 것과 같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백성들은 더욱 난리가 일어나기를 바라게 되어, 한 사람이 분개하여 소리를 지르면 그를 따르는 사람은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그리고 그 지방의 수령을 떼밀어 쫓아 버린 예도 1년에 수십 건이나 되었다. 이것을 민요라고 한다. 옛날 제도에 민요를 일으킨 사람은 참형에 처한다고 하였으나, 이제 그런 사람들을 참한다 하더라도 다 참할 수가 없기 때문에 많이 너그럽게 처리하여 종종 유배에 그치고, 그 소요를 일으키게 한 관리도 금전을 바쳐 은밀히 후원해 주기를 바라므로 그들은 다시 승진하여 임지로 떠나기도 하였다. 이에 대하여 김병시는 누차 진언하면서 눈물까지 흘렸지만 아무 도움이 되지 않았다.
14. 호서지방의 구감역
호서의 어느 강변에 강씨라는 늙은 과부가 살고 있었다. 그는 가정이 조금 부유하게 살고 있었지만 자녀를 두지 못하고 개 한 마리와 살고 있었다. 그 개의 이름은 복구라고 하였다.
하루는 어떤 사람이 그곳을 지나다가 「복구」라고 부르는 소리를 듣고 어느 남자의 이름으로 생각하였다. 그 후 그는 강복구라는 이름으로 감역을 임명하고 그 대가를 받기 위해 그 집을 방문하자 과부는 탄식하면서 “손님께서 복구를 한 번 보시겠습니까?”라고 한 후 고함을 질러 복구를 불렀다. 그러나 어떤 개 한 마리가 꼬리를 저으며 다가오므로 그 손님은 크게 웃으며 그곳을 떠나갔다. 이로부터 호서에 「구감역」이 있게 되었다. 이것을 볼 때 다른 일도 미루어 알 수 있는 것이다.
15. 전주 아전들의 행패
대원군이 집권하고 있을 때, 그는 늘 전주 아전의 행패를 국내 3대 폐단 중 하나로 손꼽고 있었다. 대개 전주영은 본래 교활하고 완악한 곳으로 일컬어졌지만 그 원인은 서울의 권귀들이 그들의 뇌물을 받아먹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의 좋은 사례는 이하응이 백악서의 악행을 키웠던 것이 될 것이다.
이때부터 그들은 교만하기 시작하여 그 습관이 이미 관습화되어 사대부들을 욕보이고 관장을 능멸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 아랫사람을 매우 엄하게 다루었다. 모든 관노와 사령들은 아전들과 계급이 하나밖에 차이가 나지 않지만, 그들이 받는 제압은 종이 주인에게 당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그러므로 관노와 사령들은 그들을 두려워하여 그들에게 굽실굽실하였으나 그들에게 이를 가는 것은 예전과 다름 없었다.
그 후 을축년(1889) 1월에 어느 아전의 아들이 통인이 되었다. 그는 어린 나이로 늙은 관노에게 행동이 근신하지 못하다고 나무라면서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 관노를 발로 차 넘어뜨렸다. 이에 관노와 사령들은 결의하기를, 이런 욕은 견딜 수 없다 하고 결사적으로 일어나 그 통인의 집을 불태워버렸다. 이에 많은 아전들은 두려움을 느껴 감사에게 그 사실을 알리며 병사들을 파견하여 그들을 형벌에 처하도록 간청하였다.
이때 감사는 리헌식이었다. 그는 나약하여 그들을 제압하지 못하고, 또 권세가 그 아전들에게 있으므로 어떤 조치를 취할 수도 없었다. 모든 아전들은 자기 가족을 데리고 무기고를 부순 후 병사들이 사용하는 화기를 꺼내어 그들과 대항하여 반석리를 소각하였다. 그 마을은 남천교의 남쪽에 있으며, 약 500여 호에 달하는 곳으로 관노와 사령들이 사는 곳이다. 단 한 번의 횃불을 대어 잿더미로 만들었으므로 그때 피살된 사람들은 수십 명이나 되었고 그 나머지는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져 원성이 원근을 진동하였다.
그리고 아전들은 이헌식을 협박하여, 관노와 사령들이 난을 일으킨 것처럼 조정에다 위장 보고를 하도록 하였다. 조정에서도 비록 그 사실을 다 알고 있으므로 그 아전들에게 죄를 돌려야 하겠지만 아전들이 혹 난을 일으킬까 두려워한 데다가 그들이 또 권귀들과 서로 협력을 할까 싶어 간단하게 처리하기로 하고 그들 괴수 몇 사람만 유배하였다. 그 후 난이 조금 진정되자 아전들은 관노와 사령이 없으면 관부를 운영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령을 게시하여 그들의 죄를 용서하는 한편, 제각기 옛날 직위로 돌아오도록 하였다.
이때 사방으로 흩어진 관노와 사령들은 초췌할대로 초췌하여 조금씩 복직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불만을 참고 때를 기다리고 있다가 을미년(1895) 겨울에 기일을 정하여 거사를 하려고 하였다. 그들은 감사를 받들고 나서서 먼저 제재를 가하여 맹세코 아전들의 집안을 다 망쳐 놓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 후 그들의 음모가 누설되어 제각기 가족을 데리고 도주하였으므로 살해된 사람은 몇 명 되지 않았다. 이때부터 아전들은 그들의 결사대가 일어날까 싶어 옛날부터 있었던 관노와 사령들도 모두 쫓아내고 일반인을 고용하여 그들의 직책을 맡게 하였다.
그 후 진위대가 창설되자 아전들은 또 관노와 사령들이 응모할까 염려하여 제각기 자기의 자제들을 군대에 집어넣었으므로 관노와 사령들은 결국 그 원수를 갚지 못하였다
하(1894년 이전) ②
1. 주천진독리 김명규와 종사관김상덕
기축년(1889) 5월, 금명규를 주진독리, 금상덕을 종사관으로 임명하여 천진으로 보냈다. 김명규는 장동 김씨의 먼 일족으로, 그의 아우 금종규는 김병덕의 양자가 되어 김병덕이 그를 이끌어 주었다. 김명규는 음사로 참봉이 되었다가 수년 후에는 과거에 급제하여 민씨들에게 아부하므로, 그를 외교업무에 천거하였다.
그는 일찍 고종에게 총애를 받아 외직으로는 영변부사를 지내고 내직으로는 참판을 지내다가 이 직책을 맡게 되었다. 그는 아첨을 좋아하고 교활한 속임수에 능하여 세상 사람들은 그를 교환으로 불렀고, 어떤 사람들은 김병덕이 속임수를 당했다고 하였다. 그리고 김상덕은 완당금정희의 종손으로 민영환의 막빈으로 있었다.
2. 시강원의 검교관 설치
시강원에 검교관을 두었다. 그것은 내각의 예와 같았다. 이것을 민영달에게 주관하도록 하였는데 그는 사업을 하듯 운영하였다.
3. 한용석, 유지영 등의 유배
지평향교의 유생 한용석, 류지영 등이 항교의 회의석상에서 노론을 비방하며 송시렬을 배척하고, 또 신임사화를 논하면서 금창집1648~1722. 노론으로 4대신의 한 사람. 1684년에 을과로 급제하여 정언, 병조참의 등을 역임하고, 그 후 1717년에 영의정을 지내다가 신임사화 때 거제도로 유배되어 사사되었음. 편자주 등 여러 사람을 열거하여 멸시하였는데, 이때 현감리승희도 그들을 거들었다.
그 후 오랜 시일이 지나 경기도 유생 금사익 등이 조정으로 상소하여 그 사실을 알리자 대계와 상차의 성토가 일제히 일어나, 이승희를 잡아 심문하고 한용석과 유지영 등을 외딴 섬으로 유배하였다. 이 사건의 합계를 올릴 때 수찬서상집과 사간려규형 등은 소론이므로 참여하지 않고 지평고시협은 호남 사람으로 제봉고경명1533~1592. 선조 때의 의병장. 자는 이순, 호는 제봉. 편자주 의 방손이었는데, 그는 본래 가문이 가난하고 또 소론이었으므로 참석하지 않아 모두 유배되었다.
4. 임원상의 유배
전교리림원상이 상소하여 영의정침순택을 탄핵하자 고종은 매우 노하여 그를 숙천부로 유배하라는 명을 내렸다. 임원상은 고 판서림한수의 아들이다.
5. 영조의 추존
영종을 「조」로 추존하고 시호 위에 존호를 가상하였다. 이것은 봉조하금상현의 제의를 따른 것이다
김상현은 젊었을 때 문학으로 명성을 날려, 민규호가 그를 팔좌륙조판서를 말함. 편자주 에 끌어올리고 또 량관의 대제학까지 되었다. 그는 평안감사로 있을 때 청렴하지 못하다는 말을 들었다.
그 후 그가 늙어 벼슬을 그만두고 남산에 있는 록천정을 사서 별장을 만들어 문주를 즐겼는데, 이때 그는 고종의 뜻을 영합하여 함부로 전례를 논하다가 후배들의 조롱을 초래하였다. 그리고 그가 민태호에게 문형을 추천하는 것은 문원에 있어서 더욱 부끄러운 일이라 하겠다.
6. 방곡령과 조병식
일본인이 함경도에서 황두를 무역하였다. 그것은 외무아문의 허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감사조병식은 백성들의 기근을 핑계로 황두의 출항을 엄금하였다. 그 이유는 조병식이 백성들의 식생활을 우려한 것이 아니라, 그의 성품이 고집스러운 데다가 일을 할 줄 모르고 또 일본인에게 뇌물을 받으려고 했기 때문이다. 이때 내무부에서는 일본인의 협박이 들어오므로 상계를 올려 봉급을 3등급으로 깎아 주자고 간청하였다. 그 후 을미년(1895)에 일본인은 그때의 부진한 상무로 인하여 적자를 보았다는 핑계로 손해배상금 10만원을 청구하였다.
그리고 조병식은 그가 비록 뇌물을 탐한다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그가 받은 뇌물은 모두 대내와 권력층에 바쳤기 때문에, 가세가 가난하여 그들의 청구를 받아들일 수 없어 결국 그의 집안 사람들에게 갹출하여 주었다. 그중 조동희가 가장 부유하게 살았으므로 혼자 5만원을 바쳐, 온 가문의 재산이 모두 탕진하였다.
7. 어사이건창의 조병식 감찰
조병식이 충청감사로 있을 때 그는 천안군리전제홍을 그의 심복으로 삼았다. 전제홍은 장물의 대소를 막론하고 그에게 바쳤다. 그 후 리건창이 어사로서 그의 비리를 캐기 위해 그곳을 갔으나, 조병식과 가까운 영리들이 모두 도주하여 한 사람도 잡을 수 없으므로 그 비리를 캘 길이 없었다. 이때 이건창은 꾀를 내어 전제홍을 데려다가 그의 목숨을 살려 주기로 약속한 후 장물기록부를 작성하도록 하자 전제홍은 3일 동안을 부복하고 울다가, “제가 죽을 사람이지만 오늘 목숨을 살려 주신다고 하니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하고 구슬을 꿰듯 조목조목 써서 바쳤다. 그 액수는 10여만 냥이나 되었다.
이 사실을 장계에 적어 올린 후 조병식은 그 말이 전제홍에게 나온 것임을 알고 그는 언제나 이를 갈며 중얼거리기를, “내가 전제홍만 죽이면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하였다. 그 후 수년이 지나 그는 형조판서가 되어 관아로 가던 길에 전제홍을 보고, 종자들에게 그를 잡아 형조로 끌어들이라고 하고는 말 한마디도 묻지 않고 그를 곤장을 쳐서 죽였다. 그는 이와 같이 행동이 악독하였다.
8. 조대비의 사망
경인년(1890) 4월 17일에 대왕대비 조씨가 승하하였다. 나이는 83세이며 시호는 신정으로 수릉에 부장하였다. 고종은 임금의 덕을 한 번도 실천하지 못했지만 조대비를 섬기는 데 있어서는 효성을 다한다고 소문이 나 있었다.
그러나 민비가 정사에 참여한 이후에는 조대비가 그의 기염을 두려워하여 늘 그를 피하였고, 또 조성하와 조녕하 등이 사망한 이후에는 자신의 종족들이 몰락하여 더욱 슬퍼하였다. 그리고 국가의 변란이 계속되어 그 험한 일을 몸소 다 겪었으므로 항시 궁인들을 대하면 눈물을 흘리며 속히 죽지 못한 것을 한탄하였다.
9. 조대비와 황해감사
해주에서 서울까지 가는 데는 3일밖에 걸리지 않았다. 더욱이 뱃길로는 바람이 세차게 불어 아침에 출발하면 저녁에 도착하였으므로 서울의 속담에 “황해감사는 부지깽이가 탈 시간에 올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그곳은 벼슬아치들이 탐을 내던 곳이었다.
그러나 신정왕후는 친정 집안이 가난한 데다가 경비도 넉넉치 못하므로 고종에게 간청하여 황해도의 한 자리만은 자기 평생 경비를 공급해 주는 곳으로 해달라고 하자, 고종은 신정왕후의 간청을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10여 년 동안 이곳 감사는 신정왕후의 일가가 아니면 그의 친척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그것은 조병철과 조경하 등이 좋은 예가 될 것이다. 그리고 관리와 신사들도 “황해감사는 조대비의 감사다”라는 말까지 하였다.
10. 호남균전사김창석의 징세
전승지금창석을 호남균전사로 임명하였다. 김창석은 전주 아전 집안의 출신으로, 대대로 부유하여 그의 전답에서 수확한 볏섬은 1만석이나 되었다. 그는 과거에 급제한 다음날 돈 10만냥을 상납하여 임금의 은혜에 감사의 뜻을 표하자 고종은 매우 기뻐하였다.
그러나 고종은 그에게 외부궁중의 재화를 맡은 부서. 편자주 의 일을 맡아 오랫동안 상납을 하게 하고, 갑자기 고위직에 앉혀 싫증을 내지 않도록 하였다. 그는 누차 승지에 임명되어 전후로 수백 냥을 갖다 바쳤다. 이때 호남의 우도 연해 지방에는 해마다 가뭄이 들어 보이는 곳마다 전답이 황폐하였고, 정공국가에 정당하게 바친 세조와 방물. 편자주 도 반액이나 줄어들자 김창석을 균전사로 임명하여 그로 하여금 자금을 변통하여 소를 세내고 경작자를 모집하여 농사를 짓게 하였다. 이것은 백성과 국가를 다 이롭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오랫동안 그 수답 개간비를 청산하지 못하고 원결을 충당하지 못하면 그 세금을 김창석에게 전가하여 독촉할 심산이었다. 김창석도 고종의 속셈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부호들에게는 억지로 떠넘기고 남는 일손들을 끌어들여 한 구역씩 그들에게 떼어 주어 수답을 개간한 뒤 3년 내지 5년까지는 면세를 해준다고 하였다.
그러나 한해가 다 되자 세금을 징수하므로 농민들은 큰 소란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 다음해에 흉작이 들었으나 김창석은 작년의 장부대로 금년 세금을 징수하고 이것을 정안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는 흉작이 든 것을 널리 알려고는 자기의 장토에서 수확한 잘 여물지 않은 벼를 그 재결에 포함시키고, 그 남은 것으로 빈민에게 대충 나누어주어 책임을 면해버렸다. 이에 농민들의 매우 피폐하여 원성이 행인들의 입에 오르내렸으나 김창석은 거드름을 피우며 별사로 자처하면서 가마에 걸터앉아 선화당을 출입하고, 또 뜰 위로 오를 때도 부축을 받아 감사와 같은 예우를 받으므로 이 광경을 보는 사람들은 매우 분개하였다.
11. 시호의 남발
리봉구는 갑신정변 후 고향집으로 돌아가 있다가 몇 년 후에 사망하자 특별히 그에게 충절이란 시호를 내렸고, 또 태인의 부자 류사현은 그가 사망한 후에 그의 집에서 수십 만냥을 상납하고 유사현을 학행이 있는 사람이라고 사칭하므로 그에게 판서와 제학의 벼슬을 주고 문절이란 시호까지 내렸다. 이렇듯 이름그릇(명기)이 무분별하기가 황천에 미칠 정도로 극도에 달하였다.
12. 중국 죄수의 보은과 이덕유의 치부
리덕유는 서울 사람으로 나라의 갑부였다. 그가 가지고 있는 재산은 민영준보다 더 많았다. 그는 젊었을 때 통역관으로 북경을 가던 도중 요동을 경유하다가 한 죄수를 만났다. 그 죄수는 1천냥만 있으면 죽음을 면할 수 있다고 했다. 이런 사정을 안 이덕유는 돈 자루를 다 털어서 그 죄수에게 주었다.
그 후 수십 년이 지나서 이덕유는 또 북경을 가다가 어떤 사람을 만났다. 그는 장막을 훌륭히 치고 있으면서 조선의 이아무개란 사람을 기다린다고 하였다. 이렇게 만난 그는, “내가 옛날의 사형수입니다. 공의 돈을 갚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으나 공이 오지 않아 그 돈으로 이자놀이를 하여 밭을 사다 보니, 지금은 큰 별장이 되어 그 조세의 수입이 보리와 기장으로 1만석이나 됩니다. 공께서 이것을 보십시오”라고 하더니 품속에서 장부 하나를 꺼내어 주면서 “이 속에 그 수가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우리 나라는 땅이 좁고 척박하여 그 면적에서 사는 백성들 중 부자라고 하는 사람은 극히 소수에 불과하였다. 그나마 외국에다가 별장을 마련한 사람은 이덕유로부터 시작되었다. 그의 집에는 마제은이 두 창고에 가득 차 있어 그 소문이 이웃 나라까지 퍼졌다. 고종은 언제나 중국 지방에 돈을 쓸 일이 있으면 이덕유의 어음을 보냈다. 그것은 청나라 상인들이 고종의 어새보다 이덕유의 어음을 더 믿었기 때문이었다.
13. 이덕유의 검소생활
리덕유는 지극히 검소하여, 집을 나설 때는 교자와 말도 없으므로 혹은 작은 개만한 나귀를 타기도 하고 혹은 보행을 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겨울에도 목면옷(목면구)를 입었고 식사 때 반찬값은 100전에 한하였으며, 벼슬은 바라지도 않고 오직 재산 증식에 즐거움을 두고 살았다. 고종은 자금이 부족하면 언제나 이덕유를 불러 차비문에서 그를 대하였고, 민영환도 문을 닫고 손님을 사절할 때라도 리음죽이 왔다는 말만 들으면 그대로 데리고 갔다. 이덕유는 음죽현감에 제수되었으나 몇 달 만에 벼슬을 버리고 돌아왔다.
14. 서울의 부호 배동익
서울에서 상전을 가지고 있는 배동익이란 사람은 돈줄이 매우 확실하였다. 언제나 조정에서 인사발령을 할 때 관직을 사는 사람이 어음을 가져오면, 고종은 “이 어음이 배동익에게서 나왔습니까?”라고 물었다. 그것은 경향의 부호들을 고종이 다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15. 호남의 부호 오영석
호남의 부호 중에 오영석이란 사람이 있었다. 그의 논밭에서 생산되는 벼는 1만석쯤 되었다. 민영환은 그를 끌어들여 자신의 문하에 출입하게 하였다. 서울 사람들은 그를 오금이라고 하였다. 「오」와 「오」가 동음이기 때문이다. 그는 음사로 누차 군읍의 수령을 지냈다.
그가 림피의 수령로 있을 때 대내에서 유기를 5그릇씩 500쌍을 바치라고 하였다. 그러나 갑자기 유기를 마련할 수 없으므로 가격을 배나 주면서 민가에서 구입하여 여러 마을의 징과 꽹과리가 모두 바닥이 났다. 대개 시골에서는 여름철에 농민들이 징과 꽹과리를 치면서 논을 맸다. 이것을 농악이라고 한다. 징과 꽹과리는 놋쇠와 백철이 아니면 만들 수 없다.
16. 초피 진상
평안도와 함경도에서 나는 담비모피(초피)를 속칭 돈피라고도 하며 그 겨드랑이에 난 풍성한 털을 자얼(자!!)이라고 하는데 그 털은 특이할 정도로 온기가 있어 매우 귀중품에 속하고 그 가격은 비단의 몇 갑절이나 되었다.
하루는 대내에서 모피전에 명하여 갑자기 자얼모장(자!!모장) 10부를 진상하라고 하자 돈피모자를 쓴 서울 사람들은 10배의 가격을 받고 팔았다. 이렇게 만들어 진상하자 명성왕후는 그것을 펴 보라고 한 후 잠시 구경하고 있을 때 촛불의 불티가 떨어져 삽시간에 다 타 버렸다.
팔도에서 생산되는 진귀한 토산물은 단 하나라도 진상물로 바쳐지지 않는 것이 없어 항시 산처럼 쌓여 있었다. 그리고 궁중에서는 언제나 곡연을 베풀 때 주흥이 오르면 량전은 기둥을 기대고 서서 접은 부채와 꼬부라진 인삼을 빗발처럼 땅에다가 던져 주었으므로 노래를 할 줄 알고 북을 칠 줄 아는 무당과 광대들은 하룻밤의 휴가를 청하여 세모시, 부채, 칼 등을 많이 가지고 나왔다.
17. 고종의 밤나들이
승지리최승은 월사리정구의 후손으로, 그는 오랫동안 대궐에서 가주서로 있었다. 그는 나에게 이런 말을 해주었다. 어느 날 밤 노래와 풍악 소리가 들렸다. 그는 액속들을 따라 그 소리 나는 곳을 찾아갔다. 어느 한곳에 있는 전각이었다. 불빛은 낮처럼 훤하고 양전은 평복 차림으로 앉아 있는 사람이 보였다.
그리고 그 뜨락 밑에는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팔뚝을 걷어붙인 수십 명의 사람들이 노래를 부르며 북을 치고 있었다. 그중 한 사람이 부른 잡가는, “오는 길 가는 길 만난 정 깊이 들어 죽으면 죽었지 헤어지기 어렵다”는 가사였다. 이렇듯 음탕하고 비루한 가사를 들은 사람들은 얼굴을 돌릴 정도였지만, 명성왕후는 무릎을 치며 “그렇지, 그렇지” 하고 좋아하였다.
18. 세자의 성불능
세자의 성기가 발기되지 않았다. 이때 어떤 사람은 그것을 고자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세자가 어렸을 때 궁녀가 그 음경을 빨아 음경이 한 번 나온 후 들어가지 않은 것이라고 하였다.
세자의 나이가 조금 장성하였으나 그 음경이 오이처럼 드리워져 발기되는 때가 없었다. 소변도 그대로 흘려 버려 항시 앉은 자리를 적시었으므로 하루에 한 번쯤 요를 바꾸거나 바지를 두 번씩 바꾸기도 하였다. 그리고 혼사를 치를 나이가 되었지만 남자의 도리를 다할 수 없어 명성왕후는 미친 듯이 한탄을 하였다.
하루는 명성왕후가 궁비에게 부탁하여 세자에게 성교하는 것을 가르쳐 주도록 하고, 자신은 문밖에서 큰 소리로 “되느냐? 안되느냐?” 하고 물었으나 그 궁비는, “안됩니다”라고 하였다. 명성왕후는 두어 번 한숨을 내쉬다가 가슴을 치며 자리를 일어섰다. 이때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것은 완화군을 죽인 응보”라고 하였다.
19. 성불구였던 남공철과 서승보
옛날부터 서울에는 고자가 많았다. 근세의 재상으로는 남공철과 서승보가 그중 두드러진 사람이다.
남공철은 자도고대의 미남자. 편자주 와 같이 아름다운 눈을 가졌고 또 그는 약관 때부터 한각을 출입하여 길을 가는 사람들도 그를 보고 선관과 같다고 하였다.
하루는 그가 대궐을 가려고 하는데 그의 부인이 조복을 펴놓고 구멍을 뚫어 놓았다. 그리고 그의 등뒤로 가서 어깨를 물더니 대성통곡을 하였다. 그것은 그의 얼굴이 아름답게 생겼어도 남자 노릇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서승보의 부인은 임종할 때 서승보를 불러 이별을 고하고 웃음을 지어 보이며, “나는 깨끗한 몸으로 떠나갑니다”라고 하였다.
20. 고종의 후사 거론과 상궁 장씨
세자의 양도가 아직 발기되지 않는 데다가 고칠 수 없는 신병까지 앓고 있어 명성왕후는 세자에게 후사를 바라볼 수 없음을 한탄하고, 왕자 강이 아들을 낳으면 세자 대신 고종의 왕통을 잇게 하려고 하였으므로 강을 대할 때 예전보다는 조금 박대하지 않았다. 그것은 완화군을 대하는 것과는 각별한 것이었다.
그 후 신묘년(1891) 겨울에 명성왕후는 고종에게 강을 의화군으로 봉하자고 권하였다. 의화군강은 상궁 장씨의 아들이었다. 강이 태어났을 때 명성왕후는 화가 나서 날카로운 칼을 들고 장씨의 거처로 가서 그 칼을 문지방에 꽂으며 큰 소리로 말하기를, “칼 받으라”고 하였다 장씨는 본래 힘이 세어 한손으로는 칼자루를 잡고 또 한 손으로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그는 땅에 엎드려 목숨만 살려 달라고 애걸하였다. 머리는 흩어져 길게 드리워져 얼굴은을 가리고 있었다.
명성왕후는 그가 가여운 생각이 들어 칼을 던져 버리고 웃으며 “과연 대전의 사랑을 받을 만하구나. 지금 너를 죽이지는 않겠다만 다시는 궁중에서 거처할 수 없다”고 한 후 력사를 불러 그를 포박하게 하였다. 그러고 그의 음부 양쪽의 살을 도려낸 후 그를 낭가에 실어 밖으로 내쫓아 버렸다. 그 후 장씨는 그의 형제들에게 10년 동안 의지하고 살다가 그 상처로 인하여 죽고 말았다.
21. 황주 기생의 처형
황주의 기생이 연회에 참석하기 위해 대내로 들어왔는데, 고종은 그녀를 좋아하여 남몰래 불러다가 동침을 하고 정락용에게 명하여 그에게 금가락지 1쌍과 화장품 값 3천냥을 하사하였다.
명성왕후는 이 소문을 듣고 크게 노하여 즉시 그녀를 포도청으로 데려가 죽이라고 하고, 정낙용도 심히 꾸짖어 비상한 처분을 내릴 것같이 하였다. 이때 정낙용은 백방으로 명성왕후의 노기를 풀려고 하였으나 일은 이미 끝난 뒤였다.
하(1894년 이전) ③
1. 이용원의 유배와 원세개의 대원군 섭정계획
신묘년(1891) 2월에 호군리용원을 흑산도로 유배하고 그 후 다시 천극을 가하였다. 그리고 원세개는 진주한 지 10년이란 세월이 흘러 우리 나라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고종이 흥쇠간에 가망이 없는 것으로 판단하고 세자에게 양위하기를 권하려고 하였다. 그런 후에 대원군이 섭정을 하면 쇠퇴한 정국을 유지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금윤식이 유배되자 그는 수년 동안 꾹 참고 있다가 이때 시국이 날로 변하는 것을 보고 또 은밀히 양위를 거론하였다. 이에 고종은 크게 두려워하며 세자에게 남면정좌를 하게 하고 백관의 조하를 받게 하여 장차 대리집정할 뜻을 보여 주기 위해 령상침순택에게 그 의식을 적어 올리도록 하였다.
이때 이용원이 상소하여 간하기를, “사람은 두 하늘이 없고 하늘은 두 해가 없으므로 옛날 삼왕중국 신화상의 세 제왕, 복희, 신농, 황제. 편자주 때부터 당송 때에 이르기까지 남면을 한 임금은 오직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만일 지금과 같이 선위를 한 후에 세자가 중해지고 왕통이 높아진다면 주공, 공자, 정자, 주자도 먼저 선위를 거론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남면」 두 자의 소중함도 세자에게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어찌 신하로서 건의할 수 있는 말이라고 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이에 심순택은 성밖으로 나가 죄명이 내려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명성왕후는 이용원이 계미년(1883)에 진하를 저지한 데다가 지금 또 대례까지 방해하여 조정의 신하들이 소요를 일으킬 것으로 생각하여, 이 두 가지에 대한 노기가 일시에 폭발하였다. 그의 죄는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만 것이다.
그러나 그는 노론이기 때문에 그를 구제하는 사람이 많아 감사률로 처리되었다. 그리고 심순택은 전후 20년 동안 재상으로 있었지만, 미련하고 체면도 없는 사람이라 오직 왕후의 뜻만 받들어 권세가를 찾아 다녔으므로 사람들 이목에 거슬리는 비정은 모두 그로 하여금 건의하여 시행하도록 하였다. 이에 국론이 비등하여 어떤 사람은, “저 도둑놈이 언제나 잡혀 죽을까?”라고 하였고, 어떤 사람은, “너무 가련해서 죽이지 않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고종은 그가 자기 명령만 이행하기 때문에 그를 매우 편안하게 생각하여, 그를 사직시키라는 상소에 답할 때마다 걸핏하면 소하, 조참한 고조의 공신들. 편자주 , 방현령, 두여회당 태종의 공신들. 편자주 등을 인용하여 그들의 마음을 진정시키므로 이 광경을 보는 사람들은 입을 가리고 웃었다.
그리고 지난 갑신정변 때 원세개가 날마다 사람을 시켜 우리 정부에 정변이 일어난 이유를 물었지만, 심순택은 겁에 질려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토시를 가지고 침실로 들어가서 목을 매어 자결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의 아우 침리택이 구하여 죽음을 면하였으므로 그때 사람들은 그를 투자대신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용원은 본래 교만한 귀인 같다는 지목을 받았고, 성품은 활달하여 세절에 구애를 받지 않았다. 그가 수재로 있을 때 뇌물을 좋아한다는 비난을 받기도 하였으나 그는 성품이 곧아 세속에서 보기 드문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가 전후로 올린 상소는 일시에 널리 알려져서 사람들은 이 일로 그를 높이 평가하였다.
2. 심순택의 무능과 조소
침순택이 늙어도 물러나지 않자 시정의 부녀자들만 그를 비난할 뿐 아니라 그와 동색인 재상들도 그를 경멸하여 공석에서도 그를 서로 흘겨보며 웃음 도구로 생각하였다.
하루는 그가 정청에서 여러 사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앉아서 졸고 있자 금병시가 미소를 지으며, “승상은 과연 무사하다고 말할 만하군”이라고 하였고, 금영수는 자기의 담뱃대로 그의 눈에다가 대는 모습을 하며 그를 야유하였다.
이때 그 광경을 본 사람들은 정청을 나와서 탄식하기를, “심순택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두 김씨도 조롱하기를 매우 좋아하는 사람들입니다. 심순택이 그 직위에 맞지 않으면 물러가라고 권하면 될 것이지 어찌 그토록 조롱을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3. 심순택의 수결
내가 하루는 금병덕을 방문하였는데, 그때 봉상사의 관리가 공첩을 가지고 왔다. 그것은 봉상시의 제조를 삼공이 겸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조 한 자리는 영상이 겸임하고 제조 두 자리는 좌우상이 겸임하여 언제나 공첩이 있을 때는 이들이 수결을 한 후에 반포하였다.
이때 영상은 심순택, 우상은 김병덕이었으므로 심순택을 거쳐 김병덕에게 온 것이다. 김병덕은 심순택이 한 수결을 보고 웃으며 그 관리에게 말하기를, “당신이 이 수결을 좀 보시오. 영의정이 아니면 어찌 이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나는 이 말을 듣고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이때 김병덕이 나에게 묻기를, “당신은 왜 웃습니까?”라고 하자 나는 대답하기가 매우 곤란하여 우물쭈물하고 있는데 그가 다시 물어 나는 겸손하게 대답하기를, “승상이 수결을 할 수가 있습니까?”라고 하였다. 이에 김병덕도 웃으며 “이제 수결을 한 승상을 다 보겠습니다”라고 하였다. 나는 이 말이 끝난 뒤 매우 후회를 하였다. 김병덕은 심순택과 내외간에 친척 사이였으며 그 관리는 심순택의 하인이기 때문이다.
4. 고종의 정승 기용
금유연이 정승으로 임명될 때 고종은 사석에서 말하기를 “김유연은 대신의 풍도는 있지만 목이 너무 세어 부리기가 어렵다”고 하였는데 그 후 얼마 안되어 파직되었고, 조병세가 우상으로 임명되어 처음으로 경연 자리에 참석하였을 때 고종은 좌우를 돌아보며 “이 사람은 정직하여 마음이 변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으나, 그는 누차 직언을 하였으므로 고종은 그를 싫어하여 파직시켰다. 그 후 이 두 사람은 모두 기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침순택은 누차 배척하면서도 다시 기용하여 그에게 베푸는 은전은 변하지 않았다. (고종이 명석한 지혜가 없진 않았지만, 그 결함은 남을 속이는 데 있었다.)
5. 고종의 뇌물요구
정태호를 황해감사로 임명한 후 그가 뇌물을 탐한다는 소문을 들었지만 상납이 드물자 고종은 그를 매우 꾸짖으며 “네 생각에 내가 리건창과 어윤중을 그곳으로 보내 장물을 염탐해 오게 못할 줄 아느냐?”고 하였다. 이것은 어윤중과 이건창을 쓸 만한 인재로 알고 있는 것이다.
6. 고종의 인물보는 안목
신묘년(1891)과 임진년(1892)이 바뀔 무렵 서울에서는 화적이 크게 일어나서 약탈과 살인 등 끔찍한 사건이 종종 대낮에도 발생하고, 심지어는 대궐 안의 원역들까지 도적질을 하였다. 고종이 동쪽 방에서 서쪽 방으로 가면 동쪽 방의 물건이 없어지고, 서쪽 방에서 동쪽 방으로 가면 서쪽 방의 물건이 없어졌다.
고종은 이것을 매우 걱정하고 있었으나 어찌할 도리가 없어, 하루는 시원임대신금병시와 금홍집을 모두 대궐로 모이게 하였다. 그들은 서로 말하기를, “우리를 부르시는 것은 포도대장을 추천하라고 하는 것이니 누가 그 임무에 적합하겠습니까?”라고 하자 김홍집이 말하기를, “신정희입니다” 하였다 김병시는, “그러면 누가 그와 짝이 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자김홍집은, “마지 못하면 리봉의가 어떻습니까?”라고 하였다.
이때 김병시는 손을 저으며 “임금께서는 자기 앞에 있는 사람을 두둔하시므로 우리는 상 앞에서 절대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상께서 스스로 선택할 것입니다. 상께서도 보시는 눈이 있으시니 반드시 이 두 사람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 후 그들이 대궐로 들어가자 고종은, “경들은 화적이 있다는 말을 듣지 못했습니까? 그 쥐 같은 놈들이 대궐까지 스며들어 있으니 이것은 포도대장이 포도대장 같지 못하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므로 경들이 각기 한 사람씩 추천하여 주시오”라고 하였다. 이에 그들은, “신들이 어찌 말할 수 있겠습니까? 신하를 아는 것은 주상같이 잘 아는 사람이 없으므로 전하께서 재량대로 하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자 고종은, “신정희가 어떻습니까?”라고 하였다.
이때 고종은 또 “신정희와 짝이 될 만한 사람은 누구입니까?”라고 하더니 잠시 후 다시 “이봉의가 어떻습니까?”라고 하므로, 그들은 일제히 “성의가 지당하십니다” 하고 서로 돌아보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고종이 그들의 웃음을 보고 그 이유를 묻자 김병시가 말하기를, “신들이 밖에서 이미 두 사람을 점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상의 뜻을 예측할 수 없어 감히 말씀을 드릴 수 없었습니다”라고 하였다. 고종은 이 말을 듣고 크게 웃으며, 적합한 인재를 기용하는 데 대해 기뻐하며 신정희를 좌포장, 이봉의를 우포장으로 임명하였다.
신정희는 도박이 절도의 원인이 되는 것으로 생각하여 도박꾼들도 엄히 다스리고 그들을 잡으면 즉시 죽였으므로 반년도 안되어 그가 죽인 사람은 400명이나 되었다. 도성 사람들은 그를 두려워하여 일찍 자고 늦게 일어났다. 그들은 마치 귀신이 자기 문 앞에 있는 것처럼 무서워하며 저울눈 하나도 속이는 일이 없었다. 이때 여론을 좋아한 사람들은, 신정희 한 사람을 기용하여 농간을 부리는 사람이 세상에 없어졌으니 시국을 구제할 인재가 없는 것이 아니라 그런 인재를 기용하지 않는 것이 우려될 뿐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봉의는 본래 근신하고 중후하여 말 한마디와 행동 하나도 함부로 하지 않으므로 고종은 시신에게 말하기를, “이봉의가 나를 섬긴 지 30년이 되었지만 그는 연석을 출입할 때 한 번도 눈을 흘겨본 일이 없으니 참으로 군자다”하고 칭찬하였다. 그러나 그가 우포장이 되면서부터는 그 위엄과 풍도가 신정희만은 못했지만 법을 범한 자가 있으면 조금도 용서하지 않았으므로 그의 부하들도 잘 다스렸다.
이봉의는 옛 장신 리경우의 양자이다. 그는 10여 세 때 호남에서 와 시골말을 사용하였으므로 비복들이 그만 보면 웃었다. 이봉의는 그것이 부끄러워 반 년 동안 말을 하지 않고 있다가 서울말을 다 터득한 후에 말을 하였다고 한다. 그의 차분한 성격과 독실한 행실은 어렸을 때부터 이미 그러했던 것이다.
그리고 제주도에서 민란이 일어나 목사를 쫓아내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섬에는 오랫동안 큰 소란이 일어났지만 진압하지 못하고 있었으므로 그 유언비어가 서울에까지 들렸다. 고종은 이 사건을 우려하여 위덕을 겸비한 문무관을 그곳으로 발령하려 하였으나 그 위덕을 겸비한 인물이 없자 삼공을 입궐시키라고 하였다. 이때 김병시 등은 또 겸손해 하며 아무 말을 하지 않고 있었다. 고종은 오랫동안 생각하고 있다가 “내가 적합한 사람을 생각해 냈습니다. 그것은 리규원을 능가할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자 여러 신하들은 하례를 올렸다.
그 후 이규원을 찰리사를 겸직시켜 임명하였다. 이규원은 질이 높은 장신이기 때문에 목사로만 임명하여 그 도민들의 경시를 받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 이규원은 제주도에 도착한 지 1년이 지난 후에 그 민란을 가라앉혔다.
고종은 오랫동안 재위하여 신하들의 현부를 잘 파악하고 있었으나 사사로운 일에 끌려 공적으로 처리하지 못하고 있다가, 다만 그 일이 해결할 수 없을 만큼 착잡하게 된 후에야 적합한 인재를 기용하곤 하였다.
그 예로 함흥민란 때는 감사서정순이 진압하고 북청민란 때는 남병사이규원이 진압했는데, 지금 제주민란도 그와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고종은 언제나 민란이 평정되면 그대로 방치하고 있었다. 그리고 고종의 성품은 자신이 모든 일을 잘 알고 있는 것으로 판단하고 남들과 영합하기를 좋아하였으므로 지혜가 있는 대신들 중 김홍집이나 김병시 같은 사람들도 감히 인재를 추천하지 않고 고종 자신이 선택하도록 유도하여, 지인지감이 있다는 명예를 고종에게 돌렸다. 아! 그러나 이것은 신하의 도리가 아니라 시정에서나 있는 도리라고 하겠다.
7. 이규원의 청백
리규원은 리건창의 종족이다. 그의 집안은 여러 대에 걸쳐 무예를 닦았지만 유명한 장수가 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규원은 재주도 있고 청렴하다는 명성이 나 있었다. 그는 당하관으로서 일곱 번이나 부사를 지냈지만 벼슬을 그만두고 오던 날 밤 남에게 돈을 빌려 밥을 지어 먹고, 거처도 일정한 집이 없었으므로 가는 곳마다 남의 집을 빌려 전전하였다.
그리고 민태호가 경기감사로 있을 때 이규원은 통진부사로 있었다. 이때 민태호는 그를 잘 알고 있었으므로 강력히 그를 조정에 추천하였는데, 그는 수년 사이에 금위대장과 해방사를 역임하여 무명이 널리 알려졌다.
8. 경리청의 신설
경리청을 신설한 후 총융청의 병력을 그곳으로 옮하고, 민영준을 총융사로 임명하였다. 그 체제는 총융, 수어 량사의 예를 따랐다.
민영준의 하인 한 사람이 매우 교만하여, 많은 사대부들이 그에게 모욕을 당하였다. 하루는 신정희가 민영준을 방문하였으나 그를 만나지 못하자 자기의 종자들에게 눈짓을 하여 그 하인을 잡아갔다.
이 소문을 들은 민영준은 크게 놀란 나머지 신정희에게 서신을 보내 그를 보내 달라고 간청하였으나 그때는 이미 그를 교살한 뒤였다. (이때 민영준은 진령군의 위복으로 세력이 당당하여 사람들은 그에게 이를 갈고 있었으나, 오직 신정희에게만은 그의 하인을 죽였어도 끝까지 손을 대지 못하였다.)
9. 호남지방의 큰비
신묘년(1881) 8월 7일, 호남에서는 많은 비가 내리고 거센 바람이 불어 나무의 뿌리가 뽑히고 집이 부서졌다. 그리고 벼들도 모두 피해를 입었다.
10. 세자의 기억력
세자의 기억력이 남보다 뛰어나 조장, 국고, 산천, 관방, 기곡, 갑병 등의 장부로부터 사대부의 문벌, 보첩, 과환년월에 이르기까지 그 사실에 따라 나열하면서 하나도 착오 없이 다 기억하고 있었다. 고종도 그의 총명함을 믿고 있었으므로, 막히는 것이 있으면 종종 세자에게 물었다. 이때 춘방 신하들은 모두 그들의 문벌과 왕의 친척들만 기용하여, 학식이 있고 없음을 묻지 않았기 때문에, 무슨 사실을 기억하고 높은 지식을 갖는 것이 모두 세자보다 못하였으므로 세자는 그들을 얕잡아보았다.
하루는 세자가 민경호의 등에 앉아서 그를 채찍으로 치며 말 타는 시늉을 하자 민경호는 엎드려 기면서 말이 우는 소리를 냈다. 그러자 모든 대신들은 그 광경을 보고 웃으며 즐겁게 놀았다.
그리고 리보영은 설서로 <소학>을 강하면서 제사를 읽다가 「경잔교이」란 대목을 「교시」라고 읽었다. 그리고 이 일에 앞서 승지조명교는 군호를 만들면서 어필로 쓴 「고」자를 「일피」라고 나누어 쓰자, 서울에서는 이 말을 웃음거리로 전해 가며, “모든 물질은 짝이 없을 수 없으므로 전에는 일피승지가 있더니 지금은 교시설서를 보았다”고 하였다.
11. 고종의 연말 진휼
해마다 연말이 되면 고종은 사람을 시켜 서울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의 명단을 작성하게 하였다. 그 대상은 문관, 음관, 무관 등 3품 이하로부터 유사까지 해당되었다. 그들에게 내탕전과 미곡 등을 나누어 주었다.
그러나 백관들은 봉급을 못받았으며 군영들의 봉급도 옛날과 마찬가지로 지급되지 않았다. 이렇게 수년 동안 시행하다가 갑오년(1894)에 중지되었다.
12. 명성왕후의 대원군 저격
임진년(1892) 봄에 자객이 운현궁을 침범하였으나 그를 잡지 못하였다. 이때 대원군은 배척을 당한 지 이미 오랜 세월이 흘렀으나 그와 왕래한 사람들은 모두 화를 당하였으므로, 그의 집에는 손님의 발길이 끊겨 잡초만 무성하였다.
그러나 명성왕후는 끝까지 그를 꺼려하여 남모르게 자객을 시켜 그를 해치려고 하였다. 그의 음모는 비밀로 하였기 때문에 외간에서는 듣지도 못한 일들이 많았다. 하룻밤에는 대원군이 정신이 황홀하여 혼자 자기가 싫었다. 그는 베개와 이불을 내려 사람이 누워 있는 모습을 해 놓고 밀실로 가서 살펴보고 있었다. 잠시 후 문 여는 소리가 나 그곳 가까이 가서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때 비수 하나가 베개에 꽂혀 있고 시자들은 실색을 하고 있었다. 대원군은 “잔말 하지 말고 있거라. 이것은 귀신이 하는 짓이다”라고 하였다.
그 다음날 부대부인 민씨는 크게 놀라 고종 앞으로 가서 눈물로 호소를 하였지만 고종은 뚫어지게 쳐다만 볼 뿐이었다. 민씨는 눈물을 흘리며 밖으로 나갔다. 이 소문을 들은 도성 사람들은 그 소문을 서로 전해 가며 날씨가 차지 않아도 벌벌 떨었다.
그 후 또 하룻밤에는 대원군의 정신이 전일처럼 또 편안치 못하여 탄식하기를, “이상하다. 내가 어찌 죽지나 않을까?”라고 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마루를 왔다갔다 하고 있는데, 갑자기 방안에서 쿵 하고 무슨 소리가 났다. 무슨 불덩어리가 집들보를 치는 소리였다. 화약이 잇달아 터진 것이다. 대원군은 급히 작은 사랑채와 산정의 부엌을 샅샅이 뒤져보라고 했다. 사랑채와 산정에는 한두 개 정도의 화약이 놓여 있을 뿐 화약과 연결된 노끈 줄은 아직 불이 붙지 않고 있었다. 작은 사랑은 대원군의 아들 리재면이 거처하는 곳이며 산정은 그의 손자 리준용이 거처하는 곳이었다.
그 다음날 대원군은 가족에게 말하기를, “우리는 할아버지, 아들, 손자가 모두 동갑이다. 그것은 우리가 금년에 태어났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그것은 그의 3대가 모두 이날 똑같이 다시 살아났기 때문이다.
하(1894년 이전) ④
1. 이용직과 민형식 등의 음사, 탐학과 이응서의 선정
리용직은 100만 냥을 상납하고 경상감사로 임명되었다. 그는 충민공리건명의 사손으로 영동현에서 살고 있었다. 그는 무력으로 백성들을 괴롭혀 그 피해는 인근 도민에게까지 미쳤다. 그는 호서의 갑부가 된 후 정도에 넘는 사치와 음행을 자행하여 거실은 대궐과 같고 첩은 10여 명이나 되었다. 그의 나이는 70세가 넘었지만 여자를 대하는 데는 기력이 조금도 쇠퇴하지 않았다. 이때 그가 진령군의 위력으로 이 관직을 제수받게 되자 조야는 모두 놀라고 분개하였다.
하루는 어떤 사람이 그에게 축하인사를 하자 그는, “내가 사는 환경은 공후와 바꿀 수 없는데 어찌 지방관을 좋아하겠습니까만 영남에는 인물 좋은 여자가 많다고 하니 나는 그곳으로 가서 나의 음욕을 다 채우려고 합니다”라고 하였고, 그 후 그는 하부기관에 지시하기를 “나는 이 여색 때문에 고생을 한다”고 하였다. 그가 부임한 후 포졸과 나졸들이 사방으로 나가자 부민들이 그를 보러 들고 나는 것이 마치 전쟁터와 같았다. 그가 부임한지 1년도 안되어 온 도내가 다 탕진되었다.
그리고 이때 민형식이 통제사로 임명되었다. 그는 고 판서민영위의 서자이다. 민영위는 세상에서 여주의 망나니로 불렸다. 민형식은 그의 나이 겨우 30세였지만 매우 교만하고 어리석어 항시 그의 좌우에 칼을 비치하고 있다가 걸핏하면 사람을 죽였고, 또 원근을 막론하고 사람들을 협박하여 부호들의 재물을 갈취하였다.
그리고 그는 처음에 영남에만 국한하였지만 그는 삼도를 관할하기 위해 충청, 전라 양도를 침범하여 선박이 닿을 만한 모든 연읍은 먼저 그에게 착취를 당하였다. 거부는 5만 내지 6만냥을 상납하고 그 다음은 3만에서 4만냥, 또 그 다음은 1만에서 2만냥을 상납하였으며 1만냥 이하는 1차 상납으로 치지 않고 모두 죄수로 인정하여 가산을 몰수하였으므로 영내에 쌓인 돈은 억대에 달하여 아무리 졸개들이라 하더라도 그때 착취를 맡은 자들은 모두 벼락부자가 되었다.
그리고 그는 기생들을 모아 풍마바람난 말. 편자주 놀이를 하며 흥이 절정에 달하면 기생 한 사람에게 1만냥을 주곤 하였으므로 산처럼 쌓였던 돈이 구름처럼 흩어졌다. 그리고 그의 성품은 술을 미친 사람처럼 마셔 은으로 만든 큰 표주박으로 연거푸 수십 표주박씩 마셨고, 또 사람들에게 억지로 술을 권하여 죽도록 마시게 하였으므로 그의 관할에 있던 수령들은 종종 죽을 뻔한 곤경에 처하였다.
그 예로는 진주감목관인 모씨는 술로 죽어 낭가에 실려 나갔는데, 그 시체를 염할 때 그의 시체는 유들유들하여 솜 부대와 같았다고 하였다. 이렇듯 수십 년을 지나는 동안 남의 재산을 탐하는 것이 관습화되어 백성들은 으레 그러려니 생각하였지만, 민형식 같은 사람은 고금에 처음 보는 사람이었으므로, 이때 사람들은 그를 광적이라고 하였다.
그는 1년 남짓 있다가 서울에 있는 자기 집으로 100만냥을 보내려고 하였는데, 뱃사공들이 그것을 싣고 도주하자 이 소문을 들은 사람들은 서로 경사가 난 양 좋아하였다
이 일에 앞서 통제사정락용은 부산으로 가는 삼남세미선을 잠상이라고 속여 해로를 가로막고, 그 세미를 모두 약탈하고 또 송금을 핑계로 연군 도륙민들의 재산을 갈취하여 수만 냥의 재산을 모으므로 사람들은 통영을 설치한 이후 처음 있는 일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민형식의 학정을 경험하였으므로 정통제사는 부처님 같다고 하였다.
통영은 서울에서 멀리 떨어져 소식이 잘 통하지 않았으므로 아무리 문책할 일이 있어도 미치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있었다. 그리고 이곳 통제사는 대개 사납고 무식한 사람이 많아, 남의 재산을 탐내지 않으면 백성들을 가혹하게 부리거나 술과 여색에 빠져 위엄을 함부로 부리며 누가 감히 자기를 억제할 수 없다고 판단하였으므로 남도 백성들은 그를 해왕이라고 칭하였다.
그러나 그중 변무에 유의하여 공사에 힘을 쓴 사람은 근세에 리응서 한 사람뿐이었다. 그러므로 통영 사람들은 리모가 부임한 이후 삼통사가 있었다고 하였다. 그 삼통사인 채동건은 지장이었으며 금건은 위장, 신억은 복장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응서를 따를 수 없었다. 이응서는 그 후 70세의 나이로 다시 그곳으로 부임하였다. 철종 말년이었다. 이때 그는 성곽을 쌓고 선박을 보수하는가 하면 총과 포를 제조하고 소금과 땔감을 저장하여, 흡사 산업을 경영하는 것과 같았고 늠름하게 적과 대치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는 봉급도 공적인 일이 아니면 사용하지 않고, 사직하고 돌아올 때도 그는 손에 채찍 하나만 들고 왔으므로 그곳 관리와 백성들은 지금도 그를 사모하고 있다.
채동건이 하루는 전선을 검열하다가 한 창판을 가리키며 “이 나무 속에는 좀이 들어 있으므로 바꾸라”고 하였다. 톱으로 베어 보니 과연 나무가 썩고 벌레가 먹었으므로 이를 본 많은 사람들은 그가 특이한 신술을 가지고 있는가 싶어 그를 두려워하였다.
2. 영호남 관리의 잠상 탈취 행위
조정에서는 이미 외국인에게 개항을 허락하였으므로 잠상을 금지하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영호남의 연해처럼 잠상이 많은 곳도 없었다. 그곳은 왕화가 잘 미치지 못할 뿐 아니라 백성들은 어리석고 관리들은 재물을 탐하여, 미곡을 싣고 항구로 가는 배만 있으면 위로는 감사가 빼앗고 아래로는 수령들이 빼앗아 갔다. 그들은 함정을 파 놓고 백성들의 재산을 다 털어 그것을 봉급으로 여기고 있었으니 어찌 이것이 법이라고 하겠는가?
그러나 갑오년(1894)에는 「잠상」이란 두 글자가 사람들의 입에서 모두 사라졌다.
3. 천둥
4월 15일 상오 3시에 동북쪽 하늘에서 큰 뇌성이 울렸다.
4. 전우의정김병덕의 사망
전우의정금병덕이 사망하였다. 그의 나이는 66세였다. 그 부음이 대궐에 알려지자 고종은 장계를 기다리지도 않고 특명을 내려 문숙이란 시호를 내렸다. 그는 갑신정변이 일어난 후 영평의 가계에 가 살면서 9년 동안 서울을 들어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검소하고 청백하여 옛날의 명유에 비하여 하나도 부끄러울 것이 없었지만, 40년 동안 관직에 있으면서 칭찬할 만한 일이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그가 관서지방을 순찰하면서 탐묵자를 추방하자 그를 꺼리지 않는 사람이 없어 도내가 숙연하였고, 감영에 있을 때 그는 원접사로 임명되어 의주에서 청국 칙사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가 그곳으로 갈 때 교자를 타고 갔는데, 그 교자는 하인 두 명이 메고 갔다. 그렇게 초라한 행차에 경비도 일정하게 썼고 주식도 일정한 가격이 있었다. 그리고 숙소도 일정한 장소가 있었고 밤이면 자물쇠도 반드시 채웠다.
그가 안주에 도착하였을 때이다. 그곳 어느 아전이 훌륭한 음식상을 마련하여 그를 대접하자 그는 그 아전을 곤장으로 쳐 그의 앞에서 칼(가)을 씌우고, 또 명령을 내려 연로에 소를 잡아 대접하는 자는 그 직에서 쫓아내겠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가 룡천에 도착하였을 때는 청나라 칙사가, 주방 일을 보는 아전이 대접하는 예가 거만하다고 지적하면서 김병덕에게 그를 치죄하라고 하였다. 김병덕은 거짓으로 크게 화를 내는 것처럼 하고 그의 목을 베라고 하므로, 상하 관원이 서로 그를 ̫Ř하였으나 그는 끝내 듣지 않고 “감히 천사의 비위를 거스르고도 죽지 않기를 바라느냐? 오로지 죽일 것이니, 지금 나에게 간하는 자들도 같이 죽여서 나의 과오를 나눌 것이니라”고 하였다. 그 주방 아전은 어찌할 도리가 없어 자신의 아내와 어머니를 시켜 역관들에게 애걸하여 목숨만 살려 달라고 하였다.
청나라 칙사는 이 소문을 듣고 크게 놀라, “내가 귀 나라에 들어와서 남에게 좋은 말은 나지 않고 공연히 사람만 죽인다고 하면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내가 접빈사에게 부탁한 말은 그를 매로 쳐서 징계하려고 하였던 것이지 어찌 죽이려고 한 것이겠는가?”라고 하였다. 이 말을 역관에게 시켜 자기의 뜻을 김병덕에게 알렸으나, 김병덕은 그의 말을 듣지 않고, ”나는 나의 책임을 다할 뿐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그 칙사는 빈관까지 와서 그를 풀어 달라고 간청하자 김병덕은 못이긴 척하면서 허락하였지만 칙사 앞에서 그를 곤장으로 수십 대를 쳐서 뜨락에 유혈이 낭자하게 흐른 후 그를 죽은 사람처럼 끄집어 내보냈다. 그 후 칙사는 숙소로 돌아가서 배종자들에게 혀를 내저으며 말하기를, “금대인은 무서운 분이다. 적은 죄를 지은 사람을 그렇게 죽이니 이곳을 어찌 범할 수 있겠느냐”고 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일행을 단속하여 함부로 돈 한 푼도 요구하지 않고 예전처럼 예우를 하지 않는다고 책망도 하지 않았으므로 천리길을 가도록 사람 소리가 들리지 않았고, 그가 귀국할 때도 이와 마찬가지로 숙연하였으므로 백성들은 칙사가 행차한 줄도 몰랐다.
그리고 그를 맞을 때와 보낼 때의 비용이 옛날보다 10분의 8할이 절감되었으므로 서도 사람들은 대국을 섬긴 지 500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당나라 마수당의 신하. 누차 리령요를 격파하여 관직이 동중서문하평장사에까지 이르렀음. 편자주 가 회흘위구르 편자주 사신을 대한 술책으로서 김병덕의 술법이 우연히 그것과 맞아떨어진 것이다. 김병덕의 성품은 고상하고 냉정하여 아무 권력과 술수가 없었지만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간절하기 때문에 이런 꾀가 나온 것이다.
4. 관상가와 김병덕
우의정금병덕이 어렸을 때 어느 관상가가 관북에서 와 그의 관상을 보고 깜짝 놀라며 “나의 관상이 어찌 맞지 않을 수 있겠는가? 네 세대에 정승 가문으로 일컬어질 것이다“라고 한 후 “너도 정승이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의 말은 별로 새롭게 들리지는 않았지만 다만 이상하다는 느낌은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또 “네가 정승이 되기는 되지만 반드시 모든 나라와 통상을 할 때 정승이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 나라는 옛날부터 항구를 폐쇄하였는데, 모든 나라와 통상할 리가 있을까? 내가 아마 잘못 본 것 같다”고 하였다.
이 말은 김병덕이 많은 사람들에게 말한 것으로, 그는 국가의 성쇠가 운수에 정해졌으므로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한탄하였다고 한다.
5. 김병덕의 우의와 이면상의 방탕
정지윤의 호는 하원이며 자는 수동이다. 그의 집은 대대로 통역을 업으로 삼고 있었으나 수동은 그 업을 버리고 낙척불우한 생활을 하였다. 그는 재주도 뛰어나고 학식도 많았지만 더욱 시를 잘하여 미친 사람처럼 노래를 부르고, 술에 취하면 세상을 꾸짖으며 모든 것을 부정하였다. 그리고 그의 재주를 사랑하는 많은 사대부들은 종종 그를 맞이하였지만 모두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헤어졌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김병덕은 그를 맞이하여 무엇이든 도와주었다. 그가 술을 먹고 마음대로 행패를 부려도 아무 불편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수십 년 동안을 하루처럼 보냈다. 김병덕은 문학에 재주가 적었으므로 그가 수동이를 아끼는 마음은 천성적으로 타고난 것 같았다. 하루 저녁에는 수동이가 변소를 갔는데 돌아오지 않자 그는 촛불을 밝히고 수동이를 찾으러 나섰다. 수동이는 화원의 돌 위에 앉아서 이미 죽은 모습으로 발견되었다. 김병덕은 흔연히 장례까지 치러 주었다.
그의 천성이 비록 근신하여 법도 외의 것은 불결하게 여긴 것 같았지만 한편으로는, 이와 같은 독실한 면모가 있었다.
그리고 그는 평생 동안 청탁을 받지 않아 서울 사람들은 그를 찬돌(한수석)이라고 지목하였으므로, 고종은 공정한 과거를 치르려고 할 때는 반드시 김병덕을 고시관으로 임명하였다.
그리고 그가 형조판서로 있을 때 고종은 호조와 선혜청의 그간 쌓인 미납세금(적포)를 받아들이라고 하였다. 이때 감옥에 갇힌 관리들이 수백 명이나 되므로 경재들은 조금 느슨하게 처리하라는 소장을 빗발처럼 올렸지만, 그는 범포자를 그의 슬하에 체포하여 조금도 가차없이 엄한 형벌을 가하였다. 이렇게 문초한 지 10일 만에 그는 수십만 냥이나 되는 미납세금을 다 거두어들여 장부를 말끔히 정리하였다.
그리고 리면상은 주진독리로 임명을 받고 천진으로 갔다.
이면상은 고 판서리흥민의 아들이다. 그는 전라도 어사로 임명되어 기생과 악사를 거느리고 산사를 두루 다녔다. 그가 타고 다닌 말 뒤에는 항시 수백 명의 불량배들이 따라다녔다. 그는 언제나 사찰이 있는 곳을 찾아가면 달을 넘기며 놀았고 음식값도 치르지 않았으므로, 그가 방문한 사찰은 모두 재정이 탕진되었다. 이것을 어사란리라고 한다.
그리고 옛날부터 내려오는 관례에 어사가 어떤 사건을 추적할 때 관리들의 비리를 캐어 장물을 압수하였는데, 이것은 사징전이라고 하였다. 이 사징전은 본읍에 비치하여 백성들의 고질적인 병폐가 있을 때만 사용하였다. 그러나 이면상은 각읍의 사징전을 징수할 때 임금의 뜻을 받들어 각 사찰로 그 사징전을 보내 고종의 장수를 빌 때 재초비로 충당하고, 또 잘 사는 관리와 민간의 부호를 기록해 두었다가 그들의 죄를 허위로 꾸며 그들을 체포하여 감옥에 가두었다. 그런 후 그들은 도내의 재산을 다 긁어다가 줄을 이어 상납하였다.
그리고 복명할 때는 그 서계에다 사징전을 조목조목 적어 모읍의 돈 몇천 냥은 모 사찰의 행사 때 보내고 모인의 돈 기백 냥은 모 암자의 행사 때 보냈다고 하므로, 이때 사람들은 이것을 불사서계라고 하였고, 승정원에 있던 승지들도 이 서계를 읽고 서로 탄식하기를, “이제 어사도 이면상 때 망했다”고 하였다. 그 후 얼마 안되어 관제가 개편됨에 따라 옛날과 같은 어사의 기풍도 찾아볼 수 없었으니 과연 그들의 말과 같이 맞아떨어졌다.
6. 이강의 부인 김씨
금사준의 딸을 의화군리강의 부인으로 맞이하였다. 김사준은 의민공금제남의 후예이다. 처음에 인목대비는 국혼으로 일어나는 화근을 막기 위해 친정으로 서신을 보내 대대로 왕실과 국혼을 하지 말라고 하였는데, 이때 김사준이 국혼을 않겠다는 사유를 적어 올리자 민후는 김씨의 용모와 부덕을 사랑하여 그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후 국혼이 이루어져 김사준을 선산부사로 기용하자 많은 사람들은 세자의 뜻이 불만스러울 것이라고 하였으나 이강은 자신이 왕위에 오를 것이라는 망상을 하면서 김사준의 집에 많은 손님이 찾아들 것을 예측하고 있었다.
그 후 이강은 동궁을 나와 사치와 뇌물을 좋아하여 그를 따르는 여마와 배종들이 도로에 가득하고, 궁노 수십 명이 길거리를 막고 소란을 피우므로 민씨의 노복들은 그들을 피하였다.
그리고 의화군의 관문이 각도에 유행하여 소송인과 채무자에게 받아들인 돈은 장물을 추심하듯 많았으므로 많은 사람들은 탄식하기를, “친족과 원족을 막론하고 왕족은 모두 불량합니다. 어린 나이에 행동이 이러하니 앞일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김씨는 현명하고 문자를 잘 알아 <맹자>를 줄줄 외우고 배서도 법도 있게 잘 썼다.
7. 강화 진무영의 승격
계사년(1893)에 강화 진무영을 기연도총제영으로 승격시켜 민응식을 류수로 임명한 후 겸직하게 하였다.
8. 이용식의 대사성 임명
리용식을 대사성으로 임명하여 매월 강학과 제술하는 규정을 두도록 하였다. 그리고 그들 중 성적이 우수한 사람은 승보시성균관장이 매년 10월에 사학의 유생을 모아 놓고 12일 동안 시부의 시험을 보여, 그중 성적이 우수한 사람은 생원, 진사의 시험자격을 주었음. 편자주 의 예를 따라 문과전시를 보게 하므로 과거생들의 조급한 기풍이 더욱 심하였다.
이때 큰 난리가 곧 일어날 무렵이었지만 상하가 다 그런 줄도 모르고 태평할 때나 즐기던 일을 이와 같이 따르고 있었다. 이용식은 나이 어린 소년이었지만 경학에 밝아 명망이 높았다.
하(1894년 이전) ⑤
1. 권봉희의 상소
3월에 전사간권봉희가 상소하였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지금 우리나라는 또 기근이 들어 백성은 도탄에 빠지고 국부는 탕진되었습니다. 그리고 기강도 해이되고 정도는 쇠퇴하여 사교가 횡행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비유하면 큰 솥에 물을 끓일 때 솥 안의 물은 부글부글 끓고 밖은 뜨거운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늙은 나무에 좀이 먹어 속은 텅텅 비고 껍질만 서 있는 것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솥은 장차 깨지고 나무는 넘어지고 말 것이니 이 어찌 두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저의 소견을 다음과 같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그것은 성인의 학문을 본받아 국명을 영원히 지속할 수 있도록 기원할 것, 성의를 다하여 현재를 구할 것, 수령을 택하여 백성을 편안히 할 것, 자신이 먼적 검소한 생활을 하여 재정을 펴 나갈 것, 기강을 정하여 민심을 안정시킬 것, 장재를 발탁하여 군대의 기강을 밝힐 것, 정도를 옹호하여 사설을 배척할 것 등입니다. 조용히 생각해 보면, 전하께서 림어하신 지 30년이 되었습니다만 어떤 혜택도 아래로 미치지 못하여 백성들이 잘 다스려지지 않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그 이유는 성인의 학문을 본받아 마음으로부터 얻어진 공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제왕의 학문은 서인과 같지 않습니다. 그것은 가깝게 있는 사람의 말을 잘 살피어 간신들의 말에 동요되지 말 것이며, 자기의 사심을 버리고 오직 정직한 일을 표준으로 삼아야 할 것이며, 궁중의 기풍을 엄숙하게 하여 정직한 선비를 친히 할 것이며, 경연을 개방하여 자주 유신을 접할 것이며, 무슨 일이든 실천에 옮겨 시행할 때 반드시 그 효과가 나타나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위로 조종들께서 물려준 은혜에 보답하고 밑으로 신민의 기대에 부응한다면 모든 운이 돌아오고 신이 도와줄 것이니 어찌 미약한 사람들이 기도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속어에 「재주는 다른 시대에서 빌릴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조정과 초야에 인재가 없다고 부정하지 못할 것입니다. 오직 정확하게 발탁한 후 그 인재를 신임하여 그 직위와 덕망을 맞게 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만일 그 관직과 재질이 맞아떨어지면 한 시대에 쓸 수 있을 것인데, 어찌 신하들의 직책을 주야로 살피어 백 가지 일을 총괄하시려고 하십니까? 전에 이르기를, 「임금은 배와 같고 백성은 물과 같으므로 물은 배를 띄을 수도 있고 배를 엎을 수도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백성이 두렵다는 것을 극단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수재들은 백성들을 병들게는 할 줄 알아도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 어떤 것인 줄은 모르고 있습니다. 그들은 직급이 오르고 관직을 옮길 때 바치지 않으면 벼슬자리를 얻지 못하고 백성들에게 학정을 하지 않으면 뇌물을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뇌물을 바치는 일을 일체 금지하고 엄하게 성적을 매겨 권장할 사람은 권장하고 징계할 사람은 징계해 나간다면, 뇌물이 공공연히 행해지지 않고 백성들은 실질적인 혜택을 받게 되어, 윗사람을 신임하고 관장을 위해 사력을 다하는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입니다.
선왕을 돌이켜보더라도 우리 선조대왕은 목면 대여섯 근으로 내의를 만들어 입었고, 정종(조)대왕이 입은 모시옷은 하도 여러 차례 빨아 실오라기가 얼멍얼멍하였습니다. 아! 전하께서 본받을 분은 선왕들이 아니겠습니까? 지난번 경축일 때 신도 군인의 직함을 가지고 참석하였는데, 하사하신 음식이 너무 많아 감사함을 느낀 나머지 남모르게 염려스러운 마음까지 들었습니다.
그것은 임금께서 하사하신 음식이 비록 한 잔의 술과 한 그릇의 고기일지라도 그 은혜가 팔도의 진미보다 나은데, 이렇게 풍성한 음식을 마련하였으니 이것은 많은 음식을 차려 즐겁게 노는 것을 두렵게 여기라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신이 바라는 것은 지금부터 전하께서는 조종들의 훈계를 본받아 마음을 넓게 가지시고, 음식과 기물을 토산품으로 사용하시고, 상품과 잔치를 베풀 때에도 항시 물력을 헤아리시어 당연히 쓸 만한 데라도 절약하는 것을 생각하시고, 당연히 경비가 들 때도 그 비용을 줄여 나간다면 이런 습관이 오랜 세월 속에 연마되어 혹 재정이 펴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위에서 실천하면 밑에서는 윗사람을 본받아, 바람이 불 때 풀이 눕는 것과 같이 조정과 초야가 서로 솔선수범하여 순박한 풍속으로 살게 될 것입니다. 관자춘추 시대 제의 영상인. 이름은 이오, 자는 중. 항공이 그를 승상으로 임명하여 중부로 칭하였으며, 그는 부국강병의 정책을 써서 중국의 패권을 장악하였음. 편자주 는 말하기를, “사유례, 의, 렴, 치. 편자주 가 행해지지 않으면 국가가 망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요즘 우리 나라는 기강이 사라지고 풍속도 아름답지 못하여, 조정에는 청렴한 기풍이 있다는 말을 듣지 못했고 서울에는 날로 분수에 넘치는 일이 발생하여 작년에는 군인들이 행포를 부려 수감되었고, 원례들이 조사를 구타하여 불상사가 극도에 달하였습니다. 아! 이러한 병폐가 고질화되어 일조에 다스리는 것도 어렵게 되었지만 그 처방을 한 번도 써보지도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죽음을 기다리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전하께서는 이러한 풍조를 심상하게 보지 마시고 깊이 생각하시어 속히 용단을 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예로써 신하를 대하시어 친소를 막론하고 법으로 다스리고, 귀천을 가리지 말고 인심을 감복시킨다면 국법이 다시 강화되고 백성들의 마음도 안정될 것입니다.
국가가 태평한 지 이미 오랜 세월이 흘러 문관과 무관이 편안한 생활을 하였으므로 수백 년 동안 처음 있었던 병인양요가 발생하였습니다. 그때 상황은 도성이 모두 텅텅 비었지만 그들이 다시 후퇴하여 다행히 무사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정축년(1877) 일본인이 왔을 때도 그들은 강화를 체결한 후 물러가고, 지금도 각국이 강화를 체결하여 공사를 파견하고 통상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만일 이때 병역의 강화를 거론하지 않고 장재를 기용하지 않았다면 어찌 그것이 가능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지금 각 군영의 정예 병사들이 외국 교관에게 군사훈련을 받고 있는데, 이것은 성상께서 군무에 유의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장수는 대대로 무관의 집에만 임명하였는데, 그런 절차를 밟아 기용된 사람을 신은 잘 모르지만 그들이 과연 얼마나 무술을 잘 익혀 절충장군과 어모장군의 자격을 갖추고 있습니까? 옛날 권률1537~1599. 호는 만취당. 시호는 충정. 편자주 과 리정암1541~1600. 임진왜란때 선조를 호위하고 의주로 가다가 개성에서 의병을 일으켜 연안에서 적을 대파하고, 충청도관찰사로 임명되어 리몽학의 난을 평정하였음. 편자주 은 문관 출신이지만 선조대왕이 기용하여 중흥을 이루었습니다. 이런 예를 보면 장재는 무관에게 국한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전하께서 성의를 다하여 그런 사람을 구한다면, 꿈속에서 나타날 수도 있고 농부와 어부 중에서도 만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탁월한 재주를 가진 사람이 반드시 시운을 타고 나타날 것이며 간성지장을 성상께서 마음대로 부리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서방에서 사교가 수입된 이후 무식한 우리 백성들은 그들의 와중에 빠져 유식자들이 한심스럽게 여긴 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그러나 뜻밖에도 작년 겨울에 동학도들이 전라, 충청 양도에 출현하였습니다. 이들은 수가 많이 불어나 포교를 하고 있지만 도신과 수신들은 그들의 포교를 금지하지 않았으므로, 이달에는 그들이 수십 년 전에 처형된 최제우1824~1864. 호는 수운. 편자주 를 스승으로 칭하고 그의 신원을 위해 대궐 가까운 곳에서 소란을 피우며 상소를 하였습니다. 만일 그들의 죄를 논한다면 사형에 처해도 가벼운 일입니다만 한 번의 효유로 그들을 물러가게 하였으니, 이것은 성인이 살리기를 좋아하신 덕분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단을 배척하는 것은 정도를 어떻게 옹호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찌 이런 시기에 유풍을 진작하고 사기를 장려하여 교화를 일으키려고 하지 않습니까? 신이 바라옵건대 도술과 덕망이 있는 유사를 예로써 맞이하여 그에게 국자감고려 때의 교육기관으로 조선조의 성종이 제도를 개편하였음. 편자주 의 책임을 맡기어, 또 국내의 수재들을 성균관에 모아 가르치고, 정이천송의 대유. 이름은 신, 자는 정숙. 주돈신의 제자이며 정호의 아우임. 선생은 숭정전의 설서가 되어 손각 등과 함께 국자감의 학제를 개정하였음, 편자주 의 학제 규칙을 자세히 따라 각군의 학교와 각현의 서재에서도 학자를 양성하면 사기가 다시 진작될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이 보고 듣고 하는 아름다운 구경거리에 불과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유사에게 명하여 뇌물을 탐한 자를 엄하게 징계하고 가난한 서민을 보호하여 그들이 편안한 생활을 할 수 있게 해주신다면 헤어진 가족들이 다시 모여들 것이며, 사교에 물든 자들도 정도로 돌아올 것입니다. 이것은 바다 한쪽에서 해가 뜨면 모두 그 햇빛을 받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아! 전하께서는 열성조가 어렵게 이룩한 큰 업적을 이어받으셨으니 항시 조심하고 두려워하시어 그 국운을 계숭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옛날에 이윤은의 현상. 이름은 지. 신야에서 농사를 짓고 있다가 탕을 도와 천하를 평정하였으며, 탕의 손자 태갑이 무도하므로 그를 동궁으로 3년 동안 유배하여 과오를 뉘우친 후 박으로 귀환하였음. 편자주 은 태갑상(은)의 태종. 편자주 에게 말하기를, 「하늘은 가깝게 할 수 없습니다. 오직 공경하는 마음을 가까이해야 합니다. 그리고 백성들은 누구나 사모하지 않고 오직 어진 사람만 사모합니다. 그리고 귀신도 어느 곳이나 나타나지 않고 오직 성의가 있는 사람에게만 나타나는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전하께서도 그릇된 마음을 일조에 뉘우치고 태갑처럼 자신을 원망하고 자신을 다스리면, 하늘이 복을 주고 백성들이 떠받들고 귀신이 도와줄 것입니다. 만일 그렇게 되면 억만 년 동안 한없이 누릴 아름다운 복도 참으로 이런 일에서 기인한 것입니다. 이렇게 되는 것도 한 순간에 불과한 일입니다. 그럼에도 전하께서는 무엇이 괴로워 그렇게 하지 않고 계십니까?
신이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신이 올린 이 상소문을 조정에 내리시어, 모든 일을 시행할 때 신의 말과 같이 시행하여 3년 사이에 이뤄지지 않으면 신을 성상을 속인 죄로 다스려 함부로 가볍게 말하는 자들에게 귀감이 되게 하시기 바랍니다.”
이 상소가 올려진 후 보고되지는 않았다. 그리고 이 상소 내용이 평범하여, 비록 특별한 주장과 날카로운 논설은 없다 하더라도 온 세상이 칠흑같이 어두운 속에서 나왔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권봉희를 자못 뛰어나다고 생각하였다. 권봉희는 대대로 영남의 삼가현에서 살았다.
2. 권봉희 상소의 배경, 동학도의 복합상소
처음에 최복술의 일명을 제우라고 하였다. 그가 처형된 후 그의 조카 최시형이 보은의 산중에 숨어 살면서 요술을 전파하며 이를 동학이라고 하였다. 그는 이때 유언비어를 퍼뜨리어, “세상이 장차 큰 난리가 일어나므로 동학이 아니면 살 수가 없다. 그리고 진인이 나와 계룡산에다가 도읍을 정하는 데 그 장상과 위명공신들은 모두 동학도들이다”라고 하면서 사방으로 돌아다니며 백성들을 선동하자, 백성들은 학정에 시달리던 때이므로 결국 그들과 호응하여 전라도, 충청도에 널리 퍼져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경인년(1890)에서 신묘년(1891) 이후 여러번 통문을 보내 총회를 갖고 10명 내지 100명씩 떼를 지어 공청을 왕래하였지만 지방관들은 아직 아무 탈이 발생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들의 행사를 금지하지 않았다. 이에 그들은 「조정에서도 우리를 어떻게 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판단하고 한 번 농락을 부려 보자는 속셈으로, 2월 중에 그들 수천 명은 서로 이끌고 대궐 앞에 엎드려 상소를 하였다. 죽은 최제우의 죄를 씯어주기 위한 것이다. 이때 성균관 유생들은 먼저 성토를 해야 한다는 여론을 내고, 신정희는 그들을 다 처형하여 난을 방지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고종은 말을 듣지 않고 그들을 효유하여 물러가게 하였다. 이때의 여론은 울분에 쌓여 있었으므로 권봉희가 상소를 한 것이다. (동학의 전말은 <동비기략>에 상술하였으므로 여기에서는 대충 언급하였다.)
3. 어윤중의 동학 선유
이해 4월에 어윤중을 선무사, 홍계훈을 초토사로 임명하여 전라, 충청 지방의 동비를 진압하게 하였다. 이때 보은에 모인 동비는 8만명이나 되었다 그들은 성루를 쌓고 기치를 세워 사방을 방어할 태세를 갖추었다. 행인들은 자취를 감추고 원근 지역이 모두 진동하자 어윤중과 홍계훈에게 명하여 한밤중에 남쪽 지방으로 내려가게 하였다. 그들은 교지를 받들어 동비를 진압하는 임무를 맡은 것이다.
이때 홍계훈이 영솔한 경영의 병대는 500명이었다. 그는 현지에 도착하여 대포를 쏘아 그들에게 공포감을 주었다 동비들은 그 수가 아무리 많다고는 하지만 맨손으로 기만 꽂아 놓고 있었기 때문에 감히 저항하지 못하고 관군의 선유를 들을 의사가 있으므로 어윤중은 임금의 말씀(륜음)을 선포하였다. 그 윤음은 다음과 같다.
“왕이 말하노니, 너희 무리들은 모두 나의 말을 듣도록 하라. 우리 열성조의 가르침은 크게 빛나노니, 밝은 윤리(이륜)을 밝혀 인기를 세우고 정학을 숭상하여 국속을 이끎으로 하여 사, 농, 공, 상들이 자신의 업에 편안히 종사한 지 지금까지 500여 년이 되었도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세월이 내려오면서 풍속은 투박해지고, 제각기 쫓는 바가 달라, 내 대에 와서 방탕한 무리들이 주술로서 내 백성들을 무혹하여 그릇쳐서, 술에 취해 넘어지는 것 같이 되어 어떻게 붙잡아 정신을 차리게 할 수도 없게 되었도다. 하물며 너희 동학이라는 자들은 스스로 경천과 존천을 주장하지만, 너희들이 말하는 경천과 존천은 모두 하늘을 우습게 여기고 하늘을 속이는 것들이로다. 무리들을 소란스럽게 모여 있는 뜻은 과연 어디에 있는 것이냐? 너희들은 지금 돌을 모아 성을 쌓고 깃대를 꽂아 서로 호응을 하면서 감히 「창의병」이란 글자를 써 놓기도 하고, 혹은 통문을 보내기도 하며 혹은 방문을 게시하여 인심을 선동하고 있도다. 너희들이 비록 시세에 어둡고 어리석은 자들이라고 하더라도 세계의 대세와 조정에서 맺은 조약들을 어찌 들어보지도 못하고서 이와 같이 구실을 주어 화를 불러들이려고 하는 것이냐? 이는 창의가 아니라 창란이로다.
그리고 너희들은 지금 한곳을 차지하여 무리를 지어 모여 있으면서, 무리의 수를 믿고 스스로 방자해져서, 조정의 다스림이 아래로 닿지 못하게 하고 명령도 시행하지 못하도록 하니, 고금을 통해 보더라도 어찌 이와 같은 이치가 있겠는가? 이것은 모두 내 한 사람이 너희들을 안락하게 인도하지 못한 소치이다. 또한 모든 고을의 수령들이 백성의 재산을 긁어내고 벗겨내어 너희를 힘들고 고통스럽게 하고 있으니 이들 탐관오리들을 장차 혼을 내고 벌을 주겠노라. 생각건대 나는 백성의 부모로서 자식이 불의에 빠진 것을 보고 어찌 불쌍하고 측은한 마음에 어두운 길에서 밝은 길로 인도할 것을 생각하지 않겠는냐? 이에 호군어윤중을 선무사의 임을 주어 내 대신 달려 내려가도록 하여 이 효유문을 포고하는 바이니, 이것 또한 먼저 가르친 후에야 벌을 준다는 뜻이로다.
그러므로 너희들은 각자 서로 해산할 것을 권할 것이며, 위협을 받아 따르게 된 자들은 모두 양민인 것이니, 지금 그 괴수를 잡아오거나 혹 그 정보를 비밀리 고하는 자들은 정도에 따라 큰 상을 주겠도다. 그러나 한결같이 뉘우치지 않고 해산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내가 큰 죄를 내릴 것이니, 너희들은 마음을 바꾸어 스스로 왕장을 범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바라노라.”
4. 어윤중의 실책
동비가 해산하자 홍계훈은 관군을 이끌고 돌아왔다. 조정에서는 얼굴빛이 환하게 밝아져 서로 축하를 하였지만 동비들이 깊숙이 숨어 있어 우려가 커지기 시작하였다.
전라, 충청 양도의 사대부들은 모두 어윤중이 한 실책을 비난하고 있었다. 어윤중은 보은에서 올라올 때 렬읍을 일일이 순찰하면서 왔다. 처음에 리도재의 형 아무개가 충청도에 살면서 마음대로 나쁜짓을 하다가 그곳 백성들에게 살해되었다. 이때 마침 이도재는 유배중이라 세력이 없었으므로 형에 대한 복수를 못하고 있었는데, 어윤중이 선무사의 위세를 빙자하여 그 주동자를 곤장으로 때려 죽였다. 또 그는 사람을 시켜 악양(지이산에 있는 동명으로 하동군에 있음)에서 사는 손씨의 선영에다가 가묘를 해 두었다. 가묘를 한 것은 옛날 수장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법은 남의 무덤을 침범하는 것을 엄금하고 있다. 하지만 손씨들은 그가 두려워 감히 항의하지 못하였다. 사람들은 이 두 가지 일을 선무사로서 할 일이 아니라고 하였다. 어윤중은 본래부터 풍수보는 것에 현혹되어 있었는데 자신이 풍수에 밝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윤중이 전후로 올린 상계에는, 동학도를 동비라고 하지 않고 「민당」이라고 지칭하였다. 이것은 서양의 민권을 주장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유식자들은 그가 실언을 한 것이라고 하였다.
5. 호남의 향약과 영남의 향음주예
민영준은 동학이 일어난 것은 고례가 행해지지 않아 풍속이 퇴폐해졌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고종에게 아뢰어 호남과 영남 도신에게 칙령을 내려 호남에는 향약, 영남에는 향음주례를 빠른 시일 내에 시행하게 하였다. 이에 량남의 수재들은 상황돌아가는 것을 눈치보며 자기가 뒤쳐질까 두려워하여 더운 때에 백성들에게 속히 시행하기를 강요하므로 그들은 땀을 흘리며 무릎을 꿇고 절을 하였다. 그들은 돈을 갹출하여 음식을 장만해 먹으므로, 그것은 농사에 방해도 되고 일을 해치기도 하여 마을마다 모두 괴롭게 생각하였다.
그리고 또 나이 많은 노인들에게 미육을 하사하고, 수직, 통정, 가선 등의 직첩을 나누어 준 후 돈 30민을 받기 위해 그들의 자손들을 가두어 독촉하므로 가난한 시골 노인들은 돈을 꾸어서 바쳤다. 이것을 노인난리라고 하였다.
6. 이건창의 어윤중 반박
부호군리건창이 상소하여, 어윤중이 동비를 초멸하지 못한 실책을 논하였다. 이 상소가 올려졌지만 임금이 보지는 않았다.
이때 어윤중은 임금의 뜻을 따라 그들을 선유하여 해산시키기에 급급하자 유식자들은 그의 조치가 타당하지 못함을 비난하였다. 그리고 직언으로 반론을 편 것은 이건창으로부터 시작되었는데, 그 후 동비가 해산하자 세상 사람들은 그의 선견지명에 놀라다.
7. 안효제가 진영군의 주살을 간청
이해 7월에 전정언안효제가 상소하여 요무 진령군을 처형하자고 간청하였다. 안효제는 의녕현 사람이다. 이 상소가 들어가자 승지민영주와 박시순 등은 승정원에 있다가 서로 쳐다보며 어쩔줄 몰라하며 임금께 올릴 여부를 의논하였다.
민영주가 고함을 지르며 “이런 흉소를 어찌 봉입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자 박시순은, “이것은 나라일에 관계된 상소(언사(소))인데 어쩐단 말입니까?”라고 하였고 정인학은, “도승지 어른과 상의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이때 도승지금명규는 소매 속에 그 상소문을 넣고 가서 민영준에게 보이며 봉입 여부를 물었으나, 민영준은 벌컥 화를 내고 옷을 털고 나가면서 “이 상소를 올리고 올리지 않고를 도승지도 결정하지 못하는데 세상에 어찌 도도승지가 있단 말입니까?”라고 하였다. 김명규는 돌아와서 “나의 역량으로는 결코 봉입하지 못하겠다”고 하면서 상소문을 물리치자, 박시순은 탄식하며 “비록 자기는 말을 하지 않더라도 남의 말까지 막아서야 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이 상소가 비록 보고되지는 않았지만 그 부본이 서울에 많이 전해져 량전이 일찌감치 보게 되었다.
8. 어윤중과 이건창 등의 유배
권봉희는 흑산도, 안효제는 추자도, 어윤중은 연일, 박시순은 홍원, 리건창은 보성, 전정언장병익은 □□으로 위리안치하라는 명을 내렸다. 이에 앞서 중궁은 안효제의 상소를 보고 크게 노하여 주먹으로 책상을 치면서, “이런 말을 한 자들을 다 죽여야만 이 분통이 풀리겠다”고 하자 고종은 중궁을 위로하기를, “우리 조종조에서는 직언한 사람을 함부로 죽이지 않았습니다. 지금 죽이려면 죽일 수도 있지만 그러나 우리 세자가 무엇을 본받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이때 중궁은 고종이 세자의 처지를 위해 말하였으므로 노기가 조금 풀렸다.
그리고 갑신정변 때 제적들을 고종은 매우 미워하고 있었는데, 리도재 등이 그들과 뜻을 통하고 있었던 갓을 늘 불쾌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노여움을 풀 만한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꾹 참고 있다가 어윤중이 이도재의 복수를 해주었다는 소문을 듣고 크게 노하여 정언금만제를 시켜 상소를 하게 하였다. 그 상소문에,
“권봉희는 우매함을 무릅쓰고 상소를 하여 무고와 욕설을 하였고, 안효제는 말을 가리지 않고 마구 퍼부었으므로 그 죄를 용서할 수 없으니 이들을 모두 사형에 처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선무사어윤중은 지난번 동비들이 모였을 때 그들을 물리치는 일을 하루도 늦추어서는 안 될 일임에도 남고산성으로 기생을 끌고 가서 질탕하게 놀았고, 또 사람을 두 명이나 죽이어 죄인으로 복역중인 이도재의 복수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승지박시순은 안효제와 한 마을 사람으로 사이가 매우 좋아 마음이 서로 통하였으므로 그 와중에 힘을 써 상소문을 대궐로 들여 놓으려고 하였으니 그들을 다 같이 치죄해야 합니다.”
라고 하였다. 이 상소가 올라오자 고종은 그대로 윤허했다. 그리고 이건창의 상소도 조금 조롱적이었고, 전정언장병익도 시사를 언급한 상소(언사항소)였으므로 모두 죄를 얻게 되었다. 장병익은 인동 사람이다.
이상 여러 사람들이 유배된 후 고종은 승정원에 유시하기를, “지금부터 시사를 논한 상소는 일체 받아들이지 말라”고 하였다.
9. 조희일과 여규형의 유배
9월에 조희일은 신지도, 려규형은 금중도로 유배하였다. 옛날에 민치록이 덕천군수로 부임하였을 때 어사조학년이 그의 비리를 적발하여 파직하였다. 이때 중궁의 나이는 겨우 4세로 부친 민치록을 따라 덕천 관아에 있었는데, 민치록이 조학년의 박해를 받아 가족을 이끌고 외숙모 댁으로 가다가 중궁을 안은 채 담에서 떨어져 중궁이 발을 다쳤다. 이것이 커서도 흉터로 남아 있었다. 그 후 귀인이 된 중궁은 언제나 발을 어루만지며 조학년을 꾸짖고 그를 죽이려고 하였지만 그는 이미 죽고 없었다.
그러나 그의 조카 조희일은 젊은 명관으로 일시 명망이 높았는데, 이때 중궁은 승정원에 명하여 승진 후보에 오르지 못하게 하였다. 이로부터 조희일은 전참판의 직함으로 20년 동안 승진하지 못하고 두문불출하면서 살았다 그의 아들 조성재는 응제과에 급제하였는데, 그의 방목을 공개할 때 중궁은 깜짝 놀라 한탄하며, “조희일의 집안에서 이렇게 대과 출신까지 나다니……”라고 하였다. 조희일은 이 소문을 듣고 더욱 두려워하였다.
그리고 려규형의 가문은 매우 가난하였으나 그는 재주가 있어 기억력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그러나 여색과 도박을 좋아하여 선비들의 기대를 얻지 못하였다. 그는 과거에 급제한 후 수년 동안 하급관리로 있으면서 더욱 방자하였고, 또 진령군이 양전에게 말하기를, “관제(관운장)가 려포에게 살해되었으므로 여씨 성을 가진 사람을 관제는 죽어서도 미워하고 있으니 전하께서 관제에게 복을 받으려면 여규형을 멀리하십시오”라고 하였다. 고종은 그의 말을 전적으로 믿고 있었으므로 정원의 관리들은 고종의 뜻을 헤아리고 여규형을 후보물망에 넣지 않았다. 그는 민씨들의 집을 출입하다가 품계가 오른 후에는 민영주을 따라 놀러다니며 술을 마셨다. 이 해의 만수절에는 고종이 민영달의 집에 찬수를 하사하자 민영달은 명사들을 모아놓고 술을 마시며 왕을 기념하기 위하여 시를 지었다. 여규형도 참여하였다. 이때 「산」자의 운이 나오자 그는 「유주여회육사산」이란 시구를 지었다.
고종은 민영달의 집에서 시회를 가졌다는 소문을 듣고 그 시축을 구해 보고는, 여규형의 시를 지적하면서 “육산포림이라고 한 것은 나를 걸주에게 비교한 것이다”라고 하며 그를 주목하고 있었다. 그 후 얼마 안되어 식년초시가 있자 고종은 어비를 내려 조희일을 서울 제2소의 고시관으로 임명하였다. 조희일은 죄나 짓지 않을까 우려하여 분향재배를 하면서 하늘에 맹서하며 극히 공정하게 선발할 것을 다짐하였는데, 방목이 나온 후 아무 시비가 없었다.
한편, 중궁은 무명배를 모집하여 종가에다가 괴서를 걸어 두었다. 그것은 려규형이 밖으로 보낸 서신 가운데 「조희일이 방목을 다 팔았다」고 한 구절이었다. 임금은 엄한 교지를 내려 둘 다 섬으로 유배보낼 것을 명하였다. 그리고 <비망기>에는 자주 여규형에 관한 기록이 있었는데, 그는 행실이 본래 더럽고 말하는 것도 거칠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고기가 산같이 쌓여 있다는 그의 시를 가리킨 것이다.
10. 지진
8월 22일, 지진이 있었다.
11. 개성민란
12월에 외무참의박용선을 개성으로 보내 민란을 조사하게 하였다. 이때 개성유수금세기가 숨겨 놓은 인삼을 찾아낸다는 핑계로 백성들의 재산을 많이 약탈하자 부민 금흔 등이 군중을 모아 소란을 피웠다. 김세기는 변복을 하고 도주하였다.
이때 탐관오리들이 국내에 가득하여 읍마다 소란스럽지 않은 곳이 없었지만 그중 가장 심한 자를 색출하여 논죄하였다. 전후로 유배된 사람은 리돈하, 리용익, 정광연, 리근호, 리원일, 홍시형, 금영적, 침인택, 윤병관, 조준구, 리용직, 조만승, 김세기 등이다. 그러나 많은 뇌물을 받아먹은 고관들은 법망을 다 빠져 나가 그들을 징계할 수 없었다.